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부 창립 45주년을 돌아보면서

                                                                              이 영 일

전 국토통일원 상임연구위원, 정치외교정책담당관, 교육홍보실장, 통일연수소장, 3선 국회의원(제11대, 12대, 15대), 남북한고위급 회담 한국 측 대표, 국회문교공보위원장, 사단법인 한중문화협회 회장(현)

 

대한민국 정부기구로서의 통일부가 국토통일원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지 어언 45주년이 흘렀다. 그 당시 국토통일원은 일하는 정부부처라기보다는 분단국가로서 출발한 대한민국 정부가 통일이라는 국민적 목표를 지니는 정부임을 나타내는 상징적 기구로 출발했다. 왜 분단국가인 한국에서 정부수립직후부터 이러한 부서가 세워지지 않고 정부수립 20주년이 지나서야 이러한 기구가 발족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당시 교육홍보국장 겸 대변인이던 필자에게 묻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 필자도 정확히는 모르지만 나름의 추론으로 대답했다. 그 당시 통일은 “백두산 영봉에 태극기 날리는 상태의 회복”으로 간단히 정의되었고 따라서 통일은 대한민국의 일방적 과업으로서 정부전체가 통일목표에 복무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분단이 장기화되는 추세를 보이면서 국방부가 맡던 민사군정업무를 떼어 내어 북한실정을 충실히 연구함으로써 국토통일을 위한 수복 시 대비책을 연구 발전시킬 국가기관설치의 필요성이 생기면서부터 국토통일원이 창설된 것 같다고 답했다. 당시 중화민국도 대륙광복이라는 통일목표를 가졌기 때문에 국가기구로서 대륙광복위원회를 설치, 운영했다. 이러한 목표의 공통성 때문에 통일원 창설초기에는 대만과의 교류가 잦았다.

 

그러나 1970년에 접어들면서 월남전의 양상이 공산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미국역시 닉슨 독트린을 발표, 아시아 내전에 군사개입을 축소하고 주한미군을 감축하면서 한국방어의 한국화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 반면 북한은 노동당 5차 전당대회에서 4대군사노선의 완료를 선언하고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통해 “조선의 적화통일”을 완수하겠다고 밝혔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이러한 내외정세를 지켜보면서 1970년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평화통일구상선언(8.15선언)을 발표하고 남북한관계를 창조와 건설을 향한 선의의 체제경쟁관계로 바꾸면서 평화통일의 길을 열자고 제안했다. 이 선언에 뒤이어 월남전의 후유증이 한반도로 확전할 가능성에 막기 위해 북한의 김일성에게 특사를 파견, 남북한의 대결구조를 대화구조로 바꾸는 조치를 취했다. 북측도 남한의 대화제의를 받아들이고 분단국가의 가장 원초적인 분단고통으로서 이산가족의 생사소재의 확인과 재결합을 주제로 한 대화를 개시했다.

 

이때부터 통일문제의 성격은 일방적 과업에서 남북한의 대화와 협력을 전제로 하는 쌍방적 과업으로 전환되었다. 이것은 수복시대비책연구에 골몰하던 통일원에는 엄청난 도전이었다. 당시 정치외교정책 담당관이던 필자도 한반도에서 성립 가능한 평화통일의 단계적 접근방안을 입안,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에게 국정감사장에서 보고하여 여야의원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대공협상에 대해서는 사실상 연구가 전무한 상태였다.

 

 대통령으로부터 적십자회담 협상요원 교육을 통일원이 맡으라는 지시가 떨어지자 이것은 실로 비상사태였다. 필자는 미국에서 대학교수로 재직 중인 양성철 박사(뒤에 국회의원과 주미대사역임)에게 전화로 대공협상관련 서적을 구해 항공편으로 직송해달라고 부탁했다. 다행히 그는 터너 조이 제독의 "How Communists Negotiate"라는 휴전회담 협상회고록과 필립모리스의 "How Can We Negotiate with Communist"라는 책을 구해 보내줘서 동양통신 외신부에 부탁, 3일내에 자료 번역을 완료한 후 내용을 분석하여 대북협상에 유용한 자료를 추출하는 한편 Fred I'kle의 How Nations Negotiate를 차용해서 필자가 필요한 부분만을 발췌 번역하여 대공협상교육지침을 철야작업으로 마쳤다. 이처럼 창졸간에 협상지침을 작성, 적십자 회담요원에 대한 교육훈련을 대과없이 끝마친 일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히 살아있다. 이때 가장 열심히 교안작성과 브리핑업무를 맡아줬던 C보좌관(정년퇴임후 대학교수)의 노고를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통일원은 대화업무를 주도하지 못했다. 중앙정보부가 모든 업무를 주도했고 국회에서는 중앙정보부가 해온 일을 통일원장관이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답변하면서 엄호하고 정책지원업무를 뒷받침 하는 보조기관이 통일원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통일원에는 전문 인력의 보강이 필요해졌다. 필자는 장관의 명을 받아 전문 인력의 조달을 위해 주요대학을 방문, 정치, 외교, 홍보 분야에서 일할 20명가량의 새로운 인재(그때는 이들을 새 피라고 했다)를 선발했다. 이들 중에서 1인의 장관, 5인의 차관이 탄생했고 또 필자와 함께 근무했던 대다수의 동료들이 모두 정무 직으로 승진하여 정년퇴임하였다고 한다. 공무원을 중도 하차시키는 부패, 비리, 독직이 스며들 여지가 적었던 업무환경 탓일 것이다.

 

통일원이 평화통일추진기구로 성격이 전환되면서부터 통일원의 해외파트너는 독일 내독관계성이 되었다. 이규호장관의 방독에 대한 답방으로 에곤 프랑케 장관이 답방했고 한독 간에 실무자간 접촉과 정책협의가 진행되었다. 필자도 1980년 분단국문제 한독 정책협의회 실무수석 대표로 독일을 방문, 양ㆍ독 관계의 발전양상을 살폈으며 독일의 협상경험을 전수받는 전략카드작업에 열을 올렸던 시절이 뇌리를 스친다. 지금 통일원은 필자가 복무하던 당시의 통일원이 아닌 통일부로서 남북한 관계를 담당하는 명실상부한 정부부처다. 인원이나 예산도 증가했고 정부 내에서의 영향력도 커졌다. 국토통일원 당시와 비교하면 정말 부러울 정도의 성장이고 발전이다.

 

 그러나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통일원과 유사한 역할을 했던 외국의 정부기구들은 모두 없어졌는데 한국에만 아직도 통일부라는 이름의 정부기관이 남아있는 것이다. 대만의 대륙광복설계위원회는 장제스(蔣介石)의 사망에 뒤이어 양안관계가 변함으로써 사라졌고 독일은 1990년 통일성취로 내독관계성이 사라졌다. 우리의 통일부만이 지구상에서 45년 동안 남아있는 유일한 정부기구이다. 이렇게 오래 남아있다는 것이 결코 자랑일 수 없다는데 우리의 고뇌가 있다. 하루빨리 통일부의 명칭과 용도를 변화시킬 날을 맞기 위해 우리의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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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 비핵화의 정치과정을 전망한다.

  이글은 헌정지 4월호에 기고되었으며 위키트리에 전재되었다(2014/03/20)

 

1.들어가면서

남북한관계가 대화모드로 바뀌고 있다. 2월 20일부터 24일까지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가 금강산에서 이루어졌다. 이에 앞서 남북한 간에는 판문점에서 고위급 접촉이 8년 만에 개시되었다. 북한 측의 선제의(先提議)로 열린 남북한의 고위급 만남은 남북한의 상호비방 중지를 합의하면서 이 모임을 이어가자는데 합의했다. 북한은 김정은의 신년사를 통해 남북관계개선의 의사를 밝혔고 박근혜 대통령도 금년 1월 6일 가진 신년기자회견에서 김정은의 남북관계개선언급이 위장평화공세일 수 있다고 경계하면서도 북한의 남북관계 개선의지가 진정성이 있는 것이기 위해서는 먼저 이산가족 상봉행사에 북한이 호응하라고 촉구했다. 북한은 그들의 제의가 위장공세가 아님을 행동으로서 보이겠다면서 남측이 내놓은 이산가족상봉행사를 수락하고 서해인근에서의 대남비방과 삐라 살포를 중단하였다.

북한의 대남태도는 1년 전 이맘때와 비교하면 너무 큰 변화다. 2012년 12월 12일 탄도 미사일발사, 2013년 2월 12일 제3차 핵실험, 3월 초에는 그들의 심리전 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를 통해 서울과 심지어 워싱턴까지를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위협하는가 하면 4월에는 휴전협정의 폐기까지를 호언하고 새로 출범한 박대통령정부를 향해 입에 올리기 힘든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던 북한이 2014년에 들어오면서 태도를 갑자기 바꾸고 그들의 한국과의 관계 개선의지가 위장이 아니라면서 이산가족 상봉을 수용하고 고위급접촉에 나섰다. 더욱이 한미양국이 1994년 이래 연례적으로 실시해오는 키 리졸브 훈련과 독수리훈련이 시작됨에도 불구하고 이 훈련에 대해 구두로는 반대하면서도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실천에 옮겼다. 북한은 왜 태도를 바꾸었는가. 이하에서 그 원인과 배경을 살피기로 한다.

 

2. 날로 심화되는 북한의 고립과 딜레마

 

① 고립 자초한 긴장도발

북한은 현재 내치, 외교 양면에서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있다. 당초 김정은은 후계자로 옹립되자마자 그가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선군정치를 충실히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대내외적으로 위협적인 태도를 과시했다. 김정일이 발전시킨 선군의 “위업(偉業)”을 계승한다는 취지에서 세계여론을 무시하고 미사일 발사와 제3차 핵실험을 자행했다. 그러나 결과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강도 높은 제재였다. 북한이 우방으로 믿었던 중국까지 제재결의에 가세했다. 북한은 이 결의가 부당하다면서 강도 높은 대남위협공세를 펼치고 한반도정세를 긴장시켰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북한의 어떠한 공세에도 한국군 지휘부가 일체의 “정치적 고려를 배제하고 당당히 맞대응”할 것을 전군에 명령하고 일전불사의 태도를 밝혔다. 그간 한국정부는 항상 확전방지를 명분으로 수세적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박대통령정부의 태도는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와는 전혀 달랐다. 정면 맞대응의 자세를 보였다. 북한의 기대나 예상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었다.

 

②중국의 대북한 태도변화

이와 동시에 중국의 북한에 대한 태도에서도 큰 변화가 발생했다. 북ㆍ중양국은 1961년이래 외부의 침략을 받을 경우 즉각 군사원조를 제공키로 하는 동맹조약(朝中相互援助및 友好協力條約-1961〜2021)을 체결한 관계다. 그러나 북한은 이 조약을 신뢰하지 않고 상호 협의 없이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였다. 중국은 초기에는 북한이 미국을 상대로 하는 협상수단으로 핵과 미사일 공세를 취하는 것으로 낮게 평가하고 국제사회의 대북강경결의를 완화하면서 외교적 해결을 주선해주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북한의 제3차 핵실험은 중국의 이러한 북 핵 관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하였다. 특히 중국공산당 18차 당 대회에서 당서기로 선출된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2013년 3월 자기가 국가주석으로 정식 취임할 때까지 한반도에서의 긴장조성을 자제할 것을 당정(黨政)외교경로를 통해 북측에 요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은은 이 요구를 묵살하고 미사일과 핵실험을 단행, 자기가 중국의 태도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존재임을 과시했다.

시진핑 주석은 국가부주석으로 취임한 후 제1차 해외방문지로 북한을 선택할 만큼 북한에 대해서는 우호적이었던 인물이었다. 시진핑 주석의 선친인 시중쉰(習仲勳)부수상은 김일성과 친밀한 사이였다. 그러나 김정은의 제3차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는 시진핑의 대북관에 변화를 일으켰다. 북한의 핵개발이 대미협상용이 아닌 핵 무장력을 갖추자는데 있고 결국 북한은 중국과 맺은 동맹관계의 틀에서 벗어나려한다는 중국내부의 의구심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결과 제4차 유엔안보리의 대북제재결의에는 중국도 적극 참가했고 김정은의 중국초청도 아직까지 유보상태다. 2013년 5월 22일 김정은은 북한인민군 총정치국장인 최룡해를 중국에 특사로 파견, 시진핑 주석을 접견했는데 이때 시진핑 주석은 중국은 어느 경우에도 북한의 핵보유를 인정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한반도의 비핵화가 중국의 확고한 입장이라고 밝혔다. 북 핵 불용입장을 중국이 확실히 밝힌 것이다.

 

③ 경제적 궁핍의 지속

한편 내치에서도 북한의 경제난은 계속되었다. 유엔제재로 정상적인 대외무역이 사실상 어려워진 가운데 배급체제의 붕괴과정에서 기형적으로 발생한 시장경제는 갈수록 그 영향력을 북한내부에서 확대해 가고 있다. 북한의 도시주민들은 먹고 살기위해서는 당이나 정부보다는 시장에 더 의존했다. 주민을 굶기지 않겠다는 김정은의 약속은 지켜지기 않고 있다. 박봉주 총리 등 이른바 개혁파들을 실무부서에 배치했지만 자금, 자재, 기술, 에너지가 부족한 상황에서 뾰쪽한 대책이 나올 수 없다. 시장화의 확산에 발맞춰 중국인들이나 화교가 중심이 되어 소비시장으로서의 마트나 큰 상점을 평양에 세우고 기타 도시에도 유사한 시장이 들어서고 있지만 주민들의 빈곤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특히 시골이나 농촌 주민들의 식량난, 의료, 에너지의 부족은 조금치도 나아지지 않았고 탈북행렬도 끊이지 않았다. 장성택의 처형이 공개되면서 세계에 비친 김정은의 이미지는 21세기 최악의 독재자, 살인마로 투영되었다. 이런 정권을 상대로 어느 나라가 투자하겠으며 경제협력을 시도하겠는가.

또 정권유지에 필요한 외화자금 조달문제를 놓고 조선노동당 행정부와 조직부간의 갈등이 심화된 상황에서 김정은은 조연준 부부장을 필두로 하는 조직부의 책략에 휘둘려 장성택 숙청이라는 희대의 살인극을 연출하였다.

