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평화상에 중국 반체제 인사 류샤오보(퍼온글)

  • 입력 : 2010.10.08 18:03 / 수정 : 2010.10.08 20:03
류샤오보 /조선일보DB

올해의 노벨평화상은 중국의 인권운동을 선택했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8일 오후 6시(한국시각)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2010년 노벨 평화상 발표식에서 중국의 인권신장을 위해 오랫동안 투쟁한 반체제 인사 류샤오보(劉曉波)를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중국에서 기본적인 인권을 위해 길고 비폭력적인 투쟁을 벌였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이어 “지난 20년간 류샤오보는 중국에서 기본 인권을 수호하기 위한 대변인 역할을 해왔다”고 소개한 뒤 “그는 1989년 톈안먼 시위에 참여했으며, ’08헌장’의 주요 저자였다”면서 “그는 중국 인권 개선을 위한 광범위한 투쟁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위원회는 성명에서 중국 정부가 자국민들의 정치적 권리와 인권을 제약하고 있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이어 “중국의 새로운 위상은 더 큰 책임을 요구한다”고 지적한 뒤 “중국은 정치적 권리와 관련, 자신들이 서명한 여러 국제 합의와 자국 법조문을 위반하고 있다”며 “중국 헌법 35조는 중국 인민이 언론과 출판의 자유, 집회, 결사, 시위의 자유를 갖는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실제 이런 자유는 명백히 제약돼 온 것으로 밝혀졌다”고 지적했다.

류샤오보는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 이후 줄기차게 중국의 민주화와 개혁을 요구해온 대표적인 중국의 민주화 운동가다. 노벨위원회는 "중국 인권운동의 가장 뚜렷한 상징"이라고 평했다.

그는 톈안먼 사태 당시 방문학자로 있던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급거 귀국해 단식투쟁을 이끌다 수감된 것을 시작으로 반복된 투옥 등 고난으로 점철된 민주화 운동의 길을 걸었다.

지난 2008년 12월 ‘일당 독재 종식’을 골자로 하는 ‘08 헌장’ 작성에 참여했다가 체포돼 지난해 12월 국가권력 전복 선동죄로 징역 11년을 선고받고 현재 랴오닝(遼寧)성 감옥에 수감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 사건으로 인해 중국의 인권운동을 대표하는 인물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앞서 중국은 류샤오보의 수상이 유력하다는 관측이 제기되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류샤오보의 수상은 곧 중국의 인권탄압이 국제적인 ‘공인’을 받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중국 외교부는 이미 지난 6월 노르웨이의 노벨위원회에 “류샤오보가 평화상을 받게 되면 노르웨이와 중국의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줄 것”이라며 압력을 가했다.

지난달 28일에는 “류샤오보는 중국 현행법을 위반한 사람으로 그의 행동은 노벨평화상의 정신과 정반대”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중국 정부는 “인권문제에 대해 각국의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노르웨이의 노벨위원회가 류샤오보를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결정하는 행위가 중국 내정 간섭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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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동아일보 2010년 9월7일에 시린 글을 참고로 띄운다

김정일에게 남은 선택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올해 3개월 만에 두 차례나 중국을 방문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미국의 대북 제재와 한국의 원조 중단, 그리고 국제사회의 압력 강화 등으로 중국과의 경제협력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북한이 중국에서도 필요한 원조를 얻지 못하면 남는 것은 ‘죽음의 길’밖에 없어 보인다. 2012년 강성대국 건설은 완전히 환상이고 나라를 지탱하기도 어려운 지경이 될 것이다.

지난해 5월 2차 핵실험 이후 중국도 대북 제재에 가세하자 북한은 ‘조-중(朝-中) 전통 우의론’을 앞세워 도와달라고 중국 지도부를 설득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총리로서는 17년 만에 방북했으나 신압록강대교 건설 약속과 약간의 현금 외에 북한이 얻은 것은 없다. 올해 5월 김 위원장의 방중에서도 그가 정치적 환대는 받은 듯하지만 경제적 실리는 크지 않았다. 중국은 북한의 핵 포기에 실질적인 진전이 있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제재 결의안이 취소되기 전에는 원조를 해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북한이 중국으로부터 바라는 것은 단순한 원조가 아니라 대규모 설비 및 공장을 통째로 지어주거나 에너지 분야의 건설, 기초설비의 투자 등 규모가 크고 광범위한 것이다. 이를 통해 북한은 공업과 농업생산력을 크게 향상시키기를 바라지만 관건은 중국을 어떻게 설득하느냐다.

그런데 김 위원장의 아전인수식 계산법은 북-중 관계가 (맹목적으로 지원하고 지원받던) 냉전시대 북한과 옛 소련 관계로 되돌아가기를 바라는 것 같다. 러시아 자료에 따르면 1955년부터 1985년까지 옛 소련이 북한에 지원한 공업 분야는 모두 11개로 북한의 경제발전에 중요한 작용을 했다.

올 6월 이후 미중 관계에서 서해 한미 연합훈련과 남중국해 문제 등으로 긴장 국면이 나타나자 북한은 이를 호기로 생각한 듯하다. 다시 말해 이를 북한과 중국 동북지방 간 경제협력의 기회로 활용하고 북한이 중국에 대해 갖는 전략적 가치를 높여 실질적인 원조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평양에 와있을 때 김 위원장이 굳이 중국을 방문한 것도 북한이 ‘워싱턴과 베이징(北京)’ 중에 베이징을 선택했다는 것을 중국에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김 위원장이 북-중 양국 경제협력 관계를 ‘냉전시대 모델’로 돌리려 한다면 이는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다. 중국이 북한과의 경제협력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확실하지만 이는 북한의 정책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 수단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국이 냉전시대 모델을 따르거나 북한에 대한 전략적인 이익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잘못이다.

비록 미중 관계가 일시적으로 기복이 있지만 ‘신냉전’으로 갈 수는 없다. 그리고 중국의 한반도에서의 가장 큰 전략적 이익은 북한 및 한국과 동시에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한국을 배제한 채 북한만이 갖는 전략적인 이익은 없다.

만약 김 위원장이 ‘중국 요소’를 잘 이용하려 한다면 두 가지 선택만이 남아 있다. 북한 비핵화와 개혁 개방에 대해 확고한 결심을 하는 것이다. 두 가지 선택은 선후는 있을 수 있지만 결국은 두 가지를 모두 실현해야 한다. 지난달 하순 김 위원장의 방중이 개혁 개방에 대한 결심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중국은 매우 환영한다. 중국식 발전 모델을 따르고 싶다면 ‘선(先)개방, 후(後)개혁’을 권하고 싶다. 이어지는 비핵화는 그런 개혁 개방이 잘 진행되도록 보장해 줄 것이다.

주펑 베이징대 국제관계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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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10년 9월 1일 중국문화원에서 열린 중국대사관 주최 抗日戰爭승리 65주년 기념식상에서 행한 이영일 총재의 致辭全文이다.


               항일전쟁승리 65주년 기념식 치사

尊敬하는 장씬선 中華人民共和國 大使님내외분, 그리고 독립운동가 후손을 대표해서 이자리에 참석하신 국회 李鍾杰 의원님,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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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하신 內外貴賓 여러분!

오늘 이 자리는 中國 政府가 抗日戰爭勝利 65周年을 記念하기 위하여 마련한 매우 의의 깊은 記念式場입니다.

동시에 우리 한국의 입장에서도 祖國光復 65周年의 意味를 되새겨보는 자리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한중양국이 그 意義과 가치를 共有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행사인줄 압니다.

