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기고/이영일]아프간 땅에서 양귀비를 밀어낸 한국 콩
   


올해 10월은 한국의 콩이 아프가니스탄 땅에서 새로운 식량으로, 영양소로 각광 받는 역사적인 달이 될 것이다. 당초 콩은 아프가니스탄의 식량역사에 없던 곡물이다. 그러나 7년 전 미국에서 영양학을 전공한 권순영 박사가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해 수많은 아동과 산모가 영양 결핍으로 신음하며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하고 아프가니스탄을 돕는 방법으로 콩 재배를 생각한 것이 아프가니스탄에 콩이 알려진 시초다.

그는 오랜 전쟁으로 헐벗고 굶주린 아프가니스탄 사람에게 시급히 필요한 것은 단백질 공급이며 이를 해결하려면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한국의 콩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편 원료인 양귀비가 잘 자라는 아프가니스탄 땅에서도 한국 콩이 자랄 수 있는지를 실험했다. 콩은 뜻밖에도 잘 자랐다.

실험 결과에 자신을 얻은 그는 한국 콩을 2005년부터 아프가니스탄의 일부 지역에 심으면서 현지에서 생산된 콩으로 두유를 만들어 아동과 임산부에게 먹이고 콩가루를 아프간의 주식(主食)인 난(Naan·빵의 일종)에 섞어 콩 난을 제조해 급식했다. 영양개선의 효과는 놀라웠다. 그는 이 성과를 토대로 미국에 영양과 교육 국제기구(NEI)라는 비정부기구(NGO)를 설립해 아프가니스탄을 돕는 콩 사업에 헌신하기로 뜻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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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식을 접한 한국 CBMC의 ‘세계로’지회(회장 신치호)는 미국 NEI의 한국지부를 결성한 후 이 기구를 ‘희망의 콩’ 운동본부로 개칭했다. 이어 외교통상부 등록단체인 한국·아프가니스탄친선협회와 조직을 통합한 후 협력해 콩 씨앗 보내기, 콩 가공사업, 멸균두유공장 설치운동에 착수했다. 두유 생산은 현지의 열악한 냉장시설 때문에 멸균시설을 필히 갖추어야 한다. 사업에 소요되는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젊은 지성인들이 네이버에 ‘해피로그(happylog)’라는 블로그를 만들어 범국민적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현재 ‘희망의 콩’ 사업본부는 2007년에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 한국형 콩 방앗간을 설립하고 콩 씨앗을 구입해 현지로 보내는 한편 콩 가공사업으로 두유 가공공장 두 곳을 설립했다. 이제껏 양귀비 재배에만 주력해 온 현지 농민도 점차 콩 농사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실감해 콩 재배와 가공사업을 자신의 소득증대사업으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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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간 사람들과 오찬나누는 권순영박사)

콩 사업에 회의적이었던 아프가니스탄 정부도 몇 차례의 시험재배와 영양 상태 개선의 성과를 지켜본 후 작년 말에야 비로소 전국에 걸친 콩 재배를 승인했다. 이 운동의 진행을 지켜본 한국국제협력단(KOICA)과 일본 NGO도 콩 사업에 동참하게 되었다.

처음 2, 3개 주(州)에서 재배하던 콩이 이제는 아프간 34개 주 전역에 보급되어 금년에 110t을 파종해 이달 중순 4000t 정도를 수확하게 된다. 지금까지 아편 재배로 삶을 이어왔던 아프가니스탄도 앞으로는 콩을 생산하는 축복의 땅으로 변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아프가니스탄판(版) 추수감사절을 맞는 셈이다.

우리는 6·25전쟁 후 복구 과정에서 세계 각국과 NGO에 커다란 사랑의 빚을 졌다. 이제 우리도 어렵고 힘든 나라의 재건 지원을 통해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한다. 현재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된 국군은 남부 파르완 지역에서 재건사업과 경비업무에 주력하고 있다. 현시점에서 아프가니스탄 문제가 올바르게 해결되려면 군사작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아프가니스탄 사람의 마음속에 사랑의 꽃을 심는 일이다. 우리의 콩 사업이 아프가니스탄을 향한 한국의 사랑으로 꽃피기를 기대한다.

이영일 한국·아프가니스탄 친선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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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일 전 조선일보 논설주간의 재심청구사건에서 행한 이영일 증언

(이 글은 이영일의 홈페이지 www.rep201.or.kr의 통일꾼 칼럼에 올려있음)
(2010년 8월 17일 오후 2시 서울형사지법 425법정에서 이영일이 증언한 내용이며 사전준비된 문면에 따라 변호사와 검사의 질의 및 재판장의 질의에 답한 내용을 정리한 것임)

가 이영일의 서울대 민족통일연맹 관련 입장

1. 본인은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정치학과 4학년 재학 중인 1961년 9월 30일 남북학생회담제안과 관련되어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제6조" 위반 피고 사건으로 5.16군사혁명재판에서 7년 징역형을 선고 받고 상급심에서 상고가 기각된 후 1962년 4월 경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형 면제 확인 조치로 출감하였으며 1963년 복학하여 1964년 졸업한 사실이 있음.

