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주간조선 2375호로서 2015년 9월 121일부터 10둴4일까지의 특대호에 실렸다.
이영일 전 국회의원·한중정치외교포럼 회장
항일을 위한 한중공동투재의 역사를 복원하다
지난 9월 3일 중국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열병식에서 한국의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서 있는 모습이 전 세계에 방영됐다. 이 광경은 형식상으로 보면 중국이 개최한 항일전쟁 및 반파시스트 투쟁 승리 70주년 기념행사의 한 순서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그림’이 태어나기까지의 역정을 돌이켜보면 결코 예사로운 사건이 아니다. 이날의 행사는 그간 냉전에 가려 밝혀지지 않았던 한·중 간 항일 공동투쟁의 역사적 진실이 70년 만에 제 모습을 찾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61년 전인 1954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5주년 기념식 사열대에는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이 북한의 김일성과 나란히 서서 중국 인민해방군들을 사열했다. 그러나 올해 천안문 사열대에는 태평양전쟁 개시(1941년 12월 8일) 다음날 중국과 더불어 일본제국에 선전포고를 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박근혜 대통령이 대일항쟁의 당당한 파트너로서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 나란히 서서 중국 인민해방군 부대를 사열했다. 이 그림은 결코 의례적인 행사의 형용(形容)이 아니다. 한·중 관계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할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며, 한·중 양국의 지난 시대를 규정했던 냉전사(冷戰史)의 청산을 알리는 것이다.
최근 중국의 항일전쟁승리 70주년을 알리는 국내 언론 보도를 보면 한국 임시정부가 태평양전쟁 개시 다음날 대일 선전포고를 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챙겨서 보도하지 않았다. 정식으로 대일 선전포고를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 대통령이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기념식전에 참석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인데 이러한 논리를 펴는 언론이 눈에 띄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올해로 시진핑 주석과 여섯 번째 만남을 가졌다. 이 두 지도자 간 만남에서 역사적으로 의미가 남을 두 가지 문제를 회담의 중요한 의제(Agenda)로 설정한 것은 중국을 상대로 벌인 박근혜 외교의 큰 공헌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 같다. 첫째는 박 대통령의 제의로 한·중 정상 대화에서 처음으로 한반도 통일 문제를 주요의제로 설정한 것이다. 둘째는 박 대통령의 주장과 제안에 따라 항일을 위한 한·중 공동투쟁 역사의 줄거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심으로 재구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북한의 김일성이 내세우는 항일혁명운동은 독립운동의 큰 줄기에서 보면 중국 동북지방에서 명멸했던 반일투쟁의 한 지류였다. 독립운동의 본류는 1942년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의 창립을 계기로 한·중 공조가 강화되는 가운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펼쳐진 독립군, 광복군, 또 여기에 마지막으로 합류하게 된 조선의용군 부대들이 펼친 항일 독립 투쟁이었다. 그러나 동서냉전이 심화되던 시기의 중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심으로 펼쳐진 본류(本流) 독립운동보다는 이념을 공유하는 김일성 중심의 소규모 독립운동을 더 중시했다. 즉 중국 동북지역 항일연합군에 포함된, 김일성이 부대장을 맡고 있던 소대 병력 규모의 투쟁을 평가해줬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시진핑 주석과의 정상회담을 통하여 그간 중국 당국이 외면했던 항일을 위한 한·중공투(韓中共鬪)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은 안중근(安重根) 의사 기념처 설치를 시진핑 주석에게 건의해 하얼빈 역사(驛舍)에 안중근기념관을 건립하도록 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격살사건을 항일 치적으로 기념하게 된 것이다. 이어 시안(西安)에 있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 표지석도 복원되었다.
