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인(狂人)효과를 극복, 강력대응만이 우리의 살 길이다.

 

이영일 한중문화협회 총재는 12월 10일 저녁 7시 20분부터 30분간 국회 TV

금요초대석에서 한나라당 유기준 의원과 연평도사태이후의 한국외교방향을

주제로 대담토론을 했습니다. 이 토론에서 이영일 총재의 발언내용을 간추립

니다. 이영일 총재는 11대, 12대, 15대 국회의원(외교통일통상위원회위원)과

국회문교공보위원장을 역임했으며 "햇볕정책의 종언"(2008 전예원)이라는 저

서를 출판했습니다. 유기준의원은 현재 국회외교통일위원회 간사이며 17대,

18대 국회의원입니다.

 

1. 북한의 천안함 도발에 이은 연평도 도발로 한반도는 지금 크나큰 위기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작금의 북 도발과 이에 대응하는 우리의 최고 군통수권자나 대통령 주변의 참모들 보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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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공격에 대한 우리 측의 대응은 한마디로 개탄스러웠습니다. 군 시설은 물론 민간거주지에 까지 무차별 포격을 가해온다면 즉각 대응해야 합니다. 적의 공격으로 민간인까지 죽어가는 사태를 지켜보면서 국가원수에게 "어찌 하오리까"를 물은 후에 조치를 취한다는 발상이야말로 개탄스러움의 극치입니다. 공격이 있을 경우 당당히 대응하여 공격의 예봉을 꺾은 후 상황처리 결과를 윗선에 보고하고 사후대책을 강구토록 하는 것이 올바른 수순입니다.

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작전 지휘권이 없다거나 교전규칙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치사한 책임회피입니다. 군민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공격에 대응하지 말라는 교전 규칙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군이 이처럼 전투 아닌 행정군대로 변한 까닭도 따져보아야 합니다. 첫째 정부는 아직도 북한군을 주적으로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북측은 침공해 올 적이 구체적으로 없는데도 일부러 적을 만들어 북한을 압살하려는 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핵무기를 제조한다는 판에 우리는 있는 적도 주적이라고 못 부르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이미 시효가 지나버린 햇볕정책을 즉각 폐기처분하지 못하고 그것을 어물어물 묵인하면서 정상회담이나 해볼까하는 어정쩡한 태도를 버리지 않는데도 주원인이 있습니다.

오늘날 남북한 간에는 정상회담을 열어서 해결할 문제가 하나도 없습니다. MB도 정상회담 병을 바로 치유해야 합니다. 대통령이 정상회담 병에 걸려 있는 한 우리 군은 적의 공격에 맞대응하는 군이 아니라 “어찌 하오리까”의 군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목숨을 걸고 국가를 지킬 열정을 쏟을 군을 만들려면 시급히 주적(主敵)을 명시하고 어정쩡한 정상회담의 꿈을 내팽개쳐야 합니다.

 

2. 북한은 앞으로도 경기도나 서울, 서해 함정을 공격하겠다는 위협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그동안 북한의 행동 패턴으로 볼 때 북이 또 다시 도발할 가능성... 어떻게 보시고, 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금년 3월에 발생한 천안함 폭침사건과 연평도 포격사건에서 우리가 내릴 결론은 북한은 대남도발을 내치외교의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북한의 내정에서 가장 긴급한 것은 3대 세습체제를 연착륙시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대내적으로 공포정치, 위기정치를 강화할 것입니다. 특히 북한은 중국이나 미국이 확전을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역이용하여 수시로 필요하다면 치고 빠지는 공세를 강화할 것입니다.

또 김정일은 흔히 군중심리학에서 말하는 狂人效果를 이용하여 대남 군사공세를 강화합니다. 광인효과란 김정일이 무슨 미친 일을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을 심어놓고 자기들의 군사도발에 한국이 맞대응하면 전면전도 불사한다거나 서울을 불바다로 만든다거나 핵전쟁도 불사한다거나 하는 심리전을 펼칩니다. 이것이 바로 김정일이 노리는 광인효과입니다. 단호히 대처하되 확전을 피하라는 소리는 바로 이러한 광인효과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는 구체적 증거입니다. 지금 우리 정부가 바로 이 광인효과의 최면에 걸려 공격대응보다는 擴戰防止에 力點을 두고 있는 것은 정말로 개탄스럽습니다.

잘 알다시피 오늘날 全面戰은 偶發的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6.25動亂만 해도 김일성은 당시 소련, 중국과 사전에 충분히 협의, 미군의 즉각 개입만 없다면 남한을 완전 점령, 통일할 수 있다는 계산이 확실했기 때문에, 즉 최종적 승리에 대한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전면전을 일으켰다가 패주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북한은 모든 역량에서 한국에 뒤지고 있는 지구 최빈국의 하나입니다. 한국이 광인효과의 최면상태에서 깨어나기만 하면 얼마든지 강력히 대응, 북의 도발을 철저히 봉쇄할 수 있습니다. 북한의 도발과 한국의 강력대응이 전면전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는 힘은 미국과 중국의 몫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확전에 대해 우려할 필요 없이 즉각적이고 강력히 대응만 하면 될 것입니다.

 

3. 7일, 한․미․일 세 나라는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일 외무장관 회담을 통해 중국의 6자 회담 제안은 적절치 않으며, 오히려 중국이 북한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미온적 입장이 바뀔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이는데요. 중국은 중립을 가장해 북한 감싸기를 한다는 지적을 받아왔습니다. 중국이 계속해서 이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와 배경은 어디에 있을까요?

 

중국의 양제츠 외교부장은 지난 12월 1일 기자회견에서 밝힌바와 같이 남북한의 어느 편도 아닙니다. 중국자신의 국가이익을 지키는 중국편입니다. 한 예로 1991년 북한의 김일성은 중국을 방문했습니다. 이것이 김일성의 40번째의 중국방문이었고 또 마지막 중국방문이었습니다. 이때 김일성은 당시 중국의 등소평 지도자에게 한국과의 수교를 자제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이듬해인 1992년 한국과 수교했습니다. 이때 북한이 중국에 대한 배신감이 엄청 컸을 것입니다. 혈맹이 과연 이럴 수 있을까하고 놀랐을 것입니다.

중국의 국가이익 차원에서 보면 경제적으로는 한국이 중요하지만 정치군사적으로는 북한카드가 당분간 중국에는 아주 유용합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세계정세는 미국이 주도하는 단극체제에서 다극체제로 변화되는 과도기정세이기 때문에 북한이 미국을 상대로 벌이는 핵과 미사일 노름이야말로 중국이 북한을 유용한 외교카드로 이용할 가치를 증대시켰습니다. 북한의 핵무장 시도 때문에 중국은 맨입으로 동북아 외교를 주도할 6자회담의 의장국이 되었습니다. 북한이 사고를 치면 칠수록 북한에 영향력이 큰 것으로 알려진 중국은 동북아시아 국제정치에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엄청난 외교적 특권이지요. 북한을 위해서가 아니라 중국자신의 외교적 이득을 위해서 북한카드를 당분간 놓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4. 연평도 포격 도발 이후 북한은 연일 ‘북중 우호’를 강조했었습니다. 사실 중국 정부도 북한 때문에 여러모로 곤혹스러운 입장일텐 데, 혹시 북한과 중국의 혈맹 관계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은 없을까요? 어떻게 보십니까?

 

중국 외교를 이해하는 데는 두 가지 포인트가 있습니다. 국가대 국가차원의 외교와 黨대 黨 차원의 두 가지 외교를 동시에 구사합니다. 국가차원 외교에서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북 핵과 미사일을 규탄하는 결의안에 찬성하는 외교입니다. 또 지금은 중국과 북한관계가 혈맹이 아닌 정상적인 국가대 국가관계라고 외교부 대변인이 말했습니다. 중국의 국가차원의 외교는 미국과의 관계가 원만할 경우입니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과의 관계가 불편해지거나 부딪치는 국면이 생기면 중국의 외교는 북한과의 관계에서 당대 당 외교로 변합니다.

