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이희아(李喜芽)의 베이징 연주회를 끝마치고 

이희아(맨오른쪽)와 어머니 우갑순 여사(중앙)

2011년 11월 19일 저녁 7시30분 베이징 세기극장(世紀劇院)대강당에서 열린 이희아 피아노 연주회는 한마디로 자리를 함께한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과 충격을 안겨준 일대사건이었다. 하나님이 창조한 생명은 그것을 간절한 기도 속에서 갈고 닦으면 그것이 어떤 형태의 것이라 하더라도 보석처럼 번쩍이는 생명으로 거듭난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자리에 참석하기 전에 이희아라는 피아니스트가 손가락 넷 밖에 없는 장애인이라는 이야기만 듣고 왔는데 막상 무대 위에 나타난 이희아는 양다리와 발도 없고 무릎으로만 걷는 장애인 중의 장애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인사말에서 자기 딸을 세계 최단신의 피아니스트라고 설명했지만 무릎발로 무대 위를 걸어 나오면서 청중들에게 밝은 미소를 짓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날 밝은 표정으로 무대로 나와서 청중들에게 인사를 하는 이희아의 어머니를 쳐다보면서 과연 우리 인류가운데 저런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잘 믿기지 않았다. 중증 장애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저런 희아를 낳은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호모사피엔스로서의 인간은 직립 보행하는 유인원(類人猿)에서 그 첫 모델을 찾는데 희아는 인간으로 인정받기 힘든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났다. 양다리와 발이 없고 손가락도 한 손에 두 개씩밖에 없는 아이를 누가 사람으로 인정할 것인가. 과연 희아 같은 애기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존재로 보일 것인가.

깊은 신앙의 눈으로 볼 때에만 희아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 우갑순 여사는 사람 같지 않게 태어난 희아 아기를 자기의 사랑하는 딸로 받아들였고 그녀를 온 지성으로 키우고 가르쳐서 오늘의 베이징 대극장에서 1700여명의 청중 앞에서 베토벤과 쇼팽과 모차르트를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로 길러낸 것이다. 또 가장 처절한 불행을 안고 태어난 딸을 잘 키워 하나님을 향하여 영어로 Amazing Grace를 부르는 음악인으로 키워 낸 것이다. 통속적 의미의 인간승리라는 표현으로는 그 의미설명이 한참 모자랄 위대하고 숭고한 어머니 사랑의 극치였다.

피아노 앞에 앉은 희아의 표정은 시종 맑고 밝았다. 베토벤의 “열정”을 연주할 때는 청중들에게까지 힘이 느껴질 정도로 강하게 건반을 쳤다. 특히 쇼팽의 즉흥환상곡은 열손가락이 다 같이 빠른 속도로 작동해야 제대로 연주가 되는 곡인데 네게의 손가락을 빨리 움직여 작곡가의 취지를 애써 살려내 보이는 그녀의 연주 앞에 청중들은 뭉클한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날 연주회장에는 피아노를 배우는 자녀를 가진 부모들이 자녀와 함께 많이 참여했다. 모든 면에서 희아 보다 좋은 여건에서 피아노를 배우는 자녀들에게 이날의 연주는 놀라운 충격일 것이다. 어느 면에서는 희아 보다 더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었을지도 모른다. 또 피아노 배우기가 어렵다거나 귀찮다고 늑장부리는 아이들에게도 무언가 큰 깨달음을 주었을 것 같다.

 연주회의 끝머리에 희아가 중국청중들을 의식해서인지 찬송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영어로 부를 때 극장 곳곳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참으로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우리 협회가 베이징에서 이 행사를 협찬한 것은 정말 잘 한 일 같다. 희아의 피아노 연주는 그 자체로서도 훌륭했지만 사람으로 대접받기 힘든 존재로 태어난 자기 딸을 가치 있는 사람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의 건강한 신체 가짐을 하늘의 큰 축복으로 감사하게 생각토록 만든 그 어머니의 놀라운 사랑이 더 고마웠고 더 위대했다. 이 어둡고 답답한 세상을 향해 비추는 한줄기의 큰 빛처럼 어머니의 참 사랑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느끼게 해준 이 연주회야말로 참으로 값진 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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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방문중인 리커창 정치국 상무위원과 이영일 총재 

           

한중관계는 전략적 협력 동반자관계인가

  한중문화협회 총재 이 영 일

                       1.
중양국은 2008년 양국관계의 현주소를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로 격상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는 한중양국이 전면적 협력동반자관계로 양국관계를 천명한지 5년만이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의 최초의 중국방문에서 후진타오 중국국가주석과 합의해서 발표한 전략적 협력동반자 론은 한중관계의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들을 한 순간 당황하게 했다. 첫째 오늘의 한중관계가 과연 전략적 파트너관계로 인식될 만큼 성숙된 관계인지를 심사(深思)해야 했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MB의 당시의 첫 방중 분위기가 지난 10월 12일부터 14일까지 행해진 MB의 미국방문과는 달리 매우 썰렁했기 때문이다.

MB의 베이징 도착당일 중국외교부 대변인은 외교관례에 어긋나는 성명을 발표했다. 즉 한미동맹을 냉전의 유물이라고 비난하는 취지의 논평을 발표하고 중국정부가 이 내용을 충분히 논의했다는 것이다.

한중양국관계가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로 격상되었다는 발표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나왔던 것이다. 이 때문에 새로운 관계설정이 양국 정상들 간에 오간 대화에서 단순히 합의된 외교적 수사(修辭)인가 아니면 양국 간에 전략적 상황을 충분히 평가한 토대위에서 도출된 새로운 결론인지를 놓고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2.

돌이켜 보건데 한중양국은 공식적인 국교수립이래 가장 빠른 속도로 각 분야에서 합작과 발전을 심화시켜 왔다. 1992년 수교 직후의 단순수교(單純修交)관계에서 수교 5년 후인 1997년부터는 협력동반자관계(協力同伴者關係)로, 또 다른 5년후 인 2003년경부터는 전면적 협력동반자관계로 협력의 폭과 대상을 넓혔으며 2008년부터는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戰略的協力同伴者關係)로 양국관계가 발전하고 있다.

동반자관계, 중국어로 허반콴시(伙伴關係)라는 표현은 중국인들에게는 익숙한 표현이고 특히 중국외교에서는 동반자관계 앞에 여러 가지 접두어(接頭語)를 붙여 국가 간의 관계를 표현한다. 예컨대 프랑스와의 관계는 건설적 협력동반자 관계라고 말하는가 하면 일본이나 미국은 전략적 동반자관계라고 표현한다. 이처럼 협력적(協力的), 건설적(建設的), 전략적(戰略的)이라는 접두어(接頭語)들을 사용하는데 그 정확한 의미는 외부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필자는 동반자관계(同伴者關係)란 동맹(同盟)과는 구별되면서도 양국이 대내외적으로 서로 협력해나갈 명분과 수준을 나타내는 말로 이해되며 아울러 전략적 동반자란 자국이 보호해야 할 국익가운데 전략적 차원에서 협력이 요구되는 파트너일 것이다.

그러면 현재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로 알려져 있는 한중관계의 현황은 어떠한가. 필자는 오늘의 한중간의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는 한중양국이 현재 협력하고 있는 수준과 범위만이 아니라 앞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협력의 목표까지를 내다보는 표현으로 생각한다. 현재 한중협력의 수준은 전략적 파트너라고 말하기에는 다소 상황이 덜 성숙했지만 한국의 세계정치에서의 영향력 증대는 한중간의 전략적 협력이 불가피해질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최근 중국에서 미국전문가로 알려진 칭화대학(淸華大學)의 추슈롱(楚樹龍·55) 교수는 한중관계의 현 수준을 이야기하면서 "현재 한국과 중국이 기초적인 전략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고 해도 동일한 전략적 우려나 이해를 공유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한·중 사이에 '전략적 파트너십'은 존재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나 필자는 전략적 파트너십이 존재하지 않는다기보다는 전략적 협력은 한국의 전체적 역량에 비추어 이미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본다.

                                                         3.

