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주도의 통일이 곧 한반도의 비핵화다.

                                - 한미중 국제학술회의를 참관하고

                                                                                                       이 영 일

 

1. 한미중(韓美中) 학자 포럼에서 나온 이야기들

지난 4월 4일 서울 강남의 한 대형빌딩에서는 한국고등교육재단이 동북아시아와 미국을 주제로 한,중,미 3국학자들의 정책포럼(Trilateral Conference on Northeast Asia and the United States)을 열었다. 요즈음 중국학자들의 참여가 늘어난 학술회의가 서울 도처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열리고 있는데 반해 8, 90년대의 유행이던 일본학자들 참가의 학술회의는 많이 퇴색했다. 중국의 커진 국력과 한국의 안보와 통일에 미치는 중국의 영향력이 증대한 탓이 아닐 까.

이날 필자가 방청한 포럼에는 나름대로 한중일 3국에서 내로라하는 분들이 다수 참석했다. 우선 미국 측에서는 브루킹스연구소(Brookings Institution)의 Robert EINHORN, Kenneth Liberthal, Jonathan D. Pollack등 미국의 학술지에 발표된 그들의 논문으로 한국학계에 잘 알려진 분들이 참가했다. 중국 측에서도 중국사회과학연구원의 니펑(倪峰)부소장, 베이징 대학의 자칭궈(賈慶國), 주펑(朱鋒)교수, 중국현대국제관계연구원의 웬펑(袁鵬)부원장, 샹하이 푸단대학의 선딩리(沈丁立), 중국인민해방군 국방대학원의 쉬히(徐輝)교수 등이 참가했고 한국에서는 서울대학교의 정재호, 정영록, 박철희 교수, 문정인, 이정훈 등 연세대교수, 성균관 대학교의 김태효 교수 등이 참가했다.

이들은 공개회의 전날 비공개회의에서 심층 토론을 한 후 이날은 공개포럼으로 열렸는데 비공개회의에서 얼마만큼 밀도 있는 토론과 의견교환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공개회의에서는 얻을 내용이 별로 없는 개념논쟁이 주를 이루었다. 주요쟁점은 미중관계로서 중국이 내놓은 신형대국관계에 대한 미중 양측의 입장표명과 토론, 또 미중관계 변화가 한반도에 미칠 영향, 또 최근에 문제되고 있는 한일관계와 미국의 입장 등이었다.

                        

                     <중국의 신형대국관계론을 보는 미국적 시각>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작년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과 가진 정상회담에서 미중관계를 신형대국관계로 발전시켜 양국이 서로 핵심이익을 존중하고 세계문제를 대등한 자격에서 논의해결하자고 제안한 바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중국 측의 제안에 대해 구체적인 답변은 피하고 양국 협력의 중요성만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학자들은 신형대국관계를 국제사회에서 중국이 대국으로서 감당해야할 역할의 중요성에서 원칙적으로 수용하지만 이 용어가 다분히 중국적이며 미국으로서는 그 말의 의미를 객관,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입장이었다. 이유인즉 중국이 말하는 핵심이익이라는 개념도 중국의 국력이 신장되는 정도에 비례해서 그 이익의 리스트가 계속 추가되는데다가 “대국”(大國)의 개념도 양적 개념인지 질적 개념인지 불분명하다고 지적하고 중국의 힘이나 역할이 과거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국제관계에서 커진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의 상황에서 중국을 미국과 1대1의 대등한 관계로 받아들이기는 거북하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중국이 세계의 모든 문제에서 미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맞장트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것이고 동북아시아 지역에서도 미국이 일본을 제치고 중국을 미국과 동격으로 대접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중국학자들은 논리적으로는 미국의 주장을 긍정하면서도 동북아 지역문제해결에서 중국의 협조가 필수적임을 내세우면서 미국의 중국견제(Hedging)가 주안점인 미국의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나 재균형(Rebalancing)의 부당성을 역설하고 미중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賈慶國)

 

                                    <미중관계가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평가>

 

한국학자들은 현재 협력과 경쟁이 혼재하는 미중관계가 한반도의 비핵화문제를 아직까지 미해결상태로 방치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미중 양국, 특히 중국이 북핵문제의 해결을 위해 가진 바 영향력을 보다 강도 높게 행사할 것을 역설했다. 또 어느 한국 학자는 미중의 패권경쟁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100년 안에 동북아시아에서 확실한 패권을 가질 국가가 나오기는 힘들 것이라는 이색적인 주장도 튀어나왔다.

이날 토의에서 한국의 박철희 교수는 최근의 한일관계와 관련, 중국 측이 한일양국의 갈등을 즐기고 있다면서 일본의 아베정권은 잃어버린 세계 G2의 위상을 되찾겠다는 구호로 일본유권자들의 지지를 모아 정권을 잡고 있지만 역사인식과 영토문제로 주변국들의 반발을 유발해서는 정권을 지탱해 나가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학자들은 한일관계에 대해 한국이 역사문제와 현실 안보문제를 분리해서 대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에 반해 중국학자들은 일본정부의 영토와 역사문제를 통한 도발은 아시아지역에서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2. 외국학자들과의 통일 대화

 

필자는 이번 학술회의가 끝난 다음날 중국 베이징 대학의 朱鋒 교수와 브루킹스 연구소의 중국연구센터소장인 Jonathan Pollack박사를 오찬에 초대, 전날 가진 세미나에 대한 필자 나름의 참관소감과 더불어 한반도 문제를 놓고 이들과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두 분 모두 박근혜 대통령이 펼치는 통일안보외교정책을 정확히 알고 있으면서 오히려 필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두 분의 질문가운데 공통되는 첫 번째 문제는 북한 김정은 정권의 내구성(耐久性)에 대한 평가였다. 이들은 장성택 이후 김정은의 권력기반이 공고화되었느냐 여부였다.

                       

                            < 북한 김정은 정권의 내구성 평가>

 

필자는 사견(私見)임을 전제로 김정은이 현재 노동당 부부장들인 황병서, 조연준, 김경옥 등의 반간계(反間計)에 걸려 장성택을 제거했기 때문에 김정은은 형식적으로는 안정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반간계를 주도한 노동당 조직부 부부장 그룹에 얹혀 있는 형편이며 이들이 최근 북한 내부에서 진행되는 숙청과 승진인사를 주도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들이 명분으로는 백두혈통의 정통성을 말하지만 북한소식통에 의하면 백두혈통이 반드시 김(金)씨 만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며 김일성과 함께 백두산일대에서 투쟁한 사람들의 후손은 모두 백두혈통이라는 이야기가 현재 북한에서 퍼지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남북한 외교상황을 비교해 봐도 북한의 위기는 심각하다고 말했다. 우선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은 오바마 대통령과 몇 차례 정상회담을 가진데 이어 중국 시진핑 주석과의 정상회담만도 3회에 걸쳐 가졌으며 이외에도 인도, 베트남, 영국, 프랑스, 네델란드, 독일 등을 국빈 방문, 해당지역의 국가수뇌들과 정상회담을 가졌으며 특히 이번 헤이그의 53개국 핵 안보정상회담에서는 기조연설을 통해 한반도를 핵 없는 세계건설의 출발지로 만들자고 호소하는 등 한반도 비핵화외교를 활기차게 전개해 왔다.

 

이에 비해 김정은은 정권을 세습한지 3년차에 이르지만 해외는 물론 아직까지 동맹국의 수도인 베이징조차도 방문하지 못했으며 북한이 중시한다는 대미외교도 기껏해야 미국의 농구선수 데니스 로드만과의 교유(交遊)정도에 그치고 제3차 핵실험에 뒤이은 유엔안보리 결의 2094호로 말미암아 국제무역은 사실상 마비상태다. 김일성 때부터 강조해오던 이른바 국제혁명지원역량은 철저히 고갈되었으며 한국내의 친북 호응 세력도 그 마각이 들어나면서 국민적 지지를 상실한 가운데 소멸상태로 접어들고 있다. 북한 외교관들은 김정은 정권이 겪는 외교적 고립 때문에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었으며 북한내부의 지배동맹세력들도 김정은이 겪는 이러한 상황을 모를 리 없다. 김정은은 난국돌파의 수단으로 대남도발을 감행할 가능성이 많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과거 김대중이나 노무현 대통령처럼 북한을 달래는 정책보다는 강력한 응징을 선택하는 리더십을 보이고 있어 김정은은 결코 쉽지 않은 상대를 만난 셈이라고 설명하면서 김정은 정권의 위기가 이처럼 내부적으로 심화되는 상황이라는 필자의 지적에 두 분 학자들은 공감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왜 통일을 강조 하는가>

 

이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과거 정권들과는 달리 금년 들어 한국통일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하면서 통일을 현실적인 과제로 들고 나온 배경에 대해서도 질문했다. 필자는 이 문제에 관해 책임 있게 답변을 할 위치가 아님을 밝히고 다만 필자 나름의 관점을 정리해서 설명했다. 우선 북핵문제와 관련해서 미중양국은 지난 20년 동안 북 핵을 양국의 외교카드로 활용하면서 서로 즐겨(?)왔지만 이젠 북 핵은 미중양국이 더 이상 방치할 수없는 현실적 위협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북 핵 폐기를 시급히 서둘러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고 지적하고 북 핵 폐기 없이는 한반도의 평화와 동북아시아의 안정은 기대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현시점에서 중국은 시장경제와 개방체제로 성공한 한국이 한반도 전체의 관리주체가 되어야 비로소 동북아시아 긴장의 원천인 한반도의 비핵화를 달성할 수 있으며 가장 확실한 비핵화와 개방화의 대안은 다름 아닌 한국주도의 한반도 통일임을 역설했는데 두 사람 모두 필자의 주장을 진지하게 경청했다. Pollack박사는 박근혜 대통령의 드레스덴연설을 보면 점진적 통일을 시도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김정은 정권이 이를 쉽게 받아들일 것 같지 않다고 우려했다.

 

 이에 대해 필자는 통일은 기회가 올 때 이를 포착하여 통일목표에 연결시킬 준비와 능력이 있느냐 여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하고 한반도 비핵화프로세스는 그 추진과정에서 한반도에 긴장도 가져오지만 통일의 기회도 될 수 있다고 답했다. 주펑 교수도 통일을 위한 기회포착과 준비의 중요성에 적극 공감하면서 필자의 주장에 동의했다.

필자는 한반도가 처한 지정학적 현실에서 볼 때 남북한의 어느 측이나 핵을 보유할 경우 주변의 어느 국가도 한국 통일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독일은 전략무기로서 미사일과 핵을 보유하지 않음으로 해서 주변국들의 지지를 얻어 통일을 이룩했음을 상기시켰다. 한국은 주변4대국의 동의가 통일의 필수조건인 독일과는 상황이 다르지만 그렇다고 주변국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통일을 성취할 수 없는 점에서는 독일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서 Pollack 박사와 주펑 교수의 논평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일본도 한반도 주변 국가이긴 하지만 한국 통일에 비토권을 행사할 수는 처지가 아닐 것이라고 내다보면서 중요한 것은 앞으로 북한주민들이 한국주도의 통일에 마음으로 부터 지지를 해야 큰 성과가 날 것이라고 말했다.

 

필자도 이들 견해에 동의하면서 봄꽃 이야기를 비유로 대화를 마쳤다. 봄꽃은 반드시 기온이 섭씨 15도가 되어야 피며(15도가 Critical Mass) 그 이하의 온도에서는 꽃이 피지 않는다고 말하고 현재 북한의 상황을 온도에 비유하면 약 13도까지 올라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나머지 2도를 더 올리려면 미중양국의 적극적 협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두 분 학자들도 필자의 견해에 공명하면서 오찬대화를 끝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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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부 창립 45주년을 돌아보면서

                                                                              이 영 일

전 국토통일원 상임연구위원, 정치외교정책담당관, 교육홍보실장, 통일연수소장, 3선 국회의원(제11대, 12대, 15대), 남북한고위급 회담 한국 측 대표, 국회문교공보위원장, 사단법인 한중문화협회 회장(현)

 

대한민국 정부기구로서의 통일부가 국토통일원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지 어언 45주년이 흘렀다. 그 당시 국토통일원은 일하는 정부부처라기보다는 분단국가로서 출발한 대한민국 정부가 통일이라는 국민적 목표를 지니는 정부임을 나타내는 상징적 기구로 출발했다. 왜 분단국가인 한국에서 정부수립직후부터 이러한 부서가 세워지지 않고 정부수립 20주년이 지나서야 이러한 기구가 발족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당시 교육홍보국장 겸 대변인이던 필자에게 묻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 필자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나름의 추론으로 대답했다. 그 당시 통일은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는 상태의 회복”으로 간단히 정의되었고 따라서 통일은 대한민국의 일방적 과업으로서 정부전체가 통일목표에 복무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분단이 장기화되는 추세를 보이면서 국방부가 맡던 민사군정업무를 떼어 내어 북한실정을 충실히 연구함으로써 국토통일을 위한 수복 시 대비책을 연구 발전시킬 국가기관설치의 필요성이 생기면서부터 국토통일원이 창설된 것 같다고 답했다. 당시 중화민국도 대륙광복이라는 통일목표를 가졌기 때문에 국가기구로서 대륙광복위원회를 설치, 운영했다. 이러한 목표의 공통성 때문에 통일원 창설초기에는 대만과의 교류가 잦았다.

 

그러나 1970년에 접어들면서 월남전의 양상이 공산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미국역시 닉슨 독트린을 발표, 아시아 내전에 군사개입을 축소하고 주한미군을 감축하면서 한국방어의 한국화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 반면 북한은 노동당 5차 전당대회에서 4대군사노선의 완료를 선언하고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통해 “조선의 적화통일”을 완수하겠다고 밝혔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이러한 내외정세를 지켜보면서 1970년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평화통일구상선언(8.15선언)을 발표하고 남북한관계를 창조와 건설을 향한 선의의 체제경쟁관계로 바꾸면서 평화통일의 길을 열자고 제안했다. 이 선언에 뒤이어 월남전의 후유증이 한반도로 확전할 가능성에 막기 위해 북한의 김일성에게 특사를 파견, 남북한의 대결구조를 대화구조로 바꾸는 조치를 취했다. 북측도 남한의 대화제의를 받아들이고 분단국가의 가장 원초적인 분단고통으로서 이산가족의 생사소재의 확인과 재결합을 주제로 한 대화를 개시했다.

 

이때부터 통일문제의 성격은 일방적 과업에서 남북한의 대화와 협력을 전제로 하는 쌍방적 과업으로 전환되었다. 이것은 수복시대비책연구에 골몰하던 통일원에는 엄청난 도전이었다. 당시 정치외교정책 담당관이던 필자도 한반도에서 성립 가능한 평화통일의 단계적 접근방안을 입안,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에게 국정감사장에서 보고하여 여야의원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대공협상에 대해서는 사실상 연구가 전무한 상태였다.

 

 대통령으로부터 적십자회담 협상요원 교육을 통일원이 맡으라는 지시가 떨어지자 이것은 실로 비상사태였다. 필자는 미국에서 대학교수로 재직 중인 양성철 박사(뒤에 국회의원과 주미대사역임)에게 전화로 대공협상관련 서적을 구해 항공편으로 직송해달라고 부탁했다. 다행히 그는 터너 조이 제독의 "How Communists Negotiate"라는 휴전회담 협상회고록과 필립모리스의 "How Can We Negotiate with Communist"라는 책을 구해 보내줘서 동양통신 외신부에 부탁, 3일내에 자료 번역을 완료한 후 내용을 분석하여 대북협상에 유용한 자료를 추출하는 한편 Fred I'kle의 How Nations Negotiate를 차용해서 필자가 필요한 부분만을 발췌 번역하여 대공협상교육지침을 철야작업으로 마쳤다. 이처럼 창졸간에 협상지침을 작성, 적십자 회담요원에 대한 교육훈련을 대과없이 끝마친 일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히 살아있다. 이때 가장 열심히 교안작성과 브리핑업무를 맡아줬던 C보좌관(정년퇴임후 대학교수)의 노고를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통일원은 대화업무를 주도하지 못했다. 중앙정보부가 모든 업무를 주도했고 국회에서는 중앙정보부가 해온 일을 통일원장관이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답변하면서 엄호하고 정책지원업무를 뒷받침 하는 보조기관이 통일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통일원에는 전문 인력의 보강이 필요해졌다. 필자는 장관의 명을 받아 전문 인력의 조달을 위해 주요대학을 방문, 정치, 외교, 홍보 분야에서 일할 20명가량의 새로운 인재(그때는 이들을 새 피라고 했다)를 선발했다. 이들 중에서 1인의 장관, 5인의 차관이 탄생했고 또 필자와 함께 근무했던 대다수의 동료들이 모두 정무 직으로 승진하여 정년퇴임하였다고 한다. 공무원을 중도 하차시키는 부패, 비리, 독직이 스며들 여지가 적었던 업무환경 탓일 것이다.

