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남북공동성명 45주년의 교훈
이 영 일 (전 국회의원)
7.4공동성명이 발표된 지 45년이 지났다. 그 당시 통일을 갈망하던 국민들은 마냥 불가능하게만 느껴
졌던 평화통일이 남북대화를 통해 혹시라도 가능할 수 있지 않을 가하는 기대를 가져봄직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북이 분단된 지 27년밖에 지나지 않았고 남북한이 서로 통일을 불가능한 것으로 느낄 만큼 갈등의 양과 질도 지금보다는 덜 했었다. 물론 체제와 이념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이질화가 진행 중이긴 했지만 이질화로 변한 것은 정치교육이 먹힌 의식의 표면이었을 뿐 같은 민족으로서 역사와 함께 형성되어 온 집단무의식에 까지 변화가 미친 것은 아니었다. 특히 당시에는 국제사회가 한반도통일을 확실히 반대할 이유가 되는 핵과 미사일을 남북한의 어느 측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북한의 법적 지위는 무엇인가>
7.4공동성명 발표에 이어 남북한 간에는 고위층 간의 상호방문이 이어졌고 남북한 관계를 7.4공동성명정신에 부합하도록 바꿔나가는 협력의 틀을 만들기 위한 협상이 심도 있게 진행되었다. 남북조절위원회가 만들어졌고 남북조절위원회의 운영과 구성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또 북한 측에서는 큰 문제가 안 되었지만 한국에서는 7.4공동성명이 한반도의 유일합법정부인 대한민국의 법적 지위에 미칠 영향을 두고 국회 내에서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정통정부에서 분리된 반란단체로서 괴뢰라고 부르는 북한의 지위에 7.4성명이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두고 심각한 법리논쟁이 벌어졌다.
당시 국토통일원의 정치외교담당관이었던 필자는 김종필 국무총리의 국회질의 답변 자료준비에 협력하기위해 실무자로서 국회본회의 국무총리 석 뒷자리의 보조 의자에 대기해야했다. 7.4공동성명이 발표됨으로 해서 북한을 한국이 별개의 국가로 법적 승인을 한 것이냐 여부를 놓고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당시 서독에서는 동서독 기본조약을 체결한 후 동독에 “그러한 정부가 실재로 존재함을 인정한다”는 이른바 “실재승인”(Die Faktishe recognition)이라는 독특한 이론을 만들어 발표하면서 실재승인은 법률적(De jure)승인도, 사실상의 승인(De Facto)도 아니라는 식으로 양독 관계를 정리했다. 당시 김종필 총리는 북한을 유효하게 지배하는 정치체가 존재함을 인정하지만 그것이 북한을 국제법상 별개의 국가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질의에 답했다. 이 당시 필자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 것은 서독이 동독과 협상할 때 협상이 몰고 올 법적 상황을 꼼꼼히 예상하고 거기에 합당한 법 이론을 준비, 협상에 임했던 것에 비해 우리는 너무 엉성하거나 대비가 부족했다는 사실이었다.
<대외적 비 반공과 대내적 반공 사상 강화>
우리의 7.4공동성명은 최고 지도자의 결단으로 일단 성명을 만들어 발표해놓고 이를 사후에 합리화하는 조치들을 다소 무리하게 강구하면서 국회와 언론의 동의를 얻는데 주력했다. 그러나 납득시킬 대상은 국회만이 아니었다. 반공정신으로 세뇌된 국민을 대상으로 설득작업을 병행해야 했다. 7.4공동 성명의 정신에 비추어 반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힘들게 되었기 때문에 “대외적으로는 비반공(非反共)”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반공을 지향하게 하는 상황의 조절이 북한에 비해 한국 체제가 훨씬 더 힘들었다. 또 이 당시는 남한이나 북한이나 대화를 문제해결을 위한 협상으로 보기보다는 형태를 달리하는 전쟁으로 보았기 때문에 남북한 간의 사상전(思想戰)은 오히려 더 치열해졌다.
