타이베이의 2월은 을씨년스러운 날씨가 이어지는 우기(雨期)였다. 햇볕 아래서는 반팔을 입어도 덥지만 구름이나 가랑비에 햇볕이 차단되고 바람이 불어오면 온도는 급강하, 대기 속에서 한기(寒氣)를 느낀다. 한중문화협회는 그간 정책연구에서 등한시되었던 양안관계연구의 일환으로 작년 6월에는 중국국제우호 연락회와 제휴, 제3차 한중민간우호포럼을 중국과 타이완간의 교류 현장인 샤먼(廈門)에서 개최하고, 그간 양안관계 발전상황을 고찰하였다. 이어 금년에는 오늘의 타이완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3박4일 일정으로 타이베이를 방문했다.
아울러 금년은 한중문화협회 창립 70주년이 되는 해임을 감안, 오래 동안 협회의 협력파트너였으나 한중수교 후 관계가 소원(疏遠)해진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로부터 협회 창립70년사 정리에 필요한 자료협력도 받아볼 양으로 금년 제1차 중국방문지로 타이베이를 택했다. 그러나 한중문화협회와 관계가 멀어진 타이완의 중한문화협회는 타이완•한국경제문화기금회(基金會)로 명칭을 바꾸었다는 것
                (장개석 좌상)
이 주한(駐韓)타이완 대표부의 전언이었다. 한중문화협회가 한중수교 후 하나의 중국원칙 때문에 타이완의 민간단체 아닌 국가기관으로서의 중한문화협회와 공식협력을 자제한 때문이었다.

필자는 1982년 제11대국회의원 시절 몇몇 한국국회의원들과 함께 타이완을 방문한 바 있다. 그때로부터 만 30년만의 방문이었다. 물론 필자가 한중문화협회 회장이던 1999년 타이완의 타이중(臺中)에서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협회는 제 아내를 포함한 10인의 대표단을 구성, 타이완을 방문하고 재해의연금으로 1만 달러를 중한문화협회에 전달한 바 있다. 이것이 중한문화협회와의 마지막 공식협력이었다.

오늘의 타이완은 30년 전과는 판이했다. 물리적 외관이 바뀌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타이완 사회를 유지하는 원리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우선 타이완은 더 이상 중국대륙을 수복하려는 광복기지가 아니었다. 한국의 통일부에 해당하는 대륙광복설계위원회나 이 목적에 복무하던 정치작전학교는 그 간판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우선 도착당일 느낀 일이지만 타이베이공항의 명칭이 장제스(蔣介石)의 호를 딴 중정(中正)공항에서 타오위안(桃園)공항으로 바뀌었다. 장총통의 중정기념관은 “타이완민주기념관”으로, 대중지정(大中至正)광장도 “자유의 광장”으로 아름이 바뀌었다. 2008년 천수이비엔 총통이 내린 조치였다.

1975년 장제스 총통이 사망했을 때 그를 따라왔던 국민당원과 군인들은 친부모를 여읜 것보다 더 설게 울었다지만 이제는 지도자로서의 장제스 한 사람만을 우러러 보던 시대는 끝났다. 장제스는 생전에 한 번도 중공을 인정하지 않았고 자기의 군사적 패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자기 군대의 타이완 이동을 “공간으로 시간을 벌겠다는 전략원리”를 쫒는 작전상의 철수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따라서 타이완은 대륙광복을 위한 기지였을 뿐 그 지역을 본토로 부터 분리해서 독립한다는 생각은 아예 존재치 않았다.

그는 죽을 때 까지 국부 쑨원(孫文)이 세운 중화민국의 총통으로 자기를 정의했다. 물론 1972년 미국과 중국 간에 샹하이 공동성명이 발표되고 타이완이 중국의 일부임을 미국이 인정한다고 했을 때만해도 그 내용이 통일을 꿈꾸는 장제스의 철학과 원칙 면에서 다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유엔에서 중국대표권이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넘어가면서부터 장제스의 꿈은 사라졌고 그의 시대도 끝장났다.

유엔과 그 전문기구에서 모든 지위를 중국에게 빼앗긴 타이완은 국제무대에서 완전 고립되었다. 타이완과 단교 없이는 중국과의 수교의 길이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고궁박물관의 귀한 문화재나 자연경관의 어느 것도 유네스코에 인류문화유산으로 등록할 수 없게 되었다. 40여개가 넘게 몰려오는 태풍에 이름 붙일 권한도 없어졌다고 가이드는 말했다. 그러나 처지는 변했지만 놀라지 않는다(處變不驚)는 입장을 타이완은 견지하고 있다.

장제스 사후 아들 장징궈(蔣經國)가 총통 직을 세습하면서 대만의 경제는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아시아의 4룡(龍)의 하나로 타이완을 위치지우는 발전의 역사를 이루었다. 타이완의 동(東)과 서(西)를 잇는 도로를 굴착 하면서 자연자원을 이용한 관광산업(타이루코(太魯閣)협곡 등)을 일으키고 낙후지역 개발, 서민생활수준의 향상, 기업입국의 토대를 구축하는 등 타이완이 자립(自立) 자전(自轉) 자활(自活)할 수 있는 발전의 문을 열었다.
 
또 장제스를 따라 타이완으로 들어온 수많은 노병(老兵)들의 소원인 고향방문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중국과의 대화의 문을 연 것도 장징궈의 큰 업적이다. 지금도 타이완의 주민 여론조사에서 장징궈 총통이 장제스의 지지도 10%보다 훨씬 높은 50%대의 지지를 받는 것도 그가 세운 타이완 발전에 대한 기여 때문이라고 한다. 더욱이 장징궈 총통은 그가 죽기 전에 “장씨(蔣氏)가문의 정치는 나로서 끝난다.”면서 세습정치를 포기했다.

뒤이은 총통은 국민당의 리덩휘(李登輝)였으며 타이완 태생의 리 총통은 총통제를 주민직선제로 바꾸고 1996년 타이완 역사상 처음 실시된 직선에서 민선총통에 당선되었다. 정치의 민주화를 주도, 군인들에게도 정당선택권을 부여했다.장징궈의 세습 포기결단은 시대의 흐름에 따른 것이라는 평도 있지만 실제로는 러시아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후손에로의 권력세습이 동양정치의 전통에서 용납될 수 없다는 인식 때문이라는 견해가 더 설득적이다.

리덩휘 이후 민진당(民進黨)의 타이완 출신의 천수이비엔(陳水扁)이 총통에 당선됨으로 해서 당대당간의 정권의 수평적 교체가 이루어졌으며 천수이비엔은 재선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중국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이라는 표퓰리즘적 공약은 중국의 강한 반발, 특히 통일을 위한 무력공격의 법제화라는 강공을 받았고 미국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이 결과 2009년 총통선거에서는 국민당의 마잉주(馬英九) 후보가 승리했고 마 총통은 2012년 1월에 실시된 총통선거에서도 재선되었다.

그러나 국민당이 민진당을 누르고 재집권했지만 장제스가 갈망했던 통일광복의 꿈은 되살아나지 않았다. 새로 집권한 마잉주(馬英九)총통은 중국과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을 체결, 양안간의 협력관계를 확대, 발전시키는 한편 이른바 3불 원칙을 내세워 통일을 당면 국가목표에서 제외했다. 마 총통의 3불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통일을 추구하지 않고(不統), 독립을 시도하지 않으며(不獨),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다(不武)를 말한다.

이번 여행에서 필자의 눈에 띈 장제스의 유산(遺産)은 경제발전의 큰 업적을 제외한다면 사림관저(士林官邸)로 표시된 장제스 부부가 살던 사택과 민주기념관에 비치된 장제스 관련 자료, 장제스가 중국본토수복의 꿈을 살린다는 명분으로 중국본토 도시들의 명칭을 따서 붙인 타이베이 시가지의 명칭 예컨데 뤄양가(洛陽街)나 난징루(南京路)같은 도로표지판 등이었다.

그러나 장제스유산으로 남은 것 가운데 주목되는 하나의 제도로는 공직자부패 때문에 본토를 잃은 장제스가 타이완에서 부패한 공직자를 국적(國賊)으로 엄히 다스리게 한 형법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때문에 부패혐의로 구속된 전 총통 천수이비엔은 17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그러나  세월과 함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영웅 장제스가 그리던 통일 광복의 꿈은 사라졌고 G2로 커져버린 중국과의 관계를 조절하면서 생존을 추구하는 타이완의 새로운 현실이 앞날의 역사를 채워나가고 있다.

                          (오른편에서 4번째가 정상기 대만주재한국 대표 5번째가 이영일 회장)
2008년 마잉주 대만 총통 취임 이후 양안 간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주변국들과 타이완의 교류도 급증하고 최근 일본은 타이완과 투자보호협정을 맺었다. 이런 새로운 정황을 피부로 느끼는 주 타이완 한국대표부는 한국도 타이완과의 관계를 양안관계의 변화에 맞게 잘 조정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3박4일 동안 타이베이와 타이완의 일부지역을 돌아보면서 실패한 지도자에게 주어진 운명의 무상함을 실감했다. 그러나 우리 정부의 타이완에 대한 정책목표가 뚜렷치 못한 현실이 귀로에 오른 필자의 마음을 마냥 무겁게만 했다.

