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국사대주의를 경계 한다

 

한국의 친 중국 인사들은 36년간의 일본지배에는 분개하면서도 1250년 동안 한국을 소국으로 짓밟아온 중국의 역사행태는 까맣게 잊고 있다. 오히려 북한을 인식하는 내재적 접근방식을 중국에 적용하면서 중국의 미국비판에 맞장구치고 중국의 경제적 약진을 찬양한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세기가 끝나고 중국의 세기가 왔으면 하는 기대도 넘치는 것 같다.

 

이들은 이제 강대국들 간의 세력전이도 그 시대의 핵심기술을 선점한 세력이 주도한다는 기술경쟁이론을 내세우면서 중국이 첨단기술면에서 미국을 앞선 것처럼 말한다. 또 어떤 한국학자는 "미국이 세계의 패권국가가 된 이후 미국 국력의 50% 이상까지 치고 올라온 국가가 없었다. 그런데 중국은 미국 GDP3분의 2까지 따라왔다. 게다가 중국은 미국에 대한 안보 의존도도 전혀 없다""기존의 대국 경쟁과 다른 양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면서 중국 편으로 기운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1215일 중국방문 시 스스로 소국임을 자처하면서 시진핑이 말하는 중국몽 실현에 중견국가로서 일익을 맡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의 특보라는 문정인도 2019124일 비록 가상적 상황임을 전제하기는 했지만 미국이 나가면 중국의 핵우산을 쓰고라도 북과 비핵화협상을 벌일 수 있다고 발언, 말썽을 일으켰다. 중국에 대한 문정권의 3() 약속부터 현재까지 집권층 인사들의 언동을 보면 서울이 미중패권 전쟁 상황에서 친 중(親中)으로 기울고 있다는 미국 측 일부의 비판적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결국 중거리미사일(INF) 배치반대, 사드추가배치반대, ,,일 안보협력반대라는 등 중국의 내정 간섭적 요구를 자초한 측면이 없지 않다.

 

중국 특색적 사회주의는 중국의 최고부자 1000명중 중국공산당 간부가 160명에 이를 정도의 불평등한 중국현실을 제도화하고 선진투자기업들로 부터 기술, 경영 노하우를 강탈하거나 지적 재산권을 해킹해서라도 자국만 발전시키면 된다는 중상주의적 국가자본보주의적 논리다.

 

한국은 중국에 3불 약속(사드 추가 불배치, 미국의 MD에 불가입, 한미일 안보조약 불참여)를 스스로 약속했지만 사드 배치에 대한 중국의 보복은 풀리지 않고 있다. 관광, 문화예술교류는 철저히 닫혀있으며 학술교류의 문만 조금 열고 있는데 그것도 목적은 한국학계에 친 중 세력을 키우고 미중 패권싸움에서 중국 편을 들 선전요원확보용인 것 같다.

 

이제 우리는 정신을 똑똑히 차리고 대륙세력의 끝자락에 붙어 중국에 끌려 다니느냐 아니면 해양세력의 대륙진출교두보가 되어 국력신장을 지속할 것이냐를 결단해야한다. 우리 한국을 3-5그룹(인구 5000만 이상에 1인당 GDP 3만 달러이상인 국가가 가입하는 국가그룹)의 멤버가 되게 한 것은 지정학적으로 해양세력의 편이었기 때문임을 명심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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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미국은 중국에 강공책을 휘두르는가.

 

이 영 일 (대한민국 헌정회 통일연구위원장)

1. 들어가면서

 

바야흐로 미국과 중국 간에 무역 전쟁의 불이 붙었다. 우리가 미중 무역 분쟁을 전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현재 펼쳐지고 있는 양국갈등이 흔히 국가들 간에 일시적으로 시작되었다가 끝나는 분쟁차원을 넘어서서 군사 대결만을 피할 뿐 그 밖의 모든 차원에서 양국이 승패를 다투기 때문이다. 지구 최강자들 간에 무역거래를 앞세운 격전이기 때문에 일반전쟁과는 달리 다른 나라들의 중립조차 허용치 않는 상황이다. 양대 강국과 거래하는 모든 국가들은 선택의 딜레마를 피할 수 없다. 또 양대 강국의 틈바구니에서 갈등의 직접 영향을 받는 약소국들은 상황에 따라 대리전쟁(Proxy War)에 휘말릴 수도 있다. 현재 미중갈등은 양자 간에 자기 입장을 정당화하는 심리전차원을 넘어서서 구체적인 조치, 예컨대 관세부과, 물류와 자원이용, 기술의 이전까지의 통제를 포함한 봉쇄와 배제라는 심각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

또 남중국해를 둘러싸고 전개되는 갈등도 본질적으로는 자원과 물류의 안전 확보라는 경제문제가 핵심이지만 이 해역에서 전개되는 미중갈등은 중국이 이 해역을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인공섬에 군사시설을 만들고 미국은 국제법상 중국영토가 아니라면서 항해 자유를 명분으로 해역침투를 강행한다.

한국은 미중 양대 강국의 틈바구니에 끼여 있다. 양국 중의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도 쉽지 않을 만큼 지정()학적으로 어려운 처지다. 한국은 미국과는 군사동맹 국가이며 중국과는 이른바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다. -이 관계의 정확한 의미는 중국만이 알뿐 한국인들은 잘 모른다. 이런 상황 하에서 한국의 선택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본고는 이하에서 왜 미국이 현시점에서 중국에 유례없이 강력한 제재를 가하고 이에 중국도 결사항전으로 맞대응하겠다고 나서는가를 총체적으로 개관하고 금후 한국의 진로를 검토코자 한다.

 

2. 미중간의 협력과 갈등

 

미국과 중국 간에 시작된 무역 갈등은 갈수록 확대되면서 양국 간의 패권전쟁으로 번지고 있다. 상호 협력적이던 양국관계가 이처럼 심각한 대립국면으로 치닫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집약한다면 미중 양국의 상대방에 대한 인식과 기대의 차이에 기인한다.

 

. 미국의 입장과 기대

우선 미국은 1960년대 후반부터 양성화되기 시작한 중소(中蘇)분쟁이 군사대결로 변해가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냉전시대의 대 중국 봉쇄정책(Containment)을 포용(Engagement)정책으로 전환했다. 미국은 중소대립상황에서 중국을 옹호, 소련이 동유럽에서처럼 중국을 침공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면서 중국을 지원하였다. 미국은 대만을 외교적으로 희생시키면서 중국을 포용했다. 특히 미국은 중국에서 등소평(鄧小平)이 등장, 개혁개방정책을 펼치면서 경제발전에 주력하는 모습을 보고 중국이 경제적으로 발전하면 할수록 경제개혁에 상응하는 정치개혁이 이루어지고 인권상황도 개선될 것을 기대했다. 미국은 이러한 기대에서 중국경제발전에 필요한 두 가지의 특혜를 제공했다. 하나는 2001년 중국이 자유무역체제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세계무역기구(WTO)가입의 길을 터주었다. 다른 하나는 개발도상국에 제공하는 최혜국(最惠國)대우를 중국에 허용, 대미무역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최근 미중 간에 관세전쟁이 불붙기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중국 수입 물자에 4%관세를 부과했고 중국은 미국상품에 10%관세를 매겼다. 미국의 이러한 정책적 배려에 힘입어 중국은 연 평균 10%를 상회하는 경제성장을 달성, 201071일자로 총량 GDP에서 일본을 앞지르고 G2의 고지에 올라섰다.

 

. 경제 분야에서의 갈등 시작

미국의 공화당은 민주당과는 달리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이전부터 중국의 발전이 필연적으로 미국의 패권에 도전할 것이라는 전망 하에 중국의 실상을 치밀하게 분석, 중국제압전략을 준비해왔다. 미국공화당의 주류인 미국보수연합(ACU)의 이론가 Peter Navarro2011년 출간된 자기 저서 중국에 의한 죽음'(‘Death by China: Confronting the Dragon A Global Call to Action)을 통해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 강경 노선을 뒷받침할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트럼프의 대선캠프에 뛰어들었다. 그는 트럼프 가 당선된 후 백악관에 신설된 국가무역위원회(NTC) 위원장을 맡았다가 현재는 백악관 무역 제조업 정책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책의 요지는 중국 공산당이 불공정무역과 비관세장벽을 앞세운 보호주의로 미국의 산업과 취업 기회를 약탈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연간 무역적자 8000억 달러 가운데 절반이 넘는 5040억 달러가 중국에 의해 발생한다."고 주장하는 근거도 이 책에 담겨있다. 그는 중국을 불법적인 수출 보조와 불합리한 수입 관세 부과, 환율 조작, 짝퉁 생산, 사이버공격을 통한 지식재산권 침해, 외국 기업에 대한 기술이전 강제, 대규모 환경오염 등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국가로 묘사한다. 그는 이러한 중국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불공정하게 취득한 재화로 만든 중국산 제품에 45% 수준의 높은 관세를 부과하고 '중국제조 2025' 프로젝트를 저지시키며 지식재산권 및 사업 기밀의 대중유출을 철저히 차단하고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할 것 등을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즉시 관세폭탄을 투척하고 정보통신 사업과 특히 G5사업에 대한 대중 압박 수위를 높이면서 ZTE, 화웨이(華爲) 등 중국의 첨단산업 발전에 강력한 제동을 걸어 Navarro의 조언을 충실히 이행한다. Navarro는 중국처럼 국가자본주의와 중상주의로 나가는 세력이 세계시장에서 판치는 한 자유무역주의는 살길이 없다고 설파한다.

트럼프는 이들의 주장을 근거로 중국이 자유무역제도의 제반규칙-중국의 WTO 가입조건-을 준수하는 내부개혁을 단행하지 않는 한 고율관세를 계속 퍼붓겠다고 밝혔다. 서유럽을 비롯하여 G20국가들이 트럼프의 조치를 묵인하는 것은 그들 역시 중국과의 거래에서 유사한 아픔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 정치 분야의 갈등

중국공산당 제19차 당대표자대회는 미국이 중국을 정치차원에서 위협으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시진핑 주석은 당 대회 연설에서 중국의 영광을 되찾자는 민족주의 구호로서 중국몽(中國夢)을 슬로건으로 내놨다. 그는 국가주석이 되면서 즉각 국민통합을 강조하면서 내치외교의 모든 분야에서 자기 1인 영도(領導)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경제, 외사, 인터넷통제 등 주요결정을 만들어 내는 영도소조 중 여섯 개의 주요소조의 조장을 시진핑 자신이 직접 맡으면서 친정에 나섰다.

또 중국경제가 일본을 앞선 현실에 비추어 중국인들의 생각도 새로운 상황에 맞도록 바뀌어야 한다면서 등소평(鄧小平)이 제시한 도광양회(韜光養晦)노선에 중국이 더 이상 묶여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왕후닝((王滬寧)등 시진핑의 책사들이 시진핑이 영도하는 새 체제의 명칭을 도광양회를 넘어선 신시대 중국특색적 사회주의로 바꾼 까닭이다. 이들은 나아가 시진핑이 중국몽을 실현할 수 있도록 공산당이 그의 지도력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면서 국가주석의 임기제한조항을 개헌을 통해 삭제했다. 미국이 기대했던 정치개혁이 아니라 중국정치를 모택동 시대로 역행시키는 것이었다. 동시에 시진핑은 대내통치에서 인터넷 통신망을 철저히 통제관리, 외국포탈(미국의 Google은 물론 한국의 Naver, Daum)의 진입을 차단하는가 하면 화웨이(華爲)를 통해 주민들에 대한 감시체제를 강화했다. 인민해방군예산보다 대내통치와 주민감시에 쓰이는 공안예산을 훨씬 증액했다. 경제가 발전될수록 인권과 자유가 신장되는 것이 아니라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처럼 감시와 억제가 심화되었다. 또 시진핑은 중국내의 고질병으로 부정부패척결을 강력히 추진하지만 공산당원들 모두의 환영을 받는 것은 아니다. 공산당원이 아닌 한 부정부패를 꿈꿀 수 없는 체제하에서 진행되는 반부패투쟁은 그것이 곧 정적(政敵)제거, 1인 독재강화를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신징위구르 지역에서 회교도 주민들을 강압적으로 집단수용, 시진핑 주석이 강행한 중국공산당의 세뇌교육은 소수민족들에 대한 심각한 인권침해로 지적되고 있다.

 

3. 미중 패권싸움의 시작

 

현재 미중의 싸움은 누가보아도 패권을 둘러싼 갈등이다. 미국은 패권싸움 아닌 공정무역을 향한 가치투쟁이라지만 그것은 명분이다.

 

가 중국의 선공(先攻)

누가 먼저 시작했느냐고 묻는다면 필자는 중국이 먼저 시작했다고 본다. 시진핑은 집권 후 최초의 미국방문에서 신형대국관계(新型大國關係)론을 제안했다. 미중양국이 서로 간에 다툼 없이 공동패자(共同覇者)가 되자는 것이다. 태평양은 넓기 때문에 미중양국이 대등한 권한과 책임을 갖자면서 패권을 미중양국이 공유하자는 것이었다. 미국이 수용할리 없다. 이 주장이 먹히지 않자 시진핑은 20171018일에 열린 19차 중국공산당 당 대회에서 중국의 당장(黨章)시진핑 신시대 중국특색적 사회주의로 개정하는 한편 당 대회 보고를 통해 이른바 양 백년발전계획구상과 중국제조2025을 선포한다.

양 백년 발전계획은 중국공산당창당 100(1921~2021)과 건국100(1949~2049)중 창당 100년이 되는 2020년에는 중국사회가 더 높은 단계의 샤오캉(小康)사회를 완성, 완벽한 복지사회를 이룩한다는 것이고 건국100년이 되는 2050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앞서가는 최강의 선진 국가를 완성한다고 하였다. 여기에 이르는 도정(道程)15년씩으로 나누어 2035년 까지 최고도로 완성된 샤오캉 사회를 이룩하면서 이 기간 중에 "중국제조 2025"의 과제로서 IT, AI, Robotics, Bio산업 등 10대 전략과제를 완성, 세계최강의 선진 국가건설의 토대를 다진다. 이어 2050년에는 지구 최강의 선진 복지국가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이런 도발적 구상발표는 곧 모든 면에서 미국을 제압하겠다는 포부의 피력이다. 이것이 곧 시진핑의 정치상표(政治商標)가 된 중국 몽이며 1832년 세계 제1GNP국가였던 중국의 위상을 되찾자는 것이다. 이런 꿈을 이루도록 공산당이 시진핑을 밀어주는 힘이 임기제한철폐와 당장개정이다.

 

. 미국의 대응조치

미국은 이를 좌시할 리 없다. 하버드 대학교수 Graham Allison은 그의 예정된 전쟁이라는 책에서 고대 희랍전사(戰史)를 인용, Thucydides의 함정을 이론화하고 미중관계가 패권대결로 치달을 것인데 핵시대인 오늘날 대결이 양성화되면 지구파멸의 위기가 오기 때문에 긴 눈으로 양자관계를 조망하면서 협력의 방도를 안출해내야 한다고 밝혔다.

미국은 2018104일 펜스 부통령의 미국 허드슨 연구소에서 행한 정책연설을 통해 누가 들어도 선전포고라고 할 만한 강도 높은 대 중국 비판연설을 했다. 연설 내용은 앞서 Navarro가 그의 저서에서 밝힌 중국공산당의 불공정 무역관행을 낱낱이 예거했고 여기에 중국내 소수민족의 인권문제를 지적하였다. 또 시진핑 정권의 외교상표의 하나로 된 11(Belt and Road Initiative: 약칭 BRI)를 빈곤한 약소국에 외자제공이라는 함정을 파놓고 거기에 빠진 국가들이 채무불이행시 모든 이권을 빼앗아 가는 나쁜 행동을 한다고 지적하였다. 동시에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으로 수출된 중국 상품에 대해 25%의 높은 관세를 부과하고 이를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의 관세폭탄은 보호무역주의를 지향해서가 아니라 중국의 불공정 무역태도를 바로 잡자는 것이며 이는 자유무역의 포기가 아니라 공정한 자유무역질서 확립에 필요불가결하다는 것이다. 중국이 자유무역주의 국제질서를 따르려면 외국투자자들이 보호받을 수 있도록 중국내부의 모든 제도를 개혁하고 체제내의 수많은 비과세 장벽을 제거하라고 요구했다. 미국처럼 시장을 완전히 개방하라는 것이다.

 

. 중국 측 대응

시진핑은 미국이 중국의 불공정 무역관행을 모두 개혁하라는 요구에 대해 2의 남경조약을 체결하자는 것이냐면서 강력히 반발하고 미국에 대해 전당(全黨)과 전군(全軍)이 나서서 결사 항전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무역관행이 거래당사자간의 합의에 의한 것인 만큼 이를 인정해야 하며 설사 기술을 강제로 이전시키거나 지적재산권을 둘러싼 쟁송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한국이나 일본도 1인당 GNP5000달러 미만이었을 때는 특허료나 기술료 등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은 선례가 많았다면서 유독 중국에 대해서만 강경한 조치를 취하는 것은 불공정하다고 주장한다. 또 중국이 외국원조에 메여 살기보다는 오늘날처럼 자생력을 길러 큰 발전을 이룬 것이야말로 IMF나 세계은행이 바라는 이상이 아니냐고 따진다.

 

4. 금후의 전망과 한국의 선택

 

지금 세계여론은 미국 우세를 점친다. 그러나 미국이 중국을 완전히 제압하기에는 중국의 실력이 예상외로 강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는 견해도 있다.

 

, 미국우세론

지금 미국은 역량 면에서 중국이 갖지 못한 두 가지 큰 강점을 가지고 있다. 식량과 에너지의 자급이다. 중국은 세계 석유에너지의 8분의 1을 수입에 의존해야 하지만 미국은 세일가스혁명으로 에너지를 자급하게 되었다. 여기에 미국은 우수한 대학과 기술수준, 젊은 인구(Demographic Index), 민주정치체제로서 자기 정화(淨化)능력이 강하며 아직도 군사력은 중국에 대해 압도적으로 위위를 점하고 있다. 미국은 이제 석유 개발 기구(OPEC)들을 의식 않고 세계정치를 주도할 수 있게 되었다.