 

통일원이 평화통일추진기구로 성격이 전환되면서부터 통일원의 해외파트너는 독일 내독관계성이 되었다. 이규호장관의 방독에 대한 답방으로 에곤 프랑케 장관이 답방했고 한독 간에 실무자간 접촉과 정책협의가 진행되었다. 필자도 1980년 분단국문제 한독 정책협의회 실무수석 대표로 독일을 방문, 양ㆍ독 관계의 발전양상을 살폈으며 독일의 협상경험을 전수받는 전략카드작업에 열을 올렸던 시절이 뇌리를 스친다. 지금 통일원은 필자가 복무하던 당시의 통일원이 아닌 통일부로서 남북한 관계를 담당하는 명실상부한 정부부처다. 인원이나 예산도 증가했고 정부 내에서의 영향력도 커졌다. 국토통일원 당시와 비교하면 정말 부러울 정도의 성장이고 발전이다.

 

 그러나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통일원과 유사한 역할을 했던 외국의 정부기구들은 모두 없어졌는데 한국에만 아직도 통일부라는 이름의 정부기관이 남아있는 것이다. 대만의 대륙광복설계위원회는 장제스(蔣介石)의 사망에 뒤이어 양안관계가 변함으로써 사라졌고 독일은 1990년 통일성취로 내독관계성이 사라졌다. 우리의 통일부만이 지구상에서 45년 동안 남아있는 유일한 정부기구이다. 이렇게 오래 남아있다는 것이 결코 자랑일 수 없다는데 우리의 고뇌가 있다. 하루빨리 통일부의 명칭과 용도를 변화시킬 날을 맞기 위해 우리의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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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 내외의 정치상황에서 본 통일대박 론

 

                                                     1.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1월 6일 연두회견에서 던진 통일대박 론은 조국분단 70년을 내다보는 시점에서 시들대로 시들어버린 우리 국민들의 통일염원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분단이 장기화하면서 조국통일에의 꿈은 우리 국민들의 의식 속에서 점차 기필코 성취해야 할 과업으로서의 현실적 의의를 상실해갔다. 특히 젊은 사람들 가운데는 통일 무용론이나 아니면 통일포기 내지 통일 불요론에 휘둘려 조국통일을 우리민족이 기필코 달성해야 할 실존적 과업의 우선순위에서 후순위로 밀어놓는 경향까지 보였다. 그간 역대 정부는 통일에의 꿈을 국민들이나 젊은 세대들에게 일깨워주기 보다는 남북한 관계 개선을 통일에 우선하는 개념으로 내세우면서 분단 상태의 안정적 관리에 정책의 더 큰 비중을 두어온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도 오늘의 통일의지 마비 내지 침잠의 한 원인이 있을 것 같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올해의 화두로 던진 통일대박 론은 잠재되어 있던 국민들의 통일의식에 다시 불을 붙이는 신선한 충격이었고 자극이었다. 조국통일이 국가가 추진해야할 과업의 우선순위에서 다시 최상의 위치를 되찾는 계기가 되었다. 대통령이 취임선서에서 국민들에게 평화통일성취의 책임을 다하겠다는 다짐이 이제 실감 있는 주제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통일대박 론에 이어 한반도의 통일이 한국에만 유익한 것이 아니라 동북아시아 모든 국가들에게도 유익한 선택임을 강조함으로써 한국통일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한 국내외의 인식이나 관점을 새롭게 드높이는 전기를 마련했다. 한반도의 통일은 그것이 동북아시아 긴장의 가장 큰 근원을 제거하는 조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북한의 핵개발 시도가 몰고 오는 갈등과 긴장의 해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박대통령이 국가시책의 우선순위의 상위목표로 조국통일을 들고 나오자 국내외를 막론하고 한국통일의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었고 통일무용이나 불요론 보다는 통일이익이 분단이익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든 새로운 접근에는 반동이 따르기 마련이다. 박대통령의 통일대박 론이 국민적 공감 속에서 확산되어 나가자 우리나라의 소위 진보진영에 속하는 사람들은 마치 그들이 기득권을 빼앗긴 것처럼 충격과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그간 소위 진보 모자를 쓰고 북한정권의 통일 주장을 직간접으로 긍정하면서 국내통일담론을 주도해오던 ‘진보인사’들은 정부가 주도하는 강력한 통일공세 앞에 자기들의 입지를 새롭게 정립해야 할 도전에 직면했다. 보수정권을 반통일(反統一)세력으로 몰아붙이면서 자기들만이 조국통일에 헌신한다고 내세워오던 ‘진보진영’의 입지가 하루아침에 동요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장성택 처형이 공개된 이후 국내외에서 불기 시작한 반 김정은 정서의 확산과 북한 인권유린을 국제사법재판소의 처벌대상으로 삼자는 세계인권기구(COI)의 북한 인권보고는 이들 ‘진보“인사들을 극도로 난감한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순순히 물러설 그들이 아니다. 새로운 논리의 조작을 통해 북으로부터 그들의 존재를 긍정 받을 새로운 논리공작을 꾸리기 시작했다. 이하에서 이들의 새로운 대응논리를 살펴보면서 대응방향을 모색하기로 한다.

 

                                                                        2.

 

소위 진보진영의 통일논리작업은 창작과 비평(이하 약칭으로 창비)이나 일간지로서 H, K신문이나 일부 인터넷 신문 등을 통해 발표된다. 체계적인 저술보다는 그때그때의 칼럼이나 인터뷰, 잡지기고를 통해 표출되는 그들의 입장을 총괄적으로 살펴봄으로써 현시점에서 이들이 내놓는 안티(Anti)통일대박 론의 실체를 살피기로 한다. 우선 이들이 설정하는 첫 번째 공세목표는 통일대박 론을 흡수통일 기도로 단정하고 이러한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통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민족적 재앙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흡수통일의 다른 표현인 통일대박 론에 현혹되지 말고 통일이 대박이 아니라 “남북한의 교류와 협력이 대박”이라는 주장을 국민들에게 확산시키자고 주장한다.(林東源) 이와 궤를 같이하는 다른 주장으로는 백낙청의 이른바 장기흡수 통일론이다. 그는 단기흡수통일에는 동의하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장기적으로는 흡수통일이 불가피하다고 보면서 여건이 성숙하면 흡수통일밖에 다른 대안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국민들의 다수이기 때문에 통일대박 론을 흡수통일로 비판, 배격하는 것만으로는 진보진영의 대응이 올바르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백낙청은 정부가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장기적인 흡수통일을 추진하되 통일과정을 그들이 주도하면서 여기에 도전하는 세력들을 그때그때 종북 몰이로 제압한다면 진보진영은 설자리를 잃을 수 있다고 진단하고 이런 우려를 배제하기위한 대안으로 그는 포용정책 2.0이라는 개념을 내놓고 있다. 그의 포용정책 2.0은 한마디로 6.15선언가운데 들어있는 낮은 단계 연방제 합의를 오늘의 남북한 관계 현실에 대입, 남북한 간에 국가연합단계를 통일의 중요한 단계로 설정, 밀고 나가면서 이 목표를 향해 남북한 간의 당면한 모든 통일노력을 집중시키자고 주장한다. 그는 지난 대통령 선거 시에는 원탁회의의 결정이라는 형식으로 이른바 2013체제론을 주창했다가 대선패배로 이 개념이 무용지물이 되자 요즘 새롭게 던진 화두가 바로 포용정책 2.0이다. 그는 6.15 선언 실천 남측본부장이었기 때문에 통일에 대한 그의 사고를 6.15선언에 내맡기고 있는 것 같다.

 

이들 ‘진보’ 파들의 주장에서 문제되는 것은 크게 보아 네 가지다. 첫째 통일대박 론은 흡수통일로 간주, 민족적 재앙이 된다는 것이다. 둘째 친북좌파로서 통진당에 대한 정부의 단죄를 종북 몰이라고 비판한다. 셋째 북한의 인권상황을 옹호하기 위해 창비논객들을 동원, 코리아인권이라는 생경한 주장을 내세우면서 남북한의 어느 체제도 인권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인권양비론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북한인권의 참담한 현실을 호도한다. 넷째로 이들은 북핵문제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침묵을 지키면서 남북교류만을 강조한다.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진보가 참된 진보이기 위해서는 두 가지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하나는 전 세계 진보운동의 핵심과제가 비핵반전평화운동이란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점에서 북핵문제에 침묵하는 진보는 참된 진보일 수 없다. 둘째로 공화정치를 거부하는 세습독재정권을 단호히 배격, 부정해야 한다. 세습독재정권에 대해 침묵하는 세력은 지구의 어느 곳에 가서도 진보로 인정받지 못한다. 한국의 진보가 북한의 세습독재에 침묵하는 한 진정한 진보가 아니다. 더욱이 북한의 잔혹한 인권상황까지를 외면하는 태도야말로 한국의 진보가 사이비 진보임을 전 세계에 알리는 가장 확실한 징표다.

 이들 한국판 사이비 진보는 오래 동안 북한정권을 북한의 입장에서 평가해야 한다는 이른바 내재적 접근 론을 내세워 북한정권의 주장이나 존립이유를 성원하기 위한 논리조작에 심혈을 쏟았다. 현대 사회과학에서 이미 한 물 가버린 이론들, 예컨대 세계체제론이나 종속이론의 이 구절, 저 구절을 입맛대로 꿰맞추는 논리를 조작하는 말장난을 하면서 그들만이 한국의 시대적 과제를 가장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고민하는 세력인 것처럼, 때로는 순교자행색을 하면서 자신들을 정당화해왔다. 백낙청의 ‘흔들리는 분단체제’론이나 창비논객들이 꾸며낸 ‘코리아 인권’론, 2013체제론, 포용정책 2.0 같은 개념조작도 이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고민은 국내외의 상황이 그들의 소망대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선패배로 2013체제론은 허무한 말장난에 불과하게 되었고 전체 국민들에게 통일의 새로운 꿈을 심어주는 통일정책의 주도권도 이제 박근혜 대통령이 틀어쥐고 있기 때문이다.

 

                                                                       3.

 

요즈음 한국의 사이비 진보세력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펼치는 통일을 위한 내치외교의 궤도 깔기(Road Mapping)작업 앞에 자체 전열마저 정비할 힘을 잃고 있다. 남북한 관계를 발전시킬 대안으로 내놓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국내외의 지지를 받는 가운데 남북한관계를 대화관계로 발전시키고 있다. 개성공단문제의 해결과 이산가족 상봉행사의 성공은 가시적 성과다. 또 동북아시아 국가들이 겪는 아시아의 역설(Asian Paradox)을 극복하기위해 역내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한 동북아 평화협력구상은 한미, 한중양국 간 정상회담에서 심도 있게 논의, 진전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아울러 동북아시아의 지역분쟁과 갈등의 근원이 한반도의 분단 상태와 북한의 핵무장기도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사실을 공론화함으로써 한반도 통일에 대한 주변국들의 지지와 공감을 획득하고 있다.

 바야흐로 한국통일이 한국만의 대박이 아니고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전, 그리고 공동번영의 길이라는 인식이 주변국가 국민들에게도 확산되어 가고 있다. 또 박대통령이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마친 후 제시한 유라시안 이니셔티브(Eurasian Initiative)도 한반도의 지정학적 기능이 러시아를 포용하면서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협력의 통로로 이용될 수 있음을 천명, 통일한국이 갖는 국제적 순기능을 국제사회에 알리는데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또 대내적으로는 박대통령이 통일을 단순히 구호로서가 아니라 우리 세대가 실천하고 성취해야 할 구체적 과업으로 인식한 가운데 통일준비위원회 구성을 발표하면서 자신이 위원장으로서 통일준비를 착실히 다져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박대통령은 취임첫해로부터 2차년도가 시작되는 지금까지 이처럼 통일을 위한 내치외교의 궤도를 깔면서 통일을 향해 국력을 비축하고 지혜를 모으는 통일대장정(長征)에 나서고 있다.

 

 한국판 사이비 진보세력들은 요즈음 통일이 흡수통일이이어서는 안되고 김일성 세습정권이 내놓은 연방제 통일을 긍정하면서 연방제통일의 전 단계로서 남북한을 국가연합으로 묶자는 이른바 포용정책 2.0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국가통일방도에는 정해진 왕도(王道)가 없다. 국내외정세의 변화 과정에서 불시에 나타나는 통일기회를 정확히 포착하고 이를 활용할 능력과 준비를 착실히 다진 측이 통일대업을 주도한다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이다. 전쟁이 기회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흡수가 기회가 될 때도 있고 협상이 기회일 때도 있다. 통일에는 모든 기회가 열려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기회가 닥쳐왔을 때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통일로 연결시킬 준비와 능력을 갖추고 있는가이다. 능력은 적극적인 국력배양에서 조성되며 준비는 통일을 위한 국민적 합의기반의 확충에서 나온다.

그러나 우리 한반도는 국제 형 분단국가이기 때문에 주변 국가들로부터 한반도 통일에 대한 지지와 협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주변국들로부터 통일을 위한 지지와 협력을 얻어 낼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조건은 한반도의 비핵화다. 남북한의 어느 편이라도 핵이 있을 경우 주변국들은 그것을 자국안보의 위협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핵 있는 한반도, 자국안보에 위협이 되는 한반도 통일은 절대로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의 핵무장기도는 중국학자들이 지적하는 대로 한반도 긴장의 가장 큰 원인이며 동시에 동북아 정세긴장의 근원이기도 한다. 현시점에서 가장 긴급한 통일여건조성노력은 두말할 것도 없이 북한의 비핵화이다. 우리는 한반도 비핵화라는 주변 국가들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통일여건을 하나씩 쌓아가야 한다. 이점에서 우리나라의 소위 진보세력들도 북한이 통일을 위해 핵을 포기하라는 국민적 부르짖음에 보조를 함께 하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우리는 핵과 미사일 없이도 통일에 성공하고 경제적 번영을 누리는 독일에서 많은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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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의 정치교육과 한국현대사 교과서 문제

 

                                                              이 영 일 전 국회문교공보위원장

 

                                                       1. 문제의 제기

 

한국현대사 교과서 문제로 국론이 크게 갈리고 있다. 역사는 하나인데 역사를 보는 관점이 다름으로 해서 1국(國) 1사(史) 아닌 1국(國) 다사(多史)현상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중국의 연변을 방문했을 때 들은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한다. 중국 사회과학연구원에서 정부의 예산을 얻어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연구 프로젝트가 진행됨에 따라 고구려사를 보는 중국학자들의 태도가 한국학자들과는 전혀 다른 시각임이 알려지자 이때 어느 편도 들 수 없던 중국의 조선족 학자들은 고구려사를 일국양사(一國兩史)로 보아야 한다는 타협안을 내놓은 적이 있었다. 주장인 즉 중국의 관점에서 보는 고구려사와 한국의 관점에서 보는 고구려사가 해석상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일고 있는 현대사 교과서 파동은 고구려사처럼 과거에는 우리의 강역이었지만 이제는 중국 땅이 되어버린 곳의 역사문제와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일제식민통치시대로부터 해방과 분단과 건국, 6.25의 전란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역사를 함께 공유해온 국민들이 현대사를 해석하는 관점에서 너무 큰 차이가 들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것을 식민지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에서 한국민족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역사의 아픔이라고 생각한다. 이 아픔은 그간 어설프게 봉합되어 나왔는데 이번 교과서 검인정이라는 여과과정을 거치면서 그 진상이 마침내 백일하에 들어나게 되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픔의 미봉적 봉합이 아니다. 근본적 치유를 통해서 앞으로 우리가 수립해야 할 통일 민족국가가 정초(定礎)해야 할 역사의 정통성을 바로 세울 토대를 올바로 축성하는 작업일 것이다. 우리 한국의 현대사는 식민지로부터 탈각하는 해방의 과정이 하나의 확실한 민족운동 지도부의 일관되고 조직적인 지도아래 추진된 독립운동으로 전개된 것인지 여부 또 우리 힘만으로 쟁취된 독립이었는지 여부를 놓고도 국민적 합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또 식민지시대를 살아온 방식으로서 친일과 반일문제를 놓고도 치열한 대립과 갈등이 지속되었다. 특히 대한민국의 건국의 정당성을 놓고도 찬반이 엇갈렸다. 유엔감시하의 자유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방식과 소련군점령사령관의 지시에 의한 정권창립과정을 놓고도 평가가 엇갈렸다. 또 한국이 발전해온 역사의 지난 60년을 평가하는 방식을 놓고도 대립과 반목이 지속되어 왔다. 물론 북한에는 역사논쟁이 있을 수 없다. 쟁점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른 주장이나 견해가 발붙일 여지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해방 60년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 쟁점들이 시효가 지나거나 토론의 실익이 없어 수면 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겉으로는 다 봉합된 것처럼 보였던 현대사의 해묵은 쟁점들이 교과서 검인정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또다시 머리를 쳐들고 밖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우리에게만 고유한 것은 아니다. 식민지민족주의 운동을 거쳤던 국가들 중에서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유지한 국가들에서는 한번쯤은 겪었던 문제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가 다른 나라와 유별난 것은 통일의 문제를 안고 있는 분단국가로서 남북한 간에 지난 60년 동안 치열한 사상전이 전개되어 온데 기인한다. 이것은 냉전이데올로기 자체가 발생시킨 사상전이 한 측면이며 다른 하나는 분단체제 양방 간에 민족국가로서의 정통성확보를 위한 경쟁에서 필연적으로 파생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교과서검인정 과정에서 배태된 한국현대사의 문제점은 분단체제 양방 간에 제기되어온 정통성 경쟁을 염두에 둘 때 북한정권이 자기 정권의 정당성을 논증하기 위해 만든 역사관점을 대한민국의 현대사 교과서 내용에 접목시키려는 기도와 무관하지 않다.

