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65주년날에 감상한 오페라 투란도트 (이글은 憲政誌 9월호 118p-120p에 게재되었음) 

                              한중문화협회 총재  이영일

광복절 65주년을 기념하는 서울경동교회의 일부 예배를 마치고 나는 아내와 함께 오후 3시 서울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초연하는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를 감상했다. 작년 가을부터 우리 내외는 좋은 오페라를 빠짐없이 감상하는 행운을 안았다. 경동교회 성가대원 들 중에 오페라 현역출연진들이 많은 덕분에 때로는 표 파는데 협력해야 하는 부담도 있었지만 우리 가족들이 팔아준 표 값보다 훨씬 더 많은 오페라 초대를 받게 되었고 또 예술관련 회사를 경영하는 친구가 우리 내외를 음악이나 오페라 예술에 상당한 소양을 가진 것으로 착각(?)해서인지 자기에게 오는 표를 많이 할애해주어 세종문화회관에서 돈 카를로, 마농 레스코를,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칼멘, 라 트라비아타를, 그리고 이번에는 오페라하우스에 딸린 소형극장 토월극장에서 투란도트를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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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절 65주년을 맞아 새로 준공된 광화문과 그 앞에서 거행되는 기념행사에도 조그마한 홍조근정훈장을 서랍에서 꺼내 앞가슴에 달고 참가하는 치기를 발휘할까도 생각해 보았다. 고등학교 때 국어교과서에 실린 설의식 선생의 "헐려짓는 광화문"의 기억이 너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침 일요일이 광복절인관계로 교회에서 경동교회를 창립한 김재준 목사님 작사의 찬송 582장 "깊은 밤 어둠에 잠겨"를 힘차게 불렀고 또 예배말미에 "흙 다시 만저 보자"를 리드로 하는 광복절 노래도 눈시울 붉히는 감동 속에서 따라 불렀기 때문에 내 나름의 기념식은 끝난 셈이었다. 그래서 우리 내외는 광화문은 다음에 보기로 하고 오후 세시에 시작되는 투란도트 감상에 나섰다.

  그간 푸치니의 오페라는 여러 편 보았고 투란도트도 수년전 테너 임응균이 타탈의 왕자 칼라프로 나오는 역을 할 때 본 일이 있지만 중국을 무대로 한 작품을 다시 보고 싶은 욕심에서 예술의 전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푸치니는 일본을 소재로 나비부인을 그려 일본 게이샤를 서양에 소개했고 중국을 소재로 하는 것으로는 처음이고 마지막인 작품이 투란도트였다.

  그러나 투란도트는 작품을 통한 중국문화의 증언이라기보다는 중동식의 천일야화를 중국이야기로 둔갑시켰기 때문에 문화의 지역성이 뚜렷하지 않고 주제곡이나 변주곡이 모두 푸치니 가극에서 흔히 듣는 음색들로 크게 새로울 것이 없었다. 적어도 동양적 선율을 느낄 수없었다는 데 아쉬움이 있었다.

다만 이날 공연에서는 푸리마돈나로 나온 투란도트보다는 조연으로 나와 타타르의 왕자 칼리파를 사모하는 애인 류가 사랑을 위해 죽음을 택하면서 부르는 아리아가 음악성에서 훨씬 감동적이었다. 막이 내린 후 나오는 류를 향한 박수의 강도가 매우 길고 큰 것으로 미루어 내 느낌이 옳았던 것 같다.

 나는 이번 여러 편의 오페라를 보면서 한국오페라의 수준이 역시 GDP랭킹 세계 13~15위만큼 올랐음에 놀랐다. 1958년 대학에 입학해서 같은 캠퍼스의 수학과 김치호(4.19당일 경무대 앞에서 총 맞고 사망)군과 함께 당시 시공관에서 맨 처음 감상했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나 레온카발로의 기극 파리아치를 볼 때와는 너무 차이가 나는 기획, 연출, 무대, 성악수준이었다. 왜 한류(韓流)가 세계도처에서 평가받는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다른 나라에서 한류가 받는 것만큼 칭찬받을 전망이 전혀 없는 정치권에서 인생을 살았다. GDP가 아무리 높아져도 한국정치의 수준은 GDP만큼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정치는 정치문화를 떠나서 성립하기가 힘들고 식민지를 체험한 국가들에서 민주주의가 잘될 수 없는 소위 식민지근성이 청산되는 데는 아직도 시간이 더 흘러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분단과 전쟁의 갈등이 내면화되는 가운데 쌓인 모순과 대립을 극복하기 보다는 그것을 이용하고 그것에 편승하여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가 뒤쳐져 있다고 해서 다른 분야가 정체된다면 문제가 심각하지만 정치를 제외한 다른 모든 분야가 세계와 흐름을 같이하면서 발전하기 때문에 나라의 미래에는 큰 걱정은 없다.

  정치의 기능과 역할이 국가의 존속과 발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나날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교육국경, 경제국경, 문화국경이 무너져 가는 세계사의 큰 흐름을 조망할 때 정치적 국경의 테두리 속으로 역할이 줄어드는 정치에 너무 큰 기대도, 환멸도 가질 필요가 없다. 대통령을 잘못 뽑았다고 개탄할 필요도, 잘 뽑았다고 기뻐할 필요도 없다. 다 지나가는 하나의 절차요 과정이기 때문이다. 결국GDP 수준을 밑도는 정치는 세대교체의 와중에서 점차적으로 정비되어 갈 것이다. 이점에서 문화의 선진화는 마침내 정치선진화의 중요하고 큰 동력이 될 것이다.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하여 GDP를 밑도는 수준의 정치를 연출하는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고 웃으면서 악수하는 것보다는 토월극장에서 수준 높은 오페라를 감상하면서 광복절을 보낸 것이 더 값지다는 생각이 아직도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 다소 아이러니이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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