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4.19혁명 50주년을 맞이하여 미래정책연구소가 2010년 4월 14일 14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한 “ 4월 혁명과 이승만 대통령”을 주제를 한 세미나를 위해 준비된 이영일의 기조논문이다.
이글의 주요내용은 2010년 4월 14일 조선일보 A25면에 상세히 보도되었으며 4월16일 조선일보 데스크 칼럼에서도 인용되었습니다.
4.19세대가 본 이승만 전 대통령의 공과 과
차 례
1. 들어가면서
2. 재론의 필요성
3. 이승만 대통령을 둘러싼 그간의 공과논쟁 검토
4.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 민주주의 문제
5. 글을 마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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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우열4번)과 김구(좌열4번)가 보스턴 마라톤 대회 승리후 가진 기념사진
1. 들어가면서
사진은 이영일(우로 부터 세번째)의 주제발표
우리는 금년으로 4.19혁명 50주년을 맞는다. 벌써 반세기가 흐른 것이다. 이제 우리의 민주정치는 국민의 자유로운 선거에 의한 지도자 선택, 정부 선택이 일상화될 수준에 도달했다. 앞으로 정당정치가 한 단계만 더 발전하여 대화와 타협을 통해 국사(國事)를 해결하는 관행이 확립된다면 이 나라는 당당히 민주 선진국의 반열에 오를 것이다.
이러한 정치발전은 4.19혁명의 큰 업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는 4.19혁명의 성공과 동시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4.19 혁명에 뒤이은 군사쿠데타와 개발독재정권의 출현, 군사권위주의 정부의 지배와 같은 엄청난 어려움이 있었으나 4.19에 흘린 젊은이들의 순수한 정의의 피가 국민적 지지를 비축하고 있음(Reserve of support)으로 해서 군사 권위주의를 반대하는 끈질긴 젊은이들의 투쟁이 이어져왔고 이 투쟁들을 통해 오늘의 민주화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러한 성공을 위하여 역사의 제단에 자기 피를 뿌리고 산화(散華)한 영령들의 명복을 빌고 지금도 병상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부상자들과 유족 및 가족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필자는 금년 초에 미래정책연구소의 박범진 이사장으로부터 4.19혁명 50주년을 맞으면서 4.19세대의 입장에서 4.19혁명으로 권좌(權座)에서 축출된 이승만(李承晩)전 대통령의 공(功)과 과(過)를 새롭게 조명해 보는 것도 의의 있는 일로 생각된다면서 1960년 당시 대학 3학년에 재학 중 서울대의 4.19혁명에 참여했던 나 같은 경력을 가진 사람이 오늘의 시점을 기준으로 이승만의 공과를 다루는 발제의 글을 세미나에서 발표해 달라고 제의했다. 필자역시 나 아닌 누구에 의해서라도 이 문제는 한번 재음미 해 보아야 할 문제라는 나름대로의 소신에서 이 제의를 수락했다.
특히 금년은 4.19혁명 50주년으로 혁명성공의 희년(禧年)을 맞는 해이다. Bible은 50년을 희년(禧年)이라 부르면서 빚진 자의 부채를 탕감해주고 노예를 해방시켜 주고 갇힌 자를 풀어준다고 한다. 그것이 우리 역사에서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단일민족임을 자부하는 우리로서는 민족 내부에 쌓인 지나간 역사의 부채를 희년정신으로 처리해서 50년에 한번쯤은 민족의 화합과 단결을 도모하는 것이 보다 나은 미래를 열어가는 지혜가 될 수 있다는 견지에서 이승만의 문제를 새롭게 음미해야 할 것 같았다.
먼저 필자는 1960년 당시의 4.19세대가 오늘의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나름대로 회고해 보았다. 1960년 당시 20대였던 4.19세대들은 이제 인생 나이 70대에 이르렀거나 넘어섰다. 나이 20대의 4.19당시에 생각했던 이승만 대통령과 이제 고희를 바라본 시점에서 보는 이승만 대통령이 똑같을 수는 없다. 그간 사물을 관찰하고 평가하는 태도와 경륜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또 동서냉전으로 남북한의 사상전이 고도화 되던 시기에 평가되던 이승만과 공산권이 붕괴되고 한반도 분단국가 형성과정에 대한 공산권의 자료가 공개된 지금의 시점에서 보는 이승만 평가도 같을 수 없다.