한중관계는 엄격히 법리적 견지에서만 보면 전략적 파트너십이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현재 한미양국은 한미 상호방위조약 이라는 군사동맹에 입각, 미군을 한국에 주둔시키고 있으며 중국과 북한은 1961년 이래 중조(中朝)상호원조 및 우호협력조약에 근거하여 체약국의 일방이 침략을 받으면 즉각 군사원조를 제공키로 한 군사동맹을 체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휴전협정이 정치적 수준의 협정에 의하여 새로운 협정으로 대체될 때까지는 한미양국을 일방으로 하고 북중양국(北中兩國)을 타방으로 하는 휴전협정체제가 유지되는 것이다. 따라서 협정의 쌍방은 형식논리로만 본다면 문서상 적대관계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중양국이 전략파트너가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반도 휴전체제에 대한 재정의(再定義)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이러한 법률문제는 사후에 해결해야할 과제로 유보한 가운데 우선 미국과는 1979년 국교를 정상화했고 1992년에는 한국과도 수교했다. 휴전협정서명당사자의 한 축인 중국이 휴전협정이 엄존하는 상황에서 한국을 전략적 파트너로 인정한 것은 중국이 내린 현 시기의 자국의 전략상황에 대한 총체적 판단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현재 중국은 자국의 경제나 안보상황을 대국(大國)으로 커가는 축력기간(畜力其間)으로 정의하고 있다. 국가발전을 위한 주변정세의 안정화가 필요하고 이런 측면에서 한국이 갖는 전략차원의 역할을 올바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지난 시기 일본의 재무장 가능성을 우려할 때는 한미군사협력을 긍정했으나 최근 중국은 자국의 국력신장에 자신감을 얻으면서부터 동아시아에서 자기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미국과의 직접 대결은 자제하면서도 은근히 동아시아에서 미국이 누린 영향력의 범위를 재분배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이러한 시기에 MB외교가 한미동맹을 강화하는 한편 국제정치차원에서도 한국의 경제적인 영향력이 확대되어 감에 따라 한국을 전략적 파트너로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국의 G20회의 주최, 핵 안보정상 회담추진, 중국제1의 수출입국임과 동시에 투자국인 현실도 중국은 충분히 감안했을 것이다.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미동맹에 입각한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이 한미 간에 합의되고 앞으로 2015년부터는 작전 지휘권이 한국군에로 이관될 것이라는 전망에서 보면 중국은 한국을 전략적 파트너로 인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이 천안함 사건이나 연평도 사건에서 보인 태도의 배경은 무엇일까. 혹자는 중국의 태도를 북한 감싸기로 보는 견해가 다수이지만 과연 그럴까. 필자는 중국의 태도가 북한 감싸기라기보다는 자국의 국익실현을 위한 조치의 결과로 본다.

천안함 사건의 경우 만일 중국이 천안함 공격을 북한의 소행으로 보는데 동의한다면 현재의 유엔헌장이나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거, 한미양국이 자위권발동으로 북한에 단행할 보복공격을 중국은 반대할 수 없을 것이다.

중국은 이런 난처한 입장을 피하면서 서해(西海)에서의 전쟁발발로 당시 샹하이(上海)에서 개최한 엑스포를 망치지 않기 위해 북한의 소행을 고의로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국익을 위한 조치가 북한을 감싸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휴전체제가 평화체제로 전환된 상황이었다면 중국의 태도는 다를 수 있었을 것이다.

                                                     4.

현시점에서 필자는 중국이 한국을 공식적으로 전략적 협력파트너라고 밝힌 것을 중시한다. 앞으로 한중양국이 전략적 협력 동반자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양국 간에 몇 가지 분야에서 선행되어야 할 이해(理解)의 영역(領域)이 있다. 첫째로 북한을 보는 시각(視角)차이를 좁히는 것이며 둘째로는 한미동맹에 대해서도 양국 간에 존재하는 시각차를 상호이해로서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먼저 한국의 북한에 대한 시각을 말해보자. 한국은 하루라도 빨리 북한이 개혁개방노선을 선택하여 중국처럼 크게 발전하기를 희망한다. 한국은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북한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식생활문제를 해결할 수준(溫飽段階)의 경제발전을 달성하고 또 달성하도록 지원할 것임을 북측에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정권세습(政權世襲)을 추구하기 때문에 중국에서의 등소평(鄧小平)지도자,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書記長)같은 개혁(改革)마인드를 가진 새로운 지도자가 출현할 길이 없다. 전임자(前任者)의 정책과 노선을 비판하고 개혁할 수 없는 곳에서는 사실상 개혁개방이 불가능하다.

다음 우리 한반도처럼 땅이 좁고 인구가 조밀한 곳에서는 안보를 위해 핵폭탄, 장거리 탄도 미사일, 항공모함 같은 전략무기를 가질 필요가 없다. 이런 무기들은 유지비용이 너무 과다, 국민들의 복지를 희생시킬 뿐만 아니라 주변 국가들의 안보 불안 심리를 자극, 개입과 간섭을 불러들인다. 특히 핵보유시도는 핵 비확산이라는 국제법위반 행위이다. 북한의 핵 보유시도가 없었더라면 미중일러(美中日露) 4개국이 6자회담을 통해 한반도문제에 개입할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한미동맹문제도 살펴보자. 우리 한국에게는 한미동맹관계가 한중관계에 못지않게 중요한 국제관계이다. 지금의 한미동맹은 북한의 침략책동에 대한 것을 제외한다면 결코 어느 특정 국가를 겨냥하는 군사동맹이 아니다. 남북한 간의 군사충돌을 방지하는 억지력임과 동시에 테러방지나 환경개선, 기후변화 등 글로벌 시대의 요구를 반영하는 동맹으로 변화, 발전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최근 국력신장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에서 발언권을 높이면서 서해를 자국안보의 요충지로 선언하고 한미군사동맹이 자국안보에 대한 위협이라고 한다. 그러나 변한 것은 한미동맹이 아니라 한미동맹을 보는 중국의 태도이다.

한국은 한미동맹을 한국의 건국, 생존과 발전을 위해 유익한 동맹으로 인식하고 한미협력관계의 굳건한 유지를 확고한 외교원칙으로 삼고 있다. 우리는 중국이 한미 간에 역사적으로 형성되어온 오늘의 한미동맹관계의 존재를 존중하고 긍정하는 토대위에서 한중관계를 현재보다 더 긴밀히 발전시켜나가기를 원한다. 이러한 두 가지 관점을 중국이 수용할 때 한중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는 더한층 활성화될 것이다.

요즈음 일부 학계가 연미화중(聯美和中)을 말하면서 중국에의 편승을 강조한다. 그러나 중국의 축력기간은 생각보다 오래 걸릴 수 있고 다음 세기까지 지연될 수도 있다. 또 지금 쇠퇴하는 것 같아 보이는 미국의 영향력도 예상하는 것만큼 쉽게 약화되지 않을 수 도 있다. 영국 Financial Times의 칼럼니스트 Martin Wolf가 중국을 설익은 강대국(premature superpower)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경제개발을 서둘러야 할 수준인데도 허장성세로 국제적 영향력을 키우고 있는 측면을 꼬집은 것이다. 올바른 판단과 전망을 가지고 한미관계와 한중관계를 잘 관리해야만 우리는 숙원으로서의 평화와 통일성취의 길을 뚫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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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曺祥鉉 장로님 1주기 추모음악제에서

 

내가 조상현 장로님의 조사를 쓴지가 벌써 1년이 지났다. 작년 10월 29일 우리 곁을 떠난 그 분을 추모하는 음악제가 경동교회 본당에서 예배와 함께 열렸다. 이 자리에는 유족으로 미망인 김순옥 권사와 조영방, 조영미 두 딸, 그리고 그 분의 음악계의 옛 동료와 제자, 경동교회의 교우들이 참석했다.

 

나는 고인의 경력가운데 제12대 국회의원의 경력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분의 삶의 전부가 음악이었기 때문에 불행히도 그를 추모할 정치인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함께 의정생활을 했던 사람으로서 경동교회를 1958년부터 출석, 그 분을 기억하고 그 분을 존경했기 때문에 비음악인이지만 그의 정치경력의 증인자격에서 이 자리에 꼭 참석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이 자리에 나왔다.

 

박종화 목사님이 추모예배를 집례했다. 나는 예배시간에 평소 조 장로님이 즐겨 불렀다는 찬송 146장 (저 멀리 푸른 언덕에)과 183장(빈들에 마른 풀같이)을 열창함으로써 내 나름의 추모의 념을 표현했다. 박재윤 장로님의 추모기도는 기도문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시편(詩篇)처럼 듣는 이들의 마음속에 깊은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박수길 장로님의 사회로 시작된 추모음악제는 내가 본 추모음악제중 가장 짜임새 있는 음악제였다. 이 자리에 나온 제자들과 친지 음악인들은 하나같이 한국 음악계의 중진들로 음악교육에 헌신해온 조 장로님의 생애의 업적을 참으로 기리는 분위기였다. 독창, 2중창, 4중창, 합창은 모두 수준이 국내최상급이었고 생전에 조 장로님이 애창했던 곡들을 불렀다.

 

나에게 이날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음악보다는 조 장로님의 시와 수필 낭독이었다. 음악들은 앞으로 다른 곳에서도 들을 수 있겠지만 이 날 낭독된 시와 수필 한 토막은 이 순간 이 자리에서만 들을 수 있는 명품이었다.

 

조 장로님의 시 “귀한 이 순간에....”의 한 토막, “멀고도 험한 길 용케 이까지 왔습니다. 사랑하는 이들 다 헤어지고, 정든 땅도 아껴주던 사람도 보이잖는데 어느새 용케 이까지 왔습니다“를 들을 때 북에 고향을 두고 온 사람의 아픔을 절절하게 말해주었다.

