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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박사와 4.19와 나
이글은 2016년 4월 19일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서울 정동제일교회 아펜셀러 관에서 열린 이승만 포럼에서 행한 이영일의 강연 전문이다
이 영 일 (4.19당시 서울대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3년생)
1. 들어가면서
이승만 포럼 측에서 저에게 준 논제가 “이승만 박사, 4.19와 나”라는 매우 특이한 제목이다. 4.19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이승만 박사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를 묻는 제목으로 이해한다. 오늘은 4.19혁명 56주년 기념일이다. 419혁명에 앞장섰던 한 사람으로서 이승만 박사에 대한 제 소견을 말씀 드리기 전에 지금부터 56년 전 불의와 부정에 항의하기위해 궐기했다가 목숨을 바친 183위의 영령들을 추모하는 묵념을 잠시 올릴 것을 제안한다. --(잠시 묵념)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평가하려고 하면 평가자가 가지거나 축적하고 있는 당해 사건이나 인물에 관한 지식이나 정보, 평가자가 지향하는 이념, 평가하는 시기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서면서 떠오르는 성경말씀 한 구절이 생각난다. 신약성경 고린도 전서 13장 11절로 기억하는데 “내가 어릴 때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다”는 바울 사도의 이야기다. 제가 지금부터 56년 전 20대 때인 4.19혁명당시에 생각했던 이승만 박사와 80대를 바라보는 지금의 시점에서 제가 생각하는 이승만 박사는 결코 같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우선 말씀 드리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승만 박사는 그의 90년의 생애가 한국 현대사와 궤를 같이하기 때문에 그분의 영향력 범위 안에 있던 사람들의 여러 가지 이해관계(정치적, 이념적, 사회경제적)에 따라 호오포폄(好惡褒貶)이 극에서 극으로 갈린다.
그간 이승만 박사에 관해서는 최근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라는 우리 사회의 새로운 분위기가 조성되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분을 부정하거나 매도하는 이른바 ‘이승만 죽이기’가 우리 사회의 일반적 흐름이었다. 이러한 흐름에 연(沿)하여 가능한 한 이승만 박사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지 않는, 시쳇말로 “말을 아끼는 추세”가 이승만 박사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였던 것 같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는 대한민국의 국가로서의 위상이 제고되고 남북한 발전경쟁에서 한국의 우위가 실증되는 것과 때를 같이해서 초대대통령으로서 ‘이승만 대통령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 조명하려는 분위기가 싹텄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승만 죽이기‘의 목소리보다는 ’이승만 살리기‘의 목소리가 점차 들려오고 학자들 간에 이승만을 다시 보는 연구업적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제가 과문(寡聞)하거나 불민(不敏)한 탓도 있었지만 오늘 같은 포럼이 거의 매월 한 차례씩 지닌 6년간 지속되어왔다는 사실을 저는 오늘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다른 나라에서 같으면 이승만 박사가 서거했던 60년대 후반부터 등장했어야 할 이승만 연구나 포럼이 80년대에 겨우 싹트고 이승만 포럼도 21세기에 들어와서 겨우 월례행사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오늘 우리 사회의 현주소인 것 같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 작업은 역사학자들이 중심이 되는 것만으로는 공정성과 객관성을 기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한국 역사학자들의 역사연구범위는 가능한 한 조선사 연구로 시종되었으면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독립운동사까지 연장할 수는 있겠지만 해방 전후사나 대한민국의 수립과 발전과정의 연구, 분석, 평가는 정치학이나 국제정치학, 비교정치학자들에게 우선적으로 맡겨야할 과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역사학자들은 대개 일국사(一國史)적 안목이나 도덕적 기준에서 사물을 관찰하기 쉽고 법통이나 치적평가를 선악을 중심으로 보는 경향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학이나 국제정치학(외교사 포함), 비교정치학은 한국과 같은 신생국이 나라세우는 Nation Building 과정에서 직면하는 여러 가지 복잡다단한 내외의 도전을 비교, 분석하면서 상황의 의미를 객관화하는 방법론에 의지하기 때문에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 평가에서 현실성과 객관성을 가질 수 있다. 이점에서 작금에 거론되는 한국현대사 교과서의 집필 주체도 한국사 전문가들에게만 맡기는 것으로는 부적절하고 오히려 정치학과 비교정치학자들이 더 큰 역할을 맡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이와 관련해서 유념해야 할 것은 이승만 살리기가 이승만 죽이기의 재판(再版)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승만을 긍정하고 추앙하고 숭배할 자료만을 수집하고 이러한 평가를 토대로 한국의 현대사를 재단(裁斷)하려고 한다면 상당한 반론에 직면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승만 죽이기가 이승만의 철저한 부정에만 치중했기 때문에 이승만 살리기의 필요성을 자극한 것처럼 이승만 살리기도 지나친 과찬이나 추앙(推仰)으로 흘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정치지도자는 누구나 공(功)과 과(過)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지적하여 후세에 귀감을 삼도록 해야 할 것이다. 특히 21세기 한국의 오늘을 사는 우리 국민들은 대한민국의 탄생과 존속과 발전의 기초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역사 속에서 되돌아본다면 이승만 대통령의 지도력과 예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 사회는 이승만 박사의 90평생의 어느 한 시기(이승만 생애의 20분의 1정도)만을 떼어내어 그분의 과오를 들추면서 욕하거나 부정해왔지만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항상 편치 못했던 것은 그 분이 우리나라 초대대통령이었고 우리 Nation Building에 끼친 기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지금 국민들 가운데는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을 이렇게 홀대, 폄하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태도인가를 놓고 반성하는 사람들도 점차 늘고 있다.
영국의 정치학자 Bernard Click은 정치를 멋있게 정의했다. 즉, 정치란 한 나라의 정치공동체의 존속과 발전에 기여한 정도에 비례해서 거기에 상응한 몫을 나누는 과정이라고.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의 존속과 발전에 기여한 몫을 공헌으로서 제값대로 평가해주고 동시에 과오를 지적하는 것이 지금 우리 후대들에게 주어진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러한 맥락과 문제의식에서 “이승만 박사와 4.19와 나와의 관계”를 살피기로 한다.
2. 나의 청소년 시절과 이승만
저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추억을 감히 인문학적 표현을 빌려 “나와 이승만 박사와의 만남”이라고 한다면 건방진 태도 아닐까. 이승만 대통령은 해방 다음해인 1946년 9월 필자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부모님들에게서 훌륭한 독립 운동가, 나라의 큰 지도자라고 들었다. 초등 3학년 때인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고 그 때부터 대학교 3학년 되던 1960년까지 대통령은 오로지 이승만 한 분뿐이었다. 그 시절 이승만 박사는 국민 모두에게 대통령의 동의어로 받아들여졌다.
제 삶속에서 이승만대통령과 맨 처음 연관된 일은 광주서중 2학년 때인 1954년 6월에 일어났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제막식에 이승만 대통령이 제 모교인 광주서중을 방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관행으로는 대통령의 방문 시 학생들이 시민들과 함께 출영하는데 이때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다는 광주서중과 전남여중생들이 출영을 맡았다. 제 어머니는 “나라님” 출영을 나간다고 하여 잘 다려놓은 교복을 내줘서 입었던 기억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다. 광주에서 14Km 가량 떨어진 송정리비행장까지 부슬비를 맞으면서 도보로 행진, 출영을 나갔지만 기상사정으로 대통령의 광주방문은 취소되었다.
이날 학생들은 먼 길을 비 맞으면서 되돌아왔지만 누구하나 불평불만을 내뱉지 않았다. 먼발치로라도 말로만 듣던 이승만 박사를 한번 못 본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을 뿐이다. 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카리스마의 극치였다. 학생 탑 건립위원회는 이승만대통령에게 ‘학생운동기념탑’이라는 휘호 써주기를 청했는데 대통령은 원안(原案)에 ‘독립’이라는 두 글자를 첨가 “光州學生獨立運動紀念塔”이라는 휘호를 써주었다. 이 대통령은 휘호를 주는 자리에서 "1919년 3.1운동으로 점화된 독립운동의 열기가 10년을 지나면서 자칫 시들해지는 바로 그 때인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외치고 나옴으로써 독립운동의 열기가 다시 타올랐다“ 회고하고 해외에서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큰 용기와 희망을 준 사건이었다고 술회했다는 것이다.
1955년 광주일고에 진학하면서부터는 중학교 다닐 때 영문도 모르고 선배들과 함께 휴전을 반대하는 관제시위에 동원되어 참가했던 시절과는 달리 내 또래 친구들 간에도 정치의식이 조금씩 싹트면서 시국이야기를 곧잘 나누었다. 특히 동아일보의 사설을 매일 읽고나오는 친구 한 사람이 화제를 독점하면서 국내정치를 소재로 매일 쉬는 시간마다 토론했다. 저도 이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신문사설을 열심히 읽었다. 이승만 박사이야기보다는 민주당의 신익희 씨나 조병옥 박사 이야기에 관심이 쏠렸으며 특히 4사5입 개헌 이야기는 우리 학생들에게도 큰 흥밋거리였다.
136표면 가결될 자유당의 개헌안이 자유당의 이용범의원이 잘못투표함으로써 135표로 1표 부족사태가 발생, 개헌안이 부결되었는데 이를 4사5입으로 처리, 개헌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용범의원은 저와 같은 함평이씨(咸平李氏)였는데 그는 입구(口)자가 있는 투표지에 O표를 하라는 원내총무의 지시를 받고 투표용지를 받아 보니 옳을 가(可)자에도 口자가 있고 아니 부(否)자에도 口자가 있어 두 쪽 모두에게 O표를 한 것이 투표를 무효로 만든 원인이었다. 그 정도로 무식한 수준의 의원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자유당에 대한 국민적 혐오를 유발하는 것이었다. 자유당을 싫어하고 반대하는 심리가 내심에 쌓이기 시작했다.
3. 저의 대학시절
1958년 일고를 졸업하고 저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에 진학했다. 이 때는 6.25의 전재복구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는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이 흑 수저로서 가정교사로 입주하여 공부하였다. 저도 얼마 있다가 친척집 아들을 가르치기로 하여 숙식문제는 해결되었고 성적이 오를 경우 등록금 보조도 약속받았다. 입학식이 끝난 후 광주에서 다니던 교회목사의 권고로 장충단에 있는 서울 경동교회에 대학생으로 등록을 하고 동대문 시장의 헌 책 방을 뒤지면서 대학 내에서 진보적인 채 할 수 있는 책 몇 권을 헐값에 샀다.
유물사관으로 역사를 보는 세계사 교정 5권, 전석담의 조선경제사, 백남훈의 조선 봉건사회경제사, 반 듀링 론 등 학내에서 진보를 앞세우면서 좀 유식한 채 하는 친구들과 입씨름할 책을 구입하여 탐독했다. 내 인생이 요즈음 말로 표현하면 ‘운동권’으로 변하는 과정이었다.
이런 책의 내용을 놓고 날 새가면서 토론했고 책에 담긴 내용을 한국현실에 대입하면서 한국사의 현 단계를 ‘반봉건 민주주의 혁명단계’로 규정하고 경제적으로는 미 제국주의에 예속된 매판자본에 의해 한국경제가 수탈되고 있다고 분개했다. 특히 집권당인 자유당은 이승만이 친일파숙정을 외면하고 그들과 제휴했기 때문에 친일 관료배들이 국권을 농단한다고 진단했다.