결국 남북한 사상전의 역사쟁점을 청산 극복하지 않은 상태를 그대로 두고 현대사교과서 검정과정을 시작한데서 교과서문제가 발생하였다. 우리가 현시점에서 현대사가 안고 있는 이러한 문제를 중시하지 않고 이를 학자들 간의 논쟁문제로 치부하거나 교육인적자원부의 행정문제로 방치할 경우 우리는 두 가지의 큰 문제에 봉착한다. 하나는 현실문제로서 우리의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현대사문제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정답(正答)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가 건설해야 할 통일국가의 정확한 목표비전을 정립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민주국가에서 역사관을 통일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렵다고 피하거나 외면해서 될 일은 아니다. 국민적 대화합의 차원에서 현대사 문제의 큰 범주를 정하고 문제의 심도를 가리면서 허심탄회(虛心坦懷)한 대화를 통해 조국이 처한 현실과 시대의 요구에 맞는 해답을 마련해야 한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전후 서독(西獨)이 취한 통일을 위한 정치교육방식을 참고하면서 우리나라의 타개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2. 제2차대전이후의 독일 상황과 정치교육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대전을 발생시킴으로 해서 유럽대륙에서 백인이 백인을 살육하는 사상 최대의 비극에 책임을 져야할 국가다. 전쟁에서 패한 독일은 유럽사상사의 큰 흐름에서 이탈한 나치즘의 대두로 자국이 전패국이 되었음을 자인하고 반서구적인 나치즘이 다시 유럽대륙에서 등장하는 것을 막도록 독일 국민을 정치적으로 재교육(再敎育)시킨다는 계획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베토벤과 마르틴 루터, 괴테의 나라에서 히틀러의 나치당 같은 전체주의무리가 다시 등장하지 않도록 모든 교육과정을 통제할 정치교육본부를 각 정당과 연방에서 추천하는 인사들로 구성하였다. 물론 당시 독일도 동서로 분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양 독 간의 첨예한 사상전은 우리와 별 차이 없이 심각했다.

 

필자는 1980년 당시 국토통일원 통일연수원장으로서 한독간의 분단국문제 통일정책협의회 실무수석대표로 독일을 방문, 연방정치교육본부를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건물의 입구에는 Max Weber의 유명한 글이 현판에 새겨져있었다. 내용인즉 “어떠한 정부도 자기 후대들에게 자기나라에 대한 귀속감을 갖게 하고 자기나라를 사랑하도록 교육시킬 능력이 없으면 오래 가지 못한다.” 당시 서독의 정치교육(Politische Bildung)본부는 우선 정치교육의 큰 테제로 ①서독이 전체 독일을 대표하는 독일국가의 핵심이며 동독은 핵심에서 분리된 반란단체다, ②그러나 동독은 통일이 될 때까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통일독일헌법이라는 큰 지붕 밑에 함께 동거하는 존재로 실재함을 인정한다는 두 개의 원칙을 세우고 각 정당 정파들이 이 원칙에 합의하는 과정을 가졌다. 그리고 이 목표에 맞춰 교과서편성의 지침을 작성했다. 이 때 독일인들은 나치의 죄과 청산 없이는 주변국들의 반대에 부딪쳐 독일통일이 불가능 할 것으로 보고 제2차 대전을 발생시킴으로서 독일이 ①이웃국가들에게 입힌 피해, ②나치만행이 저지른 범죄, ③타율적인 분단에서 생긴 국민적 아픔이라는 세 가지의 실존적(實存的)부담을 서독이 떠안자는데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였다.

 

 동시에 대내적으로는 나치전범을 철저히 숙청함과 동시에 나치문화를 연상시킬 일체의 상징이나 활동을 단속했다. 아울러 서독은 헌법대신에 기본법을 만들어 통일에 대비하는 한편 양독의 유엔동시가입을 실현하고 이어 양독 간의 교류와 협력을 활성화시켰다. 이러한 서독정부의 구상과 계획을 뒷받침할 교육은 연방정치교육본부의 지침에 따라 독일 역사, 특히 현대사 부문의 과오를 인정하는 내용으로 역사교과서를 재구성하고 프랑스와도 공동의 역사서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독일연방정치교육본부는 자기주장만을 고집하는 외골수 학자들보다는 서방적 가치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상식인(정계, 학계, 종교계, 문화계)들로 위원회를 구성, 교과서 작성에 필요한 지침을 작성했다. 새로운 독일 국가가 추구하는 목표를 실현하는데 공헌할 인재양성이라는 목표를 향하여 교과서가 집필되도록 했다. 매우 힘들게 보였던 과제를 독일인들은 대화와 타협이라는 독일문화의 큰 전통 속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독일 재건의 주체들이 동서독을 막론하고 반 나치운동에 앞장섰던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접근은 아주 불가능할 것인가?

 

 

                              3.국민적 대화합 대타협의 광장을 만들자

 

오늘날 우리나라도 교과서문제를 놓고 제기되는 갈등과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가차원에서 우리가 지향하는 국가목표로서의 통일과 통일국가건설비전에 대한 범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아무리 통일이 대박이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목표와 비전에 대한 합의 없이는 통일을 이루기도 힘들뿐 만아니라 현대사문제에 대해 학생들에게 정답을 제시하기도 어렵게 된다. 통일성취의 대전제가 다름 아닌 국론통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각 정당이 의원을 보내고 있는 국회가 중심이 되어 각 정당이 추천한 전문가그룹의 집중적 토론과 학식과 덕망을 갖춘 명망가 집단의 평가를 거치고 국회토론의 정치과정을 거쳐 현대사 해석의 큰 맥락에 대한 합의의 범주를 설정해야 한다. 이러한 시도에서 유념해야 할 과제는 한국과 독일의 역사과정의 차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한국과 독일 양국은 걸어온 역사과정이 다르다. 우선 독일은 중세의 한자(Hansa) 동맹 이래 제후국 들 상호간은 물론 군신(君臣)간에도 Give and Take라는 흥정윤리가 고도로 발달 되어 온데 비해 우리나라의 경우 흥정의 윤리보다는 지조(志操)의 윤리가 철저히 뿌리를 내렸다. 결국 전부(全部)아니면 전무(全無)가 우리의 윤리적 선택상황이었다. 대결상대방과의 협력보다는 대결상대방의 굴복이나 멸살이 유일한 문제해결방식이었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 유산 때문에 독일에 비해 대화에 의한 합의도출이 결코 쉽지 않다. 우리나라는 북한과는 달리 식민지에서 해방된 후 민주정치를 실시해왔기 때문에 모든 문제에서 일도양단 식 해법을 가질 수 없었다.

 

 또 해방이후 오늘에 이르기 까지 치열한 내부투쟁과 갈등 속에서 국가발전을 이루어왔기 때문에 현대사평가의 시각이 극에서 극을 달릴 만큼 갈라지기도 했다. 감정과 증오에 사무쳐 사물을 객관적으로 정시하기 힘든 상황도 깔려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편견이 생겼고 편견은 왜곡을 낳고 왜곡은 또 편견을 확대재생산하는 상황이 지속되어 왔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현대사 문제를 해결하는 접근방식은 과거에 얽매이기보다는 현재 도달한 국가발전의 성과를 기준으로 삼으면서 미래를 향한 목표를 두고 현대사의 구성을 새롭게 재단하는 용기가 요구된다. 동시에 통일이라는 민족의 큰 목표를 향하여 소아(小我)를 죽이고 대아(大我)를 세우는 결연한 합의가 필요하다. 이런 대 합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국회가 선두에 서고 학계와 언론계가 성원하고 정부가 이를 뒷받침하는 정치적 협의과정이 시급히 진행되어야 한다. 이를 위한 정치권의 대화와 결단이 있어야 한다.

 

 

                                               4. 글을 맺으면서

 

독일에서 가능했던 일이라면 우리나라에서도 가능할 것이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작금의 내외정세가 우리의 통일을 아득한 미래의 과제로 정의할 수 없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를 분단시키는 것이 자국의 안보와 이 지역의 세력균형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강대국들의 동북아 정세관이 최근에는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한반도가 한국주도로 통일되는 것이 동북아시아의 가장 심각한 긴장의 근원을 제거하고 평화적 협력환경을 만들 수 있다는 전망이 서기 때문이다.

 

 통일은 한국의 대박(Jackpot)만으로는 주변국들의 협력을 얻을 수 없다. 주변국들에게 구체적으로 혜택이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안전보장상의 불리(不利)가 줄어들고 평화의 여건이 증진되어야 하며 경제협력을 통한 공존공영의 여건이 마련될 수 있어야 한다. 정부가 제안하고 있는 “동북아 평화협력프로세스”나 “유라시안이니셔티브(Eurasian Initiative)는 그 가능성이 주변정세에 대한 객관적 평가의 산물일진데 통일을 위한 국론통일은 이제 초미의 급선무다. 이번 교과서문제는 단순한 교육부차원의 행정문제나 좋은 교과서를 만든다는 문제의 차원을 넘어섰다. 힘으로 봉합시킨다고 풀릴 문제도 아니다. 이제는 통일을 내다보는 국론통일의 대과제와 연계된 국가적 과업으로 인식하고 교과서 문제해결에 접근해야 한다. 국민적 대합의, 대타협의 전기를 시급히 조성해야 한다. 민족통일이라는 대 목표에 조명하여 그 해결의 돌파구를 찾는 것이 정도임을 역설하면서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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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산가족 상봉 사업의 성공을 위한 제언

 

                                                                                        이 영 일 (전 국회의원)

 

                                                                       1.

 

우리는 이론상으로는 북한정권과 우리나라가 인도주의적 가치관을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러나 가끔은 공유가 가능할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진다. 더욱이 북한이 모든 선전매체를 이용하여 “우리민족끼리”라는 구호를 외칠 때면 어느 순간에 북한정권의 담당자들도 우리와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많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서 북한정권과 북한 동포는 일견 같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같지 않다. 북한 동포들은 우리와 같이 핏줄을 나눈 동포로서 인도주의적 가치를 공유한다. 탈북자들이 어렵게 번 돈을 북한에 남겨둔 부모형제를 위해 비싼 대가를 지불하면서 송금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북한동포들도 우리와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러나 2400만 북한동포를 다스리는 김정은 세습독재자를 수령으로 하는 북한의 지배동맹세력은 인종학적으로는 우리와 같은 민족이지만 가치관 면에서는 우리와 전혀 다른 집단이다. 지금 북한에는 우리와 동포로서의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는 북한동포가 있는가하면 우리와 가치관을 전혀 달리하는 북한지배동맹세력이 함께 살고 있다. 북한의 지배동맹세력은 흔히 북한 식 표현으로는 핵심계층이라고 하는데 김일성 가문을 이른바 성골(聖骨)로 하는 혁명가족과 그에 동조하는 이른바 진골(眞骨)로서의 당 간부와 군 간부 및 그 동조세력으로 구성되는데 이들의 외연을 크게 확장하면 약 200여만 명(강인덕씨는 500만으로 추산)에 이르고 그중에서 실권세력은 약 200명가량의 당⦁군 지배집단이다. 이들 지배세력의 가치관은 우선 그들의 적(敵)과 동지(同志)에 관한 태도에서 분명히 차이가 난다. 우리의 경우 적이 아니면 동지이거나 친구이거나 우방이지만 북한지배동맹의 가치관에서는 동지가 아니면 모두가 적이다. 부모, 형제, 처자도 동지가 아니면 적이다. 학연, 혈연, 지연도 동지가 아니면 무시되고 적이 된다. 바로 이러한 적과 동지관(同志觀)에 세워져 있는 정권이 바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고 이 정권을 틀어쥐고 있는 세력이 바로 김정은을 세습수령으로 받드는 북한지배동맹세력이다. 우리는 이론상으로 이러한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으면서도 북한정권도 우리와 인도주의적 가치관을 공유할 것이라는 잘못된 가정에 빠져 오류(誤謬)룰 범할 때가 적잖다. 특히 이러한 착각과 오류가 자주 일어나는 남북한 간의 대표적인 사업이 이산가족 상봉사업이다. 북한의 계급정책분류에서 보면 현재 남한에 부모형제가 살고 있는 월남자 가족이나 남한으로 넘어간 탈북자 가족은 “복잡한 계층”으로 분류되어 2중, 3중의 감시 하에 놓여있고 각종 불이익처분을 항의한마디 못하고 받아들이면서 삶을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북한정권은 월남자 가족의 현황에 대해서는 감시의 눈을 떼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항상 가장 정확한 자료와 정보를 가지고 있다. 이 반면 한국에서는 북한에서 넘어온 동포들의 현황을 자세히 파악하기가 힘든 실정이다. 오히려 신고를 받아서 이산가족의 실상을 파악해야 한다. 왜냐하면 월남 동포들은 이미 대한민국 국민으로 용해되어 대한민국국민들로 당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주체로서 성장하고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우리가 북한정권의 가치관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이산가족 찾기나 상봉사업에 매달린다면 항상 좌절과 실패에 직면할 것이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앞으로의 이산가족 상봉사업의 현재와 장래를 전망하고자 한다.

 

                                                      2.

