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헌정지 2016년 12월호에 기고된 것임
헌법개정을 통해 국난을 극복하자
이 영 일(3선 국회의원)
한국정치에서 다시 개헌문제가 현안으로 등장하고 있다. 특히 최근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대상으로 몰고 가는 최순실 게이트는 단순한 비리로만 간주할 사건을 넘어서서 여섯 번째로 이어지고 있는 5년 단임제 헌법, 이른바 87년 체제가 그 수명이 다 했음을 단적으로 입증한 대표적인 사건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회고컨대 87년 체제는 1인장기집권의 폐해를 막는 데는 기여했지만 아직도 발전과 변화의 속도를 늦출 수 없는 우리나라에서 5년에 한번 씩 국민직선으로 대통령이 바뀜에 따라 국가발전의 견인에 꼭 필요한 장기적 국정과제 추진이 어렵게 되었다. 또 새로 당선되는 대통령마다 전 정권이 추진한 정책의 승계발전보다는 이를 무시하거나 부인하고 새 정책을 추구하기 때문에 국가정책의 지속성, 일관성도 유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예컨대 MB정권이 말하던 녹색성장론은 박근혜 정권의 창조경제론에 눌려 그 기치마저 희미해지고 있지 않은가.
또 모두가 경험해온 사실이지만 집권3년차부터 시작되는 대통령 리더십의 레임덕 현상과 여기에서 비롯되는 공무원 집단의 복지부동은 국력신장을 저해해 왔다. 여기에 대통령임기 후반에는 친인척 비리 아니면 측근 비리와 부정부패가 예외 없이 나타났다.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시작해서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비리, 김대중 대통령의 3형제 비리, 노무현 대통령의 형님비리, 아내, 자녀들의 비리, 이명박 대통령의 형님비리 등이 친인척 비리였다면 박근혜 대통령시대에는 친인척 비리가 없는 대신 측근비리로서 최순실 게이트가 나타났다.
이러한 국정상황 때문에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달러 선에 묶여서 3만 달러 선으로 치솟지 못하고 있다. 침체와 답보상태의 지속은 국제 경제 환경의 탓도 있겠지만 대내적으로는 가장 중요한 원인의 하나 가운데 87년 체제에 포함된 비능률과 불안정, 비리와 부패에도 큰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평가다.
지금 우리의 시대상황은 이러한 국내 상황의 어려움 극복 이외에도 현재 펼쳐지고 있는 제4차 산업혁명의 요구도 수용하고 또 북한의 핵무장으로 조성된 남북한관계의 변화에 까지도 적극 대처해야할 도전에 직면해 있다. 바로 여기에 국가운영의 큰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될 절실한 요구가 있으며 이 과제해결의 방편으로 개헌의 필요성이 등장한다.
이제 1인 장기집권의 우려는 없어졌다지만 우선은 내치외교에서 장기적인 국정과제를 추진하고 정책의 일관성, 지속성을 확보할 체제를 시급히 모색해야 한다. 아울러 대통령제의 또 다른 병폐로 지적되는 이른바 함량미달의 선동정치인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그 결과 열등한 정책이 나오지만 임기 중에 책임을 추궁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우리 국민 들은 너나없이 체험해왔다.
능력이 모자란 사람이 혼자서 중요한 국사를 마음대로 결정하는 폐단은 대통령제를 채택하는 모든 국가가 당면하는 고민거리이다. 플라토가 말하는 철인(哲人)이 대통령에 당선될 수만 있다면 그 나라는 축복받겠지만 우리나라는 불행히도 그렇게 인물 복이 많은 나라 같지는 않다.
요즘 국내에서 거론되는 차기 대선주자들의 면면을 보아도 국민들의 큰 지지를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는 상황을 본다면 87년 체제의 문제점이 해소될 전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점에서도 개헌은 필요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수석비서관들이나 내각의 각료들을 그대로 장식품처럼 세워놓고 자기의 카리스마를 지키기 위해 공식참모들과의 공식적인 국정논의나 개인독대를 피하면서 최순실과 문고리 3인방만 데리고 국가의 중요정책을 좌지우지하다가 터진 사건이 한국정치의 오늘의 위기라면 대통령이 혼자서 국가를 다스리는 시스템은 더 이상 이대로 두어서도 안 될 것이다.
다행히 박근혜 대통령은 금년 가을 국회연설에서 개헌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자기 임기 안에 개헌작업을 끝내고 싶다고 말했다. 정치권은 최순실 비리를 은패하려는 책동으로 간주하고 이를 무시, 외면했다. 물론 그러한 측면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개헌발언의 동기가운데 불순한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고 해서 87년 체제를 끝내고 새로운 형태의 국가체제를 갖자는 개헌의 필요성마저 부정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된다.
