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19 혁명 55주년 국립묘지참배를 마치고

 

                                                  이 영 일

 

 필자는 4.19혁명 55주년을 맞는 이른 아침 7시30분, 4월회 회원들에게 배정된 시간에 4.19민주혁명묘지를 참배, 분향 한 후 옛 학우들의 무덤과 영정보관소를 살핀 후 함께 온 동지들과 해장국으로 아침을 마치고 곧장 교회로 갔다. 내가 4.19 민주혁명묘소를 꼬박 꼬박 참석한지는 몇 년 안 된다.

나는 1963년 쿠데타 정권이 수여하는 건국공로훈장의 수상거부를 대학신문에 성명으로 발표한 후 군사권위주의정권이 계속된 30년간 정부에서 주관하는 일체의 4.19관련행사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 당시에는 4.19가 실패한 혁명처럼 느껴졌고 그래서인지 서가(書架)에 촘촘히 끼여 있는 민주주의 관련 서적들마저 희미한 옛 연인의 추억처럼 의미 없어 보였다.

 

 그러나 4.19날만 되면 4.19 당일 현장에서 나와 함께 서울문리대 학생데모의 선두에서 달리다가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앞에서 총을 맞고 타계한 문리대 수학과 3학년의 친구 김치호(金致浩)의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서 떠나지 않았다. 김치호는 당일 나와 함께 종로5가 지경에서 진압경찰에 함께 억류되어 시청광장으로 끌려갔다. 거기서 학생들을 일단 풀어주자 경찰봉에 안경이 깨지면서 왼쪽 눈자위를 다쳐 피 흘리는 나를 서울대학병원 안과로 데리고 가서 진료를 받게 한 후 도서관에 둔 가방을 찾아오겠다면서 뛰어나간 것이 내가 본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는 도서관이 아닌 경무대 쪽으로 바로 뛰어갔다가 참변을 당했다.

 그는 나와 학과는 달랐지만 문리대 기독학생회(SCA)에서 만났고 그 후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함께 감상한 것이 인연이 되어 대학교정에서 만나면 가끔 레시타티브로 대화를 나누던 좋은 친구였다. 나를 자기가 멤버인 남산 합창단에 함께 나가자고 권유하다가 먼저 타계했다. 내 부모 말고 성묘해야할 친구가 있다면 바로 그 친군데 정부주관 행사가 싫다고 4.19묘지에 안 가는 것이 항상 나의 맘을 무겁게 했다.

 

 나의 60년대 10년 동안은 인생의 시련기였다. 두어 차례 투옥되어 540여일을 서대문교도소에서 보냈고 신원조회에 걸려 취업 길도 막혔던 답답하고 막막한 시절이었다. 나는 대학연구소의 연구원이라는 타이틀로 도서관에 다니면서 쿠데타나 학생혁명 등 신생국 근대화과정을 소재로 한 책들만 줄곧 읽어대었다. 흔히 말하는 신생국에 관한 비교정치연구서들이었다. 여기서 나는 4.19는 실패한 혁명이 아니라 성공한 혁명이었다는 결론을 얻었다. 한국의 1960년이라는 시간과 분단된 후진국이라는 공간의 제약 속에 갇혀있던 내가 지식과 정보의 양이 크게 늘어나면서부터 민주주의와 국가발전을 보는 시각에 큰 변화가 생겼다.4.19이후에 전개된 한국사회의 현상을 읽고 평가하는 관점도 달라졌다.

 

당시 한국은 오늘날 아프리카의 가나 수준의 경제력밖에 없을 만큼 가난했다. 그러한 한국이 경제도약을 위한 선행조건을 충족시켜 국력을 기르려면 권위주의 정권이 출현할 도리밖에 없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군사권위주의 정권들이 출현하기에 앞서 4.19를 통해 우리 국민 모두가 나라의 주권자로서의 의식과 지위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권위주의 정권들은 중남미나 아프리카, 중동에서와 같은 부패독재정권으로 전락할 수 없었다. 개발독재라는 표현이 나올 만큼 한국의 권위주의 정권들은 국력배양과 신장에 크게 공헌하면서도 주권자인 국민을 두려워했다. 젊은 사람들의 피로 국민들을 주권자가 되게 하였고 이 주권자의 지위를 지켰기 때문이다.