중국공산당의 외교가 당 대 당 차원으로 바뀌면 북한의 지위는 혈맹이 됩니다. 김정일은 금년 8월까지 김일성 사후 다섯 차례 중국을 방문했는데 다섯 차례 모두 중국 외교부 아닌 중국공산당의 대외연락부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했습니다. 그러므로 비공식 방문입니다. 화려한 공항에서의 의전행사도 없습니다. 그러나 당대당차원의 외교는 곧 同志 대 同志외교로 되어서 중국정치국 상무위원 9인이 김정일을 따뜻하게 영접하는 대우를 해줍니다. 또 중국에서의 인민해방군이 우리나라에서와 같은 國軍이 아니고 당의 군대이기 때문에 군을 통수하는 시진핑 군사위원회 부주석은 지금까지도 중국과 북한간의 군사협력의 명분이었던 抗美援朝론을 고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중국을 이해하려면 이러한 두 가지 이중적 입장을 감안하면서 대처해야 실수가 없는데 중국을 미국적 시각에서 보거나 이해하는 사람은 중국의 태도를 예측하기 힘듭니다. 중국은 한국을 대미외교의 한 부분으로 보기 때문에 미중관계가 불편해지면 그 여파가 우리에게 미치게 됩니다. 여기에 우리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5. 중국 정부가 잇따른 도발 사태에서 지나칠 정도로 북한을 감싼 것은 비판해야 하지만 일각에서는 우리 정부의 대미 편중 외교가 중국의 그런 행태를 조장한 측면이 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는데요. 향후 남북관계에 있어서 중국의 역할이나 한국과 중국과의 관계 설정...어떻게 가야 한다고 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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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이후 한중양국관계는 우선 경제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여 한중교역은 2008년경에 벌써 미일과의 교역보다 양적으로 더 많아졌고 후진타오 주석과 노무현 대통령 간에 합의한 바 2012년 수교 20주년까지 교역량총액을 2000억 달러로 신장하자는 합의는 2012년보다 앞당겨져 금년에 달성될 전망입니다. 또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양국관계가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로 격상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입장에서 어려운 것은 미중 간에 갈등이 조성되는 부면에서 한국이 취할 선택의 폭이 좁다는 것입니다. 지금 미국과 중국 간에는 금융위기이후 기축통화인 달러의 지위와 위안화의 절상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또 중국은 조어도 문제를 놓고 일본과 영유권분쟁을 일으키고 있으며 南支那海 국가들과도 해상통로 문제를 놓고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로 인해 미중갈등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지금 미국정부는 일본으로부터 대만, 필리핀, 베트남, 인도네시아, 인도를 이으면서 북으로 몽고에 이르기까지 중국에 대한 광범한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이런 포위망을 깨기 위해 군사력을 강화하는 한편 샹하이 협력기구를 결성, 이에 맞대응 하는 한편 북한이 핵과 미사일 개발로 미국, 한국, 일본을 괴롭히는 상황을 외교카드로 활용하여 동북아 지역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증대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중국이 북한을 외교카드로 사용하는 동안에는 어느 경우에나 옳고 그름을 떠나 북한 측의 주장에 맞장구를 칠 것입니다. 그러나 실리추구에 밝은 중국은 경제의 중요성 때문에 한국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거나 외면하지는 않고 원론적인 주장으로 남북한이 냉정한 입장에서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라고 권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한국도 독자적인 외교노선을 정립해야 할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MB정부는 그간 대미관계를 개선하는 데는 다소 성과가 있었지만 중국문제를 다루는 태도나 정책이 의외로 빈곤합니다. 우선 중국정책을 결정하는 외교통상부 장차관과 외교안보수석, 심지어 주중대사까지 우연이겠지만 중국에서 한 번도 근무한 일없는 분들로 짜져 있다는 현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중국에 투자하거나 중국과 외교교섭을 하려면 중국을 심도 있게 알고 연구해야 하는데 그 점에서 보강해야 할 점이 많습니다.

 

6. 향후에 남북관계를 비롯해 한반도를 둘러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의 주변 정세는 어떻게 돌아갈 것으로 보십니까?

요즈음 한반도 주변정세에서 긴장의 파고가 일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은 미국의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고 있는 가운데 중국과 미국과의 관계가 여러 방면에서 부딪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힘이 강하고 미중관계가 원만할 때는 중국의 외교는 공세보다는 수세적 입장을 취합니다. 이른바 등소평이 강조한 도광양회(韜光養晦) 즉 어둠속에서 힘을 기르고 발톱을 내 보이지 말라는 정책을 취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금융위기의 여파로 미국의 경제력은 약화되고 미국의 군사력도 이라크와 아프간에 쏠리고 있는 반면 중국은 비약적인 경제발전으로 일본을 앞지르는 상황이 조성되고 있습니다. 중국에게는 이때야말로 자국의 영향력과 발언권을 국제정치무대에서 확대 강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외교를 원칙과 시간이라는 두 기준에서 지켜보면 중국은 원칙 면에서는 북한의 비핵 화, 개혁개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 면에서는 북의 비핵화나 개혁개방을 서두르지 않습니다. 미국의 대중국정책이 변화될 때까지 북한카드를 최대한 활용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중국이 북한을 이용한 만큼 많이 돕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외교적으로 북한주장에 동조해주면서 연명시킬 정도의 식량과 에너지를 지원하여 계속해서 북한이 중국에 매달리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비추어 한국외교는 매우 중요한 시련기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북한이 수시로 내치외교의 수단으로 구사하는 폭력도발에 대해서는 강력히 대처하여 중국이나 미국이 앞장서서 확전을 막도록 유도해야 하는데 거꾸로 우리가 확전을 걱정하는 넌센스가 일어납니다. 대통령에게 "어찌 하오리까"를 묻는 군대가 아니라 대응 조치결과를 보고하는 군으로 한국군의 타성을 바꾸어야 변화되는 주변정세에서 자기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동시에 한반도 주변의 어느 국가와도 우리의 주권을 무시할 경우에는 1회전 정도는 감당할 군사력을 길러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 목소리를 가질 수 있습니다.

7. 마지막으로... 위기의 남북관계를 풀어줄 탈출구,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대결이익보다는 대화이익이 크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폭력도발을 내치외교의 수단으로 쓰는 상황 하에서는 그러한 도발이 실익이 없음을 실감토록 하는 조치가 선행되어야 대화의 문이 열립니다.

 1971년의 남북적십자회담은 남북한 대결구조를 대화구조로 전환시킨 획기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의 안보태세가 확고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남북대화가 열리기 3년 전까지만 해도 1.21사태, 삼척울진사태가 연이어졌으나 모든 도발이 무위로 돌아가자 비로소 북한은 대화에 응했던 것입니다. 확실한 안보태세확립을 추구하는 정책이 대화를 포기하는 정책이 아니고 진정으로 대화의 물꼬를 트는 정책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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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2일의 파인비치 골프여행

나는 2010년 11월 하순의 쌀쌀한 날씨를 뒤로 하고 새벽6시 영어로 C씨 성을 가진 세 명의 친지(蔡씨, 秋씨, 崔씨)들과 자동차 한 대로 한반도 최남단에 새로 개장된 골프장을 향해 여행길을 떠났다. 목적지는 해남군 화원반도에 해안을 끼고 해송을 원형대로 보존하면서 새롭게 조성한 파인비치 골프코스이다. 내비게이션을 점검해보니 한반도의 중부에서 서남단을 가로지르는 서해안고속도로로 접어드는 데는 여러 갈래 길이 있지만 가장 빠른 길은 천안-논산 간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서산으로 빠지는 코스였다. 이 길을 타면 2시간 정도 걸려 군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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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에 비친 늦가을의 들녘은 추수뒤끝이라 그런지 벼 잘린 그루터기들과 볏 집을 말아놓은 흰색의 두루마리들이 군대 군대 시야에 들어왔다. 이른 아침시간에는 안개 같은 스모그 때문에 경관의 모습이 희미했지만 태양이 떠오르면서부터 농촌풍경은 빈 들판이긴 하지만 보다 여유롭고 한가해 보였다. 나는 혼자서 밀레의 만종을 머리에 그렸다. 밀레가 살던 시절의 프랑스 농촌과 같은 가난은 지금의 한국에는 없겠지만 그 대신 그림에서 보는 것 같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기도도 없어지지 않았을까.

오늘의 한국 농촌은 젊은 사람들이 모두 도시로 떠나버렸고 60세가 가장 젊은 층에 속한다고 한다. 나는 어린 시절을 남도 시골마을에서 보냈다. 농사철에 어머니가 다른 아낙들과 더불어 간식(그곳에서는 이를 술참이라고 한다)거리로 무 섞은 마른 갈치조림과 나무새, 빛 좋은 김치를 장만해서 막걸리 통을 머리에 이고 가는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이제 그런 정경은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 속에만 아련히 남아있을 뿐이다. 우리 일행은 남 부여(夫餘) 휴게실에 잠시 머물면서 육개장과 국수로 아침을 때우고 습관적으로 커피를 마신 후 다시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교대하면서 운전대를 잡기 때문에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중은 네 사람의 유우모어 경쟁 때문에 시종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어느새 차는 목포 톨게이트를 지나서 파인비치골프 코스로 접어들고 있었다. 서울은 영하의 날씨고 강원도에서는 진눈깨비가 퍼부어 도로통행이 어렵다고 뉴스가 나오지만 이곳 해남은 뉴스와 아랑곳없이 초가을의 온화한 날씨였다. 지구 온난화 때문인지 눈을 보지 않고 겨울을 지나는 해가 많은 지역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제주도에서만 자라던 귤이 이곳에서도 잘 자라면서 도처에 아열대 기후 권에서나 보이던 파초 모양의 코코넛 트리들이 가로의 이곳저곳에 삐쭉삐쭉 솟아 있고 귤들이 대롱대롱 달려있는 나무들이 보일 때마다 새삼 기후변화의 신비를 느꼈다. 반도남단에 자리한 해남군도 이제는 제주도 기후 권으로 들어간 것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이다. 이것이 축복인가 아니면 어떤 다가올 재앙의 신호일까. 아직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나로서는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느껴졌다.

파인비치 골프장은 해남군 화원반도의 해변을 27홀의 골프장으로 개발하면서 바다 사이를 낀 계곡과 숲과 해송의 원형을 보존한 점이 훌륭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몬트레이 근처의 Pebble Beach가 태평양을 바라보는 낭떠러지를 골프장의 풍경 속에 담았다면 파인비치는 잔잔한 남해바다와 나지막한 섬들을 전망 속에 담아 스릴보다는 안온한 느낌에 아기자기한 맛을 더해준다.

나는 1986년 방미 시 샌프란시스코 총영사로 있던 M선배 덕분에 1박 2일의 Pebble Beach 골프코스를 라운딩 할 수 있었다. 서부 태평양의 지평선을 바라보면서, 특히 석양 녘 주황빛갈로 물든 해안코스에서 골프를 즐기는 것은 잊을 수없는 추억이다. 경치에 취해 호기를 보이다가 백구방생(白球放生)을 여러 차례 하는 바람에 스코어는 평소 기록을 훨씬 상회했지만 그때 내심에 느꼈던 유쾌 지수(Comfortable Index)는 생각할 때마다 아직도 전신을 근지럽게 한다.

파인비치도 설계나 경관에서 페블비치에 못지않다. .맛이 다들 뿐이다. 우리나라 건축예술로 비유한다면 페블비치가 석가탑이라면 파인비치는 다보탑이라고나 할까. 11월 하순의 날씨에도 파릇파릇한 녹색의 양 잔디를 밟으면서 라운딩을 하는 것은 서울 근교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운치였다. 발걸음을 옮겨 놓을 때마다 봄의 카펫위를 걷는 기분이 느껴쪘고 맑은 공기로 하여 감기기운으로 가끔 흘러나오던 콧물도 딱 멈춰버렸다. 파인 코스에서 비치코스로 이동하는 소로주변에는 봄의 들녘을 누비는 민들레꽃을 꼭 닮은 철머우 꽃들이 곱게 피어있었다. 나는 철머우 라는 꽃의 이름을 이곳에서 캐디아가씨에게 처음 들었다. 늦가을에 피는 민들레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았다.