                                              韓中文化協會 會長 李榮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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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9. 22:16 http://cafe.daum.net/MyLoveChina/437n/1767 

삼일절 노래를 들으며(퍼온글)

 

 

삼 일 절  노 래
                                              정인보 작사 / 박태현 작곡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은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우리나라는 3.1절등 국경일에 새해의 노래, 3.1절 노래, 제헌절 노래, 광복절 노래, 개천절 노래, 한글 노래 등으로 의식의 노래가 불려집니다. 며칠전 3.1절 기념식전 실황방송을 보면서 느낀 소감의 일단을 말하려 합니다.

그 하나는 기미독립선언문의 낭독에서 연로한 광복회 회장이 낭독하는 기미독립선언문이 너무 어려워서 읽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가 다 곤혹스러웠다는 생각을 지워버릴수 없었습니다. 명문절구이지만 난삽한 한문투이기 때문에 한문세대의 어르신들도 저렇게 읽기가 어려운데 한문을 안 배운 한글전용세대인 젊은이들에게야 오죽하겠습니까.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앞으로는 김동길박사가 이미 1969년에 쉽게 풀어 쓴 한글 기미독립선언문으로 바꿔 낭독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또 하나는 3.1절 노래를 듣는데서였습니다.

내가 국민학교에서 배워 부르던 노랫말과는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 요즘의 음악교과서를 펼쳐 의식의노래중 3.1절노래를 살펴보니 이전의 "한강물"은 ==> "한강은" 으로 "물"이 빠지고 "은"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선열아"는 ==> "선열하" 로 바뀌어 불려지고 있었습니다.

손쉬운 도구이자 만인의 선생인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이전에 배운 것과 새로이 바뀐 것이 둘다 그대로 실려 있습니다.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아 평소에 자상히 대해 주시고 친절히 알려 주시는 오동일교수님께 전화로 여쭈었더니 당신께서도 그렇게 배워 불렀는데 바꿔진 노랫말이 맞을 것 같다 하시면서 역전앞이 前과 앞을 겹쳐 잘못 쓴 것처럼 "한강물" 은 江과 물을 겹쳐 쓴 것이 분명하고, "선열아" 는 우럴어 숭앙하는 선열께 막말로 부르기를 하는 것은 위당 선생의 뜻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옛날부터 여기를 부르면서 느끼던 곤혹이 바로 이러한 오교수님의 지적에 그 이유가 있었지 않았나 생각되어 집니다.

나중에 "하"가 이유없이 쓰여지지 않았스리란 생각에서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하" 에는 " --- 이시여" 하고 부르는 말의 옛 표현으로 풀이하고 있는데 그 용례로 님금하, 세존하 아라쇼셔 등의 예가 있고 또 정읍사의 "달하 노피곰 도다샤"와 사모곡의 "아소 님하 ---" 도 그렇게 쓰인 용례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교수님은 이런 일화도 들려 주셨습니다.

광복후 국권을 회복하자 우리나라의 제도와 문물을 정비할때 의식의 노래도 새로 마련하였는데 이들 노랫말은 최현배선생의 한글의 노랫말을 제외한 전체 노랫말이 위당 정인보선생의 작품이었습니다. 작곡에는 당시의 기라 성같은 작곡가 이흥렬(새해의 노래) 박태준(제헌절 노래) 윤용하(광복절 노래) 김성태(개천절 노래) 박태현(한글 노래) 같은 선생들이 작곡에 참여했는데 이중 박태현선생 작곡의 삼일절 노래를, 당시 작곡에 참여한 분들의 품평회에서 최고의 명곡으로 총평하였다고 들려 주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하여 어려운 가운데 훌륭하게 만들어진 작품과 우리노래들이 앞으로 나라 안팎에서 더 많이 더 널리 불려 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방송에서는 으레껏 섣달 그믐이나 정월 초하루에는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을 들려 줍니다. 그리고 그동안 광복절과 다른 옌만한 국경일에는 나라 사랑이라는 뜻에서겠지만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나 스메나타의 나의 조국을 들려주기 일쑤였습니다.

이제는 우리 것도 찾아서,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우리 것을 더 많이 들려주었으면 합니다. 원단에는 수제천, 안익태선생의 코리아 판타지, 김규환선생의 나의 조국 등을 연주하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글/ 정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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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젊은

요즈음 젊은 사람들의 3포(抛)문제 이야기가 사라지지 않는다. 3포란 취업포기, 결혼포기,출산포기라고 한다. 젊은이들 가운데는 봉급도 신통치 않고 앞날의 전망도 그리 밝지 않은 직장에 나갈 바에야 차라리 취업을 포기하겠다면서 할 일없이 노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남이 알아주지 않는 시시한 직장에 가는 대신에 유학이나 대학원으로 진학하여 시간을 버는 사람들도 있다. 취업포기의 변이다.

 

또 상당수의 젊은이들은 돈이 없어 결혼을 못한다면서 혼기를 늦추거나 포기한다. 혼자 사는 것이 오히려 자유롭다고 말하는 여자들도 있다. 상당한 유산이 있거나 강남(江南)형 재력가(부동산 등이나 한탕으로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을 지칭)의 자녀처럼 삶에 불편함이 없는 경제수준이 아니라면 선뜻 결혼을 결심할 수 없다는 것이 결혼포기의 변이다.

이러한 분위기속에서 출산포기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모른다. 교회에서는 자녀란 하나님이 주는 선물이라고 설파하지만 오히려 짐으로, 부담으로 보는 젊은이들이 있다. 맞벌이 부부에게는 자녀 키우는 일만큼 어렵고 힘든 일은 없을 것이다. 자녀에게 좋은 부모(좋은 과외나 유학을 뒷받침할 능력 등)가 될 수 없을 바에야 자녀를 안 갖는 편이 낫다는 것이 출산포기의 변이다.

지금 이들 젊은이들의 3포 현상은 기성세대들의 입장에서 보면 뭔가 한참 잘못된 태도 같다. 그러나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주어진 환경에 대한 그들 나름의 어쩔 수없는 몸부림이다. 그들도 부모들에게서 전수한 인생의 목표, 학교교육과정이나 성장하면서 내심에 간직했던 꿈은 결코 3포가 아니었다. 3포를 선택하는 그들 내면에는 우리 기성세대들이 모르는 깊은 아픔과 외로움, 그리고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 있다. 이들의 모습은 그 내막을 알면 알수록 안쓰럽기 짝이 없다.

이들의 문제를 일부 “젊은 그들”만의 문제로 치지도외(置之度外)할 수 없다. 왜냐하면 경제성장 제일주의로 줄달음치던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우리 기성세대들이 그 부작용에 대한 배려와 대비를 소홀이 했던 황금만능주의의 가치관에 짓눌려 버렸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경제는 세계 랭킹 15위권으로 껑충 뛰어올랐다지만 서민들이 느는생활의 어려움은 오히려 가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간 우리의 경제발전은 성장제일주의에 사로잡혀 한국사회구조속에 커다란 문제점을 야기 시켰다.

 

대기업은 중소기업의 희생위에 부를 일궜고 중소기업들은 노동자의 과도한 희생위에 그나마 잔명을 부지해왔다. 중소기업과의 동반성장이란 개념은 최근 S그룹 회장이 말하는 대기업 경제학 교과서에는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개념이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분은 인간을 평민과 천민으로 가르는 갈등양상을 노정했다. 아들, 딸 구별 없이 가르쳐도, 여자는 출산이 곧 퇴직이라 애 낳기도 쉽지 않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오늘 한국경제의 현실은 부익부, 빈익빈을 노정시켰고 모든 개발혜택은 특권층이나 부동산 투기꾼들에게 돌아갔다. 정권은 이들과의 유착 속에서 창출되었다. 모든 형태의 불공정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이 사회적 가치로서의 돈과 권력과 명예를 독식하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돈이 권력을 낳고 권력을 치부의 수단으로 삼는 한탕주의자들이 뭉쳐 대통령을 만들고 여기에서 각종 권력형 부정부패와 비리가 꼬리를 잇는다.

지금 우리 사회는 바야흐로 탄생에 기인한 부와 빈곤의 대물림상황이 조성되고 있다. 성장만능의 추구는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를 따뜻한 인간애와 공평한 정의가 숨 쉬는 사회로 업그레이드 하는 대신 인간을 돈의 노예로 만드는 황금만능주의와 불공정 편법경쟁을 부추기는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로 전락시켰다.

 지금 우리가 걱정하는 3포현상은 갈수록 높아지는 격차의 벽을 우리가 그것을 이루었다고 자랑하는 민주정치와 선거로는 결코 극복, 시정할 수 없다는 실망과 좌절에서 파생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 젊은이들이 한참 열정을 쏟아 일 할 나이에 직업의 귀천에 구애 받지 않고 하루라도 인생을 낭비 없이 열심히 일하여 경험도 쌓고 일도 배우는 것, 성인이 되어 결혼해서 가정을 만들고 자녀를 낳아 인간으로서의 역사를 이어가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없는데 이를 포기한다는 것은 실로 통탄할 일이다.
 