 

또 수필 ”여성의 힘은 하나님 다음 간다“에서는 가사(家事)의 모든 중요한 부분을 아내에게만 맡겨 놓고 살아오면서 아내의 아픔과 괴로움을 진심으로 몰라주었던 나를 새삼 반성시키는 각성제였다. 조 장로님이 자기 아내가 막내 딸 영미에게 꼭 결혼을 해야만 하는가를 물으면서 자기가 다시 태어난다면 결혼을 하지 않고 어두운 곳에 사는 이웃을 돌보면서 한 평생을 지내고 싶다고 토로하는 소리를 들을 때 정말 충격이었다고 수필은 고백하고 있다.

어려운 살림 속에서 성악가 남편을 돌보아야 하고 세 자녀를 유학시켜 조 트리오라는 한국음악계의 지도자들을 길러내느라고 자기의 모든 아이덴티티를 버렸던 한국판 현모양처의 삶을 훌륭히 간증했다. 내 아내에 대한 사무치는 반성을 촉구하는 메시지였다.

조영방, 조영미 자매가 피아노와 비이올린 2중주로 펼친 Grieg 곡은  오늘만의 무료인 수준높은 연주로 조상현장로 내외분의 자녀교육의 열정이 거둔 큰 열매를 추모객들에게 보여주었다.
 

이 날 행사의 마지막을 장식한 경동교회 2부성가대의 찬양은 지휘자 최승한 선생의 집념과 강도 높은 연습 탓인지 놀랄 만큼 훌륭한 연주였다. 추모음악제에서 나오기 힘든 앵콜 송이 나왔다.

 피곤하고 귀찮아서 올까 말까를 망설이다가 참석했는데 너무 잘한 선택이었다. 우리 교회 교우들이 좀 더 많이 참석했더라면 자리가 더욱 빛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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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대학교 중국유학생을 위한 이영일 총재 특강

안녕하십니까 (꺼웨이 따쟈 하오)

                             2011/10/14 호남대학교 국제회관에서 강의

저는 방금 소개 받은 대로 한중문화협회를 운영하고 있는 이영일입니다. 우선 여러분들에게 한중문화협회의 창립배경을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한중문화협회는 1942년 당시 중국의 임시수도 중국의 충칭(重慶)에서 창립되었습니다. 그 당시는 제2차 국공합작이 성공하여 중국국민당과 공산당 간부들이 서로 협력하면서 같은 지역에서 항일투쟁에 복무하는 시기였습니다. 1911년 辛亥革命을 통해 淸나라를 타도하고 중국에 공화정을 수립한 孫文선생은 중국과 친선하는 외국의 민간단체를 모두 문화협회라고 불렀습니다. 中美文化協會, 中蘇文化協會처럼 말입니다.

중국 측에서는 中韓文化協會라고 말하고 한국 측에서는 韓中文化協會라고 부르는 이 단체의 창립에는 깊은 뜻이 담겨있습니다. 그 때 한국은 일본에게 나를 빼앗긴 상태였기 때문에 국가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孫文선생은 한국은 임시정부주도하에 반드시 나라를 되찾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한국의 독립을 지원했으며 그 아들 孫科 씨는 당시 중화민국의 입법원장으로서 父親 孫文선생의 遺志를 받들어 한국에 국가가 없고 임시정부뿐인 상태 하에서도 한중양국민간의 友好協力를 추구하는 韓中文化協會창립을 지원했습니다. 아울러 당시 충칭에 머물고 있던 저우언라이(周恩來) 공산당 지도자도 이 취지에 적극 찬성함으로 해서 中國國民黨, 中國共産黨, 韓國臨時政府가 협력해서 韓中文化協會를 탄생시켰습니다.

따라서 한중문화협회의 창설이야말로 한국의 독립에 대한 중국인민과 지도자들의 가장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결단이었습니다. 현재 제가 이끌고 있는 한중문화협회는 바로 이러한 傳統과 精神을 繼承하고 있습니다.

新中國 성립 후 민간차원에서 중국인민과 우호친선을 도모하는 외국단체를 일괄해서 友好協會라고 불러 이른바 中美友好協會, 中國ㆍ러시아友好協會가 결성되었고 한국에도 韓中友好協會가 있습니다만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중 聯合國으로서 한국의 光復운동을 확실히 지원하고 인정해준 중국의 공헌을 잊지 않겠다는 취지로 오늘날까지 韓中文化協會를 유지시키고 있습니다.

현재 협회는 15개 國內支會와 중국의 8개 지역에 연락소를 두고 있습니다. 아울러 각 지회마다 인권위원회를 설치하여 중국유학생이나 노동자들이 한국에 있는 동안 인권침해를 받지 않도록 법률지원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호남대학교로 유학 온 중국대학생들을 만나기 위해 이 자리에 왔습니다. 아울러 중국유학생들과 한 캠퍼스에서 생활하는 한국학생들과도 함께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잘 아시다시피 한국과 중국은 하늘이 짝 지어준 이웃입니다.

중국이나 한국 속담에 “먼 친척보다는 가까운 이웃”(遠親不如近隣)이 더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과 중국은 바로 이러한 의미의 이웃이라고 생각하는데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한국과 중국은 지리적으로도 山水相連관계라고 표현할 만큼 가까운 이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이 留學地로 한국을 선택한 것을 매우 잘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아시아 대륙에는 44개국이 있습니다만 夏季올림픽을 개최한 나라는 세 나라 뿐입니다.

한국, 중국, 일본입니다. 이 3국간에는 매년 한차례 씩 국가정상들끼리의 만남이 어우러지고 있고 3국간의 협력을 조화롭게 추진해 나갈 사무국도 서울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현재 중국은 1인당GNP는 작년말 기준으로 4328달러이지만 총량GNP는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G2반열에 올랐고 그 뒤를 일본이, 한국은 13위에서 14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나는 앞으로 한중일 3국이 가진 경제력을 통합한다면 오늘날 유럽국가들이 만든 유럽연합(EU)나 미국, 멕시코 카나다가 주축이 된 북아메리카자유무역연합(NAFTA)에 맞대응할 실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동북아시아 경제공동체가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조만간 아시아 대륙에 새로운 경제 블럭이 탄생할 조건이 하나씩 마련되고 있습니다.

미국 달러의 가치가 떨어지자 유럽연합에서는 유로(EURO)라는 국제화폐를 만들었습니다. 현재의 추세대로라면 앞으로 동북아시아에서도 새로운 화폐가 나올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가장 量的으로 큰 위안화가 지역통화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시대에 여러분이 留學國으로 한국을 선택한 것은 너무나 잘한 일입니다. 동아시아시대에 동아시아를 잘 이해하고 이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는 것이야말로 21세기 자기 인생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갈 기반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여러분 모두가 한국전문가가 될 것을 호소하고자 합니다. 각 분야에서 한국전문가로 커나가면 중국을 위해서나 아시아 대륙에서 협력을 증진시킬 꿈나무로 여러분이 쓰이게 될 것입니다.

한국의 역사, 한국의 문화와 습속, 기호를 바로 이해하고 또 한국 속에 많은 친구를 만들어 둔다면 그만큼 여러분이 앞으로 살아나가는데 필요한 자산을 갖게 된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한국 전문가로 성장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여러분들이 비록 힘들지만 한국말을 완전히 익히는 것입니다. 한국어교육원에서 한국말을 배웠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강의를 이해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아직도 강의를 이해하는데 불편을 느끼는 사람도 있습니다.

강의가 귀에 들어오지 않으면 한국생활이 재미없어 집니다. 유학 온 것을 후회하게 될 경우도 있습니다. 또 학생의 신분을 이탈한 행동을 하다가 법적 재재를 받아 추방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한국어를 잘 이해하지 못한데서 생긴다는 것이 조사결과로 나오고 있습니다.

둘째로 학교당국이 중국유학생을 위한 한국어 지도를 더한층 강화해야 합니다. 한국어 수준이 강의를 이해할만한 수준에 오를 때까지 유학생 신분은 주더라도 어학훈련을 강화해야 합니다.

아울러 한국대학생들도 한국어 학습강화를 위해 그들의 동아리에 중국유학생들을 적극 포섭하여 받아들임으로써 아시아에서 함께 사는 공동체 체험을 넓혀나가게 해야 합니다.

앞으로의 세상은 아시아시대 그중에서도 동북아시아가 세계의 중심이 됩니다. 지금 유럽이나 미국은 점차로 쇠퇴일로에 있습니다. 역사의 큰 흐름에서 보면 로마가 중심이 되던 지중해 시대가 가고 영국이 중심이 된 대서양 시대도 끝났습니다.