 

, 중국우세론

영국의 사학자 Jaques Martin은 그가 쓴 중국이 세계를 지배할 때(When China Rules The World)' 를 발표한 데이어 이제 중국은 모방하는 나라가 아니라 창조하는 나라로 위상이 바뀌었으며 화웨이를 비롯한 첨단 산업분야에서 기술선도국가로서의 중국리더십은 미국을 앞서갈 뿐만 아니라 구매력가격(ppp)에서도 미국을 앞서갔기 때문에 미국은 중국을 이길 수 없다고 말한다. 또 중국학자로서 옌쉐퉁(閻學通)은 그가 쓴 “2023년의 중국에서 바야흐로 중국은 세계재패를 도모할 모든 능력을 이미 비축했기 때문에 미중패권싸움은 지구전(持久戰)으로 버티면 미국은 중국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 한국의 선택

한국은 모든 여건에서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안보는 미국에, 경제는 중국에 의존한다는 이른바 안미경중(安美經中)론은 타당성을 잃고 있다. 지금 한국에는 세계 최강의 미군 28,500명이 대한민국의 심장부에 주둔해 있다. 여기에 세계적 전략가의 한 사람인 해리 해리스(Harry Harrys)장군이 미국대사를 맡고 있다. 조선조 말기에 중국의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용산 병영에 3000명의 청나라 군대를 가지고 조선왕정을 쥐락펴락 하던 때와 지금 사정은 다르지만 외국군이 국가의 중심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메시지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 지금 중국은 우리와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라는 중국식 표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한국제일의 무역파트너로서 우리의 대 중국무역의존도는 26%에 이르기 때문에 중국에 등 돌리기도 쉽잖다. 그렇다고 한국이 미중양국에 양다리를 걸치는 헤징(hedging)전략을 택할 수도 없다.

결국 한국은 정부와 기업이 역할을 분담해야 하는데 정부로서는 한미동맹의 요구에 맞춰서 중국이 아닌 미국과의 협력에 중점을 두지 않을 수 없고 그러한 의지를 명시적으로 밝혀 미국의 오해를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기업들은 지난 20여 년간 중국기업들을 상대로 벌여온 거래실적을 감안할 때 기업들 간의 거래관행과 상도를 벗어난 선택을 해서는 안 될 것이며 미중관계의 변화를 내다보면서 교류와 협력의 규모를 점진적으로 줄여나가는 도리밖에 없다. 한국정부는 미국이 한국기업들의 입장을 이해하도록 대미교섭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현재처럼 중 무역 갈등상황 속에서 선택의 문제는 기업들 문제라면서 두 손 놓는 정부가 되어서는 안 도리 것이다.

아울러 우리는 중국의 내부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트럼프의 강공으로 시진핑의 권력유지의 핵심인 주민상대로 촘촘히 짜여진 감시 체계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1인 독재와 정치개혁외면에 대한 중국지식인들의 반발이 갈수록 높아지고 등소평의 도광양회 지지 파들의 움직임도 시진핑 정책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시진핑 주석 1인의 시한없는 독재 통치는 개혁개방시대라는 역사의 흐름에 역행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덧붙여 미국정부가 소련해체연구로 명성을 얻은 Kiron Skinner박사를 미 국무성 정책기획국장으로 임명한 것도 눈여겨 볼만하다.

또 지난 6월 하순에 홍콩에서 들고 일어난 범죄인 송환법제정반대 시위는 중국공산당이 내세운 일국양제(一國兩制)가 커다란 시련에 봉착하게 되었고 하나의 중국을 인정치 않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언동과 이에 부응하려는 타이완의 태도역시 시진핑의 중국 몽에 큰 부담을 줄 것이다.

 

미중 양국 간의 승부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지구 최강들 간의 협상은 진행과 중단을 거듭하지만 내외정세에 비추어 중국은 미국의 공정거래요구를 끝까지 거부하기는 힘들 것이다. 따라서 중국은 나름의 체면(面子)을 유지하는 선에서 미국이 요구하는 공정무역절차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양자관계를 매듭지으면서 내일의 승리를 기약할 것이다. 싱가포르의 리콴유 전 수상이 미국은 상황이 바뀌면 언젠가 아시아를 떠날 터이지만 한국과 일본은 그때에도 다시 만나야 할 상대가 중국이기 때문에 중국과의 관계는 항상 긴 호흡으로 풀어가야 한다는 견해에도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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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중국 간의 무역전쟁의 전망

이 영 일(한중정치외교포럼회장)

이글은 헌정지 2019년 1월호에 발표된 것이 초고이고 본고의 내용은 2019년 2월 14일 군산 모 공군기지에서 교양강좌로 행한 강의전문이다ㅣ.

목 차

1. 들어가기

2.중국이 먼저 시작한 도전

. 도광양회에서 유소작위로

. 신형대국관계 론을 주장

. 아시아에서 미국몰아내기 시도

. 중국 몽을 비전으로 제시

. 남중국해 전역을 해양영토로 선언하고 군사기지건설

3.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전략

. 브리튼 우즈(Bretton Woods)회의소집

. 새로운 자유무역체제의 탄생

. 미중관계의 개선

. 소련방의 해체

. 미중갈등의 시작

4. 현 단계 미국의 대 중국전략

. 기본배경

. 중국에 대한 미국의 강경대결선언

. 쉐일가스(Shale Gas) 혁명과 미국의 새로운 전략구상

. 미국은 더 이상 세계경찰이 아니다.

5. 양자관계의 전망

. 중국내부의 갈등요인

. 대외정책상의 문제

. 공산당의 자정능력소멸

. 한국학계의 일부견해

6. 한국의 선택

 

1. 들어가면서

 

바야흐로 미국과 중국 간에 무역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우리가 흔히 보아온 무역국가들 간에 일시적으로 일어났다가 곧 결말이 나는 경제 전쟁이 아니다. 이 전쟁은 외견상으로는 미국이 중국과의 무역거래에서 아주 큰 폭의 적자를 보고 있는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양국이 부딪치는 갈등의 저변에는 세계정치에서 미국이 누리는 패권(覇權,Hegemon)에 중국이 도전하기 때문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강하다.

그러면 패권을 놓고 미국과 중국이 무역전쟁을 일으키고 있다는데 무슨 전쟁을 패권전쟁이라고 부르는지부터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국제사회는 잘 아시다시피 정부가 없는 무정부상태이기 때문에 항상 강자가 약자를 누르는 약육강식이 지배해 왔다. 그러나 여러 국가 중에서 힘이 제일 강한 국가가 나서서 다른 국가들이 안전보장과 경제거래의 편의를 도모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규칙을 만들고 위반자를 다스려 국제질서를 유지해 나가는데 이 경우에 강한 국가를 패권국가라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새로운 세력이 부상하여 기존의 패권 국가를 누르고 새 패권국가가 등장하는데 역사적으로는 이러한 패권교체_세력교체가 16번 일어났고 이중 14번 전쟁을 통해서 패권이 교체되었고 오직 4번만이 전쟁 없이 패권을 신흥도전세력에게 물려주었다고 미국 하버드대학의 Graham Allison교수는 말하고 있다.

앨리슨 교수는 기존의 패권국들은 새로 부상하는 도전국가들이 자기의 지위를 넘보는 경향이 있음을 간파하고 거기에 대비하게 된다. 신흥 도전 국가들의 움직임을 보면서 기존 패권국들이 느끼는 위기의식은 반드시 양자 간에 갈등을 유발하는데 이를 투키디데스 함정(Thucidides Trap)이라고 한다. 투키디데스는 고대 희랍의 역사학자인데 당시 지중해 일대의 패권국인 마케도니아가 그리스의 새로운 부상에 위기를 느끼고 펠로폰네소스전쟁을 일으켜 그리스를 멸망시킨 고사를 인용하면서 투키디데스 함정이라는 말을 역사에 남겼다. 그는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전사했지만 그가 쓴 펠로폰네소스전쟁사에는 기존패권국가와 새로 부상되는 신흥국가간에 패권을 다툴 전쟁이 예상될 때 튀어나오는 용어로 투키디데스 함정이라는 국제정치학의 명언을 남겼다.

 

그래함 엘리슨은 지금의 미국과 중국관계도 겉으로는 무역 갈등으로 보이지만 본질은 세계정치의 패권을 겨루는 싸움이기 때문에 단순 무역경쟁이 아니고 투키디데스함정에 빠지는 패권경쟁으로 보아야한다고 말한다. 앞으로 미중 양국 간 경쟁이나 갈등은 어느 일방이 타방에 무릎을 꿇을 때까지 장기에 걸쳐(30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음) 지속될 것이라는 점에서 승패를 겨루는 심각한 전쟁 그 자체로 보는 것이다.

 

핵 보유 강대국 간에는 서로 확증파괴력(MAD)이 있음을 전제하기 때문에 군사적인 요소가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군사전쟁의 형태는 취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군사외적 방법으로 상대방의 패권도전의사가 완전히 꺾기거나 무력화될 때까지 경쟁과 대결이 이어지고 여기에는 무역, 시장, 식량, 에너지, 원자재, 기술력 등에 대한 접근 차단이나 방해는 물론이거니와 정치외교 및 동맹결속까지를 포함하는 다방면에 걸치는 대결이 양성화된다.

 

이러한 상황이 나타날 경우 한국처럼 지정학적으로 미중 양국의 영향권에 속하면서 동시에 양국에 대한 무역의존도가 높은 나라는 갈등의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선택해야할 상황에 봉착할 수도 있고 선택이 잘못될 경우 국가존립의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우리로서는 어느 경우에나 고래싸움에 새우 등터지는 상황을 피하기 힘들다. 오직 누가 승자가 될 것인가를 면밀히 타산, 승자 쪽을 택하는 지혜가 요구되는 상황이다.

이하에서 우리의 선택과 진로를 모색할 상황들을 총체적으로 분석해보기로 한다.

 

2. 그러면 누가 먼저 이 전쟁을 시작했는가. 중국이 먼저 시작했다.

 

. 도광양회(韜光養晦)에서 유소작위(有所作爲)

중국은 1820년까지 만해도 세계GDP33%를 차지하는 강대국으로서 경제력에서는 G2아닌 G1이었다. 그러나 아편전쟁에서 패한 후(1842)부터 내리막길을 걸어 중국에서는 해군력이 와해되고 공산당이 집권한 모택동(毛澤東)시절에도 죽()의 장막에 갇혀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된 가운데 총량 GDP는 세계 GDP2%수준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모택동 사후 등소평(鄧小平)이 집권한 후 13년 동안(1976~1989)개혁개방에 총력을 기울이고 당의 역할과 정부의 역할을 구별하면서 정부주도로 경제개발에 주력한 결과 중국경제수준은 세계 GDP15%까지 올라섰다.

 

등소평은 이때 자본축적이 부족하고 기술력도 떨어지는 중국이 국제사회의 견제를 피하면서 튼실한 국력을 배양하려면 발톱을 숨기고 힘을 기르는데 주력해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양 백년 즉 중국공산당의 창당100(1921~2021)과 중국의 건국 100(1949-2049)이 끝나는 시점을 넘어 경제발전이 더 높은 단계에 오르기까지는 힘을 기르는데 만 충실해야 한다는 이른바 도광양회 노선을 따르도록 후대에게 유지를 남겼다. 등소평의 뒤를 이은 장쩌민(江澤民)과 후진타오(胡錦燾)는 도광양회의 기조는 유지하면서도 중국의 국력이 커지면서 그 정도에 맞게 국제문제에 중국의 목소리를 내자는 입장을 비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진핑(習近平)주석이 등장하면서부터 중국의 대외정책노선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변했다. 이렇게 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로 세계경제에 대한 미국의 지도력이 흔들리고 서구열강이 하나같이 경제적으로 휘청거리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 맞추어 중국은 2010730일을 기점으로 세계 GDP 총량에서 에서 일본을 재끼고 G2의 지위에 올랐다. 또 이와 때를 같이하여 서구 선진국들은 경제위기를 극복하기위해 노력하기보다는 포퓰리즘에 약한 민주주의를 이용하여 포퓰리즘으로 정권을 잡겠다는 세력들이 등장하여 민주정치의 위기가 심화되었다. 이때 중국은 베이징 컨센서스가 워싱턴 컨센서스보다 보다 유효한 체제라는데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중국은 자기들이 총량 GDP가 일본을 앞지르고 미국의 총량 GDP의 절반 수준까지 따라잡자 상황을 판단하는 중국 시진핑 주석의 전략 참모들은 우리가 변화된 정세에 맞게 생각하는 방식만 바꾸면 중국도 조만간 미국을 추월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 신형 대국 관계론의 주창

 

중국의 리더십이 후진타오로부터 시진핑으로 바뀌면서 중국외교사상에서 가장 주목되는 변화는 신형대국관계 론을 들고 나온 것이다. 중국도 미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세계문제에 대해 중국 나름의 발언권을 행사하면서 자국의 핵심이익을 챙기겠다는 것이다. 시진핑은 중국의 경제력이 커지고 실력이 향상되면 상황을 보는 생각도 변해야 한다면서 중국외교는 이제 더 이상 도광양회에 머물러서는 안되고 미국과 대등한 지위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시진핑은 오바마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미중 양국이 군사적으로 충돌을 피하려면 중국을 미국이 자국과 맞장을 트는 대국으로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이를 수용할리 없었다. 중국이 경제력에 알맞게 책임 있는 강국으로서 국제사회에서 책임과 역할을 다하는 것은 환영하지만 미국주도의 세계질서를 중국과 대등한 자격에서 논하자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거부했다.

 

. 아시아에서 미국몰아내기 시도

 

시진핑 주석은 2014520일 중국 샹하이에서 열린 제6차 아시아교류 및 신뢰구축회의(CICA-(Conference on Interaction an Confidence builing in Asia))에서 아시아 역내 국가들을 운명공동체라고 정의하면서 집단안보론을 주창, 아시아의 안보는 아시아인들이 주축이 되어 해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아시아 집단안보구상에서 미국을 배제했다. 한마디로 아시아 대륙에서 미국을 몰아내자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영국의 The Economist지는 중국의 GDP가 조만간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예측했는가하면 미국의 금융회사들도 The Economist보다는 시기는 뒤로 잡았지만 2025년부터(JP.Morgan) 27(Goldman Sachs)사이에 중국이 미국을 추월할 것으로 예측했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을 얻어 중국공산당 18차 당대회 예비회담에서는 미국인구는 중국에 한참 뒤지며 자원은 피차 비슷하기 때문에 앞으로 중국이 미국을 따라잡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역설하기도 했다.

 

. 중국 몽을 비전으로 제시

 

시진핑 주석은 그가 공산당 주석에 취임하면서 위대한 중국의 부흥을 강조하면서 자기의 비전으로 중국몽(中國夢)을 내세웠다. 아편전쟁패전이래 중국인민들이 겪었던 수모를 넘어서서 세계의 강자의 자리를 되찾겠다는 민족주의 깃발을 들고 나온 것이다. 세계질서를 주도하는 미국에 대한 공공연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제18차 공산당 대회까지 에서의 중국의 대미도전은 말로 하는 도전이었다. 그러나 19차 당 대회에서 시진핑은 중국몽을 실현할 구체적인 방도를 시기별로 제시하면서 등소평이 말했던 양 백년의 중간단계인 2035년경이면 중국이 선진화를 완료한다고 선언했다. 특히 중국은 중국몽 실현의 수단으로 2025년까지 제조업분야, 특히 IT, 우주항공, 로봇, 바이오 의약 같은 첨단 분야에서 세계를 제패,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함으로써 미국을 앞서겠다고 말했다. 동시에 대양해군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첨단 항공모함 12척을 가진 미국에 맞서 중국도 세척이상의 항공모함을 만들어 해양 전력에서도 미국에 맞서겠다는 담대한 포부를 밝혔다. 그러나 중국공산당 지도자가 자국의 목표를 수치로, 시간으로 외부에 공표한 것은 공산당의 전략에서 볼 때 지금까지 없었던 일인데 시진핑은 과감히 밝히고 나섰다.

 

. 남중국해 전역을 해양영토로 선언하고 군사기지건설

 

시진핑 주석은 중국본토에서 1000여마일 이상 떨어진 필리핀 북쪽부터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의 영역으로 펼쳐진 남중국해의 넓은 해역을 제1 구단선(九段線)에 속하는 중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해수에 잠긴 산호초들을 인공으로 개발, 군사기지를 설치하였다. 이에 대해 필리핀은 헤이그 국제상설재판소에 제소, 중국의 주장이 국제법상 근거가 없다는 판결을 받아냈다. 그러나 중국은 국제상설재판소의 판결에 무시하고 남중국해의 9단선내의 해역을 모두 자국의 핵심이익이 걸린 영토라면서 만패불청의 자세로 수호의지를 과시하고 있다. 석유에너지를 중동에서 수입해야 하는 중국으로서는 말라카 해협이 포함된 남중국해가 자기네들의 에너지확보를 위해 꼭 확보해야 할 해역이기 때문에 이 지역에 관련된 역사속의 우화(寓話)를 끌어내어 연고를 내세우면서 억지로 둘러대서라도 자기들의 고유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항해자유의 원칙을 앞세우면서 중국의 영토주장을 무시하고 해상작전을 펼치는가하면 중국의 주장을 반대하는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을 강력히 옹호하고 있다. 미국 항공모함은 베트남의 캄란만에 정박할 권한을 얻었다.

 

3.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전략

 

.브레튼 우즈(Bretton Woods)회의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영국과의 패권갈등 없이 영국이 누리던 패권을 자연스럽게 승계했다. 2차 세계 대전은 미국을 제외하고는 전승국이나 전패국 할 것 없이 모두 폐허로 변했다. 소련이외의 연합국들은 전쟁에서 이겼을 뿐 전 국토와 군사력은 철저히 망가졌다. 더욱이 해군의 함대는 거의 멸종상태였다. 육군부대를 가지고 있는 내륙국가 소련도 해군병력은 사실상 존재치 않았다.

이런 상황 하에서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이후의 세계질서를 모색하기위해 독일항복을 1여년을 앞둔 시점에서 미국의 뉴햄프셔 주의 브레튼우즈에서 국제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는 미국과 동맹한 44개연합국과 이들의 식민지에서 온 730명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미국의 제안으로 3년간 이 회의를 준비해온 미국의 해리 덱스터 화이트(Harry Dexter White)와 존 메이나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3주에 걸쳐 회의를 주도한 끝에 세계은행(WB), 국제통화기금(IMF), 국제개발부흥은행(IBRD)의 설립에 합의했다.