이런 지적 분위기속에서 나는 학내 정치학과생들이 중심이 된 사회민주주의 연구 서클인 신진회에 가입하여 선배들과의 토론에 참여하였다. 신진회는 류근일 사건 등으로 유명했고 정치학과 선후배들의 주류서클이어서 참여한 것 자체가 매우 자랑스러웠다. 그 당시는 활동보다는 연구와 토론이 주제였기 때문에 Lenin의 Imperialism이나 Rudolf Hilferding의 Financial Capitalism을 원서로 구입, 영어공부 겸 지식습득의 수단으로 연구하고 연구결과를 발표하면서 사회과학의 비판적 측면을 학습하였다.
이런 와중에 사회민주주의자로 알려진 조봉암(曺奉岩) 선생이 공산간첩으로 몰려 사형당하고 경향신문이 폐간되고 국가보안법이 개악되어 인심혹란죄(人心惑亂罪) 같은 항목이 설치되는 등 적어도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민주역행현상이 줄이어 일어났다. 우리 학생들은 이 모든 것이 이승만이 조종한다고 생각했다. 민주공화국을 만들어놓고 정부 스스로가 헌법을 유린하고 갈수록 강권독재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고 단정했다. 이승만이 말하는 민주주의와 한국의 현실은 너무 유리되었다. 학교에서 배운 민주주의와 우리가 현실에서 목도하는 민주주의는 너무나 달랐다.
자유당 정권에 대한 미움에서 민주당에 대한 선호가 지식인 사회는 물론이거니와 시골이 아닌 도시에서는 갈수록 팽배했다. 여촌야도(與村野都)는 당시 선거의 일반적 흐름이었다. 이에 당황한 자유당은 지방자치법을 개정하여 6.25전쟁 기간 중에도 실시해왔던 지방자치단체장의 선거를 없애고 시장 군수 임명제를 실시하면서 1960년에 실시될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대비했다.
그러나 정부통령 선거가 공고된 기간 중에 야당 대통령후보였던 조병옥 박사가 암으로 서거하는 바람에 이승만 대통령은 사실상 무투표당선이 확정되었고 다만 미국과 달리 정부통령 런닝 메이트 제가 아닌 한국에서는 부통령을 국민직선으로 선출해야했다. 1956년에 실시된 제3대정부통령 선거 때는 대통령과 부통령의 당적이 달랐다. 야당의 장면(張勉)씨가 부통령에 당선되고 여당의 이기붕 씨가 낙선했는데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이러한 실패가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자유당의 목표였고 미국식 민주주의를 선호했던 이승만 대통령도 정부통령이 동일정당에서 나오는 것이 순리라는 입장을 누차 표명한 바 있었다.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지만 만일 정부통령이 같은 당에서 뽑히는 미국식 선거제도였더라면 3.15부정선거는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4. 4월 혁명의 전개
1960년 3월 15일에 실시된 제4대 정부통령 선거는 사실상 부통령선거였지만 관권선거의 극치였다. 유권자의 정치적 의사표시를 철저히 왜곡하는 부정선거였다. 전 국민이 피부로 실감할 정도의 부정선거였다. 부정선거규탄의 함성이 전국각지에서 터져 나왔다. 이 과정에서 1960년 4월 11일 부정선거 규탄 데모를 하다가 사망한 김주열 군의 시신이 마산앞바다에서 물위로 떠오르면서 국민적 분노는 불길처럼 솟았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국민들의 구호는 ‘이승만 정권타도라기보다는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것이었다. 조봉암 선생은 사형 당했고 조병옥 박사도 병사하여 마땅한 야당의 대통령 후보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승만 퇴진을 요구하기보다는 우선 부정선거 규탄으로 국민들의 주장은 모아졌다.
그러나 데모가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경찰들의 데모진압이 강경해지면서 반정부시위는 변증법적 진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양(量)이 축적되면 질(質)적 변화를 가져온다는 질변율(質變律)이 적용되기 시작했다.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구호가 ‘독재정권 물러나라’로 바뀌기 시작했고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생들의 시위에 대한 자유당 깡패들의 테러가 알려지면서부터 드디어 전국 각 대학들은 4월 19일을 기하여 총궐기하게 되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새벽에 닭이 울듯이 전국 대학생들은 너나없이 반정부 시위에 떨쳐나선 것이다.
자유당 정권은 무력으로 시위진압을 시도, 183명의 시위대들의 목숨을 앗아갔고 수 천 명의 학생들에게 부상을 입혔다. 국민들의 분노는 치솟았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계엄군은 데모진압에 나서지 않았고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가진 미군사령관과 당시 주한 미국대사 Walter p. McConaughy는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권고했다. 계엄군은 중립을 표방함으로써 자유당 정권에 대한 충성을 포기했고 이승만 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지철회라는 압력 앞에서 대통령은 하야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이승만 정권을 옹호하다가 자칫 한국 국민들이 반미(反美)로 태도를 바꿀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승만 박사의 하야를 촉구하고 하와이 망명길까지 신속히 마련해주었다.
당시 서울대학교는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3년생들이 주동이 되어 데모에 필요한 준비를 서둘렀다. 선언문은 몇몇 친구가 초안을 마련했지만 최종적으로 채택된 것은 정치학과 3학년 이수정(지금은 고인, 문화공보부장관 역임)이 작성한 선언문이었다. 선언문의 요지는 “한국 학생운동이 적색독재를 반대했던 것과 똑같은 논리의 연역에서 백색독재에 항거함을 자부 한다”면서 “부정과 불의에 항거하기 위해 진리의 상아탑을 박차고 거리로 뛰쳐나왔다”고 시위입장을 밝혔다. 4월 25일 “학생의 피에 보답하자”는 피켓을 든 교수단 데모에 이어 이승만의 하야성명이 발표되었다.
대통령 하야와 때를 같이하여 서울 시가지는 무규제의 혼란에 휩싸였다. 파출소는 불타고 경찰들은 근무지를 이탈, 모두 도망쳤기 때문에 경찰서들은 텅 빈 공간으로 방기되었다. 이때 학생운동은 두 패로 갈렸다. 학생들이 질서유지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파가 있었는가 하면 혁명의 가장 정상적 질서는 ‘파괴와 혼란과 무질서’이기 때문에 혁명화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제4계급으로서의 건달들이나 좌판상인들이나 껌팔이, 구두닦이들이 앞장서는 파괴활동이 더 지속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필자는 두 주장이 모두 일리는 있지만 당시의 상황에서는 질서유지의 주체가 학생이 되어 파괴를 막아야한다는 견해를 지지했다.
결국 4.19 직후 사태는 질서유지 파들이 장악했고 계엄군도 여기에 협조하였다. 다행이도 북한공산당이 배후에서 주도했다고 인정할만한 공작이나 준비는 전무했던 것 같았다. 이 당시 혁명적 질서를 강조하던 친구들 가운데는 그 후 여러 형태의 친북좌경사건에 휘말리거나 사회활동에서 낙오되어 지금은 생사조차 알 길이 없다.
5. 4.19이후의 학생운동의 흐름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면서 우리 사회는 국가의 진로를 놓고 심각한 토론이 사회 각 분야에서 일어났다. 서울대학교의 경우 세 가지의 큰 흐름이 등장했다. 하나는 학생회가 중심이 되어 펼친 새 생활운동이었다. 관용차량의 사용(私用)반대나 양담배 안 피우기 운동, 질서 지키기 운동, 공명선거추진운동 등 우리 사회의 일반적 비리를 척결하자는 것이다. 두 번째로 관심을 끈 움직임은 민족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우면서와 후진성극복을 통한 국가근대화연구 활동이었다. 문리대 사회학과나 서울상대 경제학과 등에서 주도하는 운동이었다.
셋째로는 7.29선거이후로 등장한 민족통일 운동이었다. 한국이 겪는 모든 어려움의 근원은 외세가 물고 온 분단이기 때문에 독재정권을 타파한 열정으로 민족의 발전을 저해하는 3.8선을 타파하는 통일운동이 이 시대를 바로 사는 청년운동의 길이라는 주장이 대학운동의 새롭고도 강렬한 흐름으로 등장했다.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운동의 결성이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이 시기에 학생들에게 가장 자극적이었던 뉴스는 우주과학 분야에서 소련이 미국을 앞질러 Sputnik 발사에 성공했고 후르시초프가 유엔에서 미국을 상대로 평화공존을 제의하면서 전쟁하지 않고도 발전경쟁에서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이긴다고 큰 소리를 친 것이다. 여기에 주일본 미국대사인 마이크 맨스필드가 한국통일 모델로 오스트리아 식 중립화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발언한 것도 큰 자극제였다.
4.19 이후 정권을 잡은 민주당은 혁명의 주체세력들인 대학생들이 갈망하는 이상과 꿈에 걸 맞는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던 학생들의 대다수는 자유당 정권이 정권연장에만 급급했을 뿐 국민들에게 필요한 국가발전의 꿈과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이 컸는데 이 점은 민주당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3선 개헌으로 장기집권의 길만 열었을 뿐 장기집권의 대가로서 국민들에게 꿈과 비전을 주지 못했다. 부흥부장관(復興部長官) 송인상(宋仁相)씨 등이 중심이 되어 경제개발계획을 세웠다고는 하지만 이 계획이 정권의 중심 어젠다가 되지 못했고 국민들이 원하는 근대화의 비전으로 발전시키지도 못했다. 인사정책도 집권연장을 위한 친일관료정상배들을 선발, 권력의 주변에 포진시키고 정권안보를 위해 경찰들의 권력만 강화시켰다.
제가 볼 때 이승만 대통령은 개헌으로 3선의 길을 열고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당시 81세의 노인 대통령으로서는 경륜 있는 새 정치를 펼치기에는 육체적인 한계가 찾아왔던 것이다. Vilfred pareto는 그의 유명한 ‘권력순환이론’에서 노쇠라는 육체적 몰락은 이념의 고갈을 수반하면서 필연적으로 엘리트 순환을 가져온다고 설파한 바 있다. Pareto의 권력순환이론이 이승만 박사에게 적중한 것이다. 이승만 박사는 집권기간이 늘어난 만큼 거기에 상응하는 대국민 서비스로서 근대화나 경제개발 같은 공공재나 꿈을 제공하지 못했다. 북진통일이나 안보위기강조만으로는 더 이상 국민들의 지지를 창조해 낼 수 없었다. 결국 무상독재(無償獨裁)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맞게 된 것이다. 이승만 정권 붕괴 후 아무런 준비 없이 정권을 장악한 민주당 역시 비록 단명으로 끝났지만 시대정신에 맞는 국민통합의 길을 제시하지 못했다. 4.19의 혁명에 국민들이 걸었던 기대는 그 후 모두 군사정권의 과제로 옮아갔다.
대한민국 체제는 북한의 수령정치처럼 우상화를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은 재임 중 자신의 생애나 업적을 정리하여 국민들에게 알리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북한처럼 독립운동의 역사나 건국과정의 어려움을 자료로 편찬하여 알리지도 않았다. 때문에 이승만 박사의 정체(正體)는 젊은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일반국민들에게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알 수도 없었다.
또 하와이로 망명한 후에는 ‘이승만 죽이기’라고 명명할만한 엄청난 모략과 비방이 쏟아짐으로 해서 이승만 박사가 81세 이전(1956년 이전)에 쌓은 기여나 공로는 모두 묻히고 과오만 나열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4.19당시 젊은 학생들은 대통령으로서의 이승만 박사는 알지만 그분이 독립운동과 건국을 위해, 한국전쟁과 휴전과 한미방위 동맹을 위해 어떻게 기여했는가를 바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바로 이 무지의 공간을 파고든 것이 친북좌파들이었다. 이승만 박사 때문에 적화통일이 안된 것을 몹시 애통해했던 친북공산주의자들이 나서서 4.19이후의 혼란을 틈타 반 이승만 모략책동을 치밀하게 펼쳤다.