지금은 미국이 중심이 된 태평양 시대 또는 미국이 주도하는 평화라는 뜻으로 Pax Americana시대라고 합니다. 이 시대가 당분간은 계속됩니다만 전반적인 추세로 보아 미국의 힘도 쇠퇴의 길로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전 세계는 앞으로의 세계는 중국과 한국과 일본이 중심이 되는 동북아시대가 도래하고 그중에서도 가장 빠른 속도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는 중국이 이 지역의 안정과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중국이 주도하는 평화”Pax Sinica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내다보는 사람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시대에 勝者가 되는 것은 여러분 한사람 한 사람이 자기 맡은 분야에서 한국전문가가 되는 것입니다. 한국 유학에서 여러분이성공한다면 그것은 여러분 개인의 성공이 아닙니다. 한국의 성공이고 중국의 성공입니다. 한국과 중국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협력해나갈 길잡이 역할을 여러분들이 도맡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중친선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한국에 유학 온 8만 명 이상의 중국학생들과 70만 중국노동자들이 우선 한국에서 모두 성공해야 합니다. 한국에 유학온 것을 여러분들이 좋은 선택이었다고 말하고 노동자들도 다른 나라에 가서 노동했던 것보다는 한국에 왔기 때문에 자기들 생활이 안정되었고 미래를 위한 기반을 다졌다고 자랑스럽게 회고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중문화협회는 바로 한국에 와있는 중국인들이 한국에 온 것을 후회 하지 않고 한국행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입증하도록 중국인들을 위한 지원활동을 적극 펼쳐나갈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성공하기 빕니다. 또 여러분들이 성공하도록 한중문화협회는 적극 지원해 나갈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건강하시고 유학생활이 행복해지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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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동아일보가 서울시장선거를 보는 입장을 잘 나타내고 있다. 아직도 이념적 접근을 시도하는 것 같다. 시민운동가를 선발할 때는 이념적 접근이 통상적 방법인데 좀더 세련될 필요가 있다. 항상 동일한 접근에는 문제가 따르기 때문이다.

2011-10-10 동아일보

박원순 시장의 서울시’가 탄생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어제 발표된 정책공약도 중요하지만 그 정책을 추진하고 집행할 사람들이 누군지는 더 중요하다. 박원순은 직접 감동적인 프레젠테이션을 하면서도 기이하게 서울시가 ‘시민참여형 민주정부’로 공동 운영된다는 점은 밝히지 않았다. 그가 야권 통합후보 경선에서 이긴 3일, 박원순 측은 경선에 참여한 민주당 민주노동당 및 ‘시민사회’와 함께 “신뢰 연대 호혜 원칙에 따라 서울시를 시민참여형 민주정부로 함께 운영한다”는 공동 운영 합의문에 서명했다.

여기서 시민사회란 1000만 서울시민이 아니라 한국진보연대, 혁신과통합, 희망과대안을 말한다. 서명한 이들을 보면 ‘박원순 서울시’는 단순히 시정을 바꾸는 게 아니라 광우병 촛불시위 세력과 친노(친노무현) 세력이 손잡고 ‘새로운 시대’의 토대를 닦을 것으로 예상된다. 백승헌 박석운 김기식 문성근 진보연대 박석운 공동대표는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촛불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됐던 인물이다.

2006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시애틀 원정시위, 2005년 맥아더 동상 파괴시위도 주도한 시위전문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8년 ‘등록금넷’을 만들어 대학생들을 사로잡고, 2010년엔 곽노현 서울시교육감 공동선거대책본부장으로 후보 단일화에 깊숙이 관여하는 등 정치 감각도 뛰어나 보인다. 親北 시위세력에 서울 맡긴다. 진보연대는 2007년 1월 1일 북한이 발표한 ‘올 대선에서 반보수 대연합을 구축해 한나라당을 매장시켜야 한다’는 신년공동사설에 화답하듯, 1월 9일 준비모임을 거쳐 9월 출범했다.

친북 성향의 민족해방(NL) 단체 중심이다. 강령에 명시된 ‘교육 주거 시장화 반대’는 이번 박원순의 공약에 상당 부분 들어갔다. 앞으로 한미 FTA 폐지, 미군 완전 철수, 국가정보원과 국가보안법 폐지 같은 강령은 어떻게 반영될지 궁금하다. 혁신과통합 공동대표로 서명한 김기식 씨 역시 NL 계열 운동권 출신이다. 오랜 참여연대 활동을 거쳐, 야권연합정당을 통한 내년 총선과 대선 승리를 목표로 하는 이 단체에 합류했다.

혁신과통합엔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 한명숙 이해찬 전 총리, 문성근 국민의행동 대표 등 친노 세력뿐만 아니라 조국 서울대 교수, 시인 안도현 등 지식인과 문화예술인이 모여 있다. 자발적인 것처럼 보이는 시위도 사람을 모이게 하려면 조직의 힘이 필요하다고 최근 워싱턴포스트는 지적했다. 특히 지식인과 문화예술인, 엔터테이너 같은 문화자본이 있어야 메시지를 증폭시킬 수 있다고 했는데 혁신과통합이 바로 그렇다.

김 씨는 혁신과통합 출범을 앞두고 8월 30일 기자설명회에서 “지루한 후보 단일화 협상으로 국민을 짜증나게 해선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며 단일화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경로와 과정에 대해 고민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당시는 이미 혁신과통합에서 박원순을 시민후보로 내세울 것이라는 소문이 돌던 때였다. 9월 1일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기대학원장의 출마 의사설이 나온 뒤 백두대간을 종주하던 박원순이 5일 문재인 측에 “한명숙을 만나 시장선거 문제를 논의하고 싶다”고 연락을 하고 △6일 오후 2시 안철수-박원순 회동 △3시 박원순-한명숙-문재인 단일화 협력 △4시 박원순으로의 단일화 발표 △7시 혁신과통합 발족식까지 숨 막히게 전개된 드라마는 그래서 가능했던 듯하다.

박원순 서울시가 탄생하면 한때 ‘폐족’을 자처했던 친노 세력은 서울지방공동정부부터 사실상 재집권을 시작해 내년 총선과 대선을 기대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희망과대안은 좌파시민단체의 정치 참여를 위해 2009년 발족했다. 공동정부에 서명한 백승헌 공동대표는 좌파 법조계 인사의 결집체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전 회장으로 곽 교육감과 한 전 총리 재판에서 변호를 맡고 있다.

공교롭게도 세 집단의 공동대표들은 곽노현과 연(緣)이 깊다. 그가 참여연대 발기인부터 집행위원 운영위원을 두루 지냈기 때문이다. 곽노현의 서울시교육청은 자기 사람으로 각종 위원회를 구성해 해당 부처를 제치고 주요 정책을 결정했다. 공동정부 합의문에 따르면 서울시도 시장 직속으로 설치될 서울시정운영협의회를 통해 같은 식으로 운영될 공산이 크다. 親盧부터 곽노현까지 부활할까 국방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정권 유지가 최대 목표인 북의 김정일에게는 적화통일보다 2012년 친북 정권 수립이 더 유리할 수 있다”고 했다.

물론 서울시에 국방과 외교권은 없다. 하지만 서울 공동정부에는 친북 인사가 대거 참여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한 운동권 출신은 “박원순이 종북 세력을 너무 모르는 것 같다”며 386의 도구였던 노무현처럼 박원순은 더 과격한 세력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당장 협의회 결정에 따라 서울광장을 무제한 개방하고 곽노현을 위한 촛불집회부터 한미 FTA 반대, 국정원 서울 철수요구 촛불집회가 서울을 마비시킨다면 정말 불안한 시대가 시작될지 모른다. 박원순의 촛불 서울시 2011-10-10 <동아일보> 박원순 시장의 서울시’가 탄생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어제 발표된 정책공약도 중요하지만 그 정책을 추진하고 집행할 사람들이 누군지는 더 중요하다. 박원순은 직접 감동적인 프레젠테이션을 하면서도 기이하게 서울시가 ‘시민참여형 민주정부’로 공동 운영된다는 점은 밝히지 않았다. 그가 야권 통합후보 경선에서 이긴 3일, 박원순 측은 경선에 참여한 민주당 민주노동당 및 ‘시민사회’와 함께 “신뢰 연대 호혜 원칙에 따라 서울시를 시민참여형 민주정부로 함께 운영한다”는 공동 운영 합의문에 서명했다. 여기서 시민사회란 1000만 서울시민이 아니라 한국진보연대, 혁신과통합, 희망과대안을 말한다.

서명한 이들을 보면 ‘박원순 서울시’는 단순히 시정을 바꾸는 게 아니라 광우병 촛불시위 세력과 친노(친노무현) 세력이 손잡고 ‘새로운 시대’의 토대를 닦을 것으로 예상된다. 백승헌 박석운 김기식 문성근 진보연대 박석운 공동대표는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촛불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됐던 인물이다. 2006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시애틀 원정시위, 2005년 맥아더 동상 파괴시위도 주도한 시위전문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8년 ‘등록금넷’을 만들어 대학생들을 사로잡고, 2010년엔 곽노현 서울시교육감 공동선거대책본부장으로 후보 단일화에 깊숙이 관여하는 등 정치 감각도 뛰어나 보인다. 親北 시위세력에 서울 맡긴다. 진보연대는 2007년 1월 1일 북한이 발표한 ‘올 대선에서 반보수 대연합을 구축해 한나라당을 매장시켜야 한다’는 신년공동사설에 화답하듯, 1월 9일 준비모임을 거쳐 9월 출범했다.

