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주간조선 2375호로서 2015년 9월 121일부터 10둴4일까지의 특대호에 실렸다.

 

 이영일 전 국회의원·한중정치외교포럼 회장 

 

항일을 위한 한중공동투재의 역사를 복원하다

 

지난 9월 3일 중국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열린 열병식에서 한국의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서 있는 모습이 전 세계에 방영됐다. 이 광경은 형식상으로 보면 중국이 개최한 항일전쟁 및 반파시스트 투쟁 승리 70주년 기념행사의 한 순서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그림’이 태어나기까지의 역정을 돌이켜보면 결코 예사로운 사건이 아니다. 이날의 행사는 그간 냉전에 가려 밝혀지지 않았던 한·중 간 항일 공동투쟁의 역사적 진실이 70년 만에 제 모습을 찾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61년 전인 1954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5주년 기념식 사열대에는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이 북한의 김일성과 나란히 서서 중국 인민해방군들을 사열했다. 그러나 올해 천안문 사열대에는 태평양전쟁 개시(1941년 12월 8일) 다음날 중국과 더불어 일본제국에 선전포고를 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박근혜 대통령이 대일항쟁의 당당한 파트너로서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 나란히 서서 중국 인민해방군 부대를 사열했다. 이 그림은 결코 의례적인 행사의 형용(形容)이 아니다. 한·중 관계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할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며, 한·중 양국의 지난 시대를 규정했던 냉전사(冷戰史)의 청산을 알리는 것이다.

 

최근 중국의 항일전쟁승리 70주년을 알리는 국내 언론 보도를 보면 한국 임시정부가 태평양전쟁 개시 다음날 대일 선전포고를 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챙겨서 보도하지 않았다. 정식으로 대일 선전포고를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 대통령이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기념식전에 참석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인데 이러한 논리를 펴는 언론이 눈에 띄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올해로 시진핑 주석과 여섯 번째 만남을 가졌다. 이 두 지도자 간 만남에서 역사적으로 의미가 남을 두 가지 문제를 회담의 중요한 의제(Agenda)로 설정한 것은 중국을 상대로 벌인 박근혜 외교의 큰 공헌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 같다. 첫째는 박 대통령의 제의로 한·중 정상 대화에서 처음으로 한반도 통일 문제를 주요의제로 설정한 것이다. 둘째는 박 대통령의 주장과 제안에 따라 항일을 위한 한·중 공동투쟁 역사의 줄거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심으로 재구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북한의 김일성이 내세우는 항일혁명운동은 독립운동의 큰 줄기에서 보면 중국 동북지방에서 명멸했던 반일투쟁의 한 지류였다. 독립운동의 본류는 1942년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의 창립을 계기로 한·중 공조가 강화되는 가운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펼쳐진 독립군, 광복군, 또 여기에 마지막으로 합류하게 된 조선의용군 부대들이 펼친 항일 독립 투쟁이었다. 그러나 동서냉전이 심화되던 시기의 중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중심으로 펼쳐진 본류(本流) 독립운동보다는 이념을 공유하는 김일성 중심의 소규모 독립운동을 더 중시했다. 즉 중국 동북지역 항일연합군에 포함된, 김일성이 부대장을 맡고 있던 소대 병력 규모의 투쟁을 평가해줬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시진핑 주석과의 정상회담을 통하여 그간 중국 당국이 외면했던 항일을 위한 한·중공투(韓中共鬪)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은 안중근(安重根) 의사 기념처 설치를 시진핑 주석에게 건의해 하얼빈 역사(驛舍)에 안중근기념관을 건립하도록 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격살사건을 항일 치적으로 기념하게 된 것이다. 이어 시안(西安)에 있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 표지석도 복원되었다.

 

사실 안중근 의사 기념 시설 건립 문제는 박근혜 대통령 이전부터 한국 측에서 중국 당국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요청해 왔다. 고 황인성(黃寅性) 국무총리와 고건(高建) 전 국무총리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중국 정부에 요구했지만 신통한 반응을 얻지 못했다. 내가 몸담았던 한·중문화협회도 대표단을 흑룡강성 정부에 파견, 요청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특정 외국인의 항일운동 업적을 중국 땅에 단독으로 부각시킬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그 배경에는 북한이 아닌 한국 중심의 항일 투쟁을 의도적으로 부각시키지 않으려는 공산당의 방침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국의 한 기업인이 자기 비용으로 만들어 하얼빈에 세운 안중근 의사의 동상까지 뜯어내 창고에 처넣기까지 하였다.

 

시진핑 주석의 배려

 

다행히도 시진핑 주석은 박근혜 대통령과의 한·중 정상회담 이후 중국 대륙에서 펼쳐진 한국인들의 독립운동 업적을 평가하고 거기에 상응하는 기념사업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번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참석한 가운데 이루어진 상하이임시정부 청사 재·복원 사업의 경비를 중국 정부가 전액 부담해준 것은 과거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맨 처음 세워진 한국 임시정부 상하이(上海) 청사를 복원할 때에는 청사에 살고 있던 중국인 가정의 이전 문제와 인근 주택 매입비용 문제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측과 상하이시 당국 간에 오랜 시간의 비용 협상이 있었다.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추진된 충칭(重慶)임시정부 청사 복원 시에도 임시정부 청사에 거주하는 52가구의 이전비용과 청사 수리비용 문제를 놓고도 질긴 협상을 벌였다. 결국 한국 측에서 큰 비용을 부담함으로써 복원사업을 마무리했는데 중국 측이 한국 측 요구를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은 북한을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난해 정홍원 국무총리가 충칭 방문 시 요청한 한국광복군 사령부 복원 문제는 중국 측이 즉시 수락했다고 한다. 비록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시진핑 주석이 취임하면서부터 중국에서 전개된 한국인들의 항일투쟁을 보는 중국의 태도는 점차 달라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주도한 항일 독립운동을 정통 독립운동으로 수용하고 한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이 오늘날 대한민국에 의해 정당히 계승되고 있음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역사의 축적을 바탕으로 지난 9월 3일 베이징의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기념 열병식에서 일본에 정식으로 선전포고(宣戰布告)한 세 국가의 지도자, 즉 시진핑 주석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 그리고 우리 박근혜 대통령이 나란히 서서 인민해방군의 사열을 받게 됐다.

 

한중문화협회의 창립과 중국의 독립운동지원

 

이제까지 국내에서 진행된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는 불행하게도 두 가지의 맹점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독립운동의 무대를 지나치게 중국 중심으로만 보려는 경향이다. 또 다른 하나는 중국에서의 항일 독립운동과 관련해 중·한문화협회 창립이 갖는 의의를 외면해 왔다는 점이다. 항일 독립운동은 처음에는 여러 개의 임시정부 형태로 펼쳐지다가 1920년에 이르러 중국의 상하이에 본부를 두는 단일 임시정부로 통합되었으나 그후 본부가 이곳저곳으로 전전했고 마지막에 충칭에서 광복을 맞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한국 임시정부는 세계 각지에서 펼쳐진 독립운동을 전략적으로 지도하거나 조정할 구심력도 부족했고 상황도 열악했다. 미국에서는 이승만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구미(歐美)본부를 세워 항일 독립운동을 이어갔으며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서도 독립운동은 계속되었다. 오히려 한국 독립에 결정적 영향을 준 카이로선언은 그것이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주도한 점에 비추어 이승만이 중심이 된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의 독립운동이 처음부터 중국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것은 한국과 중국 간의 지리적 인접성과 역사적 유대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중국의 신해(辛亥)혁명에 성공한 쑨원(孫文)이 1921년 11월 중화민국 비상대총통에 취임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특사로서 총리대행인 신규식(申圭植)을 접견한 자리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식으로 승인하고 중국의 북벌계획이 완료되면 그때 전력을 다해 한국의 구국운동을 돕겠다”는 희망찬 약속을 던진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1925년 쑨원이 사망한 후 1927년 중화민국을 승계한 장제스(蔣介石)는 쑨원이 약속한 한국 임시정부 승인을 이행하지 않고 유보했다. 당시 한국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이국땅에서 항일독립 투쟁을 하는 데 적잖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망명정부가 아닌 임시정부에 대한 연합국 정부의 승인을 얻는 것이 독립 성공의 중요한 발판이 될 것으로 인식하고 이를 위해 갖은 노력을 경주했다. 이승만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즉시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미국에 요청했으나 외면당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쑨원의 아들이며 중화민국 입법원장(우리의 국회의장에 해당)인 쑨커(孫科)는 아버지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중국이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공공연히 촉구하고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과 중국의 항일 역량을 연결할 기관으로서 중·한문화협회의 창립에 착수했다. 원래 중화민국에서는 정식으로 수교한 국가의 국민과 중국 인민과의 우호협력을 촉진하는 기관으로 ‘문화협회’를 구성, 공공외교를 추진해 왔다. 중·미(中美)문화협회나 중·소(中蘇)문화협회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주권도, 인민도, 영토도 없는 문자 그대로 임시정부였기 때문에 중국과 한국 간의 수교가 불가능해서 문화협회도 합법적으로 창립할 수 없었다. 이에 쑨커는 국가 대 국가 차원이 아닌 당 대 당 차원과 인민 대 인민 차원이라는 중국적 외교 방식을 원용해서 앞으로 탄생할 한국 독립정부를 상정해 놓고 중국국민당과 공산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정당세력들의 연대를 바탕으로 중·한문화협회를 창립하도록 주선, 중화민국 정부의 승인을 얻었다. 이로써 1942년 10월 11일 중국의 임시수도 충칭에서 중·한문화협회가 창립되었다.

 

창립식에는 중국의 장제스 총통이 참여하여 격려사를 했다. 중·한문화협회의 조직은 중국국민당의 고위간부들과 중국공산당, 한국 임시정부의 고위층들을 포함한 한국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들로 구성되었다. 임시정부에서는 김구 주석을 비롯해 이승만, 서재필 등 임정요인 전체가 멤버로 참가했고 국민당 측에서는 쑨커(孫科) 입법원장, 우티예청(吳鐵城) 중앙조직지도부장 등의 요인들이 참가했다. 공산당 측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총리를 지낸 저우언라이(周恩來)와 문화계 대표로 궈모뤄(郭沫若)가 참가했다. 저명한 역사가이자 시인, 고고학자 등으로 활약한 궈모뤄는 1926년 북벌전쟁(北伐戰爭) 당시 국민혁명군 정치부 부주임을 맡았었다.

 

이때는 중국의 충칭이 한·중 양측의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사는 장소였기 때문에 중·한문화협회와 구별되는 한·중문화협회를 따로 구성하지 않았다. 중·한문화협회가 한·중문화협회도 겸하는 구조였다. 한·중 양측은 한국 임시정부의 외교부장인 조소앙(趙素昻)을 한국 측 창구로 하여 협력을 전개해 왔다. 중국정부는 중·한문화협회 창립을 계기로 한국 임시정부에 대한 재정 지원을 본격화했다. 중·한문화협회를 지원하는 형식으로 재정 지원을 실시했다. 이때부터 한국 임시정부의 재정 형편은 다소 나아졌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중·한문화협회는 한국의 독립을 위한 지원 활동으로 한국 임시정부 승인을 촉구하는 문서 청원을 주도하고 한국 임시정부 승인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여론 조성 강연회, 학술회의 등을 줄기차게 개최하였다. 3·1절 기념 독립운동 행사를 통해 한국 독립의 필연성과 당위성을 알리는 사업도 꾸준히 이어갔다. 특히 한국 임시정부 승인 문제를 관철하기 위해 쑨커는 중국공산당의 저우언라이(周恩來)와 제휴하여 내적 분열의 위기를 겪고 있던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을 임시정부 깃발 아래로 뭉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결국 김구(金九)가 이끄는 임시정부 세력과 김원봉(金元鳳)이 이끄는 조선의용군 계열의 조선혁명당 세력이 중국 정부의 임시정부 승인을 전제로 대동 단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전후처리 문제의 어려움을 내세워 “한 치의 영토도 없는 임시정부” 승인을 유보하자는 영국 처칠 총리의 주장에 휘말려 한국 임시정부 승인을 끝까지 유보했다. 중·한문화협회는 비록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 정부의 승인을 얻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한국 독립운동의 정통성이 한국 임시정부로 모아지고 대일 무력투쟁의 총본산으로 광복군 사령부가 설치되는 등 항일을 위한 한·중공투의 역사를 펼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한국의 독립운동사 연구가들은 중·한문화협회가 중국 대륙에서 한국 독립운동과 투쟁에 미친 커다란 기여를 전혀 연구하지도, 평가하지도 않는 실정이다.

