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사태로 본 중국의 대북정책

한중문화협회 총재 이  영  일


천안함 침몰사건이 북한 잠수정의 어뢰공격 때문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북한은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적 침략행위를 자행했고 정전협정을 명백히 위반했다. 피해자인 한국은 유엔안보리에 제소하거나 응분의 자위권을 발동할 명분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자위권의 행사는 주한미군사령관이 전시의 경우 한미양국대통령의 사전협의를 거쳐 행사하는 작전 지휘권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한미 간에 긴밀한 협의가 뒤따를 것이다.

현시점에서 한국이 취할 최선의 방도는 한국이 독자적으로 취할 수 있는 대북제재와 병행하여 한미 간의 협력을 통해 북측에 천안함 사건을 훨씬 능가할만한 아픔과 부담을 안겨주어 제2의 천안함 사건에의 유혹을 단호히 차단하는 조치를 강구하는 것이다. 동시에 북한의 침략책임을 묻기 위해 유엔안보리를 통한 제재를 추진해야 한다. 물론 유엔안보리를 통한 대북 제재는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실효성에 문제가 없진 않지만 유엔이 국제평화와 안전에 대한 도전을 묵과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의 후견국인 중국이 유엔안보리의 대북제재에 지난 2006년의 안보리 결의 1718호와 2009년의 1874호의 경우에서처럼 이번에도 동참 할 것인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상식적으로 말하면 북한의 천안함 공격은 한미연합방위체제에 대한 도발이었기 때문에 한미양국은 군사적으로 보복 조치할 수 있는 명분을 얻고 있다. 따라서 중국도 군사적 보복에서 비롯되는 동북아시아 정세의 악화를 원치 않는다면 유엔안보리를 통한 제재결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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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5월3일부터 4일간 중국공산당의 호출로 북경을 방문한 김정일과 후진타오 주석)
그러나 천암함 침몰 사건 이후 북한의 김정일은 5월 3일부터 4박5일간 중국을 비공식 방문, 당대당(黨對黨) 수준의 정상회담을 가진 바 있다. 흔히 김정일의 중국방문의 성격을 놓고 중국이 먼저 방문을 요구했다는 설과 북한 측이 내부경제사정을 풀기위해 방문을 희망했다는 설이 있지만 이번의 경우는 “국가대 국가” 외교 아닌 “당대당” 외교라는 중국특유의 외교방식으로 중공당이 당대외연락부를 통해 비공식으로 김정일을 초청한 것이다.

중국 측으로서는 그들이 수년 동안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통해 준비해 온 상해 엑스포 개막즉전에 뜻하지 않은 천안함 침몰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 남북한 간의 군사적 충돌로 비화하여 한반도정세가 악화된다면 상해엑스포는 치명상을 입게 될 것이다. 중국의 국익에 역행하는 사태의 전개를 막기 위해 중국의 후진타오 주석은 엑스포 개막식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서는 천암함 사건의 과학적 진상 구명을 요구했고 북한 측에 대해서는 김정일을 중국으로 불러 들여 사태의 더 이상의 악화를 방지하도록 단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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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하이엑스포2010개막식에 참석한 이대통령내외와 후주석 내외)
현시점에서 중국의 당면한 국가이익은 상해 엑스포의 성공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중국은 김정일을 급히 중국으로 불러들였다. 중국TV에 비친 김정일의 모습은 한마디로 환자의 몰골 그대로였다. 머리는 듬성듬성 빠져있고 왼쪽 다리는 절고 한쪽 팔도 자유롭지 못한 처지에서 정상외교에 나서기에는 너무 부적절했다. 그러나 중국은 상해엑스포 개막식에 북한을 대표해서 참석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제쳐두고 실력자 김정일을 바로 불러들인 것이다.

중국은 이러한 조치를 통해 상해 엑스포의 급한 불은 일단 꺼놓고 나머지는 외교를 통해 천안함 사건에 접근할 것이다. 북한 측은 천암함 사건과 자신들이 무관하다고 강변하지만 북한의 침략행위가 명백히 증거로서 밝혀진 이상 유엔안보리의 제재는 피할 수 없다. 중국도 천안함 사건을 한미양국의 자위권행사에 내맡기는 것 보다는 안보리 제재를 선택할 것이다. 안보리가 북한의 천안함 사태에 적절한 조치를 강구치 못함으로 해서 미7함대를 비롯한 주요전함들이 서해와 동해로 몰려들고 한국도 비상사태를 선언하여 한반도 긴장상태가 일촉즉발의 위기로 발전하는 것을 중국은 원치 않기 때문이다.

중국은 지금까지는 북한이 선군정치, 강성대국, 세습정치를 추구하면서 일으키는 의외의 사고에 대해서는 심지어 핵 실험까지도 중국의 국익에 직접적으로 위협이 되지 않는 한 겉으로는 유감스럽다고 하면서도 내심으로는 많은 경우에 한국과 미국을 상대로 중국의 영향력을 과시하는 카드로 이용해왔다.

그러나 천안함 사태는 상해 엑스포의 성공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직접적 위협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번에는 김정일을 곧 바로 불러들인 후 당대당 외교의 특색을 살려 극진히 예우를 하면서도 실질에서는 향후 북한이 제반문제에서 중국과의 사전소통을 강력히 요구하고 중국식 개혁개방을 본받으라는 내정간섭적 통고조치를 단행한 것이다.

중국은 커졌고 북한은 핵 놀음을 하면서도 왜소해졌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천안함 폭침사고에 대해서도 중국이 뒤를 잘 봐줄 것을 기대하면서 모든 수모를 감수하고 쓸쓸히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나 역사는 천안함의 비극에 대해 김정일에게 응분의 책임을 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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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영 저 <토비아>

 추천의 글 한국·아프가니스탄 친선협회 회장 이 영 일

이 글은 작가 김윤영 씨가 아프간의 산간빈촌에 살고 있는 아홉 살 난 토이바라는 소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30년에 걸친 외침과 내전으로 극도의 어려움 속에서 목숨을 이어가는 아프간 인들의 삶의 모습을 생생히 소묘(素描)한 것이다. 토이바는 작가 이상(李箱)이 그의 ‘날개’ 속에서 “도적의 도심마저 도적당할 만큼 가난한”이라는 표현이 그대로 적중하는 아프간의 산간벽촌에서 전쟁구호기관이 배급해주는 빵으로 가족들과 같이 매 끼니를 근근이 이어가는 착한 아프간 소녀이다.
 

이 소녀의 집에는 전쟁에서 한쪽 다리를 잃고 성질만 부리는 아버지, 다섯 번째 아이를 낳다가 산후처리 잘못으로 몸 저 누어 있는 어머니, 토이바보다 한 살 위의 언니와 세 동생이 함께 살면서 빵 배급을 받으면 먹고 없으면 굶으면서 살아간다. 산촌마을의 주변은 매 마른 사막지대로 물기도, 볼품도 없는 잡초들이 드문 드문 자라고 있고 별로 쓸모없어 보이는 자갈들이 이리저리 나딩굴어 발길에 체이는 박토를 연상시킨다.


이 풍경들은 오늘날 전쟁으로 이글어진 아프간 산간벽지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나는 2002년 7월호 신동아 지(誌)에 “수난의 땅 아프가니스탄을 다녀와서”라는 여행기를 발표했는데 그 때 목격했던 풍경들이 이 작품 속에 그대로 담겨있다.

내가 방문했던 지역들에서도 수많은 토이바들을 만났다. 맨발의 소녀가 코란을 좔좔 외면서 나의 손을 붙들고 신발을 사달라고 졸라댔는데 한 아이 아닌 수백 명의 토이바들을 그 자리에서 감당할 수 없어 손을 뿌리치고 돌아왔다. 지금도 내 마음 한 구석에는 그날의 일들이 아픈 빚으로 남아있다.

나의 아프간 방문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토이바들의 눈동자 속에 전혀 악의가 담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맑고 밝고 선한 눈빛이었고 아이들뿐만 아니라 부르카를 쓴 아줌마들이나 총을 지게처럼 메고 다니는 아프간 군인들의 눈 속에서도 악의를 느낄 수 없었다.

이들은 자기들을 도와주러 온 사람들을 고마운 마음으로 대해 주었다. 또 이슬람 문화의 영향이겠지만 신에의 경외심, 신에게 칭찬 받을 선행에의 의지가 토이바들에게 살아 있었다.

중국 심양이나 연길거리에서 간혹 만나게 될 때마다 섬뜩한 느낌을 주는 탈북 청소년들과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섬기는 신이 있는 사람들과 없는 사람들의 차이 같다.

토이바는 폭군으로 변한 아버지의 구박을 피해 외할머니 집으로 도망쳐 나와 새 삶을 얻지만 그것이 토이바 문제의 해결은 아니다.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한다.

전쟁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생명을 이어가는 아프간 인들을 향한 구호와 사랑의 손길이 이어져야 한다. 아프간 인들의 그 처절한 굶주림과 아픔에 시달리는 바로 그 현장에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우리들의 기도와 사랑의 손길을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작가 김윤영씨는 자기에게 주어진 가장 참담한 상황 속에서 착한 소녀 토이바를 발견했고 또 토이바를 통해 전쟁 속에 모든 것을 상실해버리고 신의 가호만 기다리는 아프간 인들의 아픔과 고난의 진실을 들추어냈다. 얽매여 있는 자신의 처지를 넘어서는 사랑이야기를 기록했다. 이것은 작가만의 간증이 아니다. 토이바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나누어야 할 사랑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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演劇 사나이 와타나베 감상소감

 

모처럼 볼만한 연극이었다.

시내 지하철 2호선 삼성역 8번 출구로 나와 100m쯤 직진한 후 강남소방서를 끼고 좌회전을 하면 백암아트홀이 시야에 들어온다. 지금 이 아트홀 공연장에서는 장항준 감독의 <사나이 와타나베> 이야기가 연극으로 상제되었다. 내가 감상한 5월 10일에는 TV탤런트 백인철이 와타나베 역을 맡고 정은철이 박만춘 역을 김C가 멀티맨을 맡아 열연했다. 극중 인물 3인이 역할을 분담하면서 1시간 40분간 흥미 있게 진행하는 신파성 멜로물이다.

 

스토리는 일본 시모노세끼에서 주먹세계를 흔들었던 조선인 와타나베가 나이가 든 후 자기의 야쿠자로서의 삶을 마음속 깊이 후회하면서 그러면서도 야쿠자로서의 자기 삶을 다소라도 미화해보기 위해 한국에서 예술 영화 만든답시고 번번이 실패해서 카드빚만 몽땅 떠안고 있는 영화감독 박만춘을 고용한 후 자기 삶의 대본을 쓸 감독과 인생황혼을 내다보는 와타나베가 재기 넘치는 유모어와 과장 섞인 칼춤 동작 등으로 이어가는 장면 장면들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장면을 내뱉는 작품이다. 대화 속에 깃든 유모어와 페이소스는 일품이었으며 경술국치 100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깔고 나라 없는 조선인의 아픔, 서러움이 결국 인간말종의 야쿠자의 길을 걷게 한다는 식민시대의 비극을 희극적으로 素描한 작품이었다.

 

주인공 야쿠자 와타나베는 자기 삶의 리얼리티를 그대로 작품화하려고 오디션을 통해 발굴한 와타나베 역의 젊은 배우를 죽이고 자기 자신이 스스로 각색, 개작, 자신을 영웅화한 후 자기가 주연을 맡는 작품의 영화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감독은 그 작품이 영화 아닌 쓰레기라는 평가를 내뱉고 와타나베를 떠나고 와타나베가 죽인 영화배우의 형이 동생 원수를 갚는다고 와타나베 자신을 암살한다. 불행하게 태어났다가 끝까지 불행한 최후를 마치면서 바다속이 인생의 종착역이고 자기가 사랑하는 어머님이 계신 곳이라면서 세상을 하직하는 것을 많은 여운을 남기면서 막이 나린다.

 

그의 삶과 죽음자체보다는 극 전체를 통하여 넘치는 해학과 재치문답이 일품이다. 시종 즐겁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으로서 극 처리가 현대적 기법으로서의 비디오를 요긴한 부위마다에 첨가함으로써 생동감을 배가시킨 점은 평가할만하다.

 

지난 4월 6일부터 오는 6월 6일까지 오후 3시, 7시에 공연하고 일요일에는 오후 6시에 1회 공연한다. 연극관중이 좌석을 그런대로 메우는 점은 한국연극의 장래를 밝게 전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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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핵안보정상회의 한국개최

이명박 대통령은 4월 12-13일 워싱턴 D.C.에서 개최된 '핵안보정상회의(Nuclear Security Summit)'에 참석하여, 2012년 핵안보정상회의 개최를 비롯하여 국제 핵안보 체제에 대한 우리의 기여와 역할 증대 계획을 발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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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안보정상회의(Nuclear Security Summit)는 국제안보에 대한 가장 심각한 위협중 하나로 평가되는 핵테러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개최된 회의로서, 47개국 정상(또는 정부대표) 및 유엔ㆍ국제원자력기구(IAEA)ㆍ유럽연합(EU) 등 대표적인 국제ㆍ지역기구 대표가 회합하여 핵물질 방호 강화 방안 및 핵안보 관련 국제협력 공고화 방안 등에 대해 논의한 최초의 회의로 그 의미가 큽니다.

우리나라는 금번 회의의 후속회의로 개최되는 2012년 제2차 핵안보정상회의를 개최할 예정인 바, 우리의 차기 회의 유치는 우리나라가 핵비확산조약(NPT) 등 비확산 규범을 성실히 준수하면서 민수용 원자력 이용을 활발히 추진해 온 모범국가라는 점과 한반도가 핵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 등이 고려된 것이라 평가됩니다. 또한 오바마 이니셔티브의 일환으로 시작된 동 회의를 우리나라에서 이어 개최하게 된 것은 한ㆍ미간 긴밀한 동맹관계 및 돈독한 신뢰ㆍ협력 관계를 반영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2012년 핵안보정상회의는 이번 워싱턴 정상회의를 통해 형성된 핵안보에 대한 국제적 관심과 의지를 구체적으로 점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로서는 북핵 문제 당사국으로서 핵안보정상회의를 한반도에서 개최함으로써 북핵문제 해결에 대한 국제사회의 의지를 결집하고 공고화시키는 효과도 거둘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 대통령은 차기 정상회의 개최 발표 외에도 제1세션 발언을 통해 ▲우리나라의 활발한 원자력 이용 현황(현재 원전 20기 운영중, 2030년까지 원전 19기 추가 건설 예정) 및 원자력 기술의 우수성을 소개하고 ▲우리나라의 핵안보 강화 노력(핵물질 방호를 총괄하는 전문 독립기관인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KINAC) 설립, 방사성물질의 추적과 감시, 방재 대응을 위한 종합관리시스템 구축 등)을 소개하는 한편,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공조(6자회담, 안보리 제재 이행 등) 노력을 평가하고 ▲국제 핵안보 체제에 대한 우리의 기여 및 역할 증대 계획(2011년 세계핵테러방지구상(GICNT) 총회 서울 개최, 국제 핵안보 교육ㆍ훈련센터 설립) 등을 발표하였습니다.

금번 워싱턴 핵안보정상회의는 참석 정상들간 논의를 반영한 정상성명(communique)을 채택하는 등 핵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 건설을 향한 국제사회의 의지를 결집하고 구체적인 대응방안을 모색하는 자리였다고 평가됩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금번 회의 참석은 평화적 원자력 이용 모범국으로서 우리나라의 면모를 적극 홍보하고, 핵안보 강화를 향한 우리의 기여와 역할 증대 계획을 발표함으로써 글로벌 리더로서의 우리의 입지를 강화함과 동시에, 2012년 차기 핵안보정상회의 유치를 통해 대한민국의 달라진 국제적 위상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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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4.19혁명 50주년을 맞이하여 미래정책연구소가 2010년 4월 14일 14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한 “ 4월 혁명과 이승만 대통령”을 주제를 한 세미나를 위해 준비된 이영일의 기조논문이다.