바로 이런 자리에서 本人이 1942년 중국의 臨時首都 총칭(重慶)에서 抗日을 위한 韓中合作機構로 創立된 韓中文化協會의 정신을 계승하는 단체의 대표로서 致辭의 말씀 말씀을 드리게 된 것을 매우 榮光으로 생각합니다.

돌이켜 볼 때 우리 韓國과 中國은 20世紀가 시작될 무렵부터 근 半世紀 가까운 긴 세월동안 日本 帝國主義者들의 侵略으로 말미암아 이루 말할 수 없는 苦痛과 不幸을 겪었습니다.

日本帝國主義者들은 1900년대 초에는 그들의 이른바 國家利益線이 韓半島까지라고 일방적으로 선언, 韓半島를 强占하고 뒤이어 그들 이익선 개념을 滿洲로 확장,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마침내 중국대륙을 침략하고 동남아시아에까지 침략의 魔手를 뻗쳐,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罪過를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내세워 亞細亞大陸에 속하면서도 亞細亞國家임을 부인했습니다. 그들이 벌인 전쟁을 鬼畜聖戰이라면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과 중국인들을 가장 잔인하게 학살했습니다. 남경대학살에서 목숨을 잃은 중국인 총수가 일본에 떨어진 原爆被害者보다 그 수가 더 많다는 것이야말로 일본의 殘虐性을 雄辯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일본제국주의 세력들에게 나라를 강탈당한 우리 韓國民들은 祖國光復을 위해, 중국은 일본침략자들을 자기 疆土에서 몰아내기위해 함께 힘을 합쳐 싸웠습니다.

中國大陸은 우리 先祖들이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일본침략세력을 상대로 목숨 바쳐 투쟁했던 獨立運動의 現場이였습니다. 抗日獨立鬪爭 時에 中國人民들이 한국독립운동지도자들에게 보여준 聲援과 支持를 우리는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中國人民들이 尊敬하는 故 周恩來 中國總理는 일찍이 伊藤博文을 하얼빈 驛에서 쓰러뜨린 安重根 義士의 長擧야말로 日本에 대한 韓中共同鬪爭의 시작이라고 評價한 바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1940년대에는 韓中文化協會의 創立을 적극 周旋, 支援함으로써 抗日鬪爭을 위한 韓中合作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오늘 中國政府가 이 자리에서 紀念하는 抗日戰爭勝利의 歷史는 비단 中國만의 勝利가 아닙니다. 우리 겨레의 祖國光復으로 이어지는 勝利의 歷史와 脈과 軌를 같이한다고 보는데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제2차 世界大戰에서 侵略勢力 日本은 敗亡했습니다. 그러나 패망으로부터 65년이 지난 오늘날 일본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일본에서는 다른 나라를 侵略한 行爲에 대한 反省보다는 왜 敗戰했는가에 대한 反省을 더한층 强調하는 정권들이 오래 동안 집권했습니다

그들은 敗戰 후 하면서 人間性과 平和에 대한 범죄(Crimes Against humanity and Peace)로 東京戰犯裁判에서 處刑당한 사람들을 일본을 위한 愛國者, 義士, 烈士로 추모하는 사람들이 적잖았으며 역대 일본 수상들 가운데는 이들 전쟁범죄자들의 位牌를 奉安한 야스쿠니(靖國)神社에 참배하여 그들의 애국정신을 讚揚, 鼓舞한 바 있었습니다.

최근 새롭게 집권한 일본 민주당 정권이 야스쿠니(靖國) 神社參拜를 중단하고 이웃나라를 침략했던 역사를 다소나마 반성하는 자세를 보이는 것은 지극히 부족하고 晩時之歎의 감이 있지만 사태의 다행스러운 進展의 하나라고 평가할 수 있겠습니다.

일본은 自己 나라에 文化와 知識과 産業發展의 技術을 傳授해 준 이웃나라들을 一方的으로 侵略하여 갖은 蠻行을 저지른 잘못된 역사를 통절히 반성해야 합니다. 獨逸이 나치의 罪惡相을 반성하고 나치세력이 장악한 영토를 다시 요구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고 나치즘의 再登場을 막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일본은 많은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일본인 가운데는 과거의 잘못에 대한 반성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歷史를 美化, 承繼하려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실로 痛嘆할 일입니다.

오늘 저는 이 자리를 빌어 日本人들은 그들의 侵略的 過去를 徹底히 反省하고 그러한 禽獸와 같은 歷史와의 斷絶을 宣言할 것을 강력히 促求하는 바입니다.

오늘 이 뜻 깊은 행사가 더 이상 침략의 우려가 없어지는 동아시아, 평화와 안정 속에서 共存共榮 하는 동아시아의 世紀를 만드는 契機가 될 것을 祈願하면서 이 행사를 조직한 중국정부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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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2010년 9월 10일 통일신문 11면에 전재되었다)

선한 사마리아인과 북한 동포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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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을 돕자는 종단 지도자들의 모임)

 2010년 8월 27일 한국5개종단의 종교지도자 9인이 정부의 허가를 얻어 개성을 방문, 밀가루 400톤을 북한에 전달하고 돌아왔다. 식량난에 수해가 겹쳐 굶주리고 있는 북한동포를 그냥 앉아서 볼 수만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식량이 남아도는 한국이 어려움에 처한 북한동포를 돕는다는 것은 거창한 명분으로 인도주의를 내걸 필요도 없이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다. 북한이 1995년 그들의 표현대로 큰물피해와 냉해로 식량난에 허덕이면서 유엔에 구호를 호소했을 때 한국정부와 민간NGO단체들은 북한에 대한 지원에 발 벗고 나섰다. 북민협(北民協)(북한을 돕는 민간단체협의회의 약칭)에 가입한 단체 수만도 50개를 넘었다. 그러나 왜 이러한 지원이 최근에는 중단되다시피 되었고 국제사회의 대북지원도 급격히 줄어들었을까.

 

오늘 필자가 섬기는 교회의 목사님은 강도를 만나 몸에 심한 상처를 입고 피 흘리면서 길가에 버려진 사람을 구해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본문으로 하여 자기도 참여한 이번 종교인들의 대북지원이 갖는 성서적 의미를 설교했다. 특히 목사님은 "너의 형제가 주릴 때 너는 굶는 형제를 위해 무엇을 해 주었느냐"고 주님께서 물을 때 아무 답변도 할 수 없는 크리스천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옳은 말씀이다. 필자도 약 6년간 북한을 돕는 개신교 단체의 공동대표로서 활동하면서 북한 땅을 여섯 차례 다녀왔다. 목사님이 말씀한 요절도 간증자료로 많이 활용하면서 북한지원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필자의 북한을 향한 열정은 식어버렸다. 2006년 10월 9일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는 뉴스를 들으면서 우리들이 지금까지 해온 대북지원 사업이 결국 선군정치를 뒷받침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북한을 다니면서 항상 느끼는 회의는 사마리아인이 구해주었다는 "몸에 심한 상처를 입고 피 흘리면서 길가에 버려진 사람"을 한 사람도 만나 보지 못하고 다만 북한당국이 만나라고 지정한 사람만 만나고 다녔다는 것이다.

 

결국 북민협에 참여한 사람들은 북한 동포를 위해 북한에 보낸 모든 지원물자가 북한 동포들을 위해 제대로 쓰여 졌는가를 한 번도 확인하지 않고 물자만 갖다 주었던 것이다. 북민협에 속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시간에 북한을 들어갈 수가 없었다. 자기들이 제공한 물자가 제대로 쓰이는가를 확인할 모니터링을 요구하면 내정에 간섭한다고 몰려 재방북이 불가능해졌다. 북민협은 평양에 연락 사무소 하나도 갖지 못했다.