 

한중문화협회의 탄생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면서부터 쑨커가 이끌던 중·한문화협회는 대만으로 이주했다. 중·한문화협회의 한국 측 파트너였던 조소앙 선생은 1945년 귀국 후 한·중문화협회를 광복된 한국 땅에 발족시키려고 준비하던 중 한국전쟁 발발로 본인이 납북되면서 한·중문화협회 창립을 보지 못했다. 1958년 조소앙 선생이 납북된 북한 땅에서 생을 마감하자 선생의 유지를 받들던 최용덕 전 공군참모총장(중국공군사관학교 출신)이 1965년 한·중문화협회를 서울에 창립하고 초대회장으로 조소앙 선생을 추서한 후 본인이 제2대 회장에 취임하였다. 서울의 한·중문화협회와 대만의 중·한문화협회는 초기에는 서로 교류했지만 한·중수교 이후 대만과 단교되면서 파트너십이 끝났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쑨원 시대와는 달리 민간우호단체의 명칭을 ‘문화협회’에서 ‘우호협회’로 바꾸고 한·중수교 후에는 양국 간에 우호협회를 새로 창립하여 문화협회의 역할을 대체했다. 하지만 한·중문화협회 7대 회장인 이종찬(李鐘贊)씨(전 국정원장)는 이 시기 서울의 한·중문화협회를 한·중우호협회로 변신시키기보다는 중국과 손잡고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한·중 협력단체로서의 역사성을 지켜나가는 민간기구로 존속하는 길을 택했다. 나는 제8대 회장으로 15년 동안 협회를 이끌다가 작년 7월 명노승(明魯昇) 변호사에게 회장직을 넘기고 한·중문화협회에 병설된 한·중정치외교포럼의 회장을 맡고 있다.

 

올해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 정부가 한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은 “항일을 위한 한·중공투의 당당한 파트너”로서 정당한 지위를 되찾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이렇게 되찾은 한·중 파트너십이 우리 모두의 진정한 광복인 통일한국 건설의 디딤돌로 승화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중국을 상대로 펼친 박근혜 외교의 값진 승리에 박수를 보낸다.

 

필자: 이영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졸업(58학번), 제11대ㆍ12대ㆍ15대 국회의원 및 국회문교공보위원장, 사단법인 한·중문화협회 총재(1998~2014), 한·중정치외교포럼 회장(2014~ ), 한·중정상회담 2회 수행(김대중-강택민, 박근혜-시진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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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략외교와 박근혜 독트린의 필요성

 이 영 일 (한중정치외교포럼회장)

 

1. 들어가면서

 

지금 한국외교는 중대한 기로에 서있다. 중국이 동북아 지역에서 잠재적 패권국(Potential Hegemon)으로 발돋움, 미중관계가 경쟁, 갈등관계로 변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21세기의 두 번째 10년의 시작과 더불어 자국의 발전을 평화적 굴기(崛起)라고 설명하면서 GDP 총량규모에서 일본을 제치고 G2로 부상하였다.

 

이때부터 세계전략가들의 눈에는 중국이 금후 제2차 세계대전종전이래 지구최강자로 군림해온 미국에 맞서 패권(覇權)을 추구할 국가로 투사되면서 다만 그 접근방식과 전개양식이 어떻게 표현될 것인가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국가주석에 취임함과 동시에 내치외교에서 중국의 본심을 드러냈다. 우선 내치 면에서는 개혁의 심화를 통해 고속성장의 역기능을 극복하면서 전면적인 부패척결을 겨냥하는 의법치국(依法治國)을 강조, 내부권력 다잡기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동시에 대외정책으로는 미국을 상대로 신형대국관계를 주장, 미국이 중국을 대등한 강국으로 대접해줄 것을 요구하는 한편 아시아안보는 아시아인들이 주도할 것을 강조하고 나아가 이른바 일대일로(一帶一路)로 알려진 신 실크로드 정책을 발표했다.

또 신 실크로드 정책추진에 필요한 물질적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 거금을 아시아 인프라투자은행(Asia Infra-Invest Bank:AIIB)과 신 브릭스 은행(New BRIGS Bank)설립에 투자하고 있다. 필자는 본고에서 중국의 내치보다는 중국의 새로운 대외정책, 그것도 전략가들의 눈에 중국식 패권추구로 평가될 일대일로로 불리는 신 실크로드 정책(New Silk Road Initiative)을 분석하면서 이러한 상황에 대처할 한국외교의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2. 시진핑 주석의 일대일로(一帶一路:이따이이루)정책

 

시진핑 주석은 취임과 동시에 중국의 대외노선을 덩샤오핑(鄧小平)이래의 도광양회(韜光養晦)에 머물지 않고 G2로 성장한 국력에 걸맞게 세계정치에서 발언권과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이른바 유소작위(有所作爲)의 태세를 갖추는 한편, 가능한 한 미국과 충돌하는 것을 피하면서 중국을 장래의 잠재적 패권국으로 키워나갈 전략방침으로 신 실크로드 정책을 입안 추진하고 있다.

 

이 정책은 현재의 내치외교상 중국이 당면한 난국돌파를 위해 세 가지의 장점을 지닌다. 첫째 투자과잉과 내수부진, 수출 감소로 고속성장이 둔화되고 있는 중국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을 수 있다는 점이다. 중국경제는 현재 지역, 계층, 도농, 동서 간의 심각한 격차, 소수민족의 분란 등으로 대내적 위기가 심화되고 수출도 갈수록 어려워지는데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는 방도로 흔히 신창타이(新常態)라고 부르는 경제고속성장의 조정국면에 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그간 선진국과 후진국간의 격차해소를 목표로 유엔통상개발회의가 오랫동안 추진해온 개발도상국 인프라 개발의 새로운 기회를 중국이 주도하겠다는 것이다. 즉 유엔의 목적과제 해결에 기여하겠다는 것이다. 특히 그간 중국은 외교적으로 아시아, 아프리카 등 개발도상국들의 비동맹 중립운동에 어께를 함께 하면서 이들의 맹주적 지위를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셋째로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은 이것이 성공할 경우 범지구적 규모로 미국과 경쟁을 벌이는 중국식 패권전략이 되면서도 국제사회에 투영되는 정책의 모습은 결코 반미(反美)가 아니다. 만일 일대일로 정책이 반미로 투영된다면 AIIB 창설에 가입할 국가는 많지 않거나 자칫 와해될 수도 있다. 중국 베이징 대학의 왕지스(王緝思)교수가 현시점에서 중국이 반미동맹을 전개한다면 여기에 가세할 국가는 지구상에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 한 바 있다.

중국은 이제 중국 시안(西安)에서부터 중앙아시아를 거쳐 러시아를 경유, 유럽으로 뻗는 북방실크로드와 중국 쿤밍(昆明)에서 미얀마를 거쳐 인도, 중동, 아프리카로 이어지는 남방실크로드의 넓은 지역에서 미국과 일본이 참가하지 않는 가운데 57개국이 참가하는 AIIB창립에 성공, 바야흐로 중국식 패권추구의 장정(長程)에 오르고 있다.

 

3.동북아시아의 전략상황평가.

 

 미국의 국제정치학자중에서 공격적 현실주의를 대표하는 존 미어세이머(John J. Mearsheimer)교수는 그의 명저 ⟦강대국 국제정치의 비극⟧에서 미국은 미국에 맞설 잠재적 패권국가의 출현을 막기 위해 미국과 지역적으로 연접되지 않은 유럽전쟁에 두 차례나 참전, 독일의 패권추구를 저지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냉전적 대치상황 속에서도 소련에 대한 봉쇄정책을 고수, 소련의 해체를 주도한 미국대외정책의 역사를 분석하고 이 정책은 중국의 패권추구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는 미국의 아시아 중시(Pivot to Asia)를 강조하는 재 균형 전략(Re-balancing Strategy)역시 중국의 패권도전에 대비한 포석이라면서 1945년 이래 세계정치의 패권을 유지해온 미국이 국제정치에서 자기가 누리는 지위를 흔들리게 할 도전을 용납하지 않는 것은 대국으로서의 미국의 숙명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 오바마 행정부는 중국이 경제력에 상응하는 국가로서 세계정치에서 일정한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의 이익에 역행하는 균형파괴는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이를 위한 여건으로 미일동맹을 강화하는 한편 기왕의 안보동맹국으로서 한국이 일본과 더불어 미국이 추구하는 재 균형체제추진의 일원으로 역할해주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중국은 미국의 이러한 움직임에 맞서 상하이협력기구(SCO)를 구성함과 동시에 러시아와의 협력관계를 새롭게 강화하는 추세다. 이런 가파른 전략상황 하에서 박근혜 정부가 중국이 주도하는 아시아 인프라 투자은행(AIIB)에 투자국으로 참가를 결정한 것은 실로 용기 있는 결정이었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중국정부가 일대일로나 AIIB에 가지고 있는 잠재적 의도에 구태여 개의(介意)하기보다는 중국이 AIIB를 통해 추진하는 개발도상국들의 인프라 개발사업을 남달리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한국은 그간 중동이나 아프리카, 특히 리비아 등지에서 수로 공사나 발전설비 등 이른바 인프라 분야에서 가장 많은 노하우를 축적한 대표적인 아시아 국가라는 사실이다.

 

둘째로 그간 박근혜정부가 추진해온 동북아평화협력구상이나 유라시안 이니셔티브(Eurasian Initiative)도 중국이 말하는 북방실크로드와 정책방향을 거의 같이하거나 겹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셋째로는 역사적으로 보아도 실크로드의 동쪽 출발지점은 7세기경부터 신라의 수도 경주(慶州)였으며 신라 승려 혜초(慧超)가 왕오천축국전을 기술한 여행경로가 바로 실크로드였기 때문에 같은 아시아 국가로서 중국정부가 추진하는 실크로드 정책에 한국이 편승할 역사적 정당성이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한국은 통일문제를 안고 있는 분단국가로서 인프라 개발과 건설이 시급히 필요한 곳은 한국이 아닌 북한이기 때문에 한국의 참여는 한반도 전체의 AIIB 참여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고 보아야 한다. 북한은 현재 유엔의 제재와 더불어 AIIB에 참여할 조건의 미비로 참여자체가 어려운 실정이다.

 

4. 맺으면서

 

박근혜 정부는 어느 경우에나 AIIB 참여가 전통적인 안보동맹국인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역행하는 선택이어서는 안 된다. 동시에 한국, 중국과 더불어 동북아시아 3국 중의 하나인 일본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선택이어서도 안 된다. 한국은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라는 목적과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변국가들 모두와 우호협력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지리(地理)가 곧 운명이다”(Geography is destiny)는 국제정치의 격률을 염두에 둘 때 우리는 이 시점에서 국가안보와 경제정책을 분리해서 주변정세변화에 대처해야 한다. 이것은 급변하는 내외정세 속에서 우리의 입장에 대한 주변국들의 이해를 구할 명분이기 때문이다.

동북아시아에서 세력전이(勢力轉移)가 진행되는 기간을 긴 호흡으로 내다보면서 안보와 경제를 분리, 대처하는 것이 우리의 갈 길일 진데 이런 입장을 확고한 한국의 외교원칙으로 세우고 이를 「박근혜 독트린」으로 발표하는 것은 시급히 결단을 필요로 하는 과제로 보인다.

 

오늘날 한반도 정세는 북한핵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는 가운데 주변국가 모두를 만족시킬 외교정책의 대안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북한의 핵 고집으로 유엔의 제재결의가 시행중인데다가 핵문제 해결을 주도할 국가들의 입장도 미국과 중국 간에 책임 전가논쟁만 진행될 뿐 실질적 해결을 밀고나갈 주체가 누구인지조차 갈수록 불분명해지는 상황이다.

 

상황이 이렇게 얽힐 경우 결국 핵문제 해결도 해결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당사자에게 맡겨질 수밖에 없는 상황의 도래에도 우리는 대비해야 한다. 이점에서 AIIB의 한국참여는 북한과의 대화협상을 위해서도 필요한 결단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그때그때 당면한 문제를 적당히 때우는 것만을 능사로 여기는 외교가 아니라 한국을 주변국들 모두에게 적극 협력할 주체로 만드는 능동적이고 지혜로운 통일외교다. 여기에 즉응할 통일외교리더십의 구축이 진실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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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19 혁명 55주년 국립묘지참배를 마치고

 

                                                  이 영 일

 

 필자는 4.19혁명 55주년을 맞는 이른 아침 7시30분, 4월회 회원들에게 배정된 시간에 4.19민주혁명묘지를 참배, 분향 한 후 옛 학우들의 무덤과 영정보관소를 살핀 후 함께 온 동지들과 해장국으로 아침을 마치고 곧장 교회로 갔다. 내가 4.19 민주혁명묘소를 꼬박 꼬박 참석한지는 몇 년 안 된다.

