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 아닌 실질적인 남북대화가 바람직하다.
이 영 일(한중정치외교포럼회장)
1. 남북대화의 새로운 국면
남북대화가 조만간 재개될 것이라는 기대가 새해의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북한 김정은이 올해 신년사형식의 연설에서 남북한 최고위급 회담을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 반면 박근혜 대통령역시 연두기자회견에서 아무 조건 없이 남북정상회담에 응할 용의가 있다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북한 고위층의 대화긍정발언으로 남북대화가 올해 재개되리라는 기대가 싹트는 상황에서 남북한 관계를 다시 후퇴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회고록을 발표, 자기의 대북정책이 과거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때와는 달리 원칙을 지키고 북한의 대화공세에 대처했다고 자랑하면서 그간 김정일이 중국지도부를 통해 여러 차례 정상회담을 제의해왔지만 그때마다 거액의 금품을 요구했기 때문에 이를 거절했다고 밝혔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발언을 놓고 국내 좌파단체들은 남북관계를 단절함으로 해서 천안함 사태나 연평도 포격 사태 등 군사적 긴장상태를 조성한 정권이 반성은커녕 자기의 대화실패정책을 정치적 성과로 자랑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반면 우파진영에서는 남북 대화나 교류 때마다 뒷돈을 집어주던 악습(대화나 교류매입정책)을 차단한 것은 잘했지만 원칙 있는 대화를 주도적으로 열지 못하고 오히려 대화를 주선해준 중국지도자를 실속 없이 거명한 것은 부적절한 처사라고 비판했다.
박근혜 정권은 집권 이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캐치플레이스로 하여 그간의 왜곡된 남북대화를 바로잡으면서 핵문제를 포함한 남북한의 제반 현안에 대해 한국이 당사자로서 대화와 협상의 주체적 지위를 되찾으려고 모든 외교적 노력을 경주해왔다. 특히 중국정부의 협력유도에도 많은 공을 드려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비록 단기적이긴 하지만 정부의 새로운 대북접근 노력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 발표로 의외의 복병을 만난 셈이다. 일방적 주장만을 담은 회고록의 시효는 결코 길지 않아 조만간 수습이 되겠지만 한국정부의 협상평판, 신뢰평판에 남긴 상처는 쉽게 가시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의 남북한관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것인가. 한국으로서는 금년이 분단 70년과 광복 70년이 맞닿는 해라는 시점임을 감안, 작년 12월 29일 통일을 위한 남북당국 간 대화에 북한이 응해올 것을 통일준비위원회의 이름으로 제의한 바 있기 때문에 김정은의 신년사의 대화언급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은 작년 1월 6일 신년기자회견에서 통일대박 론을 제기, 통일문제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을 제고했고, 작년 3월 28일 독일 드레스덴에서 행한 연설에서 자기가 주창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구체적 실천방안을 제시했기 때문에 남북한 당국 간 대화를 여는 것은 금년 정치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 주제다.
그러나 197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남북대화는 단절되었다가 다시 이어지고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기를 반복하면서 4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우리가 지난 대화의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대화를 위한 대화, 이벤트 성 대화에서는 아무런 결실도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하 현재의 한반도 내외상황을 남북대화라는 측면에서 재구성하면서 바람직한 대화의 향방을 모색하기로 한다.
2. 북한에 대화수요가 있는가.
금년은 김정은이 김정일의 유훈통치 3년을 벗어나 자기 스타일의 북한 통치를 시작하는 시점이다. 김정은은 작년도 신년사에서 들고 나온 ‘위대한 변혁의 시대’는 내부숙청만 되풀이하는 가운데 뚜렷한 성과 없이 끝났고 경제도 민중들에게 끌려가는 시장화추세를 때로는 긍정, 때로는 활용, 때로는 규제하면서 근근이 현상을 유지하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중국과의 관계가 냉랭해 짐으로 해서 북한내부에서 조차 김정은 정권의 정통성이 흔들리고 있으며 특히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결의한 5개항에 걸친 대북제재는 아직도 효력이 발효 중이다.