이것이 사회의 경제구조와 이 구조에서 배태된 가치관의 결과라면 우리가 당면해서 해결해야 할 개혁은 실로 시급하고 막중하다. 오늘날 여야 정당들이 앞 다투어 복지개혁에 열을 올리는 것은 만시지탄이지만 좋은 조짐이다. 동반성장을 강조하는 담론이 등장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특히 부자들의 탐욕을 통제하기 위해 재벌해체, 부자에게 중세를 과하자는 주장과 부자들의 국제경쟁무대에서의 활동은 지원하되 국내적으로는 일정한 울타리에 가두어 기업 활동의 부작용을 막자는 논의가 여야 정책담론을 이루는 것은 한국정치의 큰 발전이라고 볼 수 있다. 최종결론은 국민이 선택하는 것이지만 성장만능주의시대에 소홀이 취급했던 개발시대의 부채를 정치권이 청산에 나섰다는 데 의의가 있는 것 같다.

 지금 서구에서도 자본주의 시스템이 결국 30% 가량의 낙오자를 만들고 있다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체제의 근본적인 재검토를 말하고 있다.(2012 다보스 포럼에서의 클라우스 슈바브 회장) 자본주의 4.0이나 따뜻한 자본주의가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부의 편제를 규탄하면서 1%에 의한, 1%를 위한, 1%의 미국분배상황을 비판한 스티글리츠의 견해가 금융위기의 도래와 함께 경제체제변혁의 새로운 담론이 되고 있다.

 지금 3포 문제의 해결은 구조차원이외에도 가치관개혁도 필요하다. 일부 젊은 층의 3포로 흐르는 낙오자적 사고와 가치관의 개혁도 아울러 모색해야 할 때다. 사회적 가치관의 물질적 표현이 사회구조일진데 가치관의 변화 없이 사회구조를 바꾼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지금 많은 젊은이들은 강남주의(江南主義)를 욕한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도달하려는 3포 청산의 기준은 어디에 두고 있는가. 역설이지만 강남주의를 준거한다.

이러한 가치관개혁은 국가나 정부보다에 시민사회가 주축이 되어 추진할 때 보다 호응과 반응이 좋을 것이다. 즉 황금만능주의의 가치관을 무너뜨리는 시민운동을 일으키자는 것이다. 돈으로는 인간사의 본질 문제를 어느 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이다. 예컨대 “돈으로 집은 살 수 있어도 행복한 가정은 살 수 없고 섹스는 살 수 있어도 진정한 사랑은 살 수 없다.”는 자명한 진리를 깨닫게 하자는 것이다.

아직 우리사회의 3포는 보편적 현상은 아니다. 모든 예식장들은 아직도 사전 예약을 필수로 한다. 취업설명회는 초만원을 이룬다. 어려운 조건에서도 사랑을 매개로 결혼하여 가정을 일구고 자녀를 낳고 기르면서 행복하게 사는 많은 사람들을 본다. 나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역사의 주인공들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가치관에서 낙오의식을 청산하고 자기에게 내재한 가능성을 개발하는 가치관을 보였기 때문이다.

 

돈을 매개로 결혼한 부부는 돈이 떨어지거나 벌어들이지 못하면 금방 파탄다. 비록 가진 것은 작아도 사랑을 매개로 맺어진 부부는 모든 풍랑을 함께 이겨낸다. 우리부모들의 역사다.

 

이제 우리 사회의 3포 문제는 구조개선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갖게 해주는 한편 민간들이 주도하는 사회운동, 문화 운동을 통해 가치관의 변을 활성화시켜 나가야 한다. 보다 따뜻한 가슴으로 인생의 정도에서 벗어나고 있는 사람들의 처지에 높은 이해와 관심을 보일 때다.

이글은 연우포럼(No.5235)에 2012년 2월 1일자로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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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김정일 시대와 북ㆍ중 관계

이영일 한중문화협회 회장

1. 북한정권 안정화 필요성에 공감

 

작년 말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은 새해 동북아시아 정세전망에 새로운 변화를 몰고 왔다. 중국은 ‘주변정세안정화’라는 중국의 국익개념을 실현한다는 명분하에 사회주의 역사에서 그 유례가 없는 김정은에 의한 “3대 권력세습”을 공인하면서까지 북한정권을 신속히 안정시키기를 선택했다.

북한정권의 조기안정화가 필요하다는 데는 미국과 일본 그리고 러시아도 같은 입장을 보이면서 조의를 표했다. 한국정부가 북한정권에 조문(弔問)빚을 진 김대중 전 대통령가족이나 현대상선 정몽헌 전 회장가족들에게 방북조문을 허용하면서 간접 조의를 표한 것 역시 북한정권 안정화의 필요성에 공감한 조치다.

 

중국이 김정은 정권을 이렇게 서둘러 지지한 것은 김정일 사후 북한정권을 동요시킬 북한 내외의 도전요소의 등장을 미리 차단하면서 중국주도로 북한 안정화의 출로를 열어주는 외교적 이니셔티브를 장악하는데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변국들이 북한정권의 조기안정화에 공감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북한정권의 지속적 안정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북한체제가 안고 있는 내외적 갈등요소를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한다면 북한정권의 안정화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김정일 사망 후 한국에서 발표된 한 학자의 칼럼은 “한반도 분단사(分斷史)의 제2막이 끝났다. 1994년 김일성의 사망으로 6·25 남침과 남북체제 경쟁으로 대표되는 제1막이 종료됐다면, 2011년 김정일의 사망은 배고픔, 핵개발, 기만외교로 점철된 철권통치의 제2막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과연 북한이 개방·개혁을 통해 역사적 대반전의 제3막을 열 것인지, 아니면 무질서와 폭력이 난무하는 혼돈의 시대로 접어들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한겨레2011-12-20]고 말했다. 이하에서 북한정권 안정화의 조건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2. 북한정권 안정화의 조건

 평양에서 12월 29일 열린 김정일 장례식에는 김정일로부터 정권의 후사(後嗣)를 부탁받은 김정은 이외의 7인이 관(棺)에 손을 얹고 운구행렬을 선도했다. 이들이 북한권력의 새로운 실세 지도부로 보인다. 북한정권 안정화의 첫째 조건은 이들이 김정은 체제가 확고히 뿌리내릴 때 까지 화합, 단결하는 것이다. 이들 간 단합의 기초는 김정일의 카리스마적, 독재적 리더십이 유효하게 작동하는 상황이었는데 김정일 사후에도 과연 단합이 제대로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김정일은 그간 인민들은 굶기더라도 상위지배동맹성원만은 일체 생활상의 어려움이 없게 하면서 자기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정권을 지켜왔다. 새 지도부 역시 지배동맹의 일원들로서 지금까지 누리던 특권적 지위를 지켜야한다는 점에서는 이해관계를 공유한다. 그러나 역사의 경험은 시간이 흐르면서 북한체제 내부가 당면한 대내외 도전을 처리하는 방식을 놓고는 지배집단 간에 불일치가 나오고 이해(利害)가 갈려 경쟁하고 다투게 된다는 것이다.

우선 김정은 정권이 내세울 정치구호를 설정하는 문제도 간단치 않다. 당장은 유훈통치를 강조하지만 북한이 풀어야할 대내외 도전가운데서 유훈통치만으로 해결될 일이 거의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북한 정권의 창업주 김일성은 주체(主體)강국을 말했고 그의 아들 김정일은 선군(先軍)강국을 내세웠는데 그러나 주체노선이나 선군노선의 어느 것도 인민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지 못했다. 식량, 에너지, 생산 원료, 의료의 어느 것도 제대로 공급하지 못했다. 그래도 김일성 때는 아사자는 없었고 탈북자도 드물었다.

 

그러나 김정일 시대에는 스스로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르는 시기에 수백만의 북한 동포들이 굶어죽었다. 수십만의 탈북자가 줄을 이었다. 배급체제는 붕괴되었다. 주민들 스스로가 먹는 문제해결에 직접 뛰쳐나오면서 부터 경제는 시장화(市場化)로 기울었고 국가의 계획경제 시스템은 약화되었다. 지금도 탈북은 이어지고 있으며 탈북에 실패한 정신적 탈북자까지를 합한다면 체제 내 위기는 극에 달하고 있다. 굶주림을 더 이상 통치의 수단으로 삼을 수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김정일은 이러한 위기극복을 위해 모든 역량을 동원, 핵과 미사일 개발에 광분했다. 두 차례에 걸친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개발을 김정일은 선군의 위업(偉業)으로 과시했다. 그러나 이 정책들은 하나같이 북한을 국제적으로 고립시켰고 인민들만 궁핍 속으로 몰아넣었다. ‘극빈 속의 핵무장 시도’는 인민들은 물론 심지어 군인들에게 조차 먹을 것을 줄 수없는 체제위기를 불러왔다.

