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택 이후의 북한과 중국 관계를 생각한다.

 

                                                       한중문화협회 회장 이영일

 

                                              1.

 북한정권의 제2인자로 알려졌던 장성택(張成澤)이 12월 12일 총살형을 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 앞으로 북한과 중국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놓고 국내외에서 많은 논의가 흘러나오고 있다. 현시점에서 밝혀진 중국 정부의 공식입장은 외교부 대변인 발언을 통해 간단히 표현되었다. 내용인즉 “장성택 문제는 북한의 내부문제이고 중국은 북한의 내정에 관여치 않으며 중국과 북한관계에서는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네티즌들은 웨이보(微博)나 일간지에 실린 댓글을 통해 대체로 북한의 장성택 처형을 독재체제유지를 위한 필연적 결과라면서 매우 부정적이고 냉소적으로 평가한다. 또 주목되는 글로는 장성택의 사형선고 판결문에 외국에 지하자원을 헐값으로 팔아넘긴 것을 비난한 것과 관련하여 판결문이 말한 외국은 바로 중국이 아니냐면서 중국에 에너지와 식량을 신세지는 나라가 그런 말을 내뱉는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반응과는 달리 장성택 문제는 미국과 중국 간의 고위층 대화에서도 거론될 만큼 파장이 크게 일고 있다. 존 케리 미국무장관과 중국의 왕이(王毅)외교부장은 12월 15일 전화통화를 통해 북한의 내부문제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매우 이례적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미ㆍ중대화에서는 북한의 대외행동을 문제 삼았을 뿐 양국 간에 북한정권의 내부문제를 소재로 삼은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장성택 사건을 계기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신설하고 한반도에서 야기될지도 모를 유사시 대비를 서두르고 있다.

 

북한은 장성택 사건이후 유일영도체제를 공고히 했을 뿐 북한의 대내외정책이나 노선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문제전문가들 간에는 이번 장성택 처형문제가 북ㆍ중 관계를 바꾸는 결정적 변곡점이 될 수 있다고 점치는가하면 중국은 전략적 관점에서 북한을 보기 때문에 장성택 문제가 북ㆍ중 관계에 별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보수적 관점도 그대로 살아있다.

그러나 장성택이 그간 북한과 중국 관계에서 수행해온 역할이 결코 가볍지 않고 장성택을 둘러싼 중국의 정치문제도 간단하지 않기 때문에 중국의 대북한 정책에 전혀 영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속단일 것 같다. 물론 누구도 현시점에서 앞으로 북ㆍ중 양국관계를 정확히 전망할 수는 없다. 중국인들은 속내를 잘 내비치는 일이 드물고 또 속내를 말한다고 해도 대개의 경우 애드벌룬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다만 가능한 것은 장성택 사건의 전후관계를 북ㆍ중 양국관계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토대로 재구성해보면서 현 상황의 맥점(脈点)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하에서 북ㆍ중 관계의 금후의 진로를 살펴보기로 한다.

 

 

                                                 2.

 

장성택은 김정일 사후 2012년 북한 대표단을 인솔하고 중국을 방문, 후진타오 주석을 접견하였다. 이 방문은 김정일 사후와 김정은 집권이후 북한에 대한 중국의 입장을 전달하는 가장 높은 수준에서의 소통창구였고 이와 동시에 중국과 북한간의 경제협력을 다시금 활성화시키는 기회이기도 했다. 장성택은 방중을 계기로 압록강변의 황금평 개발에 대한 중국의 협력을 얻어냈고 양국을 연결하는 철교와 고속도로 건설, 나진ㆍ선봉지구개발에 대한 중국의 지원을 얻어냈다. 뿐만 아니라 지하자원을 중심으로 대중국 수출을 늘리는 데도 성공, 양국 간의 무역량도 늘리게 되었다. 그간 장성택의 행보를 미루어 보면 북한정권 지도층 가운데서 중국이 북한에 바라는 정책으로서의 개혁개방과 한반도 비핵화문제에 대한 중국의 입장을 정확히 통보받았고 여기에 긍정적 화답을 한 인물이었다.

 그는 한국 실정이나 세계경제정세를 살피는 안목도 지녔다. 그가 2002년 북한경제고찰단을 이끌고 단장으로서 한국을 방문, 주요공장과 산업시설을 돌아보았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그는 중국의 권고를 받아들여 신의주 공단 대신에 개성공단을 창설하는데도 큰 역할을 수행했다. 선군(先軍)정치가 김정일 시대의 특징이었다면 장성택은 김정은에게 선군에 못지않게 경제발전이 중요함을 역설하였다. 김정은이 권력을 세습한 후 인민들이 더 이상 배고프지 않도록 하겠다고 공언하면서 외자유치를 위한 시설투자에 나선 배경에는 장성택의 건의가 깔려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성택의 이러한 태도를 선군정치와 구별되는 선경(先經)정치라고 학자들은 표현했다. 중국에서 볼 때 김정은 시대의 시작과 더불어 장성택이 추진하는 선경정책은 중국이 1980년대부터 북한에 권고해온 개혁개방정책과 궤를 같이하고 한반도의 안정이라는 중국의 정책목표구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과 북한사이의 인적 소통창구(疏通窓口)였던 장성택이 하루아침에 체포되고 군사재판을 통해 속전속결로 잔인하게 처형당했다. 미국 국무성은 장성택의 처형방식을 이례적으로 '잔인의 극치'(Extreme Brutality)라고 표현했는데 중국정부와는 달리 중국의 네티즌들은 한결같이 김정은의 무도한 숙청정치에 쓰디쓴 냉소를 보냈다. 장성택의 처형(處刑)을 보는 전 세계는 너나없이 치를 떨었고 넬슨 만델라와 정반대의 길을 걷는 김정은을 21세기 판 최악의 독재자로 만들었다. 김정은에게는 살인마로서의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이제 전 세계에 비친 2400만 북한 동포는 인권의 주체, 생명의 주체가 아니라 독재권력 앞에 목숨을 초개(草芥)같이 내맡기고 살아가는 불행한 존재였다.

 

                                                  3.

 

장성택 죽음의 원인을 그의 판결문대로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북한사람들은 김정은을 향한 충성맹세대회에서 장성택을 “이 땅에 묻힐 자격조차 없는 인간”이라고 철저히 규탄하고 증오했지만 그것이 북한주민들의 본심으로 볼 수는 없다. 중국의 한 네티즌은 북한인들은 공포에 짓눌려 눈물을 흘린 것(我相信痛哭流涕的朝鮮人有一部分原因是恐懼)이라고 바로 지적했다. 장성택은 북한 김정은의 가장 중요한 지지기반이고 중국의 지원을 끌어내는 창구인데 그가 반당 반혁명을 획책할리도 없고 그러한 증거도 밝혀지지 않았다. 김정은이 장성택을 죽인 것은 장성택 반대세력들의 반간계(反間計)가 작용한 결과로 보아야 할 여러 가지 증거가 있다.

우선 김정은의 권력승계를 주도한 장성택은 김정일 시대 북한정권유지의 중심축을 이룬 선군정치를 당 중심 정치로 바꿔야 한다고 주창하면서 선군정치의 물질적 기초를 군에서 당으로 이관하는 조치를 취했다. 김정일 시대의 북한경제는 인민군 경제와 인민경제로 이원화되어 있었고 인민군 경제가 인민경제의 우위를 차지하였다.

인민군경제는 산에서 채취되는 것과 바다에서 채취되는 것을 물질적 기초로 하여 실물경제에서 무역을 통한 외화벌이를 추구했다. 지하자원과 수산자원이 주된 수출품인데 여기에는 아편이나 버섯, 인삼, 한국에서 수요가 높은 해사(海沙)도 인민군 경제 소관이었다. 장성택은 군에서 주도하는 이러한 사업을 당으로 이관하면서 외화벌이의 주도권을 하나씩 군에서 자기가 주도하는 당으로 이관시키고 대중국 무역을 통하여 외화벌이를 장악하는 한편 외국공관을 이용한 외화벌이도 자기 수중에 장악했다. 선군이 아닌 선경정치의 기초를 하나씩 다져나갔다. 장성택의 주도와 박봉주 총리의 지휘능력이 결합됨으로 해서 북한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에서 플러스 성장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위기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장성택의 선경정치로 입지가 약화된 선군정치세력이 당 내외에서 단합, 反장성택 전선을 형성해 나갔다. 이 당시 이영호 참모총장의 장성택에 대한 도전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당내 조직지도부를 중심으로 하는 선군정치지원세력은 ‘백두혈통에 의한 유일영도체제확립’과 핵과 미사일이라는 ‘선군의 위업’수호를 내걸고 장성택이 중국과 제휴하면서 경제권을 장악하고 김정은의 유일지도체제 확립에 역행하는 노선을 걸을 뿐 아니라 선군의 위업을 승계하기도 꺼려한다고 모략하는 반간계에 착수했다. 장성택의 일거수 일투족을 조사하여 장성택의 제거 없이는 유일영도체제 확립이 어려울 뿐 아니라 한반도 비핵화를 말하는 중국과 제휴하여 선군위업의 승계마저 어렵게 한다고 김정은을 설득하였다.

 

김정은과 장성택 간의 모순조작은 의외로 쉽게 이루어졌다. 김정은은 반간계를 간파 하지 못하고 자기의 가장 주요한 지지기반인 장성택을 버리고 중국의 개입을 꺼려 속전속결로 장성택을 처형해버렸다. 반간계의 주축세력이 김정은에게 추호라도 애정이 있었다면 장성택 제거과정에서 김정은의 이미지를 지구최악의 독재자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장성택의 죽음은 김정은 지지기반의 약화를 의미하며 북한정치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배제를 겨냥한 쿠데타의 성공을 의미했다. 형식은 친위쿠데타 같지만 본질은 김정은의 지위가 선군정치세력의 괴뢰로 전락하는 길이었다. 12월 17일 김정일 사망2주년 추도식에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진다는 백두혈통은 김정은 이외에는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김정은의 고모 김경희도, 그의 형인 김정철도, 그의 여동생도 금수산 태양궁의 김정일 영령안치소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중국고사에 반간계에 걸린 자는 예외 없이 반간계를 건자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김정은은 백두혈통의 용도가 있을 동안은 버티겠지만 자기의 구체적 지지기반이 사라진 김정은이 앞으로 자기를 표현할 방도가 무엇일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4.

 

북ㆍ중 관계는 현시점에서 무어라고 속단할 수 없다. 북한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중국을 대하지만 김정은의 북한에 대한 중국의 입장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앞으로 2021년까지 북한과 중국 간에 체결된 이른바 조중(朝中)상호원조 및 우호협력조약은 형식적으로 유효하지만 사실상 사문화(死文化)된지 오래다. 북한의 핵무기 포기를 전제로 추진하는 중국의 6자회담 재개구상도 현실성이 떨어지는 제안이 되었다.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지구최악의 독재자로 인상 지워진 김정은을 옹호하기도 매우 어렵게 되었다. 중국인민들의 지지를 받기 힘들기 때문이다. 장성택 사후 북한을 엄습할 경제난과 내부갈등의 돌파구로 북한이 추구할 대남긴장고조정책은 중국의 대한반도 정책에 엄청난 난관을 조성할 것이다. 미국과 일본이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연대할 명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대북한 정책은 이제 바야흐로 그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느낌을 준다. 중국은 그간 북한이 지니는 전략적 가치를 고려하여 북한과 김일성, 북한과 김정일을 동일체로 보는 관점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중국은 앞으로 북한과 김정은을 하나의 동일체로 간주하고 거기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을까.

