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1일 나는 여성국극계 예술인으로 아직도 활동하고 계시는 이소자 여사가 제작한 대춘향전을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감상했다. 이소자 여사는 우리나라 전통음악을 國劇化한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면서 아직 결혼도 하지않고 금년으로 80세를 넘겨 望九를 바라보는 연세가 되었다. 점점 잊혀져 가고 사라져가는 여성국극을 전수해 보겠다는 일념에서, 또 여성국극 선배들에 대한 보은의 뜻에서 5월1일 오후 2시와 6시 30분 단2회로 여성국극  대춘향전을 상제했다. 누구의 후원도 없이 자기 사재를 털어 여성국악인들만이 주역인 여성국극으로 춘향전을 공연했다. 한중문화협회에서도 이를 성원하는 뜻에서 10여명의 간부들이 오후 2시 공연에 참여, 뜨거운 갈채를 보냈다. 

이날 공연에서 이소자 여사는 본인이 직접 출연자들의 옷과 소품을 만들고 또 변사또 역할을 제대로 소화해냈다. 80세가 넘는 나이로 이처럼 사뿐히 춤을 추고 남성목소리의 변사또 역을 너무 실감있게 연기해내는데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없었다.

특히 이 공연에서 눈이 띄는 것은 춘향전을 현대의 요구에 맞게 극적 재구성을 함과 동시에 현대무용을 적절히 안배함으로써 극의 효과를 높이고 있다는 점이다. 안무와 구성까지를 모두 이소자 여사가 직접 꾸몄다는 사실에 더욱 놀랄뿐이다.
 
 이날 공연에서는 국악예술계의 신인인 김태희 씨가 춘향역을, 박수빈이 이몽룡역을 맡았고 원로 국악인 조영숙 여사사 월매역을 맡아 극의 흥취를 한층 북돋우었다. 이들이 모두 국악인이면서도 돋보인 연기를 펼치는 것을 보는 것은 예상외의 큰 성과였다. 

 서양오페라는 그것이 아무리 비극으로 종결된다고 하여도 끝나면 웃는 얼굴로 나오면서 프리마돈나나 테너의수준을 아렇다 저렇다 평가하지만 우리나라의 오페라인 국극은 특히 춘향전의 경우 대사와 노래에서 엄청난 공감을 얻기 때문에 청중들은 때로 웃고 때로 눈물짓던 감정을 얼굴에 담고 나온다. 페이소스와 해학이 살아 우리 감정에 파고 들기 때문이다.  나도 몇대목에서는 눈시울을 닦았다.

이소자 여사는 여성국극을 한국문화의 장르에서 되찾는 것을 필생의 꿈으로 안고 살고 있다. 정부에서는 남성 혼성국극만을 인정하기 때문에 여성국극은 재대로 대접을 못받는다. 그러나 이 분야의 여성국극은 성(性)의 문제와 관계없다. 50년대와 60년대에 여성국악인들이 중심이되어 발전시킨 한국창극의 한 장르이기 때문이다.
 가장 한국적인 여성국극이 한국정부나 뜻있는 기업들의 협찬으로 다시금 활성화되기를 기대해 본다. 모든 보는 이들에게 큰 감동을 안겨준 이소자 여사의 대춘향전이 불씨가 되어 여성국극이 다시 옛모습을 되찾고 활성화되기를 비는 마음 간절하다. 아래 글과 사진은 이소자 여사가 쓴 대춘향전 상제의 인사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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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페라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할 자격이 없는 무면허 운전자와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평범한 구경꾼의 한 사람으로서 토스카 관람 소감을 여기에 적어본다.


지난 4월 23일 19시 30분 우리 내외는 세종문화회관 대 강당에서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를 감상했다. 서울 시립오페라단이 마크 깁슨이 지휘하는 경기교향악단과 더불어 박세원 총감독의 지휘로 토스카를 상제한 것이다. 내가 감상한 토스카는 이번까지를 합하면 모두 세 번째이다.

내가 맨 처음 오페라를 접한 것은 1958년 대학입학 후 서울 명동에 자리한 시공관에서 본 Cavalleria Rusticana였다. 난생 처음 보는 오페라였기 때문에 이런 음악과 연극이 있다는 것에 놀라면서 바로 저런 형식의 음악과 노래가 진짜 음악 같다고 생각했다.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에 너무 깊은 감동을 받은 탓에 그 다음 해 가을쯤인가 벽보에 나붙은 오페라 토스카 공연광고를 보고 푸치니의 그 유명한 오페라 토스카를 꼭 가보고 싶은데 가정교사의 호주머니 형편에서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진은 푸치니)
 그런데 뜻밖에도 주인집에서 오페라 토스카 초대장이 있는데 주말에 한번 가지 않겠느냐고 권유했다. 주인아저씨 내외분이 다른 일정으로 갈 수 없었기 때문에 나에게 얻은 표를 준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내심의 축제 같았다. 빈집에 황소 들어오는 것이 이를 두고 말하는 것인가.


그날 밤 토스카에서 들었던 아리아들은 지금도 잊혀 지지 않을 만큼 나의 심금을 울렸다. 그 때만해도 토스카의 유명한 아리아 “별은 빛나건만”이나 오묘한 조화의 가사를 나는 이태리어로 암송하면서 명동의 음악감상실에서 여러 차례 여러 성악가들의 노래로 열심히 들었다. “별은 빛나건만”을 부른 성악가들은 너무 많았다


나에게 인상적인 분은 마리아 델 모나코로서 고함지르지 않는듯하면서도 높고 아름다운 음색으로 카바라도시의 심정을 쏟아놓는 테너음성을 들으면 전신에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짜릿해 왔다. 토스카가 부르는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는 경쾌하면서도 간절한 노래이지만 내가 전혀 흉내 낼 수 없는 소프라노의 노래였기 때문에 열심히 간직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후 나의 삶속에서 오페라는 한동안 거의 사라진 거나 다름없었다. 60년대 10년 동안 학생운동으로 두 차례나 붙들려 들어가 서울 서대문 교도소에서 500여일을 보내야 했고 그에 뒤따르는 실업과 가난으로 하여 오페라 간판마저 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결혼 후 삶이 안정 되면서 부터 다시 오페라나 오케스트라 연주회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아내도 오페라음악을 사랑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이화여대 강당에서 열렸던 마리아 칼라스와 스테파노의 공연도 감상했다.


두 번째 토스카 감상은 시일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의 장충단 국립극장에서인 것 같다. 이때는 노래도 노래려니와 스토리도 집중해서 들었다. 그때는 요즈음처럼 모든 오페라 대사와 노래를 원어로 하면서 자막이 나오는 방식이 아니고 번역된 한국말로 하기 때문에 한국성악가들의 레시타티브나 아리아의 한국번역 가사들이 사뭇 어색하게 들렸다. 오페라 대사가 어색한 우리말로 들리면서 비로소 우리나라의 창극이 바로 한국판 오페라임을 깨달았다.
1950년대 초엽 내가 중학교 다닐 때
광주극장에서 공연하던 임춘앵, 조금행, 김경애 씨등이 주연으로 활약하던 여성국극 햇님 달님을 어머니 따라서 구경한 일이 있다. 그때 햇님과 달님간의 사랑이야기를 즐겁고 슬프게 연극화 했는데 모든 대화가 창(唱)으로 이어졌다. 창의 아니리나 창으로 하는 대화가 바로 오페라의 레시타티브요 간절히 부르는 한 곡의 판소리가 바로 오페라의 아리아 아니겠는가.


