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도 봄은 올 것인가.
한중문화협회 총재 이 영 일
1.
21세기는 변화의 시대다. 국제정치를 이해하는 패러다임도 크게 변화했다. 이러한 변화들은 20세기의 나머지 10년부터 태동하여 이제는 세계정치의 새로운 현실이 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이러한 변화의 예외지대가 있다는 것이다. 다름 아닌 북한정권이다. 그렇다면 북한정권은 영원히 예외지대로 남을 것인가. 북한정권의 운명을 진단하기위한 노력의 하나로 20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부터 시작된 세계적 변화를 개관, 오늘의 북한의 예외성(Exceptionality)이 얼마만큼 지속될 수 있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지난 세기의 마지막 10년 사이에 세계에서 발생한 가장 큰 혁명은 한 마디로 소련제국과 동구 공산권을 해체시킨 러시아 혁명일 것이다. 여기에 곁들여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사건은 동서독이 하나로 통일된 것이다. 그러나 흥미 있는 것은 세계사의 흐름을 바꿀 이러한 큰 변화와 사건들이 사전에 누구에 의해서도 예측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미국의 소련문제 최고권위자의 한 사람인 George Kennan도 “현대 국제정치 사건의 역사를 통틀어서 러시아제국과 소비에트연방(蘇聯)으로 알려진 강대국이 이처럼 돌연히 총체적으로 붕괴해서 사라지는 이상하고 놀라운 사건은 있어본 일이 없다”고 말했다. 독일의 통일에 관해서도 통일 당시 서독 수상이었던 Helmut Kohl자신도 독일이 이처럼 빨리 통일에 이르게 될지 몰랐다고 회고했다.
소련의 붕괴에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요인 등 구조적 요인들이 많았지만 언제(When), 어떻게(How), 왜(Why) 소련제국이 망했는지에 관한 납득할만한 설명은 모자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당독재, 국유경제, 15개 구성공화국과 동구라파에 대한 Kremlin의 통제는 사라진 것이다. 유럽 대륙에서 발생한 이러한 변화에 이어서 올봄에는 중동과 북 아프리카에서도 유사한 변화가 발생했다. 이집트의 Tahrir광장, 튀니지의 Casbah Plaza, 리비아의 Benghazi 거리에서 일어난 민중 혁명은 소련과 동구에서 제기되었던 투쟁구호들과 많은 공통성을 보이고 있다. 중국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劉小波의 주장 속에도 놀랄만한 유사성성이 담겨있다.
미국의 러시아 문제 전문가의 한 사람인 Leon Aron은 최근 발표한 글(Foreign Policy. Washington: Jul/Aug 2011. , Iss. 187; pg. 64, 8 pgs)에서 소련의 해체는 고르바초프의 이상주의적 접근에서 비롯되었는데 고르비가 시도한 ‘위로부터의 개혁“이 혁명적 변화를 몰고 왔다고 밝혔다. 고르비는 개혁의 규모와 깊이가 당초 의도했던 궤도를 벗어났을 때 강제력행사를 자제했다. 그것은 스탈린주의의 청산이 스탈린적 수법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는 고르비의 강권정치에 대한 혐오와 그의 이상주의적 성향 때문이었다고 Aron은지적하고 결국 고르바초프의 온건개혁정책이 소련해체를 가져왔다고 결론지었다.
중국의 개혁도 위로부터의 개혁인 점에서는 소련의 그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개혁정책의 집행방식에서는 러시아와 달랐다. 중국 공산당은 민주화를 향한 급격한 체제변혁의 시도(1989년의 천안문사건)를 군사력을 동원해서 철저히 차단하고 공산당 주도하에 중국내부정세와 당시의 중국경제력의 수준에 맞게 개혁정책을 점진적으로 집행했다.(장쩌민의 與時俱進) 여기에서 중국의 성공과 소련의 실패가 갈린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2.
지금까지 소련과 동구, 중동과 북 아프리카에서 진행된 혁명과 변화는 변화의 당사국들이 내놓은 이데올로기나 정치명분이 무엇이냐에 관계없이 인권을 존중치 않는 정권은 존립하는데 실패했고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명제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고르바초프는 그가 1985년 3월 공산당 서기장이 된 후 소련이 당면한 문제로서 거짓과 테러위에 세워진 스탈린 식 공산주의라는 거대한 구조물의 청산을 겨냥하면서 “소련모델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실패했다. 그것은 인간을 존중하지 않고 정신적으로, 정치적으로 탄압했기 때문이라면서 소련을 한층 더 높은 도덕수준으로 재건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1989년 소련개혁의 설계자로 알려진 Alexandr Yakovlev도 “우리는 이대로는 더 이상 살 수 없다. 모든 것이 새로 바뀌어야 한다. 우리의 개념, 접근방식, 과거와 미래에 관한 우리들의 생각을 재고해야 한다. 이제까지 살아온 대로는 더 살 수 없다. 창피하다, 참을 수 없다”는 인식이 소련사회에 팽배했다고 술회했다.