 

수천 년의 역사에서 1인의 자유는 있었지만 만인의 자유가 없던 나라, 왕권은 있었으나 국권이 없었던 토양위에서 국민을 주권자로 섬기는 민주정치가 이루어진 것이다. 4.19후에 성립한 군사권위주의 정권들은 중요한 정책을 비민주적, 권위주의적으로 결정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주권자로서의 국민을 결코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못했다. 국민들의 호응을 얻는 학생들의 간고한 감시와 저항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군사권위주의 정권들은 스스로 민주적 정통성의 부족을 메꿔 보기위해, 국민들에게 점수를 따기 위한 국력배양에 주력했던 것이다. 그것이 마침내는 한국을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루는데 성공한 국가반열에 오르게 했던 것이다. 한국인과 중국인을 비교하는 말 가운데 한국 사람들은 중국인들과는 달리 불리(不利)는 잘 견디지만 불의(不義)에는 못 참는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날 중국인들은 주권을 공산당(共産黨)에 맡겨놓았지만 우리 국민들은 주권자의 자리를 확실히 지키고 있다. 이것이 4.19의 가장 큰 공로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서부터 나는 다시 4.19 기념일에 묘소참배를 빠트리지 않게 되었다. 김치호 묘소도 참배, 성묘한다.

 

 최근 인간의 행복지수를 따지는 미국행태연구소의 자료를 보면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나라에 태어난 사람이 그렇지 않은 나라에 태어난 사람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는 것이다. 주권재민이 갖는 중요한 의미다. 4.19는 그러나 남한 사람에게만 주권을 되찾게 해주었을 뿐 북한 2500만 동포들은 아직도 주권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상황을 살고 있다. 결국 조국의 통일은 북한 동포들도 주권자가 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북한의 4.19가 곧 통일일 것이다.

 

 이날 4.19영령 봉안소에는 384위의 영령사진이 안치되어있었다. 1960년대에는 180여명이었지만 지금은 부상자나 기타 유공자들이 추가되었다는 것이다. 주권재민(主權在民)을 위한 대의에 순의(殉義)하신 분들이다. 확실한 국민적 합의로 그들의 순의를 국민들은 하나같이 추모한다. 이렇게 4.19혁명은 그 55년의 흐름을 이땅에서, 우리가 만드는 역사의 현장에서 여전히 자랑스럽게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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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36일 새로운 한국을 위한 국민운동산하 통일준비국민운동본부 세미나에서 행한 이영일 본부장의 기조연설전문(이 세미나는 국회의원회관관 29회의실에서 13시부터 17시까지 비공개로 개최)

 

       통일준비국민운동 본부 세미나 기조연설

                                                                                                               이 영 일

 

지난해 우리 국민들은 세월호 참사라고 하는 현대사의 터무니없는 비극을 목도하면서 우리 국민들은 이 나라가 더 이상 4.16이전의 상태로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는 각성을 하게 되었고 이러한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여 우리 사회의 각계각층의 원로 분들이 새로운 한국을 위한 국민운동에 떨쳐나섰다. 이 운동체가 중심이 되고 여기에 그간 우리 사회의 개혁과 나라 바로 세우기에 공헌해온 불교, 기독교, 천주교 등의 종교지도자들이 동참하는 가운데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고질적 적폐를 파헤쳐 바로잡는 운동을 전개했다. 관피아 척결, 역사바로잡기, 통진당 사건에 대한 헌재판결 촉구, 교육개혁운동, 법질서확립운동, 군납비리척결촉구, 경제난국극복과 합리적인 복지정책 등을 부르짖으면서 국민적 합의를 확대하는 노력을 지난 한 해 동안 펼쳐왔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새로운 한국을 위한 국민운동 지도부는 오늘의 국민운동이 단순히 국내개혁에만 치중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우리가 추구하는 국민운동의 궁극적 목표가 조국통일에 기여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공감에서 통일위원회를 국민운동기구의 하나로 발족시켰다. 통일위원회는 제3차에 걸친 공개, 비공개 회의를 통해 정부의 통일준비위원회 구성에 발맞춰 민간차원의 통일준비운동이 수반되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통일위원회를 통일준비국민운동본부로 개편했다.

