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뮤얼 헌팅턴 교수의 추억
한중문화협회 총재 이영일
헌팅턴 교수와 필자
나이가 들어가면서부터 해마다 연말이 되면 지난날의 자료를 정리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금년에도 수많은 사진 자료를 정리했다. 후대들에게 특히 남겨줄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 아닌 내 자신이 직접 미리 챙겨 폐기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특히 내 연배(年輩)들처럼 20세기에서 21세기에 걸쳐 생을 이어가는 사람에게는, 특히 정치생활을 한 사람들에게는 한 세기가 지난 사진들과 자료들이 너무 지천이다. 시효지난 사진이나 자료를 틈나는 대로 살피면서 과감히 서둘러 폐기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자료를 정리하던 중 내가 거의 잊고 있었던 귀한 사진 한 장을 찾았다. 하버드 대학의 석학 고 새뮤얼 헌팅턴 교수를 그의 연구실에서 만나 찍은 사진이었다.
1986년 5월 나는 미 국무성 초청으로 1개월간 미국의 여러 곳을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나를 초청한 미국국무성에서는 미국 체류 중 꼭 만나고 싶은 인물, 특별히 관심 갖는 미국의 제도, 미국의 명승지중 방문하고 싶은 지역을 미리 말해달라고 했다. 이 때 내가 면담하겠다고 신청한 사람이 바로 새뮤얼 헌팅턴 교수였다. 여기에 곁들여 또 각 지역마다 실시형태가 다른 미국의 지방자치제도를 시찰하겠다고 했다. 특히 지방자치문제는 방미직전 전두환 대통령이 나에게 직접 지시한 사항이었다.
나는 그 당시까지만 해도 헌팅턴 교수가 어떤 분인지를 잘 몰랐지만 그가 저술한 정치발전론을 원서도 아닌 번역본(배성동, 민준기 공역)으로 읽으면서 그의 논리와 식견에 흥미를 가졌다. 그의 정치발전론 가운데 한 대목은 지금도 나에게 좋은 참고로 기억에 남아있는데 욕망곡선과 성취곡선간의 간격에 관한 그의 견해였다. 그에 의하면 개발도상국들은 빠른 속도로 경제발전을 이루지만 경제발전이 된다고 해서 국민들의 증가하는 욕구를 충족시키기는 힘들다면서 좌표 상 욕망곡선이 올라간 만큼 국민들의 성취곡선이 오르지 않고 그 간격은 날로 넓어진다는 것이다. 이 간격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국민들의 불만은 고조되고 사회적 불안정이 확산되어 정권은 위기를 맞는다는 것이다.
나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총재비서실장으로 재임 중이었는데 1985년 중반의 5공 정권이 맞고 있던 위기가 바로 헌팅턴 교수가 말하는 위기와 유사하다고 생각하고 그 처방을 물어볼 양으로 국무성에 그와의 면담을 신청했던 것이다. 날자는 5월13일로 잡혔다. 헌팅턴 교수와의 약속시간은 10시 30분부터 1시간이었기 때문에 보스턴의 파크 플라자 호텔에서 조반을 서둘러 마치고 통역으로 수행한 신린섭(국무성 통역원)씨와 하버드타운으로 들어갔다.
헌팅턴 교수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는 미 국무성에서 연구비를 받고 있기 때문에 국무성초청으로 미국을 방문, 자기와의 면담을 청한 분에게는 인터뷰 비용을 청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11시 30분까지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대학교수와 만나 대화를 하는데 인터뷰 비용을 낸다는 말을 나는 이 날 처음 들었다. 미국에서는 저명교수를 만나 인터뷰로 그의 시간을 할애하고 식견을 들을 때에는 수준 별로 차이는 있지만 소정의 비용을 낸다는 것이다. 상당히 합리적인 이야기로 들렸다. 신린섭씨는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개 1시간당 5백 달러 정도 지불하는데 나는 국무성 초청케이스라 인터뷰비용을 면제받았다고 설명하고 헨리 키신저 같은 분을 만나려면 인터뷰 비용을 좀 더 많이 청구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번뜩 들어 한국식의 인사치레는 모두 생략하고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내가 한국의 재선 국회의원으로서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일하고 있다는 점과 전두환 대통령을 당(黨)쪽에서 가까이 보필하는 총재비서실장임을 소개한 후 현재 한국은 헌팅턴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욕망곡선과 성취곡선 간에 간격이 벌어짐으로 인해서 정치적 불안과 사회적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이런 견지에서 볼 때 현재 한국이 안고 있는 위기를 나는 헌팅턴 교수가 말한 바와 같은 위기로 보고 이를 헌팅턴위기(Huntingtonian Crisis)라고 부르고 싶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위기에 대응할 방도를 이야기 듣고 싶다고 곁들였다.