6. 이승만 박사에 대한 모략책동
가. 소남한단정(小南韓 單政)론 비판
4.19직후 서울대민족통일연맹이 결성된 후 필자는 전국민족통일연맹 선전위원장으로서 활약했는데 이 때 한국의 각지에 잠재되어있던 공산 분자들은 제철을 만난 듯 민족통일연맹운동에 날 파리 떼처럼 몰려들었다. 이들 중에는 민청학련사건에 관련되어 사형당한 사람도 끼여 있다. 이들이 맨 먼저 들고 나와 나를 설득한 주제는 이승만의 건국노선을 소남한 단정노선(小南韓單政)이라고 공격한 것이다. 당시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김구(金九) 선생 중심으로 통일되었어야 할 나라가 이승만이 미국과 짜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했기 때문에 통일이 안 되고 한반도에 두 개의 분단국가가 세워졌다는 것이다. 매우 그럴듯하게 들렸다.
이 주장이 허구였음을 제가 깨닫는데 반세기가 흘렀다. 4.19혁명 50주년 기념으로 기획된 미래정책연구소의 학술세미나에서 “4.19세대가 본 이승만 박사의 공과 과”를 주제로 발표논문을 준비하면서 몇 가지 놀랄만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첫째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이 북한 땅에 그들이 오래 동안 염원했던 부동항(不凍港)을 마련할 목적으로 미소공동위원회의 결과와 관계없이 그들 점령지인 북한에 위성정권을 세우도록 1945년 9월 20일 북한군 점령사령관 치스차코프에게 스탈린이 지령했다는 사실이었다.
둘째로 우리나라 해방정국에서 민족지도자가운데 미국인 비서와 러시아인 비서를 기용, 정보를 수집 분석한 사람은 이승만 박사뿐이었다는 사실이다. 미국과 소련의 움직임을 전혀 모르면서 한반도에 독립국가 건설을 모색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인데 이승만 대통령만 이 유일하게 미국인으로서는 로버트 올리버(R. Oliver)를, 러시아인으로서는 에밀 구베로(Emile Gouvereau)를 두고 정보를 획득했다는 사실이다. 이 당시 북한에서 단독정부가 세워지고 인민군이 창설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군정당국은 아무 대책 없이 세월을 허송하면서 일제에서 해방된 한국 국민들의 주권회복을 기약 없이 천연시키고 있었다. 이 답답한 현실을 타개하기위해 이승만은 미국으로 건너가 유엔감시하의 자유총선거로 한국민의 주권회복과 적법한 독립정부를 수립할 방도를 마련, 미 국무성에 제시함으로써 유엔방식에 의한 정부수립의 길을 열었다.
소련군 점령사령관의 지시로 만들어진 북한 정권은 한마디로 소련의 괴뢰정부, 위성정부였으나 한국은 유엔감시 자유총선거로 국회를 구성하고 정부를 수립한 후 유엔총회로부터 한반도에 유일한 적법정부로 승인받았기 때문에 국가수립의 정통성에 아무런 흠결이 없는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적법 정부의 출현을 소남한 단정으로 비방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 곁들여 특히 놀라운 세 번째 발견은 이승만 박사가 1923년에 벌써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이란 논문을 써서 공산주의를 비판하고 자기가 꿈꾸는 정부는 그가 1904년에 발표한 “독립정신”에서 주장한대로 자유민주주의 정부였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민족지도자가운데 여운형(呂運亨)은 중국대륙에서 공산주의 ABC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번역하는 등 공산주의에 심취한 반면 그 밖의 인사들은 아나키즘에 흐르기도 했고 아니면 이념문제에 대해 문외한이기 일쑤였다.
김구(金九) 선생이 추구한 이념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바 없지만 그분이 이승만 박사보다는 나이가 한 살 아래지만 학문적 배경이 과거(科擧)를 준비하던 유생이었던 점으로 보나 외교투쟁보다는 의혈투쟁(윤봉길 의사나 이봉창 열사가 추구했던 노선)을 주도한 점 등으로 미루어 공산당이나 공산주의에 대해 명확한 개념을 가졌는지는 의문이다. 특히 1948년의 김일성이 주도한 이른바 4김 회담이나 남북협상에서 들어난 김구 선생의 태도는 그분의 대공관이 매우 불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민족이익을 사상이익의 우위에 두고 분단 없는 통일을 추구하기위해 이승만의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반대할 수 있다는 주장도 성립될 수 있지만 당시 북한이 남한의 치안능력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한 인민군이 창설된 것을 보고도 통일만을 추구했다면 공산화통일도 통일로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를 가졌다는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나. 부산정치파동과 양민학살문제
소남한 단정비판 이외에 이승만이 받는 다른 비판은 부산정치파동과 한강 폭파사건, 양민학살 사건 등이 있다. 그러나 부산정치파동은 6.25전쟁 중에 미국이 자기들 목적에 맞도록 한국전쟁을 끝맺기 위해 미국의 한국전 종전방침에 사사건건 맞서자 임기가 종료되기 직전에 있는 이승만을 대통령 직에서 끌어내기 위해 국회가 대통령을 선출하는 당시 헌법에 착안, 원내다수의석을 가진 한국 민주당을 꼬드기는 공작을 이승만이 미리 알아채고 군대를 동원, 국회를 겁박함으로써 미국의 책동을 저지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킨 사건이다. 이 사건은 어느 면에서 이승만을 비판할 대목이라기보다는 어느 면에서는 평가해야 할 대목이다. 한국통일을 바라는 한국민의 여망에 따라 전쟁정책이 수행되어야한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주장이 옳았기 때문이다.
미국에 놀아난 당시의 한민당(韓民黨)의 열등성, 한국내정에 마구 개입한 미국의 태도는 이승만의 반민주적 행태에 못지않게 비난받아야할 것이다. 결국 이승만의 이러한 대미외교자세가 반공포로석방, 한미방위조약체결로 이어졌던 것이다. 제가 과거 통일원 재임 중 모셨던 고(故)김용식 장관에게 이승만 대통령에 관하여 들은 이야기 한 토막을 여기에 옮기겠다. 이승만 박사는 6.25 동란에 참전,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한국을 지켜 준 미국에 사의를 표하기 위해 휴전 직후 1953년 10월 미국을 방문했다고 한다. 이때 이승만은 도착성명에서 한국에서 목숨을 잃은 미군병사 3만2000명의 희생에 감사한다는 이야기는 한마디 하지 않고 “우리 한국 국민들은 워싱턴의 겁쟁이들 때문에 통일을 상실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정도로 대미외교에서 국익을 강력히 앞세우는 외교를 펼쳤다는 것이다.
이밖에 양민학살 문제나 한강 철도 폭파문제도 비난받아야 할 이유가 되지만 그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결심사항이라기보다는 군사작전상의 필요가 더 컸고 또 개인으로서 자기 이익을 위해 취한 행동이 아님에 비추어 큰 과오로 보지 않겠다.
다. 친일파 숙정문제
끝으로 친일파 청산문제 역시 이승만 박사가 책임져야 할 과오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친일파문제에 대해서는 이승만 박사의 입장이 일반인들의 생각과는 다른 측면이 있었다. 그는 1945년 10월 임시정부요인환국기념만찬 석상에서 해외파와 국내파간에 친일문제를 놓고 열띤 토론이 벌어지자 이승만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선국왕이 총 한방 쏘지 않고 나라를 일본에 합병시킴으로써 2천만 조선민중이 친일하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만들었는데 조선국왕에게 물어야할 책임을 그간 국내외에서 일제 때문에 고생하면서 살아온 사람들 끼리 친일이냐 반일이냐를 따지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지금은 합심하여 나라를 세우는 일에 힘을 모아야 한다”고 호소했다는 것이다.(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논리적으로는 옳은 말이지만 국회가 의결한 반민족행위처벌에 관한 법에 따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차원에서 시범적으로라도 악랄한 행동을 한자들에 대한 처벌을 단행해야 했는데 그것을 차일피일 하다가 6.25동란을 당하여 친일파응징은 손도 못 댔고 휴전 후에는 오히려 친일 했던 사람들을 대공기술자들이라고 하여 정부요직에 기용하고 오히려 독립운동가탄압에 앞장섰던 자들이 득세하는 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라. 토지개혁문제
남한의 좌익들은 해방 후 북한에서는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토지개혁을 실시했지만 이승만은 지주계급의 이익만을 옹호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1947년 북한에서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을 내세우면서 토지제도를 개혁한다는 정보를 얻은 후 즉시 한국형 농지개혁안을 만들어 토지개혁을 단행, 6.25 전시 하에서도 이를 적극 추진하였다. 북한에서는 잘 알려진대로 토지국유화는 있었어도 농민에게 토지가 분배되는 토지개혁은 없었다. 토지의 소유를 협동적 소유, 전 인민적 소유로 명칭을 바꾸면서 국유화를 했을 뿐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한 일은 없었다.
이승만 정부는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원칙으로 하여 소작농체제를 폐지하고 자작농체제를 확립했다. 조선조 500년 이래 양반계급만 재산을 소유하고 학문을 배울 수 있었던 나라를 누구나 공부하고 재산을 소유할 민주주의 시대로 바꾼 것은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가 아닐까.
마. 조봉암 선생에 대한 사법살인
죽산 조봉암 선생에 대한 사법살인은 이승만 대통령의 과오의 하나로 지적되어야 한다. 죽산 조봉암 선생은 자기 스스로 독립운동기에 택했던 공산혁명노선을 청산하고 대한민국의 정부수립을 위한 제헌국회의원선거에 참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김구, 김규식 선생 등 한국독립당이 참여를 거부한 제헌의회선거에도 참여하고 농지개혁을 추진하는 이승만 정부의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입각하여 농지개혁을 시행하는데도 기여하였다.
그러나 당시 국내정계는 이승만 대통령이후 가장 유망한 대통령 후보로 여론의 지지가 있는 그를 제거해야 한국보수 세력으로서의 자유당과 민주당이 계속 집권할 수 있다는 계산 하에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사형을 선고했다. 설사 사법당국이 그런 결정을 내렸더라도 형의 집행을 면제할 권한을 가진 대통령이 형의 집행만은 허가해서는 안 될 터인데 사형집행을 허가했던 것이다.
7. 끝마치면서
이승만 박사는 그의 생애를 조국의 독립과 발전에 헌신한 위대한 선각자요 민족의 큰 지도자였다. 한국처럼 좋은 지도자 복이 없는 나라에서 하늘이 준 큰 인물이었다. 그분으로 인하여 오늘의 대한민국이 탄생했고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해방당시 우리나라는 민주정치가 뿌리내릴 여건이 거의 갖춰지지 않은 나라였다. 전체인구의 80%가 문맹이었다. GDP의 통계가 잡히지 않을 만큼 빈곤한 나라로서 민주주의가 발전할 경제적 기초가 원천적으로 결여된 나라였다. 여기에 분단국가로서 건국초기부터 남북한 간에는 심각한 사상전이 이어졌고 급기야는 동족상잔의 비극마저 겪어야 했다.
그러나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황 하에서도 이승만은 문맹퇴치에 박차를 가했고 열악한 재정형편 속에서도 배워야 산다는 일념 하에 국민의무교육제를 밀어붙였고 지방자치를 실시함으로 해서 대한민국국민들을 국민으로서 정체성(正體性)을 갖도록 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미군이 주둔하는 밀착방어체제를 갖춤으로써 국가의 안보기반도 공고히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인생 70세에 귀국, 나라를 세우고 전쟁에서 국가를 방위하고 대한민국을 국가다운 국가로 기틀을 세우는데 12년의 세월을 바쳤다. 그는 3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던 1956년에 이미 81세의 고령이었다. 육체적으로 더 이상 정상적인 정무와 국사를 감당할 수 없는 시점에 왔던 것이다. 그는 마땅한 후계자를 찾지 못한 가운데 장기집권을 꾀하다가 수많은 젊은 학생들이 목숨을 잃는 비극을 보면서 혁명의 객체가 되는 큰 과오를 범했다.
