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래 부완혁 선생 서거 30주년 추도식을 다녀와서

 

이 영 일 (3선 국회의원, 한중정치외교포럼회장)

 

이날 추도식에서

2014년 12월 30일 부완혁(夫玩爀) 선생 서거 30주년 추도식이 서울 매리어트 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열렸다. 그분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이리저리 인연이 닿는 분들이 봉래(蓬萊)부완혁 선생의 유일한 혈육인 부정애(夫貞愛) 여사와 그 부군 되시는 신선호 회장이 차린 추도식장을 가득 메웠다.

 

 

이날 추도식에서  눈길을 끄는 캐치플레이스는 인문의 샘, 시대의 좌표, 지성의 빛 이었다. 봉래선생이 사상계를 통해 표현하고 싶은 가치였고 일생을 두고 추구했던 지향(志向)인 것 같다. 이 모임에는 이인호 KBS이사장(전 러시아 대사)을 비롯하여 학계, 언론계, 정계, 경제계의 여러 분야에서 많은 분들이 오셨는데 봉래선생이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 장군을 모시고 족청(族靑)계 활동을 함께 했던 당시의 동지였던 김정례(金正禮) 전 보사부 장관 이 금년 89세의 고령인데도 참석하셔서 헌화했고 미국유학중으로 생전에 부완혁 선생을 만난 일이 없다고 본인 스스로 고백한 노재봉(盧在鳳)전 국무총리가 한국 지성인을 대표하여 추도사를 맡아주셨다. 노 총리는 추도사에서 오늘의 한국만큼 부완혁 선생 같은 인물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시기에 그런 분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이 시대의 안타까움이라고 설파, 분위기를 숙연케 했다.

 

필자는 1960년대 초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10년 동안 사상계에서 부완혁 선생이 맡겨주는 좋은 논문을 번역해서 사상계에 게재도 하고 몇 편의 논문도 발표하여 부완혁 선생으로부터 정치평론가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당시 필자 나이 27~28세의 청년운동가였는데 봉래선생의 심사를 통과하여 사상계에 글을 싣는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어떻든 필자는 그 시기에 봉래선생에게 필력을 인정받아 사상계에 글을 기고한 것 자체만으로도 엄청나게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필자는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재학중 학생운동으로 당시 두 차례 감옥을 갔다가 나와서 이리저리 방황하는 운동권의 낭인이었는데 선생은 사상계를 통해서 나 같은 젊은 사람에게 글 쓸 기회를 줘 자신감과 용기를 갖게 해주었다. 정말 나에게 삶에 대한 용기와 자신감을 심어준 큰 선물이었다. 그때 사상계에 필자가 발표한 ‘한국정치사상의 메타볼리즘’이나 ‘개발독재발상법 서설’은 선생에게 크게 칭찬받은 글이었다. 그러나 시국을 평가하는 논쟁 중에는 통렬한 독설과 시니컬한 비판도 감수해야했다.

 

그러나 봉래선생은 그때뿐 뒤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대로 끝이었다. 매일 혼자 사는 봉래선생은 회색의 황혼이 오면 으레 젊은 후배들을 데리고 중국식당에 가서 백주(白酒)를 사주시거나 냉천동 집으로 데리고 가서 혼자 즐기는 양주를 꺼내 함께 마시기도 했다. 그때 안주는 따님인 부정애 여사가 내온 것으로 기억된다. 사상계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공판타자기로 책을 찍을 때는 원고료 없이 글 쓴 분들을 많아 근근이 잡지사의 명맥을 유지할 때도 있었다.

 

그때 한국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한 김성우 형의 ‘만세(萬歲) 반만세(反萬歲)’ 같은 당대의 명 칼럼이 공판인쇄본에 실렸다. 다행히 김세영씨의 후원으로 사상계가 정상을 되찾아 가는 중에 김지하(金芝河)의 5賊사건으로 폐간되었고 기때 봉래 선생은 투옥되기도 했다. 필자는 추도식장에서 부정애 여사 내외분을 만나 40년 전에도 봉래 선생은 나에게 술을 사주셨는데 돌아가신지 30년이 지난 후에도 그분 덕에 다시 맛있는 식사와 와인을 마신다고 술회했다.

이날 부정애 여사는 유족대표인사말을 통해 ‘일찍이 혼자 되셨고 또 정치적 경제적 어려움이 많았지만 아버지는 항상 의연하셨다.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밖에 들어나지 않은 외로운 시간도 적잖았을 것으로 생각 한다‘면서 울먹였다. 이어 선친 생전에 독설이나 씨니시즘 때문에 상처를 입은 분이 혹 계신다면 모든 것을 추억으로 승화시키자고 말했다.

 

함께 참석한 모든 분들은 유일한 혈육인 부정애 여사가 부군과 함께 대한민국에서 가장 성대한 추도식을 마련한데 대해 그 효성을 평가했다. 이날 추도식은 일본으로부터의 해방, 해방 후의 그 혼란, 건국과 동란, 4.19혁명과 5.16군사쿠데타, 민주화투쟁 시대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의 큰 흐름 속을 방청인으로서가 아니라 때로는 정치인으로, 때로는 학자로, 때로는 언론인으로 직접 참여하여 현실과 맞서면서 치열하게 살았던 우리나라 대표적인 지식인의 한분이신 봉래 부완혁 선생의 족적을 기리고 우리의 금후의 진로를 새삼 돌이켜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값진 추도식에 참여한 것이 올해를 마감하는 뜻 있는 발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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