사실 안중근 의사 기념 시설 건립 문제는 박근혜 대통령 이전부터 한국 측에서 중국 당국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요청해 왔다. 고 황인성(黃寅性) 국무총리와 고건(高建) 전 국무총리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중국 정부에 요구했지만 신통한 반응을 얻지 못했다. 내가 몸담았던 한·중문화협회도 대표단을 흑룡강성 정부에 파견, 요청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특정 외국인의 항일운동 업적을 중국 땅에 단독으로 부각시킬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그 배경에는 북한이 아닌 한국 중심의 항일 투쟁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키지 않으려는 공산당의 방침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국의 한 기업인이 자기 비용으로 만들어 하얼빈에 세운 안중근 의사의 동상까지 뜯어내 창고에 처넣기까지 하였다.
시진핑 주석의 배려
다행히도 시진핑 주석은 박근혜 대통령과의 한·중 정상회담 이후 중국 대륙에서 펼쳐진 한국인들의 독립운동 업적을 평가하고 거기에 상응하는 기념사업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번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참석한 가운데 이루어진 상하이임시정부 청사 재·복원 사업의 경비를 중국 정부가 전액 부담해준 것은 과거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맨 처음 세워진 한국 임시정부 상하이(上海) 청사를 복원할 때에는 청사에 살고 있던 중국인 가정의 이전 문제와 인근 주택 매입비용 문제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측과 상하이시 당국 간에 오랜 시간의 비용 협상이 있었다.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추진된 충칭(重慶)임시정부 청사 복원 시에도 임시정부 청사에 거주하는 52가구의 이전비용과 청사 수리비용 문제를 놓고도 질긴 협상을 벌였다. 결국 한국 측에서 큰 비용을 부담함으로써 복원사업을 마무리했는데 중국 측이 한국 측 요구를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은 북한을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난해 정홍원 국무총리가 충칭 방문 시 요청한 한국광복군 사령부 복원 문제는 중국 측이 즉시 수락했다고 한다. 비록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시진핑 주석이 취임하면서부터 중국에서 전개된 한국인들의 항일투쟁을 보는 중국의 태도는 점차 달라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주도한 항일 독립운동을 정통 독립운동으로 수용하고 한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이 오늘날 대한민국에 의해 정당히 계승되고 있음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역사의 축적을 바탕으로 지난 9월 3일 베이징의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일본에 정식으로 선전포고(宣戰布告)한 세 국가의 지도자, 즉 시진핑 주석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 그리고 우리 박근혜 대통령이 나란히 서서 인민해방군의 사열을 받게 됐다.
한중문화협회의 창립과 중국의 독립운동지원
이제까지 국내에서 진행된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는 불행하게도 두 가지의 맹점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독립운동의 무대를 지나치게 중국 중심으로만 보려는 경향이다. 또 다른 하나는 중국에서의 항일 독립운동과 관련해 중·한문화협회 창립이 갖는 의의를 외면해 왔다는 점이다. 항일 독립운동은 처음에는 여러 개의 임시정부 형태로 펼쳐지다가 1920년에 이르러 중국의 상하이에 본부를 두는 단일 임시정부로 통합되었으나 그후 본부가 이곳저곳으로 전전했고 마지막에 충칭에서 광복을 맞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국 임시정부는 세계 각지에서 펼쳐진 독립운동을 전략적으로 지도하거나 조정할 구심력도 부족했고 상황도 열악했다. 미국에서는 이승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구미(歐美)본부를 세워 항일 독립운동을 이어갔으며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서도 독립운동은 계속되었다. 오히려 한국 독립에 결정적 영향을 준 카이로선언은 그것이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주도한 점에 비추어 이승만이 중심이 된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의 독립운동이 처음부터 중국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것은 한국과 중국 간의 지리적 인접성과 역사적 유대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중국의 신해(辛亥)혁명에 성공한 쑨원(孫文)이 1921년 11월 중화민국 비상대총통에 취임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특사로서 총리대행인 신규식(申圭植)을 접견한 자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식으로 승인하고 중국의 북벌계획이 완료되면 그때 전력을 다해 한국의 구국운동을 돕겠다”는 희망찬 약속을 던진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1925년 쑨원이 사망한 후 1927년 중화민국을 승계한 장제스(蔣介石)는 쑨원이 약속한 한국 임시정부 승인을 이행하지 않고 유보했다. 