첫날은 파인코스와 비치코스를 돌았고 다음 날 아침에는 비치코스에서 스타트해서 오시아노로 끝났다. 27홀의 홀마다 특색이 있고 또 풍향이 다르기 때문에 저공비행하는 클럽을 잡는 것이 늦가을 라운딩에는 유리할 것 같았다. 동행한 친지들은 모두 골프에서는 나보다 상수(上手)들이지만 나 때문에 스코어 카드에는 신경을 끄고 매 홀을 즐기면서 라운딩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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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고산의 생가와 500년된 은행나무)
첫날 저녁식사를 위해 해남읍내로 이동하는 도중 우리는 이곳이 고향인 C형의 안내로 조선 광해조 시대의 문인 고산(孤山) 윤선도의 유적지 녹우단에 들렸다. 해질 무렵이어서 자세히 관광할 시간은 없었지만 조선조에서 벼슬길에 올랐다가 낙향을 거듭하던 절충파 선비의 고향이 그를 잊지 않고 그의 생가와 오우가(五友歌)로 유명한 신중신곡의 발상지를 잘 보존하는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관광자료에는 고산문학의 숨결이 느껴진다고 표현하고 있다.

내가 오우가를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서 배울 때만해도 세계문학에 대한 안식이 전무하여 고산 문학의 문학사적 위치를 촌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대학생 시절 학생운동으로 옥중에 갇혔을 때 읽은 미국의 초월주의 작가 Henry D. Thoreau(1817-62)의 Walden Pond의 분위기와 기맥이 통하는 문인 같았다. 살았던 시기도 어쩌면 비슷했다. 머릿속에서 오래 전에 사라졌던 오우가를 다시 떠올려 암송해 보는 것도 내심의 축제 아닐까.

우리가 당도한 식당은 “땅 끝 기와집”으로 불리는 해남에서 가장 이름난 한식집이다. 과거에 명성을 날리던 천일식당보다 요즈음에는 더 인기가 높다고 한다. 그러나 음식들은 요즈음 서울에도 전통음식점이 많아졌기 때문인지 내세울만한 특 미는 없었다. 현지에서 생산된 막걸리와 약주를 마셨으나 반평생을 서울의 술 문화에 젖은 사람에게는 신통찮았다. 이제 한국음식이 지방마다에서 가졌던 특 미는 간혹 먹게 되는 일품요리에서는 느낄 수 있을지 몰라도 전통 한식은 거의 보편화되어 서울에서도 얼마든지 맛볼 수 있었다.
 
 해남군청에서 근무하는 C친지의 지인이 식사에 동참했다가 해남 쌀의 밥맛이 좋다고 칭찬한 바람에 5Kg 들이 쌀 상자를 하나씩 선물로 받게 되었다. 이것이 참가상이 된 셈이다. 군수는 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다가 부군수가 수뢰로 구속되는 불상사가 발생, 급히 광주로 가는 바람에 자리를 함께 하지 못했다.

이튿날 8시 30분에 비치코스에서 스타트해서 오시아노 코스로 라운딩 했음은 앞에서 말 한대로다. 오시아노 코스는 바람이 덜 타는 곳이어서 골프의 스코어는 어제보다 더 향상 되었다. 바다를 향해 내리 쏘는 쇼트홀과 바다와 바다사이를 230야드 가량 벌여놓은 곳을 넘어야 하는 티샷 코스는 나에게는 다소 도발적이었지만 운전시험에 합격하듯 나는 도강에 겨우 성공했다. 금년 들어 내 골프의 비거리가 다소 개선된 것 같아 즐거웠다.

골프를 끝내기가 무섭게 목욕을 간단히 마치고  영암군 학산면 독천리에 있는 그린식당을 향해 차를 달렸다. 모처럼 낙지 요리로 오찬을 즐기기 위해서다. 막걸리에 낙지 볶음과 초무침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서울에도 낙지요리집이 많지만 갯벌낙지는 드물고 중국에서 수입한 낙지로 요리하기 때문에 낙지 맛도 다르고 질기다. 그러나 이곳만은 갯벌낙지를 그대로 요리하기 때문에 전통 맛을 잘 살려냈다. 나는 종전대로 낙지 대가리를 잘 먹었지만 일행 중에는 서울특별시장이 암을 유발할 요소가 낙지머리 속에 들어있다는 경고를 의식해서인지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러나 식약청은 근거 없는 이야기라고 수정발표해서 큰 논란은 사라졌지만 유독성 발언의 여파는 이 지역으로 몰려들던 낙지 마니아들의 수를 많이 줄였다. 2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어서 오찬 손님들이 다 떠난 뒤겠지만 과거에 비해 그린식당이 한가해진 것은 사실이다 주인도 이 사실을 시인했다. 나는 한평생 낙지머리를 특미로 알고 많이 먹은 사람인데 이제 서울시장 말 한마디 듣고 먹지 않는다는 것이 꼴을 더 우습게 만들 것 같았다. 나는 한평생 먹어 생긴 면역력이 있음을 강조하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삶은 낙지 머리를 우둑 우둑 씹어 삼켰다.

우리 일행은 오찬을 마친 후 목포 시내를 관통, 서해안 고속도로를 향해 달렸다. 오던 길을 다시 달리는 것이다. 논산을 지나면서부터 스마트 폰에 부착된 내비게이션으로 붐비는 길을 피해가는 서울 진입작전을 세워 저녁 8시 서울에 당도했다. 주말부부들이 서울로 몰려드는 고속도로 길은 이미 길고 넓은 주차장으로 변했지만 오산으로 진입해서 서울-용인 간 고속도로 코스를 잡은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오늘 우리 일행은 남들보다 쉽게 귀경하는데 성공했지만 앞으로 스마트 폰이 더 대중화하면 서울 용인고속도로도 또다시 붐비는 주차장 형 도로로 변하는 것은 숙명일 것이다. 1박2일의 파인비치 골프여행은 두고두고 추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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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憲政誌2010 12월호에 기고되었음)

            연평도 패전과 국가 지도자의 리더십

1. 국가안보에 커다란 허점이 드러났다.

북한은 11월 23일 대낮에 연평도를 향해 무차별 포격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연평도 주민들과 군인들이 살상 당했고 군 시설과 민간인 생활공간이 처절하게 파괴되었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은 6.25사변 이래 처음 있는 대한민국 영토에 대한 공공연한 무력도발이다. 이 사건은 천안함 폭침이 있은 지 7개월 만에 일어났다. 천안함에 대한 폭침도 국제법상 군함에 대한 공격으로 유엔헌장이 정한 자위권 행사의 대상이지만 연평도 포격이야말로 곧바로 자위차원에서 반드시 대응해야 할 군사도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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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연평도에 대한 무차별 공격은 치밀하게 계획된 것이다. 포격이 행해지기 10일전에 북한은 미국의 핵과학자 S. Hecker 박사를 북한으로 초청, 농축 우라늄 폭탄제조에 응용될 원심분리기를 공개하고 북의 핵능력의 건재를 과시했다. 미국이 북의 대남도발에 개입한다면 핵개발로 맞서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이런 조치를 선행시킨 후 한국의 육해공 3군이 함께하는 호국합동군사훈련에 때맞춰 연평도에 대한 무력공격을 자행한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현재 심경은 어떨까. 그는 지난 5월 24일 천안함 사건의 진상을 발표하면서 “대한민국은 앞으로 북한의 어떠한 도발도 용납하지 않고, 적극적 억제 원칙을 견지할 것이다. 우리의 영해, 영공, 영토를 무력 침범한다면 즉각 자위권을 발동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연평도포격에서 MB가 국민에게 약속한 자위권차원의 대응은 없었다. 대응시늉은 있었지만 사실상 자위를 포기하는 수준의 대응이었다. 국내언론들은 MB가 "단호히 대처하되 확전되지 않도록 관리하라"고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청와대는 이를 부인했지만 결과는 좋게 말해 전략적 인내지만 실제는 확전방지에 쏠린 대처였다. 이 사태에서 국민들을 절망시킨 것은 3군 합동훈련기간 중에 발생한 "연습상황 아닌 실제상황"에서 군이 제대로 된 대응을 보이지 못한 것이다. 특히 연평도를 지키기 위해 배치된 자주포 K-9 6문 중 2문이 작동불능상태였다는 것이다.

이 사태에서 보건데 천안함 폭침사건이 한국의 안보에 아무런 교훈이 되지못했다는 사실이다. 물샐 틈 없는 안보태세가 아님이 밝혀졌다. 군사연습에서 가장 기초적 점검사항인 최전방의 무기 수입상태 마저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연습이 진행된 것이다. 북한의 포격은 바로 이러한 태세불비상태에서 발생하였다. 정말 한심하고 통탄스럽다. 국군통수권자의 지도력을 묻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감정적 분노표출보다는 이성적 대처이다. 대통령의 지도력도 비판해야겠지만 거기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북한의 만행을 규탄해야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통절한 자기반성과 미래를 위한 올바른 대비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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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국내구조상의 안보허점을 직시해야한다.

지금 국내언론들은 11월 28일부터 실시되는 미국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 호가 포함되는 서해에서의 한미연합훈련에 관심을 쏟고 있다. 이 훈련이 북한에 강한 경고는 되겠지만 그것으로 북한은 도발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지난여름 동해에서도 한미연합훈련이 있었지만 북한은 도발을 포기하지 않았다.