2. 본인은 1960년 4.19혁명직후 당시 고려대학교의 김성식 교수가 쓴 독일학생 운동사를 읽으면서 비스마르크 치하의 독일에서 7개 선제후 국 대학생들이 한 곳에 모여 통일을 공동으로 부르짖음으로 해서 독일통일의 길을 열었다는 사실에 큰 감명을 받고 한국에서도 대학생들이 주체가 되는 통일운동을 모색하기에 이르렀으며 1960년 10월 경 동경에 망명 중이던 동아일보 주필을 역임했던 중립화통일운동가인 김삼규 선생이 귀국, 고려대학교에서 중립화통일론에 대한 강연을 듣고 신선한 충격을 받아 1960년 10월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강당에서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을 결성, 공보부장 및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선전위원장을 맡아 활동한 바 있음

3. 4.19혁명 후 한국 대학사회에는 학생운동의 큰 흐름이 신생활운동, 후진성 극복운동, 민족통일운동의 세 가지로 집약되었는데 본인은 후진성 극복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후진사회연구회를 결성했으며 이에 앞서부터 참여하고 있던 정치학과 중심의 신진회 서클들과 제휴하여 독재정권을 타도했던 열정으로 남북을 가르는 3.8선을 타도하는데도 학생들이 앞장서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성세대들이 독재체제에 안주했던 것처럼 분단체제에도 안주하여 통일문제를 외면하고 있는 상황을 타개하려면 분단체제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은 우리 학생들이 남북통일의 주역이 되어야 통일의 길이 열릴 것이라는 생각 하에 남북한 학생들이 판문점에서 만나 대화를 해보자는 뜻을 모으게 되었음

4. 본인 등은 신진회라는 정치학과 중심 서클의 회원이었기 때문에 1961년 4.19 1주년을 전후한 시기에 당시 필화사건으로 이름이 학생들 간에 많이 알려진 정치학과 선배로서의 류근일 형을 학교에서 만나 민족통일연맹에 참여해줄 것을 부탁드렸던바 옳은 일인데 함께 하자고 동의했으며 그러나 류근일 형은 2년 후배들이 중심이 되어 뛰는 민족통일연맹 활동자체에는 거의 참여한바 없었음

5. 당시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결성은 학칙 상으로나 현행법 상 아무런 위법사유가 없는 합법단체였으며 200여명의 학생들이 자유롭게 가입하고 회의에서도 통일운동의 방법을 놓고도 격의 없는 토론을 벌였으며 정치학과 출신인 본인과 법대출신의 강우혁과의 민족통일연맹 창립당일에 벌인 노선을 두고 전개된 논쟁은 많은 흥미를 일으켰던 것으로 지금도 회상됨

6. 1961년 5월 3일 남북학생회담을 제의할 당시에도 사전에 지금은 고인들이 되신 통일부장관을 역임하셨던 당시 서울대 정치학과의 이용희 교수, 서울대총장을 역임하셨던 사회학과의 최문환 교수 등을 만나 의견을 구했던바 "보수, 혁신 양진영의 정치권이 자기들의 필요에 맞게 여러분들의 순수한 제안을 악용할 우려가 있으니 문제제기수준을 넘는 행동은 자제하고 연구단체로서 민통의 성격을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충고를 주셨던 사실이 있음.

7. 남북학생회담제의는 당시 정치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켜 민주당 정부의 표의석(?) 장면총리 비서관이 본인 등을 불러 직접 대화를 한 바 있고 당시 민주당 대변인인 신상초 의원과 본인이 민국일보 남재희 기자주선으로 언론대담을 갖는 등 학생 회담에 대한 대학생들의 입장을 국민들에게 솔직히 말씀 드린 바 있음 특히 이 자리에서 본인은 민주당정부의 학생회담 반대주장에 대해 민족이익을 정권이익에 종속시키는 한 통일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백색독재정권을 타도한 한국의 대학생처럼 북한대학생들도 적색독재타도에 나서야 분단체제에 안주하지 않는 순수한 민족운동으로서의 통일운동이 가능하다고 주장했음

8. 따라서 당시의 민족통일연맹운동은 결코 반국가적이거나 당시의 법질서를 파괴하는 행동이 아니었으며 학생운동지도부도 항상 교수님들의 의견도 구하고 정부 측과 만나 우리 주장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활동수준도 내부토론을 통해 조절하는 등 민주국가에서 통용될 정당하고 합법적인 활동을 벌였음

9. 그러나 군사정권은 쿠데타의 명분조성의 일환으로 서울대 민족통일연맹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와 같은 일부 극단적인 혁신계의 구호를 마치 우리들이 떠들어 댄 것처럼 단죄하고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이라는 소급법을 제정하여 일제시대의 치안유지법보다 더 가혹한 형을 언도하는 등의 혁명재판을 진행하였으며 이는 법적이라기보다는 민주정부를 뒤엎은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이벤트로 혁명재판이 활용되었던 것으로 사료됨

나. 류근일 선배 관련 사항

1. 류근일 형은 민족통일연맹에서는 별 활약을 한 바 없으며 앞에서도 기술한 바와 같이 후배들이 참여를 권고할 때 같이 협력하자고 약속을 한 수준이었으며 일상 회의나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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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시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은 1961년 5월 3일 오전 10시 당시 서울법대 구내식당에서 대의원 총회를 열고 남북학생회담제안결의안을 채택할 예정이었는데 당시 대의원총회 의장이었던 서울법대 4년 윤용남이 定時에 참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인이 윤용남을 찾기 위해 밖에 나갔다가 대학본부에서 신학기 등록을 마치고 법대 쪽으로 걸어 나오고 있는 류근일 선배를 만나 대의원총회가 의장불참으로 회의진행이 지연되고 있는 상황을 설명하고 잠시 임시의장으로 회의 진행을 맡아달라고 부탁하였던바 이를 수락하여 그 자리에서 임시의장에 선출되어 남북학생회담 결의문 채택 시 의사진행을 맡은 후 귀가한 사실이 있음