 

정부의 통일준비위원회는 민관의 합동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위원장이 현직 대통령이기 때문에 통일문제에 관한 대내외적 의사표시에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또 이 위원회는 운동조직이라기 보다는 전략연구에 중점을 두기 때문에 통일에 관한 국민적 기대와 소망을 현실적으로 담아내는데도 한계가 있다. 그간 정부통일준비위원회의 활동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이러한 한계에 메이지 않을 국민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고 민간차원의 통일준비가 어느 면에서는 더 긴급하고 절실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러한 필요성에서 오늘 우리는 현시점에서 통일운동의 실질적 주체가 되어야 각계각층의 지도층 인사들을 이 자리에 모셨다. 탈북민 대표들을 비롯해서 북한 동포들의 인권개선이라는 구체적이고 현실적 문제를 다루는 단체대표들, 북한 동포들의 마음을 대한민국 주도의 통일을 바라도록 유도하는데 앞장서온 운동가들도 초청했다. 제가 보기에 분단시대의 한국에서 자유통일을 갈망하는 각 분야의 지도자들이 대체로 오늘 이 자리를 채우게 되었다.

 

오늘 저는 통일준비국민운동을 대표하여 통일 상황에 대한 나름대로의 평가를 토대로 국민운동의 방향을 함께 모색하고자 한다. 우리는 우선 20세기가 끝나가던 1990년의 10년 동안으로 우리의 시각을 옮겨 볼 때 세계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두 개의 큰 사건이 발생했다. 하나는 소련제국의 붕괴였고 다른 하나는 독일의 통일이었다. 21세기의 세계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두 개의 큰 사건이 누구의 예측이나 전망도 없이 갑자기 일어났다. 저도 국제정치를 공부했지만 이러한 예측이나 전망을 내놓은 분을 만나거나 보거나 들은 일도 없었다.

 

사후적으로 보면 이런 상황을 가져올 주객관적 조건들이 성숙하고 있었지만 우리가 느끼지 못했고 보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한반도의 통일문제의 해결도 이러한 문맥(Context)에서 검토해야 한다. 그러나 독일은 시기는 몰랐지만 통일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전제하에 통일능력을 비축하고 정책을 준비해왔다. 결국 미래는 준비하는 자의 것이었다.

 

오늘의 한반도 내외정세도 바야흐로 통일준비를 서둘러야 할 상황이다. 그간 북한은 핵과 미사일개발에 주력하는 선군 세습권력의 지배 하에서 폭력과 테러로 한반도 정세를 악화시킬 군비확충에만 광분했다. 그러면서도 핵무장과 경제발전을 병진시킨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 길은 북한이 걸어서는 안 될, 역사발전에 역행하는 길이었다. 국제적인 고립에의 길이었으며 국제사회의 지원과 협력을 차단하는 길이었다. 이 결과 북한인민을 장악할 능력은 매년 감소하고 있으며 조만간 정권존립의 위기가 도래할 형편이다.

