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줄 오른편에서 넷째번이 박영호 교수, 오른편 앞줄 끝이 부인, 필자는 전면의 검정 모자,우편옆이 김중배, 주섭일 씨등이다.

“공산당 선언 새로 읽기”출판기념회

나는 2012년 12월 1일 하오 4시 시내 레이첼 카슨 홀에서 열린 박영호 교수 저술의 공산당 선언 새로읽기 출판기념회에 참석했다. 「지식을 만드는 지식출판사」가 출간한 박영호 교수의 공산당선언 새로 읽기는 근래 보기 드문 명작으로서 박교수가 근 2년여에 걸친 연구 끝에 발표한 노작이었다.

 

한중문화협회 연구이사이기도 한 박영호 박사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경제학박사학위를 얻은 석학으로서 대학시절이래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다. 그는 164년 전에 발표된 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현재를 기준으로 재조명하면서 그간 마르크스이념을 구현했다고 자부하면서 출범한 소련에서의 공산주의의 실험이 얼마나 마르크스의 이념으로서의 인간해방, 인간소외의 극복, 민주주의의 실현과 동떨어진 체제였던가를 실감 있게 파헤쳤다.

 

동시에 그간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지만 그때그때의 처방으로 아직도 그 잔명을 부지하고 있는 자본주의가 소련에서 실패한 공산주의와 함께 또다시 존폐의 위기에 직면한 현실을 분석하면서 칼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인간해방의 메시지를 실현하지 못하는 이즘은 그것이 자본주의이건, 오도된 공산주의이건 결국 실패할 수 없다는 것을 날카롭게 피헤쳤다.

 

한때 동구라파에서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두브체크)가 체코개혁파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노동자의 자주연대운동이 폴란드(바웬사 등)에서 정치변혁을 가져왔다. 마르크스는 죽었지만 그가 추구했던 인간해방의 비전은 아직도 역사 속에 살아있음을 박 교수는 강력히 증언하면서 신자유주의가 몰고 온 인간소외, 빈익빈 부익부를 가져온 격차의 현실을 마르크스주의를 재음미해야 할 시대의 징표, 시대적 당위로 제시하고 있다.

 

박교수의 명쾌한 분석에 박수를 보내면서 한 가지 첨언하고 싶은 것은 모택동 이후 등소평의 이른바 초기 사회주의 이론과 공산당 선언과의 관계를 비교 체제차원에서 분석했으면 보다 논점의 보편화에 기여할 것 같다는 점이다.

 

중국의 등소평은 중국이 높은 단계의 사회주의를 하기에는 너무나 생산력발달이 뒤져있다면서 현재의 중국은 사회주의의 초기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이 단계를 극복, 더 높은 단계의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데는 앞으로도 약 100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중국은 지령경제, 계획경제의 문제점을 많은 면에서 해결하고 있지만 인간의 소외나 해방의 문제는 아직도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있다.

 

당내 민주나 사회민주를 말하지만 정치개혁과는 크게 연결되지못하고 있어 마르크스가 공산당선언에서 말한 민주와도 거리가 멀다. 그러나 소련공산주의 보다는 중국공산주의가 어느 면에서는 공산당 선언의 이념구현에 더 접근한 요소를 발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박교수는 무척 어려운 과제를 용기 있게 파헤치고 방향을 제시한 점에서 그의 노작은 그의 학문여정에서 중요한 기여로 평가될 것이다.

 

이날 출판기념식에서는 김중배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이부영 전 국회의원, 장기표 사회민주주의 연구회장, 조희연 교수의 축사에 이어 박만섭 고려대 교수의 서평, 박영호 박사의 인사말이 이어졌다. 특히 이날 박영호 교수는 그가 칼 마르크스와 만나게 된 동기를 설명하면서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재학시절 서울 상대에서 열린 학술토론대회에서 그가 공산당 선언과 레닌을 읽은 덕분에 1등 입상한 사실을 수상 사진과 함께 슬라이드 필름으로 보여주어 감동을 자아냈다.

 

근래에 드문 신선한 출판기념회, 뜻깊은 모임이었다. 플러스 감으로 채워진 토요일오후를 가진 것이 즐거웠다.

자리를 같이한 주섭일 박사(파리대박사, 전 중앙일보 대기자), 한기호 전자신문 사장, 김승균 남북교역사장, 장기표씨등과 어울려 김치찌개로 막걸리잔을 기울이면서 남의 출판기념회 뒤풀이를 한 것도 즐거운 추억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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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2012년 11월 24일 光州 프라도호텔에서 열린 재외동포문화예술대전 창립총회에서 행한 이영일 한중문화협회 회장의 축사전문입니다  

 

           재외동포문화예술대전 창립총회 축사

 

오늘 광주에서 매우 귀한 행사가 열렸습니다. 광주의 밝은 미래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민족의 발전과 지역의 발전이라는 두 개의 큰 명제를 동시에 충족시킬 야심찬 기획을 내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기로 오늘 이 행사를 개최하는 재외동포 후생 사업단은 재작년부터 광주광역시에 “韓中文化의 거리”를 만들어 지역발전과 재중동포사회를 연결시키려는 구상을 추진해왔습니다. 이를 위해 이들은 제1회 韓中詩畵교류전을 광주에서 가진 이래 중국과 한국을 오가면서 한중문화교류전시회를 3회에 걸쳐 개최하면서 마침내 재외동포 문화예술대전 창립을 이곳 광주에서 발기하기로 뜻을 세웠다고 합니다.

 

돌이켜 보건데 지금부터 21년 전 1991년에 한국과 러시아가 국교를 열고 그 다음해인 1992년, 한국과 중국 간에 국교가 열린 것을 계기로 그간 우리의 관심권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在中同胞社會, 在러시아同胞社會가 다시 우리 민족공동체의 일부로 새롭게 復活하였던 것입니다.

 

재중동포사회나 재러시아 동포사회는 우리 민족의 불행한 역사의 시작과 궤를 같이하면서 형성되었습니다. 지금부터 100년 전 조선왕조가 일본에 합방되던 비운의 역사를 맞으면서 일본제국주의의 치하에서 일본의 노예가 되는 삶을 거부하기 위해서 정든 산천을 버리고 한반도를 떠났던 분들, 조국광복을 위한 투쟁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서 떠났던 분들, 일제치하에서 먹을 것이 없어 생계를 꾸릴 땅을 얻기 위해 男負女戴하고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건넜던 분들의 후예들이 바로 오늘의 재외동포들입니다.

 

이들은 초기에는 중국의 만주벌판과 러시아의 연해주지역에 정착했다가 이제는 중국의 동북 3성과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대륙으로 흩어져 여러 나라의 국적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핏줄로 보나 문화적 습속으로 보나 언어로 보나 심지어 생김새까지를 보아도 우리 한민족임이 분명합니다. 이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나라와 한국 간에 국교가 열리면서부터 그리던 조국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리던 땅, 자기들의 부모가 죽기 전에 꼭 한번 가보고 싶다던 바로 그 땅을 다시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국 대한민국을 찾아온 대다수의 재외동포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노동력이외에는 아무 가진 것도 없이 노동 일을 하기위해 우리나라를 찾아왔습니다. 이들을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차갑게 노동자로 천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과연 이러한 나라가 자기 선조들이 그토록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다고 목메던 조국이었던가에 회의를 품는 재외동포들도 적잖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중국이 東北工程을 통해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역사 속에 편입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매우 분개하면서도 만주 땅에 살다가 한국으로 노동 일 하러 온 조선족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이들을 천시하거나 푸대접하는 사람들이 우리 국민들 가운데 있다는 것을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입니다.