친북 성향의 민족해방(NL) 단체 중심이다. 강령에 명시된 ‘교육 주거 시장화 반대’는 이번 박원순의 공약에 상당 부분 들어갔다. 앞으로 한미 FTA 폐지, 미군 완전 철수, 국가정보원과 국가보안법 폐지 같은 강령은 어떻게 반영될지 궁금하다. 혁신과통합 공동대표로 서명한 김기식 씨 역시 NL 계열 운동권 출신이다. 오랜 참여연대 활동을 거쳐, 야권연합정당을 통한 내년 총선과 대선 승리를 목표로 하는 이 단체에 합류했다. 혁신과통합엔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 한명숙 이해찬 전 총리, 문성근 국민의행동 대표 등 친노 세력뿐만 아니라 조국 서울대 교수, 시인 안도현 등 지식인과 문화예술인이 모여 있다.

자발적인 것처럼 보이는 시위도 사람을 모이게 하려면 조직의 힘이 필요하다고 최근 워싱턴포스트는 지적했다. 특히 지식인과 문화예술인, 엔터테이너 같은 문화자본이 있어야 메시지를 증폭시킬 수 있다고 했는데 혁신과통합이 바로 그렇다. 김 씨는 혁신과통합 출범을 앞두고 8월 30일 기자설명회에서 “지루한 후보 단일화 협상으로 국민을 짜증나게 해선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며 단일화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경로와 과정에 대해 고민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당시는 이미 혁신과통합에서 박원순을 시민후보로 내세울 것이라는 소문이 돌던 때였다. 9월 1일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기대학원장의 출마 의사설이 나온 뒤 백두대간을 종주하던 박원순이 5일 문재인 측에 “한명숙을 만나 시장선거 문제를 논의하고 싶다”고 연락을 하고 △6일 오후 2시 안철수-박원순 회동 △3시 박원순-한명숙-문재인 단일화 협력 △4시 박원순으로의 단일화 발표 △7시 혁신과통합 발족식까지 숨 막히게 전개된 드라마는 그래서 가능했던 듯하다. 박원순 서울시가 탄생하면 한때 ‘폐족’을 자처했던 친노 세력은 서울지방공동정부부터 사실상 재집권을 시작해 내년 총선과 대선을 기대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희망과대안은 좌파시민단체의 정치 참여를 위해 2009년 발족했다. 공동정부에 서명한 백승헌 공동대표는 좌파 법조계 인사의 결집체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전 회장으로 곽 교육감과 한 전 총리 재판에서 변호를 맡고 있다. 공교롭게도 세 집단의 공동대표들은 곽노현과 연(緣)이 깊다. 그가 참여연대 발기인부터 집행위원 운영위원을 두루 지냈기 때문이다. 곽노현의 서울시교육청은 자기 사람으로 각종 위원회를 구성해 해당 부처를 제치고 주요 정책을 결정했다. 공동정부 합의문에 따르면 서울시도 시장 직속으로 설치될 서울시정운영협의회를 통해 같은 식으로 운영될 공산이 크다.

親盧부터 곽노현까지 부활할까 국방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정권 유지가 최대 목표인 북의 김정일에게는 적화통일보다 2012년 친북 정권 수립이 더 유리할 수 있다”고 했다. 물론 서울시에 국방과 외교권은 없다. 하지만 서울 공동정부에는 친북 인사가 대거 참여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한 운동권 출신은 “박원순이 종북 세력을 너무 모르는 것 같다”며 386의 도구였던 노무현처럼 박원순은 더 과격한 세력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당장 협의회 결정에 따라 서울광장을 무제한 개방하고 곽노현을 위한 촛불집회부터 한미 FTA 반대, 국정원 서울 철수요구 촛불집회가 서울을 마비시킨다면 정말 불안한 시대가 시작될지 모른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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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2011년 6월29일 하오 6시 民正黨 전직의원들의 모임인 민우회에서 행할 이영일 한중문화협회 총재의 강연안이다


 한반도와 중국문제

                                                                                   한중문화협회 총재 이 영 일

                                                                    1.

중국과 북한의 관계는 지금 두 차원에서 관계가 이어져 오고 있다. 하나는 공산권 특유의 국가 대 국가외교 차원과 당 대 당(즉 동지 대 동지관계)차원에서 양자관계가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국가대 국가 관계에서 보면 중국은 북한의 핵개발이나 개혁개방거부정책에 비판적이다. 유엔안보리의 대북제재결의안에 중국이 두 차례나 찬성한 것은 국가대 국가차원의 외교에서이다.

그러나 중국은 당 대 당 차원에서는 북한의 김정일 집단을 혈맹으로 대접한다. 장쩌민 주석 당시 1회,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취임한 이후 김정일은 6회 중국을 방문했는데 이런 방문 모두가 중국 외교부 아닌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의 초청과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이 관행은 지금도 지속 유지되고 있다.

 

지난 5월 김 위원장의 제7차 방중(후진타오 주석 재임 중 1년 사이에 3회, 작년 5월 ,8월, 금년 5월)도 중공의 초청으로 방문한 비공식 방문이었다. 양국 정상 공동성명에는 ‘후진타오(胡錦濤) 중공 총서기, 국가주석 초청에 따라 김정일 노동당 총비서, 국방위원회 위원장이 방문했다’고 나온다. 올해 1월 후 주석의 미국 방문, 2009년 11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중국 방문에서는 후 주석 타이틀로 중공 총서기란 것을 붙이지 않았다. 중-미 정상의 만남은 국가 대 국가의 만남인 것이다.

베이징 대학 국제관계학원의 왕지스 교수는 중국외교에서 상충하는 도개의 노선 즉 모택동 노선과 등소평 노선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데 기인한다는 것이다.

  2.

 지난 3월 천안함 침몰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도 이 원칙은 지켜졌다. 우선 샹하이 엑스포 개막일에는 중국외교부 초청으로 이명박 대통령과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의장(북한의 국가원수) 중국을 방문, 후진타오 국가주석과 만났다. 그러나 이런 만남이 있은 지 3일 후 김정일은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 초청으로 대련 심양을 거쳐 북경을 방문, 후진타오 국가주석, 원자바오 총리와 당정치국 상무위원 전원과 따로 만나 영접을 받는 의외의 환대를 받았다. 물론 회담내용은 성격상 잘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전문가들의 추론으로는 북중관계의 재조정에 초점이 모아졌다.

 

북한이 자행한 천안함 폭침사건은 중국과 북한관계에 미묘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 사건은 중국을 두 측면에서 크게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하나는 중국이 금년 1월 28일 왕자루이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을 평양에 보내 샹하이 엑스포가 열릴 금년에 연초부터 북한이 서해지역에 해안포를 발사하는 행위를 벌이자 이의 자제를 요구하면서 북한이 필요한 원조제공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러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천안함 폭침사건을 일으켜 중국정부가 심혈을 기울여 추진해 온 상해(上海)엑스포 개막에 난관을 조성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미연합방위체제가 북한을 상대로 국제법상 용인된 자위권을 행사할 경우 중국은 본의 아니게 한반도의 전쟁위기에 휘말릴 수 있었다.

 

이에 분노한 후진타오 주석은 2010년 5월 5일 중국공산당 총서기 자격으로 김정일 조선노동당 총비서를 당 대 당 외교형식으로 중국에 초청했지만 사실상 召唤的 성격이 강한 초청이었다. 이 자리에서 후진타오 주석은 전례 없이 강경한 어조로 이 담판을 벌임으로써 양국관계의 재조정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선 중국은 이번 천안함 사태를 계기로 북한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북한의 행동을 강력히 통제하기 위한 자기요구를 드러냈다. 우선 후진타오 주석은 김정일에게 양국 간에 중요사안의 사전소통을 요구했다. 이는 매사에 중요한 문제는 중국과 사전에 협의하라는 요구였다. 또 원자바오 총리는 외교적인 언사로 중국의 개혁개방을 소개한다고 표현했지만 내용인즉 중국식 개혁개방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한 것이다. 김정일은 이 두 요구를 모두 수용할 것 같은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행동으로 옮길지는 두고 보아야겠지만 쉽지는 않을 것이다.

 

중국은 2006년 10월과 2009년 5월의 북한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 같은 사태에 대해서도 유엔안보리를 통한 대북제재에 소극적으로 동참했을 뿐 북·중 양국관계에서는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천안함 사태에 대해서는 한국이 조사 발표한 북한도발책임을 공인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북한에 대해 문책적 조치를 강구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국익이라는 입장에서는 천안함을 북한이 자행했다고 공인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 군함에 대한 공격은 유엔이 공인하는 자위권행사의 대상으로서의 침략행위이기 때문에 중국이 북한에 의한 천안함 공격을 인정할 경우 한미연합전력에 의한 자위차원의 대응 보복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될 경우 한반도에서는 긴장이 고조되고 중국이 추구하는 주변정세의 안정-특히 샹하이 엑스포기간 중-이라는 국익을 실현하는데 막대한 지장이 있을 것이다. 중국은 현실적 국익에 대한 고려에서 사태의 진실보다는 사태의 결과를 중시하는 입장에서 천안함에 대한 북의 책임에 눈을 감은 것으로 보인다.

