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시아 국제정치에서 본 사드문제 

                                                           이 영 일 전 국회의원(11대, 12대, 15대의원)

 1. 들어가면서 

 오늘날 사드(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ce)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내외 정치의 뜨거운 뇌관이 되었다. 정부의 사드배치허가는 한미방위동맹에 의거,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의 안전에 필요한 장비를 보강하겠다는 주한미군 사령관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것은 박근혜 정부가 아닌 다른 어떤 정부라도 한미방위동맹이 존속하는 한, 또 우리가 한미방위동맹을 필요로 하는 한 허가치 않을 수 없는 조치다. 여기에는 여야 간에 갈등이 일어날 원인도 이유도 없다. 더욱이 미국이 사드배치를 요청한 현실적 배경을 보면 바로 해답이 나온다. 우선 북한의 핵과 미사일 공세가 갈수록 공세화 하고 있는 점이다. 김정일 시기에는 핵 실험도발 2회, 미사일 발사 26회였지만 김정은 등장이후 3년 동안에 핵실험 도발 3회, 미사일 도발이 49회로 늘어났다. 김정은은 또 도발할 때마다 주한 미군이 제1차 타격목표이고 제2차 타격목표는 유사시 한국을 지원할 주일 미군 기지이며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괌 기지나 미국본토까지 타격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부의 사드배치 허가조치가 알려지면서 배치장소로 거론된 성주(星州)군민들의 반발은 물론이거니와 국민의 당, 더 민주당 소속의 일부의원들까지 반대에 가세했다. 여기에 중국이 러시아와 함께 사드배치를 강도 높게 반대를 천명하면서부터 사드는 동북아 국제정치의 새로운 긴장의 뇌관이 되었다. 그러나 이때 우리의 가슴을 가장 괴롭힌 것은 우리 내부에 사드배치에 반대하는 북한이나 외부세력의 주장에 맞장구칠 분열의 씨앗들이 잠재해있다는 사실이다. 적전분열(敵前分裂)이 망국의 길임은 누구나 잘 아는 역사의 교훈이다. 제1차 대전을 앞두고 여야 간에 성내(城內)평화(Burueger Frieden)를 부르짖으면서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했던 독일의 역사에서 우리는 많은 교훈을 얻어야 한다. 안보에 여야가 없다는 사실이 실천으로 입증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러나 북한의 5차 핵 실험을 계기로 안보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진 국민여론이 사드불가피론을 수용하면서 여야 간에 국론 통일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하 사드를 둘러싼 국제환경을 분석하고 우리의 대비책을 검토하고자 한다. 2. 한중간에 잠재된 모순의 폭발 중국은 사드배치결정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거의 선전포고에 준할 수준의 공갈, 협박 위협을 가해왔다. 한국정부는 사드배치허용이 결코 중국을 겨냥한 것이 아님을 박근혜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통해 시진핑 주석에게 직접 설명하고 북한의 도발이 사라지면 사드의 필요성도 없어진다는 조건부 사드배치 론을 제시했다. 특히 박대통령은 “북한의 위협에 대해 느끼는 불안감은 한국인과 중국인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다”며 사드 배치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푸틴 러시아대통령에게 “북한 위협은 생사의 문제”라고 했던 정도의 원색적 표현은 아니지만 강조하고자 한 의미는 같았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항조우(杭州)에서 열린 G20정상회담 중 시진핑 주석과 가진 정상회담에서 사드가 중국을 타격목표로 하지 않는 것임을 설명했지만 중국은 한미양국정부의 설명을 전혀 수용치 않고 사드배치는 동북아시아의 전략균형을 파괴함으로써 정세불안을 야기한다고 강력히 반발했다. 중국은 공식적으로는 사드가 왜 동북아시아의 정세균형을 파괴하고 안보정세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지에 대한 입장설명이 없다. 다만 시진핑 주석이 항조우 정상회담에 앞선 Summit 비즈니스 회담연설에서 한국정부를 겨냥, “각국의 안보는 긴밀히 맞물려 있고 어느 한 국가도 자기만 생각해서는 안 되며 또 홀로 해결할 수도 없다”고 말하고 박 대통령과 회담에서도 사드배체는 "지역의 전략적 안정에 도움이 되지 않고 관련 당사국 간 모순을 격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결국 사드문제는 박근혜 대통령이 설득외교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동북아시아 국제정치의 커다란 맥락에서 다루어져야 할 문제로 정의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 왜 중국은 이처럼 강경하게 사드배치에 반발할 까. <중국이 반발하는 논리> 중국의 사드반대론은 중국 메스컴을 통해 여러 가지로 제시되었지만 군사전략가들의 견해는 사드의 목표가 한국정부의 설명과는 달리 중국정부를 겨냥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우리 정부는 사드가 북한만을 겨냥하고 중국이나 제3국을 노리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전문가들은 사드 의 무기체계가 미국의 미사일방어(MD)체계의 핵심 요소로서 위성을 포함한 미국 MD망과 연계되지 않으면 아무리 종말단계라도 북한미사일을 요격하는 성능을 발휘할 수 없다고 지적하고 이것은 마치 아무리 최신형 스마트 폰을 갖고 있어도 통신망과 연결되지 않으면 쓰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면서 한국의 설명을 반박하고 있다. 특히 한국에 배치될 사드 포대는 미7공군 사령관이 관리하는데, 미7공군은 태평양 사령부에 직보를 하는 등 미국 MD체계와 직결돼 있기 때문에 중국은 사드를 미국 MD가 한반도로 확장된 것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또 전문가들은 “북한만 들여다보고, MD와 연결이 안 된다는 국방부의 주장이 맞는다면 성주에 배치될 사드는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 대상이 아니어야 한다. 그게 과연 가능할까? 또 사드의 한반도화란 결국 북한만 바라보고 중국은 엿보지 않는 레이더, 즉 옆으로 눈도 안 돌리고 업그레이드도 안 하는 레이더를 가진다는 것인데, 그건 바보 사드 아닌가. 1~2년 그럴 수는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종말단계라도 정확한 요격을 위해서는 업그레이드를 해야 한다”면서 중국이 아닌 북한만을 겨냥한다는 주장을 수용하지 않는다. 최근 미국은 루마니아와 폴란드에 아무 저항을 받지 않고 배치하는데 성공했다. 오히려 나토제국들은 미국은 퍼싱(Pershing)2 미사일보다 더 성능이 좋은 사드를 유럽보다는 아시아에 먼저 배치해야 하는가를 따졌다. 그러나 정작 사드를 문제 삼을 러시아는 그것이 방어무기이고 러시아가 미국과 유럽대륙에서 패권다툼을 벌일 형편이 아니기 때문에 초기의 한 두 차례에 걸친 항의성명이후에는 동유럽지역에 대한 사드배치를 묵인했다. 여기에는 나토에 편입된 동유럽 국가들은 이들 지역이 피침 시 나토에 군사적 대응의무가 배제된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중국이 반대하는 진의> 이상의 주장은 기술적(技術的) 관점이지만 사드를 중국이 반대하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시진핑이 구상하는 중국의 꿈 실현에 역행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번 사드에 대한 정부의 허가를 계기로 우리가 확실히 파악한 것은 미중 간에 잠재된 패권경쟁이라는 모순이 양성화되었다는 사실이다. 미국과 중국 간의 모순은 무엇인가. 간단히 요약하면 시진핑이 말하는 중국의 꿈은 아시아에서 미국을 밀어내고 중국이 지역의 패자가 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은 중국이 동북아지역의 패자가 되는 것을 막으면서 아시아 태평양세력으로 계속 남겠다는 것이다. 사드배치허가는 한국이 미중패권투쟁에 끼이게 됨으로써 한국이 소화해야할 국제정치의 상황이 한층 더 어렵게 되었다. 중국도 대외적으로 밝힐 수는 없겠지만 북한과 마찬가지로 주한미군이나 주일미군 기지를 겨냥할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배치해 놓았는데 한국의 사드는 미국본토를 공격할 중국의 ICBM은 요격할 수 없지만 이 지역에 배치된 중국의 미사일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중국을 자극한다. 그간 중국은 한미동맹을 비판적이면서도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였지만 이제는 중국이 미국 MD체제의 일환으로 보는 사드가 들어옴으로 해서 한미동맹이 반중군사동맹으로 달리 해석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궁극적인 선택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3. 한국이 보는 중국과 중국이 보는 한국 한국은 1992년 수교 이래 양국관계발전을 가장 중요한 대외관계의 하나로 규정하였다. 중국도 이에 호응하고 초기의 단순수교관계가 협력적 동반자관계, 전면적 협력동반자관계,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로 발전해 왔다고 중국 관리들은 평가한다. 그러나 한국의 어느 누구도 중국이 양국관계의 단계적 발전에 붙이는 수식어가 무엇을 뜻하는가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혹자는 전략적 동반자관계란 동맹조약만은 못하더라도 양국협력의 긴밀도가 동맹수준에 오를 만큼 높아졌을 때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 중국은 47개국과 전략적 동반자관계를 맺고 있지만 협력수준은 그렇게 높지 않다. 중국이 다만 북한과 동맹조약을 맺고 있고 유효기간은 2021년까지다. <한국이 보는 중국> 한국에 있어서 중국은 휴전협정의 서명자인데다가 북핵문제의 비군사적 해결이나 한반도 통일에서 기대하는 역할의 중요성 때문에 동맹국가인 미국에 못지않은 중요한 국가로, 최근 여론조사로는 미국보다 더 중요하게 간주되었다.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를 동맹관계보다 더 중시한 것이다. 그러나 2010년의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사태를 거치면서 중국은 중요하지만 안보 면에서 신뢰할 수 있는 국가인지에 대해 짙은 회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국이 자기 동맹국인 북한을 감싸면서 북한에 대한 국제제재를 거부권으로 막았기 때문이다. 중국은 그러나 제4차 북한의 핵실험 후에는 북한에 대한 유엔의 강도 높은 제재에 동참하고 북한에 대한 국제제재를 다짐했다. 그러나 중국의 대북제재는 핵을 포기시킬 만큼 강도 높은 제재가 아니었다. 중국은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핵 비확산 지지라는 명분 때문에 대북제재에 동참은 하면서도 미국을 핵으로 괴롭히면서 중국안보의 일각을 맡아주는 북한의 존재를 중국은 줄곧 활용하겠다는 속셈을 버리지 않았다. 북한문제와 북핵문제를 분리대처 한다거나 북한의 도발이 일어날 때마다 관련당사자들이 서로 냉정하고 자제하라는 양비론적 논평만을 되풀이 하는 중국에 우리는 실망을 거듭해왔다. 북한은 중국의 이러한 속셈을 읽고 국제사회와 맞서 핵 도발을 하면서 버티고 있는 것이다. <중국이 보는 한국> 중국은 한중수교이후 한국의 발전경험을 활용, 경제발전을 추진하면서 한중간의 교역량을 증진시켜왔다. 지난 수년 동안 한중교역량은 미국, 일본과의 교역량을 능가하면서 양국협력은 FTA를 체결할 만큼 고도화되었다. 그러나 한중수교를 가능케 했던 등소평(鄧小平)의 도광양회(韜光養晦)외교노선이 폐기되면서부터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등소평은 도광양회전략을 통해 사회주의 초기단계를 약 100년간 계속해야 할 것을 당부했지만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가 도래하자 중국은 도광양회노선을 끝맺고 국제사회에서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노리는 대국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한국을 보는 중국의 시각은 달라졌다. 중국은 한미동맹을 냉전의 유물이라고 비판, 한미안보협력을 약화시키려 하는 한편 한국국민들의 역사적인 반일감정을 활용, 한국이 미국, 일본과 긴밀히 협력하는 관계발전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중국의 대한정책의 중점이 중국의 동아시아 패권 장악에 한국이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는 쪽으로 옮겨진 것이다. 시진핑이 북한의 핵무장 포기를 요구하면서 김정은과의 면담을 거부한 것이나 항일투쟁시의 중국 측 파트너로서 임시정부의 법통을 승계한 한국을 인정하고 기념물을 설치해주는 조치 등은 모두 중국의 이러한 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중국이 패권추구의 명분으로 내세우는 세력전이(勢力轉移)론이나 신형대국관계 론을 앞세운 중국의 꿈은 시진핑 주석이 추구하는 목표는 될 수 있지만 당장 실현되기는 힘들 ㄱ서이다. 학자들은 모든 지표로 보아 금세기는 어렵고 22세기에나 가능할지 모른다고 한다. 우리 입장에서 볼 때 중국의 꿈은 자칫 한국의 핀랜드화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경계해야할 요소이기도 하다. 더욱이 당면한 한국안보위기해소와는 무관하다. 현시점의 한국은 중국과의 전략적 동반자관계 아닌 한미동맹을 통해 도전 상황을 극복해야 한다. 여기서 내야할 우리의 목소리는 중국에 대하여는 ‘북한의 도발이 있는 한 한미동맹은 결코 흔들릴 수 없음’을 강조하고 미국에 대해서는 ‘한미동맹이 북한의 도발억제와 비핵화 이외의 목적에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이러한 뜻을 담은 박근혜 대통령의 외교독트린이 필요한 때이다. 4. 맺으면서 현시점에서 우리가 국익이라고 정의해야할 과제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도발을 효과적으로 저지하는 것이며 이 과제를 해결하는 데는 한국 안보에 대한 확실한 공약이 있고 유사시 함께 목숨 걸고 싸워 나갈 동맹인 한미동맹을 굳건히 강화하는 것이다. 또 상황이 어려울 때 일수록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국론통일이다. 외부세력들에게 얕보이거나 이용당할 적전분열을 철저히 방지하고 국가의 결정된 목표를 향해 온 국민이 하나로 뭉치는 것이다. 민주정치를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다당제나 다양성, 언론자유가 국가위기 시에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하지 못하고 적전 분열을 일으켜 위기대응 능력을 약화시킨다면 그러한 민주주의는 수호할 가치가 없다. 지금이야말로 국론분열의 도구로서의 민주주의가 아니고 국론을 하나로 통일, 위기대응능력을 키우는 민주주의로 한국정치를 발전시킬 방도를 적극 모색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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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해외개입축소균형전략의 의미를 살핀다.
                                      
                                                                                      이 영 일 전 국회의원 

미국 시카고 대학의 존 미어세이머(John Mearsheimer)교수는 미국의 외교평론지인 Foreign Affairs지에 Harvard Kennedy School의 스테펀 월터(Stephen M. Walter)교수와 공동으로 집필한 논문(The Case for Offshore Balancing(July/Aug2016, Foreign Affairs))에서 미국의 새로운 대전략(Superior U.S. Grand Strategy)으로서 ‘해외개입축소균형전략(Offshore Balancing Strategy)을 제안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국제정치학에서 현실주의학파(Realist School)에 속하는 석학들인데 그간 미국의 대외정책입안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학자들인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특히 이번 미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의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후보와 공화당의 도날드 트럼프(Donald Trump)후보가 미국 대외정책을 해외관여보다는 국내문제에 중점을 두자고 주장하고 있고 2016년에 4월에 실시한 미국 내 여론조사(Pew Poll)에서도 응답자의 57%가 다른 나라들의 문제보다는 미국의 국내문제해결에 치중해야 한다고 응답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비추어 미국의 대외정책이 차기행정부에서 크게 바뀔 조짐을 보이기 때문에 영향력 있는 학자들의 대외정책변경에 관한 견해에 관심을 갖지않을 수 없다. 필자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미어세이머 교수와 월터 교수의 정책제안을 총체적으로 검토하고 제안된 정책관점 중 우리 한국이 유의해야 할 대목을 간추려 소개하면서 필자의 소견을 말하고자 한다.

                                          1.

 지난 25년 동안 미국의 대외전략은 흔히 자유주의 패권(Liberal Hegemony)추구로 불리는 전략(Grand Strategy)에 입각, 전개되어왔다. 물론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강조하는 구호나 슬로간, 정책의 중점이 바뀌었지만 그 기저는 자유주의 패권이론에 입각, 미국이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서 유일 최고의 패권(Hegemony)을 누리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최근에 들어와서 자유주의 패권전략을 싫어하게 된 것은 지난 25년간 되풀이 된 정책실패 때문이다. 

이 전략은 아시아에서 인도와 파키스탄, 그리고 북한의 핵무장을 막지 못했고 중국이 인접해역에서 현상유지(Status Quo)에 도전하게 했다. 유럽에서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크리미아를 합병하면서 미국과 러시아 관계가 악화되었다. 중동을 보면 미국은 지금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싸우고 있지만 승리의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미국은 이라크와 리비아에서 정권교체(Regime Change)를 끝내고 시리아에서도 정권교체를 추진했지만 내전이 국제적으로 확산되면서 혼란이 가중되고 이런 와중에서 이슬람주의운동은 대부분의 지도자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아랍세계로 파급(Metastasis)되면서 이슬람국가(ISIS)를 출현시켰다. 
미국이 주선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협상은 실패, 두개 국가방식으로의 해결이 어렵게 되었다. 민주주의는 세계적으로 약화되고 있으며 미국이 자행한 고문이나 기획 살인 등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행위로 말미암아 인권과 국제법의 옹호자로서의 미국의 이미지는 심각히 퇴색되었다. 미국이 이러한 실패를 거듭하게 된 것은 자유주의 패권추구라는 오도된 전략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이 전략의 핵심은 미국이 주요지역(Key Area)에서의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요구에 부응하는 대신에 세계 도처에서 민주주의를 촉진하고 인권이 위협받는 곳이면 어디에서라도 미국의 힘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미국이 세계경찰로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국제법(International Institutions), 대의정부, 시장개방, 인권에 기초한 세계질서를 수호하는데 미국의 힘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미국은 세계에서 지정학적으로 가장 축복받은 나라였다. 한때 주미프랑스대사였던 장질 쥐세랑(Jean-Jules Jusseand)은 “미국은 북으로는 약한 이웃, 남으로는 더 약한 이웃, 동서양쪽으로는 물고기만 있는 대양을 끼고 있는”국가로서 자원은 풍족하고 역동적인 인구를 배경으로 세계최대의 경제대국, 수천 개의 핵탄두를 가진 대국이기 때문에 미국본토가 외부로부터 위협받을 가능성이 없는 국가라고 말했다. 이런 천혜(天惠)의 환경 때문에 미국인들은 세계를 자기들의 이미지에 맞게 재형성시키려는 저돌성을 벌였다. 
미국은 이러한 돌출적 충동에 기초한 군사개입확대정책을 구사하지 않고도 미국의 힘과 안정을 유지하고 지구 최강자로 남을 전략을 만들 수 있다. 지금 양 교수가 제안하고 있는 해외개입축소균형전략(Offshore Balancing Strategy)이 바로 그 대안이다. 

