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난찡(南京)과 일본의 히로시마(廣島)

 

                                                                한중정치외교포럼 회장 이 영 일

 

난찡 대학살의 현장을 보면서

 

2014년 11월이 시작되는 날 필자는 난찡 대학의 초청으로 한중문화협회 대표단과 함께 난찡을 방문했다. 난찡은 남송을 거쳐 중국의 명나라가 창업했고 뒤에 쑨원((孫文)과 장제스(蔣介石)가 중화민국을 세웠던 도읍지로서도 유명하거니와 일본 침략자들이 일본의 원폭피해자보다 더 많은 중국인들을 총칼로 학살, 오늘날 중국인들의 반일감정의 발화점이 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우리 일행은 3박4일의 짧은 일정이기 때문에 공인된 14개의 관광지가운데 3곳만을 선택했다. 11월 3일에 온종일 남경대학남해연구협동창신(南京大學南海硏究協同創新)센터 팀들과 함께 가질 세미나와 필자가 3일 오후 난찡 대학 대강당에서 “한국통일과 중국의 협력문제”를 주제로 가질 특강시간까지를 감안하면 세군데 이상의 관광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난찡 루코(祿口)공항에 착륙한 후 우리는 숙소인 난찡대학 옆 신세기(新世紀) 호텔로 가기에 앞서 일본군의 난찡 대학살 기념관을 먼저 들르기고 했다. 난찡 대학살 기념시설을 돌아보다 중일전쟁 기간 중 일본군이 난찡에서 벌인 극악무도한 반인도적 범죄행위를 전 세계에 고발한 기념시설은 그 규모의 방대함과 정밀한 실상고발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설의 입구광장에는 일본의 만행을 고발하는 조각상들이 즐비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이 시설의 입구에 길게 옆으로 쓰여 있는 대형 간판에 새겨진 글씨내용이 섬뜩했다. 침화일군남경대도살우난동포기념관(侵華日軍南京大屠殺遇難同胞紀念館)이었다. 중국인들은 학살이 아닌 도살로 표현했다. 군인도 아닌 양민을 남녀노유를 불문하고 중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총과 대검으로 짐승처럼 살육했기 때문인 것 같다.

 

당시 일본도를 꺼내들고 누가 더 많은 중국인들을 살육했는가를 서로 경쟁한 일본군의 사진까지가 게재된 일본신문을 보면서 잔학해진 인간이야말로 금수보다 더 악독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일본인들의 DNA에 그런 잔혹성이 살아있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요즈음 도쿄거리에서 스피커로 반한연설을 해대는 일본우익들의 Hate Speech, 소위 일본역사수정주의를 부르짖는 일본정치인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바로 저러한 잔학DNA의 재생을 기도하는 것 아니냐하는 느낌까지 불러일으켰다.

 

이 기념시설의 이곳저곳을 살피는 중에 필자의 눈에 띄는 몇 개의 글귀가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다. 너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이 이 기념관의 여러 군데에 써 붙인 벽보나 플래카드의 내용인데 가이관노, 불가이망각(可以寬怒, 不可以忘却-용서할 수는 있지만 잊지는 말자)는 것이다. 비슷한 취지로 전사불망 후사지사(前事不忘 後事之師-앞일을 잊지 말고 뒷날 스승으로 삼자)는 것이다. 중국의 대국다운 풍모를 여실히 들어 낸 말이다.

 

히로시마 평화공원과의 비교

 

필자는 1986년 나카소네 수상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하던 중 일본의 히로시마에 있는 평화공원(원폭기념관을 평화공원이라 부름)을 방문한 바 있다. 원폭의 실황을 자세히 정리하여 그 비인도성을 철저히 고발하는 내용인데 안내인이 해주는 해설을 들으면서 이 시설을 한 바퀴 돌고나면 누가 듣더라도 원폭을 자행한 미국에 대하여 뜨거운 분노의 주먹을 불끈 쥐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바로 이곳이 일본인 초등학생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기 일본국민 모두의 정치교육현장이 되고 있었다.