이글의 주요내용은 2010년 4월 14일 조선일보 A25면에 상세히 보도되었으며 4월16일 조선일보 데스크 칼럼에서도 인용되었습니다

      4.19세대가 본 이승만 전 대통령의 공과 과

                                    차 례

1. 들어가면서

2. 재론의 필요성

3. 이승만 대통령을 둘러싼 그간의 공과논쟁 검토

4.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 민주주의 문제

5. 글을 마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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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우열4번)과 김구(좌열4번)가 보스턴 마라톤 대회 승리후 가진 기념사진
1. 들어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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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이영일(우로 부터 세번째)의 주제발표

우리는 금년으로 4.19혁명 50주년을 맞는다. 벌써 반세기가 흐른 것이다. 이제 우리의 민주정치는 국민의 자유로운 선거에 의한 지도자 선택, 정부 선택이 일상화될 수준에 도달했다. 앞으로 정당정치가 한 단계만 더 발전하여 대화와 타협을 통해 국사(國事)를 해결하는 관행이 확립된다면 이 나라는 당당히 민주 선진국의 반열에 오를 것이다.

이러한 정치발전은 4.19혁명의 큰 업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는 4.19혁명의 성공과 동시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4.19 혁명에 뒤이은 군사쿠데타와 개발독재정권의 출현, 군사권위주의 정부의 지배와 같은 엄청난 어려움이 있었으나 4.19에 흘린 젊은이들의 순수한 정의의 피가 국민적 지지를 비축하고 있음(Reserve of support)으로 해서 군사 권위주의를 반대하는 끈질긴 젊은이들의 투쟁이 이어져왔고 이 투쟁들을 통해 오늘의 민주화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러한 성공을 위하여 역사의 제단에 자기 피를 뿌리고 산화(散華)한 영령들의 명복을 빌고 지금도 병상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부상자들과 유족 및 가족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필자는 금년 초에 미래정책연구소의 박범진 이사장으로부터 4.19혁명 50주년을 맞으면서 4.19세대의 입장에서 4.19혁명으로 권좌(權座)에서 축출된 이승만(李承晩)전 대통령의 공(功)과 과(過)를 새롭게 조명해 보는 것도 의의 있는 일로 생각된다면서 1960년 당시 대학 3학년에 재학 중 서울대의 4.19혁명에 참여했던 나 같은 경력을 가진 사람이 오늘의 시점을 기준으로 이승만의 공과를 다루는 발제의 글을 세미나에서 발표해 달라고 제의했다. 필자역시 나 아닌 누구에 의해서라도 이 문제는 한번 재음미 해 보아야 할 문제라는 나름대로의 소신에서 이 제의를 수락했다.

 

특히 금년은 4.19혁명 50주년으로 혁명성공의 희년(禧年)을 맞는 해이다. Bible은 50년을 희년(禧年)이라 부르면서 빚진 자의 부채를 탕감해주고 노예를 해방시켜 주고 갇힌 자를 풀어준다고 한다. 그것이 우리 역사에서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단일민족임을 자부하는 우리로서는 민족 내부에 쌓인 지나간 역사의 부채를 희년정신으로 처리해서 50년에 한번쯤은 민족의 화합과 단결을 도모하는 것이 보다 나은 미래를 열어가는 지혜가 될 수 있다는 견지에서 이승만의 문제를 새롭게 음미해야 할 것 같았다.

 

먼저 필자는 1960년 당시의 4.19세대가 오늘의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나름대로 회고해 보았다. 1960년 당시 20대였던 4.19세대들은 이제 인생 나이 70대에 이르렀거나 넘어섰다. 나이 20대의 4.19당시에 생각했던 이승만 대통령과 이제 고희를 바라본 시점에서 보는 이승만 대통령이 똑같을 수는 없다. 그간 사물을 관찰하고 평가하는 태도와 경륜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또 동서냉전으로 남북한의 사상전이 고도화 되던 시기에 평가되던 이승만과 공산권이 붕괴되고 한반도 분단국가 형성과정에 대한 공산권의 자료가 공개된 지금의 시점에서 보는 이승만 평가도 같을 수 없다.

4.19세대는 1인당 국민소득 60 여 달러시대에 인생의 청소년기를 살다가 이제는 20,000 달러시대를 맞고 있다. 자유당 정권에 맞서 4.19혁명에 앞장섰고 4.19혁명이 성공했다고 자부한지 2년 만에 발생한 군사쿠데타와 그로 인한 군사독재, 군사권위주의 정권하에서 25년을 살았다. 인생의 가장 활력이 넘치는 시대를 군사정권하에서 보냈다. 민주주의가 목적처럼 보이던 시대부터 국가발전의 수단으로 민주주의의 가치가 재 정의되던 시대를 살아왔다. 즉 1960년대 이후 신생국가에서 실험된 서구적 의미의 민주주의 정권들이 거의 예외 없이 붕괴되거나 변질되는 역사를 보면서 살아왔다.

또 군사권위주의 정권하에서 이루어지는 경제발전과 국력신장의 현장을 목격했고 이때의 국가발전에 동참하면서 살아왔다. 가장 가난했던 약소국가가 G20국가의 반열에 오른 역사과정을 지켜보았다. 다른 한편 소련과 동유럽 공산정권들의 몰락과 붕괴, 그리고 북한이 지구 최빈국으로 전락하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동서독이 통일되는 역사도 보았다.

이제 4.19세대는 시대의 변화와 진보의 증인임과 동시에 변화와 발전시대를 실존적으로 체험한 세대들이다. 4.19혁명 50주년은 바로 이렇게 살아온 세대들이 역사의 주역자리를 후대들에게 물려주는 시점이다. 이러한 때에 4.19혁명으로 퇴진했던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좀 더 성숙한 자세에서, 50년 전과 다른 시각과 관점에서 평가해보는 것도 의의 있는 일로 생각되었다. 정의감은 20대처럼 간직해야겠지만 사물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안목은 인생 70대 수준에 걸맞아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막상 자료를 검토하면서 글을 쓰려고 보니 4.19 당시 목숨을 잃은 친구들과 유족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李承晩의 문제, 부상당한 후 오늘날 까지 병상에서 목숨을 잇고 있는 분들이 보는 이승만의 문제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유족들과 부상자들은 독재 권력의 구체적 희생자들이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4.19혁명 50주년을 맞는 시점에서 실패한 독재자의 이야기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싫을 것이다. 필자도 이런 감정을 공유하지만 그러나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문제를 감정에만 묶여 그대로 지나칠 수는 없다.

4.19혁명 50주년을 맞는 이 시점은 이승만 대통령을 과오일변도에서만 보는 시각을 넘어서서 새롭게 조명해야할 상황을 맞고 있다. 현시점에서 이승만대통령의 치적을 공과 과로 나누어 공정하게 자리매김하는 일은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통성을 이어가고 확립하기 위해서도 또 우리가 앞으로 준비하고 대비해야할 통일을 위해서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이승만 대통령 평가문제를 부족한 사람이 감히 발제해보기로 한다.

2. 재론의 현실적 필요성

 

재론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은 우선 한국 갤럽과 한국논단이 실시한 바 있는 한국정치지도자에 관한 여론조사의 결과인데 내용인즉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친미사대주의자(53%), 반민주적 독재자(18%), 남북영구분단의 원흉(18%)이라는 등 부정적 평가가 주를 이루었으며 "독립투사이며 건국의 아버지"라는 평가는 1.3%불과하여 한국청년들의 다수가 북한의 김일성보다도 이승만을 더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4.19혁명이후 이승만 대통령을 보는 사회분위기가 이러한 결과를 초래했다면 이 문제는 한 정치인 이승만의 실패에 그치지 않고 자칫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통성에도 위기를 조성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한 인간의 생애는 누구나 장점과 단점, 과오와 업적의 결합체일진데 이승만의 생애도 공(功)과 과(過)의 양면에서 공정하게 다루어야 그의 진면목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생애의 특정시기와 몇 가지 사건만을 떼어내서 과오, 실책만을 들추고 이를 근거로 실패한 정치인의 대명사로 낙인찍어버리는 것이 과연 독립운동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냈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인물을 평가하는 정당하고 공정한 방법인가를 놓고 진지한 성찰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둘째로는 1990년 이후부터 국내외 학계에서 이승만의 공과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탈수정주의적(post-revisionism)관점에서 추진되었고 특히 냉전의 종식과 소련 및 동구 공산권의 붕괴에 따라 한반도문제에 관한 공산권 소장 자료들이 공개됨으로 해서 그간 베일에 가려졌던 한반도에서의 분단국가 성립과정과 한국전쟁발발원인의 진상이 밝혀졌다. 이런 연구와 자료가 공개됨으로 해서 이승만에 대한 평가기준이 바뀌게 된 점 즉 이른바 수정주의적 해석을 재고해야할 필요가 생겼다.

셋째로는 동서냉전으로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는 상황에서 이승만이 추구했던 유엔감시하의 총선거로 세워진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가 소련 군정이 세운 북한 공산정권에 비해 국가발전의 모든 부문에서 너무나 올바른 선택이었음이 현실 역사 속에서 입증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주역이 되어 그 기초를 세운 한국의 자유민주 체제는 오늘날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서고 있는데 반해 공산독재를 택한 북한은 지구최빈국의 하나로 전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넷째로는 민주당정부를 뒤엎고 집권한 군부쿠데타 정권들과 이승만 정권을 비교정치차원에서 따져 보아야 한다. 군사 권위주의 정권은 이승만 정권 12년보다 훨씬 더 긴 25년간 지속되었다. 이들 정권은 이승만의 가부장적, 내지 문민독재보다 한층 더 강도 높은 군사독재 정부였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독재 정권들의 출현은 한국에만 고유한 현상이 아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부분의 신생국들의 정치발전과정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또 한국의 경우 이들 권위주의 정권들이 경제발전에 치중하는 개발연대를 주도했고 이 단계를 거친 후에 비로소 현재 수준의 절차적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렸다. 동시에 민주주의 성장의 경제적 기초도 강화되었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에서 보면 이승만 정권에 대한 비판적 평가도 4.19혁명당시와는 달리 상대화(相對化)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필자는 이번의 발제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독립운동에 관한 분야는 중점을 두지 않았고 해방 후 한국 땅에서 행해진 그의 정치생활을 주 대상으로 삼으면서 과오는 그의 장기집권 욕과 관계된 부분을 중심으로 다루었고 동시에 새 자료가 나옴으로 말미암아 밝혀진 그에 대한 오해와 왜곡을 지적함과 동시에 그의 기여와 공헌을 나름대로 평가, 대한민국 역사의 정당성을 세우고 미래를 향한 발전의 지침을 마련하는데 목표를 두었다.

3. 이승만 대통령을 둘러싼 그간의 공과논쟁 검토

 

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비판과 옹호론 검토

 

한국 근현대사에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평가만큼 사실과 관계없이 호오(好惡), 긍부(肯否), 훼예포폄(毁譽褒貶)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지도자도 드물 것이다. 이승만은 생전부터 평가가 대립되었으며 사후에는 평가가 극단으로 양립되었다. 1950년대에 발표된 전기적(傳記的) 접근들에서는 이승만에 대한 예찬 등 홍보적 평가가 우세하였다. 반면 1960년대 이후 간행된 평전(評傳)들은 정반대로 비판적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다. 전기나 평전이외의 연구에서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시기별로 차이가 있다. 4.19혁명이후 이승만의 반민주 독재, 부정선거, 부정부패, 반공주의에 대해 국민들의 기억이 분명하던 1960년대〜80년대에는 이승만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분단과 독재의 책임자로 비판하는 평가가 주류였다. 특히 이 시기는 4.19혁명이념과 거리가 먼 군사정권시기임에도 불구하고 군사정권비판보다는 이승만 대통령을 마치 만 악(萬惡)의 근원인 것처럼 비판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4.19이념을 계승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논객들도 적잖았다. 그러나 이후 90년대에 들어오면서 비로소 일부 학계와 언론기관을 중심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재평가 논의가 등장하고 여기서는 이승만을 건국공로자로 긍정하는 평가도 있었다.

1960년대부터 80년대 기간에 등장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평가의 대표적인 예를 세 가지만을 예시하고자 한다. 먼저 이승만에게 포문을 연 학자는 한국인이 아닌 미국인 Richard C. Allen이었다. 그는 30세의 전기 작가이며 한국 전쟁 시 휴전반대를 부르짖는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할 계획을 입안했던 당시 주한유엔군사령관 Maxwell Taylor대장의 아들이었다. 그는 Korea‘s Syngman Rhee: An Unauthorized Portrait를 통해 이 대통령은 부산정치파동과 4사5입이라는 기상천외의 계산법으로 두 번이나 개헌을 감행하여 장기집권의 기반을 다진 후 진보당을 탄압하고 3.15부정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가 4.19로 권좌에서 물러난 경위를 설명하고 그의 대일 외교실패, 거창양민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사건 등을 조명함으로써 이승만을 “평생 자기 조국에 대한 봉사로 국민들에게 선물 받은 권력에 의해 타락한 애국자라고 낙인찍었다.

국내에서는 4.19이후의 시기에 대표적인 논객의 한 사람인 송건호 씨의 다음과 같은 논평도 주목할 만하다. "이승만은 ····그가 범한 많은 과오 중에서도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외세의 국가이익추구에 편승하여 이 나라를 분단하는데 앞장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제(日帝)시대 때 민족을 배반한 친일역적들을 싸고돌아 민족정기를 흐려놓은 점과 12년간의 통치기간에 이 나라를 자주 아닌 열강 예속으로 전락시켰다는 사실도 들어야 할 것이다. 전략(前略) ···· 오늘 한반도가 겪고 있는 민족의 수난은 다름 아닌 이승만의 지도노선에 일단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Allen 및 송건호의 이승만 비판론은 1980년대에 미국으로부터 유입된 수정주의 사관의 영향하에서 이승만에 대한 한층 더 강도 높은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 1965년에 이르러 김삼웅이 나열한바 다음과 같은 이승만의 12개 죄악상은 당시 중도, 진보진영에 속하는 학자나 언론인들의 입장을 총정리한 감이 있다. ①분단책임 ② 친일파 중용 ③한국전쟁유발 내지 예방실패 ④ 독립운동가 탄압 ⑤ 헌정유린 ⑥ 정치군인 육성 ⑦ 부정부패 ⑧ 매판경제 ⑨ 양민학살 ⑩ 극우반동 ⑪ 언론탄압 ⑫ 정치보복 등 12개 조목이다.

 

이상의 주장들과 각도를 달리해서 이승만의 사람됨과 업적에 대해 정반대의 평가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이승만을 가리켜 외교의 신(神)(조정환), 대한민국의 국부, 아시아의 지도자, 20세기의 영웅(허정), 조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 그리고 아브라함 링컨을 모두 합친 만큼의 위인(김활란), 자기 체중만큼의 다이아몬드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닌 인물(James A. Van Fleet)이라고 칭송했다.

