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작품속에 담긴 여러 형태의 문제의식은 분단 한반도를 떠나서는 형상화될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분단시대의 역사를 문학에서 증언한 작가들이 많지만 비교적 공정성을 잃지않은 작가였다.
독자를 많이 가진 작가는 자기를 보는 세상의 눈길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의 분위기에 편승, 阿世하기 보다는 그것을 초월한다. 나는 그점에서 박완서를 높게 보아온 터다. 평론가들을 무서워 하지않고 입방아찧는 사람들의 말장난을 의식하지않는 작가야말로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진리의 증인일 것이다.
나는 오늘 좋은 작가의 부음을 들으면서 그녀의 승리로 평가되어질 삶을 부러워한다. 자기 생각대로 바르게 떳떳하게 살다간 한국의 멋진 여류작가의 삶이 삐딱하게 세상을 보는 사람들에게 좋은 치유제가 되기를 빌어본다.
조선일보가 본 박완서
명쾌하고 거침없는 서술,
세대초월 사랑받은 국민작가2011/1/24
"6·25전쟁 통에 오빠와 삼촌을 잃고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을 때, 그걸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은 언젠가는
저 자들을 악인(惡人)으로 등장시켜 마음껏 징벌하는
소설을 쓰리라는 복수심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20년이 지나도록 증오와 복수심만으로는
소설이 써지지 않았습니다. '나목'으로 나이 마흔에 등단해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지요."
박완서는 1970년 '나목'으로 등단한 이후
여성의 몸에 새겨진 전쟁의 상흔을 쉼 없이 되새김질하면서도
사랑과 용서·화해의 높은 세계를 노래하며
한국 문학의 찬란한 봉우리로 우뚝 섰다.
6·25전쟁 체험과 분단이라는 역사적 소재를 다룬
'엄마의 말뚝' 연작과 '그 남자의 집'은 남성 작가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여성의 체험이라는
새로운 프리즘으로 해석했다는 점에서
큰 문학적 의미를 지닌다.
박완서는 인간의 내면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보는 데 능했으며,
이를 명쾌하고 거침없는 서사로 표현한 탁월한 이야기꾼이었다.
'휘청거리는 오후' '도시의 청년' 등에서 그녀는 1970년대 이후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등장한 중산층의 속물화된 일상과 허위의식, 세속적 탐욕을 신랄한 문체로 꼬집었다.
작가는 노년에 이르러서는 중산층 도시 여성들의 일상도 즐겨
소재로 선택했다. 이 과정에서 중년 여성의 내면에 들어찬 헛된 욕심과 위선을 놀랍도록 정교하게 포착하면서도 그런 속성 또한 인간의 본질적 모습임을 인정함으로써
복잡하고 다면적인 인간 이해의 경지를 보여줬다.
박완서는 문학적 성취와 독자의 사랑을 동시에 거머쥔 행복한 작가였다. 1992년 출간한 장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1930년대 고향 개풍에서의 어린 시절과 1950년대 전쟁으로 황폐해진 서울에서의 20대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전쟁을 기억한 작품으로
100만부가 넘게 팔렸다.
그녀가 77세의 고령에 발표한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도
30만부나 나가며 그녀가 세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국민작가임을 증명했다.
노년의 박완서는 '부숭이의 땅힘'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 등 동화집을 쓰며 세상에 태어난 것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기쁨을 어린이들에게 전하려 애썼다.
지난해 소설가 정이현씨가 엄마가 되자 젊은 부부와 아기가 그려진 엽서에다 "아가야 예쁘고 건강하게 자라서 엄마 아빠의 기쁨이 되거라.
박완서 할머니가"라고 써서 주었다.
김수환 추기경과 나눈 아름다운 교유를 통해서도
그녀의 인간됨을 엿볼 수 있다.
