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9년 12월 17일 15시 서울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실에서 통일부가 후원하고 통일동우회와 통일교육연구원이 함께 주최한 李榮一 韓中文化協會 總裁 초청 강연회에서 행한 연설내용 全文임 |
제 2의 분단만은 피합시다.
통일 꾼 동지 여러분,
대망의 새해를 꿈꾸면서 다사다난했던 己丑年을 보내는 시기에 통일꾼 동지들을 이렇게 만나 함께 말씀을 나누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금년은 우리와 같은 분단국이었던 독일이 동서독을 가로막던 베를린 장벽을 깨트리고 통일을 성취한지 20주년을 맞는 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감회와 반성을 일깨워 주는 해이기도 합니다. 독일은 동서독 기본관계 협정을 만든 후 18년 만에 統一을 성취했지만 우리는 7.4공동성명을 발표한지 37년이 지났고 남북한 기본합의서가 채택된 지 18년이 흘렀어도 통일의 전망조차 서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솔직한 현실입니다.
저는 만31세에 당시 국토통일원(현 통일부)의 요직인 정치외교정책담당관(2갑)에 임명되었습니다. 당시 金永善 장관님이 임명장을 수여하면서 이영일 담당관 같은 나이에 이런 자리에 오르는 일은 前無後無할 것이라고 격려 말씀을 주셨는데 그때로부터 40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1980년 12월 6일 離任式을 마치고 통일원을 떠났는데 그때로부터 30년이 지난 시점에서 오늘 여러분들을 이렇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의 감회도 남다른 것 같습니다.
1. 통일문제의 현주소를 생각한다.
우리 모두가 통일을 기다려온 지도 금년으로 어언 65개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제가 통일원에 근무할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통일을 생각하는 우리의 태도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고 한반도 주변정세를 보는 우리의 관점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나서는 내외정세를 관찰하면 두 가지의 상반된 전망이 나옵니다. 하나는 북한내부의 급변사태로 통일의 기회가 그 어느 때보다 시급히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러한 가능성을 내다보면서 有事시 대비를 철저히 하고 기회를 잘 활용한다면 대한민국 주도로 통일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난 10년간 우리국민들이 통일비용론에 위축되고 북한 핵문제도 주변국들의 보조불일치로 해결가능성이 희박해 보이기 때문에 통일을 먼 미래의 일로 간주하는 통일 비관론 내지 포기론이 대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의 현실적, 실용적 사고방식과 태도를 보면 통일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 경향마저 보이고 있습니다.
2. 통일정책의 회고
저는 오늘 통일의 기회가 바야흐로 다가오고 있다는 입장에 서서 통일문제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돌이켜 보건데 제가 1969년 12월 경 통일원 상임연구위원으로 처음 일을 시작할 때만해도 통일은 우리 대한민국만의 일방적 과업이었습니다. 군사적 의미의 수복통일이 우리가 생각하는 통일과업의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통일원에 들어오기 前前해인 1968년에는 31명의 북한특공대들이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위해 서울을 습격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남북한관계는 전쟁상태나 다름없었고 이런 환경 하에서는 일방에 의한 타방의 합병이나 점령만이 통일의 유일한 방도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8.15평화통일 구상 선언]
그러나 정부는 1970년에 들어서면서 越南戰이 격화되는 가운데 닉슨독트린이 발표되는 등 한반도에 새로운 군사긴장을 불러올 정세가 조성됨에 따라 남북한의 대결구도를 대화구조로 전환시킴으로써 전쟁가능성을 줄여나가는 정책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8.15경축사를 통해 통일수단으로 무력과 폭력의 사용을 포기하는 평화통일을 추진할 것과 남북한관계를 "창조와 건설과 개발을 향한 선의의 체제경쟁관계"로 전환시킬 것을 제안하고 이산가족의 생사소재를 파악하여 인도적 차원에서의 분단고통을 줄여나갈 것을 천명하였습니다.
흔히 평화통일구상 선언으로 알려진 8.15선언을 계기로 한국정부의 통일방안이 상대방의 존재를 무시하는 일방적 과업에서 북한이라는 상대와의 협력을 전제하는 쌍방적 과업으로 통일정책의 성격이 전환되었던 것입니다. 즉 평화통일을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남북대결구조를 대화구조로 전환]
1971년 남북한 간에 적십자회담이 열리면서부터 남북한의 대결구조는 대화구조로 역사적인 전환을 보게 됩니다. 이때부터 오늘날 까지 남북관계는 그 可視的 성과와는 상관없이 대화구조를 유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중단도 있었고 오랜 기간 단절도 있었지만 대화는 끊기지 않고 유지되었기 때문입니다. 남북한 간에 열린 대화는 국제정세면 에서는 장기화된 월남전이 미국 측에 불리하고 공산 측에 유리한 쪽으로 종결을 향하여 진행되는 정세 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앞서도 지적했지만 월남전이 끝난 후 한반도에 다시 전쟁의 불통이 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남북대결을 對話戰, 協商戰으로 전환시켰던 것입니다. 1974년 4월 19일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없어지는 것은 휴전선이요 이룩되는 것은 통일"이라는 섬뜩한 발언을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이 당시 북한은 4대 군사노선을 완성하여 전쟁준비를 완료한 조건하에서 대남인민민주주의 혁명 전략을 적극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면전에 의하지 않더라도 적화통일이 가능할 것으로 내다보았던 것 같습니다. 즉 형태를 달리하는 전쟁이 협상이라는 레닌의 전략을 이론적 배경으로 하면서 대남 사상전, 모략전과 혁명유도전략을 강화하면 능히 북한주도의 통일이 가능할 것으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통일접근을 위한 기능주의 이론의 대두]
이 당시 한국에서는 통일이론으로 기능주의가 남북대화와 평화통일론을 뒷받침하는 이론으로 크게 부상되었습니다. 기능주의 통일론이란 남북한이 교류와 협력을 진행하면 협력의 범위가 넓어지고 각 기능분야에서의 협력이 확대(Spill-over effect) 되면서 상호이질성이 줄어들고 공통성이 늘어나 평화통일의 여건이 마련된다는 점진적 통일 접근이론입니다.
이 방식에서 말하는 통일은 기능적 접근을 통해 분단고통을 하나씩 줄여나가면 모든 형태의 분단고통이 해소될 날이 올 것을 목표모델로 정하고 바로 이 과정을 거처 통일이 평화적으로 완성될 수 있다는 점진적, 단계적 통일론이었던 것입니다.
