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19 혁명 55주년 국립묘지참배를 마치고
이 영 일
필자는 4.19혁명 55주년을 맞는 이른 아침 7시30분, 4월회 회원들에게 배정된 시간에 4.19민주혁명묘지를 참배, 분향 한 후 옛 학우들의 무덤과 영정보관소를 살핀 후 함께 온 동지들과 해장국으로 아침을 마치고 곧장 교회로 갔다. 내가 4.19 민주혁명묘소를 꼬박 꼬박 참석한지는 몇 년 안 된다.
나는 1963년 쿠데타 정권이 수여하는 건국공로훈장의 수상거부를 대학신문에 성명으로 발표한 후 군사권위주의정권이 계속된 30년간 정부에서 주관하는 일체의 4.19관련행사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 당시에는 4.19가 실패한 혁명처럼 느껴졌고 그래서인지 서가(書架)에 촘촘히 끼여 있는 민주주의 관련 서적들마저 희미한 옛 연인의 추억처럼 의미 없어 보였다.
그러나 4.19날만 되면 4.19 당일 현장에서 나와 함께 서울문리대 학생데모의 선두에서 달리다가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앞에서 총을 맞고 타계한 문리대 수학과 3학년의 친구 김치호(金致浩)의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서 떠나지 않았다. 김치호는 당일 나와 함께 종로5가 지경에서 진압경찰에 함께 억류되어 시청광장으로 끌려갔다. 거기서 학생들을 일단 풀어주자 경찰봉에 안경이 깨지면서 왼쪽 눈자위를 다쳐 피 흘리는 나를 서울대학병원 안과로 데리고 가서 진료를 받게 한 후 도서관에 둔 가방을 찾아오겠다면서 뛰어나간 것이 내가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는 도서관이 아닌 경무대 쪽으로 바로 뛰어갔다가 참변을 당했다.
그는 나와 학과는 달랐지만 문리대 기독학생회(SCA)에서 만났고 그 후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함께 감상한 것이 인연이 되어 대학교정에서 만나면 가끔 레시타티브로 대화를 나누던 좋은 친구였다. 나를 자기가 멤버인 남산 합창단에 함께 나가자고 권유하다가 먼저 타계했다. 내 부모 말고 성묘해야할 친구가 있다면 바로 그 친군데 정부주관 행사가 싫다고 4.19묘지에 안 가는 것이 항상 나의 맘을 무겁게 했다.
나의 60년대 10년 동안은 인생의 시련기였다. 두어 차례 투옥되어 540여일을 서대문교도소에서 보냈고 신원조회에 걸려 취업 길도 막혔던 답답하고 막막한 시절이었다. 나는 대학연구소의 연구원이라는 타이틀로 도서관에 다니면서 쿠데타나 학생혁명 등 신생국 근대화과정을 소재로 한 책들만 줄곧 읽어대었다. 흔히 말하는 신생국에 관한 비교정치연구서들이었다. 여기서 나는 4.19는 실패한 혁명이 아니라 성공한 혁명이었다는 결론을 얻었다. 한국의 1960년이라는 시간과 분단된 후진국이라는 공간의 제약 속에 갇혀있던 내가 지식과 정보의 양이 크게 늘어나면서부터 민주주의와 국가발전을 보는 시각에 큰 변화가 생겼다.4.19이후에 전개된 한국사회의 현상을 읽고 평가하는 관점도 달라졌다.
당시 한국은 오늘날 아프리카의 가나 수준의 경제력밖에 없을 만큼 가난했다. 그러한 한국이 경제도약을 위한 선행조건을 충족시켜 국력을 기르려면 권위주의 정권이 출현할 도리밖에 없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군사권위주의 정권들이 출현하기에 앞서 4.19를 통해 우리 국민 모두가 나라의 주권자로서의 의식과 지위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권위주의 정권들은 중남미나 아프리카, 중동에서와 같은 부패독재정권으로 전락할 수 없었다. 개발독재라는 표현이 나올 만큼 한국의 권위주의 정권들은 국력배양과 신장에 크게 공헌하면서도 주권자인 국민을 두려워했다. 젊은 사람들의 피로 국민들을 주권자가 되게 하였고 이 주권자의 지위를 지켰기 때문이다.
수천 년의 역사에서 1인의 자유는 있었지만 만인의 자유가 없던 나라, 왕권은 있었으나 국권이 없었던 토양위에서 국민을 주권자로 섬기는 민주정치가 이루어진 것이다. 4.19후에 성립한 군사권위주의 정권들은 중요한 정책을 비민주적, 권위주의적으로 결정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주권자로서의 국민을 결코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못했다. 국민들의 호응을 얻는 학생들의 간고한 감시와 저항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군사권위주의 정권들은 스스로 민주적 정통성의 부족을 메꿔 보기위해, 국민들에게 점수를 따기 위한 국력배양에 주력했던 것이다. 그것이 마침내는 한국을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루는데 성공한 국가반열에 오르게 했던 것이다. 한국인과 중국인을 비교하는 말 가운데 한국 사람들은 중국인들과는 달리 불리(不利)는 잘 견디지만 불의(不義)에는 못 참는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날 중국인들은 주권을 공산당(共産黨)에 맡겨놓았지만 우리 국민들은 주권자의 자리를 확실히 지키고 있다. 이것이 4.19의 가장 큰 공로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서부터 나는 다시 4.19 기념일에 묘소참배를 빠트리지 않게 되었다. 김치호 묘소도 참배, 성묘한다.
최근 인간의 행복지수를 따지는 미국행태연구소의 자료를 보면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나라에 태어난 사람이 그렇지 않은 나라에 태어난 사람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는 것이다. 주권재민이 갖는 중요한 의미다. 4.19는 그러나 남한 사람에게만 주권을 되찾게 해주었을 뿐 북한 2500만 동포들은 아직도 주권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상황을 살고 있다. 결국 조국의 통일은 북한 동포들도 주권자가 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북한의 4.19가 곧 통일일 것이다.
이날 4.19영령 봉안소에는 384위의 영령사진이 안치되어있었다. 1960년대에는 180여명이었지만 지금은 부상자나 기타 유공자들이 추가되었다는 것이다. 주권재민(主權在民)을 위한 대의에 순의(殉義)하신 분들이다. 확실한 국민적 합의로 그들의 순의를 국민들은 하나같이 추모한다. 이렇게 4.19혁명은 그 55년의 흐름을 이땅에서, 우리가 만드는 역사의 현장에서 여전히 자랑스럽게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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