 

. 새로운 자유무역 경제체제의 탄생

 

이 당시까지 만해도 세계는 경제문제에서는 약육강식의 무정부 상태였고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제국주의 경제 질서였는데 이 회의에서 미국은 전후세계의 부흥문제를 놓고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이 상상할 수 없는 새로운 구상을 발표하면서 참가국대표들의 동의를 구했다. 첫째 전승국으로서 미국은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영토나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할 욕심이 없으며 세계 모든 국가들에게 미국의 시장을 차별 없이 개방한다. 둘째로 미국은 자국의 해군력을 통해서 다른 나라들이 해군력 없이도 전후복구와 재건에 필요한 원자재를 확보하고 원자재에 접근하고 물자를 수송할 안전을 보장해주겠다고 선언했다. 셋째로 미국은 기축통화로서 달러를 유지하면서 세계경찰로서의 군사력을 가지고 국제무역질서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의 이 제안을 모든 참가국들이 받아들임으로써 흔히 말하는 자유무역질서의 대명사가 된 브레튼우즈 체제가 탄생하였다. 미국이 세계정치의 패자로서 세계의 경찰이 되어 수송의 안전을 보장해주고 시장을 개방해준다는 것은 실로 기쁜 소식이었다. 미국의 브레튼우즈 체제로 말미암아 세계 각국은 미국의 협력을 얻으면서 군사력에 투자할 부담을 덜고 전후복구를 진행시킬 수 있었다. 또 군사력에 의해 지탱되던 전승국들이나 전패국들의 식민지들도 식민모국의 힘이 약화됨과 동시에 거의 모두 식민지 굴레를 벗고 해방독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에 맞서 세계재패를 꿈꾸는 소련과 소련의 지원으로 내전에 승리, 중국본토를 장악한 모택동의 중국은 브레튼 우즈체제에 참가하기를 거부했다. 이 결과 전후세계는 소련, 중국과 동구라파제국을 일방으로 하고 미국을 맹주로 하는 자유세계 간에 철의 장막이 펼쳐진 가운데 모든 협력과 교류가 단절되는 냉전적 대치의 시대가 출현했다.

 

. 미중관계의 개선

 

소련에서 스탈린이 사망한 후 중국과 소련 간에는 겉으로는 이념논쟁이라고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공산세계의 리더십을 둘러싸고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소련은 중국을 자국의 위성국가로 만들려고 하지만 중국은 이를 거부했다. 소련의 위성국가들이 소련으로 부터 당하는 주권행사의 제한 즉 제한주권론을 중국은 결코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양자관계는 1968년 전쟁 일보 즉전까지 사태가 악화되었다. 미국은 소련의 군사적 위협에 몰리는 중국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 1972년 키신저를 앞세우고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 모택동과 정상회담을 가짐으로써 양국관계는 신속히 개선의 길로 들어섰다.

모택동 사망 후 등소평이 등장하면서 미중 양국 간에는 교류와 협력이 확대되고 중국은 경제발전의 정상궤도에 진입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브레튼 우즈 체제의 정신에 걸맞게 미국시장을 중국에 폭넓게 개방하고 2001년에는 세계무역기구(WTO)의 회원국으로 중국을 받아들임으로써 중국이 G2수준으로 발전할 여건을 제공하였다. 이때 미국지도자들은 중국을 견제가 아닌 지원을 통해 경제발전을 이루게 해준다면 중국도 체질이 변화하여 미국주도의 자유무역체제의 규칙을 지키면서 정치민주화의 길을 내딛게 될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를 가졌던 것이다.

 

. 소련방의 해체.

 

한편 소련은 미국과 중국관계가 개선되면서 중국에 대한 군사적 압박 대신에 자국이 생산하는 석유를 밑 자본으로 하여 석유수입국인 미국을 상대로 신예무기개발에 역점을 두는 군비경쟁에 나섰다. 미국보다 한 때 앞서 나갔던 우주과학 분야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대륙 간 탄도미사일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유럽을 압박할 중거리 미사일(INF)까지 개발했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도 소련을 능가하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강도 높은 무기경쟁을 벌이면서 사우디아라비아를 포용, 석유 값 인하에 주력함으로써 소련의 석유무기화를 막았다. 우선 키신저가 사우디아라비아와 협력, 미국의 달러화를 석유대금 결제수단으로 합의함으로써 기축통화로서의 달러화의 위상을 높이는 한편 석유생산량을 크게 늘리게 하여 석유 값의 국제시세를 대폭으로 떨어뜨렸다. 석유 판매수익으로 국가재정을 충당하던 소련의 수익은 급락했다. 이러한 상황이 길어지자 미소간의 전개된 군비경쟁에서 소련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다가 결국 1991년 볼세비키 혁명 74년 만에 소련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은 해체되고 말았다. 소련이 해체됨으로 해서 미국과 중국을 서로 협력하게 했던 공동의 적은 사라졌다. 결국 세계정치상황은 미국이 제압하려고 했던 소련의 위치에 중국이 올라서는 형국으로 변하게 되었다.

 

. 미중갈등의 시작

 

미국이 자유무역국가의 대열에 참여시켜 줌으로써 경제발전에 크게 성공한 중국은 미국이 기대했던 만큼 정치가 민주화되지도 않았고 자유무역질서의 규칙에도 따르지 않았다. 중국은 G2의 반열에 오르면서 미국이 이끌어왔던 국제질서의 수정을 요구했고 스스로 국제질서의 규칙을 자기 필요에 맞게 고치겠다고 주장했다. 또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미국과 대등한 지위를 갖겠다면서 양국관계를 신형대국관계로 고치자고 요구했다. 오늘날 미중대결의 본질은 한마디로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4. 현 단계 미국의 대중국전략

 

. 기본배경

 

미국의 국제정치전문가들은 유럽에서는 러시아, 중동에서는 이란, 아시아에서는 중국을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수정주의 세력이라고 정의하고 미국의 대외정책의 중점은 이들이 미국에 맞서지 못하도록 선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현시점에서는 러시아나 이란보다는 중국이 앞으로 미국과 패권을 겨루려는 실질세력으로 간주하고 대 중국견제를 미국대외정책의 핵심과제로 정하고 있다. 현재 미국에서 중국 측 로비스트로 활동 중인 것으로 알려진 Kissinger는 그의 유명한 저서 중국이야기(On China)세계질서(World Order)에서 미중관계가 대서양동맹(Trans-Atlantic Alliance)처럼 앞으로는 미중양국이 태평양을 공유하는 협력질서를 확립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이나 존 미어샤이머(John Mearsheimer)는 키신저와는 달리 G2로 성장한 중국이 미국의 패권에 도전해오기 때문에 미중간의 전쟁은 불가피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2018년 여름 한국을 방문한 그래함 엘리슨(Graham Allison)도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와 스파르타 관계에 적용된 투키디데스 함정(Thucydides Trap)이론을 들고 나와 도전세력으로서의 중국과 방어세력으로서의 미국 간에 충돌은 불가피하지만 가능한 한 양국은 상호간에 이해를 더욱 증진하고 신뢰를 회복, 충돌을 피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이러한 학계의 예견과 더불어 201712월 트럼프가 발표한 미국의 국가안보전략(National Security Strategy)은 중국을 미국에 대한 경쟁자, 미국주도의 세계질서에 대한 수정주의 세력으로 규정했다. 미국의 국가안보전략에서 중국을 이렇게 규정하기는 미중관계 40년의 역사상 처음이었다. 결국 냉전시기에 소련을 규정했던 미국의 전략논리가 이제는 그 목표(Target)를 중국으로 삼겠다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 중국에 대한 미국의 강경대결선언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국가안보전략보고서가 발표된 다음해인 2018104일 마이크 펜스(Michael Richard pence)부통령은 미국의 허드슨 연구소에서 행한 연설에서 미국이 중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있다고 평가할 정도로 강도 높게 중국의 내정과 외교를 비판했다. 중국은 해킹으로 미국의 첨단기술을 불법으로 탈취하고 중국에 투자하는 미국기업들에게 시장제공의 대가로 기술이전과 지적재산권을 강탈하는가 하면 국가가 보조하는 국영기업을 무역경쟁에 앞세우는 등 불공정 무역을 통해 이익을 취하는 국가라고 규정했다. 또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는 조건으로 제시된 국제사회의 모든 요구를 하나도 준수하지 않으면서 자유무역의 혜택만 누려왔다고 비판했다. 또 약소국에 인프라를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국영기업들을 내세워 차관을 제공하고 차관의 상환이 불가능해질 때 약소국의 내정에 개입, 이권을 빼앗으려는 함정을 파는 것이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라고 규탄했다. 또 신장 위구르 지역과 티베트에서 자행되는 인권유린을 구체적으로 비판하면서 국내정치에서도 인터넷 통제를 갈수록 강화, 언론자유를 철저히 차단하는 독재국가라고 규탄했다. 양국 간에는 새로운 냉전이 시작된 것이다.

현재 트럼프는 자기만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만든 것처럼 미국역사상 최초로 중국을 전략적으로 견제하기에 앞장선 대통령으로 인정받겠다는 태세다. 지금 트럼프 대통령의 대중정책에 관한 한 미국의 정계는 물론이거니와 학계, 언론계에서도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결국 미국의 입장에서는 이 시기에 중국에 대한 전략적 견제를 늦춘다면 결국 중국에 밀릴 수도 있다는 절박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현재 미국여론은 중국의 성장이나 영향력확대가 더 이상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지도력을 넘볼 수 없도록 견제하자는데 완전한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 쉐일(Shale)가스혁명과 미국의 새로운 전략구상

 

미국은 트럼프 집권을 전후한 시기에 오래 동안 중동의 석유에 의존하던 에너지 굴레와 부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2019년부터 미국은 석유와 천연가스 생산에서 세계 1위가 되었으며 에너지 수출국 1위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쉐일 가스 개발기술이 향상되어 국제경쟁력을 갖는 석유와 가스를 개발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자국의 석유안보 즉 에너지 안보를 위해 중동해역에 함대를 파견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간 소련의 천연가스에 의존 했던 유럽 국가들도 미국으로부터 더 싸고 안전하게 천연가스를 공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일본과 한국도 중동이 아닌 미국으로부터 석유와 가스를 직수입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세계유가를 오르고 내리게 하는데 미국의 영향력은 훨씬 커졌다. 지금의 미국은 금융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나 여전히 세계 GDP4분의 1을 장악하고 있으며 앞으로 200년 이상 에너지 걱정 없는 나라가 되었다.

 

. 미국은 더 이상 세계경찰이 아니다.

이런 에너지 혁명과 때를 같이하여 미국은 더 이상 세계경찰로서의 역할을 축소해나가면서 미국의 안보지원을 받는 국가들에 대해서는 자국의 경제력에 상응하는 부담을 미국과 공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의 일방적인 지원에 의존하는 안보를 안보무임승차라고 비판하면서 동맹이나 우방들과의 부담공유를 세계전략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간 미국은 세계경찰로서의 위상을 지키기 위하여 지구의 도처에서 일러나는 분쟁에 직접 개입했다가 재정적자와 일반 예산적자라는 쌍둥이 적자가 해년마다 늘어나 온 국민들이 해외 개입에 피로감을 나타낸 지 오래되었다. 미국 국민여론이 이렇게 변해감에 따라 미국의 세계 경찰로서의 역할을 축소하겠다는 정책은 트럼프 아닌 오바마 행정부 때부터 나왔다. 앞으로 이 정책은 트럼프 대통령이 설사 재선에 실패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달라질 가능성은 적다.

2차 세계대전이후 유럽의 EUNATO 제국은 전후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경제적으로 발전했고 일본이나 한국도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을 제압할 만큼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룩했다. 따라서 미국은 더 이상 적자에 시달리지 않고 미국자신의 이익, 즉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주장이 여론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다.

또 미국과 협력을 원하는 국가와는 협력하지만 미국을 제압하겠다는 중국의 편을 드는 국가들에 대해서는 협력을 거부하겠다는 것이다. 또 트럼프는 2019년 연두교서에서 중국 측에 타국의 원천기술의 강탈이나 지적재산권의 해킹 같은 반칙적인 경제발전방식까지를 포함한 경제운용구조의 총체적인 개혁을 강도높이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시진핑이 중국 몽에 집착하고 이를 관철하기위해 중국제조 2025를 계속 추구하는 한 미중간의 무역 전쟁이 쉽사리 끝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시진핑도 자기의 비전이나 비전달성을 위해 짜놓은 구조를 변경하거나 포기할 가능성이 현재로서는 전무하기 때문에 미중대결은 당분간 불가피할 추세다.

5. 양자관계의 전망

 

지금 중국의 시진핑은 미국에 대해 결사항전의 의지를 밝히면서 군에 대해서는 전쟁준비를 명령해 놓고 경제에서도 미국의 관세공세에 맞대응하겠다는 결의를 보이고 있다. 특히 미중무역 갈등에서 중국이 얻는 대미흑자는 미국인들의 소비성향이 큰데 원인이 있을 뿐 중국 측에는 하등의 귀책사유가 없다고 한다. 중국의 이러한 도발적 대응에 미국이 물러선다면 미국은 스스로 패권적 지위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미국이 중국의 도전을 수정주의로 규정하고 펜스 부통령의 정책연설을 통해 강력히 대처할 것을 밝힌 것은 중국의 도전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재 시진핑의 결사항전주장에 대해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들의 상당수는 시진핑을 지지하면서 대결노선에 격려와 응원을 보낸다. 중국의 한 군 장성은 미사일로 미국항공모함 2척을 파괴, 만 명의 미군장병을 죽여서 미국을 겁주자는 이야기가 언론에 보도도기도 했다.

. 내부의 갈등 요인

중국공산당내부의 모든 세력들이 시진핑의 주장이나 입장에 공감, 지지할 것으로만 기대할 수는 없다. 대내외적으로 상당한 우려가 지적되고 있다.

첫째 우려는 우선 이론적으로 시진핑이 도광양회라는 등소평 노선을 너무 서둘러 폐기함으로써 미국의 반발을 자초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등소평은 공산당 창건 100주년(1921~2021)과 중국건국 100(1949~2049)이라는 양 백년이 끝나는 시점까지 사회주의 초기단계(자본축적단계)를 끌고 나가야 중국의 안정적 발전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중국경제가 G2로 성장함과 때를 같이하여 시진핑은 신시대이론을 내세워 등소평 노선을 이탈한 결과 오늘과 같은 미국공세를 불렀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파리나 호랑이도 모두 때려잡는다는 반부패투쟁이 인민들에게는 박수를 받지만 공산당원이 아니고는 누구도 부패를 할 수 없는 중국의 당 국가체제(黨國家體制)하에서는 반부패투쟁이 정적(政敵)제거의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비판이 당내에서 일고 있다.

 

셋째로는 시진핑이 중국공산당을 마르크스주의에 가장 충직한 정당임을 강조함으로써(19차당대회 결의사항) 중국의 민주개혁을 기대하던 서방측을 낙담시켰고 중국내부에서도 당내 수직적 민주주의를 통한 체제의 자정(自淨)능력을 약화시키고 있다는 비난이 세를 얻고 있다.

 

넷째로 강도 높은 방화벽(Great Fire-Wall)을 통한 인터넷이나 매스컴의 단속통제가 민주화개혁에 근본적으로 역행한다는 비판이 대내외적으로 연일 쏟아져 나온다.

 

다섯째로 가장 많이 지적되는 것은 시진핑 체제하에서 갈수록 부실화해가는 국영기업이 몰고 올 금융파탄의 위험성이다. 중국의 큰 은행들은 국영기업이나 지방자치단체에 사업의 효율성을 묻지 않고 당 방침에 따라 무조건 융자하기 때문에 대출회수전망이 없는 금융부실화가 해가 갈수록 누적된다는 것이다.

 

. 대외정책상의 문제

 

또 외교 면에서도 우려가 튀어나오고 있다. 일대일로(一帶一路)사업의 경우 치밀한 준비 없이 국영기업들이 나서서 약소국에 차관을 제공한 후 중국의 인력과 기술로 해당사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현지인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보잘 것 없고 또 차관상환이 어려워지면 약소국가들의 내정에 간섭, 이권을 챙기기 때문에 펜스부통령이 지적한 것처럼 중국이 차관함정(借款陷穽)을 판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여기에 부가해서 중국외교의 오랜 흐름인 원교근공(遠交近攻) 때문에 주변 국가들은 중국이 말하는 아시아 운명공동체 론에 동조하지 않을 뿐 아니라 중국과의 협력을 외면하려든다.

 

또 시진핑이 펼치는 남중국해역에 인공섬을 만들어 군사기지를 만드는 조치도 21세기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시대착오적 행보라면서 지금은 통신 무기체계의 발달로 해외기지무용론이 일반화 되었고 기지(基地)보다는 가치 확산에 기반을 둔 동맹확보를 중시한다고 말하면서 시진핑이 말하는 중국몽(中國夢)도 결국은 19세기형 강대국 모형에 사로잡혀 정치에 경제를 예속시키는 전시대적 근대국가 패러다임을 모방하는데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을 가한다.

이와 같은 내치외교에 대한 비판 때문에 지금 시진핑의 중국은 미국의 공세라는 외환(外患)으로 말미암아 내우(內憂)를 초래할 리스크에 걸려있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 공산당의 자정(自淨)능력 소멸

 

특히 시진핑 체제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공산당의 대내외정책에서 나타나는 이상과 같은 오류나 실책을 스스로 정화(淨化)하거나 시정(是正)할 능력이 시진핑 체제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시진핑이 중국몽이라는 큰 꿈을 실현한다는 명분으로 시진핑 주석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도록 당이 그에게 힘을 실어줄 것을 요청, 중국공산당은 제 19차 당 대회의 결의로 중국 국가주석의 임기제한조항을 헌법에서 폐지했다. 이 결과 5년에 한번 씩 중국 베이다이허(北戴河)에서 8500만 당원 중에서 엄선된 150여명의 당 최고전략가들이 모여 무제한 토론을 통해 당 주석을 선출하고 오도된 정책을 바로잡던 당의 자정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수직적 민주주의가 후퇴한 결과 시진핑 1인 독재만 강화되고 정치개혁은 실종되었다는 것이다.