                                                                                3.

한편 중국은 북한에 대해서는 국가 대 국가차원에서는 양국관계가 냉전형의 혈맹이 아닌 국가대 국가관계로 바뀌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도 당대 당 차원에서는 혈맹임을 내세워 대북경제 원조를 늘리는 한편, 북한정권의 존속과 안전에 각별한 관심과 지지를 보냈다. 특히 2009년 10월 원자바오 중국총리가 북한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중국은 북한문제와 북핵문제를 분리, 북한정권의 존속에 역점을 두는 경제협력을 강화하고 북한이 중국식의 개혁개방에 나서도록 설득하는데 주력했다.

 

특히 원자바오는 방북 시 마오쩌둥의 아들로서 6.25전쟁 시 전사한 마오안잉의 묘소를 참배했는가하면 작년 한국전쟁 60주년을 기념하는 북한 대사관 리셉션에 참가한 시진핑 군사위원회 부주석은 북중 혈맹을 다시 강조, 눈길을 끌었다. 또 최근에도 한중일 3국 정상회담에서 원자바오 총리는 지난 달 5월의 김정일 초청도 북한의 개혁개방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또 지난 5월의 김정일 방중이후 6월 8일과 9일에는 압록강 하구의 황금평 개발과 두만강 하구의 나진·선봉 공동개발 착공식이 열렸다. 북중 경제관계가 한층 더 긴밀해지고 있다. 최근 북•중관계의 개선조짐을 놓고 국내 학계의 일각에서는 중국이 청진항의 5개 埠頭중에서 1개의 부두를 중국에 장기 조차에 북한이 동의함으로써 태평양으로 뻗어 나올 중국의 전략적 이익을 북측이 받아들인 결과라고 크게 평가하는 견해도 없지 않다.

그러나 필자로서는 북한의 자연붕괴를 방치하는 이익과 북한정권의 붕괴를 막는 이익을 較量 한 결과 북한을 지원해서 김정일 정권을 살리는 것이 중국의 국익에 더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것 같다. 북한문제와 북핵문제를 분리하면서 비핵화정책은 지지하되 그것의 결과로 북한이 붕괴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이 현시점의 중국입장으로 보인다. 또 경제적으로 어려운 지경으로 몰리는 북한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남북한 간에 필연적으로 군사충돌이 발생할 것이며 그것은 중국이 바라는 주변안정이라는 이른바 安隣政策에 불리하다는 것이다. 중국의 한반도 전문가들 간에는 중국정부가 북한의 군사도발이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고 전하는 사람들도 적잖다.

                                                                                    4.

  그간 중국은 한국에 대해서는 경제적 파트너십을 중시, 양국관계를 전략적 협력 동반자관계로 발전시키기로 합의하고 한중수교 20주년이 되는 2012년까지 양국의 교역량을 2000억 달러수준으로 끌어올리는 한편 한중 FTA를 추진키로 하였다.

그러나 MB정권성립 후 중국의 한국에 대한 태도는 그리 달가운 편이 아니다. 우선 중국은 한국이 대미일변도외교를 벗어나지 못하고 중국의 國格에 합당한 대중국정책이 부족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 MB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맨 먼저 미국을 방문한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두 번째 방문 국으로 중국 아닌 일본을 선택한 것에 대해 매우 서운한 느낌을 드러냈다. 중국은 유엔 상임이사국이며 휴전협정 서명국이며 한중교역량이 일본을 훨씬 앞지르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일본보다는 중국을 먼저 방문하는 것이 옳다는 입장이다. 결국 MB가 중국을 방문하는 당일 중국외교부의 천강 대변인이 한미동맹을 냉전의 유산이라는 이례적 성명을 발표한 것으로 유감의 정서를 들어냈다.

 

당시 MB는 방미 후 귀국길에 일본을 방문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한국외교의 편의주의적 해석일 뿐이다. 결국 MB 재임 중 주중대사가 세 번이나 바뀐 것은 우리의 대중국정책이 매우 중요한 시기에 올바로 정립되지 못한 데 기인한다.

 

중국지도층 가운데는 한국정부의 대북정책이 일관성이 부족하다고 말하면서 앞선 정권들의 북한 달래기 정책이 현명했다는 인식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

 

앞으로 한국정부와 민간에서의 대중국설득외교가 매우 중요해지고 있다. 정부는 지금 환경문제와 경제문제에서는 중국과의 협력이 잘 진행되고 있다. 특히 아세안 플러스3을 통해 중국과의 협력이 긴밀해지고 있으며 한중일 3국정상회담의 정례적 개최역시 양국관계 개선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특히 정부의 G20회담과 핵 안보정상 회담의 유치는 중국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의 전략 가치를 증대시켰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에서 크게 부족한 것은 첫째 用中정책개발에 노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우선 친 한 인맥의 구축노력이 취약하다. 정부와 민간인과 경제인들이 협력하여 친한(親韓)인맥을 구축하는데 공을 들여야 한다. 이러한 노력은 대미외교에서보다 중국에서 더 큰 효험을 볼 수 있다.

  둘째로 국내에 유입되어 있는 8만여 중국유학생들을 친한세력으로 키우려는 정책적 노력이 全無하다. 또 십 수만 명을 헤아리는 노동자들에 대한 정책도 분명히 세워야 한다. 이들이 반한감정을 갖고 한국을 떠날 경우 외교적으로는 중국시장 확보라는 장기적 목표에서 볼 때 養虎爲患을 당할 수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셋째로 남북한관계 개선에 중국을 이용하는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 남북한 관계개선과 한중관계 개선을 동시에 도모할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

                                                                                   5.

  중국의 정치지평에 커다란 변화가 예상되고 있다. 2012년 제18차 공산당 대회는 후진타오를 비롯한 모든 지도부가 연령에 걸려 퇴진하고 현재 정치국원으로 연령상의 시효가 남은 시진핑(習近平)과 리커창(李克强)-서열 6위와 7위-가 남아 주석 직을 선출하게 된다. 태자당을 대표하는 시진핑과 투안파이(團派)를 대표하는 리커창 중 1인이 국가주석직을 맡게 되는데 현재로서는 시진핑 부주석이 주석으로 선출될 가능성이 많고 후진타오 계통의 리커창도 만만찮은 지지세를 가지고 있다.

  태자당은 당 고급간부 자제들로서 해외 유학파, 국가나 당의 고위관료, 신 중국에서 치부한 경제인, 인민해방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장쩌민 계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에 반해 투안파이의 리커창은 당내의 서기처와 지방의 성, 시의 당 간부와 전국인민대표대회의 70%, 대중들의 광범한 지지세를 가지고 있으며 후진타오 계가 주류를 이룬다.

 

전문가들은 누가 국가주석 직을 맡더라도 사실상 연립정부형태를 취하게 되어 어느 한 파에서 당직과 관직을 독점하기 힘들 것이라고 한다. 결국 집정당내의 세력 간에 연립이 불가피해질 만큼 중국사회가 분화된 데 기인한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것은 투안파이측이 북한정권에서의 3대 세습을 반대하고 북한의 핵무장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중국의 대북 정책이 현재와 같이 일사분란 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러나 금년 7월1일이 공산당 창당 90돌이기 때문에 이념적 열정이 고조되어 친북정책이 어느 면에서는 강화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중국전역에서 불고 있는 紅歌열풍이 이를 증명한다. 이 분위기가 금년까지는 고조되지만 내년 당 대회를 전후해서는 중국의 북한평가에서 변화가 예상될 것이다. 이념보다는 실용이 앞설 것이라는 관점이다.

  중국을 찾는 한국인들의 연인원은 매년 6백만 명을 넘어서며 중국유학생들도 8만 명이상, 근로자들도 십수만 명에 이르며 교역량도 년 2000억 달러로 북한의 연간 35억 달러와는 비교가 안 된다. 매주 수백 대의 항공기가 중국의 주요도시와 한국을 잇고 있다. 중국의 외교정책이 앞으로 중국인민들의 실생활상의 이익 실현에 더 큰 비중을 두게 된다면 한중관계의 비중은 북•중 관계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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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로부터 둘째가 권원칠 박사, 필자, 량치똥 박사(키큰 분) 

서평: 취엔위엔치와 량치똥의 “패권전쟁”을 읽고

이 영 일 한중문화협회 총재

                                                   1. 

 미국경제가 패권을 중국에게 넘길 것인가. 2008 금융위기 이후 미국경제는 장기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지만 중국경제는 초기의 수출부문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금융위기이전에 못지않은 경제성장을 보이는 가운데 총량GNP에서 일본을 앞지르는 제2의 경제대국으로 급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는 중국을 미국에 버금가는 G2로 중국의 위상을 자리매김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중국의 두 젊은 경제학자가 2008년 금융위기이후 중국경제의 미래보고서라는 단행본을 출판하고 한국어판의 제목을 “패권전쟁”(覇權戰爭)으로 붙여 작년 말 21세기북스에서 출판했다. 일견 이 책의 내용을 읽고 있노라면 제목에 붙은 패권전쟁(覇權戰爭)이 미중간의 패권을 다투는 전쟁이라기보다는 기축통화의 변경을 요구하는 폐권전쟁(幣券戰爭)을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물론 책 명칭은 출판사가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부치는 것이기 때문에 내용과 제목이 전부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대의 흐름과 궤도를 같이하는 명칭부여임에는 틀림없다.