 

여기에 바로 우리가 재외동포문제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야할 당위가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재외동포문제를 바로 해결해 나가려면 고용이나 피고용이라는 경제적 거래관계에서 생기는 문제도 잘 풀어야겠지만 그에 앞서서 추진해야할 과제는 오늘의 재외동포사회를 우리가 그 성립배경과 현황에 대해 보다 더 잘 알고 깊게 이해하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일은 어느 면에서는 정부가 앞장서 해결해야할 과제도 있지만 민족적 과업을 해결하는 주체를 꼭 정부에만 국한시킬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제외동포사회와 한국의 지역사회의 문화인들이, 예술인들이 주축이 되어 문화와 예술의 교류, 협력을 심화시켜 나감으로써 서로가 서로의 처지를 보다 깊이 알고 이해하는 폭도 넓힐 수 있을 것입니다.

 

재외동포가 형성되는 역사적 배경에 대해 우리들이 보다 깊이 알면 알수록 이들이 현재 당면한 처지가 우리와 무관한 남의 역사, 남의 처지 아니고 바로 우리와 핏줄을 같이 나눈, 民族受難의 역사를 함께 한 형제들의 처지, 형제들의 역사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 인구가 많은 재중동포와 재러시아 동포들이 그 나마 라도 우리 민족공동체의 일부로 존속하기 위해서는 재외동포들의 2세 교육이 아주 중요한 과제로 등장합니다. 핏줄이 같고 문화가 같다 하더라도 언어의 공통성이 사라지면 그것은 準 민족이지 온전한 민족으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족이 해체되거나 변질된다면 민족공동체의 개념도 희박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 재외동포의 2세들은 우리말을 거의 상실했거나 상실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가족개념도 변질되거나 왜곡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결코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일조일석에 풀 수 있는 문제도 아닙니다. 방도가 있다면 뜨거운 동포애를 바탕으로 문화교류와 협력을 통해서만이 민족공동체를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중국연변에서 매년 열리는 한글백일장운동을 저의 한중문화협회는 몇 년 동안 지원한 바 있습니다. 많은 성과를 얻었습니다. 이러한 사업에서는 정부보다는 바로 문화, 예술인들이 앞장설 때 더 현실적인 열매를 많이 맺게 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여기서 열리는 창립총회는 그 의의가 자못 크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재외동포사회의 문화인들과 藝鄕 광주의 문화인들이 서로 손을 잡고 재외동포문화예술대전을 창립하고 이를 토대로 문화교류와 협력의 길을 터서 지역발전에도 기여하고 재외동포사회의 발전에도 보탬이 되는 사업을 시도한 것은 매우 귀하고 값진 이니셔티브라고 나는 평가하고 싶습니다.

 

이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작업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나서서 문제를 제기하고 꼭 해결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피는 물보다 짙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피보다 더 짙은 것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뜨거운 동포애입니다.

 

 오늘 재외동포후생사업단이 광주를 시작으로 해서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려고 돛을 올렸습니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습니다. 좋은 뜻은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믿습니다. 시작은 작으나 후에는 크게 창대하리라는 믿음에 서서 큰 발전이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면서 축하의 말씀에 가름합니다.

                                                   

                                                          2012년 11월 24일

                   

                                      사단법인 한중문화협회 총재 이 영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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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왼쪽이 베이징 국제콩클 대표 張勇,박지은씨, 이규형대사, 필자)  

         Flutist 박지은의 수준 높은 연주를 듣고 씨

 

                                                               한중문화협회 회장 이 영 일

 

우연히 횡재를 만나는 일만큼 인간사에서 기쁜 일은 없을 것 같다. 횡재는 반드시 재물을 얻는 경우만이 아니다. 뜻밖에 뜻이 통하는 친구를 만난다거나 좋은 예술품을 발견하거나 또는 자기가 전혀 모르던 세계와 접하게 되는 경우도 횡제에 해당할 것이다. 나는 이런 의미에서 지난 10월 21일 밤 뜻밖에도 한국의 저명한 Flutist의 한 분인 박지은 씨의 Flute 연주를 접하는 횡재를 만났다.

 

나는 한중문화협회 운영이사의 한분이신 김혜영 여사(영은 기획 대표)의 권유로 제5회 베이징 국제 음악 콩쿠르에 참관하게 되었다. 금년이 제5회째라고 하지만 지금까지는 나의 관심권 밖의 행사였기 때문에 잘 아는 바 없었다. 다만 K-Pop과 더불어 K-Classic을 꿈꾸는 김혜영 여사의 설명으로 베이징에서 이런 음악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마침내 가을비가 을씨년스럽게 주변을 적시는 밤에 베이징 중산공원 음악당을 찾게 되었다.

 

이날 행사의 공식명칭은 한국말로 표현한다면 “플루트 부문 베이징국제음악경연대회”인데 중국말로는 北京長笛國際音樂比賽였다. 나는 이 표현을 읽으면서 음악콩쿠르가 모든 음악을 망라하는 것이 아니라 부문별 행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플루트를 중국인들은 긴 피리나 퉁소를 의미하는 장적(長笛:창디)으로 번역하는데 놀랐다. 우리말에는 플루트의 한국어가 없다.

 

제5회 베이징 국제 플루트 콩쿠르에는 38개국 221명이 참가했다는데 지난 한 주일동안 경연은 모두 끝났고 내가 참관한 연주회는 시상식 전날 이 콩쿠르에 초대받은 세계적 수준의 Flutist들의 연주회였다. 한국출전자들은 18명이 본선에 올라 3위와 5위를 차지했다고 김혜영 여사는 못내 감격해 했다. 성악과 피아노, 바이올린 부문에서는 세계적 수준의 연주가들을 많이 배출한 한국이지만 플루트나 클라리넷 같은 관악기 부문은 아직도 한국이 좀 더 분발해야할 분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날 연주회에 한국대표로 초청받은 서울시향의 수석 플루트 박지은 씨는 연주순서 네 번째로 등단, 세 곡을 연주했다. 그러나 그녀의 연주는 앞서 연주했던 세계정상급 연주가들과는 전연 다른 느낌을 주었다. 몸매가 플루트 선율을 닮았다고 표현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등단과 더불어 잘 어울리는 연주 복이 베이징 중산공원 음악당을 Andre Lieu가 지휘하는 비엔나 음악당의 분위기로 바꿔 놓는 것 같았다.