당시 고르바초프를 지지했던 개혁론자들은 소련국민들이 갈수록 심해지는 부패에 대한 혐오, 뻔뻔한 도적질, 올바른 삶을 저해하는 무법이 판을 쳤기 때문에 고르바초프의 개혁 즉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하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정신적인 노예제도의 재현에 영향을 받지 않을 “자유인”을 만들어내야 소련혁명이 성공한다고 보았다. 경제문제보다는 독재체제의 인권유린을 더 중시했다.
한편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도 유사한 경향이 엿보였다. 자스민 혁명이 맨 먼저 시작된 튀니지의 경우 빵보다는 인간의 존엄(Dignity before Bread)이 큰 공감과 대중 참여를 이끌어냈다. 과일노점상을 하던 Mohamed Bouazizi가 관권의 탄압에 항거하다가 분신한 사건이 튀니지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집트나 리비아에서도 반부패, 불법, 불공정이 혁명의 구호였다. 이집트의 무바라크나 튀니지의 벤 알리, 리비아의 카다피 모두가 1인 장기집권과 독재, 부정부패, 경찰을 앞세운 감시와 자유억압으로 정권을 지키다가 결국 대중항거 앞에 무너지고 말았다.
소련의 경우 스탈린체제의 청산문제는 위로부터 시작된 개혁이었지만 기존체제, 즉 구체제(Ancient Regime)에 대한 대중의 저항은 이미 존재해왔다. 브레즈네프가 제한주권론을 내세어 무력진압을 자행한 체코의 봄 역시 당시 체코지도자 두브체크가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로의 개혁을 추구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소련에서 1989년에 최초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공산당 이외의 정당의 합법화, 선거를 통한 경쟁에 대한 지지가 압도적이었고 건전한 경제는 개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허용해 줄때 가능하다는 시장경제선호도가 1989년 56%에서 1990년에는 64%로 올라갔다. 70년 이상의 일당독재와 국유배급 경제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소련모델은 이미 시효가 끝났던 것이다.
3.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격변과 혁명이 사전에 해당분야의 전문가들의 누구에 의해서도 예견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결국 학문은 사건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그 전말을 뒤늦게 파헤치고 정리하는 기능밖에 못한다는 미네르바의 부엉이임이 옳다는 것을 절감케 한다. 인간사에는 학자나 전문가들이 예측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항상 변화의 싹이 움터 자라고 있다. 다만 사람들이 쉽게 알아보지 못할 뿐이다.
봄꽃은 섭씨 15도가 되면 피게 마련이다. 14.5도에서도 피지 않고 꼭 15도가 될 때 핀다. 물도 100도가 되어야 비로소 끓는다.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임계질량(Critical Mass)이론이다. 그러나 사회과학에서는 이러한 실험이 불가능하다. 역사적인 유추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예측이나 예견이 없어도 변화는 일어났고 변화의 불씨는 자라고 있다. 대개의 경우 역사적인 큰 사건들은 우리의 광복의 역사처럼 전조는 있지만 예고 없이 돌연히 발생했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하면 평양의 봄도 그 씨앗이 분명히 자라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러시아나 중동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부정, 불법, 부패에 맞설 주체가 내부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위로부터건 아래로 부터건 내부에서 변혁의 주체가 형성되었다. 소련에서는 Khrushchev나 Gorbachev같은 지도층이 소련인민의 노예화를 초래한 스탈린체제개혁의 주체가 되었다. 중국에서도 사상해방과 위민정치(爲民政治)를 내세우는 등소평이 개혁을 주도한 지도층이었다. 위로부터의 혁명(Revolution von Oben)이다.