또 11월 27일 북한은 그들의 선전매체를 통해 연평도 포격으로 민간인 희생자가 있었다면 유감이라면서 이것은 한국군이 민간인을 인간방패로 삼은 때문이라고 책임을 한국 측에 전가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유감표명이 아니라 인간방패라는 표현이다. 북한은 NNL을 부정하면서 연평도가 자기 땅인데 한국이 민간인들을 들여보내 북한의 포격을 막는 인간방패로 이용했다는 취지다. 이번 포격으로 민간인들이 연평도를 모두 떠나 이 지역일대가 국제분쟁지역으로 변한다면 북한은 연평도를 군사적으로 점거, NNL을 철폐하겠다는 의도를 들어낸 심리전을 편 것이다.

국가안보에 허점이 크게 뚫린 원인은 김대중ㆍ노무현시대의 잘못된 대북정책에 원인이 있다. 북한에 대한 퍼주기와 정상회담병(頂上會談病)이 바로 그 원인이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지사이며 MB 집권이후 김ㆍ노양정권의 잘못된 유산을 바로잡지 않은데 현실적 잘못이 있다. MB는 퍼주기 정책을 추종하지는 않았지만 북한을 주적(主敵)에서 배제한 김ㆍ노 정권의 잘못된 유산을 철저히 정리하지 않았다. MB도 김정일과의 정상회담을 은근히 추구하면서 정상회담을 의식, 자기 노선을 중도실용으로 내걸고 국내의 친북, 종북 세력의 발호에 단호히 대처치 않았다고 지적하는 논객들도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국민장(國民葬),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장(國葬)이 모두 MB의 시국관을 반영한 것이다. 이러한 리더십 하에서 목숨으로 북의 도발에 맞설 충직한 군 지휘관이 나올 수 있을까. 국가안보를 담보할 국내구조 정착 없이는 북의 도발에 대한 효과적 대처를 기대할 수 없다.

북한의 국지적 도발을 전면전으로 확전시키는 것은 국가차원에서 결코 현명한 조치가 아니다. 그러나 확전이 두려워 북한의 군사공세를 그대로 묵인하면서 넘어가는 것이야말로 정말 큰 위기인 전면전을 불러올 것이다. 현시점에서 확전은 한국의 우려나 자제로 막아지지 않는다. 확산방지는 미국과 중국의 중재로 이루어진다. 한국은 확전우려보다는 북의 도발을 자위차원에서 강력응징, 재발을 방지하는데 총력을 쏟아야한다. 총력응징이 없는 한 북한은 군사도발을 내치외교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면서 대내적으로는 세습체제이행에 따른 내부 저항을 봉합하고 외교적으로는 국제사회에서 핵 국가로서의 지위를 얻는데 주력할 것이다.

지금 미국은 한국이 도발에 강력 대처할 의지가 약할 경우 한미방위조약이 있다고 해서 스스로 대북응징에 나서지 않을 것이다. 중국은 천안함 폭침 때도 그랬지만 연평도 포격사건과 관련해서도 동일한 처방을 내놓는다. "양측이 냉정한 자세에서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연평도 사건과 관련해서는 신속히 후진타오 주석의 특사로 다이빙궈(戴秉國) 외교담당 국무위원을 한국에 파견하였다. 한미연합군사훈련이 북한에 대해 자위권을 행사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이점에서 확전방지문제는 애당초 MB가 꺼낼 이야기가 아니다. 빈틈없는 안보태세의 확립과 즉각적인 대응보복만이 국군통수권자로서 대통령이 취할 정도다. 그러나 자위차원의 대응을 단행할 기회를 우리는 놓쳤다.

3. 우리는 진솔한 대통령을 원한다.

그간 국민들은 원조 받던 나라가 원조하는 나라로 발전한 대한민국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다. G20의 개최와 성공에 긍지를 느꼈다. 광저우 아시안게임도 국민들의 사기를 앙양시켰다. 그러나 연평도에 대한 북한의 포격 앞에 제대로 된 대응도 없이 무너진 우리의 방어태세는 국민들의 안보자신감에 치명적 타격을 안겨주었다.

지금 국민들은 MB가 과연 종북, 친북세력이 날뛰는 국내구조를 그대로 두고 국가의 안보태세를 확립,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중도실용이라는 어설픈 입장을 계속 고수해 나갈 것인가. 정상회담이 열리면 북한의 도발을 막고 비핵화와 개혁개방을 가져올 자신이 있는가를 대통령에게 묻고 있다. 또 대중국정책결정의 지도부인 외교통상부 장차관 3인과 외교안보수석, 그리고 주 중국 대사까지 어느 자리도 중국에서 근무한 경험이 거의 없는 분들로 채워지고 있는 현실이 우리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 지도 묻고 있다.

이제 대통령은 자기의 입장과 안보관, 주어진 여건과 처지를 진솔하게 밝히고 국민들의 이해를 구해야 한다. 어느 경우에나 반드시 실천해 낼 수 있는 목표를 국민들에게 내놓고 지지와 단합과 협력을 호소해야 한다. 위기 속에서 국민들은 대통령의 참된 리더십을 보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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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2010년 11월 25일 관악아카데미에서 행한 이영일 특강내용이며 國際問題誌 12월호pp28-35에 轉載되었음)          
                     
                     

                    북한은 중국의 입술 아닌 립스틱이다.

 중국과 북한은 지금 두 차원에서 관계가 이어져 오고 있다. 하나는 공산권 특유의 국가 대 국가외교 차원과 당 대 당(즉 동지 대 동지관계)차원에서 양자관계가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국가대 국가 관계에서 보면 중국은 북한의 핵개발이나 개혁개방거부정책에 비판적이다. 유엔안보리의 대북제재결의안에 중국이 두 차례나 찬성한 것은 국가대 국가차원의 외교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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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중국은 당 대 당 차원에서는 북한의 김정일 집단을 혈맹으로 대접한다. 장쩌민 주석 당시 1회,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취임한 이후 김정일은 5회 중국을 방문했는데 이런 방문 모두가 중국 외교부 아닌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의 초청과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즉 공식방문이 아니고 비공식 방문이며 전 세계가 지켜보는 의전행사도 방영되지 않았다. 이 관행은 지금도 지속 유지되고 있다.


 
지난 3월 천안함 침몰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도 이 원칙은 지켜졌다. 우선 샹하이 엑스포 개막일에는 중국외교부 초청으로 이명박 대통령과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의장(북한의 국가원수)이 중국을 방문, 후진타오 국가주석과 만났다.

 이때 후진타오주석은 남북한의 국가원수들과 각각 정상회담을 가진 지 3일 후 김정일을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를 통해 따로 북경으로 불러 들였다. 후진타오 주석은 김정일과의 회담에서
김정일에게 국제사회에 파급이 클 중요한 문제를 북한이 일방적으로, 단독으로 결정하지말고 사전에 중국과 협의할 것을 요구했다.

 또 원자바오 총리도 이때 김정일과의 만남에서  외교적인 언사로는 중국의 개혁개방을 소개한다고 표현했지만 내용인즉 중국식 개혁개방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한 것이다. 김정일은 이 두 요구를 모두 수용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과연 북한이 중국의 요구를 실천할 것인가. 중국과의 사전소통약속이 지켜진다면 추가적인 북한의 대남도발로서의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는 억제될 가능성이 많고 6자회담재개도 예상된다. 또 서해상에서의 새로운 도발우려도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지금까지 중국 측의 요구를 항상 존중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개혁개방이나 대남태도에서 제대로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중국이 북한에 개혁개방을 요구한지 금년으로 26년의 세월이 흘렀다. 등소평이 1984년 김정일을 만나 개혁개방을 권고했고 그 이래 장쩌민, 후진타오, 원자바오에 이르기까지 영도 급 인사들이 북한을 방문했거나 북한고위층을 만날 때 마다 개혁개방을 권고했다.

지난 8월에도 중국 장춘에서 김정일을 만난 후진타오 주석은 북한의 개혁개방을 권고하고 북측도 정권세습이후 중국이 김정은에로의 권력세습을 묵인한다면 개혁개방의 점진적 실시와 북한비핵화를 위한 6자회담참여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중국은 북한의 핵문제에 대해 한국이나 미국만큼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북한의 핵 장난을 외교적으로 이용하면서 대미, 대일, 대한국 외교의 카드로 활용하고 있다. 중국은 국가차원에서는 유엔안보리를 통해 북 핵을 비난하면서도 당 대 당 차원에서는 북핵이 중국에 실질적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서 북한 핵을 사실상 묵인하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중국이 북한의 핵 포기를 강력하게 요구하지도 않고 국제사회의 대북압박정책에 반하여 북한에 원조를 제공함으로써 북한의 핵 포기 압력을 무효화시키는 상황이 이대로 지속되는 한 북한의 핵 포기는 기대하기 힘들며 북한의 개혁개방도 중국이 내정불간섭원칙을 내세워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는다면 북한 주민들의 고통과 불행도 계속될 것이다.

 일부 중국학자들은 북중관계를 양국안보의 순치관계(脣齒關係)로 정당화하려고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핵과 탄도미사일, 그리고 전략무기로서의 항공모함이 등장한 시대에는 어불성설이다. 이때문에 중국학자들 가운데는 북한이 중국의 입술이 되어 중국의 안보를 뒷받침한다는 순치관계론의 효용을 부정하면서 북한은 중국의 입술이 아닌 립스틱이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또 어떤  중국학자들은 북한이 중국안보를 위한 완충지대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민을 굶기면서 핵과 탄도미사일을 개발하는 선군정치로 주변정세에 엄청난 불안정을 조성하는 세력이 완충국이라는 견해는 어떤 국제정치교과서에도 없는 소리다. 