                                         2. 

 해외개입축소균형전략(이하에서 균형전략으로 약칭함)은 미국이 다른 사회를 미국의 가치에 맞게 재구성하려거나 세계경찰이 되겠다는 야심적인 생각을 접고 우선 서반구(Western hemisphere)에서 미국의 지배적인 지위(Dominance)를 유지하면서 유럽과 동북아시아, 페르샤 만(灣)에서 잠재적인 패자(Potential Hegemon)가 등장하는 것을 막는데 힘을 집중하자는 것이다. 

미국은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직접 해외로 군사 개입하는 것을 자제하고 새롭게 부상하는 세력에 대한 견제는 가능한 한 현지에서 도전받는 세력이 감당토록 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국가로서의 미국의 지위를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고 미국본토만을 지키자는 것도 아니다. 이 전략은 미국을 가능한 한 힘 있는 국가, 이상적으로 말하면 서반구뿐만 아니라 지구상에서 지배력을 갖는 국가로 유지시키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전략이 고립주의(Isolationism)와 다른 점은 서반구이외에도 미국인의 피와 물자를 제공해야 할 지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바로 유럽, 동북아시아, 페르샤 만 지역이 여기에 해당한다. 유럽과 동북아시아지역에서는 미국이 서반구에서 누리는 것 과같이 이 지역을 지배할 지역패권국가가 출현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은 경제적인 영향력도 충분하고 정교한 무기를 개발할 능력, 자기 힘을 지구상에 투사할 잠재력도 갖추면서 미국과의 무기경쟁에 더 많은 자산을 투자할 능력을 가질 국가의 출현에 관심을 갖는다. 
지금 러시아와 중국이 미국의 표적인데 러시아는 이제 유럽에서 패자가 될 가능성은 줄어들었다. 독일을 중심으로 한 나토세력이 러시아를 견제할 만큼 힘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페르샤 만에서도 이란이나 이라크가 지역패권을 장악할 가능성은 줄어들었다. 이라크의 정권교체와 이란 핵협상 타결은 미국에 도전할 지역패권국가의 출현가능성을 줄였다. 따라서 미국은 이러한 지역에서 군사개입을 줄여 나가고 지역 국가 상호간에 균형을 유지하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맡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북아시아의 상황은 다르다. 미국은 중국의 인상적인 성장과 굴기가 미국의 지도력에 도전할 잠재적 패권추구의 환경을 조성하였으며 특히 이 지역에는 중국을 견제할 다른 강자가 없다. 물론 미국의 동맹국들이 있지만 서로 떨어져 있어 유효한 중국견제가 어렵다. 이러한 지역에는 미국이 직접 군사적으로 개입하고 미국의 힘을 유지함으로써 중국의 패권추구를 막는 것이 균형전략이다. 

지난 30년 동안 중국은 미국이 지난날 해외군사개입에 끼어들지 않고 경제건설에 매진, 강대국 반열에 오른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경제발전에 주력하여 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미국은 중국이 이 지역에서 패자(覇者)로 등장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이 점은 미어세이머 교수의 평소의 지론과 일치한다) 

                                             3.

 균형전략은 미국의 해외군사개입을 줄임으로써 현지국가들이 자국의 안전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하게 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냉전 이후 미국의 보호에 무임승차만 하는 동맹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게 된다. NATO의 경우 군사비용의 76%를 미국이 부담해 왔는데 이는 배리 포슨(Barry Posen)교수가 “부자를 위한 복지지출”과 같다고 비꼴만했다. 

또 균형전략은 테러위험을 줄이기도 한다. 자유주의 패권정책은 토양이 맞지 않는 곳에 민주주의를 심는다면서 군사적으로 점령하거나 현지 정치상황에 개입하였는데 이러한 행동은 민족적 분노를 유발한다. 저항세력들은 미국과 직접대결하기에는 너무 힘이 약하기 때문에 테러에 호소한다. 특히 미국은 정권교체를 통해 미국의 가치 확산을 추구함으로 해서 기존통치제도의 역할은 약화되고 폭력적인 극단주의자들이 판칠 통치부재 공간 을 만들어 주었다. 

앞으로 미국은 중요한 이해가 걸린 지역이 잠재적인 패권국가에 위협받는 경우에 한하여 해외에 미군을 주둔시켜야 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반미가 일어나지 않고 미군을 구세주로 여긴다. 그러나 위기가 해소되면 미군은 곧장 철수하고 현지정치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 
끝으로 자유주의 패권논자들은 미국이 핵 비확산을 보장하기 위해서도 해외개입을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국의 역할이 줄어들거나 주요지역에서 철수한다면 미국보호에 익숙한 국가들은 스스로 핵을 개발하여 자신을 보호할 길을 택할 도리밖에 없을 것이다. 이점에서 아직까지 핵무기의 확산을 완전하게 막을 수 있는 전략은 없는 셈이다. 모든 국가들은 공격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핵을 가지려고 하는데 미국이 정권교체(Regime Change)를 추구하면 할수록 이러한 두려움은 더 커진다. 

그러나 해외개입축소균형전략에 입각하여 미국이 군사개입을 줄이고 정권교체를 추진하지 않는다면 핵 확산논자들의 명분도 약화될 것이다. 그러나 핵무기를 꼭 갖겠다고 결의한 국가들의 핵무장을 막아내기 힘들 것이다. 최근 이란 핵협상의 성공은 예방전쟁이나 정권교체보다는 잘 조절된 다자압력과 엄격한 경제제재가 더 좋은 방도임을 알게 해주었다. 만일 미국이 안보 공약을 축소한다면 취약한 국가들 가운데는 핵 억지력을 추구할지 모른다. 이것은 결코 바람직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핵을 완전히 막는다는 것은 비용도 많이 들고 성공하지도 못할 것이다. 

1945년 이래 10개국이 핵 문턱을 넘었지만 그렇다고 지구질서가 와해되지도 않았고 핵을 가졌다고 해서 약소국가가 강대국으로 변형된 일도 없으며 경쟁 국가를 공갈로 굴복시키지도 못했다. 핵 확산문제는 아직도 미국이 우려해야할 사항이지만 이 문제의 해법도 해외개입축소균형전략으로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4.

 중국은 미국의 아시아재균형전략에 따라 중국견제를 강화하는 미국을 상대로 평화적인 세력전이(勢力轉移)론을 내세우면서 우선 미국이 중국을 미국과 대등한 강국으로 대우하는데 합의, 양국관계를 신형대국관계로 발전시키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을 미국과 동일한 대국반열에 올리자는 주장에 난색을 표시하고 앞으로 세월이 흘러 결과적으로 대등해질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 당장 대등하다는 모자를 씌울 수는 없다고 말하고 상호간의 협력을 통하여 양자관계를 능력에 상응하게 전개시키자고 대응한다. 중국은 미국과 역량이 대등해지는 것이 목표일수는 있어도 21세기 안에 그렇게 되기는 힘들다고 미국 전문가(Joseph Nye 등)들은 말한다. 미국의 아시아 전략은 미국의 새 행정부를 누가 맡게 되더라도 해외개입축소전략을 추구하겠지만 중국이 동북아시아 지역의 패자로 부상하는 것을 막겠다는 미국의 목표는 변할 것 같지 않다. 이점에서 한미동맹을 안보의 기본 축으로 삼으면서 중국과의 협력동반자관계를 유지하는 한국정부의 방침은 타당하다. 그러나 북한의 비핵화를 협상의 전제조건으로서가 아니라 해결해야할 협상의 과제로 정의하면서 남북관계를 풀어나가는 지혜도 우리에게는 필요한 방향이 아닐까. 함께 모색해야 할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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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동북아시아공동체연구재단이 2016년 6월 16일 서울프레스센터에서 “남북대화 어디로”라는 제목으로 개최한 세미나에서 발표한 이영일의 기조연설전문이다 

이제 자주 외교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한중정치외교포럼 회장 이 영 일 

 1. 들어가면서 

 2016년 1월 6일 북한의 제4차 핵 실험과 뒤이은 탄도미사일 발사가 있은 직후 미국과 중국은 북·핵 처리를 논의했다. 2월 24일 미국의 존 케리 국무장관과 중국의 왕이(王毅)외교부장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결의 내용을 협의한 후 양국은 북한에 대해 강도 높은 제재를 결의하되 제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수단인 만큼 한반도의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는 협상도 병행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미국은 비핵화가 전제되지 않는 평화협정은 있을 수 없지만 제재에 병행하는 비핵화협상의 필요성을 인정, 제재와 협상의 병행이라는 접근방식에 합의했다. 앞으로 어떤 형태의 대북 협상이 열릴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북한의 김정은은 7차당대회에서 당 규약을 일부러 개정, 핵·경제병진노선을 명문으로 규정해 놓았기 때문에 이를 폐기, 변경시킬 협상에는 쉽사리 응하지 않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중국이 북한을 협상으로 끌어낼 미끼는 북한이 오래 동안 주장해온 휴전협정의 평화협정에로의 전환일 것이다. 북한은 미국과 북한만이 휴전협정(Cease-fire)의 서명주체로서 양자 간의 평화협정을 통해서 한국전쟁을 법적으로 종결하고 주한미군이 철수해야하다고 주장해왔기 때문에 이 문제를 주제로 열리는 미·북양자회담이라면 북한도 응할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해서 검토해야할 또 다른 과제는 한반도에서 전쟁상태를 법률적으로 종결시키려면 현재의 휴전협정이 “정치적 수준의 새로운 협정에 의해 대체될 때까지 계속 유효하다”고 규정한 휴전협정 5조 61항의 처리문제다. 

종전에 관한 국제법의 최근 흐름은 한반도의 경우 비핵화실현을 바탕으로 남북한 간에 전쟁상태가 종결되었음을 확인하는 유엔안보리의 결의로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이하 한반도 평화문제에 임하는 미중양국의 태도를 차례로 살펴보자. 

 2. 강대국들의 평화에 대한 태도검토 

 한반도가 포함된 동북아시아지역에는 1975년에 유럽에서 성립한 헬싱키 체제-구주안보협력회의(CSCE)와 같은 역내평화를 담보할 국제기구가 없다. 최근 카자크스탄 대통령이 제안하고 중국이 중심이 된 아시아교류 및 신뢰구축회의(CICA)는 아시아 집단안보를 표방하고 있다. 또 중국의 시진핑(習近平)주석은 지난 5월 21일 상해의 CICA총회에서 아시아의 안보는 아시아 국가들이 해결해야 한다는 아시아 집단안보론도 제기했다.
그러나 이 기구에는 한국은 가입했지만 북한은 회원이 아니고 동아시아 평화와 안보에 절대적 영향력을 갖는 미국이 참여하지 않고 있어 아시아 집단안보기구로 볼 수 없다. 현재 동북아시아는 국제정치 환경이 집단안보기구를 형성하기에는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고 특히 미국과 중국의 이해충돌이 심각하기 때문에 집단안보기구논의는 현시점에서는 수사(修辭)적 수준을 넘어서기 힘든 실정이다. 그런데도 한반도의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자거나 평화체제를 안출해야 한다는 주장이 미국과 중국 간에 북·핵 처리의 한 방법으로 거론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하 미중양국의 입장을 검토하기로 한다. 

가. 그간의 평화협정논의 회고 

1970년대부터 북한은 현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꿀 것을 미국에 요구해왔다. 북한은 휴전협정의 서명당사자가 미국과 북한이기 때문에 한국을 배제하고 미국과 북한이 평화협정을 체결, 이 협정으로 휴전협정을 대체해야 하고 한반도에서의 전쟁상태를 법률적으로 종결시키면서 주한미군도 철수시켜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한국을 배제한 평화협정주장은 다분히 선전적 주장이기 때문에 미국이 북측 제안을 수용할리 없었다. 
그러나 한국도 휴전체제문제를 이대로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1996년 한미양국은 남북한과 미·중이 참가하는 4자회담을 제안했다. 이 제안은 서명국인 중국을 회담 당사자로 포함시킨 점에서 진일보했다. 중국과 북한이 이를 수용, 1997년 12월 제네바에서 제1차 회담이 개최되었다. 이 회담에서 한국은 한반도의 비핵화나 양국 간의 신뢰관계 조성을 위한 조치 등 지금까지의 합의사항에 대한 이행을 요구한데 반해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우선으로 내세웠다. 1999년 6차까지 진행된 4자회담에서 북한은 미군철수, 한·미 대규모 전쟁연습 중지, 한반도로의 전쟁장비 반입 금지를 주장했다. 중국은 자국의 입장을 '조선반도 평화협정 초안'을 만들어왔는데 내용인즉 전쟁상태의 종식 선언, 불가침·내정불간섭, 군사적 신뢰구축 및 군축조치 등 일반적인 평화협정에 포함되는 사항들을 담았다. 
한국은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남북한이 주당사자가 되고 미·중은 증인 자격으로 서명하는 '남북평화합의서'와 미·중이 합의서의 효력을 보장하는 내용의 '추가의정서'를 채택할 것을 주장했다.

 나. 중국이 말하는 표본겸치(表本兼治)와 평화체제 

중국은 시진핑 정부의 등장과 더불어 2013년 1월 외교담당 국무위원인 양제츠를 내세워 한반도문제의 표본겸치론을 들고 나왔다. 북핵문제를 처리함에 있어 증상치료뿐만 아니라 원인까지를 함께 다스리자는 것이다. 북한이 안심하고 핵을 포기할 환경을 만들어주는 방식을 한반도 비핵화과정에서 함께 다루자는 것이다. 지금 중단된 6자회담의 9.19합의는 이러한 요구를 십분 반영했지만 북한이 핵 포기를 거부함으로써 수포로 돌아갔다. 현시점에서 중국은 한반도가 포함된 동북아시아 평화체제의 일환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모색하자고 말하지만 중국의 내심이 담긴 평화체제개념은 나오지 않았다.

또 중국은 북한의 핵 포기라는 표현대신에 한반도 비핵화를 주장한다. 중국이 의미하는 한반도비핵화는 북한의 핵 포기뿐만 아니라 필요시 핵사용 능력을 가진 주한미군의 철수까지를 포함한 개념임을 암시한다. 그간 중국은 소련과의 갈등이나 일본의 재무장 가능성 차단이라는 중국안보목적에 필요할 경우에는 미군의 한국주둔을 역사적 사실로 긍정해왔지만 미중갈등의 최근 양상에서 보면 내심으로는 주한미군철수까지를 협상대상에 포함시킬 것을 상정한다.

최근 THAAD배치에 대한 중국의 태도에서 이러한 의도를 규지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이 구상하는 평화체제는 주한미군의 철수를 암묵적 조건으로 하면서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남북한이 통일수단으로서 무력불사용을 문서로서 합의하고 미국과 중국이 이 합의의 효력을 보증하는 형식의 한반도 평화체제이다. 결국 중국의 목표는 자국과의 관계에서 한반도 전체의 완충지대화(Buffer Zone)일 가능성이 크다. 시진핑이 주변 국가들을 상대로 친성혜용(親誠惠容)의 외교원칙을 내세우면서 펼치는 담론인 운명공동체론도 바로 이러한 의도를 담고 있는 것 같다. 

 다. 아시아 재 균형론과 미국의 평화체제구상 

미국도 한반도의 휴전협정이 국제법이 생긴 이래 가장 오래된 휴전협정이란 점에서 변화된 환경에 맞게 새롭게 정의될 필요성에는 공감하고 있다. 미국은 2003년부터 시작되었던 6자회담의 실패 이래 북한의 비핵화 의지가 전제되지 않는 한 어떠한 협상도 무익하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유엔의 안보리제재나 미국의 독자제재도 그것이 비핵화를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점에서 북핵문제의 비군사적, 외교적 해결을 위해 중국의 주선으로 북한이 협상에 응해온다면 미국도 북한과의 대화에 응할 뜻을 밝히고 있다. 현재 북한은 비핵화를 전제한 어떠한 회담에도 응할 수 없다고 하지만 국제제재를 돌파하고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모든 협상을 거부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미국이 유엔제재를 통한 한반도의 비핵화유도상황의 진전과는 관계없이 자신이 추구하는 아시아재균형전략의 일환으로 중국견제로 보이는 외교활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남중국해에서 중국이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인공섬에 대한 영토권을 인정하지 않고 오바마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 베트남에 대한 무기 수출을 허용했으며 일본의 히로시마를 방문, 미일동맹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한반도에 THAAD미사일 배치도 추진하고 있다. 

미국의 이러한 조치가 유엔의 대북제재조치에 참여하고 있는 중국을 자극함으로써 대북제재에 대한 미중양국의 제재전선의 균열을 가져올 우려를 낳고 있다. 북한 핵문제를 미중관계의 맥락에서 활용하는 중국은 현시점에서 북한을 약화시킬 제재이익(制裁利益)과 자국의 국익을 면밀히 검토한다. 결론은 중국이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제재방식만을 따라간다면 북한에 대한 자국의 영향력만 줄어들고 미국의 대중국견제망만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우려다. 이러한 우려는 지난 6월 1일 시진핑 주석과 김정은의 친서를 휴대한 이수용 북한외상의 면담성사로 외교현실이 되었다. 미국으로서는 북한의 핵 포기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국익으로 추진되는 아시아 재 균형전략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미국과 중국이 현시점에서 논의하는 한반도 평화체제는 엄격히 말해서 미중 양자관계에서 필요한 수준의 한반도 평화논의이다. 군사충돌이나 소요나 갈등이 줄어드는 현상유지(Status Quo),즉 미중양국의 안보정책에 종속시키는 평화다. 따라서 미중양국이 말하는 평화협정이나 평화체제는 그것이 북한으로 하여금 핵을 포기시킴과 동시에 한국이 주도하는 통일도 포기케 하는 타협안으로서의 평화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나마 북한의 핵 포기라도 가시적 성과를 낸다면 다행일 것이다. 우리가 강대국들이 말하는 평화에 대해 경계심을 늦출 수 없는 이유다. 

