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세대 인생 80대의 자화상(2019년 11월 3일 Whytimes와 페이스북) 

 

지금부터 59년 전 19604, 서울의 회색빛 페이브멘트 위에 피를 흘리면서 자유와 민주를 절규했던 20대의 젊은 대학생들이 어언 인생 80대의 노인들로 변해가고 있다. 아직도 노익장을 과시하는 분들도 많지만 그러나 상당수는 인생 80이 주는 건강상의 부담 때문에 매일 한웅 큼 씩 약을 복용하거나 지팡이에 의지해서 운신하는 분들이 나날이 늘고 있다. 나는 다행히 하루 1만보이상을 걸으면서 책도 읽고 친구도 만나고 여러 가지 모임에도 머리를 내밀만큼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건강의 은사에 감사한다.

 

그러나 올해 103일 서울 시내의 중심부를 완전히 뒤덮은 시위군중의 엄청난 운집과 시위함성을 먼발치에서 들으면서 지금부터 59년 전의 나를 되돌아보았다. 그때 같았으면 맨 앞에 서서 마이크를 붙잡고 가장 과격한 구호를 외쳤을 난데 지금은 누구 눈에도 띄지 않을 만큼 뒷전에 서있는 나를 보았다. 나는 하이네처럼 창밖에 마르세이유 노래 소리가 들려도 못들은 채로 꽃과 여인과 현금을 타면서 호반을 거닐고 싶다고 독백하는 수준까지 내려 앉아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태양이 마구 붉은 피를 내쏟는다. 10월은 센티멘탈, 찢어진 기폭 , 스스로의 기로틴에 목이 달아난 리바이아탄의 추태를 보았는가 보았는가를 읊던 한 혁명가의 노래도 나의 노래는 아니다. 주도적 참여가 아닌 추종적 참여, 관중적 참여였다. 그러면서도 이것만이 나이든 우리들의 전부는 아닌데라고 자탄하면서 남다른 고뇌에 빠진다.

 

나아가 들었다는 것은 인생이 낡아지는 것이 아니라 잘 익는 것이라는 한 인기 가요의 가사 한 줄이 머리를 스친다. 4.19혁명과 혼란, 5.16쿠데타와 사회변혁. 한일회담 반대투쟁, 월남 파병, 10월 유신과 10.26사태, 5.18과 광주사태, 6.10항쟁과 민주화, 보수, 진보정권의 성립과 퇴진,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과 문재인 정권의 성립 등 한국현대사의 수많은 부침과 굴곡을 목격하면서 얻고 쌓은 데서 얻은 번쩍이는 지혜가 후대들에게 줄 80대의 선물이어야 하는데 시국을 풀어갈 현자의 지혜를 내놓을 수 없는 것이 실로 안타깝기 짝이 없다. 대안을 내놓지 못해서 나서지 못하는 처지가 남의 눈에 안 띄는 뒷전차지로 전락하는 것 아닌가. 정말 낡지 않고 잘 익었다면 이러한 시기에 무언가 가시적인 대안을 내놓아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나라의 오늘은 집권세력과 국민 간에 국익개념이 공유되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대안도 정부가 받아드릴 수 있는 정답일 수가 없다는데 오늘의 문제가 있다. 정치도, 외교도 군사상의 안보도 국민다수가 바라는 바와는 다른 길을 가는 정부에 먹힐 정답이 있겠는가. 우리 국민 모두가 국익이라고 믿는 한미동맹, 한일 친선을 국익으로 보지 않고 반일이 국익이라고 우기는 곳에 외교안보의 정답은 있을 수 없다. 범법자를 범무 장관으로 임명하면서 그것이 정당하다고 우기는 정부를 상대로 정답을 제시하는 것은 허망한 낭비가 될 뿐이다. 현재 상황은 선거를 통하여 국익을 국민과 공유할 수 있는 정부를 만들어 내는 도리밖에 다른 길이 없어 보인다. 우리는 지금 한국역사상 국민과 정부 간에 국익개념이 공유되지 않는 최초의 정부를 상대로 어떠한 지혜를 내놔도 정답이 될 수 없는 시대상황을 살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생 80대에 접어든 4.19세대는 하루하루 늙어지고 낡아져 가고만 있다. 잘 익은 지혜가 소용될 시대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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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19 혁명 55주년 국립묘지참배를 마치고

 

                                                  이 영 일

 

 필자는 4.19혁명 55주년을 맞는 이른 아침 7시30분, 4월회 회원들에게 배정된 시간에 4.19민주혁명묘지를 참배, 분향 한 후 옛 학우들의 무덤과 영정보관소를 살핀 후 함께 온 동지들과 해장국으로 아침을 마치고 곧장 교회로 갔다. 내가 4.19 민주혁명묘소를 꼬박 꼬박 참석한지는 몇 년 안 된다.

나는 1963년 쿠데타 정권이 수여하는 건국공로훈장의 수상거부를 대학신문에 성명으로 발표한 후 군사권위주의정권이 계속된 30년간 정부에서 주관하는 일체의 4.19관련행사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 당시에는 4.19가 실패한 혁명처럼 느껴졌고 그래서인지 서가(書架)에 촘촘히 끼여 있는 민주주의 관련 서적들마저 희미한 옛 연인의 추억처럼 의미 없어 보였다.

 

 그러나 4.19날만 되면 4.19 당일 현장에서 나와 함께 서울문리대 학생데모의 선두에서 달리다가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앞에서 총을 맞고 타계한 문리대 수학과 3학년의 친구 김치호(金致浩)의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서 떠나지 않았다. 김치호는 당일 나와 함께 종로5가 지경에서 진압경찰에 함께 억류되어 시청광장으로 끌려갔다. 거기서 학생들을 일단 풀어주자 경찰봉에 안경이 깨지면서 왼쪽 눈자위를 다쳐 피 흘리는 나를 서울대학병원 안과로 데리고 가서 진료를 받게 한 후 도서관에 둔 가방을 찾아오겠다면서 뛰어나간 것이 내가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는 도서관이 아닌 경무대 쪽으로 바로 뛰어갔다가 참변을 당했다.

 그는 나와 학과는 달랐지만 문리대 기독학생회(SCA)에서 만났고 그 후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함께 감상한 것이 인연이 되어 대학교정에서 만나면 가끔 레시타티브로 대화를 나누던 좋은 친구였다. 나를 자기가 멤버인 남산 합창단에 함께 나가자고 권유하다가 먼저 타계했다. 내 부모 말고 성묘해야할 친구가 있다면 바로 그 친군데 정부주관 행사가 싫다고 4.19묘지에 안 가는 것이 항상 나의 맘을 무겁게 했다.

 

 나의 60년대 10년 동안은 인생의 시련기였다. 두어 차례 투옥되어 540여일을 서대문교도소에서 보냈고 신원조회에 걸려 취업 길도 막혔던 답답하고 막막한 시절이었다. 나는 대학연구소의 연구원이라는 타이틀로 도서관에 다니면서 쿠데타나 학생혁명 등 신생국 근대화과정을 소재로 한 책들만 줄곧 읽어대었다. 흔히 말하는 신생국에 관한 비교정치연구서들이었다. 여기서 나는 4.19는 실패한 혁명이 아니라 성공한 혁명이었다는 결론을 얻었다. 한국의 1960년이라는 시간과 분단된 후진국이라는 공간의 제약 속에 갇혀있던 내가 지식과 정보의 양이 크게 늘어나면서부터 민주주의와 국가발전을 보는 시각에 큰 변화가 생겼다.4.19이후에 전개된 한국사회의 현상을 읽고 평가하는 관점도 달라졌다.