6

. 한국학계의 일부견해

 

그러나 한국의 중국연구가들 가운데는 트럼프 방식으로는 시진핑을 이길 수 없는 여섯 가지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중국은 미국에 거래로 접근할 것이다. 거래의 미끼로서 트럼프가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미국 제품을 많이 수입해준다. 트럼프는 좋아라하고 중국에 대한 압박을 푼다. 트럼프에게는 '이번에야 말로 중국 성장의 싹을 잘라버리겠다'는 단호한 전략적 결기가 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시장(市場)'은 중국의 '()'을 능가하지 못할 것이다. 시진핑의 중국은 위기가 닥치면 당이 국가의 전면에 나서서 자원을 전략적으로 재배치하고, 동원한다. 8000만 엘리트로 구성된 당 권력은 선전을 통해 민의를 모으고, 일사분란하게 외부공세에 대응한다. 시장의 눈치를 봐가며 선거를 치러야 하는 트럼프의 미국이 결코 당할 수 없을 것이다. 시진핑은 지구전(持久戰)을 준비하고 있다. (미국의 Lincicomb).

중국은 미국이 지금까지 꺾는데 성공했던 소련이 아니고, 일본도 아니다. 트럼프는 동맹을 끌어들여 중국을 봉쇄하고, 중국 기업을 국제 분업체계에서 몰아내려 한다. 소련과 일본에 했던 그대로다. 그러나 소련과는 달리 중국은 미국 경제와 너무 깊숙하게 연결되어 있다.

일본은 미국에 안보를 의존했지만, 중국은 안보적으로 미국과 별개다. 일본이야 '미국을 자칫 잘못 건드리면 경제가 파멸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혔지만, 중국에는 봉쇄와 압박이 통하지 않는다.

미국도 중국과의 무역대결이 지속될 경우 미국경제가 입는 손실도 크기 때문에 그 수준은 미국경제가 감당할 정도를 넘기 어려울 것이다.

또 미국이 중국을 아무리 견제하려고 해도 중국은 이미 기술 조작, 개발 등에서 굴기에 진입했기 때문에 이미 막을 수 없는 상황이 아니다. (옌쉐퉁(閻學通) 교수 주장)

따라서 내우(內憂)가 심각히 확산되지 않는 한 미국이 대결에서 궁극적인 승자가 될지는 미지수라고 말한다.

6. 한국의 선택

 

미국은 새해 국방예산을 6860억 달러로 책정, 작년대비 13%를 증액시키고 있다. 이 규모는 군사력 제2위에서 9위까지를 포함하는 국가들의 군사예산을 합친 총액을 상회한다. 트럼프의 대중 공세는 레이건 대통령이 마치 소련을 상대로 벌이는 군비경쟁(Star War)을 연상시킨다. 미국은 대양해군건설과 중장거리 미사일 배치에 힘을 쏟고 있는 중국을 제압하는데 모자람이 없을 만큼 강도 높게 군비를 증강한다. 군사력, 기술력, 외교력, 소프트 파워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중국견제를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중국은 세계석유의 8분의 1을 소비하고 미국은 3분의 2를 소비하는데 미국은 이제 자급단계를 넘어서서 수출단계에 진입했다.

 

시진핑은 트럼프의 일방주의가 갖는 약점을 이용, EU와 미국의 이간, 일본과 미국의 간극확대 등을 획책하지만 21세기에도 마르크스주의 노선에 가장 충직하겠다는 시진핑의 중국에 선뜻 동조할 유럽 국가들은 거의 없다. 유럽은 사상사적으로 마르크시즘을 극복한지 오래고 또 중국이 지금까지 서방측 기업들에게 강탈적으로 요구해온 기술이전이나 지식재산권탈취에 관한 적대적 태도에서는 미국과 다를 바 없다. 중국은 미국의 관세공세이외에도 경제건설에 필요한 자원, 시장, 에너지의 확보에 미국의 견제정책때문에 갈수록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시진핑은 최근 신형대국관계라는 말도 신형국제관계로 표현을 바꾸고 주변국들에 대해서도 포용적 자세를 취하지만 우리 국민들은 사드(THAAD)파동을 겪으면서 중국의 민낯을 본 후부터는 그동안 역사 속에서 당해온 중국의 갑 질을 되새기면서 중국에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 있다. 현시점에서 시진핑의 대미도전은 중국이 소성(小成)에 도취, 미국이 지닌 엄청난 강점을 과소평가한데 기인한다는 견해가 우세하다.

 

이러한 여건을 종합적으로 검토할 때 한국정부가 외교적 문맹(文盲)이 아니라면 우리는 당연히 통상 면에서 미국으로부터 불리(不利)를 당하지 않도록 실리를 챙기는 한편 한국 땅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안보우방을 가장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다. 해외주둔 미군기지 중에서 가장 큰 평택기지를 가진 우리로서는 선택의 폭이나 여지가 별로 없다. 지금 우리는 미국의 군사동맹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은 지정학적인 근접국가로서 우리와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를 맺고 있다. 미중 양국과 불편한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는 가장 바람지하지만 국제정치에서 등거리 외교는 쉽지 않다. 특히 우리는 경제적으로는 미국과 1500억 달러 규모의 무역을 하는데 비해 중국과는 3000억 달러 규모의 무역거래를 하고 있는 점에서 안보와 경제를 동시에 살릴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이러한 숙제를 풀어내는 것이 앞으로의 국가적 과제일 것이다.

그러나 미중관계는 빨리 결론이 나지 않고 시간을 끌면서 휴전과 갈등을 되풀이하는 지루한 과정이 연출될 것이다. 우리는 한 치의 방심도 없이 고래싸움에 등터지는 일이 없도록 국민적 단합과 지혜의 발양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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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심리전 공세에 휘둘리지 말자

 이 영 일 (한중정치외교포럼 회장) 

 1. 시진핑 시대와 한중관계 
 2013년 시진핑이 중국의 국가주석에 취임하면서부터 중국의 내치외교에 새바람이 일어났다. 우선 외교에서는 덩샤오핑(鄧小平)이래 표방했던 도광양회(韜光養晦)의 기조가 유소작위(有所作爲)로 바뀌었다. 국제관계에서 영향력을 휘두르기보다는 조용히 힘을 기르면서 때를 기다리자는 정책을 지양하고 국력에 상응하는 발언권을 행사하고 서구(西歐)가 일방적으로 만들어 놓은 규범이나 규제에 얽매이기보다는 세계인구의 5분의 1을 갖는 대국으로서 중국이 국가발전에 유리한 규범이나 규칙을 만드는 국가로서 발돋움하겠다는 입장을 천명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진핑 주석은 주변국을 상대로 하는 외교에서는 후진타오(胡錦燾)시대의 3린(睦隣, 安隣, 富隣)보다 진일보한 덕치(德治)를 강조하면서 친성혜용(親誠惠容)을 자기의 외교정책으로 내세웠다. 친선혜용이 적용되는 주변국들에게 대해서는 운명공동체라면서 협력을 강조하기도 했다. 동시에 일로일대(一路一帶)정책과 이를 물질적으로 뒷받침할 아시아 인프라투자은행(AIIB)설립은 중국이 표방한 주변국외교정책의 실천적 표현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시진핑 주석은 취임과 동시에 한국에 대해 우호적 조치를 취했다. 앞서의 정권들과는 달리 한국임시정부를 항일전쟁당시의 한중협력의 파트너로 공인하고 박근혜 대통령이 요청한 안중근 의사기념관을 설립 해주는가하면 시안(西安)의 광복군 기념비석, 샹하이 임시정부 청사보수, 충칭(重慶)의 광복군사령부 복원 등을 지원해 준 것은 한중관계를 개선하려는 적극적인 의지의 표현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한국도 시진핑 외교의 이러한 흐름에 주목하면서 한중간의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를 한층 더 성숙시키는 한편, 한중FTA를 체결하였고 AIIB에도 적극 참여하였으며 또 서방의 어느 국가도 참석하지 않는 항일전쟁승리 70주년 행사에도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참석, 천안문 광장의 사열대에 섰다. 한국은 1941년 12월 9일 한국이 그 법통을 계승하고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당시 중국정부에 뒤이어 대일선전포고를 했기 때문에 중국의 시진핑 주석,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과 더불어 항일전쟁승리 70주년행사에 참가할 명분이 있다. 

 2. THAAD배치허가와 한중관계의 풍파 
 그러나 지난 7월 8일 한국정부가 미국의 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의 한국설치를 허용한다고 발표한 것과 동시에 한중관계에는 큰 풍파가 일어났다. 중국은 한국정부가 미국에 설치 허가를 해준 THAAD가 이 지역의 전략균형을 중국에게 불리하게 변경시키는 조치-중국의 왕이(王毅)외교부장의 표현을 빌면 THAAD가 한국방위의 범위를 넘어서는 조치라고 규정하고 THAAD설치의 재고(再考)를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물론 인접국가간에 안보상의 이해관계 때문에 분쟁이나 대립이 야기될 수도 있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외교관계가 단절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THAAD설치허용에 대한 중국 측의 반응은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지나친 기우(杞憂)거나 과잉반응이다. 우선 THAAD는 공격무기가 아닌 방어무기이다. THAAD체계에 부수된 AN/TPY-2 X-Band 레이더의 경우 통상적인 운용범위는 600여 ㎞에 불과하고, 인공위성 등으로부터 받은 정보에 근거하여 공격해오는 상대의 미사일을 ‘추적’,요격하도록 하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이 레이더가 CCTV처럼 중국의 모든 군사 활동을 탐지할 수 있는 것으로 호도하였으나, 레이더는 점(点)으로 나타난 정보를 해석하여 대상물체를 파악하는 장비로서 CCTV처럼 다른 일반적 군사정보를 파악할 수는 없음은 중국의 군사전문가들도 잘 알고 있다. 

 현시점에서 THAAD를 한국에 배치하도록 허용한 것은 중국의 공격위협 때문이 아니다. 북한이 증강시키고 있는 미사일위협 때문이다. 주한미군을 타격목표로 해서 북한이 유엔의 대북제재결의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단거리, 중거리, 장거리 미사일과 잠수함 발사 미사일실험을 강행, 임의의 시간에 공격을 가해올지 모를 상황을 조성하는 것에 주목할 때 미국정부가 주한미군의 안전을 위해 북한의 미사일공격으로부터 자국군대를 지키기 위해 미국정부가 발주, 제작한 THAAD를 한국에 설치하도록 한국정부에 허가를 요청해왔고 군사동맹국가로서의 한국이 동맹관계를 깨지 않는 한 이를 허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알면서도 중국은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으면서 방어무기인 사드배치를 허가하지 말라고 한국에게만 일방적으로 압박을 가한다.

 한국정부는 사드문제가 제기된 이래 지난 2년간 중국과의 ‘성숙한 전략동반자관계’를 유지하면서 미국의 THAAD를 배치하지 않고도 안보위협을 극복할 방법을 안출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한국형 미사일 방어체계를 구축하는데 주력, 2020년 상반기에야 한국의 독자적인 미사일 방어망이 갖추어질 전망이다. 현시점에서 한국의 독자적인 미사일 방어망이 구축될 때까지의 안보 공백을 메울 방도의 하나로 THAAD를 검토하게 된 것이다. 중국은 창(槍)을 휘두르는 북한에는 침묵하면서 방패를 갖추려는 한국의 THAAD배치허용만을 자국안보에 불리하다면서 반발하는 것은 약소국에 대한 강대국의 갑(甲)질로 보일 뿐이다. 

 3. 중국의 일부학자와 언론들의 심리전 공세 
사드 배치허용과 때를 같이하여 중국의 일부 언론이나 한국을 자주 들락거린 이른바 지한(知韓)파 학자들이 한국에 대해 강력히 보복할 것을 중국정부에 촉구하는 언동을 서슴지 않고 있다. 현재까지 이들의 주장이나 중국네티즌들의 반응이 시진핑 정부의 정책이 된 것은 전혀 아니다. 다분히 심리전적 목표를 지닌 언동으로 보인다. 

최근 중국의 환쥐스바오(環球時報)가 7월 14일자 보도에서 성주군(星州郡)에 대한 제재를 거론했다. 성주군이 THAAD배치결정이나 허가와 아무 관련이 없는 지방자치단체인데도 마치 책임이 있는 것처럼 지적하면서 군민들의 반대로도 설치가 저지되지 않는다면 중국정부는 성주군을 제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G2로 불리는 강대국의 저명한 언론기관이 벌이는 논설치고는 그 품위와 수준 낮음에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중국의 일부 언론이나 학자들이 이런 보복선동발언을 하는 것은 그들 나름대로 한국의 여론을 흔들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나온다. 다양성이 허용된 한국사회의 여론은 국익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논리적 인식을 바탕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군사기지의 설치문제가 나올 때마다 집단적 저항과 여론분열이 일어나는 상황에 그들은 주목했을 것이다. 또 역사적인 사대의식 탓인지 일부 중국 언론이나 학자들의 위협언동 등 심리전 공세에 항상 취약했다. 

여기에 중국전문가로 행세하는 한국학자들이나 언론들도 한중관계가 어려워질 때 그들의 전문성을 어려움을 극복 타개할 방도로 쓰기 보다는 중국의 한국에 대한 심리전공세에 동조하거나 걱정하는 체 하면서 중국 측 편을 드는 경우도 눈에 띤다. THAAD허가여부가 검토단계일 때는 여러 가지 득실을 따질 논의가 필요하지만 정부가 최종적으로 허가결론을 내렸을 때부터는 정부결정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것이 정치권이나 학계가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한 저명한 언론인 가운데는 자기가 마치 에드가 스노우(Edgar Snow)나 된 것처럼 THAAD의 포기를 감히 자기만의 이유로 정부에 촉구하기도 했다. 

 4. 한국은 추호도 휘둘릴 필요가 없다 

 현시점에서 한국은 중국의 심리전 공세에 추호도 흔들릴 필요가 없다. THAAD배치로 중국이 느끼는 안보위협이나 전략적 균형의 불리한 변화라는 것은 현실적이기 보다는 상상적이고 단기적이기 보다는 중장기적 고려에서 나온 것이다. 한미관계를 놓고 중국이 한국에 거는 변화의 기대 역시 현실적이기 보다는 희망론적(Wishful)이다. THAAD의 위협성 여부는 한미중(韓美中)3국 군사 전문가들이 함께 모여 토의한다면 저절로 해답이 나올 것이다.

 더욱이 한국은 중국을 추호도 적(敵)으로 인식하지 않았으며 박근혜 대통령취임과 더불어 다져진 ‘성숙한 전략동반자관계’를 유지, 발전시킨다는 것이 한국외교의 중요한 목표가 되어 있다. 중국의 일부언론들이 제기하는 한국에 대한 보복주장은 어느 경우에나 결코 심리전 수준을 넘지 못한다. 만일 보복적 제재가 중국정부의 현실정책이 된다면 중국은 북한과 한국을 동시에 제재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북한은 유엔을 통한 경제제재 대상이고 한국은 THAAD에서 비롯된 독자제재대상이 되는 상황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현재 유엔 상임이사국으로서 책임 있는 강대국반열에 오른 중국이 유엔결의에 맞서는 북한의 미사일공세에 대한 방위강화조치의 하나로 THAAD배치를 허용했다고 해서 그간 한중(韓中)간에 형성된 전략적 동반자관계를 희생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시진핑 주석의 주변국을 상대로 하는 외교노선인 친성혜용에 대한 신뢰를 상실하면서까지 한국에 대해 보복정책을 취할 리 없으며 더욱이 한중FTA나 AIIB에 대한 양국협력을 약화시키거나 포기할 수도 없을 것이다.

 상황이 이러 할진 데 우리는 일부 중국 언론이나 학자들의 언동에서 나오는 심리전 공세에 조금치도 휘둘릴 필요도 없고 휘둘려서도 안 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나 국력 면에서 미국이나 중국에 대해 을(乙)일 수 있다. 이것은 지정학에서 비롯된 우리들의 숙명일지 모른다. 따라서 乙이라는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비극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비극적인 것은 ‘乙’ 자체가 분열되어 乙의 몸값마저 제대로 챙기지 못하게 되는 경우이다. 내적 분열의 극복이 초미의 과제다. 이제 외교안보에는 여야가 있을 수 없다는 경구(警句)를 우리 모두가 생활화하지 않고는 나라를 위기에서 지킬 수 없다. 정치인이나 학자, 언론인, 교육자들이 모두 이러한 자세를 가질 때 비로소 우리는 당면한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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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의 4차 핵실험과 중국의 선택

                                                  (이글은 2016년 憲政誌 2월호에 기고된 것임)

                                                                               이 영 일 한중정치외교포럼 회장

 

1. 4차 핵실험의 상황평가

 

북한정권은 지난 1월 6일 김정은의 지시에 의해서 제4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그간 주변국들은 김정은이 조만간 이런 결정을 내릴 것으로 예상하면서도 중국측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처럼 수소폭탄실험에 성공했다는 발표와 더불어 제4차 핵실험을 감행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주지하는 바이지만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작년 9월 오바마 미국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중국은 북한의 핵무장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고 그에 앞선 박근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도 북 핵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특히 중국은 작년 10월 10일 시진핑 주석의 친서를 휴대한 류윈샨(劉雲山)중국공산당 상임위원을 조선노동당 창당 70주년 기념식에 파견, 이 기회에 북핵문제에 대한 중국 측의 견해를 김정은에게 직접 전달했다.

 

 소식통들에 의하면 류윈샨은 김정은과의 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의 필요성을 자세히 설명하고 6자회담을 통한 북 핵의 평화적 해결만이 북·중간의 전통적 우의, 협력관계를 복원하는 방도라고 말했다고 한다. 북한도 이런 중국 측의 태도에 호응, 김정은의 연설에서 핵문제에 대한 언급을 자제한 것으로 보였다. 국제여론은 이러한 동향을 주목하면서 그간 냉랭했던 북·중관계가 회복될 기미가 보인다고까지 예상했다.

