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2012년 10월 14일 서울 경동교회 장년회가 주최한 특강(13시 30분부터 16시까지 경동교회 如海기념관)에서 행한 강연내용을 그대로 싣는다 .이영일
독일통일이야기
1. 서언
20세기가 끝나는 마지막 10년 동안에 세계는 두 개의 큰 혁명적 사건을 목도한다. 하나는 소련제국의 해체이며 다른 하나는 독일의 재통일이다. 경기변동에 따라 기업의 영역에 변화가 생기듯 세계의 정치지도도 늘 변화하여 왔다. 그러나 소련제국의 해체만큼 지도를 크게 바꾼 사건은 드물 것이다. 또 중부유럽대륙에 새로운 강국을 탄생시키는 독일의 통일도 유럽의 정치지도를 크게 변경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 두 개의 큰 혁명적 사건이 어느 누구에 의해서 예측된 것도 아니었고 당사자들도 이런 변화를 능동적으로 기획하거나 추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큰 변화에는 그것을 암시하는 여러 가지 징후가 있었지만 이런 징후들이 상승작용을 하여 커다란 변화를 실제로 몰고 올 상황이나 시점을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미국의 저명한 소련문제 전문가였던 George Kennan도 “소련 같은 거대한 제국이 이렇게 돌연히 붕괴한다는 것은 역사에 그 유례가 없었다.“고 논평했다. 독일 통일을 주도한 Helmut Kohl서독 수상 자신도 독일이 이렇게 쉽게 통일될 줄은 몰랐다고 술회했다.
독일의 통일에 시각을 맞춰보면 독일통일만큼 짧은 시일 안에 “철과 피”를 앞세우지 않고 평화적 대화와 인민의 자율로서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성취한 일은 세계외교사의 어느 페이지를 뒤져도 그런 선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극적으로 통일의 계기가 왔고 이 기회를 통일로 연결시키는 정부의 외교와 통일을 향한 거족적인 협력이 이루어낸 엄청난 성과였다.
긴 안목에서 보면 독일 통일은 준비된 통일이라고 보아야 할 측면이 많지만 실제로 성취된 통일은 준비된 통일이라고 볼 수 없다. 예측도, 기획도 없이 통일의 기회를 맞았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통일로 연결시켰다는데 독일통일은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2. 통일준비상황 평가
가. 兩獨관계의 긴장완화와 교류협력의 발전
서독은 1949년 정권수립 이후 아데나워 수상 주도하에 냉전의 서방진영인 나토에 가입한 후 서독이 동독보다 더 잘살게 되어야 동독을 흡수하는 통일이 가능하다는 이른바 磁力理論(Magnetic Power)을 제창하고 사회적 시장경제정책을 채택, 패전 후의 독일경제재건에 주력했다. 에어하르트 경제상이 주도하는 독일경제부흥과 재건은 미국과 서방측의 원조에 힘입은 바 크지만 독일인들의 단결과 창의를 통해 라인( Rhein)강의 기적을 이루어냈다.
아데나워 정부의 磁力정치의 성과로 300만 명의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빠져 나오자 소련과 동독 당국은 1960년 베를린 장벽을 세우고 주민이동을 엄중히 단속하고 위반자를 처형하기에 이르렀다. 장벽설치이후 兩獨 관계는 꽉 막혔다.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서독은 전후 경제부흥에 성공한 업적을 딛고 서서 새로 집권한 사회민주당의 Willy Brandt 수상의 주도로 기독교 민주당과의 大聯政을 수립, 정국안정을 기한 후 이른바 동방정책(Ost Politik)을 실시한다. 이 정책의 첫 열매가 두 차례의 兩獨 정상회담이다. 동독의 빌리 슈토프와 서독의 빌리 브란트 수상간의 2회에 걸친 정상회담이후 兩獨은 오랜 협상과 대화를 진행하면서 이산가족 방문, 문물교환, 라디오 시청, 심지어 TV시청까지를 허용하는 긴장완화의 시대가 열린다. 특히 경제교류가 활발해짐으로 해서 兩獨 간에는 경제통합의 전망이 트일 정도로 협력이 심화되어 갔다.