2. 며칠 후 당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약칭 민자통)라는 단체에서 민족통일연맹의 남북학생회담제안을 지지하기 위한 군중대회를 동대문운동장에서 개최한다고 하면서 본인과 류근일 선배를 이 행사의 연사라고 일방적으로 발표했으나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은 학생운동의 순수성을 왜곡할 우려가 있는 정당 사회단체 행사에 불참할 것을 결의하여 언론에 발표하고 본인과 류근일 선배는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집회에 불참하였는데 이 군중대회에서 채택한 구호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였던 것으로 기억됨

3, 본인은 혁명재판의 구형 공판 시 당시 朱鎭鶴 검찰관이 남북학생회담을 공식으로 제안한 본인에게는 7년 징역형을 구형하고 류근일 선배와 이수병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는데 본인은 최후진술을 통해 류근일 선배에 대한 구형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이 사건과 아무 관련 없는 류근일 선배에게 구형한 형을 제가 떠맡겠다고 강력히 항의한바 있으며 이때 李會昌 심판관(당시 공군대위로 기억함)이 본인을 꾸짖으며 앉으라고 말하고 류근일 형도 본인을 잡아끌어 앉게 하는 등의 법정 소란을 일으킨 바 있음

4. 이날 검찰관은 구형공판에서 남북학생회담이 큰 물의를 일으켜 결과적으로 적을 이롭게 한 반국가활동이었다고 말하고 그러나 피고인들의 동기의 순수성은 인정된다고 의견을 말하면서 구형을 했는데 그러면서도 류근일 선배에 대해서는 일벌백계 론을 내세워 무기징역을 구형했고 재판부는 무기형을 15년형으로 감형판결 했지만 결국 7년 동안이라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절을 서울교도소와 안양교도소에서 보내야 했음

5. 쿠데타 정권의 탄생을 정당화하려는 혁명재판에서 억울한 사람의 아픔과 고뇌가 많았겠지만 류근일 선배처럼 자기 행위에 전혀 합당하지 않은 벌을 뒤집어쓰고 억울한 희생을 강요당한 사람도 없을 것임

6. 류근일 선배가 감옥에 있는 동안 위장병이 심각해서 병보석으로 석방해 보기 위해 본인을 비롯한 후배들이 기족들과 협력해서 수도의과대학병원(지금은 고려대학병원)에서 진단을 받게 했지만 병보석 사유에 해당되지 않는 다고해서 우리 후배들의 석방 노력이 좌절된바 있음

7. 본인은 5.16혁명재판에서 유죄를 받고 1년여 세월을 서대문 구치소에서 보냈고 그것으로 인해 취업도 할 수 없는 국내추방상태를 수년간 살아야 했지만 그러나 1969년 이후에는 상황이 다소 풀려 국토통일원에 촉탁으로 들어가 10년 동안 통일원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남북적십자회담 전략지원반장, 통일원 정치외교정책담당관, 교육홍보실장, 통일교육원장을 역임, 홍조근정훈장을 받았으며 국회로 진출해서는 남북한 고위급 회담 대표, 전두환 총재비서실장, 국회문교공보위원장 등 3선 국회의원을 역임했음

8. 류근일 선배 역시 조선일보를 통해 친북좌파를 비판하는 논설을 통해 국민적 감동을 일으켰음은 주지하는 바임. 결국 5.16군사혁명재판은 국가에 유해한 위험분자를 배제한 재판이었다기보다는 국가발전에 공헌할 능력 있는 젊은 지성인들을 권력 정치적 필요성 때문에 희생시킨 정치 이벤트였다고 규정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임.

9. 끝으로 호소 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제 군사쿠데타가 발생한지도 반세기에 이르렀으며 박정희 대통령이 이룩한 국가발전이나 업적은 그 나름대로 한국사의 일부가 되었음은 인정하지만 이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꾸며진 혁명재판의 역사를 무조건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재판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여 청춘을 희생한 사람의 권리까지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그늘진 곳에 다시금 빛이 쬐이는 민주화시대가 열린 오늘날 억울한 희생자들의 권리가 더 이상 불문에 붙여져서는 안 되며 반드시 그 억울함을 뒤늦게나마 밝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10. 이제 5.16의 역사는 더 이상의 정당화가 필요 없으며 다만 5.16으로 말미암아 희생된 자들의 억울한 시정과 원상회복을 위한 과업만이 우리 앞에 남아 있는 과제일 것입니다. A라는 시점에서 억울하게 고생했던 사람이 B라는 시점에서는 그 억울함이 밝혀질 수 있는 사회가 그나마 희망 있는 사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재판은 어느 사회에나 있었고 그에 따른 희생자도 생기게 마련이지만 정치재판에서 생긴 억울함이 반드시 밝혀져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향해 그 효력을 소멸시키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정도라고 믿으면서 증언을 가름합니다.


잘못된 재판, 50년간 바로잡지 못한 것 사과"(조선일보 2010년 9월 11일)
법원, 민통련사건 관련
북한을 찬양했다는 혐의로 5·16쿠데타 직후 혁명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류근일(72·사진) 전 조선일보 주필이 49년 만에 재심(再審)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3부(재판장 홍승면)는 10일 류 전 주필에 대한 재심 선고 공판에서 "공소 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없고, 이후 피고인의 사상과 인생을 되짚어 보더라도 매우 부당함을 확인할 수 있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류 전 주필은 서울대 정치학과 재학 중이던 1961년 4월 통일문제를 연구하던 학생 단체인 민족통일연맹(민통련) 소속으로 남북 학생회담을 제안했다가 기소돼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7년6개월간 수감생활을 했다.