북한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겠지만 중국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선택이다. 중국의 대안은 미국이 오랫동안 주장했던 정권교체(Regime Change)일 것이다. 바꿔 말하면 비핵개방을 지향하는 정권으로의 북한정권의 변환을 중국은 바랄 것이다. 시진핑의 중국은 북한의 백두혈통중심의 유일영도체제도 아니고 선군정치도 아닌 비핵, 비세습 개방정권일 것이다. 물론 미일관계나 한미일 3국을 바라보는 중국의 전망에 따라 중국의 선택지는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지구최악의 독재자로 변한 북한의 대변인이 되는 길을 중국이 과연 선택할 것인가. 그길 이외의 대안을 찾을 것이다. 여기에 한국외교의 당면과제가 있지 않을까. 함께 고민할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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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옌쉐퉁(閻學通)교수와의 대화

 

                                                    한중문화협회 회장 이 영 일

 

1.들어가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상황이 요동치고 있다. 한중관계는 박 대통령의 성공적인 정상회담을 계기로 모든 면에서 관계가 크게 개선되고 있는데 반해 한일관계는 영토문제, 종군위안부문제, 역사문제 등으로 갈등이 겪고 있다.

 

같은 시기에 일본과 중국 간에는 조어도(釣魚島)(센카쿠열도) 영유권을 둘러싼 분쟁이 날이 갈수록 그 강도가 높아지는 가운데 미국은 조어도가 미일방위조약이 정하고 있는 일본영토에 포함된다고 밝혔다. 여기에 더하여 미국은 일본 아베(安培)정권이 추구하는 집단자위권행사를 지지, 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이 맡아야 할 역할의 일정부분 일본에 내맡기는 태도를 취한다.

 

이러한 시기에 필자는 한중문화협회 베이징지회 제4대지회장 취임식(10월 26일)참석차 베이징을 방문하는 기회에 10월 25일 중국 칭화대학(淸華大學)의 당대국제관계연구원(當代國際關係硏究院)의 옌쉐퉁(閻學通)원장을 사무실로 방문, 시국담을 나눌 기회를 가졌다.

 

내가 옌 교수에게 흥미를 가진 것은 그가 발표한 논문들 속에 시진핑 주석이 추구하는 신형대국관계론의 주요관점이 포함되어 있었고 특히 중국정부의 중한(中韓)전문가위원회의 위원으로 중국의 대한반도정책결정에도 관여하는 인사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의 UC Berkley에서 정치학박사학위를 얻은 석학으로도 알려져 있다.

 

2. 대화요지

 

필자와는 초면이었지만 편지로 면담의사를 전한 탓인지 자기 연구실에서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처음에는 말문 열기가 다소 어색했지만 그를 알게 된 배경이 그가 발표한 논문들을 통해서였고 특히 옌 교수의 국제관계를 보는 시각이 수백 개의 국가들이 명멸(明滅)했던 중국 춘추전국 시대와 그 때 출현했던 지도자들의 전략사상들을 오늘의 상황분석에 응용하고 발전시켜 현대국제관계를 설명하는 접근법을 제시한 점에 내가 흥미를 가졌다고 말하자 그의 말문도 자연스럽게 트였다.

 

① 한반도의 안정화 방안

 

필자는 대화의 모두에 한중문화협회의 탄생배경을 설명하면서 학창시절에 읽은 백범일지의 한 토막을 이야기했다. 백범 김구(白凡 金九)선생은 광복 후 그가 발표한 일지(日誌)에서 강대국들로 둘러싸인 한국이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립과 번영을 누리기 위해서는 군사강국을 지향하지 말고 문화강국, 경제 강국, 과학기술 강국의 길을 택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나도 그의 견해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하고 현재 한국정부도 지정학적으로 보아 주변의 어느 국가와도 1대1로 맞설 만큼 강국이 아니기 때문에 핵이나 탄도 미사일, 항공모함 같이 주변국들의 안보우려를 유발할 전략무기의 보유를 자제하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북한은 핵무장과 탄도미사일 보유를 적극 추구함으로 해서 강대국들의 개입과 유엔안보리의 제재를 자초했고 북한이 핵을 버리지 않는 한 중국이 바라는 한반도의 안정은 기대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북 핵은 일본이 핵무장할 명분만을 제공, 동북아시아가 중일(中日)간의 핵 대결지역으로 변할 우려마저 있다면서 이에 대한 옌 교수의 생각을 물었다.

 

그도 나의 관점에 공감하면서 자기의 전략관점에서는 중국의 주변국가 중 한국과 파키스탄 양국은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과도 함께 동맹관계를 가질 수 있는 국가로 본다면서 한중동맹이 필요하다는 뜻밖의 견해를 표명했다. 그는 한국이 미국과의 방위동맹을 유지하면서도 중국과도 동맹관계를 맺어야 평화와 안정 확보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이어 중국은 1961년 이래 북한과 동맹관계를 갖고 있지만 실상을 보면 “무늬만의 동맹(Quasi Alliance)일 뿐, 합동군사훈련 한번 없었고 군사무기거래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국가 간에 동맹이 체결되려면 그 조건으로 공동안보이익의 필요성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 한중간에는 공동안보이익이 형성 중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 첫째 근거로 한중양국은 지금 일본과의 관계에서 영토문제를 위요하고 대결구도가 형성되어 있으며 또 한반도 안정을 위해 북한의 비핵화가 필요한데 이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도 한중양국은 안보이익을 공유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둘째로는 한중간에는 수교이후 경제협력이 지속적으로 증대되고 있는데 이제 한중협력은 단순한 우호관계 차원을 넘어서서 공동발전관계로 업그레이드되고 있으며 셋째로 동아시아국가들 간의 지역협력은 나날이 늘어나는데 이제는 일본이 아닌 한중양국의 협력만으로도 지역협력을 추동할 수 있다면서 그 실례로 1997년의 외환위기와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양국 협력의 효율성은 실증되었다고 말했다.

결론으로 그는 한중양국 간에는 공동의 전략적 이익이 존재하며 그 이익의 범위도 부단히 확대추세이기 때문에 한미동맹과 함께 한중동맹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나는 옌 교수의 제안이 매우 새로운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런 발언의 내면에 담긴 전략관점이 무엇일까를 순간적이나마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이 미일의 대중국견제나 공격기지로 변화되는 되는 것을 막겠다는 의도인지 아니면 최근 조성되고 있는 한미일 안보협력가능성을 보는 중국의 시각 속에 일본과 갈등관계인 한국을 가장 약한 고리로 보는 것은 아닌가하는 느낌이 뇌리를 스쳤다.

필자는 옌 교수에게 한중동맹론은 매우 의미 있는 제안이지만 당장 실천에 옮길 과제라기보다는 시간을 두고 검토해 나갈 과제 같다고 평가하고 옌 교수가 동의한다면 내년 봄 서울에서 한중문화협회와 칭화대학의 당대국제관계연구원이 공동으로 “한중동맹은 가능한가”를 주제로 학술회의를 열어 학자 간 토론을 갖자고 제안하였다. 옌 교수도 이를 흔쾌히 수락하였다.

 

② 남북대화에 대한 중국의 태도

 

뒤이어 나는 오늘날 북한이 일방적으로 패쇄 했던 개성공단은 재개되었지만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북한이 돌연 일방적으로 거부함으로써 남북관계의 개선전망은 현재 매우 어두운 실정인데 북한에 대해 가장 영향력이 큰 중국이 6자회담재개를 위한 외교노력은 강화하면서도 “남북관계 개선 문제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옌 교수는 현재 북한은 한국과 중국과의 관계가 나날이 긴밀해지고 유엔안보리에서 대북제재결의를 중국이 찬동하면서부터 중국의 외교적 권고에 대해 매우 경계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예로 “박근혜 대통령은 시진핑 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졌으나 북한의 김정은 제1비서는 아직도 중국을 방문치 못하고 있다. 한국의 외상은 수시로 중국외상과 대화하고 있지만 북한은 그렇지 못하다”고 지적하고 이 때문에 지금 중국이 남북한 관계에 끼여들 여지가 적다고 말했다.

 

나는 “그렇다면 정부수준에서는 어렵더라도 중국의 홍십자(紅十字)가 민간단체입장에서 남북한적십자단체들과 함께 만나 인도적 차원의 이산가족상봉문제, 대북식량이나 의료지원문제를 해결하도록 주선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겠는가.”고 물으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도 남북한 간의 인도적 문제해결을 시작으로 점차 신뢰를 회복함으로써 더 큰 협력으로 남북한관계를 발전시키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옌 교수는 “홍십자 역할론은 매우 의미 있는 제안으로 본다.

 

자기도 중한전문가위원회 위원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정부당국에 제기, 실현성을 타진해 보겠다.”고 답했다.

 

③ 일본의 집단자위권문제

 

Ⓐ 일본의 집단자위권과 미국문제

 

옌 교수는 일본의 집단자위권 주장을 미국이 지지했는데 이를 필자는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다. 나는 미국이 유엔헌장의 집단안보조항을 인용, 일본의 집단자위권을 지지한다고 말하지만 내심으로는 현재 모든 면에서 중국에 앞서는 미국에 대해 신형대국관계를 들고 나오면서 미중 양국 관계를 대등관계로 간주, 국제문제에서 양국이 동등한 발언권을 갖자고 요구하는데 대한 미국의 전략적 대응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이 집단자위권 행사를 명분으로 비무장헌법을 개정, 군대를 보유한 정상국가로 되면 머지않아 미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독자노선을 택할 가능성이 높은데 미국의 선택이 현명한지는 두고 볼 일이라고 덧붙였다.

 

나의 견해에 대해 옌 교수는 중국역사에서 성공한 군주가 갖는 덕목으로서 "시혜(施惠benevolence), 인의(仁義 righteousness), 의례(儀禮 rite)라는 사상적 전통을 오늘에 계승하고 있는 중국은 앞으로 미국과의 경쟁에서 물질적으로뿐만 아니라 가치문제에서도 앞설 것이라고 말하고 “중국이 떠오르는 대국이라면 미국은 쇠퇴하는 대국”인데 전자(前者)가 왕도(王道)를 걷고 후자(後者)가 패도(覇道)를 추구한다면 중국고대전략사상의 귀결로 보아 중국이 필승한다고 말했다.

이어 국제정치문제에서 리얼리스트(Realist)인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의 미국에 대한 신형대국관계 요구는 가장 현실적이라고 강조하고 한중협력도 이러한 상황변동과 연관된다고 말했다.

 

Ⓑ 인구는 자원인가 재앙인가

 

옌 교수는 일본은 인구의 고령화, 인구의 감소로 앞으로의 발전에 한계가 예상된다고 지적했다. 나는 한국도 유사한 문제를 안고 있으며 중국의 가장 큰 자원은 인구 같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옌 교수는 먹을 것과 일자리는 줄 수 없는데 인구만 불어나면 그것은 곧 국가적 재앙이 된다는 관자(管子)의 이론에 비추어 중국은 1가정 1자녀 정책을 유지해왔다는 것이다. 이어 소말리아 같은 아프리카 국가에서는 인구가 불어나면 그것은 자원이 아니라 곧 재앙이 된다고 지적하고 인구를 감당할 생산기반확충이 국력의 가장 중요한 기초라고 말했다.

 

3. 맺으면서

 

옌 교수와의 대화는 오찬까지 이어졌다. 나는 10월 25일 이 날이 중국인민의용군이 63년 전 한국전에 참전한 날이어서 중국정부나 언론이 이 날의 의의를 되새기는 행사를 갖는가를 눈 여겨 보았다. 내가 점검한 범위 내에서는 중국의 정부는 물론이거니와 TV 방송이나 신문의 한 구석에서도 중공군의 참전을 지나가는 뉴스로도 보도하지 않았다. 한편 이날 평양에서는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내각은 공동명의로 평양의 북·중 우의탑(友誼塔)에 헌화하고 고위 인사들이 중국지원군 전사자들을 추모했다고 보도했다.