나는 1963년 쿠데타 정권이 수여하는 건국공로훈장의 수상거부를 대학신문에 성명으로 발표한 후 군사권위주의정권이 계속된 30년간 정부에서 주관하는 일체의 4.19관련행사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 당시에는 4.19가 실패한 혁명처럼 느껴졌고 그래서인지 서가(書架)에 촘촘히 끼여 있는 민주주의 관련 서적들마저 희미한 옛 연인의 추억처럼 의미 없어 보였다.

 

 그러나 4.19날만 되면 4.19 당일 현장에서 나와 함께 서울문리대 학생데모의 선두에서 달리다가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앞에서 총을 맞고 타계한 문리대 수학과 3학년의 친구 김치호(金致浩)의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서 떠나지 않았다. 김치호는 당일 나와 함께 종로5가 지경에서 진압경찰에 함께 억류되어 시청광장으로 끌려갔다. 거기서 학생들을 일단 풀어주자 경찰봉에 안경이 깨지면서 왼쪽 눈자위를 다쳐 피 흘리는 나를 서울대학병원 안과로 데리고 가서 진료를 받게 한 후 도서관에 둔 가방을 찾아오겠다면서 뛰어나간 것이 내가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는 도서관이 아닌 경무대 쪽으로 바로 뛰어갔다가 참변을 당했다.

 그는 나와 학과는 달랐지만 문리대 기독학생회(SCA)에서 만났고 그 후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함께 감상한 것이 인연이 되어 대학교정에서 만나면 가끔 레시타티브로 대화를 나누던 좋은 친구였다. 나를 자기가 멤버인 남산 합창단에 함께 나가자고 권유하다가 먼저 타계했다. 내 부모 말고 성묘해야할 친구가 있다면 바로 그 친군데 정부주관 행사가 싫다고 4.19묘지에 안 가는 것이 항상 나의 맘을 무겁게 했다.

 

 나의 60년대 10년 동안은 인생의 시련기였다. 두어 차례 투옥되어 540여일을 서대문교도소에서 보냈고 신원조회에 걸려 취업 길도 막혔던 답답하고 막막한 시절이었다. 나는 대학연구소의 연구원이라는 타이틀로 도서관에 다니면서 쿠데타나 학생혁명 등 신생국 근대화과정을 소재로 한 책들만 줄곧 읽어대었다. 흔히 말하는 신생국에 관한 비교정치연구서들이었다. 여기서 나는 4.19는 실패한 혁명이 아니라 성공한 혁명이었다는 결론을 얻었다. 한국의 1960년이라는 시간과 분단된 후진국이라는 공간의 제약 속에 갇혀있던 내가 지식과 정보의 양이 크게 늘어나면서부터 민주주의와 국가발전을 보는 시각에 큰 변화가 생겼다.4.19이후에 전개된 한국사회의 현상을 읽고 평가하는 관점도 달라졌다.

 

당시 한국은 오늘날 아프리카의 가나 수준의 경제력밖에 없을 만큼 가난했다. 그러한 한국이 경제도약을 위한 선행조건을 충족시켜 국력을 기르려면 권위주의 정권이 출현할 도리밖에 없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군사권위주의 정권들이 출현하기에 앞서 4.19를 통해 우리 국민 모두가 나라의 주권자로서의 의식과 지위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권위주의 정권들은 중남미나 아프리카, 중동에서와 같은 부패독재정권으로 전락할 수 없었다. 개발독재라는 표현이 나올 만큼 한국의 권위주의 정권들은 국력배양과 신장에 크게 공헌하면서도 주권자인 국민을 두려워했다. 젊은 사람들의 피로 국민들을 주권자가 되게 하였고 이 주권자의 지위를 지켰기 때문이다.

 

수천 년의 역사에서 1인의 자유는 있었지만 만인의 자유가 없던 나라, 왕권은 있었으나 국권이 없었던 토양위에서 국민을 주권자로 섬기는 민주정치가 이루어진 것이다. 4.19후에 성립한 군사권위주의 정권들은 중요한 정책을 비민주적, 권위주의적으로 결정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주권자로서의 국민을 결코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못했다. 국민들의 호응을 얻는 학생들의 간고한 감시와 저항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군사권위주의 정권들은 스스로 민주적 정통성의 부족을 메꿔 보기위해, 국민들에게 점수를 따기 위한 국력배양에 주력했던 것이다. 그것이 마침내는 한국을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루는데 성공한 국가반열에 오르게 했던 것이다. 한국인과 중국인을 비교하는 말 가운데 한국 사람들은 중국인들과는 달리 불리(不利)는 잘 견디지만 불의(不義)에는 못 참는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날 중국인들은 주권을 공산당(共産黨)에 맡겨놓았지만 우리 국민들은 주권자의 자리를 확실히 지키고 있다. 이것이 4.19의 가장 큰 공로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서부터 나는 다시 4.19 기념일에 묘소참배를 빠트리지 않게 되었다. 김치호 묘소도 참배, 성묘한다.

 

 최근 인간의 행복지수를 따지는 미국행태연구소의 자료를 보면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나라에 태어난 사람이 그렇지 않은 나라에 태어난 사람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는 것이다. 주권재민이 갖는 중요한 의미다. 4.19는 그러나 남한 사람에게만 주권을 되찾게 해주었을 뿐 북한 2500만 동포들은 아직도 주권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상황을 살고 있다. 결국 조국의 통일은 북한 동포들도 주권자가 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북한의 4.19가 곧 통일일 것이다.

 

 이날 4.19영령 봉안소에는 384위의 영령사진이 안치되어있었다. 1960년대에는 180여명이었지만 지금은 부상자나 기타 유공자들이 추가되었다는 것이다. 주권재민(主權在民)을 위한 대의에 순의(殉義)하신 분들이다. 확실한 국민적 합의로 그들의 순의를 국민들은 하나같이 추모한다. 이렇게 4.19혁명은 그 55년의 흐름을 이땅에서, 우리가 만드는 역사의 현장에서 여전히 자랑스럽게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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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36일 새로운 한국을 위한 국민운동산하 통일준비국민운동본부 세미나에서 행한 이영일 본부장의 기조연설전문(이 세미나는 국회의원회관관 29회의실에서 13시부터 17시까지 비공개로 개최)

 

       통일준비국민운동 본부 세미나 기조연설

                                                                                                               이 영 일

 

지난해 우리 국민들은 세월호 참사라고 하는 현대사의 터무니없는 비극을 목도하면서 우리 국민들은 이 나라가 더 이상 4.16이전의 상태로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는 각성을 하게 되었고 이러한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여 우리 사회의 각계각층의 원로 분들이 새로운 한국을 위한 국민운동에 떨쳐나섰다. 이 운동체가 중심이 되고 여기에 그간 우리 사회의 개혁과 나라 바로 세우기에 공헌해온 불교, 기독교, 천주교 등의 종교지도자들이 동참하는 가운데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고질적 적폐를 파헤쳐 바로잡는 운동을 전개했다. 관피아 척결, 역사바로잡기, 통진당 사건에 대한 헌재판결 촉구, 교육개혁운동, 법질서확립운동, 군납비리척결촉구, 경제난국극복과 합리적인 복지정책 등을 부르짖으면서 국민적 합의를 확대하는 노력을 지난 한 해 동안 펼쳐왔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새로운 한국을 위한 국민운동 지도부는 오늘의 국민운동이 단순히 국내개혁에만 치중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우리가 추구하는 국민운동의 궁극적 목표가 조국통일에 기여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공감에서 통일위원회를 국민운동기구의 하나로 발족시켰다. 통일위원회는 제3차에 걸친 공개, 비공개 회의를 통해 정부의 통일준비위원회 구성에 발맞춰 민간차원의 통일준비운동이 수반되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통일위원회를 통일준비국민운동본부로 개편했다.

 

정부의 통일준비위원회는 민관의 합동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위원장이 현직 대통령이기 때문에 통일문제에 관한 대내외적 의사표시에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또 이 위원회는 운동조직이라기 보다는 전략연구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통일에 관한 국민적 기대와 소망을 현실적으로 담아내는데도 한계가 있다. 그간 정부통일준비위원회의 활동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이러한 한계에 메이지 않을 국민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고 민간차원의 통일준비가 어느 면에서는 더 긴급하고 절실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러한 필요성에서 오늘 우리는 현시점에서 통일운동의 실질적 주체가 되어야 각계각층의 지도층 인사들을 이 자리에 모셨다. 탈북민 대표들을 비롯해서 북한 동포들의 인권개선이라는 구체적이고 현실적 문제를 다루는 단체대표들, 북한 동포들의 마음을 대한민국 주도의 통일을 바라도록 유도하는데 앞장서온 운동가들도 초청했다. 제가 보기에 분단시대의 한국에서 자유통일을 갈망하는 각 분야의 지도자들이 대체로 오늘 이 자리를 채우게 되었다.

 

오늘 저는 통일준비국민운동을 대표하여 통일 상황에 대한 나름대로의 평가를 토대로 국민운동의 방향을 함께 모색하고자 한다. 우리는 우선 20세기가 끝나가던 1990년의 10년 동안으로 우리의 시각을 옮겨 볼 때 세계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두 개의 큰 사건이 발생했다. 하나는 소련제국의 붕괴였고 다른 하나는 독일의 통일이었다. 21세기의 세계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두 개의 큰 사건이 누구의 예측이나 전망도 없이 갑자기 일어났다. 저도 국제정치를 공부했지만 이러한 예측이나 전망을 내놓은 분을 만나거나 보거나 들은 일도 없었다.

 

사후적으로 보면 이런 상황을 가져올 주객관적 조건들이 성숙하고 있었지만 우리가 느끼지 못했고 보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한반도의 통일문제의 해결도 이러한 문맥(Context)에서 검토해야 한다. 그러나 독일은 시기는 몰랐지만 통일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전제하에 통일능력을 비축하고 정책을 준비해왔다. 결국 미래는 준비하는 자의 것이었다.

 

오늘의 한반도 내외정세도 바야흐로 통일준비를 서둘러야 할 상황이다. 그간 북한은 핵과 미사일개발에 주력하는 선군 세습권력의 지배 하에서 폭력과 테러로 한반도 정세를 악화시킬 군비확충에만 광분했다. 그러면서도 핵무장과 경제발전을 병진시킨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 길은 북한이 걸어서는 안 될, 역사발전에 역행하는 길이었다. 국제적인 고립에의 길이었으며 국제사회의 지원과 협력을 차단하는 길이었다. 이 결과 북한인민을 장악할 능력은 매년 감소하고 있으며 조만간 정권존립의 위기가 도래할 형편이다.

 

몽고의 전 대통령 푼살마긴 오치르바트 대통령이 북한 김정은에게 국가안보는 핵이 아니라 두둑해진 국민들의 지갑에서 나온다.”고 충고했다. 심지어 쿠바의 카스트로까지도 20134월 김정은이 서울과 워싱턴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위협했을 때 어리석은 전쟁 놀음을 집어치우라고 공개 경고했다. 소련공산당수 고르바초프도 동독창건 40주년 기념식전이 열린 198910월 베를린에서 연설에서 역사는 뒤처지는 지도자를 벌한다. 역사는 자신의 길을 방해하는 자를 엄하게 다스린다.“고 말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최근 북한은 제풀에 넘어질 정권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저주도 아니고 농담도 아니다. 객관적인 정세평가에서 나온 이야기다. 유엔은 총회결의로서 북한의 독재자를 인권유린의 극악한 지도자로 규정, 국제 형사 재판소에 넘겨야 한다고 결의했고 안전보장이사회의 토론의제로 선정했다. 이것이 오늘의 북한을 보는 외부세계의 태도다.

 

오늘날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고 거기에 매달리는 한 북한의 붕괴는 필연적이다. 동서독이 통일한 것도 핵이 없었기 때문이며 쿠바가 미국과 수교하게 된 것도 핵이 없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통일 후에도 핵을 갖지 않고 개혁개방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새로운 베트남으로 미국과 국교를 트고 IMF의 지원을 받으면서 빠른 발전을 이루고 있다. 미국은 쿠바와의 수교를 통해 미주대륙에서 냉전시대를 완전 끝냈다. 지금 미국에 남아있는 마지막의 냉전지대는 북한뿐이다. 북한은 핵을 포기하면 미국과의l 관계도 풀리고 중국과의 썰렁한 관계도 해소되고 국제사회의 지원은 물론이거니와 한국의 실질적인 지원도 얻게 된다. 핵이 북한을 살리는 길이 아니라 망치는 길이라는 인식이 북한 내부에서 싹터 오르는 것도 시간문제다. 특히 최근에 눈에 띄는 북한의 시장화 움직임은 북한지도부의 각성에서 나온 위로부터의 개혁이 아니고 장마당을 통해서라도 명줄을 이어가려는 북한주민들의 아래로부터에서 나온 개혁의 흐름이다. 결국 스탈린식 계획경제는 나날이 힘을 잃고 시장경제가 오늘의 북한에서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저는 차제에 봄꽃을 비유로 들고 싶다. 봄꽃은 꼭 15도가 되어야 핀다.(Critical Mass) 지금 북한의 온도는 봄꽃 만개시기를 대입하면 몇 도 쯤 일까? 제가 보기엔 13도정도 같다. 앞으로 2도를 더 올리는 것이 한국의 일인데 그 가운데 많은 부분에서 통일준비국민운동이 맡아야 할 일이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첫째 목숨을 걸고 자유대한을 선택한 탈북민들이 국민들의 사랑 속에서 안착에 성공하도록 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주류국민대열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독일 메르켈 수상은 동독출신이고 대통령 요하임 가우크도 동독출신이다. 탈북민들이 대한민국에서 모두 성공하고 대한민국을 선택한 일이 아주 잘된 일로 자부하도록 만드는 만큼 중요한 통일준비는 없다고 보는데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 문제도 오늘 충분히 토론되어야 한다.