그러나 1월 6일 단행된 북한의 4차 핵실험은 중국의 입장을 철저히 무시함과 동시에 그간 펼쳐진 한반도 핵문제의 외교적, 평화적 해결에 대한 모든 기대를 일거에 무산시키고 오직 한층 더 강화된 제재만이 북한으로 하여금 핵을 포기시키는 유일한 방도라는 쪽으로 세계여론이 모아지고 있다. 북한은 이런 여론에 맞서 수소폭탄급 핵실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하면서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이 지속되는 한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핵실험 추진이유를 밝혔다.

 

북한은 항상 미국의 대북적대시정책을 핵실험이유로 내놓았다. 1차 핵실험이나 2차 핵실험에서도 미국의 적대시 정책을 들고 나왔으며 제3차나 4차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핵실험이 실시되는 상황의 전후관계(Context)를 살펴보면 각 실험 때마다 북한이 겨냥하는 주안점은 달랐다. 2013년 2월 12일의 3차 핵 실험의 경우 중국공산당의 대외연락부가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선출된 시진핑의 국가주석 취임을 앞두고 한반도의 안정에 북측이 협력할 것을 당부했는데도 김정은은 권자를 이어받은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지만 중국의 눈치를 보지 않는 김정은임을 과시하겠다는 심산에서 핵실험을 감행했고 이에 앞선 2012년 12월의 미사일 실험 발사도 맥락을 같이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중 관계는 악화되었으며 유엔안보리의 북한제재에 중국이 적극 참여함과 동시에 시진핑 주석은 지난 4년 동안 한국을 먼저 방문하면서 북한을 방문하지도 않았고 김정은을 아직까지 만나지도, 부르지도 않았다. 이번 4차 핵실험도 상황논리에서 보면 중국이 제시하는 비핵개방노선이 김정은의 생존전략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북한 나름의 결기의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 미국과 중국 간의 4차 핵실험을 둘러싼 논쟁

 

북한의 4차 핵실험 후 미중 간에는 열띤 책임공방이 이어졌다. 북한의 핵실험 다음날인 1월 6일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왕이(王毅)외교부장과 전화통화한 후 공개적으로 "중국식 북핵저지방식은 이미 실패했다"고 비판했고 이에 대해 화춘잉 외교부 대변인은 전날 "한반도 핵문제의 원인과 문제점은 중국에 있는 것이 아니며 문제 해결의 관건에도 중국이 있지 않고 미국의 대북한 정책이 오늘의 사태를 몰고 온 원인“이라고 반박했다.

 

그간 미국은 존 케리 국무장관 취임이후 북한의 핵과 미사일이 미국보다는 중국의 안보에 더 관련이 깊다면서 북핵문제의 해결에 중국이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핵문제는 당초 미 북 양자 간의 문제처럼 인식되었지만 북한의 핵무장은 미 북한간의 양자문제를 넘어서서 북 핵의 영향을 받는 관련국 모두의 문제라는 키신저의 주장이 반영되어 북 핵을 다루는 외교무대가 6자회담으로 확대되었고 중국이 의장국이 되어 6자회담을 주도했다. 그러나 북한이 6자회담을 거부하면서부터 미국은 북한정권의 안보 동맹국이고 북한의 존립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칠 뿐만이 아니라 북 핵이 미칠 부정적 파급효과에 직접 노출되어 있는 중국이 북핵문제해결에 앞장설 것을 촉구했다.

이 반면 미국은 자국의 입장을 전략적 인내라고 표현하면서 북핵문제해결의 전면에서 한걸음 물러서는 태세를 보였다. 이에 대해 중국학자들은 미국이 화전양면의 어느 공세로도 북핵문제에서 적절한 해법을 찾지 못하는데다가 2008년 국제금융위기이후 침체를 보이는 자국의 경제사정 때문에 북 핵을 다루는 자국의 입장을 전략적 인내로 호도하면서 북 핵 해결의 모든 책임을 중국에 떠넘긴다고 반발한다.

그러나 미국의 태도는 두 가지 면에서 정당하다. 중국이 북 핵의 외교적 해결장인 6자회담을 북한이 박차고 나가는 현실을 막지 못하는 한 북핵문제의 외교적 해결은 불가능하며 둘째로 유엔안보리의 어떠한 대북제재도 중국이 협조하지 않는 한 실효를 얻을 수 없다는 현실에 비추어 중국책임론을 강조하는 미국의 주장은 타당하다.

결국 6자회담 실패 후 한국이 중국과의 접근 외교 강화를 통해 북핵문제해결의 실마리를 풀려고 하는 것도 미국의 이러한 대 중국 정책과 본질적으로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중국도 이제 G2라는 국제정치적 지위에 비추어 핵 비확산에 대한 국제책임을 수용하고 북한을 핵보유국가로 인정치 않을 것임을 중국지도부의 대외적 발언을 통해 밝힘과 동시에 4차례에 걸친 유엔안보리의 대북제재에 동참해 왔다. 또 중국역시 모든 강대국들이 그러한 것처럼 국경에 인접한 약소국이 핵무장으로 대드는 상황을 용납하기는 더더욱 힘들 것이다. 물론 중국학자들 가운데는 한 때 북한의 핵문제를 대수롭게 생각지 않으면서 중국주변에 핵 가진 여러 국가 중에 북한이 하나 더 추가된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당 지도부가 북한의 핵 보유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결정, 발표하면서부터 일거에 사라졌다. 따라서 북한의 핵 처리 논의는 사실상 북 핵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공산당 지도부의 입장이 어떻게 현실정책으로 구체화될 것인가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아울러 중국의 비핵개방권고를 거부하고 중국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나겠다면서 핵실험을 강행, 동북아시아 대륙에서의 핵도미노 현상(일본과 중국 간의 핵 대결상황)을 몰고 올 가능성을 중국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또 한편 중국은 남중국해에서 진행되는 미국과의 갈등상황도 한반도 정세와의 연관 속에서 심도 있게 검토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중국의 전략적 고려가 구체적으로는 유엔안보리의 북한 제재수준에 영향을 미칠 것이며 중국자체의 독자적 제재구상에도 반영될 것이다.

 

3. 중국과 북한관계의 재조명

 

북한의 핵무장 기도는 당초 6.25 사변에서의 처절한 패배에 대한 반성에서 김일성이 꿈꾸었던 일이지만 구체적 실천에 박차를 가한 것은 중국이 북한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과의 수교를 단행한데서 부터 자위책강화수단으로 시도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북한 핵무장의 배경에는 중국에 대한 깊은 불신이 깔려있다. 물론 북한의 핵실험은 상황마다 겨냥하는 목표가 다르다. 금년 5월에 36년 만에 실시할 노동당 전당 대회를 앞두고 자신들의 업적을 과시, 주민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데도 큰 목적이 있겠지만 더 비중을 둔 것은 앞서도 지적했지만 중국이 북한의 핵무기를 주축으로 하는 자위노선에 어떠한 영향력도 미칠 수 없음을 과시하는데 더 큰 뜻을 두었다.

 

북한은 류윈산의 북한 방문이후 중국과의 관계조정을 놓고 심각한 내부토론을 거쳤다고 한다. 북한의 원로장성들은 중국이 제시한 비핵개방의 길이나 남북대화가 북한 김정은의 세습 독재권력 유지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으며 여기에 곁들여 모란봉 예술단의 안무(按舞)가운데 담겨진 미사일 발사장면에 대한 중국지도부의 부정적인 반응 등을 종합한 끝에 김정은은 더 이상 중국에 끌려 다니지 않는 자주정권임을 과시하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하고 수소폭탄실험으로 명명된 핵실험을 감행했다. 이번 4차실험이 3차와 다른 것은 사전에 중국 측에 전혀 통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 핵실험 직전에 발표된 대남협상을 주도하던 김양건의 돌연사도 북한지배체제의 내부흐름의 일단을 말하고 있다.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은 동맹국이긴 하지만 안보 면에서 믿을 수 없는 동맹국이다. 중·북간에 조약은 있지만 양자 간에는 한번도 합동군사훈련이 없었고 새로운 군사무기거래나 안보전략협의마저 없었으며 유엔안보리의 북한제제결의에 중국은 찬성했다. 동맹조약의 시효는 2021년까지지만 사문화된 지 오래다. 또 최근 시진핑 정권이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경제협력기구인 AIIB(아시아 인프라 투자개발은행)에 북한 측은 참여자격이 부정되었으며 그에 앞서 결성된 샹하이 협력기구나 아시아교류 및 신뢰구축기구(CICA)에도 북한의 참여는 배제되었다.

이 반면 중국의 한국과의 관계는 다방면적으로 개선되었다. 한중간에는 FTA의 체결로 경제면에서는 동맹국에 준하는 협력관계가 정립되었으며 시진핑 주석과 박근혜 대통령 간에는 5차에 걸친 정상회담이 열렸다. 특히 중국의 시진핑 정부는 항일투쟁시의 한중공동투쟁의 파트너를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는 한국으로 인정하면서 하얼빈의 안중근(安重根)의사 동상건립, 시안(西安)의 광복군 표지석 복원, 샹하이 임시정부 청사복원, 충칭의 광복군 사령부 복원(예정)등을 적극 지원하고 항일전쟁승리 70주년기념식의 천안문 열병식에 박근혜 대통령을 초청하는 친한(親韓)적 조치를 취하였다.

 

이러한 정황을 놓고 볼 때 김정은은 적어도 중국공산당이 오늘날 한국을 상대로 펼치는 정책이나 노선이 전혀 달갑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북한에게 취하라고 제시하는 권고도 김정은의 3대에 걸친 세습독재정권의 유지에 전혀 도움이 되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오직 핵강성(强盛)대국만이 자기의 살길이라는 보수적 결론에서 4차 핵실험을 단행했다. 북한의 중국불신은 심각의 극을 넘어섰다. 북한은 핵실험이 감당하기 힘든 부작용을 몰고 올 것을 예상하면서도 고난을 이겨낸다는 자신감과 중국이 지정학 상 순치관계에 있는 북한을 끝내 버리지 못할 것이라는 희망론을 깔고 버틸 것이다.

 

4. 맺는 말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우리 사회의 일각에는 북핵문제 해결에서 중국은 어느 경우에도 북한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거나 박근혜 정부의 중국친화정책도 아무 성과가 없다는 중국불신론이 번지고 있다. 설사 중국이 유엔안보리 제재결의에 참가하지만 북한이 핵을 실질적으로 포기하게 만들 강경제재에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의 소리도 커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불신이나 비관에 앞서 신중하고 지혜로운 전략적 사고를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물론 중국정부는 북핵문제처리원칙으로 이른바 ①한반도 비핵화, ②한반도 안정, ③대화에 의한 해결의 3원칙을 들고 나오면서 이 중 어느 한 요소라도 빠져서는 안 된다(缺一不可)고 말하지만 이것이 중국의 본심이라면 우리는 북핵문제에 관련해서 중국에 어떤 기대도 걸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핵개발 강경론에 매달리는 김정은이 북한을 틀어쥐고 있는 한 중국이 말하는 3원칙에 의한 한반도 문제해결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중국 또한 이것을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중국은 과거와 같이 앞으로도 북한정권의 존속을 지지할 것이다. 그러나 김정은의 존속과 북한의 존속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지금 김정은은 김일성이나 김정일과는 달리 카리스마도 없고 그런 수준의 인물대안은 북한내부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또 비핵개방만을 살길로 믿는 장마당 세력이 북한 각지에서 나날이 강성해지고 있는데 이런 현실을 중국이 모를 리 없다. 따라서 중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김정은을 권력에서 배제하는 공조를 조용히 추진한다면 노동당 내부의 궁중정변과 같은 방식으로도 김정은 제거가 불가능 한 것은 아니다.

 

중국은 대외적으로 밝히지는 않지만 이러한 접근(Plan B)을 추진할 능력을 충분히 비축하고 있음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중국에 대한 불신이나 비관에 앞서 이러한 가능성을 내다보면서 중국을 움직이게 할 공식, 비공식의 전략카드를 만드는데 주력해야 할 시점이다. 우리가 이를 서둘러야 할 이유는 북한의 핵무장은 앞으로 동북아시아의 평화는 물론이거니와 우리 민족의 평화와 통일, 번영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재앙의 근원이기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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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주간조선 2375호로서 2015년 9월 121일부터 10둴4일까지의 특대호에 실렸다.

 

 이영일 전 국회의원·한중정치외교포럼 회장 

 

항일을 위한 한중공동투재의 역사를 복원하다

 

지난 9월 3일 중국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열병식에서 한국의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서 있는 모습이 전 세계에 방영됐다. 이 광경은 형식상으로 보면 중국이 개최한 항일전쟁 및 반파시스트 투쟁 승리 70주년 기념행사의 한 순서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그림’이 태어나기까지의 역정을 돌이켜보면 결코 예사로운 사건이 아니다. 이날의 행사는 그간 냉전에 가려 밝혀지지 않았던 한·중 간 항일 공동투쟁의 역사적 진실이 70년 만에 제 모습을 찾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61년 전인 1954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5주년 기념식 사열대에는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이 북한의 김일성과 나란히 서서 중국 인민해방군들을 사열했다. 그러나 올해 천안문 사열대에는 태평양전쟁 개시(1941년 12월 8일) 다음날 중국과 더불어 일본제국에 선전포고를 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박근혜 대통령이 대일항쟁의 당당한 파트너로서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 나란히 서서 중국 인민해방군 부대를 사열했다. 이 그림은 결코 의례적인 행사의 형용(形容)이 아니다. 한·중 관계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할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며, 한·중 양국의 지난 시대를 규정했던 냉전사(冷戰史)의 청산을 알리는 것이다.

 

최근 중국의 항일전쟁승리 70주년을 알리는 국내 언론 보도를 보면 한국 임시정부가 태평양전쟁 개시 다음날 대일 선전포고를 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챙겨서 보도하지 않았다. 정식으로 대일 선전포고를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 대통령이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기념식전에 참석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인데 이러한 논리를 펴는 언론이 눈에 띄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올해로 시진핑 주석과 여섯 번째 만남을 가졌다. 이 두 지도자 간 만남에서 역사적으로 의미가 남을 두 가지 문제를 회담의 중요한 의제(Agenda)로 설정한 것은 중국을 상대로 벌인 박근혜 외교의 큰 공헌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 같다. 첫째는 박 대통령의 제의로 한·중 정상 대화에서 처음으로 한반도 통일 문제를 주요의제로 설정한 것이다. 둘째는 박 대통령의 주장과 제안에 따라 항일을 위한 한·중 공동투쟁 역사의 줄거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심으로 재구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북한의 김일성이 내세우는 항일혁명운동은 독립운동의 큰 줄기에서 보면 중국 동북지방에서 명멸했던 반일투쟁의 한 지류였다. 독립운동의 본류는 1942년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의 창립을 계기로 한·중 공조가 강화되는 가운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펼쳐진 독립군, 광복군, 또 여기에 마지막으로 합류하게 된 조선의용군 부대들이 펼친 항일 독립 투쟁이었다. 그러나 동서냉전이 심화되던 시기의 중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심으로 펼쳐진 본류(本流) 독립운동보다는 이념을 공유하는 김일성 중심의 소규모 독립운동을 더 중시했다. 즉 중국 동북지역 항일연합군에 포함된, 김일성이 부대장을 맡고 있던 소대 병력 규모의 투쟁을 평가해줬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시진핑 주석과의 정상회담을 통하여 그간 중국 당국이 외면했던 항일을 위한 한·중공투(韓中共鬪)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은 안중근(安重根) 의사 기념처 설치를 시진핑 주석에게 건의해 하얼빈 역사(驛舍)에 안중근기념관을 건립하도록 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격살사건을 항일 치적으로 기념하게 된 것이다. 이어 시안(西安)에 있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 표지석도 복원되었다.

 

사실 안중근 의사 기념 시설 건립 문제는 박근혜 대통령 이전부터 한국 측에서 중국 당국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요청해 왔다. 고 황인성(黃寅性) 국무총리와 고건(高建) 전 국무총리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중국 정부에 요구했지만 신통한 반응을 얻지 못했다. 내가 몸담았던 한·중문화협회도 대표단을 흑룡강성 정부에 파견, 요청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특정 외국인의 항일운동 업적을 중국 땅에 단독으로 부각시킬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그 배경에는 북한이 아닌 한국 중심의 항일 투쟁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키지 않으려는 공산당의 방침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국의 한 기업인이 자기 비용으로 만들어 하얼빈에 세운 안중근 의사의 동상까지 뜯어내 창고에 처넣기까지 하였다.

 

시진핑 주석의 배려

 

다행히도 시진핑 주석은 박근혜 대통령과의 한·중 정상회담 이후 중국 대륙에서 펼쳐진 한국인들의 독립운동 업적을 평가하고 거기에 상응하는 기념사업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번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참석한 가운데 이루어진 상하이임시정부 청사 재·복원 사업의 경비를 중국 정부가 전액 부담해준 것은 과거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맨 처음 세워진 한국 임시정부 상하이(上海) 청사를 복원할 때에는 청사에 살고 있던 중국인 가정의 이전 문제와 인근 주택 매입비용 문제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측과 상하이시 당국 간에 오랜 시간의 비용 협상이 있었다.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추진된 충칭(重慶)임시정부 청사 복원 시에도 임시정부 청사에 거주하는 52가구의 이전비용과 청사 수리비용 문제를 놓고도 질긴 협상을 벌였다. 결국 한국 측에서 큰 비용을 부담함으로써 복원사업을 마무리했는데 중국 측이 한국 측 요구를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은 북한을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난해 정홍원 국무총리가 충칭 방문 시 요청한 한국광복군 사령부 복원 문제는 중국 측이 즉시 수락했다고 한다. 비록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시진핑 주석이 취임하면서부터 중국에서 전개된 한국인들의 항일투쟁을 보는 중국의 태도는 점차 달라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주도한 항일 독립운동을 정통 독립운동으로 수용하고 한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이 오늘날 대한민국에 의해 정당히 계승되고 있음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역사의 축적을 바탕으로 지난 9월 3일 베이징의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일본에 정식으로 선전포고(宣戰布告)한 세 국가의 지도자, 즉 시진핑 주석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 그리고 우리 박근혜 대통령이 나란히 서서 인민해방군의 사열을 받게 됐다.

