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2013년 4월 9일 오후 2시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4월회 주최, 4.19문화상 시상식에서 이영일 4월회고문이 행한 특강연설문 전문이다.

한국통일문제의 현 단계

이 영 일(한중문화협회 회장)

 

1. 통일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흔히 잘 아는 말이라도 그것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정의(定義)하려면 매우 힘들 때가 많다. 지금 우리가 생각해야 할 통일이라는 용어도 이 점에서는 크게 예외가 아니다. 분단직후의 시기에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거나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는 식으로 통일염원이 표현되었고 북측에서는 “온 겨레가 일일천추 갈망하는 과업이라고 ”통일”을 정의했다. 남북공히 염원으로서의 통일을 말했을 뿐 구체적인 정의는 없었다.

 

그러나 동서냉전이 한국전쟁으로 격화되면서부터 통일은 일방에 의한 타방의 합병 또는 정복을 의미하였고 한반도의 휴전은 이러한 통일달성을 위한 전투를 현지 군사령관들이 잠정적으로 중지키로 합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점에서 한반도는 아직도 전쟁상태가 법률적으로는 종결된 상태가 아니다. 이점에서 한국휴전협정은 국제법이 생긴 이래 가장 장기간 유지되는 휴전협정으로 불린다.

 

그러나 한반도 분단을 가져왔던 국제정세는 많이 변천했다. 강대국들 간의 동서 냉전은 종결되었고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큰 물결이 지구촌을 감싸면서부터 통일을 보는 우리의 시각도 달라졌다. 우선 주변정세와 한반도 내부 상황에서 통일문제를 생각하는 새로운 관점들이 대두했다.

우선 국제정치차원에서 보면 한반도를 분단된 휴전체제로 더 이상 방치해두어서는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에 주변국들이 공감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특히 북한의 핵실험이 3차에 걸쳐 행해지고 한반도의 비핵화라는 이 지역을 향한 주변 국가들의 목적과제가 협상에 의해 해결될 전망이 약화됨에 따라 한반도 문제를 새 차원에서 총체적으로 다루자는 논의가 국제정치의 지평에 떠오르고 있다. 오늘의 한반도를 어떻게 운영 관리하는 것이 이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가져오고 분쟁의 씨앗을 제거할 것인가라는 물음의 해법으로 한국통일문제가 새로운 출구를 얻게 되었다.

 

또 한반도 내부사정에서도 탈북현상과 인권문제가 등장하면서부터 어떤 통일, 즉 어떤 체제하의 통일이 이루어져야 주변정세의 요구와도 어울리면서 탈북을 막고 인권을 보장하여 민족의 분단고통도 줄이고 주변 국가들의 부담도 덜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상황이 대두했다. 이하에서 21세기와 그 특징의 하나가 된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우리나라 통일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2. 한국통일 상황의 점검

 

한국통일문제가 강대국이 포함된 국제정치적 논의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1954년의 제네바 정치회담이었다. 그러나 이 회담은 휴전협정을 국제사회가 추인하는데 그쳤고 그 후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이관시키는 것으로 끝장났다. 그러나 북한의 끈질긴 핵과 탄도 미사일개발시도는 한반도의 현상과 미래를 주제로 주변 강대국들 간의 논의가 재개될 필요성을 야기했다. 특히 중국은 북한에 대한 유엔안보리의 제재 결의를 지지하면서도 한반도의 비핵화, 전쟁방지와 안정을 위한 6자회담(신 6자회담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의 개최를 안보리의 북한 제재결의에 포함시켜 요구하고 있다.

물론 우리가 이러한 회담 제안을 섣불리 받아들일 경우 유엔안보리의 북한제재결의의 효력을 무력화(無力化)시킬 우려도 없지 않지만 비군사적 방법으로 북한의 핵미사일문제를 해결하려면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담보할 새로운 메커니즘의 모색은 불가피하다. 여기서의 중점과제는 동북아 각국의 안보우려를 해소할 평화의 새로운 기틀마련이며 이 과업은 구체적으로는 한반도의 운영주체를 한반도의 비핵화. 개방화를 보장할 체제하의 통일 내지 통일에 준하는 안정된 남북한 관계를 만들어 보자는 논의로 집약될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미국과 중국 간의 전략대화가 중심이 되고 의제 가운데는 한반도의 통일문제가 포함될 수 있다. 왜냐하면 오늘의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한반도의 관리주체를 남북한의 어느 체제로 통합하는 것이 비핵화와 개방을 통한 지역의 안정과 평화에 도움이 될 것인가의 문제로 결론이 집약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한반도 내부 상황에서 보면 남북한의 어느 체제하에서 통일이 이루어져야 한민족의 생활환경이 개선되고 인권이 보장되고 탈북사태를 막을 것인가라는 민족공리(民族功利)적 측면에서 남북한을 평가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특히 중국이 가장 우려하는 탈북사태가 일어나지 않을 한반도 운영주체를 찾는 과제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이상 두 가지의 큰 줄거리를 토대로 그간 남북한이 걸어온 길을 간략히 비교해 보기로 한다.

 

3. 남북한 관계의 전개 회고

1970년은 한반도 역사에서 분단국으로서 남북한이 변화된 내외정세 속에서 경쟁을 새롭게 전개하는 역사의 시발점이 된다. 우선 한국은 1970년 8월 15일의 박정희 대통령이 발표한 평화통일선언을 시발로 해서 국가발전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갔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남북한을 창조와 개발과 건설을 향한 선의의 경쟁에 나설 것을 북한에 촉구하면서 통일수단으로서 무력과 폭력을 사용치 않을 것을 중외에 밝힌 평화통일구상을 발표했다. 이때로부터 40년이 지난 오늘날 한국은 핵무기 비 확산조약에 가입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빨리 경제건설에 성공한 국가의 반열에 올랐다.

반면 1970년 4대군사로선(全體人民의 武裝化, 全軍의 幹部化, 全國土의 要塞化, 軍裝備의 現代化)의 완수를 외치면서 “인민혁명을 통한 남조선 해방”을 선언했던 북한은 오늘날 지구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북한은 한국의 국력우위를 만회할 방도를 상실하자 체제개혁대신에 전체 주민을 굶기면서 핵과 미사일 개발에 총력을 경주, 탄도미사일과 세 차례의 핵실험을 통하여 소위 북한판 강성대국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는 남북한의 어느 측에서건 대량살상무기 보유를 시도할 경우 주변 국가들의 안보우려를 유발, 필연적으로 외세개입을 가져온다. 유엔안보리의 3차 걸친 대북제재결의와 중국주도의 6자회담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개발에서 비롯된 한반도 문제에 대한 외세개입에 다름 아니다. 대량살상무기의 개발은 이 점에서 한반도의 자주적 평화통일에 엄청난 난관을 조성할 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는 최악의 선택이다.

 

독일의 통일과정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큰 교훈은 동독과 서독이 핵무기와 같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도, 제조도 하지 않을 것임을 주변국들에게 다짐하고 핵확산 금지조약에 양독(兩獨)이 가입함으로써 주변국들의 안보 우려를 불식함으로써 통일에 대한 국제적 합의를 유도했다는 사실이다. 독일은 지금 핵무기 없이도 유럽에서 가장 잘사는 국가 아닌가.

 

4.급변하는 주변정세

 

북한의 제3차 핵실험은 한반도의 주변정세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북한에 대해 4회(결의 1718, 1874, 2087, 2094호)에 걸쳐 제재결의안을 상임이사국 전원 일치로 가결시켰다. 이 결의는 처음에는 권고안이었으나 3차 결의부터는 회원국들에게 구속력을 갖는 결의로 제제의 수준이 높아졌다. 그러나 이 결의보다 더 중요한 정세변화는 중국의 대북태도에 변화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제3차 핵 실험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은 한반도 비핵화를 지지한다고 하면서도 북핵문제의 본질을 미국과 북한간의 양자문제로 간주하고 중국은 제3자 입장에서 미 북한관계를 조정하는 위치를 고수했다. 그러나 북한이 핵무기화의 바로 직전단계인 제3차 핵 실험에 이르자 중국도 북핵문제가 더 이상 미 북한간의 문제만이 아닌 중국자신의 문제임을 각성하게 되었다. 최근 덩위원(鄧聿文)이라는 중국공산당 당학교의 한 간부가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에 올린 글(2013년 2월 28일 9면)은 오늘의 중국입장을 잘 간추리고 있다.

 

덩위원은 이 글에서 북한이 일단 핵무장을 끝낸다면 김정은 정권은 중국을 상대로도 핵 공갈을 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북한은 냉전기에는 중국에 유용했지만 이제 북한을 지정학적 완충지대로 보는 것은 시대에 뒤진(outdated)견해라면서 중국은 이제 북한을 포기해야 한다고 했다. 최근 외신에 의하면 덩위원은 이 글 발표 후 직위해제를 당했다고 하지만 이러한 내용은 이미 내부토론을 거친 후 발표되었음을 상기할 때 중국의 대북정책은 바야흐로 변화의 시발점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최근 북한이 휴전협정을 일방적으로 백지화한다고 선언한 것은 휴전협정의 서명당사자인 중국에 대한 도발임과 동시에 강한 불신을 표현한 것이다.

 

5. 중국의 접근방식

 

이와 동시에 중국의 인민일보가 금년 1월 24일자보도에서 표본겸치(標本兼治)론을 들고 나온 대목도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 한다. 즉 여기서 표(標)라는 것은 안보리 결의에 맞추어 제제를 통한 북한의 비핵화를 촉구하고 더 이상 국면을 악화시키는 행동을 취하지 않게 하자는 것이고, 또 본(本)이라는 것은 동북아 안보기제(Security Mechanism)를 새롭게 정립, 휴전체제의 불안정성을 극복하고 안보에 대한 상호신뢰를 강화해 나가자는 것을 말한다. 인민일보는 2013년 2월 12일자에서 한반도 안보정세의 악화를 저지하기 위해서 반드시 표본겸치(標本兼治)의 방식을 채택, 협상을 통하여 전면적인 안보시스템을 마련함으로써 한반도 비핵화를 실현하고 관련 국가들과의 관계정상화를 실현하자고 주장한다.

앞으로 중국의 선택은 무엇일까. 중국은 미국과의 논의를 통해 비핵화가 되고 개방된 한반도의 미래를 모색할 것이다. 특히 북한이 개혁개방을 선택하지 않고는 경제개발을 이룩할 수 없으며 정권의 주체가 개혁개방노선을 걷는 방향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한반도 비핵화는 불가능하고 북한의 비핵화를 저지하지 않으면 핵 도미노, 군비경쟁, 전운(戰雲)에 쌓이는 동북아시아 지역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통일의 기회이기도 하며 새로운 긴장의 시작이기도 하다.

최근 한국을 방문하는 중국의 관계, 당, 학계지도자들은 하나같이 한반도의 비핵화(그들은 無核化라고 함)와 한반도의 안정이 중국의 국익과 직결됨을 강조한다. 이 국익을 실현할 방도가 무엇인가. 북한은 지정학적으로 중국에 중요한 지역이지만 핵과 미사일에 집착하는 김정은 세습정권보다는 비핵개방을 공약하는 새로운 북한정권의 등장을 중국은 더 선호할 것이다.(Regime Change)

 

6. 21세기 시대의 큰 흐름

 

역사의 흐름에서 보면 북한이 개혁개방을 성취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러나 봄꽃이 꼭 섭씨 15도(Critical Mass臨界質量)가 되어서 피듯이 평양의 개혁개방도 온도가 현재보다 더 올라가야 한다. 지금 평양의 온도는 몇 도일까. 현재의 온도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세계에서 내노라고 하는 국제정치전문가들도 소련의 붕괴나 중동에서 시작된 재스민혁명, 독일의 통일을 예측 못했다. 그러나 예측을 못한다고 해서 반드시 와야 할 사태가 비켜가지는 않는다.

북한 땅에서는 주민들이 비핵개방운동을 펼칠 여지가 현재로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현시점에서 북한주민이 체제에 저항할 유일한 수단은 탈북뿐이다. 탈북행렬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평양의 온도는 이미 10도를 넘어선지 오래인 것 같다. 배고픔을 틈타 외부세계로부터 유입되는 지식과 정보가 북한주민들의 의식을 변화시키고 있다. 사상강국(思想强國)이라는 북한의 목표는 이미 허물어졌고 경제 강국의 꿈도 사라진지 오래다.

그들은 지금 핵미사일 체제만 갖추면 그것이 곧 강성대국이라고 주장하면서 핵무장을 통해 외부로부터의 침략위협이 사라지면 경제건설에 박차를 가하겠다는 논리를 당 학습을 통해 전파하고 있다. 그러나 핵미사일은 재조하는 힘에 못지않게 유지하는 비용이 과다하기 때문에 북한은 결국 인민의 경제적 욕구를 해결할 방도가 없고 더욱이 유엔안보리의 제재결의 등 외부의 압박으로 핵미사일체제의 유지는 갈수록 힘들어질 것이다.