 

그러나 핵실험이전에는 체제차이 때문에 그러려니 하면서 마음속에 피어나는 회의를 억누르면서 언젠가는 북한이 변할 날이 올 것으로 기대했다. 필자가 참여한 단체의 북측 상대가 요구하는 물자는 의약품의 경우 다소 힘에 벅차더라도 구해서 보내주곤 했다. 필자가 북민협 회의에 참여해서 항상 강조한 이야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 that)라는 철학을 우리들이 가져야 북한지원 사업을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도와줘도 감사할 줄 모름에도 불구하고, 항상 오만한 태도를 보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으면 추방하듯 내쫒고 재방북(再訪北)의 길을 막음에도 불구하고 겸손과 인내로서 북한지원을 계속하면 북한이 변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자는 것이었다.

 

필자의 이러한 신념은 북한의 핵실험으로 근본적으로 흔들려 버렸다. 특히 북한이 자행한 2009년 5월의 제2차 핵실험은 우리로부터 통일에 대한 꿈을 접게 만들었다. 특히 김정일 정권의 북한사회에 대한 통제가 절대적 수준을 유지하는 한 우리들의 대북지원은 예외 없이 선군정치지원으로 변하고 만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한국이 북에 보낸 비료는 대부분이 동남아로 포장을 바꾸어 수출되었으며 심지어 약품, 겨울철에 아동들의 방한(防寒)을 위해 애써 만들어 보낸 아동복까지도 컨테이너에 실린 채 북한 땅에 내리지도 않고 그대로 중국변방지방으로 팔려나갔다. 쌀이 군량미로 변하는 것은 그럴 수 있다. 북한 군대도 가난한 북한 동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낸 쌀을 인민들에게 나눠 주지 않고 군량미로 비축해버린다면 이것이야말로 인도적 차원의 대북지원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다.

 

이번에 방북한 한국의 종교인들도 "강도를 만나 피 흘리면서 길가에 버려진 북한 동포들"(聖書에서 말하는 사랑의 誘發態)을 한 사람도 못 만나고 돌아왔다. 북한에서 부족한 식량이 얼마이고 얼마나 지원해야 북한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아무런 정확한 정보도 없이 굶는다는 소문만 듣고, 어렵다는 이야기만 듣고 밀가루를 트럭에 싣고 들어가서 북한이 지정한 장소에 운반해 놓고 왔을 뿐이다. 앞으로 밀가루가 북한 동포를 위해 쓰일지 아니면 군량미창고로 들어갈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밀가루를 주고 온 것이다. 동시에 굶주리는 형제를 외면하지 않았다는 자위를 얻었을 것이다.

 

현실은 참으로 딱하다.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의 정확한 실상도 알 수가 없고 또 지도자를 잘못 만나 굶주리고 있는 북한 동포들을 무작정 외면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북한동포지원이 곧 김정일 정권지원으로 변해버리는 상황을 묵인할 수도 없는 상황 앞에 우리는 놓여있다. 도대체 이러한 어려움을 우리는 어떻게 풀어가야 한단 말인가.

 

8월 29일 아침에도 북한 방송은 어떠한 도전에도 핵무기로 대응하겠다고 엄포하고 있다. 북한이 비핵화 하지 않고는 국제사회가 우리의 통일을 결코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핵 실험을 통해 통일의 앞날에 이처럼 엄청난 난관을 조성한 북한을 그래도 인도주의 이름하에 도와주어야 할 것인가. 실로 풀기 힘든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오호라!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이 선택의 험 곡에서 우리는 어느 길을 택해야 할 것인가. 바이블이 우리에게 주는 해답은 헐벗고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이 있는 바로 그 현장에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믿는지 여부에 달려 있는 것 같다. 신앙인들이 내려야할 결단의 과제가 우리의 새로운 기도제목이 되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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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통일신문 2010년 9월 20일자 7면 통일광장에 게제되었음)
누가 그 분야에서 한국의 최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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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대통령의 국무총리임명과 부분 개각이 국회의 인사청문회에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만일 국무총리 임명 안이 부결되고 각료인선이 실패한 것으로 들어나면 이명박 대통령은 통치력에서 심각한 위기를 맞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사실상의 불신임안이 국회에서 두 차례나 통과된 셈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다수인 국회에서 대통령이 제출한 세종시법 수정안이 부결된데 이어 이번에는 총리 임명동의안이 부결된다면 그것은 곧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불신임결의가 두 차례 이루어지는 셈이기 때문이다.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에서 이처럼 지지가 약하고 자기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한나라당의 지지마져 확보 못하는 대통령이라면 나머지 임기가 과연 국가발전에 의미 있는 기간이 될 것인지를 걱정치 않을 수 없다. 외교상으로는 동북아 질서가 심각한 재편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한국과 동맹관계에 있는 미국경제와 이웃인 일본의 경제가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다가 북한의 도발책동도 나날이 가열해지는 상황에서 MB의 이러한 內治의 실패가 외교의 실패로 연결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외교는 내치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이번 MB의 인사가 난항을 겪는 것은 MB가 추천한 인물들이 거짓증언이나 말 바꾸기, 도덕성, 준법정신의 수준이 시정배들 수준을 넘지 못한데 있다고 언론들은 말하지만 그것은 겉에 들어난 이야기이고 실제로는 현시점에서 대한민국의 존속과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인물을 골라 국회에 동의를 요청하지 못한데 진짜 원인이 있는 것 같다. 유능한 인재들을 발굴, 국회동의를 구했더라면 오늘과 같이 난감한 상황을 맞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정부의 인사가 있을 때마다 비록 20년이 훨씬 지난 일이지만 전두환 전 대통령의 인사문제를 처리하던 방식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 분은 항상 인사문제를 처리할 때는 으레 내세우는 원칙이 그 분야에서 대한민국의 최고 권위자가 누구냐, 가장 경륜이 높은 사람이 누구냐를 묻고 특별한 흠결이 없다면 그러한 분을 총리나 장관으로 영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그 때만해도 군 출신 대통령이 인물정보가 어두워 덮어놓고 최고만 찾는 것이라고 속단했는데 근래에 와서야 그 분이 추구했던 인사원칙의 진가를 비로소 깨달았다.

전두환 대통령은 대통령이라고 해서 결코 만능이 아니며 해당분야의 전문가들의 경륜에서 항상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겸손이 있었다. 그분은 각료인선에 앞서 추천받은 인사를 만나 대화할 때 항상 말문을 여는 서두가 "이 분야에서 당신의 경륜이 훌륭하고 한국의 최고권위자로 알려진 분이어서 이렇게 만나게 되었다"면서 이 분야의 장관을 맡아 대통령이 일 잘하게 도와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는 것이다. 내가 "그대의 능력과 공헌을 평가해서 장관으로 발탁하니 일 잘하라"고 당부하는 자세가 아니었다. 특히 민간인 출신에 대해서는 더한층 깍듯이 경어를 쓰면서 도움을 청하는 자세로 인사문제를 다루었다.

