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베트남의 하노이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
1. 들어가면서
나는 오래전부터 베트남 통일이후의 하노이를 꼭 한번 방문하고 싶었다. 이 욕구는 작년 7월 1주일동안 통일독일의 동독지역으로 베를린과 라이프치히를 방문하면서부터 더욱 간절해졌다. 뜻밖에도 제 큰딸이 갖는 아트 프로젝트에 하노이가 포함된 관계로 지난 6월 5일부터 10일까지 5일간 하노이를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베트남이 통일된 지 금년으로 38년이 되는 해에 나는 통일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를 찾은 것이다.
항공기가 인천공항에서 하노이의 노이 바이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의 4시간동안 나의 뇌리에는 그간 명멸했던 정치인들의 이름이 스쳐갔다. 이미 작고한 분들이 대부분이지만 베트남 의 분열과 통일과정에서는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인물들의 이름이 하나씩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1969년 베트남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작고한 항불(抗佛)독립운동가요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세운 호치민(胡志明)대통령의 삶과 죽음을 생각했다. 또 미국의 잘못된 베트남 개입정책을 합리화하기위해 발생한 쿠데타로 목숨을 잃은 고딘디엠 ‘자유베트남’ 대통령, 쿠데타의 주역들이었던 구엔 반 티우 대통령이나 콧수염을 자랑했던 구엔 카오 키 부통령(현재는 LA에서 리꺼 스토어를 한다고 알려졌다)의 이름도 떠올랐다. 베트남 평화협상개시와 함께 그 이름을 날렸던 수안 투이 협상대표나 헨리키신저와의 담판으로 월남평화협상을 마무리했던 레둑토 베트남 정치국원, 구정(舊正)공세(Tet Offensive)를 주도했던 보 구엔 지압 장군의 이름도 내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있다. 내가 월남의 인물들을 이렇게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내 인생의 어려운 시절인 1960년대 후반에 D통신사의 외신기자로 활동하면서 베트남 전황을 보도하는 일에 수년간 매달렸기 때문이다.
오늘날 베트남은 항불 독립운동운동을 주도하면서 베트남 민족의 포괄적인 지지를 받던 호치민 대통령의 민족해방전선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국가통일을 달성했다. 전쟁사학자들은 미국은 월남전에서 전투에는 승리했지만 전쟁에서는 패했다고 평가한다. 결국 베트남은 1975년 한반도의 3배되는 영토에 인구 9천만을 포용하는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으로 통일되었고 베트남 민족의 새로운 역사가 통일된 수도 하노이를 중심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제 통일된 베트남의 오늘을 살펴보기 위해 나는 하노이 공항에 발을 내딛은 것이다.
2. 미국은 왜 베트남정책에 실패했던가.
제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미국은 소련의 등장으로 양분된 냉전의 세계질서를 주도하면서 소련공산주의 세력이 아시아 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유럽에서 독일이 분단되고 동구라파 제국이 소련의 영향권으로 들어가면서 세계는 미소양국이 주도하는 냉전체제로 분립하였다. 양진영간에는 철의 장막이 펼쳐졌다. 이때 미국을 당황케 했던 것은 중국대륙이 중국공산당의 지배로 넘어가는 사태였다. 이때 미국은 장개석 정부대신에 중국공산당 정부와의 관계 정상화를 위한 협상을 개시했다. 이를 알아챈 소련은 북한 김일성으로 하여금 남침 전쟁을 일으키게 하고 이 전쟁에 중국을 끌어들임으로써 미국과 중국을 대결관계로 몰아넣는데 성공했다. 이 틈바구니에서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세력을 퇴치하고 민족공산주의자인 호치민의 주도로 베트남의 통일가능성이 엿보이자 이를 방치할 경우 동남아시아 일대가 공산주의의 영향권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라는 도미노 현상을 우려, 프랑스를 대신해서 인도차이나 반도의 공산화를 억제한다는 명분으로 미국은 베트남 내전에 말려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전략가들은 베트남과 호치민에 대해 연구가 너무 부족했다. 호치민이 선택한 노선은 국제공산주의운동이 아니라 베트남의 자주독립이었고 국제공산주의운동에 가담한 것은 독립을 위한 수단이었다. 또 역사적으로 베트남을 오랫동안 속국으로 무시해 온 중국을 몹시 혐오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참전한 미국은 각개 전투에서는 승리를 얻었을지 몰라도 전쟁승패를 결정짓는 베트남 인들의 마음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게릴라 군은 지지 않으면 이기지만 정규군은 이기지 못하면 패한다는 게릴라전의 명제에 익숙하지 못했다. 결국 미국은 국내의 반전여론에 밀려 협상을 통한 철군정책을 추구했다. 미국 측 협상의 주역은 헨리 키신저였고 베트남에서는 레둑토가 대미협상을 맡았다. 이 당시 키신저는 베트남이 공산화되더라도 중국이나 소련의 영향권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을 것임을 내다보면서 베트남이 북부베트남 주도로 통일되는 길을 터주었다. 결국 베트남은 1975년 미군철수와 때를 같이해서 사회주의 국가로 통일되었고 통일된 지 4년 후인 1979년 베트남은 중국의 선제침공으로 전쟁을 개시했다. 베트남의 캄란 만이 소련의 군사기지가 되어 중국을 포위하려한다는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 중국이 베트남을 침공했지만 베트남군의 강한 반격으로 중국은 패퇴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전쟁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이 소련의 군사기지가 되는 것을 저지한다는 전략목표는 달성했다. 키신저가 예측한대로 미국은 통일베트남과 다시 수교했고 인도차이나 반도의 공산화 도미노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국제관계에는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우방도 없으며 그때그때마다의 국익이 있을 뿐이라는 영국외상 팔머스톤의 말이 허언이 아님을 실감케 한 사건이었다.
