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정치교육과 한국현대사 교과서 문제
이 영 일 전 국회문교공보위원장
1. 문제의 제기
한국현대사 교과서 문제로 국론이 크게 갈리고 있다. 역사는 하나인데 역사를 보는 관점이 다름으로 해서 1국(國) 1사(史) 아닌 1국(國) 다사(多史)현상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중국의 연변을 방문했을 때 들은 이야기 한 토막을 소개한다. 중국 사회과학연구원에서 정부의 예산을 얻어 이른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라는 연구 프로젝트가 진행됨에 따라 고구려사를 보는 중국학자들의 태도가 한국학자들과는 전혀 다른 시각임이 알려지자 이때 어느 편도 들 수 없던 중국의 조선족 학자들은 고구려사를 일국양사(一國兩史)로 보아야 한다는 타협안을 내놓은 적이 있었다. 주장인 즉 중국의 관점에서 보는 고구려사와 한국의 관점에서 보는 고구려사가 해석상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일고 있는 현대사 교과서 파동은 고구려사처럼 과거에는 우리의 강역이었지만 이제는 중국 땅이 되어버린 곳의 역사문제와는 그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일제식민통치시대로부터 해방과 분단과 건국, 6.25의 전란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역사를 함께 공유해온 국민들이 현대사를 해석하는 관점에서 너무 큰 차이가 들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것을 식민지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에서 한국민족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역사의 아픔이라고 생각한다. 이 아픔은 그간 어설프게 봉합되어 나왔는데 이번 교과서 검인정이라는 여과과정을 거치면서 그 진상이 마침내 백일하에 들어나게 되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픔의 미봉적 봉합이 아니다. 근본적 치유를 통해서 앞으로 우리가 수립해야 할 통일 민족국가가 정초(定礎)해야 할 역사의 정통성을 바로 세울 토대를 올바로 축성하는 작업일 것이다. 우리 한국의 현대사는 식민지로부터 탈각하는 해방의 과정이 하나의 확실한 민족운동 지도부의 일관되고 조직적인 지도아래 추진된 독립운동으로 전개된 것인지 여부 또 우리 힘만으로 쟁취된 독립이었는지 여부를 놓고도 국민적 합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또 식민지시대를 살아온 방식으로서 친일과 반일문제를 놓고도 치열한 대립과 갈등이 지속되었다. 특히 대한민국의 건국의 정당성을 놓고도 찬반이 엇갈렸다. 유엔감시하의 자유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방식과 소련군점령사령관의 지시에 의한 정권창립과정을 놓고도 평가가 엇갈렸다. 또 한국이 발전해온 역사의 지난 60년을 평가하는 방식을 놓고도 대립과 반목이 지속되어 왔다. 물론 북한에는 역사논쟁이 있을 수 없다. 쟁점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른 주장이나 견해가 발붙일 여지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해방 60년이 지나면서 여러 가지 쟁점들이 시효가 지나거나 토론의 실익이 없어 수면 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겉으로는 다 봉합된 것처럼 보였던 현대사의 해묵은 쟁점들이 교과서 검인정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또다시 머리를 쳐들고 밖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우리에게만 고유한 것은 아니다. 식민지민족주의 운동을 거쳤던 국가들 중에서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유지한 국가들에서는 한번쯤은 겪었던 문제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가 다른 나라와 유별난 것은 통일의 문제를 안고 있는 분단국가로서 남북한 간에 지난 60년 동안 치열한 사상전이 전개되어 온데 기인한다. 이것은 냉전이데올로기 자체가 발생시킨 사상전이 한 측면이며 다른 하나는 분단체제 양방 간에 민족국가로서의 정통성확보를 위한 경쟁에서 필연적으로 파생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교과서검인정 과정에서 배태된 한국현대사의 문제점은 분단체제 양방 간에 제기되어온 정통성 경쟁을 염두에 둘 때 북한정권이 자기 정권의 정당성을 논증하기 위해 만든 역사관점을 대한민국의 현대사 교과서 내용에 접목시키려는 기도와 무관하지 않다.