중국의 모택동은 이승만 대통령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난 과오를 범했다. 그는 이른바 문화대혁명이라는 10년 대란을 일으켜 전 중국을 폐허로 만들고 수천만의 동포가 굶어죽거나 테러로 죽음을 당하게 하는 엄청난 과오를 범했다. 양과 질적으로는 이승만과 비교도 안될 만큼 크고 무서운 과오를 범했다. 그러나 오늘날 모택동은 중국베이징의 천안문위에 그의 초상이 항상 걸려있고 중국공산당 만세와 함께 모택동 만세가 대형 현수막으로 걸려있다.
중국공산당은 1981년 6월 역사에 관한 중요결의를 통해 모택동의 공(功)은 7이요 과(過)는 3으로 결정했다. 중국 현대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모택동은 과오가 7, 공을 3정도로 봐주어도 너무 후한 평가일 것이다. 그러나 등소평(鄧小平)은 중국공산당이 일당으로서 계속 정권을 장악할 명분을 쌓기 위해 모택동의 공과 과를 7대 3으로 결정하였다.
문화대혁명의 책임을 물어 공산당이 모택동을 단죄한다면 중국공산당은 스스로 더 이상 집권할 명분을 가질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모택동을 의도적으로 살려야 중국공산당이 존속할 수 있다는 것을 등소평은 잘 알았기 때문이다. 이승만 박사도 그 분의 삶을 총체적으로 평가한다면 공을 7로, 과를 3으로 점수를 매겨도 결코 과장된 평가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 박사에게는 그를 죽이기에 나설 사람들은 많았어도 살리기에 나설 사람은 정치세력가운데 없었다. 이승만을 지지했던 자유당은 해체되었고 부정선거 원흉으로 처벌받거나 부정축재자로 몰려 단죄되었기 때문이다. 안창호 선생이나 김구 선생은 해방이후 냉전의 와중에서 건국이라는 어렵고 힘들고 중차대한 과업에 맞닥뜨려 투쟁한 일이 없기 때문에 찬사만 있고 욕이나 비난은 적다. 좋고 나쁨이나 공과 과의 평가는 일한 사람에게만 귀속되는 것 같다.
하와이에서 병들어 최후를 기다리면서 이승만은 모국에서 삶을 마치기 위해 귀국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청했지만 국민여론이 두려워 귀국허가가 거절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승만 박사의 귀국을 주선하고 필요한 경비도 지원했다는 글이 최근 김종필 회고록에 나와 있지만 그때는 이미 환국이 의미가 없을 만큼 건강이 악화된 시점이었다.
그러나 그분은 아직도 국민들의 마음속에 존경받는 존재로 남아있었다. 필자의 체험담 하나를 이 기회에 소개한다. 1965년 7월 21일경 이승만 박사의 시신이 서울로 돌아와 국립묘지에 가족장으로 묻힐 때 전국각지에서 그분 시신의 환국을 지켜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상경했고 도로연변에는 시민들이 도열, 애도하고 있었다. 이때 4.19에 앞장섰던 저와 더불어 제 친구들이 모여 하와이로 망명한 이승만 유해의 귀국을 반대한다는 시위를 벌였지만 이때 저희들에게 동조하거나 호응하는 시민들은 거의 없었고 오히려 우리들에게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결국 이곳, 저곳을 뛰어다니다가 도로교통법위반으로 걸려 남대문 경찰서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훈방당한 일이 있었다.
일반시민들은 이승만 대통령은 훌륭한데 그분이 인의 장막에 싸여 민심을 몰랐다거나 자유당 강경파 관료세력들 때문에 말년이 잘못되었다고 평가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다행히 1980년대의 시작과 더불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작업이 학계와 언론계에서 시도되고 그분의 건국과 관련된 업적이 제대로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많은 모략이 허위임이 밝혀지고 있고 특히 한미방위조약체결로 휴전 60년 동안 부분적인 남북충돌은 있었지만 동족상잔의 큰 전쟁 없이 경제발전을 이룩할 여건을 만든 이승만 박사의 기여가 새롭게 조명된 것도 잘 된 일이다. 현재까지 나타난 업적평가의 실적은 미약하다. 그러나 초대대통령으로서 이승만 박사의 공로를 그 적정형태에서 평가하고 국민들이 기억하도록 해주는 일은 민족의 긴 미래를 내다볼 때 서둘러야 할 일이다. 우리 후대들이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회고할 민족의 큰 지도자의 반열에 이승만 대통령을 올리는 작업이 오늘 이 포럼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강사 : 이영일(李榮一)
주요학력 및 경력 학 력
*광주·서중·일고(1955-58) 및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정치학과 졸업(1958-64)
*동국대학교행정대학원 수료(1968)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발전정책연구과정 1기 수료(1972)
*日本 츠쿠바(筑波)대학 외국인연구원(1988-90)
*중국 베이징 대학 국제관계학원 동북아전략연구중심 특약연구원(2009-2011)
*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드 외국어 대학 명예정치학박사(2003)
*광주 호남대학교 명예법학박사(2009)
경 력
1.정치경력
*제11,12,15대국회의원(통일 외교 통상위원)
*제12대 국회 국회문교공보위원장(1987-89)
2. 頂上外交참여
*한미정상회담(전두환 대통령-레이건대통령)공식수행(1985)
*유럽4개국(영국, 프랑스, 독일 벨기에)정상회담공식수행(1986)
*한중정상회담(金大中대통령-장쩌민주석) 공식수행(1998)
*한중정상회담(박근혜대통령-시진핑 주석)비공식수행(2013)
3.국토통일원 근무(1970-1980)
*통일연수원장(1급)
*교육홍보실장(1급)
*정치외교정책담당관(2급)
4. 사회활동경력
*한민족복지재단 공동대표로 6회 북한방문 (2001-2006)
*한중문화협회 총재(1998-2014 )
*한중정치외교포럼회장(2014~ )
5. 상훈 및 주요저서
*홍조근정훈장 수상(1979)
*벨기에정부 대십자수교훈장(1986)
*분단시대의 통일문제(전예원 1981)
*햇볕정책의 종언( 전예원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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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국제문제 5월호에 기고된 글임
한·미·중 3국학자들의 북 핵 대처방안 토론 참관기
이 영 일 (한중정치외교포럼 회장)
한국고등교육재단은 4월 15일 09시 30분부터 12시30분까지 4시간 동안 韓美中 3국 정치학자들을 초청, 북한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주제(Options for Dealing with North Korea)로 공개토론회를 열었다. 토론회는 미국 측에서는 로버트 아인혼(Robert Einhorn)박사(전 미 국무성 비확산 및 군축 차관보)와 다글러스 팔(Douglas H. Pall)박사(카네기 국제평화재단 부소장)가, 중국 측에서는 옌쉬퉁(Yan Xuetong)교수(중국외교부 자문위원 및 청화대학 세계 평화포럼 사무총장)와 순쉐핑(Sun Xuefeng)교수(중국청화대학 국제학부 교수)사 참가했고 한국 측에서는 김성한 고려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전 외교부 제2차관)와 정재호 교수(서울대학교 미중관계연구소장)가 발제 및 토론자로 나서 열띤 토론을 벌였다.
1. 미국은 제재와 외교협상의 병행이라는 양면궤도전략을 강조
이 날의 토론은 UN안보리의 대북제재가 과연 비핵화에 얼마만큼 효력을 가질 수 있는지, 제재이외의 다른 방안은 없는지를 놓고 전개되었다. 미국 측의 R. Einhorn과 D. Paal은 최근 북한이 핵무기의 소형화, 경량화를 진척시켰다고 하고 또 탄도 미사일기술개발에서도 큰 진전이 이뤄졌음을 대내외에 과시하면서 특히 미사일 발사 시에 기술이 진일보한 고체연료사용을 실험했고 탄도미사일의 대기권 재 진입 실험에도 성공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미국까지 공격할 능력을 북한이 갖춘 셈이라면서 북한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국제사회는 현재 과장이라거나 진실이라거나 허위라는 등 평가가 엇갈리고 있지만 한 가지 공통된 것은 북한의 행동을 이대로 좌시한다면 앞으로 국제사회는 큰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유엔제재보다도 더 강도 높은 제재가 요구된다고 말하고 이번 유엔안보리의 북한제재 2270호는 고강도 제제라고 평가했다. 한국도 개성공단을 폐쇄함으로써 단호한 제재에 나서고 있는데 박근혜 대통령도 북한의 위협의 심각성을 깊이 인식한데서 내린 결정이라고 말하고 제제의 성패는 중국이 얼마만큼 협조하느냐에 달려있는데 현재 중국은 안보리 결의이행을 다짐하고 있지만 좀 더 시간을 두고 제재의 강도를 지켜봐야 중국의 진의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미국 학자들은 현재 한미동맹관계는 잘 유지되는 가운데 강력한 제재를 추진하고 있지만 제재만으로는 북핵문제가 풀리지 않기 때문에 제재와 외교협상의 병행이라는 양면궤도전략(Dual Track)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하고 우선 북한이 핵무기의 완전동결은 아니더라도 잠정적인 동결 안이라도 내놓으면 평화협정문제와 함께 비핵화문제를 다루는 외교협상환경이 조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 북한은 비핵화를 전제로 하는 어떤 협상에도 응하지 않겠다면서 다만 한미양국이 실시하는 군사연습(Key Resolve같은)을 중지한다면 현재의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를 중지할 수 있다는 조건을 내놓고 있는데 이는 한미양측에서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이라고 잘라 말했다 .
2. 제재보다는 협상에 중점을 두는 것이 현실적이다
중국에서 외교정책 자문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옌쉐퉁(Yan Xetong)교수((Ph.D U.C. Berkley)와 순쉐펑(Sun Xuefeng)교수는 아래와 같이 자신들의 견해를 피력했다. 이들은 북핵문제는 미중간의 수많은 현안중의 하나이며 중국입장에서는 남중국해의 미중갈등이 북·핵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지금까지 북핵문제를 해결하기위한 6자회담 등 다자접근이 행해졌지만 효과는 없었다. 중국과 미국이 협력한다고 해도 북핵문제해결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이며 만일 미중협력이 효과가 컸다면 북핵문제는 진즉 해결되었을 것인데 그렇지 못했음이 이를 증명한다. 이들은 6자회담에 일본과 러시아를 끼여 넣은 것은 실익이 없었다.
그간 여러 차례 유엔중심의 제재가 있었지만 별 효과가 없었는데 앞으로도 효과가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국제정치의 현실주의 학파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회의적이다. 북 핵은 정치안보문제인데 제재는 주로 경제문제이기 때문에 양자관계가 서로 맞아떨어지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현재 미국이 북핵문제를 못 푼다면 중국도 못 풀 것이며 미국보다 중국이 북한을 다루는 입장이 좀 더 나을 수 있다고 하지만 미국의 정책이나 중국의 대북정책도 비핵화라는 면에서 서로 같아지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중국의 권고를 수용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중국의 영향력도 줄어들 것이다.