 

당시 한국은 오늘날 아프리카의 가나 수준의 경제력밖에 없을 만큼 가난했다. 그러한 한국이 경제도약을 위한 선행조건을 충족시켜 국력을 기르려면 권위주의 정권이 출현할 도리밖에 없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군사권위주의 정권들이 출현하기에 앞서 4.19를 통해 우리 국민 모두가 나라의 주권자로서의 의식과 지위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권위주의 정권들은 중남미나 아프리카, 중동에서와 같은 부패독재정권으로 전락할 수 없었다. 개발독재라는 표현이 나올 만큼 한국의 권위주의 정권들은 국력배양과 신장에 크게 공헌하면서도 주권자인 국민을 두려워했다. 젊은 사람들의 피로 국민들을 주권자가 되게 하였고 이 주권자의 지위를 지켰기 때문이다.

 

수천 년의 역사에서 1인의 자유는 있었지만 만인의 자유가 없던 나라, 왕권은 있었으나 국권이 없었던 토양위에서 국민을 주권자로 섬기는 민주정치가 이루어진 것이다. 4.19후에 성립한 군사권위주의 정권들은 중요한 정책을 비민주적, 권위주의적으로 결정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주권자로서의 국민을 결코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못했다. 국민들의 호응을 얻는 학생들의 간고한 감시와 저항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군사권위주의 정권들은 스스로 민주적 정통성의 부족을 메꿔 보기위해, 국민들에게 점수를 따기 위한 국력배양에 주력했던 것이다. 그것이 마침내는 한국을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루는데 성공한 국가반열에 오르게 했던 것이다. 한국인과 중국인을 비교하는 말 가운데 한국 사람들은 중국인들과는 달리 불리(不利)는 잘 견디지만 불의(不義)에는 못 참는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날 중국인들은 주권을 공산당(共産黨)에 맡겨놓았지만 우리 국민들은 주권자의 자리를 확실히 지키고 있다. 이것이 4.19의 가장 큰 공로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서부터 나는 다시 4.19 기념일에 묘소참배를 빠트리지 않게 되었다. 김치호 묘소도 참배, 성묘한다.

 

 최근 인간의 행복지수를 따지는 미국행태연구소의 자료를 보면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나라에 태어난 사람이 그렇지 않은 나라에 태어난 사람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는 것이다. 주권재민이 갖는 중요한 의미다. 4.19는 그러나 남한 사람에게만 주권을 되찾게 해주었을 뿐 북한 2500만 동포들은 아직도 주권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상황을 살고 있다. 결국 조국의 통일은 북한 동포들도 주권자가 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북한의 4.19가 곧 통일일 것이다.

 

 이날 4.19영령 봉안소에는 384위의 영령사진이 안치되어있었다. 1960년대에는 180여명이었지만 지금은 부상자나 기타 유공자들이 추가되었다는 것이다. 주권재민(主權在民)을 위한 대의에 순의(殉義)하신 분들이다. 확실한 국민적 합의로 그들의 순의를 국민들은 하나같이 추모한다. 이렇게 4.19혁명은 그 55년의 흐름을 이땅에서, 우리가 만드는 역사의 현장에서 여전히 자랑스럽게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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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평 용문사 瞥見 有感

                                                                  (이글은 오늘자로 김승웅 글방에 떳다)

 

                                       이영일 한중정치외교포럼 회장

 

 올 설은 설 전날을 포함해서 5일간 이어지는 휴가라서 젊은 사람들에게는 황금연휴이겠지만 나이든 우리 또래에게는 매일이 휴가인지라 휴가를 휴가 비슷하게라도 보낸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자식들이 경기도 양평의 콘도를 예약했다면서 나들이를 서두르는 바람에 우리 내외도 함께 집을 나섰다.

 양평의 블룸비스타라는 콘도에 여장을 푼 후 식구들과 같이 인근에 명성 높은 사찰인 용문사를 찾아 나섰다. 나는 용문사를 이름만 알뿐 어떻게 하다 보니 한번도 와 본 일이 없던 곳인지라 다소간의 호기심을 느끼면서 일행과 함께 용문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현란한 식당 간판들이 우리나라 전통식단의 메뉴들을 나열하면서 시야를 채웠다. 산길의 양옆에 즐비한 식당들을 지나치면서 30분 이상 가파른 산길을 올라갔다. 프랑스의 도시계획위원회에 상정되었다면 절대로 허가받지 못할 건물들이 난개발(亂開發)의 상징처럼 늘어서서 절로 들어가는 길목들의 전망을 어지럽혔다. 길에는 등산모를 쓴 중년 남녀들이 떼를 지어 오가는데 거기에는 탬플스테이로 이곳에 왔다는 외국인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사찰 입구에는 탬플스테이라는 간판이 내방객들을 영접하고 길 왼편에는 수령 1200년이나 되었다는 은행나무를 수호신처럼 모신다는 설명문과 더불어 은행나무를 먼발치로 바라볼 전망대가 놓여있었다.

 

용문사 경내는 여느 절이나 비슷했지만 기도꾼들이 몰려들어 대웅전 등 큰 사찰 건물에서 기도회를 열고 있었다. 야단법석(夜壇法席)이다. 그러나 불교사찰이 제단(祭壇)을 쌓는데서 생기는 신성함은 어느 곳에서도 느껴지거나 찾을 수가 없었다. 불심(佛心)과 무관한 중국관광객들의 나들이 장소로 변해버린 중국사찰들을 너무나 많이 닮아버렸다. 먹고 마시고 떠들면서 이 건물 저 건물로 몰려다니는 중국관광지 그대로의 모습이 우리 용문사에서 재연되고 있었다. 약수물이 좋은 것으로 소문이 났다지만 약수물을 관리하는 실태를 보면 영약(靈藥)을 마신다는 기대를 불러일으킬 정결함이나 신성함은 전무했다. 갈증을 달래는 쉼터에 불과했다.

사찰의 관광이 선교라는 문제의식과 연결되지 못하고 그냥 돈벌이에 역점을 두는 관광업으로 전락해버린 곳이 중국사찰들인데 그런 모습이 이 땅에서도 재연되고 있다는데 마음이 아팠다.

