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김정일 시대와 북ㆍ중 관계

이영일 한중문화협회 회장

1. 북한정권 안정화 필요성에 공감

 

작년 말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은 새해 동북아시아 정세전망에 새로운 변화를 몰고 왔다. 중국은 ‘주변정세안정화’라는 중국의 국익개념을 실현한다는 명분하에 사회주의 역사에서 그 유례가 없는 김정은에 의한 “3대 권력세습”을 공인하면서까지 북한정권을 신속히 안정시키기를 선택했다.

북한정권의 조기안정화가 필요하다는 데는 미국과 일본 그리고 러시아도 같은 입장을 보이면서 조의를 표했다. 한국정부가 북한정권에 조문(弔問)빚을 진 김대중 전 대통령가족이나 현대상선 정몽헌 전 회장가족들에게 방북조문을 허용하면서 간접 조의를 표한 것 역시 북한정권 안정화의 필요성에 공감한 조치다.

 

중국이 김정은 정권을 이렇게 서둘러 지지한 것은 김정일 사후 북한정권을 동요시킬 북한 내외의 도전요소의 등장을 미리 차단하면서 중국주도로 북한 안정화의 출로를 열어주는 외교적 이니셔티브를 장악하는데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변국들이 북한정권의 조기안정화에 공감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북한정권의 지속적 안정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북한체제가 안고 있는 내외적 갈등요소를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한다면 북한정권의 안정화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김정일 사망 후 한국에서 발표된 한 학자의 칼럼은 “한반도 분단사(分斷史)의 제2막이 끝났다. 1994년 김일성의 사망으로 6·25 남침과 남북체제 경쟁으로 대표되는 제1막이 종료됐다면, 2011년 김정일의 사망은 배고픔, 핵개발, 기만외교로 점철된 철권통치의 제2막이 끝났음을 의미한다. 과연 북한이 개방·개혁을 통해 역사적 대반전의 제3막을 열 것인지, 아니면 무질서와 폭력이 난무하는 혼돈의 시대로 접어들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한겨레2011-12-20]고 말했다. 이하에서 북한정권 안정화의 조건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2. 북한정권 안정화의 조건

 평양에서 12월 29일 열린 김정일 장례식에는 김정일로부터 정권의 후사(後嗣)를 부탁받은 김정은 이외의 7인이 관(棺)에 손을 얹고 운구행렬을 선도했다. 이들이 북한권력의 새로운 실세 지도부로 보인다. 북한정권 안정화의 첫째 조건은 이들이 김정은 체제가 확고히 뿌리내릴 때 까지 화합, 단결하는 것이다. 이들 간 단합의 기초는 김정일의 카리스마적, 독재적 리더십이 유효하게 작동하는 상황이었는데 김정일 사후에도 과연 단합이 제대로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김정일은 그간 인민들은 굶기더라도 상위지배동맹성원만은 일체 생활상의 어려움이 없게 하면서 자기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정권을 지켜왔다. 새 지도부 역시 지배동맹의 일원들로서 지금까지 누리던 특권적 지위를 지켜야한다는 점에서는 이해관계를 공유한다. 그러나 역사의 경험은 시간이 흐르면서 북한체제 내부가 당면한 대내외 도전을 처리하는 방식을 놓고는 지배집단 간에 불일치가 나오고 이해(利害)가 갈려 경쟁하고 다투게 된다는 것이다.

우선 김정은 정권이 내세울 정치구호를 설정하는 문제도 간단치 않다. 당장은 유훈통치를 강조하지만 북한이 풀어야할 대내외 도전가운데서 유훈통치만으로 해결될 일이 거의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북한 정권의 창업주 김일성은 주체(主體)강국을 말했고 그의 아들 김정일은 선군(先軍)강국을 내세웠는데 그러나 주체노선이나 선군노선의 어느 것도 인민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지 못했다. 식량, 에너지, 생산 원료, 의료의 어느 것도 제대로 공급하지 못했다. 그래도 김일성 때는 아사자는 없었고 탈북자도 드물었다.