3. 신 6자회담론의 등장

 

북한이 내치, 외교상의 난국을 푸는 방법은 우선 핵개발과 경제발전을 동시에 이루겠다는 이른바 핵ㆍ경제 병진정책을 포기하고 비핵ㆍ개방의 길을 택해야 한다. 북한이 핵무장을 추구하는 한 북한에 대한 외세의 개입은 끊일 날이 없으며 한반도 통일에도 난관을 조성하게 된다. 한반도 주변의 어느 강대국도 전략무기로서의 핵과 미사일을 보유한 한반도의 통일을 지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반도 주변에는 남북한이 1대1로 맞서 제압할 국가가 하나도 없다. 지구 최강국들로만 둘러 쌓여있는 우리 한반도는 항상 외세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즉 국제정치에서 말하는 “지정학적 저주”(Geopolitical Curse)를 감수해야할 운명을 지녔기 때문이다.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6자회담은 2003년부터 10개년동안 개최되었지만 북한이 보이콧함으로써 아무 성과 없이 끝났다. 유엔안보리는 4차에 걸친 대북제재결의를 단행하였고 그 효력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재작년부터 중국은 6자회담 재개를 위한 외교적 노력을 강화하고 있지만 북한의 태도 변화 없이는 6자회담에 응하지 않겠다는 한미양국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고무적인 사실은 6자회담이 중단된 상황 하에서도 한국의 주도하에 북한의 핵보유를 용인하지 않는다는 합의가 6자회담 참가국들 간에 확고히 뿌리를 내렸다는 사실이다.

작년 초부터 중국은 이른바 표본겸치(表本兼治)를 명분으로 6자회담재개를 제안하고 나왔다. 즉 북ㆍ핵 폐기라는 겉에 나오는 상태를 표(表)로 하고 한반도를 포함한 동북아 안보체제형성이라는 기본토대를 본(本)-여기에 휴전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전환 포함 한다-으로 하는 협상을 한꺼번에 다루어 해결하자(兼治)는 주장을 내놓고 6자회담재개(필자는 신6자회담이라 하자)를 요구하고 있다. 지난 2월초 중국을 방문한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은 중국과의 대화에서 북한이 2005년 6자회담에서 도출된 9.19합의를 수용, 이행토록 할 만큼 중국이 현재 보다 더 강한 영향력을 북한에 행사할 용의가 있는지를 타진, 긍정적 반응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이 추세라면 앞으로 북 핵 포기를 위한 신6자회담의 정치과정이 조만간 가시권(可視圈)에 들어올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이러한 정세변화가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우선 남북한관계가 북한의 도발에 의한 긴장국면에서 벗어나 대화와 협력국면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즉 대결구조에서 대화구조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9.19합의는 북한이 핵 무장을 하나 씩 해체하는 단계에 연동하여 북한에 대한 경제지원을 제공하고 미국과 북한간의 관계개선을 추진하자는 것이기 때문에 북한이 이 합의를 진정성 있게 수용하고 실천할 의지를 보일 때 비로소 중단된 6자회담이 새롭게 재개될 수 있다. 결국 북한 비핵화 프로세스는 북한이 9.19합의를 제대로 이행하고 한국과 주변국들이 북한의 조치에 상응하는 정치․경제적 지원을 제공할 때 비로소 정상궤도에 진입하게 될 것이다. 이 길을 트는 첫 단계가 남북한 관계의 개선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북한이 최근에 벌이는 대남평화공세의 이면에 이러한 주변정세가 깔려 있음은 주목해야 한다.

 

4. 북한의 살길은 핵무장의 포기다

 

북한의 비핵개방은 주변국 모두의 바람이다. 북한이 핵 포기에 나서면 한국은 물론이거니와 6자회담 다른 참가국들도 상응하는 경제적 대가를 지불하는데 협력할 것이고 북한 인권개선에 큰 관심을 보여 온 유럽 국가들도 지원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진정성 있는 핵 포기가 가시화되고 행동화된다면 금강산 관광문제나 5.24제재조치도 긍정적으로 재검토되고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비상임이사국인 한국의 발의로 유엔 안보리의 대북한 제재도 해제의 수순을 밟을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주창한 동북아 평화협력구상에 따라 북한 경제재건을 위한 동북아 개발은행 창설도 모색될 수 있다.

이제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시작으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첫 단추는 끼워졌다. 앞으로 상봉행사의 정례화와 이산가족 재결합도 진행되어야 한다. 남북한 고위급 접촉이 정례화 되어 고위급 회담으로 발전하면 비무장지대의 평화공원화, 제2, 제3의 개성공단도 가능하며 북ㆍ중 합작으로 추진되는 황금평 개발이나 나선지구 개발 사업에도 한국이 참가할 수 있다. 또 김정은이 현지지도로 만들었다는 마식령 스키장도 한국의 스키 메니아들이 이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의 유라시안 이니셔티브(Eurasian Initiative)에 따라 시베리아 가스의 한반도 관통 파이프라인 건설도 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북한 지도자들이 선군의 위업으로 떠받치는 핵과 미사일은 북한주민들에게 공포와 굶주림, 그리고 탈북의 아픔을 주었지만 비핵개방은 경제발전과 삶의 풍요, 생활안정을 주게 될 것이다. 이제 선택은 북한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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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 내외의 정치상황에서 본 통일대박 론

 

                                                     1.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1월 6일 연두회견에서 던진 통일대박 론은 조국분단 70년을 내다보는 시점에서 시들대로 시들어버린 우리 국민들의 통일염원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분단이 장기화하면서 조국통일에의 꿈은 우리 국민들의 의식 속에서 점차 기필코 성취해야 할 과업으로서의 현실적 의의를 상실해갔다. 특히 젊은 사람들 가운데는 통일 무용론이나 아니면 통일포기 내지 통일 불요론에 휘둘려 조국통일을 우리민족이 기필코 달성해야 할 실존적 과업의 우선순위에서 후순위로 밀어놓는 경향까지 보였다. 그간 역대 정부는 통일에의 꿈을 국민들이나 젊은 세대들에게 일깨워주기 보다는 남북한 관계 개선을 통일에 우선하는 개념으로 내세우면서 분단 상태의 안정적 관리에 정책의 더 큰 비중을 두어온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도 오늘의 통일의지 마비 내지 침잠의 한 원인이 있을 것 같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올해의 화두로 던진 통일대박 론은 잠재되어 있던 국민들의 통일의식에 다시 불을 붙이는 신선한 충격이었고 자극이었다. 조국통일이 국가가 추진해야할 과업의 우선순위에서 다시 최상의 위치를 되찾는 계기가 되었다. 대통령이 취임선서에서 국민들에게 평화통일성취의 책임을 다하겠다는 다짐이 이제 실감 있는 주제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통일대박 론에 이어 한반도의 통일이 한국에만 유익한 것이 아니라 동북아시아 모든 국가들에게도 유익한 선택임을 강조함으로써 한국통일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한 국내외의 인식이나 관점을 새롭게 드높이는 전기를 마련했다. 한반도의 통일은 그것이 동북아시아 긴장의 가장 큰 근원을 제거하는 조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북한의 핵개발 시도가 몰고 오는 갈등과 긴장의 해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박대통령이 국가시책의 우선순위의 상위목표로 조국통일을 들고 나오자 국내외를 막론하고 한국통일의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었고 통일무용이나 불요론 보다는 통일이익이 분단이익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든 새로운 접근에는 반동이 따르기 마련이다. 박대통령의 통일대박 론이 국민적 공감 속에서 확산되어 나가자 우리나라의 소위 진보진영에 속하는 사람들은 마치 그들이 기득권을 빼앗긴 것처럼 충격과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그간 소위 진보 모자를 쓰고 북한정권의 통일 주장을 직간접으로 긍정하면서 국내통일담론을 주도해오던 ‘진보인사’들은 정부가 주도하는 강력한 통일공세 앞에 자기들의 입지를 새롭게 정립해야 할 도전에 직면했다. 보수정권을 반통일(反統一)세력으로 몰아붙이면서 자기들만이 조국통일에 헌신한다고 내세워오던 ‘진보진영’의 입지가 하루아침에 동요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장성택 처형이 공개된 이후 국내외에서 불기 시작한 반 김정은 정서의 확산과 북한 인권유린을 국제사법재판소의 처벌대상으로 삼자는 세계인권기구(COI)의 북한 인권보고는 이들 ‘진보“인사들을 극도로 난감한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순순히 물러설 그들이 아니다. 새로운 논리의 조작을 통해 북으로부터 그들의 존재를 긍정 받을 새로운 논리공작을 꾸리기 시작했다. 이하에서 이들의 새로운 대응논리를 살펴보면서 대응방향을 모색하기로 한다.

 

                                                                        2.

 

소위 진보진영의 통일논리작업은 창작과 비평(이하 약칭으로 창비)이나 일간지로서 H, K신문이나 일부 인터넷 신문 등을 통해 발표된다. 체계적인 저술보다는 그때그때의 칼럼이나 인터뷰, 잡지기고를 통해 표출되는 그들의 입장을 총괄적으로 살펴봄으로써 현시점에서 이들이 내놓는 안티(Anti)통일대박 론의 실체를 살피기로 한다. 우선 이들이 설정하는 첫 번째 공세목표는 통일대박 론을 흡수통일 기도로 단정하고 이러한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통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민족적 재앙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흡수통일의 다른 표현인 통일대박 론에 현혹되지 말고 통일이 대박이 아니라 “남북한의 교류와 협력이 대박”이라는 주장을 국민들에게 확산시키자고 주장한다.(林東源) 이와 궤를 같이하는 다른 주장으로는 백낙청의 이른바 장기흡수 통일론이다. 그는 단기흡수통일에는 동의하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장기적으로는 흡수통일이 불가피하다고 보면서 여건이 성숙하면 흡수통일밖에 다른 대안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국민들의 다수이기 때문에 통일대박 론을 흡수통일로 비판, 배격하는 것만으로는 진보진영의 대응이 올바르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백낙청은 정부가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장기적인 흡수통일을 추진하되 통일과정을 그들이 주도하면서 여기에 도전하는 세력들을 그때그때 종북 몰이로 제압한다면 진보진영은 설자리를 잃을 수 있다고 진단하고 이런 우려를 배제하기위한 대안으로 그는 포용정책 2.0이라는 개념을 내놓고 있다. 그의 포용정책 2.0은 한마디로 6.15선언가운데 들어있는 낮은 단계 연방제 합의를 오늘의 남북한 관계 현실에 대입, 남북한 간에 국가연합단계를 통일의 중요한 단계로 설정, 밀고 나가면서 이 목표를 향해 남북한 간의 당면한 모든 통일노력을 집중시키자고 주장한다. 그는 지난 대통령 선거 시에는 원탁회의의 결정이라는 형식으로 이른바 2013체제론을 주창했다가 대선패배로 이 개념이 무용지물이 되자 요즘 새롭게 던진 화두가 바로 포용정책 2.0이다. 그는 6.15 선언 실천 남측본부장이었기 때문에 통일에 대한 그의 사고를 6.15선언에 내맡기고 있는 것 같다.

 

이들 ‘진보’ 파들의 주장에서 문제되는 것은 크게 보아 네 가지다. 첫째 통일대박 론은 흡수통일로 간주, 민족적 재앙이 된다는 것이다. 둘째 친북좌파로서 통진당에 대한 정부의 단죄를 종북 몰이라고 비판한다. 셋째 북한의 인권상황을 옹호하기 위해 창비논객들을 동원, 코리아인권이라는 생경한 주장을 내세우면서 남북한의 어느 체제도 인권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인권양비론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북한인권의 참담한 현실을 호도한다. 넷째로 이들은 북핵문제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침묵을 지키면서 남북교류만을 강조한다.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진보가 참된 진보이기 위해서는 두 가지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하나는 전 세계 진보운동의 핵심과제가 비핵반전평화운동이란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점에서 북핵문제에 침묵하는 진보는 참된 진보일 수 없다. 둘째로 공화정치를 거부하는 세습독재정권을 단호히 배격, 부정해야 한다. 세습독재정권에 대해 침묵하는 세력은 지구의 어느 곳에 가서도 진보로 인정받지 못한다. 한국의 진보가 북한의 세습독재에 침묵하는 한 진정한 진보가 아니다. 더욱이 북한의 잔혹한 인권상황까지를 외면하는 태도야말로 한국의 진보가 사이비 진보임을 전 세계에 알리는 가장 확실한 징표다.

 이들 한국판 사이비 진보는 오래 동안 북한정권을 북한의 입장에서 평가해야 한다는 이른바 내재적 접근 론을 내세워 북한정권의 주장이나 존립이유를 성원하기 위한 논리조작에 심혈을 쏟았다. 현대 사회과학에서 이미 한 물 가버린 이론들, 예컨대 세계체제론이나 종속이론의 이 구절, 저 구절을 입맛대로 꿰맞추는 논리를 조작하는 말장난을 하면서 그들만이 한국의 시대적 과제를 가장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고민하는 세력인 것처럼, 때로는 순교자행색을 하면서 자신들을 정당화해왔다. 백낙청의 ‘흔들리는 분단체제’론이나 창비논객들이 꾸며낸 ‘코리아 인권’론, 2013체제론, 포용정책 2.0 같은 개념조작도 이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고민은 국내외의 상황이 그들의 소망대로 전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선패배로 2013체제론은 허무한 말장난에 불과하게 되었고 전체 국민들에게 통일의 새로운 꿈을 심어주는 통일정책의 주도권도 이제 박근혜 대통령이 틀어쥐고 있기 때문이다.

 

                                                                       3.

 

요즈음 한국의 사이비 진보세력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펼치는 통일을 위한 내치외교의 궤도 깔기(Road Mapping)작업 앞에 자체 전열마저 정비할 힘을 잃고 있다. 남북한 관계를 발전시킬 대안으로 내놓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는 국내외의 지지를 받는 가운데 남북한관계를 대화관계로 발전시키고 있다. 개성공단문제의 해결과 이산가족 상봉행사의 성공은 가시적 성과다. 또 동북아시아 국가들이 겪는 아시아의 역설(Asian Paradox)을 극복하기위해 역내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한 동북아 평화협력구상은 한미, 한중양국 간 정상회담에서 심도 있게 논의, 진전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아울러 동북아시아의 지역분쟁과 갈등의 근원이 한반도의 분단 상태와 북한의 핵무장기도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사실을 공론화함으로써 한반도 통일에 대한 주변국들의 지지와 공감을 획득하고 있다.

 바야흐로 한국통일이 한국만의 대박이 아니고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전, 그리고 공동번영의 길이라는 인식이 주변국가 국민들에게도 확산되어 가고 있다. 또 박대통령이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마친 후 제시한 유라시안 이니셔티브(Eurasian Initiative)도 한반도의 지정학적 기능이 러시아를 포용하면서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협력의 통로로 이용될 수 있음을 천명, 통일한국이 갖는 국제적 순기능을 국제사회에 알리는데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또 대내적으로는 박대통령이 통일을 단순히 구호로서가 아니라 우리 세대가 실천하고 성취해야 할 구체적 과업으로 인식한 가운데 통일준비위원회 구성을 발표하면서 자신이 위원장으로서 통일준비를 착실히 다져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박대통령은 취임첫해로부터 2차년도가 시작되는 지금까지 이처럼 통일을 위한 내치외교의 궤도를 깔면서 통일을 향해 국력을 비축하고 지혜를 모으는 통일대장정(長征)에 나서고 있다.