나의 말을 들은 헌팅턴 교수는 태도가 일순간 밝아지면서 처음 인사를 나누던 순간에 내가 느꼈던 “용건만 말하고 나가라”는 식의 업무적(business-like)표정이 누그러졌다. 그는 나의 이야기와 분석에 큰 흥미를 보이면서 자기의 소견을 이야기 했다. 자기의 이론은 한국에 특정된 견해는 아니며 개발도상국들의 일반적 현상을 분석하면서 도출된 추세라고 전제한 다음 위기에 대한 대응방안을 들으려면 자기에게 새로운 연구비를 주어야 할 것이라고 농담조로 말을 이었다. 그는 현 시점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욕망곡선과 성취곡선간의 큰 Gap으로 정치체가 겪는 리스크나 부담을 극복하기보다는 경감시키는 방도를 마련하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고 말하고 그 방도로 자기가 생각하는 것은 권력의 집중이 아닌 권력의 분산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의 취지를 촌탁하면 대통령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어 있으면 국민들의 욕구나 불만이 대통령 한사람에게로 집중되기 때문에 대통령은 항상 위기의 한 복판에 서 있게 된다면서 이 부담과 압력을 경감시키려면 통치(Governance)에서 지방자치 실시와 같은 권한의 분산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대통령에게 집중된 힘의 축(Axis)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으로 다원화시키면 시킬수록 정권을 향한 국민들의 불만도 분산되고 대통령이 받는 압력도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견해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고 그의 답변을 들었는데 시간은 약속된 한 시간을 넘겼고 오히려 그의 부담으로 구내식당에서 오찬까지 대접받았다. 나는 이 자리에서 그에게 한국방문을 제안했고 그도 일정을 보아가면서 추후 연락하기로 했다. 나는 귀국 후 당시 최창윤 정무비서관을 통해 대통령에게 헌팅턴과의 대화내용을 자세히 기록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대통령은 곧장 나를 청와대로 불러 보고서를 잘 읽었다면서 나의 방미보고를 평가한 후 헌팅턴 교수를 한국에 조속히 초청하라고 했다. 나는 즉시 초청 서한을 보냈는데 헌팅턴 교수는 미리 잡혀있는 일정 때문에 1987년 이후에나 한국방문이 가능하다고 회신했다. 결국 그의 초청은 무산되었지만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아직도 나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 후 나는 그의 유명한 저서 ‘문명의 충돌’을 탐독했다. 지금부터 3년 전인 2008년 12월 그는 타계했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업적은 고인이 된 후에도 세계정치학계에 큰 족적을 남기고 있다. 그는 문명의 충돌에서 21세기에 미국이 당면할 도전으로서의 이슬람 권 문제나 앞으로 중국이 미국과 대적할 강자임을 예측하고 대비할 것을 주장한 점은 국제정치학자로서의 그의 선견을 세계정치학계가 평가하는 이유인 것 같다. 학자들은 누구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나는 “헌팅턴 위기”라는 표현하나로 그의 환심을 사서 한 시간 넘게 대화를 나누고 점심대접까지 받았다.
당시 나의 통역을 맡았던 신린섭 씨는 Problems of Communism에 좋은 글을 많이 발표했던 공산권연구 전문가였는데 지금은 연락이 끊겨 생사를 알 길 없다. 세월과 함께 인걸들도 사라지기 마련 아닌가. 헌팅턴 교수와의 인연을 몇 자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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