 

 특히 맨 첫 곡으로 연주한 Chopin의 Nocturne in C#minor for Piano and Flute는 10월 하순의 베이징 가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선곡이었다. 이 곡은 처음 듣는 곡은 아니다.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이, 또 유명한 바이오린 연주가들이 즐겨 하는 곡목이기 때문에 쇼팽 음악의 대명사가 된 Nocturne을 처음 듣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피아노나 바이올린의 Nocturne 연주도 많은 분들에게 뜨거운 감동을 선사하지만 이날 밤 박지은의 Nocturne 연주는 계절과 분위기, 그리고 청중들의 수준과 조화를 이루면서 듣는 이의 가슴속과 뇌리를 짙은 감동으로 파고드는 선율이었다.

 

모든 연주에는 연주자의 의지가 강하게 투영되지만 그러나 플루트만큼 그 강도가 높은 것은 없을 것 같다. 심장에서 울어 나오는 호흡이 금관을 통해 음으로 변하는 플루트를 통해서만이 인간의 서정은 극치를 이루는 것 같다. 옛날 동양의 선인들은 대 피리나 퉁소로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거나 자기의 포부를 전달했다고 한다. 중국인들이 플루트를 장적(長笛)으로 번역한 까닭을 알 것 같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20세기 최고의 비극을 그린 영화 “피아니스트”의 주제곡으로 Nocturne in C# minor 를 선택한 이유를 회상하면서 박지은이 그리는 쇼팽의 세계가 더 아름답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쇼팽에 이어 박지은은 이안 클라크 작곡의 The Great Train Race를 연주했다. 이 곡은 플루트 솔로로서 연주의 기교를 통해 악기로서의 플루트가 감당할 음역을 넘어선 연주를 보이는 것으로 고강도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한 연주였다. 그래서인지 어느 연주자보다도 더 많은 갈채를 받았다. 달리는 기차의 치찰음과 기적소리를 플루트 연주를 통해 새로운 음악의 영역으로 승화시키는 연주기법은 다른 연주자들을 완전히 압도할만했다. 세 번째로 연주한 Denny Boy는 만인공감의 서정성, 그리움, 동경을 잔잔하게 표현함으로써 음악당 분위기를 한층 더 훈훈하게 만들었다.

 

 이날 초청 연주가 끝난 후 주최 측이 조사한 이른바 출구조사 형식의 반향에서 박지은이 단연 톱으로 나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박지은은 10세 때 플루트 세계에 뛰어들어 예원학교 재학 중 도미, 줄리어드 예비학교, 맨하튼 음대를 마치고 예일대학교 음악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재원이다. 귀국한 후 참여한 모든 콩쿠르에서 항상 수석을 차지하면서 25세의 나이에 서울시향(市響)의 최연소 수석 플루트로 정명훈에 의해 발탁되었다. 여기까지 오르는데 그가 쌓은 내공이 얼마나 힘든 길이었던가는 오직 높은 고지에 달한 사람만이 알 것이다.

 

박지은과 더불어 초청연주에 나선 분들의 면면을 팜플릿을 통해 살펴보니 플루트 계에서는 하나같이 세계정상급 반열에 오른 분들이었다. 명예 대회장인 독일인 Paul Meisen은 국제 뮌헨 콩쿠르에서 수석으로 입상한 이래 Karlsruhe의 플루트 솔로이스트, 뮌헨 음악아카데미 교수로 활약 중이며 Peter-Lukas Graf는 스위스 인으로 Lucerne Orchestra Festival의 수석 Flutist 였다.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 Flutist인 Paul Edmund Davies는 이날 중국의 플루트 계의 선두주자인 한구어량(韓國良)과의 협연으로 중국 쪽 청중들의 호응을 불러 일으켰다.

 

김혜영 여사는 자기가 학창시절에 만났던 비엔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 Flutist Wolhgang Schultz선생이 노구에도 불구하고 감미로운 연주를 보여준 것을 높이 평가하고 달려가서 기쁜 상봉을 하고 사진으로 인증샷을 날렸다.

 

금년으로 5회를 맞는 베이징 국제콩쿠르는 중국에서 장용(張勇)이라는 사람이 경영하는 개인 기획사가 조직한 행사였다. 그러나 높아진 중국의 위상 때문에 세계수준의 연주가들이 초청 연주자로서, 심사위원으로 대거 참여했다. 물론 중국에서는 국제행사를 개인이 임의로 개최할 수 없다. 중국공산당 선전부, 중국정부의 문화부, 대외우호협회 등의 사전 심사와 능력평가가 전제된다.

 

소프트 파워를 중시하는 중국외교의 새로운 단면을 볼 수 있는 좋은 행사였다. 중국의 소프트 파워에 못지않게 한국의 소프트 파워는 바야흐로 K-Pop으로 대표된다. 그러나 그간 우리내 부모들이 자녀를 위해 고전음악분야에 투자한 수많은 인적자원(人的資源)들을 사장(死藏) 시키지 말고 K-Classic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영은기획 김혜영 자매의 꿈이 현실화될 것을 기대하면서 베이징 국제콩쿠르 소감으로 가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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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젊은

요즈음 젊은 사람들의 3포(抛)문제 이야기가 사라지지 않는다. 3포란 취업포기, 결혼포기,출산포기라고 한다. 젊은이들 가운데는 봉급도 신통치 않고 앞날의 전망도 그리 밝지 않은 직장에 나갈 바에야 차라리 취업을 포기하겠다면서 할 일없이 노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남이 알아주지 않는 시시한 직장에 가는 대신에 유학이나 대학원으로 진학하여 시간을 버는 사람들도 있다. 취업포기의 변이다.

 

또 상당수의 젊은이들은 돈이 없어 결혼을 못한다면서 혼기를 늦추거나 포기한다. 혼자 사는 것이 오히려 자유롭다고 말하는 여자들도 있다. 상당한 유산이 있거나 강남(江南)형 재력가(부동산 등이나 한탕으로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을 지칭)의 자녀처럼 삶에 불편함이 없는 경제수준이 아니라면 선뜻 결혼을 결심할 수 없다는 것이 결혼포기의 변이다.

이러한 분위기속에서 출산포기는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모른다. 교회에서는 자녀란 하나님이 주는 선물이라고 설파하지만 오히려 짐으로, 부담으로 보는 젊은이들이 있다. 맞벌이 부부에게는 자녀 키우는 일만큼 어렵고 힘든 일은 없을 것이다. 자녀에게 좋은 부모(좋은 과외나 유학을 뒷받침할 능력 등)가 될 수 없을 바에야 자녀를 안 갖는 편이 낫다는 것이 출산포기의 변이다.

지금 이들 젊은이들의 3포 현상은 기성세대들의 입장에서 보면 뭔가 한참 잘못된 태도 같다. 그러나 당사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주어진 환경에 대한 그들 나름의 어쩔 수없는 몸부림이다. 그들도 부모들에게서 전수한 인생의 목표, 학교교육과정이나 성장하면서 내심에 간직했던 꿈은 결코 3포가 아니었다. 3포를 선택하는 그들 내면에는 우리 기성세대들이 모르는 깊은 아픔과 외로움, 그리고 남몰래 흐르는 눈물이 있다. 이들의 모습은 그 내막을 알면 알수록 안쓰럽기 짝이 없다.

