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석(楓石) 서유구(徐有矩) 전기를 읽고

 

                                  한중정치외교포럼회장 이 영 일 (풍석 서유구 선생 기념재단추진위원회 고문)

 

풍석 서유구 전기가 진병준씨의 저술과 출판사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대표 장익순)의 기획으로 세상에 나왔다. 금년으로 탄생 250주년을 맞는 풍석 서유구 선생은 18세기에서 19세기로 이어지는 조선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당시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그는 당시 지배계급의 다른 명칭인 경화세족출신이면서도 주자학이 지배하는 질서에 맞서서 애인휼민을 목표로 실학에 전 생애를 바쳤다.

 

당시 조선사회의 통치이데올로기인 주자학은 공리공론에 매여 민생보다는 파쟁을 일삼고 적서반상(嫡庶班常)신분 차별 질서를 심화, 민중수탈의 명분으로 변질되어갔다. 결국 조선을 망국으로 몰아간 이데올로기로 변하고 있었다. 이 시기를 살았던 풍석 선생은 실사구시를 중시하는 학문적 가정을 배경으로 청나라에서 유입된 신지식을 섭렵하고 토지자본이 유일한 생존기반인 조선사회의 생산력증대에 공헌할 이론과 기술을 탐구하고 이를 실용할 학문으로 발전시키는 데 앞장섰다.

 

정조시대의 개혁정치에 동참한 그는 주어진 관직을 그가 탐구한 민생정치의 실험기회로 활용하면서 백성들에게 유익할 생활지식을 새롭게 정비해나갔다. 이 작업은 그에게 있어서는 주자학의 병폐를 청산하고 민중생활개선의 건실한 토대를 쌓게 하려는 구국운동이었고 그를 필생동안 매달리게 했던 임원경제지(林園經濟誌) 편찬이다. 한중일 3국을 통틀어 서유구 선생이 펴낸 임원경제지만큼 백성들이 바로 실천에 옮길 생활지식백과사전을 집대성한 나라는 없었다.

 

서유구 선생의 삶에서 주목되는 또 다른 측면은 지식이 통치 집단의 도구로, 입신양명의 수단으로 쓰이는 풍조에 반대하고 민생을 풍부히 하는데 공헌한다는 소명의식이었다. 그분은 박제가나 이덕무, 유득공 처럼 당시 출세의 길이 막혀 실학연구에만 몰두했던 중서인출신이 아니었다. 그는 소론에 속했지만 좋은 집안에 태어나 경학을 통해 과거에 급제, 관직에 발탁되었고 행정 분야에서도 오랜 세월 복무했지만 그는 신분상의 차이를 넘어서서 당시의 실학자들과 열린 마음으로 교유하고 필요한 연구와 정보를 공유함으로 해서 문자 그대로 실학을 구국의 경륜으로 발전시켰다.

 

 임원경제지는 바로 이런 경륜의 집대성인 점에서 당시 실학이 내놓은 학문연구의 최고 금자탑이 된 것이다. 당시 구국을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주자학과 파쟁을 넘어서서 정치혁명을 꿈꾸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지만(허균처럼)그는 충효사관에 매인 유생적(儒生的) 한계를 넘지 않고 민간의 생산력증대를 통한 부국안민에만 전력하였다. 구국의 필수방책인 정치투쟁을 외면, 망국으로 흐르는 조선의 국정을 바로잡는 데는 기여하지 못했지만 개혁정치인으로서, 사상가로서 그의 업적은 후대에 크게 귀감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실학자들과는 달리 그의 공헌과 업적이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분의 사상과 철학이 후대에 전수 발전되기 위해서는 한글로의 번역이 시급한데 임원경제지의 역간(譯刊고전국역)사업이 너무 방대하여 다른 저술에 비하여 간행이 늦어졌다. 다행히 풍석기념재단추진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지식의 보고라 할 수 있는 임원경제지의 한글 번역을 촉진, 조만간 방대한 저서의 번역 장정(飜譯長征)을 마치고 발간을 보게 된다고 한다.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마틴 루터가 라틴어 성경을 독일말로 번역한 것이 성경대중화의 길을 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임원경제지의 창간과 더불어 한국인들이 조선실학의 진면목을 대하는 기회가 되고 수많은 새로운 한류의 아이디어가 속출될 것이 기대된다. 풍석 서유구 선생의 전기가 널리 읽혀져서 실학이해의 새로운 지평이 넓어지길 기대한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