 

몽고의 전 대통령 푼살마긴 오치르바트 대통령이 북한 김정은에게 국가안보는 핵이 아니라 두둑해진 국민들의 지갑에서 나온다.”고 충고했다. 심지어 쿠바의 카스트로까지도 20134월 김정은이 서울과 워싱턴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위협했을 때 어리석은 전쟁 놀음을 집어치우라고 공개 경고했다. 소련공산당수 고르바초프도 동독창건 40주년 기념식전이 열린 198910월 베를린에서 연설에서 역사는 뒤처지는 지도자를 벌한다. 역사는 자신의 길을 방해하는 자를 엄하게 다스린다.“고 말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최근 북한은 제풀에 넘어질 정권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저주도 아니고 농담도 아니다. 객관적인 정세평가에서 나온 이야기다. 유엔은 총회결의로서 북한의 독재자를 인권유린의 극악한 지도자로 규정, 국제 형사 재판소에 넘겨야 한다고 결의했고 안전보장이사회의 토론의제로 선정했다. 이것이 오늘의 북한을 보는 외부세계의 태도다.

 

오늘날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고 거기에 매달리는 한 북한의 붕괴는 필연적이다. 동서독이 통일한 것도 핵이 없었기 때문이며 쿠바가 미국과 수교하게 된 것도 핵이 없기 때문이다. 베트남은 통일 후에도 핵을 갖지 않고 개혁개방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새로운 베트남으로 미국과 국교를 트고 IMF의 지원을 받으면서 빠른 발전을 이루고 있다. 미국은 쿠바와의 수교를 통해 미주대륙에서 냉전시대를 완전 끝냈다. 지금 미국에 남아있는 마지막의 냉전지대는 북한뿐이다. 북한은 핵을 포기하면 미국과의l 관계도 풀리고 중국과의 썰렁한 관계도 해소되고 국제사회의 지원은 물론이거니와 한국의 실질적인 지원도 얻게 된다. 핵이 북한을 살리는 길이 아니라 망치는 길이라는 인식이 북한 내부에서 싹터 오르는 것도 시간문제다. 특히 최근에 눈에 띄는 북한의 시장화 움직임은 북한지도부의 각성에서 나온 위로부터의 개혁이 아니고 장마당을 통해서라도 명줄을 이어가려는 북한주민들의 아래로부터에서 나온 개혁의 흐름이다. 결국 스탈린식 계획경제는 나날이 힘을 잃고 시장경제가 오늘의 북한에서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저는 차제에 봄꽃을 비유로 들고 싶다. 봄꽃은 꼭 15도가 되어야 핀다.(Critical Mass) 지금 북한의 온도는 봄꽃 만개시기를 대입하면 몇 도 쯤 일까? 제가 보기엔 13도정도 같다. 앞으로 2도를 더 올리는 것이 한국의 일인데 그 가운데 많은 부분에서 통일준비국민운동이 맡아야 할 일이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첫째 목숨을 걸고 자유대한을 선택한 탈북민들이 국민들의 사랑 속에서 안착에 성공하도록 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주류국민대열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 독일 메르켈 수상은 동독출신이고 대통령 요하임 가우크도 동독출신이다. 탈북민들이 대한민국에서 모두 성공하고 대한민국을 선택한 일이 아주 잘된 일로 자부하도록 만드는 만큼 중요한 통일준비는 없다고 보는데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 문제도 오늘 충분히 토론되어야 한다.

 

둘째는 북한의 정권이 아닌 북한 주민을 돕는 방도를 강구해야 한다. 인도적 차원의 대북지원은 정부가 확정한 방침이지만 정부는 모든 문제를 북한정권을 상대로 추진할 도리밖에 없다. 정권과 구별되는 인민들을 직접 지원하는 방도를 깊이 있게 연구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문제도 이 자리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특히 탈북민들이 북한에 남겨진 가족 친지들에게 송금할 수 있는 방도를 국제기구들을 통하거나 남북대화를 통해 해결하는 방도도 강구해야 한다.

 

셋째는 북한인권 개선을 위해 국회가 조속히 북한인권법을 제정하도록 촉구하고 인권법 제정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에 대한 국민적 비판운동을 국민운동차원에서 조직하는 것도 시급한 과제일 것이다. 아울러 이산가족 찾기도 단순히 노부모들이 만났다가 헤어지는 차원을 넘어서서 노후를 뜻있게 가족의 품에서 마칠 수 있도록 재결합하는 방도를 강구하고 납북자, 국군포로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협상적 해결을 모색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 인권에 관한 유엔총회의의 결의를 적극 활용해야 할 것이다.