 

현시점에서 강대국들이 제시할 한반도 문제해결방안은 명분상으로는 한반도정세변화에 이해관계를 갖는 주변 국가들의 안보우려를 해결할 동북아시아 안보기제(安保機制)를 마련하고 이 틀 안에서 한반도의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변화시키는 방도를 강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는 한반도의 비핵화가 이루어지지 않고는 동북아시아의 안보기제가 강구될 수 없기 때문에 비핵화와 안보기제를 동시에 추구하는 표본겸치(標本兼治)가 필요한 것이다.

 

7. 결론과 전망

 

현시점에서 주변대국들은 한반도의 비핵화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되고 있다. 동시에 북한을 개혁개방을 통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자기 책임을 다하도록 하자는 데도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특히 중국은 북한으로부터 몰려오는 탈북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부담을 줄이기를 바라고 있다. 이 문제의 해법은 중국이 개혁개방을 외면하면서 핵과 미사일 개발에 집착하는 김정은 세습정권을 북한체제유지의 유일한 대안으로 보는 사고를 버리는데서 찾아야 한다.

우선 한국주도로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비핵화, 개방화는 자동으로 이루어지며 탈북현상은 사라질 뿐만 아니라 중국의 잉여 노동력을 오히려 흡수하게 될 것이다. 또한 국제관계에 있어서도 한미관계와 한중관계는 양자 공히 전략적 협력 동반자관계로 균형을 취하게 될 것이다. 한국주도로 통일이 성취되지 않고 북한에 비핵개방정권만 성립되어도 남북한 간의 교류와 협력은 가속화되고 제2, 제3의 개성공단이 만들어져 경제통합이 촉진됨으로 해서 한반도는 준통일상태(準統一狀態)에 진입하게 될 것이다. 완전통일은 자주적으로 여유 있게 추진해 나갈 것이다.

북한 땅에 비핵개방정권을 세우는 일이 현 시기에 있어서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의 지름길임을 남북한 동포들과 주변국들이 진지하게 고민하고 검토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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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2012년 9월 24일 동아일보에 기고한 이영일 칼럼입니다

[기고/이영일]日의 아시아 회귀, 과거 청산 선행돼야

기사입력 2012-09-24 03:00:00 기사수정 2012-09-24 03:00:00


 

이영일 한중문화협회장

중국과 일본이 센카쿠(尖閣)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 영유권을 둘러싼 외교적 갈등을 겪고 있다. 이 사태가 중국인들의 해묵은 반일정서에 불을 붙여 중국 내 반일시위가 양국 수교 이래 최고조에 달했다. 중국 당국도 시위대가 이성적 항의를 할 경우 막을 도리가 없다며 묵인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중국에서 진행되는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대일 규탄 운동은 우리에게 결코 불구경거리가 아니다.

전체 5개 섬과 3개 도초(島礁·간만의 차에 따라 암초가 됐다 섬이 됐다 하는 바위)로 이뤄진 댜오위다오를 두고 일본에서는 1884년 오키나와 주민이 처음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중국에서 댜오위다오를 중국 영토로 주장하는 중요한 근거 중 하나는 1865년 작성된 중국 지도에 댜오위다오가 푸젠(福建) 성에 속한 섬으로 표시돼 있다는 것이다. 일본은 청일전쟁 중에 댜오위다오를 자국 영토로 편입시켰다. 1951년 일본이 연합국과 맺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미국 지배를 받기도 했지만, 1971년 관할권이 일본에 넘어가면서 지금까지 일본이 실효지배하고 있다.

독도는 어떤가.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우연히 동해상 독도를 발견하고 이 섬을 일방적으로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뒤 1910년 조선을 일본에 합병시켰다. 이어 만주사변, 중일전쟁을 일으켰다가 마침내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하고 몰락했다.

나는 일본이 댜오위다오를 자국 영토로 주장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메이지유신을 통해 아시아의 강자로 등장한 일본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裕吉)가 말한 ‘탈아입구(脫亞入歐)’를 개혁의 명분으로 삼았다. 아시아 국가의 테두리를 벗어나 유럽 국가와 같은 반열에 서서 이웃 국가들을 침략함으로써 자국의 영역을 키우는 제국주의의 길을 걷겠다는 것이었다. 1924년 11월 일본을 방문한 쑨원(孫文)은 일본에 “공리강권(功利强權)을 추구하는 서양 패권의 응견(鷹犬)이 될 것인가, 인의도덕을 중시하는 동양 왕도의 간성이 될 것인가”를 물었다. 결국 일본은 아시아 침략을 추구하다가 패망했다.

그 뒤로 전개된 역사도 결코 일본의 망상을 용납하지 않았다. 아시아는 바야흐로 세계사의 중심이 됐다. 미국도 아시아 중시 정책을 공식화했고 일본도 결국 탈아입구의 미망을 버리고 아시아 회귀를 지향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러나 일본의 아시아 회귀의 대전제는 잘못된 과거를 확실히 반성하고 청산하는 것이다. 독도를 자기 영토라고 억지를 부리고 댜오위다오를 국유화하겠다고 말하기 전에 일본 제국주의의 과거 청산이 선행돼야 할 것이다.

일본의 잘못된 태도에는 미국에도 일말의 책임이 있다. 태평양전쟁의 전범은 비교적 엄히 다스리면서도 아시아 침략의 원흉들에 대해서는 덜 엄격했던 점이다. 그 결과 전후 일본의 정치는 전범과 그 후예들이 좌지우지하면서 과거 청산이 독일처럼 철저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바로 여기에 오늘날 동북아시아 정세 혼란의 원인이 있다고 본다.

이제 한중 양국은 독도나 댜오위다오 문제를 자국만의 문제로 보는 좁은 시각을 넘어서서 아시아적 차원에서 일본의 잘못된 과거 청산을 요구하는 공동 협력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일본이 철저한 과거 청산 없이 아시아로의 순조로운 회귀가 불가능함을 확실히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

이영일 한중문화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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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은 한중문화협회가 1942년 10월11일 당시 중국의 임시수도 충칭(重慶)에서 창립된 지 어언 70주년을 맞습니다. 이 뜻 깊은 역사를 기리기 위해 저희 협회는 두 개의 일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중국 푸단(復旦)대학 石源華 교수가 저술한 한중문화협회연구(中韓文化協會硏究)를 한국어로 번역, 출간(500페이지)하고자 합니다.다른 하나는 한중문화협회창립의 의의와 앞으로의 과제를 모색하는 대규모 국제학술회의를 개최, 한중간의 갈등을 줄이고 협력을 확대하는 방안을 도출하고자 합니다.

 

일상적으로는 잘 거론되지않는 사실(史實)이지만 조선(朝鮮)의 망국(亡國)은 일본이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 때문이 아닙니다. 일본이 1910년 군대로 조선의 궁성을 포위한 가운데 이또히로부미가 조선왕을 강권으로 위협, 일본에 합병하는 조약을 강제체결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따라서 우리나라는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한다고 해서 자동(自動)으로 독립될 수 없는 법적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다행히 카이로 선언, 포츠담선언을 통한 연합국들의 지지로 독립을 달성할 수 있었지만 이렇게 되는 데는 3.1운동 이래 부단히 전개된 우리 민족의 끈질긴 항일독립투쟁의 결과였습니다. 동시에 1942년 한중문화협회 창립을 계기로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연합국 수뇌들에게 일깨워준 중국의 외교적 협력-특히 카이로 선언발표-에도 힘입은 바 큽니다.

 

당시 중국은 정식으로 수교하고 있는미국과는 중미문화협회(中美文化協會), 소련과는 중소문화협회를 창립하여 민간들 간의 우호협력을 도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국가도 정부도 없는 한국임시정부를 상대로 중한문화협회 창립을 지지한 것은 한국의 해방과 독립을 정당한 것으로 믿고 이를 지원하겠다는 강력한 의사표시였습니다.

 

중국이 연합국들의 의견불일치로 한국임시정부에 대한 정부승인은 유보했지만 정부승인에 거의 준하는 기구로서 중한문화협회를 창립한 것은 한국의 독립운동과정에서 중국이 보여준 값비싼 응원으로서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 갖는 의의가 실로 지대하였습니다.

 

중국은 1942년 韓中文化協會의 창립을 기반으로 해서 1943년 카이로에서 열린 연합국 수뇌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에 관한 국제적 합의를 유도하고 이것이 기초가 되어 1945년 독일의 포츠담에서 열린 일본항복조건에 관한 연합국선언에 한국독립조항을 포함시키는데 필요한 외교적 지원을 제공해주었습니다.

 

한중문화협회가 창립된 지 3년 후에 일본은 패망했습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던 大韓民國臨時政府 指導者들이 還國하고 大韓民國政府가 수립되었습니다. 임시정부지도자들 가운데서 趙素昻선생(臨時政府 當時 外交部長)은 한중문화협회의 창립으로 표현된 1942년의 한중협력정신이 광복된 祖國 大韓民國(當時는 大韓民國臨時政府)에서도 계속 승계, 발전되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귀국후 한국의 수도 서울에 韓中文化協會간판을 내걸었습니다.이후 조소앙 선생이 6.25전쟁시 납북되어 1958년 북한땅에 묻히고 생존한 동지들이 1965년 한중문화협회를 재건하고 정부의 외교통상부에 등록함으로써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제 한중문화협회는 어언 창립 70돌을 맞습니다. 1949년 신 중국이 탄생한 이후 臺灣으로 주소를 옮긴 中韓文化協會는 이제 명칭을 中韓經濟文化基金會로 바꾸었습니다. 서울의 한중문화협회가 韓中修交 후 관계를 단절했기 때문입니다. 한중문화협회는 中國代表權을 가진 중국과의 우호협력단체이며 중국의 일부가 된 대만을 상대로 하는 민간우호단체의 길을 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한국에는 한중수교 후 韓中友好協會가 조직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한중문화협회가 옛 명칭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中國國際友好連絡會 등 민간외교단체와 제휴, 활동을 지속하는 이유는 한중문화협회창립이 한중관계의 역사에서 갖는 의의가 크고 이 정신의 토대위에서 한중 양국 인민들 간의 우호협력이 계속 증진되어야 한다는 역사적 당위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현재 한중문화협회는 7만여 명의 중국유학생들이 모두 한국에서 성공하고 돌아가도록 필요한 지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한국생활에서 필요한 법률지식 자료, 한중문화협회 附設 人權委員會를 통한 無料辯論 등 법률구조활동, 한중관계의 역사와 한반도의 현실에 대한 교양강좌, 한국문화강좌 등을 실시하고 전국 15개 支會를 통해서도 한국유학생활에 따르는 苦情을 청취, 이를 해결하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또 60여만 명의 中國國籍노동자들의 권익옹호를 위해서도 각별한 관심과 지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한국 독립 운동가들이 중국대륙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시절에 중국인민들에게 진 우정의 빚(友情債)에 보답하기 위해서입니다. 저희 협회의 70주년 기념사업들은 이상의 뜻과 목표를 이루는데 기여하자는 것입니다.

 

한중문화협회는 앞으로도 사업의 대상과 범위를 넓혀가면서 정치외교차원의 과제보다는 사회 문화 분야의 교류협력에 역점을 두면서 한중양국이 하늘이 맺어준 隣邦으로서 서로 이해하고 서로 돕고 서로 우정을 나누는 동아시아 공동체를 이뤄나가는데 일익을 담당할 것을 기약합니다.

2012년 9월

사단법인 한중문화협회 회장 이 영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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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2012년 10월 14일 서울 경동교회 장년회가 주최한 특강(13시 30분부터 16시까지 경동교회 如海기념관)에서 행한 강연내용을 그대로 싣는다 .이영일 

독일통일이야기

 

1. 서언

 

20세기가 끝나는 마지막 10년 동안에 세계는 두 개의 큰 혁명적 사건을 목도한다. 하나는 소련제국의 해체이며 다른 하나는 독일의 재통일이다. 경기변동에 따라 기업의 영역에 변화가 생기듯 세계의 정치지도도 늘 변화하여 왔다. 그러나 소련제국의 해체만큼 지도를 크게 바꾼 사건은 드물 것이다. 또 중부유럽대륙에 새로운 강국을 탄생시키는 독일의 통일도 유럽의 정치지도를 크게 변경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 두 개의 큰 혁명적 사건이 어느 누구에 의해서 예측된 것도 아니었고 당사자들도 이런 변화를 능동적으로 기획하거나 추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큰 변화에는 그것을 암시하는 여러 가지 징후가 있었지만 이런 징후들이 상승작용을 하여 커다란 변화를 실제로 몰고 올 상황이나 시점을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미국의 저명한 소련문제 전문가였던 George Kennan도 “소련 같은 거대한 제국이 이렇게 돌연히 붕괴한다는 것은 역사에 그 유례가 없었다.“고 논평했다. 독일 통일을 주도한 Helmut Kohl서독 수상 자신도 독일이 이렇게 쉽게 통일될 줄은 몰랐다고 술회했다.