재판부는 "민통련의 결의문과 성명서는 민족의 평화 통일을 지향하면서 남북 교류 차원에서 남북 학생회담 등을 주장한 것일 뿐 북한 정권이나 정책 혹은 북한의 통일 방안에 찬동하는 내용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어 "불법적인 수사와 분명하지 않은 증거에 의해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이를 50년간 바로잡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며 "법원을 대표해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또 "지금 과거의 잘못된 재판들을 바로잡는 것은 피고인과 같은 국민의 희생으로 이룩한 민주화의 성과라는 점에서 피고인의 고난과 희생이 헛된 것이 아님을 말씀드린다"고 덧붙였다.

류 전 주필은 판결 선고 후 "50년 만에 햇빛을 보았다"며 "당시 행동이 20대의 설익은 행동이었을지 몰라도 민주 선진국에 도달하기 위한 진통이었다고 생각한다. 패자 부활전이 가능한 대한민국에 긍지를 느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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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65주년날에 감상한 오페라 투란도트 (이글은 憲政誌 9월호 118p-120p에 게재되었음) 

                              한중문화협회 총재  이영일

광복절 65주년을 기념하는 서울경동교회의 일부 예배를 마치고 나는 아내와 함께 오후 3시 서울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초연하는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를 감상했다. 작년 가을부터 우리 내외는 좋은 오페라를 빠짐없이 감상하는 행운을 안았다. 경동교회 성가대원 들 중에 오페라 현역출연진들이 많은 덕분에 때로는 표 파는데 협력해야 하는 부담도 있었지만 우리 가족들이 팔아준 표 값보다 훨씬 더 많은 오페라 초대를 받게 되었고 또 예술관련 회사를 경영하는 친구가 우리 내외를 음악이나 오페라 예술에 상당한 소양을 가진 것으로 착각(?)해서인지 자기에게 오는 표를 많이 할애해주어 세종문화회관에서 돈 카를로, 마농 레스코를,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칼멘, 라 트라비아타를, 그리고 이번에는 오페라하우스에 딸린 소형극장 토월극장에서 투란도트를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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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절 65주년을 맞아 새로 준공된 광화문과 그 앞에서 거행되는 기념행사에도 조그마한 홍조근정훈장을 서랍에서 꺼내 앞가슴에 달고 참가하는 치기를 발휘할까도 생각해 보았다. 고등학교 때 국어교과서에 실린 설의식 선생의 "헐려짓는 광화문"의 기억이 너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침 일요일이 광복절인관계로 교회에서 경동교회를 창립한 김재준 목사님 작사의 찬송 582장 "깊은 밤 어둠에 잠겨"를 힘차게 불렀고 또 예배말미에 "흙 다시 만저 보자"를 리드로 하는 광복절 노래도 눈시울 붉히는 감동 속에서 따라 불렀기 때문에 내 나름의 기념식은 끝난 셈이었다. 그래서 우리 내외는 광화문은 다음에 보기로 하고 오후 세시에 시작되는 투란도트 감상에 나섰다.

  그간 푸치니의 오페라는 여러 편 보았고 투란도트도 수년전 테너 임응균이 타탈의 왕자 칼라프로 나오는 역을 할 때 본 일이 있지만 중국을 무대로 한 작품을 다시 보고 싶은 욕심에서 예술의 전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푸치니는 일본을 소재로 나비부인을 그려 일본 게이샤를 서양에 소개했고 중국을 소재로 하는 것으로는 처음이고 마지막인 작품이 투란도트였다.

  그러나 투란도트는 작품을 통한 중국문화의 증언이라기보다는 중동식의 천일야화를 중국이야기로 둔갑시켰기 때문에 문화의 지역성이 뚜렷하지 않고 주제곡이나 변주곡이 모두 푸치니 가극에서 흔히 듣는 음색들로 크게 새로울 것이 없었다. 적어도 동양적 선율을 느낄 수없었다는 데 아쉬움이 있었다.

다만 이날 공연에서는 푸리마돈나로 나온 투란도트보다는 조연으로 나와 타타르의 왕자 칼리파를 사모하는 애인 류가 사랑을 위해 죽음을 택하면서 부르는 아리아가 음악성에서 훨씬 감동적이었다. 막이 내린 후 나오는 류를 향한 박수의 강도가 매우 길고 큰 것으로 미루어 내 느낌이 옳았던 것 같다.

 나는 이번 여러 편의 오페라를 보면서 한국오페라의 수준이 역시 GDP랭킹 세계 13~15위만큼 올랐음에 놀랐다. 1958년 대학에 입학해서 같은 캠퍼스의 수학과 김치호(4.19당일 경무대 앞에서 총 맞고 사망)군과 함께 당시 시공관에서 맨 처음 감상했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나 레온카발로의 기극 파리아치를 볼 때와는 너무 차이가 나는 기획, 연출, 무대, 성악수준이었다. 왜 한류(韓流)가 세계도처에서 평가받는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다른 나라에서 한류가 받는 것만큼 칭찬받을 전망이 전혀 없는 정치권에서 인생을 살았다. GDP가 아무리 높아져도 한국정치의 수준은 GDP만큼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정치는 정치문화를 떠나서 성립하기가 힘들고 식민지를 체험한 국가들에서 민주주의가 잘될 수 없는 소위 식민지근성이 청산되는 데는 아직도 시간이 더 흘러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분단과 전쟁의 갈등이 내면화되는 가운데 쌓인 모순과 대립을 극복하기 보다는 그것을 이용하고 그것에 편승하여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가 뒤쳐져 있다고 해서 다른 분야가 정체된다면 문제가 심각하지만 정치를 제외한 다른 모든 분야가 세계와 흐름을 같이하면서 발전하기 때문에 나라의 미래에는 큰 걱정은 없다.