그분은 발탁하는 인물의 고향을 따지지 않았다. 나이도 따지지 않았다. 또 성격이 고분고분해서 자기 말을 잘 들을 사람인가를 따지는 일도 없었다. 또 자기와 평소에 지면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분은 대한민국 대통령은 한국 국민이라면 누구라도 유능한 인물을 각료로 골라 쓸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 말은 얼핏 들으면 권위주의적인 것 같지만 인사행정을 자기와 개인적으로 친면이 없더라도 한국에서 최고의 경륜과 권위를 지닌 자를 영입해야겠다는 의지로 받아들인다면 별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자기를 도와 줄 인물을 경륜과 전문적 권위를 기준으로 잘 고르는 것이야말로 시국의 需要를 제대로 반영하는 인사 아닐까. 그분은 관료로서 청렴하고 유능한 사람을 골라내려고 노력했다. 청와대 司正 팀의 주 임무였을 것이다. 물론 흠결도 많고 제대로 되지 않은 부분도 적지 않았다. 인사나 공천에 잡음이 없을 수 없고 만인을 만족시킬 인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대통령직을 물러난 후에도 인사문제는 그 흠결이 크게 지적되지 않았고 오히려 어려운 시기에 사람만은 잘 골라 썼다는 평이다. 또 신년 인사를 오는 하례객이 끊이지 않고 문전성시를 이루는 것도 그분의 리더십과 그것의 표현인 인사정책덕분인 것 같다.

 인사청문회 정국의 混迷를 보면서 자기를 낮추고 자기의 부족한 것을 자기보다 유능한 사람을 골라 채우려했던 전두환 대통령의 리더십이 새삼 떠오르는 것은 자기가 아는 사람, 자기보다 나이가 작은 사람, 자기가 통제하기 쉬운 사람, 선거유공자들 중에서 인물을 고르는 현재의 리더십에 대한 환멸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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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2일 이영일 총재를 단장으로 중국산동성 威海市가 주최한 '한중수교 18주년 기념 한중문화에술교류의 달'행사 개막식에 참가하기 위해 인천을 출발했던 한중문화협회 방중단은 주어진 임무를 잘 마치고 24일 밤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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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막식-좌로부터 張培廷 당서기, 노영민 국회의원, 이영일 총재, 장영달 전 의원 )
이 행사는 한중양국의 서예가, 미술가등 1000여명의 작품이 전시되고 대만 홍콩 작가들에게도 문호가 개방된 큰 행사였지만 행사명칭은 "한중문화예술교류의 달"로 정했다.   한국측에서는 이영일 총재를 비롯하여 국회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인 노명민 의원, 전국회의원이었던 장영달 의원, 전남 여수시 김충석시장과 김영규 의장, 한국관광공사의 정용문 칭다오 지회장 등이 참석했다.
 
우리 협회에서는 이만섭 부총재, 박세정 부산관역시 지회장, 송동석 광주광역시 지회장, 이근재 전주지회장, 윤경숙 운영이사, 김종경이사, 박동기 광주지회 고문, 정창엽 광주지회 부회장, 윤정하 운영이사등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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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하이 참석한 한중대표단 전원기념좌로부터 정창엽, 송동석,김종경,이근재, 박세정, 총재.윤경숙,이만섭,윤정하, 박동기)

張培廷 威海시당 서기는 첫날 각계대표자들을 威海市 영빈관에 해당하는 東山빈관에 만찬으로 초청,  방문인사들을 두루 환영하고 환영하고 행사의 성공적 게최를 다짐했다. 이영일 총재는 답사겸 건배사를 통해 정치적 수교가 정치적 거리를 가깝게 했다면 문화예술의 교류는 한중양국민들간의 마음의 거리를 더 좁혀준다고 말하고 威海市가 한국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데 이제는 마음의 거리까지 가까워지게 되엇다고 평가한 후 이 행사를 준비해온 張培廷 당위 서기와 張劍 준비위원장의 노고를 치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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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당일(22일) 만찬을 마친 후 威海市인민정부는 우리 일행을 경제개발구 화샤루(華夏路1번지)에 있는 웨이하이화샤청(威海華夏城)으로 초대, 산의 계곡과 바다를 360도로 회전하는 무대에서 감상할 수 있는 중국역사극과 음악, 춤과 무예, 해전모형극을 약 1시간 반에 걸쳐 감상했다. 조안이라는 분이 감독했다는 창작무대를 통해 펼쳐지는 중국의 과거와 현재를 가무와 연극으로 표현하는 무대예술앞에 우리 일행들 입에서는 "이곳에 오기를 잘했다"는 찬사가 이어졌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청중들의 반응이었다. 한국에서 같으면 기립박수가 나오거나 기립은 아니더라도 힘찬 박수가 오래도록 이어졌을 것이나 박수를 통한 청중호응이 너무 미약하였고 그것도 기껏해야 한국관중들이 박수를 선도했지만 호응의 미약으로 짧게 끊겼다. 중국이 총량지표상으로는 G2일지 몰라도 문화적으로 G2가 되려면 아직도 요원해 보였다. 박수의 길이와 선진화의 수준은 비례하기 때문이다.            

 행사당일(23일)은 비가와서 屋外행사가 어려웠는데도 주최측은  개막식의 옥외행사를 강행했다. 賀客들은 모두 양쪽의 구름다리밑으로 자리를 옮겨 행사를 참관했고 主席團에 오른 인사들은 檀上에 서서 우산을 들고 행사진행에 참여했다. 주최측이 무리하게 옥외행사를 강행한 이유는 뒤에 알고보니 행사가 성공하려면 폭죽을 터트리는 관행이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어쩔 수없이 옥외행사를 하지않을 수없었다는 것이다. 정말 행사 말미에 동시다발의 폭죽이 터졌다.  중국이 진짜 G2로 불러도 될가를 다시 되새기게 하는 광경들이었다.      

 우리 일행은 개막식 행사를 마치고 미술과 서예 전시장을 巡回감상했는데 예술문화중심건물의 웅대함과 방대함에는 저으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시장도 너무 많고 넓어 다 채우려면 상당한 세월이 흘러야 할 것 같았다. 장 서기가 앞장서서 한국에서 온 노영민 국회의원 등 주석단에 오른 인사들을 안내하는데 너무 빨리 걸어가는 바람에 작품을 감상했는지 전시장을 행진했는지 구별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新羅坊 대신 韓樂坊(한러방)추진
이곳에서 인상적인 것은 한러방(韓樂坊)발전계획이었다. 3국시대 신라를 무역대국으로 발전시카려던 장보고가 산동성 일원에 신라인들의 집단거부지로 신라방을 차린 고사는 우리가 잘 알거니와 장보고의 신라방을 오늘에 되살려 이곳에 한중교류의 새장을 펼친다는 것이 한러방 계획의 참 뜻이 있다고 한다.  신라방이라는 표현을 생각했지만 역사적 고증도 문제려니와 설명의 편의상 한러방이 신라방 보다 쉽다는 취지에서 이렇게 命名된 된 같다.  工程이 약 20% 진척되었는데 鳥瞰圖는 훌륭했다. 준공후 와 볼만한 곳 같다.