나. 분단의 원인제거를 위한 정치교육전개
제2차 대전이 끝난 후 지구상에는 원래 하나였던 국가가 둘로 갈라지는 국가분단현상이 여러 지역에서 발생했다. 분단이 발생한 상황을 을 표준으로 하여 학자들은 分斷국가(Divided Nation)를 둘로 구분한다. 중국이나 대만처럼 내부혁명의 결과로 갈라진 국가들은 內爭형 분단국가라 하고 한국이나 동서독처럼 분단이 외부의 힘에 의해 강요되었을 경우 이를 국제형 분단국가라고 한다. 따라서 내쟁형 분단국가들은 분단문제의 해결책임이 당사자에게 귀착된다. 즉 통일문제가 자결적 처리로 이루어지는 국가들이다. 인도제국을 구성했던 인도와 파키스탄이 갈린 것은 원래 하나 아니었던 것을 영국이 인도아대륙을 식민통치의 필요상 강제로 묶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외적 강제력으로서의 영국의 힘이 약화되면서 저절로 갈라진다. 이런 곳에는 통일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정치학자들은 이런 나라를 분단국가와 구별하여 分裂국가(Partitioned Country)라고 칭한다.
국제형 분단국가에 속하는 독일이나 한반도는 강대국들이 자기들의 안보이익에 대한 고려에서 원래 하나였던 국가를 갈라놓았다. 독일은 한국과 같은 분단국가이지만 분단의 원인이 다르다. 중부유럽에서 독일은 통일될 때마다 국력이 너무 강해서 이웃을 침략하거나 팽창하는 정책을 추구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유럽대륙에서 백인이 백인을 죽이는 전쟁을 두 차례나 일으켰다. 독일에 의한 새로운 대전을 예방하기 위해 연합국들은 의도적으로 독일을 분할 점령하였고 동서냉전의 와중에서 독일은 동서독으로 분단되었고 분단이 고착되기에 이른다.
이 반면 한국은 국력이 너무 약해서 주변강대국의 어느 일방의 영향권 속으로 끌려들어갈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만일 한반도가 주변강대국의 어느 일방의 영향권속으로 끌려 들어가면 지정학적 위치상 한반도 주변의 세력균형질서가 파괴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할 목적으로 국토를 분단해버린 것이다.
독일은 스스로 분단의 원인을 잘 알기 때문에 전쟁의 상처, 나치독일이 남긴 큰 상처, 동서냉전이 몰고 온 상처라는 三重의 상처를 치유하면서 다시금 이웃나라를 침략하는 팽창주의를 포기하고 이웃과 화목하게 지낼 국민들의 심성을 기르는 정치교육에 국가의 영향력을 집중했다. 극우, 극좌의 이데올로기가 독일민족과 세계, 그리고 이웃들에게 미친 범죄적 과거를 철저히 청산하고 나치즘과 같은 반 유럽 사상적 정치세력이 등장할 소지를 교육을 통해 엄격히 차단하는 작업에 국력을 쏟았다. 나치독일이 빼앗은 폴란드 영토에 대한 미련이나 야욕을 철저히 버리고 유태인 학살에 대한 과오를 철저히 시인하고 회개하고 반성하면서 유태인들에게, 폴란드 인들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비는 노력을 부단히 전개했다. 헌법상으로도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질서를 뒤엎을 세력을 사후에 다스리기보다는 미리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방어적 민주주의를 실천하였다.
독일연방정치교육본부(Politische Bildung)가 전개한 국민교육운동은 나치세력의 재등장을 막는 국민교육에서 성과를 얻었을 뿐 아니라 외교정책이 이를 뒷받침함으로 인해서 주변국가들로 부터 신뢰를 회복하고 독일통일에 대한 거부의식을 약화시켜 나갔다.
