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재식 선생의 부음을 듣고

 

오재식 선생의 부음이 아침 신문에 보도되었다. 몸이 안 좋아 투병중이라는 이야기는 박경서 형을 통해 전해 들었지만 이렇게 빨리 별세하실 줄은 몰랐다. 인터넷 뉴스를  보니 오 선생은 작년 11월 14일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팔순잔치를 열고 나에게 꽃으로 닥아오는 현장이라는 회고록을 발표했다는데 나는 정식으로 초청을 받지 못했고 또 그 때 선약이 있어 못 가뵌 것이 몹시 마음에 걸린다.

 

나는 1958년 6월경 경동교회에서 오재식 선생을 처음 만났다. 본 예배가 끝난 후 교회에 나오는 대학생들은 잠시 그 자리에 남아달라는 광고말씀을 듣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나보다 약간 선배로 보이는 오재식 선생이라는 분이 나와서 목사님 부탁으로 자기가 이 교회의 대학생부 조직을 맡게 되었다고 자기소개를 해서 처음 만났다. 참석자들의 자기소개를 하는 순번이 나에게 와서 나도 금년에 서울대학교 문리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이영일이라고 소개하자 그는 자기도 문리대 종교학과를 졸업했다면서 나에게 유난히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회의가 끝난 후 점심이나 같이하자면서 나를 시내 삼각동에 위치했던 하동관 곰탕집으로 데려갔다. 그렇게 맛있는 곰탕을 난생 처음으로 먹었다. 광주에서 서울로 유학 와서 하숙방이나 자취방 생활을 하는 나로서는 그런 곰탕집이 있는 줄도 몰랐고 설사 알았더라도 찾아갈 처지가 안 되었을 것이다.

 

어떻든 나는 대학생부에서 오 선배(그때는 오선배라고 하였다)를 종종 만났지만 대학생부 모임이 그렇게 활성화되지는 않았다. 그 후 나는 교회생활이외에도 대학에서 기독학생회( SCA)운동에 참여하여 성경공부나 기도모임에 자주 참여했는데 오재식 선배는 또 기독학생회의 총본산인 한국기독교학생연합회의 간부로 활동하고 계셨다. 나는 SCA운동에 참여하면서 나보다 1년 선배인 사회학과의 김재온씨가 회장인 SCA가 계간으로 발행하는 “길”이라는 팜플릿에 Charles Kingsley 목사 등이 주장하는 기독교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껴 기독교 사회주의의 길이라는 글을 쓰기도 하고 SCA를 통해 외국에서 한국으로 유학 온 크리스천 유학생들과도 교분을 가졌다.

 

4.19혁명 후 나는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과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선전위원장으로 활동하였는데 이때 민통연이 제안했던 남북학생회담이 문제되어 5.16군사혁명당국은 민족통일연맹 간부들을 모두 군사혁명재판에 회부하였다. 이 사건으로 나는 7년징역 형을 선고받았지만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의 형 확인과정에서 4.19혁명의 공적을 평가, 형 면제 조치를 취함으로써 1년여 만에 서울 서대문교도소에서 출감하였다.

 

이때부터 나는 서울거리를 방황하는 노숙자 신세가 되었는데 틈틈이 젠센 기념관 사무실에서 Frontier Service and Study를 주관하는 오재식 선배를 찾아가 인생 상담도 하고 시국담도 나누었다. 몇차례 불광동의 오선배님 댁에서 잠자리 신세를 진일도 있었다. 그후 오선배님 내외는 가끔 나를 만나면 아직도 Tooth Brush를 가지고 다니느냐고 묻곤 했다. 노숙자처럼 이집 저집 다니면서 동가숙, 서가식 할 때는 자기 칫솔만은 꼭 지참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출감 후 퇴학당한 상태에서 복교가 되기 전의 나의 생활은 매우 단조로웠다. 매일 도서관과 가정 교사하는 집 외에는 갈 곳이 없었다. 이때 시내에 나오면 오재식 선배 방을 찾아갔다. 오선배와의 만남은 나에게 항상 큰 위로가 되었고 그의 격려는 새로운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나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권면해 주었다. 기독교사상지 1962년 8월호에 “아시아 민족주의운동의 전개”라는 나의 글을 싣게 해준 것도 오 선배였다. 또 오 선배를 통해서 강문규 선생, 박상증 선생, 박형규 목사, 한배호 선생, 김규택 선생, 백상창 박사, 연세대 교수이던 함병춘 박사 등 많은 분들을 만나게 되었고 교분을 쌓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정치가 3선 개헌 파동을 겪게 되면서부터 나와 오 선배와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오 선배는 김재준 목사님과 같은 민주화노선을 고수하면서 기독교의 세계적 연대 속에서 한국에서의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주화를 추진하는데 헌신했다. 나는 당시 성균관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조교(원장 차기벽 교수)라는 타이틀로 김규택 교수연구실에 상주하면서 김 교수가 맡아온 연구프로젝트를 돕고 또 思想界와 政經硏究誌 등에 글을 발표, 생계를 꾸려갔다. 그러다가 동양통신 외신부 기자로 취직하고 결혼 후 국토통일원 상임연구위원으로 발탁되었다.