이번에 내가 본 서울시립오페라단의 토스카는 박세원 총감독의 연출 하에 극과 무대를 현대화된 기법으로 재구성되었다. 그러면서도 푸치니 작곡의 모든 음악과 극중 대사를 130분에 걸쳐 전부 소화해냈고 생동감 나는 오케스트라가 밑받침됨으로 해서 서양무대에 상제해도 큰 손색이 없을 수준작이었다.         (이소자여사의 대춘향전 광고)
특히 토스카 역을 맡은 김은경 교수의 열창은 너무 인상적이었다. 고성현씨가 맡도록 되어있던 스칼피아 역은 고성현씨의 개인사정으로 불참하여 최진학교수로 바뀌었지만  너무 실감나는 것이었다. 테너 박기천 교수의 카바라도시 역 역시 청중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기에 합당했다.

 

무대는 항상 바뀌고 극의 구성도, 의상도 변하지만 푸치니의 음악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시간을 초월해서 생명력을 갖는 것을 고전이라고 한다면 이제 푸치니의 오페라도 이미 고전이 되었다. 주인공 네 사람이 모두 죽는 끔찍한 비극인데도 슬픈 표정으로 극장을 나오는 사람은 없다. 스토리보다는 한 대목 한 대목의 훌륭하고 장엄한 음악과 아리아에 더 큰 관심을 쏟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관객이 푸치니 극의 스토리를 알고 있기때문인지도
                                                                                    (소프라노 김은경)
모른다. 그러나 한국의 국극 춘향전은 몇몇 대목에서 눈시울을 붉히게 한다.



서양의 오페라는 요즈음에는 예술의 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에서 거의 정기적으로 공연되지만 우리나라의 창극, 특히 여성국극은 사살 상 소멸되고 있다. 오는 5월 1일 이소자 여사가 자기 사재를 털어 여성국극 대 춘향전을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오후 2시, 6시30분에 공연한다고 한다. 한국판 오페라인 여성국극 부흥의 계기가 되길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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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燮日의 북의 3대 세습으로 본 평양의 봄

이 글은 2011년 3월 23일 오후 6시 프레스센터 18층 오신기자클럽에서 열린 주섭일 박사 출판기념회에서 행한 축사를 겸한 서평이다

한중문화협회 이 영 일 총재

저자 주섭일 박사는 1958년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에 입학한 후 캠퍼스에서 나와 서로 만나 인사를 나눈 이래 어언 54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그간 나와 주 박사는 비록 전공은 달랐지만 동시대인으로 같은 캠퍼스에서, 도서관에서, 학림다방이라는 조그마한 찻집 등에서 노상 만나 차를 마시거나 쌍과부 집에 들려 막걸리를 마시면서 많은 토론과 대화를 하면서 대학시절을 보냈다. 또 나와 주 박사는 4.19 학생혁명대열에 함께 서면서 당시의 시대정신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중요한 가치로 인식하고 동시에 민족사의 분단시대 극복이라는 소명의식을 공유한 동지적(同志的) 유대 속에서 친구로서 살아왔다.

이번에 출판사 사회와 연대가 발간한 주섭일 박사의 북의 “3대세습과 평양의 봄”은 주 박사가 파리 제13대학에서 박사학위로 쓴 논문을 책으로 옮겨 세상에 내놓은 ‘한말변혁운동과 프랑스 혁명“이후 열다섯 번째의 저술이다. 내가 알기로 주 박사에게는 그가 경륜을 편 삶의 현장이 크게 보아 두 곳이었다. 첫째 현장은 그가 가난한 불문학도로서의 대학을 마치고 신문사 사회부기자로서 활동하던 무대였다. 그는 4.19혁명이 5.16군사쿠데타로 뭉개진 이후 4.19혁명이 추구했던 민주주의의 가치를 되찾으려는 대학가의 연면한 데모투쟁을 부지런히 쫓아다니면서 취재했다. 각 경찰서마다에 분산 수용되어 있는 후배들의 이야기를 보도하면서 데모 현장을 떠난 선후배들에게 상황을 알려주고 학생운동으로 옥살이하다가 낭인 되어버린 당시 운동권 동료들을 챙기는데도 부지런했다. 이 당시 그를 이처럼 열심히 뛰게 했던 동력은 민주화였을 것이다.

그러던 주 박사에게 새로운 현장이 펼쳐졌다. 파리특파원으로 발령받은 것이다. 불문학을 전공한 기자들이 누구나 발령받기를 희망했던 바로 그곳에 그는 보내졌다. 파리는 서울과는 다른 무대에다. 공산주의를 비판한 알베르 까뮈와 공산주의의 가치를 지겹게 옹호한 사르트르와의 논쟁이 한창이던 때 그는 파리에 있었다. 국가의 자율성을 진영이익에 우선시키는 그람시와 알튀쎄 간의 토론, 마르쿠제와 포퍼 간의 논쟁도 세기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던 바로 그 시기의 파리를 무대로 그는 취재활동을 하면서 한말 동학운동으로 표현된 민족주의와 프랑스 혁명사상의 비교연구에 천착했다.

그러나 역사의 큰 흐름을 그가 학구에만 전심하게 하지 않았다. 동구라파와 소련의 붕과가 시작되면서 분단독일이 통일을 성취하는 새로운 정세가 펼쳐졌다. 이제는 중앙일보 파리특파원에서 세계일보 파리특파원으로 직장을 바꾸면서 파리에 머물러 동유럽 변화의 현장을 부지런히 쏘다녔다. 이번에 발간된 평양의 봄에 담긴 이야기는 북한 이야기가 아니다. 동구공산권의 변화와 붕괴, 소련제국의 해체와 그 배경, 독일의 통일과정, 특히 헬무트 콜 서독 수상과 겐셔 외상 등이 펼치는 통일외교, 미국 조지 부시 1세 대통령과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 마가렛 대처 영국수상들의 움직임을 리얼하게 취재했다.

그간 많은 학자들이 동구라파와 소련제국의 붕괴과정을 연구, 많은 저서를 내놓았다. 그러나 대부분이 사실의 나열이나 시계열방식에 의한 사건의 정리로 시종되었다. 물론 깊이 있는 연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 박사처럼 동구의 변화와 소련제국의 붕괴, 독일의 통일문제를 자기 조국 대한민국의 통일문제에 연관시키면서 남의 문제 아닌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면서 사실의 전후관계와 거기에 작용한 힘의 맥락을 쫓아서 취재하고 정리한 사람은 내가 아는 한 거의 없다.