 

 지난 9월 25일로 예정되어 있던 금강산에서의 이산가족상봉행사가 북한의 일방적인 연기 통보로 가족만남을 기다리던 이산가족들에게 엄청난 낙담과 실망을 안겨주었다. 이번 이산가족상봉사업은 남북한당국자들과 적십자사업 요원들 간의 회담에서 상봉장소를 금강산으로, 상봉자 명단을 상호 교환한 결과 북한 측에서는 100명을, 남한 측에선 95명으로 하기로 합의하고 9월 24일부터 26일 사이에 상봉행사를 갖기로 양측이 합의했던 것이다. 이 합의로 남북한 관계의 장래는 순항할 것처럼 예상되었다. 개성공단이 지난 4월 8일 북한정권의 일방적 노동자철수로 사실상 가동중단상태에 빠졌다가 지난 8월 14일 정상화하기로 합의, 이제는 정상가동단계에 접어들었고 앞으로 10월 2일에는 금강산 관광사업 재개를 위한 실무회담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남북한관계는 의외로 잘 풀리면서 이산가족 상봉사업도 무난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4일 앞두고 이 행사를 무기 연기 한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북한이 이산가족상봉이라는 분단국가로서의 남북한 간에 통일에 앞서 해결해야할 기장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합의의 불이행과 연기조치는 이번에만 처음 있는 일은 아니지만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것은 북한이 남북대화를 거부해서는 안 될 내외정세 하에 있었기 놓여 있다고 보였기 때문이다. 제3차 핵 실험 이후 중국이 가세한 유엔의 대북한 제재결의는 그 제재의 강도를 북한의 경제와 외교가 피부로 느낄 만큼 나날이 심화되고 있다. 또 대내적으로도 경제난이 가중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나날이 개선되면서 중국으로부터는 북한 핵무기의 포기를 비군사적으로 해결하기위한 수순으로 중국이 의장으로 되어있는 6자회담에 다시 참가하라는 압력이 거세지고 있다. 이러한 압력에 대한 대응으로 북한은 지난 6월 남북한 당국 간 회담을 제안했고 그들이 일방적으로 가동 중단시켰던 개성공단의 발전적 정상화협상에 나와 한국 측 제안을 수용하는 선에서 발전적 정상화에 합의했고 이산가족상봉화담에도 응해서 합의했던 것이다. 그러던 북한이 의외의 강수로서 이산가족상봉행사를 일방적으로 연기한다는 조치를 발표한 것이다. 이유는 무엇일까. 두 가지로 집약된다. 하나는 회담의 형식인데 이번 개성공단 정상화조치나 이산가족상봉사업이 김정은의 선의나 아량의 산물이 아니고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공약으로 내세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가 주효했던 결과로 국내외의 평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제사회는 북한이 금년 봄에 한국을 상대로 벌였던 고강도 적대적 심리전공세에 맞서서 “평화를 지키면서(Peace keeping), 평화를 만들겠다(Peace building)”는 박근혜대통령의 단호한 의지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구상에 잘 반영되어있다고 평가한 것이다. 둘째는 회담개최의 실익이 없다는 북한정권의 내부에서의 반발이 강하게 제기된 것으로 보인다. 그간 북한은 주지되는 바이지만 항상 북한지도자와의 인터뷰나 접견도 반드시 북한이 필요로 하는 외화벌이수단에 연계하여 추진해왔고 북한을 방문하는 한국인에게는 항상 입북료(入北料)를 현금이나 물자로 공여를 받아왔다. 심지어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공식적으로는 5억 달러 가량의 입북료를 현찰로 입금시켰고 그것이 확인된 후에야 비로소 김정일-김대중 회담이 열렸던 것은 이미 공지된 사실이다. 하물며 북한지배동맹이 적대계층으로 관리하는 월남자가족을 남한 친척친지들과 만나는 사업을 무상으로 한다는 것은 북한지배동맹세력의 관행적 사고로는 도저히 수용될 수 없는 합의였다. 추측하건데 금강산 관광재개와 연계하여 이번 이산가족상봉행사를 추진하려고 했던 것인데 한국 측의 태도가 과거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처해오는 양상을 볼 때 인도주의적 가치를 경제적 가치로 교환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고 판단하고 무기연기를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3.

 

 현시점에서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치적 차원에서는 남북한 대화에 대한 수요가 높지만 개성공단합의와 가동정상화를 통해 일단 국제사회에 대한 체면은 세웠기 때문에 이산가족문제에서만은 인도주의적 가치를 경제적 가치로 교환할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상황을 평가한 후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취소 아닌 연기로 호도하고 있다. 연기의 명분으로는 한국의 내부 분위기가 정상적인 남북대화를 기대할 상황이 아니라고 하면서 대북 적대적인 태도가 노골화되고 있다느니, 통일 애국세력을 탄압한다느니 하는 구실을 내세우고 있지만 본심은 무상으로 인도주의적 사업을 추진해서는 안 된다는 지배동맹세력내부의 강한 반발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973년에는 김대중 남치사건을 이유로 7.4남북공동성명으로 추진된 남북조절위원회회담을 완전히 단절시킨 바도 있었는데 이번에는 단절 아닌 연기로 입장을 바꾸고 있다. 합의 불이행이 다반사인 북한지배동맹이 합의의 취소 아닌 이행시기의 연기를 택한 것은 합의 불이행이라는 국제사회의 지탄을 피하면서 실리를 확보하자는 것으로 엿보인다. 동시에 한국정부의 박근혜 대통령이 내놓고 있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현실적인 남북대화와 관련해서 구체적으로 그 효용성을 시험해보려는 측면도 엿보인다.

 

  이산가족 상봉사업은 북한지배동맹과는 가치관과 철학을 달리하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반드시 관철시켜야 할 역사적 과제다. 또 1970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남북한관계를 대결에서 대화관계로 전환시킨 최초의 명분도 이산가족 찾기 사업이었음을 상기할 때 우리로서는 결코 포기하거나 간과할 수없는 남북한관계에서의 가장 기본이 되는 사업이다. 그래서 한국 측은 이산가족 상봉장소로서 금강산 보다는 서울과 평양을 내왕하는 것이 남북한이 갈라져 살아온 역사적 현실을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직시하면서도 체제오염을 두려워하는 북측의 우려를 감안, 금강산을 요구하는 북측의 제안을 양보하면서 수용했던 ㄱ서이다. 현재 가족을 만나야할 이산가족의 수효도 2010년 10만 5천에서 이제는 7만2천명으로 줄었고 이 추세로 몇 년을 더 허송한다면 이산가족 생존자가 더 줄어들 전망이다. 이런 견지에서 우리는 북측에 이산가족 사업의 조속한 합의이행을 강력히 촉구하면서 이산가족 상봉행사의 거부가 북한에 가져올 대내외적 불이익을 각성하도록 촉구하는 외교적 노력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남북한 이산가족 상봉을 계기로 북측에 남아있는 연로한 가족이나 친지들에 대한 경제적 지원책을 마련하여 제시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나아가 삶의 길이가 얼마 남지 않은 이산가족들의 재결합을 위한 자유선택권 행사도 새로운 제의가운데 포함시켜보면 어떨까. 아울러 금강산 관광재개문제도 북한이 박왕자 여인의 비극적 죽음에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는 절차를 밟은 후 관광의 재개의 길을 터주는 방안도 검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서독(西獨)이 동독으로부터 정치범을 거금을 들여가며 구해낸 사건은 너무 유명한 이야기다. 인도주의적 가치를 경제적 가치로 교환한 역사적 선례가 아닐 수 없다. 국내외 상황은 남북한 관계의 정상화를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시계방향을 거꾸로 돌리는 북한의 기도가 오래갈 수는 없다. 우리는 인내심을 가지면서 인도주의적 가치를 경제적 가치로 교환하는 새로운 접근도 시도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노력도 결국에는 통일비용으로 환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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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일이 TV조선 보도본부 황금펀치에서 8월 23일 오후 5시 40

 

분부터 가진 토론에서 주고받은 내용입니다. 

 

 

MC>남북 이산가족 상봉 회담이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진행중인데.

고령의 이산가족들은 가슴 졸이며 협상 결과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MC> 이산가족 상봉, 정치적 이벤트, 북한의 휘둘림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70-80년대 통일원과 남북고위급 회담 대표로 남북관계를 직접 다루신 3선 국회의원 이영일 의원 모셨습니다.

MC> 그간 저희와 정치현안을 많이 말씀하셨는데, 오늘은 본 전공인 남북대화를 주제로 대화를 나눠보겠습니다.

 

Q1. 이산가족 상봉, 오늘 협상 잘 끝마치면 3년만인데, 북한이 적극적으로 나올 것으로 보시나요?

 

답: 지금 북한은 자기 체제의 위기관리차원에서 모든 형태의 남북대화에 적극적으로 응할 것입니다. 우선 대내적으로 경제난이 가중되고 있고 국제적으로는 유엔안보리의 제재결의가 초기와는 달리 구체적으로 북한의 대외활동에 제약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위기와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술로 한국을 상대로 하는 대화전술을 적극적으로 펴고 있는 것 같습니다.

 

Q2. 이산가족 상봉 매번 100명씩밖에 못 만나니, 이번 기회에 대규모, 정례화해서 틀을 바꾸는 것도 하는데, 북한이 과연 받아들일까요? 뭔가 조건을 제시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 이산가족 틀 바꾸는 대신, 금강산 관광 재개를 끼워넣기 하려고 하지 않을까

 

답: 이산가족 상봉자의 수를 늘리거나 상봉을 정례화하자는 제안을 북한이 현재 못 받겠다고 할 이유는 없지만 면회를 할 사람을 선정하고 사전 점검하고 훈련시키는 문제가 남한과는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수를 늘리기는 쉽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국으로서는 지금부터 3년 전 면회신청자수가 12만 여명에서 그간 5만여명이 돌아가시고 현재 약 7만여명이 남아있는데 100여명씩 만나는 수공업적 방식으로는 상봉의 실효를 얻기 힘들다는 점을 내세워 현재의 3배 내지 5배로 늘릴 것을 요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곁들여 면회 횟수를 늘리거나 정례화하는 방식으로 상봉의 실효를 높여나가는 방법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Q3. 이산가족 상봉할 때마다 북한은 쌀, 비료를 요구하는데, 이번에도 요구할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우리 정부는 안된다는 입장이긴 하지만. 그래도 인도적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결국 주게 되지 않을까요?

 

답: 남북한은 정치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핏줄을 같이 나눈 동포들 간의 분단국가입니다. 따라서 우리 한국의 입장에서는 조건 없이 대화하고 협력해야 할 과제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식량문제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는 동포를 외면해서는 안 되고 굶고 있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면서 무슨 조건을 달겠습니까. 그러나 북한은 식량을 군량미로 빼돌린다잖아요?(MC) 북한의 식량문제는 심각해서 군인들이 제대하면 사회에 나와 굶을까봐 장기근무를 택한다잖아요, 인민과 군을 딱히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군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도 굶주리는 북한 동포로 보아야겠지요. 우리가 보낸 쌀이 영유아를 돌보는데도 쓰일 것입니다.

둘째로는 의료문제입니다. 의약품이 없어 병들어 죽는 사람을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의료지원에도 조건이 있을 수 없습니다. 셋째로는 이산가족의 상봉문제입니다. 남북으로 갈라진 부모형제가 상면하자는데 거기에 무슨 조건을 답니까. 이 세 문제는 가장 인도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조건 없이 실천해야 합니다. 박대통령이 제68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인도적 대북지원은 정세와 관계없이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은 인도원칙에 합당한 것입니다. 이 원칙에 조명하여 북측이 합당한 제안이나 요구를 해오면 수용하는 것 옳을 줄 압니다.

 

Q4. 이산가족 상봉을 하면 늘 장소가 문제됩니다. 1985년 1차 상봉때 서울 평양 교환 행사하던 것이...2002년부터는 금강산에서만 계속 했어요. 이번에는 좀 바뀔까요?

 

답: 저는 금강산을 면회장소 선택하는 것을 좋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 우선 금강산은 이산가족들이 접근하기도 불편하고 또 남북한 동포들이 서로 갈라져 살아온 그간의 삶을 역사적으로 이해하는데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나 북한은 서울과 평양을 오가는 이산가족 상봉사업에 체제상의 부담을 느낍니다. 북한주민의 사상오염도 우려하고 남한체제의 우위성이 북한전역에 퍼지는 것도 바라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서울과 평양을 오가는 것보다는 금강산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러나 장소문제에 대한 이견으로 이산가족 상봉이 어려워진다면 그것 역시 원칙에서 벗어나는 문제로 되겠지요. 우선 상봉실현자체에 큰 무게를 두어야 할 줄 압니다.

 

Q5 북한에서는 "금강산 관광을 하루빨리 재개하자"며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을 엮고 있어요. 오늘 이산가족 회담이 잘 마무리되더라도, 실제 상봉은 금강산관광 회담 지켜보고 하겠다는 전략 같은데요?

금강산 관광 정상화 문제는 결국 북한의 사과가 관건인데. 개성공단 정상화때도 사과한마디 못받았는데, 우린 항상 "북한이니까"라고 넘어가니 버릇만 나빠졌습니다. 어떻게 해야하죠?

 

답: 북한은 금강산 재개문제와 관련해서 사과는 할 것입니다. 대개 유감표명이지요. 재발방지약속도 할 것입니다. 김일성도 1968년 미루나무 사건 때 유엔군 사령관 스틸웰 장군에게 유감표명을 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이제는 북한도 박대통령의 원칙 있는 대북정책을 수용하는 것만이 그들의 대화전술전개에 유리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사과를 할 것입니다. 사과에는 손해배상이 따른데 이는 현대아산과 북측 간에 매듭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Q6. 북한이 개성공단 회담에서 얼굴 바꾸고 나오고 지금 이산가족 상봉 회담에도.. 뭔가 북한의 책략에 말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답: 북한의 최근 동향을 보면 선군정치를 밀어붙이면서 작년 12월 12일 미사일 발사, 금년 2월 12일 제3차 핵실험, 개성공단 중단, 휴전협정 파기, 서울 불바다 같은 고강도 긴장을 조성했던 금년 춘계 대공세가 그것이 자충수였음을 북한도 이제 자인한 것 같습니다. 점차 김정은도 군보다는 당을 중시하는 조짐을 보입니다. 잘 안 알려져 있지만 북한에는 두 개의 경제가 있습니다. 인민경제와 인민군 경제가 그것입니다. 선군정치세력들이 돈이 생기는 산과 바다의 산출물, 무역에서 생기는 이익을 장악해서 미사일이나 핵개발에서 실권을 장악하는데 이 부면의 경제가 인민군경제입니다. 이 반면 당정이 협력하여 민생을 해결하고 개성공단같은 공업지구나 제조업, 농업 등에서 발생하는 소출을 관리하는 경제가 인민경제입니다. 이번에 인민경제를 대표한다는 박봉주를 다시 정무원 총리로 발탁한 것을 보면 오늘의 남북관계를 부정적인 시각에서만 볼 것은 아닌 것 같군요

 

Q.7 그래도 북한 핵은 여전히 진행형, ...남북대화와 북핵대응을 분리해왔는데 결국 북한의 핵 개발 시간만 벌어주는 것은 아닙니까

답: 앞에서도 지적했습니다만 북한이 핵 무력을 지키는 수단으로 남북대화전술을 구사하는 측면이 강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비군사적 방법으로 북한의 비핵화를 추구하야 한다면, 또 미국이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북한 핵 제거에 나서는 접근방식을 우리나라나 중국이 반대한다면 나머지 방도는 한반도 비핵화를 추진할 정치과정의 주체가 남북한이 되고 주변국들이 성원해주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돌이켜 볼 때 지난 10년간 6자회담에서 한국은 아무런 역할을 못했습니다. 북한의 입김, 태도 하나, 하나가 만사를 좌지우지했고 미국의 크리스토퍼 힐과 북한의 김계관 외상이 주연이었다면 한국대표는 Extra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한국외교의 가장 수치스러운 역사로 기억되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상대방의 저의도 정확히 간파해야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한반도 비핵화문제를 주변 대국들에게 맡겨놓고 직접 당사자인 우리가 곁다리로 끼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비핵화를 향한 외교의 이니셔티브를 우리 한국이 장악하고 북한을 상대로 핵 무력 유지이익과 포기이익을 비교하면서 남북한이 공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도가 한반도의 비핵화임을 설득해 내는 일입니다. 주변국들은 한국의 주도적 노력이 성과를 내도록 윤활유를 치는 역할을 하도록 한국외교가 펼쳐져 나가야 합니다. 우리 외교부장관과 통일부 장관이 국면을 이렇게 몰아갈 뱃장과 구상, 내공을 쌓은 분들인지는 잘 모르지만 방향만은 이래야 합니다.

 

Q.8 북한이 개성공단에서 연간 9000만달러, 금강산 관광에서 연간 2000만달러를 얻는데 정상화되더라도 핵개발로 흘러들어가지 않을까요 이를 차단할 방도는 ?

 

답: 북한이 핵실험하는데 대개 3억씩 들어간다고 합니다. 2000년 정상회담 당시 몇 차례 핵실험할 비용을 용처도 묻지 않고 김정일 면회비로 제공한 사실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지금까지 남북관계를 무원칙하게 추진해온 대통령들도 이제 모두 고인이 되었고 김정일 위원장도 고인이 되었기 때문에 과거의 아픈 경험들의 연장선에서 남북한관계의 현상만을 보지 말고 미래를 향한 우리들의 목적에 조명하여 오늘의 남북한 관계를 보는 안목이 지금은 필요할 것 같습니다.

 

Q.9 북한 핵 포기협상은 노상 6자회담 테이블에서 하자고 합니다. 둘이 만나도 하기 힘든 협상, 6자회담으로 해결하자, 과거에도 그렇고 앞으로 100년이 지나도 안 풀릴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 까요?

