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가족 상봉 사업의 성공을 위한 제언
이 영 일 (전 국회의원)
1.
우리는 이론상으로는 북한정권과 우리나라가 인도주의적 가치관을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러나 가끔은 공유가 가능할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진다. 더욱이 북한이 모든 선전매체를 이용하여 “우리민족끼리”라는 구호를 외칠 때면 어느 순간에 북한정권의 담당자들도 우리와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많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서 북한정권과 북한 동포는 일견 같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같지 않다. 북한 동포들은 우리와 같이 핏줄을 나눈 동포로서 인도주의적 가치를 공유한다. 탈북자들이 어렵게 번 돈을 북한에 남겨둔 부모형제를 위해 비싼 대가를 지불하면서 송금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북한동포들도 우리와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러나 2400만 북한동포를 다스리는 김정은 세습독재자를 수령으로 하는 북한의 지배동맹세력은 인종학적으로는 우리와 같은 민족이지만 가치관 면에서는 우리와 전혀 다른 집단이다. 지금 북한에는 우리와 동포로서의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는 북한동포가 있는가하면 우리와 가치관을 전혀 달리하는 북한지배동맹세력이 함께 살고 있다. 북한의 지배동맹세력은 흔히 북한 식 표현으로는 핵심계층이라고 하는데 김일성 가문을 이른바 성골(聖骨)로 하는 혁명가족과 그에 동조하는 이른바 진골(眞骨)로서의 당 간부와 군 간부 및 그 동조세력으로 구성되는데 이들의 외연을 크게 확장하면 약 200여만 명(강인덕씨는 500만으로 추산)에 이르고 그중에서 실권세력은 약 200명가량의 당⦁군 지배집단이다. 이들 지배세력의 가치관은 우선 그들의 적(敵)과 동지(同志)에 관한 태도에서 분명히 차이가 난다. 우리의 경우 적이 아니면 동지이거나 친구이거나 우방이지만 북한지배동맹의 가치관에서는 동지가 아니면 모두가 적이다. 부모, 형제, 처자도 동지가 아니면 적이다. 학연, 혈연, 지연도 동지가 아니면 무시되고 적이 된다. 바로 이러한 적과 동지관(同志觀)에 세워져 있는 정권이 바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고 이 정권을 틀어쥐고 있는 세력이 바로 김정은을 세습수령으로 받드는 북한지배동맹세력이다. 우리는 이론상으로 이러한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으면서도 북한정권도 우리와 인도주의적 가치관을 공유할 것이라는 잘못된 가정에 빠져 오류(誤謬)룰 범할 때가 적잖다. 특히 이러한 착각과 오류가 자주 일어나는 남북한 간의 대표적인 사업이 이산가족 상봉사업이다. 북한의 계급정책분류에서 보면 현재 남한에 부모형제가 살고 있는 월남자 가족이나 남한으로 넘어간 탈북자 가족은 “복잡한 계층”으로 분류되어 2중, 3중의 감시 하에 놓여있고 각종 불이익처분을 항의한마디 못하고 받아들이면서 삶을 유지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북한정권은 월남자 가족의 현황에 대해서는 감시의 눈을 떼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항상 가장 정확한 자료와 정보를 가지고 있다. 이 반면 한국에서는 북한에서 넘어온 동포들의 현황을 자세히 파악하기가 힘든 실정이다. 오히려 신고를 받아서 이산가족의 실상을 파악해야 한다. 왜냐하면 월남 동포들은 이미 대한민국 국민으로 용해되어 대한민국국민들로 당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주체로서 성장하고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우리가 북한정권의 가치관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이산가족 찾기나 상봉사업에 매달린다면 항상 좌절과 실패에 직면할 것이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앞으로의 이산가족 상봉사업의 현재와 장래를 전망하고자 한다.
2.