오찬을 마친 후 청산터우(成山頭) 일대를 관광했다. 제주 상산포와 같은 분위기였다. 일출봉이라는 명칭도 있어 성산포와 같다는 느낌을 더해주었다. 모두 역사적 유물이라기 보다는 관광용으로 새로 건조한 것들이지만 그나름의 노력은 평가할만했다. 우리 가이드는 진시황이 徐福에게 명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떠난 배의 출발점이 이곳이라고 주장하는데 반해 지난 5월 한중문화협회 대표단이 방문한 진황도에서는 그곳이 출발지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홍길도의 탄생지와 ㅊ심청의 탄생지가 두곳이상의 지방자치단체들이 자기들의 주장을 굽히지않고 다투는 하는 것과 진배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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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날은 장보고 장군의 유적지가 있는 赤山景區를 들러보았다. 모두 새로운 건조물들이어서 역사를 느낄 수는 없었지만 이곳을 찾는 한국인의 발길이 끊기지않는다는 가이드이 설명에 가슴에 뭉클했다. 우리 여행객들의 마음속에 역사의식이 숨쉬고 있음을 알 수있기 때문이다.
 (츠산경구의 진시황, 서복의 석상앞에서)
 오찬은 영성시의 빈관에서 李冠營 산동성 국제우호연락회장이 주관했다. 오붓하고 화려한 오찬이었다.  우리 일행이 세분의 국제우호련 산동지부 간부들과 함께 나누는 오찬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오찬후면 귀국길에 오를 일정이었기 때문에 허리풀고 차분히 즐겁게 마시고 휴식했다. 주최측이  선물을 준비해왔는데 우리는 지난번 제2차 한중민간우호포럼 보고서를 선물로 전달해 주었다.

  귀국후 여성 두분을 제외한 일행들은 이영일 총재 주관의 만찬으로 해단식을 하면서 威海를 다녀온 팀들이 威海클럽을 만들기로 하고 회장은 李根宰  全州지회장이, 총무는 김종경 이사가 맡기로 했다. 이만섭 부총재는 자기 사무실에서 가져온 靈池버섯酒를 일병씩 기념품으로 나누어 주면서 함께 힘과 지혜를 모아 한중문화협회를 발전시키자고 제창, 박수갈채를 받았다. 아주 좋은 추억에 남을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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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렬 목사라는 사람의 비극

 

요즈음 우리는 한상렬이라는 소위 기독교 목사라는 사람의 삶속에 깃든 비극성을 목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한국진보연대 상임의장이라는 그럴듯한 간판을 등에 업고 친북, 대한민국 폄하운동을 직업으로 삼고 살아왔다. 모든 형태의 반정부시위에는 그 수염을 휘날리며 앞장서왔다. 촛불시위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군사령부의 평택이전 반대, 효순, 미선의 죽음에 항의하는 반미 시위 등 시국에 관한 뉴스를 지켜본 사람들에게는 그 얼굴이 널리 알려졌다. 그 얼굴이 화면에 비치면 반갑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듣는 바로는 저 자가 누구인데 항상 데모만 나면 그 꼴불견의 수염에 한복 입고 나타나느냐고 힐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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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현재 그는 기독교계에서나 북한공산정권의 양편에서 용도가 폐기된 것 같다. 목사의 이름만 달고 있을 뿐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목회에 나선다는 이야기도 없고 섬기는 교회가 있다는 말도 들리지 않으며 하나님보다는 김정일을 더 믿고 교회보다는 조선인민공화국을 더 열심히 섬긴다고 알려진 사람을 한국 교계가 좋아할 리 없다. 그는 목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다니는 친북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북한정권이 달가워할 시효도 이제 끝났다. 지난 달 북한의 초청만 받고 정부의 허가 없이 월북하여 대한민국정부와 대통령을 비방한 후 후 휴전선을 넘어 한국으로 되돌아오겠다는 것이다. 북한이 한국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한 것은 그가 더 이상의 용도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북한에게 이용당하고 버림 받는 자가 어찌 그 한 사람 뿐이랴 마는 그는 이미 용도가 폐기되었다. 1회용 비닐우산처럼 용도가 마감된 것이다. 남은 용도가 있다면 DMZ의 중앙분리대를 넘어 남한으로 오겠다고 때 거지를 부리다가가 한국정부가 체포하면 그는 자신을 통일운동가로 변호하면서 국가보안법 반대운동에 점화하는 불쏘시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북한정권이 그를 남한으로 돌려보내는 마지막 용도가 아닐까.

이제 그는 한국에서 범법자로 처벌받는다. 이 처벌 자체가 북한정권이나 종북세력들이 남한 정권을 인권탄압정권으로 비난할 투쟁의 구실로 변한다. 그의 불법방북과 그의 북한에서의 언동은 한국정부의 천안함 폭침사건의 진상발표에 한국사회의 목사들까지도 이를 믿지 않고 있는 것처럼 선전을 조작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북한정권의 존속을 위해 이렇게라도 쓰임 받는 것을 기쁨으로 알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무가치한 정권의 이용물로 시종되는 비극 그 자체이다.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아무 가치 없는 삶을 살다가 시들어가는 인간비극의 한토막일 뿐이다. 제발 한국 교계에서 제2, 제3의 한상렬 같은 사람이 나오지 말기를 기대해 본다.


무단 訪北했던 한상렬씨 "北에서 살고 싶지는 않아"
[조선일보] 2010년 09월 11일(토) 오전 03:01 
지난 6월 불법 방북해 2개월여 동안 북한 에 머물면서 북한체제를 찬양한 혐의로 구속된 한상렬 (60·목사) 진보연대 상임고문이 공안당국의 조사를 받으면서 "북한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씨는 지난달 20일 체포 이후 줄곧 묵비권을 행사했으나, 신문조서를 작성하지 않을 때에는 수사관들과 일상적인 대화는 나눴다고 한다.

공안당국에 따르면 한씨는 "북한에서 살고 싶으냐"는 수사관의 질문에 "그건 아니다"라고 대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관이 "북한에 살기 싫다면서 왜 북한 체제를 찬양했느냐"고 물어보자 "하나님의 계시에 따른 통일운동"이라는 취지로 대답했다는 것이다.

공안당국은 한씨의 불법 방북이 1989년 고
문익환 목사의 불법방북 사건 때와 비슷한 양태를 보이고 있다고 분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씨는 문 목사처럼 혼자서 밀입북했고,
판문점을 통해 남한 으로 내려왔다.

평양 주민들을 상대로 연설을 하거나 입국할 때는 문 목사가 입었던 두루마기를 입었다. 한씨는 이 두루마기를 문 목사의 부인
박용길씨로부터 건네받아 소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씨는
김일성을 만났던 문 목사와는 달리 김정일을 만나지 못했고, 판문점을 통해 입국할 당시 한씨를 환영하는 지지 인파를 목격하지도 못했다.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부장 이진한)는 지난 9일 한씨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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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일 전 조선일보 논설주간의 재심청구사건에서 행한 이영일 증언

(이 글은 이영일의 홈페이지 www.rep201.or.kr의 통일꾼 칼럼에 올려있음)
(2010년 8월 17일 오후 2시 서울형사지법 425법정에서 이영일이 증언한 내용이며 사전준비된 문면에 따라 변호사와 검사의 질의 및 재판장의 질의에 답한 내용을 정리한 것임)

가 이영일의 서울대 민족통일연맹 관련 입장

1. 본인은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정치학과 4학년 재학 중인 1961년 9월 30일 남북학생회담제안과 관련되어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제6조" 위반 피고 사건으로 5.16군사혁명재판에서 7년 징역형을 선고 받고 상급심에서 상고가 기각된 후 1962년 4월 경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형 면제 확인 조치로 출감하였으며 1963년 복학하여 1964년 졸업한 사실이 있음.