 

용문사 구경을 마치고 Moon River라는 간판을 단 식당에 들어갔다. 오리백숙으로 명성을 얻은 곳이라고 한다. 요리 맛은 환상적이었다. 밑반찬도 좋았다. 한때 카페를 하다가 안 되어 업종을 바꾸었다는 것이 주인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간판과 메뉴가 너무 다른 것은 부적절했다. 음식에 어울리는 간판과 그 간판에 합당한 맛을 전하는 레스토랑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함께 온 자식들은 휴대폰을 손에서 떼지 않고 무언가 열심히 전화하는데 바빴다. 함께 조용히 이야기 나눌 시간도 없어 보였다. 어느 외국작가가 한국을 소재로 글을 쓰면서 책명을 “기적을 이룬 나라, 그러나 기쁨을 잃은 나라”라고 붙였다고 한다. 1인당 GDP 30,000 달러의 수준에 도달한 것은 기적이지만 그 수준을 지키기 위해 더 가치 있는 많은 것을 잃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기쁨 상실이다. 우리 주변에서도 요즘 전통적인 것이 거의 사라지고 그렇다고 모든 것이 서양화된 것도 아니다. 퓨전이 오늘날 한국문화의 현주소 같다. 퓨전화된 韓를 우리는 한류로 자랑하고 있지만 그것이 진정한 한류일지는 시간을 더 가지고 깊이 음미해야 할 것 같다. 기적을 이룸과 동시에 기적만한 기쁨이 우리의 소유가 될 길을 적극 모색해야겠다. 올 설은 그런대로 즐겁게 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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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래 부완혁 선생 서거 30주년 추도식을 다녀와서

 

이 영 일 (3선 국회의원, 한중정치외교포럼회장)

 

이날 추도식에서

2014년 12월 30일 부완혁(夫玩爀) 선생 서거 30주년 추도식이 서울 매리어트 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열렸다. 그분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이리저리 인연이 닿는 분들이 봉래(蓬萊)부완혁 선생의 유일한 혈육인 부정애(夫貞愛) 여사와 그 부군 되시는 신선호 회장이 차린 추도식장을 가득 메웠다.

 

 

이날 추도식에서  눈길을 끄는 캐치플레이스는 인문의 샘, 시대의 좌표, 지성의 빛 이었다. 봉래선생이 사상계를 통해 표현하고 싶은 가치였고 일생을 두고 추구했던 지향(志向)인 것 같다. 이 모임에는 이인호 KBS이사장(전 러시아 대사)을 비롯하여 학계, 언론계, 정계, 경제계의 여러 분야에서 많은 분들이 오셨는데 봉래선생이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 장군을 모시고 족청(族靑)계 활동을 함께 했던 당시의 동지였던 김정례(金正禮) 전 보사부 장관 이 금년 89세의 고령인데도 참석하셔서 헌화했고 미국유학중으로 생전에 부완혁 선생을 만난 일이 없다고 본인 스스로 고백한 노재봉(盧在鳳)전 국무총리가 한국 지성인을 대표하여 추도사를 맡아주셨다. 노 총리는 추도사에서 오늘의 한국만큼 부완혁 선생 같은 인물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시기에 그런 분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이 시대의 안타까움이라고 설파, 분위기를 숙연케 했다.

 

필자는 1960년대 초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10년 동안 사상계에서 부완혁 선생이 맡겨주는 좋은 논문을 번역해서 사상계에 게재도 하고 몇 편의 논문도 발표하여 부완혁 선생으로부터 정치평론가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당시 필자 나이 27~28세의 청년운동가였는데 봉래선생의 심사를 통과하여 사상계에 글을 싣는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어떻든 필자는 그 시기에 봉래선생에게 필력을 인정받아 사상계에 글을 기고한 것 자체만으로도 엄청나게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필자는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재학중 학생운동으로 당시 두 차례 감옥을 갔다가 나와서 이리저리 방황하는 운동권의 낭인이었는데 선생은 사상계를 통해서 나 같은 젊은 사람에게 글 쓸 기회를 줘 자신감과 용기를 갖게 해주었다. 정말 나에게 삶에 대한 용기와 자신감을 심어준 큰 선물이었다. 그때 사상계에 필자가 발표한 ‘한국정치사상의 메타볼리즘’이나 ‘개발독재발상법 서설’은 선생에게 크게 칭찬받은 글이었다. 그러나 시국을 평가하는 논쟁 중에는 통렬한 독설과 시니컬한 비판도 감수해야했다.

 

그러나 봉래선생은 그때뿐 뒤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대로 끝이었다. 매일 혼자 사는 봉래선생은 회색의 황혼이 오면 으레 젊은 후배들을 데리고 중국식당에 가서 백주(白酒)를 사주시거나 냉천동 집으로 데리고 가서 혼자 즐기는 양주를 꺼내 함께 마시기도 했다. 그때 안주는 따님인 부정애 여사가 내온 것으로 기억된다. 사상계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공판타자기로 책을 찍을 때는 원고료 없이 글 쓴 분들을 많아 근근이 잡지사의 명맥을 유지할 때도 있었다.

 

그때 한국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한 김성우 형의 ‘만세(萬歲) 반만세(反萬歲)’ 같은 당대의 명 칼럼이 공판인쇄본에 실렸다. 다행히 김세영씨의 후원으로 사상계가 정상을 되찾아 가는 중에 김지하(金芝河)의 5賊사건으로 폐간되었고 기때 봉래 선생은 투옥되기도 했다. 필자는 추도식장에서 부정애 여사 내외분을 만나 40년 전에도 봉래 선생은 나에게 술을 사주셨는데 돌아가신지 30년이 지난 후에도 그분 덕에 다시 맛있는 식사와 와인을 마신다고 술회했다.

이날 부정애 여사는 유족대표인사말을 통해 ‘일찍이 혼자 되셨고 또 정치적 경제적 어려움이 많았지만 아버지는 항상 의연하셨다.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밖에 들어나지 않은 외로운 시간도 적잖았을 것으로 생각 한다‘면서 울먹였다. 이어 선친 생전에 독설이나 씨니시즘 때문에 상처를 입은 분이 혹 계신다면 모든 것을 추억으로 승화시키자고 말했다.

 

함께 참석한 모든 분들은 유일한 혈육인 부정애 여사가 부군과 함께 대한민국에서 가장 성대한 추도식을 마련한데 대해 그 효성을 평가했다. 이날 추도식은 일본으로부터의 해방, 해방 후의 그 혼란, 건국과 동란, 4.19혁명과 5.16군사쿠데타, 민주화투쟁 시대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의 큰 흐름 속을 방청인으로서가 아니라 때로는 정치인으로, 때로는 학자로, 때로는 언론인으로 직접 참여하여 현실과 맞서면서 치열하게 살았던 우리나라 대표적인 지식인의 한분이신 봉래 부완혁 선생의 족적을 기리고 우리의 금후의 진로를 새삼 돌이켜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값진 추도식에 참여한 것이 올해를 마감하는 뜻 있는 발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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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석(楓石) 서유구(徐有矩) 전기를 읽고

 

                                  한중정치외교포럼회장 이 영 일 (풍석 서유구 선생 기념재단추진위원회 고문)

 

풍석 서유구 전기가 진병준씨의 저술과 출판사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대표 장익순)의 기획으로 세상에 나왔다. 금년으로 탄생 250주년을 맞는 풍석 서유구 선생은 18세기에서 19세기로 이어지는 조선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당시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그는 당시 지배계급의 다른 명칭인 경화세족출신이면서도 주자학이 지배하는 질서에 맞서서 애인휼민을 목표로 실학에 전 생애를 바쳤다.

 

당시 조선사회의 통치이데올로기인 주자학은 공리공론에 매여 민생보다는 파쟁을 일삼고 적서반상(嫡庶班常)신분 차별 질서를 심화, 민중수탈의 명분으로 변질되어갔다. 결국 조선을 망국으로 몰아간 이데올로기로 변하고 있었다. 이 시기를 살았던 풍석 선생은 실사구시를 중시하는 학문적 가정을 배경으로 청나라에서 유입된 신지식을 섭렵하고 토지자본이 유일한 생존기반인 조선사회의 생산력증대에 공헌할 이론과 기술을 탐구하고 이를 실용할 학문으로 발전시키는 데 앞장섰다.