당시 한국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이국땅에서 항일독립 투쟁을 하는 데 적잖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망명정부가 아닌 임시정부에 대한 연합국 정부의 승인을 얻는 것이 독립 성공의 중요한 발판이 될 것으로 인식하고 이를 위해 갖은 노력을 경주했다. 이승만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즉시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미국에 요청했으나 외면당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쑨원의 아들이며 중화민국 입법원장(우리의 국회의장에 해당)인 쑨커(孫科)는 아버지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중국이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공공연히 촉구하고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과 중국의 항일 역량을 연결할 기관으로서 중·한문화협회의 창립에 착수했다. 원래 중화민국에서는 정식으로 수교한 국가의 국민과 중국 인민과의 우호협력을 촉진하는 기관으로 ‘문화협회’를 구성, 공공외교를 추진해 왔다. 중·미(中美)문화협회나 중·소(中蘇)문화협회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주권도, 인민도, 영토도 없는 문자 그대로 임시정부였기 때문에 중국과 한국 간의 수교가 불가능해서 문화협회도 합법적으로 창립할 수 없었다. 이에 쑨커는 국가 대 국가 차원이 아닌 당 대 당 차원과 인민 대 인민 차원이라는 중국적 외교 방식을 원용해서 앞으로 탄생할 한국 독립정부를 상정해 놓고 중국국민당과 공산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정당세력들의 연대를 바탕으로 중·한문화협회를 창립하도록 주선, 중화민국 정부의 승인을 얻었다. 이로써 1942년 10월 11일 중국의 임시수도 충칭에서 중·한문화협회가 창립되었다.
창립식에는 중국의 장제스 총통이 참여하여 격려사를 했다. 중·한문화협회의 조직은 중국국민당의 고위간부들과 중국공산당, 한국 임시정부의 고위층들을 포함한 한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들로 구성되었다. 임시정부에서는 김구 주석을 비롯해 이승만, 서재필 등 임정요인 전체가 멤버로 참가했고 국민당 측에서는 쑨커(孫科) 입법원장, 우티예청(吳鐵城) 중앙조직지도부장 등의 요인들이 참가했다. 공산당 측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총리를 지낸 저우언라이(周恩來)와 문화계 대표로 궈모뤄(郭沫若)가 참가했다. 저명한 역사가이자 시인, 고고학자 등으로 활약한 궈모뤄는 1926년 북벌전쟁(北伐戰爭) 당시 국민혁명군 정치부 부주임을 맡았었다.
이때는 중국의 충칭이 한·중 양측의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사는 장소였기 때문에 중·한문화협회와 구별되는 한·중문화협회를 따로 구성하지 않았다. 중·한문화협회가 한·중문화협회도 겸하는 구조였다. 한·중 양측은 한국 임시정부의 외교부장인 조소앙(趙素昻)을 한국 측 창구로 하여 협력을 전개해 왔다. 중국정부는 중·한문화협회 창립을 계기로 한국 임시정부에 대한 재정 지원을 본격화했다. 중·한문화협회를 지원하는 형식으로 재정 지원을 실시했다. 이때부터 한국 임시정부의 재정 형편은 다소 나아졌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중·한문화협회는 한국의 독립을 위한 지원 활동으로 한국 임시정부 승인을 촉구하는 문서 청원을 주도하고 한국 임시정부 승인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여론 조성 강연회, 학술회의 등을 줄기차게 개최하였다. 3·1절 기념 독립운동 행사를 통해 한국 독립의 필연성과 당위성을 알리는 사업도 꾸준히 이어갔다. 특히 한국 임시정부 승인 문제를 관철하기 위해 쑨커는 중국공산당의 저우언라이(周恩來)와 제휴하여 내적 분열의 위기를 겪고 있던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을 임시정부 깃발 아래로 뭉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결국 김구(金九)가 이끄는 임시정부 세력과 김원봉(金元鳳)이 이끄는 조선의용군 계열의 조선혁명당 세력이 중국 정부의 임시정부 승인을 전제로 대동 단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전후처리 문제의 어려움을 내세워 “한 치의 영토도 없는 임시정부” 승인을 유보하자는 영국 처칠 총리의 주장에 휘말려 한국 임시정부 승인을 끝까지 유보했다. 중·한문화협회는 비록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 정부의 승인을 얻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한국 독립운동의 정통성이 한국 임시정부로 모아지고 대일 무력투쟁의 총본산으로 광복군 사령부가 설치되는 등 항일을 위한 한·중공투의 역사를 펼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한국의 독립운동사 연구가들은 중·한문화협회가 중국 대륙에서 한국 독립운동과 투쟁에 미친 커다란 기여를 전혀 연구하지도, 평가하지도 않는 실정이다.