이러한 단편적인 평가와는 달리 Robert T. Oliver(1909-2000)교수는 이승만의 1942년부터 59년까지의 자문역을 맡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에서 이승만의 애국심, 학문적 실력, 역사적 혜안, 정치적 투지, 종교적 초월성 등을 지적하면서 이승만을 한국역사상 누구보다도 국민들의 두터운 신망을 획득한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지도자”라고 평했다. 나아가 “그의 이름은 위인을 많이 배출한 한국역사에서 단연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이승만 대통령을 평가한 주된 내용을 요약하면 한국이 초창기에 직면했던 미증유의 혼란으로서의 여순(麗順)반란 사건, 4.3 제주도 사건과 6. 25동란을 거치는 등 극한의 위기상황들 속에서 국민을 단합시켜 국가적 재앙을 훌륭히 극복하고 대한민국의 국가건설(Nation Building)의 과업으로서 안보, 외교, 교육, 농지개혁을 통한 산업발전분야에서 혁혁한 업적을 세워 신생 대한민국을 굳건한 반석위에 올려놓았고 이것이 밑거름이 되어 1960년대 이후 한국에서의 눈부신 발전에 근원적으로 기여했다고 평하고 있다.

 

나. 이승만 평가기준의 변화요인 대두

 

①한반도 분단국가 형성과정에 대한 소련 측 자료의 발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이상에서 적시한 바와 같이 부정적 평가가 긍정정인 것보다 압도적으로 많았고 그 중에서도 국토영구분단과 6.25동란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평가(송건호, 김삼웅, 김도현, Bruce Cummings 등)는 이승만에게는 반민주독재자라는 평가보다 더 아픈 공격이었다. 그러나 동서냉전의 종결과 더불어 소련의 붕괴, 그에 수반한 한반도 분단국가 형성과정과 한국전쟁에 대한 소련 측 자료들이 발굴, 공개됨으로 해서 이승만의 책임으로 들씌워진 많은 사실 왜곡들이 밝혀졌다. 우선 소련군 점령지역에 부르주아 정권을 수립하라는 1945년 9월 20일의 스탈린 지령의 발견은 1946년 6월 3일의 이승만의 정읍(井邑)발언보다 앞선 것으로 소련군 총사령관 스탈린과 참모장 안토노브(Alexei E. Antonov)명의로 연해주 군관구 및 제25군 군사평의회(의장은 북한점령군 사령관 치스차코프)에 발송된 것인데 이 전보는 제2항에서 "소련군 점령지역에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조직의 광범한 연대(블럭)를 기초로 한 '부르주아적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할 것을 지시했다. 이 지령은 그대로 구체화되어 미소간의 합의 없이 북한지역에서 임시인민위원회라는 이름의 정부가 1946년에 세워지고 이 이 위원회를 통해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원칙으로 하는 토지개혁이 단행되고 인민군이 창설됨으로 해서 남한에서보다 먼저 소련점령군 주관 하에 분단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지령이 밝혀지기 전까지만 해도 국내좌파 및 중도 사학계, 특히 수정주의적 해석에 영향 받은 학자들은 이승만의 정읍(井邑)발언을 빌미삼아 국토영구분단의 모든 책임을 이승만에게 뒤집어 씌웠던 것이다.

지금까지 이승만 대통령을 소남한단정(小南韓單政)분자로 몰아 국토영구분단의 책임을 뒤집어씌운 것은 한반도 분단국가 형성과정에 대한 공산권의 자료가 나오기 전의 국내 언론을 기준으로 이승만을 평가한데 기인한 것 같다. 필자도 4.19직후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과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선전위원장 시절에 선배들의 이승만대통령에 대한 평가에 그대로 동조했음을 고백한다.

돌이켜보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정읍발언으로 공론화된 과도정부노선은 소련이 기도하는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예방하고 자율적으로 독립 국가를 세우려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분단의 원흉이라는 평가도 이제 재고되어야 할 것 같다.

 

② 소련의 6.25전쟁관련 자료

 

이승만 대통령은 6.25동란의 원인제공자라는 비판도 받았다 그러나 현재 밝혀지고 있는 6.25동란 관련 모든 자료는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스탈린이 승인, 지원하고 협력함으로써 일어난 민족최대의 비극으로 밝혀졌다. 1949년 3월 5일 소련의 초청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은 공식회담을 마친 후 1949년 3월 7일 스탈린을 만난 자리에서 남한 공격을 스탈린이 허용해주고 지원할 것을 건의했다. 이때는 스탈린이 3.8선에 관한 미소합의는 유효하며 전쟁발발 시 미국개입가능성이 크고 북한군이 남한 군에 대한 절대 우위가 아니라는 이유에서 김일성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이 시기 스탈린은 북한의 군사력 증강노력을 지지하고 육해공군의 강화를 위한 원조를 제공했다.

그러나 1949년 중엽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우선 남한 주둔 미군이 470여명의 미 군사고문단만을 남기고 전원 철수를 단행했고(1949.6.30)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함으로써 핵보유국가로 등장, 미국의 핵독점을 종식시키고(1949. 8) 중국의 공산군이 대륙장악에 성공하는 상황이 조성되었다.(1949.10.1) 이와 동시에 1950년 1월 12일 Dean Acheson 미 국무장관은 워싱턴 기자협회의 연설에서 미국의 극동방위선이 필리핀에서 유구열도, 일본을 지나 알류산 열도로 이어진다고 밝히고 이 방위선 밖의 지역에 대한 침공은 일차적으로 지역주민이 저지하고 유엔헌장에 의하여 모든 문명세계의 개입에 의존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은 김일성의 남침야욕에 다시 불을 붙였고 소련도 새로운 정세를 중국에 이어 한반도의 공산화라는 전략목표를 고려하게 되었다. 김일성은 1950년 3월 30일 재차 소련을 비공식 방문, 4월 25일까지 머물면서 세 차례에 걸쳐 스탈린과 남침계획을 검토한 후 스탈린으로부터 남침 허락과 군사원조, 필요한 전략지원을 확약 받고 여기에 유사시 중국군 지원계획까지를 합의한 후 귀국했음이 자료에 의해 밝혀졌다. 이런 관점은 Nikita Khrushchev 회고록에서도 같은 내용이 담겨있다.

이때 한국군은 북한에 맞설 군사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심리전차원에서 대북우세를 강조하고 군민(軍民)들의 사기앙양을 도모하는 조치를 취했는데 이 측면만을 부각시켜 그것이 남침유발이라고 평하는 것은 당시 국제정치상황이나 한반도 군사정세의 진상과는 전혀 맞지 않는 주장이다. 지금 살아있는 모든 자료들은 한국동란의 도발 책임이 김일성과 소련에 있었음을 명증하고 있다. 이 분야에서도 이승만에 대한 기왕의 평가는 시정되어야 할 것 같다.

③ 이승만은 친미사대주의자였던가.

 

우리 학계 일각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을 친미사대주의자로 매도했다. 필자는 최근 1993년 국내에서 출판된 이승만의 “독립정신”(1904년 한성가옥에서 탈고)이라는 저서를 읽었는데 이 책은 그가 한성감옥에서 5년간 수감되어 있는 동안 집필한 것으로 여기에 나타난 그의 대미관은 확실히 친미적이었다. 그의 이 책에는 그의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동경이 잘 그려져 있었다. 특히 그는 민주정치 제도에 관해서는 미국 민주주의를 관찰하고 이를 발표했던 A. de Tocqueville같은 느낌을 줄만큼 미국 민주주의에 심취하고 있었다. 이 결과 그는 미국유학의 길을 택했고 그가 마음속에 그린 해방조국의 정치형태를 미국화 하겠다는 건국의 이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미국에서 오래 살면서 조국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하는 동안 강대국들의 이중성(二重性)을 피부로 느꼈고 특히 미국의 20세기 초의 대한반도 정책의 진상을 파악한 후부터는 항상 미국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고 한다. 이승만 연구의 권위자의 한 사람인 미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이정식(李庭植) 교수는 이승만 박사의 미국관은 미국의 대한정책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면서부터 크게 달라졌다고 지적했다. 우선 이승만은 미국이 1882년 조미(朝美)수호조약에 명시된바 조선이 외국의 침략위협을 받을 때 거중조정(Good office)을 해주겠다는 약속을 위반했음을 알았고 특히 이승만은 미국이 1905년 미국의 육군 장관 William H. Taft와 일본의 카쓰라 타로(桂太郞)총리 간에 조선을 일본이 차지하도록 비밀협정을 맺었음이 1924년에 밝혀짐에 따라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승만은 1905년 당시 미국의 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을 찾아가 만나고 한국문제에 관한 청원서를 제출하려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승만은 미국의 이중적(二重的) 태도를 간취하고 분개했으며 그 후 미국은 일본에게 진주만을 침공 당한 후에도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요구를 거부한데 대해서도 불만이었다고 한다.

이런 체험 때문에 이승만은 자기 외교체험을 통해 강대국들 간의 흥정에 해방된 조국의 운명을 맡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하루라도 빨리 한국인들이 주도하는 정부를 서둘러 수립하고 외국의 군정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열망에 불탔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한미방위조약협상대표 Walter S. Robertson 국무차관보와의 담판에서 이런 사실(史實)을 상기시켰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승만은 해방 후 건국준비과정에서도 군정사령관 John R. Hodge 장군과도 많은 부문에서 의견대립을 보여 이승만의 제거를 미군정이 검토했었고 특히 한국 휴전협상 시기에는 이승만이 통일 없는 휴전반대라는 명분을 내걸고 단독북진을 주장하자 미국은 한국전쟁의 조기종결구상에 따르지 않는 이 대통령을 제거하기위해 맥스웰 테일러 대장이 Plan Everready라는 비상계획을 입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승만은 대미관계에서 기록상의 자료로는 공식적으로 대미종속이나 미국에 굴종하는 괴뢰 같은 처신을 한 사례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비록 국력은 약했고 원조를 받기위해 대미외교를 강화했지만 항상 당당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미국방문을 수행했던 김용식 전 국토일원 장관은 그가 통일원에 재임했던 1974년 당시 통일원 정치외교정책담당관이던 필자에게 다음과 같은 회고담을 들려주었다. “워싱턴 공항에 취재차 나온 기자들에게 한국은 워싱턴의 겁쟁이들 때문에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는 충격적인 도착성명을 발표, 그날 미국 주요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고 말하고 6.25동란에서 3만2000명의 미군이 희생됨으로 해서 한국이 국권을 지키게 되었다는 감사의 메시지보다는 제네바 정치협상이 실패로 끝난 상황에서 미국이 왜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와 경제 원조를 강화해야 하는가를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담판, 설득하기 위한 명분조성에 더 큰 비중을 두었던 외교의 귀재(鬼才)였다고 말했다. 결국 이승만 박사는 휴전반대 단독북진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벼랑 끝 외교를 통해 한미방위조약을 미국으로부터 얻어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승만을 친미사대주의자로 매도하기 보다는 지미(知美), 용미(用美)의 외교대통령으로 평가해주는 것이 옳을 것이다.

④ 정통정부와 위성정권 문제

 

남북한은 분단이후 서로에 대해 괴뢰정부로 비난하는 심리전을 계속했다. 이것은 한반도가 1945년 이후 동서냉전에 휩싸여 분단국가로 출발한데 그 원인이 있다. 당시 동서냉전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미군과 소련군 점령지역에서 남북한이 별개의 정치형태를 갖는 분단국가로 출범하는 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당시의 세계대세였다. 앞에서 본바와 같이 북한지역에서는 소련군점령 치하에서 형식은 대한민국보다 1개월 늦게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는 간판을 달았지만 실제로는 스탈린의 1945년 9월20일 지령에 의해 사실상 정부수립이 1946년과 1947년 사이에 완결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김일성 정권은 한마디로 동구라파에서와 같이 소련군 점령치하에서 소련의 제한주권론의 통제를 받는 위성국가로 그 출발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성립과정은 북한과는 달랐다. 우선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됨으로 해서 미국이 한국문제를 유엔이 해결할 과제로 정의하고 유엔으로 이관시켰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유영익(柳永益) 교수는 이승만이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서는 한국의 독립과 점령군철수문제를 결말지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한국문제를 유엔에 넘겨 해결하자는 유엔공식을 미국 측에 건의하고 이 건의를 미국 측이 받아들였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유엔활용의 아이디어를 꺼낸 사람이 이승만이라는 것이다.

이승만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산되고 미군정의 지원 하에 추진된 김규식⦁여운형 중심의 좌우합작운동이 소기의 성과를 거둘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1946년 12월 남조선 대한민국 대표 민주의원 의장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 1947년 4월까지 워싱턴에 머물면서 미국정부지도자들과 언론을 통하여 유엔을 통해 남한에 과도정부를 수립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는 당시 미국대통령, 국무장관, 유엔사무총장 등을 만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미 국무성의 점령지역 담당 차관보인 John R. Hilldring을 만나 자기의 과도정부 구상을 설명,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고 했다. 당시 상황은 미국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고 미소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기 때문에 모스크바 협정으로 발표된 한반도 신탁통치 안은 미국이 이를 포기하고 그 대신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 유엔감시하의 자유총선거로 한반도에 통일된 단일정부를 수립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대한민국은 이런 과정을 거쳐 유엔결의로 파견된 감시단이 참관하는 가운데 실시된 자유총선거로 정부를 수립했다. 이 과정은 공산세력들의 선거방해, 민족진영 일부와 진보성향 인사들의 선거거부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러나 이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유엔총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정통정부로 승인받았다. 그러나 이 과정과 절차가 갖는 중요성과 의의는 이승만의 단정론 비판에 휩싸여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분야에 대한 평가도 재고되어야 할 것 같다.

 

4.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 민주주의 문제

 

이승만 대통령은 해방 후 대한민국 통치의 기본 틀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로 만드는데 주도적으로 기여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은 이승만 박사의 선택임과 동시에 또 동서 냉전의 확산과정에서 한국에 주어진 운명적 상황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이러한 기여는 그가 4.19혁명으로 대통령직에서 하야한 후 하와이로 망명했고 그의 정치적 기반인 자유당은 해체되었으며 정치적 추종자들은 반민주행위자로, 그의 경제적 후원세력들은 부정축재자로 법의 심판을 받는 운명에 놓였기 때문에 누구도 제대로 평가해줄 수 없었고 한국 민주정치를 그와 관련시켜 왈가왈부하기도 힘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1960년 4.19로부터 약 30년간 지속되어왔고 아직도 저류가 남아있다. 그러나 4.19혁명이 50주년을 맞이하면서 이승만의 문제를 공과 과로 나누어 보다 객관적으로 새롭게 조명할 필요성 때문에 이승만과 한국의 민주정부 수립문제를 다시 살펴보게 된다.

가. 민주주의와의 만남

 

이승만의 생애를 보면 아이러니 같지만 한국에서 최초로 군주정치를 반대하고 공화정치를 부르짖다가 징역형을 선고받고 5년 옥살이를 한 한국최초의 민주화를 위한 운동권 형 인물로 보이는 측면이 있다. 그는 한말의 유생이었지만 일찍이 신학문을 받아들였다. 한말 독립협회운동에 참여했으며 배제학당에서 수학했고 여기서 그의 생애의 외교무기, 집권무기가 된 영어를 마스터했다. 그는 1898년 고종황제의 군주정치를 비판하고 공화정으로 정체를 바꾸려는 개혁에 앞장섰다가 국가반역죄로 투옥되었다. 한성감옥에서 5년간 복역하면서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선교사들이 보내준 책과 서재필 박사의 가르침을 익혀 미국식 민주주의에 심취했다. 1904년에 탈고한 그의 저서『독립정신』에서 그는 미국민주주의를 “제일 선미(善美)한 제도”라고 칭찬했다.