 

한중문화협회가 지난 8월 한국휴전60주년 행사의 하나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중국군 사병을 초청, 파주의 중국군 묘지를 참배토록 주선한 바 있는데 이 행사는 비록 조그마한 일이었지만 한중간에 있었던 전쟁의 상처를 넘어서서 새로운 시대를 열자는 상징성에서는 나름의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아직도 한중관계는 어려운 구석들이 많고 중국지도층이 갖는 전략관점도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중국은 북한편이라는 선입견에 더 이상 묶여서는 안 된다. 중국이 우리의 실리-한반도의 평화, 통일, 번영-의 파트너가 되도록 양국관계를 다방면에 걸쳐 증진시키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한중관계를 발전시키는 가장 중요한 우리의 버팀목은 튼튼한 한미동맹임은 항상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항상 변하기 때문에 우리는 주변정세변화에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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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의 정상 외교대첩
작성일 : 13-07-18 13:38
 글쓴이 : 관리자 (121.162.10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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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일의 한중정상회담 수행기

                                         ---한중정상회담 수행을 마치고

 

                                                   한중문화협회 회장 이 영 일

 

1.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

 

나는 6월 중순 대통령 외교안보수석비서관으로부터 6월 27일부터 31일까지 진행될 한중정상회담 수행단의 일원으로 선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정상회담을 수행하는 한편 그간 중국의 대외문화교류협회와 한중문화협회 간에 협의된 MOU체결을 이번 베이징 방문길에 하자고 중국 측과 교섭, 6월 27일 하오 3시에 서명식을 갖기로 하고 베이징을 향해 오전 중에 김포공항을 출발했다. 이날 베이징 날씨치고는 너무 맑고 화창했다. 중국대외문화교류협회가 있는 중국 文化部 청사로 가면서 천안문 광장을 지나는데 대한민국 太極旗와 중국의 五星紅旗가 나란히 천안문 광장 사방에 줄줄이 세워져 있는 석탑 깃봉마다에서 휘날리고 있었다. 중국인민대회당의 동문 쪽에서 바라보면 천안문에 걸려있는 毛澤東 주석의 바로 코밑에서 태극기와 오성홍기가 펄럭이는 것이었다. 그것은 실로 감동적이었다. 나는 중국의 베이징을 그토록 많이 다녔지만 천안문 광장에서 태극기가 휘날리는 것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역사는 모택동 시대가 아닌 시진핑(習近平) 시대이며 가난한 한국이 아닌 세계랭킹 10위를 넘나드는 국가반열에 오른 한국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았다.

 

2. 이번 정상회담에서 들어난 특징

 

이번 정상회담의 특징을 요약한다면 양측이 이번 정상회담을 성공시켜 한중관계를 새 차원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의지가 그 어느 때 보다도 두드러졌다는 것이다. 박대통령이 중국영도들과의 대화를 잘 풀어가기 위해 필요한 요소마다에 합당한 중국의 故事成語, 論語나 諸子百家, 三國志등에 담긴 명언들을 사전에 잘 준비한 점도 눈에 두드러졌지만 그보다는 한중간에 나누어야 할 議題를 아무 제한 없이 논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중국 측도 정상회담 준비과정에서 과거와는 달리 한국 측에 마음을 열고 한국이 제기하고자하는 모든 의제를 폭넓게 수용함과 동시에 박 대통령의 방문을 최상의 국빈으로 대우하였다. 이러한 접대는 박대통령이 한중협력을 매우 중시하고 중국과의 우호협력관계를 심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주목한 데 기인한다. 또 중국인들에게는 박대통령이 걸어온 험난하고 기구한 인생사도 깊은 인상을 심어준 것 같다. 이번에 “절망은 나를 단련시킨다.”는 제목으로 중국에서 출판된 박대통령의 중국어 판 자서전이 중국서점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이러한 평가를 입증한다.

또 중국은 과거와는 달리 최상의 국빈만을 모시는 중국 인민대회당 3층에 위치한 金色大廳을 국빈만찬장으로 정해 박대통령을 초청했다. 덕분에 수행원들의 격도 높아졌고 만찬장의 우아한 분위기는 이 자리에 초청받았다는 사실자체에서 큰 감동과 긍지를 느낄 만하였다. 이날 만찬의 식간 행사에서는 박대통령이 좋아한다는 삼국지의 영웅 상산 조자룡을 등장시켜 장판파에서 적장 8명을 물리치면서 劉備의 아들을 구해내는 京劇을 문화공연으로 준비하는 등 박대통령을 기쁘게 해주려는 중국 측의 치밀한 준비가 돋보였다.

 

3. 정상 간의 폭넓은 대화와 합의도출

 

이번 정상회담의 하이라이트는 무엇보다도 양국정상이 양국 간의 모든 현안들을 격의 없이 논의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이번 정상회담에서 박대통령이 중국의 시진핑 주석에게 한반도 통일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하고 중국이 한반도 평화통일의 동반자가 되어주기를 바란다고 제안한 것은 특기할만한 역사적 제안이다. 이와 동시에 북한 핵은 어느 경우에도 용납할 수 없음을 구체적으로 지적, 호응을 얻어낸 점이다. 지금까지 한중간에 여러 차례 정상회담이 열렸지만 한국의 어느 대통령도 중국이 껄끄럽게 생각할 문제를 박대통령만큼 당당히 제기하지 못했다. 대개 중국 측이 사전에 불편한 의제는 논의대상에서 배제하거나 부담스러운 문제를 빼고 대화를 갖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상대화의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통일문제, 핵문제, 한중FTA문제, 역사인식과 관련된 인문교류문제, 탈북자 문제, 심지어 안중근 의사의 標識石을 하얼빈 역에 새기자는 문제까지를 중국 측에 내놓고 제기, 합의를 도출한 점에는 큰 방점을 찍지 않을 수 없다.

국내언론이나 외신보도는 공동합의문을 중심으로 성과를 분석하면서 북핵문제에 관하여 기존의 양측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고 평가하지만 정상회담의 진행과정을 보면 중국 측 은 문서로 보다는 마음과 행동으로 박대통령의 제안과 주장을 폭넓게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특히 북 핵 불용 입장을 한국 측 주장으로 떼어 공동합의문에 포함시킨 것 자체가 한국 측 주장을 수용한 것에 다름 아니다.

6자회담을 새로 추진하자고 제안하고 있는 중국으로서는 문서로서는 북한을 자극할 표현을 삼가고 있지만 정상회담에서 들어난 분위기나 행동에서 보면 박대통령의 제안을 대폭 수용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특히 리커창(李克强) 총리는 박대통령 앞에서 북 핵 불용입장을 공공연히 밝혔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북한비핵화를 말하는 것이다.

박대통령은 또 칭화대학 연설에서 한반도가 동북아시아 긴장의 진원지로 방치되어서는 어느 나라에도 이익이 될 수 없다면서 북한이 핵을 폐기,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면 동북아시아가 21세기 세계경제발전의 새로운 견인차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요즈음 북한이 핵 보유와 경제발전을 병행 발전시킨다는 이른바 핵ㆍ경제 竝進論이 어불성설임을 지적하였다. 박대통령의 연설은 형식은 칭화대학 학생들을 상대로 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중국 전체인민을 상대로 중국어를 섞어서 행한 명연설이었다. 중국CCTV와 인민일보 등 전 중국매스컴이 연설내용을 상세히 보도했기 때문이다.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중국은 기왕의 ①한반도 평화(不戰), ②북한안정(不亂), ③비핵화(无核)라는 우선순위를 ①비핵화(无核), ②한반도 평화(不戰), ③북한안정(不亂)의 순으로 정책중점을 전환할 것으로 전망된다. 당분간 중국이 북한을 버리는 선택은 기대하기 힘들지만 북한의 비핵화와 개혁개방을 촉구하는 압력은 앞으로 더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왜냐하면 북한에 핵이 있는 한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은 유지될 수 없고 일본 핵무장의 구실이 되기 때문이다.

이번 정상회담으로 한중관계는 여전히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로 정의되지만 막연한 전략적 동반자관계가 아니라 목적을 공유한 동반자 관계로 발전했다. 즉 한반도의 통일과 한반도 비핵화라는 목적을 공유하는 동반자관계로 전략적 동반자관계의 내용을 구체화시켰다는 것이 이번 정상회담의 가장 큰 성과라고 할 것이다.

 

4. 김정일 방중과 비교

 

金正日은 1984년 중국을 방문, 鄧小平을 접견하면서 1시간 동안 개혁개방의 필요성을 설명 듣고 현지를 답사하고 돌아온 후 개혁개방을 추진한다고 合營法 등 개혁개방 관련 14개 법안을 제정했다. 이어 개발특구로 나진선봉지구를 지정하면서 노선전환을 시도했다. 그러나 김일성과 김정일은 북한세습체제유지에 부담이 될 사상오염을 경계한 나머지 개혁개방을 사실상 포기하고 그나마 시행될 것처럼 보이던 나진선봉지구도 극단적인 통제와 간섭으로 외국 투자자들이 투자를 포기함으로 해서 실패했다. 그 후 2002년 다시 신의주에 세우려고 했던 특구는 중국이 신의주특구 행정장관으로 임명된 중국인 楊斌을 구속시킴으로써 계획자체가 와해되었다.

金正日은 김일성이 사망한 1994년부터 집권했지만 한중수교에 불만을 품고 중국과의 관계를 사실상 단절했다가 1999년부터 북ㆍ중 관계를 재개한 후 2001년부터 4회에 걸쳐 중국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중국외교부 초청이 아닌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가 주선한 비공식 방문이었기 때문에 방문 사실자체가 항상 공개되지 않았고 그의 여행 일정은 하나같이 비밀에 쌓였다. 따라서 2000년대에 들어와서 金正日은 네 차례나 베이징과 중국의 몇 개 도시를 방문했지만 천안문 광장에 한번도 人共旗와 五星紅旗가 揭揚된 일이 없었고 더욱이 전체 중국인민들을 상대로 하는 대중 강연은 있을 수도 없었다. 중국공산당 영도들과의 비공개 접촉과대화가 있었을 뿐이다. 이번에도 박대통령은 취임 4개월 만에 중국을 국빈 방문 했지만 김정일을 승계한 金正恩은 아직도 중국방문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5. 결론

 

한중관계는 변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부터 “가재는 게 편”이라는 俗言에 순치되어 중국은 항상 북한 편이라는 편견을 버릴 때가 되었다. 중국이 개혁개방 35년을 경과하면서 한중간에 놓여있는 체제차이는 거의 줄어들었다. 북한을 보는 중국의 관점도 바뀌고 있음이 이번 정상회담을 통하여 사실로 증명되었다. 문제는 앞으로 우리가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진전시켜 나가는가에 따라 우리가 원하는 통일도 달성할 수 있고 지속적인 평화도 누릴 수 있다. 정부수준에서는 한중 FTA도 느긋한 자세로 추진하면서 양국이 윈윈 할 수 있는 협상으로 매듭지어야 할 것이다. 동시에 한중간에 진행된 모든 대화 내용은 우리 우방들과도 공유함으로써 아무런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배려해야 할 것이며 일본과의 관계도 매끄럽게 풀어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중국인민의 마음을 한국을 지지하도록 끌어드리는 노력에서 큰 성과를 얻어야 한다. 최근 중국정치에서도 여론의 역할이 한층 더 중요해지고 있다. 지난 5월 19일 북한함정들이 중국어선을 나포하여 엄청난 몸값을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중국네티즌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북한을 배은망덕하다고 질타하였다. 이 사태에 당황한 북한 대사는 본국에 急電을 쳐서 9일 만에 중국 어부들을 석방시킨 일이 있었다. 中國 古史에 인민의 마음을 얻는 것이 천하를 잡는 법이라고 말했다. 한국에 와 있는 8만 명의 중국유학생에 대한 우리들의 관리가 제대로 되고 있는가. 중국국적을 가진 40만의 노동자들을 우리가 따뜻하게 대해주고 있는가를 우리는 깊이 반성해야 한다. 정부 대 정부수준의 외교와 함께 당 대 당, 국회 대 국회, 인민 대 인민수준의 외교가 보다 더 진지하게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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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2012년 9월 24일 동아일보에 기고한 이영일 칼럼입니다

[기고/이영일]日의 아시아 회귀, 과거 청산 선행돼야

기사입력 2012-09-24 03:00:00 기사수정 2012-09-24 03:00:00


 

이영일 한중문화협회장

중국과 일본이 센카쿠(尖閣)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 영유권을 둘러싼 외교적 갈등을 겪고 있다. 이 사태가 중국인들의 해묵은 반일정서에 불을 붙여 중국 내 반일시위가 양국 수교 이래 최고조에 달했다. 중국 당국도 시위대가 이성적 항의를 할 경우 막을 도리가 없다며 묵인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중국에서 진행되는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대일 규탄 운동은 우리에게 결코 불구경거리가 아니다.