지난 9월 25일로 예정되어 있던 금강산에서의 이산가족상봉행사가 북한의 일방적인 연기 통보로 가족만남을 기다리던 이산가족들에게 엄청난 낙담과 실망을 안겨주었다. 이번 이산가족상봉사업은 남북한당국자들과 적십자사업 요원들 간의 회담에서 상봉장소를 금강산으로, 상봉자 명단을 상호 교환한 결과 북한 측에서는 100명을, 남한 측에선 95명으로 하기로 합의하고 9월 24일부터 26일 사이에 상봉행사를 갖기로 양측이 합의했던 것이다. 이 합의로 남북한 관계의 장래는 순항할 것처럼 예상되었다. 개성공단이 지난 4월 8일 북한정권의 일방적 노동자철수로 사실상 가동중단상태에 빠졌다가 지난 8월 14일 정상화하기로 합의, 이제는 정상가동단계에 접어들었고 앞으로 10월 2일에는 금강산 관광사업 재개를 위한 실무회담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남북한관계는 의외로 잘 풀리면서 이산가족 상봉사업도 무난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4일 앞두고 이 행사를 무기 연기 한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북한이 이산가족상봉이라는 분단국가로서의 남북한 간에 통일에 앞서 해결해야할 기장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합의의 불이행과 연기조치는 이번에만 처음 있는 일은 아니지만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것은 북한이 남북대화를 거부해서는 안 될 내외정세 하에 있었기 놓여 있다고 보였기 때문이다. 제3차 핵 실험 이후 중국이 가세한 유엔의 대북한 제재결의는 그 제재의 강도를 북한의 경제와 외교가 피부로 느낄 만큼 나날이 심화되고 있다. 또 대내적으로도 경제난이 가중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나날이 개선되면서 중국으로부터는 북한 핵무기의 포기를 비군사적으로 해결하기위한 수순으로 중국이 의장으로 되어있는 6자회담에 다시 참가하라는 압력이 거세지고 있다. 이러한 압력에 대한 대응으로 북한은 지난 6월 남북한 당국 간 회담을 제안했고 그들이 일방적으로 가동 중단시켰던 개성공단의 발전적 정상화협상에 나와 한국 측 제안을 수용하는 선에서 발전적 정상화에 합의했고 이산가족상봉화담에도 응해서 합의했던 것이다. 그러던 북한이 의외의 강수로서 이산가족상봉행사를 일방적으로 연기한다는 조치를 발표한 것이다. 이유는 무엇일까. 두 가지로 집약된다. 하나는 회담의 형식인데 이번 개성공단 정상화조치나 이산가족상봉사업이 김정은의 선의나 아량의 산물이 아니고 박근혜 대통령이 대선공약으로 내세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가 주효했던 결과로 국내외의 평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제사회는 북한이 금년 봄에 한국을 상대로 벌였던 고강도 적대적 심리전공세에 맞서서 “평화를 지키면서(Peace keeping), 평화를 만들겠다(Peace building)”는 박근혜대통령의 단호한 의지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구상에 잘 반영되어있다고 평가한 것이다. 둘째는 회담개최의 실익이 없다는 북한정권의 내부에서의 반발이 강하게 제기된 것으로 보인다. 그간 북한은 주지되는 바이지만 항상 북한지도자와의 인터뷰나 접견도 반드시 북한이 필요로 하는 외화벌이수단에 연계하여 추진해왔고 북한을 방문하는 한국인에게는 항상 입북료(入北料)를 현금이나 물자로 공여를 받아왔다. 심지어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공식적으로는 5억 달러 가량의 입북료를 현찰로 입금시켰고 그것이 확인된 후에야 비로소 김정일-김대중 회담이 열렸던 것은 이미 공지된 사실이다. 하물며 북한지배동맹이 적대계층으로 관리하는 월남자가족을 남한 친척친지들과 만나는 사업을 무상으로 한다는 것은 북한지배동맹세력의 관행적 사고로는 도저히 수용될 수 없는 합의였다. 추측하건데 금강산 관광재개와 연계하여 이번 이산가족상봉행사를 추진하려고 했던 것인데 한국 측의 태도가 과거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처해오는 양상을 볼 때 인도주의적 가치를 경제적 가치로 교환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고 판단하고 무기연기를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3.