3. 도이모이로 불리는 개혁개방과 시장경제의 도입
베트남은 1975년 통일된 후 남북베트남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면서 남북지역의 사회주의적 개혁에 주력했다. 남부베트남을 해방시켰다는 당당한 명분을 배경으로 남부베트남의 반사회주의(反社會主義)적 요소를 배제 순화시키는 정치교육을 강화하는 작업을 서둘렀다. 한편 구체제의 지도세력은 대부분 해외로 망명하거나 보트피플로 잔명을 부지하다가 세계 각국으로 흩어지는 베트남 판 디아스포라가 되었다. 통일 베트남의 내부정비는 세 차원에서 강력히 추진되었는데 하나는 공산당 주도의 국가통치체제를 강화하고 둘째는 화교(華僑)에 의한 경제 지배를 철저히 억제하였으며 셋째는 이슬람세력의 베트남 침투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내부정비가 끝난 후인 1986년부터 중국에서와 같은 개혁개방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판반동 수상이 주도하는 초기 개혁은 사회주의 원칙의 테두리에 지나치게 얽매임으로써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했다. 여러 차례의 시행착오의 과정을 거친 후 1996년부터 베트남의 개혁개방이 성과를 나타내면서 시장화개혁이 정착되었고 이제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활기찬 발전의 도정에 올랐다고 한다. 현재 1인당 GNP는 1,600 달러 수준이지만 호치민 시의 GNP는 6,000 달러로 추정되고 이에 비해 하노이 시는 4,000 달러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4. 한국과 베트남의 경제협력
나는 한국군의 베트남전쟁 참전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약소민족의 민족해방투쟁을 막는데 우리가 개입했다는 것이 결코 개운치 않은 추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한 이후 양국관계는 다른 어느 공산국과의 관계보다 더 좋을 뿐만 아니라 베트남 인들의 한국선호도는 상상도 못할 만큼 높다는 것이다. 특히 양국 간의 협력은 경제 분야는 물론이거니와 문화, 예술, 국제결혼에 이르기까지 확대 심화되고 있다. 특히 신기한 것은 동남아국가들 중에서 베트남 사람들과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닮았다는 것이다. 베트남 왕국의 왕자 두 사람이 한국으로 건너와 오늘의 화산 이 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사실에 미루어 남방계 한국인의 출처가 베트남인지도 모를 일이다.
하노이의 노이 바이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올 때는 반드시 홍강(紅江)을 건너는 상롱교(上龍橋-러시아 베트남 친선교)를 지나야 하는데 다리의 양옆에는 최근 베트남에 거액을 투자, 휴대폰 부품 공장을 짓고 있는 삼성전자를 축하하기 위해 영어로 쓴 삼성의 깃발이 다리의 마디마디를 뒤덮고 있었다. 다리를 지나자 금호타이어 광고가 크게 눈에 띄었고 이어서 LG의 대형광고판이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하노이 시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옛날에는 대우 호텔과 대우 경영센터였지만 지금은 경남 기업이 지었다는 랜드마크 빌딩이 가장 높으며 현대건설의 힐 스테이트가 시내에 우뚝 솟아 고층 아파트의 상징이 되고 있었다.