[북한의 연방제 통일공세와 민족공동체 통일방안]
북한은 한국의 이러한 접근방식을 제압하기 위해 남북연방제 통일공세를 강화해 왔습니다. 북측은 우선 과도기적으로 1민족 1국가 양 체제로 연방을 실시하고 최종적으로 단일의 통일정부를 세우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도적 접근은 대내외적으로 일단은 그럴듯해 보였기 때문에 지지 세력의 저변을 확장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측에 부담을 주는 통일 공세였던 것입니다. 특히 김일성이 주창한 고려연방제는 비록 공산당의 연합전술이 그 이론에 내제된 독소였지만 통일선전공세로는 한국 측에 크게 부담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은 이러한 공세의 효과를 차단하기 위해 가장 느슨한 형태의 연방제인 英聯邦의 Common wealth모델을 비롯해서 한 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연합왕국 시기에 등장했던 국가연합(Confederation)등도 검토하고 공산주의자들의 전통적인 합작전략인 상하층 통일전선전략을 조명하면서 평화공존단계, 교류협력단계, 연합단계, 통일단계를 상정하는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각계각층의 의견을 수렴한 토대위에서 정부의 통일방안으로 확정, 발표했습니다. 통일과정의 단계설정 때문에 단계적 통일방안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현재까지도 이 기조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2. 공산권의 붕괴와 통일문제
7.7선언과 남북한 기본합의서 채택의 문제점
정부의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1991년 남북대화를 통해 한반도비핵화 공동선언을 포함한 남북기본합의서로 발전되었습니다. 당시 북한의 김일성이 남북한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선언에 동의한 진정한 이유는 공산권 붕괴의 국제적 분위기 속에서 북한정권을 지키면서 시간을 벌기위한 전술에서 나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당시를 돌이켜 보면 노태우 정부가 취한 조치 중에서 반성해야 할 점이 없지 않습니다. 첫째 공산권의 붕괴가 공산권이 당면한 시대의 필연적 흐름임을 직시하지 못하고 남북대화를 통해 북한 측과 그럴듯한 합의를 생산하는 데만 치중했다는 점입니다.
둘째로는 공산권 변화의 와중에서 통일의 실질적 기회를 포착하겠다는 의지와 준비가 태부족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당시 노태우 정권은 냉전청산작업의 일환으로 대북유화정책의 극치라고 할 7.7선언을 발표하면서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를 포함한 인권문제, 이산가족문제, 국군포로문제를 적극 제기, 북한을 적극적으로 압박하는 공세를 취하지 못하고 북측이 지키지 않을 합의생산에만 치중했던 것입니다.
김일성은 남한 측의 공세를 피하려고 남북 당국 간 회담에 응했던 것입니다. 결국 지켜질 전망이 없는 합의만 얻어내는 대신 북한의 숨통을 열어주고 시간을 벌게 해주는데 이용당했던 것이 당시의 남북당국 간 회담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남북기본합의서는 채택 18년이 경과한 지금까지도 아무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핵문제로 훨씬 더 심각한 국면으로 남북한 관계가 밀려가고 있는 현실이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셋째로 한국통일 방안이 딛고 서 있는 기능주의이론의 현실성과 한계성을 통찰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공산권을 상대로 하는 기능주의적 접근은 극히 제한된 분야에서만 성과를 가질 뿐 공산권의 체제변화에 큰 영향을 못 준다는 사실입니다. 공산권을 붕괴, 변화시킨 것은 기능주의적 접근 때문이 아니라 공산권 내부의 체제모순이 성장하여 공산권 경제가 파탄된 데 기인했던 것입니다.
공산권의 붕괴는 70년대 중반부터 농업생산성이 약화되는 사회주의 침체기에 진입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역사의 큰 흐름을 간파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실수가능성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이미 지나간 이야기를 이 항목에서 반성의 소재로 내놓는 것은 북한이 바야흐로 잘못된 화폐개혁으로 인민 대 정권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대북 탈북러시가 예고되는 판에 한국의 대북정책이 또다시 남북정상회담의 유혹이나 6자회담 재개 쪽으로만 흐른다면 이는 결과적으로 북한 인민이 아닌 김정일 정권을 또다시 내부 와해위기로부터 구해주는 결과밖에 초래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산권은 개혁이 아닌 수구에서 몰락했습니다. 변하지 않으면 죽는 것(不變卽死)이 역사의 교훈입니다. 그러나 북한은 계획경제의 와해 과정에서 모처럼 싹튼 시장을 죽이고 체제를 다시 계획경제로 되돌려 통제를 강화하려는 화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이 결과 인민과 정권 간에 신뢰가 무너지고 정권의 악랄한 인민억압정책에 대한 분노와 저항이 대내적인 모순과 갈등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북한이 이러한 대내적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남북정상회담을 열거나 6자회담에 복귀, 대미관계를 개선하는 등 외교적 성과를 올려 원조를 끌어오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런 책략에 또다시 말려들어서는 안 됩니다.
주지하다시피 소련이나 동구에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개혁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데로 리베르만 개혁이론이라든가 체코의 오타 시크의 시장 중심적 개혁이론 등이 모두 이때 등장했고 중국에서는 1978년 등소평의 개혁개방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은 그때나 지금이나 개혁에는 항상 역행하고 있습니다. 현시점에서 남북정상회담이나 6자회담의 재개는 위기에 몰린 북한정권만을 돕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신중한 대처가 요망된다 하겠습니다.
[중국에서의 등소평의 개혁개방정책]
중국은 다른 공산국가들과는 달리 정치개혁은 유보한 채 경제면에서 개혁개방을 적극 실시하고 명칭은 사회주의 초급단계라거나 사회주의적 시장경제 또는 중국특색적 사회주의라고 붙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실시하여 농업생산력을 증강함으로써 대중빈곤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즉 중국경제를 전체 인민에게 빵을 나누어 주어 식 생활을 해결하는 원파오(溫飽)단계로 진입시켰던 것입니다.
등소평은 이미 60년대 초기에 사회주의는 빈곤의 대명사가 아니며 모두가 잘살게 되는 共同富裕의 길이라고 설파하고 인민에게 빵을 줄 수 없는 당은 진정한 의미의 공산당이 아니라면서 모든 것에 우선하여 인민에게 빵을 공급하는 것이 공산당의 一次的 의무라고 하였습니다. 이 당시 중국경제학자 劉伯承의 黃猫白猫론을 등소평이 칭찬하면서 이를 黑猫白猫라고 부른 것이 오늘날에는 黑猫白猫론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북한은 중국의 개혁개방권고를 외면]
등소평은 개혁개방의 초기에 북한을 비공식 방문, 김일성에게 개혁개방을 권유했고 1983년에는 아들 김정일을 초청하여 개혁개방의 이론과 현장을 설명하면서 중국식의 개혁개방을 따르도록 권유하였습니다. 개혁개방을 권유받은 초기에는 북한에서도 合營法을 비롯하여 이른바 14개의 개혁법률을 제정 공포하고 개혁개방에 나설 것 같은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북한은 아들에게 권력을 세습시키는 이른바 사회주의적 봉건체제건설에 주력하면서 개혁을 외면하고 중국식이 아닌 자기 식 즉 주체적 개혁개방노선을 내세우면서 중국노선을 외면하였던 것입니다. 세습체제에 대한 내부저항을 잠재우고 전체인민에 대한 수령 독재체제를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북한을 안정과 발전의 반석위에 올려놓는 길이라고 자기 노선을 정당화했던 것입니다.