다만 미중협력이 가져온 가장 큰 효과는 이 지역에서 큰 전쟁이 발생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고 그 효과는 아직도 유효하다. 그러나 그것이 핵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제재보다는 동북아시아 안보의 큰 틀에서 외교협상을 추진하는 것이 그나마 바람직한 방법인데 꼭 6자회담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앞으로 10년을 내다볼 때 미중간의 협력이 있어도 이 지역의 긴장은 지속되겠지만 안정은 유지될 것이고 미중관계나 한미관계도 큰 변화가 없을 것이며 미·북 관계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북한의 비핵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한국이나 일본이 핵무장에 나서지 않을 것이다. 한일 양국은 핵 불 보유이익과 핵 확산이익을 비교해보면 스스로 무엇이 정답인지 알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다자회담이 그들에게 불공정할 것이기 때문에 택하지 않을 것이며 다자 아닌 양자회담을 선호할 것이다. 미중은 다른 문제에서는 서로 이해가 엇갈려도 한반도 비핵화라는 북핵문제에서만은 협력을 지속할 것이다. 미중관계는 남중국해문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양국이 취하는 조치들이 투명하기 때문에 갈수록 악화되지 않을 것이며 이것이 다른 이슈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북한과 중국관계는 중국이 제재를 계속하는 한 갈수록 악화될 것이고 이미 악화된 상태가 개선될 가능성도 적다. 현 상황은 북 핵으로 말미암아 긴장은 높아지지만 전쟁의 위험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북한은 앞으로도 추가적인 실험을 포함하여 자기에게 유리한 모든 조치를 그대로 밀고 나갈 것으로 보인다.
3. 북한 정권전환압박 없이는 비핵화 이루기는 힘들 것이다.
김성한 교수와 정재호 교수는 김정은은 장기적으로 북한정권을 유지하기위해 핵·경제 병진정책을 추구할 것인데 ① 미국본토까지 공격할 능력을 갖겠다는 뜻으로 핵무기의 소량화, 경량화를 추구하며 ② 국제사회의 제재를 경감해 나가는 수단으로 전술적 차원의 대화를 시도할 것이고 ③ 북한에 대한 압박이 완화되면 핵과 미사일 실험을 재개하며 ④ 핵과 미사일에 대한 나름의 전략목표가 달성되면 실험중단을 선언한 후 ⑤ 주도권을 가진 협상을 추구하면서 입지를 강화할 것이라면서 현시점은 북한에 대한 제재를 한층 더 강화할 때라고 말했다.
두 교수는 북한의 김정은은 국가안보보다 자기의 정권유지, 즉 집권안보를 더 중시하고 그 수단으로 핵을 선택했기 때문에 정권을 뺏겠다고 압박해야 비핵화를 수용할 것이라고 진단하면서 북한의 행동을 바꾸고 핵에 집착하는 태도를 바꾸는 방도는 정권에 대한 위협이 가장 절실히 요구된다고 말하고 유엔제재와 더불어 정권을 위협할 Plan B, C를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미국의 아인혼(Einhorn)이 북 핵의 잠정적 동결화를 대북협상개시의 조건이라고 앞서 말한데 대해 한국이 바라는 것은 <제재-동결화-비핵화>라는 틀 내에서의 동결화이며 대화를 위한 대화는 북한에게 시간만 벌어주었기 때문에 거부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중국이 지금은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결의안 2270호를 성실히 이행한다고 하지만 이것이 북한에 대한 단순한 전술변화 아닌 전략적 변화로 발전하기위해서는 북한이 앞으로 5차 핵실험을 자행할 경우 석유공급을 전면 차단한다는 신호를 명시적으로 북한에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중국과 북한 관계는 핵실험 이후 양국관계가 악화되고, 대북제재에 동참을 선언하고 있지만 북한과 거래를 해오던 동북3성은 북한과의 거래제한이나 중지로 현실적으로 피해를 보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 한국정부는 동북 3성을 상대로 하는 경제협력을 정책적으로 강화, 북한에 대한 중국의 제재가 차질 없이 이행될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어 북한의 국영회사들이 중국기업인 것처럼 위장하여 대중무역을 실시하는데 이들을 적발, 강력히 단속하도록 외교노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평화조약과 평화체제는 전혀 별개의 문제인데 미국이나 중국은 평화협정과 비핵화협상의 병행추진에 합의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현재 한반도에 필요한 것은 평화조약이 아닌 평화체제라고 말하고 평화협정이란 현재의 정전협정을 미국과 북한이 당사자가 되어 양자 간에 전쟁종결을 선언하고 이를 평화협정으로 대체하자는 것이기 때문에 이는 한국이 결코 수용할 수 없는 견해라고 못 박았다.
이어 평화체제는 비핵화의 바탕위에서 남북한의 군축과 교류, 협력 그리고 미일의 북한승인을 포함한 포괄적인 한반도 평화조건을 정하는 바탕위에서 1953년의 정전협정을 한반도 평화협정으로 바꾸어 나가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한미 간에 평화체제문제에 견해차이가 없다>
이에 대해 Robert Einhorn도 미국이 생각하는 평화협정이 바로 한국 측이 말하는 평화체제와 개념이 같은 것이라면서 미국의 목표는 제재만으로는 비핵화를 달성할 수 없기 때문에 비핵화의 수단으로서 평화협정을 함께 논의하자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이어 현재 북한은 어떤 형태의 대화도 준비된 것 같지 않다면서 북한이 적어도 2005년의 9.19선언수준의 비핵화의지의 표명과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실험중지, 핵시설의 동경과 IAEA의 사찰 수용, 영변 밖에서 비공식으로 진행 중인 핵 프로그램중지 등 비공식 시설문제도 협상대상으로 삼겠다는 입장이 분명해질 때 미국은 북한과 비핵화와 평화협정 문제를 나란히 논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과 미국 양자 간의 평화협정 체결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고 앞으로 논의할 평화체제 문제 속에는 양측 간의 신뢰회복, 군축, 경제문화교류와 함께 미·북 관계의 정상화도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에 한미 간에는 아무런 견해차이가 평화협정문제도 비핵화의 최종단계에서 논의될 과제라고 답했다.
한국 측은 대북제재가 진행될 경우 무고한 인민들의 희생이 따른 다는데 여기에는 비례원칙에 따라 인민들의 희생을 최소화해야 하지만 “복숭아를 키우려면 자두나무가 희생한다”는 중국의 속담이 있듯이 북한이 국제사회의 인내심을 시험하면서 강경하게 나올 경우 여기에 수반하는 최소한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4. 토론의 결론
최종토론에서 참가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아래와 같다. 중국 측은 중국이 말하는 협상적 해결은 지금까지 비핵화의 실적이 없는 6자회담을 반드시 재개하자는 것은 아니며 동북아시아 안보의 큰 틀 속에서 남북한과 중국, 미국의 입장을 포괄하는 통합적 해결방도를 찾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측 학자들도 한반도 핵문제는 지난 25년간 잠간씩의 성과는 있었지만 지속적인 성공이 없는 가운데 계속되어 오다가 김정은이 등장하면서 취하는 공격적 핵정책 때문에 전 세계는 경각심을 가지고 제재에 나섰다면서 이번에는 김정은도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했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측은 현 상황은 주요 이해당사자간에 위기의식을 공유해야 하며 전술적 도구로서의 제재가 협상을 수반하는 전략적 도구로 발전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현시점에는 제재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북한정권의 변환에 역점을 두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참관자로서 아쉬웠던 것은 북한의 진의가 적화통일을 위해 핵무장을 추진하면서도 동족을 상대로 핵 공격을 준비한다는 말을 안 듣기 위해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이나 핵 공격의 위협에 대비한다는 명분을 조작하고 있는 본질을 파헤치지 못한 점이다. 앞으로는 북핵문제의 이러한 본질적 측면을 좀 더 심도 있게 파헤쳐 국론통일의 기반을 다져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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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헌정지 2016년 4월호에 게재)
김정은의 퇴출이 한반도 비핵화의 첩경이다
이 영 일 한중정치외교포럼회장(전 국회의원)
1.
북한지역에서 김정은이 3대에 걸친 세습독재 권력을 승계하면서부터 오늘의 한반도를 생존무대로 하는 한민족의 우리 세대는 이 땅에서 열핵(熱核)전쟁이 발생할지도 모를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북한의 김정은이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핵무장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굳히면서 한반도비핵화라는 국제사회의 요청을 전면 거부함으로써 핵문제의 비군사적, 외교적 해결가능성을 차단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김정은은 그의 선대(先代)인 김일성이나 김정일과는 달리 외교의 중요성을 거의 외면하거나 의식하지 않는 모양새다. 김일성은 6.25동란을 일으킨 전쟁범죄자였지만 북한정권을 지켜 내기위해 중국과 소련사이에서 줄타기외교를 하는 전술적 교활성과 전략적 신중성을 보이면서 정권과 체제를 지탱했다.
김정일도 김일성에 못지않게 외교의 중요성을 터득하고 생존수단으로 때로는 중국에 밀착, 중국의 지지를 끌어내기도 하고 때로는 남북대화를 열거나 대미접근을 시도했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천안함 폭침이나 연평도 포격도발 같은 군사공세도 펼치고 은밀히 핵무기 개발도 추진해왔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김정일은 미국의 대북압살정책으로부터 자기를 지키기 위한 억제력확보수단으로 핵개발에 나섰다고 주장, 수세적 입장을 취하면서 미국이 북한의 생존을 확실히 보장한다면 핵무기 비확산(NPT)질서에 복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즉 북핵문제의 외교적 해결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었다.
그러나 김정은은 그의 선대들과는 태도가 전혀 다르다. 그는 권력을 잡자마자 곧바로 2012년 제3차 핵실험과 제5차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를 단행한데 이어 금년 1월 6일에는 제4차 핵 실험과 제6차 광명성 4호로 위장한 장거리미사일발사를 자행했다. 국외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러한 행동이 몰고 올 후과(後果)에 대해 김정은이 전략적으로나 전술적으로 충분히 고려했다는 증거는 없다. 김정은은 그간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4회에 걸쳐 통과시킨 북한제재결의를 철저히 무시할 뿐만 아니라 북한의 우방국으로 행세해온 중국의 권고나 자제요구에도 귀를 닫았다.
금년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에 대해 유엔사상 가장 강력한 제재내용을 담은 결의 2270호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는데도 김정은은 이러한 제재도 의식 하지 않는 듯 오히려 본인이 직접 전 세계로 방영되는 TV에 나와서 “핵탄두를 경량화, 규격화할 것이며 서울은 물론 워싱턴·뉴욕도 사정권 안에 들어 있다”는 등 도발적 언동을 이어가고 있다. 미국을 향해 핵과 미사일발사를 계속하고 핵무기를 탑재한 미사일 공격으로 맞서겠다는 것이다.
마치 북한이 G2에 맞서는 G3같은 강대국이나 된 것처럼 핵무기의 비확산(NPT)이나 미사일통제체제(MTCR)라는 국제규범을 사그리 무시하면서 비핵화거부와 핵 무력증강을 공공연히 주장한다. 북한 내부에는 김정은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할 견제세력이 있을 수 없다. 반론을 제기하는 자는 이유의 타당성과는 관계없이 잔인한 처형이 뒤따르는 무시무시한 공포정치를 자행, 집권기반을 다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국제사회에 비친 김정은은 21세기 국제사회의 무법자, 난폭한 질서 파괴자다. 이미 죽은 독일 제3제국의 아돌프 히틀러나 세르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세비치의 망령이 북한 땅에 되살아 난 것 같다.
이제 국제사회는 한반도비핵화를 달성하려면 비외교적(非外交的) 대안으로 우선 김정은이라는 폭군을 권자에서 내려오게 하거나 핵과 미사일 시설을 군사적으로 점령, 강제해체하는 응징적 해결을 시도할 밖에 다른 도리가 없어졌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경계하면서 피해 가야 할 열핵(熱核)전쟁의 위기가 배태되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의 병행추진을 한반도 문제해결의 대안으로 합의했다지만 김정은의 북한이 현재의 자세를 바꾸지 않는 한 군사충돌의 위기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하 김정은의 언행이 몰고 오는 위기상항을 개관키로 한다.
2.