 3. 한국의 선택 

 가. 우리가 맞을 어려운 상황 

 한국은 현재로서는 한미동맹을 근간으로 하여 대북제재를 통한 북한의 핵 포기유도를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도리밖에 없다. 그러나 유엔안보리의 강도 높은 제재에도 불구하고 국제적인 대북제재전선에 균열이 생기고 또 강대국들이 주도하는 협상이 북한의 비핵화가 아닌 핵의 현상동결이나 비확산으로 미중 간에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한국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들은 하나같이 한국의 입장을 어렵게 한다. 정답은 한국이 주도하는 자주적 해결이지만 그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우리가 지나치게 자주를 내세우면 미국과의 협력이 어려워질 수 있고 미국에만 일방적으로 끌려가면 한중관계를 어렵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강대국들과의 협력은 긴밀히 추구하면서도 모든 것을 강대국에만 맡기거나 의지할 것이 아니라 자주적으로 대비해야 할 전략을 미리 준비해두어야 한다. 출구전략과 Plan B를 준비하는 지혜다. 
현시점에서 우리가 검토할 수 있는 출구전략은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문제다. 인도적 지원의 중단은 북한의 지배층보다는 북한에서 변화를 주도할 장마당 세력과 주민들을 더 곤궁하게 만들고 이산가족들의 재회의 꿈을 차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도적 지원문제를 깊이 고려해야 한다. 핵개발에 필요한 물자나 자금이 북으로 들어가는 것은 철저히 차단해야겠지만 북한주민을 위한 식량이나 의료지원, 이산가족 상봉추진 같은 인도적 차원의 문제는 민간기구나 단체를 활용, 지원에 나서도록 해야 한다. 

 나. 자주적 결단과 준비의 필요성 

다음으로 Plan B를 준비해야 한다. 첫째 북한의 비핵화가 외교적 방법으로 해결불가능한 상황에 대비해서 한국이 독자적인 핵무장의 길을 강구하자는 것이다. 직접적인 핵무장이라기보다는 핵물질과 기술의 확보라는 핵무장 준비태세(Nuclear Hedge)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시화될 때 비로소 중국은 북한의 핵 포기를 강하게 밀어붙일 것이다. 한국의 핵무장이 일본의 핵무장으로 이어져서 동북아시아가 중일(中日)양국 간의 핵 대결체제로 바뀌는 것을 중국이 가장 꺼리기 때문이다. 요즈음 중국학자들 가운데는 한국은 미국의 압력 때문에 핵무장을 엄두도 못 낼 것이라고 단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둘째로 한반도 평화체제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남북한과 미중양국이 참가하는 ‘신 4자회담’을 준비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이 북한의 핵 보유를 공동으로 반대하고 있는 현실에 주목, 한국이 ‘신 4자회담’을 제의함으로써 국제사회의 대화수요도 수렴하는 한편 대화주도권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회담이 한국의 이니셔티브로 열려야 한국의 발언권이 계속 유지될 수 있다. 중국학자들 가운데는 일본과 러시아를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협상에 꼭 참여시킬 필요가 있는가에 회의를 표시한다. 남북한과 미·중만이 당사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남북한 관계의 전개형태로서의 대화, 교류, 협력, 제재 중 “제재”가 진행 중 임을 감안, 제재의 실효성 확보에 비중을 실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 Plan B는 당분간 공개적으로는 아니더라도 필수적으로 준비하고 구체화시켜야 한다. 현재 어떤 주변강대국도 우리의 분단을 아파하고 통일을 지원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의 붕괴를 기다리는 자세로도 통일의 길은 열리지 않는다. 이제 우리의 통일은 기다리는 통일이나 주어지는 통일이 아니라 쟁취하는 통일이어야 한다. Plan B의 집중적 개발과 준비가 절실히 요망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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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박사와 4.19와 나

 

이글은 2016년 4월 19일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서울 정동제일교회 아펜셀러 관에서 열린 이승만 포럼에서 행한 이영일의 강연 전문이다

 

                                             이 영 일 (4.19당시 서울대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3년생)

 

1. 들어가면서

 

이승만 포럼 측에서 저에게 준 논제가 “이승만 박사, 4.19와 나”라는 매우 특이한 제목이다. 4.19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이승만 박사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를 묻는 제목으로 이해한다. 오늘은 4.19혁명 56주년 기념일이다. 419혁명에 앞장섰던 한 사람으로서 이승만 박사에 대한 제 소견을 말씀 드리기 전에 지금부터 56년 전 불의와 부정에 항의하기위해 궐기했다가 목숨을 바친 183위의 영령들을 추모하는 묵념을 잠시 올릴 것을 제안한다. --(잠시 묵념)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평가하려고 하면 평가자가 가지거나 축적하고 있는 당해 사건이나 인물에 관한 지식이나 정보, 평가자가 지향하는 이념, 평가하는 시기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서면서 떠오르는 성경말씀 한 구절이 생각난다. 신약성경 고린도 전서 13장 11절로 기억하는데 “내가 어릴 때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다”는 바울 사도의 이야기다. 제가 지금부터 56년 전 20대 때인 4.19혁명당시에 생각했던 이승만 박사와 80대를 바라보는 지금의 시점에서 제가 생각하는 이승만 박사는 결코 같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우선 말씀 드리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승만 박사는 그의 90년의 생애가 한국 현대사와 궤를 같이하기 때문에 그분의 영향력 범위 안에 있던 사람들의 여러 가지 이해관계(정치적, 이념적, 사회경제적)에 따라 호오포폄(好惡褒貶)이 극에서 극으로 갈린다.

 

 그간 이승만 박사에 관해서는 최근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라는 우리 사회의 새로운 분위기가 조성되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분을 부정하거나 매도하는 이른바 ‘이승만 죽이기’가 우리 사회의 일반적 흐름이었다. 이러한 흐름에 연(沿)하여 가능한 한 이승만 박사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지 않는, 시쳇말로 “말을 아끼는 추세”가 이승만 박사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였던 것 같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는 대한민국의 국가로서의 위상이 제고되고 남북한 발전경쟁에서 한국의 우위가 실증되는 것과 때를 같이해서 초대대통령으로서 ‘이승만 대통령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 조명하려는 분위기가 싹텄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승만 죽이기‘의 목소리보다는 ’이승만 살리기‘의 목소리가 점차 들려오고 학자들 간에 이승만을 다시 보는 연구업적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제가 과문(寡聞)하거나 불민(不敏)한 탓도 있었지만 오늘 같은 포럼이 거의 매월 한 차례씩 지닌 6년간 지속되어왔다는 사실을 저는 오늘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다른 나라에서 같으면 이승만 박사가 서거했던 60년대 후반부터 등장했어야 할 이승만 연구나 포럼이 80년대에 겨우 싹트고 이승만 포럼도 21세기에 들어와서 겨우 월례행사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오늘 우리 사회의 현주소인 것 같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 작업은 역사학자들이 중심이 되는 것만으로는 공정성과 객관성을 기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한국 역사학자들의 역사연구범위는 가능한 한 조선사 연구로 시종되었으면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독립운동사까지 연장할 수는 있겠지만 해방 전후사나 대한민국의 수립과 발전과정의 연구, 분석, 평가는 정치학이나 국제정치학, 비교정치학자들에게 우선적으로 맡겨야할 과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역사학자들은 대개 일국사(一國史)적 안목이나 도덕적 기준에서 사물을 관찰하기 쉽고 법통이나 치적평가를 선악을 중심으로 보는 경향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학이나 국제정치학(외교사 포함), 비교정치학은 한국과 같은 신생국이 나라세우는 Nation Building 과정에서 직면하는 여러 가지 복잡다단한 내외의 도전을 비교, 분석하면서 상황의 의미를 객관화하는 방법론에 의지하기 때문에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 평가에서 현실성과 객관성을 가질 수 있다. 이점에서 작금에 거론되는 한국현대사 교과서의 집필 주체도 한국사 전문가들에게만 맡기는 것으로는 부적절하고 오히려 정치학과 비교정치학자들이 더 큰 역할을 맡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이와 관련해서 유념해야 할 것은 이승만 살리기가 이승만 죽이기의 재판(再版)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승만을 긍정하고 추앙하고 숭배할 자료만을 수집하고 이러한 평가를 토대로 한국의 현대사를 재단(裁斷)하려고 한다면 상당한 반론에 직면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승만 죽이기가 이승만의 철저한 부정에만 치중했기 때문에 이승만 살리기의 필요성을 자극한 것처럼 이승만 살리기도 지나친 과찬이나 추앙(推仰)으로 흘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정치지도자는 누구나 공(功)과 과(過)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지적하여 후세에 귀감을 삼도록 해야 할 것이다. 특히 21세기 한국의 오늘을 사는 우리 국민들은 대한민국의 탄생과 존속과 발전의 기초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역사 속에서 되돌아본다면 이승만 대통령의 지도력과 예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 사회는 이승만 박사의 90평생의 어느 한 시기(이승만 생애의 20분의 1정도)만을 떼어내어 그분의 과오를 들추면서 욕하거나 부정해왔지만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항상 편치 못했던 것은 그 분이 우리나라 초대대통령이었고 우리 Nation Building에 끼친 기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지금 국민들 가운데는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을 이렇게 홀대, 폄하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태도인가를 놓고 반성하는 사람들도 점차 늘고 있다.

영국의 정치학자 Bernard Click은 정치를 멋있게 정의했다. 즉, 정치란 한 나라의 정치공동체의 존속과 발전에 기여한 정도에 비례해서 거기에 상응한 몫을 나누는 과정이라고.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의 존속과 발전에 기여한 몫을 공헌으로서 제값대로 평가해주고 동시에 과오를 지적하는 것이 지금 우리 후대들에게 주어진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러한 맥락과 문제의식에서 “이승만 박사와 4.19와 나와의 관계”를 살피기로 한다.

 

2. 나의 청소년 시절과 이승만

 

저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추억을 감히 인문학적 표현을 빌려 “나와 이승만 박사와의 만남”이라고 한다면 건방진 태도 아닐까. 이승만 대통령은 해방 다음해인 1946년 9월 필자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부모님들에게서 훌륭한 독립 운동가, 나라의 큰 지도자라고 들었다. 초등 3학년 때인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고 그 때부터 대학교 3학년 되던 1960년까지 대통령은 오로지 이승만 한 분뿐이었다. 그 시절 이승만 박사는 국민 모두에게 대통령의 동의어로 받아들여졌다.

 

제 삶속에서 이승만대통령과 맨 처음 연관된 일은 광주서중 2학년 때인 1954년 6월에 일어났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제막식에 이승만 대통령이 제 모교인 광주서중을 방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관행으로는 대통령의 방문 시 학생들이 시민들과 함께 출영하는데 이때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다는 광주서중과 전남여중생들이 출영을 맡았다. 제 어머니는 “나라님” 출영을 나간다고 하여 잘 다려놓은 교복을 내줘서 입었던 기억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다. 광주에서 14Km 가량 떨어진 송정리비행장까지 부슬비를 맞으면서 도보로 행진, 출영을 나갔지만 기상사정으로 대통령의 광주방문은 취소되었다.

이날 학생들은 먼 길을 비 맞으면서 되돌아왔지만 누구하나 불평불만을 내뱉지 않았다. 먼발치로라도 말로만 듣던 이승만 박사를 한번 못 본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을 뿐이다. 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카리스마의 극치였다. 학생 탑 건립위원회는 이승만대통령에게 ‘학생운동기념탑’이라는 휘호 써주기를 청했는데 대통령은 원안(原案)에 ‘독립’이라는 두 글자를 첨가 “光州學生獨立運動紀念塔”이라는 휘호를 써주었다. 이 대통령은 휘호를 주는 자리에서 "1919년 3.1운동으로 점화된 독립운동의 열기가 10년을 지나면서 자칫 시들해지는 바로 그 때인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외치고 나옴으로써 독립운동의 열기가 다시 타올랐다“ 회고하고 해외에서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큰 용기와 희망을 준 사건이었다고 술회했다는 것이다.

 

1955년 광주일고에 진학하면서부터는 중학교 다닐 때 영문도 모르고 선배들과 함께 휴전을 반대하는 관제시위에 동원되어 참가했던 시절과는 달리 내 또래 친구들 간에도 정치의식이 조금씩 싹트면서 시국이야기를 곧잘 나누었다. 특히 동아일보의 사설을 매일 읽고나오는 친구 한 사람이 화제를 독점하면서 국내정치를 소재로 매일 쉬는 시간마다 토론했다. 저도 이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신문사설을 열심히 읽었다. 이승만 박사이야기보다는 민주당의 신익희 씨나 조병옥 박사 이야기에 관심이 쏠렸으며 특히 4사5입 개헌 이야기는 우리 학생들에게도 큰 흥밋거리였다.

 

136표면 가결될 자유당의 개헌안이 자유당의 이용범의원이 잘못투표함으로써 135표로 1표 부족사태가 발생, 개헌안이 부결되었는데 이를 4사5입으로 처리, 개헌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용범의원은 저와 같은 함평이씨(咸平李氏)였는데 그는 입구(口)자가 있는 투표지에 O표를 하라는 원내총무의 지시를 받고 투표용지를 받아 보니 옳을 가(可)자에도 口자가 있고 아니 부(否)자에도 口자가 있어 두 쪽 모두에게 O표를 한 것이 투표를 무효로 만든 원인이었다. 그 정도로 무식한 수준의 의원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자유당에 대한 국민적 혐오를 유발하는 것이었다. 자유당을 싫어하고 반대하는 심리가 내심에 쌓이기 시작했다.

 

3. 저의 대학시절

 

1958년 일고를 졸업하고 저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에 진학했다. 이 때는 6.25의 전재복구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는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이 흑 수저로서 가정교사로 입주하여 공부하였다. 저도 얼마 있다가 친척집 아들을 가르치기로 하여 숙식문제는 해결되었고 성적이 오를 경우 등록금 보조도 약속받았다. 입학식이 끝난 후 광주에서 다니던 교회목사의 권고로 장충단에 있는 서울 경동교회에 대학생으로 등록을 하고 동대문 시장의 헌 책 방을 뒤지면서 대학 내에서 진보적인 채 할 수 있는 책 몇 권을 헐값에 샀다.

유물사관으로 역사를 보는 세계사 교정 5권, 전석담의 조선경제사, 백남훈의 조선 봉건사회경제사, 반 듀링 론 등 학내에서 진보를 앞세우면서 좀 유식한 채 하는 친구들과 입씨름할 책을 구입하여 탐독했다. 내 인생이 요즈음 말로 표현하면 ‘운동권’으로 변하는 과정이었다.

이런 책의 내용을 놓고 날 새가면서 토론했고 책에 담긴 내용을 한국현실에 대입하면서 한국사의 현 단계를 ‘반봉건 민주주의 혁명단계’로 규정하고 경제적으로는 미 제국주의에 예속된 매판자본에 의해 한국경제가 수탈되고 있다고 분개했다. 특히 집권당인 자유당은 이승만이 친일파숙정을 외면하고 그들과 제휴했기 때문에 친일 관료배들이 국권을 농단한다고 진단했다.

 

이런 지적 분위기속에서 나는 학내 정치학과생들이 중심이 된 사회민주주의 연구 서클인 신진회에 가입하여 선배들과의 토론에 참여하였다. 신진회는 류근일 사건 등으로 유명했고 정치학과 선후배들의 주류서클이어서 참여한 것 자체가 매우 자랑스러웠다. 그 당시는 활동보다는 연구와 토론이 주제였기 때문에 Lenin의 Imperialism이나 Rudolf Hilferding의 Financial Capitalism을 원서로 구입, 영어공부 겸 지식습득의 수단으로 연구하고 연구결과를 발표하면서 사회과학의 비판적 측면을 학습하였다.

 

이런 와중에 사회민주주의자로 알려진 조봉암(曺奉岩) 선생이 공산간첩으로 몰려 사형당하고 경향신문이 폐간되고 국가보안법이 개악되어 인심혹란죄(人心惑亂罪) 같은 항목이 설치되는 등 적어도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민주역행현상이 줄이어 일어났다. 우리 학생들은 이 모든 것이 이승만이 조종한다고 생각했다. 민주공화국을 만들어놓고 정부 스스로가 헌법을 유린하고 갈수록 강권독재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고 단정했다. 이승만이 말하는 민주주의와 한국의 현실은 너무 유리되었다. 학교에서 배운 민주주의와 우리가 현실에서 목도하는 민주주의는 너무나 달랐다.

 

자유당 정권에 대한 미움에서 민주당에 대한 선호가 지식인 사회는 물론이거니와 시골이 아닌 도시에서는 갈수록 팽배했다. 여촌야도(與村野都)는 당시 선거의 일반적 흐름이었다. 이에 당황한 자유당은 지방자치법을 개정하여 6.25전쟁 기간 중에도 실시해왔던 지방자치단체장의 선거를 없애고 시장 군수 임명제를 실시하면서 1960년에 실시될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대비했다.

그러나 정부통령 선거가 공고된 기간 중에 야당 대통령후보였던 조병옥 박사가 암으로 서거하는 바람에 이승만 대통령은 사실상 무투표당선이 확정되었고 다만 미국과 달리 정부통령 런닝 메이트 제가 아닌 한국에서는 부통령을 국민직선으로 선출해야했다. 1956년에 실시된 제3대정부통령 선거 때는 대통령과 부통령의 당적이 달랐다. 야당의 장면(張勉)씨가 부통령에 당선되고 여당의 이기붕 씨가 낙선했는데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이러한 실패가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자유당의 목표였고 미국식 민주주의를 선호했던 이승만 대통령도 정부통령이 동일정당에서 나오는 것이 순리라는 입장을 누차 표명한 바 있었다.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지만 만일 정부통령이 같은 당에서 뽑히는 미국식 선거제도였더라면 3.15부정선거는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4. 4월 혁명의 전개

 

1960년 3월 15일에 실시된 제4대 정부통령 선거는 사실상 부통령선거였지만 관권선거의 극치였다. 유권자의 정치적 의사표시를 철저히 왜곡하는 부정선거였다. 전 국민이 피부로 실감할 정도의 부정선거였다. 부정선거규탄의 함성이 전국각지에서 터져 나왔다. 이 과정에서 1960년 4월 11일 부정선거 규탄 데모를 하다가 사망한 김주열 군의 시신이 마산앞바다에서 물위로 떠오르면서 국민적 분노는 불길처럼 솟았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국민들의 구호는 ‘이승만 정권타도라기보다는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것이었다. 조봉암 선생은 사형 당했고 조병옥 박사도 병사하여 마땅한 야당의 대통령 후보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승만 퇴진을 요구하기보다는 우선 부정선거 규탄으로 국민들의 주장은 모아졌다.