3. 김대중 노무현시기의 통일 정책
김대중 대통령은 자기의 3단계 통일론이 정부의 공식적인 통일방안과 다르면서도 대통령 재임 중 정부의 공식통일방안을 수정하지 않은 채 6.15선언을 자기 모델에 맞춰 내놓았던 것입니다. 다만 다른 점은 공존단계의 설정 없이 바로 연합단계로 남북한을 접목시켜 통일 분위기를 조성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북측이 말하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연합의 이름으로 바로 실천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2000년대의 6.15선언이나 노무현 대통령의 10.4합의도 이러한 정책적 사고의 틀에서 나온 것입니다.
[햇볕정책의 본질]
앞으로 後代의 역사가 어떻게 평할지는 모르지만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이 추구했던 소위 햇볕정책이나 평화번영정책이 북한을 변화시켜 점진적으로,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루는 방도라고 말할 수 있을지 저로서는 의심이 갑니다. Francis Fukuyama가 북한처럼 철저한 통제체제에는 햇볕정책이 아무런 효험이 없고 햇볕정책이 성과를 볼 수 있는 곳은 알카에다나 탈레반이 지배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이라고 한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견해였습니다..
저도 한민족복지재단의 공동대표로서 몇 차례 북한을 다녀왔습니다만 불행히도 햇볕정책이나 평화번영정책의 이름으로 펼쳐진 대북지원정책은 북한의 선군정치의 지원이었을 뿐 인도주의적 목표나 북한변화유도목표에 거의 기여한 바 없는 것 같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북한의 핵 개발에 현금을 지원했다고 말해도 크게 틀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통일비용문제를 내세워 통일논의의 발전을 억압]
그러나 김대중, 노무현 정권 당시는 통일론의 차원에서 볼 때 통일논의를 사실상 제한한 시기였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대통령 중에서 김대중 대통령만큼 통일에 비용이 많이 든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통일논의의 발전을 억제하거나 기피한 대통령도 없습니다. 통일에 대한 강조나 통일논의의 활성화가 자칫 자기정책에 대한 저항을 유발하거나 북한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우려에서 통일논의의 제압수단으로 과다한 통일비용을 강조하고 심지어 통독의 가장 큰 문제점이 통일비용인 것처럼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선의로 말해서 통일지향적인 대통령이었다기보다는 전쟁억제에 역점을 둔 대통령, 즉 북한의 호전적 태도를 완화하기 위해 경제 지원으로 평화를 사보자는 정책을 폈다고 말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북한이 한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만한 능력을 보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전쟁억제를 빙자한 대북 퍼주기 정책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측면이 있습니다. 유람선이 오가는 금강산 상황과 海戰이 벌어지는 西海 상황을 그대로 동시에 받아들이자는 그의 정책이 과연 옳은 정책이었는지 자문하고 싶습니다. 당시 김대중 추종자들이 대북 퍼주기를 비판하면 그러면 "전쟁하자는 것이냐"고 대들던 정치 상황을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4. 현 단계의 통일 상황 진단
[북한 정권의 실패와 핵문제의 대두]
통일이론으로서의 기능주의적 접근은 남북한 사회가 서로 교류와 협력을 증진시켜 나가면 남북한이 함께 발전하고 양측에서 이루어진 발전은 어느 시점에서는 체제차이에도 불구하고 양 체제 간에 상호수렴(convergent)현상을 誘發한다는 전제가 깔려있습니다.
1960년대를 기점으로 할 경우 북한은 한국보다 경제력에서나 종합국력 면에서 다소 앞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1972년경부터 남북한의 발전수준은 역전되기 시작했고 현재는 한국이 G20의 반열에 오른 반면 북한은 지구 최빈국으로 전락했습니다. 인민에게 빵을 제대로 공급할 수 없는 국가로 전락한 것입니다. 등소평은 인민에게 빵을 줄 수 없는 공산당은 당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고 했습니다. 공산당은 집권과 동시에 인민들의 밥그릇을 장악하는 정권인데 빵을 배급해 줄 능력을 갖지 못한다면 정권을 가질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1990년대 중반 이래 북한에서의 기아는 그 심각성이 전 세계의 우려를 살 수준이었으며 중국의 권고로 유엔에 식량지원을 호소하고 이 호소를 계기로 유엔식량기구를 비롯하여 전 세계의 NGO들이 북한 돕기에 나섰습니다. 한국정부와 NGO도 북한 돕기에 나섰던 것입니다. 본인도 한민족복지재단의 공동대표로 북한지원 사업에 6년간 종사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국제사회의 대북지원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경제사정은 개선되지 않았고 만성적인 饑饉지대로 변해가는 형국입니다. 2003년 5월 베이징에서 열린 북한지원 NGO대회(저는 한국 측 대표로 참가)에서는 두 가지 문제가 심도 있게 다루어졌습니다. 하나는 수년간 지원을 계속해도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데서 오는 援助疲勞(Donor's Fatigue)현상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와 다른 하나는 원조의 형태를 무상원조가 아닌 개발원조로 전환해야 하는데 이 전환의 필수적인 요소는 원조의 대상과 상환계획을 북한 측이 마련할 수 없는 처지라는 것입니다.
북한은 이러한 문제나 요구를 제기하면 오히려 내정간섭이라 비난하면서 원조거부나 원조기관의 철수를 요구하는 형식으로 대응했음은 주지하는 바입니다. 세계식량계획의 Richard Reagan 대표는 당시 북한에 주재하는 유일한 미국인이었지만 북한정권의 난폭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북한주민을 餓死에서 방지하는 것은 국제사회의 책임이라고 강조하면서 지원의 계속을 각국 대표들에게 호소했습니다.
[북한은 개혁개방외면으로 실패했다]
북한은 오늘 겪고 있는 경제적 난경과 낙후성의 원인을 미국의 대북 압살 정책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북한이 경제적 곤경에 처한 것은 개혁개방이라는 세계적 추세를 외면한데 기인합니다. 중국은 1983년 이래 등소평이 앞장서 북한의 개혁개방을 권고했고 그 이후에도 김정일의 공식 비공식 중국방문 시에 개혁개방정책의 효험을 상세히 설명하고 상해 등 개혁개방의 성공사례를 직접 설명하면서 개혁개방을 적극 권장했습니다.
중국은 1996년 우방궈 중국부총리가 북한이 개혁개방에 나서지 않는 한 경제회생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 공개적으로 개혁개방을 촉구하기도 했습니다. 중국의 이러한 노력은 2000년대에도 지속되었습니다. 장쩌민 주석은 2001년 북한 방문 시 개혁개방을 김정일에게 권고했는데 김정일은 북한에는 북한식 사회주의가 있고 중국에는 중국식 사회주의가 있다면서 중국식 권고를 거부했습니다.
