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헌정지 2010년 11월호(pp47-49)일자에 개제되었고 국제문제2010년 10월호에 전재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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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국호가 金氏朝鮮王國으로 바뀌고 있다.

북한의 정식국호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이 조만간 김씨조선왕국(Kim's Kingdom of Chosun or Kim's Dynasty of Chosun)으로 바뀔 것 같다. 공화제에서 세습군주제로 정권의 속성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급작스러운 사망 후 김정일이 대를 이은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후계자 훈련이 진행되었고 1980년대에는 사실상 북한의 통치를 김정일이 전담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정일의 급작스러운 건강악화와 더불어 28세의 아들 김정은에게 권력이 이양되는 3대 세습과정은 누구에게나 정권의 속성변경으로 보인다. 특히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나라들에서는 1인 독재의 장기화는 있었지만 父子와 孫子로 이어지는 3대 세습은 그 선례가 없기 때문이다. 당내에서의 민주적인 절차와 토론, 경우에 따라서는 격렬한 투쟁을 통해 후계자를 선출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 독재자가 자기의 의중 인물을 후계자로 지명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러한 지명이 성공하는 일은 드물었다. 미국의 정치학자 브르진스키(Brzezinski)가 후계자 지명을 ‘죽음의 키스’라고 비유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반대세력들이 뭉쳐서 지명된 자를 거세하거나 지명권을 행사한 자가 최종순간에 당초의 방침을 고치고 새로운 선택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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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8일 북한노동당 대표자대회에서는 세습후계자를 부각시켰을 뿐만 아니라 당규개정을 통해 북한인을 ‘김일성 민족’이라고 말하고 조선노동당을 ‘김일성 당’이라고 결정하였다. 신문에서 이 보도를 읽으면서 필자는 북한판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가 나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 북한 땅에서는 민주주의도, 인민도, 공화주의도 사라져버렸다. 북한의 국호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고 부를 모든 근거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습비판에만 관심을 모으는 것은 현실적으로 소모적이다. 북한의 새 정권을 맡은 지도자가 지금과는 달리 개혁개방과 비핵화를 통해 북한 동포들을 굶기지 않고 국제사회와 더불어 공생 공영하는 길을 모색하는데 앞장 설 지도자라면 굳이 세습된 지도자라고 해서 경원하거나 비판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우리도 직접선거로 지도자를 뽑았지만 항상 만족할만한 선택이 아닌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북한에서 진행되고 있는 세습의 정치과정은 전임자의 업적과 정책을 공정하게 비판하고 그 토대위에서 개혁개방의 길을 걸었던 중국의 현대화과정과는 너무나 닮지가 않았다. 중국에서는 “모택동 동지의 교시와 정책은 모두 옳다”는 양거빤스(兩個凡是)를 놓고 심각한 당내투쟁이 벌어졌다. 결국 실천에 의해 검증된 것만이 진리라는 결론을 당론으로 채택한 후 개혁개방의 길을 열었던 것이다.

오늘의 북한에서는 전임지도자들의 노선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나 비판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김일성의 교시와 정책, 김정일의 지도하에 이룩된 선군위업으로서의 핵과 미사일개발노선을 올바른 지도노선으로 강조하면서 혈통, 즉 김일성 자손의 혈통, 김일성 당의 혈통을 잇는 자를 후계자로 받드는 혈통세습제를 채택했다. 역사의 시계바늘이 북한 땅에서는 거꾸로 돌아가고 있음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에서의 혈통세습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안보에 대한 대비를 어느 때보다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지도자가 자기 리더십을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해, 주민들의 충성심을 테스트하기 위해 새로운 도발을 획책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대남 카드 외에는 북한의 김정은이 쓸 만한 카드는 별로 없다. 그러나 김정은의 대남기도에 과연 북한 주민들이 맹종, 호응할 것인가.

북한의 군부는 수령의 군대로서 지도부차원에서의 충성확보는 가능할지 모르나 가족들의 굶주림을 매일 같이 피부로 느끼는 북한군 사병이나 주민들이 통치능력이 전혀 검증되지 않은 김정은에게 맹종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북한판 흑묘백묘(黑猫白猫)운동을 펼쳐 북한주민을 기아로부터 해방시키는 조치를 적극 강구하지 않는 한 주민들의 충성심 확보는 갈수록 어려울 것이다.

국내외 일부 학자들 가운데는 세습보다 중요한 것이 정책이라면서 북한 안에 정책변화의 징후가 보인다고 기대감을 표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그런 변화가 중국의 관여를 통해서라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러나 노동당의 당규개정을 유심히 지켜보면 혈통세습에서 정책변화를 기대하기가 쉬울 것 같지 않다. 막연한 기대보다는 안보에 대한 철저한 자기 대비와 국론통일이 시급한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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