2. 본인은 1960년 4.19혁명직후 당시 고려대학교의 김성식 교수가 쓴 독일학생 운동사를 읽으면서 비스마르크 치하의 독일에서 7개 선제후 국 대학생들이 한 곳에 모여 통일을 공동으로 부르짖음으로 해서 독일통일의 길을 열었다는 사실에 큰 감명을 받고 한국에서도 대학생들이 주체가 되는 통일운동을 모색하기에 이르렀으며 1960년 10월 경 동경에 망명 중이던 동아일보 주필을 역임했던 중립화통일운동가인 김삼규 선생이 귀국, 고려대학교에서 중립화통일론에 대한 강연을 듣고 신선한 충격을 받아 1960년 10월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강당에서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을 결성, 공보부장 및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선전위원장을 맡아 활동한 바 있음

3. 4.19혁명 후 한국 대학사회에는 학생운동의 큰 흐름이 신생활운동, 후진성 극복운동, 민족통일운동의 세 가지로 집약되었는데 본인은 후진성 극복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후진사회연구회를 결성했으며 이에 앞서부터 참여하고 있던 정치학과 중심의 신진회 서클들과 제휴하여 독재정권을 타도했던 열정으로 남북을 가르는 3.8선을 타도하는데도 학생들이 앞장서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성세대들이 독재체제에 안주했던 것처럼 분단체제에도 안주하여 통일문제를 외면하고 있는 상황을 타개하려면 분단체제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은 우리 학생들이 남북통일의 주역이 되어야 통일의 길이 열릴 것이라는 생각 하에 남북한 학생들이 판문점에서 만나 대화를 해보자는 뜻을 모으게 되었음

4. 본인 등은 신진회라는 정치학과 중심 서클의 회원이었기 때문에 1961년 4.19 1주년을 전후한 시기에 당시 필화사건으로 이름이 학생들 간에 많이 알려진 정치학과 선배로서의 류근일 형을 학교에서 만나 민족통일연맹에 참여해줄 것을 부탁드렸던바 옳은 일인데 함께 하자고 동의했으며 그러나 류근일 형은 2년 후배들이 중심이 되어 뛰는 민족통일연맹 활동자체에는 거의 참여한바 없었음

5. 당시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결성은 학칙 상으로나 현행법 상 아무런 위법사유가 없는 합법단체였으며 200여명의 학생들이 자유롭게 가입하고 회의에서도 통일운동의 방법을 놓고도 격의 없는 토론을 벌였으며 정치학과 출신인 본인과 법대출신의 강우혁과의 민족통일연맹 창립당일에 벌인 노선을 두고 전개된 논쟁은 많은 흥미를 일으켰던 것으로 지금도 회상됨

6. 1961년 5월 3일 남북학생회담을 제의할 당시에도 사전에 지금은 고인들이 되신 통일부장관을 역임하셨던 당시 서울대 정치학과의 이용희 교수, 서울대총장을 역임하셨던 사회학과의 최문환 교수 등을 만나 의견을 구했던바 "보수, 혁신 양진영의 정치권이 자기들의 필요에 맞게 여러분들의 순수한 제안을 악용할 우려가 있으니 문제제기수준을 넘는 행동은 자제하고 연구단체로서 민통의 성격을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충고를 주셨던 사실이 있음.

7. 남북학생회담제의는 당시 정치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켜 민주당 정부의 표의석(?) 장면총리 비서관이 본인 등을 불러 직접 대화를 한 바 있고 당시 민주당 대변인인 신상초 의원과 본인이 민국일보 남재희 기자주선으로 언론대담을 갖는 등 학생 회담에 대한 대학생들의 입장을 국민들에게 솔직히 말씀 드린 바 있음 특히 이 자리에서 본인은 민주당정부의 학생회담 반대주장에 대해 민족이익을 정권이익에 종속시키는 한 통일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백색독재정권을 타도한 한국의 대학생처럼 북한대학생들도 적색독재타도에 나서야 분단체제에 안주하지 않는 순수한 민족운동으로서의 통일운동이 가능하다고 주장했음

8. 따라서 당시의 민족통일연맹운동은 결코 반국가적이거나 당시의 법질서를 파괴하는 행동이 아니었으며 학생운동지도부도 항상 교수님들의 의견도 구하고 정부 측과 만나 우리 주장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활동수준도 내부토론을 통해 조절하는 등 민주국가에서 통용될 정당하고 합법적인 활동을 벌였음

9. 그러나 군사정권은 쿠데타의 명분조성의 일환으로 서울대 민족통일연맹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와 같은 일부 극단적인 혁신계의 구호를 마치 우리들이 떠들어 댄 것처럼 단죄하고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이라는 소급법을 제정하여 일제시대의 치안유지법보다 더 가혹한 형을 언도하는 등의 혁명재판을 진행하였으며 이는 법적이라기보다는 민주정부를 뒤엎은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이벤트로 혁명재판이 활용되었던 것으로 사료됨

나. 류근일 선배 관련 사항

1. 류근일 형은 민족통일연맹에서는 별 활약을 한 바 없으며 앞에서도 기술한 바와 같이 후배들이 참여를 권고할 때 같이 협력하자고 약속을 한 수준이었으며 일상 회의나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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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당시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은 1961년 5월 3일 오전 10시 당시 서울법대 구내식당에서 대의원 총회를 열고 남북학생회담제안결의안을 채택할 예정이었는데 당시 대의원총회 의장이었던 서울법대 4년 윤용남이 定時에 참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인이 윤용남을 찾기 위해 밖에 나갔다가 대학본부에서 신학기 등록을 마치고 법대 쪽으로 걸어 나오고 있는 류근일 선배를 만나 대의원총회가 의장불참으로 회의진행이 지연되고 있는 상황을 설명하고 잠시 임시의장으로 회의 진행을 맡아달라고 부탁하였던바 이를 수락하여 그 자리에서 임시의장에 선출되어 남북학생회담 결의문 채택 시 의사진행을 맡은 후 귀가한 사실이 있음

2. 며칠 후 당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약칭 민자통)라는 단체에서 민족통일연맹의 남북학생회담제안을 지지하기 위한 군중대회를 동대문운동장에서 개최한다고 하면서 본인과 류근일 선배를 이 행사의 연사라고 일방적으로 발표했으나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은 학생운동의 순수성을 왜곡할 우려가 있는 정당 사회단체 행사에 불참할 것을 결의하여 언론에 발표하고 본인과 류근일 선배는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집회에 불참하였는데 이 군중대회에서 채택한 구호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였던 것으로 기억됨

3, 본인은 혁명재판의 구형 공판 시 당시 朱鎭鶴 검찰관이 남북학생회담을 공식으로 제안한 본인에게는 7년 징역형을 구형하고 류근일 선배와 이수병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는데 본인은 최후진술을 통해 류근일 선배에 대한 구형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고 이 사건과 아무 관련 없는 류근일 선배에게 구형한 형을 제가 떠맡겠다고 강력히 항의한바 있으며 이때 李會昌 심판관(당시 공군대위로 기억함)이 본인을 꾸짖으며 앉으라고 말하고 류근일 형도 본인을 잡아끌어 앉게 하는 등의 법정 소란을 일으킨 바 있음

4. 이날 검찰관은 구형공판에서 남북학생회담이 큰 물의를 일으켜 결과적으로 적을 이롭게 한 반국가활동이었다고 말하고 그러나 피고인들의 동기의 순수성은 인정된다고 의견을 말하면서 구형을 했는데 그러면서도 류근일 선배에 대해서는 일벌백계 론을 내세워 무기징역을 구형했고 재판부는 무기형을 15년형으로 감형판결 했지만 결국 7년 동안이라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절을 서울교도소와 안양교도소에서 보내야 했음

5. 쿠데타 정권의 탄생을 정당화하려는 혁명재판에서 억울한 사람의 아픔과 고뇌가 많았겠지만 류근일 선배처럼 자기 행위에 전혀 합당하지 않은 벌을 뒤집어쓰고 억울한 희생을 강요당한 사람도 없을 것임