 

정조시대의 개혁정치에 동참한 그는 주어진 관직을 그가 탐구한 민생정치의 실험기회로 활용하면서 백성들에게 유익할 생활지식을 새롭게 정비해나갔다. 이 작업은 그에게 있어서는 주자학의 병폐를 청산하고 민중생활개선의 건실한 토대를 쌓게 하려는 구국운동이었고 그를 필생동안 매달리게 했던 임원경제지(林園經濟誌) 편찬이다. 한중일 3국을 통틀어 서유구 선생이 펴낸 임원경제지만큼 백성들이 바로 실천에 옮길 생활지식백과사전을 집대성한 나라는 없었다.

 

서유구 선생의 삶에서 주목되는 또 다른 측면은 지식이 통치 집단의 도구로, 입신양명의 수단으로 쓰이는 풍조에 반대하고 민생을 풍부히 하는데 공헌한다는 소명의식이었다. 그분은 박제가나 이덕무, 유득공 처럼 당시 출세의 길이 막혀 실학연구에만 몰두했던 중서인출신이 아니었다. 그는 소론에 속했지만 좋은 집안에 태어나 경학을 통해 과거에 급제, 관직에 발탁되었고 행정 분야에서도 오랜 세월 복무했지만 그는 신분상의 차이를 넘어서서 당시의 실학자들과 열린 마음으로 교유하고 필요한 연구와 정보를 공유함으로 해서 문자 그대로 실학을 구국의 경륜으로 발전시켰다.

 

 임원경제지는 바로 이런 경륜의 집대성인 점에서 당시 실학이 내놓은 학문연구의 최고 금자탑이 된 것이다. 당시 구국을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주자학과 파쟁을 넘어서서 정치혁명을 꿈꾸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지만(허균처럼)그는 충효사관에 매인 유생적(儒生的) 한계를 넘지 않고 민간의 생산력증대를 통한 부국안민에만 전력하였다. 구국의 필수방책인 정치투쟁을 외면, 망국으로 흐르는 조선의 국정을 바로잡는 데는 기여하지 못했지만 개혁정치인으로서, 사상가로서 그의 업적은 후대에 크게 귀감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실학자들과는 달리 그의 공헌과 업적이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분의 사상과 철학이 후대에 전수 발전되기 위해서는 한글로의 번역이 시급한데 임원경제지의 역간(譯刊고전국역)사업이 너무 방대하여 다른 저술에 비하여 간행이 늦어졌다. 다행히 풍석기념재단추진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지식의 보고라 할 수 있는 임원경제지의 한글 번역을 촉진, 조만간 방대한 저서의 번역 장정(飜譯長征)을 마치고 발간을 보게 된다고 한다.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마틴 루터가 라틴어 성경을 독일말로 번역한 것이 성경대중화의 길을 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임원경제지의 창간과 더불어 한국인들이 조선실학의 진면목을 대하는 기회가 되고 수많은 새로운 한류의 아이디어가 속출될 것이 기대된다. 풍석 서유구 선생의 전기가 널리 읽혀져서 실학이해의 새로운 지평이 넓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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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래 신문의 성유보 동문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며칠 전 마르코 글방에 오른 글 가운데 이부영 의원이 쓴 성유보 동문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63학번?)이야기가 잊히질 않는다. 박정희 정권 때 삶이 괴로웠던 분들 이야기고 나 역시 5.16후 당시 서대문 교도소(현저동 101번지)에서 두 차례나 옥고를 치르면서 500여일을 보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역사는 불행히도 승자의 역사였고 패자는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 같았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만리장성을 쌓고 병마용을 만들 때 얼마나 많은 인명을 희생시켰고 또 분서갱유를 통해 수많은 6국 선비들을 살해한 역사를 아는 사람들은 다 알지만 지금 중국에서의 진시황은 후대들에게 엄청난 달러 박스를 남겨준 위대한 선조로 평가된다.

 

중국인들은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시킨 BC. 221년을 중국통일의 원년으로 기념하는데 인접국가인 우리들도 앞으로는 미국이 독립에 성공한 1776년이나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1789년처럼 기억해야 할 해로 변해가고 있다.

 

유신반대투쟁 때문에 고생했던 분들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박정희 대통령도 업적남긴 승자처럼 과오는 갈수록 망각되고 업적은 해가 갈수록 부풀려지고 재해석되어 여론조사를 보면 가장 훌륭한 지도자의 상석을 여전히 지키고 있다.

 

많은 분들이 좀 더 살기를 바랐던 성유보 동문의 심정은 어떠할까. 그를 회고하는 이부영 형의 심정은 어떠할까. 서울 문리대 정치학과 출신들이 정치사에서 배워야할 교훈은 무엇일까를 다시 생각한다. 우리 동문가운데는 영국유학을 해서 어렵게 박사학위까지 얻은 동문이 승리하는 영국정신인 해적정신을 배우지 않고 얄궂은 신사도 흉내만 내다가 모자란 사람들에게 좋은 일만 시켜주고 자기는 입지마저 잃고 헤매다가 정계은퇴를 선언하한 사건도 보았다. 

 

 한국인과 중국인을 구별하는 논리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중국인은 불의를 보고는 잘 참지만 불이익 앞에는 목숨을 걸고 덤비는데 한국인은 불이익은 잘 견디지만 불의에는 용서 없이 과감히 나서 싸운다는 것이다. 성유보 형의 죽음을 보면서 서울 문리대 정신의 참된 지향이 무엇인가를 되씹으면서 쓴 웃음을 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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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지난 8월 22일부터 9월5일까지 노아남성합창단의 일원으로 카나다의 뱅쿠버와 록키산맥의 관광, 미국 씨애틀의 방문을 마치고 난 후에 적은 칼럼입니다  

 

Canadian Rocky 산록의 도시 Banff시에서 받은 감명

 

벤프 시는 원래 영국 ScotlandBanffshire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민 와서 세운 도시였다. 도시의 모든 경관-주택이나 가로의 풍경을 스코트랜드 식으로 꾸몄기 때문에 영국의 시골도시를 연상케 했다. 이 도시는 빙하가 만드는 호수의 도시가 갖는 아름다움에 더하여 1954년 마리린 몬로와 로버트 밋참 주연으로 선풍을 일으켰던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의 촬영 무대였던 나지막한 폭포도 장관이었다.

 

그러나 나를 더욱 감동시킨 것은 이 도시가 사람과 야생동물이 공생하는 환경도시로 발전되어 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디안의 수렵시대가 끝난 이후 영국인들이 정착하고 나서부터 식물과 더불어 동물까지도 인간과 공생할 수 있는 도시로 이 지역을 발전시키자는 초기 건설자들의 꿈이 이루어져서 100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무서워서 피하거나 도망가는 산 짐승이 없고 야생의 무스나 여우, 흰꼬리 원숭이 등 도시를 넘나드는 동물을 보고 두려워하는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길에 덩치 큰 무스가 나딩굴고 있으면 그 짐승이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갈 때까지 사람들이 기다려준다는 것이다. 교통체증보다는 동물과의 공생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인수공생(人獸共生)의 완전환경도시가 이 깊은 빙하의 계곡에서 완성되고 있다는 사실의 확인이 이번 Canadian Rocky산록 여행의 큰 수확의 하나일 것 같다. 제대로 된 환경보호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비단 나만의 공감은 아닐 것이다.