그는 독일통일의 막후교섭과정을 잘 파헤치고 있다. 물론 서독의 성공적인 경제발전이 전제되겠지만 그는 독일통일에서 외교가 차지하는 비중을 매우 중시, 평가했다. 분단에 작용한 독일주변 4강의 입장을 조율, 독일통일을 긍정하도록 만들어 내는 외교야말로 통일외교의 중요성을 웅변한다. 물론 역사적인 큰 사건은 누구의 예언이나 예측과 관계없이 도둑처럼 찾아온다. 오늘의 중동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예견한 정치학자나 미래학자거 하나도 없었던 것처럼. 헬무트 콜 독일 수상자신도 자기가 영도하는 독일 통일이 이처럼 뜻밖에 이루어지리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통일의 결실을 맺는 데는 외교의 역할이 매우 컸다. 기회란 머리만 있고 꼬리가 없기 때문에 한번 놓치면 다시 잡기 힘들다고 한다. 그렇게 중요한 독일통일과정의 역사를 당시 주독대사의 리포트보다 더 실감나게, 전후관계의 맥락을 심도 있게 파악, 기술한 책이나 논문, 보고서가 나의 과문 탓도 있겠지만 아직 내 눈에 띄지 않았다. 그가 이처럼 깊이 있는 취재와 자료파일을 만드는데 작용한 힘은 무엇인가. 동서냉전으로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열망하는 그의 절절한 소명의식이 취재와 분석의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동구라파로부터 소련이 겪는 변화를 살피고 뒤이어 중국과 베트남이 변화하는 과정 을 분석한 후 끝으로 오늘의 쿠바의 카스트로가 공산주의로는 안 된다는 고백과 더불어 정권을 새로 계승한 아우의 시장 지향적 경제계획을 승인하는 과정까지를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자료 분석과 전망에서 유추할 때 평양의 봄은 필연적이다. 역사는 1인 독재를 용납하지 않고 있다. 계획경제도 실효(失效)된 지 오래다. 북한정권이 유지되는 것은 중국이 동북아외교에서 아직도 북한의 존재를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역사는 한국이 주도하는 통일의 필연성을 예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 때는 아직 누구도 예언할 수 없다. 도둑처럼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 박사는 김정일의 승계과정은 연착륙이었다고 평가한다. 20년에 걸친 후계수업과 김일성의 돌연한 사망,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주선으로 미‧북 간에 제네바회담이 열려 이 회담의 효력이 김일성 사후에도 이어지기를 바라는 미국 정부의 희망 때문에 김정일의 후계 작업은 오히려 용이했다. 그러나 김정은은 다르다. 후계수업이 없었고 김정일의 병상 통치가 이어지는 가운데 국제환경은 유엔안보리의 두 차례에 걸친 북한제제결의가 발효 중에 있다. 여기에 남쪽의 햇볕정책 마저 그 효력을 잃어 경제난이 가중되고 여기에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까지 겹쳐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평양에서의 세습정권도 조만간 종말을 고할 것이라고 주 박사는 내다보면서 한국주도의 통일로 전개되는 역사의 새로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는 독일통일이 비핵화와 영토회복주의의 포기로 주변국들의 통일지지를 얻었던 교훈을 지적하면서 한국통일도 비핵화 없이는 주변국들의 지지를 얻기 힘들다고 말하고 한반도의 비핵화의 필요성을 진언한다. 여기에 통일외교의 진정한 과업이 있다. 아울러 통일을 위한 국론통일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끝을 맺는다. 정말 일독을 권할만한 좋은 저술이다. 젊은 대학생들이 반드시 읽어야할 독본이다. 특히 P세대들의 사유의 폭을 넓히는데 이 책은 그 유용성이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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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감동적인 이야기여서 여기에 퍼온다)
 
철 지난 유행가를 성가로 만드는 힘

박은주 기획취재부장 zeeny@chosun.com 2011.01.26 조선

슬픈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면 속이 오히려 후련해진다. 이런 걸, 카타르시스(정화·배설)라 한다. 아프리카 수단에서 봉사활동을 하다 지난해 1월 14일 선종한 이태석 신부 이야기는 그런 카타르시스와는 좀 거리가 있다. 책('친구가 되어 주실래요')으로, 극장 다큐멘터리('울지마 톤즈')로, 방송 다큐로 이태석 신부 이야기를 접하고 나면 실컷 울었는데도 마음이 더 무거워진다.

 

신부는 내전으로 엉망이 된 아프리카 수단에서 2001년 12월부터 7년여 동안 한센병과 말라리아 환자를 치료했고,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쳤고, 내일은 오늘과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알게 했다. 사람들은 묻는다. "어찌 그렇게 헌신하는 삶을 살 수 있는가."

 

부산에서 태어난 이 신부는 10남매 중 9번째다. 형님 중 한 분이 신부이고, 누님 한 분도 수녀다. 10남매 중 셋이 종교에 몸을 맡겼다. 그 집안 피가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다. 이 신부의 형님이 신부가 될 때 집안에 소동이 일어났던 것을 봤던 그는 신부 꿈을 가라앉히고 의대에 진학했다. 그렇지만 결국 신부가 됐다. '남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은 원래부터 그럴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면 우리 마음은 훨씬 편해질 것이다. 봉사할 사람은 양심이 아니라 DNA가 결정한다고 믿으면 죄책감을 조금은 면할 수 있다.

 

기록화면으로 남아있는 이태석 신부의 모습은 흔히 상상되는 '성자'의 모습은 아니다. 흑인 아이들의 머리를 꿰매며 그는 말한다. "(피부가) 다 새까마니 실이 안 보이네." 아이가 아프다고 꼼지락거리면 머리도 한 대 때린다. 톡 하고 말이다. 근엄 떠는 성직자가 아니라 가식 없이 친근한 '아저씨' 같은 모습은 보는 이의 양심을 더 세차게 찌른다.

 

사실 이역만리에서 의술로 사람을 살리는 이들은 지금도 수백명도 넘는다. 이태석 신부와 2회 한미자랑스런의사상을 공동수상한 심재두 샬롬클리닉 원장 또한 지난 93년부터 역시 의사인 부인과 알바니아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있다. '유럽의 화약고'라 불리는 발칸반도에 위치한 알바니아에서 그는 결핵을 퇴치하고 의료캠프를 만들어 난민을 보살펴왔다. 뿐만 아니다. 26회 행사를 치른 보령의령봉사상 수상자들, 올해 10회를 맞은 한미참의료인상 수상자들 상당수가 국내외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있다.

 

그러나 특히 이때, 이 땅에서 신부의 모습에 사람들이 그토록 눈물을 흘리는 까닭은 단지 그가 세상을 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의사상을 수상하면서 이 신부는 "백신을 개발한 것도 아니고 고도의 의술로 불치병을 고친 것도 아닌 내세울 것 없는 조그마한 의술로 (아프리카에서) 몇 년 살았을 뿐인데…"라고 말했다. 공(功)을 드러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으며, 가식하지 않는 종교인의 모습. 온갖 다툼이 연일 신문을 장식하는 우리 교회, 성당, 절에서 실망한 종교인들에게 진짜 종교가 이런 것임을 다시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선종 3개월 전, 항암치료로 머리카락이 빠진 이태석 신부는 가발을 쓰고 휴대용 반주기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이 생명 다하도록, 이 생명 다하도록, 뜨거운 마음속, 불꽃을 피우리라, 태워도 태워도, 재가 되지 않는, 진주처럼 영롱한, 사랑을 피우리라." 윤시내의 철 지난 유행가 '열애'가 성가(聖歌)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들린다. 이게 종교의 힘이다. Copy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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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교육으론 중국 못 넘는다
동아일보 김순덕 칼럼
2011-01-24 00:07


김순덕 논설위원
후&추아
최근 미국은 이 두 사람의 중국인으로 떠들썩했다. 후는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고 추아는 예일대 로스쿨 교수인 에이미 추아를 말한다.

후는 마침내 중국이 미국과 대등한 동방대국에 등극했음을 과시해 미국의 혼을 빼놨다. 추아는 ‘왜 중국 어머니들은 우월한가’라는 도발적 제목으로 자신의 자녀교육법을 월스트리트저널에 실어 미국인의 비위를 긁었다.

안 그래도 미국은 자국의 쇠락과 중국의 굴기(굴起)에 뼈가 저리는 처지다. 일본계 3세 미국인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21세기 첫 글로벌 위기에서 미국 민주주의는 무능과 부패를 노출했지만 중국은 독재자본주의(authoritarian capitalism)의 우월성을 입증했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에다 ‘고발’했다. 그의 말이 맞는다면 앞으로의 세계는 암울하다. 우리처럼 작은 나라는 조공이라도 바쳐야 하는 게 아닌지 걱정될 판이다.