결국 남북한 사상전의 역사쟁점을 청산 극복하지 않은 상태를 그대로 두고 현대사교과서 검정과정을 시작한데서 교과서문제가 발생하였다. 우리가 현시점에서 현대사가 안고 있는 이러한 문제를 중시하지 않고 이를 학자들 간의 논쟁문제로 치부하거나 교육인적자원부의 행정문제로 방치할 경우 우리는 두 가지의 큰 문제에 봉착한다. 하나는 현실문제로서 우리의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현대사문제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정답(正答)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가 건설해야 할 통일국가의 정확한 목표비전을 정립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민주국가에서 역사관을 통일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어렵다고 피하거나 외면해서 될 일은 아니다. 국민적 대화합의 차원에서 현대사 문제의 큰 범주를 정하고 문제의 심도를 가리면서 허심탄회(虛心坦懷)한 대화를 통해 조국이 처한 현실과 시대의 요구에 맞는 해답을 마련해야 한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전후 서독(西獨)이 취한 통일을 위한 정치교육방식을 참고하면서 우리나라의 타개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2. 제2차대전이후의 독일 상황과 정치교육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대전을 발생시킴으로 해서 유럽대륙에서 백인이 백인을 살육하는 사상 최대의 비극에 책임을 져야할 국가다. 전쟁에서 패한 독일은 유럽사상사의 큰 흐름에서 이탈한 나치즘의 대두로 자국이 전패국이 되었음을 자인하고 반서구적인 나치즘이 다시 유럽대륙에서 등장하는 것을 막도록 독일 국민을 정치적으로 재교육(再敎育)시킨다는 계획을 발전시켰다. 그들은 베토벤과 마르틴 루터, 괴테의 나라에서 히틀러의 나치당 같은 전체주의무리가 다시 등장하지 않도록 모든 교육과정을 통제할 정치교육본부를 각 정당과 연방에서 추천하는 인사들로 구성하였다. 물론 당시 독일도 동서로 분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양 독 간의 첨예한 사상전은 우리와 별 차이 없이 심각했다.
필자는 1980년 당시 국토통일원 통일연수원장으로서 한독간의 분단국문제 통일정책협의회 실무수석대표로 독일을 방문, 연방정치교육본부를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건물의 입구에는 Max Weber의 유명한 글이 현판에 새겨져있었다. 내용인즉 “어떠한 정부도 자기 후대들에게 자기나라에 대한 귀속감을 갖게 하고 자기나라를 사랑하도록 교육시킬 능력이 없으면 오래 가지 못한다.” 당시 서독의 정치교육(Politische Bildung)본부는 우선 정치교육의 큰 테제로 ①서독이 전체 독일을 대표하는 독일국가의 핵심이며 동독은 핵심에서 분리된 반란단체다, ②그러나 동독은 통일이 될 때까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통일독일헌법이라는 큰 지붕 밑에 함께 동거하는 존재로 실재함을 인정한다는 두 개의 원칙을 세우고 각 정당 정파들이 이 원칙에 합의하는 과정을 가졌다. 그리고 이 목표에 맞춰 교과서편성의 지침을 작성했다. 이 때 독일인들은 나치의 죄과 청산 없이는 주변국들의 반대에 부딪쳐 독일통일이 불가능 할 것으로 보고 제2차 대전을 발생시킴으로서 독일이 ①이웃국가들에게 입힌 피해, ②나치만행이 저지른 범죄, ③타율적인 분단에서 생긴 국민적 아픔이라는 세 가지의 실존적(實存的)부담을 서독이 떠안자는데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였다.
동시에 대내적으로는 나치전범을 철저히 숙청함과 동시에 나치문화를 연상시킬 일체의 상징이나 활동을 단속했다. 아울러 서독은 헌법대신에 기본법을 만들어 통일에 대비하는 한편 양독의 유엔동시가입을 실현하고 이어 양독 간의 교류와 협력을 활성화시켰다. 이러한 서독정부의 구상과 계획을 뒷받침할 교육은 연방정치교육본부의 지침에 따라 독일 역사, 특히 현대사 부문의 과오를 인정하는 내용으로 역사교과서를 재구성하고 프랑스와도 공동의 역사서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독일연방정치교육본부는 자기주장만을 고집하는 외골수 학자들보다는 서방적 가치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상식인(정계, 학계, 종교계, 문화계)들로 위원회를 구성, 교과서 작성에 필요한 지침을 작성했다. 새로운 독일 국가가 추구하는 목표를 실현하는데 공헌할 인재양성이라는 목표를 향하여 교과서가 집필되도록 했다. 매우 힘들게 보였던 과제를 독일인들은 대화와 타협이라는 독일문화의 큰 전통 속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독일 재건의 주체들이 동서독을 막론하고 반 나치운동에 앞장섰던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접근은 아주 불가능할 것인가?