4.19세대는 1인당 국민소득 60 여 달러시대에 인생의 청소년기를 살다가 이제는 20,000 달러시대를 맞고 있다. 자유당 정권에 맞서 4.19혁명에 앞장섰고 4.19혁명이 성공했다고 자부한지 2년 만에 발생한 군사쿠데타와 그로 인한 군사독재, 군사권위주의 정권하에서 25년을 살았다. 인생의 가장 활력이 넘치는 시대를 군사정권하에서 보냈다. 민주주의가 목적처럼 보이던 시대부터 국가발전의 수단으로 민주주의의 가치가 재 정의되던 시대를 살아왔다. 즉 1960년대 이후 신생국가에서 실험된 서구적 의미의 민주주의 정권들이 거의 예외 없이 붕괴되거나 변질되는 역사를 보면서 살아왔다.
또 군사권위주의 정권하에서 이루어지는 경제발전과 국력신장의 현장을 목격했고 이때의 국가발전에 동참하면서 살아왔다. 가장 가난했던 약소국가가 G20국가의 반열에 오른 역사과정을 지켜보았다. 다른 한편 소련과 동유럽 공산정권들의 몰락과 붕괴, 그리고 북한이 지구 최빈국으로 전락하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동서독이 통일되는 역사도 보았다.
이제 4.19세대는 시대의 변화와 진보의 증인임과 동시에 변화와 발전시대를 실존적으로 체험한 세대들이다. 4.19혁명 50주년은 바로 이렇게 살아온 세대들이 역사의 주역자리를 후대들에게 물려주는 시점이다. 이러한 때에 4.19혁명으로 퇴진했던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좀 더 성숙한 자세에서, 50년 전과 다른 시각과 관점에서 평가해보는 것도 의의 있는 일로 생각되었다. 정의감은 20대처럼 간직해야겠지만 사물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안목은 인생 70대 수준에 걸맞아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막상 자료를 검토하면서 글을 쓰려고 보니 4.19 당시 목숨을 잃은 친구들과 유족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李承晩의 문제, 부상당한 후 오늘날 까지 병상에서 목숨을 잇고 있는 분들이 보는 이승만의 문제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유족들과 부상자들은 독재 권력의 구체적 희생자들이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4.19혁명 50주년을 맞는 시점에서 실패한 독재자의 이야기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싫을 것이다. 필자도 이런 감정을 공유하지만 그러나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문제를 감정에만 묶여 그대로 지나칠 수는 없다.
4.19혁명 50주년을 맞는 이 시점은 이승만 대통령을 과오일변도에서만 보는 시각을 넘어서서 새롭게 조명해야할 상황을 맞고 있다. 현시점에서 이승만대통령의 치적을 공과 과로 나누어 공정하게 자리매김하는 일은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통성을 이어가고 확립하기 위해서도 또 우리가 앞으로 준비하고 대비해야할 통일을 위해서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이승만 대통령 평가문제를 부족한 사람이 감히 발제해보기로 한다.
2. 재론의 현실적 필요성
재론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은 우선 한국 갤럽과 한국논단이 실시한 바 있는 한국정치지도자에 관한 여론조사의 결과인데 내용인즉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친미사대주의자(53%), 반민주적 독재자(18%), 남북영구분단의 원흉(18%)이라는 등 부정적 평가가 주를 이루었으며 "독립투사이며 건국의 아버지"라는 평가는 1.3%불과하여 한국청년들의 다수가 북한의 김일성보다도 이승만을 더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4.19혁명이후 이승만 대통령을 보는 사회분위기가 이러한 결과를 초래했다면 이 문제는 한 정치인 이승만의 실패에 그치지 않고 자칫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통성에도 위기를 조성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한 인간의 생애는 누구나 장점과 단점, 과오와 업적의 결합체일진데 이승만의 생애도 공(功)과 과(過)의 양면에서 공정하게 다루어야 그의 진면목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생애의 특정시기와 몇 가지 사건만을 떼어내서 과오, 실책만을 들추고 이를 근거로 실패한 정치인의 대명사로 낙인찍어버리는 것이 과연 독립운동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냈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인물을 평가하는 정당하고 공정한 방법인가를 놓고 진지한 성찰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둘째로는 1990년 이후부터 국내외 학계에서 이승만의 공과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탈수정주의적(post-revisionism)관점에서 추진되었고 특히 냉전의 종식과 소련 및 동구 공산권의 붕괴에 따라 한반도문제에 관한 공산권 소장 자료들이 공개됨으로 해서 그간 베일에 가려졌던 한반도에서의 분단국가 성립과정과 한국전쟁발발원인의 진상이 밝혀졌다. 이런 연구와 자료가 공개됨으로 해서 이승만에 대한 평가기준이 바뀌게 된 점 즉 이른바 수정주의적 해석을 재고해야할 필요가 생겼다.