 

이 시설은 우연히 들른 외국방문객들의 마음에까지 뜨거운 분노를 느끼게 하는 곳인데 하물며 일본국민들에게는 어떻겠는가. 오늘날 좋아 보이는 미일관계의 장래도 그렇게 밝게만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곳에서는 미국이 왜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는지 그 까닭이나 전후관계는 전혀 말하지 않고 다만 원폭의 비인도성만 들추어내서 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본 원폭공원의 어느 곳에도 중국처럼 ‘용서하나 잊지 않는다.’는 식의 그러한 너그러운 표현은 아예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베(安倍晉太郞)정권은 청일전쟁 승리 후에 누리던 아시아 패자의 지위가 중국한테 무너지면서 느낀 국민적 좌절감을 이용하고 아시아재균형정책의 이름하에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정책에 편승하여 이른바 역사수정주의를 내걸고 집권했다. 여기에 일본우익들이 가세하고 있다. 지금 미일관계는 좋지만 일본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용미탈미(用美脫美)아닐까. 미국의 힘이 약화되는 틈을 타서 미국역할의 대행을 의미하는 집단자위권을 해석개헌을 통해 확보한 후 군비를 강화, 미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면서 청일전쟁승리이후에 누리던 옛 영광을 되찾자는 미망에 사로잡혀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는 반성 없는 인간이나 국가에 대해 결코 관대하지 않다. 침략적 과거를 통절히 반성하고 유럽인들과 함께 살겠다는 의지를 실천, 유럽 국가들로부터의 용서와 화해를 받는 독일인들에게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고 전 동아시아를 피로 물들게 하고 수많은 여성들을 위안부로 끌고 간 만행을 부정하면서 오히려 일본이 전쟁의 피해자라고 우기는 역사왜곡을 어느 나라, 어느 국민이 용서하고 받아들일 것인가. 아베의 역사 수정주의는 일본인들에게 잠깐 먹힐 수 있지만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고 왜곡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유럽만을 따라 배우겠다고 하다가 아시아 시대가 오니 이제는 아시아로 돌아오겠다고 한다. 탈아입구(脫亞入歐)에서 탈구입아(脫歐入亞)하겠다는 것이다. 그러한 선택이 통하려면 침략역사에 대한 치열한 자기반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역사수정주의를 펼치는 아베정권의 시효는 얼마 남지 않았다. 역사의 흐름에 역행하기 때문이다.

 

중산릉(中山陵)을 돌아보면서

 

일본의 난찡 대학살시설을 돌아본 후 이튿날 아침 우리는 중산릉(中山陵)을 찾았다. 아침 일찍 출발하지 않았더라면 오전구경이 어려울 만큼 참배객들로 인산인해였다. 일요일인데다가 가을의 좋은 날씨 탓도 한몫했다는 것이다. 난찡은 잘 알려진 대로 여름이 무척 더운 중국의 4대화로(火爐)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쑨원(孫文)선생을 기념하는 능이 이렇게 넓고 크고 높은 줄은 상상도 못했다. 중국의 기념시설들은 모두 큰 것은 사실이지만 중산릉은 우리 나이 또래 사람들이 여러 개의 사당 비슷한 대문을 거쳐 약 100고지까지 올라가야 하는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끄트머리에 도착해서는 숨이 찰 정도였다.

 

B.C. 221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이래 수 천 년 동안 중국의 주권은 황제 한사람에게만 있었다. 그러나 1910년 신해혁명으로 황제에게 있던 주권이 인민에게로 돌아왔다. 쑨원이 신해혁명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쑨원이 묻혀있다는 맨 높은 곳의 사당에는 민권(民權), 민생(民生), 민족(民族)을 새긴 현판이 걸려있었다. 이 말은 현재의 중국인들에게는 비전이기도 하고 부분적으로는 현실로 변했다. 비전으로 평가하는 중국인들에게나 현실로 받아들이는 중국인들에게나 중산릉은 생전에 한번은 꼭 참배해야 할 중국의 큰 지도자의 능이다.

 

대만인들이나 중국본토인들 모두 그를 국부로 추앙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한국인의 입장에서 쑨원 선생은 한국임시정부의 은인이기도 하다. 그는 1924년 신규식 당시 임시정부 국무령을 만난 자리에서 “조선은 반드시 독립되어야 하고 독립될 것이다. 중국은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1925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아들 쑨커(孫科)가 중화민국 입법원장으로 재임 중 한국임시정부를 재정적, 정치적, 외교적으로 지원하는 중한문화협회를 창설, 중화민국이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하도록 추진함과 동시에 수많은 원조를 제공해왔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쑨원은 생전인 1924년 일본의 고베(神戶)에서 행한 연설에서 일본에게 “공리강권을 추구하는 서양패권의 응견이 될 것인가, 아니면 인의도덕을 중시하는 동양왕도의 간성이 될 것인가”를 묻고 패권추구를 삼가 하라“고 충고했다. 이 충고를 받았던들 아시아인들에 대한 일본의 범죄는 없었을 것이고 오늘처럼 고립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본의 아시아 복귀는 통절한 과거청산과 회개가 필수적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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