 

 한국판 사이비 진보세력들은 요즈음 통일이 흡수통일이이어서는 안되고 김일성 세습정권이 내놓은 연방제 통일을 긍정하면서 연방제통일의 전 단계로서 남북한을 국가연합으로 묶자는 이른바 포용정책 2.0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국가통일방도에는 정해진 왕도(王道)가 없다. 국내외정세의 변화 과정에서 불시에 나타나는 통일기회를 정확히 포착하고 이를 활용할 능력과 준비를 착실히 다진 측이 통일대업을 주도한다는 것이 역사의 가르침이다. 전쟁이 기회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흡수가 기회가 될 때도 있고 협상이 기회일 때도 있다. 통일에는 모든 기회가 열려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기회가 닥쳐왔을 때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통일로 연결시킬 준비와 능력을 갖추고 있는가이다. 능력은 적극적인 국력배양에서 조성되며 준비는 통일을 위한 국민적 합의기반의 확충에서 나온다.

그러나 우리 한반도는 국제 형 분단국가이기 때문에 주변 국가들로부터 한반도 통일에 대한 지지와 협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주변국들로부터 통일을 위한 지지와 협력을 얻어 낼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조건은 한반도의 비핵화다. 남북한의 어느 편이라도 핵이 있을 경우 주변국들은 그것을 자국안보의 위협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핵 있는 한반도, 자국안보에 위협이 되는 한반도 통일은 절대로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의 핵무장기도는 중국학자들이 지적하는 대로 한반도 긴장의 가장 큰 원인이며 동시에 동북아 정세긴장의 근원이기도 한다. 현시점에서 가장 긴급한 통일여건조성노력은 두말할 것도 없이 북한의 비핵화이다. 우리는 한반도 비핵화라는 주변 국가들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통일여건을 하나씩 쌓아가야 한다. 이점에서 우리나라의 소위 진보세력들도 북한이 통일을 위해 핵을 포기하라는 국민적 부르짖음에 보조를 함께 하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우리는 핵과 미사일 없이도 통일에 성공하고 경제적 번영을 누리는 독일에서 많은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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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의 정치교육과 한국현대사 교과서 문제

 

                                                              이 영 일 전 국회문교공보위원장

 

                                                       1. 문제의 제기

 

한국현대사 교과서 문제로 국론이 크게 갈리고 있다. 역사는 하나인데 역사를 보는 관점이 다름으로 해서 1국(國) 1사(史) 아닌 1국(國) 다사(多史)현상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중국의 연변을 방문했을 때 들은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한다. 중국 사회과학연구원에서 정부의 예산을 얻어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연구 프로젝트가 진행됨에 따라 고구려사를 보는 중국학자들의 태도가 한국학자들과는 전혀 다른 시각임이 알려지자 이때 어느 편도 들 수 없던 중국의 조선족 학자들은 고구려사를 일국양사(一國兩史)로 보아야 한다는 타협안을 내놓은 적이 있었다. 주장인 즉 중국의 관점에서 보는 고구려사와 한국의 관점에서 보는 고구려사가 해석상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일고 있는 현대사 교과서 파동은 고구려사처럼 과거에는 우리의 강역이었지만 이제는 중국 땅이 되어버린 곳의 역사문제와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일제식민통치시대로부터 해방과 분단과 건국, 6.25의 전란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역사를 함께 공유해온 국민들이 현대사를 해석하는 관점에서 너무 큰 차이가 들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것을 식민지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에서 한국민족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역사의 아픔이라고 생각한다. 이 아픔은 그간 어설프게 봉합되어 나왔는데 이번 교과서 검인정이라는 여과과정을 거치면서 그 진상이 마침내 백일하에 들어나게 되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픔의 미봉적 봉합이 아니다. 근본적 치유를 통해서 앞으로 우리가 수립해야 할 통일 민족국가가 정초(定礎)해야 할 역사의 정통성을 바로 세울 토대를 올바로 축성하는 작업일 것이다. 우리 한국의 현대사는 식민지로부터 탈각하는 해방의 과정이 하나의 확실한 민족운동 지도부의 일관되고 조직적인 지도아래 추진된 독립운동으로 전개된 것인지 여부 또 우리 힘만으로 쟁취된 독립이었는지 여부를 놓고도 국민적 합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또 식민지시대를 살아온 방식으로서 친일과 반일문제를 놓고도 치열한 대립과 갈등이 지속되었다. 특히 대한민국의 건국의 정당성을 놓고도 찬반이 엇갈렸다. 유엔감시하의 자유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방식과 소련군점령사령관의 지시에 의한 정권창립과정을 놓고도 평가가 엇갈렸다. 또 한국이 발전해온 역사의 지난 60년을 평가하는 방식을 놓고도 대립과 반목이 지속되어 왔다. 물론 북한에는 역사논쟁이 있을 수 없다. 쟁점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른 주장이나 견해가 발붙일 여지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해방 60년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 쟁점들이 시효가 지나거나 토론의 실익이 없어 수면 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겉으로는 다 봉합된 것처럼 보였던 현대사의 해묵은 쟁점들이 교과서 검인정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또다시 머리를 쳐들고 밖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우리에게만 고유한 것은 아니다. 식민지민족주의 운동을 거쳤던 국가들 중에서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유지한 국가들에서는 한번쯤은 겪었던 문제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가 다른 나라와 유별난 것은 통일의 문제를 안고 있는 분단국가로서 남북한 간에 지난 60년 동안 치열한 사상전이 전개되어 온데 기인한다. 이것은 냉전이데올로기 자체가 발생시킨 사상전이 한 측면이며 다른 하나는 분단체제 양방 간에 민족국가로서의 정통성확보를 위한 경쟁에서 필연적으로 파생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교과서검인정 과정에서 배태된 한국현대사의 문제점은 분단체제 양방 간에 제기되어온 정통성 경쟁을 염두에 둘 때 북한정권이 자기 정권의 정당성을 논증하기 위해 만든 역사관점을 대한민국의 현대사 교과서 내용에 접목시키려는 기도와 무관하지 않다.

결국 남북한 사상전의 역사쟁점을 청산 극복하지 않은 상태를 그대로 두고 현대사교과서 검정과정을 시작한데서 교과서문제가 발생하였다. 우리가 현시점에서 현대사가 안고 있는 이러한 문제를 중시하지 않고 이를 학자들 간의 논쟁문제로 치부하거나 교육인적자원부의 행정문제로 방치할 경우 우리는 두 가지의 큰 문제에 봉착한다. 하나는 현실문제로서 우리의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현대사문제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정답(正答)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가 건설해야 할 통일국가의 정확한 목표비전을 정립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민주국가에서 역사관을 통일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렵다고 피하거나 외면해서 될 일은 아니다. 국민적 대화합의 차원에서 현대사 문제의 큰 범주를 정하고 문제의 심도를 가리면서 허심탄회(虛心坦懷)한 대화를 통해 조국이 처한 현실과 시대의 요구에 맞는 해답을 마련해야 한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전후 서독(西獨)이 취한 통일을 위한 정치교육방식을 참고하면서 우리나라의 타개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2. 제2차대전이후의 독일 상황과 정치교육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대전을 발생시킴으로 해서 유럽대륙에서 백인이 백인을 살육하는 사상 최대의 비극에 책임을 져야할 국가다. 전쟁에서 패한 독일은 유럽사상사의 큰 흐름에서 이탈한 나치즘의 대두로 자국이 전패국이 되었음을 자인하고 반서구적인 나치즘이 다시 유럽대륙에서 등장하는 것을 막도록 독일 국민을 정치적으로 재교육(再敎育)시킨다는 계획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베토벤과 마르틴 루터, 괴테의 나라에서 히틀러의 나치당 같은 전체주의무리가 다시 등장하지 않도록 모든 교육과정을 통제할 정치교육본부를 각 정당과 연방에서 추천하는 인사들로 구성하였다. 물론 당시 독일도 동서로 분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양 독 간의 첨예한 사상전은 우리와 별 차이 없이 심각했다.

 

필자는 1980년 당시 국토통일원 통일연수원장으로서 한독간의 분단국문제 통일정책협의회 실무수석대표로 독일을 방문, 연방정치교육본부를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건물의 입구에는 Max Weber의 유명한 글이 현판에 새겨져있었다. 내용인즉 “어떠한 정부도 자기 후대들에게 자기나라에 대한 귀속감을 갖게 하고 자기나라를 사랑하도록 교육시킬 능력이 없으면 오래 가지 못한다.” 당시 서독의 정치교육(Politische Bildung)본부는 우선 정치교육의 큰 테제로 ①서독이 전체 독일을 대표하는 독일국가의 핵심이며 동독은 핵심에서 분리된 반란단체다, ②그러나 동독은 통일이 될 때까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통일독일헌법이라는 큰 지붕 밑에 함께 동거하는 존재로 실재함을 인정한다는 두 개의 원칙을 세우고 각 정당 정파들이 이 원칙에 합의하는 과정을 가졌다. 그리고 이 목표에 맞춰 교과서편성의 지침을 작성했다. 이 때 독일인들은 나치의 죄과 청산 없이는 주변국들의 반대에 부딪쳐 독일통일이 불가능 할 것으로 보고 제2차 대전을 발생시킴으로서 독일이 ①이웃국가들에게 입힌 피해, ②나치만행이 저지른 범죄, ③타율적인 분단에서 생긴 국민적 아픔이라는 세 가지의 실존적(實存的)부담을 서독이 떠안자는데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였다.

 

 동시에 대내적으로는 나치전범을 철저히 숙청함과 동시에 나치문화를 연상시킬 일체의 상징이나 활동을 단속했다. 아울러 서독은 헌법대신에 기본법을 만들어 통일에 대비하는 한편 양독의 유엔동시가입을 실현하고 이어 양독 간의 교류와 협력을 활성화시켰다. 이러한 서독정부의 구상과 계획을 뒷받침할 교육은 연방정치교육본부의 지침에 따라 독일 역사, 특히 현대사 부문의 과오를 인정하는 내용으로 역사교과서를 재구성하고 프랑스와도 공동의 역사서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독일연방정치교육본부는 자기주장만을 고집하는 외골수 학자들보다는 서방적 가치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상식인(정계, 학계, 종교계, 문화계)들로 위원회를 구성, 교과서 작성에 필요한 지침을 작성했다. 새로운 독일 국가가 추구하는 목표를 실현하는데 공헌할 인재양성이라는 목표를 향하여 교과서가 집필되도록 했다. 매우 힘들게 보였던 과제를 독일인들은 대화와 타협이라는 독일문화의 큰 전통 속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독일 재건의 주체들이 동서독을 막론하고 반 나치운동에 앞장섰던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접근은 아주 불가능할 것인가?

 

 

                              3.국민적 대화합 대타협의 광장을 만들자

 

오늘날 우리나라도 교과서문제를 놓고 제기되는 갈등과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가차원에서 우리가 지향하는 국가목표로서의 통일과 통일국가건설비전에 대한 범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아무리 통일이 대박이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목표와 비전에 대한 합의 없이는 통일을 이루기도 힘들뿐 만아니라 현대사문제에 대해 학생들에게 정답을 제시하기도 어렵게 된다. 통일성취의 대전제가 다름 아닌 국론통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각 정당이 의원을 보내고 있는 국회가 중심이 되어 각 정당이 추천한 전문가그룹의 집중적 토론과 학식과 덕망을 갖춘 명망가 집단의 평가를 거치고 국회토론의 정치과정을 거쳐 현대사 해석의 큰 맥락에 대한 합의의 범주를 설정해야 한다. 이러한 시도에서 유념해야 할 과제는 한국과 독일의 역사과정의 차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한국과 독일 양국은 걸어온 역사과정이 다르다. 우선 독일은 중세의 한자(Hansa) 동맹 이래 제후국 들 상호간은 물론 군신(君臣)간에도 Give and Take라는 흥정윤리가 고도로 발달 되어 온데 비해 우리나라의 경우 흥정의 윤리보다는 지조(志操)의 윤리가 철저히 뿌리를 내렸다. 결국 전부(全部)아니면 전무(全無)가 우리의 윤리적 선택상황이었다. 대결상대방과의 협력보다는 대결상대방의 굴복이나 멸살이 유일한 문제해결방식이었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 유산 때문에 독일에 비해 대화에 의한 합의도출이 결코 쉽지 않다. 우리나라는 북한과는 달리 식민지에서 해방된 후 민주정치를 실시해왔기 때문에 모든 문제에서 일도양단 식 해법을 가질 수 없었다.

 

 또 해방이후 오늘에 이르기 까지 치열한 내부투쟁과 갈등 속에서 국가발전을 이루어왔기 때문에 현대사평가의 시각이 극에서 극을 달릴 만큼 갈라지기도 했다. 감정과 증오에 사무쳐 사물을 객관적으로 정시하기 힘든 상황도 깔려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편견이 생겼고 편견은 왜곡을 낳고 왜곡은 또 편견을 확대재생산하는 상황이 지속되어 왔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현대사 문제를 해결하는 접근방식은 과거에 얽매이기보다는 현재 도달한 국가발전의 성과를 기준으로 삼으면서 미래를 향한 목표를 두고 현대사의 구성을 새롭게 재단하는 용기가 요구된다. 동시에 통일이라는 민족의 큰 목표를 향하여 소아(小我)를 죽이고 대아(大我)를 세우는 결연한 합의가 필요하다. 이런 대 합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국회가 선두에 서고 학계와 언론계가 성원하고 정부가 이를 뒷받침하는 정치적 협의과정이 시급히 진행되어야 한다. 이를 위한 정치권의 대화와 결단이 있어야 한다.

 

 

                                               4. 글을 맺으면서

 

독일에서 가능했던 일이라면 우리나라에서도 가능할 것이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작금의 내외정세가 우리의 통일을 아득한 미래의 과제로 정의할 수 없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를 분단시키는 것이 자국의 안보와 이 지역의 세력균형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강대국들의 동북아 정세관이 최근에는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한반도가 한국주도로 통일되는 것이 동북아시아의 가장 심각한 긴장의 근원을 제거하고 평화적 협력환경을 만들 수 있다는 전망이 서기 때문이다.

 

 통일은 한국의 대박(Jackpot)만으로는 주변국들의 협력을 얻을 수 없다. 주변국들에게 구체적으로 혜택이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안전보장상의 불리(不利)가 줄어들고 평화의 여건이 증진되어야 하며 경제협력을 통한 공존공영의 여건이 마련될 수 있어야 한다. 정부가 제안하고 있는 “동북아 평화협력프로세스”나 “유라시안이니셔티브(Eurasian Initiative)는 그 가능성이 주변정세에 대한 객관적 평가의 산물일진데 통일을 위한 국론통일은 이제 초미의 급선무다. 이번 교과서문제는 단순한 교육부차원의 행정문제나 좋은 교과서를 만든다는 문제의 차원을 넘어섰다. 힘으로 봉합시킨다고 풀릴 문제도 아니다. 이제는 통일을 내다보는 국론통일의 대과제와 연계된 국가적 과업으로 인식하고 교과서 문제해결에 접근해야 한다. 국민적 대합의, 대타협의 전기를 시급히 조성해야 한다. 민족통일이라는 대 목표에 조명하여 그 해결의 돌파구를 찾는 것이 정도임을 역설하면서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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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성택 이후의 북한과 중국 관계를 생각한다.