셋째로는 동서냉전으로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는 상황에서 이승만이 추구했던 유엔감시하의 총선거로 세워진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가 소련 군정이 세운 북한 공산정권에 비해 국가발전의 모든 부문에서 너무나 올바른 선택이었음이 현실 역사 속에서 입증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주역이 되어 그 기초를 세운 한국의 자유민주 체제는 오늘날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서고 있는데 반해 공산독재를 택한 북한은 지구최빈국의 하나로 전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넷째로는 민주당정부를 뒤엎고 집권한 군부쿠데타 정권들과 이승만 정권을 비교정치차원에서 따져 보아야 한다. 군사 권위주의 정권은 이승만 정권 12년보다 훨씬 더 긴 25년간 지속되었다. 이들 정권은 이승만의 가부장적, 내지 문민독재보다 한층 더 강도 높은 군사독재 정부였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독재 정권들의 출현은 한국에만 고유한 현상이 아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부분의 신생국들의 정치발전과정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또 한국의 경우 이들 권위주의 정권들이 경제발전에 치중하는 개발연대를 주도했고 이 단계를 거친 후에 비로소 현재 수준의 절차적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렸다. 동시에 민주주의 성장의 경제적 기초도 강화되었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에서 보면 이승만 정권에 대한 비판적 평가도 4.19혁명당시와는 달리 상대화(相對化)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필자는 이번의 발제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독립운동에 관한 분야는 중점을 두지 않았고 해방 후 한국 땅에서 행해진 그의 정치생활을 주 대상으로 삼으면서 과오는 그의 장기집권 욕과 관계된 부분을 중심으로 다루었고 동시에 새 자료가 나옴으로 말미암아 밝혀진 그에 대한 오해와 왜곡을 지적함과 동시에 그의 기여와 공헌을 나름대로 평가, 대한민국 역사의 정당성을 세우고 미래를 향한 발전의 지침을 마련하는데 목표를 두었다.
3. 이승만 대통령을 둘러싼 그간의 공과논쟁 검토
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비판과 옹호론 검토
한국 근현대사에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평가만큼 사실과 관계없이 호오(好惡), 긍부(肯否), 훼예포폄(毁譽褒貶)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지도자도 드물 것이다. 이승만은 생전부터 평가가 대립되었으며 사후에는 평가가 극단으로 양립되었다. 1950년대에 발표된 전기적(傳記的) 접근들에서는 이승만에 대한 예찬 등 홍보적 평가가 우세하였다. 반면 1960년대 이후 간행된 평전(評傳)들은 정반대로 비판적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다. 전기나 평전이외의 연구에서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시기별로 차이가 있다. 4.19혁명이후 이승만의 반민주 독재, 부정선거, 부정부패, 반공주의에 대해 국민들의 기억이 분명하던 1960년대〜80년대에는 이승만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분단과 독재의 책임자로 비판하는 평가가 주류였다. 특히 이 시기는 4.19혁명이념과 거리가 먼 군사정권시기임에도 불구하고 군사정권비판보다는 이승만 대통령을 마치 만 악(萬惡)의 근원인 것처럼 비판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4.19이념을 계승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논객들도 적잖았다. 그러나 이후 90년대에 들어오면서 비로소 일부 학계와 언론기관을 중심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재평가 논의가 등장하고 여기서는 이승만을 건국공로자로 긍정하는 평가도 있었다.