 현시점에서 김정일의 유훈(遺訓)은 사실상 그 시효가 끝났다고 보아야 한다. 주체나 선군이 아닌 북한경제상황의 개선이라는 새로운 지도노선을 부각시키고 그 실효성을 보여주어야 비로소 김정은 체제의 안정화는 터를 잡을 것이다.
 북한의 김정일은 핵 보유와 경제발전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려고 노력했지만 핵무기의 비확산을 지향하는 국제사회는 결코 김정일의 시도를 용납하지 않았다. 중국이 틈틈이 강조하는 한반도의 비핵화는 북한의 핵 포기를 촉구하는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김정은은 대외적으로는 국제사회가 적극 관여하게 될 핵문제해결의 방도를 놓고 시급히 새 지도층 간에 컨센서스를 만들어야 한다. 다음 대내적으로는 북한의 경제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개혁개방문제를 놓고 조속히 내부적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

이처럼 대내외 도전에 응답하는 방법을 둘러싸고 지도층간에 확고한 합의가 마련되지 않는 한 김정은의 세습체제는 결코 안정화의 길에 들어설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의 한 학자는 김정은이 같은 세습지도자라도 하이티의 Baby Doc Duvalier보다는 대만의 장징궈(蔣經國)가 더 바람직한 모델인데 그러한 리더십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 같고 대남, 대미강공책으로 리더의 위엄을 과시하는 방식에 쏠릴 가능성도 크다고 우려했다. (Sheena Greitens, Succession and Stability in North Korea January 23, 2011 (Korea Platform CSIS)


3. 우려되는 지도층 내부의 노선갈등

현재 북한에 잠복되어 있는 노선갈등요소는 중국 편향(偏向)파와 중국경계(警戒)파의 대립가능성이다. 김정일 사망이후 북한이 기댈 곳은 중국뿐이고 중국만이 북한의 세습정권의 안착을 가장 강력, 명백하게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대소사(大小事)를 중국과의 협의로 해결하자는 중국 편향파가 지금은 주류다. 그러나 중국에만 일방적으로 의존한다고 해서 모든 우려가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현 단계 중국의 대북정책은 미국처럼 핵 포기의 선행을 요구하는 대신에 ‘협력을 통한 개입’을 추구하며 한반도의 비핵화를 외교목표로 내세운다. 때문에 한반도 비핵화를 원하는 중국과 김정일의 유훈에 따라 핵 보유를 밀고나갈 김정은의 정책 간에는 전략적 갈등요인이 도사린다. 물론 중국이 현재처럼 북한문제와 북핵문제를 나누어 대처할 때는 큰 문제가 없겠지만 앞으로 펼쳐질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치과정에서 북·중 갈등은 반드시 수면위로 떠오를 것이다. 또 중국은 북한의 개혁개방을 적극 권고, 지원하는 입장인데 이것의 수용여부도 중북관계에서 큰 변수의 하나가 될 것이다. 김정일 치하에서 강성해진 선군세력의 영향력을 김정은이 어떻게 조정, 통제해 나갈 것인가가 중요하다.

 

둘째로 중국이 우방국 국가원수의 가족이라고 해서 보호하고 있는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金正男)의 존재도 김정은을 둘러싼 권력층에서는 경계의 눈초리를 한시도 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중국 측에는 카드가 되겠지만 김정은 측에서는 상당한 부담이 될 것이다. 이러한 잠재적 갈등요인을 가정할 때 북한의 내부노선 갈등은 항상 중국일변도로만 흐를 수없는 요인을 안고 있다.

또 북한의 외교라인에서는 꾸준히 대미접근의 중요성을 말한다. 금년 신년공동사설에서 "현시기 인민들의 먹는 문제, 식량 문제를 푸는 것은 강성국가 건설의 초미의 문제"라고 명기하면서 미국과의 식량협상의 문을 열어놓고 있다. 또 북한노동당은 개성공단, 금강산사업 등의 경험에 비추어 식량난 해결을 위한 남한이용의 필요성을 제기할 것이다. 대미접근 노선과 남북관계개선노선이 중국편향노선, 중국경계노선과 맞물리면서 상황변동에 따라 정권이 추구하는 정책의 중점은 가변적이 될 것이다. 김정은 정권은 당분간 선군세력의 영향 하에 있지만 그러나 경제상황은 더 이상 주체나 선군에만 매달릴 수 없게 되어 있다.

 

4. 한국의 선택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한국의 입장에서는 총체적 상황이 북한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략적 낙관론을 가질 수 있지만 선군세력에 옹위된 김정은의 진로가 불명하기 때문에 안보차원의 대비에도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동시에 북한이 중국에만 전적으로 매달리는 상황을 방치만 해서도 안 되기 때문에 대북협력을 구체화할 조치들을 정치, 경제 외교차원에서 하나씩 준비하고 필요한 제안을 추진해 나가야 한다. 특히 현시점에서 한국이 남북한관계를 개선해 나가려는 것은 오늘의 급변하고 있는 북한 상황의 요구일 뿐만 아니라 주변정세의 큰 흐름에서 보아도 한국이 당면한 도전적 과제이기도 하다.

최근 주변정세에서 한시도 주목을 게을리 할 수 없는 것은 미국과 중국과의 관계이다. 미국이 대외정책의 중심을 아시아로 옮긴다고 선언하면서부터 미ㆍ중 관계는 갈수록 협력보다는 갈등 쪽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당초에는 대선을 앞둔 미국 내의 정치적 필요가 미중관계를 긴장시키는 원인으로 보였지만 최근 상황을 보면 미·중 양국 간의 국익차원의 갈등양상이 결코 예사롭지 않다.

미국은 미일동맹을 강화하는 한편 호주에 미국 해병대를 상주시키고 인도, 미얀마,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 외몽고를 망라하는 다각적 협력의 그물망을 촘촘히 짜들어가고 있다. 중국은 이에 맞서 아세안과의 협력긴밀화, 한ㆍ중ㆍ일 FTA체결 제의, 샹하이 협력기구강화, 러시아와의 협력관계개선,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거부 등으로 맞서고 있다. 또 아직까지 중국이 핵심이익으로 평가하지 않던 북한의 전략 가치를 새롭게 제고하고 있다.

 

물론 미중관계의 갈등이 심화된다고 해서 두 강대국 간에 군사충돌이 발생할 가능성은 오늘의 세계정치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양국 간에 이해관계가 맞부딪히는 지역차원에서는 미중양국간의 실력과시의 수단으로 또는 강국정치의 음모적 속성 때문에 또는 상대방의 오산으로 인하여 대리전의 결과를 초래할 충돌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혹시라도 한반도가 이렇게 악용될 가능성을 차단하는 방법도 강구해두어야 한다. 이 방법가운데 남북한관계개선도 중요한 과제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한ㆍ미관계와 한ㆍ중 관계를 잘 풀어갈 외교역량의 극대화가 요망되는 임진년이다. 올해가 남북한이 새롭게 대화하고 협력하는 시대로 정상화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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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10대 강점
 
미국은 지난 20~30년간 세계의 수퍼 파워로 군림했다. 2차대전 승리후 유례없는 호황은 덤으로 따라왔고 국민의 자부심도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다 옛 이야기다. 예전의 미국은 더 이상 없다. 경제는 추락하고 정치는 표류한다. 그러나 어느 유학생이 썼다는 '미국에 대한 느낌 10대 강점은 상당히 일리 있어 여기에 옮긴다.

첫째 미국은 넓고 크다. 러시아 캐나다에 이어 세계 세 번째다. 풍족한 자원 넘치는 물산은 한국같은 나라가 따라올 수 없는 축복이다.
 
둘째 미국은 역사의 교훈을 배우려는 나라다. 1776년 7월 4일에 건국됐다. 겨우 235년이다. 그런데도 구석구석 기념관 기념공원 박물관을 만들어 역사를 공부한다. 역사를 아는 나라에 미래가 없을 수 없다.

셋째 미국은 공정한 룰이 지배하는 나라다. 편법과 억지 '떼법'과 목소리 크기로 해결하려 들지 않는다.
 
넷째 미국은 공권력이 존중받는 나라다. 경찰과 군인을 신뢰하고 존경한다. 한국처럼 경찰에게 행패를 부리는 모습은 상상할 수가 없다.

다섯째 미국은 리더의 권위를 인정하는 나라다. 한 번 뽑힌 지도자는 인정하고 따라준다. 정치적 의견이 달라도 국익 앞에선 하나가 될 줄 안다.
 
여섯째 미국은 삶의 가치를 아는 나라다. 일보다는 가정이 우선이다. 퇴근 후 가족을 팽개치고 술집으로 달려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중산층의 주말은 대개 아이들을 위한 시간이다.

일곱째 미국은 신용사회다. 결과 못지않게 과정을 중시하고 노력과 정직을 최고의 미덕으로 친다. 권력과 '빽'이 아니라 크레딧 좋은 사람이 대접받는다.

여덟째 미국은 영웅을 만드는 나라다. 나라에 몸 바친 사람들을 무한 존경한다. 참전 용사 군인 소방관 등은 그래서 모두 영웅이다. 애국심이 저절로 발현(發現)될 수밖에 없다.

아홉째 미국은 약자를 배려하는 나라다. 어디를 가든 어린이와 임신부 노인들을 위하고 양보한다. 장애인도 보통 사람과 똑같이 살아갈 수 있는 나라가 미국이다.

열째 미국은 무엇보다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 어딜 가나 안전 제일이다. 따지고 또 따진다. 보고 또 본다. 생명과 관련된 영역엔 에누리가 없다.


