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태극기를 사랑한다

기미년 3월1일

왜놈에게 항거하여 목이 터져라 외치며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던

그 태극기 김구 선생님과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의사가 가슴에 품었던 그 태극기

1945년 8월15일, 해방의 기쁨을 목 터지게 외치며

길거리를 메운 전 국민의 손에 손에 쥐어졌던

그 태극기

적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적진 속으로

높이 쳐들고 뛰어들며 목숨을 내놓고 지키려던

그 태극기

불의와 부정을 타파하고 민주화된 조국을 위해 산화해 가신

"명실상부한 민주. 정의 투쟁 자들"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그 관을 덮어 우리의 뜻을 전해준

그 태극기

열사의 사막 가운데 자랑스럽게 올려 졌던

중동 근로자 숙소 앞의 빛나든

그 태극기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라고

절규했던 새 마을 운동의 깃발과 함께

힘차게 펄럭이던 시골 마을 입구의

그 태극기

1988년, 평화의 상징인 올림픽기와 나란히 나부끼며

전 세계에 우리의 자리를 매기 든 자랑스러운

그 태극기

2002년 월드컵 4강으로 이끌어 가며

온 국민을 흥분과 눈물과 희망으로 묶어 하나 되게 했던

그 태극기

국립 현충원에 높이 걸려

호국영령과 애국지사님들을 지키고 있는

그 태극기

나는 그 태극기를 사랑한다,

그 태극기엔

우리의 피와 땀으로 성취한 민족의 꿈과 얼이 담겼으며

우리의 정체성과 민주성 그리고 역동성이 함께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청명한 날엔 그 태극기를 내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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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9. 22:16 http://cafe.daum.net/MyLoveChina/437n/1767 

삼일절 노래를 들으며(퍼온글)

 

 

삼 일 절  노 래
                                              정인보 작사 / 박태현 작곡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 같은 대한 독립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은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우리나라는 3.1절등 국경일에 새해의 노래, 3.1절 노래, 제헌절 노래, 광복절 노래, 개천절 노래, 한글 노래 등으로 의식의 노래가 불려집니다. 며칠전 3.1절 기념식전 실황방송을 보면서 느낀 소감의 일단을 말하려 합니다.

그 하나는 기미독립선언문의 낭독에서 연로한 광복회 회장이 낭독하는 기미독립선언문이 너무 어려워서 읽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가 다 곤혹스러웠다는 생각을 지워버릴수 없었습니다. 명문절구이지만 난삽한 한문투이기 때문에 한문세대의 어르신들도 저렇게 읽기가 어려운데 한문을 안 배운 한글전용세대인 젊은이들에게야 오죽하겠습니까.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앞으로는 김동길박사가 이미 1969년에 쉽게 풀어 쓴 한글 기미독립선언문으로 바꿔 낭독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또 하나는 3.1절 노래를 듣는데서였습니다.

내가 국민학교에서 배워 부르던 노랫말과는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 요즘의 음악교과서를 펼쳐 의식의노래중 3.1절노래를 살펴보니 이전의 "한강물"은 ==> "한강은" 으로 "물"이 빠지고 "은"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선열아"는 ==> "선열하" 로 바뀌어 불려지고 있었습니다.

손쉬운 도구이자 만인의 선생인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이전에 배운 것과 새로이 바뀐 것이 둘다 그대로 실려 있습니다.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아 평소에 자상히 대해 주시고 친절히 알려 주시는 오동일교수님께 전화로 여쭈었더니 당신께서도 그렇게 배워 불렀는데 바꿔진 노랫말이 맞을 것 같다 하시면서 역전앞이 前과 앞을 겹쳐 잘못 쓴 것처럼 "한강물" 은 江과 물을 겹쳐 쓴 것이 분명하고, "선열아" 는 우럴어 숭앙하는 선열께 막말로 부르기를 하는 것은 위당 선생의 뜻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옛날부터 여기를 부르면서 느끼던 곤혹이 바로 이러한 오교수님의 지적에 그 이유가 있었지 않았나 생각되어 집니다.

나중에 "하"가 이유없이 쓰여지지 않았스리란 생각에서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하" 에는 " --- 이시여" 하고 부르는 말의 옛 표현으로 풀이하고 있는데 그 용례로 님금하, 세존하 아라쇼셔 등의 예가 있고 또 정읍사의 "달하 노피곰 도다샤"와 사모곡의 "아소 님하 ---" 도 그렇게 쓰인 용례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교수님은 이런 일화도 들려 주셨습니다.

광복후 국권을 회복하자 우리나라의 제도와 문물을 정비할때 의식의 노래도 새로 마련하였는데 이들 노랫말은 최현배선생의 한글의 노랫말을 제외한 전체 노랫말이 위당 정인보선생의 작품이었습니다. 작곡에는 당시의 기라 성같은 작곡가 이흥렬(새해의 노래) 박태준(제헌절 노래) 윤용하(광복절 노래) 김성태(개천절 노래) 박태현(한글 노래) 같은 선생들이 작곡에 참여했는데 이중 박태현선생 작곡의 삼일절 노래를, 당시 작곡에 참여한 분들의 품평회에서 최고의 명곡으로 총평하였다고 들려 주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하여 어려운 가운데 훌륭하게 만들어진 작품과 우리노래들이 앞으로 나라 안팎에서 더 많이 더 널리 불려 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방송에서는 으레껏 섣달 그믐이나 정월 초하루에는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을 들려 줍니다. 그리고 그동안 광복절과 다른 옌만한 국경일에는 나라 사랑이라는 뜻에서겠지만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나 스메나타의 나의 조국을 들려주기 일쑤였습니다.

이제는 우리 것도 찾아서,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우리 것을 더 많이 들려주었으면 합니다. 원단에는 수제천, 안익태선생의 코리아 판타지, 김규환선생의 나의 조국 등을 연주하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글/ 정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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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굿 소사이어티 Issue 레터 - 2011년 4월 제10호에서 퍼온 것임을 밝힙니다. 

성급한 국사 필수화 약인가,독인가 강규형 | 2011-04-27 14:32:02 | 조회 166


강규형 (명지대 기록정보과학대학원 교수) ▲ 강규형 (명지대 기록정보과학대학원 교수)


역사교육, 특히 자기 나라의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기억의 공유’를 통해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얻기 위함이다. 그러기에 한국사를 필수로 한다는 정책은 타당함이 있다. 그러나 잘못된 역사교육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한국사 필수 논의 이전에 국사교육의 여러 문제점을 인식하고 개선방향을 찾는 노력부터 해야 한다.

 

일제강점 35년에 대한 치욕을 극복하고자 민족주의를 북돋는 국사교육이 광복 후 강조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런 노력은 결실을 이뤄 자긍심을 갖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부작용도 나타났다. 한국의 국사 교육은 역사 인식의 주체를 국민 혹은 국가가 아니라 민족으로 설정하고 있으며 민중적 관점을 강조했다.


그 결과는 한편으론 편협하고 폐쇄적인 복고적(復古的) 민족주의, 다른 한편으론 마오쩌둥(毛澤東)주의에 영향을 받은 좌파적 민족주의로 귀결됐다. 권위주의 정부 시기의 국사학에 대한 특혜에 가까운 전폭적 지원은 국사학계를 안이하고 자족적이고 구태의연한 시각과 서술에 머물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국사 교과서의 특징과 문제점 국사 교과서의 또 다른 특징은 내재적(內在的) 발전론에 입각해서 근대를 열강의 침략과 그것에 대한 저항이라는 이원적(二元的) 관점에서만 접근하고 있는 점이다. 반면 조선왕조체제의 내적 취약성과 자폐적(自閉的) 성격에 대한 언급은 없다.
 

한국의 근·현대는 좋건 싫건 간에 국제관계 속에서 전개될 수밖에 없는데도 국제관계에 대한 인식과 서술이 무시되고 있다. 즉 폐쇄적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일국사(一國史)적 관점에 빠져버려 한국사를 세계사적 시야에서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 그리고 현대사 서술에서는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부정적 서술, 대한민국의 성취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 북한체제에 대한 우호적 서술도 강하게 나타났다.
 

한국은 역사학과가 한국사·동양사·서양사로 나누어진 거의 유일한 국가이다. 심지어 국사학과만 있는 대학들도 있다. 그 결과 같은 역사학 내부에서도 교류가 단절되는 경향이 있다. 현대 학문은 학문 간 통섭(通涉)을 중시하는 데 비해 한국의 사학계는 역사학 내부에서도 벽을 쌓고 있다. 이러한 특수성으로 인해 국사학계 일부에서는 서양사나 동양사와의 교류도 없는 채 한국사라는 좁은 틀 안의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새로 나온 ‘한국사’ 교과서들은 이전 교과서들보다 많이 개선됐지만 크게 봐서는 기존의 한계를 못 벗어나고 있다. 암기 위주의 편성도 여전하다. 전문가가 읽어도 지겨운 책을 학생들에게 읽으라고 할 수 있나. 나는 (원래 역사교과서로 간행되기로 했던) 한국사 교과서 검인정 1차과정인 연구위원으로 참여해 많은 문제점을 지적하고 수정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2차과정인 검정과정을 통과한 문제 내용이 상당수 교과서에 수록됐다. 교과서의 문제점을 놓고 역사교육학계와 국사학계가 서로 책임을 미루는 모습까지 보인다. 탈락한 일부 교과서는 현행 교과서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친(親) 북한 체제적 서술 신천학살 사건을 묘사한 피카소의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은 북한 ‘아지프로(선전선동)’의 산물이었다. 실제 황해도 신천에서 학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지역의 좌우대립에서 일어난 것이지 북한의 대외적인 선전선동이 주장하는 미군과 국군의 학살이 아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 피카소는 북한 선전에 휘둘려 격분해서 이 그림을 그렸고 미군의 학살을 상징하는 작품이 됐다.
 

남침론을 부정했던 브루스 커밍스의 책 표지에도 실린 그림이다. 이것은 한 교과서가 교묘히 왜곡 표현한 것처럼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전쟁을 비판한 작품”이 아니다. 많은 교과서 시안이 사전에 짜맞춘 듯 이 사진을 매우 크게 걸어놓았고, 어떤 시안은 미군이 자행한 학살의 예로 들었다. 결국 이 사진은 역사적 사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데도 두 교과서에 실렸다.


은연중 아지프로에 놀아난 셈이다. 국사 필수화보다 중요한 것 고등학교 과정 국사필수화와 공무원 임용과정 및 고시에 국사를 포함한다는 내용이 발표됐다. 국사 필수화와 역사교육 강화에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필수화하고 시험에 포함한다고 해서 역사의식과 국가관과 세계관이 바로잡힌다는 것은 얄팍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다.


만약 국사교육을 시키면 시킬수록 더 국가관이 나빠진다면 어찌할 것인가. 이것은 실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아이가 배가 고프다면 먹여야 한다. 그렇다고 오래돼서 상한 음식을 먹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효용성이 다하고 낡아빠졌으며 왜곡된 정보로 가득 찬 한국사를 가르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낡은 체계를 새로 고치는 것은 많은 시간을 요하는 문제다.


그러나 틀린 사실을 바로잡는 것은 가능하다. 국사 필수화를 성급히 시행하기 전에 현행 교과서의 중장기 및 단기 개정 작업부터 했어야 옳은 순서였다. 반성과 개선이 있고 나서야 한국사 필수가 진지하게 논의돼야 할 것이다. 또한 일선 역사교육 현장의 편향성 문제도 심각하다. 제일 문제 많고 편향된 금성출판사 교과서가 전국적으로 가장 높은 채택률을 보였던 것은 그런 서술이 교사들의 입맛에 맞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전교조 교사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결론적으로 한국사 교육은 민족, 민중, 통일지상주의라는 협소하고 폐쇄적인 사관(史觀)에서 탈피해 세계 속의 한국이라는 국제적 관점을 강화해야 한다. 또한 ‘자기비하’적인 역사관과 ‘자화자찬’식 서술이라는 양극단적인 접근에서 탈피해야 한다.


의도나 선전보다는 엄밀한 사료비판을 통해 입증된 사실을 중심으로 명암과 공과를 균형적으로 서술해야 한다. 특히 1948년 대한민국 체제가 어려움과 시행착오 속에서도 이룩한 성과를 충분히 서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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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한국국제문제연구원의 국제문제지 2011년 2월호에 기고되었으며 중앙일보 중국연구소의 중앙오피니언 2011년 1월27일에 (백가쟁명)기재되었음)

                  미중정상회담이 한반도에 주는 국제정치적 의미
                         
                                                       이      영    일(한중문화협회 총재)

지난 18일부터 3박 4일 간 미국에서 열린 미국과 중국의 정상회담은 2008년 세계금융위기로 조성된 새로운 국제관계의 현실을 놓고 지구최강국(最强國)들 간의 입장조율이라는 견지에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정상회담이었다.