 

한중문화협회의 창립과 중국의 독립운동지원

 

이제까지 국내에서 진행된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는 불행하게도 두 가지의 맹점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독립운동의 무대를 지나치게 중국 중심으로만 보려는 경향이다. 또 다른 하나는 중국에서의 항일 독립운동과 관련해 중·한문화협회 창립이 갖는 의의를 외면해 왔다는 점이다. 항일 독립운동은 처음에는 여러 개의 임시정부 형태로 펼쳐지다가 1920년에 이르러 중국의 상하이에 본부를 두는 단일 임시정부로 통합되었으나 그후 본부가 이곳저곳으로 전전했고 마지막에 충칭에서 광복을 맞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국 임시정부는 세계 각지에서 펼쳐진 독립운동을 전략적으로 지도하거나 조정할 구심력도 부족했고 상황도 열악했다. 미국에서는 이승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구미(歐美)본부를 세워 항일 독립운동을 이어갔으며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서도 독립운동은 계속되었다. 오히려 한국 독립에 결정적 영향을 준 카이로선언은 그것이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주도한 점에 비추어 이승만이 중심이 된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의 독립운동이 처음부터 중국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것은 한국과 중국 간의 지리적 인접성과 역사적 유대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중국의 신해(辛亥)혁명에 성공한 쑨원(孫文)이 1921년 11월 중화민국 비상대총통에 취임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특사로서 총리대행인 신규식(申圭植)을 접견한 자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식으로 승인하고 중국의 북벌계획이 완료되면 그때 전력을 다해 한국의 구국운동을 돕겠다”는 희망찬 약속을 던진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1925년 쑨원이 사망한 후 1927년 중화민국을 승계한 장제스(蔣介石)는 쑨원이 약속한 한국 임시정부 승인을 이행하지 않고 유보했다. 당시 한국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이국땅에서 항일독립 투쟁을 하는 데 적잖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망명정부가 아닌 임시정부에 대한 연합국 정부의 승인을 얻는 것이 독립 성공의 중요한 발판이 될 것으로 인식하고 이를 위해 갖은 노력을 경주했다. 이승만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즉시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미국에 요청했으나 외면당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쑨원의 아들이며 중화민국 입법원장(우리의 국회의장에 해당)인 쑨커(孫科)는 아버지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중국이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공공연히 촉구하고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과 중국의 항일 역량을 연결할 기관으로서 중·한문화협회의 창립에 착수했다. 원래 중화민국에서는 정식으로 수교한 국가의 국민과 중국 인민과의 우호협력을 촉진하는 기관으로 ‘문화협회’를 구성, 공공외교를 추진해 왔다. 중·미(中美)문화협회나 중·소(中蘇)문화협회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주권도, 인민도, 영토도 없는 문자 그대로 임시정부였기 때문에 중국과 한국 간의 수교가 불가능해서 문화협회도 합법적으로 창립할 수 없었다. 이에 쑨커는 국가 대 국가 차원이 아닌 당 대 당 차원과 인민 대 인민 차원이라는 중국적 외교 방식을 원용해서 앞으로 탄생할 한국 독립정부를 상정해 놓고 중국국민당과 공산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정당세력들의 연대를 바탕으로 중·한문화협회를 창립하도록 주선, 중화민국 정부의 승인을 얻었다. 이로써 1942년 10월 11일 중국의 임시수도 충칭에서 중·한문화협회가 창립되었다.

 

창립식에는 중국의 장제스 총통이 참여하여 격려사를 했다. 중·한문화협회의 조직은 중국국민당의 고위간부들과 중국공산당, 한국 임시정부의 고위층들을 포함한 한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들로 구성되었다. 임시정부에서는 김구 주석을 비롯해 이승만, 서재필 등 임정요인 전체가 멤버로 참가했고 국민당 측에서는 쑨커(孫科) 입법원장, 우티예청(吳鐵城) 중앙조직지도부장 등의 요인들이 참가했다. 공산당 측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총리를 지낸 저우언라이(周恩來)와 문화계 대표로 궈모뤄(郭沫若)가 참가했다. 저명한 역사가이자 시인, 고고학자 등으로 활약한 궈모뤄는 1926년 북벌전쟁(北伐戰爭) 당시 국민혁명군 정치부 부주임을 맡았었다.

 

이때는 중국의 충칭이 한·중 양측의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사는 장소였기 때문에 중·한문화협회와 구별되는 한·중문화협회를 따로 구성하지 않았다. 중·한문화협회가 한·중문화협회도 겸하는 구조였다. 한·중 양측은 한국 임시정부의 외교부장인 조소앙(趙素昻)을 한국 측 창구로 하여 협력을 전개해 왔다. 중국정부는 중·한문화협회 창립을 계기로 한국 임시정부에 대한 재정 지원을 본격화했다. 중·한문화협회를 지원하는 형식으로 재정 지원을 실시했다. 이때부터 한국 임시정부의 재정 형편은 다소 나아졌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중·한문화협회는 한국의 독립을 위한 지원 활동으로 한국 임시정부 승인을 촉구하는 문서 청원을 주도하고 한국 임시정부 승인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여론 조성 강연회, 학술회의 등을 줄기차게 개최하였다. 3·1절 기념 독립운동 행사를 통해 한국 독립의 필연성과 당위성을 알리는 사업도 꾸준히 이어갔다. 특히 한국 임시정부 승인 문제를 관철하기 위해 쑨커는 중국공산당의 저우언라이(周恩來)와 제휴하여 내적 분열의 위기를 겪고 있던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을 임시정부 깃발 아래로 뭉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결국 김구(金九)가 이끄는 임시정부 세력과 김원봉(金元鳳)이 이끄는 조선의용군 계열의 조선혁명당 세력이 중국 정부의 임시정부 승인을 전제로 대동 단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전후처리 문제의 어려움을 내세워 “한 치의 영토도 없는 임시정부” 승인을 유보하자는 영국 처칠 총리의 주장에 휘말려 한국 임시정부 승인을 끝까지 유보했다. 중·한문화협회는 비록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 정부의 승인을 얻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한국 독립운동의 정통성이 한국 임시정부로 모아지고 대일 무력투쟁의 총본산으로 광복군 사령부가 설치되는 등 항일을 위한 한·중공투의 역사를 펼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한국의 독립운동사 연구가들은 중·한문화협회가 중국 대륙에서 한국 독립운동과 투쟁에 미친 커다란 기여를 전혀 연구하지도, 평가하지도 않는 실정이다.

 

한중문화협회의 탄생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면서부터 쑨커가 이끌던 중·한문화협회는 대만으로 이주했다. 중·한문화협회의 한국 측 파트너였던 조소앙 선생은 1945년 귀국 후 한·중문화협회를 광복된 한국 땅에 발족시키려고 준비하던 중 한국전쟁 발발로 본인이 납북되면서 한·중문화협회 창립을 보지 못했다. 1958년 조소앙 선생이 납북된 북한 땅에서 생을 마감하자 선생의 유지를 받들던 최용덕 전 공군참모총장(중국공군사관학교 출신)이 1965년 한·중문화협회를 서울에 창립하고 초대회장으로 조소앙 선생을 추서한 후 본인이 제2대 회장에 취임하였다. 서울의 한·중문화협회와 대만의 중·한문화협회는 초기에는 서로 교류했지만 한·중수교 이후 대만과 단교되면서 파트너십이 끝났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쑨원 시대와는 달리 민간우호단체의 명칭을 ‘문화협회’에서 ‘우호협회’로 바꾸고 한·중수교 후에는 양국 간에 우호협회를 새로 창립하여 문화협회의 역할을 대체했다. 하지만 한·중문화협회 7대 회장인 이종찬(李鐘贊)씨(전 국정원장)는 이 시기 서울의 한·중문화협회를 한·중우호협회로 변신시키기보다는 중국과 손잡고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한·중 협력단체로서의 역사성을 지켜나가는 민간기구로 존속하는 길을 택했다. 나는 제8대 회장으로 15년 동안 협회를 이끌다가 작년 7월 명노승(明魯昇) 변호사에게 회장직을 넘기고 한·중문화협회에 병설된 한·중정치외교포럼의 회장을 맡고 있다.

 

올해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 정부가 한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은 “항일을 위한 한·중공투의 당당한 파트너”로서 정당한 지위를 되찾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이렇게 되찾은 한·중 파트너십이 우리 모두의 진정한 광복인 통일한국 건설의 디딤돌로 승화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중국을 상대로 펼친 박근혜 외교의 값진 승리에 박수를 보낸다.

 

필자: 이영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졸업(58학번), 제11대ㆍ12대ㆍ15대 국회의원 및 국회문교공보위원장, 사단법인 한·중문화협회 총재(1998~2014), 한·중정치외교포럼 회장(2014~ ), 한·중정상회담 2회 수행(김대중-강택민, 박근혜-시진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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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관계에 대한 조지프 나이 교수의 특강 청취소감 --미국의 시대는 끝나고 있는가?(한중정치외교포럼 밴드에 올렸다)

                                                     

                                             이영일 한중정치외교포럼 회장

 

1. 들어가면서

 

2014년이 끝나는 12월 10일 한국고등교육재단은 미국 하바드 대학 명예교수이며 전 미 국방부부장관과 국무성 차관보를 역임, 미국의 외교안보분야에서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석학 조지프 나이(Joseph Nye)교수를 초청, “미국의 시대는 끝나고 있는가?” 라는 주제로 특강을 개최했다.

오후 3시에 시작될 강의장 언저리는 청중들로 붐볐다. 전 직 외교관들이 20석 이상의 좌석을 미리 예약해두어 앞좌석을 잡기는 어려웠다. 다행히 나를 알아본 직원이 자리를 마련해줘서 좋은 자리에 앉았다. 동시통역을 들을 수 있는 이어폰이 없는 좌석을 대학생들이 가득 매운 것을 보면서 나이교수의 평판이 얼마나 높은지를 체감하는 한편 우리나라 대학생들의 영어 이해수준이 높아졌고 해외석학들의 강연회에 이처럼 시간을 내서 참여하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것도 우리나라 선진화의 좋은 징조로 보여 내심 즐거웠다.

 

이글은 당시 강의메모를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많은 부분이 생략되기도 했고 부분적으로 잘 못 들은 부분도 있고 내 나름대로 이해해서 기록한 부분도 있다. Nye 교수는 차분한 목소리로 특유의 논리성을 과시하면서 강의를 펼쳤다.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미국 타임과 라이프지의 경영자였던 Henry Luce가 1950년대 중반 ‘미국의 세기’라는 말을 처음 썼을 때 당시 미국은 이 말을 지나친 표현이라고 해서 수용을 꺼렸는데 그때로부터 60여년이 흘러 지난 4월 영국의 Financial Times는 중국이 미국을 2014년을 기점으로 추월할 것이라고 보도했고 World Bank는 구매력 기준으로 보면 중국은 이미 미국을 앞질렀다는 것이다. Joseph Stiglitz교수도 중국이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말했고 심지어 영국의 Jacques martin같은 사람은 When China rules the World라는 저서를 통해 중국시대의 도래를 강조했다.

 

흔히 사람들은 고대 아테네의 투기디데스의 세력전이(勢力轉移)에 대한 이야기를 교훈으로 내세운다. 즉 한 국가가 흥기(興起)하면 경쟁국가는 전쟁을 통해 몰락한다는 것으로 페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의 흥기에 대한 스파르타의 두려움에서 일어난 전쟁이었고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흥기에 대한 영국의 두려움이 가져온 전쟁이라고 예시하면서 미국에 대한 중국의 흥기가 마치 1차 대전이 일어난 1914년의 상황과 2014년의 현재상황이 그때와 유사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를 하나씩 논리적으로 반박했다.

 

2.나이교수의 반론

 

미국은 중국이 빠른 시일 내에 경제적으로 발전, 13억 인구를 부양해내는데 성공한 노력을 평가하고 환영한다. 13억 인구가 빈곤상태에서 세계각지로 뿌려지는 상황은 끔찍한 일로서 세계정세를 불안정케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중국이 이룬 발전을 미국이 높게 평가하는 소이다. 그러나 중국이 발전한다고 해서 미국이 쇠락하는가? 그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인간에게 생로병사가 있듯이 국가의 역사도 흥망성쇠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흥망성쇠의 주기를 알기는 힘들다.

영국은 섬나라지만 산업혁명으로 세계를 재패하였다. 그러나 영국이 누린 패권은 2차세계대전전에 이미 미국으로 옮겨졌다. 당시 미국은 세계 GNP의 25%를 생산했는데 제2세계대전으로 전 유럽이 전쟁의 폐허였기 때문에 1950년대에는 세계 GNP의 50%를 생산했다. 그러나 전재복구가 끝나면서부터 미국은 다시 GNP의 25%를 생산하고 있으며 그 추세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고 앞으로는 18%까지 내려갈 수도 있다.

 

미국의 역량을 1945년부터 1970년대만을 떼어서 보기보다는 미국 역사의 큰 흐름에서 이해하는 것이 옳다. 그 당시는 국제체제가 단극체제로 보였지만 각국경제가 안정을 되찾으면서 국제체제는 다극화로 움직이는 것이다. 1960년대 초에는 소련이 스푸트닉을 미국보다 먼저 발사하면서 후르시초프는 미국의 시대는 끝났다고 연설했으며 당시 여론도 소련의 우세를 점쳤다. 1980년대는 일본경제의 흥기로 일본이 미국을 앞지른다는 저서가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한때 일본경제의 빠른 성장에 대한 공포감이 확산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쇠락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데 소련과 일본의 처지는 전혀 달라져 있지 않는가. 한 국가의 쇠락을 측정하려면 쇠락의 상대적 기준과 절대적 기준이 있을 것이다. 상대적 기준은 좋은 예로 영국과 화란을 들 수 있다. 산업혁명이전의 화란은 영국보다 강국이었다. 그런데 산업혁명으로 영국의 국력이 화란을 앞질렀다. 화란은 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쇠락한 것이다.

절대적 기준은 한 국가가 부정부패로 내부의 응집력이 해체되어 로마가 게르만이라는 야만족에게 힘없이 붕괴되는 것처럼 내적 자기몰락의 경우에 적용되는 기준이다. 오늘날 미국과 중국을 비교할 때 절대적 기준으로나 상대적 기준의 어느 척도를 적용해도 중국은 미국에 앞서지도 않았고 그럴 가능성도 없다. 미국은 멸망기의 로마제국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나라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장래의 가능성을 놓고 국력비교를 할 경우 주요기준으로 인구, 에너지, 창의력을 보는 경우가 많다. 인구로 보면 지금 중국이 인구 제1위국가다. 제2위는 인도 이며 미국은 3위다. 앞으로 2040년 되면 인도인구가 1위, 중국이 2위 미국은 3위를 그대로 유지할 것이다. 둘째 기준인 에너지를 보면 미국은 세일가스 때문에 중동유전에 대한 의존도가 줄어들면서 거의 자급단계로 가기 때문에 중국이나 인도와는 비교가 안 된다. 중국은 중동에서 에너지를 수송해오는 긴 수송로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창의력 부면을 보면 미국은 이민을 허용하는 개방체제를 지니기 때문에 70억 인구에서 새로운 창의력을 조달하고 이를 뒷받침할 대학과 연구시설이 짜임새 있게 갖춰져 있다. 중국이 이 수준에 도달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새로운 기술 혁신혁명이 미국에서는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절대적 기준으로 본 미국의 쇠락은 있 수 없다.

다만 미국이 20세기 초에 누린 것만큼의 부를 창조하는 것은 여타 국가들도 발전경쟁에 뛰어들고 있기 때문에 어려워진다. 미국의 우위가 지닌 절대성은 상대성으로 대체될 것이며 미국의 일방주의 외교는 협력주의로 바뀌면서 다극화 현상이 예상된다. 나는 소프트 파워 이론을 발표한 바 있는데 힘으로 풀어야 할 문제를 외교로, 문화적 우위로 풀자는 취지이며 결코 힘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힘이 있는 자만이 소프트 파워를 효과적으로 구사한다. 그러나 적절한 힘과 소프트 파워의 결합은 싱가포르와 같은 소프트 파워정책으로 성공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3. 중국을 보는 시각

 

미국은 세계경제의 발전을 도모할 국제체제를 강화하는데 힘써왔으며 2001년 중국을 세계무역기구(WTO)의 일원으로 가입토록 했다. 중국은 WTO가입을 계기로 경제발전의 전기를 맞이했으며 미국을 따라 올만큼 경제발전의 전망도 생겼다. 경제발전은 국력신장을 가져온다. 그러나 국력이란 자국이 원하는 것을 다른 나라로 하여금 하게 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할 때 중국이 오늘의 국제체제에서 그러한 힘이 있는가. 중국을 따르는 집단적인 공동체가 늘어난다면 그것은 파워가 강해진 결과라고 말 할 수 있다. 중국은 총량지표에서 독일이나 일본을 앞섰다.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계속 7.5%를 유지하고 미국의 그것이 2.5%로 머물러 있다면 중국은 미국을 추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WTO의 회원국인 중국이 7.5%의 성장률을 계속 유지할 수는 없다. Somers는 중국의 고도성장은 지속될 수 없고 어느 시점에 가면 정상성장률로 되돌아오기 마련이며 10년이 지나면 중국도 3.5%대로 성장률이 내려갈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의 총량규모가 커져 미국을 앞지르려면 1인당 소득에서도 앞서야 하는데 미국의 1인당 소득은 중국보다 4배나 크다.

 

또 중국이 일본이나 독일을 앞섰다고 하지만 교역통계에서 보면 부가가치가 낮은 것의 총화에서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휴대전화를 많이 생산하지만 부품의 대부분을 수입하여 완제품으로 조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국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낮다고 말하고 일자리는 많이 늘어나지만 큰 벌이를 할 자리는 적다고 지적했다. 지금 상황을 보면 중국에 투자한 해외자본가들이 차지하는 몫이 중국에 남는 것보다 훨씬 크다. 따라서 총량으로만 일본이나 독일을 제쳤다는 것이나 구매력으로 앞선다는 표현의 의미를 되씹어 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Nye교수는 이어 한국도 1인당 GNP가 6000달러에서 7000달러일 때까지만 해도 권위주의적 국민지배가 가능했지만 10,000 달러를 넘어서면서부터 정부의 일방적인 국민장악력이 떨어졌다고 회고하면서 중국도 1인당 GNP가 10,000달러를 넘어선 후에도 현재와 같은 통제체제가 가능할 것인지에 의문을 던지면서 오늘날 시진핑 정부가 추진하는 반부패투쟁은 중국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지만 부패가 나오는 구조를 그대로 두고 인적쇄신에만 역점을 두는 반부패투쟁은 그 성과에 한계가 있을 것이며 인민해방군 예산보다 더 많은 공안예산이 편성되고 있는 현실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중국은 현재 일본보다 더 앞서기를 원하고 동남아 지역에 대해서도 핵심이익을 내세우면서 영향력을 키우고 있지만 베트남이나 필리핀의 반발을 유발하고 일본의 대중국투자가 줄어드는 추세라고 지적했다. 동시에 Nye교수는 한국인들에게 들으라는 듯 미국은 아베노믹스가 아무리 실패하더라도 미일협력은 계속 강력히 유지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본 로비 때문에 대표적인 친일 미국학자로 정평이 나있다.

