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개혁 2.0을 모색해야 할 때다(헌정지 2017년 5월호)
이 영 일(제11대, 12대, 15대 국회의원)
1. 들어가면서
우리는 2017년 5월9일 탄핵으로 궐위된 대통령을 새로 선출한다. 우리는 그간 대통령이 탄핵되는 상황을 하나씩 지켜보면서 이런 불행한 일이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정치가 조속히 개혁되어야 할 필요성을 너나없이 절감했다.
대한민국은 건국 이래 70여년의 역사가 흘렀다. 이 기간 동안 우리 사회는 모든 분야에서 선진화를 향한 변화가 끝없이 이어졌다. 특히 경제 분야의 발전은 경이로웠다. 시쳇말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룬 유일한 나라로 지목될 만큼 우리나라의 발전은 놀라웠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러한 발전과는 거리가 먼 예외지대가 있다. 정치 분야다. 정치는 조금치도 개선되지 않았다. 그간 대한민국에서 시행된 대통령제는 그것이 단임제이건 중임제이건 간에 예외 없이 제왕적 대통령제로 변질되어 권력의 사유화 현상을 가져왔고 임기 말로 접어들면 레임덕과 비리, 부패에 휘말려 비극적으로 종말을 고했다. 1987년부터 실시된 여섯 번 선거에서 후세에 귀감이 될 대통령이 한 분도 나오지 않았다면 그것은 이 제도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번 대선은 현행 헌법에 따른 일곱 번째 선거인데 새 대통령도 현행 헌법에 그대로 따른다면 실패한 대통령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현재의 정국은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원내안정의석을 갖지 못한 4당체제하의 소수파정권이기 때문에 국정능률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약체 정권이 될 것이다. 국가상황도 험난하다. 안보위기가 심화되어 일촉즉발의 전쟁위기가 감돈다. 경제는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만들어 내지 못한 가운데 경기침체와 실업으로 한국경제의 장래를 너나없이 걱정하고 있다. 따라서 새 대통령은 앞선 대통령들의 실패한 전철을 밟지 않도록 정치개혁을 단행, 원내안정의석을 갖는 정당이 집권, 내외의 도전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즉 제7공화국을 만드는 길을 여는데 모든 노력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 그간 정치개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정치개혁은 있었으나 그 목표는 권력구조를 대통령중심으로 강화하거나 대통령임기를 연장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이같이 대통령의 권력 강화나 임기조정에 목표를 둔 개혁을 ‘정치개혁 1.0’이라고 한다면 국정을 안정시키고 권력의 사유화를 방지, 정치행태를 민주적으로 바로 잡는 개혁을 “정치개혁2.0”이라고 정의하면서 지금 당장 한국에서 필요한 정치개혁 2.0의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2.정치개혁 2.0의 세 가지 당면과제
필자는 현시점에서 한국정치가 당면한 정치개혁 2.0의 과제를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문제 상황에 조명하여 분석하고자 한다. 첫째로 패거리 정치의 적폐가 갈수록 심해져서 정당이 사당화(私黨化)하고 있다. 둘째 전무(全無) 아니면 전부(全部)를 요구하는 비타협의 정치가 한국의회의 정치기능을 마비시키고 있다. 셋째로는 5년 단임제 헌법이 이상 두 가지의 병폐와 결합되면서 국가발전의 걸림돌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 패거리정치의 적폐
패거리정치의 적폐가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다. 잘 알다시피 동교동계와 상도동계의 오랜 파쟁은 정권교체의 기회를 놓쳐 한국 민주화의 달성을 지연시키기도 했지만 더 심각한 부작용은 그것이 정당의 사당화현상을 초래한 것이다. 이들 양파의 갈등은 5년 단임제 헌법덕분에 양파의 보스가 각각 대통령에 당선되어 시들해졌지만 그들이 남긴 유산은 정당의 패거리 화, 사당화현상을 고착시킨 것이다. 예컨대 김대중은 민주당을 뛰쳐나와 평화민주당을 만들었고 이를 다시 새정치국민회의로, 또 이를 개편, 새천년 민주당으로 바꾸었는가하면 김영삼도 신민당에서 3당 합당으로 신한국당을, 다시 ‘한나라당’으로 당명을 바꾸었다. 당이라는 간판을 달았을 뿐 그것은 다름 아닌 패거리정치의 수식어였다. 민주당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노무현도 민주당을 ‘열린우리당’으로 바꾸었다. 열린우리당은 한마디로 말해서 노무현당이다. 이명박의 한나라당도 몰락직전에 박근혜가 당권을 장악,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꾼 후 공천갈등이 심화되면서 친 박 대 비박으로 갈등을 벌이다가 탄핵정국을 맞이해서 ‘자유 한국당’과 ‘바른정당’으로 갈라섰고 민주당도 ‘국민의 당’과 ‘더불어 민주당’으로 분열했다.