후가 오늘의 중국을 상징한다면 추아는 내일의 중국을 상징한다. 추아 같은 엄마들이 길러낸 엘리트가 결국 중국을 이끌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가 쓴 ‘호랑이 엄마의 전투찬가’는 2주 전 출간 즉시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다. ‘자녀 성적이 나의 성공’이라고 믿는 중국 엄마들은 자녀가 성공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선 뭐든 한다는 내용이다. 아이가 뭘 하든 “잘한다”고 치켜세워온 미국 엄마들은 경악했다. 아동학대가 아니냐는 비판부터 중국이 무섭다는 전율까지, 유력 신문은 물론이고 인터넷에서도 난리가 났다.

한국 부모 敎育熱 짓밟는 정부

교육열로 치면 추아 정도의 엄마는 얘깃거리도 안 되는 곳이 우리나라다. 예일대 교수쯤 되는 한국 엄마가 영어로 책을 안 내서 그렇지, 우리 엄마들이 자녀교육에 쏟는 열정과 희생은 중국에 지지 않는다.

이 엄청난 교육에너지가 세계 모든 엄마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중요하다. 자녀사랑이야 공통된 본능이겠지만 교육열은 그렇지 않다. 브라질에선 저소득층 엄마들한테 아이들 학교 보낸다는 조건으로 정부가 현금 지원을 하는데도 학교 안 보내고 돈 벌어오라고 등 떠미는 집이 수두룩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교육열을 ‘망국적 치맛바람’으로 폄훼해온 시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 미국에선 미중 경쟁이 군사력 아닌 교실에서 결판난다며 교육경쟁력 높이기에 박차를 가하는 판국이다. 우리나라가 중국을 뛰어넘을 수 있는 유일한 방도가 바로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열로 글로벌 인재를 키우는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역사적으로도 우리는 문명권 중심부 중국에 맞서는 최상의 방법이 학구열에 있다고 봤다. “근대 평등사회를 이루는 과정에서 중국은 상위신분을 철폐해 하향평준화가 된 반면 우리는 누구나 상위신분이 되는 상향평준화를 택했다”고 조동일 서울대 명예교수는 분석했다. 타고난 처지에 머물지 않고 잘살아 보겠다고 공부에 분투했던 역동성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것이다.

이런 한민족이 두려웠던 일본은 우리의 학구열과 교육열 낮추기를 식민통치의 주요 시책으로 삼았다. 이 식민통치의 유산을 지금 이명박 정부가 이어가고 있다.

출범 때만 해도 ‘글로벌 인재양성’이 핵심이었던 교육정책은 2008년 촛불시위에 놀라 ‘사교육 때려잡기’로 돌변했다. 사교육비에 허리 휘는 서민을 위해서라지만 가계소비지출에서 의식주를 뺀 교육비 지출 비중은 1965년 24.5%에서 2008년 22.2%로 외려 줄었다. 가장 많이 늘어난 건 교통통신비인데도 정부는 교육열이 나라를 망치기나 하는 양 엉뚱한 정책에 매달리고 있다.

더구나 글로벌 위기 이후 선진국의 실력주의(meritocracy)는 더 확대되고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불평등’을 특집으로 다룬 최근호에서 “정부는 교육투자에 힘쓰되, 잘하는 애들을 막지 말고 못하는 애들을 끌어올려 계층이동을 북돋는 게 최선의 정책”이라고 했다. ‘공부 잘 가르치기를 회피하는 교원노조가 빈곤층의 적(敵)’이라는 대목은 한국 상황을 두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자유 없는 중국보다 옥죄어서야

중 국이 잘나가는 듯해도 정치적 사상적 자유가 없는 나라에선 구글 같은 이노베이션이 나올 수 없다고 미국은 자위하고 있다. 그래도 중국엔 국제학교와 사립학교가 많고 하버드대를 비롯한 세계 일류대학 분교가 진출해 글로벌 인재를 키운다. 정치적 사상적 자유가 있다고 자부하는 우리 정부가 중국만도 못하고, 노무현 시대보다 심한 교육관치(官治)를 펴는 것은 후대에 죄를 짓는 일이다.

우리 국민이 10년 후에 먹고살 것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대통령이라면 국제고 외국어고 같은 인재학교와 명문대학의 엘리트 교육을 옥죄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부인하고 싶대도 장차 대한민국을 먹여 살릴 글로벌 인재는 여기서 나온다. 땅덩어리도, 자원도, 이성(理性)도 빈약한 우리나라가 중국에 조공 바치지 않고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정부가 막진 말기 바란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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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아침 죽산 조봉암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김용기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간 김용기 선배는 죽산 선생의 무죄를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해왔다. 아픈 몸을 이끌면서도 역사의 진리를 구명하기 위해 애쓴 김선배를 위로하였다. 이런 선배들의 노력으로 우리나라 대법원이 죽산 조봉암 선생을 법살한 1957년 판결을 뒤엎고 2011년 1월 20일 무죄를 선고한 역사적 결정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형당한지 52년만에 역사는 조봉암선생의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나는 1961년 5.16군사혁명재판의 피고인으로 서대문 교도소에 있던 시절 옥중에 함께 있던 조정래라는 분으로부터  조봉암선생의 사상과 법정투쟁과정의 이야기를 상세히 전해 들었다. 인천에서 창사회라는 혁신단체의 간부로 활약했다는 이유로 함께 갇혔던 그분의 생사는 내가 지금 알 길없으나 그분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조봉암선생의 재판을 쫒아다니면서 보고 느꼈던 일, 죽산의 정치사상을 들었던 것이 내가 죽산선생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당시 서대문 교도소 10舍 上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죽산선생은 내가 갇혔던 바로 옆방에 수감되었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며 그때 감옥에는 수형자들이 창틀로 날아오는 새들엑 밥알들을 나누어 주었다는데 죽산이 주던 밥을 얻어먹던 새들이 죽산이 별세한 후 새들의 울음소리가 죽산, 죽산 하는 것 같아 죽산새라는 이름도 생겼다고 형무관들이 말 해주었다.

나는 혁명재판에서 7년징역형을 받았지만 학생신분에 4.19유공자라고 해서 1년여만에 석방되고 다시 복학한 후 진보당이 무엇인가를 나름대로 연구하고 진보당이 내걸었던 평화통일 방안을 검토해 보았다. 1972년의 7.4남북공동선언보다도 한 걸음 뒤늦은 감이 있는 유엔감시하의 남북평화통일 방안을 그 분이 주장했고 그는 또한 6.26동란이 미친 민족사적 범죄행위를 지적, 단죄한 분이었다.

 결국 내가 연구한 바로는 당시 제3대대통령 선거에서 해공 신익희 선생이 急逝하신 후 야당 후보인 죽산이 호남과 영남에서 다수의 표를 얻은 것을  당시의 여당인 자유당과 자유당과 노선을 같이한 민주당이 그분에게 앞으로 정권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구심에서 그를 사형으로 몰고갔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소신을 밝히지 못한채 공직생활을 해오다가 4.19혁명 5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세미나에서 "419세대가 본 이승만 대통령의 공과 과"라는 주제논문을 발표하게 되었다. (2010년 4월 14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미래정책연구소 세미나 주제논문으로 발표되었고 그후 4월회가 간행한 "4.19혁명과 나"라는 특집에 전재되었음) 이 논문을 통해 나는 이승만 대통령이 범한 세가지 잘못으로 첫째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들에 대한 발포로 젊은이들을 사살한 죄, 둘째 친일분자들에에 대한 미온적 처리  셋째 政敵으로서의 조봉암 선생을 法殺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나의 견해에 대해 일부에서 반론이 있었고 조봉암선생을 잘못인식한데서 나온 잘못된 결론이라는 극우인사들의 기죽은 항변이 있었지만 나는 내 주장을 소신껏 밝혔고 내 글을 보도한 조선일보도 나의 주장을 선명히 보도해주어 조봉암선생의 법살론을 쟁점화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번 대법원 판결로 나의 소신이 법원의 판결을 통해 지지받게 된 것이 내심 기뻤고 역사가 시간의 흐름속에서 진리와 정의를 구현하는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음을 크게 다행으로 여긴다.  그러나 인혁당 사건이나 민청학련사건에 대한 법원의 뒤늦은 무죄판결까지를 내가 옳다고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죽산 조봉암 선생에 대한 판결이 옳다는 것이다.