6. 류근일 선배가 감옥에 있는 동안 위장병이 심각해서 병보석으로 석방해 보기 위해 본인을 비롯한 후배들이 기족들과 협력해서 수도의과대학병원(지금은 고려대학병원)에서 진단을 받게 했지만 병보석 사유에 해당되지 않는 다고해서 우리 후배들의 석방 노력이 좌절된바 있음

7. 본인은 5.16혁명재판에서 유죄를 받고 1년여 세월을 서대문 구치소에서 보냈고 그것으로 인해 취업도 할 수 없는 국내추방상태를 수년간 살아야 했지만 그러나 1969년 이후에는 상황이 다소 풀려 국토통일원에 촉탁으로 들어가 10년 동안 통일원의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남북적십자회담 전략지원반장, 통일원 정치외교정책담당관, 교육홍보실장, 통일교육원장을 역임, 홍조근정훈장을 받았으며 국회로 진출해서는 남북한 고위급 회담 대표, 전두환 총재비서실장, 국회문교공보위원장 등 3선 국회의원을 역임했음

8. 류근일 선배 역시 조선일보를 통해 친북좌파를 비판하는 논설을 통해 국민적 감동을 일으켰음은 주지하는 바임. 결국 5.16군사혁명재판은 국가에 유해한 위험분자를 배제한 재판이었다기보다는 국가발전에 공헌할 능력 있는 젊은 지성인들을 권력 정치적 필요성 때문에 희생시킨 정치 이벤트였다고 규정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임.

9. 끝으로 호소 드리고자 하는 것은 이제 군사쿠데타가 발생한지도 반세기에 이르렀으며 박정희 대통령이 이룩한 국가발전이나 업적은 그 나름대로 한국사의 일부가 되었음은 인정하지만 이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 꾸며진 혁명재판의 역사를 무조건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재판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여 청춘을 희생한 사람의 권리까지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그늘진 곳에 다시금 빛이 쬐이는 민주화시대가 열린 오늘날 억울한 희생자들의 권리가 더 이상 불문에 붙여져서는 안 되며 반드시 그 억울함을 뒤늦게나마 밝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10. 이제 5.16의 역사는 더 이상의 정당화가 필요 없으며 다만 5.16으로 말미암아 희생된 자들의 억울한 시정과 원상회복을 위한 과업만이 우리 앞에 남아 있는 과제일 것입니다. A라는 시점에서 억울하게 고생했던 사람이 B라는 시점에서는 그 억울함이 밝혀질 수 있는 사회가 그나마 희망 있는 사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재판은 어느 사회에나 있었고 그에 따른 희생자도 생기게 마련이지만 정치재판에서 생긴 억울함이 반드시 밝혀져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향해 그 효력을 소멸시키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정도라고 믿으면서 증언을 가름합니다.


잘못된 재판, 50년간 바로잡지 못한 것 사과"(조선일보 2010년 9월 11일)
법원, 민통련사건 관련
북한을 찬양했다는 혐의로 5·16쿠데타 직후 혁명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류근일(72·사진) 전 조선일보 주필이 49년 만에 재심(再審)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3부(재판장 홍승면)는 10일 류 전 주필에 대한 재심 선고 공판에서 "공소 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없고, 이후 피고인의 사상과 인생을 되짚어 보더라도 매우 부당함을 확인할 수 있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류 전 주필은 서울대 정치학과 재학 중이던 1961년 4월 통일문제를 연구하던 학생 단체인 민족통일연맹(민통련) 소속으로 남북 학생회담을 제안했다가 기소돼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7년6개월간 수감생활을 했다.

재판부는 "민통련의 결의문과 성명서는 민족의 평화 통일을 지향하면서 남북 교류 차원에서 남북 학생회담 등을 주장한 것일 뿐 북한 정권이나 정책 혹은 북한의 통일 방안에 찬동하는 내용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어 "불법적인 수사와 분명하지 않은 증거에 의해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하고 이를 50년간 바로잡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며 "법원을 대표해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또 "지금 과거의 잘못된 재판들을 바로잡는 것은 피고인과 같은 국민의 희생으로 이룩한 민주화의 성과라는 점에서 피고인의 고난과 희생이 헛된 것이 아님을 말씀드린다"고 덧붙였다.

류 전 주필은 판결 선고 후 "50년 만에 햇빛을 보았다"며 "당시 행동이 20대의 설익은 행동이었을지 몰라도 민주 선진국에 도달하기 위한 진통이었다고 생각한다. 패자 부활전이 가능한 대한민국에 긍지를 느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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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65주년날에 감상한 오페라 투란도트 (이글은 憲政誌 9월호 118p-120p에 게재되었음) 

                              한중문화협회 총재  이영일

광복절 65주년을 기념하는 서울경동교회의 일부 예배를 마치고 나는 아내와 함께 오후 3시 서울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초연하는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를 감상했다. 작년 가을부터 우리 내외는 좋은 오페라를 빠짐없이 감상하는 행운을 안았다. 경동교회 성가대원 들 중에 오페라 현역출연진들이 많은 덕분에 때로는 표 파는데 협력해야 하는 부담도 있었지만 우리 가족들이 팔아준 표 값보다 훨씬 더 많은 오페라 초대를 받게 되었고 또 예술관련 회사를 경영하는 친구가 우리 내외를 음악이나 오페라 예술에 상당한 소양을 가진 것으로 착각(?)해서인지 자기에게 오는 표를 많이 할애해주어 세종문화회관에서 돈 카를로, 마농 레스코를,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칼멘, 라 트라비아타를, 그리고 이번에는 오페라하우스에 딸린 소형극장 토월극장에서 투란도트를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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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절 65주년을 맞아 새로 준공된 광화문과 그 앞에서 거행되는 기념행사에도 조그마한 홍조근정훈장을 서랍에서 꺼내 앞가슴에 달고 참가하는 치기를 발휘할까도 생각해 보았다. 고등학교 때 국어교과서에 실린 설의식 선생의 "헐려짓는 광화문"의 기억이 너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침 일요일이 광복절인관계로 교회에서 경동교회를 창립한 김재준 목사님 작사의 찬송 582장 "깊은 밤 어둠에 잠겨"를 힘차게 불렀고 또 예배말미에 "흙 다시 만저 보자"를 리드로 하는 광복절 노래도 눈시울 붉히는 감동 속에서 따라 불렀기 때문에 내 나름의 기념식은 끝난 셈이었다. 그래서 우리 내외는 광화문은 다음에 보기로 하고 오후 세시에 시작되는 투란도트 감상에 나섰다.

  그간 푸치니의 오페라는 여러 편 보았고 투란도트도 수년전 테너 임응균이 타탈의 왕자 칼라프로 나오는 역을 할 때 본 일이 있지만 중국을 무대로 한 작품을 다시 보고 싶은 욕심에서 예술의 전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푸치니는 일본을 소재로 나비부인을 그려 일본 게이샤를 서양에 소개했고 중국을 소재로 하는 것으로는 처음이고 마지막인 작품이 투란도트였다.

  그러나 투란도트는 작품을 통한 중국문화의 증언이라기보다는 중동식의 천일야화를 중국이야기로 둔갑시켰기 때문에 문화의 지역성이 뚜렷하지 않고 주제곡이나 변주곡이 모두 푸치니 가극에서 흔히 듣는 음색들로 크게 새로울 것이 없었다. 적어도 동양적 선율을 느낄 수없었다는 데 아쉬움이 있었다.