후진타오 주석도 2005년 10월 평양방문 시에 북한 만수대 의사당에서 열린 만찬 석상에서 만찬연설의 3분의 2를 중국이 개혁개방을 통해 올린 성과를 설명하는데 할애, 북한의 개혁개방을 권고했습니다. 이에 앞서 중국 전국 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장 우방궈는 중국원조로 세워진 대안친선유리공장 준공식에 참여해서 중국식 개혁개방을 북한이 참고할 것을 재차 권고했던 것으로 보도되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중국의 지도층들이 그렇게 수년에 걸쳐 권고한 개혁개방안을 채택하지도, 실시하지도 않았습니다. 한때는 앞에서도 지적했거니와 개혁개방관련 법령도 제정하고 특구정책을 모방, 나진선봉지구를 개방하기도 했지만 실질적인 측면에서 개혁개방을 추진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북한경제 실패의 1차적 원인이 있습니다.
중국은 문화대혁명이라는 史上 미증유의 난국을 끝낸 후 등소평 주도하에 전쟁과 평화에 관한 국제정세를 읽는 시각을 毛澤東의 그것과 달리했습니다. 毛澤東은 지구상에 자본주의국가가 존재하는 한 전쟁은 불가피하다면서 전쟁불가피론을 주장했고 이 정세관에 맞도록 대내외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등소평은 전쟁의 원인은 자본주의 국가가 존재하는데 있지 않고 국가들 간의 패권추구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반패권의 입장에서 국제정세에 대처해나가면 전쟁은 피할 수 있다는 戰爭可避론을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강대국들 간에는 50년 내지 100년 동안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중국은 현대화건설에 매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등소평의 정세관은 적중했고 오늘날 중국은 전 세계가 G2로 명명할 만큼 큰 발전을 이룩, 강대국의 반열로 뛰어 오르고 있습니다.
[북한이 말하는 미국의 대북압살정책]
그러나 북한은 체제유지의 명분을 미국의 북한압살정책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개혁개방을 거부한 가운데 선군정치체제를 구축하는데 돌진했습니다. 북한은 "한반도에서 통일전쟁은 끝나지 않았으며 다만 잠시 중단된 휴전상태이며 미제국주의자들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통일을 완수하는 길은 핵탄두를 장진한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 미본토를 강타할 능력을 가질 때"라는 정세관에서 핵과 미사일 개발에 역점을 두는 선군정치를 강화해 왔습니다.
이 정책은 늦게 노출된 것이지만 김일성 생존 시부터 시작되었으며 앞으로도 포기될 전망은 보이지 않습니다. 국내학자들 가운데는 북한의 비핵화는 김일성의 유훈이라는 말에 현혹되고 있지만 북한핵문제를 역사적으로 파고 들어가면 북의 핵개발이야말로 김일성의 유훈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2006년과 2009년의 두 차례에 걸친 핵실험과 장단거리 미사일 발사는 북한식 표현대로라면 선군정치의 위업달성일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핵과 미사일 개발은 북한의 경제발전, 산업발전, 과학발전의 결과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인민경제의 처절한 파탄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그것의 정치적 사회적 결과는 배고픈 인민들의 줄 이은 탈북사태, 慢性的인 飢餓, 체제저항세력을 수용하는 정치범수용소의 확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 국내의 일부 학자들은 북 핵을 미국의 대북압살정책의 결과라는 북측의 주장에 맞장구를 치면서 마치 북한 측 대변인처럼 북 핵이 앞으로 소형핵탄두로 무기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공갈하는 역할까지를 대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북한핵문제를 역사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데 그 까닭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들은 미국이 북한정권을 승인, 미⦁북 관계를 정상화할 경우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처럼 말하지만 미국은 사실상 북한을 적대할 정책도, 의도도 없음을 여러 차례 표명했습니다.
클린턴 행정부에서는 공동성명에서 대북적대정책이 없음을 밝혔고 중유제공과 경수로 건설까지를 지원하는 긍정적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핵개발을 멈추지 않았고 농축우라늄을 이용한 핵개발을 추진하고 있음이 들어났습니다. 부시정부(부시정부 2기)도 문서로 미국은 북한을 침략할 의도도 없고 침략하지 않을 것임을 6자회담 미 측 수석대표 크리스토퍼 힐을 통해 밝혔지만 아무 효용이 없이 제2차 핵실험을 감행했습니다. 6자회담이 진행되는 기간 중에 두 차례나 핵실험을 단행한 것입니다.
북한은 미국이 그들의 주장을 수용할 때마다 요구조건을 하나씩 늘리는 요구조건 배가전술을 구사해오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미국과의 관계정상화이전에 북 핵을 印度처럼 핵보유를 인정해줄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도 마찬가지이지만 인도의 경우처럼 북한 핵을 묵인하는데 동의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만일 미국이나 중국이 북 핵을 긍정하는 경우에는 일본의 핵무장이나 한국의 핵무장을 막을 명분이 없어짐으로 해서 핵의 비확산 아닌 핵무장 도미노 현상을 몰고 올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6자회담의 태두리 내에서는 북 핵이 용납될 수 없을 것입니다.
최근 북측 주장을 종합해보면 ① 북한을 핵 국가로 인정할 것 ② 미국 등과의 관계정상화 ③ 대북경제제원 ④ 평화협정체결과 미군철수 등을 단계적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결국 북한이 말하는 체제의 안전보장은 북한주도의 통일을 보장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은 핵과 미사일로 그들의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것을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핵과 미사일이 만능인가]
북한이 핵과 미사일에 거는 기대가 무엇인가는 앞서 지적한 바와 같습니다. 거기에는 우리 국내 좌파이론가들이 북한의 진의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기만적인 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2000년 6월 평양을 다녀온 김대중 대통령과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이 6.15선언의 성과를 설명하면서 “이제 한반도에는 영원히 전쟁의 위협이 없어졌으며 김정일은 통일 후에도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는 것을 양해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지금 전혀 실감할 수없는 이야기입니다. 6.15선언에는 남북기본합의서와는 달리 한반도 안보에 관련된 언급이 한마디도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국민들의 불안과 반론이 일어날까 봐 날조해낸 거짓말이었음이 확연히 들어났습니다.
북한이 두 차례에 걸쳐 핵실험을 단행하고 선군의 위업을 과시했지만 북한경제 형편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경제파탄은 더욱 심화되었고 탈북자들은 더욱 늘어나고 있으며 북한내부사정에 관한 정보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많이 대외적으로 유출되고 있습니다. 한류의 침투도 그 범위를 나날이 넓혀가고 있으며 북한정권의 내부 장악력도 떨어지고 있습니다. 식량사정은 아직도 국제사회의 원조 없이는 인민들을 부양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심지어 군량미마저 부족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핵과 미사일을 처분하지 않고는 경제생황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으로 몰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들어와서 특히 2008년 8월 이후 김정일의 건강 이상설 등 북한체제의 불확실성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앞으로 한국의 통일은 북한과의 합의와 국제적 조정·보장을 통한 단계를 거친 형태보다 한국에게 갑작스러운 도전과제로 대두될 수 가능성마저 예견되고 있습니다. 즉 통일이 쌍방적 과제 아닌 대한민국의 일방적 과제로 성격이 다시 바뀔 상황이 도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독한 독재정권이라 하더라도 선군정치의 하부기반인 경제가 파탄 날 경우 제대로 정권을 지키기는 힘들다는 것이 일반적인 예측입니다. 과거 소련은 미국에 버금가는 핵탄두와 대륙 간 탄도미사일을 가지고 있었지만 생필품공급이 막히는 경제파탄으로 결국 1917년이래의 공산독재체제가 붕괴되는 것을 우리는 목격했습니다.