청년 이승만은 이때 알게 된 미국식 대통령제 민주주의가 지도자를 국민이 직접 선출하고 지도자와 백성이 함께 나라를 부강케 하는 제도로서 전 세계 정치제도가운데 가장 이상적인 것이며 공화정의 권력이양방식도 중국의 요순시대와 비슷한 것으로 인식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러한 사고는 그의 평생의 정치사상의 뿌리였으며 대한민국의 건국구상도 이러한 연구에서 싹튼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미소냉전의 와중에서 한국이 선택할 정치형태는 사실상 주어진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초대 대통령의 민주주의에 대한 정치교양이 부족했더라면 한국정치의 틀을 자유민주주의체제로 확립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 한국 민주화를 위한 노력-교육부분

 

그러나 해방된 한국은 자유민주주의가 제대로 꽃필 여건이 아니었다. 당시 민주주의라는 밀알은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 같았다. 공산세력의 폭력테러가 끊이지 않았고 한국의 문맹률은 인구의 78%로 집계되고 있었다. 또한 전문학교 이상 대학졸업의 학력소지자는 전체인구의 0.2% 미만이었다. 이러한 여건의 불비를 채우기 위해 이승만은 건국 후 초등교육 의무화를 서둘렀다. 이 결과 1959년까지는 전국학령아동의 95.3%가 취학하는 성과를 올렸고 성인을 대상으로 한 문맹퇴치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 1958년까지 5년간 지속적으로 실시함으로써 1959년에는 우리나라 문맹률은 22%(남자11%,여자 33%)로 떨어졌다. 아울러 학교도 대폭 증설하여 해방당시 초등학생수가 1960년에는 4600여교에 360만 명으로 배가 불었고 중학생의 경우도 5만에서 53만으로 10배 증가했다. 대학교는 해방당시 20교의 대학이 1960년에 이르러는 63개 이상으로 증가, 대학생 수도 10만 명에 달하여 인구 5천만이 넘는 영국의 대학생 수와 맞먹게 되었다.

다. 민주화의 경제적 기초정비

 

이 당시는 한국의 경제적 기초도 극도로 취약하였다. 이승만 정권시기에 한국경제는 해방 후의 극심한 혼란에다 6.25의 참화까지 겹쳐 일반서민들의 생활은 최저생계수준을 밑돌았다. 1인당 소득은 1953년의 67달러(1990년 불변가격으로는 757달러), 그리고 1961년에는 82달러 수준에 머물렀다. 이승만 정권은 건국과정과 6.25전란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휴전 후부터 전재복구를 중심개념으로 하여 경제 재건에 힘썼다. 우선 미국으로부터 22.8 억 달러의 거액의 경제 원조를 받아내 1955년까지 전화(戰禍)복구사업을 거의 완료하고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고 해방 후 지속된 악성 인플레이션을 1957년부터 수습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어려운 가운데서도 이승만은 원자력연구소를 만들고 소형원자로를 구입해주면서 원자력의 연구개발을 지원했다.

라. 농지개혁

 

이승만 정권은 이러한 전재복구(戰災復舊)에 선행하여 북한이 토지개혁을 끝낸 것에 자극받고 정부수립과 동시에 진보적 성향의 조봉암(曺奉岩)을 농림장관으로 임명하여 농지개혁을 실시하였다. 일제가 차지했던 식산은행 토지 등 귀속농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한편, 농지의 소유상한을 3정보 이하로 하여 농지의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단행함으로 해서 한국농촌의 소작농 체제를 자영농 체제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소작농 체제를 기반으로 한 한국 민주당의 반발을 잠재우면서 농지개혁을 단행, 자작농지의 비율이 전체농지의 92.4%에 달하게 한 것은 한국농업구조상의 획기적인 변화를 의미했다.

이승만은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자기의 청년시절의 이상에 좇아 한국정치의 틀로서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지향한 것은 올바른 선택이었다. 동시에 자유민주주의가 성장할 토대를 구축하기 위하여 국민교육을 강화, 문맹을 퇴치하고 미국원조를 끌어 들여 전재복구, 경제 재건을 이룩하고 농지개혁을 단행한 것도 잘한 일로 평가될 수 있다. 즉 한국 민주화를 촉진시키기 위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교육적, 기초를 확충, 강화한 것은 업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마. 민주화의 길에서 빗나간 집권연장책동

 

지금까지 이승만 연구가들이 집권연장 책동과 관련하여 지적하는 민주역행 사례의 대표적인 것은 ① 1952년의 부산정치파동을 통한 발췌개헌과 1954년의 사사오입(四捨五入)을 통한 초대 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 조항철폐 ②1957년의 진보당 탄압과 조봉암의 법살(法殺) ③ 1960년의 3.15 부정선거로 집약된다.

현재까지 자료에 나타난 바로는 이승만이 자기의 과오를 인정한 부분은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4.19 학생데모대에 대한 발포로 이 나라의 꽃다운 젊은 대학생들이 살상당한 사건뿐이다.(1960년 4.26 대통령 하야성명)

그 밖의 사건에 대해서는 본인 스스로 국민을 상대로 자기 과오를 인정한 사실이 없다. 이승만에게 있어서 부산정치파동이나 사사오입 개헌을 통한 초대대통령 중임제한 조항폐지는 민주헌정을 파괴, 유린한 행위라거나 정치적 과오로 인식된 것 같지 않았다.

 

① 부산정치파동을 통한 발췌개헌과 대통령 중임제한 철폐개헌

 

이승만 대통령은 재임 중 집권연장을 위해 두 차례의 개헌을 변칙적으로 단행했다. 하나는 부산정치파동을 통한 발췌개헌이고 둘째는 4사5입 개헌으로 알려진 대통령중임제한 철폐개헌이다. 우선 부산정치파동을 살펴보자. 이승만은 부산정치파동을 통한 개헌을 6.25동란이 진행 중인 국가위기상황에서 당시 의회 다수당인 야당이 미국의 대한정책과 대일정책에 편승, 헌법을 내각책임제로 바꾸어 이승만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미국이 선호하는 장면(張勉)을 선출하려는 기도로 부터 자기를 지키려는 정치행위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 당시 미국은 휴전협정을 반대하면서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한국전의 조기종결을 추진하려는 미국에 맞서고 동시에 미국이 원하는 한일수교에도 까다로운 조건을 달아 거부하는 이승만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할 계획을 추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부산정치파동은 국내정치차원에서는 내각제정부형태와 대통령제정부형태를 혼합한 제헌헌법에 내재했던 문제점이 이승만을 대통령직에서 밀어내려는 야당의 내각제 개헌기도로 말미암아 현실문제로 폭발한 사건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엄밀히 말해서 국회 내 여야 간의 정치문제였다. 그러나 내각제개헌안과 이승만의 직선제 개헌안이 정치과정을 통해 처리되지 않고 정권에서 동원한 군부대가 국회의원들을 협박하여 개헌안을 직선제로 처리한 것은 민주헌정사에 나쁜 선례를 남겼다. 물론 국회 내에서의 수적 우세를 믿고 전시(戰時) 중에 미국의 사주를 받아 개헌을 통해 현직 대통령을 밀어내려고 했던 당시 야당의 처사는 결코 옳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승만정권이 관제데모를 통해 민의를 조작하고 끝내는 군대를 동원, 의회를 무력화(無力化)시켜 개헌을 단행, 대통령직을 유지한 것도 잘못된 처사였다. 이러한 평가와 관련하여 헌법에 대한 태도 면에서는 국회를 불법 해산한 군사정권들 보다는 국회를 해산하지 않은 이승만이 좀 더 나은 편이었다는 소수 의견도 있다.

다음으로 초대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조항을 철폐한 사사오입(四捨五入)개헌에 대해서도 이승만은 과오를 인정한 일이 없다. 물론 이 사건이 한 국회의원의 착오투표로 빚어졌다고는 하지만 비록 1표라도 그것이 헌법규정을 위반했다면 개헌안은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는 국회를 통과한 개헌안을 그대로 받아들여 공포했다.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개헌은 국내외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고 또 이 시기를 전후해서 여당 후보를 돕는 관권의 공공연한 선거개입이 행해졌다. 헌법이 보장한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가 수시로 유린되는 사태가 계속되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신시내티 대학의 김한교 교수는 이승만이 1952년과 1956년에 두 차례에 걸쳐 은퇴의사를 거듭 표명했다가 민중대회나 진정서에 나타난 은퇴반대를 민의로 받아들여 재선, 3선의 길을 걸었는데 이는 당시 그가 고령(高齡)에 인(人)의 장막(帳幕)에 둘러싸여 일반사회와 격리된데 원인이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상 두 개헌안 처리문제는 집권연장을 위한 개헌이라는 점에서 도의적, 절차적으로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정치사적으로 보면 한국을 포함한 신생국의 민주정치발전과정에서 발생가능한 일종의 정치적 진통이었다. 4.19혁명이후 군사 정권들 하에서 강압적인 3선 개헌, 계엄령하의 유신, 그리고 두 차례의 국회해산이 있었고 이런 시련을 거쳐 오늘의 민주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③ 진보당 탄압과 조봉암의 법살(法殺)사건

조봉암 법살 사건에 대해서도 이승만은 한마디 언급이 없었다. 조봉암은 독립 운동기에는 모스크바 공산대학에 다닌 공산주의자로 알려졌고 해방 후에는 공산주의운동에서 손을 털고 상당수의 임시정부요인들과 진보진영 인사들이 불참했던 제헌선거에 참여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또 전술한 바 있거니와 초대 농림장관으로서 이승만을 도와 농지개혁을 단행한 사람이다. 그에게 잘못이 있다면 1956년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 진보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23.8%라는 높은 득표를 한 것이다. 조봉암은 1952년 제 2대 대통령에 출마했을 당시에는 11.4%를 얻었는데 이번에는 민주당 신익희 후보의 사망이라는 특별한 정세의 도움을 받고 아울러 6.25이후 이승만 정권이 집권유지수단으로 활용한 반공의 구호가 휴전의 성립과 전재복구의 진전에 따라 약효가 떨어지기 시작한데 큰 원인이 있었다. 특히 이 시점에 조봉암은 "피해대중 뭉쳐라", "평화적인 남북통일"론을 들고 나와 영호남 지역에서 높은 지지를 받았다. 당시 북진통일과 멸공통일을 집권의 주 무기로 삼던 자유당 등 보수 세력들은 평화통일론으로 젊은 유권자, 특히 영호남 유권자들에게 크게 아필하기 시작한 조봉암의 지지세력 신장을 심각히 우려했다.

한편 당시 신익희 후보의 유세 중 사망으로 대통령 후보를 내놓지 못한 민주당은 신익희 후보에 대한 추모 표를 유도하면서 야당인 조봉암후보를 반대할 것을 분명히 했다. 이것은 민주당도 휴전반대라는 면에서는 이승만과 한 길을 걸었기 때문에 평화통일의 기치를 내건 조봉암을 반대했던 것이다.결국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에게 간첩혐의를 씌워 민주당의 암묵적인 양해아래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1957년 7월 30일 사형을 집행했다. 이승만이 집권기에 범한 과오 중에서 큰 과오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이승만은 조봉암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것을 사법부의 판결의 결과로 받아들이고 자기의 과오로 인정했다는 증거가 없다. 그러나 사법부의 독립적인 판단이라고 하더라도 사면권을 가진 대통령이 사형집행을 묵인한 것은 그의 과오로 지적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놀라운 것은 김대중·노무현의 집권기간 중 의문사 진상규명 등 여러 가지 과거사를 재검토 하는 위원회가 구성되어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고 심지어 보상까지 해주면서도 조봉암의 문제를 아직까지 거론하지 않는 소이를 필자는 알 수 없다.

 

③ 1960년의 3.15부정선거와 이승만의 퇴진

 

1960년 자유당은 이승만과 이기붕을 정·부통령 후보로 내세우고 정권재창출을 기도했다. 그러나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지만 이 시기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필요했던 것은 능력 있는 후계자를 물색하여 권력을 잇게 해주거나 아니면 국가유지의 방법을 변경하여 경제건설의 비전을 제시, 국민들로부터 갱신된 지지를 조달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시대의 요구에 즉응할 새로운 대안을 강구하기에는 이념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너무 노쇠했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기득권세력들은 권력유지를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여기서 3.15부정선거와 시위대에 대한 발포가 나왔다. 이것은 앞에서도 지적했거니와 이승만 대통령이 스스로 인정한 정치적 과오이기 때문에 재론의 여지가 없는 과오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이 당시 이승만의 정권유지노력이 실패한 것은 아이러니지만 이승만 정권이 적극적으로 문맹을 퇴치하고 학교교육을 초, 중, 고, 대학까지 전반적으로 확충하는 교육개혁을 단행하고 전재복구와 경제발전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국민들의 민주역량을 해방직후보다 훨씬 강화시킨 결과였다. 이승만 정권이 키워놓은 국민들의 민주역량이 독재정권을 타도할 동력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승만 정권의 무리한 정권연장기도는 국민적 저항을 유발했고 젊은 학생들이 국민들의 선두에 서서 피로써 항쟁하며 민주주의를 부르짖은 것이 4.19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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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4월19일 파고다공원에서 끌어내려지는 이승만 대통령 동상

이 혁명의 성공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권좌에서 물러나 하와이로 망명했다. 망명지에서 병고로 시달리던 이승만은 죽음만은 조국에서 맞겠다는 의사를 전했으나 당시 정권은 이를 거부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65년 7월 19일 서거(逝去)하고 시신(屍身)으로 귀국했다. 그의 시신이 돌아오는 날 서울 시내는 이승만의 서거를 애도하는 시민들의 인파로 가득 매워졌다. 그의 유족들은 국장(國葬) 아닌 가족장으로 영결식을 마치고 유해를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이때 서울은 물론이거니와 전국각지에서 수많은 추모인파가 몰려와 고인을 애도했다.

 

라. 6.25 당시의 한강 폭파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양민학살사건

상기 세 가지 사건들도 이승만 정권에게 책임이 돌아갈 과오의 리스트에 올라있다. 그러나 이 문제들 중 거창양민학살 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과 관련해서는 1951년 문책인사로 각료일부를 개편하면서 내무장관 조병옥을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임시켰다. 그러나 이 사건들은 그 본질이 전시에 발생한 군경의 작전에 관련되는 사항이었다. 또 양민 학살사건의 경우도 한국사회가 건국전야에 경험했던 여순반란 사건, 4.3 제주사건을 비롯해서 6.25당시 북쪽으로 철수 못한 공산군들이 민간을 볼모로 해서 지리산 일대에서 오랫동안 빨치산투쟁을 벌였다는 역사를 상기해 본다면 군이나 경찰의 작전수행과정에서 빚어진 사건들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사건들에 관해서는 국가 최고책임자나 군통수권자로서의 책임을 이승만에게 물을 수는 있겠지만 이는 대통령의 의지가 개입된 집권 욕에서 비롯된 과오로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피난민이 몰려오는 한강철교를 예고 없이 폭파한 사건, 수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된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등지에서 무차별로 양민들을 살상한 사건은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 시에 발생했고 희생자가 너무 많았다는 점에서 이승만 정권이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이승만 정권은 국민에게 이 사건들의 전후관계를 밝히고 옥석을 가려 희생자들에 대한 사과와 응분의 배상을 했어야 옳다. 이승만 정권이 이 책임을 못했다면 뒤이은 정부들이라도 국가수준에서 진상을 구명, 사과와 배상을 강구해야 하는데도 이 문제를 이승만 정권의 책임으로만 떠밀고 어느 정권도 제대로 된 처리를 강구하지 못한 것은 역사의 유감으로 남는다.

마. 친일파 옹호문제

 

끝으로 대통령으로서 이승만이 범한 과오 중에서 친일파를 일소하지 않고 오히려 이들과 야합하고 그들을 정부수립과정에서 중용(重用)했다는 사실이 중점적으로 지적되고 있다. 한국도 해방 후 친일분자를 마땅히 단죄해야 했고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반민족행위자 처벌법도 제정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친일파숙정에 지나치게 소극적이었고 심지어 이들을 정권창출과 유지에 활용하는 한편 정부수립 후에도 이들을 요직에 기용함으로 해서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지 못했다. 심지어 친일파들이 이승만 정권의 주구가 되어 해방 후 임정요인들과 반이승만(反李承晩) 계열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탄압했다.