  정치의 기능과 역할이 국가의 존속과 발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나날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교육국경, 경제국경, 문화국경이 무너져 가는 세계사의 큰 흐름을 조망할 때 정치적 국경의 테두리 속으로 역할이 줄어드는 정치에 너무 큰 기대도, 환멸도 가질 필요가 없다. 대통령을 잘못 뽑았다고 개탄할 필요도, 잘 뽑았다고 기뻐할 필요도 없다. 다 지나가는 하나의 절차요 과정이기 때문이다. 결국GDP 수준을 밑도는 정치는 세대교체의 와중에서 점차적으로 정비되어 갈 것이다. 이점에서 문화의 선진화는 마침내 정치선진화의 중요하고 큰 동력이 될 것이다.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하여 GDP를 밑도는 수준의 정치를 연출하는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고 웃으면서 악수하는 것보다는 토월극장에서 수준 높은 오페라를 감상하면서 광복절을 보낸 것이 더 값지다는 생각이 아직도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 다소 아이러니이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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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영 저 <토비아>

 추천의 글 한국·아프가니스탄 친선협회 회장 이 영 일

이 글은 작가 김윤영 씨가 아프간의 산간빈촌에 살고 있는 아홉 살 난 토이바라는 소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30년에 걸친 외침과 내전으로 극도의 어려움 속에서 목숨을 이어가는 아프간 인들의 삶의 모습을 생생히 소묘(素描)한 것이다. 토이바는 작가 이상(李箱)이 그의 ‘날개’ 속에서 “도적의 도심마저 도적당할 만큼 가난한”이라는 표현이 그대로 적중하는 아프간의 산간벽촌에서 전쟁구호기관이 배급해주는 빵으로 가족들과 같이 매 끼니를 근근이 이어가는 착한 아프간 소녀이다.
 

이 소녀의 집에는 전쟁에서 한쪽 다리를 잃고 성질만 부리는 아버지, 다섯 번째 아이를 낳다가 산후처리 잘못으로 몸 저 누어 있는 어머니, 토이바보다 한 살 위의 언니와 세 동생이 함께 살면서 빵 배급을 받으면 먹고 없으면 굶으면서 살아간다. 산촌마을의 주변은 매 마른 사막지대로 물기도, 볼품도 없는 잡초들이 드문 드문 자라고 있고 별로 쓸모없어 보이는 자갈들이 이리저리 나딩굴어 발길에 체이는 박토를 연상시킨다.


이 풍경들은 오늘날 전쟁으로 이글어진 아프간 산간벽지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나는 2002년 7월호 신동아 지(誌)에 “수난의 땅 아프가니스탄을 다녀와서”라는 여행기를 발표했는데 그 때 목격했던 풍경들이 이 작품 속에 그대로 담겨있다.

내가 방문했던 지역들에서도 수많은 토이바들을 만났다. 맨발의 소녀가 코란을 좔좔 외면서 나의 손을 붙들고 신발을 사달라고 졸라댔는데 한 아이 아닌 수백 명의 토이바들을 그 자리에서 감당할 수 없어 손을 뿌리치고 돌아왔다. 지금도 내 마음 한 구석에는 그날의 일들이 아픈 빚으로 남아있다.

나의 아프간 방문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토이바들의 눈동자 속에 전혀 악의가 담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맑고 밝고 선한 눈빛이었고 아이들뿐만 아니라 부르카를 쓴 아줌마들이나 총을 지게처럼 메고 다니는 아프간 군인들의 눈 속에서도 악의를 느낄 수 없었다.

이들은 자기들을 도와주러 온 사람들을 고마운 마음으로 대해 주었다. 또 이슬람 문화의 영향이겠지만 신에의 경외심, 신에게 칭찬 받을 선행에의 의지가 토이바들에게 살아 있었다.

중국 심양이나 연길거리에서 간혹 만나게 될 때마다 섬뜩한 느낌을 주는 탈북 청소년들과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섬기는 신이 있는 사람들과 없는 사람들의 차이 같다.

토이바는 폭군으로 변한 아버지의 구박을 피해 외할머니 집으로 도망쳐 나와 새 삶을 얻지만 그것이 토이바 문제의 해결은 아니다.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한다.

전쟁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생명을 이어가는 아프간 인들을 향한 구호와 사랑의 손길이 이어져야 한다. 아프간 인들의 그 처절한 굶주림과 아픔에 시달리는 바로 그 현장에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우리들의 기도와 사랑의 손길을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작가 김윤영씨는 자기에게 주어진 가장 참담한 상황 속에서 착한 소녀 토이바를 발견했고 또 토이바를 통해 전쟁 속에 모든 것을 상실해버리고 신의 가호만 기다리는 아프간 인들의 아픔과 고난의 진실을 들추어냈다. 얽매여 있는 자신의 처지를 넘어서는 사랑이야기를 기록했다. 이것은 작가만의 간증이 아니다. 토이바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나누어야 할 사랑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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演劇 사나이 와타나베 감상소감

 

모처럼 볼만한 연극이었다.

시내 지하철 2호선 삼성역 8번 출구로 나와 100m쯤 직진한 후 강남소방서를 끼고 좌회전을 하면 백암아트홀이 시야에 들어온다. 지금 이 아트홀 공연장에서는 장항준 감독의 <사나이 와타나베> 이야기가 연극으로 상제되었다. 내가 감상한 5월 10일에는 TV탤런트 백인철이 와타나베 역을 맡고 정은철이 박만춘 역을 김C가 멀티맨을 맡아 열연했다. 극중 인물 3인이 역할을 분담하면서 1시간 40분간 흥미 있게 진행하는 신파성 멜로물이다.