 지금 중국은 북한이 목숨을 이어갈 정도의 최소한의 식량과 에너지를 지원해줌으로써 북한이 중국에 철저히 매달리도록 하고 그 대가로 북한을 자국의 이익을 위한 외교카드로 이용하고 있다. 북한이 핵개발에 주력하고 선군론을 펼치면서 대남도발을 강화하면 할수록 중국의 외교카드로서의 북한의 효용은 커질 것이다.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는 것은 결코 안보상의 순치관계 때문이 아니다. 중국이 미국을 상대로, 일본을 상대로, 한국을 상대로 교섭하는 외교카드로서 북한의 용도가 크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타산이 작동하는 한 중국의 협력을 통한 북한의 비핵화, 개혁개방, 대남도발억제는 당분간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한편 북한은 중국의 이러한 태도를 역이용, 대남도발을 강화함으로써 한국이나 미국 측의 양보를 얻어내면서 협상의 주도권을 잡으려 한다. 즉 북한은 국제사회가 자국을 핵 국가로 인정하도록 유도하면서 나아가 핵보유국지위를 이용한 경제지원을  얻어내어 강성대국의 꿈을 이루겠다는 것이다.

중국은 국가차원에서는 공식적으로는 북한의 핵개발을 반대하지만 당 차원에서는 당분간 어느 시점까지는 북의 핵 활동을 묵인하면서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앞세운 공갈외교로 한국을 비롯한 서방측의 양보와 경협을 얻어내도록 북한을 지원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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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시점에서 미국의 힘이 경제적으로나 국제정치차원에서 약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이 취하는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한국의 외교와 안보에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오늘의 중국을 국제사회에서 큰 책임을 감당할 G2로 대접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아직은 대국(大國)도 소국(小國)도 아닌 중국(中国)으로 대접해야 할 것인지를 놓고 심각히 고민하지 않을 수없다.

필자는 중국이 북핵을 용인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중국의 앞날에 양호유환(养虎遗患)이 될 것으로 본다. 우리는 오늘의 중국이 앞으로 G2로서의 큰 행보와 역할이 있기를 기대한다. 그것은 평화와 안보를 위한 국제 레짐(International Regime)의 활성화에 중국의 기여가 클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중국이 자국의 영향력을 행사, 북한의 비핵화와 개혁개방을 이루어낸다면 동북아시아에서 긴장요인을 줄이고 북한주민들의 아사(餓死)나 탈북사태를 예방할 수 있다. 아울러 우리 민족이 오매불망 바라는 한반도의 평화통일 여건조성에도 크게 공헌할 것이다. 세계평화와 한반도의 통일에 보탬이 되는 중국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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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중국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글은 2010년10월 26일 오후 19시 서울 팔레스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숭실대학교 중소기업대학원 창립 27주년 기념식에서 한중문화협회 이영일 총재가 행한 강의노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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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중국의 두 얼굴

  가. 두렵고 우려스러운 모습

 중국은 자기 나라의 국익, 특히 중국정부가 핵심적 이익이라고 주장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항상 일전불사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개혁개방의 초기에는 등소평의 지시에 따라 韜光養晦의 원칙에 따라 강경대응을 자제했으나 GDP총량이 미국에 버금가는 수준에 도달한 후부터, 특히 미국 발 금융위기이후 중국경제가 세계 제1의 성장세를 과시하면서부터는 韜光養晦 아닌 패권국가적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東支那해에서의 일본과의 영토분쟁에서 보이는 중국의 태도는 패권추구 국가의 모습에 틀림없다.

 한국도 2000년 중국과의 마늘분쟁을 일으켰다가 중국의 강경한 대응으로 긴급수입제한조치를 취했다가 이를 철회했다. 당시 한국은 마늘 수입을 898만 달러(1999년 기준)정도를 제한했는데 이에 비해 중국은 휴대폰과 폴리에틸렌의 대중국 수출액은 각각 4,140만 달러, 4억7,130만 달러로 총 5억1,300만 달러의 수입제한조치를 부과했다. 당시는 중국의 WTO가입전이기 때문에 呼訴無處였다. 지금도 강대국이 위반하는 무역규칙 위반은 사실상 국제정치에서 실효가 없기는 매 한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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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기회의 땅

 중국은 개혁개방이후 지난 30년 동안 고도성장을 유지해왔고 미국 발 금융위기이후에도 가장 빠른 회복세를 보이면서 마침내 일본을 재끼고 세계랭킹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동시에 구매력도 나날이 향상되고 있다. 10,000달러 이상의 개인 소득을 가진 인구가 전체인구의 15%대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통계는 불확실)

수출입국을 기조로 하는 한국을 위해서는 중국이야말로 기회의 땅이다. 현재도 매일 1억 달러 가량의 흑자를 내고 있다. 흑자를 낸 만큼 중국경제에 대한 한국의 의존도도 높아지지만 그것 없이는 금융위기이후 한국의 위기탈출이 힘들었을 것이다.

 앞으로도 중국은 우리의 생존에 필요한 시장이다. 지금은 고구려의 옛 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 옛 땅 보다 더 넓은 시장이 우리에게 필요함을 생각할 때 중국 같은 세계의 시장(과거에는 공장)을 咫尺에 두고 있다는 점은 한국경제의 축복이다.

 2. 중국의 인근국가정책을 살펴보자

 가. 국경관념

 중국은 國境을 內境과 外境으로 구분하는 태도를 역사적으로 지녀왔다. 내경 이라함은 현재 우리가 국제법상으로 말하는 국경을 말한다. 그러나 외경은 역사적으로 중국에 조공을 바쳤거나 왕위획득이나 계승 시 중국황제의 冊封절차를 밟았던 국가들의 영토를 말한다. 베트남, 미얀마, 조선, 몽고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들 외경국가에 대해서는 말로는 주권평등이라지만 내심에서는 자기들이 우위에 선다는 우월의식을 부지불식간에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 대중국외교와 거래상의 어려움이 있다.

 

베트남은 전쟁을 통해 주권평등을 확보했고 한국은 한미방위동맹과 그간의 경제발전으로 독자성을 인정받고 있지만 중국인들의 내면에는 아직도 우월의식이 깊이 깔려있고 그것이 경제력이 강화되면서부터 나날이 밖으로 표출되어 나오고 있다. 북한을 중국이 보호하고 나서는 이면에는 외경을 보호한다는 관념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나. 외자유치정책

 중국이 한국과 다른 점은 외국인의 직접투자를 유치하는데 성공한 점이다. 한국은 제1차부터 3차에 걸치는 경제개발5개년계획과정에서 외자를 국가채무보증으로 유치했지만 중국은 FTI, 즉 정부 채무보증 없이 외자를 직접유치하고 토지와 노동력을 제공하는 합작방식을 취했다. 등소평은 이 전략이 三國志의 赤壁大戰에서 諸葛孔明이 지푸라기를 가득 채운 배를 밤중에 曹操진영으로 몰고 들어가 그 진영에서 쏘아대는 화살 10만개를 빼오는 이른바 草船借箭에 비유된다고 말했다.

 중국은 남의 돈으로 경제개발을 추진, 성장 동력을 갖춘 후부터는 외자도입조건을 갈수록 까다롭게 하면서 기술도입을 보장하는 외자도입정책을 내밀고 있다. 이제 세계 각국은 중국시장을 잃지 않기 위해서 자본제공은 물론이거니와 기술까지 제공하면서 중국경제에 자신들의 미래를 내맡기는 상황이 되었다.
 
 레닌이 자본가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자기들의 목에 달 밧줄까지 수출할 것이라고 말한 명언을 연상시킨다.

이제 중국은 미국이나 WTO나 선진국들이 만든 무역규칙, 외교규칙을 따르는 국가가 아니라 스스로 규칙을 제정하는(Rule Maker) 지경에 이르렀다.

한 중국 학자는 중국이 요즘들어 오만해졌다는 평에 대해 중국을 중국의 국격에 맞게 대우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오마한 중국이 아니지만 중국을 국격이하로 보는 사람들의 눈에만 오만하게 볼일 뿐이라고 말했다. 중국의 국격을 재는 기준은 중국인들 자신이기 때문에 이 말이 갖는 함의를 우리는 잘 촌탁해야 할 것이다. 

다. 외자 유치하는 자와 뺏는 자

 중국의 지방자치단체는 한국과는 달리 상당한 수준의 자치역량을 인정받고 있다. 중국 자치단체는 4개 직할시, 5개 자치구, 23개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통틀어 말하면 중국경제규모는 한국경제규모 정도의 경제덩어리가 32개 뭉쳐있다고 보아 틀림없다.

이들 자치단체 장들은 경쟁적으로 외자를 유치하는데 앞장선다. 省내의 市級 단체장들이 외자를 유치하더라도 省長이 직접 나가서 환영해주고 만찬도 베풀어 주면서 외자유치를 성원한다.

 외자유치협상 기간 중에는 투자자를 최고의 국빈으로 대접하지만 일단 투자협정이 체결되고 나면 그 투자자는 중국의 평범한 기업가수준으로 위치가 격하된다. 혹자는 하느님에서 사람으로 내려올 만큼 대우가 갑자기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외자기업가에게 중국의 경제법, 세법 등의 요구를 충족시키도록 압력을 가하고 여기에 불응하거나 요구충족에 미흡하면 결국 기업을 포기하고 나가게 만든다. 외자를 유치하는 단체장과 투자된 외자기업체의 약점을 적출하여 내쫓는 단체장이 있다 이들은 A지역에서는 유치자요 B지역에서는 외자기업체를 중국에서 포기하고 나가도록 압력을 가하는 자의 역할을 한다.

중국에는 단체장을 선거로 뽑지 않는다. 중앙당이 부여한 목표달성여부가 승진과 전보와 퇴진의 기준이 되는 국가이다. 촌장만은 선출하고 국가주석은 150여명가량의 정치국원, 당 원로, 중앙위원회 일부, 고위지방자치단체장 등 최고당직자들이 베이다이허(北戴河)에 모여서 만장일치 투표로 선출한다.