 

그러나 데모가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경찰들의 데모진압이 강경해지면서 반정부시위는 변증법적 진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양(量)이 축적되면 질(質)적 변화를 가져온다는 질변율(質變律)이 적용되기 시작했다.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구호가 ‘독재정권 물러나라’로 바뀌기 시작했고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생들의 시위에 대한 자유당 깡패들의 테러가 알려지면서부터 드디어 전국 각 대학들은 4월 19일을 기하여 총궐기하게 되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새벽에 닭이 울듯이 전국 대학생들은 너나없이 반정부 시위에 떨쳐나선 것이다.

자유당 정권은 무력으로 시위진압을 시도, 183명의 시위대들의 목숨을 앗아갔고 수 천 명의 학생들에게 부상을 입혔다. 국민들의 분노는 치솟았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계엄군은 데모진압에 나서지 않았고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가진 미군사령관과 당시 주한 미국대사 Walter p. McConaughy는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권고했다. 계엄군은 중립을 표방함으로써 자유당 정권에 대한 충성을 포기했고 이승만 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지철회라는 압력 앞에서 대통령은 하야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이승만 정권을 옹호하다가 자칫 한국 국민들이 반미(反美)로 태도를 바꿀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승만 박사의 하야를 촉구하고 하와이 망명길까지 신속히 마련해주었다.

 

당시 서울대학교는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3년생들이 주동이 되어 데모에 필요한 준비를 서둘렀다. 선언문은 몇몇 친구가 초안을 마련했지만 최종적으로 채택된 것은 정치학과 3학년 이수정(지금은 고인, 문화공보부장관 역임)이 작성한 선언문이었다. 선언문의 요지는 “한국 학생운동이 적색독재를 반대했던 것과 똑같은 논리의 연역에서 백색독재에 항거함을 자부 한다”면서 “부정과 불의에 항거하기 위해 진리의 상아탑을 박차고 거리로 뛰쳐나왔다”고 시위입장을 밝혔다. 4월 25일 “학생의 피에 보답하자”는 피켓을 든 교수단 데모에 이어 이승만의 하야성명이 발표되었다.

 

대통령 하야와 때를 같이하여 서울 시가지는 무규제의 혼란에 휩싸였다. 파출소는 불타고 경찰들은 근무지를 이탈, 모두 도망쳤기 때문에 경찰서들은 텅 빈 공간으로 방기되었다. 이때 학생운동은 두 패로 갈렸다. 학생들이 질서유지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파가 있었는가 하면 혁명의 가장 정상적 질서는 ‘파괴와 혼란과 무질서’이기 때문에 혁명화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제4계급으로서의 건달들이나 좌판상인들이나 껌팔이, 구두닦이들이 앞장서는 파괴활동이 더 지속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필자는 두 주장이 모두 일리는 있지만 당시의 상황에서는 질서유지의 주체가 학생이 되어 파괴를 막아야한다는 견해를 지지했다.

결국 4.19 직후 사태는 질서유지 파들이 장악했고 계엄군도 여기에 협조하였다. 다행이도 북한공산당이 배후에서 주도했다고 인정할만한 공작이나 준비는 전무했던 것 같았다. 이 당시 혁명적 질서를 강조하던 친구들 가운데는 그 후 여러 형태의 친북좌경사건에 휘말리거나 사회활동에서 낙오되어 지금은 생사조차 알 길이 없다.

 

5. 4.19이후의 학생운동의 흐름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면서 우리 사회는 국가의 진로를 놓고 심각한 토론이 사회 각 분야에서 일어났다. 서울대학교의 경우 세 가지의 큰 흐름이 등장했다. 하나는 학생회가 중심이 되어 펼친 새 생활운동이었다. 관용차량의 사용(私用)반대나 양담배 안 피우기 운동, 질서 지키기 운동, 공명선거추진운동 등 우리 사회의 일반적 비리를 척결하자는 것이다. 두 번째로 관심을 끈 움직임은 민족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우면서와 후진성극복을 통한 국가근대화연구 활동이었다. 문리대 사회학과나 서울상대 경제학과 등에서 주도하는 운동이었다.

 

셋째로는 7.29선거이후로 등장한 민족통일 운동이었다. 한국이 겪는 모든 어려움의 근원은 외세가 물고 온 분단이기 때문에 독재정권을 타파한 열정으로 민족의 발전을 저해하는 3.8선을 타파하는 통일운동이 이 시대를 바로 사는 청년운동의 길이라는 주장이 대학운동의 새롭고도 강렬한 흐름으로 등장했다.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운동의 결성이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이 시기에 학생들에게 가장 자극적이었던 뉴스는 우주과학 분야에서 소련이 미국을 앞질러 Sputnik 발사에 성공했고 후르시초프가 유엔에서 미국을 상대로 평화공존을 제의하면서 전쟁하지 않고도 발전경쟁에서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이긴다고 큰 소리를 친 것이다. 여기에 주일본 미국대사인 마이크 맨스필드가 한국통일 모델로 오스트리아 식 중립화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발언한 것도 큰 자극제였다.

 

 4.19 이후 정권을 잡은 민주당은 혁명의 주체세력들인 대학생들이 갈망하는 이상과 꿈에 걸 맞는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던 학생들의 대다수는 자유당 정권이 정권연장에만 급급했을 뿐 국민들에게 필요한 국가발전의 꿈과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이 컸는데 이 점은 민주당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3선 개헌으로 장기집권의 길만 열었을 뿐 장기집권의 대가로서 국민들에게 꿈과 비전을 주지 못했다. 부흥부장관(復興部長官) 송인상(宋仁相)씨 등이 중심이 되어 경제개발계획을 세웠다고는 하지만 이 계획이 정권의 중심 어젠다가 되지 못했고 국민들이 원하는 근대화의 비전으로 발전시키지도 못했다. 인사정책도 집권연장을 위한 친일관료정상배들을 선발, 권력의 주변에 포진시키고 정권안보를 위해 경찰들의 권력만 강화시켰다.

 

제가 볼 때 이승만 대통령은 개헌으로 3선의 길을 열고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당시 81세의 노인 대통령으로서는 경륜 있는 새 정치를 펼치기에는 육체적인 한계가 찾아왔던 것이다. Vilfred pareto는 그의 유명한 ‘권력순환이론’에서 노쇠라는 육체적 몰락은 이념의 고갈을 수반하면서 필연적으로 엘리트 순환을 가져온다고 설파한 바 있다. Pareto의 권력순환이론이 이승만 박사에게 적중한 것이다. 이승만 박사는 집권기간이 늘어난 만큼 거기에 상응하는 대국민 서비스로서 근대화나 경제개발 같은 공공재나 꿈을 제공하지 못했다. 북진통일이나 안보위기강조만으로는 더 이상 국민들의 지지를 창조해 낼 수 없었다. 결국 무상독재(無償獨裁)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맞게 된 것이다. 이승만 정권 붕괴 후 아무런 준비 없이 정권을 장악한 민주당 역시 비록 단명으로 끝났지만 시대정신에 맞는 국민통합의 길을 제시하지 못했다. 4.19의 혁명에 국민들이 걸었던 기대는 그 후 모두 군사정권의 과제로 옮아갔다.

 

대한민국 체제는 북한의 수령정치처럼 우상화를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은 재임 중 자신의 생애나 업적을 정리하여 국민들에게 알리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북한처럼 독립운동의 역사나 건국과정의 어려움을 자료로 편찬하여 알리지도 않았다. 때문에 이승만 박사의 정체(正體)는 젊은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일반국민들에게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알 수도 없었다.

또 하와이로 망명한 후에는 ‘이승만 죽이기’라고 명명할만한 엄청난 모략과 비방이 쏟아짐으로 해서 이승만 박사가 81세 이전(1956년 이전)에 쌓은 기여나 공로는 모두 묻히고 과오만 나열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4.19당시 젊은 학생들은 대통령으로서의 이승만 박사는 알지만 그분이 독립운동과 건국을 위해, 한국전쟁과 휴전과 한미방위 동맹을 위해 어떻게 기여했는가를 바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바로 이 무지의 공간을 파고든 것이 친북좌파들이었다. 이승만 박사 때문에 적화통일이 안된 것을 몹시 애통해했던 친북공산주의자들이 나서서 4.19이후의 혼란을 틈타 반 이승만 모략책동을 치밀하게 펼쳤다.

 

6. 이승만 박사에 대한 모략책동

 

가. 소남한단정(小南韓 單政)론 비판

 

4.19직후 서울대민족통일연맹이 결성된 후 필자는 전국민족통일연맹 선전위원장으로서 활약했는데 이 때 한국의 각지에 잠재되어있던 공산 분자들은 제철을 만난 듯 민족통일연맹운동에 날 파리 떼처럼 몰려들었다. 이들 중에는 민청학련사건에 관련되어 사형당한 사람도 끼여 있다. 이들이 맨 먼저 들고 나와 나를 설득한 주제는 이승만의 건국노선을 소남한 단정노선(小南韓單政)이라고 공격한 것이다. 당시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김구(金九) 선생 중심으로 통일되었어야 할 나라가 이승만이 미국과 짜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했기 때문에 통일이 안 되고 한반도에 두 개의 분단국가가 세워졌다는 것이다. 매우 그럴듯하게 들렸다.

 

이 주장이 허구였음을 제가 깨닫는데 반세기가 흘렀다. 4.19혁명 50주년 기념으로 기획된 미래정책연구소의 학술세미나에서 “4.19세대가 본 이승만 박사의 공과 과”를 주제로 발표논문을 준비하면서 몇 가지 놀랄만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첫째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이 북한 땅에 그들이 오래 동안 염원했던 부동항(不凍港)을 마련할 목적으로 미소공동위원회의 결과와 관계없이 그들 점령지인 북한에 위성정권을 세우도록 1945년 9월 20일 북한군 점령사령관 치스차코프에게 스탈린이 지령했다는 사실이었다.

둘째로 우리나라 해방정국에서 민족지도자가운데 미국인 비서와 러시아인 비서를 기용, 정보를 수집 분석한 사람은 이승만 박사뿐이었다는 사실이다. 미국과 소련의 움직임을 전혀 모르면서 한반도에 독립국가 건설을 모색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인데 이승만 대통령만 이 유일하게 미국인으로서는 로버트 올리버(R. Oliver)를, 러시아인으로서는 에밀 구베로(Emile Gouvereau)를 두고 정보를 획득했다는 사실이다. 이 당시 북한에서 단독정부가 세워지고 인민군이 창설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군정당국은 아무 대책 없이 세월을 허송하면서 일제에서 해방된 한국 국민들의 주권회복을 기약 없이 천연시키고 있었다. 이 답답한 현실을 타개하기위해 이승만은 미국으로 건너가 유엔감시하의 자유총선거로 한국민의 주권회복과 적법한 독립정부를 수립할 방도를 마련, 미 국무성에 제시함으로써 유엔방식에 의한 정부수립의 길을 열었다.

 

소련군 점령사령관의 지시로 만들어진 북한 정권은 한마디로 소련의 괴뢰정부, 위성정부였으나 한국은 유엔감시 자유총선거로 국회를 구성하고 정부를 수립한 후 유엔총회로부터 한반도에 유일한 적법정부로 승인받았기 때문에 국가수립의 정통성에 아무런 흠결이 없는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적법 정부의 출현을 소남한 단정으로 비방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 곁들여 특히 놀라운 세 번째 발견은 이승만 박사가 1923년에 벌써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이란 논문을 써서 공산주의를 비판하고 자기가 꿈꾸는 정부는 그가 1904년에 발표한 “독립정신”에서 주장한대로 자유민주주의 정부였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민족지도자가운데 여운형(呂運亨)은 중국대륙에서 공산주의 ABC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번역하는 등 공산주의에 심취한 반면 그 밖의 인사들은 아나키즘에 흐르기도 했고 아니면 이념문제에 대해 문외한이기 일쑤였다.

김구(金九) 선생이 추구한 이념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바 없지만 그분이 이승만 박사보다는 나이가 한 살 아래지만 학문적 배경이 과거(科擧)를 준비하던 유생이었던 점으로 보나 외교투쟁보다는 의혈투쟁(윤봉길 의사나 이봉창 열사가 추구했던 노선)을 주도한 점 등으로 미루어 공산당이나 공산주의에 대해 명확한 개념을 가졌는지는 의문이다. 특히 1948년의 김일성이 주도한 이른바 4김 회담이나 남북협상에서 들어난 김구 선생의 태도는 그분의 대공관이 매우 불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민족이익을 사상이익의 우위에 두고 분단 없는 통일을 추구하기위해 이승만의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반대할 수 있다는 주장도 성립될 수 있지만 당시 북한이 남한의 치안능력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한 인민군이 창설된 것을 보고도 통일만을 추구했다면 공산화통일도 통일로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를 가졌다는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나. 부산정치파동과 양민학살문제

 

소남한 단정비판 이외에 이승만이 받는 다른 비판은 부산정치파동과 한강 폭파사건, 양민학살 사건 등이 있다. 그러나 부산정치파동은 6.25전쟁 중에 미국이 자기들 목적에 맞도록 한국전쟁을 끝맺기 위해 미국의 한국전 종전방침에 사사건건 맞서자 임기가 종료되기 직전에 있는 이승만을 대통령 직에서 끌어내기 위해 국회가 대통령을 선출하는 당시 헌법에 착안, 원내다수의석을 가진 한국 민주당을 꼬드기는 공작을 이승만이 미리 알아채고 군대를 동원, 국회를 겁박함으로써 미국의 책동을 저지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킨 사건이다. 이 사건은 어느 면에서 이승만을 비판할 대목이라기보다는 어느 면에서는 평가해야 할 대목이다. 한국통일을 바라는 한국민의 여망에 따라 전쟁정책이 수행되어야한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주장이 옳았기 때문이다.

미국에 놀아난 당시의 한민당(韓民黨)의 열등성, 한국내정에 마구 개입한 미국의 태도는 이승만의 반민주적 행태에 못지않게 비난받아야할 것이다. 결국 이승만의 이러한 대미외교자세가 반공포로석방, 한미방위조약체결로 이어졌던 것이다. 제가 과거 통일원 재임 중 모셨던 고(故)김용식 장관에게 이승만 대통령에 관하여 들은 이야기 한 토막을 여기에 옮기겠다. 이승만 박사는 6.25 동란에 참전,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한국을 지켜 준 미국에 사의를 표하기 위해 휴전 직후 1953년 10월 미국을 방문했다고 한다. 이때 이승만은 도착성명에서 한국에서 목숨을 잃은 미군병사 3만2000명의 희생에 감사한다는 이야기는 한마디 하지 않고 “우리 한국 국민들은 워싱턴의 겁쟁이들 때문에 통일을 상실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정도로 대미외교에서 국익을 강력히 앞세우는 외교를 펼쳤다는 것이다.

 

이밖에 양민학살 문제나 한강 철도 폭파문제도 비난받아야 할 이유가 되지만 그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결심사항이라기보다는 군사작전상의 필요가 더 컸고 또 개인으로서 자기 이익을 위해 취한 행동이 아님에 비추어 큰 과오로 보지 않겠다.

 

. 친일파 숙정문제

 

끝으로 친일파 청산문제 역시 이승만 박사가 책임져야 할 과오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친일파문제에 대해서는 이승만 박사의 입장이 일반인들의 생각과는 다른 측면이 있었다. 그는 194510월 임시정부요인환국기념만찬 석상에서 해외파와 국내파간에 친일문제를 놓고 열띤 토론이 벌어지자 이승만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선국왕이 총 한방 쏘지 않고 나라를 일본에 합병시킴으로써 2천만 조선민중이 친일하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만들었는데 조선국왕에게 물어야할 책임을 그간 국내외에서 일제 때문에 고생하면서 살아온 사람들 끼리 친일이냐 반일이냐를 따지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지금은 합심하여 나라를 세우는 일에 힘을 모아야 한다고 호소했다는 것이다.(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논리적으로는 옳은 말이지만 국회가 의결한 반민족행위처벌에 관한 법에 따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차원에서 시범적으로라도 악랄한 행동을 한자들에 대한 처벌을 단행해야 했는데 그것을 차일피일 하다가 6.25동란을 당하여 친일파응징은 손도 못 댔고 휴전 후에는 오히려 친일 했던 사람들을 대공기술자들이라고 하여 정부요직에 기용하고 오히려 독립운동가탄압에 앞장섰던 자들이 득세하는 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라. 토지개혁문제

 

남한의 좌익들은 해방 후 북한에서는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토지개혁을 실시했지만 이승만은 지주계급의 이익만을 옹호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1947년 북한에서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을 내세우면서 토지제도를 개혁한다는 정보를 얻은 후 즉시 한국형 농지개혁안을 만들어 토지개혁을 단행, 6.25 전시 하에서도 이를 적극 추진하였다. 북한에서는 잘 알려진대로 토지국유화는 있었어도 농민에게 토지가 분배되는 토지개혁은 없었다. 토지의 소유를 협동적 소유, 전 인민적 소유로 명칭을 바꾸면서 국유화를 했을 뿐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한 일은 없었다.

 

이승만 정부는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원칙으로 하여 소작농체제를 폐지하고 자작농체제를 확립했다. 조선조 500년 이래 양반계급만 재산을 소유하고 학문을 배울 수 있었던 나라를 누구나 공부하고 재산을 소유할 민주주의 시대로 바꾼 것은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가 아닐까.

 

마. 조봉암 선생에 대한 사법살인

 

죽산 조봉암 선생에 대한 사법살인은 이승만 대통령의 과오의 하나로 지적되어야 한다. 죽산 조봉암 선생은 자기 스스로 독립운동기에 택했던 공산혁명노선을 청산하고 대한민국의 정부수립을 위한 제헌국회의원선거에 참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김구, 김규식 선생 등 한국독립당이 참여를 거부한 제헌의회선거에도 참여하고 농지개혁을 추진하는 이승만 정부의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입각하여 농지개혁을 시행하는데도 기여하였다.