 

둘째는 북한의 정권이 아닌 북한 주민을 돕는 방도를 강구해야 한다. 인도적 차원의 대북지원은 정부가 확정한 방침이지만 정부는 모든 문제를 북한정권을 상대로 추진할 도리밖에 없다. 정권과 구별되는 인민들을 직접 지원하는 방도를 깊이 있게 연구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문제도 이 자리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특히 탈북민들이 북한에 남겨진 가족 친지들에게 송금할 수 있는 방도를 국제기구들을 통하거나 남북대화를 통해 해결하는 방도도 강구해야 한다.

 

셋째는 북한인권 개선을 위해 국회가 조속히 북한인권법을 제정하도록 촉구하고 인권법 제정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에 대한 국민적 비판운동을 국민운동차원에서 조직하는 것도 시급한 과제일 것이다. 아울러 이산가족 찾기도 단순히 노부모들이 만났다가 헤어지는 차원을 넘어서서 노후를 뜻있게 가족의 품에서 마칠 수 있도록 재결합하는 방도를 강구하고 납북자, 국군포로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협상적 해결을 모색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 인권에 관한 유엔총회의의 결의를 적극 활용해야 할 것이다.

 

넷째는 국내에서 암약하는 종북잔당을 철저히 색출 배제하는 방법도 검토해야 한다. 우리 헌법재판소는 판결로서 국회에 침투한 종북 세력의 정치적 교두보를 무너뜨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종북세력의 정치적 지도부를 단죄한 것은 자유통일운동사에 기록될 자랑스러운 성과의 하나다. 이제 노동계, 문화계, 교육계, 언론계, 종교계에 침투한 종북 잔재를 색출, 규탄하는 것은 국민의 몫이다. 여기에는 새로운 한국을 위한 국민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조직이 협심 협력해야할 과제다. 특히 그간 교육개혁차원에서 자율적으로 추진한 투쟁의 성과들을 거울삼아 언론, 문화, 종교 분야로도 투쟁의 전역을 넓혀가야 한다.

 

다섯째로는 북한 동포들이 한국 사람들의 동포애를 느낄 수 있게 하는 국민운동도 모색해야 한다. 초등학교 청소년들이 통일저금통을 만들도록 권면하는 것도 시범사업으로 생각할 수 있다. 북한 동포들에게 남조선에서는 어린 학생들까지도 통일되면 북한동포를 돕자는 모금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는 것도 자유통일을 갈망하는 북한 동포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것이다.

 

저는 이 자리에서 일반적인 방향만을 말씀드렸지만 보다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방안들이 3개의 세미나 토론에서 적출되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제시된 방안들은 국민운동지도부가 국민운동 사업으로 확정함과 동시에 정부 측에 필요한 협력과 조치를 건의하고 국론확산운동을 전국적으로 펼쳐나갈 것이다. 아무쪼록 유익하고 뜻있는 토론이 펼쳐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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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관계에 대한 조지프 나이 교수의 특강 청취소감 --미국의 시대는 끝나고 있는가?(한중정치외교포럼 밴드에 올렸다)

                                                     

                                             이영일 한중정치외교포럼 회장

 

1. 들어가면서

 

2014년이 끝나는 12월 10일 한국고등교육재단은 미국 하바드 대학 명예교수이며 전 미 국방부부장관과 국무성 차관보를 역임, 미국의 외교안보분야에서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석학 조지프 나이(Joseph Nye)교수를 초청, “미국의 시대는 끝나고 있는가?” 라는 주제로 특강을 개최했다.

오후 3시에 시작될 강의장 언저리는 청중들로 붐볐다. 전 직 외교관들이 20석 이상의 좌석을 미리 예약해두어 앞좌석을 잡기는 어려웠다. 다행히 나를 알아본 직원이 자리를 마련해줘서 좋은 자리에 앉았다. 동시통역을 들을 수 있는 이어폰이 없는 좌석을 대학생들이 가득 매운 것을 보면서 나이교수의 평판이 얼마나 높은지를 체감하는 한편 우리나라 대학생들의 영어 이해수준이 높아졌고 해외석학들의 강연회에 이처럼 시간을 내서 참여하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것도 우리나라 선진화의 좋은 징조로 보여 내심 즐거웠다.

 

이글은 당시 강의메모를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많은 부분이 생략되기도 했고 부분적으로 잘 못 들은 부분도 있고 내 나름대로 이해해서 기록한 부분도 있다. Nye 교수는 차분한 목소리로 특유의 논리성을 과시하면서 강의를 펼쳤다.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미국 타임과 라이프지의 경영자였던 Henry Luce가 1950년대 중반 ‘미국의 세기’라는 말을 처음 썼을 때 당시 미국은 이 말을 지나친 표현이라고 해서 수용을 꺼렸는데 그때로부터 60여년이 흘러 지난 4월 영국의 Financial Times는 중국이 미국을 2014년을 기점으로 추월할 것이라고 보도했고 World Bank는 구매력 기준으로 보면 중국은 이미 미국을 앞질렀다는 것이다. Joseph Stiglitz교수도 중국이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말했고 심지어 영국의 Jacques martin같은 사람은 When China rules the World라는 저서를 통해 중국시대의 도래를 강조했다.

 

흔히 사람들은 고대 아테네의 투기디데스의 세력전이(勢力轉移)에 대한 이야기를 교훈으로 내세운다. 즉 한 국가가 흥기(興起)하면 경쟁국가는 전쟁을 통해 몰락한다는 것으로 페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의 흥기에 대한 스파르타의 두려움에서 일어난 전쟁이었고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흥기에 대한 영국의 두려움이 가져온 전쟁이라고 예시하면서 미국에 대한 중국의 흥기가 마치 1차 대전이 일어난 1914년의 상황과 2014년의 현재상황이 그때와 유사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를 하나씩 논리적으로 반박했다.

 

2.나이교수의 반론

 

미국은 중국이 빠른 시일 내에 경제적으로 발전, 13억 인구를 부양해내는데 성공한 노력을 평가하고 환영한다. 13억 인구가 빈곤상태에서 세계각지로 뿌려지는 상황은 끔찍한 일로서 세계정세를 불안정케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중국이 이룬 발전을 미국이 높게 평가하는 소이다. 그러나 중국이 발전한다고 해서 미국이 쇠락하는가? 그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인간에게 생로병사가 있듯이 국가의 역사도 흥망성쇠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흥망성쇠의 주기를 알기는 힘들다.

영국은 섬나라지만 산업혁명으로 세계를 재패하였다. 그러나 영국이 누린 패권은 2차세계대전전에 이미 미국으로 옮겨졌다. 당시 미국은 세계 GNP의 25%를 생산했는데 제2세계대전으로 전 유럽이 전쟁의 폐허였기 때문에 1950년대에는 세계 GNP의 50%를 생산했다. 그러나 전재복구가 끝나면서부터 미국은 다시 GNP의 25%를 생산하고 있으며 그 추세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고 앞으로는 18%까지 내려갈 수도 있다.

 

미국의 역량을 1945년부터 1970년대만을 떼어서 보기보다는 미국 역사의 큰 흐름에서 이해하는 것이 옳다. 그 당시는 국제체제가 단극체제로 보였지만 각국경제가 안정을 되찾으면서 국제체제는 다극화로 움직이는 것이다. 1960년대 초에는 소련이 스푸트닉을 미국보다 먼저 발사하면서 후르시초프는 미국의 시대는 끝났다고 연설했으며 당시 여론도 소련의 우세를 점쳤다. 1980년대는 일본경제의 흥기로 일본이 미국을 앞지른다는 저서가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한때 일본경제의 빠른 성장에 대한 공포감이 확산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쇠락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데 소련과 일본의 처지는 전혀 달라져 있지 않는가. 한 국가의 쇠락을 측정하려면 쇠락의 상대적 기준과 절대적 기준이 있을 것이다. 상대적 기준은 좋은 예로 영국과 화란을 들 수 있다. 산업혁명이전의 화란은 영국보다 강국이었다. 그런데 산업혁명으로 영국의 국력이 화란을 앞질렀다. 화란은 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쇠락한 것이다.

절대적 기준은 한 국가가 부정부패로 내부의 응집력이 해체되어 로마가 게르만이라는 야만족에게 힘없이 붕괴되는 것처럼 내적 자기몰락의 경우에 적용되는 기준이다. 오늘날 미국과 중국을 비교할 때 절대적 기준으로나 상대적 기준의 어느 척도를 적용해도 중국은 미국에 앞서지도 않았고 그럴 가능성도 없다. 미국은 멸망기의 로마제국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나라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장래의 가능성을 놓고 국력비교를 할 경우 주요기준으로 인구, 에너지, 창의력을 보는 경우가 많다. 인구로 보면 지금 중국이 인구 제1위국가다. 제2위는 인도 이며 미국은 3위다. 앞으로 2040년 되면 인도인구가 1위, 중국이 2위 미국은 3위를 그대로 유지할 것이다. 둘째 기준인 에너지를 보면 미국은 세일가스 때문에 중동유전에 대한 의존도가 줄어들면서 거의 자급단계로 가기 때문에 중국이나 인도와는 비교가 안 된다. 중국은 중동에서 에너지를 수송해오는 긴 수송로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창의력 부면을 보면 미국은 이민을 허용하는 개방체제를 지니기 때문에 70억 인구에서 새로운 창의력을 조달하고 이를 뒷받침할 대학과 연구시설이 짜임새 있게 갖춰져 있다. 중국이 이 수준에 도달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새로운 기술 혁신혁명이 미국에서는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절대적 기준으로 본 미국의 쇠락은 있 수 없다.

다만 미국이 20세기 초에 누린 것만큼의 부를 창조하는 것은 여타 국가들도 발전경쟁에 뛰어들고 있기 때문에 어려워진다. 미국의 우위가 지닌 절대성은 상대성으로 대체될 것이며 미국의 일방주의 외교는 협력주의로 바뀌면서 다극화 현상이 예상된다. 나는 소프트 파워 이론을 발표한 바 있는데 힘으로 풀어야 할 문제를 외교로, 문화적 우위로 풀자는 취지이며 결코 힘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힘이 있는 자만이 소프트 파워를 효과적으로 구사한다. 그러나 적절한 힘과 소프트 파워의 결합은 싱가포르와 같은 소프트 파워정책으로 성공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3. 중국을 보는 시각

 

미국은 세계경제의 발전을 도모할 국제체제를 강화하는데 힘써왔으며 2001년 중국을 세계무역기구(WTO)의 일원으로 가입토록 했다. 중국은 WTO가입을 계기로 경제발전의 전기를 맞이했으며 미국을 따라 올만큼 경제발전의 전망도 생겼다. 경제발전은 국력신장을 가져온다. 그러나 국력이란 자국이 원하는 것을 다른 나라로 하여금 하게 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할 때 중국이 오늘의 국제체제에서 그러한 힘이 있는가. 중국을 따르는 집단적인 공동체가 늘어난다면 그것은 파워가 강해진 결과라고 말 할 수 있다. 중국은 총량지표에서 독일이나 일본을 앞섰다.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계속 7.5%를 유지하고 미국의 그것이 2.5%로 머물러 있다면 중국은 미국을 추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WTO의 회원국인 중국이 7.5%의 성장률을 계속 유지할 수는 없다. Somers는 중국의 고도성장은 지속될 수 없고 어느 시점에 가면 정상성장률로 되돌아오기 마련이며 10년이 지나면 중국도 3.5%대로 성장률이 내려갈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의 총량규모가 커져 미국을 앞지르려면 1인당 소득에서도 앞서야 하는데 미국의 1인당 소득은 중국보다 4배나 크다.