이들의 문제를 일부 “젊은 그들”만의 문제로 치지도외(置之度外)할 수 없다. 왜냐하면 경제성장 제일주의로 줄달음치던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우리 기성세대들이 그 부작용에 대한 배려와 대비를 소홀이 했던 황금만능주의의 가치관에 짓눌려 버렸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경제는 세계 랭킹 15위권으로 껑충 뛰어올랐다지만 서민들이 느는생활의 어려움은 오히려 가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간 우리의 경제발전은 성장제일주의에 사로잡혀 한국사회구조속에 커다란 문제점을 야기 시켰다.

 

대기업은 중소기업의 희생위에 부를 일궜고 중소기업들은 노동자의 과도한 희생위에 그나마 잔명을 부지해왔다. 중소기업과의 동반성장이란 개념은 최근 S그룹 회장이 말하는 대기업 경제학 교과서에는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개념이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분은 인간을 평민과 천민으로 가르는 갈등양상을 노정했다. 아들, 딸 구별 없이 가르쳐도, 여자는 출산이 곧 퇴직이라 애 낳기도 쉽지 않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오늘 한국경제의 현실은 부익부, 빈익빈을 노정시켰고 모든 개발혜택은 특권층이나 부동산 투기꾼들에게 돌아갔다. 정권은 이들과의 유착 속에서 창출되었다. 모든 형태의 불공정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이 사회적 가치로서의 돈과 권력과 명예를 독식하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돈이 권력을 낳고 권력을 치부의 수단으로 삼는 한탕주의자들이 뭉쳐 대통령을 만들고 여기에서 각종 권력형 부정부패와 비리가 꼬리를 잇는다.

지금 우리 사회는 바야흐로 탄생에 기인한 부와 빈곤의 대물림상황이 조성되고 있다. 성장만능의 추구는 결과적으로 우리 사회를 따뜻한 인간애와 공평한 정의가 숨 쉬는 사회로 업그레이드 하는 대신 인간을 돈의 노예로 만드는 황금만능주의와 불공정 편법경쟁을 부추기는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로 전락시켰다.

 지금 우리가 걱정하는 3포현상은 갈수록 높아지는 격차의 벽을 우리가 그것을 이루었다고 자랑하는 민주정치와 선거로는 결코 극복, 시정할 수 없다는 실망과 좌절에서 파생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 젊은이들이 한참 열정을 쏟아 일 할 나이에 직업의 귀천에 구애 받지 않고 하루라도 인생을 낭비 없이 열심히 일하여 경험도 쌓고 일도 배우는 것, 성인이 되어 결혼해서 가정을 만들고 자녀를 낳아 인간으로서의 역사를 이어가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없는데 이를 포기한다는 것은 실로 통탄할 일이다.
 
이것이 사회의 경제구조와 이 구조에서 배태된 가치관의 결과라면 우리가 당면해서 해결해야 할 개혁은 실로 시급하고 막중하다. 오늘날 여야 정당들이 앞 다투어 복지개혁에 열을 올리는 것은 만시지탄이지만 좋은 조짐이다. 동반성장을 강조하는 담론이 등장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특히 부자들의 탐욕을 통제하기 위해 재벌해체, 부자에게 중세를 과하자는 주장과 부자들의 국제경쟁무대에서의 활동은 지원하되 국내적으로는 일정한 울타리에 가두어 기업 활동의 부작용을 막자는 논의가 여야 정책담론을 이루는 것은 한국정치의 큰 발전이라고 볼 수 있다. 최종결론은 국민이 선택하는 것이지만 성장만능주의시대에 소홀이 취급했던 개발시대의 부채를 정치권이 청산에 나섰다는 데 의의가 있는 것 같다.

 지금 서구에서도 자본주의 시스템이 결국 30% 가량의 낙오자를 만들고 있다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체제의 근본적인 재검토를 말하고 있다.(2012 다보스 포럼에서의 클라우스 슈바브 회장) 자본주의 4.0이나 따뜻한 자본주의가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부의 편제를 규탄하면서 1%에 의한, 1%를 위한, 1%의 미국분배상황을 비판한 스티글리츠의 견해가 금융위기의 도래와 함께 경제체제변혁의 새로운 담론이 되고 있다.

 지금 3포 문제의 해결은 구조차원이외에도 가치관개혁도 필요하다. 일부 젊은 층의 3포로 흐르는 낙오자적 사고와 가치관의 개혁도 아울러 모색해야 할 때다. 사회적 가치관의 물질적 표현이 사회구조일진데 가치관의 변화 없이 사회구조를 바꾼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지금 많은 젊은이들은 강남주의(江南主義)를 욕한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도달하려는 3포 청산의 기준은 어디에 두고 있는가. 역설이지만 강남주의를 준거한다.

이러한 가치관개혁은 국가나 정부보다에 시민사회가 주축이 되어 추진할 때 보다 호응과 반응이 좋을 것이다. 즉 황금만능주의의 가치관을 무너뜨리는 시민운동을 일으키자는 것이다. 돈으로는 인간사의 본질 문제를 어느 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이다. 예컨대 “돈으로 집은 살 수 있어도 행복한 가정은 살 수 없고 섹스는 살 수 있어도 진정한 사랑은 살 수 없다.”는 자명한 진리를 깨닫게 하자는 것이다.

아직 우리사회의 3포는 보편적 현상은 아니다. 모든 예식장들은 아직도 사전 예약을 필수로 한다. 취업설명회는 초만원을 이룬다. 어려운 조건에서도 사랑을 매개로 결혼하여 가정을 일구고 자녀를 낳고 기르면서 행복하게 사는 많은 사람들을 본다. 나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역사의 주인공들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가치관에서 낙오의식을 청산하고 자기에게 내재한 가능성을 개발하는 가치관을 보였기 때문이다.

 

돈을 매개로 결혼한 부부는 돈이 떨어지거나 벌어들이지 못하면 금방 파탄다. 비록 가진 것은 작아도 사랑을 매개로 맺어진 부부는 모든 풍랑을 함께 이겨낸다. 우리부모들의 역사다.

 

이제 우리 사회의 3포 문제는 구조개선을 통해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갖게 해주는 한편 민간들이 주도하는 사회운동, 문화 운동을 통해 가치관의 변을 활성화시켜 나가야 한다. 보다 따뜻한 가슴으로 인생의 정도에서 벗어나고 있는 사람들의 처지에 높은 이해와 관심을 보일 때다.

이글은 연우포럼(No.5235)에 2012년 2월 1일자로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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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정, 나덕성의 피아노와 첼로를 위한 베토벤 소나타 공연을 보고나서
 

                    피아니스트 신수정여사와 첼리스트 나덕성선생


요즘 내 생활은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딱 어울릴 것 같다. 12월 18일 밤 한 친구의 권유와 초청으로 서초동의 모차르트 홀에서 열린 베토벤의 피아노와 첼로를 위한 소나타 전곡연주회 2부를 듣는 모임에 참석했다. 1부는 11월 6일 예술의 전당 리사이틀 홀에서 이미 끝났다는 것이다.
 

두 분의 연주는 참으로 감미로웠다. 잘 조화된 기악곡의 협연이 줄 수 있는 멋과 아름다움, 감미로운 선율로 넘치는 화려한 연주회였다. 연주자 두 분 모두 피아노와 첼로연주에서 국내 최정상에 올랐던 평판도 작용했겠지만 이 정도의 수준 높은 연주를 해내는 두 분의 내공을 높이 사서인 것 같다.