돌이켜 보건데 7.4공동성명은 민족적 차원에서 대화에 대한 간절한 수요가 오래 동안 배태, 숙성된 토대위에서 싹이 트고 성숙한 결과로서 도출된 것이 아니었다. 한반도를 에워싼 내외정세변화 속에서 남북한 지도층들이 자기들의 필요에 적합한 대처방식으로 돌출된 것이 7.4공동성명이었고 남북대화였다. 따라서 겉으로는 대화를 내세우지만 내면적으로는 남북한의 이해가 항상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남북한은 7.4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고 해서 그간 쌓인 모순과 갈등과 적개심이 하루아침에 없어지고 화해와 협력으로 바뀐다는 것은 애당초부터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대결구조의 대화구조로의 전환>
그러나 당시 한반도 내외정세 속에는 남북한이 대화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여건이 마련되고 있었다. 우선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조선노동당 제5차 전당대회에서 김일성이 전인민의 무장화, 전국토의 요새화, 군장비의 현대화, 전군의 간부화라는 4대군사노선의 완료를 선언하면서 한반도를 제2의 베트남으로 만들려는 공세를 강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공세에 대처,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일단 남북한의 대결구조를 대화구조로 바꾸어야 할 필요에 직면했다.
이러한 필요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비밀리에 북한에 파견, 김일성을 만나게 함으로써 7.4공동성명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한편 북한의 김일성 역시 미국과 중국이 소련견제를 위해 관계를 개선하는 조짐을 보면서 이러한 데탕트 정세에 편승하기 위해서는 남북한 간의 대결상황을 데탕트 상황으로 바꿀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양측 지도부의 정세판단에서 남북한 간의 데탕트가 7.4공동성명 발표로 현실화되었다. 공동성명 발표의 배경이 이러할 진데 이 성명으로 남북한 간의 모든 갈등과 긴장이 일거에 해소될 수는 없었다. 더욱이 사상과 이념을 초월하여 민족적 대단결을 이룩하여 자주통일을 달성하자는 7.4공동성명의 문항들은 남북한의 어느 측도 제대로 수용하거나 실천할 수 없는 구호였다. 결국 대화과정에서 서로간의 차이가 들어나면서부터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합의를 이룩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졌고 대화는 계속 지지부진하다가 대화동력을 상실했다.
결국 7.4공동성명 발표 2년 후인 74년 북한은 김대중 납치사건을 이유로 남한정부를 상대로 일체의 대화를 거부하겠다고 발표했다. 한낱 남북한 간에 일시적으로 나타난 이벤트의 하나에 불과했다.
<남북대화는 그것을 북한이 필요로 할 때만 열린다.>
7.4성명이후에도 이런 저런 명분으로 남북한 간에 대화는 명맥을 이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대화들은 대체로 북한이 대화를 필요로 할 때 열렸을 뿐 한국 측이 주도해서 대화가 열린 일은 거의 없었다. 북한이 대화를 필요로 하는 시기는 소련과 동구라파가 몰락, 정권의 위기가 닥쳐올 때 그들은 자기체제의 위기관리수단으로 대화를 이용했다.
1990년도에 개시된 남북한의 총리회담과 남북한 간의 기본합의서 채택(1990)이나 한반도 비핵화선언(1992)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 하에서 이루어졌다. 오히려 이 때는 노태우정부가 북한과의 실효 없는 문서상의 합의서 작성보다는 북한의 개혁개방을 강력히 요구하면서 서울과 평양에 연락대표부를 설치할 것을 요구했어야 옳았다. 또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도 북한의 심각한 경제위기 때 이루어졌다. 한국으로 부터의 경제제원이 절실히 필요할 때 북한은 대화를 이용했다.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노무현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시기는 북한이 식량난, 의료난, 에너지난에 허덕이는 시기였기 때문에 6.15선언이나 10.4합의 같은 문서상의 합의보다는 개혁개방을 강력히 요구함으로써 북한의 체제개혁을 적극 유도해야 옳았을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자기가 노벨 평화상을 얻는데 필요한 조치만 강구했을 뿐 남북관계를 실질적으로 개선할 아무런 업적을 만들지 않았다.