한중문화협회의 탄생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면서부터 쑨커가 이끌던 중·한문화협회는 대만으로 이주했다. 중·한문화협회의 한국 측 파트너였던 조소앙 선생은 1945년 귀국 후 한·중문화협회를 광복된 한국 땅에 발족시키려고 준비하던 중 한국전쟁 발발로 본인이 납북되면서 한·중문화협회 창립을 보지 못했다. 1958년 조소앙 선생이 납북된 북한 땅에서 생을 마감하자 선생의 유지를 받들던 최용덕 전 공군참모총장(중국공군사관학교 출신)이 1965년 한·중문화협회를 서울에 창립하고 초대회장으로 조소앙 선생을 추서한 후 본인이 제2대 회장에 취임하였다. 서울의 한·중문화협회와 대만의 중·한문화협회는 초기에는 서로 교류했지만 한·중수교 이후 대만과 단교되면서 파트너십이 끝났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쑨원 시대와는 달리 민간우호단체의 명칭을 ‘문화협회’에서 ‘우호협회’로 바꾸고 한·중수교 후에는 양국 간에 우호협회를 새로 창립하여 문화협회의 역할을 대체했다. 하지만 한·중문화협회 7대 회장인 이종찬(李鐘贊)씨(전 국정원장)는 이 시기 서울의 한·중문화협회를 한·중우호협회로 변신시키기보다는 중국과 손잡고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한·중 협력단체로서의 역사성을 지켜나가는 민간기구로 존속하는 길을 택했다. 나는 제8대 회장으로 15년 동안 협회를 이끌다가 작년 7월 명노승(明魯昇) 변호사에게 회장직을 넘기고 한·중문화협회에 병설된 한·중정치외교포럼의 회장을 맡고 있다.
올해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 정부가 한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은 “항일을 위한 한·중공투의 당당한 파트너”로서 정당한 지위를 되찾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이렇게 되찾은 한·중 파트너십이 우리 모두의 진정한 광복인 통일한국 건설의 디딤돌로 승화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중국을 상대로 펼친 박근혜 외교의 값진 승리에 박수를 보낸다.
필자: 이영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졸업(58학번), 제11대ㆍ12대ㆍ15대 국회의원 및 국회문교공보위원장, 사단법인 한·중문화협회 총재(1998~2014), 한·중정치외교포럼 회장(2014~ ), 한·중정상회담 2회 수행(김대중-강택민, 박근혜-시진핑)
'통일꾼활동 > 중국교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의 심리전 공세에 휘둘리지 말자 (0) | 2016.07.27 |
---|---|
북한의 4차 핵실험과 중국의 선택 (0) | 2016.02.06 |
미중관계에 대한 조지프 나이 교수의 특강 청취소감 (0) | 2015.02.23 |
2015년의 미중관계와 한중협력의 전망 (0) | 2015.02.23 |
중국의 난찡과 일본의 히로시마 (0) | 2015.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