또 1989년 5월 2일 동독인들이 헝가리·오스트리아 경계선의 일부를 뚫고 나오면서 철의 장막이 무너지기 시작한 이후 7, 8월 여름 휴가철을 이용한 폴란드, 체코, 헝가리 등 동구 국가를 경유한 동독 주민들의 대탈출이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를 거쳐 그 다음 해인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로 이어졌는데 독일 통일이 이렇게 이루어지리라고 예견한 학자도 정치가도 없었습니다. 서독의 헬무트 콜 수상 자신도 예견 못한 사태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 국내좌파이론가들은 이런 사태를 일부러 외면하면서 만일 미국이 북한에 양보하지 않고 핵 폐기만 요구하거나 MB정권이 ‘비핵 개방3000정책’을 고수할 경우 북한은 핵폭탄을 소형화⦁경량화 하여 미사일에 정착하는 핵 무기화(제4단계)와 핵무기를 생산 배치하는 핵무장화(제5단계)까지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기를 서슴지 않습니다.
[새로운 통일 상황의 도래 가능성 증대]
공산주의를 표방해온 국가들이 겪은 이제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북한의 수령유일지배체제의 장래는 3대 세습 전후로
①루마니아 차우체스크(Ceauscescu) 식으로 붕괴하든가
② 중국ㆍ베트남 식으로 개혁ㆍ개방하던가,
③ 러시아식으로 체제를 전환하던가 아니면
④ 어렵지만 지금의 체제를 고수하면서 버텨보는 네 가지 중 하나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최근 2005년 이후 특히 2008년 말부터 북한체제의 장래와 연결된 한반도 통일 전망에 대한 연구가 많이 발표되고 있는데 2005년도 미국의 랜드연구소는 「북한의 역설: 한반도 통일의 상황, 비용 및 결과(North Korean Paradoxes: Circumstances, Costs and Consequences of Korean Unification」제하의 보고서에서
①체제진화와 통합을 통한 통일,
②붕괴와 흡수를 통한 통일,
③분쟁을 통한 통일 등 3가지 통일 시나리오 중 두 번째 시나리오에 의한 통일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또 2008년 11월 미국의 국가정보위가 발표한『2025년의 변화된 세계』제하 보고서는 2025년까지 한반도에는 단일국가는 아니지만 느슨한 남북한 연합 형태의 통일국가가 있게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또 이와는 달리 2008년 12월 “미리 가 본 2018년 유엔미래 보고서”에 의하면, 2015년이 되면 북한도 후기정보화시대에 접어들어 컴퓨터와 휴대전화를 통한 인터넷 접속이 가능하게 됨으로써 개개인이 지금보다 똑똑해지고 더 많은 정보를 갖게 돼 더 이상 권력 세습이 불가능해 지고 북한체제가 점진적으로 붕괴되어 2020년이 되면 남북한이 통일될 확률이 거의 90%에 달한다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2009년 1월 발간된『2030년의 대한민국』에서 김진현 전 과기처 장관은 한국이 선진국으로의 국격(國格)이 정착된 후 북한이 군사도발을 하면 확실히 보복하고 통일을 성취하겠다는 의지와 능력을 북한과 전 세계에 보일 경우 2030년 경 통일을 바라볼 수 있다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미국 국가정보위원회 보고서를 제외한 여타 연구의 전망들은 북한 붕괴 후 한국 주도로 통일이 될 곳으로 내다보고 통일 시기는 2020~2030년 사이가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좌파 이론가들과는 달리 오늘의 국제사회는 북한을 하루하루 몰락을 향하여 내려앉는 체제로 보고 있으며 북한의 핵과 미사일을 앞세운 위협으로 현재의 難境을 극복하고 再起할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2009년 7월 미국과 중국 간에 열린 전략경제대화에서 북한의 有事時 대책을 미리 논의해 두자는 미국식 제의를 중국이 거부, 구체적 논의의 진전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제 북한문제는 전문적인 연구기관들에서 붕괴가능체제로 분류되고 있으며 붕괴자체를 시간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상황이 이렇게 전개될 경우 우리의 통일은 그간 학계나 정부기관에서 꾸준히 연구되어 온 기능주의, 남북합작이나 연합 등 단계적 접근이론이 효용을 잃게 되며 특히 통일비용에 관련된 우려도 사실상 의미를 잃게 됩니다. 남는 문제는 북한 내에서 발생한 혼란사태가 6자회담의 틀 내에서 핵 폐기가 완료된 경우가 아니라면 북 핵의 존재나 유출이나 폭발로 안보상 위협을 받게 되는 국가들의 간여를 필연적으로 유발할 것입니다.
적어도 한국, 미국, 중국, 일본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안보상의 우려를 갖게 됩니다. 미국이나 중국은 북한내부의 핵통제 내지 관리체계가 무너질 경우 직접 출병하여 위험요소의 제거를 획책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현시점에서 한국정부는 기왕의 정부통일방안과 그 실천과정에서 제시하고 있는 "비핵개방3000"에만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다가올 북한 유사시라는 비상사태를 내다보는 정책대안을 준비하는 즉, 유사시 통일대비계획을 서두러 준비해야 할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흔히 작전계획 5029개념계획을 좀 더 구체화하자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지만 그러나 이 계획은 한국통일이라는 큰 목적에 조명할 경우 한미 간에 이해가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통일을 겨냥하는 별도의 부록계획을 한국정부는 준비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핵을 포한한 북한 군사문제는 국제사회와의 협력 하에 해결하더라도 그 밖의 문제는 한국이 주도하는 정책대안을 마련하고 국제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해 두는 전략전개와 함께 필요한 요원과 훈련을 비축해 나가야 할 시점입니다. 이러한 의지 없이, 이러한 준비 없이 좌우파간에 국론분열만을 계속하여 시간을 허송한다면 우리의 통일은 영원히 불가능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흔히 정치는 생물이라고 합니다. 항상 살아 움직이면서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반도 주변 강대국 중 한반도의 통일을 적극 지지할 나라는 없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의 노력여하, 우리외교의 능력에 따라 통일을 반대하는 외세를 통일지지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독일의 경우도 통일반대국가들을 통일외교를 통해 통일지지국가로 만드는데 성공함으로써 통독이 가능했음을 우리는 현대사에서 목격한 바 있습니다.
국제사회에서 Pax Americana의 역할이 나날이 줄어드는 미국은 북 핵만 제거된다면 그 이후 한국의 장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큰 관심을 갖기 힘들 것입니다. 일본은 학계나 정계, 심지어 경제계에서 까지도 통일한국이 친 중국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경향이 있어 한국 통일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러시아는 통일에 대한 관심보다는 한반도 종단철도가 시베리아를 지나가는 상황만 조성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 통일을 보는 중국의 태도는 어떠한가.