이번 정상회담에 임하는 미국의 입장은 다분히 수세적이었다. 그간 중국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미국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앙양된 중국의 영향력의 수준을 국제관계의 현실에서 정당한 자기 몫으로 챙기는데 정상회담의 중점을 둔 반면 미국은 지금까지 누려오던 세계정치에서의 지위와 권한을 국제정치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중국과의 관계에서 재분배(再分配)해야 할 도전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가히 세계질서의 새로운 변곡점을 마련하는 정상회담이었다. 미중양국은 다행히도 이번 정상회담에서 41개항의 공동성명을 통해 양국이 협력해서 풀어야할 세계정치의 주요과제를 정리했다. 이러한 과제가운데는 양자 간에 의견이 합치된 부분도 있지만 양자 간의 입장 차이를 미래에 조율해야 할 과제로 유보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큰 틀에서는 양자가 대화와 협력을 통해 세계평화와 안정, 발전에 공헌하자는 쪽으로 회담을 마무리 했다.

이 회담에서 우리가 관심을 갖는 문제는 공동성명 19항이다. 미중공동성명은 그 19항에서 한반도에 관한 미중양국의 입장을 밝히고 있는데 문면 상으로는 원칙적 입장의 표현이지만 전문가적 견지에서 보면 우리에게 몇 가지 심각한 숙제를 던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중성명내용을 여기에 요약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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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중국은 지난 2005년 9.19 공동성명 및 이와 관련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서 강조됐던 것처럼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해야 하는 중요성에 의견을 같이했다.

양측은 최근 사건으로 인해 한반도에 긴장이 높아진 데 대해 우려를 표시했다. 양측은 한반도 문제와 관련된 사안에 긴밀히 협력하는 노력이 지속해 온 것에 주목했다.

미국과 중국은 남북관계의 개선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진정성 있고 건설적인 남북 대화가 필수적인 조치라는데 의견을 모았다.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비핵화가 매우 중요하다는 점에 공감하면서, 미국과 중국은 비핵화의 목표를 달성하고, 2005년 9.19 공동성명에서 이뤄진 기타 약속을 전면적으로 이행하기 위해 구체적이고 효과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과 중국은 북한이 주장하는 우라늄 농축프로그램에 대해 우려를 표시했다.

양측은 2005년 공동성명 및 이와 관련된 국제적 의무와 약속에 위배되는 모든 활동에 반대한다. 양측은 이러한 문제와 기타 관련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6자회담 프로세스의 조속한 재개로 이어질 수 있는 필요한 조처를 할 것을 촉구했다."

이 성명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첫째 문제는 미중양국이 비핵화의 방법으로 2005년도에 6자회담에서 합의한 바 있는 이른바 9.19성명을 세 차례에 걸쳐 언급하고 있는 점이다. 9.19성명은 한마디로 북 핵을 적정한 수준의 보상을 통해 해결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핵개발은 NPT조약을 위배한 것임은 물론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부정한 국제법위반행위였다. 또 지난 기간 동안 계속되어온 6자회담의 진행과정을 자세히 관찰한 입장에서 보면 북한의 두 차례에 걸친 핵실험, 두 차례에 걸친 NPT 탈퇴와 IAEA사찰요원의 추방, 북한에 관한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두 차례에 걸친 대북제재결의를 상기한다면 9.19성명은 이미 그 효력을 상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미중 공동성명의 한반도 관련조항은 이미 죽은 9.19성명을 살아있는 문서로 부활시키고 있다. 죽은 문서가 살아나면 북한에 대한 유엔 안보리의 두 차례에 걸친 대북제제결의는 사실상 그 효력이 부정되거나 중지되는 것이 아닌가. 결국 중국은 이번 회담에서도 북한을 감싸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미국과 중국의 이론가들은 중국이 북한의 우라늄농축프로그램에 미국과 더불어 우려를 표시한 점을 평가하지만 필자는 한반도의 비핵화라는 큰 원칙에서 보면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고 본다.

이 공동성명이 우리에게 던지는 두 번째 문제는 북 핵 처리에 관한 구체적 조치나 시한을 말하지 않고 남북한 관계 개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진정성 있고 건설적인 남북대화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남북관계의 개선을 가로막고 있는 원인으로서의 북한의 선군정치와 핵개발의 진행문제를 그대로 둔 채 남북한이 당사자로서 진정성 있는 대화에 나서라는 것이다.

물론 남북한은 당사자로서 언제나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대화를 추진해야 하고 또 대화를 통해 남북한 간의 현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위이다. 뿐만 아니라 대화이익이 대결이익에 우선한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남북대화가 진척되지 않는 이유는 남북한이 대화의 유용성을 몰라서가 아니다. 북한이 핵과 미사일 개발을 지속하고 있는데 문제가 있다. 국제여론을 외면하고 핵과 미사일 개발에 전력 집중하는 북한을 상대로 한국이 남북한관계개선을 위해 제시할 카드가 무엇인가. 북 핵을 수용하는 햇볕정책을 펼치란 말인가 아니면 북 핵 폐기의 대가로 한미방위동맹을 포기하라는 말인가.

이 두 가지의 어느 것도 한국이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일진데 한국이 대화를 통해 남북한 관계를 개선하려면 한국이 조속히 핵 국가의 반열에 올라 남북한이 서로 보유하고 있는 핵과 미사일을 포기하는 상호군축을 시행할 여건을 마련하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모든 군축협상은 피차간에 군사력이 대칭적이고 교환이익이 균형을 이룰 때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간 북한은 연방제나 국가연합방식에 의한 통일을 주장해왔고 중국도 북한의 통일방안에 지지를 보낸바 있다. 그러나 북한이 핵을 보유하고 한국이 비핵상태에 놓여있는 안보불균형상태 하에서는 북한이 주장하는 연방제통일이나 국가연합방식에 입각한 통일 모색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미국과 중국은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는 한반도의 비핵화가 매우 중요하다고 공감을 표시했는데 한국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해 한반도의 비핵화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인식한다. 한반도의 비핵화 없이 한반도의 평화통일에 대한 국제적 협력과 지지를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늘의 독일이 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가장 주요한 여건의 하나는 양 독이 비핵화의 약속을 성실히 이행한 것이다.

현시점에서 한반도의 비핵화를 대화를 통해 실천하는 방도는 한반도의 비핵화를 위한 한국의 유핵(有核)정책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아니면 6자회담을 주도한 중국과 미국이 북한 핵 포기를 가져올 구체적 조치와 일정을 마련하고 그것의 실현방식을 9.19성명에 적합토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치와 계획을 수반하지 않고는 남북한관계를 개선할 진정성 있고 건설적인 대화를 현실적으로 기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상에서 지적한 문제의식을 남북한이 국제사회와 더불어 공유하기 위해서라도 남북한은 당장의 성과에 관계없이 모든 수준에서의 대화를 재개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가 미중공동성명에서 주목해야할 세 번째 문제는 미중양국이 그리는 동북아 질서의 내용이 겉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종식시킨 정전체제를 중심으로 이 지역에서의 긴장완화와 안정유지의 조건을 모색하는데 반해 중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종결시키는 평화협정체결을 통해 미국의 이 지역에서의 안보영향력을 줄이려고 하는 것이다.

중국이 정의하는 "한국과의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의 잠재된 개념 속에 이러한 의도가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간 중국외교부가 이명박 대통령의 방중 당일 한미방위동맹을 냉전시대의 유물이라고 비난한 까닭도 바로 이러한 잠재된 요구의 한 표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중국은 한국이 미국의 대중국 포위 또는 견제망의 일부로 포함되어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입장을 내비치는 것이다. 여기에 한국외교의 새로운 도전이 있다.

그러나 이제 한국은 동북아시아에서 펼쳐지고 있는 강대국들의 새로운 질서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에서 벗어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안보질서의 모델과 통일추진의 여건을 능동적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

그것의 첫째 조건은 강대국들을 향하여 우리나라의 의지와 신념을 내세울 자강노력이다. 그것은 국제정치론이 지금까지 그 유용성을 공인하고 있는 MAD(Mutually Assured Destruction) 즉 "확증된 상호파괴능력"을 반드시 보유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한국이 가져야 할 한반도 비핵화의 실질적 협상 조건이며 평화통일의 여건 조성방안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강대국의 의사에 맹종하는 시대가 아니다. 잘 조직화된 국력을 국제사회에 우리의 의지를 관철할 실력으로 표시해야 한다. 이 길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하루속히 국론을 통일하고 안보분야에서 자강능력을 배양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야한다. 흔히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19세기말이 아니다. 한국은 유엔의 당당한 회원국이며 G20회의를 주도하는 국가의 반열에 올랐다. 동아시아 시대의 주요한 역할자로서 자리매김 되어 있다. 우리의 강점을 안보와 통일의 밑천으로 키워나가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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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일의 저서 햇볕정책의 종언이 출간된지 오늘이 3년째 되는 날입니다.
제2판발간후 거의 매진되었으나 3판 간행은 새로 증보가 필요하기 때문에 현재 출판을 유보하고 있습니다
이 책 출판을 맡아주신 전예원 사장 김진홍 교수가 작년에 졸지에 별세, 출판활동을 멈췄기에 재판인쇄는 신간으로 새로 집필할 계획입니다.  구입을 원하시는 분은 교보문고나 영풍문고에 연락하시면 재고가 있을지 모릅니다.

이 책의 주요골자는 햇볕정책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김대중, 노무현식 식 햇볕정책의 종언을 말한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맞을 통일을 내다보면서 중국변수를 가미하여 새롭게 집필한 저서를 곧 내놓겠습니다.

항상 성원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     영    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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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ch Korea will the world support?

Lee Young-il (President of Korea-China Cultural Association)

How does the international community see the only divided nation in the world today? Occupying the north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North Korea has been brought under sanctions by 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 Resolution 1874 after its second nuclear test and random shots of missiles in May last year. All of its sea and air transportation means are subjected to inspections on suspicion of arms exports. The North Korean weapons bound for the Middle East and Thailand have been seized.

 

In contrast, the Republic of Korea on the southern half of the peninsula won a mega contract to export nuclear power generation plants worth $40 billion to the United Arab Emirates -- just half a year after the U.N. resolution was adopted against North Korea.

 

South Korea currently ranks fifth among nuclear energy producing states and is regarded as one of the countries with the highest prospects for export. Its atomic power plants are widely known for their advanced safety levels. South Korea's potential customers include China which needs to order 50 nuclear power plants in the near future, and Turkey and Middle East countries which are also showing keen interest in constructing nuclear power generators.

                                   (이명박대통령과 파틸 인도대통령의 만남(2010/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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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pite condemnations from the entire world community, North Korea has consistently pursued the transformation of atomic power into lethal weaponry. It has sacrificed the national economy and the livelihoods of the entire people under the pretext of securing deterrent force against the nonexistent U.S. policy to crush North Korea.

 

In the meantime, South Korea has now joined the ranks of the most advanced nations in the field of nuclear power generation. Syngman Rhee, the first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 established the Korea Atomic Energy Research Institute and purchased a small nuclear reactor in 1956 even as the country tried to recover from the devastation of the Korean War. This early effort led to the training of many outstanding experts at home and abroad.

 

When observing the Korean Peninsula from a spectator's seat, we see a country in the north that continues to threaten the peace and its neighbors with nuclear weapons and missiles, despite the fact that it is one of the most poverty-stricken countries in the world.

 

In contrast, South Korea has become one of the 20 most important states in the world that will play a significant role in improving the global economic situation and promoting green growth as a means of attaining economic growth as well as protecting the environment. In November this year, it will host a G20 summit conference in Seoul.

 

The North is now on the verge of breakdown due to shortages of raw materials, energy and provisions. Richard Reagan, the representative of the World Food Program of the United Nations, confessed that while most countries become self-reliant after a few years of help, North Korea has failed to feed itself after over 10 years of food aid since 1995. He also commented that donors are becoming fatigued from long-term assistance and support organizations are electing to dedicate their resources to other aids besides food. They now feel forced to devise alternative aid methods such as turning grants into development assistance containing specific repayment dates and plans.

 

How would North Korea look today if it had poured its passion and resources into the development of food and energy instead of lethal nuclear weapons? How would it look now had it set out to reform and open its doors from 1983 as recommended by China? Although it is said that there is no "if" in history, what are the causes of the state failure which has reduced North Korea from a country that could have easily become well-off to one of the poorest on earth that cannot provide food to its inhabitants without foreign aid and where the exodus of refugees increases?

 

Professor Robert Rotberg of Harvard University says in "State Failure and North Korea: A Conceptual Framework" that North Korea is rather a weak state than a failed state in light of its nuclear arsenal and strength of internal control. Whether the North has failed or weakened, the cause of all the suffering which North Korean compatriots undergo today lies in Kim Il-sung's "juche ideology" that has governed the country since the Korean War.