중국은 2000만 달러로 북한에 유리공장을 만들어 주고 줄곧 생색을 내고 있지만 김대중, 노무현 정권들은 북한에 수십억 달러를 쏟아 부었지만 이렇다 할 공장하나도 북한 땅에 세워주지 못했다. 이 때문에 김대중·노무현 양 정권은 북한이 핵무장으로 출구를 열 밑천만 제공했다는 비난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문재인 정권의 남북대화 강조>
지난 5월 9일 대통령 보궐선거에서 집권한 문재인 정권은 촛불혁명정신을 살리겠다는 취지로 “탈미자주”노선을 표방한다. 동시에 이명박·박근혜 정권들의 대북압박정책을 실패한 정책으로 폄하하면서 대화를 통해 한반도 비핵화 달성을 주도하겠다고 말한다. 지난 6월말과 7월초에 있은 한미정상회담에서도 미국의 강력한 대북압박정책을 지지한다고 하면서도 압박과 대화병행론을 내세웠다. 그러나 현시점은 정책의 중점을 대화 아닌 압박에 두어야 한다.
지금 김정은 정권은 민생은 인민들이 알아서 하라고 내팽개치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조달한 자금을 몽땅 핵과 미사일 개발에만 쏟아 붓고 있기 때문에 압박이 앞으로 더 가중, 심화되면 핵과 미사일의 실험개발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는 한계점에 봉착할 것이다. 이런 전망 하에 미국 하원은 북한을 압박하는 법안을 490대 1로 가결했으며 유엔안보리도 기왕의 제재결의를 유엔회원국들이 모두 준수하도록 구속력을 강화하는 추세다.
물론 촛불민심가운데 탈미 자주 요구가 포함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 국민 모두의 뜻은 아니다. 오늘과 같은 시기와 상황에서 촛불민심이라고 내세우는 탈미 자주노선은 결코 적실성이 없으며 그것의 정책적 표현인 북한과의 대화강조보다는 강도 높은 대북압박을 통한 비핵화추구가 더 현실적인 선택일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전역이 북한 미사일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갔고 이제는 주일 미군기지와 심지어 괌까지 북한미사일의 사거리에 들어갈 만큼 안보위기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북을 상대로 대화에 응해주도록 호소하거나 바야흐로 남북관계 변화의 운전석에 앉았다는 등의 허무한 주장을 늘어놓는 것은 시의에 맞지 않다.
오히려 핵 공포이라는 더 큰 위험을 예방하기위하여 필요한 희생과 손실을 부담할 각오를 다져야 해답이 나오는 상황이다. 여기에 부합하는 처방은 비핵화를 촉구하는 대화뿐이다. 비핵화에 직결되지 않는 대화강조는 무의미하다. 또 국방을 자주할 능력도 없으면서 탈미 자주를 말하는 것은 어리석음이다. 탈미 자주정권이기 때문에 무조건 북한의 김정은 패당과 대화해야겠다는 것은 국제적인 고립으로 나날이 숨통이 조여들고 조만간 경제적 빈사상태로 빠져 들어가는 북한정권에 한국이 또다시 구원투수가 되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또 탈미 자주한다고 해서 북한의 모든 공세를 단독으로 막을 자신과 준비 없이 전시작전권의 이전만 부르짖는다면 그것 역시 대한민국을 심각한 안보위기에 몰아넣을 것이다.
지금은 7.4공동성명이 필요한 시점이 아니라 총화단결로 위기에 대처해야 할 때이다. 남북대화를 향한 국민들의 진지한 수요 없이 정권만의 필요에서 시작되는 대화는 어느 경우에도 민족적 화해와 통일의 도관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하나의 이벤트로 끝난다는 교훈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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