 

                                                       한중문화협회 회장 이영일

 

                                              1.

 북한정권의 제2인자로 알려졌던 장성택(張成澤)이 12월 12일 총살형을 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 앞으로 북한과 중국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놓고 국내외에서 많은 논의가 흘러나오고 있다. 현시점에서 밝혀진 중국 정부의 공식입장은 외교부 대변인 발언을 통해 간단히 표현되었다. 내용인즉 “장성택 문제는 북한의 내부문제이고 중국은 북한의 내정에 관여치 않으며 중국과 북한관계에서는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네티즌들은 웨이보(微博)나 일간지에 실린 댓글을 통해 대체로 북한의 장성택 처형을 독재체제유지를 위한 필연적 결과라면서 매우 부정적이고 냉소적으로 평가한다. 또 주목되는 글로는 장성택의 사형선고 판결문에 외국에 지하자원을 헐값으로 팔아넘긴 것을 비난한 것과 관련하여 판결문이 말한 외국은 바로 중국이 아니냐면서 중국에 에너지와 식량을 신세지는 나라가 그런 말을 내뱉는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반응과는 달리 장성택 문제는 미국과 중국 간의 고위층 대화에서도 거론될 만큼 파장이 크게 일고 있다. 존 케리 미국무장관과 중국의 왕이(王毅)외교부장은 12월 15일 전화통화를 통해 북한의 내부문제를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매우 이례적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미ㆍ중대화에서는 북한의 대외행동을 문제 삼았을 뿐 양국 간에 북한정권의 내부문제를 소재로 삼은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장성택 사건을 계기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신설하고 한반도에서 야기될지도 모를 유사시 대비를 서두르고 있다.

 

북한은 장성택 사건이후 유일영도체제를 공고히 했을 뿐 북한의 대내외정책이나 노선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문제전문가들 간에는 이번 장성택 처형문제가 북ㆍ중 관계를 바꾸는 결정적 변곡점이 될 수 있다고 점치는가하면 중국은 전략적 관점에서 북한을 보기 때문에 장성택 문제가 북ㆍ중 관계에 별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보수적 관점도 그대로 살아있다.

그러나 장성택이 그간 북한과 중국 관계에서 수행해온 역할이 결코 가볍지 않고 장성택을 둘러싼 중국의 정치문제도 간단하지 않기 때문에 중국의 대북한 정책에 전혀 영향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속단일 것 같다. 물론 누구도 현시점에서 앞으로 북ㆍ중 양국관계를 정확히 전망할 수는 없다. 중국인들은 속내를 잘 내비치는 일이 드물고 또 속내를 말한다고 해도 대개의 경우 애드벌룬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다만 가능한 것은 장성택 사건의 전후관계를 북ㆍ중 양국관계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토대로 재구성해보면서 현 상황의 맥점(脈点)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하에서 북ㆍ중 관계의 금후의 진로를 살펴보기로 한다.

 

 

                                                 2.

 

장성택은 김정일 사후 2012년 북한 대표단을 인솔하고 중국을 방문, 후진타오 주석을 접견하였다. 이 방문은 김정일 사후와 김정은 집권이후 북한에 대한 중국의 입장을 전달하는 가장 높은 수준에서의 소통창구였고 이와 동시에 중국과 북한간의 경제협력을 다시금 활성화시키는 기회이기도 했다. 장성택은 방중을 계기로 압록강변의 황금평 개발에 대한 중국의 협력을 얻어냈고 양국을 연결하는 철교와 고속도로 건설, 나진ㆍ선봉지구개발에 대한 중국의 지원을 얻어냈다. 뿐만 아니라 지하자원을 중심으로 대중국 수출을 늘리는 데도 성공, 양국 간의 무역량도 늘리게 되었다. 그간 장성택의 행보를 미루어 보면 북한정권 지도층 가운데서 중국이 북한에 바라는 정책으로서의 개혁개방과 한반도 비핵화문제에 대한 중국의 입장을 정확히 통보받았고 여기에 긍정적 화답을 한 인물이었다.

 그는 한국 실정이나 세계경제정세를 살피는 안목도 지녔다. 그가 2002년 북한경제고찰단을 이끌고 단장으로서 한국을 방문, 주요공장과 산업시설을 돌아보았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그는 중국의 권고를 받아들여 신의주 공단 대신에 개성공단을 창설하는데도 큰 역할을 수행했다. 선군(先軍)정치가 김정일 시대의 특징이었다면 장성택은 김정은에게 선군에 못지않게 경제발전이 중요함을 역설하였다. 김정은이 권력을 세습한 후 인민들이 더 이상 배고프지 않도록 하겠다고 공언하면서 외자유치를 위한 시설투자에 나선 배경에는 장성택의 건의가 깔려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성택의 이러한 태도를 선군정치와 구별되는 선경(先經)정치라고 학자들은 표현했다. 중국에서 볼 때 김정은 시대의 시작과 더불어 장성택이 추진하는 선경정책은 중국이 1980년대부터 북한에 권고해온 개혁개방정책과 궤를 같이하고 한반도의 안정이라는 중국의 정책목표구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과 북한사이의 인적 소통창구(疏通窓口)였던 장성택이 하루아침에 체포되고 군사재판을 통해 속전속결로 잔인하게 처형당했다. 미국 국무성은 장성택의 처형방식을 이례적으로 '잔인의 극치'(Extreme Brutality)라고 표현했는데 중국정부와는 달리 중국의 네티즌들은 한결같이 김정은의 무도한 숙청정치에 쓰디쓴 냉소를 보냈다. 장성택의 처형(處刑)을 보는 전 세계는 너나없이 치를 떨었고 넬슨 만델라와 정반대의 길을 걷는 김정은을 21세기 판 최악의 독재자로 만들었다. 김정은에게는 살인마로서의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이제 전 세계에 비친 2400만 북한 동포는 인권의 주체, 생명의 주체가 아니라 독재권력 앞에 목숨을 초개(草芥)같이 내맡기고 살아가는 불행한 존재였다.

 

                                                  3.

 

장성택 죽음의 원인을 그의 판결문대로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북한사람들은 김정은을 향한 충성맹세대회에서 장성택을 “이 땅에 묻힐 자격조차 없는 인간”이라고 철저히 규탄하고 증오했지만 그것이 북한주민들의 본심으로 볼 수는 없다. 중국의 한 네티즌은 북한인들은 공포에 짓눌려 눈물을 흘린 것(我相信痛哭流涕的朝鮮人有一部分原因是恐懼)이라고 바로 지적했다. 장성택은 북한 김정은의 가장 중요한 지지기반이고 중국의 지원을 끌어내는 창구인데 그가 반당 반혁명을 획책할리도 없고 그러한 증거도 밝혀지지 않았다. 김정은이 장성택을 죽인 것은 장성택 반대세력들의 반간계(反間計)가 작용한 결과로 보아야 할 여러 가지 증거가 있다.

우선 김정은의 권력승계를 주도한 장성택은 김정일 시대 북한정권유지의 중심축을 이룬 선군정치를 당 중심 정치로 바꿔야 한다고 주창하면서 선군정치의 물질적 기초를 군에서 당으로 이관하는 조치를 취했다. 김정일 시대의 북한경제는 인민군 경제와 인민경제로 이원화되어 있었고 인민군 경제가 인민경제의 우위를 차지하였다.

인민군경제는 산에서 채취되는 것과 바다에서 채취되는 것을 물질적 기초로 하여 실물경제에서 무역을 통한 외화벌이를 추구했다. 지하자원과 수산자원이 주된 수출품인데 여기에는 아편이나 버섯, 인삼, 한국에서 수요가 높은 해사(海沙)도 인민군 경제 소관이었다. 장성택은 군에서 주도하는 이러한 사업을 당으로 이관하면서 외화벌이의 주도권을 하나씩 군에서 자기가 주도하는 당으로 이관시키고 대중국 무역을 통하여 외화벌이를 장악하는 한편 외국공관을 이용한 외화벌이도 자기 수중에 장악했다. 선군이 아닌 선경정치의 기초를 하나씩 다져나갔다. 장성택의 주도와 박봉주 총리의 지휘능력이 결합됨으로 해서 북한 경제는 마이너스 성장에서 플러스 성장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위기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장성택의 선경정치로 입지가 약화된 선군정치세력이 당 내외에서 단합, 反장성택 전선을 형성해 나갔다. 이 당시 이영호 참모총장의 장성택에 대한 도전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당내 조직지도부를 중심으로 하는 선군정치지원세력은 ‘백두혈통에 의한 유일영도체제확립’과 핵과 미사일이라는 ‘선군의 위업’수호를 내걸고 장성택이 중국과 제휴하면서 경제권을 장악하고 김정은의 유일지도체제 확립에 역행하는 노선을 걸을 뿐 아니라 선군의 위업을 승계하기도 꺼려한다고 모략하는 반간계에 착수했다. 장성택의 일거수 일투족을 조사하여 장성택의 제거 없이는 유일영도체제 확립이 어려울 뿐 아니라 한반도 비핵화를 말하는 중국과 제휴하여 선군위업의 승계마저 어렵게 한다고 김정은을 설득하였다.

 

김정은과 장성택 간의 모순조작은 의외로 쉽게 이루어졌다. 김정은은 반간계를 간파 하지 못하고 자기의 가장 주요한 지지기반인 장성택을 버리고 중국의 개입을 꺼려 속전속결로 장성택을 처형해버렸다. 반간계의 주축세력이 김정은에게 추호라도 애정이 있었다면 장성택 제거과정에서 김정은의 이미지를 지구최악의 독재자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장성택의 죽음은 김정은 지지기반의 약화를 의미하며 북한정치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배제를 겨냥한 쿠데타의 성공을 의미했다. 형식은 친위쿠데타 같지만 본질은 김정은의 지위가 선군정치세력의 괴뢰로 전락하는 길이었다. 12월 17일 김정일 사망2주년 추도식에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진다는 백두혈통은 김정은 이외에는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김정은의 고모 김경희도, 그의 형인 김정철도, 그의 여동생도 금수산 태양궁의 김정일 영령안치소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중국고사에 반간계에 걸린 자는 예외 없이 반간계를 건자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김정은은 백두혈통의 용도가 있을 동안은 버티겠지만 자기의 구체적 지지기반이 사라진 김정은이 앞으로 자기를 표현할 방도가 무엇일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4.

 

북ㆍ중 관계는 현시점에서 무어라고 속단할 수 없다. 북한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중국을 대하지만 김정은의 북한에 대한 중국의 입장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앞으로 2021년까지 북한과 중국 간에 체결된 이른바 조중(朝中)상호원조 및 우호협력조약은 형식적으로 유효하지만 사실상 사문화(死文化)된지 오래다. 북한의 핵무기 포기를 전제로 추진하는 중국의 6자회담 재개구상도 현실성이 떨어지는 제안이 되었다.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지구최악의 독재자로 인상 지워진 김정은을 옹호하기도 매우 어렵게 되었다. 중국인민들의 지지를 받기 힘들기 때문이다. 장성택 사후 북한을 엄습할 경제난과 내부갈등의 돌파구로 북한이 추구할 대남긴장고조정책은 중국의 대한반도 정책에 엄청난 난관을 조성할 것이다. 미국과 일본이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연대할 명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대북한 정책은 이제 바야흐로 그 한계점에 도달했다는 느낌을 준다. 중국은 그간 북한이 지니는 전략적 가치를 고려하여 북한과 김일성, 북한과 김정일을 동일체로 보는 관점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중국은 앞으로 북한과 김정은을 하나의 동일체로 간주하고 거기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을까.

북한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겠지만 중국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선택이다. 중국의 대안은 미국이 오랫동안 주장했던 정권교체(Regime Change)일 것이다. 바꿔 말하면 비핵개방을 지향하는 정권으로의 북한정권의 변환을 중국은 바랄 것이다. 시진핑의 중국은 북한의 백두혈통중심의 유일영도체제도 아니고 선군정치도 아닌 비핵, 비세습 개방정권일 것이다. 물론 미일관계나 한미일 3국을 바라보는 중국의 전망에 따라 중국의 선택지는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지구최악의 독재자로 변한 북한의 대변인이 되는 길을 중국이 과연 선택할 것인가. 그길 이외의 대안을 찾을 것이다. 여기에 한국외교의 당면과제가 있지 않을까. 함께 고민할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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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옌쉐퉁(閻學通)교수와의 대화

 

                                                    한중문화협회 회장 이 영 일

 

1.들어가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상황이 요동치고 있다. 한중관계는 박 대통령의 성공적인 정상회담을 계기로 모든 면에서 관계가 크게 개선되고 있는데 반해 한일관계는 영토문제, 종군위안부문제, 역사문제 등으로 갈등이 겪고 있다.

 

같은 시기에 일본과 중국 간에는 조어도(釣魚島)(센카쿠열도) 영유권을 둘러싼 분쟁이 날이 갈수록 그 강도가 높아지는 가운데 미국은 조어도가 미일방위조약이 정하고 있는 일본영토에 포함된다고 밝혔다. 여기에 더하여 미국은 일본 아베(安培)정권이 추구하는 집단자위권행사를 지지, 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이 맡아야 할 역할의 일정부분 일본에 내맡기는 태도를 취한다.

 

이러한 시기에 필자는 한중문화협회 베이징지회 제4대지회장 취임식(10월 26일)참석차 베이징을 방문하는 기회에 10월 25일 중국 칭화대학(淸華大學)의 당대국제관계연구원(當代國際關係硏究院)의 옌쉐퉁(閻學通)원장을 사무실로 방문, 시국담을 나눌 기회를 가졌다.

 

내가 옌 교수에게 흥미를 가진 것은 그가 발표한 논문들 속에 시진핑 주석이 추구하는 신형대국관계론의 주요관점이 포함되어 있었고 특히 중국정부의 중한(中韓)전문가위원회의 위원으로 중국의 대한반도정책결정에도 관여하는 인사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미국의 UC Berkley에서 정치학박사학위를 얻은 석학으로도 알려져 있다.

 

2. 대화요지

 

필자와는 초면이었지만 편지로 면담의사를 전한 탓인지 자기 연구실에서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처음에는 말문 열기가 다소 어색했지만 그를 알게 된 배경이 그가 발표한 논문들을 통해서였고 특히 옌 교수의 국제관계를 보는 시각이 수백 개의 국가들이 명멸(明滅)했던 중국 춘추전국 시대와 그 때 출현했던 지도자들의 전략사상들을 오늘의 상황분석에 응용하고 발전시켜 현대국제관계를 설명하는 접근법을 제시한 점에 내가 흥미를 가졌다고 말하자 그의 말문도 자연스럽게 트였다.