 

여야간에도 남북간에도공생못하는나라에서 는사람에게는더 큰 감명을주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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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베트남의 하노이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

 

1. 들어가면서

 

나는 오래전부터 베트남 통일이후의 하노이를 꼭 한번 방문하고 싶었다. 이 욕구는 작년 7월 1주일동안 통일독일의 동독지역으로 베를린과 라이프치히를 방문하면서부터 더욱 간절해졌다. 뜻밖에도 제 큰딸이 갖는 아트 프로젝트에 하노이가 포함된 관계로 지난 6월 5일부터 10일까지 5일간 하노이를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베트남이 통일된 지 금년으로 38년이 되는 해에 나는 통일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를 찾은 것이다.

항공기가 인천공항에서 하노이의 노이 바이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의 4시간동안 나의 뇌리에는 그간 명멸했던 정치인들의 이름이 스쳐갔다. 이미 작고한 분들이 대부분이지만 베트남 의 분열과 통일과정에서는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인물들의 이름이 하나씩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1969년 베트남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작고한 항불(抗佛)독립운동가요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세운 호치민(胡志明)대통령의 삶과 죽음을 생각했다. 또 미국의 잘못된 베트남 개입정책을 합리화하기위해 발생한 쿠데타로 목숨을 잃은 고딘디엠 ‘자유베트남’ 대통령, 쿠데타의 주역들이었던 구엔 반 티우 대통령이나 콧수염을 자랑했던 구엔 카오 키 부통령(현재는 LA에서 리꺼 스토어를 한다고 알려졌다)의 이름도 떠올랐다. 베트남 평화협상개시와 함께 그 이름을 날렸던 수안 투이 협상대표나 헨리키신저와의 담판으로 월남평화협상을 마무리했던 레둑토 베트남 정치국원, 구정(舊正)공세(Tet Offensive)를 주도했던 보 구엔 지압 장군의 이름도 내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있다. 내가 월남의 인물들을 이렇게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내 인생의 어려운 시절인 1960년대 후반에 D통신사의 외신기자로 활동하면서 베트남 전황을 보도하는 일에 수년간 매달렸기 때문이다.

 

오늘날 베트남은 항불 독립운동운동을 주도하면서 베트남 민족의 포괄적인 지지를 받던 호치민 대통령의 민족해방전선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국가통일을 달성했다. 전쟁사학자들은 미국은 월남전에서 전투에는 승리했지만 전쟁에서는 패했다고 평가한다. 결국 베트남은 1975년 한반도의 3배되는 영토에 인구 9천만을 포용하는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으로 통일되었고 베트남 민족의 새로운 역사가 통일된 수도 하노이를 중심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제 통일된 베트남의 오늘을 살펴보기 위해 나는 하노이 공항에 발을 내딛은 것이다.

 

2. 미국은 왜 베트남정책에 실패했던가.

 

제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미국은 소련의 등장으로 양분된 냉전의 세계질서를 주도하면서 소련공산주의 세력이 아시아 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유럽에서 독일이 분단되고 동구라파 제국이 소련의 영향권으로 들어가면서 세계는 미소양국이 주도하는 냉전체제로 분립하였다. 양진영간에는 철의 장막이 펼쳐졌다. 이때 미국을 당황케 했던 것은 중국대륙이 중국공산당의 지배로 넘어가는 사태였다. 이때 미국은 장개석 정부대신에 중국공산당 정부와의 관계 정상화를 위한 협상을 개시했다. 이를 알아챈 소련은 북한 김일성으로 하여금 남침 전쟁을 일으키게 하고 이 전쟁에 중국을 끌어들임으로써 미국과 중국을 대결관계로 몰아넣는데 성공했다. 이 틈바구니에서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세력을 퇴치하고 민족공산주의자인 호치민의 주도로 베트남의 통일가능성이 엿보이자 이를 방치할 경우 동남아시아 일대가 공산주의의 영향권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라는 도미노 현상을 우려, 프랑스를 대신해서 인도차이나 반도의 공산화를 억제한다는 명분으로 미국은 베트남 내전에 말려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전략가들은 베트남과 호치민에 대해 연구가 너무 부족했다. 호치민이 선택한 노선은 국제공산주의운동이 아니라 베트남의 자주독립이었고 국제공산주의운동에 가담한 것은 독립을 위한 수단이었다. 또 역사적으로 베트남을 오랫동안 속국으로 무시해 온 중국을 몹시 혐오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참전한 미국은 각개 전투에서는 승리를 얻었을지 몰라도 전쟁승패를 결정짓는 베트남 인들의 마음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게릴라 군은 지지 않으면 이기지만 정규군은 이기지 못하면 패한다는 게릴라전의 명제에 익숙하지 못했다. 결국 미국은 국내의 반전여론에 밀려 협상을 통한 철군정책을 추구했다. 미국 측 협상의 주역은 헨리 키신저였고 베트남에서는 레둑토가 대미협상을 맡았다. 이 당시 키신저는 베트남이 공산화되더라도 중국이나 소련의 영향권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을 것임을 내다보면서 베트남이 북부베트남 주도로 통일되는 길을 터주었다. 결국 베트남은 1975년 미군철수와 때를 같이해서 사회주의 국가로 통일되었고 통일된 지 4년 후인 1979년 베트남은 중국의 선제침공으로 전쟁을 개시했다. 베트남의 캄란 만이 소련의 군사기지가 되어 중국을 포위하려한다는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 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했지만 베트남군의 강한 반격으로 중국은 패퇴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전쟁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이 소련의 군사기지가 되는 것을 저지한다는 전략목표는 달성했다. 키신저가 예측한대로 미국은 통일베트남과 다시 수교했고 인도차이나 반도의 공산화 도미노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국제관계에는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우방도 없으며 그때그때마다의 국익이 있을 뿐이라는 영국외상 팔머스톤의 말이 허언이 아님을 실감케 한 사건이었다.

 

3. 도이모이로 불리는 개혁개방과 시장경제의 도입

 

베트남은 1975년 통일된 후 남북베트남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면서 남북지역의 사회주의적 개혁에 주력했다. 남부베트남을 해방시켰다는 당당한 명분을 배경으로 남부베트남의 반사회주의(反社會主義)적 요소를 배제 순화시키는 정치교육을 강화하는 작업을 서둘렀다. 한편 구체제의 지도세력은 대부분 해외로 망명하거나 보트피플로 잔명을 부지하다가 세계 각국으로 흩어지는 베트남 판 디아스포라가 되었다. 통일 베트남의 내부정비는 세 차원에서 강력히 추진되었는데 하나는 공산당 주도의 국가통치체제를 강화하고 둘째는 화교(華僑)에 의한 경제 지배를 철저히 억제하였으며 셋째는 이슬람세력의 베트남 침투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내부정비가 끝난 후인 1986년부터 중국에서와 같은 개혁개방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판반동 수상이 주도하는 초기 개혁은 사회주의 원칙의 테두리에 지나치게 얽매임으로써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했다.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친 후 1996년부터 베트남의 개혁개방이 성과를 나타내면서 시장화개혁이 정착되었고 이제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활기찬 발전의 도정에 올랐다고 한다. 현재 1인당 GNP는 1,600 달러 수준이지만 호치민 시의 GNP는 6,000 달러로 추정되고 이에 비해 하노이 시는 4,000 달러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4. 한국과 베트남의 경제협력

 

나는 한국군의 베트남전쟁 참전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약소민족의 민족해방투쟁을 막는데 우리가 개입했다는 것이 결코 개운치 않은 추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한 이후 양국관계는 다른 어느 공산국과의 관계보다 더 좋을 뿐만 아니라 베트남 인들의 한국선호도는 상상도 못할 만큼 높다는 것이다. 특히 양국 간의 협력은 경제 분야는 물론이거니와 문화, 예술, 국제결혼에 이르기까지 확대 심화되고 있다. 특히 신기한 것은 동남아국가들 중에서 베트남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닮았다는 것이다. 베트남 왕국의 왕자 두 사람이 한국으로 건너와 오늘의 화산 이 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사실에 미루어 남방계 한국인의 출처가 베트남인지도 모를 일이다.