 

답: 최근 경향을 보면 북 핵을 보는 국제사회의 태도에 많은 변화가 생기고 있습니다. 북 핵의 초기에는 이 문제가 미국과 북한의 양자문제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래서 양자회담이 거론되다가 한국이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거나 중국도 뺄 수 없다는 논의가 성숙해서 4자회담이 열렸고 회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북 핵에 안보상 이해가 걸린 국가들도 모두 포함시키자고 해서 6자회담이 열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참가한 6자의 입장이 모두 같지는 않았습니다. 중국은 비확산에 임하는 미국의 태도가 일관성이 없다는데 불만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을 문제 삼지 않는다는 이유지요, 일본은 북 핵보다는 납치문제에 더 큰 무게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자금에 와서는 북 핵 불용, 한반도 비핵화의 원칙에 대해 주변 국가들의 의견이 완전 일치하고 있습니다. 특히 중국의 최근 동향을 보면 북 핵은 미국에게는 실질적으로 위협이 되지 않고 오히려 중국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공공연히 나오고 있습니다. 나아가 북한의 핵무장이 완료되면 일본의 핵무장은 명약관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군사적 방법으로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6자회담이 소집된다고 해서 상황은 지난날의 6자회담과는 같을 수 없고 한반도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자는 실질적 논의도 제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남북한이 핵문제의 당사자로서 대화를 발전시키면서 6자회담이 실질적 결실을 맞도록 유도하는 노력을 펼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Q.10 남북대화, 나름의 원칙과 탄력성을 갖고 가면 좋은데, 정권 실세들의 문고리 권력, 정치적 업적을 위한 비밀회담, 늘 북한에 갖다 바치고 휘둘리곤 합니다. 여기에 어설픈 ‘화해협력 지상론자’들이 끼어들고..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답: 과거에는 북한관련 자료나 정보들을 정부가 독점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그런 수작을 부리는 자들이 발호할 수 있었어도 이제는 그런 때가 아닙니다. 나만 해도 북한을 한민족복지재단 공동대표 자격으로 여러 차례 다녀왔습니다. 별로 문제될 것 없습니다.

 

Q11. 박근혜 대통령, 이번 815 경축사에서 통일이라는 단어를 네 번이나 꺼냈습니다. 70년대 박정희 대통령 때 통일원에서 직접 한반도 통일 정책의 기초를 직접 짜셨다고 들었는데 핵 무장한 북한, 그래도 통일로 조금이라도 가까이 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 박근혜 대통령이 제시하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라는 말은 그냥 던져놓은 수사가 아닙니다. 식량문제나 의료문제, 이산가족 상봉문제 등 원칙적인 문제들이 잘 해결되어 남북한 간에 신뢰가 쌓이면 보다 큰 협력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한반도 주변에는 잘 아시겠지만 우리나라가 1대1로 겨루어 이길 수 있는 나라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 하에서는 남북한의 어느 쪽에서라도 전략무기를 갖게 되면 그것으로 안보상 위협을 느끼는 외국세력이 반드시 개입하기 마련입니다. 전략무기란 핵, 미사일, 항공모함 같은 대량살상무기입니다. 우리 한반도는 이런 전략무기를 안 갖는 것이 외세의 간섭을 피하는 방도가 됩니다. 외세의 간섭과 개입이 있는 한 평화로운 자주통일은 어렵습니다. 이런 문제를 신뢰가 쌓일 경우 남북한이 대화를 통해 논의하면서 여건에 맞는 평화통일의 정치과정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이점에서 신뢰프로세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통일접근 방도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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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한중문화협회 이영일 회장이 2013년 5월 18일 중국상해 복단대학의 한국연구소가 주최하고 한국국제교류재단이 협찬, 전 중국 각대학의 한국학 박사괴정 연구생들이 모인 제9회 박사포럼에서 행한 "한국통일과 중국에의 기대"라는 논문을 요약한 연설내용이다 

 

                                                  韓國統一의 출구가 보인다

                                                                                               이 영 일(한중문화협회 회장)

1.한국만이 지구 최후의 분단국이다

일반적으로 분단국가는 분단의 성격이나 배경의 차이에 따라 國際型과 國內型으로 구분한다. 한국이나 독일은 강대국정치의 필요에 의해서 원래 하나였던 국가가 兩分된 경우로서 國際型 분단국으로 불리며 중국과 타이완관계처럼 내부혁명의 결과로 분단된 경우를 國內型으로 부른다. 이러한 구별은 통일문제의 해결과 긴밀히 연관된다. 國內型 분단국들은 당사자 간의 합의나 투쟁으로 통일이 가능한 반면, 國際型 분단국에서는 당사자 간의 합의에 못지않게 분단을 강요했던 강대국들의 지지와 협력이 필수적이다.

지금 지구상에는 베트남의 통일이 전쟁을 통해서 해결되었고 1990년 독일 통일이 완성되면서 한국이 유일한 분단국으로 남아있다. 물론 중국도 통일문제를 안고 있다지만 오늘의 兩岸關係를 보면 분단고통이 나날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통일문제가 절박하지 않아 보인다. 미국이 타이완 관계법을 만들어 간섭하고 있지만 시간은 중국 편이다.

지구상에 남아있는 國際型 분단국가인 한국도 이제 대내의 정세의 변화로 통일을 적극 모색해야 할 상황을 맞고 있다. 우선 한반도 분단을 가져왔던 국제정세는 많이 변천했다. 강대국들 간의 냉전은 종결되었고 세계화(Globalization)의 큰 물결이 지구촌을 감싸면서부터 통일을 보는 시각도 달라졌다. 우선 주변정세와 한반도 내부 상황에서 통일문제를 생각하는 새로운 관점들을 살펴보자.

2. 한반도의 분단된 휴전체제가 동북아시아 긴장의 불씨다

먼저 국제정치차원에서 보면 한반도를 더 이상 분단된 휴전상태로 방치해두어서는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할 큰 불씨가 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이는 북한이 장거리 로켓발사에 이어 3차에 걸쳐 핵실험이 행해짐으로써 이 지역 안정화의 필수조건인 한반도 비핵화의 전망이 어두워진데 기인한다. 따라서 오늘의 한반도를 어떻게 운영하고 관리하는 것이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가져오고 분쟁의 씨앗을 제거할 것인가 하는 물음의 해법으로 한국통일문제가 새롭게 등장하는 것이다.

또 한반도 내부사정에서도 탈북현상과 인권문제가 등장하면서부터 어떤 통일, 즉 어떤 체제하의 통일이 이루어져야 주변정세의 요구와도 보조를 같이하면서 脫北을 막고 인권을 보장하여 민족의 분단고통을 줄여 나갈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상황이 대두했다. 이하에서 21세기와 그 특징의 하나가 된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한국의 통일문제를 살펴본다.

3. 중국이 제안한 6자회담과 標本兼治는 무엇을 지향하는가

한국통일문제가 강대국이 포함된 국제정치적 논의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1954년의 제네바 정치회담이었다. 그러나 이 회담은 당시 한반도 휴전협정을 추인하는 것으로 끝났고 한국 통일문제를 유엔으로 이관시켰을 뿐이다.

그러나 북한이 주변국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핵실험과 로켓발사를 강행하면서부터 주변강대국들은 한반도에서 제기되는 안보상의 우려를 해소할 새로운 정치회담의 필요성에 직면했다. 특히 중국이 유엔안보리에서 북한에 대한 제재를 결의하면서 한반도비핵화를 위한 6자회담의 새로운 개최를 강력히 요구했다. 물론 비군사적 방법으로 북한의 핵미사일문제를 원만히 해결하려면 관련 당사국 회담을 통해 북한의 핵과 미사일 야망을 포기시킬 방도를 만들어 내야겠지만 지난 10년간의 6자회담은 실질적 성과 없이 북의 탈퇴로 중단되었다.

그러나 중국이 금년 유엔안보리에서 다시 내놓은 6자회담은 지난 10년간 실패로 끝난 회담의 되풀이는 아닐 것이다. 유엔안보리가 4차에 걸쳐 북한 제재결의안을 통과시킴으로써 한반도 주변국가들 간에는 북한비핵화에 컨센서스가 이뤄졌고 이 바탕에서 나온 6자회담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신 6자회담은 두 가지 목표를 겨냥하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새로이 6자회담을 제안하면서 한반도 문제의 標本兼治的 해결을 내놓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表는 2005년 6자회담에서 북한이 동의한 9.19합의를 구체적으로 실천함과 동시에 다른 하나는 本으로서 동북아시아 각국의 안보우려를 해소할 새로운 안보의 Mechanism을 안출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중국의 양제츠 외교담당 국무위원이 지난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내놓은 접근 방안이다.

신 6자회담이 성공하려면 한반도가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헤치는 화약고가 되지 않도록 한반도의 관리방식을 한반도의 비핵화, 개방화를 보장할 체제하의 통일 내지 통일에 준하는 안정된 남북관계의 틀을 생산해 내야 한다. 이상의 큰 줄거리에 유념하면서 그간 남북한이 걸어온 길을 간략히 비교해 보기로 한다.

4. 남북한의 격차는 노선선택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1970년은 한반도 역사에서 분단국가로서 남북한이 변화된 내외정세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는 선택과 결단의 시발점이 된다. 우선 한국은 1970년 8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이 발표한 평화통일선언을 시발로 해서 북한에 남북한이 창조와 개발과 건설을 향한 선의의 경쟁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이때로부터 40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은 핵무기 비 확산조약에 가입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빨리 경제건설에 성공한 국가의 반열에 올랐다.

반면 1970년 4대군사로선(全體人民의 武裝化, 全軍의 幹部化, 全國土의 要塞化, 軍裝備의 現代化)의 완수를 외치면서 “인민혁명을 통한 남조선 해방”을 선언했던 북한은 오늘날 지구 最貧國으로 전락했다. 북한은 한국과의 국력격차를 만회할 방도를 상실하자 체제개혁대신에 전체 주민을 굶기면서 핵과 미사일 개발에 총력을 경주, 탄도미사일과 세 차례의 핵실험을 통하여 소위 北韓版 强盛大國을 지향하고 있다. 그간 북한은 수시로 남북대화를 중단하거나 파탄시키고 군사도발을 되풀이 해왔다. 현재는 3차에 걸친 핵실험과 로켓 발사까지 단행하고 서울과 워싱턴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위협하는 적대 심리전을 펼치고 있다.

5. 한반도의 지정학적 운명은 비핵개방이다.

주지하는 바이지만 한반도는 남북한의 어느 측에서건 대량살상무기로서 핵, 탄도 미사일, 항공모함 같은 전략무기의 보유를 시도할 경우 주변 국가들의 안보우려를 자극, 필연적으로 그들의 개입과 간섭을 불러온다. 이것이 강대국들에 둘러 쌓여있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운명이다. 이점에서 북한의 핵과 미사일 보유시도는 한반도의 통일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는데 엄청난 난관을 조성하고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앞으로 한국주도로 통일이 이루어지면 통일된 한국은 군사강국이 아닌 문화강국, 과학과 기술 강국, 경제 강국을 지향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미래창조과학부를 정부기구로 신설한 것도 이러한 지향의 표현으로 보인다.

독일의 통일과정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큰 교훈은 동독과 서독이 핵무기와 같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도, 제조도 하지 않을 것임을 주변국들에게 다짐하고 핵확산 금지조약에 양독(兩獨)이 가입함으로써 주변국들의 안보 우려를 불식했다는 사실이다. 독일은 지금 핵무기 없이도 유럽에서 가장 잘사는 국가 아닌가.

6. 중국도 북 핵 사태의 이해관계 당사자다.

북한의 장거리 로켓발사와 제3차 핵실험은 한반도의 주변정세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가장 注目할 만한 정세변화는 중국의 대북태도에 변화가 발생한 것이다. 제3차 핵 실험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은 명분상 한반도 비핵화를 지지한다면서도 북핵문제의 본질을 미⦁북 간의 양자대결문제로 간주하고 중국은 제3자 입장에서 양자관계를 조정하는 위치를 고수했다.

그러나 북한이 핵무기화의 바로 직전단계인 제3차 핵 실험에 이르자 중국도 북핵문제가 미 북한간의 문제만이 아닌 중국자신의 이해에 직결되는 문제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동북3성의 일부지역에 까지 핵실험의 진파가 감지된 것은 북 핵의 심각성을 말해준다. 특히 중국은 북한과의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을 통해 북한이 침략을 받을 경우 즉각 군사원조를 제공키로 약속하고 있음에도 북한은 핵실험과 로켈 발사에 집착했다. 이는 중국에 대한 북한의 전략적 신뢰가 약해졌기 때문이다. 북한이 핵무장을 완료하면 중국에 대해서도 핵 공갈을 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중국지식인 사회에서 나오는 까닭이다.

7. 케리 국무장관의 3개항 메시지

이러한 상황에 병행하여 지난 4월 11일부터 15일까지 한국, 중국, 일본을 순방한 케리 미 국무장관은 베이징에서 중국지도부에 세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만이 북한을 비핵개방노선으로 변화시킬 능력을 가진 국가다. 북한의 비핵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미국은 일본이나 한국의 핵무장 요구를 억제하기 힘들다. 중국이 북한을 비핵개방체제로 유도하는데 성공하면 미국은 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의 안보부담을 경감시킬 용의가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이러한 새로운 방향은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는 방식 같은 미국의 익숙한 군사적 접근을 한반도에 적용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클린턴이 시도했던 북핵 제거를 위한 군사작전은 한국의 반대에 부딪쳤고 부시의 군사적 해결시도는 중국의 완강한 반대 때문에 무산되었다.

케리 메시지가 의미하는 것은 시진핑 주석이 작년 2월 방미 당시 미국에 제안한 신형대국관계론을 미국이 동북아시아지역에서 수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요컨대 북한의 비핵화는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의 중국주도로 해결하고 일본의 핵무장시도는 미국책임 하에 억제하자는 것이다.

8. 북한 완충지대론은 시효지난 전략이론이다

중국으로서는 북한이 개혁개방을 선택하지 않고는 경제개발을 이룩할 수 없으며 북한정권이 개혁개방으로 노선을 바꾸지 않으면 한반도 비핵화는 불가능하고 북한의 비핵화가 이루어 지지 않으면 일본의 우경화추세가 가져올 핵무장시도 등 핵 도미노현상과 군비경쟁으로 동북아 지역정세가 戰雲에 쌓이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동북아아시의 안정이라는 중국의 국익이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중국의 일부학자들이 북한을 지원하는 명분으로 말했던 緩衝地帶論은 한참 時效가 지난 관점이다. 지금 중국의 발전과 안보에 꼭 필요한 것은 핵과 미사일에 집착하는 金政恩 세습정권을 비핵개방정권으로 노선을 바꾸게 하는 것이다. 북한의 비핵화 없이는 중국이 말하는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安保機制를 다룰 6자회담의 標本兼治的 해결이 힘들기 때문이다.

9. 한국통일의 새 전망이 열린다.

현재 북한 땅에서는 주체적으로 비핵개방운동이 나올 여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북한주민이 정권에 저항할 유일한 수단은 탈북뿐이다. 탈북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북한은 오늘 날 핵미사일 체제만 갖추면 그것이 곧 강성대국이라고 주장하면서 핵무장을 통해 외부로부터의 침략위협이 사라지면 경제건설에 박차를 가한다는 核⦁經濟竝進論을 주장하나 이는 語不成說이다. 북한의 핵미사일체제는 인민의 경제적 욕구를 해결할 방도가 되지 않고 오히려 유엔의 제재결의 등 외부의 압박 때문에 체제유지도 힘들어지고 民生苦는 가중될 것이다.

바야흐로 동북아시아 국제정치는 한국통일문제해결의 새로운 출구를 열어가고 있다. 우선은 假定이지만 한국주도로 통일이 이루어지면 중국과 주변 국가들이 바라는 한반도의 비핵화, 개방화는 분명히 실현되며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이 확보될 것이다. 아울러 한중일 3국간에도 북미대륙의 NAFTA나 EU와 경쟁할 수 있는 동북아시아 공동체형성을 기대할 수 있다. 또 중국이 걱정하는 탈북현상은 일어날 수 없고 중국의 노동력을 오히려 흡수하는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 동시에 일본의 右傾化가 몰고 올 일본 핵무장의 명분도 사라질 것이다.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韓美關係와 韓中關係는 兩者 共히 한국과의 戰略的協力同伴者關係로 변화될 것이다.

현재 한반도 주변대국들은 북한의 비핵개방에 의견이 일치한다. 이것이 중국이 새로 내놓고 있는 6자회담의 배경이다. 여기에 朴槿惠 대통령이 주창하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통한 남북한 관계개선노력이 連繫, 加勢된다면 북한의 비핵개방은 불가피 할 것이다. 당장에 완전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북한의 비핵개방은 남북한 관계를 교류협력관계로 변화시켜 남북한 동포들 간에 분단고통을 줄이는 준(準)통일 시대를 열 것이다. 중국이 북한의 비핵개방에 앞장서줄 것을 바라는 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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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2013년 4월 9일 오후 2시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4월회 주최, 4.19문화상 시상식에서 이영일 4월회고문이 행한 특강연설문 전문이다.