특히 유럽공동체 형성에 앞장서면서 유럽통합의 일환으로 동서독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적극 모색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통일이 주변국들의 안보를 위협할 것이라는 우려를 불식시키는데 주력했다. 독일이 오늘날 중부유럽의 最富國이면서도 핵개발을 포함한 전략무기개발에 나서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통일여건조성정책의 실천적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3. 통일의 전개
가.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통일역사의 시작
직접적 원인은 1989년 9월 초순 서독의 청년들이 헝가리를 거쳐 오스트리아를 경유하여 서독으로 탈주한 사건이 발생했다. 동독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헝가리가 1989년 여름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개방한 행사를 했는데 이 행사를 본 동독청년들이 새로 뚫린 통로를 넘어 서독으로 탈주하는 광경이 TV에 방영되자 한 때 주춤했던 탈 동독 붐이 다시 조성되었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동독내부에서도 체제개혁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개신교들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결국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은 붕괴되었고 이 바탕위에서 1989년 12월 양독 수상간의 통일을 위한 정상회담이 열리면서 통일을 향한 협상의 역사가 펼쳐진다. 다음해 2월 1일 동독은 국민투표에서 서독과의 전면통일을 지지하는 결정을 내렸다.
나. 동서독간의 통일준비를 위한 분야별 협상 실시
1990년 5월 18일 경제금융 및 사회통합에 관한 조약이 양정부의 각 기관 별 협상을 통해 체결되었다. 양측 통합은 흡수통일이지만 흡수의 폭과 대상이 전면적이었다. 정치제도, 사법제도, 행정제도뿐만 아니라 교육제도, 토지제도에 이르기까지 전면적 흡수로 일원화하는 합의가 도출되었다. 이 조약은 1990년 7월 1일 발효되면서 양독 간의 화폐, 경제 및 사회통합이 선언되었다.
다. 통일선언과 연방의회구성으로 통일완성
경제통합과 사회통합에 대한 양독 간의 합의가 마무리된 후 서독의 콜 총리와 드메지어 동독총리간의 최종협상을 거친 후 1990년 10월 3일 동서독 통일국가가 선언되고 12월 2일 연방의회구성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고 12월 20일 독일연방공화국 의회가 구성됨으로써 통일작업이 종료되었다.
라. 분단 41년만의 재통일달성
독일은 분단 41년 만에 통일을 이룩했는데 베를린 장벽붕괴를 가져온 동독주민들의 시위로부터 만 1년 안에 체제와 이념의 차이를 넘어서는 통일, 유럽의 정치지도를 바꾸는 통일을 이룩한 것이다. 1871년의 독일통일이 비스마크의 “철과 피”를 앞세운 통일이었다면 1990년 독일의 재통일은 철과 피를 흘리지 않고 대화와 인민들의 자주적 결단에 의해 통일을 이룩한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독일 지도층이 평소부터 독일통일을 촉진할 내적요소로서의 서독의 경제발전과 兩獨간의 교류의 심화를 꾸준히 추진함과 동시에 통일을 가로막을 외적 요소로서 주변대국들이 독일통일을 긍정하도록 내치외교의 양면에서 축적해온 지혜로운 노력의 결과이다. 특히 소련을 비롯한 동부유럽공산주의 국가들이 흔들리는 시기에 찾아온 통일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민하게 상황변화에 대처한 서독지도층의 리더십에 우리는 방점을 찍어야 한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1986년 2월에 개최된 제27차 소련 공산당대회에서 고르바초프가 공산체제하에서 조성된 경제적 낙후와 정치적 침체를 공식인정하면서 개혁개방을 권고한 분위기를 십분 활용하고 동 유럽주둔 소련군 철수비용 130억 달러를 서독이 흔쾌히 지원한 것도 평가할만한 통일노력이었다.
