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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일 전 조선일보 논설주간의 재심청구사건에서 행한 이영일 증언

(이 글은 이영일의 홈페이지 www.rep201.or.kr의 통일꾼 칼럼에 올려있음)
(2010년 8월 17일 오후 2시 서울형사지법 425법정에서 이영일이 증언한 내용이며 사전준비된 문면에 따라 변호사와 검사의 질의 및 재판장의 질의에 답한 내용을 정리한 것임)

가 이영일의 서울대 민족통일연맹 관련 입장

1. 본인은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정치학과 4학년 재학 중인 1961년 9월 30일 남북학생회담제안과 관련되어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제6조" 위반 피고 사건으로 5.16군사혁명재판에서 7년 징역형을 선고 받고 상급심에서 상고가 기각된 후 1962년 4월 경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형 면제 확인 조치로 출감하였으며 1963년 복학하여 1964년 졸업한 사실이 있음.

2. 본인은 1960년 4.19혁명직후 당시 고려대학교의 김성식 교수가 쓴 독일학생 운동사를 읽으면서 비스마르크 치하의 독일에서 7개 선제후 국 대학생들이 한 곳에 모여 통일을 공동으로 부르짖음으로 해서 독일통일의 길을 열었다는 사실에 큰 감명을 받고 한국에서도 대학생들이 주체가 되는 통일운동을 모색하기에 이르렀으며 1960년 10월 경 동경에 망명 중이던 동아일보 주필을 역임했던 중립화통일운동가인 김삼규 선생이 귀국, 고려대학교에서 중립화통일론에 대한 강연을 듣고 신선한 충격을 받아 1960년 10월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강당에서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을 결성, 공보부장 및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선전위원장을 맡아 활동한 바 있음

3. 4.19혁명 후 한국 대학사회에는 학생운동의 큰 흐름이 신생활운동, 후진성 극복운동, 민족통일운동의 세 가지로 집약되었는데 본인은 후진성 극복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후진사회연구회를 결성했으며 이에 앞서부터 참여하고 있던 정치학과 중심의 신진회 서클들과 제휴하여 독재정권을 타도했던 열정으로 남북을 가르는 3.8선을 타도하는데도 학생들이 앞장서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성세대들이 독재체제에 안주했던 것처럼 분단체제에도 안주하여 통일문제를 외면하고 있는 상황을 타개하려면 분단체제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은 우리 학생들이 남북통일의 주역이 되어야 통일의 길이 열릴 것이라는 생각 하에 남북한 학생들이 판문점에서 만나 대화를 해보자는 뜻을 모으게 되었음

4. 본인 등은 신진회라는 정치학과 중심 서클의 회원이었기 때문에 1961년 4.19 1주년을 전후한 시기에 당시 필화사건으로 이름이 학생들 간에 많이 알려진 정치학과 선배로서의 류근일 형을 학교에서 만나 민족통일연맹에 참여해줄 것을 부탁드렸던바 옳은 일인데 함께 하자고 동의했으며 그러나 류근일 형은 2년 후배들이 중심이 되어 뛰는 민족통일연맹 활동자체에는 거의 참여한바 없었음

5. 당시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결성은 학칙 상으로나 현행법 상 아무런 위법사유가 없는 합법단체였으며 200여명의 학생들이 자유롭게 가입하고 회의에서도 통일운동의 방법을 놓고도 격의 없는 토론을 벌였으며 정치학과 출신인 본인과 법대출신의 강우혁과의 민족통일연맹 창립당일에 벌인 노선을 두고 전개된 논쟁은 많은 흥미를 일으켰던 것으로 지금도 회상됨

6. 1961년 5월 3일 남북학생회담을 제의할 당시에도 사전에 지금은 고인들이 되신 통일부장관을 역임하셨던 당시 서울대 정치학과의 이용희 교수, 서울대총장을 역임하셨던 사회학과의 최문환 교수 등을 만나 의견을 구했던바 "보수, 혁신 양진영의 정치권이 자기들의 필요에 맞게 여러분들의 순수한 제안을 악용할 우려가 있으니 문제제기수준을 넘는 행동은 자제하고 연구단체로서 민통의 성격을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충고를 주셨던 사실이 있음.