다만 이날 공연에서는 푸리마돈나로 나온 투란도트보다는 조연으로 나와 타타르의 왕자 칼리파를 사모하는 애인 류가 사랑을 위해 죽음을 택하면서 부르는 아리아가 음악성에서 훨씬 감동적이었다. 막이 내린 후 나오는 류를 향한 박수의 강도가 매우 길고 큰 것으로 미루어 내 느낌이 옳았던 것 같다.

 나는 이번 여러 편의 오페라를 보면서 한국오페라의 수준이 역시 GDP랭킹 세계 13~15위만큼 올랐음에 놀랐다. 1958년 대학에 입학해서 같은 캠퍼스의 수학과 김치호(4.19당일 경무대 앞에서 총 맞고 사망)군과 함께 당시 시공관에서 맨 처음 감상했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나 레온카발로의 기극 파리아치를 볼 때와는 너무 차이가 나는 기획, 연출, 무대, 성악수준이었다. 왜 한류(韓流)가 세계도처에서 평가받는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다른 나라에서 한류가 받는 것만큼 칭찬받을 전망이 전혀 없는 정치권에서 인생을 살았다. GDP가 아무리 높아져도 한국정치의 수준은 GDP만큼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정치는 정치문화를 떠나서 성립하기가 힘들고 식민지를 체험한 국가들에서 민주주의가 잘될 수 없는 소위 식민지근성이 청산되는 데는 아직도 시간이 더 흘러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분단과 전쟁의 갈등이 내면화되는 가운데 쌓인 모순과 대립을 극복하기 보다는 그것을 이용하고 그것에 편승하여 정치적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가 뒤쳐져 있다고 해서 다른 분야가 정체된다면 문제가 심각하지만 정치를 제외한 다른 모든 분야가 세계와 흐름을 같이하면서 발전하기 때문에 나라의 미래에는 큰 걱정은 없다.

  정치의 기능과 역할이 국가의 존속과 발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나날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교육국경, 경제국경, 문화국경이 무너져 가는 세계사의 큰 흐름을 조망할 때 정치적 국경의 테두리 속으로 역할이 줄어드는 정치에 너무 큰 기대도, 환멸도 가질 필요가 없다. 대통령을 잘못 뽑았다고 개탄할 필요도, 잘 뽑았다고 기뻐할 필요도 없다. 다 지나가는 하나의 절차요 과정이기 때문이다. 결국GDP 수준을 밑도는 정치는 세대교체의 와중에서 점차적으로 정비되어 갈 것이다. 이점에서 문화의 선진화는 마침내 정치선진화의 중요하고 큰 동력이 될 것이다.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하여 GDP를 밑도는 수준의 정치를 연출하는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고 웃으면서 악수하는 것보다는 토월극장에서 수준 높은 오페라를 감상하면서 광복절을 보낸 것이 더 값지다는 생각이 아직도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 다소 아이러니이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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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하게만 보이는 MB의 리더십

  이영일 (전 국회의원)

정계를 떠난 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오늘의 국가상황을 보면 답답한 마음이 가시 지 않는다. 내가 읽고 느끼는 시국상황과 MB대통령이 보는 그것 간에 너무 차이가 큰 때문인 것 같다. 나보다 더 많은 정보와 참모를 가진 대통령의 판단이 나의 그것보다 더 나을 것으로 보지만 그러나 내 마음의 답답함이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MB를 둘러싸고 있는 참모들의 면면을 보아도 아무 답이 없어 보이는 것도 답답함의 원인이지만 오늘의 남북한 간의 군사적 긴장상태를 처리하는 정치과정에서 들어난 MB외교팀의 문제해결능력의 미숙이랄까 모자람에도 답답함의 원인이 자리 잡고 있다.

MB는 자기가 삶에서 배운 이면공작을 통해 정상회담을 뚫어 김정일의 대남공세를 완화시키려 시도할 수도 있겠지만 현재의 MB팀워크가 이를 잘 감당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 것도 나를 답답하게 한다.

천안함 사건 처리과정에서 들어난 MB정부의 수많은 실수, 특히 국방부 발표의 말 바꾸기, 외교통상부의 중국 다루는 솜씨, 유엔과 아시아안보포럼(ARF)에서 들어난 한국외교의 수준 등이 하나같이 국민들의 신뢰를 빼앗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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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국가를 유지하는 국가권력의 의미를 제대로 소화한 것 같은 느낌을 주지 않는 MB의 치국 스타일 역시 나를 답답하게 한다. 최근 개각과 새 총리임명도 나를 답답하게 한다. 좋은 분들을 선발했겠지만 시국의 需要에 걸맞지 않는 人選들이 나를 답답하게 한다.

국가안보, 외교, 통일 문제를 자기인생의 수업과정에서 한 번도 자기문제로, 자기의  실존적 관심사로 내면화시킨 경험이 전무한 사람을 분단국가의, 그것도 외교안보문제가 주요현안으로 되고 있는 정부의 국무총리로 선택하는 MB의 속내나 안목의 의미를 읽기 힘들다는 점에도 나의 답답함이 있다.

G20의 준비라는 명분으로 외교 경제 팀을 그대로 두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북한의 공세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하겠다는 의지를 누차 표명하면서도 한 번도 그 실체를 보여주지 못하는 국방장관을 그대로 두고 잇는 것도 나를 답답하게 한다.
 
 국방부 장관은 앞으로 全 전선에 걸쳐 심리전을 재개한다고 발표했다가 북한의 공격공세에 주눅들어 심리전을 포기했다. 또 전 세계 심리전 역사를 통해 적에게 언제부터 심리전활동을 개시한다고 사전에 발표, 적의 반발공세를 유도하고 그것을 빌미로 심리전을 포기하자는 국민여론을 일으킴으로써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오히려 반정부세력들이 천안함 사건을 역이용, 지자제선거의 유리한 고지를 장악케 한 국방부장관을 왜 감싸고도는지 나는 답답할 뿐이다.

그간 MB외교는 한미관계측면에서는 오바마의 신뢰를 얻는데 성공한 것 같다. 그 덕분에 G20회의를 유치하고 핵 안보정상 회담을 한국에 유치한 것은 성과로 보인다.

 그러나 중국의 태도를 한국을 지지, 존중하는 방향으로 몰고 갈 많은 카드를 제대로 활용 못한 것이 아쉽다. 천안함 사태의 경우 박근혜 전 대표를 중국특사로 활용했다면 성과를 기대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중국외교의 철학이나 전통, 스타일을 잘 모르고 MB에게 직보(直報)만 잘하는 駐中대사는 중국의 對韓 공갈외교의 통로로 잘 활용되었을 것이다. 이것도 나를 답답하게 한다. 당 내부에서도 초당외교를 못하면서 야당과의 초당외교를 기대하겠는가. MB의 이러한 포용력 부족처럼 보이는 측면도 나를 답답하게 한다.

MB의 개각은 이제 시작되었고 끝나지 않았는데 결국 자기 대선캠프에서 일했던 분들을 총동원해서 임기 후반을 함께 하려는 듯한 개각인선은 국민들에게 결코 큰 감동을 주기 힘들 것이다. 이런 인선이 과연 국민통합에 기여할 것인가.
 
 젊고 참신한 인물의 선택은 바람직하지만 시국의 수요를 충족, 반영시키지 못하는 인선은 대통령의 지도력을 약화시킨다. 이것도 나를 답답하게 한다.

이제는 정운찬 전 총리의 사표를 반환시켜 다시 데려오지않는 한 총리공백이 장기화할 것 같다. 신재민 문광장관 후보의 낙마가 유인촌 문공장관을 유임시킨 것 처럼 말이다.  정말 답답함의 연속이다.  嗚呼라 이 답답함의 굴레에서 언제쯤 벗0어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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