 

Some domestic left-wing scholars often claim that the North's nuclear development is the outcome of the United States' hostile policy against North Korea. I believe such a claim results from the inability to understand the North Korean nuclear issue from historic perspectives. Nicholas Eberstadt, testifying at a U.S. Senate hearing, said that Kim Il-sung consistently believed the "war to reunify our fatherland" had not yet finished and that it would be possible to drive out the U.S. forces from the Korean Peninsula and achieve reunification only when the North achieves some form of capability to attack the continental United States with nuclear warheads.

 

For this reason, it is correct to assume that the message Kim Il-sung left behind was not to renounce, but to possess nuclear capability. North Korea today blindly follows Kim's precepts as they are. As long as the North Korean Labor Party refuses to confirm Kim Il-sung's death in the belief that he is a being of eternal life, neither Kim Jong-il nor his son Kim Jong-un, who is mentioned as the heir apparent, can become the head of state because Kim Il-sung must remain the only one honored at this level. It seems that the chances of North Korea abandoning nuclear weapons are remote as long as Kim Il-sung's teaching wields influence and his family controls North Korea.

 

In 1957 Kim Il-sung promised the North Korean people that they would eat white rice with meat soup, wear silk clothes and live in tile-roofed houses. Admitting that his father's will has not yet been properly carried out, Kim Jong-il called on Jan. 11 for efforts to make a big change in people's living standard by expanding light industries and agricultural production.

 

North Korea could ease the food shortage by importing 4 million tons of rice from Thailand with the expenses for nuclear tests, which cost $300 million each time, and missile test firings which cost $300-400 million. In reality, North Korea has kept ignoring people's suffering and has maintained military-first politics and hereditary rule. However, Kim Jong-il has no qualms in talking as if he had deep concern about people's lives.

 

No matter how history is defined, I think this nation must be reunified under the initiative of the state that plays a central role in the world's historical progress. How then will the global spectators evaluate South Korea's politics? Do they see South Korea as a country making preparations for reunification or as a country where most people do not care much about reunification, thinking that if we achieve reunification, it is fine but if we don't, it doesn't matter.

 

I hope that an opportunity for reunification will come if only we manage to upgrade our domestic politics by one no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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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통일신문2010년 2월 1일 7면 통일로칼럼으로 전재되었다)
세계는 어느 쪽 주도의 통일에 손을 들어줄 것인가?

                                            한중문화협회 총재   이   영   일
 

새해를 맞으면서 지구 유일의 분단국인 오늘의 한반도의 남북한을 국제사회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한반도의 북쪽을 점하고 있는 북한은 지난 해 5월의 제2차 핵실험과 미사일난사로 유엔안전보장이사회 결의1874호의 제재에 걸려 모든 해공수송수단이 무기 수출의 혐의를 받아 검열의 대상 되고 있다. 중동지역과 태국으로 운송중이던 북한무기는 압수상태에 놓여있다.

                     (르 피가로 지의 한국원전수주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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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반면, 한반도의 남쪽인 대한민국은, 북한 제2차핵실험과 이에 따른 유엔제재결의가 있은 지, 반년 만에, UAE로 총액 400억달러 상당의 원자력 발전(發電)설비의 수출계약을 맺었다. 현재 한국은 원자력 발전(發電)에서 세계제5위국이며 그 높은 안전성 때문에 양질의 청정에너지로서 원자력발전설비의 수출전망이 가장 높은 국가들의 반열에 들어 서 있다. 앞으로 중국은 50기의 원자력발전소를 발주해야 하며, 터어키, 중동제국에서도 원자력발전소건립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북한이 전 세계의 비난을 무릅쓰고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미국의 대북압살정책으로부터 자국방어의 억지력이라는 명분으로 전체인민경제를 희생시킨 가운데 원자력의 살인무기화를 계속 추구하는 동안, 한국은 6.25전쟁의 전후 복구도 채 안된 시점인 1956년 이승만 박사가 구입해준 소형원자로를 밑천으로 하여 원자력연구소를 설립, 연구활동을 지속하면서 국내외에서 다수의 인재를 양성해온 결과 오늘에 와서는 바야흐로 화석원료를 대체할 청정에너지로서의 원자력발전분야에서 세계수위를 달리는 국가가 되었다.

 

현재 세계라는 관중석에서 한반도를 보면, 북한은 세계최빈국의 하나이면서도 평화파괴의 도구인 핵과 미사일로 주변국가들을 위협하고 있는데 반해, 한국은 세계경제상황개선에서 큰 몫을 맡아야할 중요한 20개국(G20)의 하나로서 금년에는 G20회의의 의장국으로 등장했고, 녹색성장을 부르짖는 기후환경개선의 선도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지금 북한은 원자재난, 에너지난,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다. 유엔의 세계식량계획(WFP)은 창설이래 특정국가의 식량긴급구호를 위해 1~2년 동안 체류봉사하거나 아니면 4~5년 동안 체류하면서 지원한 일은 있어도 북한처럼 1965년이래 10년이상 부족식량을 채워 주어도 자립되지 않는 나라는 없었다고 Richard Reagan 북한주재 WFP대표는 고백했다.

 

식량이외의 다른 북한지원NGO들도 너무 오랜 기간의 무상지원에 지쳐 원조피로(Donor's Fatigue)를 느낀다면서 이젠 무상원조를 상환일자와 상환계획을 구체적으로 담은 개발원조이외의 다른 대안을 강구할 수 없는 단계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북한이 살인무기로서의 핵개발에 쏟은 정열과 비용을 식량과 에너지개발에 쏟아 부었다면 오늘의 북한은 어떤 모습일까. 또 북한이 중국의 권고를 받아들여, 1983년이래 개혁개방에 나섰던들 오늘의 북한은 어떤 모습일까?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지만 능히 잘 살고도 남을 북한이 이처럼 지구최빈국이 되어 외부의 원조없이는 주민들에게 양식도 나누어 주지도 못하고 탈북현상이 확대되는 국가실패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어느 학자는, 북한이 핵무기개발과 내부통제력이 강한 현실에 비추어 실패국가라기보다는 약체국가(미국 하버드 대학교 Robert Rotberg 교수는 “State Failure and North Korea: A Conceptual Framework”)라고 말하고 있지만, 북한은 실패했건 약체이건 간에, 한국전쟁이래 북한을 지배해온 김일성주의에 오늘의 북한 동포들이 겪는 모든 고난의 원인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흔히 국내좌파학자들은 북한의 핵개발을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의 결과라고 말하지만 이는 북한핵문제를 역사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데 기인한다.

 

북한은, “조국통일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휴전일 뿐이며 미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통일을 성취하려면 핵탄두로 미국본토를 공격할 능력을 갖출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 핵무장에 대한 김일성의 일관된 태도였다 (Nicholas Eberstadt의 미상원 청문회 증언). 따라서, 김일성의 유훈은 핵포기 아닌 핵보유로 보아야 옳다. 오늘의 북한은 김일성의 유훈을 그대로 맹종하고 있다.

 

주석은 한 분 뿐이어야 하기 때문에, 조선노동당이 김일성의 사망을 공식으로 확인하지 않고, 영생불멸의 입장을 고수하는 한, 김정일도, 그 후계자로 거명되는 김정은도 국가주석은 될 수 없다. 핵보유가 김일성의 유훈인 한, 김일성가계가 집권중인 한, 핵포기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아야 한다.

 

2010년1월11일 김정일은 1957년 김일성이 ‘잇밥에 고깃국 먹고 비단옷에 기와집 짓고 살자는’ 비전을 북한주민들에게 제시했는데 아직도 아버지의 유언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경공업과 농업생산을 강화, 인민생활에 일대전환을 일으키는 새해를 만들자고 했다. 핵실험 1회에 3억 달러, 장거리 미사일발사실험에 3~4억달러 드는 비용을 아끼면 태국쌀 4백만톤은 거뜬히 수입하여 식량난을 덜 수 있는데도 실제로는 선군정치, 세습정치만을 획책하는 것이 오늘의 북한이다.

 

그러면서도 김정일은 인민의 삶에 깊은 애정을 가진 듯한 이런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나는 북한이 제1차핵실험을 자행한 후 즉시 대북NGO단체대표직을 내던졌지만 내가 방문할 때마다 다음에 올 때 이 약품만은 꼭 좀 구해 오세요라고 부탁하던 그 분은 지금 살았을까, 이 혹한에 병들어 죽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나는 역사를 어떻게 정의하던 역사발전의 중심대열에 서는 국가의 주도하에 이 나라가 통일되어야 하고 그렇게 될 것을 믿는다. 그런데 세계의 관중석은 오늘의 한국정치를 무어라고 평가할 것인가? 열심히 통일을 준비하는 국가로 보고 있는가, 아니면 통일은 나와 무관하다. 되면 다행이고 안 되면 그만이다고 보지는 않을까? 정치의 국격(國格)만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면 세계가 우리 쪽으로 손을 들어주는 통일의 기회도 닥아 올 것 같은 희망을 가지면서 새해 새아침의 기지개를 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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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09년 12월 17일 15시 서울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실에서 통일부가 후원하고 통일동우회와 통일교육연구원이 함께 주최한 李榮一 韓中文化協會 總裁 초청 강연회에서 행한 연설내용 全文임


제 2의 분단만은 피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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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 꾼 동지 여러분,

 대망의 새해를 꿈꾸면서 다사다난했던 己丑年을 보내는 시기에 통일꾼 동지들을 이렇게 만나 함께 말씀을 나누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금년은 우리와 같은 분단국이었던 독일이 동서독을 가로막던 베를린 장벽을 깨트리고 통일을 성취한지 20주년을 맞는 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감회와 반성을 일깨워 주는 해이기도 합니다. 독일은 동서독 기본관계 협정을 만든 후 18년 만에 統一을 성취했지만 우리는 7.4공동성명을 발표한지 37년이 지났고 남북한 기본합의서가 채택된 지 18년이 흘렀어도 통일의 전망조차 서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솔직한 현실입니다.

 

저는 만31세에 당시 국토통일원(현 통일부)의 요직인 정치외교정책담당관(2갑)에 임명되었습니다. 당시 金永善 장관님이 임명장을 수여하면서 이영일 담당관 같은 나이에 이런 자리에 오르는 일은 前無後無할 것이라고 격려 말씀을 주셨는데 그때로부터 40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1980년 12월 6일 離任式을 마치고 통일원을 떠났는데 그때로부터 30년이 지난 시점에서 오늘 여러분들을 이렇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의 감회도 남다른 것 같습니다.

 

1. 통일문제의 현주소를 생각한다.

우리 모두가 통일을 기다려온 지도 금년으로 어언 65개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제가 통일원에 근무할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통일을 생각하는 우리의 태도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고 한반도 주변정세를 보는 우리의 관점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나서는 내외정세를 관찰하면 두 가지의 상반된 전망이 나옵니다. 하나는 북한내부의 급변사태로 통일의 기회가 그 어느 때보다 시급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러한 가능성을 내다보면서 有事시 대비를 철저히 하고 기회를 잘 활용한다면 대한민국 주도로 통일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난 10년간 우리국민들이 통일비용론에 위축되고 북한 핵문제도 주변국들의 보조불일치로 해결가능성이 희박해 보이기 때문에 통일을 먼 미래의 일로 간주하는 통일 비관론 내지 포기론이 대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의 현실적, 실용적 사고방식과 태도를 보면 통일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 경향마저 보이고 있습니다.

2. 통일정책의 회고

저는 오늘 통일의 기회가 바야흐로 다가오고 있다는 입장에 서서 통일문제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돌이켜 보건데 제가 1969년 12월 경 통일원 상임연구위원으로 처음 일을 시작할 때만해도 통일은 우리 대한민국만의 일방적 과업이었습니다. 군사적 의미의 수복통일이 우리가 생각하는 통일과업의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통일원에 들어오기 前前해인 1968년에는 31명의 북한특공대들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위해 서울을 습격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남북한관계는 전쟁상태나 다름없었고 이런 환경 하에서는 일방에 의한 타방의 합병이나 점령만이 통일의 유일한 방도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8.15평화통일 구상 선언]

 

그러나 정부는 1970년에 들어서면서 越南戰이 격화되는 가운데 닉슨독트린이 발표되는 등 한반도에 새로운 군사긴장을 불러올 정세가 조성됨에 따라 남북한의 대결구도를 대화구조로 전환시킴으로써 전쟁가능성을 줄여나가는 정책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8.15경축사를 통해 통일수단으로 무력과 폭력의 사용을 포기하는 평화통일을 추진할 것과 남북한관계를 "창조와 건설과 개발을 향한 선의의 체제경쟁관계"로 전환시킬 것을 제안하고 이산가족의 생사소재를 파악하여 인도적 차원에서의 분단고통을 줄여나갈 것을 천명하였습니다.