 미국의 존 나이스 비트는 그가 쓴 "메가트랜드 차이나"에서 이를 垂直的 民主主義라고 한다. 나는 수직적 민주주의가 무슨 뜻인지 모른다. 그러나 나이스비트의 견해는 현 중국지도부를 향한 최대의 찬사일 것이다.어쩌면 한국인들도 나이스비트와 같은 찬사를 쓸줄 알아야 할 것이다.

 중국지방자치단체의 간부들은 목표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한국 중소기업들도 중국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충분히 갖지 못한 상태에서 노임이 싼 것만 보고 덥석 투자했다가 전 재산을 날리고 심지어는 맨몸으로 중국을 빠져 나오는 사람들도  적잖다.

 이들은 애당초 중국에 투자할 자격이 없는 기업이었다. 중국에 투자했다가 그나마 자기 밑천을 송두리채 날리는 어리석음은 누구탓도 아닌 자기 탓이다. 百究一投(백번 연구한 후에 한 푼이라도 투자하라)가 필요한 나라이다.

 특히 中國語를 모르면 중국투자를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중간에 朝鮮族 通譯을 앞세우고 사업하면 성공할 확률이 너무 낮다. 자기가 중국어를 하거나 자기 한국인 직원이 사업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조건에서만 투자를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3. 중국정치의 금후의 전망

 요즈음 원자바오 총리의 중국민주화발언으로 중국정치에 변화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이 없지않다. 그러나  원자바오 총리의 발언은 多黨制나 삼권분립같은 西方式 의미의 대의정치를 향한 개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당직이나 공직임명에 있어서 투명성을 높이는 문제, 파벌간의 안배 위주 인사의 개선 등 국가충원제도의 결함이나 공평성확대에 역점이 두어질 것 같고 나아가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입법기능을 강화하고 법치의 강화에 역점을 두는 개혁이 아닐까 생각된다.

 2012년 중국에서는 공산당 18차 당대회를 통하여 리더십 교체가 행해질 것이다. 현지도부가 대거 현직에서 물러나면서 새로운 지도부의모습은 현재와 다를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브르킹스연구소 중국문제연구소 李成주임은 시진핑(習近平)으로 대표되는 소위 태자당 그룹과 리커창(李克强)으로 대표되는 퇀파이(團派)간의 연립정부가 출현할 것으로 예견된다.

특히 시진핑 그룹에는 해외유학파, 고급 관료, 성공한 사업가(新紅資), 군부가 중심축을 이루는 반면 리커창 파에는 지방당의 간부들, 전국인민대표대의원, 소상인, 공산주의 청년단 출신의 후진타오 직계파 당료들이 중심이 되어 사실상 연립정부(Coalition)가 출현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 시기 중국은 일당독재이기 때문에 일본자민당처럼  당내 파벌들 간의 협력과 견제로 국정을 운영하는 수준까지는 가지않더라도 통치의 양상이나 운영형태상 변화가 예상되며 대북정책도 현재와 같은 보조일치가 힘들어 질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경제정책도 현실화되며 해외파들이 정책결정의 요직을 장악하면서 중국의 대내외정책이 현재보다 훨씬 합리화될 것이다.

 앞으로 통일안보를 위해서는 물론이거니와 한국의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도 한중협력은 한미협력에 못지않게 중요한다. 중국을 좀 더 깊이 연구하고 한중관계를 발전시킬 지혜를 발현하는 것이 우리들과 우리 자손을 위해 매우 중요한 과제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4. 중국을 우리의 안전한 시장으로 만들려면

 한중관계를 개성발전시키는 방도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에 유학와 있는 8만4000명의 중국유학생을 친한파 내지 지한파로 만드는 것이다. 또 한구에 근로자로 나와 일하는 40만 노동자들에게 한국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노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대학들이 지방의 경우 중국유학생을 정원미달을 채우는 대상으로, 수도권대학들의 경우 과외TO로 받아들여 수입을 늘리는 대상으로 삼는다면 올바를 유학정책이 아니다. 이들의 한국어 수준을 수시 점검하여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수준까지 끌어 올리면서 한국에 유학 왔기 때문에 자기 인생의 새 지평이 열리게 되었다고 자부할 수 있도록 챙기는 배려가 필요하다.

노동자들에게도 사랑과 인정을 베풀어 다른 나라아닌 한국에서 노동했기 때문에 이만큼 가치와 보람을 창조하게 되었다고 자부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잘 관리된 유학생들과 노동자들이 귀국하게 되면 중국의 전 지역은 한국을 위한 시장으로 변하는 기반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대학들과 기업들이 지금까지 옳은 중구유학생정책을 펴왔는가, 중국노동자들을 인간적으로 관리해 왔는가를 반성해야 할 때이다.

오늘 숭실대학교 중소기업대학원 선후배들이 모인 자리에서 행한 제 짧은 특강이 중국을 우리의 친구로 만들고, 안전한 시장으로 바꾸어 나가는 일에 보탬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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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악가 조상현 장로님을 영별하면서

 
                                                        이 영 일  (전 국회문교공보위원장)

 
우리들이 사랑하는 조상현 장로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셨다. 오랜 투병 끝에 지난 10월 28일 병고와 근심이 없는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나는 중국출장에서 돌아온 다음날인 오늘 아침(11월1일) 조상현 장로님을 영별하는 발인예배에 참석했다. 그분의 삶의 족적을 살피고 회상하면서 그분의 명복을 비는 조용하고 엄숙한 영별식이 박종화 목사님의 사회와 말씀으로 진행되었다. 고인이 남긴 노래 ‘국화꽃 옆에서’(서정주 시)를 녹음으로 들으면서 그 분의 마음속에 항상 간직되었던 그리움의 실체를 접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분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필연의 운명이 돌연 싫어진다.

 
나는 1958년부터 경동교회에 출석하여 오늘까지 섬기고 있다. 돗수 높은 안경 너머로 항상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성가대들 지휘하던 조 장로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러나 나는 장로님과 교회생활에서는 깊은 관계를 맺지 못했다. 나는 12대 국회에서 국회의원으로 그분을 가까이에서 만나게 되었고 또 마침 국회문교공보위원장을 맡으면서 함께 국정을 논의하던 시절에 자주 접할 수 있었다.

 
당시는 국회가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정쟁의 한 가운데서 매일 같이 여야 간에 갈등과 격돌이 끊이지 않는 시절이었다. 노태우 대표의 6.29선언이 발표되기 전후의 시기였기 때문에 국정은 끝없이 표류했고 학원안정법, 언론기본법, 방송법 등의 처리문제로 여야가 파국을 향해 달리는 분위기였다. 직업정치인이 아니고 예술계를 대표해서 직능대표로 국회에 영입된 점잖은 조상현 의원 같은 분에게는 참으로 감당하기 힘든 정치 상황이었다.

 
나는 상임위원장으로서 법안의 강행처리도 불사해야 하는 어려운 처지에 있었고 이때마다 조상현의원님과 상황을 놓고 대화하면서 조언을 구했다. 모든 문제를 어렵게 풀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개탄하면서도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게 여당의 입장에서 상황을 당당히 처리하자고 격려의 말씀을 주셨다. 다행히 6.29선언으로 상임위원회에서의 강경대치는 끝났고 그 후는 민주화의 도도한 물결 속에서 교육 언론 예술 문화 분야에서도 민주화를 위한 개혁입법이 다수 처리되었다.

 
조 장로님은 그에게 주워진 직능대표로서의 역할을 의회토론과정에서도 잘 수행하셨지만 당대표를 만나거나 당 정책팀과의 대화와 설득을 통해서도 예술 문화사업의 발전과 진흥을 위해 많은 의견을 제시하고 조언하는데 앞장섰다. 당시 군 출신들이 결정의 주요 부서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들이 문외한인 분야인 문화예술, 특히 음악분야에 관해서는 조 장로님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였다. 연설하지 않고 조용히 설득하고 젊은 친구들의 오만한 자세를 잘 감내하면서 성실하게 일을 추진하는 자세는 누구에게나 귀감이 될 것이다.

 
오늘 발인예배에서 작곡가 김형주 선생님은 조사에서 조상현 장로님의 수고와 기획으로 애국가의 작곡자인 안익태 선생의 유해를 스페인 땅에서 국립묘지로 이전했던 일, 광복절 기념음악제를 대한민국음악제로 발전시켜 음악을 통한 국민통합과 국위선양에 기여한 일 들을 회상하면서 그 분이야말로 우리 음악계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분이었다고 울먹였다. 특히 이날 김형주 선생님의 조사가운데 조 장로님이 시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에서 80대의 노구를 이끌고 ‘겨울 나그네’ 전곡을 암송하는 독창회를 가짐으로써 성악인으로서 자기의 아이덴티티를 끝까지 살리셨다는 말씀은 참가자 모두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다.

 
이제 조 장로님은 우리 곁을 떠나셨다. 그러나 그분이 가신 곳은 우리가 믿는 천국이다. 육체적인 고통이나 병마가 없고 인격적인 아픔이나 갈등이 없는 하늘나라로 부름을 받으신 것이다. 그 분의 명복을 빌면서 그의 부인과 자녀들에게 하늘로부터의 위로와 은총이 넘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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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 지도자 시진핑이 피할 수 없는 숙제는 인권 민주화

2010.10.21 중앙일보

‘동아시아 전략가’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에게 중국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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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 명예회장인 박태준(83) 전 총리의 세종로 파이낸스 빌딩 사무실엔 대형 세계지도가 걸려 있다. 그는 지도를 보면서 “한국은 중국 턱밑의 목젖과 같고, 일본 옆구리의 단도와 같다”고 말하곤 했다.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가 중국과 일본에 급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활달한 정신에서 반도적 숙명론은 찾아볼 수 없다. 박 전 총리는 1992년 이래 중국을 집중적으로 탐구해 왔다. 덩샤오핑(登小平)의 초청을 받아 ‘개발하기 전 서울의 강남’ 같던 허허벌판, 상하이(上海) 푸둥(浦東)지역을 시찰한 게 그가 중국을 탐구한 계기였다고 한다. 그전부터 박 전 총리는 중국 정부로부터 구멍가게 수준인 제철산업을 포스코처첨 현대화하는 데 협력해 달라는 간절한 요청을 받았다.