 

스토리는 일본 시모노세끼에서 주먹세계를 흔들었던 조선인 와타나베가 나이가 든 후 자기의 야쿠자로서의 삶을 마음속 깊이 후회하면서 그러면서도 야쿠자로서의 자기 삶을 다소라도 미화해보기 위해 한국에서 예술 영화 만든답시고 번번이 실패해서 카드빚만 몽땅 떠안고 있는 영화감독 박만춘을 고용한 후 자기 삶의 대본을 쓸 감독과 인생황혼을 내다보는 와타나베가 재기 넘치는 유모어와 과장 섞인 칼춤 동작 등으로 이어가는 장면 장면들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장면을 내뱉는 작품이다. 대화 속에 깃든 유모어와 페이소스는 일품이었으며 경술국치 100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깔고 나라 없는 조선인의 아픔, 서러움이 결국 인간말종의 야쿠자의 길을 걷게 한다는 식민시대의 비극을 희극적으로 素描한 작품이었다.

 

주인공 야쿠자 와타나베는 자기 삶의 리얼리티를 그대로 작품화하려고 오디션을 통해 발굴한 와타나베 역의 젊은 배우를 죽이고 자기 자신이 스스로 각색, 개작, 자신을 영웅화한 후 자기가 주연을 맡는 작품의 영화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감독은 그 작품이 영화 아닌 쓰레기라는 평가를 내뱉고 와타나베를 떠나고 와타나베가 죽인 영화배우의 형이 동생 원수를 갚는다고 와타나베 자신을 암살한다. 불행하게 태어났다가 끝까지 불행한 최후를 마치면서 바다속이 인생의 종착역이고 자기가 사랑하는 어머님이 계신 곳이라면서 세상을 하직하는 것을 많은 여운을 남기면서 막이 나린다.

 

그의 삶과 죽음자체보다는 극 전체를 통하여 넘치는 해학과 재치문답이 일품이다. 시종 즐겁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으로서 극 처리가 현대적 기법으로서의 비디오를 요긴한 부위마다에 첨가함으로써 생동감을 배가시킨 점은 평가할만하다.

 

지난 4월 6일부터 오는 6월 6일까지 오후 3시, 7시에 공연하고 일요일에는 오후 6시에 1회 공연한다. 연극관중이 좌석을 그런대로 메우는 점은 한국연극의 장래를 밝게 전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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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2010년 3월 27일자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입니다.

[기고] 아프간 살리는 콩의 이름은 우리말 '콩'

• 이영일 한국아프가니스탄친선협회 회장

입력 : 2010.03.26 23:40 / 수정 : 2010.03.27 02:05

▲ 이영일 한국아프가니스탄친선협회 회장

한국의 콩이 아프가니스탄의 식량이 되고 있다. 원래 콩이라는 식물이 없던 아프가니스탄에 한국의 콩이 소개, 이식됨으로 해서 아프간의 식량 역사에 새로운 장이 열리고 있다.

 미국 국적을 취득하고 미국 오하이오 대학에서 식품관리학을 전공한 권순영 박사는 2003년 25년간의 외침(外侵)과 내전으로 영양불량이 최악으로 치달아 유아사망률과 임산부의 출산 시 사망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아프간을 찾아가 한국산 5종의 콩 품종을 아프간 일부지역에 이식해 보았다. 이 중 3개종은 생장이 아주 빨랐고 2개 품종은 보통 수준으로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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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아프간의의료료봉사 시 정영숙 권사와 함께 아무다리오 강을 건너는 이영일 회장)

여기에서 자신감을 얻은 권 박사는 2006년부터 한국의 기독실업인단체인 '세계로 CBMC'와 제휴하고 미국 NGO단체들의 협력을 얻어 2004년부터 아프간 일부지역에서 콩 농사에 착수했다.

이 시도가 성공, 아프간 정부의 긍정적 평가를 받은 후 금년부터는 아프간 34개주 중 탈레반의 영향력이 강한 3개주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2만명의 아프간 농부들에게 콩 씨앗을 나누어주고 콩 농사교육을 시켜 콩 재배를 추진하고 있다.
앞으로 아프간 정부가 콩 농사를 전국적으로 권장하려면 정부의 작물시험장에서의 2년에 걸친 실험 성공이 전제되지만 현재의 실적으로는 내년부터 한국품종의 콩이 식량으로 확정될 전망이다.
 

이 지역에는 콩의 영어표기인 'Soy Bean'이란 말이 아예 없기 때문에 한국식 표기대로 "콩"이라 부르면서 두유, 밀가루에 콩가루를 9대1로 혼합한 "난"(Naan)이라는 주식 빵 등을 생산, 보급한 결과 임산부들의 영양실조로 인한 사망률이 낮아지고 어린이들의 얼굴에서 병색이 걷히고 체중도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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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의 그림은 아프간의 콩재배분지)
콩 1톤을 심어 40톤을 생산하기 때문에 콩 농사는 아프간 농민들에게는 채산이 맞는 사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프간 토질은 수분이 적은 탓에 양귀비가 잘 자라 마약을 많이 생산하는 병폐도 있지만 그런대로 콩 생산에 적합하기 때문에 콩이 새로운 식량원(食量源)의 구실을 해낼 것으로 보인다.
탈레반들의 납치살인 사건으로 한국인의 아프간 출입이 막힌 상황에서 권순영 박사는 미국 국적을 가진 한인들을 중심으로 NEI(국제영양교육기구)를 조직하여 아프간의 콩 농사프로젝트를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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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아프가니스탄 방문시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과 환담하는 이영일 회장)

이에 국내에서도 권 박사를 돕기 위해 한국에 아프간 유학생 12명을 데려다가 교육시키고 있는 한국 아프가니스탄 친선협회와 '세계로 CBMC'가 조직을 통합하고 두유생산, 콩 방앗간 설치, 파종할 콩 씨앗 조달업무를 지원하기에 나섰다.
현재 살균 두유시설은 두 지역에 세워졌다.'세계로 CBMC'가 수도 카불에 세운 한국식의 전통 콩 방앗간은 아프간인들에게는 새로운 관광거리가 되었다.