하노이의 노이 바이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올 때는 반드시 홍강(紅江)을 건너는 상롱교(上龍橋-러시아 베트남 친선교)를 지나야 하는데 다리의 양옆에는 최근 베트남에 거액을 투자, 휴대폰 부품 공장을 짓고 있는 삼성전자를 축하하기 위해 영어로 쓴 삼성의 깃발이 다리의 마디마디를 뒤덮고 있었다. 다리를 지나자 금호타이어 광고가 크게 눈에 띄었고 이어서 LG의 대형광고판이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하노이 시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옛날에는 대우 호텔과 대우 경영센터였지만 지금은 경남 기업이 지었다는 랜드마크 빌딩이 가장 높으며 현대건설의 힐 스테이트가 시내에 우뚝 솟아 고층 아파트의 상징이 되고 있었다.

또 주식회사 인평(仁平)이 하노이의 경전철의 시작지점에 대우 Cleve라는 이름으로 착수한 4,500세대의 아파트와 빌라공사가 한창이었다. 앞으로 이 아파트와 빌라 단지가 예술프로젝트와 제휴, 예술 감각이 살아 숨쉬는 단지로 완공된다면 프랑스의 문화와 예술의 향기가 깃든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도시건축의 새로운 명품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발전하는 국가들의 특징은 도시의 도처에 스카이 크레인이나 타워크레인으로 시야가 채워지는 것이다. 하노이 시는 도처에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경제기획원 장관을 역임한 장기영 씨가 흰 코끼리, 검은 코끼리라고 비유했던 스카이 크레인들이 공사현장마다 나름대로의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또 도시의 한복판들에는 한국브랜드의 뚜레쥬르, 파리바게트, 롯데리아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한국과 함께 발전하는 하노이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음식문화도 우리의 기호에 맞았고 특히 식당에서 마다 좋은 와인을 비치하면서 파는 것은 프랑스의 유산이 아닐까.

 

5. 본받아야 할 지도자 호치민(胡志明)의 위대한 애국 애민 정신

 

오늘날 베트남이 통일이후에 새로운 내전이나 갈등을 유발하지 않고 남북이 통합에 완전히 성공하고 발전의 큰 궤도에 진입하게 된 것은 독립운동지도자 호치민 대통령이 실천한 리더십의 귀결이었다.

그는 16세까지 유교를 신봉하면서 한학(漢學)을 공부하던 농민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큰 꿈을 품고 자기조국을 식민지로 붙들어 맨 프랑스 수도 파리로 가서 베트남 해방운동의 이론과 철학을 몸에 익히고 모스크바와 베이징 등지에서 약소민족 해방투쟁의 전략과 전술을 연구하면서 베트남의 항불 독립투쟁에 착수했다. 프랑스와 싸우는 과정에서 호치민은 북부베트남으로 쳐들어온 일본과도 싸워야 했다. 중일전쟁 당시에 중국을 지원하는 미국의 원조루트를 차단하기 위해 일본이 북부베트남을 침공하고 마침내 일본의 전역(戰域)은 베트남, 미얀마, 싱가포르, 필리핀으로 확대되었다. 이 시기에 미국은 일본을 물리치기 위해 항불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호치민 군을 원조하였고 이 원조에 힘입은 호치민은 일본의 패망과 동시에 프랑스군과 싸워 디엔비엔푸에서 항불투쟁의 최종적 승리를 얻고 북부베트남에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베트남민주공화국 성립 후 프랑스앞잡이 노릇을 했던 반 민족행위자가 많이 체포되었지만 그는 극소수의 지도층 인을 제외하고는 대사면을 내려 민족화합을 도모했다. 이승만 박사가 해방 후 총 한방 쏘지 않고 나라를 일본에 바쳐 2000만 우리 민족이 친일하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만든 조선국왕에게 물어야 할 책임을 일제하에서 고생하면서 생을 이어온 동포들의 일부를 민족반역자로 몰아 책임을 덧씌우자는 것은 반드시 옳은 일은 아니라고 말하고 소수 악질분자만을 처단하는 것으로 친일문제를 매듭짓고 국가건설에 힘을 쏟자고 호소한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그는 통일을 보지 못하고 병사하면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1.나의 무덤을 만들지 마라. 나를 우상화 하지마라.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해 서 월남의 동서남북 네 곳에 뼛가루를 뿌려 통일월남의 거름이 되게 하라.

2.친미, 자본주의 세력에 대해 보복하지 마라. 그들을 품으라.

3.전쟁으로 남편이 죽은 가정을 국가가 책임져 주라.

그리고 그간 남긴 재산은 슬리퍼 하나와 옷 세벌, 그리고 목민심서 한질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애국애민정신이 실천되고 이어졌기 때문에 오늘의 베트남은 활력 있는 통일국가로 발전하고 있으며 해외로 나간 동포들의 본국송금이 매년 120억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한 때 같은 공산주의자의 길을 걸었다고 하지만 호치민의 길과 김일성의 길은 너무 달랐다. 우리나라의 과거나 현재의 지도자들에게도 참으로 귀감이 되는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영상 42도를 웃도는 폭염의 날씨였지만 하롱베이(下龍灣)관광을 끝으로 하노이여정은 끝났다. 그러나 분단국이 통일에 성공한 이모저모를 보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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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울 음악무대가 준 감동

 

이 영 일 한중문화협회 회장

 

2013년 5월 3일 밤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는 500여명의 청중들이 마음속에서 울러나는 감동의 박수를 터뜨렸다. 처음에는 잔잔하던 감동의 물결이 점차 커지면서 장내에 파고를 일으켰다. 80세 초반부터 70대에 이르는 5명의 한국 작곡가들이 무대에 올라올 때마다 박수가 터져 나왔고 한 분은 그 아내 되는 분이 보행이 불편해서 못나온 남편을 대리해서 이 자리에 참석했다. 다섯 분 작곡가들이 지은 곡목들을 우리나라 최고의 성악가들이 예울 음악무대가 한국가곡의 향기라는 주제로 마련한 음악회에서 연주를 한 것이다.

 

해설을 맡은 바리톤 정록기 교수(한양대 음대 교수)는 이날 예울 음악무대가 금년으로 7회째 한국 가곡의 향기라는 주제로 한국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주하는 성악행사를 개최해왔다면서 2007년 제1회 때는 조두남, 변훈, 장일남 씨 등 세분의 작품들이 연주되었고 이번에는 윤해중, 오동일, 이수인, 이영조, 이건용 다섯 작곡가들의 작품이 연주된다는 것이다.

 

출연진들은 경동교회에서 노아 합창단을 이끌고 있는 전 국립오페라 단장 박수길 전 한양대 교수를 비롯해서 내 고등학교 동문인 임해철 교수, 피아니시트 이유화, 박성희 교수, 테너 이영화 교수, 소프라노 이정수, 정기옥 교수, 메조소파라노 정수연 교수 등이 출연했다.