한국통일문제의 현 단계

이 영 일(한중문화협회 회장)

 

1. 통일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흔히 잘 아는 말이라도 그것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정의(定義)하려면 매우 힘들 때가 많다. 지금 우리가 생각해야 할 통일이라는 용어도 이 점에서는 크게 예외가 아니다. 분단직후의 시기에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거나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는 식으로 통일염원이 표현되었고 북측에서는 “온 겨레가 일일천추 갈망하는 과업이라고 ”통일”을 정의했다. 남북공히 염원으로서의 통일을 말했을 뿐 구체적인 정의는 없었다.

 

그러나 동서냉전이 한국전쟁으로 격화되면서부터 통일은 일방에 의한 타방의 합병 또는 정복을 의미하였고 한반도의 휴전은 이러한 통일달성을 위한 전투를 현지 군사령관들이 잠정적으로 중지키로 합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점에서 한반도는 아직도 전쟁상태가 법률적으로는 종결된 상태가 아니다. 이점에서 한국휴전협정은 국제법이 생긴 이래 가장 장기간 유지되는 휴전협정으로 불린다.

 

그러나 한반도 분단을 가져왔던 국제정세는 많이 변천했다. 강대국들 간의 동서 냉전은 종결되었고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큰 물결이 지구촌을 감싸면서부터 통일을 보는 우리의 시각도 달라졌다. 우선 주변정세와 한반도 내부 상황에서 통일문제를 생각하는 새로운 관점들이 대두했다.

우선 국제정치차원에서 보면 한반도를 분단된 휴전체제로 더 이상 방치해두어서는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에 주변국들이 공감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특히 북한의 핵실험이 3차에 걸쳐 행해지고 한반도의 비핵화라는 이 지역을 향한 주변 국가들의 목적과제가 협상에 의해 해결될 전망이 약화됨에 따라 한반도 문제를 새 차원에서 총체적으로 다루자는 논의가 국제정치의 지평에 떠오르고 있다. 오늘의 한반도를 어떻게 운영 관리하는 것이 이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가져오고 분쟁의 씨앗을 제거할 것인가라는 물음의 해법으로 한국통일문제가 새로운 출구를 얻게 되었다.

 

또 한반도 내부사정에서도 탈북현상과 인권문제가 등장하면서부터 어떤 통일, 즉 어떤 체제하의 통일이 이루어져야 주변정세의 요구와도 어울리면서 탈북을 막고 인권을 보장하여 민족의 분단고통도 줄이고 주변 국가들의 부담도 덜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상황이 대두했다. 이하에서 21세기와 그 특징의 하나가 된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우리나라 통일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2. 한국통일 상황의 점검

 

한국통일문제가 강대국이 포함된 국제정치적 논의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1954년의 제네바 정치회담이었다. 그러나 이 회담은 휴전협정을 국제사회가 추인하는데 그쳤고 그 후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이관시키는 것으로 끝장났다. 그러나 북한의 끈질긴 핵과 탄도 미사일개발시도는 한반도의 현상과 미래를 주제로 주변 강대국들 간의 논의가 재개될 필요성을 야기했다. 특히 중국은 북한에 대한 유엔안보리의 제재 결의를 지지하면서도 한반도의 비핵화, 전쟁방지와 안정을 위한 6자회담(신 6자회담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의 개최를 안보리의 북한 제재결의에 포함시켜 요구하고 있다.

물론 우리가 이러한 회담 제안을 섣불리 받아들일 경우 유엔안보리의 북한제재결의의 효력을 무력화(無力化)시킬 우려도 없지 않지만 비군사적 방법으로 북한의 핵미사일문제를 해결하려면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담보할 새로운 메커니즘의 모색은 불가피하다. 여기서의 중점과제는 동북아 각국의 안보우려를 해소할 평화의 새로운 기틀마련이며 이 과업은 구체적으로는 한반도의 운영주체를 한반도의 비핵화. 개방화를 보장할 체제하의 통일 내지 통일에 준하는 안정된 남북한 관계를 만들어 보자는 논의로 집약될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미국과 중국 간의 전략대화가 중심이 되고 의제 가운데는 한반도의 통일문제가 포함될 수 있다. 왜냐하면 오늘의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한반도의 관리주체를 남북한의 어느 체제로 통합하는 것이 비핵화와 개방을 통한 지역의 안정과 평화에 도움이 될 것인가의 문제로 결론이 집약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한반도 내부 상황에서 보면 남북한의 어느 체제하에서 통일이 이루어져야 한민족의 생활환경이 개선되고 인권이 보장되고 탈북사태를 막을 것인가라는 민족공리(民族功利)적 측면에서 남북한을 평가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특히 중국이 가장 우려하는 탈북사태가 일어나지 않을 한반도 운영주체를 찾는 과제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이상 두 가지의 큰 줄거리를 토대로 그간 남북한이 걸어온 길을 간략히 비교해 보기로 한다.

 

3. 남북한 관계의 전개 회고

1970년은 한반도 역사에서 분단국으로서 남북한이 변화된 내외정세 속에서 경쟁을 새롭게 전개하는 역사의 시발점이 된다. 우선 한국은 1970년 8월 15일의 박정희 대통령이 발표한 평화통일선언을 시발로 해서 국가발전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갔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남북한을 창조와 개발과 건설을 향한 선의의 경쟁에 나설 것을 북한에 촉구하면서 통일수단으로서 무력과 폭력을 사용치 않을 것을 중외에 밝힌 평화통일구상을 발표했다. 이때로부터 40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은 핵무기 비 확산조약에 가입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빨리 경제건설에 성공한 국가의 반열에 올랐다.

반면 1970년 4대군사로선(全體人民의 武裝化, 全軍의 幹部化, 全國土의 要塞化, 軍裝備의 現代化)의 완수를 외치면서 “인민혁명을 통한 남조선 해방”을 선언했던 북한은 오늘날 지구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북한은 한국의 국력우위를 만회할 방도를 상실하자 체제개혁대신에 전체 주민을 굶기면서 핵과 미사일 개발에 총력을 경주, 탄도미사일과 세 차례의 핵실험을 통하여 소위 북한판 강성대국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는 남북한의 어느 측에서건 대량살상무기 보유를 시도할 경우 주변 국가들의 안보우려를 유발, 필연적으로 외세개입을 가져온다. 유엔안보리의 3차 걸친 대북제재결의와 중국주도의 6자회담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개발에서 비롯된 한반도 문제에 대한 외세개입에 다름 아니다. 대량살상무기의 개발은 이 점에서 한반도의 자주적 평화통일에 엄청난 난관을 조성할 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최악의 선택이다.

 

독일의 통일과정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큰 교훈은 동독과 서독이 핵무기와 같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도, 제조도 하지 않을 것임을 주변국들에게 다짐하고 핵확산 금지조약에 양독(兩獨)이 가입함으로써 주변국들의 안보 우려를 불식함으로써 통일에 대한 국제적 합의를 유도했다는 사실이다. 독일은 지금 핵무기 없이도 유럽에서 가장 잘사는 국가 아닌가.

 

4.급변하는 주변정세

 

북한의 제3차 핵실험은 한반도의 주변정세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북한에 대해 4회(결의 1718, 1874, 2087, 2094호)에 걸쳐 제재결의안을 상임이사국 전원 일치로 가결시켰다. 이 결의는 처음에는 권고안이었으나 3차 결의부터는 회원국들에게 구속력을 갖는 결의로 제제의 수준이 높아졌다. 그러나 이 결의보다 더 중요한 정세변화는 중국의 대북태도에 변화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제3차 핵 실험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은 한반도 비핵화를 지지한다고 하면서도 북핵문제의 본질을 미국과 북한간의 양자문제로 간주하고 중국은 제3자 입장에서 미 북한관계를 조정하는 위치를 고수했다. 그러나 북한이 핵무기화의 바로 직전단계인 제3차 핵 실험에 이르자 중국도 북핵문제가 더 이상 미 북한간의 문제만이 아닌 중국자신의 문제임을 각성하게 되었다. 최근 덩위원(鄧聿文)이라는 중국공산당 당학교의 한 간부가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에 올린 글(2013년 2월 28일 9면)은 오늘의 중국입장을 잘 간추리고 있다.

 

덩위원은 이 글에서 북한이 일단 핵무장을 끝낸다면 김정은 정권은 중국을 상대로도 핵 공갈을 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북한은 냉전기에는 중국에 유용했지만 이제 북한을 지정학적 완충지대로 보는 것은 시대에 뒤진(outdated)견해라면서 중국은 이제 북한을 포기해야 한다고 했다. 최근 외신에 의하면 덩위원은 이 글 발표 후 직위해제를 당했다고 하지만 이러한 내용은 이미 내부토론을 거친 후 발표되었음을 상기할 때 중국의 대북정책은 바야흐로 변화의 시발점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최근 북한이 휴전협정을 일방적으로 백지화한다고 선언한 것은 휴전협정의 서명당사자인 중국에 대한 도발임과 동시에 강한 불신을 표현한 것이다.

 

5. 중국의 접근방식

 

이와 동시에 중국의 인민일보가 금년 1월 24일자보도에서 표본겸치(標本兼治)론을 들고 나온 대목도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 한다. 즉 여기서 표(標)라는 것은 안보리 결의에 맞추어 제제를 통한 북한의 비핵화를 촉구하고 더 이상 국면을 악화시키는 행동을 취하지 않게 하자는 것이고, 또 본(本)이라는 것은 동북아 안보기제(Security Mechanism)를 새롭게 정립, 휴전체제의 불안정성을 극복하고 안보에 대한 상호신뢰를 강화해 나가자는 것을 말한다. 인민일보는 2013년 2월 12일자에서 한반도 안보정세의 악화를 저지하기 위해서 반드시 표본겸치(標本兼治)의 방식을 채택, 협상을 통하여 전면적인 안보시스템을 마련함으로써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고 관련 국가들과의 관계정상화를 실현하자고 주장한다.

앞으로 중국의 선택은 무엇일까. 중국은 미국과의 논의를 통해 비핵화가 되고 개방된 한반도의 미래를 모색할 것이다. 특히 북한이 개혁개방을 선택하지 않고는 경제개발을 이룩할 수 없으며 정권의 주체가 개혁개방노선을 걷는 방향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한반도 비핵화는 불가능하고 북한의 비핵화를 저지하지 않으면 핵 도미노, 군비경쟁, 전운(戰雲)에 쌓이는 동북아시아 지역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통일의 기회이기도 하며 새로운 긴장의 시작이기도 하다.

최근 한국을 방문하는 중국의 관계, 당, 학계지도자들은 하나같이 한반도의 비핵화(그들은 無核化라고 함)와 한반도의 안정이 중국의 국익과 직결됨을 강조한다. 이 국익을 실현할 방도가 무엇인가. 북한은 지정학적으로 중국에 중요한 지역이지만 핵과 미사일에 집착하는 김정은 세습정권보다는 비핵개방을 공약하는 새로운 북한정권의 등장을 중국은 더 선호할 것이다.(Regime Change)

 

6. 21세기 시대의 큰 흐름

 

역사의 흐름에서 보면 북한이 개혁개방을 성취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러나 봄꽃이 꼭 섭씨 15도(Critical Mass臨界質量)가 되어서 피듯이 평양의 개혁개방도 온도가 현재보다 더 올라가야 한다. 지금 평양의 온도는 몇 도일까. 현재의 온도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세계에서 내노라고 하는 국제정치전문가들도 소련의 붕괴나 중동에서 시작된 재스민혁명, 독일의 통일을 예측 못했다. 그러나 예측을 못한다고 해서 반드시 와야 할 사태가 비켜가지는 않는다.

북한 땅에서는 주민들이 비핵개방운동을 펼칠 여지가 현재로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현시점에서 북한주민이 체제에 저항할 유일한 수단은 탈북뿐이다. 탈북행렬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평양의 온도는 이미 10도를 넘어선지 오래인 것 같다. 배고픔을 틈타 외부세계로부터 유입되는 지식과 정보가 북한주민들의 의식을 변화시키고 있다. 사상강국(思想强國)이라는 북한의 목표는 이미 허물어졌고 경제 강국의 꿈도 사라진지 오래다.

그들은 지금 핵미사일 체제만 갖추면 그것이 곧 강성대국이라고 주장하면서 핵무장을 통해 외부로부터의 침략위협이 사라지면 경제건설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논리를 당 학습을 통해 전파하고 있다. 그러나 핵미사일은 재조하는 힘에 못지않게 유지하는 비용이 과다하기 때문에 북한은 결국 인민의 경제적 욕구를 해결할 방도가 없고 더욱이 유엔안보리의 제재결의 등 외부의 압박으로 핵미사일체제의 유지는 갈수록 힘들어질 것이다.

 

현시점에서 강대국들이 제시할 한반도 문제해결방안은 명분상으로는 한반도정세변화에 이해관계를 갖는 주변 국가들의 안보우려를 해결할 동북아시아 안보기제(安保機制)를 마련하고 이 틀 안에서 한반도의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변화시키는 방도를 강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한반도의 비핵화가 이루어지지 않고는 동북아시아의 안보기제가 강구될 수 없기 때문에 비핵화와 안보기제를 동시에 추구하는 표본겸치(標本兼治)가 필요한 것이다.

 

7. 결론과 전망

 

현시점에서 주변대국들은 한반도의 비핵화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되고 있다. 동시에 북한을 개혁개방을 통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자기 책임을 다하도록 하자는 데도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특히 중국은 북한으로부터 몰려오는 탈북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부담을 줄이기를 바라고 있다. 이 문제의 해법은 중국이 개혁개방을 외면하면서 핵과 미사일 개발에 집착하는 김정은 세습정권을 북한체제유지의 유일한 대안으로 보는 사고를 버리는데서 찾아야 한다.

우선 한국주도로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비핵화, 개방화는 자동으로 이루어지며 탈북현상은 사라질 뿐만 아니라 중국의 잉여 노동력을 오히려 흡수하게 될 것이다. 또한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한미관계와 한중관계는 양자 공히 전략적 협력 동반자관계로 균형을 취하게 될 것이다. 한국주도로 통일이 성취되지 않고 북한에 비핵개방정권만 성립되어도 남북한 간의 교류와 협력은 가속화되고 제2, 제3의 개성공단이 만들어져 경제통합이 촉진됨으로 해서 한반도는 준통일상태(準統一狀態)에 진입하게 될 것이다. 완전통일은 자주적으로 여유 있게 추진해 나갈 것이다.

북한 땅에 비핵개방정권을 세우는 일이 현 시기에 있어서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의 지름길임을 남북한 동포들과 주변국들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검토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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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2012년 10월 14일 서울 경동교회 장년회가 주최한 특강(13시 30분부터 16시까지 경동교회 如海기념관)에서 행한 강연내용을 그대로 싣는다 .이영일 

독일통일이야기

 

1. 서언

 

20세기가 끝나는 마지막 10년 동안에 세계는 두 개의 큰 혁명적 사건을 목도한다. 하나는 소련제국의 해체이며 다른 하나는 독일의 재통일이다. 경기변동에 따라 기업의 영역에 변화가 생기듯 세계의 정치지도도 늘 변화하여 왔다. 그러나 소련제국의 해체만큼 지도를 크게 바꾼 사건은 드물 것이다. 또 중부유럽대륙에 새로운 강국을 탄생시키는 독일의 통일도 유럽의 정치지도를 크게 변경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 두 개의 큰 혁명적 사건이 어느 누구에 의해서 예측된 것도 아니었고 당사자들도 이런 변화를 능동적으로 기획하거나 추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큰 변화에는 그것을 암시하는 여러 가지 징후가 있었지만 이런 징후들이 상승작용을 하여 커다란 변화를 실제로 몰고 올 상황이나 시점을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미국의 저명한 소련문제 전문가였던 George Kennan도 “소련 같은 거대한 제국이 이렇게 돌연히 붕괴한다는 것은 역사에 그 유례가 없었다.“고 논평했다. 독일 통일을 주도한 Helmut Kohl서독 수상 자신도 독일이 이렇게 쉽게 통일될 줄은 몰랐다고 술회했다.

 

독일의 통일에 시각을 맞춰보면 독일통일만큼 짧은 시일 안에 “철과 피”를 앞세우지 않고 평화적 대화와 인민의 자율로서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성취한 일은 세계외교사의 어느 페이지를 뒤져도 그런 선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극적으로 통일의 계기가 왔고 이 기회를 통일로 연결시키는 정부의 외교와 통일을 향한 거족적인 협력이 이루어낸 엄청난 성과였다.