이러한 위로부터의 개혁과는 달리 아래로 부터의 혁명(Revolution von Unten)도 있다. 폴란드에서의 자유노조운동이 그 대표적인 예이고 동서독을 통일에 이르게 한 동독주민들의 동독탈출운동, 양독통합을 위한 국민투표운동역시 아래로부터 일어난 운동이었다. 올봄 이집트의 Tahrir광장과 튀니스의 Casba Plaza를 기득 채운 민중들은 이 지역의 혁명이 위가 아닌 아래로부터의 혁명임을 웅변한다. 현시점에서 볼 때 중동과 북아프리카의 경우 인민참여의 강도와 성격상에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성공의 열매를 거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카다피의 리비아는 부족갈등이 반독재투쟁과 엉켜 있어 성격규정이 용이치 않지만 역사의 시간표는 민주화를 위한 변화의 소용돌이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특히 외세의 사주(使嗾)가 아닌 인민들 스스로의 결단과 헌신으로 투쟁이 전개되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를 향한 역사발전의 전형적 모습이 여기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4.
그러나 오늘의 북한에서는 위로부터나 아래로 부터의 개혁을 주도할 주체가 눈에 띄지 않는다. 또 이러한 변화를 강조할 학자도 사상가가 있다는 이야기조차 들리지 않는다. 동구라파의 경우 체코의 오타시크나 하벨은 유명한 개혁사상가였다. 소련에서도 안드레이 사하로프나 솔제니친 같은 체제저항지식인들이 나왔다. 물론 북한에서도 수많은 탈북자가 쏟아져 나오는 것으로 보아 개혁의 소망을 품은 학자나 문인이나 사상가도 없지 않았겠지만 북한정권은 그러한 싹마저 철저히 차단할 통제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탈북만이 유일한 투쟁방식이 되었다.
현재까지 북한을 탈출하는데 성공, 한국에 정착한 사람들이 2만 명을 넘어서고 있다는 사실은 평양에도 바야흐로 변화가 임박했다는 징조이다. 동독을 탈출하는 사람들이 마침내 동서독간의 철의 장막이었던 베를린 장벽을 뚫었던 것처럼 북한도 이제 변화의 일보 전에 와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유감스럽고 안타까운 것은 탈북의 에너지가 아직까지 체제변혁의 에너지로 전환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빵보다는 인간의 존엄이나 자유가 절실하다는 민중의 각성이 일어나기에는 북한의 발전단계가 현재 동구나 중동이나 북아프리카보다는 한 차원 낮은 단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지금 북한의 문제는 빵이냐 자유냐가 문제가 아니라 굶느냐 먹느냐가 문제로 되는 상태이다. 3대로 이어지는 세습독재체제하에서는 중국의 등소평이나 러시아의 고르바초프처럼 새로운 개혁철학을 내놓을 지도자가 나올 수 없다.
오히려 인민궁핍을 세습체제유지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측면도 엿보인다. 그간 김대중, 노무현 양 정권은 통일정책이라기보다는 분단체제 유지관리정책의 하나로 김정일 정권의 안정을 지원하는 이른바 햇볕정책을 구사했다. 8조원 가까운 돈을 김정일 정권의 안정과 대남군사도발 역량을 강화하도록 지원했을 뿐 북한 동포들의 식생활 해결이나 민생개선을 위해서는 내놓을만한 지원 실적이 전무하다. 중국은 2000만 달러로 대안유리공장을 건설해주고 큰 생색을 내지만 한국이 지원한 80억 달러는 어디에 쓰였는지 용처가 밝혀지지 않았다.
현시점에서 우리가 북한이 참으로 변하기를 원한다면, 북한 동포들이 더 자유로워지기를 원한다면, 그리하여 북한 땅에서도 인권이 숨 쉴 여지가 생기기를 바란다면 북한의 현재의 발전수준을 최소한 식생활을 해결할 수준까지 끌어올리도록 지원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제 북한정권이 더 이상 인민 궁핍을 통치의 수단으로 삼지 않도록 주변국들과 협력하여 국제사회의 보장을 확보하면서 대북식량지원을 적극 모색해야 할 때에 이르렀다.
‘자유보다 빵’이 중요한 나라를 ‘빵보다 자유’가 중요한 나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한 북한의 온도계는 항상 임계질량(Critical Mass)을 밑돌 것이다. 안보문제로서의 천안함 폭침사건과 연평도 포격사건을 인도적 차원의 대북식량지원문제와 연결시키는 것은 명분상 옳다. 그러나 남북한관계를 통일 쪽으로 바꿔 가야할 우리 한국의 주도적 책임의 윤리에서 생각한다면 인도적 차원의 대북지원만은 어떠한 조건도 내걸지 말고 추진되어야 할 시급한 과제로 정의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변화의 불씨를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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