둘째로 정치통일에 선행하여 경제 통일을 먼저 단행함으로써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주변 국가들이 정치통일을 반대할 수없는 상황을 조성한 것도 평소부터 깊이 준비해온 노력의 산물로 보여진다.
4. 독일통일의 세 가지 국면
독일통일은 정치적 통일, 경제적 통일, 사회문화적 통일이라는 세 측면에서 현황을 평가할 수 있다.
가. 정치적 통일
우선 정치적 통일은 지구상의 통일역사에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르게 이루어졌다.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욕심과 혹시 있을지 모르는 주변국가 국민들의 통일 반대여론의 형성 가능성을 차단하겠다는 고려까지를 포함하여 兩獨관리들이 각 분야별로 나누어서 2백50쪽에 달하는 양독 통일조약을 신속히 마무리함으로써 통일촉진이 가속화되었다.
독일은 특히 우리나라와는 달리 중세시대 이래 흥정의 윤리(Verantwortungs Ethik)가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화와 협상을 통한 이익의 교환이 용이한 점도 능률적인 협상을 가능케 하였다. (우리나라에는 흥정의 윤리보다는 지조의 윤리(Gwsinnungs Ethik)가 강하다) 체제와 이념을 달리하고 41년간 갈라져 살아온 국가체제의 통일이 1년 정도의 시간 안에 마무리된 것은 기적에 속한다.
큰 상황에서 보면 동서냉전에서 시작된 분단 상태가 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극복된 것이다. 1989년 Malta에서 열린 미소정상회담에서 냉전은 미국 측의 승리로 마감되었고 소련 등 동구 국가들은 체제개혁의 도전 앞에 직면하였다. 이 기회를 통일로 연결시킨 점에서 독일인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나. 경제적 통일
양독의 경제적 통일은 1970년대부터 꾸준히 신장되어온 동서독간의 경제교류가 기반이 되고 1989년 5월에 체결된 양독 간의 금융, 경제, 사회협약이 체결되고 7월 1일 이 조약이 발효됨으로써 정치적 통일보다 앞서 경제통일이 이루어졌다. 유럽공동체는 사회주의 경제체제로서 舊Comecon 회원국이던 동독이 유럽공동체회원국 중 가장 규모가 큰 서독에 부드럽게 접목되자 여기에 대응할 방도를 모색하는 [공동체와 독일통일]이라는 4만 쪽에 달하는 방대한 보고서를 만들었다. 결국 독일은 유럽통합의 한 구성부분으로 동독을 흡수한 것이 주변국들로 하여금 독일의 정치적 통일을 수용케 하는 결과를 유도한 것이었다.
서독의 사회적 시장경제시스템은 의외로 빨리 동독에 椄木, 정착되었고 양독간의 생활수준 격차도 기대이상의 빠른 속도로 해소되었다. 1999년의 경우 구동독지역의 평균 순 가계소득은 구서독지역의 80%를 넘어섰고 1인당 가처분 소득도 서독의 82%에 이르렀다. 구 동독지역의 낮은 집세와 물가를 감안한다면 구동독의 소득수준은 서독지역의 90%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었다고 한다.
동서독간의 소득수준이 유사해짐에 따라 소비패턴도 비슷해져서 자동차 전화 비디오 등 내구소비재보유율이 兩獨간에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정말로 단기간 내에 정치경제면에서는 양독은 완전히 통일국가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다. 사회경제적 통일
현시점에서 독일통일논의와 관련하여 많은 분들이 제기하는 문제점은 통일이 정치경제적 측면에서는 가장 신속히 성과 있게 이루어졌지만 이른바 독일의 내적 통일 즉 사회문화적 분야에서의 통일은 극히 부진하다는 것이다.
