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과 더불어 필요한 건국기념일

                                                               

                                                                           이 영 일(한중문화협회 회장, 3선 국회의원)

 

                                             <들어가면서>

 

금년으로 우리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69년,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지 66년을 맞는다. 우리는 일제에서 해방된 1945년 8월 15일을 광복절로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광복된 지 3년만인 1948년 8월 15일에 수립된 대한민국정부의 탄생을 기리는 기념행사를 특별히 가져 본 일이 없다. 3년의 차이가 있지만 광복절과 대한민국 건국일은 같은 날이다. 8월 15일을 공유하는 까닭에 광복절과 건국기념일은 그날이 그날인 것으로 인식되는 가운데 광복과 건국은 그 의의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양자의 차이를 의식하지 못하면서 66년을 지내오고 있다. 이 결과 대한민국의 건국이 우리 민족사에서 갖는 의의가 국민들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리지도, 내면화 되지도 않음으로 해서 오늘날에는 한반도의 유일한 정통정부로서의 대한민국의 존재를 부정하는 언설까지 나도는가 하면 국정과서인 한국현대사 교과서내용에서 마저 사실왜곡이 노정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일찍이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붸버(Max Weber)는 “어떠한 정부라도 자기국민들에게 자기 나라를 사랑하고 자기나라에 귀속감을 갖도록 가르칠 능력이 없으면 오래갈 수 없다”고 설파한 바 있다. 이런 문제의식을 염두에 두면서 건국 66년을 맞는 현시점에서 광복절과 구별되는 의미로서의 대한민국 건국이 갖는 의의를 살펴보고자 한다.

                     

                           <험난했던 건국에의 길을 회고 한다>

 

일본의 항복으로 우리민족은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되었다. 이날을 기리는 것이 광복절이다. 그러나 해방과 동시에 우리 민족 앞에 나섰던 가장 긴급한 과제는 한반도에 단일의 독립 국가를 건설(Nation Building)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해방역사는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명분으로 미국과 소련의 양국군대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38이북지역은 소련 측이, 38이남지역은 미국 측이 각각 분할 점령한 상태에서 전개되었다. 점령군은 초기에는 양 지역에서 군정을 실시하면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중심이 되고 남북한 정당 사회단체가 참가하는 협상을 통해 독립정부를 세우자는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들은 모스크바 3상회의를 통해 이미 전후처리문제로서의 한반도문제를 강대국들이 참가하는 신탁통치(소련은 이를 후견통치로 표현함)를 실시, 독립능력을 기른 후 독립 국가를 만들자는 각본을 짜놓고 우리 앞에 내밀었다. 한국인들의 통치능력, 독립능력을 무시한 이 결정에 대해 거족적인 반대운동(반탁운동)이 일어났고 여기에 곁들여 미소공동위원회가 파탄나면서 정통독립운동세력이 중심이 된 민족진영은 독자적인 독립국가 건설운동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 북한지역에 위성국가를 세우려는 소련의 음모>

 

그러나 불행한 것은 1945년 9월 20일 소련의 스탈린은 소련이 한반도를 태평양으로 뻗어나갈 아시아의 교두보로 삼기위해 전 한반도의 공산화를 획책하고 그 방법의 일환으로 소련군 점령지역인 북한 땅에 소련의 위성정권을 수립하도록 비밀지령을 내렸다. 치스차코프 북한 군정사령관은 1946년부터 조선노동당 북조선 분국을 중심으로 남한의 미군정당국과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북한지역에 인민군대를 창설하고 토지개혁의 미명하에 북한전역의 토지를 전 인민적 소유로 변형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소련군정사령부는 위성정권의 하수인으로 김일성을 선정했다. 김일성은 소련군의 극동지역 첩보대장인 스티코프 장군 밑에서 소련군대위계급장을 달고 조선인 밀정으로 활약했던 인물이었다. 당시 소련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항일애국지사들이 많았지만 김일성이 잡은 줄이 가장 튼튼했다. 김일성의 소련 측 상사는 스티코프였고 그는 소련 KGB의 수장인 베리아의 부하였으며 베리아는 당시 스탈린의 심복이었기 때문이다. 한반도 분단의 정치과정은 이처럼 온 겨레가 모르는 가운데 소련군 주도하에서 진행되었다. 소련의 괴뢰인 김일성은 이런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남북협상을 제안했고 조국분단을 원치 않았던 민족진영의 김구, 김규식, 조소앙 선생 등은 소련의 국제적 음모도 모르는 채 평양을 방문했다가 김일성 정권수립에 이용당하였다.

 

                    <유엔을 이용한 이승만 박사의 건국 작업>

 

민족진영의 이승만 박사만이 소련의 이같은 움직임을 간파했다. 당시 이승만 박사는 미국에서 국제정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해방정국에서 미국인과 러시안 인을 비서로 채용, 주변정세변화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던 유일한 지도자였다. 그는 미 군정당국에 소련의 음모를 알리면서 한국정부수립을 서두를 것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이승만 박사는 미국을 방문, 유엔감시 하에 한반도 전역에 걸친 자유총선거를 실시, 단일의 통일 독립된 민주정부를 세울 것을 미국정부에 건의하였다. 이 건의를 미국 정부가 수용함으로 해서 유엔총회는 결의로서 유엔감시위원단을 한국에 파견, 이들의 감시 하에 자유총선거가 실시되었고 이 선거를 통해 대한민국이 탄생한 것이다. 유엔감시위원단의 3.8 이북지역 방문은 소련의 거부로 실현되지 못했지만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통해 대한민국정부가 탄생했고 제헌의회는 이승만 박사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유엔총회는 1948년 12월 12일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승인했다. 유엔결의는 문면(文面)에서만 보면 대한민국이 한반도에서 선거실시가 가능했던 지역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대한민국 이외의 다른 정치체가 한반도에 존재한다거나 대한민국과 정통성을 다투는 다른 정부가 있다는 내용은 유엔결의의 어느 부분에도 없었다. 이점에서 대한민국은 한반도내에서 유엔이 인정한 유일한 합법정부인 것이다.