긴 안목에서 보면 독일 통일은 준비된 통일이라고 보아야 할 측면이 많지만 실제로 성취된 통일은 준비된 통일이라고 볼 수 없다. 예측도, 기획도 없이 통일의 기회를 맞았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통일로 연결시켰다는데 독일통일은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2. 통일준비상황 평가

가. 兩獨관계의 긴장완화와 교류협력의 발전

 

서독은 1949년 정권수립 이후 아데나워 수상 주도하에 냉전의 서방진영인 나토에 가입한 후 서독이 동독보다 더 잘살게 되어야 동독을 흡수하는 통일이 가능하다는 이른바 磁力理論(Magnetic Power)을 제창하고 사회적 시장경제정책을 채택, 패전 후의 독일경제재건에 주력했다. 에어하르트 경제상이 주도하는 독일경제부흥과 재건은 미국과 서방측의 원조에 힘입은 바 크지만 독일인들의 단결과 창의를 통해 라인( Rhein)강의 기적을 이루어냈다.

 

아데나워 정부의 磁力정치의 성과로 300만 명의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빠져 나오자 소련과 동독 당국은 1960년 베를린 장벽을 세우고 주민이동을 엄중히 단속하고 위반자를 처형하기에 이르렀다. 장벽설치이후 兩獨 관계는 꽉 막혔다.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서독은 전후 경제부흥에 성공한 업적을 딛고 서서 새로 집권한 사회민주당의 Willy Brandt 수상의 주도로 기독교 민주당과의 大聯政을 수립, 정국안정을 기한 후 이른바 동방정책(Ost Politik)을 실시한다. 이 정책의 첫 열매가 두 차례의 兩獨 정상회담이다. 동독의 빌리 슈토프와 서독의 빌리 브란트 수상간의 2회에 걸친 정상회담이후 兩獨은 오랜 협상과 대화를 진행하면서 이산가족 방문, 문물교환, 라디오 시청, 심지어 TV시청까지를 허용하는 긴장완화의 시대가 열린다. 특히 경제교류가 활발해짐으로 해서 兩獨 간에는 경제통합의 전망이 트일 정도로 협력이 심화되어 갔다.

 

나. 분단의 원인제거를 위한 정치교육전개

 

제2차 대전이 끝난 후 지구상에는 원래 하나였던 국가가 둘로 갈라지는 국가분단현상이 여러 지역에서 발생했다. 분단이 발생한 상황을 을 표준으로 하여 학자들은 分斷국가(Divided Nation)를 둘로 구분한다. 중국이나 대만처럼 내부혁명의 결과로 갈라진 국가들은 內爭형 분단국가라 하고 한국이나 동서독처럼 분단이 외부의 힘에 의해 강요되었을 경우 이를 국제형 분단국가라고 한다. 따라서 내쟁형 분단국가들은 분단문제의 해결책임이 당사자에게 귀착된다. 즉 통일문제가 자결적 처리로 이루어지는 국가들이다. 인도제국을 구성했던 인도와 파키스탄이 갈린 것은 원래 하나 아니었던 것을 영국이 인도아대륙을 식민통치의 필요상 강제로 묶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외적 강제력으로서의 영국의 힘이 약화되면서 저절로 갈라진다. 이런 곳에는 통일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정치학자들은 이런 나라를 분단국가와 구별하여 分裂국가(Partitioned Country)라고 칭한다.

 

국제형 분단국가에 속하는 독일이나 한반도는 강대국들이 자기들의 안보이익에 대한 고려에서 원래 하나였던 국가를 갈라놓았다. 독일은 한국과 같은 분단국가이지만 분단의 원인이 다르다. 중부유럽에서 독일은 통일될 때마다 국력이 너무 강해서 이웃을 침략하거나 팽창하는 정책을 추구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유럽대륙에서 백인이 백인을 죽이는 전쟁을 두 차례나 일으켰다. 독일에 의한 새로운 대전을 예방하기 위해 연합국들은 의도적으로 독일을 분할 점령하였고 동서냉전의 와중에서 독일은 동서독으로 분단되었고 분단이 고착되기에 이른다.

이 반면 한국은 국력이 너무 약해서 주변강대국의 어느 일방의 영향권 속으로 끌려들어갈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만일 한반도가 주변강대국의 어느 일방의 영향권속으로 끌려 들어가면 지정학적 위치상 한반도 주변의 세력균형질서가 파괴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할 목적으로 국토를 분단해버린 것이다.

 

독일은 스스로 분단의 원인을 잘 알기 때문에 전쟁의 상처, 나치독일이 남긴 큰 상처, 동서냉전이 몰고 온 상처라는 三重의 상처를 치유하면서 다시금 이웃나라를 침략하는 팽창주의를 포기하고 이웃과 화목하게 지낼 국민들의 심성을 기르는 정치교육에 국가의 영향력을 집중했다. 극우, 극좌의 이데올로기가 독일민족과 세계, 그리고 이웃들에게 미친 범죄적 과거를 철저히 청산하고 나치즘과 같은 반 유럽 사상적 정치세력이 등장할 소지를 교육을 통해 엄격히 차단하는 작업에 국력을 쏟았다. 나치독일이 빼앗은 폴란드 영토에 대한 미련이나 야욕을 철저히 버리고 유태인 학살에 대한 과오를 철저히 시인하고 회개하고 반성하면서 유태인들에게, 폴란드 인들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비는 노력을 부단히 전개했다. 헌법상으로도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질서를 뒤엎을 세력을 사후에 다스리기보다는 미리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방어적 민주주의를 실천하였다.

독일연방정치교육본부(Politische Bildung)가 전개한 국민교육운동은 나치세력의 재등장을 막는 국민교육에서 성과를 얻었을 뿐 아니라 외교정책이 이를 뒷받침함으로 인해서 주변국가들로 부터 신뢰를 회복하고 독일통일에 대한 거부의식을 약화시켜 나갔다.

특히 유럽공동체 형성에 앞장서면서 유럽통합의 일환으로 동서독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적극 모색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통일이 주변국들의 안보를 위협할 것이라는 우려를 불식시키는데 주력했다. 독일이 오늘날 중부유럽의 最富國이면서도 핵개발을 포함한 전략무기개발에 나서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통일여건조성정책의 실천적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3. 통일의 전개

 

가.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통일역사의 시작

 

직접적 원인은 1989년 9월 초순 서독의 청년들이 헝가리를 거쳐 오스트리아를 경유하여 서독으로 탈주한 사건이 발생했다. 동독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헝가리가 1989년 여름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개방한 행사를 했는데 이 행사를 본 동독청년들이 새로 뚫린 통로를 넘어 서독으로 탈주하는 광경이 TV에 방영되자 한 때 주춤했던 탈 동독 붐이 다시 조성되었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동독내부에서도 체제개혁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개신교들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결국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은 붕괴되었고 이 바탕위에서 1989년 12월 양독 수상간의 통일을 위한 정상회담이 열리면서 통일을 향한 협상의 역사가 펼쳐진다. 다음해 2월 1일 동독은 국민투표에서 서독과의 전면통일을 지지하는 결정을 내렸다.

 

나. 동서독간의 통일준비를 위한 분야별 협상 실시

 

1990년 5월 18일 경제금융 및 사회통합에 관한 조약이 양정부의 각 기관 별 협상을 통해 체결되었다. 양측 통합은 흡수통일이지만 흡수의 폭과 대상이 전면적이었다. 정치제도, 사법제도, 행정제도뿐만 아니라 교육제도, 토지제도에 이르기까지 전면적 흡수로 일원화하는 합의가 도출되었다. 이 조약은 1990년 7월 1일 발효되면서 양독 간의 화폐, 경제 및 사회통합이 선언되었다.

 

다. 통일선언과 연방의회구성으로 통일완성

 

경제통합과 사회통합에 대한 양독 간의 합의가 마무리된 후 서독의 콜 총리와 드메지어 동독총리간의 최종협상을 거친 후 1990년 10월 3일 동서독 통일국가가 선언되고 12월 2일 연방의회구성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고 12월 20일 독일연방공화국 의회가 구성됨으로써 통일작업이 종료되었다.

 

라. 분단 41년만의 재통일달성

 

독일은 분단 41년 만에 통일을 이룩했는데 베를린 장벽붕괴를 가져온 동독주민들의 시위로부터 만 1년 안에 체제와 이념의 차이를 넘어서는 통일, 유럽의 정치지도를 바꾸는 통일을 이룩한 것이다. 1871년의 독일통일이 비스마크의 “철과 피”를 앞세운 통일이었다면 1990년 독일의 재통일은 철과 피를 흘리지 않고 대화와 인민들의 자주적 결단에 의해 통일을 이룩한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독일 지도층이 평소부터 독일통일을 촉진할 내적요소로서의 서독의 경제발전과 兩獨간의 교류의 심화를 꾸준히 추진함과 동시에 통일을 가로막을 외적 요소로서 주변대국들이 독일통일을 긍정하도록 내치외교의 양면에서 축적해온 지혜로운 노력의 결과이다. 특히 소련을 비롯한 동부유럽공산주의 국가들이 흔들리는 시기에 찾아온 통일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민하게 상황변화에 대처한 서독지도층의 리더십에 우리는 방점을 찍어야 한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1986년 2월에 개최된 제27차 소련 공산당대회에서 고르바초프가 공산체제하에서 조성된 경제적 낙후와 정치적 침체를 공식인정하면서 개혁개방을 권고한 분위기를 십분 활용하고 동 유럽주둔 소련군 철수비용 130억 달러를 서독이 흔쾌히 지원한 것도 평가할만한 통일노력이었다.

 

둘째로 정치통일에 선행하여 경제 통일을 먼저 단행함으로써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주변 국가들이 정치통일을 반대할 수없는 상황을 조성한 것도 평소부터 깊이 준비해온 노력의 산물로 보여진다.

 

4. 독일통일의 세 가지 국면

 

독일통일은 정치적 통일, 경제적 통일, 사회문화적 통일이라는 세 측면에서 현황을 평가할 수 있다.

 

가. 정치적 통일

 

우선 정치적 통일은 지구상의 통일역사에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르게 이루어졌다.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욕심과 혹시 있을지 모르는 주변국가 국민들의 통일 반대여론의 형성 가능성을 차단하겠다는 고려까지를 포함하여 兩獨관리들이 각 분야별로 나누어서 2백50쪽에 달하는 양독 통일조약을 신속히 마무리함으로써 통일촉진이 가속화되었다.

 

독일은 특히 우리나라와는 달리 중세시대 이래 흥정의 윤리(Verantwortungs Ethik)가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화와 협상을 통한 이익의 교환이 용이한 점도 능률적인 협상을 가능케 하였다. (우리나라에는 흥정의 윤리보다는 지조의 윤리(Gwsinnungs Ethik)가 강하다) 체제와 이념을 달리하고 41년간 갈라져 살아온 국가체제의 통일이 1년 정도의 시간 안에 마무리된 것은 기적에 속한다.

 

큰 상황에서 보면 동서냉전에서 시작된 분단 상태가 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극복된 것이다. 1989년 Malta에서 열린 미소정상회담에서 냉전은 미국 측의 승리로 마감되었고 소련 등 동구 국가들은 체제개혁의 도전 앞에 직면하였다. 이 기회를 통일로 연결시킨 점에서 독일인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나. 경제적 통일

 

양독의 경제적 통일은 1970년대부터 꾸준히 신장되어온 동서독간의 경제교류가 기반이 되고 1989년 5월에 체결된 양독 간의 금융, 경제, 사회협약이 체결되고 7월 1일 이 조약이 발효됨으로써 정치적 통일보다 앞서 경제통일이 이루어졌다. 유럽공동체는 사회주의 경제체제로서 舊Comecon 회원국이던 동독이 유럽공동체회원국 중 가장 규모가 큰 서독에 부드럽게 접목되자 여기에 대응할 방도를 모색하는 [공동체와 독일통일]이라는 4만 쪽에 달하는 방대한 보고서를 만들었다. 결국 독일은 유럽통합의 한 구성부분으로 동독을 흡수한 것이 주변국들로 하여금 독일의 정치적 통일을 수용케 하는 결과를 유도한 것이었다.

 

서독의 사회적 시장경제시스템은 의외로 빨리 동독에 椄木, 정착되었고 양독간의 생활수준 격차도 기대이상의 빠른 속도로 해소되었다. 1999년의 경우 구동독지역의 평균 순 가계소득은 구서독지역의 80%를 넘어섰고 1인당 가처분 소득도 서독의 82%에 이르렀다. 구 동독지역의 낮은 집세와 물가를 감안한다면 구동독의 소득수준은 서독지역의 90%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었다고 한다.

 

동서독간의 소득수준이 유사해짐에 따라 소비패턴도 비슷해져서 자동차 전화 비디오 등 내구소비재보유율이 兩獨간에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정말로 단기간 내에 정치경제면에서는 양독은 완전히 통일국가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다. 사회경제적 통일

 

현시점에서 독일통일논의와 관련하여 많은 분들이 제기하는 문제점은 통일이 정치경제적 측면에서는 가장 신속히 성과 있게 이루어졌지만 이른바 독일의 내적 통일 즉 사회문화적 분야에서의 통일은 극히 부진하다는 것이다.

 

1999년 노벨문학상을 탄 Guenter Grass나 이른바 진보진영에 속한다는 학자들은 독일의 내적 통일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혹평한다. 연방정부도 양독간의 경제적 격차가 해소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內的統一”의 과제는 그대로 남아있다고 통독보고서에서 지적하고 있다. 통일에서 중요한 것은 정치, 행정, 제도, 경제생활상의 통일처럼 밖에 보이는 측면보다는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적, 심리적, 가치관 에서 하나로 융합되는 것이라고 이들은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독일통일에는 아직도 많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통일이 결국 인간의 융합을 대전제로 한다면 정치적, 경제적 통일에 못지않게 사회문화적 통일이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현시점에서는 동독출신에서 총리와 대통령이 나오고 양독간에 정치적 사회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사회문화부문의 통일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지적은 지나친 현실왜곡처럼 보인다. 그러나 분단직후의 상황이 환희에 넘친 일순간을 제외한다면 동독주민들이 겪은 좌절의 시간도 적지 않았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하에서 문제점을 살펴본다.

 

① Der Spiegel지는 1995년 동독주민들의 67%가 “장벽은 사라졌으나 머리속의 장벽은 더 커지고 있다”는 응답을 보도했다. 이러한 문화적, 심리적 분열현상에서 이른바 오스탈지아 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오스탈지아는 동독을 말하는 Ost와 Nostalgia의 합성어로서 동독시절이 그립다는 것이다.

 

② 당초 오스탈지아 현상은 이질적인 사회통합 후에 거쳐야할 과도기적 현상으로 간주되었고 앞으로 격차가 해소되고 양독 국민들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확대되면 사라질 것으로 보였지만 통독이 10년을 지나는 시기에도 오히려 갈등은 더 확대추세를 보였다. 한 예로 동독공산당, 즉 사회주의통일당(SED)의 후신인 민주사회당(PDS)에 대한 동독주민들의 지지가 초기에는 서독에서는 1%미만이었고 동독에서만 10%를 상회하는 지지를 얻다가 1998년 총선에서는 하원에 의석을 낼 5%를 넘었을 뿐 아니라 동독지역에서는 22%의 지지를 얻었다.

 

③사회적 통합을 이처럼 어렵게 만드는 데는 두 가지 요소가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첫째는 동독재건을 위한 경제적 부담이 늘어나면서 서독주민들은 동독주민들이 “도움을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배은망덕한 이웃”이라고 느끼게 되었고 동독주민들은 사독인을 “돈 좀 있다고 잘난 척하고 ‘돈이면 다’라는 자본주의의 천박한 면만 배운 사람들”이라고 비난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통일이 10년을 지난 시점에서 보면 게으른 동독놈들(Ossis), 역겨운 서독놈들(Wessis)로 갈리는 분열현상이 야기되었고 이것으로 미루어 사회적 통일이 요원하다는 진단이 나오는 것 같다.

④ 다른 하나는 서독의 통일 후의 선전방향이 동독인들의 저항감을 불러일으켰다. 즉 동독 40년의 역사가 무가치한 역사, 실패한 역사라고 끝없이 단죄하는 선전을 계속하는데 대해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동독 역사의 포용 아닌 배척과 비난이 동독인들의 반발을 일으켰다. 오히려 동독인들은 그들의 宣傳員들이 서독 자본주의의 부정적 측면을 비판했던 바로 그 내용이 거짓 아닌 사실임을 실감하게 되면서부터 통일에 대한 회의가 싹트고 이 회의가 內面化되어 갔다는 분석도 있다.