전체 5개 섬과 3개 도초(島礁·간만의 차에 따라 암초가 됐다 섬이 됐다 하는 바위)로 이뤄진 댜오위다오를 두고 일본에서는 1884년 오키나와 주민이 처음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중국에서 댜오위다오를 중국 영토로 주장하는 중요한 근거 중 하나는 1865년 작성된 중국 지도에 댜오위다오가 푸젠(福建) 성에 속한 섬으로 표시돼 있다는 것이다. 일본은 청일전쟁 중에 댜오위다오를 자국 영토로 편입시켰다. 1951년 일본이 연합국과 맺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미국 지배를 받기도 했지만, 1971년 관할권이 일본에 넘어가면서 지금까지 일본이 실효지배하고 있다.

독도는 어떤가.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우연히 동해상 독도를 발견하고 이 섬을 일방적으로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뒤 1910년 조선을 일본에 합병시켰다. 이어 만주사변, 중일전쟁을 일으켰다가 마침내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하고 몰락했다.

나는 일본이 댜오위다오를 자국 영토로 주장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메이지유신을 통해 아시아의 강자로 등장한 일본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裕吉)가 말한 ‘탈아입구(脫亞入歐)’를 개혁의 명분으로 삼았다. 아시아 국가의 테두리를 벗어나 유럽 국가와 같은 반열에 서서 이웃 국가들을 침략함으로써 자국의 영역을 키우는 제국주의의 길을 걷겠다는 것이었다. 1924년 11월 일본을 방문한 쑨원(孫文)은 일본에 “공리강권(功利强權)을 추구하는 서양 패권의 응견(鷹犬)이 될 것인가, 인의도덕을 중시하는 동양 왕도의 간성이 될 것인가”를 물었다. 결국 일본은 아시아 침략을 추구하다가 패망했다.

그 뒤로 전개된 역사도 결코 일본의 망상을 용납하지 않았다. 아시아는 바야흐로 세계사의 중심이 됐다. 미국도 아시아 중시 정책을 공식화했고 일본도 결국 탈아입구의 미망을 버리고 아시아 회귀를 지향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러나 일본의 아시아 회귀의 대전제는 잘못된 과거를 확실히 반성하고 청산하는 것이다. 독도를 자기 영토라고 억지를 부리고 댜오위다오를 국유화하겠다고 말하기 전에 일본 제국주의의 과거 청산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일본의 잘못된 태도에는 미국에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 태평양전쟁의 전범은 비교적 엄히 다스리면서도 아시아 침략의 원흉들에 대해서는 덜 엄격했던 점이다. 그 결과 전후 일본의 정치는 전범과 그 후예들이 좌지우지하면서 과거 청산이 독일처럼 철저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바로 여기에 오늘날 동북아시아 정세 혼란의 원인이 있다고 본다.

이제 한중 양국은 독도나 댜오위다오 문제를 자국만의 문제로 보는 좁은 시각을 넘어서서 아시아적 차원에서 일본의 잘못된 과거 청산을 요구하는 공동 협력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일본이 철저한 과거 청산 없이 아시아로의 순조로운 회귀가 불가능함을 확실히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

이영일 한중문화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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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은 한중문화협회가 1942년 10월11일 당시 중국의 임시수도 충칭(重慶)에서 창립된 지 어언 70주년을 맞습니다. 이 뜻 깊은 역사를 기리기 위해 저희 협회는 두 개의 일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중국 푸단(復旦)대학 石源華 교수가 저술한 한중문화협회연구(中韓文化協會硏究)를 한국어로 번역, 출간(500페이지)하고자 합니다.다른 하나는 한중문화협회창립의 의의와 앞으로의 과제를 모색하는 대규모 국제학술회의를 개최, 한중간의 갈등을 줄이고 협력을 확대하는 방안을 도출하고자 합니다.

 

일상적으로는 잘 거론되지않는 사실(史實)이지만 조선(朝鮮)의 망국(亡國)은 일본이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 때문이 아닙니다. 일본이 1910년 군대로 조선의 궁성을 포위한 가운데 이또히로부미가 조선왕을 강권으로 위협, 일본에 합병하는 조약을 강제체결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따라서 우리나라는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한다고 해서 자동(自動)으로 독립될 수 없는 법적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다행히 카이로 선언, 포츠담선언을 통한 연합국들의 지지로 독립을 달성할 수 있었지만 이렇게 되는 데는 3.1운동 이래 부단히 전개된 우리 민족의 끈질긴 항일독립투쟁의 결과였습니다. 동시에 1942년 한중문화협회 창립을 계기로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연합국 수뇌들에게 일깨워준 중국의 외교적 협력-특히 카이로 선언발표-에도 힘입은 바 큽니다.

 

당시 중국은 정식으로 수교하고 있는미국과는 중미문화협회(中美文化協會), 소련과는 중소문화협회를 창립하여 민간들 간의 우호협력을 도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국가도 정부도 없는 한국임시정부를 상대로 중한문화협회 창립을 지지한 것은 한국의 해방과 독립을 정당한 것으로 믿고 이를 지원하겠다는 강력한 의사표시였습니다.

 

중국이 연합국들의 의견불일치로 한국임시정부에 대한 정부승인은 유보했지만 정부승인에 거의 준하는 기구로서 중한문화협회를 창립한 것은 한국의 독립운동과정에서 중국이 보여준 값비싼 응원으로서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 갖는 의의가 실로 지대하였습니다.

 

중국은 1942년 韓中文化協會의 창립을 기반으로 해서 1943년 카이로에서 열린 연합국 수뇌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에 관한 국제적 합의를 유도하고 이것이 기초가 되어 1945년 독일의 포츠담에서 열린 일본항복조건에 관한 연합국선언에 한국독립조항을 포함시키는데 필요한 외교적 지원을 제공해주었습니다.

 

한중문화협회가 창립된 지 3년 후에 일본은 패망했습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던 大韓民國臨時政府 指導者들이 還國하고 大韓民國政府가 수립되었습니다. 임시정부지도자들 가운데서 趙素昻선생(臨時政府 當時 外交部長)은 한중문화협회의 창립으로 표현된 1942년의 한중협력정신이 광복된 祖國 大韓民國(當時는 大韓民國臨時政府)에서도 계속 승계, 발전되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귀국후 한국의 수도 서울에 韓中文化協會간판을 내걸었습니다.이후 조소앙 선생이 6.25전쟁시 납북되어 1958년 북한땅에 묻히고 생존한 동지들이 1965년 한중문화협회를 재건하고 정부의 외교통상부에 등록함으로써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제 한중문화협회는 어언 창립 70돌을 맞습니다. 1949년 신 중국이 탄생한 이후 臺灣으로 주소를 옮긴 中韓文化協會는 이제 명칭을 中韓經濟文化基金會로 바꾸었습니다. 서울의 한중문화협회가 韓中修交 후 관계를 단절했기 때문입니다. 한중문화협회는 中國代表權을 가진 중국과의 우호협력단체이며 중국의 일부가 된 대만을 상대로 하는 민간우호단체의 길을 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한국에는 한중수교 후 韓中友好協會가 조직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한중문화협회가 옛 명칭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中國國際友好連絡會 등 민간외교단체와 제휴, 활동을 지속하는 이유는 한중문화협회창립이 한중관계의 역사에서 갖는 의의가 크고 이 정신의 토대위에서 한중 양국 인민들 간의 우호협력이 계속 증진되어야 한다는 역사적 당위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현재 한중문화협회는 7만여 명의 중국유학생들이 모두 한국에서 성공하고 돌아가도록 필요한 지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한국생활에서 필요한 법률지식 자료, 한중문화협회 附設 人權委員會를 통한 無料辯論 등 법률구조활동, 한중관계의 역사와 한반도의 현실에 대한 교양강좌, 한국문화강좌 등을 실시하고 전국 15개 支會를 통해서도 한국유학생활에 따르는 苦情을 청취, 이를 해결하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또 60여만 명의 中國國籍노동자들의 권익옹호를 위해서도 각별한 관심과 지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한국 독립 운동가들이 중국대륙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시절에 중국인민들에게 진 우정의 빚(友情債)에 보답하기 위해서입니다. 저희 협회의 70주년 기념사업들은 이상의 뜻과 목표를 이루는데 기여하자는 것입니다.

 

한중문화협회는 앞으로도 사업의 대상과 범위를 넓혀가면서 정치외교차원의 과제보다는 사회 문화 분야의 교류협력에 역점을 두면서 한중양국이 하늘이 맺어준 隣邦으로서 서로 이해하고 서로 돕고 서로 우정을 나누는 동아시아 공동체를 이뤄나가는데 일익을 담당할 것을 기약합니다.

2012년 9월

사단법인 한중문화협회 회장 이 영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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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 20년을 돌아보면서

 

중국은 북한의 유보요구를 거부

 

한국과 중국이 국교를 수립한지 어언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수교당시에는 실감하지 못했지만 20년이 지난 오늘의 시점에서 회상하면 한중수교는 동북아시아 국제정치지형을 크게 변화시킨 동인이었다. 북한은 이 변화를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않았다. 김일성은 1989년 자기 생애에서 48차로 베이징을 방문, 장쩌민(江澤民) 주석에게 한중수교로 달리는 중국의 입장을 재고해줄 것을 간청했다. 또 1990년 하반기에는 그의 제49차 중국여행지인 심양(審陽)에서 장쩌민 주석과 다시 만나 한중수교에 대한 북한 측의 우려를 밝혔다.

그러나 중국은 당시의 실력자 덩샤오핑이 한중수교가 중국에 무해유익(無害有益)하고 한국과 대만관계가 단절됨으로 해서 중국의 통일에도 도움이 된다는 입장을 표명, 한국과의 수교정책을 굳히고 있었다. 또한 한국 측도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북방외교정책을 통해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을 포함하여 소련과도 이미 수교관계를 맺음으로써 중국과의 수교명분을 자연스럽게 조성해놓았다.

이런 상황에서 1991년 9월 17일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함으로써 한중양국의 수교에 대한 외교상의 걸림돌이 모두 제거되어 수교협상이 원만히 타결되었다. 장쩌민 주석은 이때 당시 첸치천(錢其琛)중국외상을 평양에 보내 한중 수교결정을 사전에 통보하고 김일성의 이해와 지지를 구하는 절차를 가졌다. 그러나 김일성은 자기가 최초로 입당했던 중국공산당이 자기의 유보요구에도 불구하고, 또 미국이 북한과의 수교를 외면하는 상황에서 한국과의 수교를 결정한데 큰 상처를 입고 1994년 그가 죽을 때까지 중국을 다시 방문하지 않았다.