 

넷째는 국내에서 암약하는 종북잔당을 철저히 색출 배제하는 방법도 검토해야 한다. 우리 헌법재판소는 판결로서 국회에 침투한 종북 세력의 정치적 교두보를 무너뜨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종북세력의 정치적 지도부를 단죄한 것은 자유통일운동사에 기록될 자랑스러운 성과의 하나다. 이제 노동계, 문화계, 교육계, 언론계, 종교계에 침투한 종북 잔재를 색출, 규탄하는 것은 국민의 몫이다. 여기에는 새로운 한국을 위한 국민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조직이 협심 협력해야할 과제다. 특히 그간 교육개혁차원에서 자율적으로 추진한 투쟁의 성과들을 거울삼아 언론, 문화, 종교 분야로도 투쟁의 전역을 넓혀가야 한다.

 

다섯째로는 북한 동포들이 한국 사람들의 동포애를 느낄 수 있게 하는 국민운동도 모색해야 한다. 초등학교 청소년들이 통일저금통을 만들도록 권면하는 것도 시범사업으로 생각할 수 있다. 북한 동포들에게 남조선에서는 어린 학생들까지도 통일되면 북한동포를 돕자는 모금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는 것도 자유통일을 갈망하는 북한 동포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것이다.

 

저는 이 자리에서 일반적인 방향만을 말씀드렸지만 보다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방안들이 3개의 세미나 토론에서 적출되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오늘 이 자리에서 제시된 방안들은 국민운동지도부가 국민운동 사업으로 확정함과 동시에 정부 측에 필요한 협력과 조치를 건의하고 국론확산운동을 전국적으로 펼쳐나갈 것이다. 아무쪼록 유익하고 뜻있는 토론이 펼쳐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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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관계에 대한 조지프 나이 교수의 특강 청취소감 --미국의 시대는 끝나고 있는가?(한중정치외교포럼 밴드에 올렸다)

                                                     

                                             이영일 한중정치외교포럼 회장

 

1. 들어가면서

 

2014년이 끝나는 12월 10일 한국고등교육재단은 미국 하바드 대학 명예교수이며 전 미 국방부부장관과 국무성 차관보를 역임, 미국의 외교안보분야에서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석학 조지프 나이(Joseph Nye)교수를 초청, “미국의 시대는 끝나고 있는가?” 라는 주제로 특강을 개최했다.

오후 3시에 시작될 강의장 언저리는 청중들로 붐볐다. 전 직 외교관들이 20석 이상의 좌석을 미리 예약해두어 앞좌석을 잡기는 어려웠다. 다행히 나를 알아본 직원이 자리를 마련해줘서 좋은 자리에 앉았다. 동시통역을 들을 수 있는 이어폰이 없는 좌석을 대학생들이 가득 매운 것을 보면서 나이교수의 평판이 얼마나 높은지를 체감하는 한편 우리나라 대학생들의 영어 이해수준이 높아졌고 해외석학들의 강연회에 이처럼 시간을 내서 참여하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것도 우리나라 선진화의 좋은 징조로 보여 내심 즐거웠다.

 

이글은 당시 강의메모를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많은 부분이 생략되기도 했고 부분적으로 잘 못 들은 부분도 있고 내 나름대로 이해해서 기록한 부분도 있다. Nye 교수는 차분한 목소리로 특유의 논리성을 과시하면서 강의를 펼쳤다.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미국 타임과 라이프지의 경영자였던 Henry Luce가 1950년대 중반 ‘미국의 세기’라는 말을 처음 썼을 때 당시 미국은 이 말을 지나친 표현이라고 해서 수용을 꺼렸는데 그때로부터 60여년이 흘러 지난 4월 영국의 Financial Times는 중국이 미국을 2014년을 기점으로 추월할 것이라고 보도했고 World Bank는 구매력 기준으로 보면 중국은 이미 미국을 앞질렀다는 것이다. Joseph Stiglitz교수도 중국이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말했고 심지어 영국의 Jacques martin같은 사람은 When China rules the World라는 저서를 통해 중국시대의 도래를 강조했다.