1960년대부터 80년대 기간에 등장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평가의 대표적인 예를 세 가지만을 예시하고자 한다. 먼저 이승만에게 포문을 연 학자는 한국인이 아닌 미국인 Richard C. Allen이었다. 그는 30세의 전기 작가이며 한국 전쟁 시 휴전반대를 부르짖는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할 계획을 입안했던 당시 주한유엔군사령관 Maxwell Taylor대장의 아들이었다. 그는 Korea‘s Syngman Rhee: An Unauthorized Portrait를 통해 이 대통령은 부산정치파동과 4사5입이라는 기상천외의 계산법으로 두 번이나 개헌을 감행하여 장기집권의 기반을 다진 후 진보당을 탄압하고 3.15부정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가 4.19로 권좌에서 물러난 경위를 설명하고 그의 대일 외교실패, 거창양민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사건 등을 조명함으로써 이승만을 “평생 자기 조국에 대한 봉사로 국민들에게 선물 받은 권력에 의해 타락한 애국자라고 낙인찍었다.
국내에서는 4.19이후의 시기에 대표적인 논객의 한 사람인 송건호 씨의 다음과 같은 논평도 주목할 만하다. "이승만은 ····그가 범한 많은 과오 중에서도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외세의 국가이익추구에 편승하여 이 나라를 분단하는데 앞장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제(日帝)시대 때 민족을 배반한 친일역적들을 싸고돌아 민족정기를 흐려놓은 점과 12년간의 통치기간에 이 나라를 자주 아닌 열강 예속으로 전락시켰다는 사실도 들어야 할 것이다. 전략(前略) ···· 오늘 한반도가 겪고 있는 민족의 수난은 다름 아닌 이승만의 지도노선에 일단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Allen 및 송건호의 이승만 비판론은 1980년대에 미국으로부터 유입된 수정주의 사관의 영향하에서 이승만에 대한 한층 더 강도 높은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 1965년에 이르러 김삼웅이 나열한바 다음과 같은 이승만의 12개 죄악상은 당시 중도, 진보진영에 속하는 학자나 언론인들의 입장을 총정리한 감이 있다. ①분단책임 ② 친일파 중용 ③한국전쟁유발 내지 예방실패 ④ 독립운동가 탄압 ⑤ 헌정유린 ⑥ 정치군인 육성 ⑦ 부정부패 ⑧ 매판경제 ⑨ 양민학살 ⑩ 극우반동 ⑪ 언론탄압 ⑫ 정치보복 등 12개 조목이다.
이상의 주장들과 각도를 달리해서 이승만의 사람됨과 업적에 대해 정반대의 평가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이승만을 가리켜 외교의 신(神)(조정환), 대한민국의 국부, 아시아의 지도자, 20세기의 영웅(허정), 조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 그리고 아브라함 링컨을 모두 합친 만큼의 위인(김활란), 자기 체중만큼의 다이아몬드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닌 인물(James A. Van Fleet)이라고 칭송했다.
이러한 단편적인 평가와는 달리 Robert T. Oliver(1909-2000)교수는 이승만의 1942년부터 59년까지의 자문역을 맡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에서 이승만의 애국심, 학문적 실력, 역사적 혜안, 정치적 투지, 종교적 초월성 등을 지적하면서 이승만을 한국역사상 누구보다도 국민들의 두터운 신망을 획득한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지도자”라고 평했다. 나아가 “그의 이름은 위인을 많이 배출한 한국역사에서 단연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이승만 대통령을 평가한 주된 내용을 요약하면 한국이 초창기에 직면했던 미증유의 혼란으로서의 여순(麗順)반란 사건, 4.3 제주도 사건과 6. 25동란을 거치는 등 극한의 위기상황들 속에서 국민을 단합시켜 국가적 재앙을 훌륭히 극복하고 대한민국의 국가건설(Nation Building)의 과업으로서 안보, 외교, 교육, 농지개혁을 통한 산업발전분야에서 혁혁한 업적을 세워 신생 대한민국을 굳건한 반석위에 올려놓았고 이것이 밑거름이 되어 1960년대 이후 한국에서의 눈부신 발전에 근원적으로 기여했다고 평하고 있다.