7. 남북학생회담제의는 당시 정치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켜 민주당 정부의 표의석(?) 장면총리 비서관이 본인 등을 불러 직접 대화를 한 바 있고 당시 민주당 대변인인 신상초 의원과 본인이 민국일보 남재희 기자주선으로 언론대담을 갖는 등 학생 회담에 대한 대학생들의 입장을 국민들에게 솔직히 말씀 드린 바 있음 특히 이 자리에서 본인은 민주당정부의 학생회담 반대주장에 대해 민족이익을 정권이익에 종속시키는 한 통일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백색독재정권을 타도한 한국의 대학생처럼 북한대학생들도 적색독재타도에 나서야 분단체제에 안주하지 않는 순수한 민족운동으로서의 통일운동이 가능하다고 주장했음

8. 따라서 당시의 민족통일연맹운동은 결코 반국가적이거나 당시의 법질서를 파괴하는 행동이 아니었으며 학생운동지도부도 항상 교수님들의 의견도 구하고 정부 측과 만나 우리 주장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활동수준도 내부토론을 통해 조절하는 등 민주국가에서 통용될 정당하고 합법적인 활동을 벌였음

9. 그러나 군사정권은 쿠데타의 명분조성의 일환으로 서울대 민족통일연맹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와 같은 일부 극단적인 혁신계의 구호를 마치 우리들이 떠들어 댄 것처럼 단죄하고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이라는 소급법을 제정하여 일제시대의 치안유지법보다 더 가혹한 형을 언도하는 등의 혁명재판을 진행하였으며 이는 법적이라기보다는 민주정부를 뒤엎은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이벤트로 혁명재판이 활용되었던 것으로 사료됨

나. 류근일 선배 관련 사항

1. 류근일 형은 민족통일연맹에서는 별 활약을 한 바 없으며 앞에서도 기술한 바와 같이 후배들이 참여를 권고할 때 같이 협력하자고 약속을 한 수준이었으며 일상 회의나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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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시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은 1961년 5월 3일 오전 10시 당시 서울법대 구내식당에서 대의원 총회를 열고 남북학생회담제안결의안을 채택할 예정이었는데 당시 대의원총회 의장이었던 서울법대 4년 윤용남이 定時에 참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인이 윤용남을 찾기 위해 밖에 나갔다가 대학본부에서 신학기 등록을 마치고 법대 쪽으로 걸어 나오고 있는 류근일 선배를 만나 대의원총회가 의장불참으로 회의진행이 지연되고 있는 상황을 설명하고 잠시 임시의장으로 회의 진행을 맡아달라고 부탁하였던바 이를 수락하여 그 자리에서 임시의장에 선출되어 남북학생회담 결의문 채택 시 의사진행을 맡은 후 귀가한 사실이 있음

2. 며칠 후 당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약칭 민자통)라는 단체에서 민족통일연맹의 남북학생회담제안을 지지하기 위한 군중대회를 동대문운동장에서 개최한다고 하면서 본인과 류근일 선배를 이 행사의 연사라고 일방적으로 발표했으나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은 학생운동의 순수성을 왜곡할 우려가 있는 정당 사회단체 행사에 불참할 것을 결의하여 언론에 발표하고 본인과 류근일 선배는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집회에 불참하였는데 이 군중대회에서 채택한 구호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였던 것으로 기억됨

3, 본인은 혁명재판의 구형 공판 시 당시 朱鎭鶴 검찰관이 남북학생회담을 공식으로 제안한 본인에게는 7년 징역형을 구형하고 류근일 선배와 이수병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는데 본인은 최후진술을 통해 류근일 선배에 대한 구형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이 사건과 아무 관련 없는 류근일 선배에게 구형한 형을 제가 떠맡겠다고 강력히 항의한바 있으며 이때 李會昌 심판관(당시 공군대위로 기억함)이 본인을 꾸짖으며 앉으라고 말하고 류근일 형도 본인을 잡아끌어 앉게 하는 등의 법정 소란을 일으킨 바 있음

4. 이날 검찰관은 구형공판에서 남북학생회담이 큰 물의를 일으켜 결과적으로 적을 이롭게 한 반국가활동이었다고 말하고 그러나 피고인들의 동기의 순수성은 인정된다고 의견을 말하면서 구형을 했는데 그러면서도 류근일 선배에 대해서는 일벌백계 론을 내세워 무기징역을 구형했고 재판부는 무기형을 15년형으로 감형판결 했지만 결국 7년 동안이라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절을 서울교도소와 안양교도소에서 보내야 했음

5. 쿠데타 정권의 탄생을 정당화하려는 혁명재판에서 억울한 사람의 아픔과 고뇌가 많았겠지만 류근일 선배처럼 자기 행위에 전혀 합당하지 않은 벌을 뒤집어쓰고 억울한 희생을 강요당한 사람도 없을 것임