 

흔히 사람들은 고대 아테네의 투기디데스의 세력전이(勢力轉移)에 대한 이야기를 교훈으로 내세운다. 즉 한 국가가 흥기(興起)하면 경쟁국가는 전쟁을 통해 몰락한다는 것으로 페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의 흥기에 대한 스파르타의 두려움에서 일어난 전쟁이었고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흥기에 대한 영국의 두려움이 가져온 전쟁이라고 예시하면서 미국에 대한 중국의 흥기가 마치 1차 대전이 일어난 1914년의 상황과 2014년의 현재상황이 그때와 유사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를 하나씩 논리적으로 반박했다.

 

2.나이교수의 반론

 

미국은 중국이 빠른 시일 내에 경제적으로 발전, 13억 인구를 부양해내는데 성공한 노력을 평가하고 환영한다. 13억 인구가 빈곤상태에서 세계각지로 뿌려지는 상황은 끔찍한 일로서 세계정세를 불안정케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중국이 이룬 발전을 미국이 높게 평가하는 소이다. 그러나 중국이 발전한다고 해서 미국이 쇠락하는가? 그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인간에게 생로병사가 있듯이 국가의 역사도 흥망성쇠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흥망성쇠의 주기를 알기는 힘들다.

영국은 섬나라지만 산업혁명으로 세계를 재패하였다. 그러나 영국이 누린 패권은 2차세계대전전에 이미 미국으로 옮겨졌다. 당시 미국은 세계 GNP의 25%를 생산했는데 제2세계대전으로 전 유럽이 전쟁의 폐허였기 때문에 1950년대에는 세계 GNP의 50%를 생산했다. 그러나 전재복구가 끝나면서부터 미국은 다시 GNP의 25%를 생산하고 있으며 그 추세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고 앞으로는 18%까지 내려갈 수도 있다.

 

미국의 역량을 1945년부터 1970년대만을 떼어서 보기보다는 미국 역사의 큰 흐름에서 이해하는 것이 옳다. 그 당시는 국제체제가 단극체제로 보였지만 각국경제가 안정을 되찾으면서 국제체제는 다극화로 움직이는 것이다. 1960년대 초에는 소련이 스푸트닉을 미국보다 먼저 발사하면서 후르시초프는 미국의 시대는 끝났다고 연설했으며 당시 여론도 소련의 우세를 점쳤다. 1980년대는 일본경제의 흥기로 일본이 미국을 앞지른다는 저서가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한때 일본경제의 빠른 성장에 대한 공포감이 확산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쇠락하지 않고 그대로 있는데 소련과 일본의 처지는 전혀 달라져 있지 않는가. 한 국가의 쇠락을 측정하려면 쇠락의 상대적 기준과 절대적 기준이 있을 것이다. 상대적 기준은 좋은 예로 영국과 화란을 들 수 있다. 산업혁명이전의 화란은 영국보다 강국이었다. 그런데 산업혁명으로 영국의 국력이 화란을 앞질렀다. 화란은 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쇠락한 것이다.