지난 2월 25일 우리 국회는 아프간 파병을 결의했다. 국제사회에 대한 한국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다. 한국군은 전투 목적 아닌 건설과 의료지원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현지에서는 이미 바그람 기지에 종합병원을 설치, 운영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파병지원도 중요하지만 아프간 농민들의 생산의욕을 북돋아주고 영양 상태를 개선해 나가는 콩 농사 지원사업도 큰 몫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말한 바 있는 가장 성공적인 햇볕정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콩 농사지원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인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꽃피어 파병장병들의 작전수행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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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연우포럼,No.4035]에 실린 김영환 칼럼에 감동되어 올립니다

 

무료급식의 허실

 

학교에서 점심밥을 학생 전원에게 무료로 주어야 하는가? 어느 도 교육감의 주장에서 촉발된 논란이 확산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의무교육이기 때문에 밥도 거저 줘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또 다른 이는 의무교육이란 병역, 납세처럼 자녀를 취학시켜야 한다는 부모들의 의무이지 국가가 모두에게 무료로 밥을 줘야 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런 논란을 보면서 필자는 프랑스 특파원 시절이 생각납니다. 당시 초등학교(cole primaire)에 다니고 있던 남매는 점심 때가 되면 집에 와서 밥을 먹고 다시 학교에 갔습니다. 그런데 18층 아파트에서 빤히 보이는 학교 교정에서는 매일 급식차가 학교에 점심을 실어 나르고 있었습니다.

 

   학교에 알아본 결과 부모가 모두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급식의 첫째 조건이었습니다. 아내는 일을 보조하고 있었으므로 교육위원회에 서류를 제출했죠. 그런 뒤에야 학교 급식이 가능해졌습니다. 급식 비용은 당시 부모의 수입에 따라 6등급으로 나뉘어 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소득에 따라 여러 배 차이가 났습니다. 그 때는 프랑소아 미테랑 대통령이 14년간 집권한 사회당 좌파 정권이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이 글을 쓰려고 프랑스 웹을 검색해보니 가장 덜 내는 아동과 많이 내는 아동 간에 10배 정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지자단체에 따라 다르지만 한 끼에 최저 0.5 유로( 800)에서 5유로(8,000) 정도였습니다. 부모의 수입이 높으면 많이 내고, 아이들이 더 많으면 덜 내는 구조입니다. ‘선진국은 모두 무료 급식한다’는 어느 야당 당직자의 발언은 거짓말이었습니다

 

   일본은 어떨까요. 일본 드라마에 ‘장미 없는 꽃집(薔薇のない花屋)’이 있습니다. 절친한 친구의 애인이 죽으면서 낳은 ‘시즈쿠’란 여자 아이를 대신 길러주는 남자의 이야기인데 그는 아이의 도시락을 정성스레 싸주었고 점심시간에는 학생들이 죄다 도시락 밥을 먹고 있었습 니다. ‘꽃보다 남자(より男子)'’에서도 초명문 사립고에 다니는 여주인공은 오직 혼자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는데 호텔 수준의 일류 급식을 즐기는 부유층 학생들로부터 ‘이지메 (괴롭힘)’를 당하는 장면이 나오죠일본의 학교급식은 시설과 설비를 국고에서 일부 지원 하지만 급식비 자체는 생활보호법의 보호 대상자에 대해서만 전부 또는 일부를 보조할 뿐입니다. 결코 무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무료급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4대강 사업비를 줄이면 된다고 합니다. 글쎄요, 근본적으로는 홍수를 막을 4대강 사업이 빈부를 안 가리는 초중생들의 전원 무료급식과 무슨 상관이 있을지요? 그렇게 무료급식이 절박하다면 그것을 주장하는 국회의원, 교육감, 도지사들이 명예직이 되어 월급을 안 받거나 정당의 국고 보조금을 출연하는 것이 국민의 지지를 더 받을지 모릅니다.

 

   돈을 쓸 데가 없어 주체하지 못하는 부자 자녀 모두에게 무료로 점심을 주기보다는 아침과 점심을 거를 빈곤층 학생들에게 밥을 먹여주고 학용품을 주는 것이 더 시급하지 않을까요? 더욱이 출산율이 세계 최저로 ‘국가가 키워줄 때까지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하여 ‘출산 파업’이라는 말마저 나오는 우리나라입니다. 힘들게 임신과 출산을 해도 고작 20-30만원의 쿠폰을 줄 뿐인 인구 정체의 나라에서 부자 아이들에게까지 공짜로 점심을 주느니 출산비와 영유아 양육비를 획기적으로 보조해주는 것이 일의 순서가 아닌가요.

 

   학교 무료급식을 안 하는 프랑스도 아이를 가지면 부유층을 뺀 약 90%의 가정이 임신 7월째에 출산수당 855유로( 136만원), 육아수당 일시금 1,710유로( 273만원), 3살이 되기 직전 달까지 매월 171유로( 27만원)를 받습니다. 또 둘 이상의 자녀를 둔 가정에 매월 최저 119유로( 19만원)의 가족수당을 줍니다. 국민이 국가의 기본이라는 신념을 드러내는 정책 이죠.  