이렇게 패거리정치는 공천 때마다 자기파 중심의 공천을 통해 권력 나눠먹기 경쟁을 하기 때문에 항상 이합집산을 거듭하기 때문에 흔히 정치학에서 말하는 당의 법통(Legitimacy)이나 정통성이라는 말은 아무 의미가 없어졌고 당 나름의 역사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념과 강령상의 큰 차이도 없었다. 정치인들은 패거리의 우두머리가 결정하는 정책과 강령에 맹종함으로써 정치생명을 이어가거나 존립했다. 이해관계가 달라지면 당을 떠나면 되었다. 이 때문에 탈당이나 당적 옮김이 변절(變節)이라거나 지조(志操)를 버렸다는 식의 도덕적 비난이 아예 성립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영미(英美)세계에서는 이념이나 정책선택의 흐름을 공유하면서 수백 년의 당사(黨史)를 이어오는 정당이 많다. 제2차 대전이후 민주적 정당제도가 실현된 독일의 경우에도 기독교민주당이 70년의 당사(黨史)를 갖는 반면 사회민주당도 우파만을 기준으로 할 때도 1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의미의 역사가 있는 정당은 존재치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었다. 패거리 정치를 극복, 청산하기 위해서는 현존 정당을 본위로 개혁의 물꼬를 트기보다는 개혁의 목표를 공유하는 인물중심의 정계개편을 통해 패거리가 아닌 정책과 이념을 공유하는 진정한 정당의 출현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나. 전무(全無)냐 전부(全部)냐의 비타협정치의 지속
한국정치에서는 All or Nothing의 비타협의 정치가 의회정치의 전면을 규정하고 있다. 심지어 외교안보분야에서 까지 비타협의 정치가 계속되고 있다. 안보외교에 여야가 없다거나 한 때 프러시아 국회에서 이룩되었던 '성내(城內)평화'(Buerger Frieden)도 우리는 기대할 수 없다. 요즈음 THAAD배치 문제를 놓고 보이는 여야대립도 우리를 슬프게 한다. 지금 당장에라도 야당이 THAAD 배치를 찬성한다고 발표, 여야합의가 이루어진다면 중국의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빤히 결론이 보이는 상황 하에서도 타협이 못 이루어지는 것은 정치체질가운데 침윤된 비타협적 DNA탓도 있겠지만 북한의 대남작동에도 한 원인이 있을 것 같다.
한국은 조선시대 이래 사회윤리의 기조로 지조의 윤리(Gesinnungs-Ethik)가 지배적 추세였으며 책임의 윤리(Verantwortungs-Ethik)는 외면되었다. 책임의 윤리는 흥정의 윤리와도 맥을 같이 하는데 유럽에서는 한자 동맹이래 상응하는 대가를 주고받는 거래의 윤리가 흥정의 윤리로, 책임의 윤리로 발전해왔다. 흥정의 윤리가 없기 때문에 국내정치에서도 타협의 정치가 숨 쉴 여지가 없다. 타협의 여지를 만들어 낼 결선투표제도 없으며 제왕적 대통령제로 흐르는 대통령 단임제를 국정운영의 틀로 하기 때문에 내각책임제에서와 같은 정당연합을 통한 연립정부나 협치(協治)가 성립할 여지도 없다. 현행 헌법 하에서는 원내안정의석을 확보하지 못하는 한 누가 집권하더라도 정치 불안은 계속되고 국정능률은 하락할 수밖에 없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정에서 국론이 크게 양분되었다. 촛불시위와 태극기 시위가 그것이다. 그러나 촛불과 태극기 시위대의 등장은 국민의 통합이 아닌 분열을 의미하고 더욱이 정부와 국민이 아닌 국민 대 국민의 분열이기 때문에 이를 하나로 통합하기위해서는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연정(聯政)의 필요성을 절감케 한다. 비타협의 정치를 타협의 정치로 바꾸기 위해서는 각종선거에서 결선투표제를 광범위하게 채택 실시, 타협이 모든 정치에서 필수적 절차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유럽과 중남미에서도 결선투표는 일반적 관행이 되고 있다.