 

① 한반도의 안정화 방안

 

필자는 대화의 모두에 한중문화협회의 탄생배경을 설명하면서 학창시절에 읽은 백범일지의 한 토막을 이야기했다. 백범 김구(白凡 金九)선생은 광복 후 그가 발표한 일지(日誌)에서 강대국들로 둘러싸인 한국이 외세의 간섭을 받지 않고 독립과 번영을 누리기 위해서는 군사강국을 지향하지 말고 문화강국, 경제 강국, 과학기술 강국의 길을 택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나도 그의 견해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하고 현재 한국정부도 지정학적으로 보아 주변의 어느 국가와도 1대1로 맞설 만큼 강국이 아니기 때문에 핵이나 탄도 미사일, 항공모함 같이 주변국들의 안보우려를 유발할 전략무기의 보유를 자제하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북한은 핵무장과 탄도미사일 보유를 적극 추구함으로 해서 강대국들의 개입과 유엔안보리의 제재를 자초했고 북한이 핵을 버리지 않는 한 중국이 바라는 한반도의 안정은 기대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북 핵은 일본이 핵무장할 명분만을 제공, 동북아시아가 중일(中日)간의 핵 대결지역으로 변할 우려마저 있다면서 이에 대한 옌 교수의 생각을 물었다.

 

그도 나의 관점에 공감하면서 자기의 전략관점에서는 중국의 주변국가 중 한국과 파키스탄 양국은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과도 함께 동맹관계를 가질 수 있는 국가로 본다면서 한중동맹이 필요하다는 뜻밖의 견해를 표명했다. 그는 한국이 미국과의 방위동맹을 유지하면서도 중국과도 동맹관계를 맺어야 평화와 안정 확보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이어 중국은 1961년 이래 북한과 동맹관계를 갖고 있지만 실상을 보면 “무늬만의 동맹(Quasi Alliance)일 뿐, 합동군사훈련 한번 없었고 군사무기거래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국가 간에 동맹이 체결되려면 그 조건으로 공동안보이익의 필요성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 한중간에는 공동안보이익이 형성 중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 첫째 근거로 한중양국은 지금 일본과의 관계에서 영토문제를 위요하고 대결구도가 형성되어 있으며 또 한반도 안정을 위해 북한의 비핵화가 필요한데 이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도 한중양국은 안보이익을 공유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둘째로는 한중간에는 수교이후 경제협력이 지속적으로 증대되고 있는데 이제 한중협력은 단순한 우호관계 차원을 넘어서서 공동발전관계로 업그레이드되고 있으며 셋째로 동아시아국가들 간의 지역협력은 나날이 늘어나는데 이제는 일본이 아닌 한중양국의 협력만으로도 지역협력을 추동할 수 있다면서 그 실례로 1997년의 외환위기와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양국 협력의 효율성은 실증되었다고 말했다.

결론으로 그는 한중양국 간에는 공동의 전략적 이익이 존재하며 그 이익의 범위도 부단히 확대추세이기 때문에 한미동맹과 함께 한중동맹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나는 옌 교수의 제안이 매우 새로운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런 발언의 내면에 담긴 전략관점이 무엇일까를 순간적이나마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이 미일의 대중국견제나 공격기지로 변화되는 되는 것을 막겠다는 의도인지 아니면 최근 조성되고 있는 한미일 안보협력가능성을 보는 중국의 시각 속에 일본과 갈등관계인 한국을 가장 약한 고리로 보는 것은 아닌가하는 느낌이 뇌리를 스쳤다.

필자는 옌 교수에게 한중동맹론은 매우 의미 있는 제안이지만 당장 실천에 옮길 과제라기보다는 시간을 두고 검토해 나갈 과제 같다고 평가하고 옌 교수가 동의한다면 내년 봄 서울에서 한중문화협회와 칭화대학의 당대국제관계연구원이 공동으로 “한중동맹은 가능한가”를 주제로 학술회의를 열어 학자 간 토론을 갖자고 제안하였다. 옌 교수도 이를 흔쾌히 수락하였다.

 

② 남북대화에 대한 중국의 태도

 

뒤이어 나는 오늘날 북한이 일방적으로 패쇄 했던 개성공단은 재개되었지만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북한이 돌연 일방적으로 거부함으로써 남북관계의 개선전망은 현재 매우 어두운 실정인데 북한에 대해 가장 영향력이 큰 중국이 6자회담재개를 위한 외교노력은 강화하면서도 “남북관계 개선 문제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옌 교수는 현재 북한은 한국과 중국과의 관계가 나날이 긴밀해지고 유엔안보리에서 대북제재결의를 중국이 찬동하면서부터 중국의 외교적 권고에 대해 매우 경계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예로 “박근혜 대통령은 시진핑 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졌으나 북한의 김정은 제1비서는 아직도 중국을 방문치 못하고 있다. 한국의 외상은 수시로 중국외상과 대화하고 있지만 북한은 그렇지 못하다”고 지적하고 이 때문에 지금 중국이 남북한 관계에 끼여들 여지가 적다고 말했다.

 

나는 “그렇다면 정부수준에서는 어렵더라도 중국의 홍십자(紅十字)가 민간단체입장에서 남북한적십자단체들과 함께 만나 인도적 차원의 이산가족상봉문제, 대북식량이나 의료지원문제를 해결하도록 주선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겠는가.”고 물으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도 남북한 간의 인도적 문제해결을 시작으로 점차 신뢰를 회복함으로써 더 큰 협력으로 남북한관계를 발전시키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옌 교수는 “홍십자 역할론은 매우 의미 있는 제안으로 본다.

 

자기도 중한전문가위원회 위원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정부당국에 제기, 실현성을 타진해 보겠다.”고 답했다.

 

③ 일본의 집단자위권문제

 

Ⓐ 일본의 집단자위권과 미국문제

 

옌 교수는 일본의 집단자위권 주장을 미국이 지지했는데 이를 필자는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다. 나는 미국이 유엔헌장의 집단안보조항을 인용, 일본의 집단자위권을 지지한다고 말하지만 내심으로는 현재 모든 면에서 중국에 앞서는 미국에 대해 신형대국관계를 들고 나오면서 미중 양국 관계를 대등관계로 간주, 국제문제에서 양국이 동등한 발언권을 갖자고 요구하는데 대한 미국의 전략적 대응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이 집단자위권 행사를 명분으로 비무장헌법을 개정, 군대를 보유한 정상국가로 되면 머지않아 미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독자노선을 택할 가능성이 높은데 미국의 선택이 현명한지는 두고 볼 일이라고 덧붙였다.

 

나의 견해에 대해 옌 교수는 중국역사에서 성공한 군주가 갖는 덕목으로서 "시혜(施惠benevolence), 인의(仁義 righteousness), 의례(儀禮 rite)라는 사상적 전통을 오늘에 계승하고 있는 중국은 앞으로 미국과의 경쟁에서 물질적으로뿐만 아니라 가치문제에서도 앞설 것이라고 말하고 “중국이 떠오르는 대국이라면 미국은 쇠퇴하는 대국”인데 전자(前者)가 왕도(王道)를 걷고 후자(後者)가 패도(覇道)를 추구한다면 중국고대전략사상의 귀결로 보아 중국이 필승한다고 말했다.

이어 국제정치문제에서 리얼리스트(Realist)인 자신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의 미국에 대한 신형대국관계 요구는 가장 현실적이라고 강조하고 한중협력도 이러한 상황변동과 연관된다고 말했다.

 

Ⓑ 인구는 자원인가 재앙인가

 

옌 교수는 일본은 인구의 고령화, 인구의 감소로 앞으로의 발전에 한계가 예상된다고 지적했다. 나는 한국도 유사한 문제를 안고 있으며 중국의 가장 큰 자원은 인구 같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옌 교수는 먹을 것과 일자리는 줄 수 없는데 인구만 불어나면 그것은 곧 국가적 재앙이 된다는 관자(管子)의 이론에 비추어 중국은 1가정 1자녀 정책을 유지해왔다는 것이다. 이어 소말리아 같은 아프리카 국가에서는 인구가 불어나면 그것은 자원이 아니라 곧 재앙이 된다고 지적하고 인구를 감당할 생산기반확충이 국력의 가장 중요한 기초라고 말했다.

 

3. 맺으면서

 

옌 교수와의 대화는 오찬까지 이어졌다. 나는 10월 25일 이 날이 중국인민의용군이 63년 전 한국전에 참전한 날이어서 중국정부나 언론이 이 날의 의의를 되새기는 행사를 갖는가를 눈 여겨 보았다. 내가 점검한 범위 내에서는 중국의 정부는 물론이거니와 TV 방송이나 신문의 한 구석에서도 중공군의 참전을 지나가는 뉴스로도 보도하지 않았다. 한편 이날 평양에서는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내각은 공동명의로 평양의 북·중 우의탑(友誼塔)에 헌화하고 고위 인사들이 중국지원군 전사자들을 추모했다고 보도했다.

 

한중문화협회가 지난 8월 한국휴전60주년 행사의 하나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중국군 사병을 초청, 파주의 중국군 묘지를 참배토록 주선한 바 있는데 이 행사는 비록 조그마한 일이었지만 한중간에 있었던 전쟁의 상처를 넘어서서 새로운 시대를 열자는 상징성에서는 나름의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아직도 한중관계는 어려운 구석들이 많고 중국지도층이 갖는 전략관점도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중국은 북한편이라는 선입견에 더 이상 묶여서는 안 된다. 중국이 우리의 실리-한반도의 평화, 통일, 번영-의 파트너가 되도록 양국관계를 다방면에 걸쳐 증진시키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한중관계를 발전시키는 가장 중요한 우리의 버팀목은 튼튼한 한미동맹임은 항상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항상 변하기 때문에 우리는 주변정세변화에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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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산가족 상봉 사업의 성공을 위한 제언

 

                                                                                        이 영 일 (전 국회의원)

 

                                                                       1.

 

우리는 이론상으로는 북한정권과 우리나라가 인도주의적 가치관을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러나 가끔은 공유가 가능할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진다. 더욱이 북한이 모든 선전매체를 이용하여 “우리민족끼리”라는 구호를 외칠 때면 어느 순간에 북한정권의 담당자들도 우리와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많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서 북한정권과 북한 동포는 일견 같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같지 않다. 북한 동포들은 우리와 같이 핏줄을 나눈 동포로서 인도주의적 가치를 공유한다. 탈북자들이 어렵게 번 돈을 북한에 남겨둔 부모형제를 위해 비싼 대가를 지불하면서 송금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북한동포들도 우리와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러나 2400만 북한동포를 다스리는 김정은 세습독재자를 수령으로 하는 북한의 지배동맹세력은 인종학적으로는 우리와 같은 민족이지만 가치관 면에서는 우리와 전혀 다른 집단이다. 지금 북한에는 우리와 동포로서의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는 북한동포가 있는가하면 우리와 가치관을 전혀 달리하는 북한지배동맹세력이 함께 살고 있다. 북한의 지배동맹세력은 흔히 북한 식 표현으로는 핵심계층이라고 하는데 김일성 가문을 이른바 성골(聖骨)로 하는 혁명가족과 그에 동조하는 이른바 진골(眞骨)로서의 당 간부와 군 간부 및 그 동조세력으로 구성되는데 이들의 외연을 크게 확장하면 약 200여만 명(강인덕씨는 500만으로 추산)에 이르고 그중에서 실권세력은 약 200명가량의 당⦁군 지배집단이다. 이들 지배세력의 가치관은 우선 그들의 적(敵)과 동지(同志)에 관한 태도에서 분명히 차이가 난다. 우리의 경우 적이 아니면 동지이거나 친구이거나 우방이지만 북한지배동맹의 가치관에서는 동지가 아니면 모두가 적이다. 부모, 형제, 처자도 동지가 아니면 적이다. 학연, 혈연, 지연도 동지가 아니면 무시되고 적이 된다. 바로 이러한 적과 동지관(同志觀)에 세워져 있는 정권이 바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고 이 정권을 틀어쥐고 있는 세력이 바로 김정은을 세습수령으로 받드는 북한지배동맹세력이다. 우리는 이론상으로 이러한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으면서도 북한정권도 우리와 인도주의적 가치관을 공유할 것이라는 잘못된 가정에 빠져 오류(誤謬)룰 범할 때가 적잖다. 특히 이러한 착각과 오류가 자주 일어나는 남북한 간의 대표적인 사업이 이산가족 상봉사업이다. 북한의 계급정책분류에서 보면 현재 남한에 부모형제가 살고 있는 월남자 가족이나 남한으로 넘어간 탈북자 가족은 “복잡한 계층”으로 분류되어 2중, 3중의 감시 하에 놓여있고 각종 불이익처분을 항의한마디 못하고 받아들이면서 삶을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북한정권은 월남자 가족의 현황에 대해서는 감시의 눈을 떼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항상 가장 정확한 자료와 정보를 가지고 있다. 이 반면 한국에서는 북한에서 넘어온 동포들의 현황을 자세히 파악하기가 힘든 실정이다. 오히려 신고를 받아서 이산가족의 실상을 파악해야 한다. 왜냐하면 월남 동포들은 이미 대한민국 국민으로 용해되어 대한민국국민들로 당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주체로서 성장하고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우리가 북한정권의 가치관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이산가족 찾기나 상봉사업에 매달린다면 항상 좌절과 실패에 직면할 것이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앞으로의 이산가족 상봉사업의 현재와 장래를 전망하고자 한다.

 

                                                      2.

