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曺祥鉉 장로님 1주기 추모음악제에서
내가 조상현 장로님의 조사를 쓴지가 벌써 1년이 지났다. 작년 10월 29일 우리 곁을 떠난 그 분을 추모하는 음악제가 경동교회 본당에서 예배와 함께 열렸다. 이 자리에는 유족으로 미망인 김순옥 권사와 조영방, 조영미 두 딸, 그리고 그 분의 음악계의 옛 동료와 제자, 경동교회의 교우들이 참석했다.
나는 고인의 경력가운데 제12대 국회의원의 경력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분의 삶의 전부가 음악이었기 때문에 불행히도 그를 추모할 정치인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함께 의정생활을 했던 사람으로서 경동교회를 1958년부터 출석, 그 분을 기억하고 그 분을 존경했기 때문에 비음악인이지만 그의 정치경력의 증인자격에서 이 자리에 꼭 참석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이 자리에 나왔다.
박종화 목사님이 추모예배를 집례했다. 나는 예배시간에 평소 조 장로님이 즐겨 불렀다는 찬송 146장 (저 멀리 푸른 언덕에)과 183장(빈들에 마른 풀같이)을 열창함으로써 내 나름의 추모의 념을 표현했다. 박재윤 장로님의 추모기도는 기도문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시편(詩篇)처럼 듣는 이들의 마음속에 깊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박수길 장로님의 사회로 시작된 추모음악제는 내가 본 추모음악제중 가장 짜임새 있는 음악제였다. 이 자리에 나온 제자들과 친지 음악인들은 하나같이 한국 음악계의 중진들로 음악교육에 헌신해온 조 장로님의 생애의 업적을 참으로 기리는 분위기였다. 독창, 2중창, 4중창, 합창은 모두 수준이 국내최상급이었고 생전에 조 장로님이 애창했던 곡들을 불렀다.
나에게 이날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음악보다는 조 장로님의 시와 수필 낭독이었다. 음악들은 앞으로 다른 곳에서도 들을 수 있겠지만 이 날 낭독된 시와 수필 한 토막은 이 순간 이 자리에서만 들을 수 있는 명품이었다.
조 장로님의 시 “귀한 이 순간에....”의 한 토막, “멀고도 험한 길 용케 이까지 왔습니다. 사랑하는 이들 다 헤어지고, 정든 땅도 아껴주던 사람도 보이잖는데 어느새 용케 이까지 왔습니다“를 들을 때 북에 고향을 두고 온 사람의 아픔을 절절하게 말해주었다.
또 수필 ”여성의 힘은 하나님 다음 간다“에서는 가사(家事)의 모든 중요한 부분을 아내에게만 맡겨 놓고 살아오면서 아내의 아픔과 괴로움을 진심으로 몰라주었던 나를 새삼 반성시키는 각성제였다. 조 장로님이 자기 아내가 막내 딸 영미에게 꼭 결혼을 해야만 하는가를 물으면서 자기가 다시 태어난다면 결혼을 하지 않고 어두운 곳에 사는 이웃을 돌보면서 한 평생을 지내고 싶다고 토로하는 소리를 들을 때 정말 충격이었다고 수필은 고백하고 있다.
어려운 살림 속에서 성악가 남편을 돌보아야 하고 세 자녀를 유학시켜 조 트리오라는 한국음악계의 지도자들을 길러내느라고 자기의 모든 아이덴티티를 버렸던 한국판 현모양처의 삶을 훌륭히 간증했다. 내 아내에 대한 사무치는 반성을 촉구하는 메시지였다.
조영방, 조영미 자매가 피아노와 비이올린 2중주로 펼친 Grieg 곡은 오늘만의 무료인 수준높은 연주로 조상현장로 내외분의 자녀교육의 열정이 거둔 큰 열매를 추모객들에게 보여주었다.
이 날 행사의 마지막을 장식한 경동교회 2부성가대의 찬양은 지휘자 최승한 선생의 집념과 강도 높은 연습 탓인지 놀랄 만큼 훌륭한 연주였다. 추모음악제에서 나오기 힘든 앵콜 송이 나왔다.
피곤하고 귀찮아서 올까 말까를 망설이다가 참석했는데 너무 잘한 선택이었다. 우리 교회 교우들이 좀 더 많이 참석했더라면 자리가 더욱 빛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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