3.국민적 대화합 대타협의 광장을 만들자
오늘날 우리나라도 교과서문제를 놓고 제기되는 갈등과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가차원에서 우리가 지향하는 국가목표로서의 통일과 통일국가건설비전에 대한 범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아무리 통일이 대박이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목표와 비전에 대한 합의 없이는 통일을 이루기도 힘들뿐 만아니라 현대사문제에 대해 학생들에게 정답을 제시하기도 어렵게 된다. 통일성취의 대전제가 다름 아닌 국론통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각 정당이 의원을 보내고 있는 국회가 중심이 되어 각 정당이 추천한 전문가그룹의 집중적 토론과 학식과 덕망을 갖춘 명망가 집단의 평가를 거치고 국회토론의 정치과정을 거쳐 현대사 해석의 큰 맥락에 대한 합의의 범주를 설정해야 한다. 이러한 시도에서 유념해야 할 과제는 한국과 독일의 역사과정의 차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한국과 독일 양국은 걸어온 역사과정이 다르다. 우선 독일은 중세의 한자(Hansa) 동맹 이래 제후국 들 상호간은 물론 군신(君臣)간에도 Give and Take라는 흥정윤리가 고도로 발달 되어 온데 비해 우리나라의 경우 흥정의 윤리보다는 지조(志操)의 윤리가 철저히 뿌리를 내렸다. 결국 전부(全部)아니면 전무(全無)가 우리의 윤리적 선택상황이었다. 대결상대방과의 협력보다는 대결상대방의 굴복이나 멸살이 유일한 문제해결방식이었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 유산 때문에 독일에 비해 대화에 의한 합의도출이 결코 쉽지 않다. 우리나라는 북한과는 달리 식민지에서 해방된 후 민주정치를 실시해왔기 때문에 모든 문제에서 일도양단 식 해법을 가질 수 없었다.
또 해방이후 오늘에 이르기 까지 치열한 내부투쟁과 갈등 속에서 국가발전을 이루어왔기 때문에 현대사평가의 시각이 극에서 극을 달릴 만큼 갈라지기도 했다. 감정과 증오에 사무쳐 사물을 객관적으로 정시하기 힘든 상황도 깔려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편견이 생겼고 편견은 왜곡을 낳고 왜곡은 또 편견을 확대재생산하는 상황이 지속되어 왔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현대사 문제를 해결하는 접근방식은 과거에 얽매이기보다는 현재 도달한 국가발전의 성과를 기준으로 삼으면서 미래를 향한 목표를 두고 현대사의 구성을 새롭게 재단하는 용기가 요구된다. 동시에 통일이라는 민족의 큰 목표를 향하여 소아(小我)를 죽이고 대아(大我)를 세우는 결연한 합의가 필요하다. 이런 대 합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국회가 선두에 서고 학계와 언론계가 성원하고 정부가 이를 뒷받침하는 정치적 협의과정이 시급히 진행되어야 한다. 이를 위한 정치권의 대화와 결단이 있어야 한다.
4. 글을 맺으면서
독일에서 가능했던 일이라면 우리나라에서도 가능할 것이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작금의 내외정세가 우리의 통일을 아득한 미래의 과제로 정의할 수 없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를 분단시키는 것이 자국의 안보와 이 지역의 세력균형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강대국들의 동북아 정세관이 최근에는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한반도가 한국주도로 통일되는 것이 동북아시아의 가장 심각한 긴장의 근원을 제거하고 평화적 협력환경을 만들 수 있다는 전망이 서기 때문이다.
통일은 한국의 대박(Jackpot)만으로는 주변국들의 협력을 얻을 수 없다. 주변국들에게 구체적으로 혜택이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안전보장상의 불리(不利)가 줄어들고 평화의 여건이 증진되어야 하며 경제협력을 통한 공존공영의 여건이 마련될 수 있어야 한다. 정부가 제안하고 있는 “동북아 평화협력프로세스”나 “유라시안이니셔티브(Eurasian Initiative)는 그 가능성이 주변정세에 대한 객관적 평가의 산물일진데 통일을 위한 국론통일은 이제 초미의 급선무다. 이번 교과서문제는 단순한 교육부차원의 행정문제나 좋은 교과서를 만든다는 문제의 차원을 넘어섰다. 힘으로 봉합시킨다고 풀릴 문제도 아니다. 이제는 통일을 내다보는 국론통일의 대과제와 연계된 국가적 과업으로 인식하고 교과서 문제해결에 접근해야 한다. 국민적 대합의, 대타협의 전기를 시급히 조성해야 한다. 민족통일이라는 대 목표에 조명하여 그 해결의 돌파구를 찾는 것이 정도임을 역설하면서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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