자리를 함께한 친구들과 이남장에서 저녁을 마치고 여유 있게 공연장을 향했다. 좁은 홀이 대만원을 이루어 사람들이 통로로 이용하는 공간까지 접는 간이의자로 채워져 있을 정도였다. 이곳저곳에 낯익은 얼굴들이 눈에 띌 때마다 가벼운 미소로 목례하면서 공연을 기다렸다. 예상은 했지만 이날 공연의 주인공들은 나의 대학시절의 콩쿠르에서 명성을 올린 분들이었기에 금년 나이는 고희를 갓 넘었을 것이다.
 

러나 유달리 큰 피아노앞으로 나앉은 신수정씨 모습은 예나 다름없었고 자기 키 크기의 첼로를 들고 나오는 나덕성씨 역시 젊어보였다. 문자 그대로 YO(Young Old의 약칭으로 75세미만의 연령그룹)세대들이었다. 베토벤은 피아노와 첼로를 위한 소나타 5곡을 썼다는데 나는 이날 밤 소나타 No.2와 소나타 N0.5의 연주를 듣게 되었다.
 
연주에 나선 두 분 모두 한국기악계의 거성들로서 음대 학장을 거친 원로들이었지만 연주를 위해 무대 위로 나와 인사하는 모습은 다소간의 수줍음을 섞은 정중함이었다. 누구나 많은 사람들 앞에 자기가 주인공으로 나와 연설을 하거나 연주를 할 때는 으레 다소간의 긴장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이 분들의 표정에서도 그런 느낌이 감전되었다.


러나 두 사람이 눈 사인에 맞춰 동시 연주를 시작하면서부터는 두 분 너무 진지해졌다. 피아노와 첼로음의 조화로 울려나오는 음률의 아름다움은 청중을 숨소리도 나오지 못하게끔 압도하였다. 한국 최고 거장들의 연주라는 선입견을 넣지 않는다고 해도 두 분 모두가 보이는 연주의 진지함은 청중들의 심금을 파고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소나타 No.2의 Allegro Molto 부분의 연주에서는 격정이랄까 열정 같은 것을 모두가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동안 감기로 고생하다가 다 끝나가는 무렵이었기 때문에 무탈하게 감상하고 올 줄 알았다가 웬걸 기침이 튀어나오려고 했다. 기침을 참으면서 안간힘을 쓰고 앉아있는데 인터미션이 되었다. 이 순간만큼 고마운 일이 또 있을까. 나의 어려움을 눈치 챈 친구가 빨리 집에 가서 쉬라고 권했다. 김남윤 씨가 바이올린으로 가세하는 Piano trio No.4도 듣고 싶었는데 남들의 감상을 위해 나의 욕심을 버렸다.


그러나 아직도 눈에 선한 것은 악장이 끝날 때마다 이마를 쓰다듬거나 콧등을 만지면서 피로해 하는 나덕성 씨의 표정이었다. 나이 탓에 연주에 힘이 부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연주에 쏟는 열정이 부족해지는 힘을 보충하면서 수준 높은 연주를 해내는데 감동치 안을 수 없었다. 이들의 연주는 훌륭했지만 보다 더 훌륭한 분은 이 소나타를 써낸 베토벤, 그리고 베토벤을 인류에게 보내주신 하나님 아니겠는가. 좋은 시간을 갖게 해준 두 분 친구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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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좌로부터 문병호, 이영일, 권순영, 박은조, 뒷열 우로부터 임신철, 신치호, 한상부 홍명수, 고성천씨)

한국•아프간 친선협회회장에 신치호씨, 이영일 전 회장은 명예회장으로

한국아프간친선협회는 2011년 12월 16일 18시 서소문 사무실에서 정기총회와 이사회를 열고 이영일 회장을 명예회장으로 추대하고 신치호 회장(노스타코리아 L.T.C.와 세계로 CBMC회장)을 새 회장으로 선출했다.

이영일 명예회장은 2002년 3월 아프간전쟁 직후 전쟁고아들을 돕기 위해 의료봉사단을 인솔하고 한국대사관도, 국제협력단도 없는 아프간의 마쟈리에샤리프와 발크지역을 방문, 의료봉사활동을 펼쳤고 그가 속한 한민족복지재단은 거의 반년 동안 의료진을 아프간에 파송, 의료지원활동을 계속했다. 이 사업에는 탈런트 정영숙 권사도 참가했다.

 2003년에는 아프간임시정부의 Fayes 고등교육부장관이 16명의 아프간 대학총장단을 이끌고 방한한 것을 계기로 6.3빌딩에서 한국아프간 친선협회를 결성하고 아프간 교육재건을 위해 다방면에 걸친 지원활동을 펼쳤다. 서울대학교 정운찬 총장이 40대의 신규 컴퓨터를 지원했고 한국진흥재단은 재활용된 400대의 컴퓨터를 아프간 대학들에 지원, 컴퓨터학과 설립을 추진했다. 2003년 여름에는 한국아프간 친선협회 대표단이 인도의 뉴델리 공항을 거쳐 카불을 방문, 수로비 지역의 관개사업을 지원하는 한편, 관개공사를 새마을 취로사업형식으로 전개, 코이카 식량을 나누어 주었다.

 이 때 이영일 회장은 카불에서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을 Fayes 고등교육부장관의 주선으로 왕궁으로 방문, 면담하고 한국에 아프간대사관을 개설할 것으로 요청, 흔쾌히 승낙을 해주어 현재 서울 한남동 소재의 유엔 빌리지에 아프간 대사관이 세워졌다. 아울러 카불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아프간•한국친선협회도 결성되고 아프간 측 회장에 Fayes장관이 선임되었다.

한국아프간 친선협회는 그 후 3명의 아프간 유학생이 한동대학교에서 공부하도록 지원했고 아프간 국회의원단의 내방을 접견함과 동시에 아프간 대사관이 제 구실을 하도록 물심양면의 지원활동을 펼쳤다. 동시에 아프간 남부 칸다하르에 필라병원을 인수해서 정인섭 사장(대한제강사장 2만 달러를 희사한 한민족복지재단 이사)불이 투자한 기금으로 재활병원을 병설해서 전쟁부상자들의 재활 지원 사업을 추진하는 한편 각 민간단체나 교회에서 단기 봉사 팀을 편성, 필라병원에서 간호활동을 지원해 왔다. 지금도 한동대학교에서는 조원철 교수 지도하에 칸다하르 병원을 돕는 단기사역의 대학생 봉사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2007년의 샘물교회의 단기봉사 활동은 탈레반에게 봉사활동대원 전원이 피랍되었고 탈레반 손에 두 사람의 봉사단원이 목숨을 잃는 끔찍한 불행을 겪었다. 김만복이라는 국정원장의 공명심 때문에 많은 돈을 들여 더 이상의 추가희생자는 없이 피랍되신 분들이 생환했지만 그 상처는 여러 군데 아직도 앙금처럼 남아있다. 한국 내에 안티 크리스천 세력이 얼마나 많은지도 인터넷을 통해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의 충격으로 나는 한국아프간친선협회를 방기하고 절차를 밟아 법인체를 해체하려고 하였다. 그때 박은조 샘물교회 목사님이 오셔서 한국아프간 친선협회가 해체되면 “우리는 두 가지를 몽땅 잃는다. 아프간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라는 큰 목표를 잃을 뿐만 아니라 이미 목숨을 잃은 두 분의 죽음을 헛되이 한다”고 말하고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한국아프간친선협회의 간판을 유지하는 가운데 아프간 전쟁난민들에게 한국인들의 사랑을 증거할 수 있는 다른 사업을 강구해 나가보자“고 제안했다.