 

흔히 평화통일구상 선언으로 알려진 8.15선언을 계기로 한국정부의 통일방안이 상대방의 존재를 무시하는 일방적 과업에서 북한이라는 상대와의 협력을 전제하는 쌍방적 과업으로 통일정책의 성격이 전환되었던 것입니다. 즉 평화통일을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남북대결구조를 대화구조로 전환]

 

1971년 남북한 간에 적십자회담이 열리면서부터 남북한의 대결구조는 대화구조로 역사적인 전환을 보게 됩니다. 이때부터 오늘날 까지 남북관계는 그 可視的 성과와는 상관없이 대화구조를 유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중단도 있었고 오랜 기간 단절도 있었지만 대화는 끊기지 않고 유지되었기 때문입니다. 남북한 간에 열린 대화는 국제정세면 에서는 장기화된 월남전이 미국 측에 불리하고 공산 측에 유리한 쪽으로 종결을 향하여 진행되는 정세 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앞서도 지적했지만 월남전이 끝난 후 한반도에 다시 전쟁의 불통이 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남북대결을 對話戰, 協商戰으로 전환시켰던 것입니다. 1974년 4월 19일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없어지는 것은 휴전선이요 이룩되는 것은 통일"이라는 섬뜩한 발언을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이 당시 북한은 4대 군사노선을 완성하여 전쟁준비를 완료한 조건하에서 대남인민민주주의 혁명 전략을 적극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면전에 의하지 않더라도 적화통일이 가능할 것으로 내다보았던 것 같습니다. 즉 형태를 달리하는 전쟁이 협상이라는 레닌의 전략을 이론적 배경으로 하면서 대남 사상전, 모략전과 혁명유도전략을 강화하면 능히 북한주도의 통일이 가능할 것으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통일접근을 위한 기능주의 이론의 대두]

 

이 당시 한국에서는 통일이론으로 기능주의가 남북대화와 평화통일론을 뒷받침하는 이론으로 크게 부상되었습니다. 기능주의 통일론이란 남북한이 교류와 협력을 진행하면 협력의 범위가 넓어지고 각 기능분야에서의 협력이 확대(Spill-over effect) 되면서 상호이질성이 줄어들고 공통성이 늘어나 평화통일의 여건이 마련된다는 점진적 통일 접근이론입니다.

 

이 방식에서 말하는 통일은 기능적 접근을 통해 분단고통을 하나씩 줄여나가면 모든 형태의 분단고통이 해소될 날이 올 것을 목표모델로 정하고 바로 이 과정을 거처 통일이 평화적으로 완성될 수 있다는 점진적, 단계적 통일론이었던 것입니다.

 

[북한의 연방제 통일공세와 민족공동체 통일방안]

 

북한은 한국의 이러한 접근방식을 제압하기 위해 남북연방제 통일공세를 강화해 왔습니다. 북측은 우선 과도기적으로 1민족 1국가 양 체제로 연방을 실시하고 최종적으로 단일의 통일정부를 세우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도적 접근은 대내외적으로 일단은 그럴듯해 보였기 때문에 지지 세력의 저변을 확장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측에 부담을 주는 통일 공세였던 것입니다. 특히 김일성이 주창한 고려연방제는 비록 공산당의 연합전술이 그 이론에 내제된 독소였지만 통일선전공세로는 한국 측에 크게 부담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은 이러한 공세의 효과를 차단하기 위해 가장 느슨한 형태의 연방제인 英聯邦의 Common wealth모델을 비롯해서 한 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왕국 시기에 등장했던 국가연합(Confederation)등도 검토하고 공산주의자들의 전통적인 합작전략인 상하층 통일전선전략을 조명하면서 평화공존단계, 교류협력단계, 연합단계, 통일단계를 상정하는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한 토대위에서 정부의 통일방안으로 확정, 발표했습니다. 통일과정의 단계설정 때문에 단계적 통일방안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현재까지도 이 기조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2. 공산권의 붕괴와 통일문제

 

7.7선언과 남북한 기본합의서 채택의 문제점

 

정부의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1991년 남북대화를 통해 한반도비핵화 공동선언을 포함한 남북기본합의서로 발전되었습니다. 당시 북한의 김일성이 남북한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선언에 동의한 진정한 이유는 공산권 붕괴의 국제적 분위기 속에서 북한정권을 지키면서 시간을 벌기위한 전술에서 나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당시를 돌이켜 보면 노태우 정부가 취한 조치 중에서 반성해야 할 점이 없지 않습니다. 첫째 공산권의 붕괴가 공산권이 당면한 시대의 필연적 흐름임을 직시하지 못하고 남북대화를 통해 북한 측과 그럴듯한 합의를 생산하는 데만 치중했다는 점입니다.

둘째로는 공산권 변화의 와중에서 통일의 실질적 기회를 포착하겠다는 의지와 준비가 태부족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당시 노태우 정권은 냉전청산작업의 일환으로 대북유화정책의 극치라고 할 7.7선언을 발표하면서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를 포함한 인권문제, 이산가족문제, 국군포로문제를 적극 제기, 북한을 적극적으로 압박하는 공세를 취하지 못하고 북측이 지키지 않을 합의생산에만 치중했던 것입니다.

 

김일성은 남한 측의 공세를 피하려고 남북 당국 간 회담에 응했던 것입니다. 결국 지켜질 전망이 없는 합의만 얻어내는 대신 북한의 숨통을 열어주고 시간을 벌게 해주는데 이용당했던 것이 당시의 남북당국 간 회담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남북기본합의서는 채택 18년이 경과한 지금까지도 아무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핵문제로 훨씬 더 심각한 국면으로 남북한 관계가 밀려가고 있는 현실이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셋째로 한국통일 방안이 딛고 서 있는 기능주의이론의 현실성과 한계성을 통찰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공산권을 상대로 하는 기능주의적 접근은 극히 제한된 분야에서만 성과를 가질 뿐 공산권의 체제변화에 큰 영향을 못 준다는 사실입니다. 공산권을 붕괴, 변화시킨 것은 기능주의적 접근 때문이 아니라 공산권 내부의 체제모순이 성장하여 공산권 경제가 파탄된 데 기인했던 것입니다.

 

공산권의 붕괴는 70년대 중반부터 농업생산성이 약화되는 사회주의 침체기에 진입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역사의 큰 흐름을 간파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실수가능성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이미 지나간 이야기를 이 항목에서 반성의 소재로 내놓는 것은 북한이 바야흐로 잘못된 화폐개혁으로 인민 대 정권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대북 탈북러시가 예고되는 판에 한국의 대북정책이 또다시 남북정상회담의 유혹이나 6자회담 재개 쪽으로만 흐른다면 이는 결과적으로 북한 인민이 아닌 김정일 정권을 또다시 내부 와해위기로부터 구해주는 결과밖에 초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산권은 개혁이 아닌 수구에서 몰락했습니다. 변하지 않으면 죽는 것(不變卽死)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그러나 북한은 계획경제의 와해 과정에서 모처럼 싹튼 시장을 죽이고 체제를 다시 계획경제로 되돌려 통제를 강화하려는 화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이 결과 인민과 정권 간에 신뢰가 무너지고 정권의 악랄한 인민억압정책에 대한 분노와 저항이 대내적인 모순과 갈등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북한이 이러한 대내적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남북정상회담을 열거나 6자회담에 복귀, 대미관계를 개선하는 등 외교적 성과를 올려 원조를 끌어오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런 책략에 또다시 말려들어서는 안 됩니다.

 

주지하다시피 소련이나 동구에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개혁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데로 리베르만 개혁이론이라든가 체코의 오타 시크의 시장 중심적 개혁이론 등이 모두 이때 등장했고 중국에서는 1978년 등소평의 개혁개방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은 그때나 지금이나 개혁에는 항상 역행하고 있습니다. 현시점에서 남북정상회담이나 6자회담의 재개는 위기에 몰린 북한정권만을 돕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신중한 대처가 요망된다 하겠습니다.

 

[중국에서의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

 

중국은 다른 공산국가들과는 달리 정치개혁은 유보한 채 경제면에서 개혁개방을 적극 실시하고 명칭은 사회주의 초급단계라거나 사회주의적 시장경제 또는 중국특색적 사회주의라고 붙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실시하여 농업생산력을 증강함으로써 대중빈곤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즉 중국경제를 전체 인민에게 빵을 나누어 주어 식 생활을 해결하는 원파오(溫飽)단계로 진입시켰던 것입니다.

 

등소평은 이미 60년대 초기에 사회주의는 빈곤의 대명사가 아니며 모두가 잘살게 되는 共同富裕의 길이라고 설파하고 인민에게 빵을 줄 수 없는 당은 진정한 의미의 공산당이 아니라면서 모든 것에 우선하여 인민에게 빵을 공급하는 것이 공산당의 一次的 의무라고 하였습니다. 이 당시 중국경제학자 劉伯承의 黃猫白猫론을 등소평이 칭찬하면서 이를 黑猫白猫라고 부른 것이 오늘날에는 黑猫白猫론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북한은 중국의 개혁개방권고를 외면]

 

등소평은 개혁개방의 초기에 북한을 비공식 방문, 김일성에게 개혁개방을 권유했고 1983년에는 아들 김정일을 초청하여 개혁개방의 이론과 현장을 설명하면서 중국식의 개혁개방을 따르도록 권유하였습니다. 개혁개방을 권유받은 초기에는 북한에서도 合營法을 비롯하여 이른바 14개의 개혁법률을 제정 공포하고 개혁개방에 나설 것 같은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북한은 아들에게 권력을 세습시키는 이른바 사회주의적 봉건체제건설에 주력하면서 개혁을 외면하고 중국식이 아닌 자기 식 즉 주체적 개혁개방노선을 내세우면서 중국노선을 외면하였던 것입니다. 세습체제에 대한 내부저항을 잠재우고 전체인민에 대한 수령 독재체제를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북한을 안정과 발전의 반석위에 올려놓는 길이라고 자기 노선을 정당화했던 것입니다.

3. 김대중 노무현시기의 통일 정책

 

김대중 대통령은 자기의 3단계 통일론이 정부의 공식적인 통일방안과 다르면서도 대통령 재임 중 정부의 공식통일방안을 수정하지 않은 채 6.15선언을 자기 모델에 맞춰 내놓았던 것입니다. 다만 다른 점은 공존단계의 설정 없이 바로 연합단계로 남북한을 접목시켜 통일 분위기를 조성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북측이 말하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연합의 이름으로 바로 실천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2000년대의 6.15선언이나 노무현 대통령의 10.4합의도 이러한 정책적 사고의 틀에서 나온 것입니다.

 

[햇볕정책의 본질]

 

앞으로 後代의 역사가 어떻게 평할지는 모르지만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이 추구했던 소위 햇볕정책이나 평화번영정책이 북한을 변화시켜 점진적으로,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루는 방도라고 말할 수 있을지 저로서는 의심이 갑니다. Francis Fukuyama가 북한처럼 철저한 통제체제에는 햇볕정책이 아무런 효험이 없고 햇볕정책이 성과를 볼 수 있는 곳은 알카에다나 탈레반이 지배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이라고 한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견해였습니다..

 

저도 한민족복지재단의 공동대표로서 몇 차례 북한을 다녀왔습니다만 불행히도 햇볕정책이나 평화번영정책의 이름으로 펼쳐진 대북지원정책은 북한의 선군정치의 지원이었을 뿐 인도주의적 목표나 북한변화유도목표에 거의 기여한 바 없는 것 같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북한의 핵 개발에 현금을 지원했다고 말해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통일비용문제를 내세워 통일논의의 발전을 억압]

 

그러나 김대중, 노무현 정권 당시는 통일론의 차원에서 볼 때 통일논의를 사실상 제한한 시기였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 중에서 김대중 대통령만큼 통일에 비용이 많이 든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통일논의의 발전을 억제하거나 기피한 대통령도 없습니다. 통일에 대한 강조나 통일논의의 활성화가 자칫 자기정책에 대한 저항을 유발하거나 북한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우려에서 통일논의의 제압수단으로 과다한 통일비용을 강조하고 심지어 통독의 가장 큰 문제점이 통일비용인 것처럼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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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은 선의로 말해서 통일지향적인 대통령이었다기보다는 전쟁억제에 역점을 둔 대통령, 즉 북한의 호전적 태도를 완화하기 위해 경제 지원으로 평화를 사보자는 정책을 폈다고 말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북한이 한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만한 능력을 보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전쟁억제를 빙자한 대북 퍼주기 정책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측면이 있습니다. 유람선이 오가는 금강산 상황과 海戰이 벌어지는 西海 상황을 그대로 동시에 받아들이자는 그의 정책이 과연 옳은 정책이었는지 자문하고 싶습니다. 당시 김대중 추종자들이 대북 퍼주기를 비판하면 그러면 "전쟁하자는 것이냐"고 대들던 정치 상황을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4. 현 단계의 통일 상황 진단

 

[북한 정권의 실패와 핵문제의 대두]

 

통일이론으로서의 기능주의적 접근은 남북한 사회가 서로 교류와 협력을 증진시켜 나가면 남북한이 함께 발전하고 양측에서 이루어진 발전은 어느 시점에서는 체제차이에도 불구하고 양 체제 간에 상호수렴(convergent)현상을 誘發한다는 전제가 깔려있습니다.