 

또 중국이 일본이나 독일을 앞섰다고 하지만 교역통계에서 보면 부가가치가 낮은 것의 총화에서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휴대전화를 많이 생산하지만 부품의 대부분을 수입하여 완제품으로 조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국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낮다고 말하고 일자리는 많이 늘어나지만 큰 벌이를 할 자리는 적다고 지적했다. 지금 상황을 보면 중국에 투자한 해외자본가들이 차지하는 몫이 중국에 남는 것보다 훨씬 크다. 따라서 총량으로만 일본이나 독일을 제쳤다는 것이나 구매력으로 앞선다는 표현의 의미를 되씹어 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Nye교수는 이어 한국도 1인당 GNP가 6000달러에서 7000달러일 때까지만 해도 권위주의적 국민지배가 가능했지만 10,000 달러를 넘어서면서부터 정부의 일방적인 국민장악력이 떨어졌다고 회고하면서 중국도 1인당 GNP가 10,000달러를 넘어선 후에도 현재와 같은 통제체제가 가능할 것인지에 의문을 던지면서 오늘날 시진핑 정부가 추진하는 반부패투쟁은 중국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지만 부패가 나오는 구조를 그대로 두고 인적쇄신에만 역점을 두는 반부패투쟁은 그 성과에 한계가 있을 것이며 인민해방군 예산보다 더 많은 공안예산이 편성되고 있는 현실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중국은 현재 일본보다 더 앞서기를 원하고 동남아 지역에 대해서도 핵심이익을 내세우면서 영향력을 키우고 있지만 베트남이나 필리핀의 반발을 유발하고 일본의 대중국투자가 줄어드는 추세라고 지적했다. 동시에 Nye교수는 한국인들에게 들으라는 듯 미국은 아베노믹스가 아무리 실패하더라도 미일협력은 계속 강력히 유지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본 로비 때문에 대표적인 친일 미국학자로 정평이 나있다.

 

4. 평가

 

Nye 교수의 특강이 갑자기 한국고등교육재단주최로 열린 배경은 알 길이 없고 묻지도 않았다. 그러나 한미관계와 한중관계에 대한 최근 언론들의 보도태도, 즉 시진핑 방한이후 한국의 친중화(親中化) 가능성이 일고 있다는 풍문에 따른 워싱턴의 우려에서 나온 조치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Nye 교수의 지론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고 이미 그의 여러 논문들에게 밝혀진 것들이었다. 다만 그의 소견을 한국의 일반대중을 상대로 체계적으로 발표한 점에서 특별히 주목을 받는 것에 불과하다. 한국의 친중화 가능성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반미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굳건한 한미동맹 때문에 중국의 입장에서 한국의 전략가치가 높아졌다는 사실을 한국 국민들은 너나없이 잘 알고 있다.

중국학자들은 그간 기회 있을 때마다 한미군사동맹을 냉전의 유산이라고 비판하지만 원교근공(遠交近攻)이 중국의 주요주변국전략이었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을진대 한국은 미국과의 안보협력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과 싸웠던 베트남이 다시 미국과 복교하는 것을 보면 동아시아 제국의 중국관의 일면을 읽을 수 있다.

 

특히 한국은 북한의 핵문제가 안보위협으로 존재하는 한 한미동맹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것이다. 오히려 미국 국회가 금후 10년간 국방예산을 삭감하는 추세이기 한미동맹에도 불구하고 대한방위공약을 미국이 감당할 수 있을 것인지를 우리는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에 관해서 Nye교수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고 질의응답사회를 맡은 김병국 교수도 관련된 토론을 잘 유도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었다.

 

그러나 현재 한중관계는 경제면에서 협력의 규모가 시진핑 주석이 지난 7월 방한 시 서울대학교 강연에서 밝힌 대로 한미교역액, 한일교역액, 한·유럽교역액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아졌고 한국의 대 중국무역의존도는 한국전체무역액의 26.1%인데 비해 중국의 전체 무역액 중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4% 수준이다. 따라서 한국은 그간 미국, 유럽, 중남미국가들과의 FTA를 통해 협력의 다각화를 추진하고 있지만 한중경협을 능가할만한 대안은 없다.

이제 경제면에서 중국은 한국의 지속적 발전을 위한 가장 중요한 파트너로 되어있고 중국을 반대하거나 적대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진입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최근 THAAD미사일을 주한민군에 배치한다는 미국의 방침을 한국이 거부하라고 중국이 압력을 가하지만 이 문제는 한미양국간만의 문제로 보아서는 안 된다. 북한 핵위협과 주한미군의 안전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한반도 비핵화를 전제로 하는 한미중 3자회담의 틀에서 다루어져야 할 문제다.

 

현시점에서 한국은 안경분리(安經分離) 즉 안보와 경제를 분리해서 대처한다는 입장을 확고한 외교원칙으로 굳혀 미중양국과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가고 한일관계도 풀어가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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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평 용문사 瞥見 有感

                                                                  (이글은 오늘자로 김승웅 글방에 떳다)

 

                                       이영일 한중정치외교포럼 회장

 

 올 설은 설 전날을 포함해서 5일간 이어지는 휴가라서 젊은 사람들에게는 황금연휴이겠지만 나이든 우리 또래에게는 매일이 휴가인지라 휴가를 휴가 비슷하게라도 보낸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자식들이 경기도 양평의 콘도를 예약했다면서 나들이를 서두르는 바람에 우리 내외도 함께 집을 나섰다.

 양평의 블룸비스타라는 콘도에 여장을 푼 후 식구들과 같이 인근에 명성 높은 사찰인 용문사를 찾아 나섰다. 나는 용문사를 이름만 알뿐 어떻게 하다 보니 한번도 와 본 일이 없던 곳인지라 다소간의 호기심을 느끼면서 일행과 함께 용문사 주차장에 도착했다.

 

 현란한 식당 간판들이 우리나라 전통식단의 메뉴들을 나열하면서 시야를 채웠다. 산길의 양옆에 즐비한 식당들을 지나치면서 30분 이상 가파른 산길을 올라갔다. 프랑스의 도시계획위원회에 상정되었다면 절대로 허가받지 못할 건물들이 난개발(亂開發)의 상징처럼 늘어서서 절로 들어가는 길목들의 전망을 어지럽혔다. 길에는 등산모를 쓴 중년 남녀들이 떼를 지어 오가는데 거기에는 탬플스테이로 이곳에 왔다는 외국인들도 더러 눈에 띄었다. 사찰 입구에는 탬플스테이라는 간판이 내방객들을 영접하고 길 왼편에는 수령 1200년이나 되었다는 은행나무를 수호신처럼 모신다는 설명문과 더불어 은행나무를 먼발치로 바라볼 전망대가 놓여있었다.

 

용문사 경내는 여느 절이나 비슷했지만 기도꾼들이 몰려들어 대웅전 등 큰 사찰 건물에서 기도회를 열고 있었다. 야단법석(夜壇法席)이다. 그러나 불교사찰이 제단(祭壇)을 쌓는데서 생기는 신성함은 어느 곳에서도 느껴지거나 찾을 수가 없었다. 불심(佛心)과 무관한 중국관광객들의 나들이 장소로 변해버린 중국사찰들을 너무나 많이 닮아버렸다. 먹고 마시고 떠들면서 이 건물 저 건물로 몰려다니는 중국관광지 그대로의 모습이 우리 용문사에서 재연되고 있었다. 약수물이 좋은 것으로 소문이 났다지만 약수물을 관리하는 실태를 보면 영약(靈藥)을 마신다는 기대를 불러일으킬 정결함이나 신성함은 전무했다. 갈증을 달래는 쉼터에 불과했다.

사찰의 관광이 선교라는 문제의식과 연결되지 못하고 그냥 돈벌이에 역점을 두는 관광업으로 전락해버린 곳이 중국사찰들인데 그런 모습이 이 땅에서도 재연되고 있다는데 마음이 아팠다.

 

용문사 구경을 마치고 Moon River라는 간판을 단 식당에 들어갔다. 오리백숙으로 명성을 얻은 곳이라고 한다. 요리 맛은 환상적이었다. 밑반찬도 좋았다. 한때 카페를 하다가 안 되어 업종을 바꾸었다는 것이 주인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간판과 메뉴가 너무 다른 것은 부적절했다. 음식에 어울리는 간판과 그 간판에 합당한 맛을 전하는 레스토랑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함께 온 자식들은 휴대폰을 손에서 떼지 않고 무언가 열심히 전화하는데 바빴다. 함께 조용히 이야기 나눌 시간도 없어 보였다. 어느 외국작가가 한국을 소재로 글을 쓰면서 책명을 “기적을 이룬 나라, 그러나 기쁨을 잃은 나라”라고 붙였다고 한다. 1인당 GDP 30,000 달러의 수준에 도달한 것은 기적이지만 그 수준을 지키기 위해 더 가치 있는 많은 것을 잃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기쁨 상실이다. 우리 주변에서도 요즘 전통적인 것이 거의 사라지고 그렇다고 모든 것이 서양화된 것도 아니다. 퓨전이 오늘날 한국문화의 현주소 같다. 퓨전화된 韓를 우리는 한류로 자랑하고 있지만 그것이 진정한 한류일지는 시간을 더 가지고 깊이 음미해야 할 것 같다. 기적을 이룸과 동시에 기적만한 기쁨이 우리의 소유가 될 길을 적극 모색해야겠다. 올 설은 그런대로 즐겁게 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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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벤트 아닌 실질적인 남북대화가 바람직하다.

                                      

                                                                          이 영 일(한중정치외교포럼회장)

 

1. 남북대화의 새로운 국면

 

남북대화가 조만간 재개될 것이라는 기대가 새해의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북한 김정은이 올해 신년사형식의 연설에서 남북한 최고위급 회담을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 반면 박근혜 대통령역시 연두기자회견에서 아무 조건 없이 남북정상회담에 응할 용의가 있다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북한 고위층의 대화긍정발언으로 남북대화가 올해 재개되리라는 기대가 싹트는 상황에서 남북한 관계를 다시 후퇴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회고록을 발표, 자기의 대북정책이 과거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때와는 달리 원칙을 지키고 북한의 대화공세에 대처했다고 자랑하면서 그간 김정일이 중국지도부를 통해 여러 차례 정상회담을 제의해왔지만 그때마다 거액의 금품을 요구했기 때문에 이를 거절했다고 밝혔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발언을 놓고 국내 좌파단체들은 남북관계를 단절함으로 해서 천안함 사태나 연평도 포격 사태 등 군사적 긴장상태를 조성한 정권이 반성은커녕 자기의 대화실패정책을 정치적 성과로 자랑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반면 우파진영에서는 남북 대화나 교류 때마다 뒷돈을 집어주던 악습(대화나 교류매입정책)을 차단한 것은 잘했지만 원칙 있는 대화를 주도적으로 열지 못하고 오히려 대화를 주선해준 중국지도자를 실속 없이 거명한 것은 부적절한 처사라고 비판했다.

 

박근혜 정권은 집권 이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캐치플레이스로 하여 그간의 왜곡된 남북대화를 바로잡으면서 핵문제를 포함한 남북한의 제반 현안에 대해 한국이 당사자로서 대화와 협상의 주체적 지위를 되찾으려고 모든 외교적 노력을 경주해왔다. 특히 중국정부의 협력유도에도 많은 공을 드려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비록 단기적이긴 하지만 정부의 새로운 대북접근 노력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 발표로 의외의 복병을 만난 셈이다. 일방적 주장만을 담은 회고록의 시효는 결코 길지 않아 조만간 수습이 되겠지만 한국정부의 협상평판, 신뢰평판에 남긴 상처는 쉽게 가시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의 남북한관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것인가. 한국으로서는 금년이 분단 70년과 광복 70년이 맞닿는 해라는 시점임을 감안, 작년 12월 29일 통일을 위한 남북당국 간 대화에 북한이 응해올 것을 통일준비위원회의 이름으로 제의한 바 있기 때문에 김정은의 신년사의 대화언급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은 작년 1월 6일 신년기자회견에서 통일대박 론을 제기, 통일문제에 대한 국내외의 관심을 제고했고, 작년 3월 28일 독일 드레스덴에서 행한 연설에서 자기가 주창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구체적 실천방안을 제시했기 때문에 남북한 당국 간 대화를 여는 것은 금년 정치일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 주제다.

 

그러나 197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남북대화는 단절되었다가 다시 이어지고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지기를 반복하면서 4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우리가 지난 대화의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대화를 위한 대화, 이벤트 성 대화에서는 아무런 결실도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하 현재의 한반도 내외상황을 남북대화라는 측면에서 재구성하면서 바람직한 대화의 향방을 모색하기로 한다.

 

2. 북한에 대화수요가 있는가.