나는 박은조 목사님의 말을 좇기로 했다. 박 목사님은 아프간에서 유학생 12명을 한국으로 데려와 그들을 전후 아프간과 한국을 연결하는 가교로 삼자는 계획을 말했다. 이 구상에 따라 아프간에서 12명의 유학생이 全州 비전대학으로 유학을 왔고 이제 절반이 공부를 마치고 귀국했으며 나머지 6명이 더 높은 단계의 공부와 새로운 임무나 직장을 검토하고 있다.

한편 아프간에 콩을 심어 전후 아프간 지역의 영양위기를 극복하자는 운동이 권순영 박사(재미교포)가 창설한 NEI를 통해 추진되고 있었고 이 사업은 한국의 세계로 CBMC가 NEI운동을 적극 도움으로써 활성화되고 있었다. 나는 이 사업이 갖는 의의에 적극 공감하고 세계로 CBMC와 한국아프간 친선협회를 아프간 돕는 사업에서 하나 되기로 합의, 조직적 통합을 이루하고 양쪽에서 이사를 선임, 조직통합을 이루었다. 통합된 한국아프간의 회장은 내가 맡고 부회장에는 세계로 CBMC의 신치호 회장이 맡았으며 사무총장에는 이형섭목사님이 맡았으며 사업본부장으로는 임신철 세계로CBMC회원이 맡았다.

작년 10월부터 아프간의 콩 사업은 지난 7년간의 권순영 박사의 눈물어린 수고와 노력 끝에 콩의 소개, 제배, 영농기법 훈련, 콩의 가공분양에서 아프간 정부당국을 승복시키는데 성공했고 이제 미국은 물론, WFP까지도 권순영 박사가 추진하는 콩사업이 갖는 의미를 지지하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국내지지를 얻기 위해 조선일보에 1회, 동아일보에 1회씩 칼럼을 게재하였으며 Naver에도 콩 사업을 지원하는 Happy Bean 카페를 열었다.

지난 12월 16일 38회째 아프간을 방문하고 귀국한 권순영 박사로부터 지난 7년과 앞으로의 7년을 위한 구상 보고를 청취하고 이제 우리 정부가 적극 참여함으로써 아프간 전쟁이후의 한국과 아프간과의 좋은 관계를 만들 정책적 Agenda로 콩 사업을 발전시킬 필요성에 이사들의 전원일치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이날 총화를 계기로 창립이래 8년간 회장으로 활동한 이영일 회장 시대는 마감하게 되었고 年富力强한 신치호 회장 시대가 개막되었으며 임신철 사업단장이 사무총장직을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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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뮤얼 헌팅턴 교수의 추억

                                                                                              한중문화협회 총재 이영일

                                헌팅턴 교수와 필자

 나이가 들어가면서부터 해마다 연말이 되면 지난날의 자료를 정리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금년에도 수많은 사진 자료를 정리했다. 후대들에게 특히 남겨줄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 아닌 내 자신이 직접 미리 챙겨 폐기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특히 내 연배(年輩)들처럼 20세기에서 21세기에 걸쳐 생을 이어가는 사람에게는, 특히 정치생활을 한 사람들에게는 한 세기가 지난 사진들과 자료들이 너무 지천이다. 시효지난 사진이나 자료를 틈나는 대로 살피면서 과감히 서둘러 폐기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자료를 정리하던 중 내가 거의 잊고 있었던 귀한 사진 한 장을 찾았다. 하버드 대학의 석학 고 새뮤얼 헌팅턴 교수를 그의 연구실에서 만나 찍은 사진이었다.

1986년 5월 나는 미 국무성 초청으로 1개월간 미국의 여러 곳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나를 초청한 미국국무성에서는 미국 체류 중 꼭 만나고 싶은 인물, 특별히 관심 갖는 미국의 제도, 미국의 명승지중 방문하고 싶은 지역을 미리 말해달라고 했다. 이 때 내가 면담하겠다고 신청한 사람이 바로 새뮤얼 헌팅턴 교수였다. 여기에 곁들여 또 각 지역마다 실시형태가 다른 미국의 지방자치제도를 시찰하겠다고 했다. 특히 지방자치문제는 방미직전 전두환 대통령이 나에게 직접 지시한 사항이었다.

나는 그 당시까지만 해도 헌팅턴 교수가 어떤 분인지를 잘 몰랐지만 그가 저술한 정치발전론을 원서도 아닌 번역본(배성동, 민준기 공역)으로 읽으면서 그의 논리와 식견에 흥미를 가졌다. 그의 정치발전론 가운데 한 대목은 지금도 나에게 좋은 참고로 기억에 남아있는데 욕망곡선과 성취곡선간의 간격에 관한 그의 견해였다. 그에 의하면 개발도상국들은 빠른 속도로 경제발전을 이루지만 경제발전이 된다고 해서 국민들의 증가하는 욕구를 충족시키기는 힘들다면서 좌표 상 욕망곡선이 올라간 만큼 국민들의 성취곡선이 오르지 않고 그 간격은 날로 넓어진다는 것이다. 이 간격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국민들의 불만은 고조되고 사회적 불안정이 확산되어 정권은 위기를 맞는다는 것이다.

나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총재비서실장으로 재임 중이었는데 1985년 중반의 5공 정권이 맞고 있던 위기가 바로 헌팅턴 교수가 말하는 위기와 유사하다고 생각하고 그 처방을 물어볼 양으로 국무성에 그와의 면담을 신청했던 것이다. 날자는 5월13일로 잡혔다. 헌팅턴 교수와의 약속시간은 10시 30분부터 1시간이었기 때문에 보스턴의 파크 플라자 호텔에서 조반을 서둘러 마치고 통역으로 수행한 신린섭(국무성 통역원)씨와 하버드타운으로 들어갔다.