그로서는 물론 친일파 처리를 태만히 한 것과 관련하여 좌우대립이 극심했던 해방정국에서 자율정부수립운동을 반대하거나 용공적(容共的)입장을 갖는 정치세력과의 대결 속에서 대한민국을 건국해야 할 긴급한 필요성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또 정부수립과정에서 일제 때 학창에서 공부한 인재들을 폭넓게 활용할 필요성을 내세울 것이다.

특히 이승만은 조선 왕정이 일본과 혈전(血戰)한 번 치루지 않고 국권을 일본에게 내주어 자기 백성들이 친일하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만든 장본인인데 이러한 역사의 원천책임을 묻지 않고 일제 치하에서 고통당하면서 살아온 고국 동포들을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과 반일로 양분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냐는 논리를 내세우면서 친일분자처단에 소극적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이런 주장은 한일합방직후 독립운동다운 독립운동이 활성화되지 못하고 일본에게 나라 뺏긴지 10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3.1운동을 전후해서 독립운동이 활력을 얻은 점, 그리고 국내 부르주아지들 가운데는 겉으로는 일제통치에 협력하면서도 이면으로는 독립운동을 후원하는 이중(二重)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적잖았다는 점들을 내세워 친일분자처벌을 적극화하지 않았다고 변명하는 입장도 보였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에서 민족정기확립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가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수립과 치안확보, 국방건설이라는 당면한 과제의 중요성, 효율성만을 내세워 친일분자처리문제를 소홀히 다루다가 6.25동란을 거치면서 유야무야 해버린 것은 마땅히 과오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그의 집권 욕과 깊이 관련된 처사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5. 글을 마치면서

 

이상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국내에서의 정치생활에서 들어난 공과 과를 대체로 검토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국내에서 거론된 평가논의의 핵심은 공(功)보다는 과(過)를 들추는데 치중했다. 과오를 지적함으로써 후세에 귀감을 삼자는 것은 옳지만 동시에 공헌도 평가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가진 지식과 정보의 양, 그리고 경험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을 정확히, 공정하게 평가하기 힘든 존재인 것 같다.

한 때 국내에서 저명한 논객으로 알려진 신상초(申相楚)씨는 이승만의 공과(功過)를 논하면서 공 3, 과 7(功三過七)로 채점하고 이러한 평가는 조금도 각박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가 집필한 시점이 1965년이기 때문에 이승만을 비판일변도로 보는 시류에 영합한 평가일 수 있다. 그러나 천관우(千寬宇)씨는 “우리나라처럼 인물이 많지 않은 형편에서 어떤 인물에 대한 극단적인 평가는 피했으면 좋겠어요. 한 인물에 대해서 조그마한 흠이라도 찾아서 부정적인 결론을 내리기로 말한다면, 성하게 남아날 사람이 우리 역사상에 몇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되도록 좋은 점을 발견하는 아량과 관용으로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총결산해서 플러스 편이 크면 우선 긍정적으로 평가해 놓고 그 테두리 안에서 흠을 말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고 말했다.

 

[중국의 모택동 평가가 주는 교훈]

 

지도자 평가문제는 중국공산당의 모택동 평가가 우리들의 관심을 끌어당긴다. 중국공산당은 1981년 6월 당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6중전회)에서 "당 역사에 관한 몇 가지 문제에 관한 결의"를 통해 모택동의 공과를 채점했다. 결의는 공이 70%이고 과는 30%였다. 공7, 과 3(功七過三)이었다.그러나 필자가 보기엔 이 평가는 모택동의 공을 지나치게 과대 포장한 것 같다. 모택동은 주지하는 바이지만 1957년의 대약진 운동으로 중국경제를 30년 이상 후퇴시켰고 1965년부터 벌인 이른바 문화대혁명을 통해 10년 동안 중국의 전토를 완전히 피폐의 극치에 이르게 했다. 문화대혁명과정에서 3600만 명이상의 중국인이 아사했거나 폭력에 희생되었다. 당시 국가주석이었던 류샤오치(劉少奇)는 1969년 홍위병들에게 구타당해 죽었고 등소평은 강남성 남창에서 트랙터 공장 직공으로 7년간 유배당했으며 그의 가족들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중국 변두리 지역의 인민공사로 배치되었다. 이러한 과오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은 모택동이 중국을 사회주의국가로 통일한 공로를 인정, 그의 공을 7, 과를 3으로 평가하여 중국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 모택동의 초상화를 항상 걸어놓게 하고 천안문 맞은편 광장에 모택동 기념관을 설치, 운영할 것을 결의했다.

중국공산당이 모택동에 대해 이처럼 관대히 평가한 것은 중국공산당의 일당 지배를 정당화하 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다. 만일 모택동을 과오일변도로 몰고 갈 경우 중화인민공화국을 이끄는 공산당의 역사는 정당성 위기에 직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결의를 채택하면서도 모택동의 과오가 워낙 심각했기 때문에 관련 자료를 검토해보면 논의과정에서 많은 고뇌가 있었던 것 같다. 예컨대 당시 정치국 상임위원이었던 천윈(陳雲)은 "모택동 주석이 1956년에 죽었다면 중국인민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언급했는가 하면 모택동과 모택동 사상을 구별, 과오를 줄이고 공을 부각시킬 논리를 개발하는 등 과오를 줄이고 공을 키우는데 어려움을 겪었음이 많은 자료에서 별견된다.만일 한국에서 이승만이 모택동만큼의 과오를 범했다면 그 시신은 한국 땅에 묻히지도 못했을 것이다.

가. 공헌부분

우리는 이 시점에서 이승만의 공과를 현재 밝혀진 자료와 대한민국의 정통성확립이라는 목적에 조명하여 공과를 재평가하고자 한다.

 

우선 이승만 대통령은 동서냉전으로 한반도가 남북한으로 분단될 수밖에 없던 역사적 상황 속에서 내외정세에 대한 예리한 통찰과 자율정부수립이라는 신념을 바탕으로 대미외교를 통해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그는 유엔감시하의 자유총선거를 통해 대한민국을 수립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유엔이 결의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의 지위를 얻게 한 점도 크게 평가되어야 한다. 이 점은 소련의 위성정권으로 출발한 북한과 너무나 대조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건국의 기틀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헌법을 갖는 국가로 세움으로써 공산독재를 추구한 북한과는 달리 오늘날 세계사의 중심대열에 올라서서 국가의 수준을 G20반열에 끌어올린 기초를 다진 것이다. 이점에서 우리는 초대 대통령으로서의 이승만 박사의 공헌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

둘째로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6.25동란에서 공산침략군 몰아내고 대한민국을 지킨 지도력과 전시외교능력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의 공로를 각별히 인정해야 한다. 특히 미국과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6.25동란 후 60년 동안 한반도에서의 전쟁재발을 방지, 한국이 오늘과 같은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안보환경을 조성한 점도 중요 공헌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건국의 기초를 마련하는 내정개혁에서 보인 성과도 그의 주요 치적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공헌의 내용은 앞에서 검토한 '4의 나, 다, 라'항으로 대체한다. 이 자료를 보면 한국에서 60년대부터 시작된 개발연대가 이승만 대통령 집권기에 그 기초가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 과오부분

첫째 고령의 비극과 장기집권의 획책을 지적한다. 그는 인생 70세에 귀국하여 73세에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75세부터 3년간 6.25동란을 겪었다. 3.15 부정선거로 그가 하야할 때의 나이는 85세의 극 노인이었다. 그가 재선임기가 끝나는 1956년에 정치인생을 마감했더라면 그는 훌륭한 지도자의 한 분으로 역사에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1960년 3.15 정부통령 선거에서 불법, 부정선거로 정권을 연장하려다가 이에 항의하는 학생 시위대들에게 발포, 수많은 사상자를 낸 것은 치유할 수 없는 과오가 아닐 수 없다. 자기가 집필한 『독립정신』속의 민주주의 정신을 스스로 망각한 것이다.

둘째로 앞으로 정권을 노릴 유력한 정적(政敵)이 될 것이라는 우려에서 진보당을 탄압하고 독립운동가인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것은 중대한 과오가 아닐 수 없다.

셋째로 친일파 처리를 유야무야하고 심지어는 친일파들이 국정의 요직을 장악, 독립지사들을 감시, 심문하는 위치까지 오르게 한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과오였다.

 

다. 총평

현시점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공과를 세계 속의 한국이라는 큰 안목에서 교량(較量)하면 대한민국의 국가로서의 초석을 올바로 세우고 한반도의 공산화책동을 막아낸 공로에는 큰 방점을 찍을 수 있다. 그러나 고령에도 불구하고 장기집권 욕에 사로잡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과오를 법한 것은 그의 업적의 액면 가치를 크게 감살 시켰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현시점의 이승만 평가를 중국공산당의 모택동 평가처럼 공7과3식으로나 신상초 씨처럼 과7 공3식으로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1990년대와 더불어 공산주의의 길을 택한 소련을 비롯한 동구제국이 몰락하고 오늘날의 참담한 북한실정을 보게 되면 이승만 대통령이 저초(底礎)한 건국노선이 너무 정당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점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구상과 추진이 갖는 의의를 새삼 재평가 하게 된다.

또 3.15부정선거와 학생데모대에 발포한 이승만의 큰 과오를 제외한 여타의 반민주행위는 1960년대에 걸쳐 신생국들에서 발생한 민주주의의 변질, 왜곡, 헌법외적 정부의 출현 등의 현상과 민주당 정부를 무너뜨린 5.16군사혁명 후 25년간 지속된 군사권위주의 정권의 역사를 되돌아 볼 때 결코 절대악(絶對惡)인 것처럼 단죄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서구식 민주주의가 한국에 정착되는 과정의 진통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현재 밝혀진 사료에서 보면 이승만 대통령을 한반도의 영구분단의 원흉이라거나 6.25동란을 초래했다는 평가는 공산권 자료들이 공개되기 이전의 자료부족에 기인하거나 아니면 냉전사에 뿌리를 둔 잘못된 평가였다. 남북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이 김일성과 스탈린의 한반도 공산화전략의 산물로 밝혀진 이상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잘못된 평가는 응당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주 독재자뿐만 아니라 국토영구분단의 원흉, 6.25동란의 유발자라는 덤터기까지 한데 뒤집어씀으로써 그의 공헌은 부정되고 과오만 부각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의 공헌도 바로 지적되고 올바른 역사의 내용으로 채워져야 할 것이다.

4.19 혁명은 이승만 대통령을 권자(權座)에서 몰아냈지만 그렇다고 그의 과오만을 들추어내서 그를 역사 속에 매장하자는데 목적이 있다고 말 할 수는 없다. 이승만 대통령 시대로부터 이 땅에 뿌려진 민주정치의 씨앗을 잘 북돋고 바로 키워 국가의 더 큰 발전을 이룩하자는 데 참뜻이 있었을 것이다. 4.19혁명 50주년이 이 나라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박사의 위치를 재조명해주는 희년(禧年)정신실천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필자: 이영일(李榮一)

①4.19혁명당시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정치학과 3년생으로 문리과 대학 학생 데모의 준비, 조직,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

② 국토통일원 정치외교정책담당관 및 교육홍보실장, 통일연수원장 역임

③ 11대, 12대, 15대국회의원 및 국회문교공보위원장 역임

④ 일본츠쿠바(筑波)대학 국제정치 객원연구원 역임

⑤ 호남대학교 및 우석대학교 초빙교수 역임

⑥ 한중문화협회 총재 및 중국베이징대학 동북아 전략연구 중심 초빙연구원

⑦ 호남대학교 명예 법학박사취득

⑧ 정부의 홍조근정훈장, 벨기에 정부의대십자수교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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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2010년 3월 27일자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입니다.

[기고] 아프간 살리는 콩의 이름은 우리말 '콩'

• 이영일 한국아프가니스탄친선협회 회장

입력 : 2010.03.26 23:40 / 수정 : 2010.03.27 02:05

▲ 이영일 한국아프가니스탄친선협회 회장

한국의 콩이 아프가니스탄의 식량이 되고 있다. 원래 콩이라는 식물이 없던 아프가니스탄에 한국의 콩이 소개, 이식됨으로 해서 아프간의 식량 역사에 새로운 장이 열리고 있다.

 미국 국적을 취득하고 미국 오하이오 대학에서 식품관리학을 전공한 권순영 박사는 2003년 25년간의 외침(外侵)과 내전으로 영양불량이 최악으로 치달아 유아사망률과 임산부의 출산 시 사망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아프간을 찾아가 한국산 5종의 콩 품종을 아프간 일부지역에 이식해 보았다. 이 중 3개종은 생장이 아주 빨랐고 2개 품종은 보통 수준으로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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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아프간의의료료봉사 시 정영숙 권사와 함께 아무다리오 강을 건너는 이영일 회장)

여기에서 자신감을 얻은 권 박사는 2006년부터 한국의 기독실업인단체인 '세계로 CBMC'와 제휴하고 미국 NGO단체들의 협력을 얻어 2004년부터 아프간 일부지역에서 콩 농사에 착수했다.

이 시도가 성공, 아프간 정부의 긍정적 평가를 받은 후 금년부터는 아프간 34개주 중 탈레반의 영향력이 강한 3개주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2만명의 아프간 농부들에게 콩 씨앗을 나누어주고 콩 농사교육을 시켜 콩 재배를 추진하고 있다.
앞으로 아프간 정부가 콩 농사를 전국적으로 권장하려면 정부의 작물시험장에서의 2년에 걸친 실험 성공이 전제되지만 현재의 실적으로는 내년부터 한국품종의 콩이 식량으로 확정될 전망이다.
 

이 지역에는 콩의 영어표기인 'Soy Bean'이란 말이 아예 없기 때문에 한국식 표기대로 "콩"이라 부르면서 두유, 밀가루에 콩가루를 9대1로 혼합한 "난"(Naan)이라는 주식 빵 등을 생산, 보급한 결과 임산부들의 영양실조로 인한 사망률이 낮아지고 어린이들의 얼굴에서 병색이 걷히고 체중도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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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의 그림은 아프간의 콩재배분지)
콩 1톤을 심어 40톤을 생산하기 때문에 콩 농사는 아프간 농민들에게는 채산이 맞는 사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프간 토질은 수분이 적은 탓에 양귀비가 잘 자라 마약을 많이 생산하는 병폐도 있지만 그런대로 콩 생산에 적합하기 때문에 콩이 새로운 식량원(食量源)의 구실을 해낼 것으로 보인다.
탈레반들의 납치살인 사건으로 한국인의 아프간 출입이 막힌 상황에서 권순영 박사는 미국 국적을 가진 한인들을 중심으로 NEI(국제영양교육기구)를 조직하여 아프간의 콩 농사프로젝트를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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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아프가니스탄 방문시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과 환담하는 이영일 회장)

이에 국내에서도 권 박사를 돕기 위해 한국에 아프간 유학생 12명을 데려다가 교육시키고 있는 한국 아프가니스탄 친선협회와 '세계로 CBMC'가 조직을 통합하고 두유생산, 콩 방앗간 설치, 파종할 콩 씨앗 조달업무를 지원하기에 나섰다.
현재 살균 두유시설은 두 지역에 세워졌다.'세계로 CBMC'가 수도 카불에 세운 한국식의 전통 콩 방앗간은 아프간인들에게는 새로운 관광거리가 되었다.


