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부 창립 45주년을 돌아보면서
이 영 일
전 국토통일원 상임연구위원, 정치외교정책담당관, 교육홍보실장, 통일연수소장, 3선 국회의원(제11대, 12대, 15대), 남북한고위급 회담 한국 측 대표, 국회문교공보위원장, 사단법인 한중문화협회 회장(현) |
대한민국 정부기구로서의 통일부가 국토통일원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지 어언 45주년이 흘렀다. 그 당시 국토통일원은 일하는 정부부처라기보다는 분단국가로서 출발한 대한민국 정부가 통일이라는 국민적 목표를 지니는 정부임을 나타내는 상징적 기구로 출발했다. 왜 분단국가인 한국에서 정부수립직후부터 이러한 부서가 세워지지 않고 정부수립 20주년이 지나서야 이러한 기구가 발족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당시 교육홍보국장 겸 대변인이던 필자에게 묻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 필자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나름의 추론으로 대답했다. 그 당시 통일은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는 상태의 회복”으로 간단히 정의되었고 따라서 통일은 대한민국의 일방적 과업으로서 정부전체가 통일목표에 복무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분단이 장기화되는 추세를 보이면서 국방부가 맡던 민사군정업무를 떼어 내어 북한실정을 충실히 연구함으로써 국토통일을 위한 수복 시 대비책을 연구 발전시킬 국가기관설치의 필요성이 생기면서부터 국토통일원이 창설된 것 같다고 답했다. 당시 중화민국도 대륙광복이라는 통일목표를 가졌기 때문에 국가기구로서 대륙광복위원회를 설치, 운영했다. 이러한 목표의 공통성 때문에 통일원 창설초기에는 대만과의 교류가 잦았다.
그러나 1970년에 접어들면서 월남전의 양상이 공산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미국역시 닉슨 독트린을 발표, 아시아 내전에 군사개입을 축소하고 주한미군을 감축하면서 한국방어의 한국화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 반면 북한은 노동당 5차 전당대회에서 4대군사노선의 완료를 선언하고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통해 “조선의 적화통일”을 완수하겠다고 밝혔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이러한 내외정세를 지켜보면서 1970년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평화통일구상선언(8.15선언)을 발표하고 남북한관계를 창조와 건설을 향한 선의의 체제경쟁관계로 바꾸면서 평화통일의 길을 열자고 제안했다. 이 선언에 뒤이어 월남전의 후유증이 한반도로 확전할 가능성에 막기 위해 북한의 김일성에게 특사를 파견, 남북한의 대결구조를 대화구조로 바꾸는 조치를 취했다. 북측도 남한의 대화제의를 받아들이고 분단국가의 가장 원초적인 분단고통으로서 이산가족의 생사소재의 확인과 재결합을 주제로 한 대화를 개시했다.
이때부터 통일문제의 성격은 일방적 과업에서 남북한의 대화와 협력을 전제로 하는 쌍방적 과업으로 전환되었다. 이것은 수복시대비책연구에 골몰하던 통일원에는 엄청난 도전이었다. 당시 정치외교정책 담당관이던 필자도 한반도에서 성립 가능한 평화통일의 단계적 접근방안을 입안,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에게 국정감사장에서 보고하여 여야의원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대공협상에 대해서는 사실상 연구가 전무한 상태였다.
대통령으로부터 적십자회담 협상요원 교육을 통일원이 맡으라는 지시가 떨어지자 이것은 실로 비상사태였다. 필자는 미국에서 대학교수로 재직 중인 양성철 박사(뒤에 국회의원과 주미대사역임)에게 전화로 대공협상관련 서적을 구해 항공편으로 직송해달라고 부탁했다. 다행히 그는 터너 조이 제독의 "How Communists Negotiate"라는 휴전회담 협상회고록과 필립모리스의 "How Can We Negotiate with Communist"라는 책을 구해 보내줘서 동양통신 외신부에 부탁, 3일내에 자료 번역을 완료한 후 내용을 분석하여 대북협상에 유용한 자료를 추출하는 한편 Fred I'kle의 How Nations Negotiate를 차용해서 필자가 필요한 부분만을 발췌 번역하여 대공협상교육지침을 철야작업으로 마쳤다. 이처럼 창졸간에 협상지침을 작성, 적십자 회담요원에 대한 교육훈련을 대과없이 끝마친 일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히 살아있다. 이때 가장 열심히 교안작성과 브리핑업무를 맡아줬던 C보좌관(정년퇴임후 대학교수)의 노고를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통일원은 대화업무를 주도하지 못했다. 중앙정보부가 모든 업무를 주도했고 국회에서는 중앙정보부가 해온 일을 통일원장관이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답변하면서 엄호하고 정책지원업무를 뒷받침 하는 보조기관이 통일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통일원에는 전문 인력의 보강이 필요해졌다. 필자는 장관의 명을 받아 전문 인력의 조달을 위해 주요대학을 방문, 정치, 외교, 홍보 분야에서 일할 20명가량의 새로운 인재(그때는 이들을 새 피라고 했다)를 선발했다. 이들 중에서 1인의 장관, 5인의 차관이 탄생했고 또 필자와 함께 근무했던 대다수의 동료들이 모두 정무 직으로 승진하여 정년퇴임하였다고 한다. 공무원을 중도 하차시키는 부패, 비리, 독직이 스며들 여지가 적었던 업무환경 탓일 것이다.
통일원이 평화통일추진기구로 성격이 전환되면서부터 통일원의 해외파트너는 독일 내독관계성이 되었다. 이규호장관의 방독에 대한 답방으로 에곤 프랑케 장관이 답방했고 한독 간에 실무자간 접촉과 정책협의가 진행되었다. 필자도 1980년 분단국문제 한독 정책협의회 실무수석 대표로 독일을 방문, 양ㆍ독 관계의 발전양상을 살폈으며 독일의 협상경험을 전수받는 전략카드작업에 열을 올렸던 시절이 뇌리를 스친다. 지금 통일원은 필자가 복무하던 당시의 통일원이 아닌 통일부로서 남북한 관계를 담당하는 명실상부한 정부부처다. 인원이나 예산도 증가했고 정부 내에서의 영향력도 커졌다. 국토통일원 당시와 비교하면 정말 부러울 정도의 성장이고 발전이다.
그러나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통일원과 유사한 역할을 했던 외국의 정부기구들은 모두 없어졌는데 한국에만 아직도 통일부라는 이름의 정부기관이 남아있는 것이다. 대만의 대륙광복설계위원회는 장제스(蔣介石)의 사망에 뒤이어 양안관계가 변함으로써 사라졌고 독일은 1990년 통일성취로 내독관계성이 사라졌다. 우리의 통일부만이 지구상에서 45년 동안 남아있는 유일한 정부기구이다. 이렇게 오래 남아있다는 것이 결코 자랑일 수 없다는데 우리의 고뇌가 있다. 하루빨리 통일부의 명칭과 용도를 변화시킬 날을 맞기 위해 우리의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통일꾼활동 > 통일교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통일은 한국이 매력국가가 될 때 가능하다 (0) | 2014.09.14 |
---|---|
한국주도의 통일이 곧 한반도의 비핵화다 (0) | 2014.04.23 |
한반도 내외의 정치상황에서 본 통일대박 론 (0) | 2014.03.24 |
독일의 정치교육과 한국현대사 교과서 문제 (0) | 2014.01.31 |
이산가족상봉사업 성공을 위한 제언 (0) | 2013.1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