헌팅턴 교수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는 미 국무성에서 연구비를 받고 있기 때문에 국무성초청으로 미국을 방문, 자기와의 면담을 청한 분에게는 인터뷰 비용을 청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11시 30분까지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대학교수와 만나 대화를 하는데 인터뷰 비용을 낸다는 말을 나는 이 날 처음 들었다. 미국에서는 저명교수를 만나 인터뷰로 그의 시간을 할애하고 식견을 들을 때에는 수준 별로 차이는 있지만 소정의 비용을 낸다는 것이다. 상당히 합리적인 이야기로 들렸다. 신린섭씨는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개 1시간당 5백 달러 정도 지불하는데 나는 국무성 초청케이스라 인터뷰비용을 면제받았다고 설명하고 헨리 키신저 같은 분을 만나려면 인터뷰 비용을 좀 더 많이 청구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번뜩 들어 한국식의 인사치레는 모두 생략하고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내가 한국의 재선 국회의원으로서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일하고 있다는 점과 전두환 대통령을 당(黨)쪽에서 가까이 보필하는 총재비서실장임을 소개한 후 현재 한국은 헌팅턴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욕망곡선과 성취곡선 간에 간격이 벌어짐으로 인해서 정치적 불안과 사회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런 견지에서 볼 때 현재 한국이 안고 있는 위기를 나는 헌팅턴 교수가 말한 바와 같은 위기로 보고 이를 헌팅턴위기(Huntingtonian Crisis)라고 부르고 싶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위기에 대응할 방도를 이야기 듣고 싶다고 곁들였다.

 나의 말을 들은 헌팅턴 교수는 태도가 일순간 밝아지면서 처음 인사를 나누던 순간에 내가 느꼈던 “용건만 말하고 나가라”는 식의 업무적(business-like)표정이 누그러졌다. 그는 나의 이야기와 분석에 큰 흥미를 보이면서 자기의 소견을 이야기 했다. 자기의 이론은 한국에 특정된 견해는 아니며 개발도상국들의 일반적 현상을 분석하면서 도출된 추세라고 전제한 다음 위기에 대한 대응방안을 들으려면 자기에게 새로운 연구비를 주어야 할 것이라고 농담조로 말을 이었다. 그는 현 시점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욕망곡선과 성취곡선간의 큰 Gap으로 정치체가 겪는 리스크나 부담을 극복하기보다는 경감시키는 방도를 마련하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고 말하고 그 방도로 자기가 생각하는 것은 권력의 집중이 아닌 권력의 분산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의 취지를 촌탁하면 대통령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어 있으면 국민들의 욕구나 불만이 대통령 한사람에게로 집중되기 때문에 대통령은 항상 위기의 한 복판에 서 있게 된다면서 이 부담과 압력을 경감시키려면 통치(Governance)에서 지방자치 실시와 같은 권한의 분산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대통령에게 집중된 힘의 축(Axis)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으로 다원화시키면 시킬수록 정권을 향한 국민들의 불만도 분산되고 대통령이 받는 압력도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견해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고 그의 답변을 들었는데 시간은 약속된 한 시간을 넘겼고 오히려 그의 부담으로 구내식당에서 오찬까지 대접받았다. 나는 이 자리에서 그에게 한국방문을 제안했고 그도 일정을 보아가면서 추후 연락하기로 했다. 나는 귀국 후 당시 최창윤 정무비서관을 통해 대통령에게 헌팅턴과의 대화내용을 자세히 기록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대통령은 곧장 나를 청와대로 불러 보고서를 잘 읽었다면서 나의 방미보고를 평가한 후 헌팅턴 교수를 한국에 조속히 초청하라고 했다. 나는 즉시 초청 서한을 보냈는데 헌팅턴 교수는 미리 잡혀있는 일정 때문에 1987년 이후에나 한국방문이 가능하다고 회신했다. 결국 그의 초청은 무산되었지만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아직도 나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 후 나는 그의 유명한 저서 ‘문명의 충돌’을 탐독했다. 지금부터 3년 전인 2008년 12월 그는 타계했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업적은 고인이 된 후에도 세계정치학계에 큰 족적을 남기고 있다. 그는 문명의 충돌에서 21세기에 미국이 당면할 도전으로서의 이슬람 권 문제나 앞으로 중국이 미국과 대적할 강자임을 예측하고 대비할 것을 주장한 점은 국제정치학자로서의 그의 선견을 세계정치학계가 평가하는 이유인 것 같다. 학자들은 누구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나는 “헌팅턴 위기”라는 표현하나로 그의 환심을 사서 한 시간 넘게 대화를 나누고 점심대접까지 받았다.

 당시 나의 통역을 맡았던 신린섭 씨는 Problems of Communism에 좋은 글을 많이 발표했던 공산권연구 전문가였는데 지금은 연락이 끊겨 생사를 알 길 없다. 세월과 함께 인걸들도 사라지기 마련 아닌가. 헌팅턴 교수와의 인연을 몇 자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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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이희아(李喜芽)의 베이징 연주회를 끝마치고 

이희아(맨오른쪽)와 어머니 우갑순 여사(중앙)

2011년 11월 19일 저녁 7시30분 베이징 세기극장(世紀劇院)대강당에서 열린 이희아 피아노 연주회는 한마디로 자리를 함께한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과 충격을 안겨준 일대사건이었다. 하나님이 창조한 생명은 그것을 간절한 기도 속에서 갈고 닦으면 그것이 어떤 형태의 것이라 하더라도 보석처럼 번쩍이는 생명으로 거듭난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자리에 참석하기 전에 이희아라는 피아니스트가 손가락 넷 밖에 없는 장애인이라는 이야기만 듣고 왔는데 막상 무대 위에 나타난 이희아는 양다리와 발도 없고 무릎으로만 걷는 장애인 중의 장애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인사말에서 자기 딸을 세계 최단신의 피아니스트라고 설명했지만 무릎발로 무대 위를 걸어 나오면서 청중들에게 밝은 미소를 짓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날 밝은 표정으로 무대로 나와서 청중들에게 인사를 하는 이희아의 어머니를 쳐다보면서 과연 우리 인류가운데 저런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잘 믿기지 않았다. 중증 장애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저런 희아를 낳은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호모사피엔스로서의 인간은 직립 보행하는 유인원(類人猿)에서 그 첫 모델을 찾는데 희아는 인간으로 인정받기 힘든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났다. 양다리와 발이 없고 손가락도 한 손에 두 개씩밖에 없는 아이를 누가 사람으로 인정할 것인가. 과연 희아 같은 애기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존재로 보일 것인가.

깊은 신앙의 눈으로 볼 때에만 희아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 우갑순 여사는 사람 같지 않게 태어난 희아 아기를 자기의 사랑하는 딸로 받아들였고 그녀를 온 지성으로 키우고 가르쳐서 오늘의 베이징 대극장에서 1700여명의 청중 앞에서 베토벤과 쇼팽과 모차르트를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로 길러낸 것이다. 또 가장 처절한 불행을 안고 태어난 딸을 잘 키워 하나님을 향하여 영어로 Amazing Grace를 부르는 음악인으로 키워 낸 것이다. 통속적 의미의 인간승리라는 표현으로는 그 의미설명이 한참 모자랄 위대하고 숭고한 어머니 사랑의 극치였다.

피아노 앞에 앉은 희아의 표정은 시종 맑고 밝았다. 베토벤의 “열정”을 연주할 때는 청중들에게까지 힘이 느껴질 정도로 강하게 건반을 쳤다. 특히 쇼팽의 즉흥환상곡은 열손가락이 다 같이 빠른 속도로 작동해야 제대로 연주가 되는 곡인데 네게의 손가락을 빨리 움직여 작곡가의 취지를 애써 살려내 보이는 그녀의 연주 앞에 청중들은 뭉클한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날 연주회장에는 피아노를 배우는 자녀를 가진 부모들이 자녀와 함께 많이 참여했다. 모든 면에서 희아 보다 좋은 여건에서 피아노를 배우는 자녀들에게 이날의 연주는 놀라운 충격일 것이다. 어느 면에서는 희아 보다 더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을지도 모른다. 또 피아노 배우기가 어렵다거나 귀찮다고 늑장부리는 아이들에게도 무언가 큰 깨달음을 주었을 것 같다.