그러나 당시 국내정계는 이승만 대통령이후 가장 유망한 대통령 후보로 여론의 지지가 있는 그를 제거해야 한국보수 세력으로서의 자유당과 민주당이 계속 집권할 수 있다는 계산 하에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사형을 선고했다. 설사 사법당국이 그런 결정을 내렸더라도 형의 집행을 면제할 권한을 가진 대통령이 형의 집행만은 허가해서는 안 될 터인데 사형집행을 허가했던 것이다.

 

7. 끝마치면서

 

이승만 박사는 그의 생애를 조국의 독립과 발전에 헌신한 위대한 선각자요 민족의 큰 지도자였다. 한국처럼 좋은 지도자 복이 없는 나라에서 하늘이 준 큰 인물이었다. 그분으로 인하여 오늘의 대한민국이 탄생했고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해방당시 우리나라는 민주정치가 뿌리내릴 여건이 거의 갖춰지지 않은 나라였다. 전체인구의 80%가 문맹이었다. GDP의 통계가 잡히지 않을 만큼 빈곤한 나라로서 민주주의가 발전할 경제적 기초가 원천적으로 결여된 나라였다. 여기에 분단국가로서 건국초기부터 남북한 간에는 심각한 사상전이 이어졌고 급기야는 동족상잔의 비극마저 겪어야 했다.

 

그러나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황 하에서도 이승만은 문맹퇴치에 박차를 가했고 열악한 재정형편 속에서도 배워야 산다는 일념 하에 국민의무교육제를 밀어붙였고 지방자치를 실시함으로 해서 대한민국국민들을 국민으로서 정체성(正體性)을 갖도록 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미군이 주둔하는 밀착방어체제를 갖춤으로써 국가의 안보기반도 공고히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인생 70세에 귀국, 나라를 세우고 전쟁에서 국가를 방위하고 대한민국을 국가다운 국가로 기틀을 세우는데 12년의 세월을 바쳤다. 그는 3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던 1956년에 이미 81세의 고령이었다. 육체적으로 더 이상 정상적인 정무와 국사를 감당할 수 없는 시점에 왔던 것이다. 그는 마땅한 후계자를 찾지 못한 가운데 장기집권을 꾀하다가 수많은 젊은 학생들이 목숨을 잃는 비극을 보면서 혁명의 객체가 되는 큰 과오를 범했다.

 

 중국의 모택동은 이승만 대통령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난 과오를 범했다. 그는 이른바 문화대혁명이라는 10년 대란을 일으켜 전 중국을 폐허로 만들고 수천만의 동포가 굶어죽거나 테러로 죽음을 당하게 하는 엄청난 과오를 범했다. 양과 질적으로는 이승만과 비교도 안될 만큼 크고 무서운 과오를 범했다. 그러나 오늘날 모택동은 중국베이징의 천안문위에 그의 초상이 항상 걸려있고 중국공산당 만세와 함께 모택동 만세가 대형 현수막으로 걸려있다.

 

중국공산당은 1981년 6월 역사에 관한 중요결의를 통해 모택동의 공(功)은 7이요 과(過)는 3으로 결정했다. 중국 현대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모택동은 과오가 7, 공을 3정도로 봐주어도 너무 후한 평가일 것이다. 그러나 등소평(鄧小平)은 중국공산당이 일당으로서 계속 정권을 장악할 명분을 쌓기 위해 모택동의 공과 과를 7대 3으로 결정하였다.

문화대혁명의 책임을 물어 공산당이 모택동을 단죄한다면 중국공산당은 스스로 더 이상 집권할 명분을 가질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모택동을 의도적으로 살려야 중국공산당이 존속할 수 있다는 것을 등소평은 잘 알았기 때문이다. 이승만 박사도 그 분의 삶을 총체적으로 평가한다면 공을 7로, 과를 3으로 점수를 매겨도 결코 과장된 평가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 박사에게는 그를 죽이기에 나설 사람들은 많았어도 살리기에 나설 사람은 정치세력가운데 없었다. 이승만을 지지했던 자유당은 해체되었고 부정선거 원흉으로 처벌받거나 부정축재자로 몰려 단죄되었기 때문이다. 안창호 선생이나 김구 선생은 해방이후 냉전의 와중에서 건국이라는 어렵고 힘들고 중차대한 과업에 맞닥뜨려 투쟁한 일이 없기 때문에 찬사만 있고 욕이나 비난은 적다. 좋고 나쁨이나 공과 과의 평가는 일한 사람에게만 귀속되는 것 같다.

 

하와이에서 병들어 최후를 기다리면서 이승만은 모국에서 삶을 마치기 위해 귀국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청했지만 국민여론이 두려워 귀국허가가 거절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승만 박사의 귀국을 주선하고 필요한 경비도 지원했다는 글이 최근 김종필 회고록에 나와 있지만 그때는 이미 환국이 의미가 없을 만큼 건강이 악화된 시점이었다.

그러나 그분은 아직도 국민들의 마음속에 존경받는 존재로 남아있었다. 필자의 체험담 하나를 이 기회에 소개한다. 1965년 7월 21일경 이승만 박사의 시신이 서울로 돌아와 국립묘지에 가족장으로 묻힐 때 전국각지에서 그분 시신의 환국을 지켜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상경했고 도로연변에는 시민들이 도열, 애도하고 있었다. 이때 4.19에 앞장섰던 저와 더불어 제 친구들이 모여 하와이로 망명한 이승만 유해의 귀국을 반대한다는 시위를 벌였지만 이때 저희들에게 동조하거나 호응하는 시민들은 거의 없었고 오히려 우리들에게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결국 이곳, 저곳을 뛰어다니다가 도로교통법위반으로 걸려 남대문 경찰서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훈방당한 일이 있었다.

 

일반시민들은 이승만 대통령은 훌륭한데 그분이 인의 장막에 싸여 민심을 몰랐다거나 자유당 강경파 관료세력들 때문에 말년이 잘못되었다고 평가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다행히 1980년대의 시작과 더불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작업이 학계와 언론계에서 시도되고 그분의 건국과 관련된 업적이 제대로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많은 모략이 허위임이 밝혀지고 있고 특히 한미방위조약체결로 휴전 60년 동안 부분적인 남북충돌은 있었지만 동족상잔의 큰 전쟁 없이 경제발전을 이룩할 여건을 만든 이승만 박사의 기여가 새롭게 조명된 것도 잘 된 일이다. 현재까지 나타난 업적평가의 실적은 미약하다. 그러나 초대대통령으로서 이승만 박사의 공로를 그 적정형태에서 평가하고 국민들이 기억하도록 해주는 일은 민족의 긴 미래를 내다볼 때 서둘러야 할 일이다. 우리 후대들이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회고할 민족의 큰 지도자의 반열에 이승만 대통령을 올리는 작업이 오늘 이 포럼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강사 : 이영일(李榮一)

 

주요학력 및 경력 학 력

 

*광주·서중·일고(1955-58) 및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정치학과 졸업(1958-64)

*동국대학교행정대학원 수료(1968)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발전정책연구과정 1기 수료(1972)

*日本 츠쿠바(筑波)대학 외국인연구원(1988-90)

*중국 베이징 대학 국제관계학원 동북아전략연구중심 특약연구원(2009-2011)

*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드 외국어 대학 명예정치학박사(2003)

*광주 호남대학교 명예법학박사(2009)

 

경 력

 

1.정치경력

 

*제11,12,15대국회의원(통일 외교 통상위원)

*제12대 국회 국회문교공보위원장(1987-89)

 

2. 頂上外交참여

*한미정상회담(전두환 대통령-레이건대통령)공식수행(1985)

*유럽4개국(영국, 프랑스, 독일 벨기에)정상회담공식수행(1986)

*한중정상회담(金大中대통령-장쩌민주석) 공식수행(1998)

*한중정상회담(박근혜대통령-시진핑 주석)비공식수행(2013)

 

3.국토통일원 근무(1970-1980)

*통일연수원장(1급)

*교육홍보실장(1급)

*정치외교정책담당관(2급)

 

4. 사회활동경력

 

*한민족복지재단 공동대표로 6회 북한방문 (2001-2006)

*한중문화협회 총재(1998-2014 )

*한중정치외교포럼회장(2014~ )

 

5. 상훈 및 주요저서

*홍조근정훈장 수상(1979)

*벨기에정부 대십자수교훈장(1986)

*분단시대의 통일문제(전예원 1981)

*햇볕정책의 종언( 전예원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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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핵 폐기의 국제정치학

                                                 (이글은 2016년 헌정지 3월호에 발표되었다)

                                                                     한중정치외교포럼 회장 이 영 일(전 국회의원)

 

1. 2016년은 북한 핵무장여부가 판가름 날 마지막 시기다.

 

북한의 4차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발사시험은 한반도를 위요한 안보지형을 크게 변화시키고 있다. 북한이 수소폭탄이라는 이름으로 시도한 4차 핵실험과 인공위성이라고 포장한 탄도미사일 발사실험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이 실전배치의 직전단계에 이르렀음을 말해주는 도발이다. 이 때문에 북 핵과 미사일의 직접 피해 당사자인 한국을 포함하여 북 핵과 미사일발사를 좌시할 수 없는 주변국들은 하나같이 긴장하고 있다.

 

특히 ‘2016’년은 북한 핵문제를 연구해온 국제정치학자들이나 전략연구가들이 기술적 견지에서나 시점의 축적에 비추어 북한은 국제사회의 공인과 관계없이 핵 국가의 반열에 오르게 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북한의 2차 핵 실험이 끝난 후 한국을 방문한 재미국제정치학자 김영진 박사(전 미 국무성 고문)는 2012년 11월 26일 사단법인 4월회 초청강연에서 2016년이 북한핵무장의 저지냐 용인이냐를 판가름할 마지막의 해가 될 것이라면서 북 핵전문가들의 연구결과를 정리해서 발표한 바 있다.

 아니나 다를까 북한은 2016년 1월 6일 4차 핵실험을 수소탄 급으로 단행했다고 발표한데 이어 2월 7일에는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바야흐로 북한의 핵무장은 그 최종단계에 근접하고 있다.

 

2. 북 핵을 보는 한·미·중의 태도평가

 

가. 한국의 대응

한국은 북한과 1992년 한반도비핵화선언을 발표한 이래 한국에 배치된 미국의 전술 핵까지도 철수시키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모든 요구를 수용하면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 아닌 군사적 이용을 배제하는 비핵화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북한은 1992년부터 IAEA의 미신고핵시설에 대한 특수사찰을 거부하면서 급기야는 1993년 핵확산 금지조약을 탈퇴하고 공공연히 핵개발을 추진해왔다.

그러나 한국은 북 핵 저지에 당사자로서 직접 대응에 나서기보다는 핵무기비확산질서를 관장하는 미국, 중국 등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들에게 주된 책임을 맡겼다. 동시에 IAEA등 핵확산금지조약(NPT) 감시기구를 통한 조치나 6자회담을 통한 외교적 해결에 기대를 걸기도 했다. 최근에는 국가안보의 방편으로 미국의 핵우산이나 확장된 억지를 통한 북 핵 대응을 추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수교 이래 경제협력이 확대되고 있는 중국과의 협력을 통해서도 핵문제해결을 모색했다.

 

그러나 상황은 한국의 기대에 너무 못 미쳤다. 한국은 결국 북한의 4차 핵 실험과 탄도미사일 발사를 확고한 대비 없이 맞게 된 것이다. 미국, 중국, 러시아 등 주변강대국들은 북한의 핵을 자국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할 필요가 없을 만큼 모든 도발을 응징할 충분한 핵탄두를 비축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만큼 절실하게 북 핵 저지를 서두르지 않았다.

강대국들은 핵무기확산저지라는 국제적 대의 때문에 북핵문제의 해결을 추구하면서도 그때그때의 자국의 실리에 얽매어 북 핵의 적극저지를 소홀히 한 결과 20년의 세월을 허송했고 북한이 핵능력만 키울 시간을 벌어주었다. 이 시점에 이르러 한국은 북핵문제를 더 이상 강대국에만 맡겨둬서는 해결전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지난 2월 10일 개성공단의 운영중단을 결정함과 동시에 북 핵 저지와 폐기에 능동적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2월 16일 국회보고연설을 통해 핵 포기냐, 체제붕괴냐의 양자택일을 북한에 요구하면서 북 핵 저지를 국가의 사활적 과제로 설정했다. 동시에 개성공단 중단은 북한에 대한 제재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면서 북 핵 저지에 국가총력을 경주할 것임을 밝혔다. 북핵문제가 비로소 우리의 실존적 과제로 결정된 것이다

 

나. 미국의 대응

미국은 북핵문제가 제기될 당초에는 북 핵시설에 대한 폭격을 검토했지만 동족상잔의 재발을 피하려는 한국 김영삼 정부의 완강한 반대와 폭격의 실효성에 대한 엇갈린 평가로 군사적 해결을 유보한 가운데 북미양자간 대화를 개시, 1994년 제네바합의를 도출함으로써 핵개발을 동결시키면서 대북지원을 통해 핵무장 포기를 유도하려고 하였다. 이때 미국은 북한의 전력생산을 지원하기 위해 경수로건설에 착수했고 수십만 톤의 중유를 북측에 무상으로 공급했다.

이때 북한은 겉으로는 대화에 호응하고 6자회담을 통해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 전망을 주는 청신호를 보내면서도(9.19합의) 이면에서는 파키스탄을 통해 원심분리기를 도입, 핵개발 수준을 높이는데 주력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은 북한과의 대화를 통한 외교적 해결을 사실상 외면하고 경수로 건설과 중유지원을 중단했다.

 

그러나 햇볕정책을 내세우는 한국의 좌파정권과 중국이 북한을 계속 지원함으로 해서 북한의 핵개발 노력은 진전되었다. 이 와중에 이란의 핵개발사태가 발생했고 아울러 북한도 6자회담을 보이콧하면서 핵개발노선을 가속화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정책의 우선순위를 “북 핵 저지”에서 “이란핵 개발저지”로 옮기고 대북 정책도 ‘전략적 인내’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호도하면서 북한이 핵 포기의사를 명확히 밝히지 않는 한 북한의 기만정책에 놀아나는 대화는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이것도 북한의 4차 핵실험의 길을 열어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다. 중국의 대응

중국은 북한 핵문제가 등장하던 1992년 IAEA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북핵문제는 “대화와 협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러한 입장은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중국이 갖는 거부권 때문에 모든 국제회의에서 북 핵 저지를 위한 다른 수단의 선택을 어렵게 했다. 이로써 중국은 사실상 북한이 4차에 걸친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발사를 추진, 성공시킬 시간과 여건을 조성해주었던 것이다.

중국의 당과 정부는 북핵문제가 등장하던 초기부터 북 핵을 중국 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지 않았고 기필코 저지해야할 과제로 보지도 않았다. 중국학자들의 대다수는 북한의 2차 핵 실험을 전후한 시기까지만 해도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14개 국가들 중 여러 나라들이 핵을 보유하고 있는데 여기에 북한 하나가 더 추가된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시진핑 주석이 2013년 한중정상회담을 통해 북한의 핵무장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언명이 있은 후부터는 중국학계의 공공연한 북 핵 긍정론은 사라졌다.

 

그러나 대화와 협상으로 북핵문제를 해결해야한다는 중국의 주장은 지난 22년 동안 계속되어왔다. 지난 1월 6일 북한의 4차 핵실험 후 왕이(王毅)중국외교부장은 여전히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 했다. 윤병세 외교장관에게, 또 1월 27일 베이징을 방문한 존 케리 미 국무장관에게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해결해야한다”고 말했다. 북한이 핵 포기를 내용으로 하는 어떠한 협상에도 불응한다는 입장을 중국 측에 분명히 밝혔고 또 핵 보유를 헌법에까지 못 박고 있는 실정을 알면서도 중국은 핵문제해결수단으로 대화와 협상만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일견 황당해 보이는 주장 같지만 여기에는 중국 나름의 전략적 고려가 담겨있다.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이 갖는 영향력을 배제하고 중국우위의 질서를 구축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 비핵화를 명분으로 북한과 미국이 대화를 열어 평화협정을 협상케 하고 이 협상과정에서 주한미군 철수를 거론, 미국의 한반도 개입명분을 약화시키거나 주한미군의 지위를 흔들겠다는 것이다.

최근 중국이 한국을 상대로 강도 높게 요구하는 사드(THAAD)배치 반대도 맥락은 같다. 사드는 공격무기가 아닌 방어무기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부지(敷地)를 제공하는 사드가 주한미군에 배치될 경우 한국은 미국의 미사일 방어망에 편입되어 중국에 대한 견제세력의 일원이 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그간 한국은 사드가 북한의 핵과 미사일로부터 주한미군의 안전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미군 사령관의 건의를 반대할 명분이 약했지만 중국의 우려를 배려, 신중한 입장을 보여 왔다.

그러나 북한의 4차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발사는 한국이 더 이상 사드 배치요구를 외면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중국도 북 핵을 감싸면서 오랫동안 공들여온 전략목표를 달성할 수 없게 되었다. 앞으로 북한이 핵실험과 탄도미사일발사에 성공, 대량살상무기들이 실전에 배치될 단계에 진입하면 중국은 오히려 양호유환(養虎遺患)의 난국에 빠지게 될 것이다. 특히 한중수교이래 오랫동안 북한내부에서 들끓어온 중국불신감을 상기할 때 북한의 핵무장은 중국에도 큰 부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북한의 4차 핵실험과 탄도미사일 발사의 성공은 그 역설로서 북한 김정은 정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강도 높은 제재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었다. 또 한국이 핵문제의 당사자로서 직접 행동에 나서게 했다. 물론 제재의 수준을 놓고 강대국 간에 견해차이가 있지만 “국제여론에 맞선 북한에게 필요한 대가를 지불케 해야 한다”는 왕이 중국외교부장의 발언도 우리는 유념할 필요가 있다. 한국이 원하는 것은 제재로서 북한이 비핵개방정권으로 바뀌는 것이다. 이제 우리 외교는 북 핵에 대한 직접대응을 소홀히 했던 구태를 털고 모든 형태의 재제를 강화, 2016년을 북 핵 저지의 결정적 해로 만들어야 할 도전을 맞고 있다.