5. 한반도의 통일을 보는 중국의 태도
[한중관계-미수교상태의 교류에서 수교까지]
중국에 공산정권이 들어선 이후 毛澤東은 " 朝鮮은 이전에는 중국의 屬邦이었으나 회복해야 할 失地에 포함되지는 않는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말은 그간 한중관계에서 흔히 인용되었지만 오늘날 티베트나 위구르 문제를 볼 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 같습니다. 공산정권 수립직후 중국군이 중국안보의 필요성 때문에 1950년 티베트와 위구르를 침략, 정복하고 자치정부를 수립한 역사적 사건을 회고할 때 한반도가 중국의 침공대상지역이 아닌 것임을 밝힌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시모노세끼(下關)조약에서 朝鮮의 自主를 승인한 이래 중국이 되찾을 영역가운데 한반도를 포함시키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중국은 한반도를 자국안보를 위한의 입술(脣)로 보는 태도는 일관성 있게 유지되어 왔습니다. 1950년의 한국전참전도 그들이 이러한 안보관을 잘 말해주는데 1950년 11월 4일 중국민주제당파의 공동선언으로 밝혀진 항미원조(抗美援朝)는 중국안보의 기본조치라고 말하고 한 때 항미원조는 중국의 헌법사항이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은 1992년 북한 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수교했습니다. 북한과 중국 관계는 오늘의 한중관계인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보다는 한 차원 더 높은 전통적 우호관계이지만 과거 냉전시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협력의 밀도가 약화되었습니다. 물론 중국과 북한은 한중수교이후 한 동안 냉랭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1990년대 말부터 다시 원상을 회복하고 양국 지도층간의 교류를 심화 시켜왔습니다. 북한은 에너지와 식량을 중국에 크게 의존치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중국과의 냉담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중국이 북한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한중수교를 서두른 것은 중국외교가 이념외교에서 실용외교로 전환했음을 의미합니다.
특히 중국은 한국의 경제발전경험과 경제발전모델이 중국현대화에 필요한 모델임을 인정하고 1980년대 후반에는 이 당시 中國 지도층의 韓國에 대한 인식이 크게 否定에서 肯定으로 바뀌었습니다.. 한 예로 1980년 당시 黨 總書記 후야오방(胡耀邦)과 總理 자오즈양(趙紫陽)이 그리스와 유고의 공산당 機關紙와 행한 각각의 회견에서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은 한국의 발전경험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중국은 한국의 경제개발 정책을 철저히 연구하고 있다”고 말한바 있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중국은 86년의 서울 아시안게임에 최대선수단을 파견하였고 88년 서울 올림픽 때도 북한이 불참했음에도 불구하고 대규모의 선수단을 파견하였습니다.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양국 간에는 경제교류가 급증하여 1979년의 2,000만 불 정도의 교역량이 1988년에는 32억불에 육박하였습니다. 한국은 은 중국과 국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일본, 독일에 이어 중국의 4대 교역국으로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은 그러나 경제 부면에서는 한국과의 관계를 이처럼 심화시키면서도 정치면에서는 한국불승인 정책을 견지해 나갔습니다. 이렇게 된 데는 중국 나름의 뚜렷한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중국이 한국을 승인할 경우 2개의 한국을 인정하게 되어 하나의 중국을 내세워 대만을 통일하려는 중국의 국가목표와 논리적으로 마찰을 일으키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중국은 하나의 중국(One China)만을 인정하는 국가에게만 수교의 문을 여는 원칙을 고수하여 미국과 일본에게도 대만과의 단교조치를 취하게 한 후 수교했는데 한국은 이 당시 대만을 인정하고 대사를 둔 유일한 아시아 국가였습니다. 이 때문에 중국의 대한정책은 이 시기에도 철저히 정경분리의 입장을 지키면서 한국과의 수교를 미루었습니다.
[한국과 중국 간의 교류협력확대]
그러나 한국정부는 한중간의 경제교역이 확대되면서 대중국접근외교를 강화하는 이른바 북방정책을 통해 대만과의 단교를 결정하고 먼저 러시아와의 수교를 추진, 성공하고 뒤이어 중국과의 교섭에 착수했습니다. 중국은 남북한유엔 동시가입이 이루어지자 즉각 한중수교를 결단, 1992년 한중수교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중국이 한국과의 수교를 단행한데는 나름대로의 국익계산이 깔려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북한에 대한 개혁개방의 압력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1984년부터 2005년까지 계속되어 온 중국의 개혁개방 압력을 북한은 사실상 거부하면서 대외폐쇄정책과 수령 독재체제만을 강화해왔던 것이다.
현제 한중관계는 경제협력 면에서는 2007년을 계기로 미일과의 경협규모를 능가했습니다. 작년과 금년 사이에 금융위기의 여파로 다소 줄어들기는 했지만 1800억 달러 수준에 육박, 앞으로 수교20주년이 되는 2012녀까지는 양국정상이 합의한 바 있는 2000억 달러 목표를 무난히 달성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 핵문제와 한중관계]
북한핵문제는 오늘날 동북아 국제정치의 뜨거운 쟁점이 되고 있습니다. 미국은 당초 북핵문제를 미국과 북한간의 양자문제로 인식했으나 부시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북 핵문제는 미·북한 간의 양자문제가 아니라 북 핵으로 안보상 위협을 받는 당사국들 모두의 문제로 인식을 바꾸었습니다. 이때부터 북핵문제는 6자회담의 과제로 정립되었습니다.
미국의 권유로 6자화담의 의장국이 된 중국은 핵 폐기라는 원칙을 지지하면서 북핵문제를 협상을 통해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북한을 응징하는 결의안 표결에서 두 차례나 찬표를 던졌습니다. 물론 구체적인 대북응징에는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지만 원칙 면에서는 북 핵을 반대했습니다. 현재 국내외 이론가들 간에는 중국이 북한에 대해 취하는 "견제지지, 행동유보"라는 모순된 행보를 놓고 여러 가지 해석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전통주의자들은 북·중 순치관계(脣齒關係)론을 내세우면서 북한정권이 붕괴되는 것이 중국안보에 불리하기 때문에 국제사회에서의 강대국으로서의 체면상 북한에 대한 제재는 지지하지만 견제행동은 自制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순치관계론은 한중관계가 적대관계일 경우 상정 가능하지만 현재처럼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로 변화된 상황에서는 전략적의미를 가질 수 없을 것이고 더욱이 한미동맹이 새로운 시대에 걸맞게 변화되어 가고 있으며 작전지휘권문제가 재조정되는 환경에서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지난 12월 11일 서울에서는 중국, 일본과 한국의 이른바 진보성향의 학자들이 모여 동북아 평화포럼 서울회의라는 명칭 하에 북핵문제에서 북한의 입장을 두둔하는 선전전, 심리전을 강화하는 학술회의를 열었습니다.