 

1960년대를 기점으로 할 경우 북한은 한국보다 경제력에서나 종합국력 면에서 다소 앞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1972년경부터 남북한의 발전수준은 역전되기 시작했고 현재는 한국이 G20의 반열에 오른 반면 북한은 지구 최빈국으로 전락했습니다. 인민에게 빵을 제대로 공급할 수 없는 국가로 전락한 것입니다. 등소평은 인민에게 빵을 줄 수 없는 공산당은 당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고 했습니다. 공산당은 집권과 동시에 인민들의 밥그릇을 장악하는 정권인데 빵을 배급해 줄 능력을 갖지 못한다면 정권을 가질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1990년대 중반 이래 북한에서의 기아는 그 심각성이 전 세계의 우려를 살 수준이었으며 중국의 권고로 유엔에 식량지원을 호소하고 이 호소를 계기로 유엔식량기구를 비롯하여 전 세계의 NGO들이 북한 돕기에 나섰습니다. 한국정부와 NGO도 북한 돕기에 나섰던 것입니다. 본인도 한민족복지재단의 공동대표로 북한지원 사업에 6년간 종사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국제사회의 대북지원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경제사정은 개선되지 않았고 만성적인 饑饉지대로 변해가는 형국입니다. 2003년 5월 베이징에서 열린 북한지원 NGO대회(저는 한국 측 대표로 참가)에서는 두 가지 문제가 심도 있게 다루어졌습니다. 하나는 수년간 지원을 계속해도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데서 오는 援助疲勞(Donor's Fatigue)현상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와 다른 하나는 원조의 형태를 무상원조가 아닌 개발원조로 전환해야 하는데 이 전환의 필수적인 요소는 원조의 대상과 상환계획을 북한 측이 마련할 수 없는 처지라는 것입니다.

 

북한은 이러한 문제나 요구를 제기하면 오히려 내정간섭이라 비난하면서 원조거부나 원조기관의 철수를 요구하는 형식으로 대응했음은 주지하는 바입니다. 세계식량계획의 Richard Reagan 대표는 당시 북한에 주재하는 유일한 미국인이었지만 북한정권의 난폭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북한주민을 餓死에서 방지하는 것은 국제사회의 책임이라고 강조하면서 지원의 계속을 각국 대표들에게 호소했습니다.

 

[북한은 개혁개방외면으로 실패했다]

 

북한은 오늘 겪고 있는 경제적 난경과 낙후성의 원인을 미국의 대북 압살 정책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북한이 경제적 곤경에 처한 것은 개혁개방이라는 세계적 추세를 외면한데 기인합니다. 중국은 1983년 이래 등소평이 앞장서 북한의 개혁개방을 권고했고 그 이후에도 김정일의 공식 비공식 중국방문 시에 개혁개방정책의 효험을 상세히 설명하고 상해 등 개혁개방의 성공사례를 직접 설명하면서 개혁개방을 적극 권장했습니다.

 

중국은 1996년 우방궈 중국부총리가 북한이 개혁개방에 나서지 않는 한 경제회생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 공개적으로 개혁개방을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중국의 이러한 노력은 2000년대에도 지속되었습니다. 장쩌민 주석은 2001년 북한 방문 시 개혁개방을 김정일에게 권고했는데 김정일은 북한에는 북한식 사회주의가 있고 중국에는 중국식 사회주의가 있다면서 중국식 권고를 거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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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타오 주석도 2005년 10월 평양방문 시에 북한 만수대 의사당에서 열린 만찬 석상에서 만찬연설의 3분의 2를 중국이 개혁개방을 통해 올린 성과를 설명하는데 할애, 북한의 개혁개방을 권고했습니다. 이에 앞서 중국 전국 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장 우방궈는 중국원조로 세워진 대안친선유리공장 준공식에 참여해서 중국식 개혁개방을 북한이 참고할 것을 재차 권고했던 것으로 보도되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중국의 지도층들이 그렇게 수년에 걸쳐 권고한 개혁개방안을 채택하지도, 실시하지도 않았습니다. 한때는 앞에서도 지적했거니와 개혁개방관련 법령도 제정하고 특구정책을 모방, 나진선봉지구를 개방하기도 했지만 실질적인 측면에서 개혁개방을 추진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북한경제 실패의 1차적 원인이 있습니다.

중국은 문화대혁명이라는 史上 미증유의 난국을 끝낸 후 등소평 주도하에 전쟁과 평화에 관한 국제정세를 읽는 시각을 毛澤東의 그것과 달리했습니다. 毛澤東은 지구상에 자본주의국가가 존재하는 한 전쟁은 불가피하다면서 전쟁불가피론을 주장했고 이 정세관에 맞도록 대내외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등소평은 전쟁의 원인은 자본주의 국가가 존재하는데 있지 않고 국가들 간의 패권추구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반패권의 입장에서 국제정세에 대처해나가면 전쟁은 피할 수 있다는 戰爭可避론을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강대국들 간에는 50년 내지 100년 동안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중국은 현대화건설에 매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등소평의 정세관은 적중했고 오늘날 중국은 전 세계가 G2로 명명할 만큼 큰 발전을 이룩, 강대국의 반열로 뛰어 오르고 있습니다.

[북한이 말하는 미국의 대북압살정책]

 

그러나 북한은 체제유지의 명분을 미국의 북한압살정책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개혁개방을 거부한 가운데 선군정치체제를 구축하는데 돌진했습니다. 북한은 "한반도에서 통일전쟁은 끝나지 않았으며 다만 잠시 중단된 휴전상태이며 미제국주의자들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통일을 완수하는 길은 핵탄두를 장진한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 미본토를 강타할 능력을 가질 때"라는 정세관에서 핵과 미사일 개발에 역점을 두는 선군정치를 강화해 왔습니다.

 

이 정책은 늦게 노출된 것이지만 김일성 생존 시부터 시작되었으며 앞으로도 포기될 전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국내학자들 가운데는 북한의 비핵화는 김일성의 유훈이라는 말에 현혹되고 있지만 북한핵문제를 역사적으로 파고 들어가면 북의 핵개발이야말로 김일성의 유훈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2006년과 2009년의 두 차례에 걸친 핵실험과 장단거리 미사일 발사는 북한식 표현대로라면 선군정치의 위업달성일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핵과 미사일 개발은 북한의 경제발전, 산업발전, 과학발전의 결과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인민경제의 처절한 파탄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그것의 정치적 사회적 결과는 배고픈 인민들의 줄 이은 탈북사태, 慢性的인 飢餓, 체제저항세력을 수용하는 정치범수용소의 확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 국내의 일부 학자들은 북 핵을 미국의 대북압살정책의 결과라는 북측의 주장에 맞장구를 치면서 마치 북한 측 대변인처럼 북 핵이 앞으로 소형핵탄두로 무기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공갈하는 역할까지를 대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북한핵문제를 역사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데 그 까닭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들은 미국이 북한정권을 승인, 미⦁북 관계를 정상화할 경우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처럼 말하지만 미국은 사실상 북한을 적대할 정책도, 의도도 없음을 여러 차례 표명했습니다.

 

클린턴 행정부에서는 공동성명에서 대북적대정책이 없음을 밝혔고 중유제공과 경수로 건설까지를 지원하는 긍정적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핵개발을 멈추지 않았고 농축우라늄을 이용한 핵개발을 추진하고 있음이 들어났습니다. 부시정부(부시정부 2기)도 문서로 미국은 북한을 침략할 의도도 없고 침략하지 않을 것임을 6자회담 미 측 수석대표 크리스토퍼 힐을 통해 밝혔지만 아무 효용이 없이 제2차 핵실험을 감행했습니다. 6자회담이 진행되는 기간 중에 두 차례나 핵실험을 단행한 것입니다.

 

북한은 미국이 그들의 주장을 수용할 때마다 요구조건을 하나씩 늘리는 요구조건 배가전술을 구사해오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미국과의 관계정상화이전에 북 핵을 印度처럼 핵보유를 인정해줄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도 마찬가지이지만 인도의 경우처럼 북한 핵을 묵인하는데 동의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만일 미국이나 중국이 북 핵을 긍정하는 경우에는 일본의 핵무장이나 한국의 핵무장을 막을 명분이 없어짐으로 해서 핵의 비확산 아닌 핵무장 도미노 현상을 몰고 올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6자회담의 태두리 내에서는 북 핵이 용납될 수 없을 것입니다.

 

최근 북측 주장을 종합해보면 ① 북한을 핵 국가로 인정할 것 ② 미국 등과의 관계정상화 ③ 대북경제제원 ④ 평화협정체결과 미군철수 등을 단계적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결국 북한이 말하는 체제의 안전보장은 북한주도의 통일을 보장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은 핵과 미사일로 그들의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것을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핵과 미사일이 만능인가]

북한이 핵과 미사일에 거는 기대가 무엇인가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습니다. 거기에는 우리 국내 좌파이론가들이 북한의 진의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기만적인 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2000년 6월 평양을 다녀온 김대중 대통령과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이 6.15선언의 성과를 설명하면서 “이제 한반도에는 영원히 전쟁의 위협이 없어졌으며 김정일은 통일 후에도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는 것을 양해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지금 전혀 실감할 수없는 이야기입니다. 6.15선언에는 남북기본합의서와는 달리 한반도 안보에 관련된 언급이 한마디도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국민들의 불안과 반론이 일어날까 봐 날조해낸 거짓말이었음이 확연히 들어났습니다.

 

북한이 두 차례에 걸쳐 핵실험을 단행하고 선군의 위업을 과시했지만 북한경제 형편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경제파탄은 더욱 심화되었고 탈북자들은 더욱 늘어나고 있으며 북한내부사정에 관한 정보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많이 대외적으로 유출되고 있습니다. 한류의 침투도 그 범위를 나날이 넓혀가고 있으며 북한정권의 내부 장악력도 떨어지고 있습니다. 식량사정은 아직도 국제사회의 원조 없이는 인민들을 부양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심지어 군량미마저 부족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핵과 미사일을 처분하지 않고는 경제생황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으로 몰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들어와서 특히 2008년 8월 이후 김정일의 건강 이상설 등 북한체제의 불확실성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앞으로 한국의 통일은 북한과의 합의와 국제적 조정·보장을 통한 단계를 거친 형태보다 한국에게 갑작스러운 도전과제로 대두될 수 가능성마저 예견되고 있습니다. 즉 통일이 쌍방적 과제 아닌 대한민국의 일방적 과제로 성격이 다시 바뀔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독한 독재정권이라 하더라도 선군정치의 하부기반인 경제가 파탄 날 경우 제대로 정권을 지키기는 힘들다는 것이 일반적인 예측입니다. 과거 소련은 미국에 버금가는 핵탄두와 대륙 간 탄도미사일을 가지고 있었지만 생필품공급이 막히는 경제파탄으로 결국 1917년이래의 공산독재체제가 붕괴되는 것을 우리는 목격했습니다.

또 1989년 5월 2일 동독인들이 헝가리·오스트리아 경계선의 일부를 뚫고 나오면서 철의 장막이 무너지기 시작한 이후 7, 8월 여름 휴가철을 이용한 폴란드, 체코, 헝가리 등 동구 국가를 경유한 동독 주민들의 대탈출이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를 거쳐 그 다음 해인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로 이어졌는데 독일 통일이 이렇게 이루어지리라고 예견한 학자도 정치가도 없었습니다. 서독의 헬무트 콜 수상 자신도 예견 못한 사태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 국내좌파이론가들은 이런 사태를 일부러 외면하면서 만일 미국이 북한에 양보하지 않고 핵 폐기만 요구하거나 MB정권이 ‘비핵 개방3000정책’을 고수할 경우 북한은 핵폭탄을 소형화⦁경량화 하여 미사일에 정착하는 핵 무기화(제4단계)와 핵무기를 생산 배치하는 핵무장화(제5단계)까지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기를 서슴지 않습니다.