 

금년은 김정은이 김정일의 유훈통치 3년을 벗어나 자기 스타일의 북한 통치를 시작하는 시점이다. 김정은은 작년도 신년사에서 들고 나온 ‘위대한 변혁의 시대’는 내부숙청만 되풀이하는 가운데 뚜렷한 성과 없이 끝났고 경제도 민중들에게 끌려가는 시장화추세를 때로는 긍정, 때로는 활용, 때로는 규제하면서 근근이 현상을 유지하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중국과의 관계가 냉랭해 짐으로 해서 북한내부에서 조차 김정은 정권의 정통성이 흔들리고 있으며 특히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결의한 5개항에 걸친 대북제재는 아직도 효력이 발효 중이다.

 

친중파인 고모부 장성택에 대한 반인륜적, 반민주적 처형과 탈북자들의 국제적 호소가 도화선이 되어 제기된 북한인권 문제는 유엔총회 제3위원회의 의제로 채택되어 김정은을 국제형사재판(ICC)에 회부해야할 대상으로 결의하는 등 국제적 고립이 북한정권 성립이후 가장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북한은 바야흐로 이 처절한 고립 환경에서 벗어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립의 위기’(Viability Crisis)에 직면하고 있다.

김정은의 권력은 쟁취 아닌 세습이기 때문에 선대(先代)인 김일성, 김정일이 지속해온 핵과 미사일 개발만은 내외사정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이를 승계해야할 숙명이다. 이 때문에 경제개발에 전력을 투구해도 모자랄 판에 핵·경제병진(竝進)노선을 고수하겟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는 한 북한경제개발에 필수적인 자본과 기술을 투자하지 않을 것이다. 그간 북한은 미국과의 대화를 끈질기게 요구했지만 핵 없는 세계건설을 집권의 캐치플레이스로 내놓고 있는 오바마 행정부가 핵개발을 계속하겠다는 북한의 제의를 받아들일 리 없다. 여기서 북한은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고립탈출을 기도했지만 핵 포기가 전제되지 않는 한 안보전략의 상당 부분을 미국에 종속시키고 있는 일본이 납치문제하나만으로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쉽게 호응할리 없다. 최근 김정은은 최룡해를 러시아에 파견, 러시아를 통한 고립탈출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는 지금 우크라이나 문제로 서방과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유가(油價)하락으로 경제마저 어려워졌기 때문에 친북(親北)정책에 적극 나설 형편이 아니다. 그러면 김정은이 검토할 대안은 무엇일까.

 

현재 북한정권은 두 가지 대안을 검토할 것이다. 하나는 한미연합방위전력을 상대로 1대1의 전면전을 도발하는 것인데 그러기에는 능력이 너무 모자란다. 전쟁에 필요한 에너지도, 자재도, 뒷받침해줄 우방도, 군대의 사기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록 결과가 정권붕괴를 몰고 올 값비싼 대가를 치루더라도 비대칭 전력으로서의 핵 공갈과 미사일 발사, 특수군 부대를 이용한 테러 형 공격 등을 구사하는 것이다. 알카에다나 이슬람 국가(IS)의 대미투쟁은 그들에게 좋은 본보기다.

다른 하나는 남북대화를 통해 위기와 고립에서 탈출하면서 시간을 버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지난 기간 그러한 대화전술로 성공한 선대들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하 북한이 구사한 대화전략을 살펴보자

 

3. 남북정상회담의 회고와 반성

 

1990년 동구라파가 몰락하고 소련이 붕괴되는 상황은 북한체제의 존폐를 위협할 정세였다. 이 위기를 극복하는 수단으로 김일성은 남북대화전략을 채택했다. 노태우정권은 이를 그가 추구한 북방정책의 성과로 평가, 당국 간 회담을 환영하고 남북총리회담을 여는 등 남북한 관계 개선에 필요한 합의도출에 주력했다. 여기서 만들어진 것이 남북한 기본관계합의서이고 한반도 비핵화선언이었다. 북한은 이같은 대화 쇼를 통해 대내외적으로 몰려오는 체제위기를 극복하면서 한국의 핵 개발저지와 미군보유 핵무기의 완전철수를 못 박는 비핵화선언을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그 후 언제 그러한 합의가 있었느냐는 듯이 한국과의 모든 합의를 유린, 외면했다. 남북대화가 북한의 체제위기극복 수단으로 이용된 대표적인 사례다.

 

김일성은 1994년에도 북핵문제로 미국이 대북폭격을 검토할 때 카터 전 미국대통령을 평양에 초청,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함으로써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 회담은 김일성의 사망으로 성사되지 못했지만 미국의 북 핵 기지 폭격계획은 없었던 일로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 후 김정일을 상대로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각각 정상회담을 가졌지만 통일문제해결에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 방문 대가로 거액의 현찰을 용처(用處)나 용도(用途)를 묻지 않고 김정일에 제공했다. 핵실험 한 번 하는데 3억 달러가 쓰이는데 여러 차례 핵실험에 필요한 현찰을 제공하고 그 비용을 국민의 혈세로 갚은 것으로 알려졌다. 6.15선언도 가장 중요한 대목인 김정일의 답방약속은 없었던 것이 되었고 “통일 후까지도 미군의 한반도 주둔을 김정일이 동의했다”거나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할 능력도 의사도 없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귀국 후의 대국민 보고는 전혀 사실이 아닌 국민기만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가 끝나갈 무렵 NLL카드를 미끼로 정상회담을 실현한 후 거액의 대북지원을 국회의 동의 없이 혼자서 약속하는 등 정상적 의미의 정상회담의 범주에 넣기 힘든 허무 황당한 회담을 연출했다. 이 두 회담은 한반도통일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정상회담이라기보다는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분단 상황을 이용해서 자기 업적을 과시하려 연출한 일종의 정치적 이벤트에 불과했던 것이다.

 

4. 결론

 

지금 박근혜 정권은 집권 3년차를 시작하면서 두 가지 측면에서 남북대화를 열어야 할 필요성에 직면하고 있다. 국제사회의 큰 공감을 얻고 있는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와 이를 실천하기 위한 드레스덴 제안, 동북아시아 정세를 신뢰프로세스를 통해 협력가능한 공동체로 변화시킬 것을 겨냥한 동북아 평화협력구상, 한반도와 유럽을 연결하기 위한 유라시안 이니셔티브 등이 제대로 굴러가기 위해서는 남북대화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앞서도 지적했지만 북한이 감행할 가능성이 있고 그 선례가 있는(1968년의 1.21사태나 연평도 도발, 원전에 대한 도발 우려 등)테러적 도발가능성을 방치(放置)하기보다는 이를 예방 관리하는데도 일정한 수준의 대화는 필요하고 유지되어야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의 대북정책이 북한의 비대칭적 도발을 유발할 궁구물박(窮寇勿迫)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현재 건강한 국민들은 대화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일방적인 퍼주기나 뒷돈 주는 형식의 대화매입에는 반대한다. 동시에 대화를 위한 대화라도 안하는 것 보다는 낫다는 회담만능주의도 필요한 정답은 아니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우리는 모든 면에서 북한보다 훨씬 앞서있다는 현실에서 대화정책을 고려해야 한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대화이익이 북한과의 대결이나 압박보다 항상 더 크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지금 북한은 도발이냐? 남북대화를 통한 위기 극복이냐? 의 양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상황이다.

형식적으로는 대화에 이러저러한 조건을 달고 있지만 그들의 본심은 대화재개다. 테러적 도발도 그들의 예비계획(Contingency Plan)에는 포함되겠지만 그것을 실행할 경우 지불해야할 대가가 자칫 체제몰락을 가져올 만큼 크기 때문에 이판사판에만 가능 할 것이다. 따라서 현 정세는 당국 간이나 민간수준에서 다양한 대화와 교류를 터야 할 시점이다.

 

그러나 대화내용과 방식은 달라져야한다. 우선 인도주의 사업으로서 이산가족문제도 만났다가 헤어지는 회담이 아니라 고령자들이 가족 품에 안겨 여생을 마칠 수 있는 재결합(Reunion)을 의제로 삼고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국군포로 송환문제도 해결해야할 의제에 포함시켜야 한다. 북한은 강도 높은 유엔인권결의가 몰고 오는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고령자들의 가족 재결합문제나 고령의 국군포로송환정도에는 능히 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일이 성사되려면 국제적십자연맹을 비롯한 세계인권단체들의 일치된 요구가 국제여론으로 동원되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북한의 핵 포기가 가시화되지 않는 조건에서 우리의 조건 없는 정상회담정책 때문에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의지를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 앞으로 재개되는 남북대화에서는 한국이 당사자로서 의제에 핵문제를 반드시 포함시키고 핵문제에서 진전이 있어야 국제사회의 대북제재완화와 한국의 대북지원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강조하는데 주력해야 한다. 이점에서 박근혜 정부의 올해 대화정책이 실패로 끝났던 과거의 되풀이가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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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의 미중관계와 한중협력의 전망(이글은 국제문제 2015년 2월호에 발표되었다)

                                                                             이 영 일 한중정치외교포럼 회장

 

1.들어가면서

 

오늘의 한반도를 생활무대로 하는 한민족의 우리 세대에게 미국과 중국처럼 중요한 국가도 없을 것이다. 두 나라 모두 지정(地政)학적으로나 지경(地經)학적으로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국가들이며 양국 모두와의 원만한 관계 유지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달성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평화와 통일이 우리의 민족적 목적과제일진데 양국 모두의 협력을 우리는 절실히 필요로 한다. 그러나 미중 양국관계는 부단히 변화한다. 때로는 갈등하고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한다. 우리는 양국 모두와 협력하고 있지만 양국관계의 변화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양국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할 어려움에 직면할 수도 있고 양국 모두와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중도적 입장을 선택하거나 요구받을 상황도 올 수 있다. 여기에 미중관계의 변화를 예측하고 전망해야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필자는 2015년의 벽두에 미중관계를 전망하면서 우리의 진로를 생각해본다.

 

2. 중국을 보는 국내학계의 시각

 

2014년을 마치면서 우리 국내의 중국전문가들 간에는 서로 비슷하지만 중점을 달리하는 두 가지 견해가 등장하고 있다. 하나는 중국이 2008년 세계금융위기를 계기로 중국도 개발도상국의 하나라는 기왕의 입장을 털어버리고 이제 당당한 대국으로서 세계정치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대국외교로 대외노선을 재정립(Reorientation)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후진타오(胡錦燾)시절에 흔히 쓰이던 중국도 ‘개발도상국의 하나’라는 주장은 사라지고 조심스럽게 모색되던 신형대국(新型大國)관계론이 강력히 대두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중국이 강대국의 하나라는 자기정체성을 모든 대외표현에서 확실히 밝히고 있다. 이것은 시진핑(習近平)주석이 추구하는 대외노선의 중요한 특징이다. 그간 미국학자들은 중국이 역내(域內)의 지역패권을 추구한다고 말해왔는데 이러한 평가에 대해서도 시진핑의 답은 NO다. 시진핑의 대국 외교노선은 그 목표가 지역이 아닌 전 지구를 무대로 겨냥한다. 그 예로 시진핑이 말하는 일대일로(一帶一路)정책을 보자. 그는 중국의 쿤밍으로부터 미얀마, 하노이를 거쳐 인도양을 지나 중동,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남방 실크로드를 추구한다고 밝혔는데 이 지역을 경제회랑(回廊)으로 보면 일대(一帶)지만 수송로로 보면 일로(一路)다. 또 시안(西安)으로부터 중앙아시아, 러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치닫는 북방실크로드 건설도 추진한다.

일대일로라는 표현은 지역별로 범세계적인 경제회랑을 만들자는 것이지만 이 전략이 포괄하는 범위는 지구적(Global)이다. 중국은 바야흐로 세계적인 대국에로의 도약에 나선 것이다. 특히 남방실크로드사업을 촉진하기 위해서 시진핑은 이미 구체적인 투자계획을 집행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대국지향론과는 달리 국내학계에서 널리 알려진 통설은 중국이 미국 등 서방측이 만들어 놓은 국제규범과 질서를 존중하면서 그 태두리 내에서 자국의 실리가 보장될 수 있는 새로운 규범을 만들어 나간다는 현상개혁론이다. 이들은 중국이 경제면에서는 G2로 성장했지만 이는 서방의 자본도입, 서방의 기술학습, 서방의 경영을 벤치마킹하였고 세계무역기구(WTO)가입으로 얻은 혜택의 결과다. 따라서 지금 중국은 강대국으로 컸지만 새로운 국제질서를 주도하거나 창설할 만큼 강대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베이징대학의 왕지스(王緝思)교수는 중국이 강해졌지만 중국이 반미동맹결성을 주창할 때 선뜻 합류하거나 가세할 나라가 아직은 없다는 것이 냉엄한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점에서 중국외교는 앞으로도 현재의 국제질서를 긍정하면서 그 틀 안에서 개혁을 추구할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견해는 다른 것 같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강조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중국이 암묵하는 내재적인 욕구에서 보면 중국은 결코 현상개혁에 만족하거나 안주하려는 것 같지 않다. 류밍푸(劉明福)로 부터 시진핑에 이르기까지 중국이 강조하는 중국몽(中國夢)은 궁극적으로 역사적인 중국의 회복을 목표로 세계적인 대국건설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인다.