이 회의에 참가한 중국학자들은 중국과 북한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어느 경우에나 중국이 북한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자립자강의 사회주의 북한의 존재자체는 중국변경안정의 보호벽이 됩니다. 하지만 중조맹우관계가 일단 파열하면 자기편을 불리하게 하고 적을 기쁘게 함(親痛仇快)은 물론 가장 큰 손해를 입는 자도 중국"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 중국내의 좌파이론가들은 북한의 핵무기 선택은 미국의 북한에 대한 오랫동안의 비하 고립, 타격, 봉쇄에서 비롯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옹호하고 중국과 북한의 우호관계는 한반도 평화와 안전의 불가결한 기초라고 강조하면서 미국이 북측의 주장을 대폭 수용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한국 측 학자들 가운데서도 북미 관계의 先 正常化 後 한반도 비핵화를 주장하면서 중국의 중재 하에 한반도 평화체제의 구축과정에서 북핵문제를 해결할 것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만으로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앞에서도 지적했거니와 요구조건 배가전술을 실천할 디딤돌로 미국과의 선 정상화를 원하는 것입니다.
좌파이론가들은 앞으로 이 회의에서 논의된 이야기들을 한국과 중국지역을 상대로 하는 선전전에 이용할 것입니다. 이 학술회의에 참가한 학자들은 북한이 개혁개방을 거부하여 자기 경제를 파멸적 지경으로 만든 가장 중요한 문제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또 중국이 학계를 지원하여 추진하고 있는 동북공정문제에 대해서도 한마디의 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중국의 대외정책 수립가들은 지금까지의 행태로 보면 철저히 실리위주의 정책을 구사합니다. 이데올로기 외교보다는 실리중심으로, 전쟁불가피론보다는 전쟁가피론으로 외교를 펼칩니다. 북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중수교를 결정했는가 하면 유엔에서의 북한견제결의안을 지지할 뿐더러 북한에 대한 필요시의 견제-유류공급중단이나 원조액수의 감소 등-을 단행해 왔습니다.
또 이런 실리적 관점 때문에 북 핵 외교에서는 북한과 중국과의 친선관계를 잘 활용, 북한카드를 유효적절하게 구사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핵무장을 중국은 결코 지지하지 않습니다. 동북아시아 대륙에서 중국이 누리는 공인된 핵 국가 지위를 북한에게 도전받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고 앞서 지적한대로 자칫 동북아에서 핵도미노를 유발할 우려 때문입니다.
또 중소대립 시부터 지금까지 걸핏하면 주체를 내세우는 북한이 중국 코밑에서 핵과 미사일을 가지고 버틸 경우 중국의 국익이나 인접국가정책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을 중국은 모를 리 없습니다. 비록 내정불간섭을 외교원칙으로 가지고 있긴 하지만 정권의 3대에 걸친 권력세습을 중국정치인이나 지식인들이 지지하기는 매우 힘들 것입니다.
중국의 권고를 받아들여 개혁개방을 했더라면 북한은 오늘의 중국보다 더 잘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은 중국이 권고하는 옳은 길을 거부하고 세계사의 흐름에 역행하는 핵 놀음에 나서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중국으로서는 한중FTA가 매우 긴요한 과제로 부각되고 있으며 동북아시아의 협력이 이 지역 국제정치의 주제로 제기되고 있습니다. 한중일 3국간의 총리회담, 한중일 3국의 FTA논의의 대두, 한중간의 거래결제수단의 선행절차로 간주된 한중 스와프 협정 등은 중국에게 한국이 북한보다 훨씬 중요한 국가로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북한은 중국에게 몇 가지기 면에서 매우 유용한 정권입니다. 북한의 핵문제 때문에 미국이 중국에 협력을 구합니다. 한국이 어느 면에서는 중국의 협력을 더 절실히 원하고 있습니다. 일본 역시 동아시아 공동체를 비롯한 안보상황개선을 위해 중국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 북한카드는 현시점에서 중국의 꽃놀이 패입니다. 이러한 외교적 이득을 중국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6자회담 의장국으로서 중국이 누리는 외교적 이점은 앞으로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 집단안보기구형성에서 가장 큰 발언권을 갖는 것입니다. 북한주재 중국대사는 한국주재 중국대사보다 격이 높습니다. 북한주재대사는 한국주재대사에 비해 역할과 기능이 더 크기 때문인데 원조문제에 관한 한 “총독적”(省長的) 지위를 행사할 만큼 중요한 존재입니다. 김정일이 수시로 중국대사관을 방문하는 것은 이러한 중요성을 감안한 태도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은 북한이 미국과의 협상을 통하여 북한 핵무기를 印度의 경우처럼 묵인 받는 것을 반대하고 다만 북한과의 관계정상화와 경제 원조를 받는 접근에는 긍정적입니다. 더 많은 이득을 북한이 미국에서 얻도록 지원해주지만 그것은 정치적인 것보다는 경제적인 것입니다. 정치적인 이득을 허용할 경우 북한 카드를 사용해서 얻는 이익보다 더 큰 재앙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중국의 북한에 대한 태도를 불가변의 것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미국의 힘과 역량이 나날이 변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과 북한 간에 중국이 원하지 않는 합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중국은 방치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은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한중관계의 긍정적인 측면과 우려스러운 측면을 대조하면서 북한 有事時를 내다보는 대중외교를 강화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북한 내부의 위기발생가능성론의 대두에 주목하자]
앞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2005년을 시점으로 하여 북한내부의 위기사태 즉 북한 유사시 사태에 관한 논의가 정보소식통이나 학계를 통해서 적잖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겨냥하는 국내논의는 작전계획 5029의 보완발전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중국에서는 경제, 군사 양면에서 움직임이 가시화되고 있습니다. 북한무역액의 70%는 지금 중국과의 교역이며 특히 중국은 북한에 대한 경제적인 영향력을 확대함으로써 북한 내 인프라 조성에 대해 남한과 일본을 따돌리고 독보적인 ‘우위’와 ‘선점’을 유지할 수 있는데다 북한 내 소비시장도 확실하게 장악하려는 기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북한은 중국의 자원외교대상이고 청진항, 나진항 등 주요항만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북한의 유사시를 대비해 조선족 특수부대를 편성, 유사시 북한에 진입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고 합니다. 또 홍콩의 북한 전문가 추전하이(邱震海)는 "6자회담 재개 후에도 상황이 악화될 경우 중국은 정권 전복이나 전략목표에 대한 '참수(斬首) 공격'에 동의하거나 북한 체제는 유지하되 김정일만을 축출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할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연합뉴스 홍콩)
한편 한국 내에서도 첫째는 김정일의 병상 통치를 거쳐 김정일 사망 이후 위기관리정권이 등장하는 경우를 내다보면서 위기관리정권은 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지는 3대 권력세습, 김정일 아들 중 하나를 앞세워 현재의 2인자인 김영남 상임위원장, 조명록 국방위 제1부위원장, 기타 당이나 군부 실력자가 뒤를 잇는 체제, 당과 군부에 의한 과도기적 집단지도체제 등장 중 하나가 될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둘째로는 대내외적 상황 악화로 인하여 주민들의 불만이 집단적으로 표출되어 반 김정일 쿠데타가 성공, 권위주의적 개발독재체제가 등장하는 경우입니다.