 

그러나 김정일 시대에는 스스로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르는 시기에 수백만의 북한 동포들이 굶어죽었다. 수십만의 탈북자가 줄을 이었다. 배급체제는 붕괴되었다. 주민들 스스로가 먹는 문제해결에 직접 뛰쳐나오면서 부터 경제는 시장화(市場化)로 기울었고 국가의 계획경제 시스템은 약화되었다. 지금도 탈북은 이어지고 있으며 탈북에 실패한 정신적 탈북자까지를 합한다면 체제 내 위기는 극에 달하고 있다. 굶주림을 더 이상 통치의 수단으로 삼을 수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김정일은 이러한 위기극복을 위해 모든 역량을 동원, 핵과 미사일 개발에 광분했다. 두 차례에 걸친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개발을 김정일은 선군의 위업(偉業)으로 과시했다. 그러나 이 정책들은 하나같이 북한을 국제적으로 고립시켰고 인민들만 궁핍 속으로 몰아넣었다. ‘극빈 속의 핵무장 시도’는 인민들은 물론 심지어 군인들에게 조차 먹을 것을 줄 수없는 체제위기를 불러왔다.

 현시점에서 김정일의 유훈(遺訓)은 사실상 그 시효가 끝났다고 보아야 한다. 주체나 선군이 아닌 북한경제상황의 개선이라는 새로운 지도노선을 부각시키고 그 실효성을 보여주어야 비로소 김정은 체제의 안정화는 터를 잡을 것이다.
 북한의 김정일은 핵 보유와 경제발전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려고 노력했지만 핵무기의 비확산을 지향하는 국제사회는 결코 김정일의 시도를 용납하지 않았다. 중국이 틈틈이 강조하는 한반도의 비핵화는 북한의 핵 포기를 촉구하는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김정은은 대외적으로는 국제사회가 적극 관여하게 될 핵문제해결의 방도를 놓고 시급히 새 지도층 간에 컨센서스를 만들어야 한다. 다음 대내적으로는 북한의 경제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개혁개방문제를 놓고 조속히 내부적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

이처럼 대내외 도전에 응답하는 방법을 둘러싸고 지도층간에 확고한 합의가 마련되지 않는 한 김정은의 세습체제는 결코 안정화의 길에 들어설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의 한 학자는 김정은이 같은 세습지도자라도 하이티의 Baby Doc Duvalier보다는 대만의 장징궈(蔣經國)가 더 바람직한 모델인데 그러한 리더십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 같고 대남, 대미강공책으로 리더의 위엄을 과시하는 방식에 쏠릴 가능성도 크다고 우려했다. (Sheena Greitens, Succession and Stability in North Korea January 23, 2011 (Korea Platform CSIS)


3. 우려되는 지도층 내부의 노선갈등

현재 북한에 잠복되어 있는 노선갈등요소는 중국 편향(偏向)파와 중국경계(警戒)파의 대립가능성이다. 김정일 사망이후 북한이 기댈 곳은 중국뿐이고 중국만이 북한의 세습정권의 안착을 가장 강력, 명백하게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대소사(大小事)를 중국과의 협의로 해결하자는 중국 편향파가 지금은 주류다. 그러나 중국에만 일방적으로 의존한다고 해서 모든 우려가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현 단계 중국의 대북정책은 미국처럼 핵 포기의 선행을 요구하는 대신에 ‘협력을 통한 개입’을 추구하며 한반도의 비핵화를 외교목표로 내세운다. 때문에 한반도 비핵화를 원하는 중국과 김정일의 유훈에 따라 핵 보유를 밀고나갈 김정은의 정책 간에는 전략적 갈등요인이 도사린다. 물론 중국이 현재처럼 북한문제와 북핵문제를 나누어 대처할 때는 큰 문제가 없겠지만 앞으로 펼쳐질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치과정에서 북·중 갈등은 반드시 수면위로 떠오를 것이다. 또 중국은 북한의 개혁개방을 적극 권고, 지원하는 입장인데 이것의 수용여부도 중북관계에서 큰 변수의 하나가 될 것이다. 김정일 치하에서 강성해진 선군세력의 영향력을 김정은이 어떻게 조정, 통제해 나갈 것인가가 중요하다.

