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 아침 죽산 조봉암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김용기 선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간 김용기 선배는 죽산 선생의 무죄를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해왔다. 아픈 몸을 이끌면서도 역사의 진리를 구명하기 위해 애쓴 김선배를 위로하였다. 이런 선배들의 노력으로 우리나라 대법원이 죽산 조봉암 선생을 법살한 1957년 판결을 뒤엎고 2011년 1월 20일 무죄를 선고한 역사적 결정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형당한지 52년만에 역사는 조봉암선생의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나는 1961년 5.16군사혁명재판의 피고인으로 서대문 교도소에 있던 시절 옥중에 함께 있던 조정래라는 분으로부터 조봉암선생의 사상과 법정투쟁과정의 이야기를 상세히 전해 들었다. 인천에서 창사회라는 혁신단체의 간부로 활약했다는 이유로 함께 갇혔던 그분의 생사는 내가 지금 알 길없으나 그분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조봉암선생의 재판을 쫒아다니면서 보고 느꼈던 일, 죽산의 정치사상을 들었던 것이 내가 죽산선생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당시 서대문 교도소 10舍 上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죽산선생은 내가 갇혔던 바로 옆방에 수감되었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며 그때 감옥에는 수형자들이 창틀로 날아오는 새들엑 밥알들을 나누어 주었다는데 죽산이 주던 밥을 얻어먹던 새들이 죽산이 별세한 후 새들의 울음소리가 죽산, 죽산 하는 것 같아 죽산새라는 이름도 생겼다고 형무관들이 말 해주었다.
나는 혁명재판에서 7년징역형을 받았지만 학생신분에 4.19유공자라고 해서 1년여만에 석방되고 다시 복학한 후 진보당이 무엇인가를 나름대로 연구하고 진보당이 내걸었던 평화통일 방안을 검토해 보았다. 1972년의 7.4남북공동선언보다도 한 걸음 뒤늦은 감이 있는 유엔감시하의 남북평화통일 방안을 그 분이 주장했고 그는 또한 6.26동란이 미친 민족사적 범죄행위를 지적, 단죄한 분이었다.
결국 내가 연구한 바로는 당시 제3대대통령 선거에서 해공 신익희 선생이 急逝하신 후 야당 후보인 죽산이 호남과 영남에서 다수의 표를 얻은 것을 당시의 여당인 자유당과 자유당과 노선을 같이한 민주당이 그분에게 앞으로 정권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구심에서 그를 사형으로 몰고갔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소신을 밝히지 못한채 공직생활을 해오다가 4.19혁명 5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세미나에서 "419세대가 본 이승만 대통령의 공과 과"라는 주제논문을 발표하게 되었다. (2010년 4월 14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미래정책연구소 세미나 주제논문으로 발표되었고 그후 4월회가 간행한 "4.19혁명과 나"라는 특집에 전재되었음) 이 논문을 통해 나는 이승만 대통령이 범한 세가지 잘못으로 첫째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들에 대한 발포로 젊은이들을 사살한 죄, 둘째 친일분자들에에 대한 미온적 처리 셋째 政敵으로서의 조봉암 선생을 法殺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나의 견해에 대해 일부에서 반론이 있었고 조봉암선생을 잘못인식한데서 나온 잘못된 결론이라는 극우인사들의 기죽은 항변이 있었지만 나는 내 주장을 소신껏 밝혔고 내 글을 보도한 조선일보도 나의 주장을 선명히 보도해주어 조봉암선생의 법살론을 쟁점화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번 대법원 판결로 나의 소신이 법원의 판결을 통해 지지받게 된 것이 내심 기뻤고 역사가 시간의 흐름속에서 진리와 정의를 구현하는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음을 크게 다행으로 여긴다. 그러나 인혁당 사건이나 민청학련사건에 대한 법원의 뒤늦은 무죄판결까지를 내가 옳다고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죽산 조봉암 선생에 대한 판결이 옳다는 것이다.
나는 2005년 한민족복지재단 공동대표로 북한을 방문했을 때 북측에 요구해서 한중문화협회 창립자의 한 분인 趙素昻 선생의 묘를 참배한 바있다. 이때 나는 형제산구역으로 알려진 이곳의 묘지를 거의 빠짐없이 일행들과 함께 둘러보았는데 사회당으로 5.16 혁명재판에서 사형받은 최백근의 묘는 있었지만 조봉암 선생의 묘는 그곳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우익인사가운데는 직접 가 보지도 않고 조봉암 선생의 묘지가 그곳에 있다고 허위사실을 적시, 애국자를 간첩으로 만드는 중상을 하고 있다. 그런 일은 삼가해야 할 것이다.