 

독일의 통일에 시각을 맞춰보면 독일통일만큼 짧은 시일 안에 “철과 피”를 앞세우지 않고 평화적 대화와 인민의 자율로서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성취한 일은 세계외교사의 어느 페이지를 뒤져도 그런 선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극적으로 통일의 계기가 왔고 이 기회를 통일로 연결시키는 정부의 외교와 통일을 향한 거족적인 협력이 이루어낸 엄청난 성과였다.

긴 안목에서 보면 독일 통일은 준비된 통일이라고 보아야 할 측면이 많지만 실제로 성취된 통일은 준비된 통일이라고 볼 수 없다. 예측도, 기획도 없이 통일의 기회를 맞았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통일로 연결시켰다는데 독일통일은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2. 통일준비상황 평가

가. 兩獨관계의 긴장완화와 교류협력의 발전

 

서독은 1949년 정권수립 이후 아데나워 수상 주도하에 냉전의 서방진영인 나토에 가입한 후 서독이 동독보다 더 잘살게 되어야 동독을 흡수하는 통일이 가능하다는 이른바 磁力理論(Magnetic Power)을 제창하고 사회적 시장경제정책을 채택, 패전 후의 독일경제재건에 주력했다. 에어하르트 경제상이 주도하는 독일경제부흥과 재건은 미국과 서방측의 원조에 힘입은 바 크지만 독일인들의 단결과 창의를 통해 라인( Rhein)강의 기적을 이루어냈다.

 

아데나워 정부의 磁力정치의 성과로 300만 명의 동독인들이 서독으로 빠져 나오자 소련과 동독 당국은 1960년 베를린 장벽을 세우고 주민이동을 엄중히 단속하고 위반자를 처형하기에 이르렀다. 장벽설치이후 兩獨 관계는 꽉 막혔다.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서독은 전후 경제부흥에 성공한 업적을 딛고 서서 새로 집권한 사회민주당의 Willy Brandt 수상의 주도로 기독교 민주당과의 大聯政을 수립, 정국안정을 기한 후 이른바 동방정책(Ost Politik)을 실시한다. 이 정책의 첫 열매가 두 차례의 兩獨 정상회담이다. 동독의 빌리 슈토프와 서독의 빌리 브란트 수상간의 2회에 걸친 정상회담이후 兩獨은 오랜 협상과 대화를 진행하면서 이산가족 방문, 문물교환, 라디오 시청, 심지어 TV시청까지를 허용하는 긴장완화의 시대가 열린다. 특히 경제교류가 활발해짐으로 해서 兩獨 간에는 경제통합의 전망이 트일 정도로 협력이 심화되어 갔다.

 

나. 분단의 원인제거를 위한 정치교육전개

 

제2차 대전이 끝난 후 지구상에는 원래 하나였던 국가가 둘로 갈라지는 국가분단현상이 여러 지역에서 발생했다. 분단이 발생한 상황을 을 표준으로 하여 학자들은 分斷국가(Divided Nation)를 둘로 구분한다. 중국이나 대만처럼 내부혁명의 결과로 갈라진 국가들은 內爭형 분단국가라 하고 한국이나 동서독처럼 분단이 외부의 힘에 의해 강요되었을 경우 이를 국제형 분단국가라고 한다. 따라서 내쟁형 분단국가들은 분단문제의 해결책임이 당사자에게 귀착된다. 즉 통일문제가 자결적 처리로 이루어지는 국가들이다. 인도제국을 구성했던 인도와 파키스탄이 갈린 것은 원래 하나 아니었던 것을 영국이 인도아대륙을 식민통치의 필요상 강제로 묶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외적 강제력으로서의 영국의 힘이 약화되면서 저절로 갈라진다. 이런 곳에는 통일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정치학자들은 이런 나라를 분단국가와 구별하여 分裂국가(Partitioned Country)라고 칭한다.

 

국제형 분단국가에 속하는 독일이나 한반도는 강대국들이 자기들의 안보이익에 대한 고려에서 원래 하나였던 국가를 갈라놓았다. 독일은 한국과 같은 분단국가이지만 분단의 원인이 다르다. 중부유럽에서 독일은 통일될 때마다 국력이 너무 강해서 이웃을 침략하거나 팽창하는 정책을 추구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유럽대륙에서 백인이 백인을 죽이는 전쟁을 두 차례나 일으켰다. 독일에 의한 새로운 대전을 예방하기 위해 연합국들은 의도적으로 독일을 분할 점령하였고 동서냉전의 와중에서 독일은 동서독으로 분단되었고 분단이 고착되기에 이른다.

이 반면 한국은 국력이 너무 약해서 주변강대국의 어느 일방의 영향권 속으로 끌려들어갈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만일 한반도가 주변강대국의 어느 일방의 영향권속으로 끌려 들어가면 지정학적 위치상 한반도 주변의 세력균형질서가 파괴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할 목적으로 국토를 분단해버린 것이다.

 

독일은 스스로 분단의 원인을 잘 알기 때문에 전쟁의 상처, 나치독일이 남긴 큰 상처, 동서냉전이 몰고 온 상처라는 三重의 상처를 치유하면서 다시금 이웃나라를 침략하는 팽창주의를 포기하고 이웃과 화목하게 지낼 국민들의 심성을 기르는 정치교육에 국가의 영향력을 집중했다. 극우, 극좌의 이데올로기가 독일민족과 세계, 그리고 이웃들에게 미친 범죄적 과거를 철저히 청산하고 나치즘과 같은 반 유럽 사상적 정치세력이 등장할 소지를 교육을 통해 엄격히 차단하는 작업에 국력을 쏟았다. 나치독일이 빼앗은 폴란드 영토에 대한 미련이나 야욕을 철저히 버리고 유태인 학살에 대한 과오를 철저히 시인하고 회개하고 반성하면서 유태인들에게, 폴란드 인들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비는 노력을 부단히 전개했다. 헌법상으로도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질서를 뒤엎을 세력을 사후에 다스리기보다는 미리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방어적 민주주의를 실천하였다.

독일연방정치교육본부(Politische Bildung)가 전개한 국민교육운동은 나치세력의 재등장을 막는 국민교육에서 성과를 얻었을 뿐 아니라 외교정책이 이를 뒷받침함으로 인해서 주변국가들로 부터 신뢰를 회복하고 독일통일에 대한 거부의식을 약화시켜 나갔다.

특히 유럽공동체 형성에 앞장서면서 유럽통합의 일환으로 동서독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적극 모색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통일이 주변국들의 안보를 위협할 것이라는 우려를 불식시키는데 주력했다. 독일이 오늘날 중부유럽의 最富國이면서도 핵개발을 포함한 전략무기개발에 나서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통일여건조성정책의 실천적 표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3. 통일의 전개

 

가.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통일역사의 시작

 

직접적 원인은 1989년 9월 초순 서독의 청년들이 헝가리를 거쳐 오스트리아를 경유하여 서독으로 탈주한 사건이 발생했다. 동독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헝가리가 1989년 여름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개방한 행사를 했는데 이 행사를 본 동독청년들이 새로 뚫린 통로를 넘어 서독으로 탈주하는 광경이 TV에 방영되자 한 때 주춤했던 탈 동독 붐이 다시 조성되었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동독내부에서도 체제개혁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개신교들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결국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은 붕괴되었고 이 바탕위에서 1989년 12월 양독 수상간의 통일을 위한 정상회담이 열리면서 통일을 향한 협상의 역사가 펼쳐진다. 다음해 2월 1일 동독은 국민투표에서 서독과의 전면통일을 지지하는 결정을 내렸다.

 

나. 동서독간의 통일준비를 위한 분야별 협상 실시

 

1990년 5월 18일 경제금융 및 사회통합에 관한 조약이 양정부의 각 기관 별 협상을 통해 체결되었다. 양측 통합은 흡수통일이지만 흡수의 폭과 대상이 전면적이었다. 정치제도, 사법제도, 행정제도뿐만 아니라 교육제도, 토지제도에 이르기까지 전면적 흡수로 일원화하는 합의가 도출되었다. 이 조약은 1990년 7월 1일 발효되면서 양독 간의 화폐, 경제 및 사회통합이 선언되었다.

 

다. 통일선언과 연방의회구성으로 통일완성

 

경제통합과 사회통합에 대한 양독 간의 합의가 마무리된 후 서독의 콜 총리와 드메지어 동독총리간의 최종협상을 거친 후 1990년 10월 3일 동서독 통일국가가 선언되고 12월 2일 연방의회구성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고 12월 20일 독일연방공화국 의회가 구성됨으로써 통일작업이 종료되었다.

 

라. 분단 41년만의 재통일달성

 

독일은 분단 41년 만에 통일을 이룩했는데 베를린 장벽붕괴를 가져온 동독주민들의 시위로부터 만 1년 안에 체제와 이념의 차이를 넘어서는 통일, 유럽의 정치지도를 바꾸는 통일을 이룩한 것이다. 1871년의 독일통일이 비스마크의 “철과 피”를 앞세운 통일이었다면 1990년 독일의 재통일은 철과 피를 흘리지 않고 대화와 인민들의 자주적 결단에 의해 통일을 이룩한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독일 지도층이 평소부터 독일통일을 촉진할 내적요소로서의 서독의 경제발전과 兩獨간의 교류의 심화를 꾸준히 추진함과 동시에 통일을 가로막을 외적 요소로서 주변대국들이 독일통일을 긍정하도록 내치외교의 양면에서 축적해온 지혜로운 노력의 결과이다. 특히 소련을 비롯한 동부유럽공산주의 국가들이 흔들리는 시기에 찾아온 통일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민하게 상황변화에 대처한 서독지도층의 리더십에 우리는 방점을 찍어야 한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1986년 2월에 개최된 제27차 소련 공산당대회에서 고르바초프가 공산체제하에서 조성된 경제적 낙후와 정치적 침체를 공식인정하면서 개혁개방을 권고한 분위기를 십분 활용하고 동 유럽주둔 소련군 철수비용 130억 달러를 서독이 흔쾌히 지원한 것도 평가할만한 통일노력이었다.

 

둘째로 정치통일에 선행하여 경제 통일을 먼저 단행함으로써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주변 국가들이 정치통일을 반대할 수없는 상황을 조성한 것도 평소부터 깊이 준비해온 노력의 산물로 보여진다.

 

4. 독일통일의 세 가지 국면

 

독일통일은 정치적 통일, 경제적 통일, 사회문화적 통일이라는 세 측면에서 현황을 평가할 수 있다.

 

가. 정치적 통일

 

우선 정치적 통일은 지구상의 통일역사에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빠르게 이루어졌다.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욕심과 혹시 있을지 모르는 주변국가 국민들의 통일 반대여론의 형성 가능성을 차단하겠다는 고려까지를 포함하여 兩獨관리들이 각 분야별로 나누어서 2백50쪽에 달하는 양독 통일조약을 신속히 마무리함으로써 통일촉진이 가속화되었다.

 

독일은 특히 우리나라와는 달리 중세시대 이래 흥정의 윤리(Verantwortungs Ethik)가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화와 협상을 통한 이익의 교환이 용이한 점도 능률적인 협상을 가능케 하였다. (우리나라에는 흥정의 윤리보다는 지조의 윤리(Gwsinnungs Ethik)가 강하다) 체제와 이념을 달리하고 41년간 갈라져 살아온 국가체제의 통일이 1년 정도의 시간 안에 마무리된 것은 기적에 속한다.

 

큰 상황에서 보면 동서냉전에서 시작된 분단 상태가 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극복된 것이다. 1989년 Malta에서 열린 미소정상회담에서 냉전은 미국 측의 승리로 마감되었고 소련 등 동구 국가들은 체제개혁의 도전 앞에 직면하였다. 이 기회를 통일로 연결시킨 점에서 독일인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나. 경제적 통일

 

양독의 경제적 통일은 1970년대부터 꾸준히 신장되어온 동서독간의 경제교류가 기반이 되고 1989년 5월에 체결된 양독 간의 금융, 경제, 사회협약이 체결되고 7월 1일 이 조약이 발효됨으로써 정치적 통일보다 앞서 경제통일이 이루어졌다. 유럽공동체는 사회주의 경제체제로서 舊Comecon 회원국이던 동독이 유럽공동체회원국 중 가장 규모가 큰 서독에 부드럽게 접목되자 여기에 대응할 방도를 모색하는 [공동체와 독일통일]이라는 4만 쪽에 달하는 방대한 보고서를 만들었다. 결국 독일은 유럽통합의 한 구성부분으로 동독을 흡수한 것이 주변국들로 하여금 독일의 정치적 통일을 수용케 하는 결과를 유도한 것이었다.