2009년 김 추기경의 선종을 접한 박완서씨는
"그분은 정의를 위해 박해받고 쫓기는 이들을 말없이
그분의 날개로 덮고 품으셨을 뿐, 결코 선동하거나 부추기지는 않으셨다.
만약 그분까지 투쟁적이었다면 그분의 그늘, 그분의 날개 밑이 그렇게 편했을 리가 없다"고 했다.
김 추기경의 너그러운 인품과 넉넉한 포용의 경지는 곧 그녀가 삶에서 추구했던 덕목이었다.
박완서는 고향 방문을 염원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내 식의 귀향'이란 글에서 그녀는 고향에 가지 못한 원초적 상실감과 지금도 계속되는 분단체제의 모순을 지적하며,
"내가 살아온 세상은 연륜으로도, 머리로도, 사랑으로도, 상식으로도 이해 못할 것 천지였다"고 회고했다.
지난해 펴낸 마지막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그토록 이해 못할 고통을 모두 이겨내고 문학의 큰나무로 우뚝 선 삶의 보람을 담고 있다.
"또 책을 낼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내 자식들과 손자들에게도 뽐내고 싶다. 그 애들도 나를 자랑스러워했으면 참 좋겠다."
박완서가 남긴 것 2011.01.24. 조선일보 <만물상>
"갈색 털이 무성한 손이 대뜸 내 코 앞까지 뻗어와 우뚝 멈추었다.
그의 손아귀에 펴든 패스포트 속에서 금발의 아가씨가 살짝 웃고 있었다."
박완서가 마흔 살에 쓴 데뷔작 '나목(裸木)'의 첫 구절이다.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 미군 PX에 근무하는 소녀가 달러 한 장을
벌기 위해 미군 병사를 꼬여 그의 애인 초상화를 주문받으려는 장면이다.
▶소동파는 "글 중에 좋은 글은 쓰지 않을 수 없어 쓴 글"이라고 했다.
'나목'의 소녀는 대학 입학 한 달 만에 일어난 전쟁으로
오빠를 잃고 소녀가장으로 삶의 최전선에 내몰려야 했던
박완서 자신이다.
그는 결혼해 남들 부러워하는 가정을 꾸린 20년 후에도
전쟁이 몰고 온 고달픔과 억울함, 절망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걸 누가 들어주건 말건 외치지 않으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
절박함, 그게 박완서 문학의 시작이었다.
▶전쟁은 박완서에게서 고향인 개성 박적골에서 키웠던
어린 시절 꿈과 청춘을 빼앗아갔다. 그는 이런 아픔을 소설에 숨김없이 드러냄으로써 자신이 구원받고 아픔 속에 세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었다.
▶동인문학상 심사 자리에서는 아무리 가까운 작가 작품이라도
완성도가 떨어지면 앞장서 칼날 같은 비평을 하던 박완서였다.
그런 한편 여자 후배가 임신을 하면 "순산하려면 잘 먹어야 한다"며
갈비와 냉면을 사주고 소주병 가득 참기름을 담아주기도 했다.
설날 출판사 편집자들이 세배를 가면 직급에 따라
1만원 2만원씩 세뱃돈을 주었다.
"이념이라면 넌더리가 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80년대 자유실천문인협의회(현 작가회의)가 어려울 때는 남몰래 수백만원씩 도왔다.
▶작년 8월 나온 그의 생애 마지막 책 제목은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였다.
그 직전 나온 마지막 동화책 제목은'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이다.
이런 아쉬움도 있고 저런 어려움도 있지만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하다는 게 그의 노년의 심경이었을까.
용인 천주교 공원묘지에 있는 앞서 간 그의 남편과
아들 묘비에는 박완서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생년월일만 있고 몰년(沒年)은 비어 있던
자리가 이제 채워지게 됐다.
박수근의 그림에 나오는 나목을 보고 박완서가 한 말이
떠오른다. "조금만 더 견디렴. 곧 봄이 오리니.
꼭 이렇게 말하며 서 있는 것 같다."
<김태익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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