 

   전원 무료급식의 논란을 보면서 우리 정당이 얼마나 왜곡된 정보로 국민을 기만하려는지 짐작하게 됩니다. 선후완급을 정밀하게 숙고하는 정책의 정합성이 없습니다. 그런 주먹구구식으로 재집권의 기회가 옵니까?

 

어느 예비후보는 ‘6.2 지방선거가 무료급식 세력 대 반대세력의 국민투표’라고 주장했고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을 지낸 어느 지사 출마 희망자는 ‘이번 6월 선거에서 여당을 심판하는 것이 아이들의 빼앗긴 밥그릇을 찾아오는 것’이라고 강변합니다.

 

   무료급식이 이제 생각났나요? 좌파 집권 10년 간엔 뭘 했나요? 천문학적인 비용의 행정수도를 건설할 생각을 말고 무료급식에 착안했다면 지금쯤 상당히 합리적으로 확대되었을 것입니다. 전원 무료급식은 무료급식이 급한 게 아니라 ‘부자들의 표’ 가 더 급하다고 생각한 발상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전원 무료급식 주장은 이 나라에서 정치한다는 자들의 수많은 문제점 중의 하나를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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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도에 한중문화협회 곤명지회장으로 취임하신 김부식 지회장이 그의 에세이 집
'대륙의 노래'를 재 출판하게 되었다는 소식은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한중문화협회의 곤명지회 창립을 계기로 김부식 선생과 인연을 맺었고 그 때 김 지회장에게서 받은 책이 바로 재판을 보게 된 대륙의 노래입니다.
                               ( 김부식지회장과 이영일 총재 -곤명지회창립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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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중국에 관심을 갖는 분들에게 많은 읽을거리를 제공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이면서도 거기에는 눈물과 안타까움과 부러움이 함께 어우러져 있습니다. 동시에 인간 김부식의 삶의 기록이며 간증입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복음서의 달란트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이야기의 내용인즉 주인이 여행을 떠나면서 종들을 불러 그들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맡기고 또 한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맡기고 또 다른 한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겼다. 주인이 돌아와서 맡긴 돈을 셈하게 되었는데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그 돈으로 장사를 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만들었다고 말하고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그 돈으로 두 달란트를 더 만들었다고 말하자 주인은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겠다. 어서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리자"고 칭찬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그 돈을 땅에 묻어두었다가 주인에게 되돌려주면서 주인을 비방했습니다. 이에 격분한 주인은 그 한 달란트마저 빼앗고 그를 밖으로 내쫓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대목은 주인이 다섯 달란트를 만든 사람이나 두 달란트를 만든 사람을 그 양으로 구별하지 않고 똑같이 칭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나는 과연 내가 받은 달란트를 주인에게 칭찬받게 키우고 있는가를 자성케합니다.

김부식 지회장은 자기 자신이 장애자로 살아야하는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자기의 달란트를 다섯 배로 키워 살고 있는 사람임을 이 책에서 느끼고 배울 수 있습니다. 에세이속의 한 소제목 "김부식 하나님" 이야기는 바로 이를 웅변하고 있습니다. 장애인이 장애인을 섬기는 삶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실감합니다. 동시에 이 책은 중국인의 삶속에 담긴 인내와 대륙기질도 체험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세계적인 부흥사 빌리 그래함 목사보다도 더 훌륭한 섬김의 삶이 묻어나는 김부식의 대륙의 노래를 함께 읽으면서 큰 은혜 나누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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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리장성의 한 단면을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다듬습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만사형통하심을 축원합니다. 중국의 비약적인 발전이 우리 마음에 부담이 되는 새해를 맞습니다. 그러나 위기는 위험과 기회의 복합어입니다. 위험을 피하면 기회만 남기때문입니다. 고구려 옛땅보다 더 넓은 중국시장을 우리는 탐욕스럽게 바라보면서 단한치라도 모든 면에서 중국에 앞서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중국에 앞서가면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영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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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꾼이란 말은 1979년 남북당국자 회담을 정부가 제안했을 때 이 회담제의를 지지하는 1000만인 국민서명운동에 동참한 모두를 가리켜 통일꾼이라고 칭한데서 비롯되었다. 박정희 대통령도 이 서명에 참여하면서 대화로 통일, 총화로 통일이라는 휘호를 남겼다. 이로서 박정희 대통령도 통일꾼임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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꾼은 그 특징이 정부의 공식적 면허증 없이도 그 분야에 달통한 한국식 표현이다. 노름꾼, 주정꾼은 좋지않은 꾼이지만 달인이라는 의미의 꾼은 좋은 의미이다.

통일꾼은 민족사의 분단시대를 살면서 통일을 희구하는 온 겨레 모두를 지칭한다. 그러나 통일을 포기하거나 외면하거나 무관심한 사람은 통일꾼이 아니다.

 한국에서 통일꾼 운동이 일어나 남북당국간 대화 1000만인 서명운동에 1400만이 서명하는 성과를 거양하고 통일꾼이라는 표현이 대중운동의 지평에 등장하면서 부터 한국을 민족분열세력이라고 비난하던 북한의 대남방송은 중지되었다.

 필자는 당시 국토통일원 교육홍보실장으로서 통일꾼 사업을 총괄하고 통일을 말하는 모든 사람을 그때부터 통일꾼이라고 명명했다.  나의 고희기념논문집은 이영일의 통일꾼운동 30주년기념문집으로 명명될만큼 나와 통일꾼이라는 명칭에는 깊은 유대와 연원이 있다.
 
이 블로그는  통일꾼운동을 지속하고자 하는 나의 의지이자 노력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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