 나는 2005년 한민족복지재단 공동대표로 북한을 방문했을 때 북측에 요구해서 한중문화협회 창립자의 한 분인 趙素昻 선생의 묘를 참배한 바있다. 이때 나는 형제산구역으로 알려진 이곳의 묘지를 거의 빠짐없이 일행들과 함께 둘러보았는데 사회당으로 5.16 혁명재판에서 사형받은 최백근의 묘는 있었지만  조봉암 선생의 묘는 그곳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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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우리나라 우익인사가운데는 직접 가 보지도 않고 조봉암 선생의 묘지가 그곳에 있다고 허위사실을 적시, 애국자를 간첩으로 만드는 중상을 하고 있다. 그런 일은 삼가해야 할 것이다.

(망우리 묘소의 조봉암선생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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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1월 22일 ) 뉴스에서 소설가 박완서씨의 부음을 들었다. 한번 만나보고 싶은 작가였는데 살다보니 만나는 대신 부음을 듣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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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작품속에 담긴 여러 형태의 문제의식은 분단 한반도를 떠나서는 형상화될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분단시대의 역사를 문학에서 증언한 작가들이 많지만 비교적 공정성을 잃지않은 작가였다.
 
독자를 많이 가진 작가는 자기를 보는 세상의 눈길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의 분위기에 편승, 阿世하기 보다는 그것을 초월한다. 나는 그점에서 박완서를 높게 보아온 터다. 평론가들을 무서워 하지않고 입방아찧는 사람들의 말장난을 의식하지않는 작가야말로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진리의 증인일 것이다.

 나는 오늘 좋은 작가의 부음을 들으면서 그녀의 승리로 평가되어질 삶을 부러워한다.  자기 생각대로 바르게 떳떳하게 살다간 한국의 멋진 여류작가의 삶이 삐딱하게 세상을 보는 사람들에게 좋은 치유제가 되기를 빌어본다.

조선일보가 본 박완서

명쾌하고 거침없는 서술,

세대초월 사랑받은 국민작가2011/1/24

"6·25전쟁 통에 오빠와 삼촌을 잃고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을 때, 그걸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은 언젠가는

저 자들을 악인(惡人)으로 등장시켜 마음껏 징벌하는

소설을 쓰리라는 복수심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20년이 지나도록 증오와 복수심만으로는

소설이 써지지 않았습니다. '나목'으로 나이 마흔에 등단해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지요."

박완서는 1970년 '나목'으로 등단한 이후

여성의 몸에 새겨진 전쟁의 상흔을 쉼 없이 되새김질하면서도

사랑과 용서·화해의 높은 세계를 노래하며

한국 문학의 찬란한 봉우리로 우뚝 섰다.

6·25전쟁 체험과 분단이라는 역사적 소재를 다룬

'엄마의 말뚝' 연작과 '그 남자의 집'은 남성 작가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여성의 체험이라는

새로운 프리즘으로 해석했다는 점에서

큰 문학적 의미를 지닌다.

박완서는 인간의 내면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보는 데 능했으며,

이를 명쾌하고 거침없는 서사로 표현한 탁월한 이야기꾼이었다.

'휘청거리는 오후' '도시의 청년' 등에서 그녀는 1970년대 이후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등장한 중산층의 속물화된 일상과 허위의식, 세속적 탐욕을 신랄한 문체로 꼬집었다.

작가는 노년에 이르러서는 중산층 도시 여성들의 일상도 즐겨

소재로 선택했다. 이 과정에서 중년 여성의 내면에 들어찬 헛된 욕심과 위선을 놀랍도록 정교하게 포착하면서도 그런 속성 또한 인간의 본질적 모습임을 인정함으로써

복잡하고 다면적인 인간 이해의 경지를 보여줬다.

박완서는 문학적 성취와 독자의 사랑을 동시에 거머쥔 행복한 작가였다. 1992년 출간한 장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1930년대 고향 개풍에서의 어린 시절과 1950년대 전쟁으로 황폐해진 서울에서의 20대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전쟁을 기억한 작품으로

100만부가 넘게 팔렸다.

그녀가 77세의 고령에 발표한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도

30만부나 나가며 그녀가 세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국민작가임을 증명했다.

노년의 박완서는 '부숭이의 땅힘'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 등 동화집을 쓰며 세상에 태어난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기쁨을 어린이들에게 전하려 애썼다.

지난해 소설가 정이현씨가 엄마가 되자 젊은 부부와 아기가 그려진 엽서에다 "아가야 예쁘고 건강하게 자라서 엄마 아빠의 기쁨이 되거라.

박완서 할머니가"라고 써서 주었다.

김수환 추기경과 나눈 아름다운 교유를 통해서도

그녀의 인간됨을 엿볼 수 있다.

2009년 김 추기경의 선종을 접한 박완서씨는

"그분은 정의를 위해 박해받고 쫓기는 이들을 말없이

그분의 날개로 덮고 품으셨을 뿐, 결코 선동하거나 부추기지는 않으셨다.

만약 그분까지 투쟁적이었다면 그분의 그늘, 그분의 날개 밑이 그렇게 편했을 리가 없다"고 했다.

김 추기경의 너그러운 인품과 넉넉한 포용의 경지는 곧 그녀가 삶에서 추구했던 덕목이었다.

박완서는 고향 방문을 염원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내 식의 귀향'이란 글에서 그녀는 고향에 가지 못한 원초적 상실감과 지금도 계속되는 분단체제의 모순을 지적하며,

"내가 살아온 세상은 연륜으로도, 머리로도, 사랑으로도, 상식으로도 이해 못할 것 천지였다"고 회고했다.

지난해 펴낸 마지막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그토록 이해 못할 고통을 모두 이겨내고 문학의 큰나무로 우뚝 선 삶의 보람을 담고 있다.

"또 책을 낼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내 자식들과 손자들에게도 뽐내고 싶다. 그 애들도 나를 자랑스러워했으면 참 좋겠다."

박완서가 남긴 것 2011.01.24. 조선일보 <만물상>

"갈색 털이 무성한 손이 대뜸 내 코 앞까지 뻗어와 우뚝 멈추었다.

그의 손아귀에 펴든 패스포트 속에서 금발의 아가씨가 살짝 웃고 있었다."

박완서가 마흔 살에 쓴 데뷔작 '나목(裸木)'의 첫 구절이다.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 미군 PX에 근무하는 소녀가 달러 한 장을

벌기 위해 미군 병사를 꼬여 그의 애인 초상화를 주문받으려는 장면이다.

▶소동파는 "글 중에 좋은 글은 쓰지 않을 수 없어 쓴 글"이라고 했다.

'나목'의 소녀는 대학 입학 한 달 만에 일어난 전쟁으로

오빠를 잃고 소녀가장으로 삶의 최전선에 내몰려야 했던

박완서 자신이다.