 

서독의 사회적 시장경제시스템은 의외로 빨리 동독에 椄木, 정착되었고 양독간의 생활수준 격차도 기대이상의 빠른 속도로 해소되었다. 1999년의 경우 구동독지역의 평균 순 가계소득은 구서독지역의 80%를 넘어섰고 1인당 가처분 소득도 서독의 82%에 이르렀다. 구 동독지역의 낮은 집세와 물가를 감안한다면 구동독의 소득수준은 서독지역의 90%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었다고 한다.

 

동서독간의 소득수준이 유사해짐에 따라 소비패턴도 비슷해져서 자동차 전화 비디오 등 내구소비재보유율이 兩獨간에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정말로 단기간 내에 정치경제면에서는 양독은 완전히 통일국가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다. 사회경제적 통일

 

현시점에서 독일통일논의와 관련하여 많은 분들이 제기하는 문제점은 통일이 정치경제적 측면에서는 가장 신속히 성과 있게 이루어졌지만 이른바 독일의 내적 통일 즉 사회문화적 분야에서의 통일은 극히 부진하다는 것이다.

 

1999년 노벨문학상을 탄 Guenter Grass나 이른바 진보진영에 속한다는 학자들은 독일의 내적 통일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혹평한다. 연방정부도 양독간의 경제적 격차가 해소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內的統一”의 과제는 그대로 남아있다고 통독보고서에서 지적하고 있다. 통일에서 중요한 것은 정치, 행정, 제도, 경제생활상의 통일처럼 밖에 보이는 측면보다는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적, 심리적, 가치관 에서 하나로 융합되는 것이라고 이들은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독일통일에는 아직도 많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통일이 결국 인간의 융합을 대전제로 한다면 정치적, 경제적 통일에 못지않게 사회문화적 통일이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현시점에서는 동독출신에서 총리와 대통령이 나오고 양독간에 정치적 사회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사회문화부문의 통일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지적은 지나친 현실왜곡처럼 보인다. 그러나 분단직후의 상황이 환희에 넘친 일순간을 제외한다면 동독주민들이 겪은 좌절의 시간도 적지 않았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하에서 문제점을 살펴본다.

 

① Der Spiegel지는 1995년 동독주민들의 67%가 “장벽은 사라졌으나 머리속의 장벽은 더 커지고 있다”는 응답을 보도했다. 이러한 문화적, 심리적 분열현상에서 이른바 오스탈지아 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오스탈지아는 동독을 말하는 Ost와 Nostalgia의 합성어로서 동독시절이 그립다는 것이다.

 

② 당초 오스탈지아 현상은 이질적인 사회통합 후에 거쳐야할 과도기적 현상으로 간주되었고 앞으로 격차가 해소되고 양독 국민들 간의 커뮤니케이션이 확대되면 사라질 것으로 보였지만 통독이 10년을 지나는 시기에도 오히려 갈등은 더 확대추세를 보였다. 한 예로 동독공산당, 즉 사회주의통일당(SED)의 후신인 민주사회당(PDS)에 대한 동독주민들의 지지가 초기에는 서독에서는 1%미만이었고 동독에서만 10%를 상회하는 지지를 얻다가 1998년 총선에서는 하원에 의석을 낼 5%를 넘었을 뿐 아니라 동독지역에서는 22%의 지지를 얻었다.

 

③사회적 통합을 이처럼 어렵게 만드는 데는 두 가지 요소가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첫째는 동독재건을 위한 경제적 부담이 늘어나면서 서독주민들은 동독주민들이 “도움을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배은망덕한 이웃”이라고 느끼게 되었고 동독주민들은 사독인을 “돈 좀 있다고 잘난 척하고 ‘돈이면 다’라는 자본주의의 천박한 면만 배운 사람들”이라고 비난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통일이 10년을 지난 시점에서 보면 게으른 동독놈들(Ossis), 역겨운 서독놈들(Wessis)로 갈리는 분열현상이 야기되었고 이것으로 미루어 사회적 통일이 요원하다는 진단이 나오는 것 같다.

④ 다른 하나는 서독의 통일 후의 선전방향이 동독인들의 저항감을 불러일으켰다. 즉 동독 40년의 역사가 무가치한 역사, 실패한 역사라고 끝없이 단죄하는 선전을 계속하는데 대해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동독 역사의 포용 아닌 배척과 비난이 동독인들의 반발을 일으켰다. 오히려 동독인들은 그들의 宣傳員들이 서독 자본주의의 부정적 측면을 비판했던 바로 그 내용이 거짓 아닌 사실임을 실감하게 되면서부터 통일에 대한 회의가 싹트고 이 회의가 內面化되어 갔다는 분석도 있다.

 

⑤ 특히 예술가들이나 학자들은 서독인들이 누리고 있는 자유가 막상 그들 자신의 자유가 되었을 때 그 자유에서 환멸을 느꼈다는 것이다. 즉 그들이 획득한 자유는 실은 시장과 문화산업이라는 또 다른 권력에 종속되는 것이었다.

결국 독일통일은 부드러운 점령에 뒤이은 서독의 내부 식민지화 과정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귄터 그라스도 이점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요컨대 동독인들의 오스탈지아 현상은 인간과 사회와 세계를 바라보는 상이한 관점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통일과업 중에서 가장 어려운 측면을 이룬다고 보여진다.

 

5. 독일의 처방과 결론

 

독일은 지금 통독20년 만에 대통령과 총리 모두 동독출신이다. 요하임 가우크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수상이 모두 동독출신으로 서독 기독교 민주당에 입당하여 총리가 되고 대통령이 되었다. 서독인들이 앝잡아 보았던 Ossis 들이 집권의 상층부를 점유한 것이다.

 

또 독일이 개최한 2006년 월드컵 경기는 양독인을 하나의 독일인으로 묶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를 계기로 하여 독일은 國旗와 國歌, 심지어 한때 나치의 유산으로 금기시했던 철십자훈장까지 제작하면서 통일국가로서의 정체성확립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다. 여기에 두 차례의 세계적 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큰 동요 없이 경제안정을 유지한 것도 사회분야에서의 국민통합을 이루는데 기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병행하여 서독의 연방정치교육본부는 동서독간의 사회통합을 겨냥하면서 동독인들에게는 서독인을, 서독인들에게는 동독인들을 바로 알도록 정치교육을 강화해 나갔다. 특히 2000년 후반부터는 “당신이 독일인입니다”라는 공익광고를 TV를 통해 독일 미디어 연합이 공동으로 실시했다. 2005년 9월26일부터 2006년 1월31일까지 4개월간 방영함으로써 정체성 캠페인을 강화하였다.

 

2007년부터는 이 캠페인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실시, “어린이들을 좋아하는 독일”을 테마로 방송캠페인을 벌였다. 이어 독일인의 긍지를 되찾는 캠페인으로서는 랑엔사이트(Florian Langensdheidt) 박사가 “오늘날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250가지 이유”라는 책을 발간, 범국민적으로 보급, 독일인들의 긍지를 찾는 한편 사회문화적 통일에도 공헌하고 있다.

 

이 책은 통일이후의 사례를 중심으로 소재를 발굴하고 베토벤이나 괴테, 실러 같은 세계적인 예술인들은 소재에서 배제하고 BOSS의 양복이나 주간지 Stern, 인물로는 축구선수 Oliver Kahn, 교황 베네딬토 16세, 디자이너 라거펠트, 통일총리 Helmut Kohl, 자동차 경주왕 Michael Schmacher, BMW. 등을 소재로 삼고 있다.

 

결론으로 말한다면 완벽한 통일은 없겠지만 독일 통일은 左派들이 비관하는 것처럼 결코 실패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물론 독일의 통일과정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준비된 부분과 준비가 덜 된 부분이 섞여 있지만 준비가 부족했다고 해서 통일이 잘못되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뜻밖에 닥쳐온 통일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 기회를 기필코 통일성취로 연결시키는 결과에서 우리는 독일인의 저력을 보아야 한다.

 

통일 후 동독지역개발에 1조 마르크(한화로 약 550조원)이상이 투입되었다. 매년 국내총생산의 4〜5%가량이 투입되었으며 이는 근로자 소득세의 5.5%에 해당하는 통일연대세로 충당되었다. 서독주민들의 부담이 적은 것은 아니었지만 동독의 5개주를 연방으로 매입하고 1600만 명의 인구를 받아들여 인구 8천100만 명의 대국으로 독일의 지위를 격상시킨다고 생각하면 결코 많거나 비싼 부담은 아니다. 통일비용이라기보다는 독일을 세계적인 대국으로 부상시키는 전략적 투자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귄터 그라스나 종교인, 학자들은 항상 현실에 만족하기보다는 현실 속에 숨겨진 문제를 파헤치고 이를 이상적인 방향으로 정향시킬 사명을 가진 분들이다. 독일 통일이 이들을 만족시킬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해도 오늘의 독일 통일은 가장 성공적인 모델이라는 나의 평가는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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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이익이 분단이익보다 훨씬 크다

 

1. 통일된 동독지역을 찾아서

 

지난 7월 12일부터 19일까지 통일된 독일의 동독지역을 다녀왔다. 필자는 서울 경동교회의 Young Old Boy(나이 65세 이상 75세미만의 연령층을 지칭)들이 중심이 된 남성합창단-공식명칭 Noah남성콰이어-의 일원으로 20년 전까지만 해도 동독지역에 속했던 베를린, 라이프치히(Leibzig), 드레스덴(Dresden), 마이쎈(Meissen), 바이마르(Weimar) 지역을 순방하고 베를린의 루드비히(Ludvig) 대성당과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St. Thomas Kirche)에서 합창공연을 마치고 돌아왔다. 필자의 독일 방문은 이번이 세 번째다. 1980년 5월 국토통일원 간부였던 나는 당시 서독의 내독관계성(Ministrium der Inner Deutsch Beziehungen)초청을 받고 한독간의 분단국문제정책협의회의 한국 측 실무수석대표로 본(Bonn 당시 서독수도)에 간 것이 제1차 방독이었고 제2차는 1985년 한독정상회담의 공식수행원으로 독일을 방문했다. 이번에는 비록 기간도 짧고 목적도 달랐지만 내 나름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통독 20년을 넘긴 동독지역을 살펴볼 생각이었다.

 

그간 국내에서는 서독이 잘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동독을 흡수 통일했다가 막대한 통일비용으로 낭패를 겪었다면서 우리는 독일의 교훈을 본받아 통일을 서두르지 말고 장기적 관점에서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 정책당국자들의 시각이었다. 특히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은 통일비용문제를 전면에 내걸고 성급한 통일을 경계해야 한다는 쪽으로 국론을 몰아갔다. 정권의 이러한 태도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경제발전으로 삶이 풍요해진 한국 젊은 세대들은 공리주의적 관점을 내세워 헐벗고 굶주리는 북한을 상대로 실익 없는 통일을 하는 것보다는 분단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통일기피 내지 통일혐오적 사고마저 배태되어온 것도 사실이다.

 

2. 통일비용걱정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통일 20년이 지난 오늘의 독일의 어느 곳을 보아도 통일비용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그러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의 독일은 분단이익보다는 통일이익이 얼마나 큰가를 실감 있게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독일이 세계정치와 유럽대륙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누리는 국격(國格)이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독일은 서독의 11개주가 동독의 5개주를 합함으로써 면적은 357,022㎢로 한국의 3.5배이며 인구도 약 8천100만명이고 GDP도 3조6286억$로 세계4위이다. (2011 IMF 기준) 이제 독일은 유럽의 동부와 서부를 아우르는 대국으로 부상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경제,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이를 잘 극복하면서 유럽의 경제맹주가 되어 있으며 독일연방공화국의 대통령과 수상 또한 모두 동독 출신들이 당선되어 오늘의 독일을 이끌고 있다.

 

동독 지역의 5개주는 비록 공산정권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경제면에서 서독만큼 라인 강의 기적은 이루지 못했지만 그러나 동유럽지역의 어느 국가보다도 잘사는 지역이었다. 동서독이 통일된 후에는 독일 연방정부와 서독의 기업가들이 안정된 투자지역으로 동독지역을 선택, 경제개발을 추진한 결과 동독정권하에서 빛을 보지 못했던 지역발전의 잠재력이 급속히 되살아나면서 경제발전에 속도가 붙어 양 지역 간의 격차도 나날이 줄어들고 있다.