[새로운 통일 상황의 도래 가능성 증대]

 

공산주의를 표방해온 국가들이 겪은 이제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북한의 수령유일지배체제의 장래는 3대 세습 전후로

①루마니아 차우체스크(Ceauscescu) 식으로 붕괴하든가

② 중국ㆍ베트남 식으로 개혁ㆍ개방하던가,

③ 러시아식으로 체제를 전환하던가 아니면

④ 어렵지만 지금의 체제를 고수하면서 버텨보는 네 가지 중 하나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 2005년 이후 특히 2008년 말부터 북한체제의 장래와 연결된 한반도 통일 전망에 대한 연구가 많이 발표되고 있는데 2005년도 미국의 랜드연구소는 「북한의 역설: 한반도 통일의 상황, 비용 및 결과(North Korean Paradoxes: Circumstances, Costs and Consequences of Korean Unification」제하의 보고서에서

①체제진화와 통합을 통한 통일,

②붕괴와 흡수를 통한 통일,

③분쟁을 통한 통일 등 3가지 통일 시나리오 중 두 번째 시나리오에 의한 통일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또 2008년 11월 미국의 국가정보위가 발표한『2025년의 변화된 세계』제하 보고서는 2025년까지 한반도에는 단일국가는 아니지만 느슨한 남북한 연합 형태의 통일국가가 있게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또 이와는 달리 2008년 12월 “미리 가 본 2018년 유엔미래 보고서”에 의하면, 2015년이 되면 북한도 후기정보화시대에 접어들어 컴퓨터와 휴대전화를 통한 인터넷 접속이 가능하게 됨으로써 개개인이 지금보다 똑똑해지고 더 많은 정보를 갖게 돼 더 이상 권력 세습이 불가능해 지고 북한체제가 점진적으로 붕괴되어 2020년이 되면 남북한이 통일될 확률이 거의 90%에 달한다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2009년 1월 발간된『2030년의 대한민국』에서 김진현 전 과기처 장관은 한국이 선진국으로의 국격(國格)이 정착된 후 북한이 군사도발을 하면 확실히 보복하고 통일을 성취하겠다는 의지와 능력을 북한과 전 세계에 보일 경우 2030년 경 통일을 바라볼 수 있다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미국 국가정보위원회 보고서를 제외한 여타 연구의 전망들은 북한 붕괴 후 한국 주도로 통일이 될 곳으로 내다보고 통일 시기는 2020~2030년 사이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좌파 이론가들과는 달리 오늘의 국제사회는 북한을 하루하루 몰락을 향하여 내려앉는 체제로 보고 있으며 북한의 핵과 미사일을 앞세운 위협으로 현재의 難境을 극복하고 再起할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2009년 7월 미국과 중국 간에 열린 전략경제대화에서 북한의 有事時 대책을 미리 논의해 두자는 미국식 제의를 중국이 거부, 구체적 논의의 진전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제 북한문제는 전문적인 연구기관들에서 붕괴가능체제로 분류되고 있으며 붕괴자체를 시간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상황이 이렇게 전개될 경우 우리의 통일은 그간 학계나 정부기관에서 꾸준히 연구되어 온 기능주의, 남북합작이나 연합 등 단계적 접근이론이 효용을 잃게 되며 특히 통일비용에 관련된 우려도 사실상 의미를 잃게 됩니다. 남는 문제는 북한 내에서 발생한 혼란사태가 6자회담의 틀 내에서 핵 폐기가 완료된 경우가 아니라면 북 핵의 존재나 유출이나 폭발로 안보상 위협을 받게 되는 국가들의 간여를 필연적으로 유발할 것입니다.

 

적어도 한국, 미국, 중국, 일본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안보상의 우려를 갖게 됩니다. 미국이나 중국은 북한내부의 핵통제 내지 관리체계가 무너질 경우 직접 출병하여 위험요소의 제거를 획책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현시점에서 한국정부는 기왕의 정부통일방안과 그 실천과정에서 제시하고 있는 "비핵개방3000"에만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다가올 북한 유사시라는 비상사태를 내다보는 정책대안을 준비하는 즉, 유사시 통일대비계획을 서두러 준비해야 할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흔히 작전계획 5029개념계획을 좀 더 구체화하자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지만 그러나 이 계획은 한국통일이라는 큰 목적에 조명할 경우 한미 간에 이해가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통일을 겨냥하는 별도의 부록계획을 한국정부는 준비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핵을 포한한 북한 군사문제는 국제사회와의 협력 하에 해결하더라도 그 밖의 문제는 한국이 주도하는 정책대안을 마련하고 국제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해 두는 전략전개와 함께 필요한 요원과 훈련을 비축해 나가야 할 시점입니다. 이러한 의지 없이, 이러한 준비 없이 좌우파간에 국론분열만을 계속하여 시간을 허송한다면 우리의 통일은 영원히 불가능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흔히 정치는 생물이라고 합니다. 항상 살아 움직이면서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반도 주변 강대국 중 한반도의 통일을 적극 지지할 나라는 없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의 노력여하, 우리외교의 능력에 따라 통일을 반대하는 외세를 통일지지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독일의 경우도 통일반대국가들을 통일외교를 통해 통일지지국가로 만드는데 성공함으로써 통독이 가능했음을 우리는 현대사에서 목격한 바 있습니다.

 

국제사회에서 Pax Americana의 역할이 나날이 줄어드는 미국은 북 핵만 제거된다면 그 이후 한국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큰 관심을 갖기 힘들 것입니다. 일본은 학계나 정계, 심지어 경제계에서 까지도 통일한국이 친 중국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경향이 있어 한국 통일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러시아는 통일에 대한 관심보다는 한반도 종단철도가 시베리아를 지나가는 상황만 조성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 통일을 보는 중국의 태도는 어떠한가.

5. 한반도의 통일을 보는 중국의 태도

 

[한중관계-미수교상태의 교류에서 수교까지]

 

중국에 공산정권이 들어선 이후 毛澤東은 " 朝鮮은 이전에는 중국의 屬邦이었으나 회복해야 할 失地에 포함되지는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말은 그간 한중관계에서 흔히 인용되었지만 오늘날 티베트나 위구르 문제를 볼 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 같습니다. 공산정권 수립직후 중국군이 중국안보의 필요성 때문에 1950년 티베트와 위구르를 침략, 정복하고 자치정부를 수립한 역사적 사건을 회고할 때 한반도가 중국의 침공대상지역이 아닌 것임을 밝힌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시모노세끼(下關)조약에서 朝鮮의 自主를 승인한 이래 중국이 되찾을 영역가운데 한반도를 포함시키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중국은 한반도를 자국안보를 위한의 입술(脣)로 보는 태도는 일관성 있게 유지되어 왔습니다. 1950년의 한국전참전도 그들이 이러한 안보관을 잘 말해주는데 1950년 11월 4일 중국민주제당파의 공동선언으로 밝혀진 항미원조(抗美援朝)는 중국안보의 기본조치라고 말하고 한 때 항미원조는 중국의 헌법사항이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은 1992년 북한 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수교했습니다. 북한과 중국 관계는 오늘의 한중관계인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보다는 한 차원 더 높은 전통적 우호관계이지만 과거 냉전시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협력의 밀도가 약화되었습니다. 물론 중국과 북한은 한중수교이후 한 동안 냉랭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1990년대 말부터 다시 원상을 회복하고 양국 지도층간의 교류를 심화 시켜왔습니다. 북한은 에너지와 식량을 중국에 크게 의존치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중국과의 냉담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중국이 북한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한중수교를 서두른 것은 중국외교가 이념외교에서 실용외교로 전환했음을 의미합니다.

 

특히 중국은 한국의 경제발전경험과 경제발전모델이 중국현대화에 필요한 모델임을 인정하고 1980년대 후반에는 이 당시 中國 지도층의 韓國에 대한 인식이 크게 否定에서 肯定으로 바뀌었습니다.. 한 예로 1980년 당시 黨 總書記 후야오방(胡耀邦)과 總理 자오즈양(趙紫陽)이 그리스와 유고의 공산당 機關紙와 행한 각각의 회견에서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은 한국의 발전경험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중국은 한국의 경제개발 정책을 철저히 연구하고 있다”고 말한바 있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중국은 86년의 서울 아시안게임에 최대선수단을 파견하였고 88년 서울 올림픽 때도 북한이 불참했음에도 불구하고 대규모의 선수단을 파견하였습니다.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양국 간에는 경제교류가 급증하여 1979년의 2,000만 불 정도의 교역량이 1988년에는 32억불에 육박하였습니다. 한국은 은 중국과 국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일본, 독일에 이어 중국의 4대 교역국으로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은 그러나 경제 부면에서는 한국과의 관계를 이처럼 심화시키면서도 정치면에서는 한국불승인 정책을 견지해 나갔습니다. 이렇게 된 데는 중국 나름의 뚜렷한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중국이 한국을 승인할 경우 2개의 한국을 인정하게 되어 하나의 중국을 내세워 대만을 통일하려는 중국의 국가목표와 논리적으로 마찰을 일으키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중국은 하나의 중국(One China)만을 인정하는 국가에게만 수교의 문을 여는 원칙을 고수하여 미국과 일본에게도 대만과의 단교조치를 취하게 한 후 수교했는데 한국은 이 당시 대만을 인정하고 대사를 둔 유일한 아시아 국가였습니다. 이 때문에 중국의 대한정책은 이 시기에도 철저히 정경분리의 입장을 지키면서 한국과의 수교를 미루었습니다.

 

[한국과 중국 간의 교류협력확대]

 

그러나 한국정부는 한중간의 경제교역이 확대되면서 대중국접근외교를 강화하는 이른바 북방정책을 통해 대만과의 단교를 결정하고 먼저 러시아와의 수교를 추진, 성공하고 뒤이어 중국과의 교섭에 착수했습니다. 중국은 남북한유엔 동시가입이 이루어지자 즉각 한중수교를 결단, 1992년 한중수교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중국이 한국과의 수교를 단행한데는 나름대로의 국익계산이 깔려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북한에 대한 개혁개방의 압력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1984년부터 2005년까지 계속되어 온 중국의 개혁개방 압력을 북한은 사실상 거부하면서 대외폐쇄정책과 수령 독재체제만을 강화해왔던 것이다.

 

현제 한중관계는 경제협력 면에서는 2007년을 계기로 미일과의 경협규모를 능가했습니다. 작년과 금년 사이에 금융위기의 여파로 다소 줄어들기는 했지만 1800억 달러 수준에 육박, 앞으로 수교20주년이 되는 2012녀까지는 양국정상이 합의한 바 있는 2000억 달러 목표를 무난히 달성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 핵문제와 한중관계]

 

북한핵문제는 오늘날 동북아 국제정치의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습니다. 미국은 당초 북핵문제를 미국과 북한간의 양자문제로 인식했으나 부시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북 핵문제는 미·북한 간의 양자문제가 아니라 북 핵으로 안보상 위협을 받는 당사국들 모두의 문제로 인식을 바꾸었습니다. 이때부터 북핵문제는 6자회담의 과제로 정립되었습니다.

 

미국의 권유로 6자화담의 의장국이 된 중국은 핵 폐기라는 원칙을 지지하면서 북핵문제를 협상을 통해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북한을 응징하는 결의안 표결에서 두 차례나 찬표를 던졌습니다. 물론 구체적인 대북응징에는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지만 원칙 면에서는 북 핵을 반대했습니다. 현재 국내외 이론가들 간에는 중국이 북한에 대해 취하는 "견제지지, 행동유보"라는 모순된 행보를 놓고 여러 가지 해석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전통주의자들은 북·중 순치관계(脣齒關係)론을 내세우면서 북한정권이 붕괴되는 것이 중국안보에 불리하기 때문에 국제사회에서의 강대국으로서의 체면상 북한에 대한 제재는 지지하지만 견제행동은 自制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순치관계론은 한중관계가 적대관계일 경우 상정 가능하지만 현재처럼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로 변화된 상황에서는 전략적의미를 가질 수 없을 것이고 더욱이 한미동맹이 새로운 시대에 걸맞게 변화되어 가고 있으며 작전지휘권문제가 재조정되는 환경에서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지난 12월 11일 서울에서는 중국, 일본과 한국의 이른바 진보성향의 학자들이 모여 동북아 평화포럼 서울회의라는 명칭 하에 북핵문제에서 북한의 입장을 두둔하는 선전전, 심리전을 강화하는 학술회의를 열었습니다.

 

이 회의에 참가한 중국학자들은 중국과 북한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어느 경우에나 중국이 북한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자립자강의 사회주의 북한의 존재자체는 중국변경안정의 보호벽이 됩니다. 하지만 중조맹우관계가 일단 파열하면 자기편을 불리하게 하고 적을 기쁘게 함(親痛仇快)은 물론 가장 큰 손해를 입는 자도 중국"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 중국내의 좌파이론가들은 북한의 핵무기 선택은 미국의 북한에 대한 오랫동안의 비하 고립, 타격, 봉쇄에서 비롯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옹호하고 중국과 북한의 우호관계는 한반도 평화와 안전의 불가결한 기초라고 강조하면서 미국이 북측의 주장을 대폭 수용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한국 측 학자들 가운데서도 북미 관계의 先 正常化 後 한반도 비핵화를 주장하면서 중국의 중재 하에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과정에서 북핵문제를 해결할 것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만으로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앞에서도 지적했거니와 요구조건 배가전술을 실천할 디딤돌로 미국과의 선 정상화를 원하는 것입니다.

 

좌파이론가들은 앞으로 이 회의에서 논의된 이야기들을 한국과 중국지역을 상대로 하는 선전전에 이용할 것입니다. 이 학술회의에 참가한 학자들은 북한이 개혁개방을 거부하여 자기 경제를 파멸적 지경으로 만든 가장 중요한 문제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또 중국이 학계를 지원하여 추진하고 있는 동북공정문제에 대해서도 한마디의 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중국의 대외정책 수립가들은 지금까지의 행태로 보면 철저히 실리위주의 정책을 구사합니다. 이데올로기 외교보다는 실리중심으로, 전쟁불가피론보다는 전쟁가피론으로 외교를 펼칩니다. 북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중수교를 결정했는가 하면 유엔에서의 북한견제결의안을 지지할 뿐더러 북한에 대한 필요시의 견제-유류공급중단이나 원조액수의 감소 등-을 단행해 왔습니다.