그는 결혼해 남들 부러워하는 가정을 꾸린 20년 후에도

전쟁이 몰고 온 고달픔과 억울함, 절망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걸 누가 들어주건 말건 외치지 않으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

절박함, 그게 박완서 문학의 시작이었다.

▶전쟁은 박완서에게서 고향인 개성 박적골에서 키웠던

어린 시절 꿈과 청춘을 빼앗아갔다. 그는 이런 아픔을 소설에 숨김없이 드러냄으로써 자신이 구원받고 아픔 속에 세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었다.

▶동인문학상 심사 자리에서는 아무리 가까운 작가 작품이라도

완성도가 떨어지면 앞장서 칼날 같은 비평을 하던 박완서였다.

그런 한편 여자 후배가 임신을 하면 "순산하려면 잘 먹어야 한다"며

갈비와 냉면을 사주고 소주병 가득 참기름을 담아주기도 했다.

설날 출판사 편집자들이 세배를 가면 직급에 따라

1만원 2만원씩 세뱃돈을 주었다.

"이념이라면 넌더리가 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80년대 자유실천문인협의회(현 작가회의)가 어려울 때는 남몰래 수백만원씩 도왔다.

▶작년 8월 나온 그의 생애 마지막 책 제목은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였다.

그 직전 나온 마지막 동화책 제목은'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이다.

이런 아쉬움도 있고 저런 어려움도 있지만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하다는 게 그의 노년의 심경이었을까.

용인 천주교 공원묘지에 있는 앞서 간 그의 남편과

아들 묘비에는 박완서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생년월일만 있고 몰년(沒年)은 비어 있던

자리가 이제 채워지게 됐다.

박수근의 그림에 나오는 나목을 보고 박완서가 한 말이

떠오른다. "조금만 더 견디렴. 곧 봄이 오리니.

꼭 이렇게 말하며 서 있는 것 같다."

<김태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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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江 鄭哲鎬 선생의 84회 생신잔치를 다녀와서

청강 정철호 선생은 우리 현대 국악계에서 생존하는 거목이다. 그는 名唱에 名鼓手, 또 판소리 唱劇을 창작하는 達人이기도 하다. 12월 23일은 청강 정철호 선생의 84세 생신날이며 언론인 김동성 씨가 청강의 삶과 예술인생을 말하는 評傳의 출판기념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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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光州를 무대로 판소리 활동을 펼치시는 정철호 선생을 수년전 운산동에 있던 한중문화협회 내 사무실을 방문한 선생과 인사를 나누었을 뿐 가깝게 대할 기회가 없었는데 마침 가까운 친구가 정 선생의 판소리 공연을 한번 듣자고 해서 따라왔던 것이 뜻밖에 중요한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 자리에 참석해서 읽은 평전에서 나는 청강 선생의 출생과 성장과정을 瞥見하면서 호남 명창이며 호남국악인의 멘토가 된 명창 임방울이후 가장 뛰어난 국악계의 예인이 바로 이 분임을 알게 되었다.

 나도 南道 출생이기 때문에 국악계의 두 분 거목으로 임방울 선생과 정철호 선생이 고향분이라는 사실에서 항상 긍지를 느껴오던 터에 뜻밖에 청강 선생의 출판기념식과 거기에 뒤이은 문하생들과 선생 자신의 연주를 들을 기회를 갖게 되었다. 나역시 2년 전 고향사람들이 즐겨 듣고 부르는 호남가를 배워 볼 양으로 친지의 소개를 받아 무형문화재 5호 정광수 선생에게 판소리를 이수한 신영자 선생의 국악전수소를 출입하면서 1년1개월가량 판소리 단가 몇 곡과 북치는 법을 배운 바 있다. 이 짧은 판소리에의 인연이 있었기에 이날 청강 선생의 삶과 예술을 말하는 행사에 얼굴을 당당히 내밀게 된 것 같다. 이 자리에 아는 분들은 별로 없었으나 김종규 선생이나 김동성 씨가 나를 기억하고 여러분들에게 특별히 내가 국회문공위원장을 지낸 분으로 소개까지 해주어서 참가의 보람을 느꼈다.

국악계에는 全敎組가 없는 모양이다. 제자들이 선생을 위하고 받드는 모습에서 사도(師道)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었다. 師父를 노동자로 알지 않고 자기 인생의 멘토로 대접하면서 그분의 삶과 인생을 기리는 태도가 이 자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의 표정에 역력했기 때문이다. 제자는 문하생이고 문하생은 자기에게 예술을 익히게 한 師父를 끔찍이 모신다.

청강 정철호 선생은 전남 해남의 극빈가정에서 태어났고 아버지에게 판소리의 기초훈련을 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가정의 안온함이나 사랑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인생을 살았다. 증조부는 神廳 계원으로 굿 음악, 춤 등을 가르쳤고 조부도 피리, 젓대, 징 등의 명인이었으며 부친도 김달천 문하에서 소리를 베운 소리꾼이었다. 이점에서 정철호 선생은 가문의 DNA속에 판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고 볼 수 있지만 어정굿판을 다니며 삶을 이어가는 생활이 극빈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12세의 어린 나이에 임방울 선생을 사부로 모시게 되면서부터 그의 인생은 바뀌었다. 임방울 선생은 앞으로 대성할 기운을 보인 청강의 성량을 높이 사주었고 여기에 청강이 보인 열심과 성실, 창의력이 가미됨으로 해서 그의 국악인생은 해가 갈수록 빛나기 시작했다. 그는 적벽가의 명창이었을 뿐만 아니라 남도 판소리의 주요악기인 북치는 법(鼓法)의 대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청강의 예술세계는 공연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그는 국악으로서 판소리의 창극을 창작하는데도 一家를 이루었다. 聖者 이차돈을 창극으로 제작하였고 안중근 선생, 유관순 여사를 소재로 애국 열사들의 생애를 판소리로 극화했는가 하면 해상왕 장보고를 창무악으로 만들어 공연하기도 했다. 청강과 예술인생을 함께 해온 명창 송순섭은 “성자 이차돈”을 부산에서 공연했을 때 수많은 관객이 몰려들어 수개월간 공연을 한일이 있다고 이 자리에서 회고했다.

 나는 청강 선생이 국악 중 판소리를 현대적 창극으로 발전시킨 공헌과 업적은 마땅히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특히 애국심을 고취하는데 판소리를 활용한 점도 후세들이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더욱 이날 행사에서 돋보인 것은 84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목소리가 다시 열려 적벽가의 한 대목을 가사 하나 틀리지 않고 비교적 맑고 우렁찬 목소리로 연주하고 또 함께 활동했던 송순섭이 수궁가를 부를 때는 고수를 맡아 그의 鼓法 大家로서 무형문화재가 된 진면목을 보여준 것이다. 문하생은 물론이거니와 청중들 모두의 감동을 자아냈다.