1999년 노벨문학상을 탄 Guenter Grass나 이른바 진보진영에 속한다는 학자들은 독일의 내적 통일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혹평한다. 연방정부도 양독간의 경제적 격차가 해소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內的統一”의 과제는 그대로 남아있다고 통독보고서에서 지적하고 있다. 통일에서 중요한 것은 정치, 행정, 제도, 경제생활상의 통일처럼 밖에 보이는 측면보다는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적, 심리적, 가치관 에서 하나로 융합되는 것이라고 이들은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독일통일에는 아직도 많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통일이 결국 인간의 융합을 대전제로 한다면 정치적, 경제적 통일에 못지않게 사회문화적 통일이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현시점에서는 동독출신에서 총리와 대통령이 나오고 양독간에 정치적 사회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사회문화부문의 통일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지적은 지나친 현실왜곡처럼 보인다. 그러나 분단직후의 상황이 환희에 넘친 일순간을 제외한다면 동독주민들이 겪은 좌절의 시간도 적지 않았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하에서 문제점을 살펴본다.
① Der Spiegel지는 1995년 동독주민들의 67%가 “장벽은 사라졌으나 머리속의 장벽은 더 커지고 있다”는 응답을 보도했다. 이러한 문화적, 심리적 분열현상에서 이른바 오스탈지아 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오스탈지아는 동독을 말하는 Ost와 Nostalgia의 합성어로서 동독시절이 그립다는 것이다.
② 당초 오스탈지아 현상은 이질적인 사회통합 후에 거쳐야할 과도기적 현상으로 간주되었고 앞으로 격차가 해소되고 양독 국민들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확대되면 사라질 것으로 보였지만 통독이 10년을 지나는 시기에도 오히려 갈등은 더 확대추세를 보였다. 한 예로 동독공산당, 즉 사회주의통일당(SED)의 후신인 민주사회당(PDS)에 대한 동독주민들의 지지가 초기에는 서독에서는 1%미만이었고 동독에서만 10%를 상회하는 지지를 얻다가 1998년 총선에서는 하원에 의석을 낼 5%를 넘었을 뿐 아니라 동독지역에서는 22%의 지지를 얻었다.
③사회적 통합을 이처럼 어렵게 만드는 데는 두 가지 요소가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첫째는 동독재건을 위한 경제적 부담이 늘어나면서 서독주민들은 동독주민들이 “도움을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배은망덕한 이웃”이라고 느끼게 되었고 동독주민들은 사독인을 “돈 좀 있다고 잘난 척하고 ‘돈이면 다’라는 자본주의의 천박한 면만 배운 사람들”이라고 비난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통일이 10년을 지난 시점에서 보면 게으른 동독놈들(Ossis), 역겨운 서독놈들(Wessis)로 갈리는 분열현상이 야기되었고 이것으로 미루어 사회적 통일이 요원하다는 진단이 나오는 것 같다.
④ 다른 하나는 서독의 통일 후의 선전방향이 동독인들의 저항감을 불러일으켰다. 즉 동독 40년의 역사가 무가치한 역사, 실패한 역사라고 끝없이 단죄하는 선전을 계속하는데 대해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동독 역사의 포용 아닌 배척과 비난이 동독인들의 반발을 일으켰다. 오히려 동독인들은 그들의 宣傳員들이 서독 자본주의의 부정적 측면을 비판했던 바로 그 내용이 거짓 아닌 사실임을 실감하게 되면서부터 통일에 대한 회의가 싹트고 이 회의가 內面化되어 갔다는 분석도 있다.
⑤ 특히 예술가들이나 학자들은 서독인들이 누리고 있는 자유가 막상 그들 자신의 자유가 되었을 때 그 자유에서 환멸을 느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이 획득한 자유는 실은 시장과 문화산업이라는 또 다른 권력에 종속되는 것이었다.