또 주식회사 인평(仁平)이 하노이의 경전철의 시작지점에 대우 Cleve라는 이름으로 착수한 4,500세대의 아파트와 빌라공사가 한창이었다. 앞으로 이 아파트와 빌라 단지가 예술프로젝트와 제휴, 예술 감각이 살아 숨쉬는 단지로 완공된다면 프랑스의 문화와 예술의 향기가 깃든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도시건축의 새로운 명품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발전하는 국가들의 특징은 도시의 도처에 스카이 크레인이나 타워크레인으로 시야가 채워지는 것이다. 하노이 시는 도처에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경제기획원 장관을 역임한 장기영 씨가 흰 코끼리, 검은 코끼리라고 비유했던 스카이 크레인들이 공사현장마다 나름대로의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또 도시의 한복판들에는 한국브랜드의 뚜레쥬르, 파리바게트, 롯데리아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한국과 함께 발전하는 하노이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음식문화도 우리의 기호에 맞았고 특히 식당에서 마다 좋은 와인을 비치하면서 파는 것은 프랑스의 유산이 아닐까.
5. 본받아야 할 지도자 호치민(胡志明)의 위대한 애국 애민 정신
오늘날 베트남이 통일이후에 새로운 내전이나 갈등을 유발하지 않고 남북이 통합에 완전히 성공하고 발전의 큰 궤도에 진입하게 된 것은 독립운동지도자 호치민 대통령이 실천한 리더십의 귀결이었다.
그는 16세까지 유교를 신봉하면서 한학(漢學)을 공부하던 농민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큰 꿈을 품고 자기조국을 식민지로 붙들어 맨 프랑스 수도 파리로 가서 베트남 해방운동의 이론과 철학을 몸에 익히고 모스크바와 베이징 등지에서 약소민족 해방투쟁의 전략과 전술을 연구하면서 베트남의 항불 독립투쟁에 착수했다. 프랑스와 싸우는 과정에서 호치민은 북부베트남으로 쳐들어온 일본과도 싸워야 했다. 중일전쟁 당시에 중국을 지원하는 미국의 원조루트를 차단하기 위해 일본이 북부베트남을 침공하고 마침내 일본의 전역(戰域)은 베트남, 미얀마, 싱가포르, 필리핀으로 확대되었다. 이 시기에 미국은 일본을 물리치기 위해 항불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호치민 군을 원조하였고 이 원조에 힘입은 호치민은 일본의 패망과 동시에 프랑스군과 싸워 디엔비엔푸에서 항불투쟁의 최종적 승리를 얻고 북부베트남에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베트남민주공화국 성립 후 프랑스앞잡이 노릇을 했던 반 민족행위자가 많이 체포되었지만 그는 극소수의 지도층 인을 제외하고는 대사면을 내려 민족화합을 도모했다. 이승만 박사가 해방 후 총 한방 쏘지 않고 나라를 일본에 바쳐 2000만 우리 민족이 친일하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만든 조선국왕에게 물어야 할 책임을 일제하에서 고생하면서 생을 이어온 동포들의 일부를 민족반역자로 몰아 책임을 덧씌우자는 것은 반드시 옳은 일은 아니라고 말하고 소수 악질분자만을 처단하는 것으로 친일문제를 매듭짓고 국가건설에 힘을 쏟자고 호소한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그는 통일을 보지 못하고 병사하면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1.나의 무덤을 만들지 마라. 나를 우상화 하지마라.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해 서 월남의 동서남북 네 곳에 뼛가루를 뿌려 통일월남의 거름이 되게 하라.
2.친미, 자본주의 세력에 대해 보복하지 마라. 그들을 품으라.
3.전쟁으로 남편이 죽은 가정을 국가가 책임져 주라.
그리고 그간 남긴 재산은 슬리퍼 하나와 옷 세벌, 그리고 목민심서 한질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애국애민정신이 실천되고 이어졌기 때문에 오늘의 베트남은 활력 있는 통일국가로 발전하고 있으며 해외로 나간 동포들의 본국송금이 매년 120억 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한 때 같은 공산주의자의 길을 걸었다고 하지만 호치민의 길과 김일성의 길은 너무 달랐다. 우리나라의 과거나 현재의 지도자들에게도 참으로 귀감이 되는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영상 42도를 웃도는 폭염의 날씨였지만 하롱베이(下龍灣)관광을 끝으로 하노이여정은 끝났다. 그러나 분단국이 통일에 성공한 이모저모를 보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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