 

 4.19혁명대열에 참가한 후 혁명재판에서 유죄선고를 받고 출감한 후부터는 신원조회에 묶여 유학도 못가고 취업도 못하는 국내추방상태에서 살았는데 9년 만에 처음으로 내 인생은 궤도에 들어섰다. 결국 친정부노선을 걷게 된 것이다. 오 선배의 입장에서는 나의 선택은 전향이거나 변절로 보였을 것이다.

 

오 선배는 외유내강하면서도 매우 올곧은 분이었다. 민주화투쟁노선에 자신을 내던지면서부터 강원용목사와의 관계도 다소 소원해진 것 같았으며 활동무대도 한국을 떠나 WCC의 동아시아 기독협의회(EACC)의 책임을 맡아 동경에 망명하다싶이 체류했다. 나는 통일원 교육홍보실장을 역임하면서 남북적십자 회담이 실패로 끝난 후 재일동포 모국방문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일본의 여러 민단 거류지역을 순방, 강연활동을 전개했다.

 

동경에 머무르는 동안 오 선생과 연락하여 만났다. 그는 매우 피곤하고 지친 모습이었다. 혼자 와서 고생하면서 민주화를 향한 투쟁의 집념을 불태우고 있었다. 아마 그의 눈에는 나도 유신잔당으로 보였을 것이다. 우리의 만남은 帝國호텔 로비에서 차 한잔 나누는 정도였다. 서로 간에 차이가 나타날 시국문제에 대해서는 피차 말을 아끼고 안부나 살피는 수준의 대화밖에 잇지 못했다.

 

내가 국회의원으로, 전두환 대통령의 총재비서실장으로 활동하던 시절에는 그를 전혀 만날 수 없었다. 오 선배가 귀국한 후 가끔 교회나 결혼식장에서 마주치는 일은 있었지만 반갑게 대화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부인되는 노옥신 여사는 항상 웃는 낯으로 나를 반갑게 대해주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한 번 민주투사의 길에 들어서면 내편 네 편을 항상 구별하는 편가르기가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졌다. 자기 편이 아니면 마음의 문을 닫고 세상살이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 친북적 통일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으레 흡사 자기가 무슨 대단히 옳은 일 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것처럼 순교자적 표정을 지으면서 사는 사람들도 있다. 나와 통일운동을 함께 하던 친구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이 몇 있다.

 

나는 정치활동에서 손을 뗀 후 대북NGO단체인 한민족복지재단의 공동대표로 몇 년간 활동하면서 북한도 여러 차례 방문했다. 북한어린이 급식지원사업이나 평남 숙천군 약전리 협동 농장지원사업 때문에 북한 측 민족화해협력위원회(민화협)사람들과도 자주 대화모임을 가졌다. 이 때 오 선배는 월드비전 회장으로 북한 돕는 사업을 하는 단체의 장이었기 때문에 나와 같은 북한민간협력단체(북민협)의 맴버로서 가끔 만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당면한 문제를 놓고 진지한 토론을 한 일은 없다. 나는 항상 친정부적 발상을 깔고 대북협력에 임하는 반면 오선배는 민주화운동 때와 마찬가지로 북한을 돕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명의식에서 문제에 접근 하는 자세였다. 기독교 단체가운데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분들의 대다수는 대북지원NGO하나씩을 만들어 북한지원에 나섰으며 이들은 특히 해외에서 조선기독교연맹과의 만남을 가지면서 북한선교라는 모자를 쓰고 북한돕기운동에 가세했다. 나와 그들과는 항상 입장차이가 있다. 최근 백낙청 전 교수등 등 소위 원탁회의 파들이 말하는 2013체제와도 그들은 다소 일맥상통하는 정향이 있었다.