박 전 총리는 ‘세계의 철강왕’일 뿐 아니라 중국의 권력자들을 직간접적으로 꾸준히 접촉하고 관리해 온 ‘동아시아의 전략가’다. 기자는 12일부터 17일까지 난징(南京)~장쑤(江蘇)성 장자강(張家港)시~상하이를 방문한 박 전 총리를 동행 취재했다.

동아시아의 전략가와 함께 중국의 변모를 관찰하면서 이 거대한 나라를 한국이 어떻게 다뤄야 할 것인가를 탐색하기 위해서였다. 5박6일간 10차례에 걸쳐 15시간 대화할 기회를 가졌다. 그는 마침 며칠 뒤 중공당 중앙군사위 부주석에 선출된 시진핑(習近平·57)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 오랜만에 본 중국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14일 장쑤성 포스코스테인리스 일관제철소 현장을 방문한 박태준 전 총리(왼쪽). 옆은 전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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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년부터 18년간 놀라울 정도로 변했어요. 놀라지 않고, 그런가 하면 둔감한 사람이지. 어느 것도 저절로 되는 건 없어요. 1차적으로 모택동(毛澤東 ※박 전 총리는 중국인의 이름을 시종일관 한자식으로 발음했다. 이하 그의 발음대로 적음)의 혁명이 완전히 성공했고, 주은래(周恩來)와 등소평으로 내려오면서 전체주의로 흐르지 않고 시장경제로 간 것 아닌가. 단순히 공산혁명이 아니야. 애국심이지.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는 마음이 없었다면 그런 변화는 있을 수 없어요.” 

- 현재 중국 리더들의 자질과 수준은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내가 가장 주목하는 건 습근평(시진핑)이야. 덩치가 좀 크데. 중국의 지도자들은 등소평이 일찍이 중국을 되돌이킬 수 없는 근대화로 나아가게 하겠다는 계획 아래 잘 준비시켰어. 강택민(江澤民), 호금도(胡錦濤) 이런 식으로.” 

- 덩샤오핑이 시진핑도 미리 지도자로 준비시켰을까요. “나는 그렇다고 보고 있어요. 그 이후는 몰라도 습근평까진 근대화 지도자의 줄을 세워놓았다고 봐.” 

- 그렇다면 상당히 안정적이고 예측가능한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중국 지도층 인사들은 한국 근대화를 포스코가 주도했다고 생각해 많이들 배우러 왔어. 포항·광양·제주도 같은 데를 다녀갔어. 등소평이 근대화 지도자들을 키웠지.” 

- 키신저 박사가 지난 여름 한국에 와서 ‘국가 지도자들이 국민에게 더 이상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 데 세계 민주주의의 위기가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만. “희생을 요구하면 표 떨어지니까. 세계 민주주의의 한계, 맞아요. 공산주의라 그렇긴 하겠지만 중국의 지도자들은 표를 의식하지 않지요. 포퓰리즘으로 흐르지 않지. 그런 점에서 안정적이고 수준 높은 리더십이 유지되고 있다고 볼 수 있어.” 

- 그러면 한국의 리더십은 어떻습니까. “다른 분들은 얘기하기 그렇고.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에게 희생을 요구했고, 자기가 먼저 희생을 했어. 나도 포항·광양에서 새벽 5시엔 일어나 현장을 돌았지. 국민들은 지도자가 먼저 희생하면 대부분 따릅니다.” 덩샤오핑이 박 전 총리를 특별히 주목한 건 78년 신일본제철의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회장을 통해서였다고 한다. 덩샤오핑이 중국의 개방 모델을 배우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을 때 둘이 나눈 대화의 한 토막. 

▶덩샤오핑=중국도 한국의 포항제철 같은 현대화된 일관 제철소를 만들고 싶다. ▶이나야마=중국엔 박태준 같은 사람이 없어서 어려울 것이다. ▶덩샤오핑=무슨 소리냐. 중국 인구가 10억이나 된다. ▶이나야마=10억이든 15억이든 없는 건 없는 거다. ▶덩샤오핑=그럼 박태준을 수입하면 될 것 아니냐. 

이 대화록은 이나야마 회장이 당시 기록을 포스코 쪽에 전달함으로써 알려졌다. 중국 정부는 이후 포스코에 사람들을 보내 제철산업을 벤치마킹했고, 이런 신뢰가 쌓여 92년 박 전 총리를 상하이로 초청해 본격적인 현대화를 요청한 것이다. 

올 들어 중국을 ‘불편한 진실’로 느끼는 한국인이 많아졌다. 천안함 사건과 북한의 3대 세습에 대한 중국 정부의 태도 때문에 특히 그러했다. 그렇다고 한국의 최대 교역국이 된 중국과 척지고 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중국을 대하는 방법을 물었다. 

- 중국이 커져서 세계가 당황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돌고 움직이는 거요. 모택동의 공산정권이 오래 안 갈 거라고 그랬는데 그 예상이 틀렸어. 중국이란 방대한 힘에 일본은 힘 못 쓰고, 미국은 어쩔 줄 모르고 있잖아. 동아시아는 마치 중국의 1극체제처럼 흘러가고 있고…. 북한 김정일이 아들에게 물려주면서 왜 중국에 갔겠나. 김정일이 죽으면 북한이 바로 붕괴할 것이란 시각도 있지만, 난 안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봐요. 중국이 보호하면 북한은 그대로 갈 수 있는 거요. 동독의 붕괴와는 상황이 달라.” 

- 그러면 한국은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안보적으로 미국과 동맹관계를 놓치면 안 돼요. 중국 사람과는 더 많이 더 자주 만나야 해. 그들을 아주 잘 알아야 돼. 지금 중국 지도부를 아는 사람들이 너무 없어. 요샌 중국 사람들 만나기도 힘듭니다. 하도 커지니까. 겸손하게 중국어를 배워야 돼. 그들의 마음을 훔쳐야 돼요. 그래야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어. 우리가 1등 국가가 된 줄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까딱 잘 못하다간 비행기 추락하듯 땅에 떨어지고 맙니다.” 

- 노벨 평화상 수상 문제로 중국의 인권 문제가 부각되고 있습니다. “인권·민주화는 산업화되는 나라가 피할 수 없는 도전이야. 그건 중국의 새로운 책임자가 될 습근평이 풀어야 할 문제일 거요.” 포스코스테인리스 일관제철소가 있는 장쑤성 장자강시에서 박 전 총리는 국빈급 대우를 받았다. 그의 승용차는 무장경찰차가 선도했으며 왕복 전 차선에서 교통이 통제됐다. 그도 그럴 것이 100만 명이 사는 장자강시의 포스코스테인리스가 지난해 낸 세금은 5000만 달러(600억원)였고, 호황이던 2007년엔 3억2000만 달러(3800억원)를 기록했다.

상하이=전영기 중앙 SUNDAY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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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10일 경동교회에서 박종화목사님이 설교하신 말씀중에 나오는 이 귀절은 통일꾼으로 살아가려는 나의 마음에 너무 뜨거운 감동을 주어  여기에 올립니다.  

前略.....훌륭한 음악가 베토벤의 이야기입니다. 아시는 대로 베토벤이 57세를 살았는데 28살에 청각 장애를 얻었으니 인생의 절반은 잘 들을 수 있었지만 그 이후에 정작 음악활동을 할 때는 청각 장애를 얻어서 귀머거리로 지냈습니다. 귀머거리가 되고 난 뒤 4년 후에 형제들에게 이런 유서를 썼습니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혹시 청각장애가 나을 수도 있다는 희망 속에 살았지만 속아서 살았습니다. 낫지 않는 군요. 들을 수 없는 운명, 감각이 없는 운명 속에 음악의 작곡가가 된다는 것이 부조리입니다. 잠시 후면 내가 인생을 마감할 겁니다. 형님들. 불운한 존재 용서하세요.”

그리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글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내게 마지막 기쁨을 누릴 수 있는 한 순간만 허락해 주십시오. 너무도 오랫동안 음악을 듣는 기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한순간만 허락해 주십시오.” 이것이 유서인데 유서대로 되지 않고 불후의 명곡들을 작곡했습니다. 어느 날 실러(Friedrich Schiller)라는 시인의 책을 받아보았는데 그 책 이름이 독일말로 , 기쁨에 드리는 헌사, 환희의 송가, 이런 뜻입니다.

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신들의 광체를 발하는 기쁨이여, 모든 생명체를 삼키고 마시니 그대의 태양이 날아가듯 기쁨이 날아가리라. 온 인류여 기쁨 속으로 들어가 하나가 되자. 기쁨이여 오라.” 이 시가 너무 아름다워서 56세 때, 죽기 바로 1년 전에 베토벤이 작곡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기쁨에 드리는 찬가, 이 곡이 56세 때, 비엔나의 쾨른텐 극장에서 공연이 되었는데 사람들이 일어나서 박수를 쳤습니다. 본인은 아마 광경만 보고 듣지는 못했을 겁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베토벤 심포니 9번의 마지막 곡입니다. 저는 이 사실 하나를 보면서 ‘죽고 싶다. 생명이 끊어질 것이다. 정말 죽고 싶다.’ 라고 생각했던 베토벤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작곡가가 들을 수 없다는 것은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슬픔이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죽지 않고 실러를 통해서 곡을 건졌는데 그 뒤 160년이 지났습니다.