이것이 한국이나 중국이 미국을 따라잡기 힘든 이유같다. 그러나 미국 경제의 어려움은 강점에 맞먹는 약점이 있음도 유의해야 한다. 그러나 단점보다는 장점, 약점보다는 강점이 많은 나라인 것은 부인할 수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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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정, 나덕성의 피아노와 첼로를 위한 베토벤 소나타 공연을 보고나서
 

                    피아니스트 신수정여사와 첼리스트 나덕성선생


요즘 내 생활은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딱 어울릴 것 같다. 12월 18일 밤 한 친구의 권유와 초청으로 서초동의 모차르트 홀에서 열린 베토벤의 피아노와 첼로를 위한 소나타 전곡연주회 2부를 듣는 모임에 참석했다. 1부는 11월 6일 예술의 전당 리사이틀 홀에서 이미 끝났다는 것이다.
 

두 분의 연주는 참으로 감미로웠다. 잘 조화된 기악곡의 협연이 줄 수 있는 멋과 아름다움, 감미로운 선율로 넘치는 화려한 연주회였다. 연주자 두 분 모두 피아노와 첼로연주에서 국내 최정상에 올랐던 평판도 작용했겠지만 이 정도의 수준 높은 연주를 해내는 두 분의 내공을 높이 사서인 것 같다.


자리를 함께한 친구들과 이남장에서 저녁을 마치고 여유 있게 공연장을 향했다. 좁은 홀이 대만원을 이루어 사람들이 통로로 이용하는 공간까지 접는 간이의자로 채워져 있을 정도였다. 이곳저곳에 낯익은 얼굴들이 눈에 띌 때마다 가벼운 미소로 목례하면서 공연을 기다렸다. 예상은 했지만 이날 공연의 주인공들은 나의 대학시절의 콩쿠르에서 명성을 올린 분들이었기에 금년 나이는 고희를 갓 넘었을 것이다.
 

러나 유달리 큰 피아노앞으로 나앉은 신수정씨 모습은 예나 다름없었고 자기 키 크기의 첼로를 들고 나오는 나덕성씨 역시 젊어보였다. 문자 그대로 YO(Young Old의 약칭으로 75세미만의 연령그룹)세대들이었다. 베토벤은 피아노와 첼로를 위한 소나타 5곡을 썼다는데 나는 이날 밤 소나타 No.2와 소나타 N0.5의 연주를 듣게 되었다.
 
연주에 나선 두 분 모두 한국기악계의 거성들로서 음대 학장을 거친 원로들이었지만 연주를 위해 무대 위로 나와 인사하는 모습은 다소간의 수줍음을 섞은 정중함이었다. 누구나 많은 사람들 앞에 자기가 주인공으로 나와 연설을 하거나 연주를 할 때는 으레 다소간의 긴장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이 분들의 표정에서도 그런 느낌이 감전되었다.


러나 두 사람이 눈 사인에 맞춰 동시 연주를 시작하면서부터는 두 분 너무 진지해졌다. 피아노와 첼로음의 조화로 울려나오는 음률의 아름다움은 청중을 숨소리도 나오지 못하게끔 압도하였다. 한국 최고 거장들의 연주라는 선입견을 넣지 않는다고 해도 두 분 모두가 보이는 연주의 진지함은 청중들의 심금을 파고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소나타 No.2의 Allegro Molto 부분의 연주에서는 격정이랄까 열정 같은 것을 모두가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동안 감기로 고생하다가 다 끝나가는 무렵이었기 때문에 무탈하게 감상하고 올 줄 알았다가 웬걸 기침이 튀어나오려고 했다. 기침을 참으면서 안간힘을 쓰고 앉아있는데 인터미션이 되었다. 이 순간만큼 고마운 일이 또 있을까. 나의 어려움을 눈치 챈 친구가 빨리 집에 가서 쉬라고 권했다. 김남윤 씨가 바이올린으로 가세하는 Piano trio No.4도 듣고 싶었는데 남들의 감상을 위해 나의 욕심을 버렸다.


그러나 아직도 눈에 선한 것은 악장이 끝날 때마다 이마를 쓰다듬거나 콧등을 만지면서 피로해 하는 나덕성 씨의 표정이었다. 나이 탓에 연주에 힘이 부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연주에 쏟는 열정이 부족해지는 힘을 보충하면서 수준 높은 연주를 해내는데 감동치 안을 수 없었다. 이들의 연주는 훌륭했지만 보다 더 훌륭한 분은 이 소나타를 써낸 베토벤, 그리고 베토벤을 인류에게 보내주신 하나님 아니겠는가. 좋은 시간을 갖게 해준 두 분 친구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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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중어업 갈등 감상법

                                                                                              전 국회의원 이영일

                                                                    1.

어부(漁夫)는 바이블 시대부터 평화를 상징하는 존재로 생각되었다. 이런 상상은 여러 명의 어부들이 예수의 제자로 선택된 데서 연유된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 속에서 경험한 어부들은 반드시 평화를 상징해온 것만은 아니다. 삼한(三韓)시대부터 한반도에 출몰했던 왜구(倭寇)들은 평화와는 거리가 먼 해적들이었다. 신라시대의 장보고(張保皐)는 오늘의 완도지방에 청해진(淸海鎭)을 열고 중국 해적들을 강력히 소탕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19세기 말엽부터 일본은 국가근대화를 이룩하고 동시에 어업도 현대화하면서 왜구라는 이름의 해적은 종적을 감추었다. 현재 한일 간에는 어족자원보호와 어로수역의 범위, 어로방법, 어로종류를 놓고 서로 간에 이해를 조정하는 협의는 지속하지만 일본어부들의 해적행위 때문에 갈등이 야기되는 일은 없다. 적어도 한일양국간의 어로문제는 문명국가적 표준에서 대화와 협력을 통해 해결하는 관행을 정착시키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한중간에는 1000년 전에 살다간 청해진 대사 장보고를 다시 기용해야한다는 국민적 부르짖음이 나올 정도로 중국어부들의 해적행위가 심각의 극에 달하고 있다. 중국어부들이 한국의 경제해역을 월경(越境)하여 고기를 잡아가는 행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물론 같은 바다를 공유하면서 경제수역을 설정하고 있는 국가들 간에 어부들의 사소한 월경은 있을 수 있고 또 어로과정에서 분쟁과 갈등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중국어부들이 떼를 지어 한국의 해역을 넘어와서 마구잡이로 고기를 잡아가고 이를 단속하는 해안경찰에 덤벼드는 행위는 다분히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작금에 일어난 중국어부들의 한국해경(海警)피살사건은 미리 준비된 폭력의 표현이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어떤 각도에서 보아도 중국어부들의 이러한 행위는 해적(海賊)행위로 규탄 받아 마땅할 것이다.

한중양국은 1998년 어업협정을 체결하고 2001년 6월1일부터 협정을 발효시켰다. 문명국 적 표준을 적용한 이 협정을 양측이 준수, 어로행위를 한다면 한중간에는 어업갈등이 발생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지금 중국 어선들의 한국수역의 침범은 점(点)이나 선(線)의 형태가 아니고 집단적이고 전면적인 양상으로 확대되고 있다. 급기야는 단속하는 해경(海警)의 생명을 빼앗는 해적으로 그 행태가 악화되고 있다. 더욱이 오늘의 중국 어부들에게는 수산자원의 보호라는 개념이 아예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단속의 눈을 피하거나 대항하면서 어종말살(魚種抹殺)을 초래할 남획(濫獲)을 필사적으로 강행하고 있는 것이다.

                                                                             2.

그러면 중국어부들은 왜 한중양국간의 어업협정을 무시하고 불법어로활동을 자행하고 한국 측의 단속에 저항하면서 필사적으로 어로활동을 감행하는가.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로 중국의 어로수준이 세계적 추세인 “기르는 어업”이 아니라 아직도 잡는 어업인데다가 수자원보호라는 문제의식의 결여에서 오는 남획으로 중국연안에 어족자원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국 연안해안(沿岸海岸)의 어족자원 고갈은 어느 면에서 보면 자연재해 같아 보이지만 환경문제를 도외시하고 개발정책추진에만 전념했던 중국당국에도 책임의 일단이 있다고 하겠다. 후진타오 주석이 과학적 발전관을 제창하기이전의 개혁개방시기에는 외자도입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제한하지 않았다. 공장건립 시에도 환경적 고려를 소홀히 했다. 이 결과 공장폐수, 농업용 폐수가 대량으로 바다 속으로 방류됨으로 해서 어족자원이 말살되거나 서식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둘째로 중국정부의 사회안전망이 어민생활에 거의 미치지 않고 바다에서 자력갱생하도록 방치되고 있는데도 큰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총량 GDP에서는 개혁개방이전의 세계6위에서 이제 세계 2위, 즉 G2의 반열에 올랐지만 사회안전망을 표준으로 할 때는 아직 G2라고 말하기는 매우 힘든 실정이다. 지금 사회안전망이 농촌지역에 조금씩 펼쳐지는 단계인데 중국의 어업인구는 3000만 명으로, 이들에 대한 교육, 훈련, 어로장비개선, 생활비보조, 학비지원 같은 어로현대화와 사회안전망구축작업은 아직도 국가우선수위에서 한참 뒤져있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불법어로문제는 중국정부와 협의한다고 해서 금방 뾰쪽한 해결책이 나온다고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부가 국민을 단속할 때는 채찍과 당근이 동시에 필요한데 중국정부로서는 어민활동을 단속하고 어업협정 준수를 요구할 채찍은 있지만 당근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중국어선들 가운데는 무면허 어선이 많아 정부수준에서 실태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고 따라서 효과적인 행정 통제를 기하기는 더욱 어려운 형편이다. 최근 중국의 환구시보(環球時報)가 한중어업갈등을 논평하면서 중국어민들은 많이 배운 사람도 아니고 생계도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다고 어민 정상론(情狀論)을 들고 나왔는데 이는 중국어민들의 오늘의 상황에 대한 솔직한 표현인 것 같다.