앞으로 우리나라는 대통령 혼자서 독단적으로 다스리고 운영하는 나라에서 중지를 모아 함께 국정을 운영하는 협치의 중요성이 갈수록 필요해지고 있다.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적기만 하는 각료가 아니라 대통령에게 No!라고 말할 수 있고 민의를 반영하면서 국정을 토론하는 각료들이 중시되어야 한다. 즉 혼자 다스리는 나라를 함께 다스리는 나라로 바꾸어 보자는 것이다. 또 1인 장기집권은 안되지만 선거를 통해 능력과 실적을 인정받는 정당의 계속 집권, 장기집권은 허용되면서 장기적인 국정과제와 국가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해 나가야한다. 지금 우리는 바로 이러한 체제를 모색해야 할 때다. 바로 여기에 맞는 정답이 내가 보기에는 내각책임제 개헌이다.
일부논객들 가운데는 5년 단임제 헌법을 대통령 중임제 헌법으로 바꾸자는 주장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제가 유지되는 한 대통령제의 폐해는 결코 시정되지 않을 것이다. 5년 단임제보다는 장기적인 국정과제를 선정하고 레임덕의 출현 시기를 늦출지는 모르지만 대통령제의 폐단은 계속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의원내각제를 적극 모색할 필요성이 있다.
또 일부 논자들은 2원집정부제가 대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2원집정부제가 대권을 꿈꾸는 다수의 주자들을 타협시키고 협력을 통한 역할분담으로 국정을 안정시킬 수 있는 방도라고 주장한다. 어느 면에서 들으면 매력적인 제안이기도 하다. 그러나 2원집정부제는 대통령이 외교안보를 맡고 총리가 내정을 맡는다는 취지의 정부인데 우리나라는 내정과 외치를 구분하기 어려운 약소 분단국가이기 때문에 대통령과 수상간의 갈등만 유발할 뿐 프랑스에서와 같은 2원정부나 동거정부(Cohabitation)를 만들어내기가 정말로 힘든 나라다.
현시점에서 우리는 개헌을 통해 의원내각제를 실시, 정당을 통한 책임정치를 실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국민들은 우리나라 4.19혁명이후 성립했던 민주당 시대의 내각제를 연상하면서 잦은 불신임 때문에 초래될 정국의 불안정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독일식의 건설적 불신임 제를 채택하면 그런 우려는 해소될 수 있다.
독일은 건설적 불신임제를 채택, 야당이 연립이건 1당이건 간에 새로운 수상을 정해놓을 때만 불신임안을 제안할 수 있게 하는 건설적 불신임제도를 채택했던 결과 국회를 통과한 불신임안은 독일헌정사 70년 역사에서 단 1건뿐이었으며 장기간 정국안정이 유지되었다. 아데나워 수상시대에 기독교 민주당은 14년간 집권하면서 라인 강의 기적을 일궈냈던 것이다.
물론 역사적, 환경적 차이가 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18년간의 개발독재를 통해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것과는 아주 대조된다.
지금 우리는 정국의 혼미에서만 벗어나려고 하는 대신에 정국혼미의 원인이 된 국가운영의 틀을 혁명적으로 바꾸는 지혜를 발현해야 한다. 최순실 사건은 이를 적발하고 파헤침으로 해서 재벌들에게서 거두어들인 800여 억 원의 돈은 회수하면 그만이고 비리에 관련된 정범과 종범, 또 대통령 이름을 팔면서 호가호위(狐假虎威)한 부패집단들은 의법 처리하면 된다. 또 자기 카리스마유지를 위해 소수 인들의 인의장막에 갇혀 국정을 오도한 박대통령에 대해서도 중한 책임을 물어 국가가 더 이상의 혼란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된다. 동시에 적극적인 개헌추진으로 한국정치의 새장을 여는데 국민의 뜻을 모아야 한다.
현시점에서 개헌을 반대하고 현행 헌법고수를 주장하는 인물들도 있다. 그들은 한시라도 빨리 대통령을 하야시켜 60일내에 대선을 치루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야당도 이제는 그 부작용 때문에 국기가 흔들리고 나라의 미래마저 암울하게 만들어 버리는 5년 단임 대통령제의 연장선에서 집권을 도모하려는 퇴영적 자세를 지양하고 국가의 틀을 바꾸는 개헌을 통해 한국정치의 새로운 비전정립에 나서야 할 때다.
더 이상 새로운 시위 없이도 이미 식물대통령으로 되어버린 박근혜 대통령의 존재를 크게 의식할 필요 없이 국가운영의 큰 틀을 바꾸는 개헌작업에 국민적 지혜를 모아야 한다. 개헌을 통해 87년 체제와 박근혜대통령을 함께 끝내는 것이야말로 100만 명의 시위가 얻는 커다란 보람이 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객(Politician)이 아니라 국정지도자(Statesmanship)이며 요즘 내 노라 하는 대권주자들이 정객적 자세를 넘어서서 국정지도자로 탈바꿈하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대통령을 하야시키는 압력으로서의 시위가 아니라 새로운 헌법을 탄생시키는 시위로 업그레이드될 때 한국민주주의는 더 한층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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