지난 2월 25일 우리 국회는 아프간 파병을 결의했다. 국제사회에 대한 한국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다. 한국군은 전투 목적 아닌 건설과 의료지원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현지에서는 이미 바그람 기지에 종합병원을 설치, 운영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파병지원도 중요하지만 아프간 농민들의 생산의욕을 북돋아주고 영양 상태를 개선해 나가는 콩 농사 지원사업도 큰 몫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말한 바 있는 가장 성공적인 햇볕정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콩 농사지원을 통해 아프가니스탄인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꽃피어 파병장병들의 작전수행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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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연우포럼,No.4035]에 실린 김영환 칼럼에 감동되어 올립니다

 

무료급식의 허실

 

학교에서 점심밥을 학생 전원에게 무료로 주어야 하는가? 어느 도 교육감의 주장에서 촉발된 논란이 확산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의무교육이기 때문에 밥도 거저 줘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또 다른 이는 의무교육이란 병역, 납세처럼 자녀를 취학시켜야 한다는 부모들의 의무이지 국가가 모두에게 무료로 밥을 줘야 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런 논란을 보면서 필자는 프랑스 특파원 시절이 생각납니다. 당시 초등학교(cole primaire)에 다니고 있던 남매는 점심 때가 되면 집에 와서 밥을 먹고 다시 학교에 갔습니다. 그런데 18층 아파트에서 빤히 보이는 학교 교정에서는 매일 급식차가 학교에 점심을 실어 나르고 있었습니다.

 

   학교에 알아본 결과 부모가 모두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급식의 첫째 조건이었습니다. 아내는 일을 보조하고 있었으므로 교육위원회에 서류를 제출했죠. 그런 뒤에야 학교 급식이 가능해졌습니다. 급식 비용은 당시 부모의 수입에 따라 6등급으로 나뉘어 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소득에 따라 여러 배 차이가 났습니다. 그 때는 프랑소아 미테랑 대통령이 14년간 집권한 사회당 좌파 정권이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이 글을 쓰려고 프랑스 웹을 검색해보니 가장 덜 내는 아동과 많이 내는 아동 간에 10배 정도 차이가 있었습니다. 지자단체에 따라 다르지만 한 끼에 최저 0.5 유로( 800)에서 5유로(8,000) 정도였습니다. 부모의 수입이 높으면 많이 내고, 아이들이 더 많으면 덜 내는 구조입니다. ‘선진국은 모두 무료 급식한다’는 어느 야당 당직자의 발언은 거짓말이었습니다

 

   일본은 어떨까요. 일본 드라마에 ‘장미 없는 꽃집(薔薇のない花屋)’이 있습니다. 절친한 친구의 애인이 죽으면서 낳은 ‘시즈쿠’란 여자 아이를 대신 길러주는 남자의 이야기인데 그는 아이의 도시락을 정성스레 싸주었고 점심시간에는 학생들이 죄다 도시락 밥을 먹고 있었습 니다. ‘꽃보다 남자(より男子)'’에서도 초명문 사립고에 다니는 여주인공은 오직 혼자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는데 호텔 수준의 일류 급식을 즐기는 부유층 학생들로부터 ‘이지메 (괴롭힘)’를 당하는 장면이 나오죠일본의 학교급식은 시설과 설비를 국고에서 일부 지원 하지만 급식비 자체는 생활보호법의 보호 대상자에 대해서만 전부 또는 일부를 보조할 뿐입니다. 결코 무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무료급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4대강 사업비를 줄이면 된다고 합니다. 글쎄요, 근본적으로는 홍수를 막을 4대강 사업이 빈부를 안 가리는 초중생들의 전원 무료급식과 무슨 상관이 있을지요? 그렇게 무료급식이 절박하다면 그것을 주장하는 국회의원, 교육감, 도지사들이 명예직이 되어 월급을 안 받거나 정당의 국고 보조금을 출연하는 것이 국민의 지지를 더 받을지 모릅니다.

 

   돈을 쓸 데가 없어 주체하지 못하는 부자 자녀 모두에게 무료로 점심을 주기보다는 아침과 점심을 거를 빈곤층 학생들에게 밥을 먹여주고 학용품을 주는 것이 더 시급하지 않을까요? 더욱이 출산율이 세계 최저로 ‘국가가 키워줄 때까지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하여 ‘출산 파업’이라는 말마저 나오는 우리나라입니다. 힘들게 임신과 출산을 해도 고작 20-30만원의 쿠폰을 줄 뿐인 인구 정체의 나라에서 부자 아이들에게까지 공짜로 점심을 주느니 출산비와 영유아 양육비를 획기적으로 보조해주는 것이 일의 순서가 아닌가요.

 

   학교 무료급식을 안 하는 프랑스도 아이를 가지면 부유층을 뺀 약 90%의 가정이 임신 7월째에 출산수당 855유로( 136만원), 육아수당 일시금 1,710유로( 273만원), 3살이 되기 직전 달까지 매월 171유로( 27만원)를 받습니다. 또 둘 이상의 자녀를 둔 가정에 매월 최저 119유로( 19만원)의 가족수당을 줍니다. 국민이 국가의 기본이라는 신념을 드러내는 정책 이죠.  

 

   전원 무료급식의 논란을 보면서 우리 정당이 얼마나 왜곡된 정보로 국민을 기만하려는지 짐작하게 됩니다. 선후완급을 정밀하게 숙고하는 정책의 정합성이 없습니다. 그런 주먹구구식으로 재집권의 기회가 옵니까?

 

어느 예비후보는 ‘6.2 지방선거가 무료급식 세력 대 반대세력의 국민투표’라고 주장했고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을 지낸 어느 지사 출마 희망자는 ‘이번 6월 선거에서 여당을 심판하는 것이 아이들의 빼앗긴 밥그릇을 찾아오는 것’이라고 강변합니다.

 

   무료급식이 이제 생각났나요? 좌파 집권 10년 간엔 뭘 했나요? 천문학적인 비용의 행정수도를 건설할 생각을 말고 무료급식에 착안했다면 지금쯤 상당히 합리적으로 확대되었을 것입니다. 전원 무료급식은 무료급식이 급한 게 아니라 ‘부자들의 표’ 가 더 급하다고 생각한 발상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전원 무료급식 주장은 이 나라에서 정치한다는 자들의 수많은 문제점 중의 하나를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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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통일신문 2010년 3월29일 3면과 한국국제문제연구원 간행의 國際問題 2010 4월호(The Journal of International Affairs)pp.53-56에 전재되었음)   


                    중국 지식인들이 말하는 북한 이야기

                             
                                                                한중문화협회 총재        이         영     일

최근 한중간은 물론 미국 일본 등지에서 열리는 주요 학술회의에 중국학자들이 주제발표자로 또는 토론 참가자로 대거 초청받고 있다. 중국의 저명 학자들을 초청하려면 종래와는 달리 최소 6개월에서 1년 전에 예약해야할 만큼 중국학자들의 견해를 구하는 모임이 부쩍 늘고 있다.
 
중국의 경제발전수준이 총량 면에서 세계2위 내지 3위권에 진입했고 미국의 달러화 보유량도 세계 1위를 점할 만큼 향상된 결과이다. 이제 중국을 G2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한 의례적인 형용사가 아니라 국제정치의 실질가치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의 한반도 내지 동북아 전략문제 전문가들이 오늘의 북한을 어떻게 평가하고 인식하고 있는가는 우리의 중요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나라 중국전문가들은 중국학자들을 국제파와 전통파의 두 그룹으로 나누어 성향에 맞추어 관련 학술회의에 초청하는 것 같다. 국제파들은 대부분이 미국 등 서구지역에서 유학하고 돌아왔거나 외교부문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학자들이다. 이들은 과거 냉전시기에는 북한과 중국은 혈맹관계였지만 한중간에 국교가 열리고 남북한이 다 같이 유엔에 가입한 현재는 혈맹관계의 북중 관계는 끝났고 정상적인 국가대 국가 간의 관계라고 인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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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단:후진타오주석과 김정일, 하단 6자회담의 오찬풍경

특히 한중 양국이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로 한중관계를 한 차원 더 높인 현 단계에서는 한중관계를 중북관계에 못지않게 중시한다고 한다. 특히 북한의 2009년의 제2차 핵실험은 2006년의 제1차 핵실험과는 달리 북 핵을 바라보는 중국정부의 태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고 한다. 북한의 제1차 핵실험 때만해도 북한의 핵실험은 대미협상에서 우위를 노린 외교행위의 일환으로 보면서 외교적 해결이 가능한 문제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2차 핵 실험이 있은 후에는 북한의 의도가 핵보유국가로서의 지위획득에 목적을 둔 것으로 평가하고 6자회담 같은 외교방식으로 해결가능한 문제인가에 심각한 우려를 자아냈다고 분석한다. 북한은 대외적으로는 비핵화가 김일성의 유훈이라고 하면서 핵 폐기에 동의할 것 같은 제스처는 취하지만 실제로는 핵 보유에 주력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 북경대학의 다른 학자는 북한의 핵개발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안전을 위해서가 아니고 김정일 정권(Kim's Household)을 지키기 위한 조치라고 주저 없이 평가한다.
 
그간 미국은 북한이 핵 포기협상에 응하도록 하기 위해 북한을 침공하는 일이 결코 없을 것임을 다짐하는 서면약속(2009년 부시정부)을 해주었고 북한에 에너지로서 중유를 제공했다.(클린턴과 부시) 이러한 미국이 북한을 압살하는 적대정책을 취하고 있다고 우기면서 이를 핵개발의 명분으로 삼고 있는 북한의 태도를 수용하지 않는다. 중국이 유엔안보리의 상임이사국으로서 비토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견제하고 응징하는 안보리의 제재결의에 두 번이나 찬표를 던진 것은 북한에 대한 중국 측의 우려와 유감을 반영한 결과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중국의 전통파들은 국제파와 입장이 다르다. 이들은 중국과 조선(북)의 우호관계는 조선(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불가결한 기초이며 기초가 흔들리면 모든 평화와 발전도 물거품이 될 수 있다면서 오늘의 북 핵 사태는 1964년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했을 당시에 미국이 중국에 보인 태도를 상기해보라면서 그 당시 중국을 비하, 고립, 봉쇄시키는 미국의 정책이 오늘날 북한에도 되풀이 적용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에 맞서 북한이 핵 개발에 나선 것은 정당한 자위행위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동시에 핵이 한 나라에 독점되었을 때는 전쟁수단이 되었지만 여러 나라가 핵무기를 보유하면서 핵무기는 더 이상 전쟁수단이 되지 않게 되었다면서 국제사회가 북한을 "악마화(惡魔化)"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이들은 또 북핵문제는 반세기를 넘기도록 미국에 의해 일방적으로 강요되고 있는 북미대결구도의 산물이며 미국의 북 핵카드의 본질은 대중 포위 전략을 완결함과 동시에 나아가 동아시아를 포함한 유라시아지역 전체, 특별히 석유 및 천연가스 자원들에 대한 자신의 패권적 지배를 관철시키려는 것으로 분석한다.

중국의 한 언론인은 자립자강의 사회주의 북한의 존재는 중국변경안정의 보호벽이 된다고 지적하고 중조(中朝)맹우관계가 일단 파열하면 “자기편을 불리하게 하고 적을 기쁘게 하여(親痛仇快) 가장 크게 손해를 보는 것은 중국”이라고 주장한다.

중국지식인 사회의 이 같은 두 가지 흐름은 중국정부의 대북한 정책에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고 어느 면에서는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유엔외교와 대서방정책에서는 국제파의 주장이 많이 채택되는데 반해 중국의 대내정책차원의 대북정책에서는 전통파의 입장을 살리는 측면이 엿보인다. 동시에 중국정부는 북 핵이 장기적으로는 중국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지만 당면해서는 북한의 붕괴나 와해가 중국안보에 더 절실한 부담과 위협이 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또 최근에 논의가 증폭되는 북한내부의 급변사태에 관해서도 북한의 붕괴방지가 중국의 국익에 일치한다는 입장이다.

중국정부의 이런 태도나 입장에 대해서는 전통파나 국제파의 시각에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요즈음 이 두 학파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북 핵 처리방도는 북한정권의 와해나 붕괴를 막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이 중국식 개혁개방에 따르도록 하여 핵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을 만들자는 쪽으로 집약된다.

 최근 중국이 북한의 사회간접자본으로서의 항만, 도로, 철도건설에 투자를 대폭 늘리고 나진항을 중심으로 추진하는 창지투(長吉圖-창춘-엔지-투먼)프로젝트는 그 의도가 북한의 개혁개방유도정책으로 보이는 측면이 있음과 동시에 북한경제를 중국에 예속시켜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양면성을 띄고 있다는 분석이 있다. 특히 화폐개혁의 실패로 김정일의 핵심지지기반이 내부적으로 크게 붕괴, 동요하는 시점에서 취하는 중국의 이러한 정책은 정책의도를 관철하기가 한층 더 용이할 것이다. 최근 경제적 궁지에 몰린 북한은 관광객의 신변안전보장을 요구하는 한국 측 주장을 일축하면서 금강산 관광 사업마저 중국에 넘기겠다고 한국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북 핵문제나 북한의 개혁개방문제는 중국이나 미국에게 보다는 우리 한국의 장래에 더 크고 중요한 문제이다. 이런 시기에 우리가 손을 놓고 앉아 미국과 중국 간의 전략대화를 지켜보면서 그 결과에 따라 한국의 대응전략을 세우려는 안이한 자세를 갖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이제 한국은 G20의장국이 될 만큼 성장한 대한민국의 역량에 걸맞게 핵문제에 진전이 없다면 핵문제가 진전되도록 외교적 이니셔티브를 강구해야 하고 북한지역의 개혁개방을 위한 인센티브도 능동적으로 제공하는 협상주도력을 발휘해야한다. 그러나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의 햇볕정책처럼 북한의 변화를 가져오지도 못하면서 선군정치나 핵개발을 뒷받침했던 과거의 전철을 밟는 일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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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L과 PD를 매장하라"

[사민주의연대 토론회 발표문] "한국판 바트 고데스베르크 선언이 시급하다"
 필자 주섭일 박사

* 아래의 글은 25일 열리는 사회민주주의연대 주최의 토론회 <제3의 길인가, 사회민주주의인가?>에서 발표될 제2주제 부분의 발표문 「'제3의 길'의 종언과 사회민주주의의 새출발- 한국판 바트 고데스베르크 선언이 시급하다 -」의 요약문입니다.

한국 진보가 나아갈 길, 제3의 길인가, 사회민주주의인가?

■일시: 2010년 2월 25일(목요일) 오후 3시-5시
■장소: 프레스센터 19층 매화홀

■개회 인사: 이부영 (화해상생마당 운영위원)
■격려사: 박영호 (한신대 명예교수, 사회민주주의연대 고문)

■사회: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

제1주제 : '제3의 길' 정치의 평가와 새로운 정치전략
발표: 김윤태 (고려대 교수)
토론: 고세훈 (고려대 교수)
토론: 윤도현 (현도사회복지대 교수)

제2주제 : '제3의 길'의 종언과 사회민주주의의 새 출발
발표: 주섭일 (언론인, <사회와 연대> 회장)
토론: 김석연 (변호사, 진보신당 정책위부의장)
토론: 노항래 (국민참여당 정책위의장)


 

1) 주섭일 박사의 주제글
프랑스 석학의 경고: 사회민주주의는 소멸할 것이다.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BHL)는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프랑스 사회당은 죽었다, 사회당은 사라져야 한다”고 선언해 유럽정가를 진동시켰다. 그는 유럽의 중도좌파가 과거의 서구 공산당처럼 소멸할 것을 경고한 것이다.

유럽의회선거에서 프랑스사회당은 사르코지 대통령의 대중운동연합(UMP)에 대패했고 녹색당과 같은 13%대의 득표로 사르코지의 대체세력에서 제거될 위기에 처했다. 영국 브라운총리의 노동당은 카메론의 보수당보다 8%나 적은 15%로, 파시스트 극우정당인 영국국민당에도 뒤진 3등으로 전락했다.