 

동북아시아 정치지형에 변화 초래

 

당시 한중수교는 한중양국이 냉전해체의 정치과정에 진입함으로 해서 필연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상황의 과제였다. 중국은 덩샤오핑이 주도하는 개혁개방정책이 1989년 천안문 사건이후 개혁의 폭과 규모를 더 한층 확대하는 실리외교를 펼치면서부터 수교를 통한 한국의 대중경제협력을 기대했다. 이것은 그간 한국의 경제발전이 중국의 경제발전의 모델로 부각될 만큼 성장한데 기인한다. 한국은 중국과의 수교를 통해 동북아시아 정치에서 중요한 행위자(Actor)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고 한국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무역환경을 갖게 되었다. 특히 한국과 중국은 지리적으로 인접, 닭울음소리와 개짓는 소리가 들릴 만큼 가깝다고 양국관계가 형용된다. 오늘날 중국시장이 개방되고 중국이 총량GDP에서 세계2위국으로 부상됨에 따라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는 중국과의 거래를 모색하는 모든 국가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수교와 동시에 한중무역규모는 작년 말로 2,200 억 달러에 이르렀고 한중간의 인적 교류는 600만 명을 돌파했다. 한국은 중국의 3대 무역파트너이고 한국 제1의 투자대상국이다. 북한과 중국의 교역량이 작년 35억 달러일진데 한반도의 남북한을 보는 중국인의 시각이 옛날 혈맹논리에만 묶여있을 수 없게 되었다. 최근 한중친선협회의 이세기 회장은 그의 “중국관계 20년”이라는 최신 저서에서 “한국은 불의(不義)에 못 참지만 중국은 불이익에 못 참는 국민성을 지녔다”고 지적했다. 한중 양 국민들이 지닌 국민성의 어느 측면을 적실히 표현한 것 같다. 한중관계가 앞으로 양국국민의 이익을 반영하는 쪽으로 변해 가는 것은 외교사의 필연적 귀결이다. 단기적으로는 중국이 북한과의 혈맹이라는 냉전논리의 잔영을 철저히 털어내지 않음으로 해서 한중관계가 불편해지는 측면도 있었지만 앞으로의 중국제5세대 지도부가 출범하면 냉전잔영세대가 대거 퇴진함으로 해서 한중양국 간의 구체적 실리에 역점을 두는 중국의 새로운 주변국정책이 실시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중관계 변화의 단계적 이해

 

중국정부는 한중관계를 그들의 입장에서 단순수교단계, 협력적 동반자관계, 전면적 협력동반자관계,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로 발전해 왔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단계설정의 기준과 의미를 형용사적 차원을 넘어서서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필자가 아는 한 한국에도, 중국에도 없다. 그저 그럴 것이라는 외교적 수사에 불과하다. 필자가 보기에 한중관계는 지난 20년 동안 ①수교초창기의 밀월단계, ②경제적 이해차이의 실감단계, ③정치, 외교, 안보적 이해갈등의 표출단계, ④새로운 조정단계로 변전해왔다고 생각된다.

 

국가 간의 외교관계 수립이 양국관계의 모든 국면을 선린우호관계로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한미관계도 외견상으로는 좋아 보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대립과 갈등국면이 적지 않았다. 특히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시기에는 노골적인 대립이 표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여러 채널을 통한 대화로서, 때로는 주고받음으로써, 때로는 어쩔 수 없이 불리를 감수 감수하면서 그래도 우호협력관계를 이어왔다. 한중관계도 예외는 아니다. 김대중 정부시절의 마늘수입을 둘러싼 갈등, 해난사고와 해적문제, 중국으로 몰려간 한국 중소투자기업들의 줄도산 같은 사태도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최근에 와서 확실히 노출된 안보이익상의 갈등으로서의 천안함 문제, 연평도 포격사건을 보는 한중간의 시각 차이는 심각했다. 수교20년이 지나면서도 아직까지 영사협정이 체결되지 않은 상황 하에서 불거져 나온 김영환 씨 등에 대한 고문사건도 오늘의 한중관계가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로 쉽게 표현되기 힘든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대화와 소통,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입장에서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한중관계의 앞으로의 과제

 

수교20 주년을 맞으면서 정부와 국민들이 함께 반성할 일이 있다. 우선 정부는 중국을 상대로 의연한 외교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국민들의 눈에 보이는 정부의 자세는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의 유행가의 가사 한 대목이 연상될 정도로 중국과의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정부의 태도가 너무 쪼는 것 같다. 중국경계론이나 위협론이라는 미국공보원식의 정세분석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지금 한국의 스포츠맨들은 세계 어느 나라선수들과 상대해도 결코 쫄지 않는다. 우리는 새마을 운동 성공이래 어느 나라라도 따라잡을 수 있다는 국민철학을 가지고 엽전 콤플렉스를 극복했다. 한국축구가 영국을 이긴 소이도 여기에 있다.

중국의 무역보복도 겁낼 필요가 없다. 중국이 한국과의 무역에서 적자를 내는 것은 그들의 이익을 위한 선택일 뿐이다. 다른 나라들과의 FTA를 통해 수출시장, 원자재 시장을 다변화하면서 중국에의 의존도를 줄여나가면 된다. 중국이 벌이는 애국주의를 앞세운 중화주의(中華主義) 고취, 부국강병을 위한 군사력증대, 우주개발에 기죽을 필요가 없다. 체제안정을 통해 공산당의 일당통치를 공고히 하려는 중국내수용 정책들이기 때문이다.

한중간에 영사협정이 맺어지지 않고 인권 면에서 한국을 차별하는 추세가 지속된다면 그러한 상황 하에서의 한중 FTA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한중FTA협상의 중단을 정부는 검토해야 한다. 인권이라는 현대세계에서 가장 유효한 외교카드를 포기하는 정부는 더 이상 존속할 가치 있는 정부가 아니다. 대통령이나 외교통상부장관도 어느 나라와의 관계에서도 우리의 태극전사들처럼 쫄지 말고 당당해지는 외교를 펼쳐야 한다. 이것이 한중수교20주년을 20주년답게 맞는 정도이다.

국민들도 중국을 넓은 시장과 13억을 넘는 소비인구를 가진 땅으로만 보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중국의 커진 국격을 존중하면서 한국인과 경쟁할 상대가 13억명 이상이 있다는 것으로 오늘의 중국을 이해해야 한다. 중국대륙을 우리의 확고한 시장으로 만들어나가기 위해서는 중국을 상대로 하는 소프트파워가 민간외교의 기반으로 뿌리를 내려야 한다.

한국에 와 있는 8만 여명의 중국유학생과 60만 명을 넘는 중국국적의 노동자들이야말로 한국의 중국시장진출을 위한 좋은 자산이 아닐 수 없다. 기업들도 중국노동자를 저임금의 수입원(收入源)으로 만 보는 태도에서 벗어나 한중친선과 중국시장을 확보하는데 보탬이 될 선전일꾼으로 만들겠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관리해나가야 한다. 대학당국들도 중국유학생들을 정원외(定員外) 수입원이나 정원미달을 메우는 수단으로만 보지 말고 한중관계의 미래를 개선해 나갈 사절(使節)로 보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 정부와 국민이 이러한 자세로 힘을 합쳐나간다면 한중수교 20년은 앞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길을 트는 외교의 대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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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개혁과 그 전망

1. 정치개혁논의의 대두와 확산

 

중국에서 정치개혁의 바람이 크게 일고 있다. 흔히 개혁이나 혁명은 주도세력의 성향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된다. 주도세력이 지배층일 경우 “위로부터의 혁명", 하층 피지배집단일 경우 ”아래로 부터의 혁명"이라 부르고 주도세력이 지배층이나 피지배층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사회적 신분집단으로서의 지식인들이 개혁의 줌심에 설 경우 이를 막스 붸버는 “옆으로부터의 혁명”이라고 불렀다.

 

현재 중국에서는 위로부터, 아래로부터, 옆으로 부터 정치개혁의 바람이 일고 있다.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위로부터’즉 중국의 최고지도층에서 정치개혁문제가 제기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원자바오 총리는 2010년 8월 선전(深玔)을 방문한 자리에서 정치개혁문제를 들고 나왔으며 작년 3월에는 전국인민대표대회(약칭 전인대)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다시금 정치개혁문제를 공공연히 거론했다. 또 금년 3월에도 전인대 기자회견에서 중국이 정치개혁을 단행하지 않으면 문화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아래로부터’의 개혁요구는 매년 12만 건을 넘는 당정(黨政)에 대한 민간항쟁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항쟁들은 중국공산당에 대한 개혁요구라기보다는 일선행정기관이나 당 간부들의 비리, 부패, 독직(瀆職)에 대한 시정요구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따라서 개혁논의는 중국의 경우 중국현대사가 보여주듯 아래로부터 보다는 위로부터 추진되는 개혁논의를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간 중국에서의 정치개혁운동은 이른바 반체제 지식인(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류샤오보 등)들의 전유물처럼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중국공산당을 지지하면서도 중국이 더 큰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경제에 못지않게 정치에서도 개혁이 필요하다는 체제내적 지식인들이 등장하고 있다. 한 예로 베이징 정경대학의 위커핑(兪可平)교수의 주장을 보자. 그에 의하면 1978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경제개혁은 지난 30년 동안 유례없는 경제발전을 가져왔는데 이제는 바로 이렇게 이룩된 경제성장이 중국의 정치와 국가운영(Governance)에 심각한 변화를 일으킬 조건들을 창출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중국통치변화의 5개항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내용인즉 ① 앞으로 중국은 일원화된 통치에서 다원화 된 통치로,②집권에서 분권으로,③인치(人治)에서 법치(法治)로,④규제정부에서 공공봉사 정부로,⑤당내민주에서 사회민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또 "중국의 정치모델은 전통적인 사회주의 모델이나 또 서방 국가의 자본주의 모델과도 확연히 다르며 그 특징으로 첫째 당 조직을 위주로 하는 다원화된 통치구조, 둘째 핵심가치를 안정(安定)에 두는 통치구조, 셋째 법치와 인치가 동시에 작용하는 통치구조라고 했다. 이것이 이른바 중국특색적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 같다.

2. 정치개혁논의의 관점 차이

 

오늘날 중국의 정치개혁은 이를 주장하는 입장에 따라 관점이 상이하다. 농민들 차원에서는 당과 관료의 부패, 독직, 인권유린을 막고 선정(Good Governance)을 펴라는 행정개혁에 정치개혁의 중점을 두지만 지식층의 정치개혁은 중국의 정치가 경제발전수준에 걸맞도록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지식인들은 건국 초기에는 국권확립이 초미의 과제였기 때문에 인민주권보다는 공산당 독재를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였지만 이제는 당의 일방적인 위민(爲民)정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법치의 확립과 인민의 참여폭 확대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중국 현직(現職)지식인들은 실제로는 등소평 시대의 지식인, 전문인 우대정책에 힘입어 공산당과 긴밀히 유착하고 있다. 이들은 공산당이 필요로 하는 국가발전의 기술적, 이론적 측면을 지원하고 공산당은 이들의 건의를 실천하면서 지식인들의 권익을 존중해주었다. 이 때문에 오늘의 중국지식인들은 많은 예외가 있지만 중국이 처한 역사적 현실에 비추어 공산당의 일당체제는 불가피하며 현재의 통치모델을 유지함으로써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오늘날 중국공산당의 고위 간부들도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인민들의 소리를 외면할 수 없다. 우선 인민들의 불만은 경제발전으로 높아진 권리의식에 상응하는 정치발전이 따르지 못하다는 것이다. 둘째 법치가 확립되지 않은데다가 공직의 부패와 특권의 폐해가 너무 심각하다. 셋째 사회안전망은 취약하고 지역 간, 계층 간, 도농 간 격차가 나날이 커지고 있다. 넷째 정부행정도 비용에 비해 효율성이 크게 떨어진다. 따라서 중국에서의 정치개혁은 시간이 흐를수록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점차 공산당이 해결해야할 필수적 과제로 변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중국의 정치개혁논의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어떠한 개혁논의도 공산당의 영도를 전제로 한 수직적 민주주의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안 된다는 한계다. 즉 공산당은 중국의 사상, 정치, 조직, 군사를 영도하며 어떠한 세력도 이에 맞설 수 없고 영도자의 교체는 당내 민주절차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작년 3월 우방궈(吳邦國)전인대 상무위원장이 중국은 어느 경우에도 다당제나 삼권분립 같은 서방제도를 따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정치개혁의 한계를 명확히 밝힌 발언이다.

 

3. 정치개혁의 방향타로서의 계급혁명과 일당독재

 

모택동이 문혁(文革)이라는 극단적인 개혁노선을 선택한 것은 가열한 계급투쟁이 없는 한 중국에서의 공산화 개혁은 결코 완수될 수 없다는 상황평가-물론 다른 정략적 이유가 더 크지만-의 산물이었다. 등소평은 계급투쟁노선의 과오를 인정하고 이를 청산했으나 이 반면 훈련된 조직을 가진 공산당의 일당독재를 중국의 안정과 발전, 중국이 꿈꿔온 4대현대화를 이루는데 필수적인 요소라고 보았다.