독일은 원래 50여개의 봉건제후국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연방국가로 통일되었기 때문에 16세기 이래 문화 능력 있는 제후들이 세운 성벽과 교회건물, 왕궁식당이나 박물관, 마이쎈의 도자기 공장 등은 비록 전쟁으로 파괴되고 공산체제하에서 방치되어 옛 모습을 많이 상실했지만 통일 후 연방정부와 기업들이 이들 건물을 리노베이션하거나 리모델링함으로 해서 다시 옛 모습을 되찾고 있다. 분단의 상처나 전쟁의 상흔은 이젠 아픔이라기보다는 값진 추억으로 변해가면서 만인의 찬탄을 불러일으키는 관광 상품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3. 투자할수록 늘어나는 관광자원

 

우리 일행은 베를린 도착 다음날 베를린 근교의 포츠담을 거처 뷧템베르그(Wittemberg)를 방문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올렸던 수도원, 그가 개혁의 당위성을 밝힌 95개조의 성명문, 그가 가르쳤던 대학은 하나같이 개신교의 성지(聖地)로 승화되어 개신교도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또 프리드리히의 현자(Friedrich-Weise)가 봄스(Worms)종교제판에서 파문당한 루터를 보호하기 위해 그를 납치해서 숨겨주었던 바르트부르그(Wartburg)성과 루터가 그 성에서 라틴어의 성경을 독일어성경(Die Bibel)으로 번역하고 구텐베르그의 인쇄술발명에 때맞춰 성경의 대중화를 이룬 역사가 낱낱이 기록되고 보존, 전시되어 있었다. 참으로 멋진 성지면서 관광지로 변해 관광버스가 연일 줄을 잇고 있었다. 이들 지역은 마르틴 루터라는 브랜드로 먹고 사는 도시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라이프치히나 드레스덴, 바이마르도 요한 세바스챤 바하(Johann Sebastian Bach),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쉴러(Johann Friedrich von Schiller)를 로고로 한 상품, 기념관(Haus), 식당 등이 모두 성업 중이었다. 특히 라이프치히의 아우어박스 켈러(Auerbachs Keller)식당은 인테리어의 수려함으로도 훌륭했지만 괴테가 젊은 시절 자주 찾은 식당이라는 이유로 더 많은 고객이 몰려든다는 것이다. 우리들도 그들 중의 한 무리일 것이다. 쉴러 뮤지엄, 각종 박물관은 많은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물론 내가 방문한 도시가 과거 중세시대이래 상공업이 발달했던 라이프치히나 작센(Sachsen)왕국의 수도였던 드레스덴처럼 투자전망이 밝은 곳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오늘의 유럽나라들의 도시들에서는 보기 힘든 타워크레인이나 스카이크레인이 이 곳 저곳에 거구(巨軀)를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면 개발과 복원, 리노베이션의 붐이 지속되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세계각지에서 이들 지역으로 모여드는 관광객들이 동독지역의 새로운 수입원이 되고 있었다. 영국 GNP의 30%가 관광수입이라는데 이제 독일의 관광수입도 그 수준을 곧 육박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영국의 셰익스피어에 비견할만한 괴테의 나라, 마르틴 루터의 나라, 바하의 나라이기 때문에 또 드레스덴의 츠빙거 궁이 복원되었고 그 유명한 군주(君主行列)의 자기벽화(瓷器壁畵)가 원형대로 보존, 전시되어 있고 영국의 폭격으로 무너진 여인들 교회(Frauen Kirche)-별명 성모교회-가 다시 복원되어 관광자원에 추가되었다. 이 지역은 분명 괴테가 독일의 베네치아라고 호평한 바대로 관광차원에서 “엘베 강의 기적”을 이룰 것으로 예견되기 때문에 동독지역의 관광수익은 해를 거듭할수록 눈덩이처럼 늘 것 같다.

 

필자는 동독지역에 속했던 지역이 모두 이렇게 발전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도의 자치를 보장받고 있는 동독의 5개 자치주(自治洲)들이 연방정부의 구성체로서 연방정부와의 제휴 속에서 발전경쟁에 나서는 추세라면 동독지역과 서독지역간의 발전격차가 줄어드는 것은 시간문제 같다. 라이프치히나 드레스덴은 이미 서독수준에 도달했다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라이프치히를 여행하면서 가이드가 한 이야기 한토막이 잘 잊혀 지지 않는다. 서독에 광부로 갔던 한 한국인이 간호사로 파독된 여자와 결혼해서 독일의 하노버에 정착, 식당으로 모은 돈을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진 직후 라이프치히로 들어가 허름한 건물을 구입하고 이를 리모델링해서 다시 한국식당을 개업했는데 현재 이 건물의 값은 구입당시보다 수 십 배 높은 가격으로 호가된다는 것이다. 졸지에 떼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서독은 통일을 통해 동독이라는 중부유럽의 5개주를 통째로 구입, 개발의 효과가 독일의 국위선양과 국력신장으로 수렴되는 안전한 투자공간을 확보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 같다. 통일이 독일국가를 크게 발전시키는 산업으로서의 효용을 확실히 입증한 것이다.

 

4. 통일이익이 분단이익보다 훨씬 크다

 

물론 통일직후의 상황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2,200만 명의 동독인들은 통일의 환희는 잠시였고 그들에게는 엄청난 시련의 시간이 닥아 왔을 것이다. 공산당이 직장을 배치해주고 생산성이 높거나 낮거나 모두에게 똑같이 생필품을 공급해주고 똑같이 교육, 의료혜택을 누리게 하고 문화생활을 균점했던 상황은 사라지고 자기 책임 하에 의식주를 포함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직장을 구해야 하고 생산성 경쟁에서 뒤지면 당장에 삶이 어려워지는 도전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허탈과 좌절의 늪에 빠졌을 것이다.

 

서독정부역시 동독주민들의 정치사회화(Political Socialization)과정을 조정, 서독의 헌법질서에 적응하도록 유도해야 하는 세기적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다. 여기에 제2차 세계대전 패배에서 온 전쟁의 상처, 나치독일이 남긴 상처, 분단과 냉전이 몰고 온 상처를 치유하면서 동서독 간의 발전격차를 줄여 가는데 엄청난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재정 부담이 뒤따랐을 것이다.

 

통일직후 동서독 사람들이 서로 간에 상대를 너무 잘 몰랐다고 독백할 정도로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잘 몰랐다는 것이 당시의 솔직한 후일담이었다고 한다. 동독인들은 서독에서의 삶이 얼마나 힘든 삶인지 몰랐다는 것이고 서독인들은 창의력도 없고 근면하지도 않고 생산성에 신경조차 쓰지 않는 저런 독일인들이 과연 있을 수 있느냐고 개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일 지도자들은 이런 어려움에 굴하지 않았다. 후회하지도 않았다. 포기하지도 않았다. 전쟁의 폐허에서 라인 강의 기적을 이루었던 서독인들의 체험과 기질이 동독으로 흘러들어갔다. 이 물결이 스며들면서 공산정권하에서 생성된 생활태도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개방사회의 장점인 정보의 소통과 확산은 동독인들을 신속히 변화시켰다. 서독(西獨)식의 정치사회화는 급속히 동독사회의 새로운 흐름을 이루었다. 높은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서독의 자본과 기술과 경험이 동독의 모든 잠재력을 발전의 원천으로 재생시켜 나갔다. 통일비용이 통일을 위한 투자로 변해갔다. 개방사회의 발전정보는 동독인들을 일깨워 스스로 자가발전을 도모할 기회를 찾게 했다. 동독5개 자치주들은 연방정부와의 협력 속에서 공산치하에서는 상상할 수없는 투자계획을 세우고 낙후성 극복에 박차를 가해나갔다.

지금 세계는 어느 곳에서도 독일통일을 놓고 통일 비용을 말하는 사람들은 없다. 핵무장하지 않고도 전 세계 강국반열에 오른 독일을 부러워하는 나라는 늘고 있다. 아직도 통일비용을 따지고 논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지구 최후의 분단국인 한국에서 일 것이다. 그것도 아이러니 같지만 항상 통일의 당위만을 앞세워왔던 친북좌파들이 통일비용타령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제 독일통일비용이야기는 아예 꺼내지 말자. 통일 후 독일인들이 감당했던 부담은 비용이 아니라 크고 강하고 영향력 있는 오늘의 독일을 만들기 위한 투자였기 때문이다. 우리도 앞으로는 통일을 단순히 비용차원의 과제로 다루는 단선적(單線的) 사고를 뛰어넘어 한반도 전체의 균형발전을 위한 투자차원의 문제로 통일을 생각하는 관점을 새롭게 정립할 때에 이르렀다. 함께 모색할 것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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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수교 20년을 돌아보면서

 

중국은 북한의 유보요구를 거부

 

한국과 중국이 국교를 수립한지 어언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수교당시에는 실감하지 못했지만 20년이 지난 오늘의 시점에서 회상하면 한중수교는 동북아시아 국제정치지형을 크게 변화시킨 동인이었다. 북한은 이 변화를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않았다. 김일성은 1989년 자기 생애에서 48차로 베이징을 방문, 장쩌민(江澤民) 주석에게 한중수교로 달리는 중국의 입장을 재고해줄 것을 간청했다. 또 1990년 하반기에는 그의 제49차 중국여행지인 심양(審陽)에서 장쩌민 주석과 다시 만나 한중수교에 대한 북한 측의 우려를 밝혔다.

그러나 중국은 당시의 실력자 덩샤오핑이 한중수교가 중국에 무해유익(無害有益)하고 한국과 대만관계가 단절됨으로 해서 중국의 통일에도 도움이 된다는 입장을 표명, 한국과의 수교정책을 굳히고 있었다. 또한 한국 측도 당시 노태우 대통령이 북방외교정책을 통해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을 포함하여 소련과도 이미 수교관계를 맺음으로써 중국과의 수교명분을 자연스럽게 조성해놓았다.

이런 상황에서 1991년 9월 17일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함으로써 한중양국의 수교에 대한 외교상의 걸림돌이 모두 제거되어 수교협상이 원만히 타결되었다. 장쩌민 주석은 이때 당시 첸치천(錢其琛)중국외상을 평양에 보내 한중 수교결정을 사전에 통보하고 김일성의 이해와 지지를 구하는 절차를 가졌다. 그러나 김일성은 자기가 최초로 입당했던 중국공산당이 자기의 유보요구에도 불구하고, 또 미국이 북한과의 수교를 외면하는 상황에서 한국과의 수교를 결정한데 큰 상처를 입고 1994년 그가 죽을 때까지 중국을 다시 방문하지 않았다.

 

동북아시아 정치지형에 변화 초래

 

당시 한중수교는 한중양국이 냉전해체의 정치과정에 진입함으로 해서 필연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상황의 과제였다. 중국은 덩샤오핑이 주도하는 개혁개방정책이 1989년 천안문 사건이후 개혁의 폭과 규모를 더 한층 확대하는 실리외교를 펼치면서부터 수교를 통한 한국의 대중경제협력을 기대했다. 이것은 그간 한국의 경제발전이 중국의 경제발전의 모델로 부각될 만큼 성장한데 기인한다. 한국은 중국과의 수교를 통해 동북아시아 정치에서 중요한 행위자(Actor)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고 한국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무역환경을 갖게 되었다. 특히 한국과 중국은 지리적으로 인접, 닭울음소리와 개짓는 소리가 들릴 만큼 가깝다고 양국관계가 형용된다. 오늘날 중국시장이 개방되고 중국이 총량GDP에서 세계2위국으로 부상됨에 따라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는 중국과의 거래를 모색하는 모든 국가들의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수교와 동시에 한중무역규모는 작년 말로 2,200 억 달러에 이르렀고 한중간의 인적 교류는 600만 명을 돌파했다. 한국은 중국의 3대 무역파트너이고 한국 제1의 투자대상국이다. 북한과 중국의 교역량이 작년 35억 달러일진데 한반도의 남북한을 보는 중국인의 시각이 옛날 혈맹논리에만 묶여있을 수 없게 되었다. 최근 한중친선협회의 이세기 회장은 그의 “중국관계 20년”이라는 최신 저서에서 “한국은 불의(不義)에 못 참지만 중국은 불이익에 못 참는 국민성을 지녔다”고 지적했다. 한중 양 국민들이 지닌 국민성의 어느 측면을 적실히 표현한 것 같다. 한중관계가 앞으로 양국국민의 이익을 반영하는 쪽으로 변해 가는 것은 외교사의 필연적 귀결이다. 단기적으로는 중국이 북한과의 혈맹이라는 냉전논리의 잔영을 철저히 털어내지 않음으로 해서 한중관계가 불편해지는 측면도 있었지만 앞으로의 중국제5세대 지도부가 출범하면 냉전잔영세대가 대거 퇴진함으로 해서 한중양국 간의 구체적 실리에 역점을 두는 중국의 새로운 주변국정책이 실시될 것으로 전망된다.

 

한중관계 변화의 단계적 이해

 

중국정부는 한중관계를 그들의 입장에서 단순수교단계, 협력적 동반자관계, 전면적 협력동반자관계,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로 발전해 왔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단계설정의 기준과 의미를 형용사적 차원을 넘어서서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필자가 아는 한 한국에도, 중국에도 없다. 그저 그럴 것이라는 외교적 수사에 불과하다. 필자가 보기에 한중관계는 지난 20년 동안 ①수교초창기의 밀월단계, ②경제적 이해차이의 실감단계, ③정치, 외교, 안보적 이해갈등의 표출단계, ④새로운 조정단계로 변전해왔다고 생각된다.