 

3. 고려할 수 있는 정책대안

 

가. 이스라엘의 교훈

이스라엘은 아랍 국가들에게 둘러싸인 고립된 나라다. 따라서 자국의 안보에 위협이 될 요소를 철저히 조사차단하는 점에서 세계적인 수범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는 1981년 이라크가 핵개발을 시도할 때 오시라크의 원자로 공사장을 기습 폭격하여 이라크 핵무장을 저지했다. 2007년에는 북한과 제휴하여 시리아의 알키바에 건설 중인 다이르 알주르 원자로 공사 현장을 정확히 파악, F-15 편대를 터어키 국경을 몰래 넘어가 기습 폭격함으로써 시리아의 핵무장을 선제 차단했다.

이때 미국은 폭격 아닌 외교적 해결을 추구했지만 이스라엘은 미국의 입장에 구애받지 않고 직접 폭격을 통해 자국의 안보위기를 극복했다. 지금 우리에게는 이스라엘의 모사드 같이 기민, 정확한 정보기관도 없고 북 핵을 직접 행동으로 폭격, 저지할 마음의 태세도 갖추지 못하고 있음이 실로 아쉽다. 뒤늦게나마 박근혜 대통령이 개성공단가동을 중단하면서 국민들에게 햇볕정책의 미몽을 버리고 단결을 촉구, 북 핵 저지를 국가안보의 제1의 과제로 설정한 것은 만 번 다행한 일이다.

 

나. 모든 가능성을 다 열어놓고 대처하자

북핵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도는 북한이 핵무장하지 않고 탄도미사일 없이도 잘 살아가는 유엔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을 제외한 나머지 193개회원국들이 걷는 바로 그 길을 택하게 하자는 것이다. 북한이 이러한 선택을 하도록 미국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북한과 여러 기회에 대화도 나누고 필요한 지원도 제공했고 북한이 가장 곤궁한 상황에 처했을 때도 군사적으로 위협한 바 없었다. 중국이 미국의 북한과의 대화가 북핵문제해결의 관건이라는 주장은 경험상으로 보아 설득력이 떨어진다. 우리도 식량, 의료, 비료 등 수 십억 달러 상당의 원조를 제공해왔다.

그러나 북한은 핵과 미사일개발에만 매달리면서 한국의 안보를 위협하고 동북아 정세를 긴장 시키고 특히 4차 핵실험과 6차에 걸친 미사일 도발로 동북아시아의 안보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는 유엔회원국인 북한의 정체(政體)는 그대로 존속시키더라도 현재 북한을 잘못 이끄는 3대세습독재자 김정은을 권자에서 물러나게 하는 북한정권의 운전수 교체(Driver Change)를 진지하게 추구해야 한다. 오늘날 북한 내에서 비핵개방을 원하면서 자생하는 장마당 세력이 보다 큰 힘을 갖도록 지원하기 위해서다.

 

 이 작업은 한반도 주변 5개국이 한국과 긴밀히 공조하는 가운데 은밀히 추진해야 하며 특히 한국은 북한 지도자 교체에 영향력이 큰 중국을 상대로 공식, 비공식 교섭을 적극 추진하고 여기에 미국과 러시아가 가세 협력토록 해야 할 것이다. 이 길이 순탄치 않을 경우에는 미국과의 협력을 통한 참수(斬首)계획도 선택에서 배제해서는 안 된다.

이와 동시에 유엔안보리에서는 가장 강력한 제재결의를 끌어내야 한다. 우리는 김정은이 전 세계로 방영되는 TV를 통해 “미사일 발사! 핵실험 단행!”을 육성으로 외치는 모습을 보면서 지도자 교체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특히 북한은 핵과 미사일로 미국 본토를 공격하겠다고 공언한 만큼 지금 미국은 북한의 사실상의 선전포고 앞에 자위조치를 취할 명분이 충분하다.

미국의 자위조치에는 중국의 거부권행사가 의미가 없기 때문에 유엔안보리 제재결의보다도 더 실효성 있는 효과적인 제재조치를 취하도록 해야 한다. 시진핑 주석이 약속한바 북한의 핵무장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언급이 중국의 정책으로 구체화하기 까지 우리는 한미동맹을 근간으로 강도 높은 대북제재와 권력교체를 병행추진하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국론통일의 바탕에서만 꽃필 수 있으며 지금이 바로 안보에 여야가 없다는 만고의 진리를 우리 정치권이 수범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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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의 해산은 통일준비의 거보를 내딛은 것이다.

 

이 영 일 한중정치외교포럼 회장

 

1. 헌법재판소가 통일진보당에 대한 정부의 해산청구를 헌법재판관중 9인중 8인의 찬성으로 받아들였다. 1인의 반대가 있었으나 그것도 통진당의 존속에 대한 지지라기보다는 정당의 해산방법으로 법원의 판결보다는 유권자의 투표에 의한 청산이 더 바람직하다는 의사표현이었기 때문에 통진당 해산은 헌법재판관들의 일치된 판단으로 보아도 틀림없다.

 

이번 헌재(憲裁)의 통진당 해산판결은 헌재가 그간 다루어온 수많은 헌법불합치판단이나 법률의 위헌판결과는 그 의의가 사뭇 다르다. 대한민국헌법질서-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를 부정하고 파괴하려는 정치세력의 존재를 거부함으로써 한국 통일을 위한 국론통일의 확실한 기준을 마련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들은 그간 4.19혁명 이래 줄기차게 진행되어온 민주화의 발전과정을 거치면서 민주화의 정치공간을 뚫고 들어오는 친북 적색분자들의 거점 확보 공작을 좌시하거나 덜 주목했다. 때로는 친북세력들의 공작활동에 대한 규제를 용공조작에 의한 민주화의 억압으로 간주하는 정치선동에 동조하기도 했다.

특히 좌익세력들의 준동을 민주화의 일환으로 눈감아주는 김대중, 노무현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에는 친북좌익세력들이 부지불식간에 존립거점을 확대해 나가면서 지방자치단체 선거를 통해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생긴 정치적 영향력을 무기로 급기야는 야권통합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반보수(反保守)통일전선의 고리에 전통야당을 끌어넣고 이를 기반으로 통일진보당은 국회에 의석까지 확보, 원내교두보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통일진보당의 원내의석확보는 북한 노동당이 1948년 국회프락치 사건 실패 후 반세기를 넘는 오랜 노력 끝에 혁명투입공작을 통해 얻은 나름대로의 값진 성과였을 것이다.

 

 

2. 우리는 1970년 조선노동당 제5차당대회가 대내적으로는 4대군사노선(전인민의 무장화(武裝化), 전 군의 간부화, 진 지역의 요새화, 군장비의 현대화)의 완성을 호언하면서 한국에 대해서는 인민민주의 혁명을 통한 남조선 해방을 공약했던 역사를 어느 순간 망각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북한은 그들 주도의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남한에서의 인민민주의 혁명을 성취하기 위한 혁명투입공작을 꾸준히 추진해왔다. 김대중 정권 성립과 동시에 대한민국 교육계에 조직거점을 마련, 이를 합법화하는데 성공했고 노동계 내부에 투입된 혁명역량의 조직공작에도 성공, 합법적 고지를 점령했다. 이어 노무현정부의 등장과 때를 같이하여 문화, 종교계에 까지 인민민주주의 혁명에 동조할 세력을 침투, 확보하였다.

 

그러나 교육계, 문화계, 종교계, 노동계에 투입된 조직역량은 반정부 통일전선의 우군(友軍)이나 동맹군은 될 수 있어도 한국사회전체를 인민민주의 혁명으로 몰아갈 통일전선의 정치적 지도부는 될 수 없었다. 통일진보당의 출현과 원내의석확보는 바로 이러한 정치투쟁의 일선지도부의 확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시 야당인 민주당과의 통합정치협상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통진당의 원내교두보 확보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민주당(당시 당대표 한명숙)내에 존재하는 동조세력 내지 연대세력의 후원으로 야권통합에 성공, 통진당은 원내진출의 길을 뚫었다. 이들은 나름대로 혁명정세의 성숙을 기다리면서 내외정세변동기를 틈타 혁명투쟁의 봉화를 들어 올리려다가 이석기 일당의 일망타진으로 퇴조기를 맞았고 이번 헌재의 해산판결로 인민민주주의혁명을 위한 정치투쟁의 남한 내 정치거점은 일단 붕괴되었다.

 

 

3. 박근혜 대통령은 작금의 정세를 통일의 준비기로 보고 통일이야말로 민족웅비의 대박이 트일 것이라고 말하면서 통일 준비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통일준비의 대전제는 ‘어떤 통일인가’에 대한 국민적 합의, 즉 통일에 대한 국론의 통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통진당처럼 친북통일을 내밀히 추진하는 혁명정당이 민주헌법이라는 보호막을 쓰고 원내정당이라는 특권을 누리면서 대한민국의 강점을 약화시키고 약점을 극대화하는 선전 선동을 펼쳐나간다면 조국통일을 위한 국론의 통일은 기할 수 없다.

또 통진당 의원들의 비호 하에 그들의 동맹세력인 교육계, 종교계, 문화계, 언론계가 국론분열의 추동체가 된다면 그 속에서도 국론통일을 기하기 힘들어진다. 특히 통합진보당은 현 정부를 독재정권이라고 격렬히 비난하면서도 유엔총회를 비롯하여 전 세계가 규탄하는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또 북한이 공화(共和)정체가 아닌 3대에 걸친 세습정권으로 변해도 여기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비판도 없었다.

또 전 세계 진보운동의 핵심가치인 반전반핵평화(反戰反核平和)를 외면하고 핵과 미사일 전력을 강화, 무력통일을 획책하는 북한에 대한 비판은커녕 오히려 북 핵과 미사일개발의 타당성을 내심으로 옹호했다. 여기에 곁들여 대한민국을 태어나서는 안 될 나라라거나 기회주의가 득세한 나라라고 폄하해왔다.

 

어찌 이뿐인가. 유엔감시 하에 실시된 자유총선거를 통해 탄생한 정부의 정통성은 부정하고 스탈린의 지령에 의하여 소련 군정사령관이 수립한 정권과 그가 지명한 사람이 정권을 잡은 북한을 마치 합법정부인양 왜곡하는 사람들이 누구였던가. 이러한 세력 들을 방치해두고서는 통일을 위한 국론통일을 기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통진당의 영향권 하에서 국공립학교 교사들이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그릇된 역사관을 주입하는 행위를 방치해도 통일을 위한 국론통일은 어려워진다. 특히 문화, 예술, 언론분야에서도 북한이 투입시킨 혁명가들이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라는 가면을 쓰고 국론분열활동을 계속하는 한 국론통일을 기할 수 없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번에 사법기관으로서의 헌재가 내린 통진당 해산결정이 정치차원에서의 국론통일 저해요인을 삼제(芟除)하는 것이라면 문화, 종교, 언론, 교육, 노동계에 뿌리내린 친북동조세력을 거세하는 일은 앞으로 정부와 국민들에게 맡겨진 몫이다.

 

헌재의 이번 판결은 정부와 국민들이 친북세력거세를 위한 투쟁의 훌륭한 지침이 될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국민의 자유를 최대로 보장하지만 자유민주주의를 이용해서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세력에게는 결코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 독일은 나치나 공산전체주의를 조금치라도 찬양, 고무, 동조하는 행위가 발생하면 이를 즉시 가장 단호하게 처벌했다. 이른바 방어적(防禦的) 민주주의를 철저히 실천한 것이다. 이로써 오늘날 독일은 통일을 달성했다.

 

 

4. 우리는 앞으로 통진당 해산을 계기로 세 가지 과업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 하나는 통일준비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다. 통일준비에는 민간과 정부의 공동노력이 필요하다. 정부만의 통일준비가 아니라 민간자율의 통일준비운동도 추진되어야 한다. 우리 앞에 나서는 가장 긴급한 통일준비의 과제는 통일에 대한 국론의 통일이다. 주변정세변화에 대한 국민적 합의형성, 통일역량에 대한 점검과 조정, 통일전망에 대한 가치관의 공유가 필요하다. 정부의 통일준비 위원회에서는 통일 미래상을 준비한다고 한다. 국론통일의 준거를 마련하겠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기대해볼만하다. 그러나 사회 각 분야에 투입된 북한의 공작거점을 색출하고 제압하는 데는 국민적 참여가 필수적이다. 이를 고무하는 노력도 아울러 강화되어야 한다.

 

둘째로는 탈북민들에 대한 우리의 관심도 제고되어야 한다. 목숨을 걸고 북한을 뛰쳐나온 탈북동포들이 너나없이 한국사회에 정착, 성공하도록 지원하여 탈북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음을 실감토록 해야 한다. 이 일은 정부와 국민이 합심하여 감당해야 할 일이다. 국론통일과 탈북민의 정착지원활동은 정부만의 과업이 아니다. 민간이 정부와 협력하여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이것이 민간통일준비위원회의 자율적 구성이 필요한 이유다. 통일의 주체는 엄격히 말하면 분단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국민이다. 국민들이 배제된 정부만이 주체인 통일은 없다. 국내외에 거주하는 우리 민족 모두가 주체가 되고 부모 형제와의 재결합의 날을 학수고대하는 탈북민들이야말로 통일달성의 실존적(實存的) 주체들이다.

 

셋째로는 국민 속에 잠재되어 있는 진보가치에 대한 희구가 건전한 진보세력의 대두를 통해 실현되어야 한다. 세습이 아닌 공화정체를 지지하고 반전반핵평화의 기치를 분명히 하면서 경제민주화를 통해 빈부의 격차를 줄이고 정의와 평등의 가치를 실현할 합리적 진보세력이 출현해야 한다. 독일과 영국 등지에서 성공한 사회민주주의나 민주사회주의 세력의 등장은 어느 면에서는 오늘의 한국사회가 당면한 시대적 요청 같기도 하다. 이번 헌법재판소의 통진당 해산결정은 분명코 통일을 향한 우리의 국론통일과정에서 거보(巨步)를 내딛은 결단이며 동시에 반종북(反從北)건전 진보세력이 등장할 새로운 정치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이제 우리 국민 모두는 뜻과 지혜를 모아 통일을 위한 국민적 합의기반을 넓히는 한편 한국정치도 개혁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세력간의 건전한 경쟁구도로 발전, 재편할 전기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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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남침전쟁과 - 찬송가 363장에 얽힌 사연

 

6.25 전쟁이 치열하던 1950년 어느 날, 삼팔선을 넘어 남하하던 민간복장을 한 인민군 첩자들이 미군 첩보 부대 요원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들은 피난민들 속에 끼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후퇴하는 유엔군과 우리 국군의 부대 이동을 파악해서 보고하고, 중요한 시설의 파괴와 요인암살 등 특수 임무를 띠고 있었다.

 

당시의 전황은 유엔군과 국군이 계속 후퇴를 하는 상황에서 체포한 북한 간첩들을 감시하고 수송하고 관리하는데 많은 문제와 위험성이 따랐다. 그래서 유엔군은 이들에게 전향할 것을 강력히 권고했으나 거절당했다.

 

 결국 유엔군 사령부로부터 이들 첩자들을 처형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그런데 이 간첩들을 처형하기 직전에 유엔군의 한 장교가 한국군 통역장교에게 이 간첩들 중에 혹시 교회에 나가는 자가 있는지 알아보게 했다. 그러자, 간첩 한 사람이 가슴에 십자가를 그려 보이며 기도하는 흉내를 냈다.

 

이 모습을 유심히 보던 유엔군 장교는 그 간첩을 살려주기 위해서 옆으로 나가 서 있으라고 했다. 그러자 눈치를 챈 다른 간첩들도 모두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며 옆으로 나가 서려고 했다. 이때 유엔군 장교는 한국군 통역 장교에게 간첩들의 행동에 의심이 간다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한국군 통역장교가 다시 유엔군 장교에게 잠시 귓속말을 하고 나서 “너희들이 정말 교회에 나갔다면 찬송가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즉 찬송을 정확하게 한 곡이라도 부르는 자만 옆으로 나오라”고 했다. 그러나 간첩들은 아무도 찬송을 부르지 못했고 결국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금방 탄로가 난 것이다.

 

그런데 이들 간첩들 중에 갑자기 한 간첩이 앞으로 나오더니 옆에 있는 동료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찬송가 363장이었다. 1절이 끝나자 그는 다시 2절을 불렀다. 뜻밖에도 이날 통역장교는 자신이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이 간첩이 부르는 찬송의 가사는 물론 박자 한 군데도 틀리지 않고 부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2절이 끝나자 이 간첩은 또 3절을 불렀고 4절을 부를 때는 울기 시작했다. 통역장교는 4절 찬송이 끝나기도 전에 유엔군 장교에게 다가가 이분은 교회를 열심히 다닌 분이 틀림없다고 자신 있게 증언을 했다. 그러자 유엔군 장교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런데 왜 울면서 찬송을 부르지” 하고 궁금하다고 했다.

 

결국 이 인민군 간첩은 찬송 때문에 그야말로 생사의 갈림길에서 혼자만 극적으로 살아 남았다. 재차 조사 과정에서 밝혀진 사실이지만 이 사람은 인민군도 간첩도 아닌 순수 민간인이었는데, 피난길에서 이들 간첩들에게 강제로 붙잡혀서 이들과 함께 피난민으로 위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사실은 교회 문턱도 밟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고 오히려 교회 나가는 사람을 극심하게 핍박을 했던 사람이었다. 교회도 나가지 않았고 또 교인들을 핍박했던 사람이 어떻게 찬송을 그렇게 잘 불렀을까? 그 기막힌 이야기를 들어보면 마치 한편의 신파 연극을 감상하는 기분이다. 내용인즉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한 부인이 시집을 와서 남편 몰래 열심히 교회를 다니다가 결국 어느 날 남편에게 들키고 말았다. 불같은 성격의 남편은 부인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창피를 준다면서 온 동네 골목으로 끌고 다녔다.

그러나, 주일이 되어 교회의 새벽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면 부인은 오늘도 남편에게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교회로 달려간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며 찬송을 부르는 그 시간만은 남편에게서 받은 핍박도 매맞은 상처도 창피 당한 일도 모두 다 잊어버리는 행복한 시간이다. 그러나 그 행복도 잠시뿐, 교회에서 돌아오는 시간이 되면 남편은 어김없이 대문에서 기다리다가 부인의 머리채를 낚아채고 부엌으로 끌고 가 따귀를 후려치며 온갖 욕설과 함께 매질까지 하게 된다.