 

 지난 9월 25일로 예정되어 있던 금강산에서의 이산가족상봉행사가 북한의 일방적인 연기 통보로 가족만남을 기다리던 이산가족들에게 엄청난 낙담과 실망을 안겨주었다. 이번 이산가족상봉사업은 남북한당국자들과 적십자사업 요원들 간의 회담에서 상봉장소를 금강산으로, 상봉자 명단을 상호 교환한 결과 북한 측에서는 100명을, 남한 측에선 95명으로 하기로 합의하고 9월 24일부터 26일 사이에 상봉행사를 갖기로 양측이 합의했던 것이다. 이 합의로 남북한 관계의 장래는 순항할 것처럼 예상되었다. 개성공단이 지난 4월 8일 북한정권의 일방적 노동자철수로 사실상 가동중단상태에 빠졌다가 지난 8월 14일 정상화하기로 합의, 이제는 정상가동단계에 접어들었고 앞으로 10월 2일에는 금강산 관광사업 재개를 위한 실무회담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남북한관계는 의외로 잘 풀리면서 이산가족 상봉사업도 무난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4일 앞두고 이 행사를 무기 연기 한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북한이 이산가족상봉이라는 분단국가로서의 남북한 간에 통일에 앞서 해결해야할 기장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합의의 불이행과 연기조치는 이번에만 처음 있는 일은 아니지만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것은 북한이 남북대화를 거부해서는 안 될 내외정세 하에 있었기 놓여 있다고 보였기 때문이다. 제3차 핵 실험 이후 중국이 가세한 유엔의 대북한 제재결의는 그 제재의 강도를 북한의 경제와 외교가 피부로 느낄 만큼 나날이 심화되고 있다. 또 대내적으로도 경제난이 가중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나날이 개선되면서 중국으로부터는 북한 핵무기의 포기를 비군사적으로 해결하기위한 수순으로 중국이 의장으로 되어있는 6자회담에 다시 참가하라는 압력이 거세지고 있다. 이러한 압력에 대한 대응으로 북한은 지난 6월 남북한 당국 간 회담을 제안했고 그들이 일방적으로 가동 중단시켰던 개성공단의 발전적 정상화협상에 나와 한국 측 제안을 수용하는 선에서 발전적 정상화에 합의했고 이산가족상봉화담에도 응해서 합의했던 것이다. 그러던 북한이 의외의 강수로서 이산가족상봉행사를 일방적으로 연기한다는 조치를 발표한 것이다. 이유는 무엇일까. 두 가지로 집약된다. 하나는 회담의 형식인데 이번 개성공단 정상화조치나 이산가족상봉사업이 김정은의 선의나 아량의 산물이 아니고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공약으로 내세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가 주효했던 결과로 국내외의 평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제사회는 북한이 금년 봄에 한국을 상대로 벌였던 고강도 적대적 심리전공세에 맞서서 “평화를 지키면서(Peace keeping), 평화를 만들겠다(Peace building)”는 박근혜대통령의 단호한 의지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구상에 잘 반영되어있다고 평가한 것이다. 둘째는 회담개최의 실익이 없다는 북한정권의 내부에서의 반발이 강하게 제기된 것으로 보인다. 그간 북한은 주지되는 바이지만 항상 북한지도자와의 인터뷰나 접견도 반드시 북한이 필요로 하는 외화벌이수단에 연계하여 추진해왔고 북한을 방문하는 한국인에게는 항상 입북료(入北料)를 현금이나 물자로 공여를 받아왔다. 심지어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공식적으로는 5억 달러 가량의 입북료를 현찰로 입금시켰고 그것이 확인된 후에야 비로소 김정일-김대중 회담이 열렸던 것은 이미 공지된 사실이다. 하물며 북한지배동맹이 적대계층으로 관리하는 월남자가족을 남한 친척친지들과 만나는 사업을 무상으로 한다는 것은 북한지배동맹세력의 관행적 사고로는 도저히 수용될 수 없는 합의였다. 추측하건데 금강산 관광재개와 연계하여 이번 이산가족상봉행사를 추진하려고 했던 것인데 한국 측의 태도가 과거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처해오는 양상을 볼 때 인도주의적 가치를 경제적 가치로 교환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고 판단하고 무기연기를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3.

 

 현시점에서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치적 차원에서는 남북한 대화에 대한 수요가 높지만 개성공단합의와 가동정상화를 통해 일단 국제사회에 대한 체면은 세웠기 때문에 이산가족문제에서만은 인도주의적 가치를 경제적 가치로 교환할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상황을 평가한 후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취소 아닌 연기로 호도하고 있다. 연기의 명분으로는 한국의 내부 분위기가 정상적인 남북대화를 기대할 상황이 아니라고 하면서 대북 적대적인 태도가 노골화되고 있다느니, 통일 애국세력을 탄압한다느니 하는 구실을 내세우고 있지만 본심은 무상으로 인도주의적 사업을 추진해서는 안 된다는 지배동맹세력내부의 강한 반발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973년에는 김대중 남치사건을 이유로 7.4남북공동성명으로 추진된 남북조절위원회회담을 완전히 단절시킨 바도 있었는데 이번에는 단절 아닌 연기로 입장을 바꾸고 있다. 합의 불이행이 다반사인 북한지배동맹이 합의의 취소 아닌 이행시기의 연기를 택한 것은 합의 불이행이라는 국제사회의 지탄을 피하면서 실리를 확보하자는 것으로 엿보인다. 동시에 한국정부의 박근혜 대통령이 내놓고 있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현실적인 남북대화와 관련해서 구체적으로 그 효용성을 시험해보려는 측면도 엿보인다.

 

  이산가족 상봉사업은 북한지배동맹과는 가치관과 철학을 달리하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반드시 관철시켜야 할 역사적 과제다. 또 1970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남북한관계를 대결에서 대화관계로 전환시킨 최초의 명분도 이산가족 찾기 사업이었음을 상기할 때 우리로서는 결코 포기하거나 간과할 수없는 남북한관계에서의 가장 기본이 되는 사업이다. 그래서 한국 측은 이산가족 상봉장소로서 금강산 보다는 서울과 평양을 내왕하는 것이 남북한이 갈라져 살아온 역사적 현실을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직시하면서도 체제오염을 두려워하는 북측의 우려를 감안, 금강산을 요구하는 북측의 제안을 양보하면서 수용했던 ㄱ서이다. 현재 가족을 만나야할 이산가족의 수효도 2010년 10만 5천에서 이제는 7만2천명으로 줄었고 이 추세로 몇 년을 더 허송한다면 이산가족 생존자가 더 줄어들 전망이다. 이런 견지에서 우리는 북측에 이산가족 사업의 조속한 합의이행을 강력히 촉구하면서 이산가족 상봉행사의 거부가 북한에 가져올 대내외적 불이익을 각성하도록 촉구하는 외교적 노력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남북한 이산가족 상봉을 계기로 북측에 남아있는 연로한 가족이나 친지들에 대한 경제적 지원책을 마련하여 제시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나아가 삶의 길이가 얼마 남지 않은 이산가족들의 재결합을 위한 자유선택권 행사도 새로운 제의가운데 포함시켜보면 어떨까. 아울러 금강산 관광재개문제도 북한이 박왕자 여인의 비극적 죽음에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는 절차를 밟은 후 관광의 재개의 길을 터주는 방안도 검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서독(西獨)이 동독으로부터 정치범을 거금을 들여가며 구해낸 사건은 너무 유명한 이야기다. 인도주의적 가치를 경제적 가치로 교환한 역사적 선례가 아닐 수 없다. 국내외 상황은 남북한 관계의 정상화를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시계방향을 거꾸로 돌리는 북한의 기도가 오래갈 수는 없다. 우리는 인내심을 가지면서 인도주의적 가치를 경제적 가치로 교환하는 새로운 접근도 시도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노력도 결국에는 통일비용으로 환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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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일이 TV조선 보도본부 황금펀치에서 8월 23일 오후 5시 40

 

분부터 가진 토론에서 주고받은 내용입니다. 

 

 

MC>남북 이산가족 상봉 회담이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진행중인데.

고령의 이산가족들은 가슴 졸이며 협상 결과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MC> 이산가족 상봉, 정치적 이벤트, 북한의 휘둘림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70-80년대 통일원과 남북고위급 회담 대표로 남북관계를 직접 다루신 3선 국회의원 이영일 의원 모셨습니다.

MC> 그간 저희와 정치현안을 많이 말씀하셨는데, 오늘은 본 전공인 남북대화를 주제로 대화를 나눠보겠습니다.

 

Q1. 이산가족 상봉, 오늘 협상 잘 끝마치면 3년만인데, 북한이 적극적으로 나올 것으로 보시나요?

 

답: 지금 북한은 자기 체제의 위기관리차원에서 모든 형태의 남북대화에 적극적으로 응할 것입니다. 우선 대내적으로 경제난이 가중되고 있고 국제적으로는 유엔안보리의 제재결의가 초기와는 달리 구체적으로 북한의 대외활동에 제약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위기와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술로 한국을 상대로 하는 대화전술을 적극적으로 펴고 있는 것 같습니다.

 

Q2. 이산가족 상봉 매번 100명씩밖에 못 만나니, 이번 기회에 대규모, 정례화해서 틀을 바꾸는 것도 하는데, 북한이 과연 받아들일까요? 뭔가 조건을 제시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 이산가족 틀 바꾸는 대신, 금강산 관광 재개를 끼워넣기 하려고 하지 않을까

 

답: 이산가족 상봉자의 수를 늘리거나 상봉을 정례화하자는 제안을 북한이 현재 못 받겠다고 할 이유는 없지만 면회를 할 사람을 선정하고 사전 점검하고 훈련시키는 문제가 남한과는 사정이 다르기 때문에 수를 늘리기는 쉽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국으로서는 지금부터 3년 전 면회신청자수가 12만 여명에서 그간 5만여명이 돌아가시고 현재 약 7만여명이 남아있는데 100여명씩 만나는 수공업적 방식으로는 상봉의 실효를 얻기 힘들다는 점을 내세워 현재의 3배 내지 5배로 늘릴 것을 요구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곁들여 면회 횟수를 늘리거나 정례화하는 방식으로 상봉의 실효를 높여나가는 방법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Q3. 이산가족 상봉할 때마다 북한은 쌀, 비료를 요구하는데, 이번에도 요구할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우리 정부는 안된다는 입장이긴 하지만. 그래도 인도적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결국 주게 되지 않을까요?

 

답: 남북한은 정치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핏줄을 같이 나눈 동포들 간의 분단국가입니다. 따라서 우리 한국의 입장에서는 조건 없이 대화하고 협력해야 할 과제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식량문제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는 동포를 외면해서는 안 되고 굶고 있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면서 무슨 조건을 달겠습니까. 그러나 북한은 식량을 군량미로 빼돌린다잖아요?(MC) 북한의 식량문제는 심각해서 군인들이 제대하면 사회에 나와 굶을까봐 장기근무를 택한다잖아요, 인민과 군을 딱히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군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도 굶주리는 북한 동포로 보아야겠지요. 우리가 보낸 쌀이 영유아를 돌보는데도 쓰일 것입니다.

둘째로는 의료문제입니다. 의약품이 없어 병들어 죽는 사람을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의료지원에도 조건이 있을 수 없습니다. 셋째로는 이산가족의 상봉문제입니다. 남북으로 갈라진 부모형제가 상면하자는데 거기에 무슨 조건을 답니까. 이 세 문제는 가장 인도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조건 없이 실천해야 합니다. 박대통령이 제68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인도적 대북지원은 정세와 관계없이 추진하겠다고 밝힌 것은 인도원칙에 합당한 것입니다. 이 원칙에 조명하여 북측이 합당한 제안이나 요구를 해오면 수용하는 것 옳을 줄 압니다.

 

Q4. 이산가족 상봉을 하면 늘 장소가 문제됩니다. 1985년 1차 상봉때 서울 평양 교환 행사하던 것이...2002년부터는 금강산에서만 계속 했어요. 이번에는 좀 바뀔까요?

 

답: 저는 금강산을 면회장소 선택하는 것을 좋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 우선 금강산은 이산가족들이 접근하기도 불편하고 또 남북한 동포들이 서로 갈라져 살아온 그간의 삶을 역사적으로 이해하는데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나 북한은 서울과 평양을 오가는 이산가족 상봉사업에 체제상의 부담을 느낍니다. 북한주민의 사상오염도 우려하고 남한체제의 우위성이 북한전역에 퍼지는 것도 바라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서울과 평양을 오가는 것보다는 금강산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러나 장소문제에 대한 이견으로 이산가족 상봉이 어려워진다면 그것 역시 원칙에서 벗어나는 문제로 되겠지요. 우선 상봉실현자체에 큰 무게를 두어야 할 줄 압니다.

 

Q5 북한에서는 "금강산 관광을 하루빨리 재개하자"며 이산가족 상봉과 금강산을 엮고 있어요. 오늘 이산가족 회담이 잘 마무리되더라도, 실제 상봉은 금강산관광 회담 지켜보고 하겠다는 전략 같은데요?

금강산 관광 정상화 문제는 결국 북한의 사과가 관건인데. 개성공단 정상화때도 사과한마디 못받았는데, 우린 항상 "북한이니까"라고 넘어가니 버릇만 나빠졌습니다. 어떻게 해야하죠?

 

답: 북한은 금강산 재개문제와 관련해서 사과는 할 것입니다. 대개 유감표명이지요. 재발방지약속도 할 것입니다. 김일성도 1968년 미루나무 사건 때 유엔군 사령관 스틸웰 장군에게 유감표명을 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이제는 북한도 박대통령의 원칙 있는 대북정책을 수용하는 것만이 그들의 대화전술전개에 유리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사과를 할 것입니다. 사과에는 손해배상이 따른데 이는 현대아산과 북측 간에 매듭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Q6. 북한이 개성공단 회담에서 얼굴 바꾸고 나오고 지금 이산가족 상봉 회담에도.. 뭔가 북한의 책략에 말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답: 북한의 최근 동향을 보면 선군정치를 밀어붙이면서 작년 12월 12일 미사일 발사, 금년 2월 12일 제3차 핵실험, 개성공단 중단, 휴전협정 파기, 서울 불바다 같은 고강도 긴장을 조성했던 금년 춘계 대공세가 그것이 자충수였음을 북한도 이제 자인한 것 같습니다. 점차 김정은도 군보다는 당을 중시하는 조짐을 보입니다. 잘 안 알려져 있지만 북한에는 두 개의 경제가 있습니다. 인민경제와 인민군 경제가 그것입니다. 선군정치세력들이 돈이 생기는 산과 바다의 산출물, 무역에서 생기는 이익을 장악해서 미사일이나 핵개발에서 실권을 장악하는데 이 부면의 경제가 인민군경제입니다. 이 반면 당정이 협력하여 민생을 해결하고 개성공단같은 공업지구나 제조업, 농업 등에서 발생하는 소출을 관리하는 경제가 인민경제입니다. 이번에 인민경제를 대표한다는 박봉주를 다시 정무원 총리로 발탁한 것을 보면 오늘의 남북관계를 부정적인 시각에서만 볼 것은 아닌 것 같군요

 

Q.7 그래도 북한 핵은 여전히 진행형, ...남북대화와 북핵대응을 분리해왔는데 결국 북한의 핵 개발 시간만 벌어주는 것은 아닙니까

답: 앞에서도 지적했습니다만 북한이 핵 무력을 지키는 수단으로 남북대화전술을 구사하는 측면이 강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비군사적 방법으로 북한의 비핵화를 추구하야 한다면, 또 미국이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북한 핵 제거에 나서는 접근방식을 우리나라나 중국이 반대한다면 나머지 방도는 한반도 비핵화를 추진할 정치과정의 주체가 남북한이 되고 주변국들이 성원해주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돌이켜 볼 때 지난 10년간 6자회담에서 한국은 아무런 역할을 못했습니다. 북한의 입김, 태도 하나, 하나가 만사를 좌지우지했고 미국의 크리스토퍼 힐과 북한의 김계관 외상이 주연이었다면 한국대표는 Extra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한국외교의 가장 수치스러운 역사로 기억되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상대방의 저의도 정확히 간파해야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한반도 비핵화문제를 주변 대국들에게 맡겨놓고 직접 당사자인 우리가 곁다리로 끼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비핵화를 향한 외교의 이니셔티브를 우리 한국이 장악하고 북한을 상대로 핵 무력 유지이익과 포기이익을 비교하면서 남북한이 공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도가 한반도의 비핵화임을 설득해 내는 일입니다. 주변국들은 한국의 주도적 노력이 성과를 내도록 윤활유를 치는 역할을 하도록 한국외교가 펼쳐져 나가야 합니다. 우리 외교부장관과 통일부 장관이 국면을 이렇게 몰아갈 뱃장과 구상, 내공을 쌓은 분들인지는 잘 모르지만 방향만은 이래야 합니다.