 

3. 2015년의 전망

 

오늘날 국제정세를 분석하는 중국학자들은 지금 미국과 중국 간에 세력전이(勢力轉移)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그러나 과거 역사에서 본 것처럼 세력전이기에 필연적으로 수반되었던 전쟁을 막으려면 쇠락하는 미국(Declining America)이 신흥중국(Rising China)을 대등한 강대국으로 인정, 세계문제에 대등한 발언권을 갖게 해주고 서로 간에 핵심이익을 존중하는 국제관계로 양자관계를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이른바 신형대국관계론을 수용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적극적인 의사표시로 시진핑은 작년 5월 21일 샹하이에서 열린 아시아지역교류회의(CICA)에서 아시아 집단안보론과 아시아 인프라투자은행(AIIB)설립 안을 내놓았다. 이 자리에서 구체적인 표현은 자제했지만 내심으로는 중국의 위안화가 달러를 대체할 국제통화가 되기를 희구하고 IMF나 세계은행을 대체할 국제금융기구창설도 꿈꾸는 것 같았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학자들이 말하는 미국쇠퇴론과 이를 근거로 한 세력전이론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작년 12월 10일 한국고등교육재단에서 열린 특강에서 조지프 나이(Joseph Nye)교수는 미국은 절대적 기준으로나 상대적 기준의 어느 척도를 적용해도 전혀 쇠퇴하는 국가가 아니며 앞으로 세계경제의 미래를 판가름할 에너지, 인구, 창의력의 면에서 미국의 위상에 영향을 줄만큼 중국의 능력이 결코 따라올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중국이 현재 누리는 7.5%의 성장률이 지속되기는 힘들 것이며 앞으로 3.8%대로 내려오는 것이 중국경제가 정상화되는 시점이라고 전망하고 중국의 1인당 GDP가 1만 달러 정도로 올라가도 1당 독재가 통하겠느냐고 물었다.

현재 시진핑 정부의 공안통치예산이 인민해방군 예산을 능가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 이 말에 담긴 뜻을 한번쯤은 깊이 음미해야 할 것 같다. 특히 이 자리에서 나이교수는 설사 아베노믹스가 실패해도 미일 간의 협력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못 박는 대목도 필자에게는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조지프 나이 교수는 이날의 특강에서 미국국방비가 의회의 결정으로 금후 점차 줄어가야 하고 미국국내정치에서 여야 간의 극한대결 같은 미국체제내의 문제점에 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 그러나 총론차원에서 보면 중국에 대한 나이 교수의 평가는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시사(示唆)하는 바가 컸다.

 

작년 하반기부터 중국은 미국을 상대로 벌인 신형대국관계 공세가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일본과의 관계도 정치안보 면에서 원만하지 않기 때문에 외교의 중점을 점차 동북아시아 보다는 동남아시아의 아세안지역과 인도를 포함한 서남아시아지역으로 옮기고 있다. 남방실크로드 건설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중앙아시아와 러시아를 포용하는 북방실크로드건설도 병행 추진하고 있다. 중국의 이러한 태도에서 우리는 전 지구적 규모의 대국을 지향하는 중국 측의 야심도 엿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14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이 실크로드 정책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주변국 다독이는 정책에 역점을 두는 측면에도 주목해야 한다. 특히 시진핑 주석은 친성혜용(親誠惠容)을 대주변국 외교의 캐치플레이스로 내세우고 주변국들이 자국의 정책에 협력하도록 유도하는 외교를 중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국을 안보와의 연계에서 동북아중심에서만 보던 기왕의 관점에만 머물지 말고 시진핑의 새로운 외교노선과 한중협력을 접목시킬 새로운 정책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4. 우리의 대응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대응은 무엇일까. 우리나라와 같은 강소국은 내치외교에서 철저히 현실주의(realism)노선을 추구해야한다. 북한의 핵무장과 미사일위협이 해소되지 않는 안보상황 하에서는 한미동맹을 굳건히 강화하면서 일본과의 관계도 안보와 역사문제를 분리해서 대처하는 지혜가 발현되어야 한다. 한일 간의 역사문제는 양국이 반드시 해결해야할 과제이나 역사문제에 묶여 안보협력 상의 손실이 수반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한편 지난해 말 추궈홍(邱國洪)주한 중국대사는 미국이 주한미군 부대에 사드(THAAD)미사일을 배치하겠다고 발표했는데 한국이 이 방침을 수용하면 그것은 한중관계를 손상시킬 수 있다고 공공연히 밝혔다. 흡사 한말의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연상시키는 발언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국방예산이 매년 줄어드는 상황에서 북한 핵과 미사일위협을 머리에 얹고 사는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미국이 자국군대의 안전을 위해 자국 부대에 사드 미사일을 배치하면서 이것이 대한방위공약이행노력의 일환이라고 할 때 이를 정면으로 반대할 수는 없다.

한국은 중국에 대해 주한미군은 조약상 중국을 반대하기 위한 군사력이 아니며 북한의 남침저지에 목적을 둔 것임을 재삼 설득하고 강조해야 할 것이다.

 

최근 한중관계는 박근혜 정부성립과 더불어 획기적으로 개선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은 앞선 정권들과는 달리 북한 핵에 대한 반대를 말과 행동으로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한중FTA를 체결함과 동시에 중국대륙에서 벌인 한국 측의 항일독립투쟁의 족적(足跡)을 중국정부가 자국 예산을 들여 복원해 주는 성의도 보여주고 있다.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중국 측의 선의가 한미동맹을 약화시키거나 한국안보이익을 희생시키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한국의 대중외교는 철저히 현실주의의 원칙에 서서 경제와 안보를 조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이점에서 중국이 주창하는 지역경제협력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필요한 지분(持分)도 선제적으로 확보하는 등 실질적 협력조치를 가시화해야 한다. 특히 경제문제로서 구체화되고 있는 아시아 인프라 투자은행(AIIB)설립에도 적극 참가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무역결제수단의 하나가 된 위안화의 활용성도 높여줘야 할 것이다. 특히 한중FTA가 체결된 만큼 양국 간의 경제협력도 한층 더 수준을 높여 나가야 할 것이다. 현시점에서 한국은 안보협력과 경제협력을 분리해서 대처하는 안경(安經)분리정책을 한국외교의 확고한 원칙으로 정립해야 한다.

또한 시진핑의 중국이 거국적으로 추진하는 실크로드 정책에는 그것이 북방이건 남방이건 간에 단순히 방관하기 보다는 투자를 통한 편승(Bandwagon)을 통해 동북아 평화협력구상이나 유라시안 이니셔티브와 연계되도록 경협외교를 강화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대내적으로는 6만 명을 상회하는 중국유학생들에 대해서도 이들을 맡는 대학당국들이 친한 인재(親韓 人材), 지한 인재(知韓 人材)로 육성하도록 협의를 강화해야 할 것이다. 특히 대 중국외교는 정부만이 아니고 민간외교를 폭넓게 활용할 때 더욱 효과적이다. 3000억 달러를 육박하는 경제교류와 1천만인의 인적교류의 한중협력시대에 정부만의 힘으로는 필요한 외교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

 

따라서 민간외교를 한층 더 중시해야 할 것이다. 정부가 안보외교에 중점을 둔다면 경제, 문화, 인문분야에서는 민간외교가 큰 역할을 하도록 적극 권장해야 할 것이다. 외교는 직업외교관만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인습적 사고를 버리고 민간 속에 잠재되어있는 자원을 폭넓게 개발 활용하는 열린 외교가 한중외교로부터 시작되는 2015년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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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대한민국 헌정회가 발행하는 헌정지 2014년 12월호에 발표된 글이다.

 

                               탈북민은 우리의 중요한 통일자산이다

 

                                                    이 영 일(한중정치외교포럼회장)

 

1. 탈북민을 보는 우리의 시각

 

2014년 현재 북한에서 한국으로 탈출해온 탈북민은 27,000명에 이른다. 탈북자와 탈북민은 동일하지만 탈북자 중에서 한국에 정착한 사람을 탈북민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앞으로 탈북민의 수효는 더욱 늘어날 추세다. 북한을 탈출해서 아직 한국에 입국 못하고 중국대륙이나 몽골, 동남아 등지에 억류되어 있거나 떠도는 사람들이 전부 입국에 성공한다면 조만간 십 수만으로 늘어날 전망이며 북한의 경제난이 가중되면 탈북민의 대열은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해방직후나 6.25전란이후에도 북한에서 한국으로 넘어온 사람들이 적잖았다. 이들에 대해서는 탈북자라는 표현대신 월남(越南)동포라고 부르거나 이북동포라고 불렀다. 이들은 북한태생이지만 북한지역이 공산체제로 개조되기 이전이나 과정에서 남하(南下)한 분들이어서 현재의 북한에는 지역적 연고는 있지만 실질적인 유대를 갖는 분들이 드물다. 그러나 탈북민들은 대부분 북한지역이 공산화된 이후 거기서 태어나서 북한식 체제에서 성장했고 아직도 부모나 형제나 친지, 동료들이 북한 땅에 거주하고 있다. 김일성, 김정일의 세습정권 밑에서 살았고 김정은 시대까지를 충분히 의식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탈북민에 대해 우리 사회는 그간 어떤 태도를 가졌는가. 일반적인 태도는 탈북민들을 난민으로 간주, 난민구호정책차원에서 돌볼 대상으로 보았다. 물론 탈북민들은 고향과 부모형제나 친지를 모두 버리고 혈혈단신 한국을 찾아왔기 때문에 경제적인 면에서는 난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탈북민은 난민이상의 의미를 갖는 분들이다. 모든 역경을 이기고 북한 정권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대한을 찾아온 용기 있는 북한 동포들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북한 땅에서 배고픔과 굴종, 처참한 인권유린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도가 탈북밖에 없을 진데 목숨을 걸고 탈북을 결행한 것은 그 비상한 각오와 용기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노예적 삶, 농노적 삶에서 벗어난 용기와 결단에 우리는 뜨거운 박수를 보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상식적 평가를 외면하고 ‘탈북민을 배신자’라고 말한 새정치연합 소속의 임수경 국회의원 같은 유별난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 우리 국민들은 탈북민들의 결단과 용기를 높이 평가한다. 정부에서도 관계 법률에 따라 이들의 한국정착을 지원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물론 우리 사회의 지원이나 배려가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지만 이들이 체제와 이념을 달리하는 한국사회에 잘 적응하도록(Koreanization Process) 돕자는 데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정부의 정책시각은 탈북민을 난민으로 보는 관점에 맴돌고 있다. 탈북민을 지원하는 단체나 지원업무를 관장하는 관리들도 난민구호차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탈북민은 결코 난민정책대상만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와 같은 분단국가에서의 탈북민은 난민구호대상임과 동시에 적극적으로는 통일정책대상으로 파악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대통령이 통일을 대박이라고 말하는 시대상황하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필자는 탈북민을 통일정책차원에서 대처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올바른 탈북민 정책이라고 보고 본고를 통해 이러한 주장의 타당성과 현실성을 논하고자 한다.

 

2. 탈북자는 왜 통일정책차원의 대상인가.

 

지금부터 25년 전 동서독이 통일되었다. 독일역시 우리와 비슷하게 체제와 이념을 달리한 가운데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로서 동서로 분단된 국제 형 분단국가다. 그런데 바로 그 독일이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룩한 것이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동독주민들이 서독과의 통일을 국민투표를 통해 확실히 지지하고 서독의 헌법절차에 따라 민주적으로 통일을 달성했다는 사실이다. 만일 동독주민들이 소련의 위성국가로 살지언정 서독과는 절대로 통일하지 않겠다고 버티었다면 동서독 통일이 가능했을까. 절대로 통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주권국가로서 유엔에 가입한 동독(DDR)이 서독과의 통일을 거부한다면 독일을 둘러싸고 있는 4대국(미·소·영·불)은 통일반대 입장을 굳혔을 것이다. 그러나 동독을 이탈하여 서독으로 넘어와 정착한 동독인들이 서독과의 통일만이 동독인들이 자유와 인권을 누릴 수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유럽대륙에서 독일인이 제대로 대접받는 민족이 될 것임을 철저히 실감했고 이 사실을 동독주민들에게 확실히 알렸기 때문에 서독과의 통일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압도적인 다수가 서독과의 통일을 지지했던 것이다.