 

이들 두 영도(領導)들 사이의 공통점은 양자 공히 서구의 제도를 그대로 수용하기보다는 이를 중국화 시켜 거기에 합당한 명칭을 부여한 점이다. 모택동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중국현실에 창조적으로 적용한다는 명분하에 모택동주의를 만들었다. 등소평은 서구의 시장자본주의를 받아들이면서 이를 중국현실에 대입하는 명분으로 사회주의 초기단계론을 들고 나왔다. 중국이 사회주의의 높은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약100년가량 공산당의 일당체제하에 사회주의 초기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말하고 이를 중국특색적 사회주의라고 명명했다.

 

문혁당시 등소평은 모택동에게 개인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받았지만 1981년 이른바 “중국공산당의 역사에 관한 주요결의”에서 모택동의 공(功)을 7, 과(過)를 3으로 평가, 모택동을 중국공산당의 위인으로 예우했는데 이것도 그의 지론인 공산당의 일당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심모(深謀)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모택동의 부정은 공산당 일당독재의 정당성 부정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중국이 당면한 문제는 공산당의 일당독재체제에서 줄곧 일어나는 인민들의 불만과 민주화요구를 어떻게 수렴, 극복해 나갈 것인가로 집약되고 있다.

4. 중국특색적 민주주의 지향

 

그간 중국은 민주화의 대안으로 인민민주와 당내민주를 실천해왔다. 중국의 정치학자들은 중국이 자치(自治)를 목적으로 시도한 촌민(村民)선거가 이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면서 중국에는 이미 새로운 형식의 민주정치가 질서정연하게 추진되었고, 이제 민주는 일종의 보편적인 추구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촌민선거는 最一線 행정기관의 장을 주민이 직접 선출하는 것으로 이러한 훈련을 쌓아 점차 선거대상을 높여 나간다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이 방식을 일선행정기관의 長人選뿐만 아니라 당직인선에도 적용한다. 중국에서 말하는“인민민주”와“당내민주”는 바로 이를 일컫는다.

 

최근 베이징 대학의 판웨이(潘緯)교수는 중국의 정치개혁을 민주화라는 큰 틀에서 보다는 중국이 필요로 하는 개혁의 수요적(需要的), 실천적 측면을 집약한 5가지의 자문형(諮問形) 법치정체로의 개혁을 제안한다. 즉 중립적인 문관 관료시스템, 자주적 사법시스템, 독립적인 반부패시스템, 전국과 성(省)인민대표대회를 핵심으로 하는 사회자문시스템, 법률로 한정된 언론, 출판, 집회와 결사자유 같은 대증요법(對症療法)적 개혁안을 내놓고 있다.

오늘날 중국의 지식인들은 중국은 이미 나름대로 민주화를 제도화시켜 중국실정에 맞는 시스템, 즉 중국특색적 민주주의를 구축했다고 본다. 아울러 이들은 소련의 성급한 정치개혁의 실패, 제3세계국가들이 민주화이후 겪는 혼란과 갈등, 무절제한 욕구의 분출을 보면서 중국의 일당체제가 갖는 효율성, 정당성을 옹호한다.

그러나 후진타오 주석이 꾸준히 주창하고 있는 화해(和諧)사회나 과학적 발전관을 반영하는 당정 개혁은 아직도 많은 시간이 흘러야 정착될 것 같다. 작년 12월 광동성 우칸(烏坎)촌에서 일어난 주민들의 집단항쟁과 최근 보도된 충칭(重慶)시의 보시라이(薄熙來)사건은 오늘의 중국 상황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중국공산당은 아직도 일당독재에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부정과 비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또 인터넷과 통신수단의 발달로 당과 정부에 의한 정보단속도 어려워지고 있다. 아울러 일당독재를 버리고 국민직선과 삼권분립 등 서방제도를 도입한 러시아와 타이완(臺灣)이 정치안정을 이루는데 성공하고 있다는 사실도 1당독재가 최선이라는 논리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사례가 되고 있다.

5. 결론과 전망

 

금년 18차 공산당 대회는 역사상 처음으로 당 간부들의 협의와 합의를 통해 국가주석을 추대하는 당 대회다. 이 대회는 태자당(太子黨)(당 간부자제들이 중심)과 샹하이파(上海派: 장쩌민 등)가 미는 시진핑(習近平)이 국가주석으로, 공산주의청년단파(후진타오 계열과 일반 대중들)가 지지하는 리커창(李克强)이 총리를 맡는 투톱체제로 될 것으로 전망된다. 따라서 새 정부는 종래와는 달리 다소 성향이 다른 파벌들의 영향력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질 것이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의 리청(李成)박사는 2011년 J일보 초청 강연에서 앞으로 중국의 새 지도부는 시진핑-리커창 간의 연립정부형태로 운영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지금까지 중국공산당은“시대변화에 보조를 같이하고(與時俱進), 영도들이 매월 집체학습을 통해 앞날에 닥칠 위험요소와 포착할 기회를 토론하면서 국정을 리드하기 때문에 영도집단내의 소통과 단결과 협력은 잘 유지될 것이다. 이들은 또 공산당의 일당체제유지에 利害를 공유하기 때문에 자스민 혁명 같은 위기가 닥쳐도 이를 능히 막아낼 수 있다. 인민들의 불만도 많지만 아직까지는 공산당에 대한 보편적 반대는 약하고 서구식 민주화에 대한 지지(약15%정도)도 그리 높지 않다. 또 인민들의 불만관리도 억압보다는 이를 수용하거나 설득하는 Mechanism을 활용하기 때문에 공산당의 통치는 여전히 안정적이다.

 

앞으로 중국은 정치개혁을 중국특색적 민주주의로 진행해 나갈 것 같다. 그러나 모택동이 계급투쟁에 집착, 실패를 자초한 것처럼 등소평 이후의 개혁세대들도 일당독재의 효율성, 안정성에 너무 집착하고 있다. 특정원칙에 묶이면 신축성을 잃고 위기관리능력도 떨어진다. 앞으로 중국의 정치개혁이 중국의 현실적 여건을 충분히 감안하면서도 인민의 참여확대와 자유 신장을 통한 政權淨化능력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추진되어야 중국의 지속적 발전이 가능할 것이다. 인민들의 자유로운 정권감시기능을 통해서만이 독재정치에 필연적으로 부수하는 부패를 줄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정치개혁이 전개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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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정 賣國 발언, “이어도, 섬이 아닌데...

무모한 도전이 中國자극

중국“해양 감시선과 항공기를 동원한 정기순찰 대상 해역에

이어도를 포함시킬 것”

金成昱
從北주의자들의 親中사대 행각이 선을 넘고 있다. 통합진보당 공동대표 심상정은 7일 서울 청계광장 촛불집회에서 “이어도는 섬이 아니라 암초”인데 “해군의 무모한 도전이 중국을 자극하고 갈등을 유발한다”고 비난했다.

이어도가 위치한 제주도 남쪽 8만㎢ 면적 ‘7광구’는 막대한 자원의 寶庫(보고)로서 최근 중국은 이어도를 자국 관할 해역인 양 억지를 부리고 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중국 류츠구이(劉賜貴) 국가해양국장(장관급)은 3일 전국인민대표회(전인대) 개막을 앞두고 官營신화통신과 인터뷰에서 “해양 감시선과 항공기를 동원한 정기순찰 대상 해역에 이어도를 포함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중국의 이어도 침탈 욕망이 노골화되는 가운데, 정치인들은 오히려 이어도는 섬이 아니라며 해군의 무모한 도전(?)을 비난한다. 아래는 통합진보당이 공개한 심상정의 발언 전문이다.

심상정 공동대표, 강정마을의 평화를 촉구하는 촛불집회 발언
- 2012년 3월 7일 (수) 저녁 8시 청계광장

여러 바쁜 일을 뒤로하고 구럼비의 고통, 강정마을의 아픔을 함께하기 위해서 달려와주신 시민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새벽 트위터를 보고 여러분들 경악했을 겁니다. 화약구멍과 전선이 이어져서 거북이 등짝처럼 되어버린 구럼비 바위의 등짝을 보면서 저는 정말 경악했습니다.

3만여년 생을 이어온 구럼비 바위가 폭파돼서 그 이상 유구한 역사 동안 우리 생명과 평화가 위협받게 될 것이라는 그런 걱정 때문에 여러분들 이 자리에 오셨다고 생각합니다.


작년에 국회에서 제주해군기지예산을 90% 삭감했습니다. 건설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국민도 반대합니다. 제주 도민도 반대합니다. 도지사도 반대하고 의회도 반대하고 모두가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 일을 총선 한 달 앞두고 이렇게 무자비하게 밀어붙이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지난 20일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강행하겠다, 이렇게 이명박 대통령이 밝힌 이후에 오늘과 같은 폭거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자연유산에 대한 쿠데타이고, 국민에 대한 도전이며, 생명에 대한 폭력입니다.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해군이 국회에 와서 여러 차례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주 해군기지를 건설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 남방해역의 군사주권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명백한 사기입니다.

건국이래에 남방해역에 그 어떤 분쟁도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이어도, 그건 섬이 아닙니다. 암초입니다. 오히려 해군의 몸집불리기를 위한 이런 무모한 도전은 중국을 자극하고 갈등을 유발하는 안보를 위협하는 행위라고 우리가 여러 차례 강조했습니다.

또 민군복합항, 미항을 만들겠다는 대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시뮬레이션 과정을 통해서 공사를 저지시켜보겠다고 제주도에서 나섰습니다. 물론 공사를 중단시키기 위한 방법일 뿐입니다. 제주도는 생명의 섬이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반대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민군복합기지라도 우리는 반대합니다. 민군복합기지는 가능하지도 않은 일입니다.

세계 민군복합기지로 샌디에이고를 예로 드는 해군이 있어서 제가 작년에 미국 갈 때 샌디에이고를 방문했습니다. 샌디에이고 안에 군항 따로 있고 민항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철저한 보안과 통제를 해야할 군기지와 자유롭고 아름답게 개방해야할 민항하고 어떻게 한 항구 안에 공존할 수 있습니까? 그게 가능합니까? 저는 정치권에서 이런 엉뚱한 대안을 거론하는 것을 이제 중단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제가 지난 1월 중순에 강정마을을 방문했는데요. 그 때 제주도지사에게 촉구했습니다. 90%예산을 삭감해서 공사를 중단하라고 했음에도 공사를 계속하는 것에 대해 우리 강정마을 주민들의 걱정이 너무나 컸습니다.

“당장 공사를 중단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분명한 답은 제주도지사가 가지고 있다, 공유수면매립 허가 당장 취소하고 공사중지명령 내려야 한다, 절대보존지구 해제 빨리 복원시켜야 한다, 그거 도지사 권한이다”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 자리에 오면서 보도를 보니까 공사 중지를 위한 행정명령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왜 폭파된 이후에야 공사중지행정명령을 내렸는지 정말로 안타깝기만 합니다.

우리 통합진보당은 여기 모인 여러분들과, 지금 제주에서, 전국에서 연대하고 있는 분들과 함께 반드시 구럼비 바위를 지켜내고,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막아내고, 대한민국의 평화를 되찾기 위해 힘차게 싸우겠습니다.


2012년 3월 15일

통합진보당 대변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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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방송과 이영일 한중문화협회 총재와의 인터뷰(2012년 3월 21일녹화)
이 라디오 방송은 불교방송Fm101.9 mhz로 3월24일 오후 6시부터 30분간 계속됩니다.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김봉래입니다. 올해는 중국과 수교를 맺은 지 2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20년이 지나면서 중국은 우리의 최대 교역국이 되는 등 경제관계가 긴밀해지고 문화 교류도 활발해졌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탈북자 북송 문제, 불법 조업 문제에 이어 이어도 관할권 문제까지 이런저런 이슈들이 심심치 않게 터져 나오면서 해결해야 할 과제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BBS 뉴스와 사람들, 중국문제 전문가시죠? 한중문화협회 이영일 총재를 모십니다.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1.오늘 이렇게 총재님을 모신 것은, 올해가 한중수교 20주년을 맞는 뜻 깊은 해고 최근에 양국간 시급한 문제들이 터져 나오고 있어서 해법을 생각해 보기 위한 건데요, 우선 우리 정부는 올해를 ‘한중 우호교류의 해’로 정하고 기념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먼저 한중수교 20주년의 의미에 대해서 어떻게 보세요?