김정은이 그의 언행으로 조성하는 한반도위기는 첫째 한반도 비핵화거부와 핵 무력증강정책을 공세적으로, 명시적으로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정일 시대 북한은 공식적으로는 비핵화목표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고 그 연장선상에서 2012년 미국과 북한 간에는 2. 29합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김정은은 이 합의마저 일방적으로 파기한 후 공공연히 비핵화거부입장을 밝혔고 2012년 4월에는 헌법에 핵보유국을 명시했다. 이어 7월에는 핵정책의 전면적 재검토를 선언한 후 2013년 2월 제3차 핵실험을 단행하고 2013년 3월 31일 핵·경제 병진노선을 내외에 선포했다.
이때 김정은은 핵 선제공격을 노골적으로 거론하면서 자신들의 “첫 타격에 미국 본토와 하와이, 괌도가 녹아나고 남조선 주둔 미군기지는 물론 청와대와 괴뢰군 기지도 동시에 초토화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김정은의 선대들 같으면 감히 입 밖에도 꺼낼 수 없는 무모하기 짝이 없는 소리를 떠벌린 것이다. 곧이어 2012년 미사일과 핵을 결합시킨 전략군을 창설하고 2015년 노동미사일 고각발사(高角發射)실험을 감행하면서 2015년에는 동해상에서 잠수함 발사탄도미사일(SLBM)실험을 단행했다. 이어 금년에는 핵무기를 「개발단계에서 생산 배치단계」로 격상시킨 제4차 핵실험과 장거리 탄도미사일 발사에 성공, 북한의 핵능력을 게임 체인저(Game Changer)로 전환시키고 있다.
지금 김정은의 심중에는 북한이 ‘핵 국가 상호간에는 공포의 균형으로 서로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는 이론’이 적용될 핵보유국만 된다면 세상에 아무 것도 무서울 것이 없고 미국도 꼼짝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나 핵전략 면에서 핵 국가들끼리 인정하는 공포의 균형논리가 적용되지 않는 지역이라는 국제사회의 공통된 인식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현재 김정은의 군사전략이 체제유지와 생존차원을 넘어서서 보다 공격적인 목표를 세우고 이를 실현하려고 한다면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는 결국 경제제재를 넘어서서 군사제재로 변할 것이 확실하다. 한미양국이 작계(作計)5015를 준비하는 소이(所以)다.
한반도의 운명이 김정은 때문에 자칫 전쟁에 휘말릴 수 있음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금년 미국 정부는 물론이거니와 항상 대립하기 일쑤인 공화·민주양당의 상하 양원도 북한을 강력히 제재하자는 데서 놀랄 만큼 국론을 하나로 모았다. 미국 학계나 군사전문가들도 북한은 “위협행동에서 가장 적대적이며 위협능력에서는 두 번째로 심각, 미국의 핵심이익에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또 북한 핵을 추적하는 웹사이트 38 North'운영자인 조엘 위트도 북한의 핵개발을 용인하면 2020년에는 한국과 미국, 일본은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고 통일도 요원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북한 4차 핵 실험 이후 유엔안전보장이사회회원국들이 대북 제재안을 전원일치로 가결시킨 것도 김정은의 핵전략을 위험스러운 것으로 평가한데 기인한다.
국내일각에서는 중국이 제재에 소극적이어서 제재효과가 감소될 것을 우려하지만 중국도 미국이 독자적으로 취할 군사적 자위조치의 가능성을 보기 때문에 과거처럼 제재에 소극적일 수 없다. 더욱이 미국 국회가 대통령에게 포괄적으로 위임한 행정명령이 요긴하게 발동될 경우 북한의 고립은 심화될 것이다. 미국이나 중국도 북 핵의 초기단계에는 이를 위협으로 인식하지 않았으나 이제는 단호한 제재 대상으로 삼고 있다. 북 핵에 대한 제재가 견문발검(見蚊拔劍)아닌 적극적 대처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3.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 2270호가 집행되면서부터 북한의 국제고립은 심화되고 대외활동과 외화벌이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김정은 체제가 안고 있는 여러 형태의 내부모순과 갈등이 조만간 현실문제로 표출될 것이다. 우선 김 씨 왕조3대에 걸친 독재권력 유지의 근간이었던 북한엘리트층의 강고한 지배동맹이 김정은의 무원칙하고 자의적이며 잔인무도한 처형위주의 공포정치로 간부숙청이 진행됨에 따라 공동운명체체로서의 일체감은 줄어들고 면종복배가 생존의 수단으로 떠오르면서 점차 해체의 길을 걷고 있다. 여기에 외화벌이감소로 통치자금 마저 고갈된다면 채찍만 있고 당근조차 없는 공포정치에 북한 엘리트층들이 더 이상 배겨날 수 없을 것이다.
둘째로는 김정일의 선군(先軍)정치세력과 김정은의 선당(先黨)정치세력간의 권력투쟁이 심화될 것이다. 현재는 군복을 입은 민간인들이 군을 지배하고 있지만(황병서가 군총정치국장) 선군세력들이 아직도 확고히 군부 내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에 양자 간의 모순은 갈수록 심화될 것이다.
셋째로 군부 내에서도 김정은이 핵미사일 부대를 전략군으로 재편성, 우대하기 때문에 재래식 군대와 신형 미사일, 로켓, 핵탄두를 다루는 전략군 간에 암투가 발생, 북한 판 임오군란(壬午軍亂) 같은 사태도 예상된다.
넷째로는 북·중 관계의 악화가 북한 경제의 생존능력을 극도로 약화시킬 것이다. 북한의 대 중국무역의존도는 공식적으로는 69%지만 실제로는 90%를 상회하기 때문에 중국이 가하는 경제제재는 북한 정권에게 심각한 타격이 될 것이다. 다만 유엔결의가운데 포함된 민생 등 인도적 문제에 대해서는 제재가 다소 약하기 때문에 북한의 민생에 직결되는 장마당 경제에는 영향이 크지는 않겠지만 북한경제의 큰 축을 이루는 인민군경제가 받는 타격은 심각할 것이다. 특히 광물자원에 대한 유엔의 제재부과와 인력수출을 견제하는 미국 대통령의 행정명령은 북한 경제의 숨통을 결정적으로 조일 것이다.
다섯째로 심각한 문제는 북한 고위지도층의 탈북행렬이 줄을 잇는 것이다. 김정일 시대의 탈북자들이 실권 없는 엘리트들이었다면 김정은 시대에는 체제 핵심들의 탈북이 증가하고 이들 중 남북군사회담에 대표로 참석했던 박재경 같은 인사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김정은도 집권과 동시에 인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인민을 더 이상 배고프지 않게 할 것임을 다짐하였지만 핵·경제병진정책을 버리지 않는 한 식량 난, 자원 난, 에너지난은 갈수록 가중될 것이며 경제의 회생가능성은 기대할 수 없다. 김정은이 추진하겠다던 19개의 개발특구도 유엔안보리의 초강경 대북제재가 진행되는 한 한 건(件)도 성사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이제 국제사회는 핵 무력의 환상에 사로잡혀 무모한 도발을 일삼고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면서 자기 인민들을 극도의 궁핍으로 몰아넣는 공포정치의 폭군 김정은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될 할 시점에 당도했다. 그를 권좌에서 몰아냄으로써 지역의 안전을 보장하고 북한이 가난에서 벗어날 개혁개방을 이루도록 지혜를 짜내야 한다. 이 기반위에서 국제사회는 필요한 공조를
통해 한반도 통일의 새 시대를 열도록 지원해야 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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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 폐기의 국제정치학
(이글은 2016년 헌정지 3월호에 발표되었다)
한중정치외교포럼 회장 이 영 일(전 국회의원)
1. 2016년은 북한 핵무장여부가 판가름 날 마지막 시기다.
북한의 4차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발사시험은 한반도를 위요한 안보지형을 크게 변화시키고 있다. 북한이 수소폭탄이라는 이름으로 시도한 4차 핵실험과 인공위성이라고 포장한 탄도미사일 발사실험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이 실전배치의 직전단계에 이르렀음을 말해주는 도발이다. 이 때문에 북 핵과 미사일의 직접 피해 당사자인 한국을 포함하여 북 핵과 미사일발사를 좌시할 수 없는 주변국들은 하나같이 긴장하고 있다.
특히 ‘2016’년은 북한 핵문제를 연구해온 국제정치학자들이나 전략연구가들이 기술적 견지에서나 시점의 축적에 비추어 북한은 국제사회의 공인과 관계없이 핵 국가의 반열에 오르게 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북한의 2차 핵 실험이 끝난 후 한국을 방문한 재미국제정치학자 김영진 박사(전 미 국무성 고문)는 2012년 11월 26일 사단법인 4월회 초청강연에서 2016년이 북한핵무장의 저지냐 용인이냐를 판가름할 마지막의 해가 될 것이라면서 북 핵전문가들의 연구결과를 정리해서 발표한 바 있다.
아니나 다를까 북한은 2016년 1월 6일 4차 핵실험을 수소탄 급으로 단행했다고 발표한데 이어 2월 7일에는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바야흐로 북한의 핵무장은 그 최종단계에 근접하고 있다.
2. 북 핵을 보는 한·미·중의 태도평가
가. 한국의 대응
한국은 북한과 1992년 한반도비핵화선언을 발표한 이래 한국에 배치된 미국의 전술 핵까지도 철수시키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모든 요구를 수용하면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 아닌 군사적 이용을 배제하는 비핵화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북한은 1992년부터 IAEA의 미신고핵시설에 대한 특수사찰을 거부하면서 급기야는 1993년 핵확산 금지조약을 탈퇴하고 공공연히 핵개발을 추진해왔다.
그러나 한국은 북 핵 저지에 당사자로서 직접 대응에 나서기보다는 핵무기비확산질서를 관장하는 미국, 중국 등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들에게 주된 책임을 맡겼다. 동시에 IAEA등 핵확산금지조약(NPT) 감시기구를 통한 조치나 6자회담을 통한 외교적 해결에 기대를 걸기도 했다. 최근에는 국가안보의 방편으로 미국의 핵우산이나 확장된 억지를 통한 북 핵 대응을 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수교 이래 경제협력이 확대되고 있는 중국과의 협력을 통해서도 핵문제해결을 모색했다.
그러나 상황은 한국의 기대에 너무 못 미쳤다. 한국은 결국 북한의 4차 핵 실험과 탄도미사일 발사를 확고한 대비 없이 맞게 된 것이다. 미국, 중국, 러시아 등 주변강대국들은 북한의 핵을 자국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할 필요가 없을 만큼 모든 도발을 응징할 충분한 핵탄두를 비축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만큼 절실하게 북 핵 저지를 서두르지 않았다.
강대국들은 핵무기확산저지라는 국제적 대의 때문에 북핵문제의 해결을 추구하면서도 그때그때의 자국의 실리에 얽매어 북 핵의 적극저지를 소홀히 한 결과 20년의 세월을 허송했고 북한이 핵능력만 키울 시간을 벌어주었다. 이 시점에 이르러 한국은 북핵문제를 더 이상 강대국에만 맡겨둬서는 해결전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지난 2월 10일 개성공단의 운영중단을 결정함과 동시에 북 핵 저지와 폐기에 능동적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2월 16일 국회보고연설을 통해 핵 포기냐, 체제붕괴냐의 양자택일을 북한에 요구하면서 북 핵 저지를 국가의 사활적 과제로 설정했다. 동시에 개성공단 중단은 북한에 대한 제재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면서 북 핵 저지에 국가총력을 경주할 것임을 밝혔다. 북핵문제가 비로소 우리의 실존적 과제로 결정된 것이다
나. 미국의 대응
미국은 북핵문제가 제기될 당초에는 북 핵시설에 대한 폭격을 검토했지만 동족상잔의 재발을 피하려는 한국 김영삼 정부의 완강한 반대와 폭격의 실효성에 대한 엇갈린 평가로 군사적 해결을 유보한 가운데 북미양자간 대화를 개시, 1994년 제네바합의를 도출함으로써 핵개발을 동결시키면서 대북지원을 통해 핵무장 포기를 유도하려고 하였다. 이때 미국은 북한의 전력생산을 지원하기 위해 경수로건설에 착수했고 수십만 톤의 중유를 북측에 무상으로 공급했다.