또 이런 실리적 관점 때문에 북 핵 외교에서는 북한과 중국과의 친선관계를 잘 활용, 북한카드를 유효적절하게 구사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핵무장을 중국은 결코 지지하지 않습니다. 동북아시아 대륙에서 중국이 누리는 공인된 핵 국가 지위를 북한에게 도전받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고 앞서 지적한대로 자칫 동북아에서 핵도미노를 유발할 우려 때문입니다.

 

또 중소대립 시부터 지금까지 걸핏하면 주체를 내세우는 북한이 중국 코밑에서 핵과 미사일을 가지고 버틸 경우 중국의 국익이나 인접국가정책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을 중국은 모를 리 없습니다. 비록 내정불간섭을 외교원칙으로 가지고 있긴 하지만 정권의 3대에 걸친 권력세습을 중국정치인이나 지식인들이 지지하기는 매우 힘들 것입니다.

 

중국의 권고를 받아들여 개혁개방을 했더라면 북한은 오늘의 중국보다 더 잘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은 중국이 권고하는 옳은 길을 거부하고 세계사의 흐름에 역행하는 핵 놀음에 나서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중국으로서는 한중FTA가 매우 긴요한 과제로 부각되고 있으며 동북아시아의 협력이 이 지역 국제정치의 주제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한중일 3국간의 총리회담, 한중일 3국의 FTA논의의 대두, 한중간의 거래결제수단의 선행절차로 간주된 한중 스와프 협정 등은 중국에게 한국이 북한보다 훨씬 중요한 국가로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북한은 중국에게 몇 가지기 면에서 매우 유용한 정권입니다. 북한의 핵문제 때문에 미국이 중국에 협력을 구합니다. 한국이 어느 면에서는 중국의 협력을 더 절실히 원하고 있습니다. 일본 역시 동아시아 공동체를 비롯한 안보상황개선을 위해 중국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 북한카드는 현시점에서 중국의 꽃놀이 패입니다. 이러한 외교적 이득을 중국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6자회담 의장국으로서 중국이 누리는 외교적 이점은 앞으로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 집단안보기구형성에서 가장 큰 발언권을 갖는 것입니다. 북한주재 중국대사는 한국주재 중국대사보다 격이 높습니다. 북한주재대사는 한국주재대사에 비해 역할과 기능이 더 크기 때문인데 원조문제에 관한 한 “총독적”(省長的) 지위를 행사할 만큼 중요한 존재입니다. 김정일이 수시로 중국대사관을 방문하는 것은 이러한 중요성을 감안한 태도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은 북한이 미국과의 협상을 통하여 북한 핵무기를 印度의 경우처럼 묵인 받는 것을 반대하고 다만 북한과의 관계정상화와 경제 원조를 받는 접근에는 긍정적입니다. 더 많은 이득을 북한이 미국에서 얻도록 지원해주지만 그것은 정치적인 것보다는 경제적인 것입니다. 정치적인 이득을 허용할 경우 북한 카드를 사용해서 얻는 이익보다 더 큰 재앙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중국의 북한에 대한 태도를 불가변의 것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미국의 힘과 역량이 나날이 변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과 북한 간에 중국이 원하지 않는 합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중국은 방치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은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한중관계의 긍정적인 측면과 우려스러운 측면을 대조하면서 북한 有事時를 내다보는 대중외교를 강화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북한 내부의 위기발생가능성론의 대두에 주목하자]

 

앞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2005년을 시점으로 하여 북한내부의 위기사태 즉 북한 유사시 사태에 관한 논의가 정보소식통이나 학계를 통해서 적잖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겨냥하는 국내논의는 작전계획 5029의 보완발전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중국에서는 경제, 군사 양면에서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북한무역액의 70%는 지금 중국과의 교역이며 특히 중국은 북한에 대한 경제적인 영향력을 확대함으로써 북한 내 인프라 조성에 대해 남한과 일본을 따돌리고 독보적인 ‘우위’와 ‘선점’을 유지할 수 있는데다 북한 내 소비시장도 확실하게 장악하려는 기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북한은 중국의 자원외교대상이고 청진항, 나진항 등 주요항만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북한의 유사시를 대비해 조선족 특수부대를 편성, 유사시 북한에 진입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고 합니다.홍콩의 북한 전문가 추전하이(邱震海)는 "6자회담 재개 후에도 상황이 악화될 경우 중국은 정권 전복이나 전략목표에 대한 '참수(斬首) 공격'에 동의하거나 북한 체제는 유지하되 김정일만을 축출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연합뉴스 홍콩)

 

한편 한국 내에서도 첫째는 김정일의 병상 통치를 거쳐 김정일 사망 이후 위기관리정권이 등장하는 경우를 내다보면서 위기관리정권은 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지는 3대 권력세습, 김정일 아들 중 하나를 앞세워 현재의 2인자인 김영남 상임위원장, 조명록 국방위 제1부위원장, 기타 당이나 군부 실력자가 뒤를 잇는 체제, 당과 군부에 의한 과도기적 집단지도체제 등장 중 하나가 될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둘째로는 대내외적 상황 악화로 인하여 주민들의 불만이 집단적으로 표출되어 반 김정일 쿠데타가 성공, 권위주의적 개발독재체제가 등장하는 경우입니다.

 

셋째는 국가체제가 무너지고 무정부상태 및 내전상태로 들어가는 경우인데, 이 경우는 정부군과 전국적으로 확산된 주민시위대가 대치하여 내전상태가 되거나 군부의 보수와 개혁세력들이 군사적으로 대치하게 되는 두 유형에 북한 군부대의 대남투항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는 북한내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휴전선에서 대남 군사충돌을 획책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제시한 네 가지 경우는 모두 독립적으로 발생할 수도 있고 압축된 형태로 연속적으로 진행될 수도 있지만 모두가 동북아와 한반도의 정세의 불안정을 초래할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의 급변사태와 붕괴는 그동안 점진적ㆍ단계적 형태로 생각해왔던 통일문제가 갑작스럽게 한국이 감당해야할 상황으로 전개될 가능성을 엿보게 합니다.

 

6. 글을 맺으면서

 

한국의 통일이 점진적으로 단계별 접근과 협력을 통해 블록을 쌓듯이 이루어지리라는 기대는 북한의 경제적 붕괴와 이 위기를 극복하려는 북한의 핵 놀음으로 사라졌습니다. 광복이 도적같이 찾아 왔듯이 통일의 기회도 그렇게 올 수도 있다는 예측이나 전망도 가능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앉아서 기다리는 자세로 우리의 통일은 성취되지 않을 것입니다. 기회는 머리만 있을 뿐 꼬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미리 서둘러 준비하고 쟁취하려는 의지와 노력과 대비가 필요합니다.

 

우선 우리는 통일한국의 미래상을 정립, 주변국들의 이해와 공감을 얻고 주변국들의 통일반대책동을 무마해야 합니다. 현재 한국은 주변국들과 모두 전략적 협력관계를 정립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서 얻은 외교적 조치였습니다. 따라서 어떤 국가라도 국익이 일치하면 협력할 수 있지만 국익이 상충할 때는 거부할 수 있는 입장을 얻은 것입니다. 自主의 幅이 그만큼 확대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제 한국은 앞으로 동북아시아에 이루어질 협력의 큰 틀을 내다보면서 그 틀에 조명하여 주변국들을 평가하고 협력해야할 시각과 분야를 결정해 나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과거로부터 오늘과 내일을 보는 패러다임이 아니라 내일을 표준으로 오늘을 바라보고 대비하는 관점을 정립해야 합니다.

 

우선 중국으로부터 한국이 주도하는 통일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북한과의 오랜 유대와 중국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안보외교에 있어서의 순치관계론을 극복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통일한국은 지정학적 위치상 어느 국가와도 안보동맹을 맺어서는 안 됩니다. 유엔이 부과하는 평화유지임무 외에는 국제분쟁에 휩싸이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동시에 통일한국은 동서독과 마찬가지로 비핵화를 철저히 추구함과 동시에 생 화학무기나 주변국에 위협이 될 전략무기생산을 자제할 것을 분명한 외교원칙으로 천명해야 합니다.

 

둘째로 주변국들과의 경제적 협력관계를 보다 긴밀화해야 합니다. 한미FTA는 물론이거니와 한중일 FTA도 서둘러 체결해야 합니다. 특히 동북아시아경제공동체건설을 동아시아 공동체 론에 선행하여 성취하고 이 협력의 틀 속에 미국과 러시아를 추가로 편입시키는 외교노력을 강화해야 합니다.

 

셋째로 주변국들을 상대로 하는 기술경쟁력을 가일층 강화해 나가야 합니다. 기술적 우위유지만이 주변대국들과의 협력수준을 높이며 보다 큰 시장 확보의 발판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선진화를 생활의 모든 부문에서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현시점에서 북·중 관계는 난공불락의 성처럼 보이지만 중국외교의 흐름을 잘 관찰하면 해법이 나옵니다. 중국은 외교에서 不義에는 둔감하지만 不利益에는 민감한 국가입니다. 따라서 중국의 입장에서 이용가치가 없는 국가는 언제나 무시하거나 외면하기 십상입니다.

 

북한이 핵 포기를 확실히 중국에 담보하지 않는 한 현재 중국이 사용하는 북한카드는 시효가 다할 것입니다. 이 시점을 빨리 앞당기는 외교가 우리에게 필요하며 이점에서 중국은 우리 외교에서 미국 못지않게 중요한 국가입니다.

 

[제2의 분단을 피해야 한다]

어떤 국제정치 전문가들은 중국이 경우에 따라서는 북한을 중국의 위성국가로 만드는 상황을 假定하기도 합니다. 또 중국의 동북3성에 추가하여 중국동북4성을 만들 것으로 예측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만일 북한지역이 중국의 위성국가나 괴뢰정부가 된다면 그것은 한반도의 제2의 분단 사태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티베트나 위구르를 능가하는 한국국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할 것이며 동아시아의 평화는 다시 세계긴장의 중심으로 변할 것입니다. 중국이 이러한 愚를 범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국이 북한 유사시 사태를 아무 준비 없이 방치할 경우 제2의 분단사태가 조성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북한의 유사시는 한국이 통일을 주도할 절호의 기회로 알고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이 이런 정세를 주도할 준비나 능력이 없다면 북한이라는 공간은 미국이나 중국의 조정으로 유엔의 신탁통치지역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이것역시 제2의 분단 사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가정을 해놓고 통일 상황을 점검해 나간다면 우리에게는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현재의 1인당 GDP의 배가운동을 일으키면서 사회 각부문의 발전을 경제력에 상응하게 높여나가야 합니다. 기술개발을 위한 R&D기금을 크게 확충해 나가야 합니다. 민간이 중심이 된 통일외교의 토대를 쌓아야 합니다.

 

역사는 세계사의 중심대열에 참여한 국가가 주도했음을 보여줍니다. 일본이 서세동진의 역사상황 속에서 명치유신을 통한 근대화달성으로 세계사의 중심대열에 섰기 때문에 중심에서 탈락한 한국과 중국은 일본의 식민지, 半植民地가 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21세기의 현재 한국과 중국은 세계사의 중심대열에 서 있음에 반하여 북한은 중심대열에서 완전히 궤도를 벗어난 지역에 놓여있습니다. 결국 전쟁 없이 통일을 성취하는 방법은 세계사의 중심대열에 참여한 국가가 그렇지 못한 정권을 흡수하는 길 이외의 다른 방도가 없을 것입니다.

 

평화적 흡수, 즉 동의에 의한 흡수냐 갈등을 수반하는 흡수냐의 차이가 있을 뿐 다른 방도는 없을 것입니다. 1970년 8.15선언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북한에 제의한 창조와 개발과 건설을 향한 선의의 체제경쟁 노선이야말로 가장 올바른 통일노선이었음을 다시 확인하면서 통일을 향한 준비와 다짐을 가일층 강화해 나가야겠습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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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자회담에서 북한이 노리는 진정한 목표는 무엇인가.

한중문화협회 이 영 일 총재

  통일동우회에서 강의하는 이영일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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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문제의 외교적 해결은 아무 해결책도 강구하지 못한 채 북한이 참가를 거부한 가운데 종말을 향하고 있다. 당초 북한을 제외한 5개국이 원했던 북 핵의 완전하고 돌이킬 수 없는 폐기는 협상기간 중에 발생한 2회에 걸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허망한 꿈이 되었다. 북한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북핵문제를 협상에 의해 해결하려면 북한이 미국의 대북 적대행위에서 비롯된 안보불안감을 먼저 제거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이 주장하는 미국의 대북적대행위는 부시 전 대통령이 말한바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면서 핵 선제공격도 불사해야 할 국가군에 북한을 포함시킨 점, 또 콘돌리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이 지칭한 "폭정의 전초기지" 같은 표현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미국의 어떠한 대통령도 지금까지 북한을 공격할 계획이나 의도를 가진 바 없었으며 오히려 두 차례에 걸쳐 미국은 북한을 공격하거나 적대할 의도가 없음을 공식적으로 천명하는 안전보장(Negative Security Assurance)을 북측에 약속, 제시했다.