 

Q.8 북한이 개성공단에서 연간 9000만달러, 금강산 관광에서 연간 2000만달러를 얻는데 정상화되더라도 핵개발로 흘러들어가지 않을까요 이를 차단할 방도는 ?

 

답: 북한이 핵실험하는데 대개 3억씩 들어간다고 합니다. 2000년 정상회담 당시 몇 차례 핵실험할 비용을 용처도 묻지 않고 김정일 면회비로 제공한 사실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지금까지 남북관계를 무원칙하게 추진해온 대통령들도 이제 모두 고인이 되었고 김정일 위원장도 고인이 되었기 때문에 과거의 아픈 경험들의 연장선에서 남북한관계의 현상만을 보지 말고 미래를 향한 우리들의 목적에 조명하여 오늘의 남북한 관계를 보는 안목이 지금은 필요할 것 같습니다.

 

Q.9 북한 핵 포기협상은 노상 6자회담 테이블에서 하자고 합니다. 둘이 만나도 하기 힘든 협상, 6자회담으로 해결하자, 과거에도 그렇고 앞으로 100년이 지나도 안 풀릴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 까요?

 

답: 최근 경향을 보면 북 핵을 보는 국제사회의 태도에 많은 변화가 생기고 있습니다. 북 핵의 초기에는 이 문제가 미국과 북한의 양자문제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래서 양자회담이 거론되다가 한국이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거나 중국도 뺄 수 없다는 논의가 성숙해서 4자회담이 열렸고 회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북 핵에 안보상 이해가 걸린 국가들도 모두 포함시키자고 해서 6자회담이 열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참가한 6자의 입장이 모두 같지는 않았습니다. 중국은 비확산에 임하는 미국의 태도가 일관성이 없다는데 불만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을 문제 삼지 않는다는 이유지요, 일본은 북 핵보다는 납치문제에 더 큰 무게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자금에 와서는 북 핵 불용, 한반도 비핵화의 원칙에 대해 주변 국가들의 의견이 완전 일치하고 있습니다. 특히 중국의 최근 동향을 보면 북 핵은 미국에게는 실질적으로 위협이 되지 않고 오히려 중국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공공연히 나오고 있습니다. 나아가 북한의 핵무장이 완료되면 일본의 핵무장은 명약관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군사적 방법으로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6자회담이 소집된다고 해서 상황은 지난날의 6자회담과는 같을 수 없고 한반도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자는 실질적 논의도 제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남북한이 핵문제의 당사자로서 대화를 발전시키면서 6자회담이 실질적 결실을 맞도록 유도하는 노력을 펼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Q.10 남북대화, 나름의 원칙과 탄력성을 갖고 가면 좋은데, 정권 실세들의 문고리 권력, 정치적 업적을 위한 비밀회담, 늘 북한에 갖다 바치고 휘둘리곤 합니다. 여기에 어설픈 ‘화해협력 지상론자’들이 끼어들고..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답: 과거에는 북한관련 자료나 정보들을 정부가 독점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그런 수작을 부리는 자들이 발호할 수 있었어도 이제는 그런 때가 아닙니다. 나만 해도 북한을 한민족복지재단 공동대표 자격으로 여러 차례 다녀왔습니다. 별로 문제될 것 없습니다.

 

Q11. 박근혜 대통령, 이번 815 경축사에서 통일이라는 단어를 네 번이나 꺼냈습니다. 70년대 박정희 대통령 때 통일원에서 직접 한반도 통일 정책의 기초를 직접 짜셨다고 들었는데 핵 무장한 북한, 그래도 통일로 조금이라도 가까이 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 박근혜 대통령이 제시하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라는 말은 그냥 던져놓은 수사가 아닙니다. 식량문제나 의료문제, 이산가족 상봉문제 등 원칙적인 문제들이 잘 해결되어 남북한 간에 신뢰가 쌓이면 보다 큰 협력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한반도 주변에는 잘 아시겠지만 우리나라가 1대1로 겨루어 이길 수 있는 나라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 하에서는 남북한의 어느 쪽에서라도 전략무기를 갖게 되면 그것으로 안보상 위협을 느끼는 외국세력이 반드시 개입하기 마련입니다. 전략무기란 핵, 미사일, 항공모함 같은 대량살상무기입니다. 우리 한반도는 이런 전략무기를 안 갖는 것이 외세의 간섭을 피하는 방도가 됩니다. 외세의 간섭과 개입이 있는 한 평화로운 자주통일은 어렵습니다. 이런 문제를 신뢰가 쌓일 경우 남북한이 대화를 통해 논의하면서 여건에 맞는 평화통일의 정치과정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이점에서 신뢰프로세스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통일접근 방도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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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의 정상 외교대첩
작성일 : 13-07-18 13:38
 글쓴이 : 관리자 (121.162.102.55)
조회 : 30  


이영일의 한중정상회담 수행기

                                         ---한중정상회담 수행을 마치고

 

                                                   한중문화협회 회장 이 영 일

 

1.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

 

나는 6월 중순 대통령 외교안보수석비서관으로부터 6월 27일부터 31일까지 진행될 한중정상회담 수행단의 일원으로 선정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정상회담을 수행하는 한편 그간 중국의 대외문화교류협회와 한중문화협회 간에 협의된 MOU체결을 이번 베이징 방문길에 하자고 중국 측과 교섭, 6월 27일 하오 3시에 서명식을 갖기로 하고 베이징을 향해 오전 중에 김포공항을 출발했다. 이날 베이징 날씨치고는 너무 맑고 화창했다. 중국대외문화교류협회가 있는 중국 文化部 청사로 가면서 천안문 광장을 지나는데 대한민국 太極旗와 중국의 五星紅旗가 나란히 천안문 광장 사방에 줄줄이 세워져 있는 석탑 깃봉마다에서 휘날리고 있었다. 중국인민대회당의 동문 쪽에서 바라보면 천안문에 걸려있는 毛澤東 주석의 바로 코밑에서 태극기와 오성홍기가 펄럭이는 것이었다. 그것은 실로 감동적이었다. 나는 중국의 베이징을 그토록 많이 다녔지만 천안문 광장에서 태극기가 휘날리는 것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역사는 모택동 시대가 아닌 시진핑(習近平) 시대이며 가난한 한국이 아닌 세계랭킹 10위를 넘나드는 국가반열에 오른 한국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았다.

 

2. 이번 정상회담에서 들어난 특징

 

이번 정상회담의 특징을 요약한다면 양측이 이번 정상회담을 성공시켜 한중관계를 새 차원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의지가 그 어느 때 보다도 두드러졌다는 것이다. 박대통령이 중국영도들과의 대화를 잘 풀어가기 위해 필요한 요소마다에 합당한 중국의 故事成語, 論語나 諸子百家, 三國志등에 담긴 명언들을 사전에 잘 준비한 점도 눈에 두드러졌지만 그보다는 한중간에 나누어야 할 議題를 아무 제한 없이 논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중국 측도 정상회담 준비과정에서 과거와는 달리 한국 측에 마음을 열고 한국이 제기하고자하는 모든 의제를 폭넓게 수용함과 동시에 박 대통령의 방문을 최상의 국빈으로 대우하였다. 이러한 접대는 박대통령이 한중협력을 매우 중시하고 중국과의 우호협력관계를 심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주목한 데 기인한다. 또 중국인들에게는 박대통령이 걸어온 험난하고 기구한 인생사도 깊은 인상을 심어준 것 같다. 이번에 “절망은 나를 단련시킨다.”는 제목으로 중국에서 출판된 박대통령의 중국어 판 자서전이 중국서점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이러한 평가를 입증한다.

또 중국은 과거와는 달리 최상의 국빈만을 모시는 중국 인민대회당 3층에 위치한 金色大廳을 국빈만찬장으로 정해 박대통령을 초청했다. 덕분에 수행원들의 격도 높아졌고 만찬장의 우아한 분위기는 이 자리에 초청받았다는 사실자체에서 큰 감동과 긍지를 느낄 만하였다. 이날 만찬의 식간 행사에서는 박대통령이 좋아한다는 삼국지의 영웅 상산 조자룡을 등장시켜 장판파에서 적장 8명을 물리치면서 劉備의 아들을 구해내는 京劇을 문화공연으로 준비하는 등 박대통령을 기쁘게 해주려는 중국 측의 치밀한 준비가 돋보였다.

 

3. 정상 간의 폭넓은 대화와 합의도출

 

이번 정상회담의 하이라이트는 무엇보다도 양국정상이 양국 간의 모든 현안들을 격의 없이 논의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이번 정상회담에서 박대통령이 중국의 시진핑 주석에게 한반도 통일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하고 중국이 한반도 평화통일의 동반자가 되어주기를 바란다고 제안한 것은 특기할만한 역사적 제안이다. 이와 동시에 북한 핵은 어느 경우에도 용납할 수 없음을 구체적으로 지적, 호응을 얻어낸 점이다. 지금까지 한중간에 여러 차례 정상회담이 열렸지만 한국의 어느 대통령도 중국이 껄끄럽게 생각할 문제를 박대통령만큼 당당히 제기하지 못했다. 대개 중국 측이 사전에 불편한 의제는 논의대상에서 배제하거나 부담스러운 문제를 빼고 대화를 갖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상대화의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통일문제, 핵문제, 한중FTA문제, 역사인식과 관련된 인문교류문제, 탈북자 문제, 심지어 안중근 의사의 標識石을 하얼빈 역에 새기자는 문제까지를 중국 측에 내놓고 제기, 합의를 도출한 점에는 큰 방점을 찍지 않을 수 없다.

국내언론이나 외신보도는 공동합의문을 중심으로 성과를 분석하면서 북핵문제에 관하여 기존의 양측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고 평가하지만 정상회담의 진행과정을 보면 중국 측 은 문서로 보다는 마음과 행동으로 박대통령의 제안과 주장을 폭넓게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특히 북 핵 불용 입장을 한국 측 주장으로 떼어 공동합의문에 포함시킨 것 자체가 한국 측 주장을 수용한 것에 다름 아니다.

6자회담을 새로 추진하자고 제안하고 있는 중국으로서는 문서로서는 북한을 자극할 표현을 삼가고 있지만 정상회담에서 들어난 분위기나 행동에서 보면 박대통령의 제안을 대폭 수용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특히 리커창(李克强) 총리는 박대통령 앞에서 북 핵 불용입장을 공공연히 밝혔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북한비핵화를 말하는 것이다.

박대통령은 또 칭화대학 연설에서 한반도가 동북아시아 긴장의 진원지로 방치되어서는 어느 나라에도 이익이 될 수 없다면서 북한이 핵을 폐기,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면 동북아시아가 21세기 세계경제발전의 새로운 견인차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요즈음 북한이 핵 보유와 경제발전을 병행 발전시킨다는 이른바 핵ㆍ경제 竝進論이 어불성설임을 지적하였다. 박대통령의 연설은 형식은 칭화대학 학생들을 상대로 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중국 전체인민을 상대로 중국어를 섞어서 행한 명연설이었다. 중국CCTV와 인민일보 등 전 중국매스컴이 연설내용을 상세히 보도했기 때문이다.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중국은 기왕의 ①한반도 평화(不戰), ②북한안정(不亂), ③비핵화(无核)라는 우선순위를 ①비핵화(无核), ②한반도 평화(不戰), ③북한안정(不亂)의 순으로 정책중점을 전환할 것으로 전망된다. 당분간 중국이 북한을 버리는 선택은 기대하기 힘들지만 북한의 비핵화와 개혁개방을 촉구하는 압력은 앞으로 더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왜냐하면 북한에 핵이 있는 한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은 유지될 수 없고 일본 핵무장의 구실이 되기 때문이다.

이번 정상회담으로 한중관계는 여전히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로 정의되지만 막연한 전략적 동반자관계가 아니라 목적을 공유한 동반자 관계로 발전했다. 즉 한반도의 통일과 한반도 비핵화라는 목적을 공유하는 동반자관계로 전략적 동반자관계의 내용을 구체화시켰다는 것이 이번 정상회담의 가장 큰 성과라고 할 것이다.

 

4. 김정일 방중과 비교

 

金正日은 1984년 중국을 방문, 鄧小平을 접견하면서 1시간 동안 개혁개방의 필요성을 설명 듣고 현지를 답사하고 돌아온 후 개혁개방을 추진한다고 合營法 등 개혁개방 관련 14개 법안을 제정했다. 이어 개발특구로 나진선봉지구를 지정하면서 노선전환을 시도했다. 그러나 김일성과 김정일은 북한세습체제유지에 부담이 될 사상오염을 경계한 나머지 개혁개방을 사실상 포기하고 그나마 시행될 것처럼 보이던 나진선봉지구도 극단적인 통제와 간섭으로 외국 투자자들이 투자를 포기함으로 해서 실패했다. 그 후 2002년 다시 신의주에 세우려고 했던 특구는 중국이 신의주특구 행정장관으로 임명된 중국인 楊斌을 구속시킴으로써 계획자체가 와해되었다.