(망우리 묘소의 조봉암선생 묘비)
나는 1961년 5.16군사혁명재판의 피고인으로 서대문 교도소에 있던 시절 옥중에 함께 있던 조정래라는 분으로부터 조봉암선생의 사상과 법정투쟁과정의 이야기를 상세히 전해 들었다. 인천에서 창사회라는 혁신단체의 간부로 활약했다는 이유로 함께 갇혔던 그분의 생사는 내가 지금 알 길없으나 그분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조봉암선생의 재판을 쫒아다니면서 보고 느꼈던 일, 죽산의 정치사상을 들었던 것이 내가 죽산선생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당시 서대문 교도소 10舍 上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죽산선생은 내가 갇혔던 바로 옆방에 수감되었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며 그때 감옥에는 수형자들이 창틀로 날아오는 새들엑 밥알들을 나누어 주었다는데 죽산이 주던 밥을 얻어먹던 새들이 죽산이 별세한 후 새들의 울음소리가 죽산, 죽산 하는 것 같아 죽산새라는 이름도 생겼다고 형무관들이 말 해주었다.
나는 혁명재판에서 7년징역형을 받았지만 학생신분에 4.19유공자라고 해서 1년여만에 석방되고 다시 복학한 후 진보당이 무엇인가를 나름대로 연구하고 진보당이 내걸었던 평화통일 방안을 검토해 보았다. 1972년의 7.4남북공동선언보다도 한 걸음 뒤늦은 감이 있는 유엔감시하의 남북평화통일 방안을 그 분이 주장했고 그는 또한 6.26동란이 미친 민족사적 범죄행위를 지적, 단죄한 분이었다.
결국 내가 연구한 바로는 당시 제3대대통령 선거에서 해공 신익희 선생이 急逝하신 후 야당 후보인 죽산이 호남과 영남에서 다수의 표를 얻은 것을 당시의 여당인 자유당과 자유당과 노선을 같이한 민주당이 그분에게 앞으로 정권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구심에서 그를 사형으로 몰고갔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소신을 밝히지 못한채 공직생활을 해오다가 4.19혁명 50주년을 기념하는 학술세미나에서 "419세대가 본 이승만 대통령의 공과 과"라는 주제논문을 발표하게 되었다. (2010년 4월 14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미래정책연구소 세미나 주제논문으로 발표되었고 그후 4월회가 간행한 "4.19혁명과 나"라는 특집에 전재되었음) 이 논문을 통해 나는 이승만 대통령이 범한 세가지 잘못으로 첫째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들에 대한 발포로 젊은이들을 사살한 죄, 둘째 친일분자들에에 대한 미온적 처리 셋째 政敵으로서의 조봉암 선생을 法殺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나의 견해에 대해 일부에서 반론이 있었고 조봉암선생을 잘못인식한데서 나온 잘못된 결론이라는 극우인사들의 기죽은 항변이 있었지만 나는 내 주장을 소신껏 밝혔고 내 글을 보도한 조선일보도 나의 주장을 선명히 보도해주어 조봉암선생의 법살론을 쟁점화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번 대법원 판결로 나의 소신이 법원의 판결을 통해 지지받게 된 것이 내심 기뻤고 역사가 시간의 흐름속에서 진리와 정의를 구현하는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음을 크게 다행으로 여긴다. 그러나 인혁당 사건이나 민청학련사건에 대한 법원의 뒤늦은 무죄판결까지를 내가 옳다고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죽산 조봉암 선생에 대한 판결이 옳다는 것이다.
나는 2005년 한민족복지재단 공동대표로 북한을 방문했을 때 북측에 요구해서 한중문화협회 창립자의 한 분인 趙素昻 선생의 묘를 참배한 바있다. 이때 나는 형제산구역으로 알려진 이곳의 묘지를 거의 빠짐없이 일행들과 함께 둘러보았는데 사회당으로 5.16 혁명재판에서 사형받은 최백근의 묘는 있었지만 조봉암 선생의 묘는 그곳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우익인사가운데는 직접 가 보지도 않고 조봉암 선생의 묘지가 그곳에 있다고 허위사실을 적시, 애국자를 간첩으로 만드는 중상을 하고 있다. 그런 일은 삼가해야 할 것이다.
(망우리 묘소의 조봉암선생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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