 연주회의 끝머리에 희아가 중국청중들을 의식해서인지 찬송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영어로 부를 때 극장 곳곳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참으로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우리 협회가 베이징에서 이 행사를 협찬한 것은 정말 잘 한 일 같다. 희아의 피아노 연주는 그 자체로서도 훌륭했지만 사람으로 대접받기 힘든 존재로 태어난 자기 딸을 가치 있는 사람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의 건강한 신체 가짐을 하늘의 큰 축복으로 감사하게 생각토록 만든 그 어머니의 놀라운 사랑이 더 고마웠고 더 위대했다. 이 어둡고 답답한 세상을 향해 비추는 한줄기의 큰 빛처럼 어머니의 참 사랑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느끼게 해준 이 연주회야말로 참으로 값진 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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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曺祥鉉 장로님 1주기 추모음악제에서

 

내가 조상현 장로님의 조사를 쓴지가 벌써 1년이 지났다. 작년 10월 29일 우리 곁을 떠난 그 분을 추모하는 음악제가 경동교회 본당에서 예배와 함께 열렸다. 이 자리에는 유족으로 미망인 김순옥 권사와 조영방, 조영미 두 딸, 그리고 그 분의 음악계의 옛 동료와 제자, 경동교회의 교우들이 참석했다.

 

나는 고인의 경력가운데 제12대 국회의원의 경력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분의 삶의 전부가 음악이었기 때문에 불행히도 그를 추모할 정치인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함께 의정생활을 했던 사람으로서 경동교회를 1958년부터 출석, 그 분을 기억하고 그 분을 존경했기 때문에 비음악인이지만 그의 정치경력의 증인자격에서 이 자리에 꼭 참석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이 자리에 나왔다.

 

박종화 목사님이 추모예배를 집례했다. 나는 예배시간에 평소 조 장로님이 즐겨 불렀다는 찬송 146장 (저 멀리 푸른 언덕에)과 183장(빈들에 마른 풀같이)을 열창함으로써 내 나름의 추모의 념을 표현했다. 박재윤 장로님의 추모기도는 기도문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시편(詩篇)처럼 듣는 이들의 마음속에 깊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박수길 장로님의 사회로 시작된 추모음악제는 내가 본 추모음악제중 가장 짜임새 있는 음악제였다. 이 자리에 나온 제자들과 친지 음악인들은 하나같이 한국 음악계의 중진들로 음악교육에 헌신해온 조 장로님의 생애의 업적을 참으로 기리는 분위기였다. 독창, 2중창, 4중창, 합창은 모두 수준이 국내최상급이었고 생전에 조 장로님이 애창했던 곡들을 불렀다.

 

나에게 이날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음악보다는 조 장로님의 시와 수필 낭독이었다. 음악들은 앞으로 다른 곳에서도 들을 수 있겠지만 이 날 낭독된 시와 수필 한 토막은 이 순간 이 자리에서만 들을 수 있는 명품이었다.

 

조 장로님의 시 “귀한 이 순간에....”의 한 토막, “멀고도 험한 길 용케 이까지 왔습니다. 사랑하는 이들 다 헤어지고, 정든 땅도 아껴주던 사람도 보이잖는데 어느새 용케 이까지 왔습니다“를 들을 때 북에 고향을 두고 온 사람의 아픔을 절절하게 말해주었다.

 

또 수필 ”여성의 힘은 하나님 다음 간다“에서는 가사(家事)의 모든 중요한 부분을 아내에게만 맡겨 놓고 살아오면서 아내의 아픔과 괴로움을 진심으로 몰라주었던 나를 새삼 반성시키는 각성제였다. 조 장로님이 자기 아내가 막내 딸 영미에게 꼭 결혼을 해야만 하는가를 물으면서 자기가 다시 태어난다면 결혼을 하지 않고 어두운 곳에 사는 이웃을 돌보면서 한 평생을 지내고 싶다고 토로하는 소리를 들을 때 정말 충격이었다고 수필은 고백하고 있다.

어려운 살림 속에서 성악가 남편을 돌보아야 하고 세 자녀를 유학시켜 조 트리오라는 한국음악계의 지도자들을 길러내느라고 자기의 모든 아이덴티티를 버렸던 한국판 현모양처의 삶을 훌륭히 간증했다. 내 아내에 대한 사무치는 반성을 촉구하는 메시지였다.

조영방, 조영미 자매가 피아노와 비이올린 2중주로 펼친 Grieg 곡은  오늘만의 무료인 수준높은 연주로 조상현장로 내외분의 자녀교육의 열정이 거둔 큰 열매를 추모객들에게 보여주었다.
 

이 날 행사의 마지막을 장식한 경동교회 2부성가대의 찬양은 지휘자 최승한 선생의 집념과 강도 높은 연습 탓인지 놀랄 만큼 훌륭한 연주였다. 추모음악제에서 나오기 힘든 앵콜 송이 나왔다.

 피곤하고 귀찮아서 올까 말까를 망설이다가 참석했는데 너무 잘한 선택이었다. 우리 교회 교우들이 좀 더 많이 참석했더라면 자리가 더욱 빛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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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끝에 쓴 한 편의 시같은 이영일의 넉두리)
오 솔 레 미오는 인간의 비창(悲唱)이다.

8월5일 아침 모처럼 태양이 빛난다.

며칠 만에 보는 밝은 태양빛이다.

그러나 나의 혀는 오 쏠 레 미오를 부르기에는 너무 굳어있다.

모든 것이 휩쓸려간 대지위를 무심히 비추는 태양이 야속해서다.

사랑하는 이, 아까운 것, 고마운 분, 소중한 인연들이 하나같이 사라졌다. 아니 휩쓸려 나갔다. 빼앗기고

상처 입은 대지 위를 태양은 아무 일 없던듯이 비추고 있다.

마치 큰 은총을 베푸는 양 밝은 빛의 촉광을 높이고 있다.

태양 속에는 위로란 말이 없다. 미안도 없다. 재발방지의 약속도 없다. 너에게 슬픈 일이 있었느냐는 물음도 없다.

저 혼자만 스스로 존재하는 자로서 뽐내고 있는 그 자태가 나는 역겹다. 거만스럽게 불행한 이들과 역사를 내려 보는 그 표정이 나는 싫다.

태양의 DNA에는 희로애락이 없다. 오직 수마(水魔)를 앞세워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야수성만을 즐긴다. 8월5일의 아침을 찬란히 비추는 태양의 DNA도 마찬가지다.

오! 인간이여,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견디며 오 솔 레 미오를 불러야 한다. 그 빛 속에 생명의 원천이 담겨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락호락 태양의 찬미가 나오지 않는다.

 인간의 보잘것없는 교만일가. 앙탈일가.

오 솔 레 미오는 인간의 비창(悲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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