이때 북한은 겉으로는 대화에 호응하고 6자회담을 통해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 전망을 주는 청신호를 보내면서도(9.19합의) 이면에서는 파키스탄을 통해 원심분리기를 도입, 핵개발 수준을 높이는데 주력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은 북한과의 대화를 통한 외교적 해결을 사실상 외면하고 경수로 건설과 중유지원을 중단했다.
그러나 햇볕정책을 내세우는 한국의 좌파정권과 중국이 북한을 계속 지원함으로 해서 북한의 핵개발 노력은 진전되었다. 이 와중에 이란의 핵개발사태가 발생했고 아울러 북한도 6자회담을 보이콧하면서 핵개발노선을 가속화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정책의 우선순위를 “북 핵 저지”에서 “이란핵 개발저지”로 옮기고 대북 정책도 ‘전략적 인내’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호도하면서 북한이 핵 포기의사를 명확히 밝히지 않는 한 북한의 기만정책에 놀아나는 대화는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이것도 북한의 4차 핵실험의 길을 열어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다. 중국의 대응
중국은 북한 핵문제가 등장하던 1992년 IAEA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북핵문제는 “대화와 협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러한 입장은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중국이 갖는 거부권 때문에 모든 국제회의에서 북 핵 저지를 위한 다른 수단의 선택을 어렵게 했다. 이로써 중국은 사실상 북한이 4차에 걸친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발사를 추진, 성공시킬 시간과 여건을 조성해주었던 것이다.
중국의 당과 정부는 북핵문제가 등장하던 초기부터 북 핵을 중국 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지 않았고 기필코 저지해야할 과제로 보지도 않았다. 중국학자들의 대다수는 북한의 2차 핵 실험을 전후한 시기까지만 해도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14개 국가들 중 여러 나라들이 핵을 보유하고 있는데 여기에 북한 하나가 더 추가된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시진핑 주석이 2013년 한중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의 핵무장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언명이 있은 후부터는 중국학계의 공공연한 북 핵 긍정론은 사라졌다.
그러나 대화와 협상으로 북핵문제를 해결해야한다는 중국의 주장은 지난 22년 동안 계속되어왔다. 지난 1월 6일 북한의 4차 핵실험 후 왕이(王毅)중국외교부장은 여전히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 했다. 윤병세 외교장관에게, 또 1월 27일 베이징을 방문한 존 케리 미 국무장관에게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해결해야한다”고 말했다. 북한이 핵 포기를 내용으로 하는 어떠한 협상에도 불응한다는 입장을 중국 측에 분명히 밝혔고 또 핵 보유를 헌법에까지 못 박고 있는 실정을 알면서도 중국은 핵문제해결수단으로 대화와 협상만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일견 황당해 보이는 주장 같지만 여기에는 중국 나름의 전략적 고려가 담겨있다.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이 갖는 영향력을 배제하고 중국우위의 질서를 구축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 비핵화를 명분으로 북한과 미국이 대화를 열어 평화협정을 협상케 하고 이 협상과정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거론, 미국의 한반도 개입명분을 약화시키거나 주한미군의 지위를 흔들겠다는 것이다.
최근 중국이 한국을 상대로 강도 높게 요구하는 사드(THAAD)배치 반대도 맥락은 같다. 사드는 공격무기가 아닌 방어무기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부지(敷地)를 제공하는 사드가 주한미군에 배치될 경우 한국은 미국의 미사일 방어망에 편입되어 중국에 대한 견제세력의 일원이 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그간 한국은 사드가 북한의 핵과 미사일로부터 주한미군의 안전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미군 사령관의 건의를 반대할 명분이 약했지만 중국의 우려를 배려, 신중한 입장을 보여 왔다.
그러나 북한의 4차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발사는 한국이 더 이상 사드 배치요구를 외면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중국도 북 핵을 감싸면서 오랫동안 공들여온 전략목표를 달성할 수 없게 되었다. 앞으로 북한이 핵실험과 탄도미사일발사에 성공, 대량살상무기들이 실전에 배치될 단계에 진입하면 중국은 오히려 양호유환(養虎遺患)의 난국에 빠지게 될 것이다. 특히 한중수교이래 오랫동안 북한내부에서 들끓어온 중국불신감을 상기할 때 북한의 핵무장은 중국에도 큰 부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북한의 4차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발사의 성공은 그 역설로서 북한 김정은 정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강도 높은 제재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또 한국이 핵문제의 당사자로서 직접 행동에 나서게 했다. 물론 제재의 수준을 놓고 강대국 간에 견해차이가 있지만 “국제여론에 맞선 북한에게 필요한 대가를 지불케 해야 한다”는 왕이 중국외교부장의 발언도 우리는 유념할 필요가 있다. 한국이 원하는 것은 제재로서 북한이 비핵개방정권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제 우리 외교는 북 핵에 대한 직접대응을 소홀히 했던 구태를 털고 모든 형태의 재제를 강화, 2016년을 북 핵 저지의 결정적 해로 만들어야 할 도전을 맞고 있다.
3. 고려할 수 있는 정책대안
가. 이스라엘의 교훈
이스라엘은 아랍 국가들에게 둘러싸인 고립된 나라다. 따라서 자국의 안보에 위협이 될 요소를 철저히 조사차단하는 점에서 세계적인 수범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는 1981년 이라크가 핵개발을 시도할 때 오시라크의 원자로 공사장을 기습 폭격하여 이라크 핵무장을 저지했다. 2007년에는 북한과 제휴하여 시리아의 알키바에 건설 중인 다이르 알주르 원자로 공사 현장을 정확히 파악, F-15 편대를 터어키 국경을 몰래 넘어가 기습 폭격함으로써 시리아의 핵무장을 선제 차단했다.
이때 미국은 폭격 아닌 외교적 해결을 추구했지만 이스라엘은 미국의 입장에 구애받지 않고 직접 폭격을 통해 자국의 안보위기를 극복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스라엘의 모사드 같이 기민, 정확한 정보기관도 없고 북 핵을 직접 행동으로 폭격, 저지할 마음의 태세도 갖추지 못하고 있음이 실로 아쉽다. 뒤늦게나마 박근혜 대통령이 개성공단가동을 중단하면서 국민들에게 햇볕정책의 미몽을 버리고 단결을 촉구, 북 핵 저지를 국가안보의 제1의 과제로 설정한 것은 만 번 다행한 일이다.
나. 모든 가능성을 다 열어놓고 대처하자
북핵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도는 북한이 핵무장하지 않고 탄도미사일 없이도 잘 살아가는 유엔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을 제외한 나머지 193개회원국들이 걷는 바로 그 길을 택하게 하자는 것이다. 북한이 이러한 선택을 하도록 미국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북한과 여러 기회에 대화도 나누고 필요한 지원도 제공했고 북한이 가장 곤궁한 상황에 처했을 때도 군사적으로 위협한 바 없었다. 중국이 미국의 북한과의 대화가 북핵문제해결의 관건이라는 주장은 경험상으로 보아 설득력이 떨어진다. 우리도 식량, 의료, 비료 등 수 십억 달러 상당의 원조를 제공해왔다.
그러나 북한은 핵과 미사일개발에만 매달리면서 한국의 안보를 위협하고 동북아 정세를 긴장 시키고 특히 4차 핵실험과 6차에 걸친 미사일 도발로 동북아시아의 안보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는 유엔회원국인 북한의 정체(政體)는 그대로 존속시키더라도 현재 북한을 잘못 이끄는 3대세습독재자 김정은을 권자에서 물러나게 하는 북한정권의 운전수 교체(Driver Change)를 진지하게 추구해야 한다. 오늘날 북한 내에서 비핵개방을 원하면서 자생하는 장마당 세력이 보다 큰 힘을 갖도록 지원하기 위해서다.
이 작업은 한반도 주변 5개국이 한국과 긴밀히 공조하는 가운데 은밀히 추진해야 하며 특히 한국은 북한 지도자 교체에 영향력이 큰 중국을 상대로 공식, 비공식 교섭을 적극 추진하고 여기에 미국과 러시아가 가세 협력토록 해야 할 것이다. 이 길이 순탄치 않을 경우에는 미국과의 협력을 통한 참수(斬首)계획도 선택에서 배제해서는 안 된다.
이와 동시에 유엔안보리에서는 가장 강력한 제재결의를 끌어내야 한다. 우리는 김정은이 전 세계로 방영되는 TV를 통해 “미사일 발사! 핵실험 단행!”을 육성으로 외치는 모습을 보면서 지도자 교체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특히 북한은 핵과 미사일로 미국 본토를 공격하겠다고 공언한 만큼 지금 미국은 북한의 사실상의 선전포고 앞에 자위조치를 취할 명분이 충분하다.
미국의 자위조치에는 중국의 거부권행사가 의미가 없기 때문에 유엔안보리 제재결의보다도 더 실효성 있는 효과적인 제재조치를 취하도록 해야 한다. 시진핑 주석이 약속한바 북한의 핵무장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언급이 중국의 정책으로 구체화하기 까지 우리는 한미동맹을 근간으로 강도 높은 대북제재와 권력교체를 병행추진하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국론통일의 바탕에서만 꽃필 수 있으며 지금이 바로 안보에 여야가 없다는 만고의 진리를 우리 정치권이 수범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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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4차 핵실험과 중국의 선택
(이글은 2016년 憲政誌 2월호에 기고된 것임)
이 영 일 한중정치외교포럼 회장
1. 4차 핵실험의 상황평가
북한정권은 지난 1월 6일 김정은의 지시에 의해서 제4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그간 주변국들은 김정은이 조만간 이런 결정을 내릴 것으로 예상하면서도 중국측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처럼 수소폭탄실험에 성공했다는 발표와 더불어 제4차 핵실험을 감행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주지하는 바이지만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작년 9월 오바마 미국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중국은 북한의 핵무장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고 그에 앞선 박근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도 북 핵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특히 중국은 작년 10월 10일 시진핑 주석의 친서를 휴대한 류윈샨(劉雲山)중국공산당 상임위원을 조선노동당 창당 70주년 기념식에 파견, 이 기회에 북핵문제에 대한 중국 측의 견해를 김정은에게 직접 전달했다.
소식통들에 의하면 류윈샨은 김정은과의 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의 필요성을 자세히 설명하고 6자회담을 통한 북 핵의 평화적 해결만이 북·중간의 전통적 우의, 협력관계를 복원하는 방도라고 말했다고 한다. 북한도 이런 중국 측의 태도에 호응, 김정은의 연설에서 핵문제에 대한 언급을 자제한 것으로 보였다. 국제여론은 이러한 동향을 주목하면서 그간 냉랭했던 북·중관계가 회복될 기미가 보인다고까지 예상했다.
그러나 1월 6일 단행된 북한의 4차 핵실험은 중국의 입장을 철저히 무시함과 동시에 그간 펼쳐진 한반도 핵문제의 외교적, 평화적 해결에 대한 모든 기대를 일거에 무산시키고 오직 한층 더 강화된 제재만이 북한으로 하여금 핵을 포기시키는 유일한 방도라는 쪽으로 세계여론이 모아지고 있다. 북한은 이런 여론에 맞서 수소폭탄급 핵실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하면서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이 지속되는 한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핵실험 추진이유를 밝혔다.