 

민주화운동이나 통일운동에 관련된 이른바 재야인사들은 김대중 정권, 노무현정권이 들어서면서 거의 친정부적 성향을 보이면서 크고 작은 감투를 얻어 쓴분들이 많았다. 적어도 정부가 추천하는 기관의 위원이나 이사자리라도 하나씩 주어찼다. 그러나 오선배는 달랐다. 그는 그런 감투에는 뜻이 없었고 올바른 민주화의 진행, 인도적 차원의 북한동포지원, 어렵고 힘든 친지들을 자기 형제로 대접하고 돌보는 일에만 평생 골몰했다. 그의 부인은 오선생이 돌아가시기 몇달전까지만 해도 여러 어려운 친지들을 집으로 데려와 묵게했는데 자기가 아르바이트해서 번 수입으로 오선생의 이런 봉사를 뒷받침했다고 술회했다. 

 

이렇게 회고할 때 내가 가장 가까워야 할 오 선배와 나 사이에는 살아가는 방식과 환경인식 차이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을 것 같다. 오선생의 올곧음이 때로는 너무 비타협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오선배는 한번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굽힐줄 모르는 강인함을 풍겼다. 나는 가치의 절대성에 구애받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다. 일상적 합리주의를 추구하기 때문에 누구의 올곧음이나 특정가치 지상주의에 큰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만사는 세월이 흐르면서 변한다는 생각으로 인생과 세계를 본다. 

 

나는 한중문화협회 회장으로서 협회에서 발행하는 모든 간행물이나 저서를 꼭 오 선배에게 보냈다. 나를 만날 때면 으레 “보내주는 것 잘 받았네, 이형 너무 열심히 일하는구만,”하면서 응대해주었다. 그러나 그의 팔순잔치에 열린 출판기념회에 나를 초청하지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벽 때문인지 아니면 병중에 갖는 행사로 경황 중 생각이 미치지 못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떻든 오선배와 나 사이에 있었던 차이의 벽은 끝내 깨지 못한 상태에서 영별하게 되었다.

 

좋은 분들과의 사이에 생긴 벽이나 차이는 서둘러 허물었어야 하는데 내 노력이 부족했음을 이제 다시 깨닫는다. 이렇게 쉽게 떠날 분이었다면 좀 더 빨리 허심탄회한 대화의 기회를 만들고 마음속에 느꼈던 차이들을 밖으로 쏟아내어 해소해야 하는데 그런 기회를 영 되찾을 수 없게 된 것이 못내 아쉽다.

 

나도 7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고 보니 내가 마음의 부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금 별로 만나지도 못하고 대화도 못하는 분들이 있는가를 다시 반성하게 된다. 오선배의 삶은 인간적으로는 매우 성공한 것이었다. 마음씨 곱고 항상 남편을 이해하는 아내를 가진 점에서 가장 큰 점수를 놓고 싶다. 또 행동하는 크리스천으로서 모범을 보인 삶을 살아온 점에서도 큰 점수를 드려야 한다. 권력이나 재물을 탐하지 않은 삶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오 선배 같은 훌륭한 사회운동가를 항시 필요로 한다. 뒤를 이을 좋은 분들이 나오겠지만 내가 아는 좋은 분은 그리 쉽게 나올 것 같지 않다. 오 선배 또래의 사회지도자들이 한분씩 주위에서 사라져간다. 실로 아쉬운 마음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오선배가 궁극적으로 바라고 그리던 조국의 미래상이 무엇이었는가를 놓고 툭 트인 대화를 못가진 것이 한스럽다. 일요일 오전의 빈소는 한산했지만 미망인이 된 노옥신 여사 , 문상온 민경배교수와 대화를 나누었다. 고인의 명복을 기원하고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큰 위로가 있기를 빈다.

 

                                              2013년 1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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