절대적 기준은 한 국가가 부정부패로 내부의 응집력이 해체되어 로마가 게르만이라는 야만족에게 힘없이 붕괴되는 것처럼 내적 자기몰락의 경우에 적용되는 기준이다. 오늘날 미국과 중국을 비교할 때 절대적 기준으로나 상대적 기준의 어느 척도를 적용해도 중국은 미국에 앞서지도 않았고 그럴 가능성도 없다. 미국은 멸망기의 로마제국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나라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장래의 가능성을 놓고 국력비교를 할 경우 주요기준으로 인구, 에너지, 창의력을 보는 경우가 많다. 인구로 보면 지금 중국이 인구 제1위국가다. 제2위는 인도 이며 미국은 3위다. 앞으로 2040년 되면 인도인구가 1위, 중국이 2위 미국은 3위를 그대로 유지할 것이다. 둘째 기준인 에너지를 보면 미국은 세일가스 때문에 중동유전에 대한 의존도가 줄어들면서 거의 자급단계로 가기 때문에 중국이나 인도와는 비교가 안 된다. 중국은 중동에서 에너지를 수송해오는 긴 수송로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창의력 부면을 보면 미국은 이민을 허용하는 개방체제를 지니기 때문에 70억 인구에서 새로운 창의력을 조달하고 이를 뒷받침할 대학과 연구시설이 짜임새 있게 갖춰져 있다. 중국이 이 수준에 도달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새로운 기술 혁신혁명이 미국에서는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절대적 기준으로 본 미국의 쇠락은 있 수 없다.

다만 미국이 20세기 초에 누린 것만큼의 부를 창조하는 것은 여타 국가들도 발전경쟁에 뛰어들고 있기 때문에 어려워진다. 미국의 우위가 지닌 절대성은 상대성으로 대체될 것이며 미국의 일방주의 외교는 협력주의로 바뀌면서 다극화 현상이 예상된다. 나는 소프트 파워 이론을 발표한 바 있는데 힘으로 풀어야 할 문제를 외교로, 문화적 우위로 풀자는 취지이며 결코 힘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힘이 있는 자만이 소프트 파워를 효과적으로 구사한다. 그러나 적절한 힘과 소프트 파워의 결합은 싱가포르와 같은 소프트 파워정책으로 성공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3. 중국을 보는 시각

 

미국은 세계경제의 발전을 도모할 국제체제를 강화하는데 힘써왔으며 2001년 중국을 세계무역기구(WTO)의 일원으로 가입토록 했다. 중국은 WTO가입을 계기로 경제발전의 전기를 맞이했으며 미국을 따라 올만큼 경제발전의 전망도 생겼다. 경제발전은 국력신장을 가져온다. 그러나 국력이란 자국이 원하는 것을 다른 나라로 하여금 하게 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할 때 중국이 오늘의 국제체제에서 그러한 힘이 있는가. 중국을 따르는 집단적인 공동체가 늘어난다면 그것은 파워가 강해진 결과라고 말 할 수 있다. 중국은 총량지표에서 독일이나 일본을 앞섰다.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계속 7.5%를 유지하고 미국의 그것이 2.5%로 머물러 있다면 중국은 미국을 추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WTO의 회원국인 중국이 7.5%의 성장률을 계속 유지할 수는 없다. Somers는 중국의 고도성장은 지속될 수 없고 어느 시점에 가면 정상성장률로 되돌아오기 마련이며 10년이 지나면 중국도 3.5%대로 성장률이 내려갈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의 총량규모가 커져 미국을 앞지르려면 1인당 소득에서도 앞서야 하는데 미국의 1인당 소득은 중국보다 4배나 크다.

 

또 중국이 일본이나 독일을 앞섰다고 하지만 교역통계에서 보면 부가가치가 낮은 것의 총화에서 앞선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휴대전화를 많이 생산하지만 부품의 대부분을 수입하여 완제품으로 조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중국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낮다고 말하고 일자리는 많이 늘어나지만 큰 벌이를 할 자리는 적다고 지적했다. 지금 상황을 보면 중국에 투자한 해외자본가들이 차지하는 몫이 중국에 남는 것보다 훨씬 크다. 따라서 총량으로만 일본이나 독일을 제쳤다는 것이나 구매력으로 앞선다는 표현의 의미를 되씹어 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Nye교수는 이어 한국도 1인당 GNP가 6000달러에서 7000달러일 때까지만 해도 권위주의적 국민지배가 가능했지만 10,000 달러를 넘어서면서부터 정부의 일방적인 국민장악력이 떨어졌다고 회고하면서 중국도 1인당 GNP가 10,000달러를 넘어선 후에도 현재와 같은 통제체제가 가능할 것인지에 의문을 던지면서 오늘날 시진핑 정부가 추진하는 반부패투쟁은 중국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지만 부패가 나오는 구조를 그대로 두고 인적쇄신에만 역점을 두는 반부패투쟁은 그 성과에 한계가 있을 것이며 인민해방군 예산보다 더 많은 공안예산이 편성되고 있는 현실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중국은 현재 일본보다 더 앞서기를 원하고 동남아 지역에 대해서도 핵심이익을 내세우면서 영향력을 키우고 있지만 베트남이나 필리핀의 반발을 유발하고 일본의 대중국투자가 줄어드는 추세라고 지적했다. 동시에 Nye교수는 한국인들에게 들으라는 듯 미국은 아베노믹스가 아무리 실패하더라도 미일협력은 계속 강력히 유지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본 로비 때문에 대표적인 친일 미국학자로 정평이 나있다.