매를 맞고 난 부인은 부엌에서 울면서 다시 찬송을 부른다. 찬송이라도 실컷 부르고 나면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핍박 속에서 부인은 결코 중단 없이 10년 동안 교회를 다녔으며, 남편을 위한 기도도 열심히 하면서 부인의 신앙은 나날이 성숙해졌다.

 특히 딸아이를 신앙적으로 키우려는 부인의 의지와 딸아이만큼은 절대 교회에는 못 보낸다는 남편의 단호한 의지가 서로 상극을 이루는 10년 세월이었다.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 근심에 쌓인 날 돌아 보사 내 근심 모두 맡으시네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질 때 불쌍히 여겨 구원해 줄이 은혜의 주님 오직 예수" 부인이 유달리 이 찬송만 부르는 것은 이 찬송의 가사 내용이 남편으로부터 핍박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자신의 형편과 너무나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부엌에서 밥을 지을 때나 설거지를 할 때나 밭에 나가 일을 할 때나 이 찬송을 항상 불렀다. 그리고 주일날 남편이 핍박을 하게 되면 마치 분이라도 푸는 기분으로 이 찬송을 더 큰 음성으로 불렀다.

그때마다 남편은 “이 천치 같은 여자야, 10년간 교회를 다니면서 노래라고 겨우 그것 하나밖에 못 배웠느냐!”고 약을 올린다. 그러면 부인은 “내가 찬송만 배우기 위해서 교회 가는 게 아니요. 내가 당신을 위해 얼마나 기도하는지 아시오? 하나님께서 언젠가 내 기도를 들어주셔서 당신을 목사로 만들지도 모르지요.” 남편은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저 인간이 이제는 실성을 했네 뭐! 내가 목사가 된다고? 별 희한한 소리까지 다 하네” 하고 버럭버럭 화를 내고 고함을 지른다.

 

 그런데 남편은, 이 한 가지 찬송만 10년간을 매일같이 듣다보니 1절에서 4절까지 가사 전부를 저절로 외우게 되었고, 박자까지도 훤히 알게 된 것이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바로 이런 상황을 비유한 것일까? 그렇게 지내던 이들 부부에게도 드디어 이별을 해야 할 운명의 날이 왔다. 6.25전쟁이 터지면서 부인은 그래도 자기 남편을 살리기 위해 옷가지와 양식을 준비해서 남편에게 빨리 피난 대열에 끼어 남쪽으로 가라고 재촉을 했던 것이다. 부인은 형편을 봐서 아이들 데리고 곧 뒤따라가겠다고 하면서 머뭇거리고 있는 남편을 억지로 밀었다.

남편은 지난날 그렇게도 자신에게 핍박만 받았던 부인과 잠시나마 헤어진다는 현실 앞에서 갑자기 그날따라 부인의 모습이 너무나 측은하기 짝이 없었다. 부인과 딸의 처량한 모습을 몇 번이나 뒤돌아보면서 남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해서 피난길에 오른 그 남편은 인민군 첩자들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되었고, 드디어 총살 직전 그야말로 죽음의 일보 직전에 자기가 그렇게도 핍박했던 부인의 찬송가 덕분에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이다.

그래서 그가 찬송가 4절을 부를 때 자신도 모르게 엉엉 울었던 것이다. 남쪽으로 넘어온 이 사람은 회개하고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늦게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었다.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다. 그는 목사안수를 받던 다음 날, 군당국의 협조를 얻어 휴전선 철책선을 찾아갔다. 거기서부터 도보로 불과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신의 고향마을을 바라보면서 그는 철책선을 붙잡고 한없이 울었다.

 

“여보, 당신은 10년 세월 단 하루도 마음 편한 날 없이 핍박만 받으며 살았지요. 교회 갔다 올 때마다 나는 당신의 머리채를 잡고, 그 연약한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쳤지! 온갖 욕설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당신은 말대꾸도 없이, 그저 바보같이 찬송만 불렀지요. 그때 당신의 그 찬송이 내 생명을 구해 주었다오. 그리고 당신이 기도한대로 나는 목사가 되었소. 그런데 이제 나는,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요! 딸아이는 얼마나 컸는지요. 당신은 지금도 혼자 살고 있는지요. 그리고 오늘도 나를 생각하며 부엌에서 그 찬송을 부르고 있는지요.”……

 

밥짓는 저녁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고향 마을을 멀리 바라보면서, 휴전선의 철책선을 붙잡고 그 목사님은 한없이 한없이 울었다. 우리의 삶이 시련에 부딪칠 때 찬송과 기도를 쉬지 말자. 우리 하나님은 눈물이 변하여 찬송이 되게 하시는 분이다. 민들레 성서마을의 강영선의 성서 이야기마당에서 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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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절과 더불어 필요한 건국기념일

                                                               

                                                                           이 영 일(한중문화협회 회장, 3선 국회의원)

 

                                             <들어가면서>

 

금년으로 우리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69년,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지 66년을 맞는다. 우리는 일제에서 해방된 1945년 8월 15일을 광복절로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광복된 지 3년만인 1948년 8월 15일에 수립된 대한민국정부의 탄생을 기리는 기념행사를 특별히 가져 본 일이 없다. 3년의 차이가 있지만 광복절과 대한민국 건국일은 같은 날이다. 8월 15일을 공유하는 까닭에 광복절과 건국기념일은 그날이 그날인 것으로 인식되는 가운데 광복과 건국은 그 의의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차이를 의식하지 못하면서 66년을 지내오고 있다. 이 결과 대한민국의 건국이 우리 민족사에서 갖는 의의가 국민들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리지도, 내면화 되지도 않음으로 해서 오늘날에는 한반도의 유일한 정통정부로서의 대한민국의 존재를 부정하는 언설까지 나도는가 하면 국정과서인 한국현대사 교과서내용에서 마저 사실왜곡이 노정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일찍이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붸버(Max Weber)는 “어떠한 정부라도 자기국민들에게 자기 나라를 사랑하고 자기나라에 귀속감을 갖도록 가르칠 능력이 없으면 오래갈 수 없다”고 설파한 바 있다. 이런 문제의식을 염두에 두면서 건국 66년을 맞는 현시점에서 광복절과 구별되는 의미로서의 대한민국 건국이 갖는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험난했던 건국에의 길을 회고 한다>

 

일본의 항복으로 우리민족은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되었다. 이날을 기리는 것이 광복절이다. 그러나 해방과 동시에 우리 민족 앞에 나섰던 가장 긴급한 과제는 한반도에 단일의 독립 국가를 건설(Nation Building)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해방역사는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미국과 소련의 양국군대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38이북지역은 소련 측이, 38이남지역은 미국 측이 각각 분할 점령한 상태에서 전개되었다. 점령군은 초기에는 양 지역에서 군정을 실시하면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중심이 되고 남북한 정당 사회단체가 참가하는 협상을 통해 독립정부를 세우자는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들은 모스크바 3상회의를 통해 이미 전후처리문제로서의 한반도문제를 강대국들이 참가하는 신탁통치(소련은 이를 후견통치로 표현함)를 실시, 독립능력을 기른 후 독립 국가를 만들자는 각본을 짜놓고 우리 앞에 내밀었다. 한국인들의 통치능력, 독립능력을 무시한 이 결정에 대해 거족적인 반대운동(반탁운동)이 일어났고 여기에 곁들여 미소공동위원회가 파탄나면서 정통독립운동세력이 중심이 된 민족진영은 독자적인 독립국가 건설운동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 북한지역에 위성국가를 세우려는 소련의 음모>

 

그러나 불행한 것은 1945년 9월 20일 소련의 스탈린은 소련이 한반도를 태평양으로 뻗어나갈 아시아의 교두보로 삼기위해 전 한반도의 공산화를 획책하고 그 방법의 일환으로 소련군 점령지역인 북한 땅에 소련의 위성정권을 수립하도록 비밀지령을 내렸다. 치스차코프 북한 군정사령관은 1946년부터 조선노동당 북조선 분국을 중심으로 남한의 미군정당국과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북한지역에 인민군대를 창설하고 토지개혁의 미명하에 북한전역의 토지를 전 인민적 소유로 변형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소련군정사령부는 위성정권의 하수인으로 김일성을 선정했다. 김일성은 소련군의 극동지역 첩보대장인 스티코프 장군 밑에서 소련군대위계급장을 달고 조선인 밀정으로 활약했던 인물이었다. 당시 소련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항일애국지사들이 많았지만 김일성이 잡은 줄이 가장 튼튼했다. 김일성의 소련 측 상사는 스티코프였고 그는 소련 KGB의 수장인 베리아의 부하였으며 베리아는 당시 스탈린의 심복이었기 때문이다. 한반도 분단의 정치과정은 이처럼 온 겨레가 모르는 가운데 소련군 주도하에서 진행되었다. 소련의 괴뢰인 김일성은 이런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남북협상을 제안했고 조국분단을 원치 않았던 민족진영의 김구, 김규식, 조소앙 선생 등은 소련의 국제적 음모도 모르는 채 평양을 방문했다가 김일성 정권수립에 이용당하였다.

 

                    <유엔을 이용한 이승만 박사의 건국 작업>

 

민족진영의 이승만 박사만이 소련의 이같은 움직임을 간파했다. 당시 이승만 박사는 미국에서 국제정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해방정국에서 미국인과 러시안 인을 비서로 채용, 주변정세변화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던 유일한 지도자였다. 그는 미 군정당국에 소련의 음모를 알리면서 한국정부수립을 서두를 것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이승만 박사는 미국을 방문, 유엔감시 하에 한반도 전역에 걸친 자유총선거를 실시, 단일의 통일 독립된 민주정부를 세울 것을 미국정부에 건의하였다. 이 건의를 미국 정부가 수용함으로 해서 유엔총회는 결의로서 유엔감시위원단을 한국에 파견, 이들의 감시 하에 자유총선거가 실시되었고 이 선거를 통해 대한민국이 탄생한 것이다. 유엔감시위원단의 3.8 이북지역 방문은 소련의 거부로 실현되지 못했지만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통해 대한민국정부가 탄생했고 제헌의회는 이승만 박사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유엔총회는 1948년 12월 12일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승인했다. 유엔결의는 문면(文面)에서만 보면 대한민국이 한반도에서 선거실시가 가능했던 지역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대한민국 이외의 다른 정치체가 한반도에 존재한다거나 대한민국과 정통성을 다투는 다른 정부가 있다는 내용은 유엔결의의 어느 부분에도 없었다. 이점에서 대한민국은 한반도내에서 유엔이 인정한 유일한 합법정부인 것이다.

 

                             <한반도의 국가 정통성은 어디에 있는가>

 

한반도에서 대한민국이 성립한 경위를 이렇게 살펴보는 것은 앞으로 한반도에서 통일을 주도해나갈 국가정통성의 소재를 분명히 하기위해서다. 소련점령군의 군정 하에서 소련 군정사령관이 세우고 우두머리를 임명한 북한정권과 유엔감시위원단의 감시 하에 실시된 자유 총선거에 의해 성립된 대한민국 정부의 어느 쪽이 대내외적으로 정통성 있는 정부인가. 그 답은 두말할 필요 없이 대한민국이다. 이점에서 우리는 건국방식으로 유엔공식을 창안하고 그 방안에 따라 대한민국을 수립한 이승만 박사의 공헌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의 탄생은 한반도 전역의 공산화라는 스탈린의 아시아 전략에 큰 차질을 초래했다. 이 기미를 간파한 김일성은 대한민국의 건국초기의 군사적, 경제적 취약점을 노리고 소련의 군사원조를 받아 1950년 6월 25일을 기해 민족해방전쟁의 미명하에 무력남침을 강행하였다. 대한민국 수립 2년 후의 일이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무력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트루맨 독트린과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집단자위조치에 따라 출병한 유엔군의 참전으로 북한의 남침은 저지되었다. 이 전쟁으로 500만 이상의 동포가 목숨을 잃거나 부상당하고 고아와 미망인이 양산되고 한반도 전역이 초토로 변했다. 이점에서 김일성은 전쟁범죄자이고 이 침략에서 정통정부를 지켜냈고 한미방위동맹을 체결, 오늘날까지도 제2의 한국전쟁을 막게 해준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은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광복과 건국 절은 날자는 같으나 내용은 별개다>

 

우리는 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앞으로 대박이 될 통일의 필연성을 주장할 때 통일이 먼 미래의 꿈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조만간 맞이해야할 새로운 과제로 받아들이고 환호했다. 특히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나 중국의 시진핑 주석도 한반도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지지한다고 밝히고 있는 점에 비추어, 또 북한정권의 생존능력에 대한 국제적 회의가 확산되는 추세를 고려할 때 통일을 주도할 대한민국의 정통성 확립에 기여한 초대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공헌은 반드시 재평가 되어야 하고 나아가 대한민국의 성립이 갖는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광복과 건국의 차이를 구별하는 문제의식 없이 지난 세월을 살아왔으나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광복과 건국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광복이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면 건국은 외세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정부가 국민의 직접 비밀 자유 보통의 선거를 통해 성립한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건국기념일과 광복절이 같은 날이기 때문에 건국의 의의를 되새기기 보다는 광복에만 더 큰 비중을 두고 지내왔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의 탄생이 우리 5천년 민족사에서 갖는 의의를 망실하거나 대한민국이 반공 구국투쟁을 통해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확립, 번영과 발전을 가져오게 한 체제라는 사실이 망각할 때가 많았다. 지금 구체적으로는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하는 역사과정에 대한 몰이해가 오늘날 역사교과서 파동의 큰 배경이 되고 있지 않는가.

 

                      <광복절과 건국절의 차이를 이해하자>

 

금년으로 우리는 광복 69주년 건국 66주년을 맞는다. 국가원수의 경축사가 광복절 행사의 백미인데 행사에 참가하는 인사들의 주축은 생존한 독립운동가나 그 후예들이며 대한민국의 건국을 가능케 하기위해 피나는 투쟁을 전개했던 역사와 인물은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일제에서 타율적으로 맞이한 광복절 못지않게 어려운 상황에서 대한민국을 세우고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고 자유민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수립, 한국의 오늘을 있게 한 역사와 인물에 대한 고마움도 이울러 기리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광복이 민족적 가치에 역점을 둔다면 건국은 국가적 가치에 보다 큰 방점을 찍어야 한다. 이러한 균형이 유지될 때 광복절과 건국 절은 국민 모두의 마음속은 물론이거니와 후대들에게도 바르게 전수될 것이다. 올해부터 광복절과 구별되는 건국 절을 정하자는 국민운동에 더 큰 활력이 넘쳐나기를 기원하는 마음 간절하다.

 

필자 이영일

학교경력: 광주일고 졸업,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졸업, 동구개학교 행정대학원 졸업

관청경력: 국토통일원 정치외교정책담당관, 교육홍보국장 및 실장, 통일연수 원장

정치경력; 제11대, 12대, 15대국회의원, 국회문교공보위원장, 당총재비서실 장, 한미정상회담 및 한국유럽4개국 정상회담공식수행원, 2회에 걸 친 한중정상회담 수행

언론경력: 동양통신사 외신부기자, 기독교방송해설위원, 사상계 편집위원

사회단체: 한민족복지재단 공동대표로 6회 북한 방문, 한국아프가니스탄 친 선협회회장 10년, 한중문화협회 회장 15년

주요저서: 분단시대의 통일논리, 햇볕정책의 종언 등 4책

대학강의: 호남대학교 초빙교수 10년, 우석대학교 초빙교수 2년,한성대학교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2년

상벌: 홍조근정훈장 수상, 벨기에 정부수교십자훈장, 우스베키스탄 국립사마 르칸드 외국어대학 명예정치학박사, 호남대학교 명예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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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노조파업문제에 대한 재미교포의 글이 많은 시사점을 준다 

공기업 부채 493조 3천억, 이대로 가면 다 죽는다
최 응 표 (뉴욕에서)
내가 먹고 사는데 큰 지장이 없으면 부자라는 인식이
보편적 사회상식이 되지 않는 한 사회갈등은 영원히
존재할 것 -마하트마 간디-
1984년 5월, “적자는 무한정이라도 좋다”며 국가전체를 파국으로 몰고 가던 탄광노조의 불법파업을 騎馬隊(기마대)를 동원해 진압한 대처 총리는 탄광노조의 불법파업은 法治(법치: the rule of the law)를 暴治(폭치: the rule of the mob)로 뒤바꾸려는 책동이었다며 그게 성공하도록 내버려둬선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두 달 뒤 대처는 의회연설에서 “광부들에게 굴복하는 것은 ‘의회민주주의에 의한 통치’(the rule of parliamentary democracy)를 ‘폭도들에 의한 통치’(the rule of the mob)에 양도하는 것과 같다”며 폭도들을 ‘내부의 敵(적)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포클랜드에선 외부의 적(1982년 4월 2일, 영국령 포클랜드를 침공한 아르헨티나)과 싸웠지만 지금은 내부의 적(탄광노조)과 싸우고 있다며 내부의 적은 자유에 대해선 더 위협적이고 더 싸우기 어려운 상대라고 했다.
더 나아가 대처는 의회 토론에서 탄광노조의 파업을 지지하는 노동당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노동당은 모든 파업을 지지합니다. 그 파업이 무슨 명목으로 하든, 어떤 손해를 끼치든 무조건 지지합니다. 이번에 노동당은 일하는 광부를 공격하는 파업광부들을 지지함으로써 전체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표한다는 그들의 주장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조갑제 기자의 ‘영국 대처 수상의 탄광노조 불법 파업 진압 성공記’ 참조)
망국적 노조를 굴복시킨 대처는 노조 간부들에게 “다음에 또 불법 파업을 하면 기마대가 아니라 탱크를 보내겠다”고 경고했다. 대처는 이런 正義의 결단력과 강력한 지도력으로 영국의 고질병을 고쳤다.
지금 한국도 대처 총리처럼, 북한이라는 외부의 적과 북한 도우미 역할에 충실한 민주당과 종북팔이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불법시위와 파업을 업으로 하는 내부의 적과 생존을 건 싸움을 벌이고 있다.
거기에 광우병 괴담으로 온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던 광우병 촛불난동을 향해 “광우병 촛불은 아테네 이후 최고의 직접 민주주의”라며 북한식 선동으로 난동꾼들을 부추기던 김대중의 망령이 되살아나 싸움은 더욱 격렬해지고 있다.
광우병 촛불난동과 철도노조의 불법 파업의 망국적 행태를 보며 생각나는 것은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민주화가 아니라 공권력의 확보”라고 한 예일 대학의 데이빗 애프터 교수의 말이다.
“눈에 보이는 현실을 신중하게 살피면 해결책이 나온다”고 한 니알 퍼거슨의 말대로, 특권 중 특권을 틀어쥐고 ‘철도민영화’ 괴담을 퍼뜨리며 국가전체를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있는 철도노조 귀족들의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가려내야 한다.
우선 정부와 언론, 그리고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시민단체가 해야 할 일은 철도노조의 불법 파업이 순수 노동운동이 아니라는 것과 철밥통 지키기를 넘어 불순한 정치세력과 종북성향 집단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국민에게 사실대로 알려야 하는 것.
지난 20일, 철도노조의 불법파업에 대해 북한이 적극적인 지지성명을 발표하자 민주당과 진골 종북성향의 민노총, 그리고 종북성향의 정당과 단체들이 철도노조의 불법파업을 거들고 나섰다.
철도노조와 민노총, 그리고 민주당과 종북단체들의 철도노조 지키기의 밑바닥에 무엇이 깔려있는지 올바로 인식 못하면 이들의 고약한 망국병은 영영 고칠 수 없다.
파업현장을 직접 찾아가 “민노총에 대한 공권력 투입에 대해 국민과 함께 분노한다”는 김한길 대표와 민주당사로 도피한 철도노조 간부들을 보호하며 불법파업을 적극 지지 격려하는 민주당의 정체와 불순한 속내가 뭔지 국민의 눈으로 세밀히 살펴야 한다.
더욱이 민주당은 “국민이 발부한 면허증 대통령의 권한을 함부로 행사하다가는 벌점 누적으로 면허증이 취소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며 대통령을 끌어내려 정부를 전복시킬 수 있다는 협박까지도 서슴없이 해대고 있다. 민주당, 이제 그 가면을 벗어라.
 