 

국가 간의 외교관계 수립이 양국관계의 모든 국면을 선린우호관계로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한미관계도 외견상으로는 좋아 보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대립과 갈등국면이 적지 않았다. 특히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시기에는 노골적인 대립이 표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여러 채널을 통한 대화로서, 때로는 주고받음으로써, 때로는 어쩔 수 없이 불리를 감수 감수하면서 그래도 우호협력관계를 이어왔다. 한중관계도 예외는 아니다. 김대중 정부시절의 마늘수입을 둘러싼 갈등, 해난사고와 해적문제, 중국으로 몰려간 한국 중소투자기업들의 줄도산 같은 사태도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최근에 와서 확실히 노출된 안보이익상의 갈등으로서의 천안함 문제, 연평도 포격사건을 보는 한중간의 시각 차이는 심각했다. 수교20년이 지나면서도 아직까지 영사협정이 체결되지 않은 상황 하에서 불거져 나온 김영환 씨 등에 대한 고문사건도 오늘의 한중관계가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로 쉽게 표현되기 힘든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대화와 소통,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입장에서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한중관계의 앞으로의 과제

 

수교20 주년을 맞으면서 정부와 국민들이 함께 반성할 일이 있다. 우선 정부는 중국을 상대로 의연한 외교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국민들의 눈에 보이는 정부의 자세는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의 유행가의 가사 한 대목이 연상될 정도로 중국과의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정부의 태도가 너무 쪼는 것 같다. 중국경계론이나 위협론이라는 미국공보원식의 정세분석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지금 한국의 스포츠맨들은 세계 어느 나라선수들과 상대해도 결코 쫄지 않는다. 우리는 새마을 운동 성공이래 어느 나라라도 따라잡을 수 있다는 국민철학을 가지고 엽전 콤플렉스를 극복했다. 한국축구가 영국을 이긴 소이도 여기에 있다.

중국의 무역보복도 겁낼 필요가 없다. 중국이 한국과의 무역에서 적자를 내는 것은 그들의 이익을 위한 선택일 뿐이다. 다른 나라들과의 FTA를 통해 수출시장, 원자재 시장을 다변화하면서 중국에의 의존도를 줄여나가면 된다. 중국이 벌이는 애국주의를 앞세운 중화주의(中華主義) 고취, 부국강병을 위한 군사력증대, 우주개발에 기죽을 필요가 없다. 체제안정을 통해 공산당의 일당통치를 공고히 하려는 중국내수용 정책들이기 때문이다.

한중간에 영사협정이 맺어지지 않고 인권 면에서 한국을 차별하는 추세가 지속된다면 그러한 상황 하에서의 한중 FTA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한중FTA협상의 중단을 정부는 검토해야 한다. 인권이라는 현대세계에서 가장 유효한 외교카드를 포기하는 정부는 더 이상 존속할 가치 있는 정부가 아니다. 대통령이나 외교통상부장관도 어느 나라와의 관계에서도 우리의 태극전사들처럼 쫄지 말고 당당해지는 외교를 펼쳐야 한다. 이것이 한중수교20주년을 20주년답게 맞는 정도이다.

국민들도 중국을 넓은 시장과 13억을 넘는 소비인구를 가진 땅으로만 보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중국의 커진 국격을 존중하면서 한국인과 경쟁할 상대가 13억명 이상이 있다는 것으로 오늘의 중국을 이해해야 한다. 중국대륙을 우리의 확고한 시장으로 만들어나가기 위해서는 중국을 상대로 하는 소프트파워가 민간외교의 기반으로 뿌리를 내려야 한다.

한국에 와 있는 8만 여명의 중국유학생과 60만 명을 넘는 중국국적의 노동자들이야말로 한국의 중국시장진출을 위한 좋은 자산이 아닐 수 없다. 기업들도 중국노동자를 저임금의 수입원(收入源)으로 만 보는 태도에서 벗어나 한중친선과 중국시장을 확보하는데 보탬이 될 선전일꾼으로 만들겠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관리해나가야 한다. 대학당국들도 중국유학생들을 정원외(定員外) 수입원이나 정원미달을 메우는 수단으로만 보지 말고 한중관계의 미래를 개선해 나갈 사절(使節)로 보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 정부와 국민이 이러한 자세로 힘을 합쳐나간다면 한중수교 20년은 앞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길을 트는 외교의 대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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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 태극기를 사랑한다

기미년 3월1일

왜놈에게 항거하여 목이 터져라 외치며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던

그 태극기 김구 선생님과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의사가 가슴에 품었던 그 태극기

1945년 8월15일, 해방의 기쁨을 목 터지게 외치며

길거리를 메운 전 국민의 손에 손에 쥐어졌던

그 태극기

적탄이 비 오듯 쏟아지는 적진 속으로

높이 쳐들고 뛰어들며 목숨을 내놓고 지키려던

그 태극기

불의와 부정을 타파하고 민주화된 조국을 위해 산화해 가신

"명실상부한 민주. 정의 투쟁 자들"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그 관을 덮어 우리의 뜻을 전해준

그 태극기

열사의 사막 가운데 자랑스럽게 올려 졌던

중동 근로자 숙소 앞의 빛나든

그 태극기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라고

절규했던 새 마을 운동의 깃발과 함께

힘차게 펄럭이던 시골 마을 입구의

그 태극기

1988년, 평화의 상징인 올림픽기와 나란히 나부끼며

전 세계에 우리의 자리를 매기 든 자랑스러운

그 태극기

2002년 월드컵 4강으로 이끌어 가며

온 국민을 흥분과 눈물과 희망으로 묶어 하나 되게 했던

그 태극기

국립 현충원에 높이 걸려

호국영령과 애국지사님들을 지키고 있는

그 태극기

나는 그 태극기를 사랑한다,

그 태극기엔

우리의 피와 땀으로 성취한 민족의 꿈과 얼이 담겼으며

우리의 정체성과 민주성 그리고 역동성이 함께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청명한 날엔 그 태극기를 내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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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개혁과 그 전망

1. 정치개혁논의의 대두와 확산

 

중국에서 정치개혁의 바람이 크게 일고 있다. 흔히 개혁이나 혁명은 주도세력의 성향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된다. 주도세력이 지배층일 경우 “위로부터의 혁명", 하층 피지배집단일 경우 ”아래로 부터의 혁명"이라 부르고 주도세력이 지배층이나 피지배층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사회적 신분집단으로서의 지식인들이 개혁의 줌심에 설 경우 이를 막스 붸버는 “옆으로부터의 혁명”이라고 불렀다.

 

현재 중국에서는 위로부터, 아래로부터, 옆으로 부터 정치개혁의 바람이 일고 있다.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위로부터’즉 중국의 최고지도층에서 정치개혁문제가 제기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원자바오 총리는 2010년 8월 선전(深玔)을 방문한 자리에서 정치개혁문제를 들고 나왔으며 작년 3월에는 전국인민대표대회(약칭 전인대)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다시금 정치개혁문제를 공공연히 거론했다. 또 금년 3월에도 전인대 기자회견에서 중국이 정치개혁을 단행하지 않으면 문화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아래로부터’의 개혁요구는 매년 12만 건을 넘는 당정(黨政)에 대한 민간항쟁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항쟁들은 중국공산당에 대한 개혁요구라기보다는 일선행정기관이나 당 간부들의 비리, 부패, 독직(瀆職)에 대한 시정요구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따라서 개혁논의는 중국의 경우 중국현대사가 보여주듯 아래로부터 보다는 위로부터 추진되는 개혁논의를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간 중국에서의 정치개혁운동은 이른바 반체제 지식인(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류샤오보 등)들의 전유물처럼 인식되었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중국공산당을 지지하면서도 중국이 더 큰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경제에 못지않게 정치에서도 개혁이 필요하다는 체제내적 지식인들이 등장하고 있다. 한 예로 베이징 정경대학의 위커핑(兪可平)교수의 주장을 보자. 그에 의하면 1978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경제개혁은 지난 30년 동안 유례없는 경제발전을 가져왔는데 이제는 바로 이렇게 이룩된 경제성장이 중국의 정치와 국가운영(Governance)에 심각한 변화를 일으킬 조건들을 창출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중국통치변화의 5개항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내용인즉 ① 앞으로 중국은 일원화된 통치에서 다원화 된 통치로,②집권에서 분권으로,③인치(人治)에서 법치(法治)로,④규제정부에서 공공봉사 정부로,⑤당내민주에서 사회민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또 "중국의 정치모델은 전통적인 사회주의 모델이나 또 서방 국가의 자본주의 모델과도 확연히 다르며 그 특징으로 첫째 당 조직을 위주로 하는 다원화된 통치구조, 둘째 핵심가치를 안정(安定)에 두는 통치구조, 셋째 법치와 인치가 동시에 작용하는 통치구조라고 했다. 이것이 이른바 중국특색적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 같다.

2. 정치개혁논의의 관점 차이

 

오늘날 중국의 정치개혁은 이를 주장하는 입장에 따라 관점이 상이하다. 농민들 차원에서는 당과 관료의 부패, 독직, 인권유린을 막고 선정(Good Governance)을 펴라는 행정개혁에 정치개혁의 중점을 두지만 지식층의 정치개혁은 중국의 정치가 경제발전수준에 걸맞도록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지식인들은 건국 초기에는 국권확립이 초미의 과제였기 때문에 인민주권보다는 공산당 독재를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였지만 이제는 당의 일방적인 위민(爲民)정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법치의 확립과 인민의 참여폭 확대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중국 현직(現職)지식인들은 실제로는 등소평 시대의 지식인, 전문인 우대정책에 힘입어 공산당과 긴밀히 유착하고 있다. 이들은 공산당이 필요로 하는 국가발전의 기술적, 이론적 측면을 지원하고 공산당은 이들의 건의를 실천하면서 지식인들의 권익을 존중해주었다. 이 때문에 오늘의 중국지식인들은 많은 예외가 있지만 중국이 처한 역사적 현실에 비추어 공산당의 일당체제는 불가피하며 현재의 통치모델을 유지함으로써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오늘날 중국공산당의 고위 간부들도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인민들의 소리를 외면할 수 없다. 우선 인민들의 불만은 경제발전으로 높아진 권리의식에 상응하는 정치발전이 따르지 못하다는 것이다. 둘째 법치가 확립되지 않은데다가 공직의 부패와 특권의 폐해가 너무 심각하다. 셋째 사회안전망은 취약하고 지역 간, 계층 간, 도농 간 격차가 나날이 커지고 있다. 넷째 정부행정도 비용에 비해 효율성이 크게 떨어진다. 따라서 중국에서의 정치개혁은 시간이 흐를수록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점차 공산당이 해결해야할 필수적 과제로 변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중국의 정치개혁논의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어떠한 개혁논의도 공산당의 영도를 전제로 한 수직적 민주주의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안 된다는 한계다. 즉 공산당은 중국의 사상, 정치, 조직, 군사를 영도하며 어떠한 세력도 이에 맞설 수 없고 영도자의 교체는 당내 민주절차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작년 3월 우방궈(吳邦國)전인대 상무위원장이 중국은 어느 경우에도 다당제나 삼권분립 같은 서방제도를 따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정치개혁의 한계를 명확히 밝힌 발언이다.

 

3. 정치개혁의 방향타로서의 계급혁명과 일당독재

 

모택동이 문혁(文革)이라는 극단적인 개혁노선을 선택한 것은 가열한 계급투쟁이 없는 한 중국에서의 공산화 개혁은 결코 완수될 수 없다는 상황평가-물론 다른 정략적 이유가 더 크지만-의 산물이었다. 등소평은 계급투쟁노선의 과오를 인정하고 이를 청산했으나 이 반면 훈련된 조직을 가진 공산당의 일당독재를 중국의 안정과 발전, 중국이 꿈꿔온 4대현대화를 이루는데 필수적인 요소라고 보았다.

 

이들 두 영도(領導)들 사이의 공통점은 양자 공히 서구의 제도를 그대로 수용하기보다는 이를 중국화 시켜 거기에 합당한 명칭을 부여한 점이다. 모택동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중국현실에 창조적으로 적용한다는 명분하에 모택동주의를 만들었다. 등소평은 서구의 시장자본주의를 받아들이면서 이를 중국현실에 대입하는 명분으로 사회주의 초기단계론을 들고 나왔다. 중국이 사회주의의 높은 단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약100년가량 공산당의 일당체제하에 사회주의 초기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말하고 이를 중국특색적 사회주의라고 명명했다.

 

문혁당시 등소평은 모택동에게 개인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받았지만 1981년 이른바 “중국공산당의 역사에 관한 주요결의”에서 모택동의 공(功)을 7, 과(過)를 3으로 평가, 모택동을 중국공산당의 위인으로 예우했는데 이것도 그의 지론인 공산당의 일당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심모(深謀)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모택동의 부정은 공산당 일당독재의 정당성 부정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중국이 당면한 문제는 공산당의 일당독재체제에서 줄곧 일어나는 인민들의 불만과 민주화요구를 어떻게 수렴, 극복해 나갈 것인가로 집약되고 있다.

