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용문사 瞥見 有感
(이글은 오늘자로 김승웅 글방에 떳다)
이영일 한중정치외교포럼 회장
올 설은 설 전날을 포함해서 5일간 이어지는 휴가라서 젊은 사람들에게는 황금연휴이겠지만 나이든 우리 또래에게는 매일이 휴가인지라 휴가를 휴가 비슷하게라도 보낸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자식들이 경기도 양평의 콘도를 예약했다면서 나들이를 서두르는 바람에 우리 내외도 함께 집을 나섰다.
양평의 블룸비스타라는 콘도에 여장을 푼 후 식구들과 같이 인근에 명성 높은 사찰인 용문사를 찾아 나섰다. 나는 용문사를 이름만 알뿐 어떻게 하다 보니 한번도 와 본 일이 없던 곳인지라 다소간의 호기심을 느끼면서 일행과 함께 용문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현란한 식당 간판들이 우리나라 전통식단의 메뉴들을 나열하면서 시야를 채웠다. 산길의 양옆에 즐비한 식당들을 지나치면서 30분 이상 가파른 산길을 올라갔다. 프랑스의 도시계획위원회에 상정되었다면 절대로 허가받지 못할 건물들이 난개발(亂開發)의 상징처럼 늘어서서 절로 들어가는 길목들의 전망을 어지럽혔다. 길에는 등산모를 쓴 중년 남녀들이 떼를 지어 오가는데 거기에는 탬플스테이로 이곳에 왔다는 외국인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사찰 입구에는 탬플스테이라는 간판이 내방객들을 영접하고 길 왼편에는 수령 1200년이나 되었다는 은행나무를 수호신처럼 모신다는 설명문과 더불어 은행나무를 먼발치로 바라볼 전망대가 놓여있었다.
용문사 경내는 여느 절이나 비슷했지만 기도꾼들이 몰려들어 대웅전 등 큰 사찰 건물에서 기도회를 열고 있었다. 야단법석(夜壇法席)이다. 그러나 불교사찰이 제단(祭壇)을 쌓는데서 생기는 신성함은 어느 곳에서도 느껴지거나 찾을 수가 없었다. 불심(佛心)과 무관한 중국관광객들의 나들이 장소로 변해버린 중국사찰들을 너무나 많이 닮아버렸다. 먹고 마시고 떠들면서 이 건물 저 건물로 몰려다니는 중국관광지 그대로의 모습이 우리 용문사에서 재연되고 있었다. 약수물이 좋은 것으로 소문이 났다지만 약수물을 관리하는 실태를 보면 영약(靈藥)을 마신다는 기대를 불러일으킬 정결함이나 신성함은 전무했다. 갈증을 달래는 쉼터에 불과했다.
사찰의 관광이 선교라는 문제의식과 연결되지 못하고 그냥 돈벌이에 역점을 두는 관광업으로 전락해버린 곳이 중국사찰들인데 그런 모습이 이 땅에서도 재연되고 있다는데 마음이 아팠다.
용문사 구경을 마치고 Moon River라는 간판을 단 식당에 들어갔다. 오리백숙으로 명성을 얻은 곳이라고 한다. 요리 맛은 환상적이었다. 밑반찬도 좋았다. 한때 카페를 하다가 안 되어 업종을 바꾸었다는 것이 주인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간판과 메뉴가 너무 다른 것은 부적절했다. 음식에 어울리는 간판과 그 간판에 합당한 맛을 전하는 레스토랑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함께 온 자식들은 휴대폰을 손에서 떼지 않고 무언가 열심히 전화하는데 바빴다. 함께 조용히 이야기 나눌 시간도 없어 보였다. 어느 외국작가가 한국을 소재로 글을 쓰면서 책명을 “기적을 이룬 나라, 그러나 기쁨을 잃은 나라”라고 붙였다고 한다. 1인당 GDP 30,000 달러의 수준에 도달한 것은 기적이지만 그 수준을 지키기 위해 더 가치 있는 많은 것을 잃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기쁨 상실이다. 우리 주변에서도 요즘 전통적인 것이 거의 사라지고 그렇다고 모든 것이 서양화된 것도 아니다. 퓨전이 오늘날 한국문화의 현주소 같다. 퓨전화된 韓流를 우리는 한류로 자랑하고 있지만 그것이 진정한 한류일지는 시간을 더 가지고 깊이 음미해야 할 것 같다. 기적을 이룸과 동시에 기적만한 기쁨이 우리의 소유가 될 길을 적극 모색해야겠다. 올 설은 그런대로 즐겁게 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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