결국 독일통일은 부드러운 점령에 뒤이은 서독의 내부 식민지화 과정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귄터 그라스도 이점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요컨대 동독인들의 오스탈지아 현상은 인간과 사회와 세계를 바라보는 상이한 관점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통일과업 중에서 가장 어려운 측면을 이룬다고 보여진다.
5. 독일의 처방과 결론
독일은 지금 통독20년 만에 대통령과 총리 모두 동독출신이다. 요하임 가우크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수상이 모두 동독출신으로 서독 기독교 민주당에 입당하여 총리가 되고 대통령이 되었다. 서독인들이 앝잡아 보았던 Ossis 들이 집권의 상층부를 점유한 것이다.
또 독일이 개최한 2006년 월드컵 경기는 양독인을 하나의 독일인으로 묶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를 계기로 하여 독일은 國旗와 國歌, 심지어 한때 나치의 유산으로 금기시했던 철십자훈장까지 제작하면서 통일국가로서의 정체성확립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다. 여기에 두 차례의 세계적 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큰 동요 없이 경제안정을 유지한 것도 사회분야에서의 국민통합을 이루는데 기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병행하여 서독의 연방정치교육본부는 동서독간의 사회통합을 겨냥하면서 동독인들에게는 서독인을, 서독인들에게는 동독인들을 바로 알도록 정치교육을 강화해 나갔다. 특히 2000년 후반부터는 “당신이 독일인입니다”라는 공익광고를 TV를 통해 독일 미디어 연합이 공동으로 실시했다. 2005년 9월26일부터 2006년 1월31일까지 4개월간 방영함으로써 정체성 캠페인을 강화하였다.
2007년부터는 이 캠페인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실시, “어린이들을 좋아하는 독일”을 테마로 방송캠페인을 벌였다. 이어 독일인의 긍지를 되찾는 캠페인으로서는 랑엔사이트(Florian Langensdheidt) 박사가 “오늘날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250가지 이유”라는 책을 발간, 범국민적으로 보급, 독일인들의 긍지를 찾는 한편 사회문화적 통일에도 공헌하고 있다.
이 책은 통일이후의 사례를 중심으로 소재를 발굴하고 베토벤이나 괴테, 실러 같은 세계적인 예술인들은 소재에서 배제하고 BOSS의 양복이나 주간지 Stern, 인물로는 축구선수 Oliver Kahn, 교황 베네딬토 16세, 디자이너 라거펠트, 통일총리 Helmut Kohl, 자동차 경주왕 Michael Schmacher, BMW. 등을 소재로 삼고 있다.
결론으로 말한다면 완벽한 통일은 없겠지만 독일 통일은 左派들이 비관하는 것처럼 결코 실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물론 독일의 통일과정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준비된 부분과 준비가 덜 된 부분이 섞여 있지만 준비가 부족했다고 해서 통일이 잘못되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뜻밖에 닥쳐온 통일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 기회를 기필코 통일성취로 연결시키는 결과에서 우리는 독일인의 저력을 보아야 한다.
통일 후 동독지역개발에 1조 마르크(한화로 약 550조원)이상이 투입되었다. 매년 국내총생산의 4〜5%가량이 투입되었으며 이는 근로자 소득세의 5.5%에 해당하는 통일연대세로 충당되었다. 서독주민들의 부담이 적은 것은 아니었지만 동독의 5개주를 연방으로 매입하고 1600만 명의 인구를 받아들여 인구 8천100만 명의 대국으로 독일의 지위를 격상시킨다고 생각하면 결코 많거나 비싼 부담은 아니다. 통일비용이라기보다는 독일을 세계적인 대국으로 부상시키는 전략적 투자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귄터 그라스나 종교인, 학자들은 항상 현실에 만족하기보다는 현실 속에 숨겨진 문제를 파헤치고 이를 이상적인 방향으로 정향시킬 사명을 가진 분들이다. 독일 통일이 이들을 만족시킬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해도 오늘의 독일 통일은 가장 성공적인 모델이라는 나의 평가는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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