앞으로 그가 그린 국악으로서의 판소리 창극이 더욱 발전하여 한국 예술의 중심축으로 부상되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나는 새 방향을 모색하는 한류가 한국국악의 세계화라는 차원에서 발전의 담론이 만들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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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2일의 파인비치 골프여행

나는 2010년 11월 하순의 쌀쌀한 날씨를 뒤로 하고 새벽6시 영어로 C씨 성을 가진 세 명의 친지(蔡씨, 秋씨, 崔씨)들과 자동차 한 대로 한반도 최남단에 새로 개장된 골프장을 향해 여행길을 떠났다. 목적지는 해남군 화원반도에 해안을 끼고 해송을 원형대로 보존하면서 새롭게 조성한 파인비치 골프코스이다. 내비게이션을 점검해보니 한반도의 중부에서 서남단을 가로지르는 서해안고속도로로 접어드는 데는 여러 갈래 길이 있지만 가장 빠른 길은 천안-논산 간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서산으로 빠지는 코스였다. 이 길을 타면 2시간 정도 걸려 군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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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에 비친 늦가을의 들녘은 추수뒤끝이라 그런지 벼 잘린 그루터기들과 볏 집을 말아놓은 흰색의 두루마리들이 군대 군대 시야에 들어왔다. 이른 아침시간에는 안개 같은 스모그 때문에 경관의 모습이 희미했지만 태양이 떠오르면서부터 농촌풍경은 빈 들판이긴 하지만 보다 여유롭고 한가해 보였다. 나는 혼자서 밀레의 만종을 머리에 그렸다. 밀레가 살던 시절의 프랑스 농촌과 같은 가난은 지금의 한국에는 없겠지만 그 대신 그림에서 보는 것 같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기도도 없어지지 않았을까.

오늘의 한국 농촌은 젊은 사람들이 모두 도시로 떠나버렸고 60세가 가장 젊은 층에 속한다고 한다. 나는 어린 시절을 남도 시골마을에서 보냈다. 농사철에 어머니가 다른 아낙들과 더불어 간식(그곳에서는 이를 술참이라고 한다)거리로 무 섞은 마른 갈치조림과 나무새, 빛 좋은 김치를 장만해서 막걸리 통을 머리에 이고 가는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이제 그런 정경은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 속에만 아련히 남아있을 뿐이다. 우리 일행은 남 부여(夫餘) 휴게실에 잠시 머물면서 육개장과 국수로 아침을 때우고 습관적으로 커피를 마신 후 다시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교대하면서 운전대를 잡기 때문에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중은 네 사람의 유우모어 경쟁 때문에 시종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어느새 차는 목포 톨게이트를 지나서 파인비치골프 코스로 접어들고 있었다. 서울은 영하의 날씨고 강원도에서는 진눈깨비가 퍼부어 도로통행이 어렵다고 뉴스가 나오지만 이곳 해남은 뉴스와 아랑곳없이 초가을의 온화한 날씨였다. 지구 온난화 때문인지 눈을 보지 않고 겨울을 지나는 해가 많은 지역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만 자라던 귤이 이곳에서도 잘 자라면서 도처에 아열대 기후 권에서나 보이던 파초 모양의 코코넛 트리들이 가로의 이곳저곳에 삐쭉삐쭉 솟아 있고 귤들이 대롱대롱 달려있는 나무들이 보일 때마다 새삼 기후변화의 신비를 느꼈다. 반도남단에 자리한 해남군도 이제는 제주도 기후 권으로 들어간 것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이다. 이것이 축복인가 아니면 어떤 다가올 재앙의 신호일까. 아직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나로서는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느껴졌다.

파인비치 골프장은 해남군 화원반도의 해변을 27홀의 골프장으로 개발하면서 바다 사이를 낀 계곡과 숲과 해송의 원형을 보존한 점이 훌륭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몬트레이 근처의 Pebble Beach가 태평양을 바라보는 낭떠러지를 골프장의 풍경 속에 담았다면 파인비치는 잔잔한 남해바다와 나지막한 섬들을 전망 속에 담아 스릴보다는 안온한 느낌에 아기자기한 맛을 더해준다.

나는 1986년 방미 시 샌프란시스코 총영사로 있던 M선배 덕분에 1박 2일의 Pebble Beach 골프코스를 라운딩 할 수 있었다. 서부 태평양의 지평선을 바라보면서, 특히 석양 녘 주황빛갈로 물든 해안코스에서 골프를 즐기는 것은 잊을 수없는 추억이다. 경치에 취해 호기를 보이다가 백구방생(白球放生)을 여러 차례 하는 바람에 스코어는 평소 기록을 훨씬 상회했지만 그때 내심에 느꼈던 유쾌 지수(Comfortable Index)는 생각할 때마다 아직도 전신을 근지럽게 한다.

파인비치도 설계나 경관에서 페블비치에 못지않다. .맛이 다들 뿐이다. 우리나라 건축예술로 비유한다면 페블비치가 석가탑이라면 파인비치는 다보탑이라고나 할까. 11월 하순의 날씨에도 파릇파릇한 녹색의 양 잔디를 밟으면서 라운딩을 하는 것은 서울 근교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운치였다. 발걸음을 옮겨 놓을 때마다 봄의 카펫위를 걷는 기분이 느껴쪘고 맑은 공기로 하여 감기기운으로 가끔 흘러나오던 콧물도 딱 멈춰버렸다. 파인 코스에서 비치코스로 이동하는 소로주변에는 봄의 들녘을 누비는 민들레꽃을 꼭 닮은 철머우 꽃들이 곱게 피어있었다. 나는 철머우 라는 꽃의 이름을 이곳에서 캐디아가씨에게 처음 들었다. 늦가을에 피는 민들레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았다.

첫날은 파인코스와 비치코스를 돌았고 다음 날 아침에는 비치코스에서 스타트해서 오시아노로 끝났다. 27홀의 홀마다 특색이 있고 또 풍향이 다르기 때문에 저공비행하는 클럽을 잡는 것이 늦가을 라운딩에는 유리할 것 같았다. 동행한 친지들은 모두 골프에서는 나보다 상수(上手)들이지만 나 때문에 스코어 카드에는 신경을 끄고 매 홀을 즐기면서 라운딩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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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고산의 생가와 500년된 은행나무)
첫날 저녁식사를 위해 해남읍내로 이동하는 도중 우리는 이곳이 고향인 C형의 안내로 조선 광해조 시대의 문인 고산(孤山) 윤선도의 유적지 녹우단에 들렸다. 해질 무렵이어서 자세히 관광할 시간은 없었지만 조선조에서 벼슬길에 올랐다가 낙향을 거듭하던 절충파 선비의 고향이 그를 잊지 않고 그의 생가와 오우가(五友歌)로 유명한 신중신곡의 발상지를 잘 보존하는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관광자료에는 고산문학의 숨결이 느껴진다고 표현하고 있다.

내가 오우가를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서 배울 때만해도 세계문학에 대한 안식이 전무하여 고산 문학의 문학사적 위치를 촌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대학생 시절 학생운동으로 옥중에 갇혔을 때 읽은 미국의 초월주의 작가 Henry D. Thoreau(1817-62)의 Walden Pond의 분위기와 기맥이 통하는 문인 같았다. 살았던 시기도 어쩌면 비슷했다. 머릿속에서 오래 전에 사라졌던 오우가를 다시 떠올려 암송해 보는 것도 내심의 축제 아닐까.

우리가 당도한 식당은 “땅 끝 기와집”으로 불리는 해남에서 가장 이름난 한식집이다. 과거에 명성을 날리던 천일식당보다 요즈음에는 더 인기가 높다고 한다. 그러나 음식들은 요즈음 서울에도 전통음식점이 많아졌기 때문인지 내세울만한 특 미는 없었다. 현지에서 생산된 막걸리와 약주를 마셨으나 반평생을 서울의 술 문화에 젖은 사람에게는 신통찮았다. 이제 한국음식이 지방마다에서 가졌던 특 미는 간혹 먹게 되는 일품요리에서는 느낄 수 있을지 몰라도 전통 한식은 거의 보편화되어 서울에서도 얼마든지 맛볼 수 있었다.
 