4. 중국특색적 민주주의 지향

 

그간 중국은 민주화의 대안으로 인민민주와 당내민주를 실천해왔다. 중국의 정치학자들은 중국이 자치(自治)를 목적으로 시도한 촌민(村民)선거가 이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면서 중국에는 이미 새로운 형식의 민주정치가 질서정연하게 추진되었고, 이제 민주는 일종의 보편적인 추구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촌민선거는 最一線 행정기관의 장을 주민이 직접 선출하는 것으로 이러한 훈련을 쌓아 점차 선거대상을 높여 나간다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은 이 방식을 일선행정기관의 長人選뿐만 아니라 당직인선에도 적용한다. 중국에서 말하는“인민민주”와“당내민주”는 바로 이를 일컫는다.

 

최근 베이징 대학의 판웨이(潘緯)교수는 중국의 정치개혁을 민주화라는 큰 틀에서 보다는 중국이 필요로 하는 개혁의 수요적(需要的), 실천적 측면을 집약한 5가지의 자문형(諮問形) 법치정체로의 개혁을 제안한다. 즉 중립적인 문관 관료시스템, 자주적 사법시스템, 독립적인 반부패시스템, 전국과 성(省)인민대표대회를 핵심으로 하는 사회자문시스템, 법률로 한정된 언론, 출판, 집회와 결사자유 같은 대증요법(對症療法)적 개혁안을 내놓고 있다.

오늘날 중국의 지식인들은 중국은 이미 나름대로 민주화를 제도화시켜 중국실정에 맞는 시스템, 즉 중국특색적 민주주의를 구축했다고 본다. 아울러 이들은 소련의 성급한 정치개혁의 실패, 제3세계국가들이 민주화이후 겪는 혼란과 갈등, 무절제한 욕구의 분출을 보면서 중국의 일당체제가 갖는 효율성, 정당성을 옹호한다.

그러나 후진타오 주석이 꾸준히 주창하고 있는 화해(和諧)사회나 과학적 발전관을 반영하는 당정 개혁은 아직도 많은 시간이 흘러야 정착될 것 같다. 작년 12월 광동성 우칸(烏坎)촌에서 일어난 주민들의 집단항쟁과 최근 보도된 충칭(重慶)시의 보시라이(薄熙來)사건은 오늘의 중국 상황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중국공산당은 아직도 일당독재에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부정과 비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또 인터넷과 통신수단의 발달로 당과 정부에 의한 정보단속도 어려워지고 있다. 아울러 일당독재를 버리고 국민직선과 삼권분립 등 서방제도를 도입한 러시아와 타이완(臺灣)이 정치안정을 이루는데 성공하고 있다는 사실도 1당독재가 최선이라는 논리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사례가 되고 있다.

5. 결론과 전망

 

금년 18차 공산당 대회는 역사상 처음으로 당 간부들의 협의와 합의를 통해 국가주석을 추대하는 당 대회다. 이 대회는 태자당(太子黨)(당 간부자제들이 중심)과 샹하이파(上海派: 장쩌민 등)가 미는 시진핑(習近平)이 국가주석으로, 공산주의청년단파(후진타오 계열과 일반 대중들)가 지지하는 리커창(李克强)이 총리를 맡는 투톱체제로 될 것으로 전망된다. 따라서 새 정부는 종래와는 달리 다소 성향이 다른 파벌들의 영향력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질 것이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의 리청(李成)박사는 2011년 J일보 초청 강연에서 앞으로 중국의 새 지도부는 시진핑-리커창 간의 연립정부형태로 운영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지금까지 중국공산당은“시대변화에 보조를 같이하고(與時俱進), 영도들이 매월 집체학습을 통해 앞날에 닥칠 위험요소와 포착할 기회를 토론하면서 국정을 리드하기 때문에 영도집단내의 소통과 단결과 협력은 잘 유지될 것이다. 이들은 또 공산당의 일당체제유지에 利害를 공유하기 때문에 자스민 혁명 같은 위기가 닥쳐도 이를 능히 막아낼 수 있다. 인민들의 불만도 많지만 아직까지는 공산당에 대한 보편적 반대는 약하고 서구식 민주화에 대한 지지(약15%정도)도 그리 높지 않다. 또 인민들의 불만관리도 억압보다는 이를 수용하거나 설득하는 Mechanism을 활용하기 때문에 공산당의 통치는 여전히 안정적이다.

 

앞으로 중국은 정치개혁을 중국특색적 민주주의로 진행해 나갈 것 같다. 그러나 모택동이 계급투쟁에 집착, 실패를 자초한 것처럼 등소평 이후의 개혁세대들도 일당독재의 효율성, 안정성에 너무 집착하고 있다. 특정원칙에 묶이면 신축성을 잃고 위기관리능력도 떨어진다. 앞으로 중국의 정치개혁이 중국의 현실적 여건을 충분히 감안하면서도 인민의 참여확대와 자유 신장을 통한 政權淨化능력을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추진되어야 중국의 지속적 발전이 가능할 것이다. 인민들의 자유로운 정권감시기능을 통해서만이 독재정치에 필연적으로 부수하는 부패를 줄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정치개혁이 전개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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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정 賣國 발언, “이어도, 섬이 아닌데...

무모한 도전이 中國자극

중국“해양 감시선과 항공기를 동원한 정기순찰 대상 해역에

이어도를 포함시킬 것”

金成昱
從北주의자들의 親中사대 행각이 선을 넘고 있다. 통합진보당 공동대표 심상정은 7일 서울 청계광장 촛불집회에서 “이어도는 섬이 아니라 암초”인데 “해군의 무모한 도전이 중국을 자극하고 갈등을 유발한다”고 비난했다.

이어도가 위치한 제주도 남쪽 8만㎢ 면적 ‘7광구’는 막대한 자원의 寶庫(보고)로서 최근 중국은 이어도를 자국 관할 해역인 양 억지를 부리고 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중국 류츠구이(劉賜貴) 국가해양국장(장관급)은 3일 전국인민대표회(전인대) 개막을 앞두고 官營신화통신과 인터뷰에서 “해양 감시선과 항공기를 동원한 정기순찰 대상 해역에 이어도를 포함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중국의 이어도 침탈 욕망이 노골화되는 가운데, 정치인들은 오히려 이어도는 섬이 아니라며 해군의 무모한 도전(?)을 비난한다. 아래는 통합진보당이 공개한 심상정의 발언 전문이다.

심상정 공동대표, 강정마을의 평화를 촉구하는 촛불집회 발언
- 2012년 3월 7일 (수) 저녁 8시 청계광장

여러 바쁜 일을 뒤로하고 구럼비의 고통, 강정마을의 아픔을 함께하기 위해서 달려와주신 시민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 새벽 트위터를 보고 여러분들 경악했을 겁니다. 화약구멍과 전선이 이어져서 거북이 등짝처럼 되어버린 구럼비 바위의 등짝을 보면서 저는 정말 경악했습니다.

3만여년 생을 이어온 구럼비 바위가 폭파돼서 그 이상 유구한 역사 동안 우리 생명과 평화가 위협받게 될 것이라는 그런 걱정 때문에 여러분들 이 자리에 오셨다고 생각합니다.


작년에 국회에서 제주해군기지예산을 90% 삭감했습니다. 건설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국민도 반대합니다. 제주 도민도 반대합니다. 도지사도 반대하고 의회도 반대하고 모두가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 일을 총선 한 달 앞두고 이렇게 무자비하게 밀어붙이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지난 20일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강행하겠다, 이렇게 이명박 대통령이 밝힌 이후에 오늘과 같은 폭거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자연유산에 대한 쿠데타이고, 국민에 대한 도전이며, 생명에 대한 폭력입니다. 절대 용서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해군이 국회에 와서 여러 차례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주 해군기지를 건설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 남방해역의 군사주권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명백한 사기입니다.

건국이래에 남방해역에 그 어떤 분쟁도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이어도, 그건 섬이 아닙니다. 암초입니다. 오히려 해군의 몸집불리기를 위한 이런 무모한 도전은 중국을 자극하고 갈등을 유발하는 안보를 위협하는 행위라고 우리가 여러 차례 강조했습니다.

또 민군복합항, 미항을 만들겠다는 대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시뮬레이션 과정을 통해서 공사를 저지시켜보겠다고 제주도에서 나섰습니다. 물론 공사를 중단시키기 위한 방법일 뿐입니다. 제주도는 생명의 섬이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반대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민군복합기지라도 우리는 반대합니다. 민군복합기지는 가능하지도 않은 일입니다.

세계 민군복합기지로 샌디에이고를 예로 드는 해군이 있어서 제가 작년에 미국 갈 때 샌디에이고를 방문했습니다. 샌디에이고 안에 군항 따로 있고 민항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철저한 보안과 통제를 해야할 군기지와 자유롭고 아름답게 개방해야할 민항하고 어떻게 한 항구 안에 공존할 수 있습니까? 그게 가능합니까? 저는 정치권에서 이런 엉뚱한 대안을 거론하는 것을 이제 중단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제가 지난 1월 중순에 강정마을을 방문했는데요. 그 때 제주도지사에게 촉구했습니다. 90%예산을 삭감해서 공사를 중단하라고 했음에도 공사를 계속하는 것에 대해 우리 강정마을 주민들의 걱정이 너무나 컸습니다.

“당장 공사를 중단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분명한 답은 제주도지사가 가지고 있다, 공유수면매립 허가 당장 취소하고 공사중지명령 내려야 한다, 절대보존지구 해제 빨리 복원시켜야 한다, 그거 도지사 권한이다”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 자리에 오면서 보도를 보니까 공사 중지를 위한 행정명령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왜 폭파된 이후에야 공사중지행정명령을 내렸는지 정말로 안타깝기만 합니다.

우리 통합진보당은 여기 모인 여러분들과, 지금 제주에서, 전국에서 연대하고 있는 분들과 함께 반드시 구럼비 바위를 지켜내고, 제주해군기지 건설을 막아내고, 대한민국의 평화를 되찾기 위해 힘차게 싸우겠습니다.


2012년 3월 15일

통합진보당 대변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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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방송과 이영일 한중문화협회 총재와의 인터뷰(2012년 3월 21일녹화)
이 라디오 방송은 불교방송Fm101.9 mhz로 3월24일 오후 6시부터 30분간 계속됩니다.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김봉래입니다. 올해는 중국과 수교를 맺은 지 2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20년이 지나면서 중국은 우리의 최대 교역국이 되는 등 경제관계가 긴밀해지고 문화 교류도 활발해졌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탈북자 북송 문제, 불법 조업 문제에 이어 이어도 관할권 문제까지 이런저런 이슈들이 심심치 않게 터져 나오면서 해결해야 할 과제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BBS 뉴스와 사람들, 중국문제 전문가시죠? 한중문화협회 이영일 총재를 모십니다.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1.오늘 이렇게 총재님을 모신 것은, 올해가 한중수교 20주년을 맞는 뜻 깊은 해고 최근에 양국간 시급한 문제들이 터져 나오고 있어서 해법을 생각해 보기 위한 건데요, 우선 우리 정부는 올해를 ‘한중 우호교류의 해’로 정하고 기념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먼저 한중수교 20주년의 의미에 대해서 어떻게 보세요?

한중수교는 다소 늦어진 편입니다. 동서냉전 때문에 수교시기가 중국의 개혁개방보다 14년 늦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 보면 동해안, 우리 쪽에서 보면 서쪽 연안지방을 향한 투자에서 西歐나 일본에 비해 좋은 기회를 놓쳤지만 우리민족의 역사적, 자연적 교역권인 중국시장에 다시 접근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 만 번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20년 동안 한중관계는 중국이 수교한 세계 어느 나라와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교류와 협력이 이루어졌습니다. 매년 600만의 한국인이 중국을 방문하고 중국 쪽에서도 금년부터는 200만인 이상이 한국을 찾을 것입니다. 한국으로 유학 온 중국유학생 수도 8만명을 넘고 있으며 한국의 중국유학생도 6만을 넘습니다. 매주 840여편의 항공기가 중국의 주요도시와 한국도시들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한중 수교는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동북아시아의 오랜 역사 속에서 형성되어온 한중관계의 중요성, 긴밀성이 그간 냉전에 파묻혀 제대로 된 궤도에서 이탈했다가 본연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2.중국은 미국과 더불어 G2로 불리고 우리에게는 미국을 제치고 최대교역국이 되었습니다. 양국간 수교를 맺은 후 양국이 여러 가지 면에서 참 많은 변화를 겪었는데요.

가장 크게 변한 점이라면 어떤 걸 꼽으실까요?