북한은 항상 미국의 대북적대시정책을 핵실험이유로 내놓았다. 1차 핵실험이나 2차 핵실험에서도 미국의 적대시 정책을 들고 나왔으며 제3차나 4차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핵실험이 실시되는 상황의 전후관계(Context)를 살펴보면 각 실험 때마다 북한이 겨냥하는 주안점은 달랐다. 2013년 2월 12일의 3차 핵 실험의 경우 중국공산당의 대외연락부가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선출된 시진핑의 국가주석 취임을 앞두고 한반도의 안정에 북측이 협력할 것을 당부했는데도 김정은은 권자를 이어받은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지만 중국의 눈치를 보지 않는 김정은임을 과시하겠다는 심산에서 핵실험을 감행했고 이에 앞선 2012년 12월의 미사일 실험 발사도 맥락을 같이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중 관계는 악화되었으며 유엔안보리의 북한제재에 중국이 적극 참여함과 동시에 시진핑 주석은 지난 4년 동안 한국을 먼저 방문하면서 북한을 방문하지도 않았고 김정은을 아직까지 만나지도, 부르지도 않았다. 이번 4차 핵실험도 상황논리에서 보면 중국이 제시하는 비핵개방노선이 김정은의 생존전략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북한 나름의 결기의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 미국과 중국 간의 4차 핵실험을 둘러싼 논쟁
북한의 4차 핵실험 후 미중 간에는 열띤 책임공방이 이어졌다. 북한의 핵실험 다음날인 1월 6일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은 왕이(王毅)외교부장과 전화통화한 후 공개적으로 "중국식 북핵저지방식은 이미 실패했다"고 비판했고 이에 대해 화춘잉 외교부 대변인은 전날 "한반도 핵문제의 원인과 문제점은 중국에 있는 것이 아니며 문제 해결의 관건에도 중국이 있지 않고 미국의 대북한 정책이 오늘의 사태를 몰고 온 원인“이라고 반박했다.
그간 미국은 존 케리 국무장관 취임이후 북한의 핵과 미사일이 미국보다는 중국의 안보에 더 관련이 깊다면서 북핵문제의 해결에 중국이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핵문제는 당초 미 북 양자 간의 문제처럼 인식되었지만 북한의 핵무장은 미 북한간의 양자문제를 넘어서서 북 핵의 영향을 받는 관련국 모두의 문제라는 키신저의 주장이 반영되어 북 핵을 다루는 외교무대가 6자회담으로 확대되었고 중국이 의장국이 되어 6자회담을 주도했다. 그러나 북한이 6자회담을 거부하면서부터 미국은 북한정권의 안보 동맹국이고 북한의 존립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칠 뿐만이 아니라 북 핵이 미칠 부정적 파급효과에 직접 노출되어 있는 중국이 북핵문제해결에 앞장설 것을 촉구했다.
이 반면 미국은 자국의 입장을 전략적 인내라고 표현하면서 북핵문제해결의 전면에서 한걸음 물러서는 태세를 보였다. 이에 대해 중국학자들은 미국이 화전양면의 어느 공세로도 북핵문제에서 적절한 해법을 찾지 못하는데다가 2008년 국제금융위기이후 침체를 보이는 자국의 경제사정 때문에 북 핵을 다루는 자국의 입장을 전략적 인내로 호도하면서 북 핵 해결의 모든 책임을 중국에 떠넘긴다고 반발한다.
그러나 미국의 태도는 두 가지 면에서 정당하다. 중국이 북 핵의 외교적 해결장인 6자회담을 북한이 박차고 나가는 현실을 막지 못하는 한 북핵문제의 외교적 해결은 불가능하며 둘째로 유엔안보리의 어떠한 대북제재도 중국이 협조하지 않는 한 실효를 얻을 수 없다는 현실에 비추어 중국책임론을 강조하는 미국의 주장은 타당하다.
결국 6자회담 실패 후 한국이 중국과의 접근 외교 강화를 통해 북핵문제해결의 실마리를 풀려고 하는 것도 미국의 이러한 대 중국 정책과 본질적으로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중국도 이제 G2라는 국제정치적 지위에 비추어 핵 비확산에 대한 국제책임을 수용하고 북한을 핵보유국가로 인정치 않을 것임을 중국지도부의 대외적 발언을 통해 밝힘과 동시에 4차례에 걸친 유엔안보리의 대북제재에 동참해 왔다. 또 중국역시 모든 강대국들이 그러한 것처럼 국경에 인접한 약소국이 핵무장으로 대드는 상황을 용납하기는 더더욱 힘들 것이다. 물론 중국학자들 가운데는 한 때 북한의 핵문제를 대수롭게 생각지 않으면서 중국주변에 핵 가진 여러 국가 중에 북한이 하나 더 추가된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당 지도부가 북한의 핵 보유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결정, 발표하면서부터 일거에 사라졌다. 따라서 북한의 핵 처리 논의는 사실상 북 핵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공산당 지도부의 입장이 어떻게 현실정책으로 구체화될 것인가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아울러 중국의 비핵개방권고를 거부하고 중국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나겠다면서 핵실험을 강행, 동북아시아 대륙에서의 핵도미노 현상(일본과 중국 간의 핵 대결상황)을 몰고 올 가능성을 중국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또 한편 중국은 남중국해에서 진행되는 미국과의 갈등상황도 한반도 정세와의 연관 속에서 심도 있게 검토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중국의 전략적 고려가 구체적으로는 유엔안보리의 북한 제재수준에 영향을 미칠 것이며 중국자체의 독자적 제재구상에도 반영될 것이다.
3. 중국과 북한관계의 재조명
북한의 핵무장 기도는 당초 6.25 사변에서의 처절한 패배에 대한 반성에서 김일성이 꿈꾸었던 일이지만 구체적 실천에 박차를 가한 것은 중국이 북한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과의 수교를 단행한데서 부터 자위책강화수단으로 시도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북한 핵무장의 배경에는 중국에 대한 깊은 불신이 깔려있다. 물론 북한의 핵실험은 상황마다 겨냥하는 목표가 다르다. 금년 5월에 36년 만에 실시할 노동당 전당 대회를 앞두고 자신들의 업적을 과시, 주민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데도 큰 목적이 있겠지만 더 비중을 둔 것은 앞서도 지적했지만 중국이 북한의 핵무기를 주축으로 하는 자위노선에 어떠한 영향력도 미칠 수 없음을 과시하는데 더 큰 뜻을 두었다.
북한은 류윈산의 북한 방문이후 중국과의 관계조정을 놓고 심각한 내부토론을 거쳤다고 한다. 북한의 원로장성들은 중국이 제시한 비핵개방의 길이나 남북대화가 북한 김정은의 세습 독재권력 유지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으며 여기에 곁들여 모란봉 예술단의 안무(按舞)가운데 담겨진 미사일 발사장면에 대한 중국지도부의 부정적인 반응 등을 종합한 끝에 김정은은 더 이상 중국에 끌려 다니지 않는 자주정권임을 과시하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하고 수소폭탄실험으로 명명된 핵실험을 감행했다. 이번 4차실험이 3차와 다른 것은 사전에 중국 측에 전혀 통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 핵실험 직전에 발표된 대남협상을 주도하던 김양건의 돌연사도 북한지배체제의 내부흐름의 일단을 말하고 있다.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은 동맹국이긴 하지만 안보 면에서 믿을 수 없는 동맹국이다. 중·북간에 조약은 있지만 양자 간에는 한번도 합동군사훈련이 없었고 새로운 군사무기거래나 안보전략협의마저 없었으며 유엔안보리의 북한제제결의에 중국은 찬성했다. 동맹조약의 시효는 2021년까지지만 사문화된 지 오래다. 또 최근 시진핑 정권이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경제협력기구인 AIIB(아시아 인프라 투자개발은행)에 북한 측은 참여자격이 부정되었으며 그에 앞서 결성된 샹하이 협력기구나 아시아교류 및 신뢰구축기구(CICA)에도 북한의 참여는 배제되었다.
이 반면 중국의 한국과의 관계는 다방면적으로 개선되었다. 한중간에는 FTA의 체결로 경제면에서는 동맹국에 준하는 협력관계가 정립되었으며 시진핑 주석과 박근혜 대통령 간에는 5차에 걸친 정상회담이 열렸다. 특히 중국의 시진핑 정부는 항일투쟁시의 한중공동투쟁의 파트너를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는 한국으로 인정하면서 하얼빈의 안중근(安重根)의사 동상건립, 시안(西安)의 광복군 표지석 복원, 샹하이 임시정부 청사복원, 충칭의 광복군 사령부 복원(예정)등을 적극 지원하고 항일전쟁승리 70주년기념식의 천안문 열병식에 박근혜 대통령을 초청하는 친한(親韓)적 조치를 취하였다.
이러한 정황을 놓고 볼 때 김정은은 적어도 중국공산당이 오늘날 한국을 상대로 펼치는 정책이나 노선이 전혀 달갑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북한에게 취하라고 제시하는 권고도 김정은의 3대에 걸친 세습독재정권의 유지에 전혀 도움이 되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오직 핵강성(强盛)대국만이 자기의 살길이라는 보수적 결론에서 4차 핵실험을 단행했다. 북한의 중국불신은 심각의 극을 넘어섰다. 북한은 핵실험이 감당하기 힘든 부작용을 몰고 올 것을 예상하면서도 고난을 이겨낸다는 자신감과 중국이 지정학 상 순치관계에 있는 북한을 끝내 버리지 못할 것이라는 희망론을 깔고 버틸 것이다.
4. 맺는 말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우리 사회의 일각에는 북핵문제 해결에서 중국은 어느 경우에도 북한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다거나 박근혜 정부의 중국친화정책도 아무 성과가 없다는 중국불신론이 번지고 있다. 설사 중국이 유엔안보리 제재결의에 참가하지만 북한이 핵을 실질적으로 포기하게 만들 강경제재에는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는 비관의 소리도 커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불신이나 비관에 앞서 신중하고 지혜로운 전략적 사고를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물론 중국정부는 북핵문제처리원칙으로 이른바 ①한반도 비핵화, ②한반도 안정, ③대화에 의한 해결의 3원칙을 들고 나오면서 이 중 어느 한 요소라도 빠져서는 안 된다(缺一不可)고 말하지만 이것이 중국의 본심이라면 우리는 북핵문제에 관련해서 중국에 어떤 기대도 걸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핵개발 강경론에 매달리는 김정은이 북한을 틀어쥐고 있는 한 중국이 말하는 3원칙에 의한 한반도 문제해결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중국 또한 이것을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중국은 과거와 같이 앞으로도 북한정권의 존속을 지지할 것이다. 그러나 김정은의 존속과 북한의 존속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지금 김정은은 김일성이나 김정일과는 달리 카리스마도 없고 그런 수준의 인물대안은 북한내부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또 비핵개방만을 살길로 믿는 장마당 세력이 북한 각지에서 나날이 강성해지고 있는데 이런 현실을 중국이 모를 리 없다. 따라서 중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김정은을 권력에서 배제하는 공조를 조용히 추진한다면 노동당 내부의 궁중정변과 같은 방식으로도 김정은 제거가 불가능 한 것은 아니다.
중국은 대외적으로 밝히지는 않지만 이러한 접근(Plan B)을 추진할 능력을 충분히 비축하고 있음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중국에 대한 불신이나 비관에 앞서 이러한 가능성을 내다보면서 중국을 움직이게 할 공식, 비공식의 전략카드를 만드는데 주력해야 할 시점이다. 우리가 이를 서둘러야 할 이유는 북한의 핵무장은 앞으로 동북아시아의 평화는 물론이거니와 우리 민족의 평화와 통일, 번영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재앙의 근원이기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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