 

4. 평가

 

Nye 교수의 특강이 갑자기 한국고등교육재단주최로 열린 배경은 알 길이 없고 묻지도 않았다. 그러나 한미관계와 한중관계에 대한 최근 언론들의 보도태도, 즉 시진핑 방한이후 한국의 친중화(親中化) 가능성이 일고 있다는 풍문에 따른 워싱턴의 우려에서 나온 조치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Nye 교수의 지론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고 이미 그의 여러 논문들에게 밝혀진 것들이었다. 다만 그의 소견을 한국의 일반대중을 상대로 체계적으로 발표한 점에서 특별히 주목을 받는 것에 불과하다. 한국의 친중화 가능성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반미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굳건한 한미동맹 때문에 중국의 입장에서 한국의 전략가치가 높아졌다는 사실을 한국 국민들은 너나없이 잘 알고 있다.

중국학자들은 그간 기회 있을 때마다 한미군사동맹을 냉전의 유산이라고 비판하지만 원교근공(遠交近攻)이 중국의 주요주변국전략이었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을진대 한국은 미국과의 안보협력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과 싸웠던 베트남이 다시 미국과 복교하는 것을 보면 동아시아 제국의 중국관의 일면을 읽을 수 있다.

 

특히 한국은 북한의 핵문제가 안보위협으로 존재하는 한 한미동맹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것이다. 오히려 미국 국회가 금후 10년간 국방예산을 삭감하는 추세이기 한미동맹에도 불구하고 대한방위공약을 미국이 감당할 수 있을 것인지를 우리는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에 관해서 Nye교수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고 질의응답사회를 맡은 김병국 교수도 관련된 토론을 잘 유도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었다.

 

그러나 현재 한중관계는 경제면에서 협력의 규모가 시진핑 주석이 지난 7월 방한 시 서울대학교 강연에서 밝힌 대로 한미교역액, 한일교역액, 한·유럽교역액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아졌고 한국의 대 중국무역의존도는 한국전체무역액의 26.1%인데 비해 중국의 전체 무역액 중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4% 수준이다. 따라서 한국은 그간 미국, 유럽, 중남미국가들과의 FTA를 통해 협력의 다각화를 추진하고 있지만 한중경협을 능가할만한 대안은 없다.

이제 경제면에서 중국은 한국의 지속적 발전을 위한 가장 중요한 파트너로 되어있고 중국을 반대하거나 적대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진입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최근 THAAD미사일을 주한민군에 배치한다는 미국의 방침을 한국이 거부하라고 중국이 압력을 가하지만 이 문제는 한미양국간만의 문제로 보아서는 안 된다. 북한 핵위협과 주한미군의 안전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한반도 비핵화를 전제로 하는 한미중 3자회담의 틀에서 다루어져야 할 문제다.

 

현시점에서 한국은 안경분리(安經分離) 즉 안보와 경제를 분리해서 대처한다는 입장을 확고한 외교원칙으로 굳혀 미중양국과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가고 한일관계도 풀어가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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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의 미중관계와 한중협력의 전망(이글은 국제문제 2015년 2월호에 발표되었다)

                                                                             이 영 일 한중정치외교포럼 회장

 

1.들어가면서

 

오늘의 한반도를 생활무대로 하는 한민족의 우리 세대에게 미국과 중국처럼 중요한 국가도 없을 것이다. 두 나라 모두 지정(地政)학적으로나 지경(地經)학적으로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국가들이며 양국 모두와의 원만한 관계 유지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달성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평화와 통일이 우리의 민족적 목적과제일진데 양국 모두의 협력을 우리는 절실히 필요로 한다. 그러나 미중 양국관계는 부단히 변화한다. 때로는 갈등하고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한다. 우리는 양국 모두와 협력하고 있지만 양국관계의 변화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양국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할 어려움에 직면할 수도 있고 양국 모두와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중도적 입장을 선택하거나 요구받을 상황도 올 수 있다. 여기에 미중관계의 변화를 예측하고 전망해야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필자는 2015년의 벽두에 미중관계를 전망하면서 우리의 진로를 생각해본다.

 

2. 중국을 보는 국내학계의 시각

 

2014년을 마치면서 우리 국내의 중국전문가들 간에는 서로 비슷하지만 중점을 달리하는 두 가지 견해가 등장하고 있다. 하나는 중국이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계기로 중국도 개발도상국의 하나라는 기왕의 입장을 털어버리고 이제 당당한 대국으로서 세계정치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대국외교로 대외노선을 재정립(Reorientation)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후진타오(胡錦燾)시절에 흔히 쓰이던 중국도 ‘개발도상국의 하나’라는 주장은 사라지고 조심스럽게 모색되던 신형대국(新型大國)관계론이 강력히 대두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중국이 강대국의 하나라는 자기정체성을 모든 대외표현에서 확실히 밝히고 있다. 이것은 시진핑(習近平)주석이 추구하는 대외노선의 중요한 특징이다. 그간 미국학자들은 중국이 역내(域內)의 지역패권을 추구한다고 말해왔는데 이러한 평가에 대해서도 시진핑의 답은 NO다. 시진핑의 대국 외교노선은 그 목표가 지역이 아닌 전 지구를 무대로 겨냥한다. 그 예로 시진핑이 말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정책을 보자. 그는 중국의 쿤밍으로부터 미얀마, 하노이를 거쳐 인도양을 지나 중동,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남방 실크로드를 추구한다고 밝혔는데 이 지역을 경제회랑(回廊)으로 보면 일대(一帶)지만 수송로로 보면 일로(一路)다. 또 시안(西安)으로부터 중앙아시아, 러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치닫는 북방실크로드 건설도 추진한다.

일대일로라는 표현은 지역별로 범세계적인 경제회랑을 만들자는 것이지만 이 전략이 포괄하는 범위는 지구적(Global)이다. 중국은 바야흐로 세계적인 대국에로의 도약에 나선 것이다. 특히 남방실크로드사업을 촉진하기 위해서 시진핑은 이미 구체적인 투자계획을 집행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대국지향론과는 달리 국내학계에서 널리 알려진 통설은 중국이 미국 등 서방측이 만들어 놓은 국제규범과 질서를 존중하면서 그 태두리 내에서 자국의 실리가 보장될 수 있는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 나간다는 현상개혁론이다. 이들은 중국이 경제면에서는 G2로 성장했지만 이는 서방의 자본도입, 서방의 기술학습, 서방의 경영을 벤치마킹하였고 세계무역기구(WTO)가입으로 얻은 혜택의 결과다. 따라서 지금 중국은 강대국으로 컸지만 새로운 국제질서를 주도하거나 창설할 만큼 강대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베이징대학의 왕지스(王緝思)교수는 중국이 강해졌지만 중국이 반미동맹결성을 주창할 때 선뜻 합류하거나 가세할 나라가 아직은 없다는 것이 냉엄한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점에서 중국외교는 앞으로도 현재의 국제질서를 긍정하면서 그 틀 안에서 개혁을 추구할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견해는 다른 것 같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강조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중국이 암묵하는 내재적인 욕구에서 보면 중국은 결코 현상개혁에 만족하거나 안주하려는 것 같지 않다. 류밍푸(劉明福)로 부터 시진핑에 이르기까지 중국이 강조하는 중국몽(中國夢)은 궁극적으로 역사적인 중국의 회복을 목표로 세계적인 대국건설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인다.

 

3. 2015년의 전망

 

오늘날 국제정세를 분석하는 중국학자들은 지금 미국과 중국 간에 세력전이(勢力轉移)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그러나 과거 역사에서 본 것처럼 세력전이기에 필연적으로 수반되었던 전쟁을 막으려면 쇠락하는 미국(Declining America)이 신흥중국(Rising China)을 대등한 강대국으로 인정, 세계문제에 대등한 발언권을 갖게 해주고 서로 간에 핵심이익을 존중하는 국제관계로 양자관계를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이른바 신형대국관계론을 수용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적극적인 의사표시로 시진핑은 작년 5월 21일 샹하이에서 열린 아시아지역교류회의(CICA)에서 아시아 집단안보론과 아시아 인프라투자은행(AIIB)설립 안을 내놓았다. 이 자리에서 구체적인 표현은 자제했지만 내심으로는 중국의 위안화가 달러를 대체할 국제통화가 되기를 희구하고 IMF나 세계은행을 대체할 국제금융기구창설도 꿈꾸는 것 같았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학자들이 말하는 미국쇠퇴론과 이를 근거로 한 세력전이론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작년 12월 10일 한국고등교육재단에서 열린 특강에서 조지프 나이(Joseph Nye)교수는 미국은 절대적 기준으로나 상대적 기준의 어느 척도를 적용해도 전혀 쇠퇴하는 국가가 아니며 앞으로 세계경제의 미래를 판가름할 에너지, 인구, 창의력의 면에서 미국의 위상에 영향을 줄만큼 중국의 능력이 결코 따라올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중국이 현재 누리는 7.5%의 성장률이 지속되기는 힘들 것이며 앞으로 3.8%대로 내려오는 것이 중국경제가 정상화되는 시점이라고 전망하고 중국의 1인당 GDP가 1만 달러 정도로 올라가도 1당 독재가 통하겠느냐고 물었다.

현재 시진핑 정부의 공안통치예산이 인민해방군 예산을 능가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 이 말에 담긴 뜻을 한번쯤은 깊이 음미해야 할 것 같다. 특히 이 자리에서 나이교수는 설사 아베노믹스가 실패해도 미일 간의 협력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못 박는 대목도 필자에게는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조지프 나이 교수는 이날의 특강에서 미국국방비가 의회의 결정으로 금후 점차 줄어가야 하고 미국국내정치에서 여야 간의 극한대결 같은 미국체제내의 문제점에 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 그러나 총론차원에서 보면 중국에 대한 나이 교수의 평가는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시사(示唆)하는 바가 컸다.

 

작년 하반기부터 중국은 미국을 상대로 벌인 신형대국관계 공세가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일본과의 관계도 정치안보 면에서 원만하지 않기 때문에 외교의 중점을 점차 동북아시아 보다는 동남아시아의 아세안지역과 인도를 포함한 서남아시아지역으로 옮기고 있다. 남방실크로드 건설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중앙아시아와 러시아를 포용하는 북방실크로드건설도 병행 추진하고 있다. 중국의 이러한 태도에서 우리는 전 지구적 규모의 대국을 지향하는 중국 측의 야심도 엿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14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이 실크로드 정책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주변국 다독이는 정책에 역점을 두는 측면에도 주목해야 한다. 특히 시진핑 주석은 친성혜용(親誠惠容)을 대주변국 외교의 캐치플레이스로 내세우고 주변국들이 자국의 정책에 협력하도록 유도하는 외교를 중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국을 안보와의 연계에서 동북아중심에서만 보던 기왕의 관점에만 머물지 말고 시진핑의 새로운 외교노선과 한중협력을 접목시킬 새로운 정책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4. 우리의 대응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대응은 무엇일까. 우리나라와 같은 강소국은 내치외교에서 철저히 현실주의(realism)노선을 추구해야한다. 북한의 핵무장과 미사일위협이 해소되지 않는 안보상황 하에서는 한미동맹을 굳건히 강화하면서 일본과의 관계도 안보와 역사문제를 분리해서 대처하는 지혜가 발현되어야 한다. 한일 간의 역사문제는 양국이 반드시 해결해야할 과제이나 역사문제에 묶여 안보협력 상의 손실이 수반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한편 지난해 말 추궈홍(邱國洪)주한 중국대사는 미국이 주한미군 부대에 사드(THAAD)미사일을 배치하겠다고 발표했는데 한국이 이 방침을 수용하면 그것은 한중관계를 손상시킬 수 있다고 공공연히 밝혔다. 흡사 한말의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연상시키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국방예산이 매년 줄어드는 상황에서 북한 핵과 미사일위협을 머리에 얹고 사는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미국이 자국군대의 안전을 위해 자국 부대에 사드 미사일을 배치하면서 이것이 대한방위공약이행노력의 일환이라고 할 때 이를 정면으로 반대할 수는 없다.

한국은 중국에 대해 주한미군은 조약상 중국을 반대하기 위한 군사력이 아니며 북한의 남침저지에 목적을 둔 것임을 재삼 설득하고 강조해야 할 것이다.

 

최근 한중관계는 박근혜 정부성립과 더불어 획기적으로 개선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은 앞선 정권들과는 달리 북한 핵에 대한 반대를 말과 행동으로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한중FTA를 체결함과 동시에 중국대륙에서 벌인 한국 측의 항일독립투쟁의 족적(足跡)을 중국정부가 자국 예산을 들여 복원해 주는 성의도 보여주고 있다.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중국 측의 선의가 한미동맹을 약화시키거나 한국안보이익을 희생시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한국의 대중외교는 철저히 현실주의의 원칙에 서서 경제와 안보를 조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이점에서 중국이 주창하는 지역경제협력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필요한 지분(持分)도 선제적으로 확보하는 등 실질적 협력조치를 가시화해야 한다. 특히 경제문제로서 구체화되고 있는 아시아 인프라 투자은행(AIIB)설립에도 적극 참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무역결제수단의 하나가 된 위안화의 활용성도 높여줘야 할 것이다. 특히 한중FTA가 체결된 만큼 양국 간의 경제협력도 한층 더 수준을 높여 나가야 할 것이다. 현시점에서 한국은 안보협력과 경제협력을 분리해서 대처하는 안경(安經)분리정책을 한국외교의 확고한 원칙으로 정립해야 한다.

또한 시진핑의 중국이 거국적으로 추진하는 실크로드 정책에는 그것이 북방이건 남방이건 간에 단순히 방관하기 보다는 투자를 통한 편승(Bandwagon)을 통해 동북아 평화협력구상이나 유라시안 이니셔티브와 연계되도록 경협외교를 강화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대내적으로는 6만 명을 상회하는 중국유학생들에 대해서도 이들을 맡는 대학당국들이 친한 인재(親韓 人材), 지한 인재(知韓 人材)로 육성하도록 협의를 강화해야 할 것이다. 특히 대 중국외교는 정부만이 아니고 민간외교를 폭넓게 활용할 때 더욱 효과적이다. 3000억 달러를 육박하는 경제교류와 1천만인의 인적교류의 한중협력시대에 정부만의 힘으로는 필요한 외교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

 

따라서 민간외교를 한층 더 중시해야 할 것이다. 정부가 안보외교에 중점을 둔다면 경제, 문화, 인문분야에서는 민간외교가 큰 역할을 하도록 적극 권장해야 할 것이다. 외교는 직업외교관만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인습적 사고를 버리고 민간 속에 잠재되어있는 자원을 폭넓게 개발 활용하는 열린 외교가 한중외교로부터 시작되는 2015년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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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난찡(南京)과 일본의 히로시마(廣島)

 

                                                                한중정치외교포럼 회장 이 영 일

 

난찡 대학살의 현장을 보면서

 

2014년 11월이 시작되는 날 필자는 난찡 대학의 초청으로 한중문화협회 대표단과 함께 난찡을 방문했다. 난찡은 남송을 거쳐 중국의 명나라가 창업했고 뒤에 쑨원((孫文)과 장제스(蔣介石)가 중화민국을 세웠던 도읍지로서도 유명하거니와 일본 침략자들이 일본의 원폭피해자보다 더 많은 중국인들을 총칼로 학살, 오늘날 중국인들의 반일감정의 발화점이 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우리 일행은 3박4일의 짧은 일정이기 때문에 공인된 14개의 관광지가운데 3곳만을 선택했다. 11월 3일에 온종일 남경대학남해연구협동창신(南京大學南海硏究協同創新)센터 팀들과 함께 가질 세미나와 필자가 3일 오후 난찡 대학 대강당에서 “한국통일과 중국의 협력문제”를 주제로 가질 특강시간까지를 감안하면 세군데 이상의 관광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난찡 루코(祿口)공항에 착륙한 후 우리는 숙소인 난찡대학 옆 신세기(新世紀) 호텔로 가기에 앞서 일본군의 난찡 대학살 기념관을 먼저 들르기고 했다. 난찡 대학살 기념시설을 돌아보다 중일전쟁 기간 중 일본군이 난찡에서 벌인 극악무도한 반인도적 범죄행위를 전 세계에 고발한 기념시설은 그 규모의 방대함과 정밀한 실상고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설의 입구광장에는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는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이 시설의 입구에 길게 옆으로 쓰여 있는 대형 간판에 새겨진 글씨내용이 섬뜩했다. 침화일군남경대도살우난동포기념관(侵華日軍南京大屠殺遇難同胞紀念館)이었다. 중국인들은 학살이 아닌 도살로 표현했다. 군인도 아닌 양민을 남녀노유를 불문하고 중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총과 대검으로 짐승처럼 살육했기 때문인 것 같다.

 

당시 일본도를 꺼내들고 누가 더 많은 중국인들을 살육했는가를 서로 경쟁한 일본군의 사진까지가 게재된 일본신문을 보면서 잔학해진 인간이야말로 금수보다 더 악독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일본인들의 DNA에 그런 잔혹성이 살아있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요즈음 도쿄거리에서 스피커로 반한연설을 해대는 일본우익들의 Hate Speech, 소위 일본역사수정주의를 부르짖는 일본정치인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바로 저러한 잔학DNA의 재생을 기도하는 것 아니냐하는 느낌까지 불러일으켰다.