친중파인 고모부 장성택에 대한 반인륜적, 반민주적 처형과 탈북자들의 국제적 호소가 도화선이 되어 제기된 북한인권 문제는 유엔총회 제3위원회의 의제로 채택되어 김정은을 국제형사재판(ICC)에 회부해야할 대상으로 결의하는 등 국제적 고립이 북한정권 성립이후 가장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북한은 바야흐로 이 처절한 고립 환경에서 벗어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립의 위기’(Viability Crisis)에 직면하고 있다.
김정은의 권력은 쟁취 아닌 세습이기 때문에 선대(先代)인 김일성, 김정일이 지속해온 핵과 미사일 개발만은 내외사정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이를 승계해야할 숙명이다. 이 때문에 경제개발에 전력을 투구해도 모자랄 판에 핵·경제병진(竝進)노선을 고수하겟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는 한 북한경제개발에 필수적인 자본과 기술을 투자하지 않을 것이다. 그간 북한은 미국과의 대화를 끈질기게 요구했지만 핵 없는 세계건설을 집권의 캐치플레이스로 내놓고 있는 오바마 행정부가 핵개발을 계속하겠다는 북한의 제의를 받아들일 리 없다. 여기서 북한은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고립탈출을 기도했지만 핵 포기가 전제되지 않는 한 안보전략의 상당 부분을 미국에 종속시키고 있는 일본이 납치문제하나만으로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쉽게 호응할리 없다. 최근 김정은은 최룡해를 러시아에 파견, 러시아를 통한 고립탈출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지금 우크라이나 문제로 서방과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유가(油價)하락으로 경제마저 어려워졌기 때문에 친북(親北)정책에 적극 나설 형편이 아니다. 그러면 김정은이 검토할 대안은 무엇일까.
현재 북한정권은 두 가지 대안을 검토할 것이다. 하나는 한미연합방위전력을 상대로 1대1의 전면전을 도발하는 것인데 그러기에는 능력이 너무 모자란다. 전쟁에 필요한 에너지도, 자재도, 뒷받침해줄 우방도, 군대의 사기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록 결과가 정권붕괴를 몰고 올 값비싼 대가를 치루더라도 비대칭 전력으로서의 핵 공갈과 미사일 발사, 특수군 부대를 이용한 테러 형 공격 등을 구사하는 것이다. 알카에다나 이슬람 국가(IS)의 대미투쟁은 그들에게 좋은 본보기다.
다른 하나는 남북대화를 통해 위기와 고립에서 탈출하면서 시간을 버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지난 기간 그러한 대화전술로 성공한 선대들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하 북한이 구사한 대화전략을 살펴보자
3. 남북정상회담의 회고와 반성
1990년 동구라파가 몰락하고 소련이 붕괴되는 상황은 북한체제의 존폐를 위협할 정세였다. 이 위기를 극복하는 수단으로 김일성은 남북대화전략을 채택했다. 노태우정권은 이를 그가 추구한 북방정책의 성과로 평가, 당국 간 회담을 환영하고 남북총리회담을 여는 등 남북한 관계 개선에 필요한 합의도출에 주력했다. 여기서 만들어진 것이 남북한 기본관계합의서이고 한반도 비핵화선언이었다. 북한은 이같은 대화 쇼를 통해 대내외적으로 몰려오는 체제위기를 극복하면서 한국의 핵 개발저지와 미군보유 핵무기의 완전철수를 못 박는 비핵화선언을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그 후 언제 그러한 합의가 있었느냐는 듯이 한국과의 모든 합의를 유린, 외면했다. 남북대화가 북한의 체제위기극복 수단으로 이용된 대표적인 사례다.