金正日은 김일성이 사망한 1994년부터 집권했지만 한중수교에 불만을 품고 중국과의 관계를 사실상 단절했다가 1999년부터 북ㆍ중 관계를 재개한 후 2001년부터 4회에 걸쳐 중국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중국외교부 초청이 아닌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가 주선한 비공식 방문이었기 때문에 방문 사실자체가 항상 공개되지 않았고 그의 여행 일정은 하나같이 비밀에 쌓였다. 따라서 2000년대에 들어와서 金正日은 네 차례나 베이징과 중국의 몇 개 도시를 방문했지만 천안문 광장에 한번도 人共旗와 五星紅旗가 揭揚된 일이 없었고 더욱이 전체 중국인민들을 상대로 하는 대중 강연은 있을 수도 없었다. 중국공산당 영도들과의 비공개 접촉과대화가 있었을 뿐이다. 이번에도 박대통령은 취임 4개월 만에 중국을 국빈 방문 했지만 김정일을 승계한 金正恩은 아직도 중국방문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5. 결론

 

한중관계는 변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부터 “가재는 게 편”이라는 俗言에 순치되어 중국은 항상 북한 편이라는 편견을 버릴 때가 되었다. 중국이 개혁개방 35년을 경과하면서 한중간에 놓여있는 체제차이는 거의 줄어들었다. 북한을 보는 중국의 관점도 바뀌고 있음이 이번 정상회담을 통하여 사실로 증명되었다. 문제는 앞으로 우리가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진전시켜 나가는가에 따라 우리가 원하는 통일도 달성할 수 있고 지속적인 평화도 누릴 수 있다. 정부수준에서는 한중 FTA도 느긋한 자세로 추진하면서 양국이 윈윈 할 수 있는 협상으로 매듭지어야 할 것이다. 동시에 한중간에 진행된 모든 대화 내용은 우리 우방들과도 공유함으로써 아무런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배려해야 할 것이며 일본과의 관계도 매끄럽게 풀어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중국인민의 마음을 한국을 지지하도록 끌어드리는 노력에서 큰 성과를 얻어야 한다. 최근 중국정치에서도 여론의 역할이 한층 더 중요해지고 있다. 지난 5월 19일 북한함정들이 중국어선을 나포하여 엄청난 몸값을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중국네티즌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북한을 배은망덕하다고 질타하였다. 이 사태에 당황한 북한 대사는 본국에 急電을 쳐서 9일 만에 중국 어부들을 석방시킨 일이 있었다. 中國 古史에 인민의 마음을 얻는 것이 천하를 잡는 법이라고 말했다. 한국에 와 있는 8만 명의 중국유학생에 대한 우리들의 관리가 제대로 되고 있는가. 중국국적을 가진 40만의 노동자들을 우리가 따뜻하게 대해주고 있는가를 우리는 깊이 반성해야 한다. 정부 대 정부수준의 외교와 함께 당 대 당, 국회 대 국회, 인민 대 인민수준의 외교가 보다 더 진지하게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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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한중문화협회 이영일 회장이 2013년 5월 18일 중국상해 복단대학의 한국연구소가 주최하고 한국국제교류재단이 협찬, 전 중국 각대학의 한국학 박사괴정 연구생들이 모인 제9회 박사포럼에서 행한 "한국통일과 중국에의 기대"라는 논문을 요약한 연설내용이다 

 

                                                  韓國統一의 출구가 보인다

                                                                                               이 영 일(한중문화협회 회장)

1.한국만이 지구 최후의 분단국이다

일반적으로 분단국가는 분단의 성격이나 배경의 차이에 따라 國際型과 國內型으로 구분한다. 한국이나 독일은 강대국정치의 필요에 의해서 원래 하나였던 국가가 兩分된 경우로서 國際型 분단국으로 불리며 중국과 타이완관계처럼 내부혁명의 결과로 분단된 경우를 國內型으로 부른다. 이러한 구별은 통일문제의 해결과 긴밀히 연관된다. 國內型 분단국들은 당사자 간의 합의나 투쟁으로 통일이 가능한 반면, 國際型 분단국에서는 당사자 간의 합의에 못지않게 분단을 강요했던 강대국들의 지지와 협력이 필수적이다.

지금 지구상에는 베트남의 통일이 전쟁을 통해서 해결되었고 1990년 독일 통일이 완성되면서 한국이 유일한 분단국으로 남아있다. 물론 중국도 통일문제를 안고 있다지만 오늘의 兩岸關係를 보면 분단고통이 나날이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통일문제가 절박하지 않아 보인다. 미국이 타이완 관계법을 만들어 간섭하고 있지만 시간은 중국 편이다.

지구상에 남아있는 國際型 분단국가인 한국도 이제 대내의 정세의 변화로 통일을 적극 모색해야 할 상황을 맞고 있다. 우선 한반도 분단을 가져왔던 국제정세는 많이 변천했다. 강대국들 간의 냉전은 종결되었고 세계화(Globalization)의 큰 물결이 지구촌을 감싸면서부터 통일을 보는 시각도 달라졌다. 우선 주변정세와 한반도 내부 상황에서 통일문제를 생각하는 새로운 관점들을 살펴보자.

2. 한반도의 분단된 휴전체제가 동북아시아 긴장의 불씨다

먼저 국제정치차원에서 보면 한반도를 더 이상 분단된 휴전상태로 방치해두어서는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할 큰 불씨가 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이는 북한이 장거리 로켓발사에 이어 3차에 걸쳐 핵실험이 행해짐으로써 이 지역 안정화의 필수조건인 한반도 비핵화의 전망이 어두워진데 기인한다. 따라서 오늘의 한반도를 어떻게 운영하고 관리하는 것이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가져오고 분쟁의 씨앗을 제거할 것인가 하는 물음의 해법으로 한국통일문제가 새롭게 등장하는 것이다.

또 한반도 내부사정에서도 탈북현상과 인권문제가 등장하면서부터 어떤 통일, 즉 어떤 체제하의 통일이 이루어져야 주변정세의 요구와도 보조를 같이하면서 脫北을 막고 인권을 보장하여 민족의 분단고통을 줄여 나갈 수 있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상황이 대두했다. 이하에서 21세기와 그 특징의 하나가 된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한국의 통일문제를 살펴본다.

3. 중국이 제안한 6자회담과 標本兼治는 무엇을 지향하는가

한국통일문제가 강대국이 포함된 국제정치적 논의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1954년의 제네바 정치회담이었다. 그러나 이 회담은 당시 한반도 휴전협정을 추인하는 것으로 끝났고 한국 통일문제를 유엔으로 이관시켰을 뿐이다.

그러나 북한이 주변국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핵실험과 로켓발사를 강행하면서부터 주변강대국들은 한반도에서 제기되는 안보상의 우려를 해소할 새로운 정치회담의 필요성에 직면했다. 특히 중국이 유엔안보리에서 북한에 대한 제재를 결의하면서 한반도비핵화를 위한 6자회담의 새로운 개최를 강력히 요구했다. 물론 비군사적 방법으로 북한의 핵미사일문제를 원만히 해결하려면 관련 당사국 회담을 통해 북한의 핵과 미사일 야망을 포기시킬 방도를 만들어 내야겠지만 지난 10년간의 6자회담은 실질적 성과 없이 북의 탈퇴로 중단되었다.

그러나 중국이 금년 유엔안보리에서 다시 내놓은 6자회담은 지난 10년간 실패로 끝난 회담의 되풀이는 아닐 것이다. 유엔안보리가 4차에 걸쳐 북한 제재결의안을 통과시킴으로써 한반도 주변국가들 간에는 북한비핵화에 컨센서스가 이뤄졌고 이 바탕에서 나온 6자회담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신 6자회담은 두 가지 목표를 겨냥하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새로이 6자회담을 제안하면서 한반도 문제의 標本兼治的 해결을 내놓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表는 2005년 6자회담에서 북한이 동의한 9.19합의를 구체적으로 실천함과 동시에 다른 하나는 本으로서 동북아시아 각국의 안보우려를 해소할 새로운 안보의 Mechanism을 안출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중국의 양제츠 외교담당 국무위원이 지난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내놓은 접근 방안이다.

신 6자회담이 성공하려면 한반도가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헤치는 화약고가 되지 않도록 한반도의 관리방식을 한반도의 비핵화, 개방화를 보장할 체제하의 통일 내지 통일에 준하는 안정된 남북관계의 틀을 생산해 내야 한다. 이상의 큰 줄거리에 유념하면서 그간 남북한이 걸어온 길을 간략히 비교해 보기로 한다.

4. 남북한의 격차는 노선선택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1970년은 한반도 역사에서 분단국가로서 남북한이 변화된 내외정세에 능동적으로 적응하는 선택과 결단의 시발점이 된다. 우선 한국은 1970년 8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이 발표한 평화통일선언을 시발로 해서 북한에 남북한이 창조와 개발과 건설을 향한 선의의 경쟁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이때로부터 40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은 핵무기 비 확산조약에 가입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빨리 경제건설에 성공한 국가의 반열에 올랐다.

반면 1970년 4대군사로선(全體人民의 武裝化, 全軍의 幹部化, 全國土의 要塞化, 軍裝備의 現代化)의 완수를 외치면서 “인민혁명을 통한 남조선 해방”을 선언했던 북한은 오늘날 지구 最貧國으로 전락했다. 북한은 한국과의 국력격차를 만회할 방도를 상실하자 체제개혁대신에 전체 주민을 굶기면서 핵과 미사일 개발에 총력을 경주, 탄도미사일과 세 차례의 핵실험을 통하여 소위 北韓版 强盛大國을 지향하고 있다. 그간 북한은 수시로 남북대화를 중단하거나 파탄시키고 군사도발을 되풀이 해왔다. 현재는 3차에 걸친 핵실험과 로켓 발사까지 단행하고 서울과 워싱턴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위협하는 적대 심리전을 펼치고 있다.

5. 한반도의 지정학적 운명은 비핵개방이다.

주지하는 바이지만 한반도는 남북한의 어느 측에서건 대량살상무기로서 핵, 탄도 미사일, 항공모함 같은 전략무기의 보유를 시도할 경우 주변 국가들의 안보우려를 자극, 필연적으로 그들의 개입과 간섭을 불러온다. 이것이 강대국들에 둘러 쌓여있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운명이다. 이점에서 북한의 핵과 미사일 보유시도는 한반도의 통일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는데 엄청난 난관을 조성하고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앞으로 한국주도로 통일이 이루어지면 통일된 한국은 군사강국이 아닌 문화강국, 과학과 기술 강국, 경제 강국을 지향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미래창조과학부를 정부기구로 신설한 것도 이러한 지향의 표현으로 보인다.

독일의 통일과정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큰 교훈은 동독과 서독이 핵무기와 같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도, 제조도 하지 않을 것임을 주변국들에게 다짐하고 핵확산 금지조약에 양독(兩獨)이 가입함으로써 주변국들의 안보 우려를 불식했다는 사실이다. 독일은 지금 핵무기 없이도 유럽에서 가장 잘사는 국가 아닌가.

6. 중국도 북 핵 사태의 이해관계 당사자다.

북한의 장거리 로켓발사와 제3차 핵실험은 한반도의 주변정세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가장 注目할 만한 정세변화는 중국의 대북태도에 변화가 발생한 것이다. 제3차 핵 실험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은 명분상 한반도 비핵화를 지지한다면서도 북핵문제의 본질을 미⦁북 간의 양자대결문제로 간주하고 중국은 제3자 입장에서 양자관계를 조정하는 위치를 고수했다.

그러나 북한이 핵무기화의 바로 직전단계인 제3차 핵 실험에 이르자 중국도 북핵문제가 미 북한간의 문제만이 아닌 중국자신의 이해에 직결되는 문제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동북3성의 일부지역에 까지 핵실험의 진파가 감지된 것은 북 핵의 심각성을 말해준다. 특히 중국은 북한과의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을 통해 북한이 침략을 받을 경우 즉각 군사원조를 제공키로 약속하고 있음에도 북한은 핵실험과 로켈 발사에 집착했다. 이는 중국에 대한 북한의 전략적 신뢰가 약해졌기 때문이다. 북한이 핵무장을 완료하면 중국에 대해서도 핵 공갈을 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중국지식인 사회에서 나오는 까닭이다.

7. 케리 국무장관의 3개항 메시지

이러한 상황에 병행하여 지난 4월 11일부터 15일까지 한국, 중국, 일본을 순방한 케리 미 국무장관은 베이징에서 중국지도부에 세 가지 중요한 메시지를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만이 북한을 비핵개방노선으로 변화시킬 능력을 가진 국가다. 북한의 비핵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미국은 일본이나 한국의 핵무장 요구를 억제하기 힘들다. 중국이 북한을 비핵개방체제로 유도하는데 성공하면 미국은 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의 안보부담을 경감시킬 용의가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이러한 새로운 방향은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는 방식 같은 미국의 익숙한 군사적 접근을 한반도에 적용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클린턴이 시도했던 북핵 제거를 위한 군사작전은 한국의 반대에 부딪쳤고 부시의 군사적 해결시도는 중국의 완강한 반대 때문에 무산되었다.

케리 메시지가 의미하는 것은 시진핑 주석이 작년 2월 방미 당시 미국에 제안한 신형대국관계론을 미국이 동북아시아지역에서 수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요컨대 북한의 비핵화는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의 중국주도로 해결하고 일본의 핵무장시도는 미국책임 하에 억제하자는 것이다.

8. 북한 완충지대론은 시효지난 전략이론이다

중국으로서는 북한이 개혁개방을 선택하지 않고는 경제개발을 이룩할 수 없으며 북한정권이 개혁개방으로 노선을 바꾸지 않으면 한반도 비핵화는 불가능하고 북한의 비핵화가 이루어 지지 않으면 일본의 우경화추세가 가져올 핵무장시도 등 핵 도미노현상과 군비경쟁으로 동북아 지역정세가 戰雲에 쌓이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동북아아시의 안정이라는 중국의 국익이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중국의 일부학자들이 북한을 지원하는 명분으로 말했던 緩衝地帶論은 한참 時效가 지난 관점이다. 지금 중국의 발전과 안보에 꼭 필요한 것은 핵과 미사일에 집착하는 金政恩 세습정권을 비핵개방정권으로 노선을 바꾸게 하는 것이다. 북한의 비핵화 없이는 중국이 말하는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安保機制를 다룰 6자회담의 標本兼治的 해결이 힘들기 때문이다.

9. 한국통일의 새 전망이 열린다.

현재 북한 땅에서는 주체적으로 비핵개방운동이 나올 여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북한주민이 정권에 저항할 유일한 수단은 탈북뿐이다. 탈북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북한은 오늘 날 핵미사일 체제만 갖추면 그것이 곧 강성대국이라고 주장하면서 핵무장을 통해 외부로부터의 침략위협이 사라지면 경제건설에 박차를 가한다는 核⦁經濟竝進論을 주장하나 이는 語不成說이다. 북한의 핵미사일체제는 인민의 경제적 욕구를 해결할 방도가 되지 않고 오히려 유엔의 제재결의 등 외부의 압박 때문에 체제유지도 힘들어지고 民生苦는 가중될 것이다.

바야흐로 동북아시아 국제정치는 한국통일문제해결의 새로운 출구를 열어가고 있다. 우선은 假定이지만 한국주도로 통일이 이루어지면 중국과 주변 국가들이 바라는 한반도의 비핵화, 개방화는 분명히 실현되며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이 확보될 것이다. 아울러 한중일 3국간에도 북미대륙의 NAFTA나 EU와 경쟁할 수 있는 동북아시아 공동체형성을 기대할 수 있다. 또 중국이 걱정하는 탈북현상은 일어날 수 없고 중국의 노동력을 오히려 흡수하는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 동시에 일본의 右傾化가 몰고 올 일본 핵무장의 명분도 사라질 것이다.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韓美關係와 韓中關係는 兩者 共히 한국과의 戰略的協力同伴者關係로 변화될 것이다.

현재 한반도 주변대국들은 북한의 비핵개방에 의견이 일치한다. 이것이 중국이 새로 내놓고 있는 6자회담의 배경이다. 여기에 朴槿惠 대통령이 주창하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통한 남북한 관계개선노력이 連繫, 加勢된다면 북한의 비핵개방은 불가피 할 것이다. 당장에 완전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북한의 비핵개방은 남북한 관계를 교류협력관계로 변화시켜 남북한 동포들 간에 분단고통을 줄이는 준(準)통일 시대를 열 것이다. 중국이 북한의 비핵개방에 앞장서줄 것을 바라는 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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