한중수교는 다소 늦어진 편입니다. 동서냉전 때문에 수교시기가 중국의 개혁개방보다 14년 늦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 보면 동해안, 우리 쪽에서 보면 서쪽 연안지방을 향한 투자에서 西歐나 일본에 비해 좋은 기회를 놓쳤지만 우리민족의 역사적, 자연적 교역권인 중국시장에 다시 접근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 만 번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20년 동안 한중관계는 중국이 수교한 세계 어느 나라와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교류와 협력이 이루어졌습니다. 매년 600만의 한국인이 중국을 방문하고 중국 쪽에서도 금년부터는 200만인 이상이 한국을 찾을 것입니다. 한국으로 유학 온 중국유학생 수도 8만명을 넘고 있으며 한국의 중국유학생도 6만을 넘습니다. 매주 840여편의 항공기가 중국의 주요도시와 한국도시들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한중 수교는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동북아시아의 오랜 역사 속에서 형성되어온 한중관계의 중요성, 긴밀성이 그간 냉전에 파묻혀 제대로 된 궤도에서 이탈했다가 본연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2.중국은 미국과 더불어 G2로 불리고 우리에게는 미국을 제치고 최대교역국이 되었습니다. 양국간 수교를 맺은 후 양국이 여러 가지 면에서 참 많은 변화를 겪었는데요.

가장 크게 변한 점이라면 어떤 걸 꼽으실까요?

잘 아시다시피 한중간의 무역총량이 韓美, 韓日교역량을 합한 것보다 더 많아졌습니다. 이 때문에 한국의 대 중국수출량이 한국수출의 26%를 넘어섰습니다. 2000억 달러를 넘는 무역규모입니다. 중국은 한국 제1의 수출국, 수입국 투자국인데 반하여 중국의 제3위 투자수출입국입니다.

첫째로 한중관계는 경제면에서 비록 상호보완적 측면이 크기도 하지만 한중양국간의 상호의존성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한반도문제로서의 평화와 통일을 이룩하는데 중국의 역할이 그 어느 때 보다 더 커지고 중요해졌다는 것입니다.

3.중국의 경제속도가 점점 빨라져서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란 이야기도 나오거든요. 앞으로 세계 속에서 중국의 역할이 점점 더 커지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보세요?

금년에 미국에서 중국문제를 다루는 두 개의 큰 저서가 출판되었습니다. Henry Kissinger가 쓴 586페이지의 On China, 우리말로는 중국론이라고 번역하는게 옳겠지요, 와 Ezra F. Vogel교수가 쓴 876페이지의 Deng Xiaoping and the Transformation of China, 등소평과 중국의 변화라고 옮겨야겠지요, 이 두 권이 중국정치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화두가 되었습니다. 이 책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Kissinger의 견해입니다. 그는 미중양국은 국가규모나 역사적 경험에서 다른 강대국에게 지배당한 일이 없고 대국으로서 자국의 지위를 유지해왔기 때문에 서로 군사적으로 승부를 가려 누가 우위를 차지하려고 경쟁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겠다고 말하고 지금 자기가 보기로는 서로 간에 협력의 영역이 넓어진 만큼 갈등의 요소도 커지고 있다면서 서로 간에 충돌을 피하고 공존공생하려면, 미중양국이 태평양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협력적인 세계질서를 이끌어가는 주역이 되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발언권은 커지고 있는데 비해 미국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추세인데 앞으로 양국이 갈등을 줄이고 협력의 영역을 넓히는 일은 세계정치의 중심과제가 될 것입니다.

외부세계에서는 중화사상을 중국의 DNA라고 규정하면서 중국경계론을 펴는 사람도 많지만 중국이 내부문제가 국제적인 파워게임에 나서는 것에 제동을 걸기 때문에 미중양국의 협력은 불가피하다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저는 후자의 견해를 지지합니다.

중국내부문제로는 격차문제나 민주화요구, 일당독재를 향한 농민들의 저항이나 부정부패문제 등이 있는데 이런 내부문제가 중국이 국제문제에서 패권을 추구하려고 발 벗고 나서는 것을 제동하고 있다고 나는 봅니다.

4.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이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발전시켜나가야 한다고 보십니까?

굉장히 힘든 질문입니다. 그러나 답은 자명합니다. 한중관계를 전략적인 협력동반자관계로 발전시키지 못하면 한국의 국가적 목표인 평화와 통일을 달성하는데 엄청난 난관에 봉착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미국의 대한방위공약은 확실합니다만 미국이 한국에 대한 공약을 지킬 힘은 나날이 줄어들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여기에 대중외교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정부에서도 외교통상부 안에 동북아국을 신설하고 중국연구센터도 만드는 등 중국의 중요성을 느끼고 대비를 서두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MB정권의 대중국정책이 대미외교에 비해 만족할만한 수준이라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좀 더 잘할 수 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5.많은 분들이 중국과 동반자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건 인정을 합니다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대중 외교 현안들이 남아 있는데요 최근 중국 정부 당국자의 발언에 의해 부상한 ‘이어도 관할권’문제도 있고요. 이 부분은 어떤 의견이세요?

저도 중국이 이어도문제를 들고 나왓을 때는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개혁개방을 했다고 해서 이웃나라들이나 자국보다 힘이 약한 나라들에게 대해서 마음까지 개혁 개방했다고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중국은 대국외교의 예를 따라 시비거리를 만들어 뒀다가 필요할 경우 시비 거리를 양보하면서 더 큰 이익을 챙기는 외교습벽이 있습니다. 중국이 이어도 관할권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승산이 있어서라기보다는 한중간의 시비거리 하나를 만들어 두자는 포석입니다.

앞으로 한중간에는 황해에서의 대륙붕 연장기선을 어떻게 할 것인가. 어업분쟁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통일 후에 제기될지도 모를 간도문제, 백두산 경계문제, 압록강 공동수역문제 등 해결해야할 과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어도의 경우 이청준의 소설 이어도나 노산 이은상 선생의 파랑도 이야기 등 역사적으로 한국고유의 영역 안에 있다는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일단 시비거리 하나를 던져두는 것 같습니다.

7.해경을 몸서리치게 만드는 ‘중국 어선 불법조업’ 문제도 끊임없이 제기되는 문제인데요. 중국 정부가 좀 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야 하는 건 아닐까요?

제가 알기로 중국정부도 골치 아픈 문제가 연안빈민어부문제로 알고 있습니다. 사회적 안전망이 전혀 확보되지 않은 어부들이 떼로 몰려다니며 고기를 잡아다가 팔거나 먹고사는데 중국정부가 이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어로현대화나 원양어업개척이나 어민 생활보호대책을 강구하지 않고 한중어업협정만 지키라고 강요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과거 張保皐가 중국해적을 소탕하면서 무역 길을 열어주어 생계대책을 세워줬던 故事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세종대왕이 최윤덕 장군을 보내어 倭寇의 본거지 대마도를 소탕한 후 세견선을 보내어 먹을 것을 원조해주었던 故事도 회상하면서 앞으로 중국정부와 협상하여 중국어민 보호대책수립에 한국도 참여해서 그 일부라도 지원해주는 방안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번 주 BBS 뉴스와 사람들, 한중문화협회 이영일 총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 중간 CM

계속해서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이영일 총재님? 앞서 한중 수교 20주년을 맞아 중국과의 관계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봤는데요. 중국 이야기를 할 때 또 빼놓을 수 없는 이슈가 바로 북한문제이지 않습니까? 특히 최근 ‘탈북자 북송’문제가 사회를 뜨겁게 달궜는데요.  민간이나 정치권에서 중국이 탈북자를 강제 북송하는 것을 막기 위한 규탄 집회도 열었고요. 총재님께서는 어떻게 보셨는지요?

한국과 중국 모두에게 탈북자문제는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중국도 양보하기 힘들고 한국도 물러서기 힘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또 중국이 국제여론을 그렇게 두려워하는 나라도 아닙니다. 그러나 한국 측에서도 탈북자문제를 항상 목소리를 낮추고 쉬쉬하는 자세로 다루기보다는 일단 목소리를 높여서 문제를 국제여론화하고 차후 외교협상을 통해 해결해야할 과제로 문제를 설정하는 것이 불가피한 단계에 왔다고 봅니다.

9.얼마 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인권이사회에서도 탈북자 강제 북송 문제가 중점 논의됐고 힐러리 미 국무장관이 탈북자 북송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표명하면서 외교적 신경전이 불가피해지는 것 같습니다. 국제 사회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선 어떻게 보세요?

저는 멋진 외교라는 것은 결코 논리로만 문제를 잘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易地思之의 입장에서 해결할 수없는 문제를 해결가능한 문제로 문제의 성격을 재구성해서 해결방도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중국의 형편에서는 탈북자를 받아들일 수도 없고 제3국 추방을 관행화할 수도 없고 난민지위를 부여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북한과 중국 간의 변경협약에 따라 북송조치를 거부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정도 참작해야 합니다.

결국 탈북의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한중회담을 열고 중국주선하에 남북회담이 열리면서 대북지원문제를 협의하고 이 문제에 진전이 있을 때까지 북송을 중단하거나 제3국 추방을 추진하는 명분조성 방식을 모색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보다 먼저 국제여론전을 유발하고 미국의회를 부추기는 방식을 선택한 것은 멋진 외교라기 말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10.하지만 중국 측 입장은 아직도 단호한 것 같습니다. 중국이 이렇게 불통으로 나오는 이유, 뭐라고 보세요?

중국은 그간 북한이 기근으로 피폐의 극에 달했던 1995년부터 1998년까지에는 실제로 굶주린 사람들이 떼로 몰려오기 때문에 적당히 눈을 감아주는 정책을 취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때부터 탈북행렬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적당히 북송도 하고 적당히 제3국으로 추방도 하고 적당히 중국사회에 파묻혀 사는 것을 눈감아주는 탈북자 관리를 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적당히, 조용히 처리하는 방식”에 한계가 왔습니다.

김정은이 권력을 세습하면서 김정일 장례기간 중 탈북자는 3족을 멸한다는 주장이 탈북자 소식통을 통해 외부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김정일 장례기간 중”이라는 단서는 사라지고 3족을 멸한다는 소리만 전 세계로 퍼졌습니다.

한국정부의 조용한 외교가 여론의 벽에 부딪쳤습니다. 결국 국제사회에 공론화 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세계여론은 중국에 불리합니다. 천신만고 호랑이 입에서 빠져나온 사람을 이리 아가리에 다시 집어넣겠다는 논리가 지구상의 공론에 맞을 리 없습니다.

10.이 자리에 나오신 김에 총재님 개인적인 질문을 드리려고 하는데요.

총재님께서는 1939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셔서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를 받으셨습니다. 11대, 12대, 15대 국회의원을 지내시고 현재는 사단법인 한중문화협회 총재를 맡고 계신데요. 한중문화협회가 어떤 단체인지부터 설명 부탁드립니다.