6. 류근일 선배가 감옥에 있는 동안 위장병이 심각해서 병보석으로 석방해 보기 위해 본인을 비롯한 후배들이 기족들과 협력해서 수도의과대학병원(지금은 고려대학병원)에서 진단을 받게 했지만 병보석 사유에 해당되지 않는 다고해서 우리 후배들의 석방 노력이 좌절된바 있음

7. 본인은 5.16혁명재판에서 유죄를 받고 1년여 세월을 서대문 구치소에서 보냈고 그것으로 인해 취업도 할 수 없는 국내추방상태를 수년간 살아야 했지만 그러나 1969년 이후에는 상황이 다소 풀려 국토통일원에 촉탁으로 들어가 10년 동안 통일원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남북적십자회담 전략지원반장, 통일원 정치외교정책담당관, 교육홍보실장, 통일교육원장을 역임, 홍조근정훈장을 받았으며 국회로 진출해서는 남북한 고위급 회담 대표, 전두환 총재비서실장, 국회문교공보위원장 등 3선 국회의원을 역임했음

8. 류근일 선배 역시 조선일보를 통해 친북좌파를 비판하는 논설을 통해 국민적 감동을 일으켰음은 주지하는 바임. 결국 5.16군사혁명재판은 국가에 유해한 위험분자를 배제한 재판이었다기보다는 국가발전에 공헌할 능력 있는 젊은 지성인들을 권력 정치적 필요성 때문에 희생시킨 정치 이벤트였다고 규정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임.

9. 끝으로 호소 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제 군사쿠데타가 발생한지도 반세기에 이르렀으며 박정희 대통령이 이룩한 국가발전이나 업적은 그 나름대로 한국사의 일부가 되었음은 인정하지만 이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꾸며진 혁명재판의 역사를 무조건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재판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여 청춘을 희생한 사람의 권리까지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그늘진 곳에 다시금 빛이 쬐이는 민주화시대가 열린 오늘날 억울한 희생자들의 권리가 더 이상 불문에 붙여져서는 안 되며 반드시 그 억울함을 뒤늦게나마 밝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10. 이제 5.16의 역사는 더 이상의 정당화가 필요 없으며 다만 5.16으로 말미암아 희생된 자들의 억울한 시정과 원상회복을 위한 과업만이 우리 앞에 남아 있는 과제일 것입니다. A라는 시점에서 억울하게 고생했던 사람이 B라는 시점에서는 그 억울함이 밝혀질 수 있는 사회가 그나마 희망 있는 사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재판은 어느 사회에나 있었고 그에 따른 희생자도 생기게 마련이지만 정치재판에서 생긴 억울함이 반드시 밝혀져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향해 그 효력을 소멸시키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정도라고 믿으면서 증언을 가름합니다.


잘못된 재판, 50년간 바로잡지 못한 것 사과"(조선일보 2010년 9월 11일)
법원, 민통련사건 관련
북한을 찬양했다는 혐의로 5·16쿠데타 직후 혁명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류근일(72·사진) 전 조선일보 주필이 49년 만에 재심(再審)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3부(재판장 홍승면)는 10일 류 전 주필에 대한 재심 선고 공판에서 "공소 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없고, 이후 피고인의 사상과 인생을 되짚어 보더라도 매우 부당함을 확인할 수 있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류 전 주필은 서울대 정치학과 재학 중이던 1961년 4월 통일문제를 연구하던 학생 단체인 민족통일연맹(민통련) 소속으로 남북 학생회담을 제안했다가 기소돼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7년6개월간 수감생활을 했다.

재판부는 "민통련의 결의문과 성명서는 민족의 평화 통일을 지향하면서 남북 교류 차원에서 남북 학생회담 등을 주장한 것일 뿐 북한 정권이나 정책 혹은 북한의 통일 방안에 찬동하는 내용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어 "불법적인 수사와 분명하지 않은 증거에 의해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이를 50년간 바로잡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며 "법원을 대표해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또 "지금 과거의 잘못된 재판들을 바로잡는 것은 피고인과 같은 국민의 희생으로 이룩한 민주화의 성과라는 점에서 피고인의 고난과 희생이 헛된 것이 아님을 말씀드린다"고 덧붙였다.

류 전 주필은 판결 선고 후 "50년 만에 햇빛을 보았다"며 "당시 행동이 20대의 설익은 행동이었을지 몰라도 민주 선진국에 도달하기 위한 진통이었다고 생각한다. 패자 부활전이 가능한 대한민국에 긍지를 느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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