김일성은 1994년에도 북핵문제로 미국이 대북폭격을 검토할 때 카터 전 미국대통령을 평양에 초청,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함으로써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 회담은 김일성의 사망으로 성사되지 못했지만 미국의 북 핵 기지 폭격계획은 없었던 일로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 후 김정일을 상대로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각각 정상회담을 가졌지만 통일문제해결에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 방문 대가로 거액의 현찰을 용처(用處)나 용도(用途)를 묻지 않고 김정일에 제공했다. 핵실험 한 번 하는데 3억 달러가 쓰이는데 여러 차례 핵실험에 필요한 현찰을 제공하고 그 비용을 국민의 혈세로 갚은 것으로 알려졌다. 6.15선언도 가장 중요한 대목인 김정일의 답방약속은 없었던 것이 되었고 “통일 후까지도 미군의 한반도 주둔을 김정일이 동의했다”거나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할 능력도 의사도 없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귀국 후의 대국민 보고는 전혀 사실이 아닌 국민기만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가 끝나갈 무렵 NLL카드를 미끼로 정상회담을 실현한 후 거액의 대북지원을 국회의 동의 없이 혼자서 약속하는 등 정상적 의미의 정상회담의 범주에 넣기 힘든 허무 황당한 회담을 연출했다. 이 두 회담은 한반도통일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정상회담이라기보다는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분단 상황을 이용해서 자기 업적을 과시하려 연출한 일종의 정치적 이벤트에 불과했던 것이다.
4. 결론
지금 박근혜 정권은 집권 3년차를 시작하면서 두 가지 측면에서 남북대화를 열어야 할 필요성에 직면하고 있다. 국제사회의 큰 공감을 얻고 있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와 이를 실천하기 위한 드레스덴 제안, 동북아시아 정세를 신뢰프로세스를 통해 협력가능한 공동체로 변화시킬 것을 겨냥한 동북아 평화협력구상, 한반도와 유럽을 연결하기 위한 유라시안 이니셔티브 등이 제대로 굴러가기 위해서는 남북대화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앞서도 지적했지만 북한이 감행할 가능성이 있고 그 선례가 있는(1968년의 1.21사태나 연평도 도발, 원전에 대한 도발 우려 등)테러적 도발가능성을 방치(放置)하기보다는 이를 예방 관리하는데도 일정한 수준의 대화는 필요하고 유지되어야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의 대북정책이 북한의 비대칭적 도발을 유발할 궁구물박(窮寇勿迫)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현재 건강한 국민들은 대화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일방적인 퍼주기나 뒷돈 주는 형식의 대화매입에는 반대한다. 동시에 대화를 위한 대화라도 안하는 것 보다는 낫다는 회담만능주의도 필요한 정답은 아니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우리는 모든 면에서 북한보다 훨씬 앞서있다는 현실에서 대화정책을 고려해야 한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대화이익이 북한과의 대결이나 압박보다 항상 더 크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지금 북한은 도발이냐? 남북대화를 통한 위기 극복이냐? 의 양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상황이다.
형식적으로는 대화에 이러저러한 조건을 달고 있지만 그들의 본심은 대화재개다. 테러적 도발도 그들의 예비계획(Contingency Plan)에는 포함되겠지만 그것을 실행할 경우 지불해야할 대가가 자칫 체제몰락을 가져올 만큼 크기 때문에 이판사판에만 가능 할 것이다. 따라서 현 정세는 당국 간이나 민간수준에서 다양한 대화와 교류를 터야 할 시점이다.
그러나 대화내용과 방식은 달라져야한다. 우선 인도주의 사업으로서 이산가족문제도 만났다가 헤어지는 회담이 아니라 고령자들이 가족 품에 안겨 여생을 마칠 수 있는 재결합(Reunion)을 의제로 삼고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국군포로 송환문제도 해결해야할 의제에 포함시켜야 한다. 북한은 강도 높은 유엔인권결의가 몰고 오는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고령자들의 가족 재결합문제나 고령의 국군포로송환정도에는 능히 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일이 성사되려면 국제적십자연맹을 비롯한 세계인권단체들의 일치된 요구가 국제여론으로 동원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북한의 핵 포기가 가시화되지 않는 조건에서 우리의 조건 없는 정상회담정책 때문에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의지를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 앞으로 재개되는 남북대화에서는 한국이 당사자로서 의제에 핵문제를 반드시 포함시키고 핵문제에서 진전이 있어야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완화와 한국의 대북지원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강조하는데 주력해야 한다. 이점에서 박근혜 정부의 올해 대화정책이 실패로 끝났던 과거의 되풀이가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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