다. 87년 체제의 청산극복
5년 단임제 헌법은 지난 30년 동안 한국정치의 오랜 병폐의 하나인 1인 장기집권을 막고 나아가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의 길을 터서 절차적 민주주의의 정착에 기여한 바 있다. 그러나 그 부작용이 기여를 넘어설 만큼 컸다. 이제 87년 체제도 박근혜 대통령 퇴진과 함께 역사 속에 파묻고 원내안정의석을 확보한 당이 권력을 장악 운영하는 내각제 내지 2원집정부제로 고쳐야 할 도전에 직면했다.
회고컨대 87년 체제는 1인장기집권의 폐해를 막는 데는 분명히 기여했다. 그러나 아직도 발전과 변화의 속도를 늦출 수 없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5년에 한번 씩 국민직선으로 대통령이 바뀜에 따라 국가발전의 견인에 꼭 필요한 장기적 국정과제 추진이 어렵게 되어왔다. 또 포퓰리즘이 선거의 주 무기가 되고 당선되는 대통령마다 전 정권이 추진한 정책의 승계발전보다는 이를 무시하거나 부인하고 새 정책을 추구하기 때문에 국가정책의 지속성, 일관성도 유지하기 어려웠다. 또 5년 단임제 대통령은 집권3년차부터 시작되는 대통령 리더십의 레임덕 화, 여기에서 비롯되는 공무원 집단의 복지부동, 대통령임기 후반에 예외 없이 나타나는 정치부패는 우리 모두가 경험했다. 이러한 국정상황 때문에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달러 선에 묶여 더 치솟지 못하고 있다. 침체와 답보상태의 지속은 국제 경제 환경의 탓도 있겠지만 대내적으로는 가장 중요한 원인의 하나 가운데 87년 체제에 포함된 비능률과 불안정, 비리와 부패에도 큰 원인이 있다.
이 시스템에 패거리정치와 비타협의 정치가 결합됨으로 말미암아 한국정치는 발전이 아닌 후퇴의 늪에 빠져 버렸다. 더 이상 국민들에게 희망과 꿈을 심어주지 못할 정도로 정치기능이 마비상태에 빠진 것이다.
3. 맺는 말
이러한 정치 병리를 극복하고 앞으로의 정치가 국가발전에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면 우선 국정의 틀을 개헌을 통해 대통령 단임제(87년 체제)에서 내각책임제나 2원집정부제로 바꾸어 원내안정의석을 확보한 정당이 국정을 주도케 해야 한다. 이러한 개헌은 제7공화국의 탄생을 의미할진데 새로운 내각제나 2원적 집정부제 정부형태 하에서는 패거리정치의 수단으로 전락한 정당을 정책과 이념중심의 정당으로 새롭게 탄생시키고 엄격한 당규 하에 당이 민주적으로 운영될 수 있게 해야 한다.
두 번째로는 원내안정의석을 획득한 정당이 없을 경우에는 연립정부를 모색하고 운영함으로써 정치에서의 타협이 정당존립과 정권유지의 필수조건이 되도록 정치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 앞서도 지적했듯이 한국은 현재 180석이상의 원내의석을 갖지 않으면 원만한 국정운영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협치(協治)를 위해서는 연립정부는 필연적 선택이 될 것이다.
이번에 당선된 대통령이 개헌을 추진, 제도적으로 제7공화국이 탄생할 여건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국민들이 주도한 박 대통령의 탄핵은 정치사적으로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더욱이 안정의석을 확보하지 못하고 출범한 약체정권이 대통령의 직권으로 임명 가능한 감투만 나눠 쓰는 정부가 된다면 필연적으로 새로운 시위의 물결이 일어날 것이다. 동시에 국가의 안보위기, 경제위기는 더 한층 심화되고 새 대통령도 정치실패의 늪에 빠지는 불행한 전철을 피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끝으로 한국은 금년으로 57주년을 맞는 4.19혁명이 성공한 나라다. 국민들의 주권의식도 팽배하다. 핵전쟁의 우려를 안고 있는 분단국가다. 이러한 나라에서 국정을 안정시키고 국민통합을 이루고 능률을 올릴 정치개혁은 촌분의 여유를 허용치 않을 만큼 시급한 과제다. 정치인들도 이 나라를 자기의 권력욕 충족대상으로만 보는 미망을 버리고 국민들도 이 나라의 내일을 걱정하면서 정치개혁 2.0의 성공을 위해 뜻과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정치개혁 2.0을 모색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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