 

코레일 부채가 17조 6천억, 하루 이자만 13억, 이대로 2020년까지 가면 부채는 50조원이 된다. 코레일은 영업적자가 연평균 5천억이 넘는데도 매출의 46%를 인건비로 쓰면서 연평균 5.5%씩 임금을 올려왔고 해마다 成果給(성과급)도 1천억에서 3천억씩 나누어 먹었다.
연평균 5천억 이상의 적자를 내면서도 미국철도원 연평균 4200만원에 비해 연평균 6300만원이라는 세계최고의 연봉을 받는 철도노조, 그 적자는 고스란히 국민세금으로 충당된다.
민주당, 공기업 전체 부채가 493조 3천 억, 그 중 철도공사 부채가 17조를 넘다는 사실과 국민세금 5천억 이상을 매년 철도노조의 만성적자에 쏟아 붓고 있다는 기막힌 사실을 아는가.
부실경영으로 매년 5천억 이상의 적자를 내면서도 연평균 5.5%씩 급료를 올리고, 매년 1000억에서 3000억의 성과급을 나누어 먹으며 자식들에까지 자리를 물려주는 고용세습 제도를 즐기는 귀족 노조의 불법성과 부도덕 행태를 민주당은 알고 있는가 말이다.
철도노조의 불법파업으로 불편과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먼저 국민이고 그 책임은 전적으로 철도 운송을 독점하며 국민을 볼모로 불법파업을 벌이는 귀족노조에 있다.
12월 28일자 조선일보에는 ‘국민이 불편 참을 테니 이번엔 파업 악순환 끊으라’는 사설이 실렸다. 바로 그거다. 저들의 고약한 버릇은 국민의 힘만이 고칠 수 있다.
이 정도의 불편은 국가의 미래를 위해 국민이 참고 정부에 힙을 보태야 한다. 일등 국민은 그래야 하고 그럴 때 사회는 밝아진다. 사람이 죽는 급한 일이 아니면 외출도 여행도 참자. 인내하며, 절대 다수 국민은 “너희들의 철밥통과 국민을 볼모로 잡는 특권을 이 기회에 빼앗아버리겠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내자. 민주당에도 언론에도 보내자.
민노총뿐 아니라 모든 노조, 이젠 절대 약자가 아니다. 언론은 귀족노조 편에 서지 말고 국민 편에 서서 저들의 부당성과 불법파업의 진짜 이유를 국민에게 사실대로 알려야 한다.
인류사회의 모든 발전은 경쟁을 통해서 이루어 졌다. 정부는 방만한 독점 경영으로 만성적자에 허덕이는 철도공사에 경쟁체제를 도입해 철도경영 합리화와 서비스의 질을 높이려고 하는데 왜 철도노조가 죽기 살기로 반대하나.
국민이야 불편하든 말든, 국민의 세금이 날아가든 말든, 국가가 어떻게 되든 말든, 저들이 틀어쥐고 있는 ‘神의 직장’이라는 특권은 절대 내놓을 수 없다는 ‘집단이기주의’가 저들의 진짜 이유라는 사실을 국민에게 알리는 것은 전적으로 언론의 몫이다.
저들은 왜 경쟁을 피하려는 것일까. 일자리가 자식에까지 이어지는 세습 특권, 방만한 경영 속에서도 6300만원이라는 세계 최고 연봉에 엄청난 성과급까지 타먹던 특권, 국민을 볼모로 파업을 벌여 최고의 복지혜택을 누리던 특권 등을 경쟁체제로 인해 더는 누릴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 대통령의 원칙, 두려움 없는 대통령의 지도력, 그리고 비전 있는 대통령의 결단은 국민을 안심시키고 국민에게 신뢰를 준다.
국민은 미래를 위해 고통을 참아낼 수 있다. 국민은 불의 앞에 당당하고 단호한 대통령의 모습을 원한다. 역사적 격동기에는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력한 지도자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럴 때, 국민은 대통령의 강력한 협조자가 된다. 모든 문제는 여기서 해결된다.
2013.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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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경제위기와 한국의 대응

 

1. 문제의 제기

 

지금 미국의회는 공화당과 민주당간의 극한대립으로 연방정부를 폐쇄(Shut Down)시키는가 하면 세계경제를 볼모로 미국경제를 국가부도로 몰고 갈지 모를 위험한 게임을 펼치고 있다. 상원의 중재로 비록 3개월간의 시한부지만 연방정부의 폐쇄는 풀렸다. 그러나 미국의 여야대립은 쉽사리 해소될 전망이 보이지 않으며 현재의 분열상은 전문가들에 의하면 남북전쟁(The Civil War)이래 가장 심각한 수준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최근의 추세에서 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90년대 말기까지 세계질서를 주도해온 헤게모니 국가로서의 미국이 아직도 그 기능과 역할을 계속 수행할 수 있을지를 놓고 우려가 확산될 정도로 미국의 국가상황은 흔들리고 있다. 제2차 대전 직후만 해도 미국의 GDP는 전 세계의 절반이상을 차지했지만 지금은 23%수준으로 내려앉았다.

 

또 미국은 냉전이후 9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미국역사상 가장 많은 부를 축적, 일극(一極)패권체제로 전 세계질서를 좌지우지했으나 지금의 미국에서는 그러한 위용(偉勇)을 찾아 볼 수도, 기대할 수도 없다. 미국은 수년간 지속되어온 재정적자와 무역적자가 겹친 쌍둥이 적자 속에서 허덕이다가 급기야는 여야정치권의 대립으로 연방정부가 폐쇄되고 심지어 국가부도까지 걱정하는 나라로 변했다. 지금은 달러화가 기축통화라는 이점을 이용하여 화폐를 계속 발행하는 양적 완화(Quantitative Easing)로 현상을 유지하고 있지만 미국경제의 안정 기반은 심각한 손상을 입고 있다. 이 결과 미국만이 세계질서를 주도하며 또 주도할 수 있다는 미국인들의 신념은 대내외적으로 더 이상 수용되기 힘든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

 

미국의 방위공약을 국가안보의 주요 발판으로 삼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미국상황의 이러한 변화에서 초래될 제반 문제를 남의 문제가 아닌 우리들 자신의 문제로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대국으로의 등장, 일본의 집단안보정책의 현실화, 북한의 미사일과 핵무장 등 한국안보의 제반 도전요소를 감안할 때 한국은 미국의 국력쇠퇴현상을 냉철하게 지켜보면서 대응방향을 진지하게 모색해야 할 때다.

 

2. 한국이 걱정하는 몇 가지 우려들

 

가. 해외개입 반대여론 고조

 

지난 9월 10일자 미국 뉴욕타임스는 미국이 계속해서 해외개입에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할 것인가의 물음에 62%의 미국인들이 반대의사를 표시했고 다른 나라의 인권과 민주화를 지원하기 위해 미국이 계속 개입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72%가 반대의사를 표했다. 해외개입에 대한 피로(疲勞)가 미국 국민들 간에 팽배하고 있으며 결국 화학무기를 사용, 비무장 민간인을 대량으로 살육하여 인류의 공분을 사고 있는 시리아에 대해서도 오바마 정부는 개입을 포기하는 결정을 내리고 있다.

 

물론 워싱턴을 움직이는 미국지도층들은 아직도 미국만이 오늘의 세계를 올바로 이끌 수 있고 이끌어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국력신장을 위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지 못하는 한 미국의 해외개입은 갈수록 어려워질 것으로 보이며 미국이 직접 개입해서 해결 가능한 국제문제의 영역도 줄어들고 있다.

 

바야흐로 미국이 그간 세계정치에서 누리던 예외주의(Exceptionalism)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북핵문제는 10년을 끌어도 미해결상태다. 한국의 입장에서 볼 때 미국의 안보 공약은 확실하고 안보 공약을 지키겠다는 미국의 의지도 확실해 보이지만 공약을 이행할 미국의 힘(Strength)이 과연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한국이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의 도전이기 때문이다.

 

나. 중국의 도전과 일본의 집단안보

 

최근 미국의 국력이 쇠퇴하는 것과 때를 같이해서 중국은 미국에 대해 양국관계의 동격화를 요구하고 서로 간에 핵심이익을 존중하고 우려사항을 배려하면서 국제문제를 함께 협의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이것이 바로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주창하는 신형대국관계다.

 

그러나 모든 면에서 아직도 중국에 앞서고 있는 미국이 비대칭적인(Asymmetrical)양국관계를 대등관계로 바꾸자는 중국의 제안을 쉽사리 받아들일 리 없다. 미국은 오히려 아시아 중시(Pivot to Asia)정책을 내세워 중국의 영향력 신장을 견제하면서 세계에서의 패권적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한다. 중국의 국력이 지난 30여 년 간 획기적으로 증강되었지만 그렇다고 중국이 주변 국가들을 동원, 반미(反美)연합을 만들 수준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앞으로도 동북아지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한다. 그러한 외교적 노력의 일환으로 일본의 집단안보구상을 지지하고 이 지역에서 미국이 맡아야 할 부담을 상당부분 일본에 떠맡기려고 한다.

그러나 미국이 태평양전쟁의 원인과 결과를 왜곡, 부정하면서 군사력 강화의 길을 걷는 일본의 손을 들어주는 행위가 과연 현명한 선택인지는 앞으로 지켜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현시점에서 아시아 지역 국가들 간에는 역사문제를 중심으로 반일연합의 형성이 가능하기 때문에 일본의 집단안보에 대한 미국의 지지는 자칫 미국에 역풍을 몰고 올 수도 있다.

미국의 이러한 접근은 한국의 외교적 운신에도 큰 난제를 던진다. 한일 간의 역사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안고 현안의 안보문제를 함께 논의해야 한다는 것은 실로 견디기 힘든 상황이기 때문이다.

 

다. 존 케리(John Kerry)국무장관의 새로운 북 핵 접근 방안

 

미국의 케리 국무장관의 행보는 국제사회의 새로운 주목을 끌고 있다. 그는 국무장관 취임후 지난 4월 중순 한국, 중국, 일본을 순방하면서 동북아시아 지역에 대한 미국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우선 그는 중국방문을 통해 북핵문제는 중국이 주도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정의하고 아울러 중국이 북핵문제 해결을 진전시키면 미국은 그에 상응하는 조치로 핵우산을 확대, 일본이나 한국의 핵무장을 억제하겠다고 말했다.

 

케리의 견해는 북 핵 해결의 주된 책임을 미국이 아닌 중국에 맡기고 미국은 이 지역에서 핵무기의 확산을 방지하는데 주력하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물론 오늘날 중국내에서도 북한의 핵이나 미사일은 미국안보에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고 오히려 중국의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다면서 북한은 현시점에서 중국의 전략적 자산이 아니고 오히려 부담이 된다는 주장이 공론화되고 있다. 그러나 케리 장관의 견해는 북핵문제가 미국과 북한간의 양자문제라는 인식에서부터 시작된 역사적 관점을 크게 뒤바꿔 놓고 있다는 점에서 각별히 주목을 요한다.

 

오늘날 국제정치의 맥락에서 볼 때 북 핵문제는 강대국들의 협력 없이는 해결하기 힘들지만 그렇다고 강대국들에게만 맡겨둔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은 지난 10년간의 6자회담이 우리에게 주는 산 교훈이다. 결국 최종적인 해결은 한반도 비핵화의 주체가 될 한국이 박근혜 대통령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구상을 기반으로 하여 북핵문제를 남북한 간의 협상의 주제로 끌어내오고 이 노력의 성과와 더불어 강대국들이 참여하는 다자간협상이 열려야 비로소 실효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한국외교의 새로운 도전이 있다.

 

3. 미국에 대한 전망

 

미국 언론들은 미국경제가 2008년의 금융위기로 조성된 불황의 늪을 벗어나 느리지만 점차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미국인들이 자체로 생산한 것보다도 더 많은 소비를 하면서 외채를 빌려 쓰는 행태를 그대로 지속하는 한 미국경제가 활력을 되찾기는 힘들 것이라고 내다본다.

이들은 특히 미국의 민주정치가 경제를 살리는 구조개혁이나 투자증강보다는 오히려 당파적 이해에 묶여 미국경제를 자살로 몰아간다고 비판하면서 과연 미국의 이러한 정치체제가 오늘의 세계가 꼭 필요로 하는 변화를 과연 감당해낼 수 있을지 심히 우려된다고 말하고 있다.

 

자카리아(Fareed Zakaria)는 오늘날 미국이 당면한 문제는 미국정치인들이 미국에 활력을 불러일으킬 구조개혁보다는 정치인 개개인의 이해관계를 지키는 데 치중, 세금인상이냐 감세냐 만을 따지면서 개혁을 외면하는 경직성(Sclerosis)에 있다고 진단한다. 그는 이어 1979년 “일본을 1등국가”라고 예찬했던 에즈라 보글(Ezra Vogel)교수가 “일본의 정치체제가 일본의 진로를 가로막아 침체를 확대하는 길로 나가리라고 자기는 결코 예상하지 못했다”고 고백한 사실을 상기하면서 오늘날 미국정치체제의 역기능이 미국이 당면한 위기의 본질이라고 강조한다.

 

그의 주장은 그것을 서방민주 국가들이 당면한 모든 위기의 원인으로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변화의 수용과 적응의 필요성이라는 측면에서 미국의 정치체제와 정치인들이 위기의 주요원인을 제공한다는 지적에는 공감이 간다.

앞으로 미국이 활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정치개혁에 서둘러야 할 것 같다. 혹자는 미국이 운신의 폭을 줄여 신 몬로주의(Neo Monroeism)로 회귀할 가능성을 말하지만 이미 세계화의 틀에 묶인 국가로서의 미국은 그 길을 선택하기가 힘들 것이다. 또 정치상황이 변하거나 경제형편이 지금보다 나아진다고 해도 미국이 과거와 같은 외교패턴(일방적인 해외개입)을 지속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한국이 국방 자주화의 문제를 심도 있게 검토해야 할 당위가 있다.

 

4. 글을 맺으면서

 

한국은 미국, 중국, 일본 등 주변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치열하게 얽히고 있는 상황에 어떻게 효과적으로 대처해야 할 것인가. 더욱이 미국의 역할과 힘이 축소되는 상황 하에서의 효과적인 대응방도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한국의 과제는 국론의 통일이다. 종북(從北)세력의 발호를 결연히 차단하면서 여야대화를 통한 타협과 조정으로 국론을 통일하는 것이다. 대통령제하에서 양당이 정치를 주도하는 국가에서는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면 양당 간의 정치적 대결도 극단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오늘날 미국정치가 이를 잘 보여준다.

한국은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정치가 국가발전과 국론통일의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현재 한국에서도 여야대립은 갈수록 극단화되고 타협의 정치가 실종되는 사태가 이어지고 있다. 내각책임제 국가들에서는 소(小)연정이나 대(大)연정을 통해 정치적 타협이 가능할 기제(Mechanism)가 마련되어 있고 대통령제 국가라도 결선투표를 실시하는 경우에는 유권자 50%이상의 지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타협이 성립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정치에서는 정치적 타협과 양보를 가능케 할 기제는 전무(全無)하고 타협의 정치는 오직 여야정치권의 정치력발휘에 의존할 뿐이다. 나날이 늘어나는 복지의 수요를 충족시키고 정세변화에 잘 대처하려면 여야 간의 타협의 정치는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것 같다.

 

남북한관계도 상대방의 붕괴를 가정하기보다는 서로 공존하면서 신뢰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냉전 이래 지금까지 남북한은 믿고 의지할만한 파트너를 주변 대국들에서 구했고 이것이 동맹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탈냉전의 새로운 국제환경하에서는 바로 그 파트너가 남북한 당사자로 바뀌어야 할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핵문제의 해결도 이러한 파트너십의 새로운 형성 없이는 어느 경우에도 큰 진전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이산가족문제의 해결이나 남북한의 경협은 이러한 신뢰를 쌓는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제시한 한반도신뢰프로세스도 소극적 관점보다는 적극적 관점으로 그 지평을 넓혀야 한다. 이와 동시에 국내정치구조(Domestic structure)도 타협의 정치가 성립할 제도적 기제를 적극 모색해야 한다. 정계개편도 여기에 포함되어야 할 과제의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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