이 책의 두 분 저자중의 한분인 취엔위엔치(權元七)박사는 필자와 10여 년 동안 한중양국간의 현안문제를 터놓고 이야기할 만큼 가까운 관계를 맺어오고 있다. 취엔 박사는 랴오닝성 둥베이(東北)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중국사회과학연구소에서 경제학박사학위를 받은 후 중국 국영기업체를 직접 운영하는 등 실물경제에도 달통하고 미국 하바드 대학의 방문학자로서 국제경제의 흐름을 몸에 익힌 현대 중국의 젊은 엘리트 학자이다. 또한 베이징 대학의 동북아전략연구중심의 이사장으로 왕지스(王緝思)교수와 제휴, 동북아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진 엘리트이다. 량치똥 박사는 나와 개인적으로 친면은 없지만 랴오닝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베이징 사회과학연구원에서 도시경제학을 전공한 소장파 엘리트 학자로 알고 있다.

                                                  2.

이 두 분의 저서는 딱딱한 경제학교과서가 아니다. 이론을 나열하면서 통계표로 내용을 보충, 설명하는 수리중심의 경제서적은 더더욱 아니다. 두 젊은 석학이 나름대로 가진 경제학의 이론과 지식을 동원해서 미국 발 금융위기의 시작과 과정, 그 배경을 날카롭게 파헤치면서 나름대로 전망을 도출하려는 진지한 논의를 대화형식으로 펼치고 있다. 두 분 학자의 대화이기 때문에 일반 경제학 저서에서 보이는 난해한 주석(註釋)이 붙지 않는다. 남의 이론을 인용하고 그 근거를 밝히는 것은 학자적 양심에서 당연하지만 주석에 신경을 너무 쓰다보면 자기 목소리가 약해진다. 그러나 이 책은 대화이기 때문에 중국의 두 젊은 석학이 갖는 자기주장, 자기식견, 자기목소리(本音)를 그대로 들을 수 있는 점에서 읽을수록 맛이 나고 한번 끌려 들어가면 빠져 나오기 힘들어 숙독할 수밖에 없다.

또 두 분 학자 모두 중국의 문화대혁명이후 중국공산당의 지도아래 성장한 젊은 세대들이기 때문에 이들이 미국 발 금융위기를 어떻게 보고 평가하는가는 오늘의 중국을 이해하는데 매우 유익한 준거가 될 것이다. 미국 발 금융위기에 관해서는 세계 각국의 전문가들이 많은 논문을 발표했고 이러한 위기의 도래를 미리 예측했다고 해서 Paul Krugman은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 두 분 학자들은 미국 발 금융위기가 태동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이념적 배경을 조직적으로 분석하는 예리함을 이 책속에 담았으며 아울러 실질문제를 폭넓은 예시를 통해 밝히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미국 발 금융위기는 세계GDP의 12배 이상 되는 500조 달러 규모로 팽창된 금융파생상품을 그대로 방치하여 금융자산의 거품이 방만하게 부풀러 졌고 부풀었던 거품이 폭발하므로 말미암아 미증유의 금융위기를 불러왔고 여기에서 오늘날 전 세계인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경제의 장기침체를 가져온 것이다. 두 분 소장 학자들은 비록 시장경제라고는 하지만 공산당이 영도하는 체제 안에서 낳고 성장하였지만 미국식 자본주의가 갖는 이러한 문제점을 적실하게 판단하고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 경탄을 금할 수 없다.

                                                        3.

이들은 미국의 신자유주의를 앞세운 경제정책이 글로벌화와 겹쳐지고 이 와중에서 실물경제의 도구이던 금융이 오히려 실물경제를 도구화하면서 금융카지노라고 부를만한 금융파생상품의 도박판을 만든 것이 금융위기의 세계화를 가져왔다고 분석하고 미국의 Wall Street는 금융의 중심지가 아니라 금융도박의 중심지가 되었다고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다. 실물경제의 기초가 없는 금융이라는 가상경제가 만드는 부작용은 세계도처에서 부동산 버블을 몰아왔고 급기야는 기축통화로서 미국달러화의 기능위기까지를 몰고 왔다.

작년 7월 미 의회는 금융시장을 규제하는 Dodd-Frank Act를 통과 시켰지만 오히려 금융시장은 경직되어 가고 있고 미궁을 헤매고 있는 금융파생상품시장은 불안정성을 아직도 불식하지 못하고 있는 현황이다. 미국경제가 지금 외형상으로는 살아나고 있는 것 같지만 작년7월 이래 9.8%를 웃도는 실업의 장기화, 주택시장의 침몰, 금융시장의 경직성과 불안정성, 대외경쟁력의 쇠퇴라는 4가지의 덧이 미국경제회복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Federal Reserve의 Quantitative Easing II나 오바마행정부의 Tax Cut Resolution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그리고 언제까지 걸림 덧의 족쇄를 풀어 줄 수 있을는지 모를 일이다. 아마도 2011년을 넘기지는 않을까 하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러한 사태를 초래한 가까운 원인에 대해서 취엔위웬치 박사는 “미국경제는 20세기 후반 클린턴 시절에 지식경제가 점차 도래하면서 제조업종의 해외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가상경제가 과도하게 팽창했고 실물경제와 어긋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어긋남이 심각한 정도에 이르자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거액의 재정적자 및 무역적자가 나타났고 이것이 쌓여 금융위기와 경제위기가 초래된 것입니다”(p.41) 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재미 한인경제학자 백순 박사는 “미국경제는 2차 대전 이후 강력한 노동력과 풍부한 자원으로 20세기 말까지 세계경제에 경쟁력을 유지하면서 선진성의 위치를 지켜 왔다. 그러나 미국경제는 21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이동과 통신의 발달에 힘입어 값싼 노동력과 풍부한 자원의 경쟁력을 뜨는 경제 국가들에게 빼앗기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4.

이와 관련하여 한국경제학계의 이론가의 한 사람인 안병직 박사는 “직접적인 계기는 미국의 불량 주택금융이 문제가 되어 금융위기가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안정적인 금융시장의 운용을 위한 인프라가 마련되기 전에 새로운 금융기법이 폭주한 면도 있었다. 제가 보기로는 각 부문별로 세계화가 상당히 진행 되었고, 금융의 세계화도 많이 진전되었다. 한 나라의 금융위기가 민감하게 세계적으로 파급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게 된 것이다. 기본적으로 금융의 세계화에 의해서 세계적 경제위기가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국내적 및 국제적 금융 산업의 심화에 대응할만한 금융제도의 발달이 여전히 미진하다. 이것이 현재 전 세계적인 경제개혁의 과제 아닌가. 자본주의에 수정이 가해진다면, 그것은 아마도 제도적 심화로 나타날 것이다”고 지적하고 있다.

원인분석이나 배경분석에서는 국내학자들이나 중국의 두 분 이론가들의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패권전쟁의 저자들은 미국경제의 회복전망에 대해 단기적으로는 매우 비관적이고 미국경제의 등락에 연계되어 있는 유럽경제도 회복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동시에 두 분 학자들은 중국이 현시점에서 중국내부의 외자관리에 대한 제도적 장치 때문에 금융위기의 파급이 경제전면에 까지 미치지는 못하고 또 주요투자의 주체, 금융의 주체가 사실상 국가라는 강점 때문에 큰 위기를 넘기고는 있지만 부동산문제에 관한 한 중국의 버블도 반드시 위기를 모면하기 힘들다면서 국제금융위기의 교훈을 금후 중국경제의 내수 진작사업이나 부동산 정책에 반영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5.

끝으로 두 분 학자들은 미국이 달러 발권력을 휘둘러 경제적 패권을 유지하려고 발버둥치고 있지만 이제 세계는 브레튼우즈 체제를 파산시킨 직후와 같은 상황이나 프라자 합의를 통해 일본의 성장에 제동을 걸었던 상황도 더 이상 아님을 상기시킨다. 동시에 근면하게 노동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던 청교도적 삶을 되찾지 않고 내년 곡식을 미리 앞당겨 먹는 (寅吃卯糧:토끼해의 곡식을 호랑이해에 먹어치운다는 뜻)무책임한 소비, 많이 벌고 적게 저축하는 개인주의와 향락주의를 그대로 유지하는 한 여기에서 비롯된 경상수지 적자와 과도한 대외군사개입에서 조성된 재정적자라는 쌍둥이 적자를 미국이 해결하기 힘들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이런 위기상황은 달러 발권력 조작만으로 해결될 수 없음을 강력히 경고하면서 미국에 주어진 상황을 객관적으로 재조명, 실상에 맞는 처방이 필요할 것으로 결론짓고 있다.