 

그러나 북한은 처음에 요구하던 보장을 미국이 수용, 실천하자마자 이러한 보장을 한 장의 휴지에 불과하다고 폄하하면서 수락을 거부했다. 지금까지 미국의 대북 적대행위 중지를 요구했던 친북 학자들도 북한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북한을 두둔해 온 것 같다. 그러면 북한이 핵협상을 통해 얻고자 하는 진정한 목적은 무엇일까. 북한은 현재 북한 핵의 폐기에 목적을 둔 국제협상에는 어떤 경우에도 불참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왜냐하면 6자회담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기 위한 회담이 아니고 협상을 통해 북 핵을 폐기한다는 입장이기 때문에 북한은 더 이상 6자회담에 참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후진타오 주석의 특사인 중국공산당 외교담당 국무위원 다이빙궈(戴秉國)가 지난 9월 17일 북한을 방문, 김정일과 회담했을 때나 10월 5일 원자바오(溫家寶) 중국총리의 방북 시에도 6자회담대신에 다자회담이라는 표현을 쓰거나 미국과 북한 간에 대화가 진전되는 것을 봐가며 6자회담 재참여문제를 검토한다는 입장을 피력, 6자회담에 대한 입장에 모호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Bosworth 미국 대북 특사의 방북 시에도 북한의 6자회담참가문제가 명확해지지 않은 상태에 있다.

 

그러면 북한이 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에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현시점에서 북한이 원하는 것은 공식적으로는 북한을 핵 보유 국으로 인정하고 미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한반도가 포함된 이 지역의 핵군축협상의 파트너로 참가해야겠다.는 것이다.

 

빅터 차 교수는 북한이 공식석상에서 제안한 것은 아니지만 6자회담과 병행하면서 미국과 북한간의 양자회담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적극적인 안전보장(Positive Security Assurance), 즉 체제안전을 얻겠다는 것이 진의인 것으로 보고 있다. 그에 의하면 북한은 6자회담 테두리 밖에서 미국이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을 인정한 것처럼 북한 핵도 인정해주고 민간베이스의 에너지협정에 동의해줄 것을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 2005년의 9.19합의나 2.13합의를 이행할 생각을 버리고 6자회담 참여를 거부하면서 새로운 요구를 들고 나오는 배경에는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이 2006년 12월 중순 인도(印度)에 핵연료 판매와 핵기술 이전을 허용하는 협정에 서명한 때문이다. 특히 인도는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하지 않은 국가인데도 미국이 핵무기를 개발한 인도에 예외를 인정, 특혜를 주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외부관측자들의 설명에 의하면 중국을 견제하고 원자력 관련 미국 기업의 수출을 돕기 위한 묵적에서 인도가 가진 22개 원자로 중에서 8개의 원자로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 감시의 대상에서 배제하는 미국과 인도와의 민간핵에너지협정을 체결해 주었다. 이 협정에 따라 인도는 미국으로부터 핵 기술을 이전받는 것은 물론 핵보유국 지위를 공식 인정받는 길이 열렸다는 것이다.

 

북한은 미국이 이중 잣대를 인도에 적용하는 것을 놓치지 않고 새로운 요구를 들고 나왔다. 이에 대해 미국은 "북한은 미국으로부터 '핵 협력'을 받고 관계도 좋은 인도(印度)가 되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될 가능성은 없다"고 말하고 그 이유로 인도는 30년 이상 핵확산으로 문제를 일으킨 기록이 없으며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핵 시설을 관리하고 있어 북한과는 사정이 다르다고 말했다. 부시 뒤를 이은 오바마 미 대통령도 선거운동 기에는 부시의 외교정책을 비판했지만 2009년 11월 24일 만모한 싱(Singh) 인도 총리를 '국빈(國賓)'으로 대접하면서 인도에 대한 핵 정책에 변화가 없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북한은 핵 문제에 대한 미국의 이러한 이중성을 문제 삼으면서 핵보유국 지위를 유지한 채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타진하려고 한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어떻게 해서든지 현재의 '위기국면'을 돌파하면 결국엔 핵 보유를 인정받을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6자화담참여시기를 질질 끌면서 내외여론의 향배를 지켜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북한 측의 오산이다. 북 핵 6자회담이 열린 것은 동북아시아지역에서의 핵 도미노현상을 막으려면 북한 핵의 폐기가 필수적이라고 주변국들이 인식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또 미국과 북한간의 양자 대화에서 설령 인도방식의 대북적용이 양해된다고 하더라도 중국이 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며 일본과 한국의 반발을 미국이 막을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6자회담의 테두리 내에서나 밖에서 북한이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다.

 

협상차원에서 북한도 핵보유국으로 인정받으려고 하겠지만 그것의 실현을 끝까지 밀어붙이지는 못할 것이다. 김정일의 건강악화를 계기로 시작된 후계체제 구축문제와 악화일로의 북한 경제사정은 북한이 핵협상을 아무 성과 없이 천연시킬 수만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현재 김정일은 자기 후계자에게 개혁된 경제상황도, 난경(難境)을 벗어나도록 지원해 줄 국제사회의 호의도 이끌어 낼 어떠한 유산도 남겨놓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김정일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미국으로부터의 적극적인 체제보장이다. 이는 빅터 차 교수에 의하면 미국과의 큰 틀의 협상을 통해 김정일의 후계자인 아들 김정은이 정권을 지켜내려면 핵을 부분적으로 포기해 가면서 외부의 경제 지원을 얻어내고 점진적인 개혁개방의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과정에서 김정일 가계(家系)가 붕괴하는 것을 막아달라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 보장은 김정일의 진실한 희망일 수는 있지만 그러나 개혁개방의 과정이 체제붕괴로 이어질 수 있는 “개혁개방의 딜렘마”를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는가. 정권교체 기에는 항상 불안정이 따르며 외부개입보다는 내부 갈등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사실상 북한이 미중양국과 진지하게 협의해야 할 과제 같다. 그러나 중국은 지난 7월 미국과 중국 간의 전략경제대화에서 미국이 제기한 북한 유사시 대책 협의를 거부하였다.

 

앞으로 6자회담이 재개된다고 하여도 협상 쌍방은 어느 측도 목표를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북측이 원하는 것을 미국이 줄 수 없고 미국이 원하는 것을 북한이 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에 추가적인 양보를 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면서 북한의 6자회담 복귀를 강력히 요구하는 한편 유엔안보리 결의 1874호를 국제사회가 이행토록 하는 이른바 협상과 제재를 병행하는 조치를 강화하고 있다. 상황은 북한의 유사 시문제로 변질되고 있다. 현시국은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이 바야흐로 6자회담에서의 성과기대보다는 북한의 유사시를 내다보는 대안강구에 좀 더 주력해야 할 때를 맞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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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사일발사를 지켜보는 김정일 2009년4월 5일)
                 

                    북한 비핵화를 위한 새 구상이 필요하다

                             우석대학교 초빙교수 이 영 일(한중문화협회 총재)

  북한의 김정일 정권은 국제사회의 여론에 아랑곳하지 않고 핵무장과 탄도미사일 개발에 집착하고 있다. 외교협상을 통해 북 핵을 포기시킨다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6자회담은 사실상 실패한 협상이다. 유엔안보리의 결의 1718이나 의장성명도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억제하는데 실패했다. 인민들을 굶겨 죽이면서도 핵실험을 단행했고 인공위성우주탐사라는 명분으로 대륙간 탄도미사일 발사실험을 단행, 미사일 능력을 과시했다.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나 전략적 종심(縱深)이 짧은 국토의 협소성 때문에 남북한 어느 측도 핵무기, 탄도미사일, 항공모함 같은 전략무기를 가질 입장이 아니다. 전략무기를 보유하게 되면 그 전략무기로 안보위협을 받는 국가들이 이를 좌시하지 않고 반드시 간섭해 들어오기 때문이다. 전략이론가들이 한반도를 핵전장터(theatre nuclear)가 아닌 재래전장터(theatre conventional)라고 보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남북한의 어느 측이라도 전략무기의 보유를 시도하면 반드시 외세의 개입을 불러 오며 한반도 통일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을 수 없게 된다. 또 소위 6.15남북선언에서 말하는 남북한 연합추진도 연합구성체간의 안보체계가 핵 대 비핵으로 갈리기 때문에 불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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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핵문제를 다루는 베이징의 6자회담장)
북한은 미국의 대북압살정책이 북한의 핵무장을 불가피하게 한다고 강변하지만 오늘의 세계에서 지구 최강국인 미국이 지구 최빈국 중의 하나인 북한을 무력으로 침략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북한은 핵무기를 가짐으로 해서 주변국들의 견제와 간섭, 심지어는 군사제재까지를 받을 위험을 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김정일은 핵과 미사일에 집착하는가.

이 집착은 한마디로 김일성으로부터 시작해서 아들 김정일에 이르는 2대에 걸친 세습통치의 정치명분 때문이다. 오늘의 북한정권은 “미제의 강점 하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남조선인민을 해방 한다 ”는 명분위에 세워져있다. 따라서 남한 땅에서 미군을 몰아내고 남조선을 해방시키는 것이야말로 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지는 세습정권의 존재이유이며 그것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곧 통일이며 앞으로 시도할 제3대 세습까지를 정당화시킬 혁명혈통계승의 명분이다. 이들은 미국의 심장부를 강타할 위력적인 핵탄두미사일로 무장해야 만이 미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조국통일을 완수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의 남북한 상황은 이미 탈북현상이 웅변하듯 헐벗고 굶주리는 것은 소련의 위성국가로 첫발을 내디딘 북한이며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건국의 기초를 다진 한국은 GDP세계 랭킹 13위로 올라선 경제대국이다. 북한은 이미 남북한 간의 개발과 건설을 향한 발전경쟁에서 패했으며 중국식 개혁개방을 본받는다고 하더라도 인민들의 생활수준은 향상될지 언정 남북한 간에 벌어진 발전격차를 매우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남북한 상황에 대한 이러한 평가 때문에 북한은 중국정부가 오래전부터 권고해 온 중국식 개혁개방정책을 수용하지 않고 이른바 “조선식 사회주의”를 실시하겠다면서 핵과 미사일개발을 중심으로 하는 선군정치와 강성대국의 기치로 병영국가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북한의 전략행동결정의 준거는 주변대국들의 동향보다는 한국의 대북동향이며 통일의 주도권을 잡기위하여 남한보다 우위에 서는 사업이 무엇이고 방법이 무엇이냐를 가장 중요시하고 있다. 현재 북한은 한국이 핵 비확산 조약(NPT)과 미사일기술 통제체제(MTCR)에 묶여있는 현 상황 하에서는 핵과 미사일을 먼저 개발 보유하는 것이 한국에 대해 우위를 누릴 수 있는 결정적 요소이며 또 이 분야에서의 대남우위가 북한이 한반도문제에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이것은 지난 60년 동안 일관된 북한의 전략이며 이 전략을 바꾸지 않는 한 북한은 어떠한 난관에 봉착하더라도 핵과 미사일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입장은 북한과 같지 않다. 한국은 남이건 북이건 핵무기를 포함한 전략무기를 갖는 한 외세의 개입은 필연적이고 결과적으로 평화통일을 향한 국제환경조성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한반도의 비핵화는 통일의 선행, 필수조건이라고 본다. 그러나 북한이 비핵화를 끝내 거부하고 주변대국들이 자국의 실리를 의식, 실효 없는 외교해법에만 매달린다면 한국은 NPT체제에 계속 묶여 있을 필요가 있는가를 신중히 재고해야 한다.
 
원자력발전능력 세계랭킹 5위국가인 한국도 NPT의 굴레를 벗고 북한과 대등한 핵보유를 할 수 있음을 과시할 필요가 있다. 한국이 북한을 제압할 핵무기를 갖지 않는 한 북한은 결코 핵무기나 미사일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한국의 핵보유, 이것은 어느 면으로 보면 모순 같지만 이 방도를 떠나서 북한의 핵 포기가 가능할 것인가를 자문해야 한다. 남북한이 핵무기를 상호 포기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지 않고 북한을 외교로 핵을 포기시킬 방도는 없다. 모순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실현시킴으로써 비로소 모순극복의 길이 트인다는 변증법의 진리를 새삼 시도해보아야 한다.

이러한 구상과 병행해서 정부는 확산방지구상(PSI)에도 전면 참여해야 한다. 북한 측의 반발을 의식해서 참여를 늦춘다면 그것은 안보의 포기다. 지금 북한이 두려워하는 것은 PSI자체가 아니라 한국의 참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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