 해남군청에서 근무하는 C친지의 지인이 식사에 동참했다가 해남 쌀의 밥맛이 좋다고 칭찬한 바람에 5Kg 들이 쌀 상자를 하나씩 선물로 받게 되었다. 이것이 참가상이 된 셈이다. 군수는 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다가 부군수가 수뢰로 구속되는 불상사가 발생, 급히 광주로 가는 바람에 자리를 함께 하지 못했다.

이튿날 8시 30분에 비치코스에서 스타트해서 오시아노 코스로 라운딩 했음은 앞에서 말 한대로다. 오시아노 코스는 바람이 덜 타는 곳이어서 골프의 스코어는 어제보다 더 향상 되었다. 바다를 향해 내리 쏘는 쇼트홀과 바다와 바다사이를 230야드 가량 벌여놓은 곳을 넘어야 하는 티샷 코스는 나에게는 다소 도발적이었지만 운전시험에 합격하듯 나는 도강에 겨우 성공했다. 금년 들어 내 골프의 비거리가 다소 개선된 것 같아 즐거웠다.

골프를 끝내기가 무섭게 목욕을 간단히 마치고  영암군 학산면 독천리에 있는 그린식당을 향해 차를 달렸다. 모처럼 낙지 요리로 오찬을 즐기기 위해서다. 막걸리에 낙지 볶음과 초무침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서울에도 낙지요리집이 많지만 갯벌낙지는 드물고 중국에서 수입한 낙지로 요리하기 때문에 낙지 맛도 다르고 질기다. 그러나 이곳만은 갯벌낙지를 그대로 요리하기 때문에 전통 맛을 잘 살려냈다. 나는 종전대로 낙지 대가리를 잘 먹었지만 일행 중에는 서울특별시장이 암을 유발할 요소가 낙지머리 속에 들어있다는 경고를 의식해서인지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러나 식약청은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수정발표해서 큰 논란은 사라졌지만 유독성 발언의 여파는 이 지역으로 몰려들던 낙지 마니아들의 수를 많이 줄였다. 2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어서 오찬 손님들이 다 떠난 뒤겠지만 과거에 비해 그린식당이 한가해진 것은 사실이다 주인도 이 사실을 시인했다. 나는 한평생 낙지머리를 특미로 알고 많이 먹은 사람인데 이제 서울시장 말 한마디 듣고 먹지 않는다는 것이 꼴을 더 우습게 만들 것 같았다. 나는 한평생 먹어 생긴 면역력이 있음을 강조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삶은 낙지 머리를 우둑 우둑 씹어 삼켰다.

우리 일행은 오찬을 마친 후 목포 시내를 관통, 서해안 고속도로를 향해 달렸다. 오던 길을 다시 달리는 것이다. 논산을 지나면서부터 스마트 폰에 부착된 내비게이션으로 붐비는 길을 피해가는 서울 진입작전을 세워 저녁 8시 서울에 당도했다. 주말부부들이 서울로 몰려드는 고속도로 길은 이미 길고 넓은 주차장으로 변했지만 오산으로 진입해서 서울-용인 간 고속도로 코스를 잡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오늘 우리 일행은 남들보다 쉽게 귀경하는데 성공했지만 앞으로 스마트 폰이 더 대중화하면 서울 용인고속도로도 또다시 붐비는 주차장 형 도로로 변하는 것은 숙명일 것이다. 1박2일의 파인비치 골프여행은 두고두고 추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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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악가 조상현 장로님을 영별하면서

 
                                                        이 영 일  (전 국회문교공보위원장)

 
우리들이 사랑하는 조상현 장로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셨다. 오랜 투병 끝에 지난 10월 28일 병고와 근심이 없는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나는 중국출장에서 돌아온 다음날인 오늘 아침(11월1일) 조상현 장로님을 영별하는 발인예배에 참석했다. 그분의 삶의 족적을 살피고 회상하면서 그분의 명복을 비는 조용하고 엄숙한 영별식이 박종화 목사님의 사회와 말씀으로 진행되었다. 고인이 남긴 노래 ‘국화꽃 옆에서’(서정주 시)를 녹음으로 들으면서 그 분의 마음속에 항상 간직되었던 그리움의 실체를 접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분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필연의 운명이 돌연 싫어진다.

 
나는 1958년부터 경동교회에 출석하여 오늘까지 섬기고 있다. 돗수 높은 안경 너머로 항상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성가대들 지휘하던 조 장로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러나 나는 장로님과 교회생활에서는 깊은 관계를 맺지 못했다. 나는 12대 국회에서 국회의원으로 그분을 가까이에서 만나게 되었고 또 마침 국회문교공보위원장을 맡으면서 함께 국정을 논의하던 시절에 자주 접할 수 있었다.

 
당시는 국회가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정쟁의 한 가운데서 매일 같이 여야 간에 갈등과 격돌이 끊이지 않는 시절이었다. 노태우 대표의 6.29선언이 발표되기 전후의 시기였기 때문에 국정은 끝없이 표류했고 학원안정법, 언론기본법, 방송법 등의 처리문제로 여야가 파국을 향해 달리는 분위기였다. 직업정치인이 아니고 예술계를 대표해서 직능대표로 국회에 영입된 점잖은 조상현 의원 같은 분에게는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정치 상황이었다.

 
나는 상임위원장으로서 법안의 강행처리도 불사해야 하는 어려운 처지에 있었고 이때마다 조상현의원님과 상황을 놓고 대화하면서 조언을 구했다. 모든 문제를 어렵게 풀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개탄하면서도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게 여당의 입장에서 상황을 당당히 처리하자고 격려의 말씀을 주셨다. 다행히 6.29선언으로 상임위원회에서의 강경대치는 끝났고 그 후는 민주화의 도도한 물결 속에서 교육 언론 예술 문화 분야에서도 민주화를 위한 개혁입법이 다수 처리되었다.

 
조 장로님은 그에게 주워진 직능대표로서의 역할을 의회토론과정에서도 잘 수행하셨지만 당대표를 만나거나 당 정책팀과의 대화와 설득을 통해서도 예술 문화사업의 발전과 진흥을 위해 많은 의견을 제시하고 조언하는데 앞장섰다. 당시 군 출신들이 결정의 주요 부서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들이 문외한인 분야인 문화예술, 특히 음악분야에 관해서는 조 장로님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였다. 연설하지 않고 조용히 설득하고 젊은 친구들의 오만한 자세를 잘 감내하면서 성실하게 일을 추진하는 자세는 누구에게나 귀감이 될 것이다.

 
오늘 발인예배에서 작곡가 김형주 선생님은 조사에서 조상현 장로님의 수고와 기획으로 애국가의 작곡자인 안익태 선생의 유해를 스페인 땅에서 국립묘지로 이전했던 일, 광복절 기념음악제를 대한민국음악제로 발전시켜 음악을 통한 국민통합과 국위선양에 기여한 일 들을 회상하면서 그 분이야말로 우리 음악계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분이었다고 울먹였다. 특히 이날 김형주 선생님의 조사가운데 조 장로님이 시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에서 80대의 노구를 이끌고 ‘겨울 나그네’ 전곡을 암송하는 독창회를 가짐으로써 성악인으로서 자기의 아이덴티티를 끝까지 살리셨다는 말씀은 참가자 모두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다.

 
이제 조 장로님은 우리 곁을 떠나셨다. 그러나 그분이 가신 곳은 우리가 믿는 천국이다. 육체적인 고통이나 병마가 없고 인격적인 아픔이나 갈등이 없는 하늘나라로 부름을 받으신 것이다. 그 분의 명복을 빌면서 그의 부인과 자녀들에게 하늘로부터의 위로와 은총이 넘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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