 

나 같은 음악 문외한은 열창하는 곡목들의 시종(始終)을 헤아리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때로는 한번 배웠으면 하던 귀에 익은 곡목을 들을 때면 더 힘껏 박수를 치면서 환호를 보냈다. 그러나 청중들을 진정으로 감동시킨 것은 성악가들의 연주에 못지않게 해설하는 정록기 교수가 청중석에 앉아 있는 작곡가들을 한 분 한 분 불러서 소개할 때였다. 백발이 허연 분들이 청중을 둘러보면서 목례를 하는 작곡가들의 표정 속에 기쁨이 가득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작곡가들이 공연이 끝난 후 한 분 한 분 호명된 순서대로 무대 위로 올라와 연주자들과 악수도 하고 포옹도 하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5월의 신록도 아름답지만 나이 든 작곡가와 그 작곡가의 작품을 연주한 바로 그 성악가들이 한 자리에서 기쁘고 반가운 표정으로 악수하고 안아주고 반기면서 서로 어우러지는 무대야말로 근래 내 주변에서 보기 드문 아름다움이었다.

 

정말 멋진 기획이다. 지금 우리나라에 많은 작곡가들이 배출되고 있지만 훌륭한 시를 음악으로 만드는 가곡의 작곡가들은 인기 있는 유행가 작곡가들 보다 음원(音源)에서 생기는 수입이 비교도 안 될 만큼 적을 것 같다. 물론 이날 인기를 모았던 작곡가 이수인 씨의 “내 마음의 강물”처럼 애창되는 곡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곡들은 성악 전공자들에게서만 연주되는 경우도 적잖을 것이다.

 

예울 음악무대가 우리나라 작곡가들을 매년 선발해서 그들의 좋은 작품을 일류 성악가들을 통해 국민들에게 선보이고 작곡가들에게 긍지와 보람을 심어주려고 기울이는 노력은 한국음악의 발전을 향한 값진 움직임이 아닐 수 없다. 작곡가들에게 꽃다발 대신에 내심의 축제를 갖게 해준 이날의 행사는 그 빛이 해가 갈수록 찬란히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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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식 선생의 부음을 듣고

 

오재식 선생의 부음이 아침 신문에 보도되었다. 몸이 안 좋아 투병중이라는 이야기는 박경서 형을 통해 전해 들었지만 이렇게 빨리 별세하실 줄은 몰랐다. 인터넷 뉴스를  보니 오 선생은 작년 11월 14일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팔순잔치를 열고 나에게 꽃으로 닥아오는 현장이라는 회고록을 발표했다는데 나는 정식으로 초청을 받지 못했고 또 그 때 선약이 있어 못 가뵌 것이 몹시 마음에 걸린다.

 

나는 1958년 6월경 경동교회에서 오재식 선생을 처음 만났다. 본 예배가 끝난 후 교회에 나오는 대학생들은 잠시 그 자리에 남아달라는 광고말씀을 듣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나보다 약간 선배로 보이는 오재식 선생이라는 분이 나와서 목사님 부탁으로 자기가 이 교회의 대학생부 조직을 맡게 되었다고 자기소개를 해서 처음 만났다. 참석자들의 자기소개를 하는 순번이 나에게 와서 나도 금년에 서울대학교 문리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이영일이라고 소개하자 그는 자기도 문리대 종교학과를 졸업했다면서 나에게 유난히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회의가 끝난 후 점심이나 같이하자면서 나를 시내 삼각동에 위치했던 하동관 곰탕집으로 데려갔다. 그렇게 맛있는 곰탕을 난생 처음으로 먹었다. 광주에서 서울로 유학 와서 하숙방이나 자취방 생활을 하는 나로서는 그런 곰탕집이 있는 줄도 몰랐고 설사 알았더라도 찾아갈 처지가 안 되었을 것이다.

 

어떻든 나는 대학생부에서 오 선배(그때는 오선배라고 하였다)를 종종 만났지만 대학생부 모임이 그렇게 활성화되지는 않았다. 그 후 나는 교회생활이외에도 대학에서 기독학생회( SCA)운동에 참여하여 성경공부나 기도모임에 자주 참여했는데 오재식 선배는 또 기독학생회의 총본산인 한국기독교학생연합회의 간부로 활동하고 계셨다. 나는 SCA운동에 참여하면서 나보다 1년 선배인 사회학과의 김재온씨가 회장인 SCA가 계간으로 발행하는 “길”이라는 팜플릿에 Charles Kingsley 목사 등이 주장하는 기독교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껴 기독교 사회주의의 길이라는 글을 쓰기도 하고 SCA를 통해 외국에서 한국으로 유학 온 크리스천 유학생들과도 교분을 가졌다.

 

4.19혁명 후 나는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과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선전위원장으로 활동하였는데 이때 민통연이 제안했던 남북학생회담이 문제되어 5.16군사혁명당국은 민족통일연맹 간부들을 모두 군사혁명재판에 회부하였다. 이 사건으로 나는 7년징역 형을 선고받았지만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의 형 확인과정에서 4.19혁명의 공적을 평가, 형 면제 조치를 취함으로써 1년여 만에 서울 서대문교도소에서 출감하였다.

 

이때부터 나는 서울거리를 방황하는 노숙자 신세가 되었는데 틈틈이 젠센 기념관 사무실에서 Frontier Service and Study를 주관하는 오재식 선배를 찾아가 인생 상담도 하고 시국담도 나누었다. 몇차례 불광동의 오선배님 댁에서 잠자리 신세를 진일도 있었다. 그후 오선배님 내외는 가끔 나를 만나면 아직도 Tooth Brush를 가지고 다니느냐고 묻곤 했다. 노숙자처럼 이집 저집 다니면서 동가숙, 서가식 할 때는 자기 칫솔만은 꼭 지참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출감 후 퇴학당한 상태에서 복교가 되기 전의 나의 생활은 매우 단조로웠다. 매일 도서관과 가정 교사하는 집 외에는 갈 곳이 없었다. 이때 시내에 나오면 오재식 선배 방을 찾아갔다. 오선배와의 만남은 나에게 항상 큰 위로가 되었고 그의 격려는 새로운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나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권면해 주었다. 기독교사상지 1962년 8월호에 “아시아 민족주의운동의 전개”라는 나의 글을 싣게 해준 것도 오 선배였다. 또 오 선배를 통해서 강문규 선생, 박상증 선생, 박형규 목사, 한배호 선생, 김규택 선생, 백상창 박사, 연세대 교수이던 함병춘 박사 등 많은 분들을 만나게 되었고 교분을 쌓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정치가 3선 개헌 파동을 겪게 되면서부터 나와 오 선배와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오 선배는 김재준 목사님과 같은 민주화노선을 고수하면서 기독교의 세계적 연대 속에서 한국에서의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화를 추진하는데 헌신했다. 나는 당시 성균관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조교(원장 차기벽 교수)라는 타이틀로 김규택 교수연구실에 상주하면서 김 교수가 맡아온 연구프로젝트를 돕고 또 思想界와 政經硏究誌 등에 글을 발표, 생계를 꾸려갔다. 그러다가 동양통신 외신부 기자로 취직하고 결혼 후 국토통일원 상임연구위원으로 발탁되었다.