 

⑤ 특히 예술가들이나 학자들은 서독인들이 누리고 있는 자유가 막상 그들 자신의 자유가 되었을 때 그 자유에서 환멸을 느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이 획득한 자유는 실은 시장과 문화산업이라는 또 다른 권력에 종속되는 것이었다.

결국 독일통일은 부드러운 점령에 뒤이은 서독의 내부 식민지화 과정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귄터 그라스도 이점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요컨대 동독인들의 오스탈지아 현상은 인간과 사회와 세계를 바라보는 상이한 관점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통일과업 중에서 가장 어려운 측면을 이룬다고 보여진다.

 

5. 독일의 처방과 결론

 

독일은 지금 통독20년 만에 대통령과 총리 모두 동독출신이다. 요하임 가우크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수상이 모두 동독출신으로 서독 기독교 민주당에 입당하여 총리가 되고 대통령이 되었다. 서독인들이 앝잡아 보았던 Ossis 들이 집권의 상층부를 점유한 것이다.

 

또 독일이 개최한 2006년 월드컵 경기는 양독인을 하나의 독일인으로 묶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를 계기로 하여 독일은 國旗와 國歌, 심지어 한때 나치의 유산으로 금기시했던 철십자훈장까지 제작하면서 통일국가로서의 정체성확립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다. 여기에 두 차례의 세계적 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큰 동요 없이 경제안정을 유지한 것도 사회분야에서의 국민통합을 이루는데 기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병행하여 서독의 연방정치교육본부는 동서독간의 사회통합을 겨냥하면서 동독인들에게는 서독인을, 서독인들에게는 동독인들을 바로 알도록 정치교육을 강화해 나갔다. 특히 2000년 후반부터는 “당신이 독일인입니다”라는 공익광고를 TV를 통해 독일 미디어 연합이 공동으로 실시했다. 2005년 9월26일부터 2006년 1월31일까지 4개월간 방영함으로써 정체성 캠페인을 강화하였다.

 

2007년부터는 이 캠페인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실시, “어린이들을 좋아하는 독일”을 테마로 방송캠페인을 벌였다. 이어 독일인의 긍지를 되찾는 캠페인으로서는 랑엔사이트(Florian Langensdheidt) 박사가 “오늘날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250가지 이유”라는 책을 발간, 범국민적으로 보급, 독일인들의 긍지를 찾는 한편 사회문화적 통일에도 공헌하고 있다.

 

이 책은 통일이후의 사례를 중심으로 소재를 발굴하고 베토벤이나 괴테, 실러 같은 세계적인 예술인들은 소재에서 배제하고 BOSS의 양복이나 주간지 Stern, 인물로는 축구선수 Oliver Kahn, 교황 베네딬토 16세, 디자이너 라거펠트, 통일총리 Helmut Kohl, 자동차 경주왕 Michael Schmacher, BMW. 등을 소재로 삼고 있다.

 

결론으로 말한다면 완벽한 통일은 없겠지만 독일 통일은 左派들이 비관하는 것처럼 결코 실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물론 독일의 통일과정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준비된 부분과 준비가 덜 된 부분이 섞여 있지만 준비가 부족했다고 해서 통일이 잘못되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뜻밖에 닥쳐온 통일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 기회를 기필코 통일성취로 연결시키는 결과에서 우리는 독일인의 저력을 보아야 한다.

 

통일 후 동독지역개발에 1조 마르크(한화로 약 550조원)이상이 투입되었다. 매년 국내총생산의 4〜5%가량이 투입되었으며 이는 근로자 소득세의 5.5%에 해당하는 통일연대세로 충당되었다. 서독주민들의 부담이 적은 것은 아니었지만 동독의 5개주를 연방으로 매입하고 1600만 명의 인구를 받아들여 인구 8천100만 명의 대국으로 독일의 지위를 격상시킨다고 생각하면 결코 많거나 비싼 부담은 아니다. 통일비용이라기보다는 독일을 세계적인 대국으로 부상시키는 전략적 투자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귄터 그라스나 종교인, 학자들은 항상 현실에 만족하기보다는 현실 속에 숨겨진 문제를 파헤치고 이를 이상적인 방향으로 정향시킬 사명을 가진 분들이다. 독일 통일이 이들을 만족시킬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해도 오늘의 독일 통일은 가장 성공적인 모델이라는 나의 평가는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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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이익이 분단이익보다 훨씬 크다

 

1. 통일된 동독지역을 찾아서

 

지난 7월 12일부터 19일까지 통일된 독일의 동독지역을 다녀왔다. 필자는 서울 경동교회의 Young Old Boy(나이 65세 이상 75세미만의 연령층을 지칭)들이 중심이 된 남성합창단-공식명칭 Noah남성콰이어-의 일원으로 20년 전까지만 해도 동독지역에 속했던 베를린, 라이프치히(Leibzig), 드레스덴(Dresden), 마이쎈(Meissen), 바이마르(Weimar) 지역을 순방하고 베를린의 루드비히(Ludvig) 대성당과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St. Thomas Kirche)에서 합창공연을 마치고 돌아왔다. 필자의 독일 방문은 이번이 세 번째다. 1980년 5월 국토통일원 간부였던 나는 당시 서독의 내독관계성(Ministrium der Inner Deutsch Beziehungen)초청을 받고 한독간의 분단국문제정책협의회의 한국 측 실무수석대표로 본(Bonn 당시 서독수도)에 간 것이 제1차 방독이었고 제2차는 1985년 한독정상회담의 공식수행원으로 독일을 방문했다. 이번에는 비록 기간도 짧고 목적도 달랐지만 내 나름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통독 20년을 넘긴 동독지역을 살펴볼 생각이었다.

 

그간 국내에서는 서독이 잘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동독을 흡수 통일했다가 막대한 통일비용으로 낭패를 겪었다면서 우리는 독일의 교훈을 본받아 통일을 서두르지 말고 장기적 관점에서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 정책당국자들의 시각이었다. 특히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은 통일비용문제를 전면에 내걸고 성급한 통일을 경계해야 한다는 쪽으로 국론을 몰아갔다. 정권의 이러한 태도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경제발전으로 삶이 풍요해진 한국 젊은 세대들은 공리주의적 관점을 내세워 헐벗고 굶주리는 북한을 상대로 실익 없는 통일을 하는 것보다는 분단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통일기피 내지 통일혐오적 사고마저 배태되어온 것도 사실이다.

 

2. 통일비용걱정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통일 20년이 지난 오늘의 독일의 어느 곳을 보아도 통일비용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그러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의 독일은 분단이익보다는 통일이익이 얼마나 큰가를 실감 있게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독일이 세계정치와 유럽대륙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누리는 국격(國格)이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독일은 서독의 11개주가 동독의 5개주를 합함으로써 면적은 357,022㎢로 한국의 3.5배이며 인구도 약 8천100만명이고 GDP도 3조6286억$로 세계4위이다. (2011 IMF 기준) 이제 독일은 유럽의 동부와 서부를 아우르는 대국으로 부상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경제,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이를 잘 극복하면서 유럽의 경제맹주가 되어 있으며 독일연방공화국의 대통령과 수상 또한 모두 동독 출신들이 당선되어 오늘의 독일을 이끌고 있다.

 

동독 지역의 5개주는 비록 공산정권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경제면에서 서독만큼 라인 강의 기적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러나 동유럽지역의 어느 국가보다도 잘사는 지역이었다. 동서독이 통일된 후에는 독일 연방정부와 서독의 기업가들이 안정된 투자지역으로 동독지역을 선택, 경제개발을 추진한 결과 동독정권하에서 빛을 보지 못했던 지역발전의 잠재력이 급속히 되살아나면서 경제발전에 속도가 붙어 양 지역 간의 격차도 나날이 줄어들고 있다.

독일은 원래 50여개의 봉건제후국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연방국가로 통일되었기 때문에 16세기 이래 문화 능력 있는 제후들이 세운 성벽과 교회건물, 왕궁식당이나 박물관, 마이쎈의 도자기 공장 등은 비록 전쟁으로 파괴되고 공산체제하에서 방치되어 옛 모습을 많이 상실했지만 통일 후 연방정부와 기업들이 이들 건물을 리노베이션하거나 리모델링함으로 해서 다시 옛 모습을 되찾고 있다. 분단의 상처나 전쟁의 상흔은 이젠 아픔이라기보다는 값진 추억으로 변해가면서 만인의 찬탄을 불러일으키는 관광 상품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3. 투자할수록 늘어나는 관광자원

 

우리 일행은 베를린 도착 다음날 베를린 근교의 포츠담을 거처 뷧템베르그(Wittemberg)를 방문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올렸던 수도원, 그가 개혁의 당위성을 밝힌 95개조의 성명문, 그가 가르쳤던 대학은 하나같이 개신교의 성지(聖地)로 승화되어 개신교도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또 프리드리히의 현자(Friedrich-Weise)가 봄스(Worms)종교제판에서 파문당한 루터를 보호하기 위해 그를 납치해서 숨겨주었던 바르트부르그(Wartburg)성과 루터가 그 성에서 라틴어의 성경을 독일어성경(Die Bibel)으로 번역하고 구텐베르그의 인쇄술발명에 때맞춰 성경의 대중화를 이룬 역사가 낱낱이 기록되고 보존, 전시되어 있었다. 참으로 멋진 성지면서 관광지로 변해 관광버스가 연일 줄을 잇고 있었다. 이들 지역은 마르틴 루터라는 브랜드로 먹고 사는 도시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라이프치히나 드레스덴, 바이마르도 요한 세바스챤 바하(Johann Sebastian Bach),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쉴러(Johann Friedrich von Schiller)를 로고로 한 상품, 기념관(Haus), 식당 등이 모두 성업 중이었다. 특히 라이프치히의 아우어박스 켈러(Auerbachs Keller)식당은 인테리어의 수려함으로도 훌륭했지만 괴테가 젊은 시절 자주 찾은 식당이라는 이유로 더 많은 고객이 몰려든다는 것이다. 우리들도 그들 중의 한 무리일 것이다. 쉴러 뮤지엄, 각종 박물관은 많은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물론 내가 방문한 도시가 과거 중세시대이래 상공업이 발달했던 라이프치히나 작센(Sachsen)왕국의 수도였던 드레스덴처럼 투자전망이 밝은 곳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오늘의 유럽나라들의 도시들에서는 보기 힘든 타워크레인이나 스카이크레인이 이 곳 저곳에 거구(巨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면 개발과 복원, 리노베이션의 붐이 지속되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세계각지에서 이들 지역으로 모여드는 관광객들이 동독지역의 새로운 수입원이 되고 있었다. 영국 GNP의 30%가 관광수입이라는데 이제 독일의 관광수입도 그 수준을 곧 육박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영국의 셰익스피어에 비견할만한 괴테의 나라, 마르틴 루터의 나라, 바하의 나라이기 때문에 또 드레스덴의 츠빙거 궁이 복원되었고 그 유명한 군주(君主行列)의 자기벽화(瓷器壁畵)가 원형대로 보존, 전시되어 있고 영국의 폭격으로 무너진 여인들 교회(Frauen Kirche)-별명 성모교회-가 다시 복원되어 관광자원에 추가되었다. 이 지역은 분명 괴테가 독일의 베네치아라고 호평한 바대로 관광차원에서 “엘베 강의 기적”을 이룰 것으로 예견되기 때문에 동독지역의 관광수익은 해를 거듭할수록 눈덩이처럼 늘 것 같다.

 

필자는 동독지역에 속했던 지역이 모두 이렇게 발전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도의 자치를 보장받고 있는 동독의 5개 자치주(自治洲)들이 연방정부의 구성체로서 연방정부와의 제휴 속에서 발전경쟁에 나서는 추세라면 동독지역과 서독지역간의 발전격차가 줄어드는 것은 시간문제 같다. 라이프치히나 드레스덴은 이미 서독수준에 도달했다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라이프치히를 여행하면서 가이드가 한 이야기 한토막이 잘 잊혀 지지 않는다. 서독에 광부로 갔던 한 한국인이 간호사로 파독된 여자와 결혼해서 독일의 하노버에 정착, 식당으로 모은 돈을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진 직후 라이프치히로 들어가 허름한 건물을 구입하고 이를 리모델링해서 다시 한국식당을 개업했는데 현재 이 건물의 값은 구입당시보다 수 십 배 높은 가격으로 호가된다는 것이다. 졸지에 떼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서독은 통일을 통해 동독이라는 중부유럽의 5개주를 통째로 구입, 개발의 효과가 독일의 국위선양과 국력신장으로 수렴되는 안전한 투자공간을 확보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통일이 독일국가를 크게 발전시키는 산업으로서의 효용을 확실히 입증한 것이다.

 

4. 통일이익이 분단이익보다 훨씬 크다

 

물론 통일직후의 상황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2,200만 명의 동독인들은 통일의 환희는 잠시였고 그들에게는 엄청난 시련의 시간이 닥아 왔을 것이다. 공산당이 직장을 배치해주고 생산성이 높거나 낮거나 모두에게 똑같이 생필품을 공급해주고 똑같이 교육, 의료혜택을 누리게 하고 문화생활을 균점했던 상황은 사라지고 자기 책임 하에 의식주를 포함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직장을 구해야 하고 생산성 경쟁에서 뒤지면 당장에 삶이 어려워지는 도전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허탈과 좌절의 늪에 빠졌을 것이다.

 

서독정부역시 동독주민들의 정치사회화(Political Socialization)과정을 조정, 서독의 헌법질서에 적응하도록 유도해야 하는 세기적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다. 여기에 제2차 세계대전 패배에서 온 전쟁의 상처, 나치독일이 남긴 상처, 분단과 냉전이 몰고 온 상처를 치유하면서 동서독 간의 발전격차를 줄여 가는데 엄청난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재정 부담이 뒤따랐을 것이다.

 

통일직후 동서독 사람들이 서로 간에 상대를 너무 잘 몰랐다고 독백할 정도로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잘 몰랐다는 것이 당시의 솔직한 후일담이었다고 한다. 동독인들은 서독에서의 삶이 얼마나 힘든 삶인지 몰랐다는 것이고 서독인들은 창의력도 없고 근면하지도 않고 생산성에 신경조차 쓰지 않는 저런 독일인들이 과연 있을 수 있느냐고 개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일 지도자들은 이런 어려움에 굴하지 않았다. 후회하지도 않았다. 포기하지도 않았다. 전쟁의 폐허에서 라인 강의 기적을 이루었던 서독인들의 체험과 기질이 동독으로 흘러들어갔다. 이 물결이 스며들면서 공산정권하에서 생성된 생활태도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개방사회의 장점인 정보의 소통과 확산은 동독인들을 신속히 변화시켰다. 서독(西獨)식의 정치사회화는 급속히 동독사회의 새로운 흐름을 이루었다. 높은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서독의 자본과 기술과 경험이 동독의 모든 잠재력을 발전의 원천으로 재생시켜 나갔다. 통일비용이 통일을 위한 투자로 변해갔다. 개방사회의 발전정보는 동독인들을 일깨워 스스로 자가발전을 도모할 기회를 찾게 했다. 동독5개 자치주들은 연방정부와의 협력 속에서 공산치하에서는 상상할 수없는 투자계획을 세우고 낙후성 극복에 박차를 가해나갔다.

지금 세계는 어느 곳에서도 독일통일을 놓고 통일 비용을 말하는 사람들은 없다. 핵무장하지 않고도 전 세계 강국반열에 오른 독일을 부러워하는 나라는 늘고 있다. 아직도 통일비용을 따지고 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지구 최후의 분단국인 한국에서 일 것이다. 그것도 아이러니 같지만 항상 통일의 당위만을 앞세워왔던 친북좌파들이 통일비용타령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제 독일통일비용이야기는 아예 꺼내지 말자. 통일 후 독일인들이 감당했던 부담은 비용이 아니라 크고 강하고 영향력 있는 오늘의 독일을 만들기 위한 투자였기 때문이다. 우리도 앞으로는 통일을 단순히 비용차원의 과제로 다루는 단선적(單線的) 사고를 뛰어넘어 한반도 전체의 균형발전을 위한 투자차원의 문제로 통일을 생각하는 관점을 새롭게 정립할 때에 이르렀다. 함께 모색할 것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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