현시점에서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치적 차원에서는 남북한 대화에 대한 수요가 높지만 개성공단합의와 가동정상화를 통해 일단 국제사회에 대한 체면은 세웠기 때문에 이산가족문제에서만은 인도주의적 가치를 경제적 가치로 교환할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상황을 평가한 후 이산가족 상봉행사를 취소 아닌 연기로 호도하고 있다. 연기의 명분으로는 한국의 내부 분위기가 정상적인 남북대화를 기대할 상황이 아니라고 하면서 대북 적대적인 태도가 노골화되고 있다느니, 통일 애국세력을 탄압한다느니 하는 구실을 내세우고 있지만 본심은 무상으로 인도주의적 사업을 추진해서는 안 된다는 지배동맹세력내부의 강한 반발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973년에는 김대중 남치사건을 이유로 7.4남북공동성명으로 추진된 남북조절위원회회담을 완전히 단절시킨 바도 있었는데 이번에는 단절 아닌 연기로 입장을 바꾸고 있다. 합의 불이행이 다반사인 북한지배동맹이 합의의 취소 아닌 이행시기의 연기를 택한 것은 합의 불이행이라는 국제사회의 지탄을 피하면서 실리를 확보하자는 것으로 엿보인다. 동시에 한국정부의 박근혜 대통령이 내놓고 있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현실적인 남북대화와 관련해서 구체적으로 그 효용성을 시험해보려는 측면도 엿보인다.
이산가족 상봉사업은 북한지배동맹과는 가치관과 철학을 달리하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반드시 관철시켜야 할 역사적 과제다. 또 1970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남북한관계를 대결에서 대화관계로 전환시킨 최초의 명분도 이산가족 찾기 사업이었음을 상기할 때 우리로서는 결코 포기하거나 간과할 수없는 남북한관계에서의 가장 기본이 되는 사업이다. 그래서 한국 측은 이산가족 상봉장소로서 금강산 보다는 서울과 평양을 내왕하는 것이 남북한이 갈라져 살아온 역사적 현실을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직시하면서도 체제오염을 두려워하는 북측의 우려를 감안, 금강산을 요구하는 북측의 제안을 양보하면서 수용했던 ㄱ서이다. 현재 가족을 만나야할 이산가족의 수효도 2010년 10만 5천에서 이제는 7만2천명으로 줄었고 이 추세로 몇 년을 더 허송한다면 이산가족 생존자가 더 줄어들 전망이다. 이런 견지에서 우리는 북측에 이산가족 사업의 조속한 합의이행을 강력히 촉구하면서 이산가족 상봉행사의 거부가 북한에 가져올 대내외적 불이익을 각성하도록 촉구하는 외교적 노력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남북한 이산가족 상봉을 계기로 북측에 남아있는 연로한 가족이나 친지들에 대한 경제적 지원책을 마련하여 제시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나아가 삶의 길이가 얼마 남지 않은 이산가족들의 재결합을 위한 자유선택권 행사도 새로운 제의가운데 포함시켜보면 어떨까. 아울러 금강산 관광재개문제도 북한이 박왕자 여인의 비극적 죽음에 사과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는 절차를 밟은 후 관광의 재개의 길을 터주는 방안도 검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서독(西獨)이 동독으로부터 정치범을 거금을 들여가며 구해낸 사건은 너무 유명한 이야기다. 인도주의적 가치를 경제적 가치로 교환한 역사적 선례가 아닐 수 없다. 국내외 상황은 남북한 관계의 정상화를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시계방향을 거꾸로 돌리는 북한의 기도가 오래갈 수는 없다. 우리는 인내심을 가지면서 인도주의적 가치를 경제적 가치로 교환하는 새로운 접근도 시도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노력도 결국에는 통일비용으로 환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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