나. 이승만 평가기준의 변화요인 대두
①한반도 분단국가 형성과정에 대한 소련 측 자료의 발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이상에서 적시한 바와 같이 부정적 평가가 긍정정인 것보다 압도적으로 많았고 그 중에서도 국토영구분단과 6.25동란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평가(송건호, 김삼웅, 김도현, Bruce Cummings 등)는 이승만에게는 반민주독재자라는 평가보다 더 아픈 공격이었다. 그러나 동서냉전의 종결과 더불어 소련의 붕괴, 그에 수반한 한반도 분단국가 형성과정과 한국전쟁에 대한 소련 측 자료들이 발굴, 공개됨으로 해서 이승만의 책임으로 들씌워진 많은 사실 왜곡들이 밝혀졌다. 우선 소련군 점령지역에 부르주아 정권을 수립하라는 1945년 9월 20일의 스탈린 지령의 발견은 1946년 6월 3일의 이승만의 정읍(井邑)발언보다 앞선 것으로 소련군 총사령관 스탈린과 참모장 안토노브(Alexei E. Antonov)명의로 연해주 군관구 및 제25군 군사평의회(의장은 북한점령군 사령관 치스차코프)에 발송된 것인데 이 전보는 제2항에서 "소련군 점령지역에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조직의 광범한 연대(블럭)를 기초로 한 '부르주아적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할 것을 지시했다. 이 지령은 그대로 구체화되어 미소간의 합의 없이 북한지역에서 임시인민위원회라는 이름의 정부가 1946년에 세워지고 이 이 위원회를 통해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원칙으로 하는 토지개혁이 단행되고 인민군이 창설됨으로 해서 남한에서보다 먼저 소련점령군 주관 하에 분단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지령이 밝혀지기 전까지만 해도 국내좌파 및 중도 사학계, 특히 수정주의적 해석에 영향 받은 학자들은 이승만의 정읍(井邑)발언을 빌미삼아 국토영구분단의 모든 책임을 이승만에게 뒤집어 씌웠던 것이다.
지금까지 이승만 대통령을 소남한단정(小南韓單政)분자로 몰아 국토영구분단의 책임을 뒤집어씌운 것은 한반도 분단국가 형성과정에 대한 공산권의 자료가 나오기 전의 국내 언론을 기준으로 이승만을 평가한데 기인한 것 같다. 필자도 4.19직후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과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선전위원장 시절에 선배들의 이승만대통령에 대한 평가에 그대로 동조했음을 고백한다.
돌이켜보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정읍발언으로 공론화된 과도정부노선은 소련이 기도하는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예방하고 자율적으로 독립 국가를 세우려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분단의 원흉이라는 평가도 이제 재고되어야 할 것 같다.
② 소련의 6.25전쟁관련 자료
이승만 대통령은 6.25동란의 원인제공자라는 비판도 받았다 그러나 현재 밝혀지고 있는 6.25동란 관련 모든 자료는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스탈린이 승인, 지원하고 협력함으로써 일어난 민족최대의 비극으로 밝혀졌다. 1949년 3월 5일 소련의 초청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은 공식회담을 마친 후 1949년 3월 7일 스탈린을 만난 자리에서 남한 공격을 스탈린이 허용해주고 지원할 것을 건의했다. 이때는 스탈린이 3.8선에 관한 미소합의는 유효하며 전쟁발발 시 미국개입가능성이 크고 북한군이 남한 군에 대한 절대 우위가 아니라는 이유에서 김일성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이 시기 스탈린은 북한의 군사력 증강노력을 지지하고 육해공군의 강화를 위한 원조를 제공했다.