협회는 1942년 중국의 임시수도 중경에서 설립된 한중국민들간의 친선우호단체의 전통을 오늘에 이어받고 있습니다. 1942년에는 한국은 국가가 없었기 때문에 중국은 임시정부지도자들과의 협력을 존중해서 양국 인민들 간의 친선기구로 한중문화협회를 만들었습니다. 국가가 없으면 국민도 없는데 한국의 독립광복을 전제로 당시 중국정부가 한중문화협회의 창립을 지지한 것은 한국의 독립에 대한 중국의 확실한 지지였고 약속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광복은 중국인들의 지지가 없었다면 훨씬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독립운동과정에서 중국인들에게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우리는 중국인들이 보여준 우정의 빚을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한중우호와 친선에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우정의 빚에 보답하는 뜻에서 협회는 그간 중국낙후지역 어린이 심장병환자 무료수술 지원사업을 지난 4년간 지속해왔습니다. 이제 중국경제력이 커져서 한국정부의 지원대상에서 빠졌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8만여 재한 중국유학생과 70만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무료법률지원을 비롯하여 인권상담 한국생활적응지원활동을 15개 지회를 통해 펼치고 있습니다. 이들이 한국에 유학 오거나 노동하러 온 것에 보람과 긍지를 갖게 될 때 한중친선은 강화되고 한국기업들이 중국에 진출,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유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의 마음속에 한국에서의 삶에 서운한 감정을 갖거나 반감을 갖는 일이 쌓인 채 돌아간다면 한중우호와 협력은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학들은 중국유학생들을 정원미달을 채우는 수입원으로 대하고 노동자들은 염가노동력으로만 처리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실로 우려스러운 일입니다. 앞으로 민간외교는 중국을 다니면서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내에 와있는 중국인들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일이 더 효과적이고 실효성 있는 민간외교일 것입니다. 한중문화협회는 이러한 민간외교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11.3선 의원을 지내셨는데요.

이제 총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요즘 정치권을 보면서 선배 정치인으로서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실 것 같은데요.

구체적인 정치이야기는 자제하겠지만 불가능 한 것을 가능하다고 거짓 약속을 하지 말고 국민을 속이는 기술이 정치라는 생각을 버리셨으면 합니다. 복지문제를 둘러싼 포퓰리즘은 국민기만 전술로 비쳐지고 있는데 이는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12.향후 이루고 싶은 소망이나 꿈이 있다면, 어떤 건가요?

한국은 1대 1로 맞설 나라가 주변에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처지는 그간 경제발전을 이루었지만 모두 비대칭적 관계에서 대해야할  약소국입니다. 이러한 처지에서 국가의 평화를 유지하고 민족의 통일이라는 꿈을 이루려면 외교에 능한 대통령이 필요합니다. 경제대통령은 필요 없습니다. 경제발전의 주체는 기업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외교에 능한 대통령의 탄생을 바랍니다. 그러한 일에 공헌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러한 인물이 거의 부상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13.끝으로 이 자리에 나오신 김에 평소에 가슴에 새기고 계신 좋은 명구나 교훈이 있으시면, BBS 청취자 여러분을 위해 소개 부탁드립니다.

스승을 능가하는 제자는 없습니다. 국민을 능가하는 국회의원도 대통령도 없습니다. 뽑아놓고 후회하는 국회의원, 대통령이 없도록 선거를 잘해야 합니다. 선거를 잘해도 경제의 구조적인 어려움이나 격차는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중문화협회 이영일 총재와 함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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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베이의 2월은 을씨년스러운 날씨가 이어지는 우기(雨期)였다. 햇볕 아래서는 반팔을 입어도 덥지만 구름이나 가랑비에 햇볕이 차단되고 바람이 불어오면 온도는 급강하, 대기 속에서 한기(寒氣)를 느낀다. 한중문화협회는 그간 정책연구에서 등한시되었던 양안관계연구의 일환으로 작년 6월에는 중국국제우호 연락회와 제휴, 제3차 한중민간우호포럼을 중국과 타이완간의 교류 현장인 샤먼(廈門)에서 개최하고, 그간 양안관계 발전상황을 고찰하였다. 이어 금년에는 오늘의 타이완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3박4일 일정으로 타이베이를 방문했다.
아울러 금년은 한중문화협회 창립 70주년이 되는 해임을 감안, 오래 동안 협회의 협력파트너였으나 한중수교 후 관계가 소원(疏遠)해진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로부터 협회 창립70년사 정리에 필요한 자료협력도 받아볼 양으로 금년 제1차 중국방문지로 타이베이를 택했다. 그러나 한중문화협회와 관계가 멀어진 타이완의 중한문화협회는 타이완•한국경제문화기금회(基金會)로 명칭을 바꾸었다는 것
                (장개석 좌상)
이 주한(駐韓)타이완 대표부의 전언이었다. 한중문화협회가 한중수교 후 하나의 중국원칙 때문에 타이완의 민간단체 아닌 국가기관으로서의 중한문화협회와 공식협력을 자제한 때문이었다.

필자는 1982년 제11대국회의원 시절 몇몇 한국국회의원들과 함께 타이완을 방문한 바 있다. 그때로부터 만 30년만의 방문이었다. 물론 필자가 한중문화협회 회장이던 1999년 타이완의 타이중(臺中)에서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협회는 제 아내를 포함한 10인의 대표단을 구성, 타이완을 방문하고 재해의연금으로 1만 달러를 중한문화협회에 전달한 바 있다. 이것이 중한문화협회와의 마지막 공식협력이었다.

오늘의 타이완은 30년 전과는 판이했다. 물리적 외관이 바뀌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타이완 사회를 유지하는 원리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우선 타이완은 더 이상 중국대륙을 수복하려는 광복기지가 아니었다. 한국의 통일부에 해당하는 대륙광복설계위원회나 이 목적에 복무하던 정치작전학교는 그 간판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우선 도착당일 느낀 일이지만 타이베이공항의 명칭이 장제스(蔣介石)의 호를 딴 중정(中正)공항에서 타오위안(桃園)공항으로 바뀌었다. 장총통의 중정기념관은 “타이완민주기념관”으로, 대중지정(大中至正)광장도 “자유의 광장”으로 아름이 바뀌었다. 2008년 천수이비엔 총통이 내린 조치였다.

1975년 장제스 총통이 사망했을 때 그를 따라왔던 국민당원과 군인들은 친부모를 여읜 것보다 더 설게 울었다지만 이제는 지도자로서의 장제스 한 사람만을 우러러 보던 시대는 끝났다. 장제스는 생전에 한 번도 중공을 인정하지 않았고 자기의 군사적 패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자기 군대의 타이완 이동을 “공간으로 시간을 벌겠다는 전략원리”를 쫒는 작전상의 철수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따라서 타이완은 대륙광복을 위한 기지였을 뿐 그 지역을 본토로 부터 분리해서 독립한다는 생각은 아예 존재치 않았다.

그는 죽을 때 까지 국부 쑨원(孫文)이 세운 중화민국의 총통으로 자기를 정의했다. 물론 1972년 미국과 중국 간에 샹하이 공동성명이 발표되고 타이완이 중국의 일부임을 미국이 인정한다고 했을 때만해도 그 내용이 통일을 꿈꾸는 장제스의 철학과 원칙 면에서 다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유엔에서 중국대표권이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넘어가면서부터 장제스의 꿈은 사라졌고 그의 시대도 끝장났다.

유엔과 그 전문기구에서 모든 지위를 중국에게 빼앗긴 타이완은 국제무대에서 완전 고립되었다. 타이완과 단교 없이는 중국과의 수교의 길이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고궁박물관의 귀한 문화재나 자연경관의 어느 것도 유네스코에 인류문화유산으로 등록할 수 없게 되었다. 40여개가 넘게 몰려오는 태풍에 이름 붙일 권한도 없어졌다고 가이드는 말했다. 그러나 처지는 변했지만 놀라지 않는다(處變不驚)는 입장을 타이완은 견지하고 있다.

장제스 사후 아들 장징궈(蔣經國)가 총통 직을 세습하면서 대만의 경제는 급속도로 발전하였다. 아시아의 4룡(龍)의 하나로 타이완을 위치지우는 발전의 역사를 이루었다. 타이완의 동(東)과 서(西)를 잇는 도로를 굴착 하면서 자연자원을 이용한 관광산업(타이루코(太魯閣)협곡 등)을 일으키고 낙후지역 개발, 서민생활수준의 향상, 기업입국의 토대를 구축하는 등 타이완이 자립(自立) 자전(自轉) 자활(自活)할 수 있는 발전의 문을 열었다.
 
또 장제스를 따라 타이완으로 들어온 수많은 노병(老兵)들의 소원인 고향방문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중국과의 대화의 문을 연 것도 장징궈의 큰 업적이다. 지금도 타이완의 주민 여론조사에서 장징궈 총통이 장제스의 지지도 10%보다 훨씬 높은 50%대의 지지를 받는 것도 그가 세운 타이완 발전에 대한 기여 때문이라고 한다. 더욱이 장징궈 총통은 그가 죽기 전에 “장씨(蔣氏)가문의 정치는 나로서 끝난다.”면서 세습정치를 포기했다.

뒤이은 총통은 국민당의 리덩휘(李登輝)였으며 타이완 태생의 리 총통은 총통제를 주민직선제로 바꾸고 1996년 타이완 역사상 처음 실시된 직선에서 민선총통에 당선되었다. 정치의 민주화를 주도, 군인들에게도 정당선택권을 부여했다.장징궈의 세습 포기결단은 시대의 흐름에 따른 것이라는 평도 있지만 실제로는 러시아인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후손에로의 권력세습이 동양정치의 전통에서 용납될 수 없다는 인식 때문이라는 견해가 더 설득적이다.

리덩휘 이후 민진당(民進黨)의 타이완 출신의 천수이비엔(陳水扁)이 총통에 당선됨으로 해서 당대당간의 정권의 수평적 교체가 이루어졌으며 천수이비엔은 재선에도 성공했다. 그러나 중국으로부터의 분리 독립이라는 표퓰리즘적 공약은 중국의 강한 반발, 특히 통일을 위한 무력공격의 법제화라는 강공을 받았고 미국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이 결과 2009년 총통선거에서는 국민당의 마잉주(馬英九) 후보가 승리했고 마 총통은 2012년 1월에 실시된 총통선거에서도 재선되었다.

그러나 국민당이 민진당을 누르고 재집권했지만 장제스가 갈망했던 통일광복의 꿈은 되살아나지 않았다. 새로 집권한 마잉주(馬英九)총통은 중국과 경제협력기본협정(ECFA)을 체결, 양안간의 협력관계를 확대, 발전시키는 한편 이른바 3불 원칙을 내세워 통일을 당면 국가목표에서 제외했다. 마 총통의 3불은 중국과의 관계에서 통일을 추구하지 않고(不統), 독립을 시도하지 않으며(不獨),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다(不武)를 말한다.

이번 여행에서 필자의 눈에 띈 장제스의 유산(遺産)은 경제발전의 큰 업적을 제외한다면 사림관저(士林官邸)로 표시된 장제스 부부가 살던 사택과 민주기념관에 비치된 장제스 관련 자료, 장제스가 중국본토수복의 꿈을 살린다는 명분으로 중국본토 도시들의 명칭을 따서 붙인 타이베이 시가지의 명칭 예컨데 뤄양가(洛陽街)나 난징루(南京路)같은 도로표지판 등이었다.

그러나 장제스유산으로 남은 것 가운데 주목되는 하나의 제도로는 공직자부패 때문에 본토를 잃은 장제스가 타이완에서 부패한 공직자를 국적(國賊)으로 엄히 다스리게 한 형법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때문에 부패혐의로 구속된 전 총통 천수이비엔은 17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그러나  세월과 함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영웅 장제스가 그리던 통일 광복의 꿈은 사라졌고 G2로 커져버린 중국과의 관계를 조절하면서 생존을 추구하는 타이완의 새로운 현실이 앞날의 역사를 채워나가고 있다.

                          (오른편에서 4번째가 정상기 대만주재한국 대표 5번째가 이영일 회장)
2008년 마잉주 대만 총통 취임 이후 양안 간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주변국들과 타이완의 교류도 급증하고 최근 일본은 타이완과 투자보호협정을 맺었다. 이런 새로운 정황을 피부로 느끼는 주 타이완 한국대표부는 한국도 타이완과의 관계를 양안관계의 변화에 맞게 잘 조정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3박4일 동안 타이베이와 타이완의 일부지역을 돌아보면서 실패한 지도자에게 주어진 운명의 무상함을 실감했다. 그러나 우리 정부의 타이완에 대한 정책목표가 뚜렷치 못한 현실이 귀로에 오른 필자의 마음을 마냥 무겁게만 했다.

                                              韓中文化協會 會長 李榮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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