잘 아시다시피 한중간의 무역총량이 韓美, 韓日교역량을 합한 것보다 더 많아졌습니다. 이 때문에 한국의 대 중국수출량이 한국수출의 26%를 넘어섰습니다. 2000억 달러를 넘는 무역규모입니다. 중국은 한국 제1의 수출국, 수입국 투자국인데 반하여 중국의 제3위 투자수출입국입니다.

첫째로 한중관계는 경제면에서 비록 상호보완적 측면이 크기도 하지만 한중양국간의 상호의존성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높아졌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한반도문제로서의 평화와 통일을 이룩하는데 중국의 역할이 그 어느 때 보다 더 커지고 중요해졌다는 것입니다.

3.중국의 경제속도가 점점 빨라져서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란 이야기도 나오거든요. 앞으로 세계 속에서 중국의 역할이 점점 더 커지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보세요?

금년에 미국에서 중국문제를 다루는 두 개의 큰 저서가 출판되었습니다. Henry Kissinger가 쓴 586페이지의 On China, 우리말로는 중국론이라고 번역하는게 옳겠지요, 와 Ezra F. Vogel교수가 쓴 876페이지의 Deng Xiaoping and the Transformation of China, 등소평과 중국의 변화라고 옮겨야겠지요, 이 두 권이 중국정치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화두가 되었습니다. 이 책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Kissinger의 견해입니다. 그는 미중양국은 국가규모나 역사적 경험에서 다른 강대국에게 지배당한 일이 없고 대국으로서 자국의 지위를 유지해왔기 때문에 서로 군사적으로 승부를 가려 누가 우위를 차지하려고 경쟁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겠다고 말하고 지금 자기가 보기로는 서로 간에 협력의 영역이 넓어진 만큼 갈등의 요소도 커지고 있다면서 서로 간에 충돌을 피하고 공존공생하려면, 미중양국이 태평양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협력적인 세계질서를 이끌어가는 주역이 되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발언권은 커지고 있는데 비해 미국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추세인데 앞으로 양국이 갈등을 줄이고 협력의 영역을 넓히는 일은 세계정치의 중심과제가 될 것입니다.

외부세계에서는 중화사상을 중국의 DNA라고 규정하면서 중국경계론을 펴는 사람도 많지만 중국이 내부문제가 국제적인 파워게임에 나서는 것에 제동을 걸기 때문에 미중양국의 협력은 불가피하다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저는 후자의 견해를 지지합니다.

중국내부문제로는 격차문제나 민주화요구, 일당독재를 향한 농민들의 저항이나 부정부패문제 등이 있는데 이런 내부문제가 중국이 국제문제에서 패권을 추구하려고 발 벗고 나서는 것을 제동하고 있다고 나는 봅니다.

4.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이 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발전시켜나가야 한다고 보십니까?

굉장히 힘든 질문입니다. 그러나 답은 자명합니다. 한중관계를 전략적인 협력동반자관계로 발전시키지 못하면 한국의 국가적 목표인 평화와 통일을 달성하는데 엄청난 난관에 봉착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미국의 대한방위공약은 확실합니다만 미국이 한국에 대한 공약을 지킬 힘은 나날이 줄어들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여기에 대중외교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정부에서도 외교통상부 안에 동북아국을 신설하고 중국연구센터도 만드는 등 중국의 중요성을 느끼고 대비를 서두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MB정권의 대중국정책이 대미외교에 비해 만족할만한 수준이라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좀 더 잘할 수 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5.많은 분들이 중국과 동반자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건 인정을 합니다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대중 외교 현안들이 남아 있는데요 최근 중국 정부 당국자의 발언에 의해 부상한 ‘이어도 관할권’문제도 있고요. 이 부분은 어떤 의견이세요?

저도 중국이 이어도문제를 들고 나왓을 때는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개혁개방을 했다고 해서 이웃나라들이나 자국보다 힘이 약한 나라들에게 대해서 마음까지 개혁 개방했다고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중국은 대국외교의 예를 따라 시비거리를 만들어 뒀다가 필요할 경우 시비 거리를 양보하면서 더 큰 이익을 챙기는 외교습벽이 있습니다. 중국이 이어도 관할권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승산이 있어서라기보다는 한중간의 시비거리 하나를 만들어 두자는 포석입니다.

앞으로 한중간에는 황해에서의 대륙붕 연장기선을 어떻게 할 것인가. 어업분쟁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통일 후에 제기될지도 모를 간도문제, 백두산 경계문제, 압록강 공동수역문제 등 해결해야할 과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어도의 경우 이청준의 소설 이어도나 노산 이은상 선생의 파랑도 이야기 등 역사적으로 한국고유의 영역 안에 있다는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일단 시비거리 하나를 던져두는 것 같습니다.

7.해경을 몸서리치게 만드는 ‘중국 어선 불법조업’ 문제도 끊임없이 제기되는 문제인데요. 중국 정부가 좀 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해야 하는 건 아닐까요?

제가 알기로 중국정부도 골치 아픈 문제가 연안빈민어부문제로 알고 있습니다. 사회적 안전망이 전혀 확보되지 않은 어부들이 떼로 몰려다니며 고기를 잡아다가 팔거나 먹고사는데 중국정부가 이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어로현대화나 원양어업개척이나 어민 생활보호대책을 강구하지 않고 한중어업협정만 지키라고 강요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과거 張保皐가 중국해적을 소탕하면서 무역 길을 열어주어 생계대책을 세워줬던 故事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세종대왕이 최윤덕 장군을 보내어 倭寇의 본거지 대마도를 소탕한 후 세견선을 보내어 먹을 것을 원조해주었던 故事도 회상하면서 앞으로 중국정부와 협상하여 중국어민 보호대책수립에 한국도 참여해서 그 일부라도 지원해주는 방안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번 주 BBS 뉴스와 사람들, 한중문화협회 이영일 총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 중간 CM

계속해서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이영일 총재님? 앞서 한중 수교 20주년을 맞아 중국과의 관계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봤는데요. 중국 이야기를 할 때 또 빼놓을 수 없는 이슈가 바로 북한문제이지 않습니까? 특히 최근 ‘탈북자 북송’문제가 사회를 뜨겁게 달궜는데요.  민간이나 정치권에서 중국이 탈북자를 강제 북송하는 것을 막기 위한 규탄 집회도 열었고요. 총재님께서는 어떻게 보셨는지요?

한국과 중국 모두에게 탈북자문제는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중국도 양보하기 힘들고 한국도 물러서기 힘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또 중국이 국제여론을 그렇게 두려워하는 나라도 아닙니다. 그러나 한국 측에서도 탈북자문제를 항상 목소리를 낮추고 쉬쉬하는 자세로 다루기보다는 일단 목소리를 높여서 문제를 국제여론화하고 차후 외교협상을 통해 해결해야할 과제로 문제를 설정하는 것이 불가피한 단계에 왔다고 봅니다.

9.얼마 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인권이사회에서도 탈북자 강제 북송 문제가 중점 논의됐고 힐러리 미 국무장관이 탈북자 북송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표명하면서 외교적 신경전이 불가피해지는 것 같습니다. 국제 사회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선 어떻게 보세요?

저는 멋진 외교라는 것은 결코 논리로만 문제를 잘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易地思之의 입장에서 해결할 수없는 문제를 해결가능한 문제로 문제의 성격을 재구성해서 해결방도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중국의 형편에서는 탈북자를 받아들일 수도 없고 제3국 추방을 관행화할 수도 없고 난민지위를 부여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북한과 중국 간의 변경협약에 따라 북송조치를 거부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정도 참작해야 합니다.

결국 탈북의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한중회담을 열고 중국주선하에 남북회담이 열리면서 대북지원문제를 협의하고 이 문제에 진전이 있을 때까지 북송을 중단하거나 제3국 추방을 추진하는 명분조성 방식을 모색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보다 먼저 국제여론전을 유발하고 미국의회를 부추기는 방식을 선택한 것은 멋진 외교라기 말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10.하지만 중국 측 입장은 아직도 단호한 것 같습니다. 중국이 이렇게 불통으로 나오는 이유, 뭐라고 보세요?

중국은 그간 북한이 기근으로 피폐의 극에 달했던 1995년부터 1998년까지에는 실제로 굶주린 사람들이 떼로 몰려오기 때문에 적당히 눈을 감아주는 정책을 취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때부터 탈북행렬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적당히 북송도 하고 적당히 제3국으로 추방도 하고 적당히 중국사회에 파묻혀 사는 것을 눈감아주는 탈북자 관리를 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적당히, 조용히 처리하는 방식”에 한계가 왔습니다.

김정은이 권력을 세습하면서 김정일 장례기간 중 탈북자는 3족을 멸한다는 주장이 탈북자 소식통을 통해 외부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김정일 장례기간 중”이라는 단서는 사라지고 3족을 멸한다는 소리만 전 세계로 퍼졌습니다.

한국정부의 조용한 외교가 여론의 벽에 부딪쳤습니다. 결국 국제사회에 공론화 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세계여론은 중국에 불리합니다. 천신만고 호랑이 입에서 빠져나온 사람을 이리 아가리에 다시 집어넣겠다는 논리가 지구상의 공론에 맞을 리 없습니다.

10.이 자리에 나오신 김에 총재님 개인적인 질문을 드리려고 하는데요.

총재님께서는 1939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셔서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를 받으셨습니다. 11대, 12대, 15대 국회의원을 지내시고 현재는 사단법인 한중문화협회 총재를 맡고 계신데요. 한중문화협회가 어떤 단체인지부터 설명 부탁드립니다.

협회는 1942년 중국의 임시수도 중경에서 설립된 한중국민들간의 친선우호단체의 전통을 오늘에 이어받고 있습니다. 1942년에는 한국은 국가가 없었기 때문에 중국은 임시정부지도자들과의 협력을 존중해서 양국 인민들 간의 친선기구로 한중문화협회를 만들었습니다. 국가가 없으면 국민도 없는데 한국의 독립광복을 전제로 당시 중국정부가 한중문화협회의 창립을 지지한 것은 한국의 독립에 대한 중국의 확실한 지지였고 약속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광복은 중국인들의 지지가 없었다면 훨씬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독립운동과정에서 중국인들에게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우리는 중국인들이 보여준 우정의 빚을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한중우호와 친선에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우정의 빚에 보답하는 뜻에서 협회는 그간 중국낙후지역 어린이 심장병환자 무료수술 지원사업을 지난 4년간 지속해왔습니다. 이제 중국경제력이 커져서 한국정부의 지원대상에서 빠졌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8만여 재한 중국유학생과 70만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무료법률지원을 비롯하여 인권상담 한국생활적응지원활동을 15개 지회를 통해 펼치고 있습니다. 이들이 한국에 유학 오거나 노동하러 온 것에 보람과 긍지를 갖게 될 때 한중친선은 강화되고 한국기업들이 중국에 진출,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유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의 마음속에 한국에서의 삶에 서운한 감정을 갖거나 반감을 갖는 일이 쌓인 채 돌아간다면 한중우호와 협력은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학들은 중국유학생들을 정원미달을 채우는 수입원으로 대하고 노동자들은 염가노동력으로만 처리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실로 우려스러운 일입니다. 앞으로 민간외교는 중국을 다니면서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내에 와있는 중국인들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일이 더 효과적이고 실효성 있는 민간외교일 것입니다. 한중문화협회는 이러한 민간외교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11.3선 의원을 지내셨는데요.

이제 총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요즘 정치권을 보면서 선배 정치인으로서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실 것 같은데요.

구체적인 정치이야기는 자제하겠지만 불가능 한 것을 가능하다고 거짓 약속을 하지 말고 국민을 속이는 기술이 정치라는 생각을 버리셨으면 합니다. 복지문제를 둘러싼 포퓰리즘은 국민기만 전술로 비쳐지고 있는데 이는 정말 잘못된 것입니다.

12.향후 이루고 싶은 소망이나 꿈이 있다면, 어떤 건가요?

한국은 1대 1로 맞설 나라가 주변에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처지는 그간 경제발전을 이루었지만 모두 비대칭적 관계에서 대해야할  약소국입니다. 이러한 처지에서 국가의 평화를 유지하고 민족의 통일이라는 꿈을 이루려면 외교에 능한 대통령이 필요합니다. 경제대통령은 필요 없습니다. 경제발전의 주체는 기업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외교에 능한 대통령의 탄생을 바랍니다. 그러한 일에 공헌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러한 인물이 거의 부상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13.끝으로 이 자리에 나오신 김에 평소에 가슴에 새기고 계신 좋은 명구나 교훈이 있으시면, BBS 청취자 여러분을 위해 소개 부탁드립니다.

스승을 능가하는 제자는 없습니다. 국민을 능가하는 국회의원도 대통령도 없습니다. 뽑아놓고 후회하는 국회의원, 대통령이 없도록 선거를 잘해야 합니다. 선거를 잘해도 경제의 구조적인 어려움이나 격차는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중문화협회 이영일 총재와 함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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