 

이 기념시설의 이곳저곳을 살피는 중에 필자의 눈에 띄는 몇 개의 글귀가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너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이 이 기념관의 여러 군데에 써 붙인 벽보나 플래카드의 내용인데 가이관노, 불가이망각(可以寬怒, 不可以忘却-용서할 수는 있지만 잊지는 말자)는 것이다. 비슷한 취지로 전사불망 후사지사(前事不忘 後事之師-앞일을 잊지 말고 뒷날 스승으로 삼자)는 것이다. 중국의 대국다운 풍모를 여실히 들어 낸 말이다.

 

히로시마 평화공원과의 비교

 

필자는 1986년 나카소네 수상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하던 중 일본의 히로시마에 있는 평화공원(원폭기념관을 평화공원이라 부름)을 방문한 바 있다. 원폭의 실황을 자세히 정리하여 그 비인도성을 철저히 고발하는 내용인데 안내인이 해주는 해설을 들으면서 이 시설을 한 바퀴 돌고나면 누가 듣더라도 원폭을 자행한 미국에 대하여 뜨거운 분노의 주먹을 불끈 쥐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바로 이곳이 일본인 초등학생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기 일본국민 모두의 정치교육현장이 되고 있었다.

 

이 시설은 우연히 들른 외국방문객들의 마음에까지 뜨거운 분노를 느끼게 하는 곳인데 하물며 일본국민들에게는 어떻겠는가. 오늘날 좋아 보이는 미일관계의 장래도 그렇게 밝게만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곳에서는 미국이 왜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는지 그 까닭이나 전후관계는 전혀 말하지 않고 다만 원폭의 비인도성만 들추어내서 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본 원폭공원의 어느 곳에도 중국처럼 ‘용서하나 잊지 않는다.’는 식의 그러한 너그러운 표현은 아예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베(安倍晉太郞)정권은 청일전쟁 승리 후에 누리던 아시아 패자의 지위가 중국한테 무너지면서 느낀 국민적 좌절감을 이용하고 아시아재균형정책의 이름하에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정책에 편승하여 이른바 역사수정주의를 내걸고 집권했다. 여기에 일본우익들이 가세하고 있다. 지금 미일관계는 좋지만 일본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용미탈미(用美脫美)아닐까. 미국의 힘이 약화되는 틈을 타서 미국역할의 대행을 의미하는 집단자위권을 해석개헌을 통해 확보한 후 군비를 강화, 미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면서 청일전쟁승리이후에 누리던 옛 영광을 되찾자는 미망에 사로잡혀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반성 없는 인간이나 국가에 대해 결코 관대하지 않다. 침략적 과거를 통절히 반성하고 유럽인들과 함께 살겠다는 의지를 실천, 유럽 국가들로부터의 용서와 화해를 받는 독일인들에게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고 전 동아시아를 피로 물들게 하고 수많은 여성들을 위안부로 끌고 간 만행을 부정하면서 오히려 일본이 전쟁의 피해자라고 우기는 역사왜곡을 어느 나라, 어느 국민이 용서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아베의 역사 수정주의는 일본인들에게 잠깐 먹힐 수 있지만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고 왜곡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유럽만을 따라 배우겠다고 하다가 아시아 시대가 오니 이제는 아시아로 돌아오겠다고 한다. 탈아입구(脫亞入歐)에서 탈구입아(脫歐入亞)하겠다는 것이다. 그러한 선택이 통하려면 침략역사에 대한 치열한 자기반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역사수정주의를 펼치는 아베정권의 시효는 얼마 남지 않았다. 역사의 흐름에 역행하기 때문이다.

 

중산릉(中山陵)을 돌아보면서

 

일본의 난찡 대학살시설을 돌아본 후 이튿날 아침 우리는 중산릉(中山陵)을 찾았다. 아침 일찍 출발하지 않았더라면 오전구경이 어려울 만큼 참배객들로 인산인해였다. 일요일인데다가 가을의 좋은 날씨 탓도 한몫했다는 것이다. 난찡은 잘 알려진 대로 여름이 무척 더운 중국의 4대화로(火爐)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쑨원(孫文)선생을 기념하는 능이 이렇게 넓고 크고 높은 줄은 상상도 못했다. 중국의 기념시설들은 모두 큰 것은 사실이지만 중산릉은 우리 나이 또래 사람들이 여러 개의 사당 비슷한 대문을 거쳐 약 100고지까지 올라가야 하는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끄트머리에 도착해서는 숨이 찰 정도였다.

 

B.C. 221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이래 수 천 년 동안 중국의 주권은 황제 한사람에게만 있었다. 그러나 1910년 신해혁명으로 황제에게 있던 주권이 인민에게로 돌아왔다. 쑨원이 신해혁명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쑨원이 묻혀있다는 맨 높은 곳의 사당에는 민권(民權), 민생(民生), 민족(民族)을 새긴 현판이 걸려있었다. 이 말은 현재의 중국인들에게는 비전이기도 하고 부분적으로는 현실로 변했다. 비전으로 평가하는 중국인들에게나 현실로 받아들이는 중국인들에게나 중산릉은 생전에 한번은 꼭 참배해야 할 중국의 큰 지도자의 능이다.

 

대만인들이나 중국본토인들 모두 그를 국부로 추앙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한국인의 입장에서 쑨원 선생은 한국임시정부의 은인이기도 하다. 그는 1924년 신규식 당시 임시정부 국무령을 만난 자리에서 “조선은 반드시 독립되어야 하고 독립될 것이다. 중국은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1925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아들 쑨커(孫科)가 중화민국 입법원장으로 재임 중 한국임시정부를 재정적, 정치적, 외교적으로 지원하는 중한문화협회를 창설, 중화민국이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하도록 추진함과 동시에 수많은 원조를 제공해왔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쑨원은 생전인 1924년 일본의 고베(神戶)에서 행한 연설에서 일본에게 “공리강권을 추구하는 서양패권의 응견이 될 것인가, 아니면 인의도덕을 중시하는 동양왕도의 간성이 될 것인가”를 묻고 패권추구를 삼가 하라“고 충고했다. 이 충고를 받았던들 아시아인들에 대한 일본의 범죄는 없었을 것이고 오늘처럼 고립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본의 아시아 복귀는 통절한 과거청산과 회개가 필수적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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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 비핵화의 정치과정을 전망한다.

  이글은 헌정지 4월호에 기고되었으며 위키트리에 전재되었다(2014/03/20)

 

1.들어가면서

남북한관계가 대화모드로 바뀌고 있다. 2월 20일부터 24일까지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가 금강산에서 이루어졌다. 이에 앞서 남북한 간에는 판문점에서 고위급 접촉이 8년 만에 개시되었다. 북한 측의 선제의(先提議)로 열린 남북한의 고위급 만남은 남북한의 상호비방 중지를 합의하면서 이 모임을 이어가자는데 합의했다. 북한은 김정은의 신년사를 통해 남북관계개선의 의사를 밝혔고 박근혜 대통령도 금년 1월 6일 가진 신년기자회견에서 김정은의 남북관계개선언급이 위장평화공세일 수 있다고 경계하면서도 북한의 남북관계 개선의지가 진정성이 있는 것이기 위해서는 먼저 이산가족 상봉행사에 북한이 호응하라고 촉구했다. 북한은 그들의 제의가 위장공세가 아님을 행동으로서 보이겠다면서 남측이 내놓은 이산가족상봉행사를 수락하고 서해인근에서의 대남비방과 삐라 살포를 중단하였다.

북한의 대남태도는 1년 전 이맘때와 비교하면 너무 큰 변화다. 2012년 12월 12일 탄도 미사일발사, 2013년 2월 12일 제3차 핵실험, 3월 초에는 그들의 심리전 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통해 서울과 심지어 워싱턴까지를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위협하는가 하면 4월에는 휴전협정의 폐기까지를 호언하고 새로 출범한 박대통령정부를 향해 입에 올리기 힘든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던 북한이 2014년에 들어오면서 태도를 갑자기 바꾸고 그들의 한국과의 관계 개선의지가 위장이 아니라면서 이산가족 상봉을 수용하고 고위급접촉에 나섰다. 더욱이 한미양국이 1994년 이래 연례적으로 실시해오는 키 리졸브 훈련과 독수리훈련이 시작됨에도 불구하고 이 훈련에 대해 구두로는 반대하면서도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실천에 옮겼다. 북한은 왜 태도를 바꾸었는가. 이하에서 그 원인과 배경을 살피기로 한다.

 

2. 날로 심화되는 북한의 고립과 딜레마

 

① 고립 자초한 긴장도발

북한은 현재 내치, 외교 양면에서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있다. 당초 김정은은 후계자로 옹립되자마자 그가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선군정치를 충실히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대내외적으로 위협적인 태도를 과시했다. 김정일이 발전시킨 선군의 “위업(偉業)”을 계승한다는 취지에서 세계여론을 무시하고 미사일 발사와 제3차 핵실험을 자행했다. 그러나 결과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강도 높은 제재였다. 북한이 우방으로 믿었던 중국까지 제재결의에 가세했다. 북한은 이 결의가 부당하다면서 강도 높은 대남위협공세를 펼치고 한반도정세를 긴장시켰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북한의 어떠한 공세에도 한국군 지휘부가 일체의 “정치적 고려를 배제하고 당당히 맞대응”할 것을 전군에 명령하고 일전불사의 태도를 밝혔다. 그간 한국정부는 항상 확전방지를 명분으로 수세적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박대통령정부의 태도는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와는 전혀 달랐다. 정면 맞대응의 자세를 보였다. 북한의 기대나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었다.

 

②중국의 대북한 태도변화

이와 동시에 중국의 북한에 대한 태도에서도 큰 변화가 발생했다. 북ㆍ중양국은 1961년이래 외부의 침략을 받을 경우 즉각 군사원조를 제공키로 하는 동맹조약(朝中相互援助및 友好協力條約-1961〜2021)을 체결한 관계다. 그러나 북한은 이 조약을 신뢰하지 않고 상호 협의 없이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였다. 중국은 초기에는 북한이 미국을 상대로 하는 협상수단으로 핵과 미사일 공세를 취하는 것으로 낮게 평가하고 국제사회의 대북강경결의를 완화하면서 외교적 해결을 주선해주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북한의 제3차 핵실험은 중국의 이러한 북 핵 관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하였다. 특히 중국공산당 18차 당 대회에서 당서기로 선출된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2013년 3월 자기가 국가주석으로 정식 취임할 때까지 한반도에서의 긴장조성을 자제할 것을 당정(黨政)외교경로를 통해 북측에 요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은은 이 요구를 묵살하고 미사일과 핵실험을 단행, 자기가 중국의 태도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존재임을 과시했다.

시진핑 주석은 국가부주석으로 취임한 후 제1차 해외방문지로 북한을 선택할 만큼 북한에 대해서는 우호적이었던 인물이었다. 시진핑 주석의 선친인 시중쉰(習仲勳)부수상은 김일성과 친밀한 사이였다. 그러나 김정은의 제3차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는 시진핑의 대북관에 변화를 일으켰다. 북한의 핵개발이 대미협상용이 아닌 핵 무장력을 갖추자는데 있고 결국 북한은 중국과 맺은 동맹관계의 틀에서 벗어나려한다는 중국내부의 의구심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결과 제4차 유엔안보리의 대북제재결의에는 중국도 적극 참가했고 김정은의 중국초청도 아직까지 유보상태다. 2013년 5월 22일 김정은은 북한인민군 총정치국장인 최룡해를 중국에 특사로 파견, 시진핑 주석을 접견했는데 이때 시진핑 주석은 중국은 어느 경우에도 북한의 핵보유를 인정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한반도의 비핵화가 중국의 확고한 입장이라고 밝혔다. 북 핵 불용입장을 중국이 확실히 밝힌 것이다.

 

③ 경제적 궁핍의 지속

한편 내치에서도 북한의 경제난은 계속되었다. 유엔제재로 정상적인 대외무역이 사실상 어려워진 가운데 배급체제의 붕괴과정에서 기형적으로 발생한 시장경제는 갈수록 그 영향력을 북한내부에서 확대해 가고 있다. 북한의 도시주민들은 먹고 살기위해서는 당이나 정부보다는 시장에 더 의존했다. 주민을 굶기지 않겠다는 김정은의 약속은 지켜지기 않고 있다. 박봉주 총리 등 이른바 개혁파들을 실무부서에 배치했지만 자금, 자재, 기술, 에너지가 부족한 상황에서 뾰쪽한 대책이 나올 수 없다. 시장화의 확산에 발맞춰 중국인들이나 화교가 중심이 되어 소비시장으로서의 마트나 큰 상점을 평양에 세우고 기타 도시에도 유사한 시장이 들어서고 있지만 주민들의 빈곤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특히 시골이나 농촌 주민들의 식량난, 의료, 에너지의 부족은 조금치도 나아지지 않았고 탈북행렬도 끊이지 않았다. 장성택의 처형이 공개되면서 세계에 비친 김정은의 이미지는 21세기 최악의 독재자, 살인마로 투영되었다. 이런 정권을 상대로 어느 나라가 투자하겠으며 경제협력을 시도하겠는가.

또 정권유지에 필요한 외화자금 조달문제를 놓고 조선노동당 행정부와 조직부간의 갈등이 심화된 상황에서 김정은은 조연준 부부장을 필두로 하는 조직부의 책략에 휘둘려 장성택 숙청이라는 희대의 살인극을 연출하였다.

3. 신 6자회담론의 등장

 

북한이 내치, 외교상의 난국을 푸는 방법은 우선 핵개발과 경제발전을 동시에 이루겠다는 이른바 핵ㆍ경제 병진정책을 포기하고 비핵ㆍ개방의 길을 택해야 한다. 북한이 핵무장을 추구하는 한 북한에 대한 외세의 개입은 끊일 날이 없으며 한반도 통일에도 난관을 조성하게 된다. 한반도 주변의 어느 강대국도 전략무기로서의 핵과 미사일을 보유한 한반도의 통일을 지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반도 주변에는 남북한이 1대1로 맞서 제압할 국가가 하나도 없다. 지구 최강국들로만 둘러 쌓여있는 우리 한반도는 항상 외세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즉 국제정치에서 말하는 “지정학적 저주”(Geopolitical Curse)를 감수해야할 운명을 지녔기 때문이다.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6자회담은 2003년부터 10개년동안 개최되었지만 북한이 보이콧함으로써 아무 성과 없이 끝났다. 유엔안보리는 4차에 걸친 대북제재결의를 단행하였고 그 효력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재작년부터 중국은 6자회담 재개를 위한 외교적 노력을 강화하고 있지만 북한의 태도 변화 없이는 6자회담에 응하지 않겠다는 한미양국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고무적인 사실은 6자회담이 중단된 상황 하에서도 한국의 주도하에 북한의 핵보유를 용인하지 않는다는 합의가 6자회담 참가국들 간에 확고히 뿌리를 내렸다는 사실이다.

작년 초부터 중국은 이른바 표본겸치(表本兼治)를 명분으로 6자회담재개를 제안하고 나왔다. 즉 북ㆍ핵 폐기라는 겉에 나오는 상태를 표(表)로 하고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 안보체제형성이라는 기본토대를 본(本)-여기에 휴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 포함 한다-으로 하는 협상을 한꺼번에 다루어 해결하자(兼治)는 주장을 내놓고 6자회담재개(필자는 신6자회담이라 하자)를 요구하고 있다. 지난 2월초 중국을 방문한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은 중국과의 대화에서 북한이 2005년 6자회담에서 도출된 9.19합의를 수용, 이행토록 할 만큼 중국이 현재 보다 더 강한 영향력을 북한에 행사할 용의가 있는지를 타진, 긍정적 반응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이 추세라면 앞으로 북 핵 포기를 위한 신6자회담의 정치과정이 조만간 가시권(可視圈)에 들어올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이러한 정세변화가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우선 남북한관계가 북한의 도발에 의한 긴장국면에서 벗어나 대화와 협력국면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즉 대결구조에서 대화구조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9.19합의는 북한이 핵 무장을 하나 씩 해체하는 단계에 연동하여 북한에 대한 경제지원을 제공하고 미국과 북한간의 관계개선을 추진하자는 것이기 때문에 북한이 이 합의를 진정성 있게 수용하고 실천할 의지를 보일 때 비로소 중단된 6자회담이 새롭게 재개될 수 있다. 결국 북한 비핵화 프로세스는 북한이 9.19합의를 제대로 이행하고 한국과 주변국들이 북한의 조치에 상응하는 정치․경제적 지원을 제공할 때 비로소 정상궤도에 진입하게 될 것이다. 이 길을 트는 첫 단계가 남북한 관계의 개선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북한이 최근에 벌이는 대남평화공세의 이면에 이러한 주변정세가 깔려 있음은 주목해야 한다.

 

4. 북한의 살길은 핵무장의 포기다

 

북한의 비핵개방은 주변국 모두의 바람이다. 북한이 핵 포기에 나서면 한국은 물론이거니와 6자회담 다른 참가국들도 상응하는 경제적 대가를 지불하는데 협력할 것이고 북한 인권개선에 큰 관심을 보여 온 유럽 국가들도 지원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진정성 있는 핵 포기가 가시화되고 행동화된다면 금강산 관광문제나 5.24제재조치도 긍정적으로 재검토되고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비상임이사국인 한국의 발의로 유엔 안보리의 대북한 제재도 해제의 수순을 밟을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주창한 동북아 평화협력구상에 따라 북한 경제재건을 위한 동북아 개발은행 창설도 모색될 수 있다.

이제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시작으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첫 단추는 끼워졌다. 앞으로 상봉행사의 정례화와 이산가족 재결합도 진행되어야 한다. 남북한 고위급 접촉이 정례화 되어 고위급 회담으로 발전하면 비무장지대의 평화공원화, 제2, 제3의 개성공단도 가능하며 북ㆍ중 합작으로 추진되는 황금평 개발이나 나선지구 개발 사업에도 한국이 참가할 수 있다. 또 김정은이 현지지도로 만들었다는 마식령 스키장도 한국의 스키 메니아들이 이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의 유라시안 이니셔티브(Eurasian Initiative)에 따라 시베리아 가스의 한반도 관통 파이프라인 건설도 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북한 지도자들이 선군의 위업으로 떠받치는 핵과 미사일은 북한주민들에게 공포와 굶주림, 그리고 탈북의 아픔을 주었지만 비핵개방은 경제발전과 삶의 풍요, 생활안정을 주게 될 것이다. 이제 선택은 북한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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