 

둘째로 중국이 우방국 국가원수의 가족이라고 해서 보호하고 있는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金正男)의 존재도 김정은을 둘러싼 권력층에서는 경계의 눈초리를 한시도 떼놓을 수 없는 요소다. 중국 측에는 카드가 되겠지만 김정은 측에서는 상당한 부담이 될 것이다. 이러한 잠재적 갈등요인을 가정할 때 북한의 내부노선 갈등은 항상 중국일변도로만 흐를 수없는 요인을 안고 있다.

또 북한의 외교라인에서는 꾸준히 대미접근의 중요성을 말한다. 금년 신년공동사설에서 "현시기 인민들의 먹는 문제, 식량 문제를 푸는 것은 강성국가 건설의 초미의 문제"라고 명기하면서 미국과의 식량협상의 문을 열어놓고 있다. 또 북한노동당은 개성공단, 금강산사업 등의 경험에 비추어 식량난 해결을 위한 남한이용의 필요성을 제기할 것이다. 대미접근 노선과 남북관계개선노선이 중국편향노선, 중국경계노선과 맞물리면서 상황변동에 따라 정권이 추구하는 정책의 중점은 가변적이 될 것이다. 김정은 정권은 당분간 선군세력의 영향 하에 있지만 그러나 경제상황은 더 이상 주체나 선군에만 매달릴 수 없게 되어 있다.

 

4. 한국의 선택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한국의 입장에서는 총체적 상황이 북한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략적 낙관론을 가질 수 있지만 선군세력에 옹위된 김정은의 진로가 불명하기 때문에 안보차원의 대비에도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동시에 북한이 중국에만 전적으로 매달리는 상황을 방치만 해서도 안 되기 때문에 대북협력을 구체화할 조치들을 정치, 경제 외교차원에서 하나씩 준비하고 필요한 제안을 추진해 나가야 한다. 특히 현시점에서 한국이 남북한관계를 개선해 나가려는 것은 오늘의 급변하고 있는 북한 상황의 요구일 뿐만 아니라 주변정세의 큰 흐름에서 보아도 한국이 당면한 도전적 과제이기도 하다.

최근 주변정세에서 한시도 주목을 게을리 할 수 없는 것은 미국과 중국과의 관계이다. 미국이 대외정책의 중심을 아시아로 옮긴다고 선언하면서부터 미ㆍ중 관계는 갈수록 협력보다는 갈등 쪽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당초에는 대선을 앞둔 미국 내의 정치적 필요가 미중관계를 긴장시키는 원인으로 보였지만 최근 상황을 보면 미·중 양국 간의 국익차원의 갈등양상이 결코 예사롭지 않다.

미국은 미일동맹을 강화하는 한편 호주에 미국 해병대를 상주시키고 인도, 미얀마,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 외몽고를 망라하는 다각적 협력의 그물망을 촘촘히 짜들어가고 있다. 중국은 이에 맞서 아세안과의 협력긴밀화, 한ㆍ중ㆍ일 FTA체결 제의, 샹하이 협력기구강화, 러시아와의 협력관계개선,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거부 등으로 맞서고 있다. 또 아직까지 중국이 핵심이익으로 평가하지 않던 북한의 전략 가치를 새롭게 제고하고 있다.

 

물론 미중관계의 갈등이 심화된다고 해서 두 강대국 간에 군사충돌이 발생할 가능성은 오늘의 세계정치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양국 간에 이해관계가 맞부딪히는 지역차원에서는 미중양국간의 실력과시의 수단으로 또는 강국정치의 음모적 속성 때문에 또는 상대방의 오산으로 인하여 대리전의 결과를 초래할 충돌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혹시라도 한반도가 이렇게 악용될 가능성을 차단하는 방법도 강구해두어야 한다. 이 방법가운데 남북한관계개선도 중요한 과제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한ㆍ미관계와 한ㆍ중 관계를 잘 풀어갈 외교역량의 극대화가 요망되는 임진년이다. 올해가 남북한이 새롭게 대화하고 협력하는 시대로 정상화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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