유럽사회민주주의는 과연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붕괴 후 소련제국을 포함한 현존사회주의가 멸망한 것처럼 소멸하고 있는 것일까? 영국노동당이 극우정당에 이은 3등으로 전락하고, 스페인 중도좌파 자파테로 총리가 우파 인민당에, 독일사민당이 메르켈의 기민-기사연에, 프랑스 사회당과 이탈리아 민주당이 각각 중도우파에 대패한 것은 한마디로 총체적 패배를 의미한다.

서민-노동자-농민-중산층의 대변 정당들이 ‘삶의 정치’를 수행하지 않고 신자유주의정책을 답습하거나(영국노동당, 독일사민당, 스페인 사회당 등), 아니면 중도우파의 실용주의정책으로 좌파정책을 선점했기(메르켈 독일 총리,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 스웨덴 럼스펠트 보수당 총리등) 때문이다.

2) 영국노동당 총리, ‘제3의 길’ 장례를 치르다.

영국노동당은 월스트리트와 부시 전대통령과 같은 신자유주의정책으로 세계경제를 위기에 처한 책임자로 지목된 좌파정당으로 선거승리는 애당초 포기한 상태였다. 영국노동당의 블레어와 브라운총리는 12년 집권하면서 이른바 “제3의 길” 구호로 신자유주의를 추종해 사회민주주의를 ‘사회자유주의’로 변형시킨 장본인들이다.

그러나 브라운은 노동당 정권의 경제정책이 잘못이었다고 공개적인 사과를 했다. 블레어 전총리의 ‘제3의 길’ 계승자인 브라운은 신자유주의적 시장만능주의를 원인으로 진단하고 사회민주주의정책으로 신속히 대응함으로써 위기국면을 극복하려고 한 것이다. 이는 영국경제의 파산을 막는데 큰 효과를 냈으며, 영국의 신노동당이 창안한 ‘제3의 길’에 종지부를 찍은 셈이다.

브라운 총리의 대국민 사과는 노동당 당수로써, 금융위기의 원인이 ‘제3의 길’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노동당 총리의 손으로 장례식을 치른 것이다. 이로써 ‘제3의 길’은 서구대륙에 확산되다가 경제위기 한복판에서 신자유주의와 함께 침몰했다.

3) ‘제3의 길’ 전염된 사민당, 메르켈 승리보증하다

금융위기를 맞으면서 메르켈은 처음에는 파산은행의 국유화를 주저하다가 브라운과 사르코지의 권고를 수용해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의 방어에 앞장섰다. 우파총리가 사민당정책으로 위기탈출의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여기서 메르켈은 국민의 신뢰를 확보했다.

그러나 명분을 챙기지 못한 연정 파트너 사민당은 ‘제3의 길’이 만든 슈뢰더의 2010 개혁정책이 위기를 불렀다는 책임을 혼자 떠맡게 됨으로써 공은 메르켈과 우파에게, 과는 스타인마이어의 사민당이 덮어 쓰는 이상한 국면이 나타났다. 사실 유럽의회선거 대승에 이어 2009년9월 총선에서 메르켈의 승리는 예정된 것이었다.

슈뢰더가 ‘제3의 길’ 전염병에 걸려 사회민주주의의 정체성인 시장의 관리와 사회정의마저 포기한 2010 개혁을 수립할 때부터 최대의 사회민주주의 대중정당 독일사민당은 사실상 기민-기사연과 차별이 없는 중도우파정당의 모습으로 투영되었다. 기민-사민 연정에서 보듯, 독일 유권자들은 좌우 색깔이 비슷한 혼란한 정치정항에서 경제위기를 잘 극복하고 있는 메르켈총리에게 결정적 손을 들어주었다.

총선결과 사민당은 역사상 최저 득표율 22.9%로 참패했다. 2005년보다 무려 11%나 감소한 군소정당 득표라는 최대의 수모를 당했다. 메르켈의 기민-기사연은 35%의 득표율로 승리하면서 3위 득표를 한 우파 자유당과 연정파트너를 교체했다. 사민당은 1998년 이래 12년만에 야당으로 전락했다. 스타인마이어는 “참으로 참담한 날이다. 득표결과를 긍정적으로 제시할 방법이 없다”고 역사적 패배를 자인했다.

‘제3의 길’ 수용에 반대해 11년 전 사민당과 결별한 라퐁텐의 좌파당은 12%의 득표율로 5년 전보다 4%나 약진했다. “우리는 역사적인 최고의 득표를 했으며, 앞으로 사회민주주의 국가복원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독일사민당은 선거전에서 2010플랜을 접고 2020플랜을 공약으로 제시해 슈뢰더와 차별화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4) ‘제3의 길’ 거부, 조스팽 총리의 21세기 프랑스사민주의

프랑스 중도좌파 사회당은 ‘제3의 길’을 거부하고 ‘21세기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독자 노선을 걸었다. 프랑스는 신자유주의의 세계화가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의 바람을 타고 몰아치고 있을 때인 1997년, 사회당-공산당-급진좌파 좌파3당 연합정부를 수립했다. 미테랑대통령의 집권은 2차 우파동거정부를 경험했지만, 사회민주주의정책을 원만히 집행했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아버지 부시, 그리고 영국의 대처총리가 미테랑의 좌파노선을 견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프랑스의 경제성장이 느리고, 노조의 잦은 파업, 복지로 과도한 재정부담, 큰 정부는 나라를 망치는 길이라고 주장하며 미테랑은 설득했다. 미테랑은 ‘우리는 사회보장, 대학까지 무료교육, 헌법상 노사공동 경영원칙 등을 위해 큰 정부가 필요하며, 우리 길에 간섭 말라’고 응수했다.

미테랑은 철강, 전자, 조선, 항공분야 대기업의 국유화를 단행했고, 민영은행을 전면적으로 공영화했다. 그리고 노인연금과 퇴직연금을 획기적으로 인상하는가 하면, 최저임금도 올렸다. 그리고 ‘사회연대세’라는 이름으로 고소득자와 부자들에게 부유세를 부과함으로써 좌파정부의 정체성을 강화했다. 특히 일부 부유층 자녀들이 다니는 사립학교에 대한 규제를 취하면서 공립학교에 대한 정부지원을 확대해 공교육을 강화했다.

특히 외국인의 프랑스 거주조건을 크게 완화하는 획기적 이민정책을 집행했다. 많은 해외이민자들이 미테랑정부의 개방정책에 환호를 보냈으며, 사회적 약자들이 살만한 사회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5년 보수 드골파 시라크 대통령시대를 열었으나, 혼합사회라는 프랑스모델을 바꾸지 않았다. 기간산업 국유화, 노사공동경영, 사회보장제도, 무상의료-무상교육 등 복지국가체제를 구축한 것은 2차대전후 드골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1997년 총선거에서 리요넬 조스팽 사회당수의 사회-공산-녹색당 연합정부를 구성해 보다 더 사회화-평등화했다. 특히 조스팽은 “경제는 시장경제, 사회는 국가의 규제관리”라는 현대적 사회민주주의정책을 수립해 경제성장과 공정분배의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결과적으로 조스팽의 정통사회민주주의는 오늘 “가장 견고하게 경제위기에 잘 저항하는 프랑스 모델”이라는 영미언론의 호평을 받는 자유와 평등의 조화로운 균형사회를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한 것이다.

5) 중도실용 신보수 3총사, 사르코지, 메르켈, 라인펠트
(생략)

6) 독일사민당 새출발, 전당대회 슈뢰더 2010 끝장내다

사회민주주의는 과연 멸망할 것인가? ‘최대의 위기인 것은 확실하나, 다시 살아 날 것이다. 베를린장벽 붕괴 후, 멸망한 구소련중심의 공산주의와는 달리 사민주의는 자본주의체제 멸망과 이를 대체하려는 이념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관리해 인간을 위한 쇄신을 도모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 서구정치학계의 일치된 해석한다.

르몽드지는 정치학자들과 사회민주주의의 위기에 관한 토론을 최근 주최했는데, 로랑 부베교수(니스대학교 정치학교수)는 3중 위기증상을 지적하고 해법을 제시했다.

“먼저 사회민주주의는 역사적 사명을 완수했기 때문에 위기이다. 다시 말하면, 사회(민주)당이 집권한 모든 나라들에서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양식의 사회복지국가가 정착했다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 역사적 플랜은 지금 완전히 실현된 것이다. 사회민주주의는 사회주의실현의 또 하나 거대한 다른 길인 공산주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살아남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사회민주주의 또는 민주적 사회주의는 1917년 러시아혁명 이래 사회주의혁명 전략의 반대에 참여한 역사적 투쟁에서 승리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또한 공산주의라는 내부의 적을 상실한 것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에 혼자 직면해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회민주주의의 제3의 위기는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것을 잘 알지 못했거나, 자발적으로 합류했기 때문에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와의 대결에 실패했다. 사람들은 이를 ‘사회적 자유주의’라고 부르는 ‘제3의 길’이다. 그래서 위기는 심각한 것이며, 반드시 경제상황에만 기인된 것은 아니다”

‘제3의 길’이 신자유주의를 답습해 위기를 만든 후, 글로벌 금융위기의 해법을 잘 찾을 수 있는 사회민주주의는 이 때문에 시장규제와 관리를 경고했음에도 유권자의 불신으로 패배했다는 얘기다. 반면 재빨리 사회민주주의의 문제의식을 갖고 모방한 신우파에게 도리어 권력을 인도한 꼴이 됐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회민주주의의 사망과 폐허에서 새출발을 권고하는 석학 BHL의 경고가 공감을 얻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낡은 복지지향적 정통사회민주주의를 그대로 품고 계속 나갈 수 없다. 그러면 사회민주주의는 어떻게 새출발하는가?

먼저 독일사민당은 2009년11월13일 드레스덴 전당대회에서 시그마르 가브리엘 전 환경장관을 새 당수로 뽑았다. 사민당 다수당원들은 슈뢰더의 ‘제3의 길’이 분당을 초래해 패배한 반면, 오스카 라퐁텐의 좌파당을 출현시켜 이번 총선에서 약진한 만큼 합당을 기대했다.

전당대회는 슈뢰더의 2010개혁 프로그램, ‘제3의 길’을 사실상 매장시켰다. 보흐닝 대변인은 전당대회 후 회견에서 “과거를 대체하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작업이 시급하다. 사민당에게 너무나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한 기민-기사연 정책과 타협한 과거를 청산하고 슈뢰더시대의 2010유산을 확실히 끝장내게 되었다”고 전당대회 결과를 요약했다.

7) 유럽사민당대회, ‘제3의 길’ 매장 사회생태주의 깃발 들다

3월 지방선거를 앞둔 프랑스 사회당은 환경문제를 사회문제와 접목함으로써 위기의 돌파구마련을 분명히 했다. 오브리당수는 “새로운 발전 모델을 창안하기 위한 성찰과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하고, “사회주의자들이 환경문제의 해결을 위한 대책을 본격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모든 환경정책은 사회문제로 수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는 <사회적 생태주의> 또는 <에코-발전주의>를 위해 3월 지방선거부터 드림팀을 구성해 활동할 것이다. 특히 환경문제해결을 위해 그린세금, 기후에너지세금, 탄소세 등을 기업의 에너지 소모량에 따라 사전 공제하도록 하겠다”고 설명했다.

유럽연합 27개국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2009년12월7-8일 양일간 체코의 프라하에서 전체의원대회를 열어 사회민주당-사회당의 새 출발을 다짐했다. 전당대회는 “독일총선 패배의 잿더미에서 특히 2010년 예상되는 영국노동당 패배가능성을 앞두고 새로운 결의를 다지며 위기탈출에 총력을 기울인다”고 선언했다.

대회는 위기의 진단을 5가지로 요약했다. 1) 세련되고 상당한 호소력을 가진 중도실용주의로 무장한 우파가 유권자를 압도해 승리를 견인함. 2) 사회민주주의의 장점을 잠식한 우파의 득세와 정책적 혼란으로 사회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함. 3) 녹색당의 선전과 부상으로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정치의 리더십을 상실함. 4) 독일사민당의 2009년 패배와 영국노동당의 2010 총선 패배전망으로 좌파에게 전반적으로 패배감이 증폭됨. 5) 그러면서 유럽사회민주주의자들은 2009년 유럽의회선거의 집단적 패배와 독일사민당 패배는 ‘이제 바닥을 쳤다’는 사실에 동의했으며, 앞으로는 패배가 오히려 중도좌파의 기회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리고 유럽사회민주주의 전당대회는 다음과 같이 결의함으로써 제로에서 출발하기 위한 방향과 지향, 이정표를 세웠다. 1) 사회민주주의의 적은 내부의 적뿐만 아니라 극좌파로 규정한다. 2)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사회의 변화에 선행대처하고 환경주의와 조화를 이루며 연결함으로써 ‘녹색-케인스주의’를 실현한다. 3) 시장경제를 수용하고 세계화는 사회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 4) 재정과 사회부문에 약간의 이견이 표출되었으나, 앞으로 대화를 통해 극복한다.

5) 유럽의 진보세력을 위한 공동의 아젠다 창출을 위한 작업팀을 구성해 앞으로 2년간 연구해 최종 마스터플랜 결정한다. 6) 앞으로는 국가단위의 해석, 정의, 규정, 결정 등을 탈피해 유럽대륙차원의 공동정책을 수립하고 가치관을 재정립한다. 7) 2014년 사회민주주의 유럽대통령 단일후보를 낸다. 그리고 대회는 유럽사회민주주의당의 총재로 덴마크의 풀 라스무쎈 전총리를 추대했다.

그리고 유럽사회민주주의당의 향후 구호를 이렇게 정했다. “사회자유주의는 죽었다! 사회-생태주의 만세!”

8) 엥겔스, 공산주의 혁명론 등이 오류임을 밝히다

그러면 세계차원의 사회민주주의의 위기탈출과 발전은 한국정치에, 특히 진보세력에게 어떤 교훈과 시사점을 보이는 것일까. 한국에서 사회민주주의, 또는 중도좌파는 진보주의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다. 진보세력으로부터는 개량주의, 또는 기회주의나 희색분자로, 보수세력은 공산주의자와 같은 적색분자로 상대하지도 않는 현실이다.

과연 그런가? 앞에서 분석한 바 같이 현대정치의 양대 주류의 하나를 이루며 중도우파와 교대로 정권교체를 해 자본주의체제를 사회화-인간화함으로써 사회양극화를 치료하는 의사의 역할을 사회민주주의는 담당해왔다.

특히 사회민주주의는 정치부패를 청소한 도덕성으로 정치사회를 쇄신하고 정화하는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에서는 정치무대에 한 정당으로 데뷔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진보는 이른바 NL과 PD라는 양대세력이 분점해 끝없는 이론-분파-파당 싸움을 하고, 삶의 정치를 주장하는 사회민주주의를 권력의 하수인으로 매도함으로써 현대적 진정한 진보세력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한국진보세력의 경직성과 완고성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자본주의 멸망설에 근거한 공산주의의 대체론, 소수정예 엘리트를 전위로하는 프롤레타리아 폭력혁명론의 도그마의 족쇄를 풀지 못하고 있다.

이는 1848년2월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선언에 근거하는 전략이며 이념이다. 특히 이는 이른바 ‘사회주의혁명’을 부르짖는 북한 김정일의 존재와 무관하지 않다. 이른바 한국진보는 북한의 덫에서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모습이다. 진보는 여기서 탈출하지 않으면 소멸할 운명에 직면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민주주의의 뿌리와 진전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

사회민주주의는 1895년3월 마르크스의 『프랑스의 계급투쟁』 재판의 엥겔스의 서문에서 출발했다. 프랑스의 1848년 2월 혁명을 분석한 마르크스의 이 저술은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의 연합봉기가 왕정을 타도하고 세계최초의 좌우공동정부를 수립한 역사적 혁명을 다루었다.