                                                                        3.

한중간의 어로갈등이 순리로 잘 풀릴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중국정부의 주요정책이 덩샤오핑(鄧小平)시대와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은 인민생활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면서 공산당이 모든 수단을 다해서 인민의 빵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이른바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을 주장했다. 또 그는 앞으로 강대국 간에는 100년 동안 전쟁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중국은 도광양회(韜光養晦)-힘의 대외적 과시보다는 국력의 내실화가 중요하다는 정책표어-자세를 견지하면서 경제건설에 매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작금의 중국은 도광양회 노선을 시효가 지난 원칙으로 평가하고 대국굴기(大國崛起)를 지향하고 있다. 도광양회시대라면 사회안전망구축이나 어민 생계보장에 정책의 중점을 두었겠지만 대국굴기시대에는 우주선발사, 인공위성 도킹, 항공모함 건립 등 전략무기개발을 앞세운 군비증강에 박차를 가한다. 이와 동시에 중국정부는 그들의 주권이 동지나해(東支那海)와 남중국해까지를 망라한다는 위력적인 주권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중국공산당은 중국민족주의(때로는 애국주의)를 외교의 표면에 등장시키면서 대국굴기(大國崛起)를 뒷받침할 업적의 과시를 통해 공산당 1당지배의 정당성을 국민들에게 승복시켜 나가고 있다.

현재 이 노선은 아편전쟁이후 실추되었던 중국의 위상을 회복한다는 의미에서 평가할만한 점이 있다. 중국 칭화대학(淸華大學)의 옌쉐통(閻學通)교수는 중국의 대국굴기란 “새로운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잃었던 것을 되찾는 것”이라고 정당화하고 있다. 이런 입장이 국내정책으로 표현되면 사회안전망구축이나 어민 보호 같은 정책목표가 후(後)순위로 밀린다.

또 한 가지 우려는 중국정부가 어부들의 불법어로에 대한 한국정부의 단속능력을 약화시키는 작용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정부는 상식적으로라면 불법어로를 하는 어부들에게 어업협정준수를 요구함과 동시에 다른 정책적 지원, 예컨대 생계비 보조나 원양어업장려를 위한 자금 지원, 어로현대화를 위한 정책자금 지원 같은 어민보호를 위한 사회안전망 구축조치를 병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원조치가 중국당국에 의해 적극 강구되지 않는 상황에서 한국정부가 불법어로에 대한 단속의 강도를 높일 경우 중국은 무역보복 같은 의외(意外)의 조치를 들고 나올 수 있다. 현시점에서 중국정부가 어민들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 한국의 단속능력을 약화시키게 하는 것뿐이라면 그것은 무역보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한중간의 마늘 협상에서는 한국 측에도 미숙한 측면이 없지 않았지만 중국은 우리 정부가 취한 조치를 훨씬 초과하는 강경보복으로 맞섰던 일이 있었다.

또 최근 동지나해에서 일본이 중국선원을 구속했을 때 중국정부가 희토류의 대일 수출중단을 통해 일본의 양보를 얻어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중국도 주변국들에게 중국경계심을 확산시킬 조치를 함부로 취하기는 힘들겠지만 중국외교의 저돌성(猪突性)이나 우격다짐식의 행태를 본다면 항상 신중한 대처가 요망된다.

최근 Y대학의 M교수는 J신문에 중국이 외교적으로 왕도(王道)를 걷고 있는데 비해 미국이 종래의 왕도를 버리고 아시아에서 패도(覇道)를 추구한다고 비난하는 글을 썼다. 그 교수의 왕도론(王道論)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중국의 대국굴기외교가 왕도인가 패도인가를 올바르게 분석해 보았다면 그런 평가는 안 나올 것이다. 최근 미국의 아시아 중시(重視)정책은 미국의 대선(大選)을 의식한 국내정치적 고려가 큰 것이지만 중국이 아시아지역에서 벌이는 패도적 접근에 대한 견제측면도 있음을 아울러 간과해서도 안 될 것이다.

                                                                     4.

한중관계는 한국의 국제관계에서 미국과의 관계 못지않게 중요한 국제관계이다. 적어도 중국의 협조 없이는 우리 모든 국민들이 일일천추 갈망하는 통일달성도 힘들어지고 당면해서 는 우리가 추구하는 평화유지도 어려울 수 있다. 또 오늘의 2000억 달러를 상회하는 한중무역에서 우리는 거액의 흑자를 얻고 있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다른 이익이 크다고 해서 당장에 한국어민들을 경제적으로 어렵게 하고 한국의 주권을 짓밟는 중국어민들의 불법어로를 그대로 눈감아 두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단속은 주권국가답게 철저히 강화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물리적 단속만을 유일한 대책으로 생각해서는 실효를 얻기 힘들다는 점도 아울러 유념할 필요가 있다.

한국정부는 현시점에서 불법어로에 대한 단속 장비와 인력을 좀 더 현실의 요구에 맞게 보강해야 한다. 동시에 한중양국은 협의를 통해 중국어민보호를 위한 정책적 조치를 강구할 필요가 있다. 우선 한국은 중국어민을 위한 지원 조처로서 첫째 의료지원을 검토할 수 있다. 중국산동성 스다오(石島)에 어민을 위한 병원설립을 지원하고 필요한 의사파견, 의약품을 공급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중국어민 자녀들에게 한국유학의 길을 열어주는 방법도 검토할 수 있다. 무상유학을 추진, 어민들의 어려움을 덜어주는데 한국이 일조하자는 것이다. 수산협동조합의 장학기금설치도 연구해 볼만하다. 셋째로는 중국 어업 현대화를 위한 한중공동어로기금의 설치도 한중간의 공식, 비공식 협의를 통해 추진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이는 단속제일주의로부터 단속과 시혜(施惠)를 병행하는 정책전환을 의미한다. 지금부터 1000년 전 해상왕(海上王) 장보고는 중국해적들을 박멸시킨 무서운 장군이었지만 그러나 해적들에게 무역을 통해 먹고 살아갈 길을 마련해 주는 구세주(救世主)적 측면을 보였다.

굶주린 이리떼처럼 죽음을 각오하고 면허(免許)나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연평도 일대에서, 소흑산도 근해에서 떼를 지어 몰려오는 바다의 빈민들을 총칼로만 다스리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세종대왕이 왜구의 출몰지역인 대마도를 정벌한 후 세견미(歲遣米)를 보내주어 그들의 마음을 다스렸던 고사(故事)를 다시 생각하면서 오늘의 한중어로사태를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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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좌로부터 문병호, 이영일, 권순영, 박은조, 뒷열 우로부터 임신철, 신치호, 한상부 홍명수, 고성천씨)

한국•아프간 친선협회회장에 신치호씨, 이영일 전 회장은 명예회장으로

한국아프간친선협회는 2011년 12월 16일 18시 서소문 사무실에서 정기총회와 이사회를 열고 이영일 회장을 명예회장으로 추대하고 신치호 회장(노스타코리아 L.T.C.와 세계로 CBMC회장)을 새 회장으로 선출했다.

이영일 명예회장은 2002년 3월 아프간전쟁 직후 전쟁고아들을 돕기 위해 의료봉사단을 인솔하고 한국대사관도, 국제협력단도 없는 아프간의 마쟈리에샤리프와 발크지역을 방문, 의료봉사활동을 펼쳤고 그가 속한 한민족복지재단은 거의 반년 동안 의료진을 아프간에 파송, 의료지원활동을 계속했다. 이 사업에는 탈런트 정영숙 권사도 참가했다.

 2003년에는 아프간임시정부의 Fayes 고등교육부장관이 16명의 아프간 대학총장단을 이끌고 방한한 것을 계기로 6.3빌딩에서 한국아프간 친선협회를 결성하고 아프간 교육재건을 위해 다방면에 걸친 지원활동을 펼쳤다. 서울대학교 정운찬 총장이 40대의 신규 컴퓨터를 지원했고 한국진흥재단은 재활용된 400대의 컴퓨터를 아프간 대학들에 지원, 컴퓨터학과 설립을 추진했다. 2003년 여름에는 한국아프간 친선협회 대표단이 인도의 뉴델리 공항을 거쳐 카불을 방문, 수로비 지역의 관개사업을 지원하는 한편, 관개공사를 새마을 취로사업형식으로 전개, 코이카 식량을 나누어 주었다.