 

 4.19혁명대열에 참가한 후 혁명재판에서 유죄선고를 받고 출감한 후부터는 신원조회에 묶여 유학도 못가고 취업도 못하는 국내추방상태에서 살았는데 9년 만에 처음으로 내 인생은 궤도에 들어섰다. 결국 친정부노선을 걷게 된 것이다. 오 선배의 입장에서는 나의 선택은 전향이거나 변절로 보였을 것이다.

 

오 선배는 외유내강하면서도 매우 올곧은 분이었다. 민주화투쟁노선에 자신을 내던지면서부터 강원용목사와의 관계도 다소 소원해진 것 같았으며 활동무대도 한국을 떠나 WCC의 동아시아 기독협의회(EACC)의 책임을 맡아 동경에 망명하다싶이 체류했다. 나는 통일원 교육홍보실장을 역임하면서 남북적십자 회담이 실패로 끝난 후 재일동포 모국방문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의 여러 민단 거류지역을 순방, 강연활동을 전개했다.

 

동경에 머무르는 동안 오 선생과 연락하여 만났다. 그는 매우 피곤하고 지친 모습이었다. 혼자 와서 고생하면서 민주화를 향한 투쟁의 집념을 불태우고 있었다. 아마 그의 눈에는 나도 유신잔당으로 보였을 것이다. 우리의 만남은 帝國호텔 로비에서 차 한잔 나누는 정도였다. 서로 간에 차이가 나타날 시국문제에 대해서는 피차 말을 아끼고 안부나 살피는 수준의 대화밖에 잇지 못했다.

 

내가 국회의원으로, 전두환 대통령의 총재비서실장으로 활동하던 시절에는 그를 전혀 만날 수 없었다. 오 선배가 귀국한 후 가끔 교회나 결혼식장에서 마주치는 일은 있었지만 반갑게 대화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부인되는 노옥신 여사는 항상 웃는 낯으로 나를 반갑게 대해주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한 번 민주투사의 길에 들어서면 내편 네 편을 항상 구별하는 편가르기가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졌다. 자기 편이 아니면 마음의 문을 닫고 세상살이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 친북적 통일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으레 흡사 자기가 무슨 대단히 옳은 일 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처럼 순교자적 표정을 지으면서 사는 사람들도 있다. 나와 통일운동을 함께 하던 친구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이 몇 있다.

 

나는 정치활동에서 손을 뗀 후 대북NGO단체인 한민족복지재단의 공동대표로 몇 년간 활동하면서 북한도 여러 차례 방문했다. 북한어린이 급식지원사업이나 평남 숙천군 약전리 협동 농장지원사업 때문에 북한 측 민족화해협력위원회(민화협)사람들과도 자주 대화모임을 가졌다. 이 때 오 선배는 월드비전 회장으로 북한 돕는 사업을 하는 단체의 장이었기 때문에 나와 같은 북한민간협력단체(북민협)의 맴버로서 가끔 만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당면한 문제를 놓고 진지한 토론을 한 일은 없다. 나는 항상 친정부적 발상을 깔고 대북협력에 임하는 반면 오선배는 민주화운동 때와 마찬가지로 북한을 돕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명의식에서 문제에 접근 하는 자세였다. 기독교 단체가운데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분들의 대다수는 대북지원NGO하나씩을 만들어 북한지원에 나섰으며 이들은 특히 해외에서 조선기독교연맹과의 만남을 가지면서 북한선교라는 모자를 쓰고 북한돕기운동에 가세했다. 나와 그들과는 항상 입장차이가 있다. 최근 백낙청 전 교수등 등 소위 원탁회의 파들이 말하는 2013체제와도 그들은 다소 일맥상통하는 정향이 있었다.

 

민주화운동이나 통일운동에 관련된 이른바 재야인사들은 김대중 정권, 노무현정권이 들어서면서 거의 친정부적 성향을 보이면서 크고 작은 감투를 얻어 쓴분들이 많았다. 적어도 정부가 추천하는 기관의 위원이나 이사자리라도 하나씩 주어찼다. 그러나 오선배는 달랐다. 그는 그런 감투에는 뜻이 없었고 올바른 민주화의 진행, 인도적 차원의 북한동포지원, 어렵고 힘든 친지들을 자기 형제로 대접하고 돌보는 일에만 평생 골몰했다. 그의 부인은 오선생이 돌아가시기 몇달전까지만 해도 여러 어려운 친지들을 집으로 데려와 묵게했는데 자기가 아르바이트해서 번 수입으로 오선생의 이런 봉사를 뒷받침했다고 술회했다. 

 

이렇게 회고할 때 내가 가장 가까워야 할 오 선배와 나 사이에는 살아가는 방식과 환경인식 차이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을 것 같다. 오선생의 올곧음이 때로는 너무 비타협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오선배는 한번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굽힐줄 모르는 강인함을 풍겼다. 나는 가치의 절대성에 구애받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다. 일상적 합리주의를 추구하기 때문에 누구의 올곧음이나 특정가치 지상주의에 큰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만사는 세월이 흐르면서 변한다는 생각으로 인생과 세계를 본다. 

 

나는 한중문화협회 회장으로서 협회에서 발행하는 모든 간행물이나 저서를 꼭 오 선배에게 보냈다. 나를 만날 때면 으레 “보내주는 것 잘 받았네, 이형 너무 열심히 일하는구만,”하면서 응대해주었다. 그러나 그의 팔순잔치에 열린 출판기념회에 나를 초청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벽 때문인지 아니면 병중에 갖는 행사로 경황 중 생각이 미치지 못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떻든 오선배와 나 사이에 있었던 차이의 벽은 끝내 깨지 못한 상태에서 영별하게 되었다.

 

좋은 분들과의 사이에 생긴 벽이나 차이는 서둘러 허물었어야 하는데 내 노력이 부족했음을 이제 다시 깨닫는다. 이렇게 쉽게 떠날 분이었다면 좀 더 빨리 허심탄회한 대화의 기회를 만들고 마음속에 느꼈던 차이들을 밖으로 쏟아내어 해소해야 하는데 그런 기회를 영 되찾을 수 없게 된 것이 못내 아쉽다.

 

나도 7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고 보니 내가 마음의 부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금 별로 만나지도 못하고 대화도 못하는 분들이 있는가를 다시 반성하게 된다. 오선배의 삶은 인간적으로는 매우 성공한 것이었다. 마음씨 곱고 항상 남편을 이해하는 아내를 가진 점에서 가장 큰 점수를 놓고 싶다. 또 행동하는 크리스천으로서 모범을 보인 삶을 살아온 점에서도 큰 점수를 드려야 한다. 권력이나 재물을 탐하지 않은 삶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오 선배 같은 훌륭한 사회운동가를 항시 필요로 한다. 뒤를 이을 좋은 분들이 나오겠지만 내가 아는 좋은 분은 그리 쉽게 나올 것 같지 않다. 오 선배 또래의 사회지도자들이 한분씩 주위에서 사라져간다. 실로 아쉬운 마음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오선배가 궁극적으로 바라고 그리던 조국의 미래상이 무엇이었는가를 놓고 툭 트인 대화를 못가진 것이 한스럽다. 일요일 오전의 빈소는 한산했지만 미망인이 된 노옥신 여사 , 문상온 민경배교수와 대화를 나누었다. 고인의 명복을 기원하고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큰 위로가 있기를 빈다.

 

                                              2013년 1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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