엥겔스의 서문은 그의 유서로 평가되며, 특히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저인 공산당선언의 오류를 솔직히 시인한 문서로 더욱 유명하다. 그러나 레닌의 러시아혁명 후 엥겔스의 유언은 날조된 것으로 왜곡되어 잊혀진 문서가 되었으나, 소련멸망 후 다시 빛을 보고 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엥겔스의 유서에서 공산당선언의 오류를 근거로 공산주의 도그마에서 탈출했다.

엥겔스는 여기서 공산당선언에서 1848년 경제상항을 사회주의혁명의 성숙기로 보았던 것이 오류였다고 고백한 것이다. 엥겔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역사는 우리와 우리처럼 생각했던 사람들 모두가 틀렸음을 입증했다. 역사는 유럽대륙의 경제발전이 아직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제거할 만큼 성숙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역사는 1848년 혁명이래 전역을 휩쓴 혁명에 의해 이를 입증해 주었다”

1789년7월 프랑스의 부르주아혁명이 봉건제의 성숙기에서 부르주아의 봉기로 자본주의로 대체했고, 1848년 자본주의 성숙기에 프롤레타리아의 봉기로 공산주의로 이행한다는 혁명론이 마르크스와 엥겔스 자신의 오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공산당선언의 공산주의유토피아는 엥겔스가 부정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다음에는 폭력혁명시대는 갔고 선거의 시대가 왔다는 엥겔스의 선언이 담겨 있다. 공산당선언은 국가란 부르주아계급의 프롤레타리아 착취도구로 타도대상으로 보았으나, 그렇지 않다고 엥겔스는 말했다. “선거야말로 프롤레타리아의 제일 효과적인 해방의 수단”이며 권력에 (프롤레타리아세력의) 다수가 진입함으로써 국가를 부르주아로부터 독립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부르주아는 프롤레타리아의 비합법적 활동보다는 합법적 활동을, 반란의 결과보다 선거의 결과를 더 두려워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엥겔스는 “체제전복을 위한 혁명가이며 음모가였던 우리는 합법적 방법으로 훨씬 더 성장하고 있다. 프랑스 부르주아 질서당은 그들이 창조한 법적 조건에서 소멸하고 있다. 그들은 합법성은 우리의 죽음이라고 울부짖고 있다!”라고 썼다. 여기서 마르크스의 폭력혁명론에 종언을 고한 셈이다.

그런데 엥겔스의 유언집행자의 한 사람인 베른슈타인이 유언발표 이듬해인 1896년 “자본주의의 제문제”에서 “자본주의 멸망은 없다”고 선언해 공산당선언의 유토피아를 매장했다. 그는 “엥겔스가 지적한 오류는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것은 자본주의 붕괴론,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자본주의체제의 필연적 붕괴를 항상적으로 기대하는 오류이다. ‘혁명’에 의해 권력을 장악하고 국가를 전복한다는 1848년(공산당선언)의 잘못된 사고는 마르크스의 지나친 연역에 의한 편향적 논리에 의해 기인하는 것이다” 그는 또 “자본주의는 점차 자기통제력을 갖게 되었다. ....노동계급의 생활조건이 향상됨으로써 계급투쟁은 오히려 약화되었다. 사회내 제관계는 공산당선언이 말한 것처럼 악화되지 않았다”고 자본주의 붕괴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했다.

실로 사회민주주의는 여기서 출발했으며, 이것이 세계최초의 사회민주당정부를 독일에서 출범시킨 이유다. 자본주의 멸망테제가 붕괴되면 공산당선언은 단순한 유토피아로 끝난다. 마르크스가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을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로 매도한 것은 이제 역사적 오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20세기 말 공산주의 멸망은 이를 확실히 증언하고 있다.

9) 한국진보, 한국판 바트 고데스베르크 선언을 하라.

1959년11월13일 독일사민당은 바트 고데스베르크에서 임시전당대회를 열어 역사적 사적소유, 시장경제, 반공산주의 규탄선언을 채택함으로써 현대적 사회민주주의의 새로운 깃발을 들었다.

   
  ▲ 1959년 독일사민당의 바트 고데스베르크 당대회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주의의 뿌리를 주장할 권리가 없다. 그들은 사회주의이념을 왜곡시켰다. 사회주의자들은 자유와 정의의 실현을 위해 투쟁하고 있으나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의 갈등을 이용해 자기 당의 독재를 확립하려한다”

독일사민당은 이렇게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규탄하고 공산주의와 결별했다. 그리고 자유정신과 개혁, 휴머니즘과 인권을 기초로 하는 ‘사회민주주의’ 강령을 구축했다. 강령의 핵심은 생산수단의 공유화라는 마르크스주의 원칙을 포기하고 사적소유권, 소비의 자유, 노동의 자유, 자유경쟁의 원리, 개인의 이니시어티브와 연대의 가치에 기초를 두는 새로운 사회경제질서의 구축을 천명했다. 이렇게 해서 “자본주의체제의 옹호”와 “사적 소유를 권장”했다.

“사회정의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면”이라는 조건을 달았지만, 자본주의의 멸망과 공산주의이행을 근간으로하는 공산주의도그마의 안전무결한 폐기요, 규탄이다. 독일사민당은 자본주의체제의 영속을 공식화하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회보장제 등 사회주의적 정책을 집행함으로써 자본주의체제를 인간화하기 위해 총력을 기우린다는 것이다. 강령은 정치부문에서 혁명을 부정하고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를 주장해 의회민주주의원칙을 천명했다.

특히 강령은 서독의 국토방위를 위한 외교-국방정책을 수립했다. 이는 좌파정당이 서독의 헌법을 존중하고 국토를 지키는 것을 원칙으로 천명한 중요한 문서다. 강령은 “우리의 길”이라는 결론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자유의 극단적 억압자, 인간권리의 파괴자, 개인과 국민의 자치를 거부하는 자들이다. 이제 공산주의국가 안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지적하고 “사회민주주의의 기본가치를 기초로 하는 사회만이 미래에 새로운 희망을 줄 수 있다”고 천명했다.

이 강령은 엥겔스가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의 오류를 마르크스의 “프랑스의 계급투쟁”서문에서 밝힌 후, 60여 년 만에 사회민주주의가 공산주의와 대체하는 이념으로 규정한 역사적 문서이다.

사회민주주의는 바트 고데스베르크 선언을 계기로 프랑스와 독일 북유럽에서 큰 발전을 이루었으며, 1989년11월 베를린장벽 붕괴로 구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진영이 멸망함으로써 유일한 좌파이념을 대변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한국의 이른바 진보세력 또는 정당들은 이미 소멸한 현존사회주의 즉 구소련공산권이라는 과거의 이념의 틀에 얽매어 있음이 확실하다.

민주노동당은 NL이 주류라고 하며, 종북주의로 비판하면서 탈당해 창당한 진보신당도 PD가 주류라는 사실은 모두가 다 알고 있다. 10년 전 우리 유권자가 10% 이상 표를 던져 국회의석 10석을 주었으나, 민주노동당은 오늘 유일좌파인 사회민주주의정책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공산주의 이념의 이론투쟁에 매달림으로써 오늘 국민적 불신의 늪에 빠저 정치무대에서 소멸한 운명에 처해 있다.

10년 동안 한국진보세력은 사회민주주의를 개량주의와 기회주의로 매도하면서 종북주의와 민족해방(NL)이라는 통일지상주의노선을 고수했고, 일부는 마르크스-레닌주의적 민중해방(PD)노선을 걸어왔다.

그들의 길은 이미 1989년11월 베를린장벽 붕괴로 사망한 공산주의와 이의 변종인 이른바 “주체사상”의 길이었다. 그들은 공공연히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세계”의 존재를 이상화하고 있으나, 이는 1895년 엥겔스가 고백했고, 60년전 바트 고데스버그 선언이 천명했으며, 20년전 베를린장벽 붕괴로 사망한 공산주의의 시체를 이념으로 삼은 그들만의 싸움일 뿐이다.

그러니 오늘 한국유권자들이 이른바 진보세력에 장송곡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프랑스의 좌파 철학자 BHL의 “프랑스 사회당은 사라져야 한다”는 외침은 서구 중도좌파가 아니라 바로 한국의 진보세력에게 주는 준엄한 경고라 하겠다.

그러면 한국의 진보가 살길은 있는가? 나는 분명히 있다고 말한다. 진보대연합을 부르짖고 있으나 쓸데없는 공허한 게임이다. 먼저 왜 20년 전 공산주의 멸망 시기에 이탈리아와 스페인, 포르투갈 공산당이 적색에 낫과 해머를 그린 깃발을 내리고 사회민주주의로 전향했는지, 특히 동독노동당을 비롯한 폴란드, 체코,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공산당이 임시전당대회를 열어 붉은 모자를 벗고 서구사회민주당의 모자를 바꾸어 썼는지를 한국의 진보는 깊이 성찰해야 한다.

그들은 모두 그래서 공산주의 멸망 후 전환 사회민주주의는 살아남았고, 민주주의 질서에 순응함으로써 보수당을 누르고 집권하기도 한 것이다. 한국진보가 NL이다, PD다 하는 공산주의시체를 껴안고 대연합이다 공동전선이다 하며 낡은 얼굴화장의 분을 바른다고 해서 회생할 수 없다. 서민, 노동자, 중산층, 지식인의 삶의 정치를, 구체적 집행정책을 강령에 담아 사회민주주의 가치관, 이념, 행동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2012년 총선에는 완전 소멸할 것이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NL과 PD라는 시체를 스스로 매장하고 사회민주주의 옷을 갈아입어라. 그리고 한국사회를 자유와 평등이 조화롭게 균형을 잡는 사회로 쇄신하는 강령을 채택해야 한다. 서구선진 사회민주주의 정치양식을 벤치마킹해서 진보의 면모를 완전히 쇄신해 우리 유권자에게 새롭게 접근하면 우리정치에 새 희망을 줄 수 있다.

독일사민당의 바트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읽어보고 한국판 강령을 만들어 대전환을 선언하라. 그리고 외교안보정책과 교육정책을 강령에 분명히 담으라. 그러면 우리 유권자는 돌아 올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정치는 영호남, 충청의 지역구도가 영원히 고착되는 보수만의 천지가 지속될 것이다. 이것은 한국을 제2의 아르헨티나로 전락시키는 최악의 시나리오이며, 그 책임은 무능하고 오만방자하고 비도덕적이며 경직된 도그마의 족쇄에 얽어 매인 이른바 한국의 가짜진보세력이 져야 할 것이다.

여기서 나는 한국선진화, 국민통합, 사회갈등해소의 길은 시장경제, 의회민주주의, 사회정의, 인권, 평화, 복지국가의 확고한 가치관으로 무장한 사회민주주의세력이 정치구도에서 보수와 대등한 규모의 주류세력을 형성하는데 있다고 굳게 믿는다. 또 이것은 대한민국을 지키는 일이며 동시에 통일을 앞당기는 길이 될 것이다. 오늘 우리가 서구 사회민주주의를 공부하는 까닭은 실로 여기에 있다.

2010년 02월 24일 (수)

주섭일 / 언론인, '사회와 연대' 회장 redian@redia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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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당한 자기 몫을 나누는 정치를 기대한다.

 

이 영 일( 전 3선 국회의원, 한중문화협회 총재)

 

새해 들어 우리 국민들에게 큰 소망이 있다면 한국정치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되는 것이다. 정치가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기보다는 낙담과 좌절, 국가의 앞날에 밝은 전망을 주기보다는 어두운 그림자를 들씌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정치에서 발전가능성이 완전히 막혀있는 것만은 아니다. 작금의 정치현상을 정치발전론적 견지에서 보면 한국정치의 주제가 민주 대 반민주 구도에서 정책대결로 진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4대강문제, 이른바 세종시 문제, 부자감세(富者減稅)로 선전되는 법인세감면문제 등은 모두 그 성격이 민주대 반민주의 과제 아닌 정책토론의 주제들이다.

정치의 주제가 바뀌면 정치투쟁의 방식도 바뀌어야 하는데 한국정치에서는 정치주제가 바뀌었는데도 정치투쟁방식은 아직도 민주대 반민주 구도시대를 풍미했던 “전부 아니면 전무” 식의 투쟁으로 시종되고 있다. 민주대 반민주 구도 시대에는 전부 아니면 전무 투쟁이 정당화될 수 있었다. 자유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토마스 제퍼슨 주의의 민주주의에 비추어 볼 때 국가권력이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부당히 제한하려고 할 때 이러한 기도에 맞서 강경투쟁, 심지어 극한투쟁을 하더라도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킨다는 명분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김대중 방식의 정치투쟁은 이런 명분에서 정당화되었고 지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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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1세기가 10년을 지나고 있는 현시점에서의 한국정치는 민주화를 향한 정치가 아니다. 절차로서의 민주주의가 정착되었고 국가권력이 국민을 섬기는 시대의 민주화 선상(民主化 線上)에서의 정치발전이 한국정치의 과제로 되었다. 이런 상황의 수요에 맞추어 정치의 주제도 정책대결로 변화된 것이다. 따라서 정치적 과제의 문제해결방식은 국민여론을 변수로 하여 여야가 정책의 내용형성에 미치는 영향력의 비율을 놓고 다투는 것이 되어야 한다.

 

다수의 의사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의사가 소수의 의사를 변증법적으로 지양하여 하나의 통일된 국민의사를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민주적 의사결정방식이며 민주주의가 갖는 묘미이다. 영국의 정치학자 Bernard Click이 정치를 정치공동체의 존속과 발전에 기여하는 정도에 비례해서 정당들 간에 자기의 몫을 분배받는 과정이라고 정의했는데 바로 이러한 정치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정치가 성숙한 민주주의로 발전하지 못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여겨진다. 하나는 여야 공히 민주대 반민주 구도시대의 정치유산을 청산 극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국회를 구성하고 있고 둘째로는 공천이 곧 당선이라는 지역구도의 혜택 속에서 정치적 생존을 유지해온 국회의원들이 정치의 주제가 정책으로 변화된 상황을 소화할 능력을 결하고 있는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근년에 들어와서 오늘과 같이 답답한 정치현실 속에서도 한 가닥의 희망을 국민들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즉 현재와 같은 무익한 정치를 국민들이 점차 강도 높게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정치인 후원회 참여를 거부하거나 후원금의 수준을 매년 줄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편을 통한 후원에는 세금감면혜택이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치를 혐오하는 국민들이 정치인 후원을 나날이 외면하기 시작한 것이다. 후원금의 부족분을 출판기념회를 통해 보충하는 정치인들도 있지만 정치자금법의 규제를 피하기 위해 노심초사해야 하는 아픔이 따른다.

 

앞으로는 공천이 곧 당선이라는 공식도 점차 그 빛을 잃어가고 있다. 몇몇 지역에는 아직도 그 잔영이 남아있지만 여론조사에 나타난 유권자들의 태도를 보면 능력과 청렴도가 검증되지 않은 정치인들이 살아남기 힘든 상황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성숙한 민주정치에서 바람직한 정치투쟁은 대화와 협상을 통해 정책내용에 미칠 영향력의 비율을 조정하는 것이다. 국민으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는 쪽은 7:3의 영향력이나 6:4의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것이고 국민들의 지지가 반반일 경우 5:5의 영향력을 놓고 가부를 물어 국민의사를 형성해야 한다. 이러한 영향력의 분배의 정치, 자기의 합당한 몫을 나누는 정치가 이번 국회를 끝으로 만개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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