 

4. 평가

 

Nye 교수의 특강이 갑자기 한국고등교육재단주최로 열린 배경은 알 길이 없고 묻지도 않았다. 그러나 한미관계와 한중관계에 대한 최근 언론들의 보도태도, 즉 시진핑 방한이후 한국의 친중화(親中化) 가능성이 일고 있다는 풍문에 따른 워싱턴의 우려에서 나온 조치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Nye 교수의 지론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고 이미 그의 여러 논문들에게 밝혀진 것들이었다. 다만 그의 소견을 한국의 일반대중을 상대로 체계적으로 발표한 점에서 특별히 주목을 받는 것에 불과하다. 한국의 친중화 가능성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반미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굳건한 한미동맹 때문에 중국의 입장에서 한국의 전략가치가 높아졌다는 사실을 한국 국민들은 너나없이 잘 알고 있다.

중국학자들은 그간 기회 있을 때마다 한미군사동맹을 냉전의 유산이라고 비판하지만 원교근공(遠交近攻)이 중국의 주요주변국전략이었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을진대 한국은 미국과의 안보협력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과 싸웠던 베트남이 다시 미국과 복교하는 것을 보면 동아시아 제국의 중국관의 일면을 읽을 수 있다.

 

특히 한국은 북한의 핵문제가 안보위협으로 존재하는 한 한미동맹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것이다. 오히려 미국 국회가 금후 10년간 국방예산을 삭감하는 추세이기 한미동맹에도 불구하고 대한방위공약을 미국이 감당할 수 있을 것인지를 우리는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에 관해서 Nye교수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고 질의응답사회를 맡은 김병국 교수도 관련된 토론을 잘 유도하지 못한 것이 유감이었다.

 

그러나 현재 한중관계는 경제면에서 협력의 규모가 시진핑 주석이 지난 7월 방한 시 서울대학교 강연에서 밝힌 대로 한미교역액, 한일교역액, 한·유럽교역액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아졌고 한국의 대 중국무역의존도는 한국전체무역액의 26.1%인데 비해 중국의 전체 무역액 중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4% 수준이다. 따라서 한국은 그간 미국, 유럽, 중남미국가들과의 FTA를 통해 협력의 다각화를 추진하고 있지만 한중경협을 능가할만한 대안은 없다.

이제 경제면에서 중국은 한국의 지속적 발전을 위한 가장 중요한 파트너로 되어있고 중국을 반대하거나 적대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진입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최근 THAAD미사일을 주한민군에 배치한다는 미국의 방침을 한국이 거부하라고 중국이 압력을 가하지만 이 문제는 한미양국간만의 문제로 보아서는 안 된다. 북한 핵위협과 주한미군의 안전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한반도 비핵화를 전제로 하는 한미중 3자회담의 틀에서 다루어져야 할 문제다.

 

현시점에서 한국은 안경분리(安經分離) 즉 안보와 경제를 분리해서 대처한다는 입장을 확고한 외교원칙으로 굳혀 미중양국과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가고 한일관계도 풀어가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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