1989년 12월 24일 밤, 한국시간으로는 12월 25일 저녁 시간입니다. 동독과 서독을 막았던 장벽이 무너지고 통일의 기쁨이 다가옵니다. 브란덴부르크 성문 광장 앞에서 수많은 관중이 모여 있습니다. 그 때 모든 청중이 약속이나 한 듯이 기쁨에 드리는 송가, 실러의 가사, 베토벤의 곡을 동-서독의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서 불렀습니다. 지휘도 아름다웠고 노래도 아름다웠는데 이 기쁨이라는 단어를 통일로, 2절에서는 자유로 바꿔서 불렀습니다.

생방송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저는 ‘베토벤이 청각장애 때문에 자살했던들, 실러의 시가 없었던들, 분노 속에 미안하다고 먼저 갔던들, 아마 베토벤의 심포니 9번도 없었겠지만 160년 이후의 동서독 통일 때의 환희와 기쁨은 내가 누리지 못했겠구나.’ 그 때 느낌입니다.

後略.....우리 민족에게도 통일은 올 것입니다. 통일을 기다린지 65년이 지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프리드리히 쉴러가 작사하고  베토벤이 작곡한 환희의 노래가 독일민족만의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압니다. 그날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찬송하고 작시하고 작곡하는 삶을 키워나가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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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기고/이영일]아프간 땅에서 양귀비를 밀어낸 한국 콩
   


올해 10월은 한국의 콩이 아프가니스탄 땅에서 새로운 식량으로, 영양소로 각광 받는 역사적인 달이 될 것이다. 당초 콩은 아프가니스탄의 식량역사에 없던 곡물이다. 그러나 7년 전 미국에서 영양학을 전공한 권순영 박사가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해 수많은 아동과 산모가 영양 결핍으로 신음하며 죽어가는 모습을 목격하고 아프가니스탄을 돕는 방법으로 콩 재배를 생각한 것이 아프가니스탄에 콩이 알려진 시초다.

그는 오랜 전쟁으로 헐벗고 굶주린 아프가니스탄 사람에게 시급히 필요한 것은 단백질 공급이며 이를 해결하려면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한국의 콩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편 원료인 양귀비가 잘 자라는 아프가니스탄 땅에서도 한국 콩이 자랄 수 있는지를 실험했다. 콩은 뜻밖에도 잘 자랐다.

실험 결과에 자신을 얻은 그는 한국 콩을 2005년부터 아프가니스탄의 일부 지역에 심으면서 현지에서 생산된 콩으로 두유를 만들어 아동과 임산부에게 먹이고 콩가루를 아프간의 주식(主食)인 난(Naan·빵의 일종)에 섞어 콩 난을 제조해 급식했다. 영양개선의 효과는 놀라웠다. 그는 이 성과를 토대로 미국에 영양과 교육 국제기구(NEI)라는 비정부기구(NGO)를 설립해 아프가니스탄을 돕는 콩 사업에 헌신하기로 뜻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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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식을 접한 한국 CBMC의 ‘세계로’지회(회장 신치호)는 미국 NEI의 한국지부를 결성한 후 이 기구를 ‘희망의 콩’ 운동본부로 개칭했다. 이어 외교통상부 등록단체인 한국·아프가니스탄친선협회와 조직을 통합한 후 협력해 콩 씨앗 보내기, 콩 가공사업, 멸균두유공장 설치운동에 착수했다. 두유 생산은 현지의 열악한 냉장시설 때문에 멸균시설을 필히 갖추어야 한다. 사업에 소요되는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젊은 지성인들이 네이버에 ‘해피로그(happylog)’라는 블로그를 만들어 범국민적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

현재 ‘희망의 콩’ 사업본부는 2007년에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 한국형 콩 방앗간을 설립하고 콩 씨앗을 구입해 현지로 보내는 한편 콩 가공사업으로 두유 가공공장 두 곳을 설립했다. 이제껏 양귀비 재배에만 주력해 온 현지 농민도 점차 콩 농사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실감해 콩 재배와 가공사업을 자신의 소득증대사업으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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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간 사람들과 오찬나누는 권순영박사)

콩 사업에 회의적이었던 아프가니스탄 정부도 몇 차례의 시험재배와 영양 상태 개선의 성과를 지켜본 후 작년 말에야 비로소 전국에 걸친 콩 재배를 승인했다. 이 운동의 진행을 지켜본 한국국제협력단(KOICA)과 일본 NGO도 콩 사업에 동참하게 되었다.

처음 2, 3개 주(州)에서 재배하던 콩이 이제는 아프간 34개 주 전역에 보급되어 금년에 110t을 파종해 이달 중순 4000t 정도를 수확하게 된다. 지금까지 아편 재배로 삶을 이어왔던 아프가니스탄도 앞으로는 콩을 생산하는 축복의 땅으로 변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아프가니스탄판(版) 추수감사절을 맞는 셈이다.

우리는 6·25전쟁 후 복구 과정에서 세계 각국과 NGO에 커다란 사랑의 빚을 졌다. 이제 우리도 어렵고 힘든 나라의 재건 지원을 통해 사랑의 빚을 갚아야 한다. 현재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된 국군은 남부 파르완 지역에서 재건사업과 경비업무에 주력하고 있다. 현시점에서 아프가니스탄 문제가 올바르게 해결되려면 군사작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아프가니스탄 사람의 마음속에 사랑의 꽃을 심는 일이다. 우리의 콩 사업이 아프가니스탄을 향한 한국의 사랑으로 꽃피기를 기대한다.

이영일 한국·아프가니스탄 친선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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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헌정지 2010년 11월호(pp47-49)일자에 개제되었고 국제문제2010년 10월호에 전재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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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국호가 金氏朝鮮王國으로 바뀌고 있다.

북한의 정식국호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이 조만간 김씨조선왕국(Kim's Kingdom of Chosun or Kim's Dynasty of Chosun)으로 바뀔 것 같다. 공화제에서 세습군주제로 정권의 속성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급작스러운 사망 후 김정일이 대를 이은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후계자 훈련이 진행되었고 1980년대에는 사실상 북한의 통치를 김정일이 전담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정일의 급작스러운 건강악화와 더불어 28세의 아들 김정은에게 권력이 이양되는 3대 세습과정은 누구에게나 정권의 속성변경으로 보인다. 특히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나라들에서는 1인 독재의 장기화는 있었지만 父子와 孫子로 이어지는 3대 세습은 그 선례가 없기 때문이다. 당내에서의 민주적인 절차와 토론, 경우에 따라서는 격렬한 투쟁을 통해 후계자를 선출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 독재자가 자기의 의중 인물을 후계자로 지명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러한 지명이 성공하는 일은 드물었다. 미국의 정치학자 브르진스키(Brzezinski)가 후계자 지명을 ‘죽음의 키스’라고 비유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반대세력들이 뭉쳐서 지명된 자를 거세하거나 지명권을 행사한 자가 최종순간에 당초의 방침을 고치고 새로운 선택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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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8일 북한노동당 대표자대회에서는 세습후계자를 부각시켰을 뿐만 아니라 당규개정을 통해 북한인을 ‘김일성 민족’이라고 말하고 조선노동당을 ‘김일성 당’이라고 결정하였다. 신문에서 이 보도를 읽으면서 필자는 북한판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가 나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 북한 땅에서는 민주주의도, 인민도, 공화주의도 사라져버렸다. 북한의 국호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고 부를 모든 근거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습비판에만 관심을 모으는 것은 현실적으로 소모적이다. 북한의 새 정권을 맡은 지도자가 지금과는 달리 개혁개방과 비핵화를 통해 북한 동포들을 굶기지 않고 국제사회와 더불어 공생 공영하는 길을 모색하는데 앞장 설 지도자라면 굳이 세습된 지도자라고 해서 경원하거나 비판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우리도 직접선거로 지도자를 뽑았지만 항상 만족할만한 선택이 아닌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북한에서 진행되고 있는 세습의 정치과정은 전임자의 업적과 정책을 공정하게 비판하고 그 토대위에서 개혁개방의 길을 걸었던 중국의 현대화과정과는 너무나 닮지가 않았다. 중국에서는 “모택동 동지의 교시와 정책은 모두 옳다”는 양거빤스(兩個凡是)를 놓고 심각한 당내투쟁이 벌어졌다. 결국 실천에 의해 검증된 것만이 진리라는 결론을 당론으로 채택한 후 개혁개방의 길을 열었던 것이다.

오늘의 북한에서는 전임지도자들의 노선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나 비판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김일성의 교시와 정책, 김정일의 지도하에 이룩된 선군위업으로서의 핵과 미사일개발노선을 올바른 지도노선으로 강조하면서 혈통, 즉 김일성 자손의 혈통, 김일성 당의 혈통을 잇는 자를 후계자로 받드는 혈통세습제를 채택했다. 역사의 시계바늘이 북한 땅에서는 거꾸로 돌아가고 있음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에서의 혈통세습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안보에 대한 대비를 어느 때보다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지도자가 자기 리더십을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해, 주민들의 충성심을 테스트하기 위해 새로운 도발을 획책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대남 카드 외에는 북한의 김정은이 쓸 만한 카드는 별로 없다. 그러나 김정은의 대남기도에 과연 북한 주민들이 맹종, 호응할 것인가.

북한의 군부는 수령의 군대로서 지도부차원에서의 충성확보는 가능할지 모르나 가족들의 굶주림을 매일 같이 피부로 느끼는 북한군 사병이나 주민들이 통치능력이 전혀 검증되지 않은 김정은에게 맹종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북한판 흑묘백묘(黑猫白猫)운동을 펼쳐 북한주민을 기아로부터 해방시키는 조치를 적극 강구하지 않는 한 주민들의 충성심 확보는 갈수록 어려울 것이다.

국내외 일부 학자들 가운데는 세습보다 중요한 것이 정책이라면서 북한 안에 정책변화의 징후가 보인다고 기대감을 표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그런 변화가 중국의 관여를 통해서라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러나 노동당의 당규개정을 유심히 지켜보면 혈통세습에서 정책변화를 기대하기가 쉬울 것 같지 않다. 막연한 기대보다는 안보에 대한 철저한 자기 대비와 국론통일이 시급한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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