세계금융위기의 현주소를 알기 쉽게 파헤친 이 책은 경제전문가나 비전문가 모두에게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적 양식이 될 것으로 생각되어 이 서평을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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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줄 우편에서 둘째, 머리숙이고 악보보는 사람이 필자이다.

추수감사절 음악제에 합창단원으로 출연

서울경동교회는 기독교 장로회에 속하기 때문에 다른 교파와는 달리 9월18일 주일을 우리의 추석절에 맞춰 추수감사절로 기념하고 있다. 감사절 예배와 성찬식 이후 오후 2시부터 감사절 기념음악제가 교회 대 예배당에서 열렸고 나는 합창단원의 일원으로 이 음악제에 참가했다..

박수길 장로(성악가, 한양음대 교수, 전 국립오페라단장)지도하에 경동교회에 구성된 남성합창단(노아남성Choir)이 결성되어 격주 토요일 오후 4시부터 2시간 동안 성가연습을 해왔다. 나는 나의 음역의 위치도 잘 모르면서도 함께 참여하자는 권유에 따라 Bass2파트에 끼여 자리를 채웠다. 연습시간 마다 옆에서 부르는 소리에 맞춰 낮은 음으로 주어진 역할을 소화해 내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나이 탓인지 소양부족인지 나의 정확한 음역이 어딘지 지금도 막연하다. 나는 박 장로님에게 나의 참여는 화음을 위해서라기보다는 화합을 위해서라고 미리 방어막을 치고 참여했다.

그런 나에게 합창단으로 전 교인 앞에서 부르는 합창단에 끼이라는 것은 매우 큰 부담이었으나 내 옆에 수준급의 젊은 성악가가 있어 나는 마치 물고기처럼 입만 방긋 벙긋 했다. 합창이 끝난 후 청중들의 반응은 의외로 좋았다. 나 때문이 아니라 이 합창을 리드하는 프로들 때문일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KBS광주라디오 방송국에 출연하여 노래를 부른 일이 있다. 그때도 반(班)전체가 하는 합창이었다. “아롱다롱나비야, 이리 날라 오너라”를 부른 것으로 회상된다. 나는 2년 전 아내의 권유로 판소리연습장에 다녔다. 신영자 선생이 경영하는 효자동의 반 지하방에서 매주 토요일 사철가 부터 흥부가의 일부, 춘향가의 일부, 호남가, 심청가의 일부를 북치면서 배웠다. 매우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런 연습덕분에 한중문화협회 친선의 밤에는 함께 연습에 참가했던 몇 분과 어울려 사철가를 합창하여 청중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음역이 애매한 사람들에게는 판소리가 더 어울리기 때문에 아내가 나에게 판소리를 권고한 것 같았다. 그러나 디스크 수술을 받은 나로서는 방바닥에 앉아서 두 시간 씩 연습한다는 것은 너무 부담스러워 판소리연습을 접고 이제는 남성합창단에 조인했다. 부족한대로 따라서 하면 그 나름의 발전이 있을 것을 기대하고 기도하면서 그냥 따라가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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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대통령의 單任 약속 이행은 한국민주발전에 기여했다.

연세대학교 국가발전연구원(원장 진영재 교수))은 당대사(當代史) 사료연구의 토대연구를 추진하면서 1차년도 연구 주제로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시기의 국가의제와 주요 정책을 삼고 분야별로 전문가들이 연구를 맡고 당시의 상황을 말해줄 관련인사를 방문, 의견을 녹취하는 Oral History 자료를 만들고 그 내용을 종합토론을 거쳐 재정리하는 작업을 진행시키고 있다. 나는 전 통일부 김형기 차관이 연구를 맡고 있는 5공 관련 정치문제에 관한 인터뷰에 응하고 그 내용을 마무리하는 보고모임에 Discussant로 초청받아 참여했다.

2011년 8월31일 13:30부터 18:00까지 서울 Palace Hotel 3층 제리 홀에서 열린 이날 보고회는 여러 사람의 보고가 행해졌고 이 보고 중에서 중요토론사항은 한국이 민주화되는 과정의 시점에 대한 논의였다. 유신체제를 권위주의 체제로 볼 때 전두환의 단임제의 이행약속이 민주화의 시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와 노태우 대통령의 6.29선언이 기점이라고 보는 견해가 나왔다.

나는 전두환 대통령의 단임 정신은 시종일관되었다고 지적하고 내가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장으로서 교육방향 설정 시에 1인장기집권의 폐단을 막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뜻을 교재에 못 박도록 지시했음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단임 대통령으로서의 임기를 마친 후의 자신의 안전을 위한 장치마련문제로 많은 고뇌가 있었는데 그가 생각한 대안은 노태우를 대통령에 당선시키는 것과 자기의 안전 확보장치로서 필요한 경비를 마련해 두는 것으로 보였다.

한국역사에서 단임 대통령이 없었기 때문에 단임 이후를 안전하게 살아갈 제도가 정착되어 있지 않은 현실을 감안하면 전두환 대통령의 선택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노태우가 자신의 안전과 명리(名利)를 위해 전두환 대통령을 백담사로 보내고 청문회에 끌어내고 마침내는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전두환, 노태우 두분 대통령 모두가 구속되어 유죄선고를 받는 재판이 뒤따름으로 인해서 전두환 대통령의 單任精神은 제대로 평가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날의 토론에서는 역사의 모든 권위주의 독재자들이 권력과 자기생명을 일치시켰던 先例를 조명할 때 전두환 대통령은 惡한 독재자들의 발악적 최후를 선택하지 않고 국민에게 행한 단임 공약을 끝까지 이행하고 청와대를 나온 것은 한국정치가 민주화되는데 가장 크고 중요한 공헌의 하나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다수였다. 전두환 대통령이 실천한  단임공약이 그 뒤 계속 이어짐으로 해서 오늘날 한국정치에서 1인장기집권의 폐해는 사라졌다. 이 부분은 반드시 역사에서 재대로 평가되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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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평화연구원의 통일세미나에서 벌어진 진풍경을 보고-

한반도 평화연구원은 9월28일 하오 2시 서울 은행회관 2층 대강당에서 남북한의 통일담론을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서울대학교 윤영관 정치외교학부 교수(전 외교통상부장관) 사회로 열린 이 세미나는 김석향 교수(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와 박정란 박사(서울대 평화연구원 북한학연구)의 주제발표가 있은 후 발표내용에 대한 질의가 뒤따랐다.

약80대로 보이는 분이 자기는 김대중 평화연구소 연구원이라고 소개하면서 첫 질의자로 나서서 MB가 북측이 제안한 금강산 피살사건의 공동조사에 불응하고 금강산 관광길을 막았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면서 MB의 통일정책을 거두절미 욕하기 시작하자 윤 교수는 주제와 동떨어진 질의를 자제할 것을 당부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분풀이하듯 떠들다가 자리에 앉았다. 뒤이어 질의가 이어졌다. 70대 후반으로 보이는 분이 일어나더니 마이크를 잡고 김석향 교수의 발표에 시비를 걸었다. 내용인즉 김 교수가 북한에서 통일에 관련된 담론을 정리하다가 김정일 대에 들어와서 통일에 관해서 뚜렷한 언급이 없어 담론다운 담론을 말할 것이 없다고 주제를 마무리한 것이 잘못이라고 비판하고 선군정치, 핵개발, 미사일 발사 등 모든 것이 적화통일을 위한 노력인데 그런 부분을 통일담론과 관련 없는 것처럼 빼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발언이었다.

이 분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앞서 첫 질의를 했던 사람이 그와 함께 온 80대노인과 합세하여 그분의 발언은 뉴 라이트에 가서나 떠들으라면서 갖은 쌍소리를 퍼부으면서 발언을 방해하고 윤 교수도 이런 식의 질의응답으로서는 좋은 세미나 진행이 어렵다고 발언 자제를 요청했으나 발언을 하던 분은 요지부동의 자세로 발언마이크를 놓지 않았다.

장내는 수라장으로 으로 변하고 어수선한 가운데 1차 회의가 끝났다. 이날 모임에는 이인호 전 주 러시아 대사, 김승호 대사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했는데 이들은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채 세미나 장을 빠져 나와야 했다. 우리에게 토론문화가 없다는 소리는 더 이상 말할 가치가 없을만큼 식상한 소리다. 국회에 없는 토론문화가 민간 속에서 자랄 것을 기대할 수 없다.

한반도 평화연구원을 이끄는 김지철 선생이나 이 장로 원장 등이 비싼 돈을 들여 좋은 발표자와 토론자를 섭외하여 모시고 좋은 장소를 임대하여 마련해 놓은 자리에 와서 좋은 토론을 듣고 자기의 의견도 시의 적절하게 표현했으면 좋으련만 무슨 억하심정에서 남의 토론장을 떼로 몰려다니면서 망치는 가. 이를 취미로 삼는 노인 통일꾼들이 있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이들을 단속할 법도 없다. 한 가지 방법이 있다면 모든 시국 관련 세미나의 有料化를 추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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