 이 때 이영일 회장은 카불에서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을 Fayes 고등교육부장관의 주선으로 왕궁으로 방문, 면담하고 한국에 아프간대사관을 개설할 것으로 요청, 흔쾌히 승낙을 해주어 현재 서울 한남동 소재의 유엔 빌리지에 아프간 대사관이 세워졌다. 아울러 카불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아프간•한국친선협회도 결성되고 아프간 측 회장에 Fayes장관이 선임되었다.

한국아프간 친선협회는 그 후 3명의 아프간 유학생이 한동대학교에서 공부하도록 지원했고 아프간 국회의원단의 내방을 접견함과 동시에 아프간 대사관이 제 구실을 하도록 물심양면의 지원활동을 펼쳤다. 동시에 아프간 남부 칸다하르에 필라병원을 인수해서 정인섭 사장(대한제강사장 2만 달러를 희사한 한민족복지재단 이사)불이 투자한 기금으로 재활병원을 병설해서 전쟁부상자들의 재활 지원 사업을 추진하는 한편 각 민간단체나 교회에서 단기 봉사 팀을 편성, 필라병원에서 간호활동을 지원해 왔다. 지금도 한동대학교에서는 조원철 교수 지도하에 칸다하르 병원을 돕는 단기사역의 대학생 봉사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2007년의 샘물교회의 단기봉사 활동은 탈레반에게 봉사활동대원 전원이 피랍되었고 탈레반 손에 두 사람의 봉사단원이 목숨을 잃는 끔찍한 불행을 겪었다. 김만복이라는 국정원장의 공명심 때문에 많은 돈을 들여 더 이상의 추가희생자는 없이 피랍되신 분들이 생환했지만 그 상처는 여러 군데 아직도 앙금처럼 남아있다. 한국 내에 안티 크리스천 세력이 얼마나 많은지도 인터넷을 통해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의 충격으로 나는 한국아프간친선협회를 방기하고 절차를 밟아 법인체를 해체하려고 하였다. 그때 박은조 샘물교회 목사님이 오셔서 한국아프간 친선협회가 해체되면 “우리는 두 가지를 몽땅 잃는다. 아프간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라는 큰 목표를 잃을 뿐만 아니라 이미 목숨을 잃은 두 분의 죽음을 헛되이 한다”고 말하고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한국아프간친선협회의 간판을 유지하는 가운데 아프간 전쟁난민들에게 한국인들의 사랑을 증거할 수 있는 다른 사업을 강구해 나가보자“고 제안했다.

나는 박은조 목사님의 말을 좇기로 했다. 박 목사님은 아프간에서 유학생 12명을 한국으로 데려와 그들을 전후 아프간과 한국을 연결하는 가교로 삼자는 계획을 말했다. 이 구상에 따라 아프간에서 12명의 유학생이 全州 비전대학으로 유학을 왔고 이제 절반이 공부를 마치고 귀국했으며 나머지 6명이 더 높은 단계의 공부와 새로운 임무나 직장을 검토하고 있다.

한편 아프간에 콩을 심어 전후 아프간 지역의 영양위기를 극복하자는 운동이 권순영 박사(재미교포)가 창설한 NEI를 통해 추진되고 있었고 이 사업은 한국의 세계로 CBMC가 NEI운동을 적극 도움으로써 활성화되고 있었다. 나는 이 사업이 갖는 의의에 적극 공감하고 세계로 CBMC와 한국아프간 친선협회를 아프간 돕는 사업에서 하나 되기로 합의, 조직적 통합을 이루하고 양쪽에서 이사를 선임, 조직통합을 이루었다. 통합된 한국아프간의 회장은 내가 맡고 부회장에는 세계로 CBMC의 신치호 회장이 맡았으며 사무총장에는 이형섭목사님이 맡았으며 사업본부장으로는 임신철 세계로CBMC회원이 맡았다.

작년 10월부터 아프간의 콩 사업은 지난 7년간의 권순영 박사의 눈물어린 수고와 노력 끝에 콩의 소개, 제배, 영농기법 훈련, 콩의 가공분양에서 아프간 정부당국을 승복시키는데 성공했고 이제 미국은 물론, WFP까지도 권순영 박사가 추진하는 콩사업이 갖는 의미를 지지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국내지지를 얻기 위해 조선일보에 1회, 동아일보에 1회씩 칼럼을 게재하였으며 Naver에도 콩 사업을 지원하는 Happy Bean 카페를 열었다.

지난 12월 16일 38회째 아프간을 방문하고 귀국한 권순영 박사로부터 지난 7년과 앞으로의 7년을 위한 구상 보고를 청취하고 이제 우리 정부가 적극 참여함으로써 아프간 전쟁이후의 한국과 아프간과의 좋은 관계를 만들 정책적 Agenda로 콩 사업을 발전시킬 필요성에 이사들의 전원일치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이날 총화를 계기로 창립이래 8년간 회장으로 활동한 이영일 회장 시대는 마감하게 되었고 年富力强한 신치호 회장 시대가 개막되었으며 임신철 사업단장이 사무총장직을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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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친북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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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중 / 문화일보 논설위원

살이 떨린다! 대한민국 초계함이 두 동강

나버린 국가 안보 파산 사태 앞에서도

여의도 국회 의사당에 빨대 꽂고 국민 혈세 받아쓰며

노골적으로 김정일 전위대 역할을

하는 저 금배지들의 정체(正體)

똑바로 목도하면서.

살이 떨리는 분노를! 천안함 사태가 터지자마자 본색을 드러낸

금배지 ‘친북족(親北族).

천안함 사태는 ‘김정일 패밀리’가

여의도 정치권 착근에 성공한 현실을

보태고 뺄 것도 없이 확인시켜줬다.

거대한 김정일 교두보!

잊어서는 안된다!

저 친북족들이 김정일을 두둔하느라 어떻게 발버둥쳤는지.

기록은 무섭게 남는다.

이들의 김정일 편들기·친북·반미 발언의 100분의 1,

1000분의 1만 되살려본다.

①민주당 원내대표 박지원.

사태 직후 용수철처럼 튕겨나와 뭐?

“북한 공격 가능성은 낮다”?

“민주정부 10년 지나면서 국민은 속아넘어가지 않는다”?

무섭게 편들었다.

미국과 중국은 결국 6자회담으로 돌아갈 것”?

천안함 때리고 6자회담으로 돌아가려는

김정일의 복심(腹心)! 김정일 대변인!

정동영.

“서해를 평화협력특별지대로 만들기

했던 10·4선언을 물거품으로 만든

이명박 대통령의 정치·정책의 실패가 비극의 원인”?

MB 잘못이라는 것!

기가 막힌다.

“주적론 부활은 전쟁불사론과 마찬가지다.

“북한에 당했다고 주장할 염치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가슴에 손을 얹고 부끄러워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심장에 손을 얹고 퇴장해야 할 사람은 정동영!

고정간첩, 비전향장기수가 하는 소리인 줄 착각할 뻔.

③민주노동당 대표 강기갑.

“한·미 군사훈련 과정이라 미군이 많은 걸 알고 있을 것”?

시간 장소 가리지 않고 미군 오폭설이다.

“수구세력들이 대북 증오감을 부추기고 있다.

더 이상 논하고 싶지도 않다.

④민주당 박영선.

인터넷에서는 미군 잠수함의 오폭 가능성을 제기하는 데, 대응책은?

‘인터넷 괴담’을 팔아 김정일을 옹호하는 야비함. 대한민국 국회의원이여!

⑤민주당 김효석.

“좌초와 피로파괴가 겹쳤다. 두고보면

여러곳에서 양심선언이 있을 수 있다.

뉴 민주당 플랜을 만든 주인공의 실체가 이거다.

양심선언 나왔나?

⑥민주당 이종걸.

침몰 직후 실종자 가족을 팔아 뭐?

“천안함이 작전 수행 중 침몰했을 가능성이 있다”?

김정일 편들기, 눈물겹다.

⑦국민참여당 유시민.

“북한 어뢰설은 근거없이 원인을 주장하는 것”?

염장을 지르는 덴 정말 이골 난 달인이다.

⑧민주당 이강래.

“북한 소행으로 단정하려는 건 지방선거를 염두에 둔

선동 정치다. 6자회담을 열어야 한다.

대놓고 김정일 편들기.

⑨민주당 천정배.

“이명박 정권과 보수언론이 증거 하나 없이

북한 어뢰 공격을 기정사실화하는 의도는

신북풍 뒤에 숨어 이득을 보려는 간악한 술수.

전직 법무장관의 발언.

⑩당대표 정세균.

“북한 연루설은 정치적으로 이용해보려는 속셈”?

어이쿠, 끝없는 북풍타령.

단언컨대, 여의도 ‘친북족’은 북한 정권의 40여년에

걸친 ‘남조선혁명전략’의 성과다.

남조선혁명전략?

김일성과 김정일은 19642월 조선노동당

4기 제8차 전원회의 결의로 스탈린이 쓴

‘레닌주의의 기초’를 그대로 베낀 ‘남조선혁명전략’을 확정한다.

대한민국 정치권에 친북세력의 진출을 도와 총선과 대선을 좌지우지하면서

대한민국을 손대지 않고 삼킨다는 것!

1987년 민주화 이후 6·25 때 우파에 의해 피해 본 제2세대 좌파 세력,

주체사상에 세뇌된 올드 운동권,

386세력의 본격적인 정계 진출은 남조선혁명전략과의 연계다.