 

서독이 동독을 흡수, 통일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정확히 말하면 서독이 동독을 흡수한 것이 아니라 동독이 서독에 합류(合流)한 통일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한국과 독일은 상황이 여러 면에서 다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북한 동포들이 굶는 한이 있더라도 남한과의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든가 인권이 보장되지 않더라도 갈라진 채로 살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통일을 이룰 수 없다. 민주화시대에 있어서는 통일의 주체는 정권이 아니고 주민들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탈북민 사회를 조심스럽게 관찰해보면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북한에 두고 온 친지, 가족, 옛날 동료들과 어떤 형태로던 연락을 주고받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정기적으로 송금까지 하고 있다. 이들을 통해서 한국에 관한 소식과 정보가 전단보다 더 빨리 북한에 전달되고 있다. 무서운 감시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부모와 친지를 돌보겠다는 한국거주 탈북민들의 사랑의 손길이 북한에 연결되고 있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말한 대로 “친절한 사랑은 철문을 뚫고 들어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탈북민들을 통해서 우리는 북한내부동향을 빨리 알 수 있으며 한국소식도 과거 어느 때 보다 빨리 북한주민들에게 전파되고 있다.

 

한국에서 인기 있는 드라마의 비디오가 북한 노동당 간부들의 집에 한 두 편 씩 있다는 이야기는 잘 믿기지 않지만 사실이라는 것이다. 요즈음 탈북민중에서는 한국사회에 정착, 성공한 사람들이 하나씩 나오고 있고 비례대표로 추천받아 국회의원도 1명이 배출되었고 대학교수로 진출한 사람도 더러 있다. 또 독자기업을 열어 성공한 사람들도 있지만 다수는 아니다. 대부분은 아직도 삶에 만족에 느낄 만큼 안정되어 있지 않다. 더욱이 한국 기업인들 가운데는 탈북민 고용을 꺼리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탈북민을 동남아에서 온 노동자들을 대하듯 얕잡아 보거나 냉대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특히 탈북민의 민원을 담당하는 통일부 관리들의 관료적 업무처리방식 역시 반발과 지탄을 사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탈북민에 대한 정책입안이 실정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탈북민의 참여가 필수적임에도 불구하고 탈북민을 배제하는 경우가 많고 탈북지원부서나 단체에서 하급직을 제외하고는 간부직에서 탈북민 출신은 배제되기 일 수라고 한다. 최근 탈북민들을 상대로 하는 정책세미나에서 흔히 듣는 이야기는 북한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일반직 공무원들이 하나원을 운영함으로 인해서 많은 불만이 쏟아지고 있다고 한다.

 

통일부 공무원 구성이 초창기와는 달리 전문직 중심에서 일반직 중심으로 전환되는데 따른 문제점 같다. 이북 5도청 운영에서도 탈북민은 배제되고 있다고 한다. 과연 어느 때 쯤 탈북자관리가 통일정책차원에서 부담이 아닌 자산으로서 제대로 이루어질 것인가.

 

3. 효과적인 대책

 

                                                       < 일반적인 방향>

 

지금 우리 정부에 탈북민 정책이 없는 것은 아니다. 탈북민 정착을 위한 지원이나 직업알선 등의 정책이 시행되고 있지만 그것이 통일정책차원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있다. 탈북민 대책이 통일정책차원의 정책이 되기 위해서는 독일의 연방정치교육본부처럼 탈북민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맞춤형 지원정책을 입안, 한국사회에 대한 적응과정을 용이하게 하면서 목숨을 걸고 탈북한 것이 옳은 결단이었음을 실감케 해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성공한 탈북민이 많아져야 한다. 국회의원에도 뽑히고 장관으로도 발탁되어야 한다. 기업가나 학자나 예술인이나 의사나 변호사로서도 성공한 분이 많이 나와야 하고 또 나오도록 지원해야 한다.

 

특히 탈북민 정책입안이나 지원단체에는 탈북민이 반드시 참여하여 주요정책결정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는 이북5도청 운영에도 탈북민들의 참여가 제도화되어야 한다. 북한에서 내려온 월남동포들에게 주어졌던 기회가 이젠 탈북자들에게로 옮겨져야 할 시점이기 때문이다. 또 교육지원에 있어서도 만학(晩學)으로라도 진학할 기회를 보장해주고 좋은 스펙을 쌓도록 지원하는 장학제도를 적극 확대 시행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탈북민 특혜라는 문제가 제기될 정도로 탈북민들에 대한 국가와 사회의 지원이 강화되어 탈북민을 부러워하는 사회 분위기가 진작되어야 한다.

 

이러한 상황이 조성될 때 비로소 북한동포들 속에 탈북민을 동경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고 한국주도의 통일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기대가 북한동포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될 것이다. 통일이 우리 한국인들에게보다는 오히려 북한동포들에게 대박이 될 것이라는 꿈이 싹트게 해야 한다. 우리가 독일의 통일정책에서 반드시 배워야 할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이러한 탈동독민 지원정책일 것이다.

 

                                             <탈북자 관할 부서를 바꾸자>

 

그러나 현시점에서 시급히 강구되어야 할 과제는 탈북민의 지원, 정착, 관리업무를 주관하는 부처로서 통일부가 부적합하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당초 통일부가 탈북자업무를 맡게 된 것은 다른 행정부처에 비해 북한문제에 전문적인 능력을 갖는 부서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통일부가 종래 국가정보원이 사실상 주도해온 남북대화업무를 맡게 되면서부터 북한문제를 다루는 전문 인력은 대화파트로 이관되고 탈북민을 관장하는 업무는 북한문제에 전혀 이해가 없거나 전문성을 결여한 일반직 공무원들이 맡게 됨으로 해서 탈북민을 통일의 주요한 자산 아닌 부담으로 여기면서 그냥 조용히 문제없이 관리하는데만 치중한다. 

 

하나원의 교육프로그램이 탈북민으로 하여금 대한민국 체제의 우월성을 알게 하고 동시에 한국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정치사회화(Political Socialization)적 관점을 크게 결여하고 모든 탈북민을 일반화하여 합숙교육으로 때우는 행태를 보인다는 것이다. 1대1의 맞춤형교육에는 이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지나친 형식주의, 관료적 처리방식이 탈북민들의 한국사회적응과정의 어려움해소에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통일부가 남북대화를 주도하는 부서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탈북자문제를 거론하는 것 자체를 꺼리는 부서로 변하고 있다. 통일부장관이 기자회견이나 정책보고에서 탈북자문제를 공개거론하기를 피하는 것이 대표적 예이다. 때문에 탈북자문제는 통일부자체의 입장에서 볼 때는 자산이 아닌 부담이 되는 것이다. 이런 상태를 방치해서는 탈북민이 결코 통일의 유용한 자산으로 관리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이런 견지에서 필자는 안전행정부와 이북5도청을 중심으로 탈북자관리의 운영주체를 바꾸고 아울러 탈북민정착과 지원에 기여할 탈북민 중심의 구심체를 조성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탈북자의 교육, 정착지원 및 관리업무에 탈북자로서 한국정착에 성공한 인사들을 대폭 참여시켜야 하여 이러한 노력을 통하여 탈북민의 통일자산화를 실질적으로 추진하게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통일대박시대의 실질적 준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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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래 부완혁 선생 서거 30주년 추도식을 다녀와서

 

이 영 일 (3선 국회의원, 한중정치외교포럼회장)

 

이날 추도식에서

2014년 12월 30일 부완혁(夫玩爀) 선생 서거 30주년 추도식이 서울 매리어트 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열렸다. 그분의 파란만장한 생애와 이리저리 인연이 닿는 분들이 봉래(蓬萊)부완혁 선생의 유일한 혈육인 부정애(夫貞愛) 여사와 그 부군 되시는 신선호 회장이 차린 추도식장을 가득 메웠다.

 

 

이날 추도식에서  눈길을 끄는 캐치플레이스는 인문의 샘, 시대의 좌표, 지성의 빛 이었다. 봉래선생이 사상계를 통해 표현하고 싶은 가치였고 일생을 두고 추구했던 지향(志向)인 것 같다. 이 모임에는 이인호 KBS이사장(전 러시아 대사)을 비롯하여 학계, 언론계, 정계, 경제계의 여러 분야에서 많은 분들이 오셨는데 봉래선생이 대한민국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 장군을 모시고 족청(族靑)계 활동을 함께 했던 당시의 동지였던 김정례(金正禮) 전 보사부 장관 이 금년 89세의 고령인데도 참석하셔서 헌화했고 미국유학중으로 생전에 부완혁 선생을 만난 일이 없다고 본인 스스로 고백한 노재봉(盧在鳳)전 국무총리가 한국 지성인을 대표하여 추도사를 맡아주셨다. 노 총리는 추도사에서 오늘의 한국만큼 부완혁 선생 같은 인물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시기에 그런 분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이 시대의 안타까움이라고 설파, 분위기를 숙연케 했다.

 

필자는 1960년대 초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10년 동안 사상계에서 부완혁 선생이 맡겨주는 좋은 논문을 번역해서 사상계에 게재도 하고 몇 편의 논문도 발표하여 부완혁 선생으로부터 정치평론가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당시 필자 나이 27~28세의 청년운동가였는데 봉래선생의 심사를 통과하여 사상계에 글을 싣는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어떻든 필자는 그 시기에 봉래선생에게 필력을 인정받아 사상계에 글을 기고한 것 자체만으로도 엄청나게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필자는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재학중 학생운동으로 당시 두 차례 감옥을 갔다가 나와서 이리저리 방황하는 운동권의 낭인이었는데 선생은 사상계를 통해서 나 같은 젊은 사람에게 글 쓸 기회를 줘 자신감과 용기를 갖게 해주었다. 정말 나에게 삶에 대한 용기와 자신감을 심어준 큰 선물이었다. 그때 사상계에 필자가 발표한 ‘한국정치사상의 메타볼리즘’이나 ‘개발독재발상법 서설’은 선생에게 크게 칭찬받은 글이었다. 그러나 시국을 평가하는 논쟁 중에는 통렬한 독설과 시니컬한 비판도 감수해야했다.

 

그러나 봉래선생은 그때뿐 뒤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대로 끝이었다. 매일 혼자 사는 봉래선생은 회색의 황혼이 오면 으레 젊은 후배들을 데리고 중국식당에 가서 백주(白酒)를 사주시거나 냉천동 집으로 데리고 가서 혼자 즐기는 양주를 꺼내 함께 마시기도 했다. 그때 안주는 따님인 부정애 여사가 내온 것으로 기억된다. 사상계가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공판타자기로 책을 찍을 때는 원고료 없이 글 쓴 분들을 많아 근근이 잡지사의 명맥을 유지할 때도 있었다.

 

그때 한국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한 김성우 형의 ‘만세(萬歲) 반만세(反萬歲)’ 같은 당대의 명 칼럼이 공판인쇄본에 실렸다. 다행히 김세영씨의 후원으로 사상계가 정상을 되찾아 가는 중에 김지하(金芝河)의 5賊사건으로 폐간되었고 기때 봉래 선생은 투옥되기도 했다. 필자는 추도식장에서 부정애 여사 내외분을 만나 40년 전에도 봉래 선생은 나에게 술을 사주셨는데 돌아가신지 30년이 지난 후에도 그분 덕에 다시 맛있는 식사와 와인을 마신다고 술회했다.

이날 부정애 여사는 유족대표인사말을 통해 ‘일찍이 혼자 되셨고 또 정치적 경제적 어려움이 많았지만 아버지는 항상 의연하셨다.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밖에 들어나지 않은 외로운 시간도 적잖았을 것으로 생각 한다‘면서 울먹였다. 이어 선친 생전에 독설이나 씨니시즘 때문에 상처를 입은 분이 혹 계신다면 모든 것을 추억으로 승화시키자고 말했다.

 

함께 참석한 모든 분들은 유일한 혈육인 부정애 여사가 부군과 함께 대한민국에서 가장 성대한 추도식을 마련한데 대해 그 효성을 평가했다. 이날 추도식은 일본으로부터의 해방, 해방 후의 그 혼란, 건국과 동란, 4.19혁명과 5.16군사쿠데타, 민주화투쟁 시대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의 큰 흐름 속을 방청인으로서가 아니라 때로는 정치인으로, 때로는 학자로, 때로는 언론인으로 직접 참여하여 현실과 맞서면서 치열하게 살았던 우리나라 대표적인 지식인의 한분이신 봉래 부완혁 선생의 족적을 기리고 우리의 금후의 진로를 새삼 돌이켜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값진 추도식에 참여한 것이 올해를 마감하는 뜻 있는 발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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