셋째는 국가체제가 무너지고 무정부상태 및 내전상태로 들어가는 경우인데, 이 경우는 정부군과 전국적으로 확산된 주민시위대가 대치하여 내전상태가 되거나 군부의 보수와 개혁세력들이 군사적으로 대치하게 되는 두 유형에 북한 군부대의 대남투항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는 북한내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휴전선에서 대남 군사충돌을 획책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제시한 네 가지 경우는 모두 독립적으로 발생할 수도 있고 압축된 형태로 연속적으로 진행될 수도 있지만 모두가 동북아와 한반도의 정세의 불안정을 초래할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의 급변사태와 붕괴는 그동안 점진적ㆍ단계적 형태로 생각해왔던 통일문제가 갑작스럽게 한국이 감당해야할 상황으로 전개될 가능성을 엿보게 합니다.
6. 글을 맺으면서
한국의 통일이 점진적으로 단계별 접근과 협력을 통해 블록을 쌓듯이 이루어지리라는 기대는 북한의 경제적 붕괴와 이 위기를 극복하려는 북한의 핵 놀음으로 사라졌습니다. 광복이 도적같이 찾아 왔듯이 통일의 기회도 그렇게 올 수도 있다는 예측이나 전망도 가능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앉아서 기다리는 자세로 우리의 통일은 성취되지 않을 것입니다. 기회는 머리만 있을 뿐 꼬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미리 서둘러 준비하고 쟁취하려는 의지와 노력과 대비가 필요합니다.
우선 우리는 통일한국의 미래상을 정립, 주변국들의 이해와 공감을 얻고 주변국들의 통일반대책동을 무마해야 합니다. 현재 한국은 주변국들과 모두 전략적 협력관계를 정립했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서 얻은 외교적 조치였습니다. 따라서 어떤 국가라도 국익이 일치하면 협력할 수 있지만 국익이 상충할 때는 거부할 수 있는 입장을 얻은 것입니다. 自主의 幅이 그만큼 확대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제 한국은 앞으로 동북아시아에 이루어질 협력의 큰 틀을 내다보면서 그 틀에 조명하여 주변국들을 평가하고 협력해야할 시각과 분야를 결정해 나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과거로부터 오늘과 내일을 보는 패러다임이 아니라 내일을 표준으로 오늘을 바라보고 대비하는 관점을 정립해야 합니다.
우선 중국으로부터 한국이 주도하는 통일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북한과의 오랜 유대와 중국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안보외교에 있어서의 순치관계론을 극복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통일한국은 지정학적 위치상 어느 국가와도 안보동맹을 맺어서는 안 됩니다. 유엔이 부과하는 평화유지임무 외에는 국제분쟁에 휩싸이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동시에 통일한국은 동서독과 마찬가지로 비핵화를 철저히 추구함과 동시에 생 화학무기나 주변국에 위협이 될 전략무기생산을 자제할 것을 분명한 외교원칙으로 천명해야 합니다.
둘째로 주변국들과의 경제적 협력관계를 보다 긴밀화해야 합니다. 한미FTA는 물론이거니와 한중일 FTA도 서둘러 체결해야 합니다. 특히 동북아시아경제공동체건설을 동아시아 공동체 론에 선행하여 성취하고 이 협력의 틀 속에 미국과 러시아를 추가로 편입시키는 외교노력을 강화해야 합니다.
셋째로 주변국들을 상대로 하는 기술경쟁력을 가일층 강화해 나가야 합니다. 기술적 우위유지만이 주변대국들과의 협력수준을 높이며 보다 큰 시장 확보의 발판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선진화를 생활의 모든 부문에서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현시점에서 북·중 관계는 난공불락의 성처럼 보이지만 중국외교의 흐름을 잘 관찰하면 해법이 나옵니다. 중국은 외교에서 不義에는 둔감하지만 不利益에는 민감한 국가입니다. 따라서 중국의 입장에서 이용가치가 없는 국가는 언제나 무시하거나 외면하기 십상입니다.
북한이 핵 포기를 확실히 중국에 담보하지 않는 한 현재 중국이 사용하는 북한카드는 시효가 다할 것입니다. 이 시점을 빨리 앞당기는 외교가 우리에게 필요하며 이점에서 중국은 우리 외교에서 미국 못지않게 중요한 국가입니다.
[제2의 분단을 피해야 한다]
어떤 국제정치 전문가들은 중국이 경우에 따라서는 북한을 중국의 위성국가로 만드는 상황을 假定하기도 합니다. 또 중국의 동북3성에 추가하여 중국동북4성을 만들 것으로 예측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만일 북한지역이 중국의 위성국가나 괴뢰정부가 된다면 그것은 한반도의 제2의 분단 사태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티베트나 위구르를 능가하는 한국국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할 것이며 동아시아의 평화는 다시 세계긴장의 중심으로 변할 것입니다. 중국이 이러한 愚를 범할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국이 북한 유사시 사태를 아무 준비 없이 방치할 경우 제2의 분단사태가 조성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북한의 유사시는 한국이 통일을 주도할 절호의 기회로 알고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이 이런 정세를 주도할 준비나 능력이 없다면 북한이라는 공간은 미국이나 중국의 조정으로 유엔의 신탁통치지역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이것역시 제2의 분단 사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가정을 해놓고 통일 상황을 점검해 나간다면 우리에게는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현재의 1인당 GDP의 배가운동을 일으키면서 사회 각부문의 발전을 경제력에 상응하게 높여나가야 합니다. 기술개발을 위한 R&D기금을 크게 확충해 나가야 합니다. 민간이 중심이 된 통일외교의 토대를 쌓아야 합니다.
역사는 세계사의 중심대열에 참여한 국가가 주도했음을 보여줍니다. 일본이 서세동진의 역사상황 속에서 명치유신을 통한 근대화달성으로 세계사의 중심대열에 섰기 때문에 중심에서 탈락한 한국과 중국은 일본의 식민지, 半植民地가 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21세기의 현재 한국과 중국은 세계사의 중심대열에 서 있음에 반하여 북한은 중심대열에서 완전히 궤도를 벗어난 지역에 놓여있습니다. 결국 전쟁 없이 통일을 성취하는 방법은 세계사의 중심대열에 참여한 국가가 그렇지 못한 정권을 흡수하는 길 이외의 다른 방도가 없을 것입니다.
평화적 흡수, 즉 동의에 의한 흡수냐 갈등을 수반하는 흡수냐의 차이가 있을 뿐 다른 방도는 없을 것입니다. 1970년 8.15선언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북한에 제의한 창조와 개발과 건설을 향한 선의의 체제경쟁 노선이야말로 가장 올바른 통일노선이었음을 다시 확인하면서 통일을 향한 준비와 다짐을 가일층 강화해 나가야겠습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