국회의원 299명 중 최소한 3분의 1,

90여명은 북한 조선로동당의 ‘여의도 분소’ 역할을 하는 세력이라는 분석은

억측이 아니다.

결코!

MB는 주적(主敵)을 세워 목숨 걸고 싸워라!

밖으로는 김정일을, 안으로는 친북족을 상대로.

천안함 사태와 친북족의 활보는 김정일

버르장머리를 확확 뜯어고치고

친북세력을 발끝까지 청소하라고 꾹꾹 눌러

찍은 유권자의 열망을 배신한 자업자득!

청와대 뒷산에 올라가 ‘아침이슬’ 들었다?

실없는 중도실용론으로 ‘김정일 사당패’들에게

문약하게 비쳤기 때문.

김정일과 친북족을 상대로 외로운 결단을

내려라! 타이밍은 증거 발표와 맞춰야.

그걸 회피하면 청와대 앞에 ‘명박산성’을 쳐야 했던 사태보다

더 엄중한 상황이 임기중에 반드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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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뮤얼 헌팅턴 교수의 추억

                                                                                              한중문화협회 총재 이영일

                                헌팅턴 교수와 필자

 나이가 들어가면서부터 해마다 연말이 되면 지난날의 자료를 정리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금년에도 수많은 사진 자료를 정리했다. 후대들에게 특히 남겨줄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 아닌 내 자신이 직접 미리 챙겨 폐기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특히 내 연배(年輩)들처럼 20세기에서 21세기에 걸쳐 생을 이어가는 사람에게는, 특히 정치생활을 한 사람들에게는 한 세기가 지난 사진들과 자료들이 너무 지천이다. 시효지난 사진이나 자료를 틈나는 대로 살피면서 과감히 서둘러 폐기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자료를 정리하던 중 내가 거의 잊고 있었던 귀한 사진 한 장을 찾았다. 하버드 대학의 석학 고 새뮤얼 헌팅턴 교수를 그의 연구실에서 만나 찍은 사진이었다.

1986년 5월 나는 미 국무성 초청으로 1개월간 미국의 여러 곳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나를 초청한 미국국무성에서는 미국 체류 중 꼭 만나고 싶은 인물, 특별히 관심 갖는 미국의 제도, 미국의 명승지중 방문하고 싶은 지역을 미리 말해달라고 했다. 이 때 내가 면담하겠다고 신청한 사람이 바로 새뮤얼 헌팅턴 교수였다. 여기에 곁들여 또 각 지역마다 실시형태가 다른 미국의 지방자치제도를 시찰하겠다고 했다. 특히 지방자치문제는 방미직전 전두환 대통령이 나에게 직접 지시한 사항이었다.

나는 그 당시까지만 해도 헌팅턴 교수가 어떤 분인지를 잘 몰랐지만 그가 저술한 정치발전론을 원서도 아닌 번역본(배성동, 민준기 공역)으로 읽으면서 그의 논리와 식견에 흥미를 가졌다. 그의 정치발전론 가운데 한 대목은 지금도 나에게 좋은 참고로 기억에 남아있는데 욕망곡선과 성취곡선간의 간격에 관한 그의 견해였다. 그에 의하면 개발도상국들은 빠른 속도로 경제발전을 이루지만 경제발전이 된다고 해서 국민들의 증가하는 욕구를 충족시키기는 힘들다면서 좌표 상 욕망곡선이 올라간 만큼 국민들의 성취곡선이 오르지 않고 그 간격은 날로 넓어진다는 것이다. 이 간격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국민들의 불만은 고조되고 사회적 불안정이 확산되어 정권은 위기를 맞는다는 것이다.

나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총재비서실장으로 재임 중이었는데 1985년 중반의 5공 정권이 맞고 있던 위기가 바로 헌팅턴 교수가 말하는 위기와 유사하다고 생각하고 그 처방을 물어볼 양으로 국무성에 그와의 면담을 신청했던 것이다. 날자는 5월13일로 잡혔다. 헌팅턴 교수와의 약속시간은 10시 30분부터 1시간이었기 때문에 보스턴의 파크 플라자 호텔에서 조반을 서둘러 마치고 통역으로 수행한 신린섭(국무성 통역원)씨와 하버드타운으로 들어갔다.

헌팅턴 교수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는 미 국무성에서 연구비를 받고 있기 때문에 국무성초청으로 미국을 방문, 자기와의 면담을 청한 분에게는 인터뷰 비용을 청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11시 30분까지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대학교수와 만나 대화를 하는데 인터뷰 비용을 낸다는 말을 나는 이 날 처음 들었다. 미국에서는 저명교수를 만나 인터뷰로 그의 시간을 할애하고 식견을 들을 때에는 수준 별로 차이는 있지만 소정의 비용을 낸다는 것이다. 상당히 합리적인 이야기로 들렸다. 신린섭씨는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개 1시간당 5백 달러 정도 지불하는데 나는 국무성 초청케이스라 인터뷰비용을 면제받았다고 설명하고 헨리 키신저 같은 분을 만나려면 인터뷰 비용을 좀 더 많이 청구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번뜩 들어 한국식의 인사치레는 모두 생략하고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내가 한국의 재선 국회의원으로서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일하고 있다는 점과 전두환 대통령을 당(黨)쪽에서 가까이 보필하는 총재비서실장임을 소개한 후 현재 한국은 헌팅턴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욕망곡선과 성취곡선 간에 간격이 벌어짐으로 인해서 정치적 불안과 사회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런 견지에서 볼 때 현재 한국이 안고 있는 위기를 나는 헌팅턴 교수가 말한 바와 같은 위기로 보고 이를 헌팅턴위기(Huntingtonian Crisis)라고 부르고 싶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위기에 대응할 방도를 이야기 듣고 싶다고 곁들였다.

 나의 말을 들은 헌팅턴 교수는 태도가 일순간 밝아지면서 처음 인사를 나누던 순간에 내가 느꼈던 “용건만 말하고 나가라”는 식의 업무적(business-like)표정이 누그러졌다. 그는 나의 이야기와 분석에 큰 흥미를 보이면서 자기의 소견을 이야기 했다. 자기의 이론은 한국에 특정된 견해는 아니며 개발도상국들의 일반적 현상을 분석하면서 도출된 추세라고 전제한 다음 위기에 대한 대응방안을 들으려면 자기에게 새로운 연구비를 주어야 할 것이라고 농담조로 말을 이었다. 그는 현 시점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욕망곡선과 성취곡선간의 큰 Gap으로 정치체가 겪는 리스크나 부담을 극복하기보다는 경감시키는 방도를 마련하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고 말하고 그 방도로 자기가 생각하는 것은 권력의 집중이 아닌 권력의 분산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의 취지를 촌탁하면 대통령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어 있으면 국민들의 욕구나 불만이 대통령 한사람에게로 집중되기 때문에 대통령은 항상 위기의 한 복판에 서 있게 된다면서 이 부담과 압력을 경감시키려면 통치(Governance)에서 지방자치 실시와 같은 권한의 분산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대통령에게 집중된 힘의 축(Axis)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으로 다원화시키면 시킬수록 정권을 향한 국민들의 불만도 분산되고 대통령이 받는 압력도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견해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고 그의 답변을 들었는데 시간은 약속된 한 시간을 넘겼고 오히려 그의 부담으로 구내식당에서 오찬까지 대접받았다. 나는 이 자리에서 그에게 한국방문을 제안했고 그도 일정을 보아가면서 추후 연락하기로 했다. 나는 귀국 후 당시 최창윤 정무비서관을 통해 대통령에게 헌팅턴과의 대화내용을 자세히 기록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대통령은 곧장 나를 청와대로 불러 보고서를 잘 읽었다면서 나의 방미보고를 평가한 후 헌팅턴 교수를 한국에 조속히 초청하라고 했다. 나는 즉시 초청 서한을 보냈는데 헌팅턴 교수는 미리 잡혀있는 일정 때문에 1987년 이후에나 한국방문이 가능하다고 회신했다. 결국 그의 초청은 무산되었지만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아직도 나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 후 나는 그의 유명한 저서 ‘문명의 충돌’을 탐독했다. 지금부터 3년 전인 2008년 12월 그는 타계했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업적은 고인이 된 후에도 세계정치학계에 큰 족적을 남기고 있다. 그는 문명의 충돌에서 21세기에 미국이 당면할 도전으로서의 이슬람 권 문제나 앞으로 중국이 미국과 대적할 강자임을 예측하고 대비할 것을 주장한 점은 국제정치학자로서의 그의 선견을 세계정치학계가 평가하는 이유인 것 같다. 학자들은 누구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나는 “헌팅턴 위기”라는 표현하나로 그의 환심을 사서 한 시간 넘게 대화를 나누고 점심대접까지 받았다.

 당시 나의 통역을 맡았던 신린섭 씨는 Problems of Communism에 좋은 글을 많이 발표했던 공산권연구 전문가였는데 지금은 연락이 끊겨 생사를 알 길 없다. 세월과 함께 인걸들도 사라지기 마련 아닌가. 헌팅턴 교수와의 인연을 몇 자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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