 

                             <한반도의 국가 정통성은 어디에 있는가>

 

한반도에서 대한민국이 성립한 경위를 이렇게 살펴보는 것은 앞으로 한반도에서 통일을 주도해나갈 국가정통성의 소재를 분명히 하기위해서다. 소련점령군의 군정 하에서 소련 군정사령관이 세우고 우두머리를 임명한 북한정권과 유엔감시위원단의 감시 하에 실시된 자유 총선거에 의해 성립된 대한민국 정부의 어느 쪽이 대내외적으로 정통성 있는 정부인가. 그 답은 두말할 필요 없이 대한민국이다. 이점에서 우리는 건국방식으로 유엔공식을 창안하고 그 방안에 따라 대한민국을 수립한 이승만 박사의 공헌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의 탄생은 한반도 전역의 공산화라는 스탈린의 아시아 전략에 큰 차질을 초래했다. 이 기미를 간파한 김일성은 대한민국의 건국초기의 군사적, 경제적 취약점을 노리고 소련의 군사원조를 받아 1950년 6월 25일을 기해 민족해방전쟁의 미명하에 무력남침을 강행하였다. 대한민국 수립 2년 후의 일이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무력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트루맨 독트린과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집단자위조치에 따라 출병한 유엔군의 참전으로 북한의 남침은 저지되었다. 이 전쟁으로 500만 이상의 동포가 목숨을 잃거나 부상당하고 고아와 미망인이 양산되고 한반도 전역이 초토로 변했다. 이점에서 김일성은 전쟁범죄자이고 이 침략에서 정통정부를 지켜냈고 한미방위동맹을 체결, 오늘날까지도 제2의 한국전쟁을 막게 해준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은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광복과 건국 절은 날자는 같으나 내용은 별개다>

 

우리는 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앞으로 대박이 될 통일의 필연성을 주장할 때 통일이 먼 미래의 꿈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조만간 맞이해야할 새로운 과제로 받아들이고 환호했다. 특히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나 중국의 시진핑 주석도 한반도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지지한다고 밝히고 있는 점에 비추어, 또 북한정권의 생존능력에 대한 국제적 회의가 확산되는 추세를 고려할 때 통일을 주도할 대한민국의 정통성 확립에 기여한 초대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공헌은 반드시 재평가 되어야 하고 나아가 대한민국의 성립이 갖는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광복과 건국의 차이를 구별하는 문제의식 없이 지난 세월을 살아왔으나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광복과 건국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광복이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면 건국은 외세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정부가 국민의 직접 비밀 자유 보통의 선거를 통해 성립한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건국기념일과 광복절이 같은 날이기 때문에 건국의 의의를 되새기기 보다는 광복에만 더 큰 비중을 두고 지내왔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의 탄생이 우리 5천년 민족사에서 갖는 의의를 망실하거나 대한민국이 반공 구국투쟁을 통해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확립, 번영과 발전을 가져오게 한 체제라는 사실이 망각할 때가 많았다. 지금 구체적으로는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하는 역사과정에 대한 몰이해가 오늘날 역사교과서 파동의 큰 배경이 되고 있지 않는가.

 

                      <광복절과 건국절의 차이를 이해하자>

 

금년으로 우리는 광복 69주년 건국 66주년을 맞는다. 국가원수의 경축사가 광복절 행사의 백미인데 행사에 참가하는 인사들의 주축은 생존한 독립운동가나 그 후예들이며 대한민국의 건국을 가능케 하기위해 피나는 투쟁을 전개했던 역사와 인물은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일제에서 타율적으로 맞이한 광복절 못지않게 어려운 상황에서 대한민국을 세우고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고 자유민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수립, 한국의 오늘을 있게 한 역사와 인물에 대한 고마움도 이울러 기리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광복이 민족적 가치에 역점을 둔다면 건국은 국가적 가치에 보다 큰 방점을 찍어야 한다. 이러한 균형이 유지될 때 광복절과 건국 절은 국민 모두의 마음속은 물론이거니와 후대들에게도 바르게 전수될 것이다. 올해부터 광복절과 구별되는 건국 절을 정하자는 국민운동에 더 큰 활력이 넘쳐나기를 기원하는 마음 간절하다.

 

필자 이영일

학교경력: 광주일고 졸업,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졸업, 동구개학교 행정대학원 졸업

관청경력: 국토통일원 정치외교정책담당관, 교육홍보국장 및 실장, 통일연수 원장

정치경력; 제11대, 12대, 15대국회의원, 국회문교공보위원장, 당총재비서실 장, 한미정상회담 및 한국유럽4개국 정상회담공식수행원, 2회에 걸 친 한중정상회담 수행

언론경력: 동양통신사 외신부기자, 기독교방송해설위원, 사상계 편집위원

사회단체: 한민족복지재단 공동대표로 6회 북한 방문, 한국아프가니스탄 친 선협회회장 10년, 한중문화협회 회장 15년

주요저서: 분단시대의 통일논리, 햇볕정책의 종언 등 4책

대학강의: 호남대학교 초빙교수 10년, 우석대학교 초빙교수 2년,한성대학교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2년

상벌: 홍조근정훈장 수상, 벨기에 정부수교십자훈장, 우스베키스탄 국립사마 르칸드 외국어대학 명예정치학박사, 호남대학교 명예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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