그러나 1949년 중엽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우선 남한 주둔 미군이 470여명의 미 군사고문단만을 남기고 전원 철수를 단행했고(1949.6.30)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함으로써 핵보유국가로 등장, 미국의 핵독점을 종식시키고(1949. 8) 중국의 공산군이 대륙장악에 성공하는 상황이 조성되었다.(1949.10.1) 이와 동시에 1950년 1월 12일 Dean Acheson 미 국무장관은 워싱턴 기자협회의 연설에서 미국의 극동방위선이 필리핀에서 유구열도, 일본을 지나 알류산 열도로 이어진다고 밝히고 이 방위선 밖의 지역에 대한 침공은 일차적으로 지역주민이 저지하고 유엔헌장에 의하여 모든 문명세계의 개입에 의존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은 김일성의 남침야욕에 다시 불을 붙였고 소련도 새로운 정세를 중국에 이어 한반도의 공산화라는 전략목표를 고려하게 되었다. 김일성은 1950년 3월 30일 재차 소련을 비공식 방문, 4월 25일까지 머물면서 세 차례에 걸쳐 스탈린과 남침계획을 검토한 후 스탈린으로부터 남침 허락과 군사원조, 필요한 전략지원을 확약 받고 여기에 유사시 중국군 지원계획까지를 합의한 후 귀국했음이 자료에 의해 밝혀졌다. 이런 관점은 Nikita Khrushchev 회고록에서도 같은 내용이 담겨있다.
이때 한국군은 북한에 맞설 군사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심리전차원에서 대북우세를 강조하고 군민(軍民)들의 사기앙양을 도모하는 조치를 취했는데 이 측면만을 부각시켜 그것이 남침유발이라고 평하는 것은 당시 국제정치상황이나 한반도 군사정세의 진상과는 전혀 맞지 않는 주장이다. 지금 살아있는 모든 자료들은 한국동란의 도발 책임이 김일성과 소련에 있었음을 명증하고 있다. 이 분야에서도 이승만에 대한 기왕의 평가는 시정되어야 할 것 같다.
③ 이승만은 친미사대주의자였던가.
우리 학계 일각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을 친미사대주의자로 매도했다. 필자는 최근 1993년 국내에서 출판된 이승만의 “독립정신”(1904년 한성가옥에서 탈고)이라는 저서를 읽었는데 이 책은 그가 한성감옥에서 5년간 수감되어 있는 동안 집필한 것으로 여기에 나타난 그의 대미관은 확실히 친미적이었다. 그의 이 책에는 그의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동경이 잘 그려져 있었다. 특히 그는 민주정치 제도에 관해서는 미국 민주주의를 관찰하고 이를 발표했던 A. de Tocqueville같은 느낌을 줄만큼 미국 민주주의에 심취하고 있었다. 이 결과 그는 미국유학의 길을 택했고 그가 마음속에 그린 해방조국의 정치형태를 미국화 하겠다는 건국의 이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미국에서 오래 살면서 조국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하는 동안 강대국들의 이중성(二重性)을 피부로 느꼈고 특히 미국의 20세기 초의 대한반도 정책의 진상을 파악한 후부터는 항상 미국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고 한다. 이승만 연구의 권위자의 한 사람인 미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이정식(李庭植) 교수는 이승만 박사의 미국관은 미국의 대한정책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면서부터 크게 달라졌다고 지적했다. 우선 이승만은 미국이 1882년 조미(朝美)수호조약에 명시된바 조선이 외국의 침략위협을 받을 때 거중조정(Good office)을 해주겠다는 약속을 위반했음을 알았고 특히 이승만은 미국이 1905년 미국의 육군 장관 William H. Taft와 일본의 카쓰라 타로(桂太郞)총리 간에 조선을 일본이 차지하도록 비밀협정을 맺었음이 1924년에 밝혀짐에 따라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승만은 1905년 당시 미국의 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을 찾아가 만나고 한국문제에 관한 청원서를 제출하려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승만은 미국의 이중적(二重的) 태도를 간취하고 분개했으며 그 후 미국은 일본에게 진주만을 침공 당한 후에도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요구를 거부한데 대해서도 불만이었다고 한다.
이런 체험 때문에 이승만은 자기 외교체험을 통해 강대국들 간의 흥정에 해방된 조국의 운명을 맡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하루라도 빨리 한국인들이 주도하는 정부를 서둘러 수립하고 외국의 군정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열망에 불탔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한미방위조약협상대표 Walter S. Robertson 국무차관보와의 담판에서 이런 사실(史實)을 상기시켰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승만은 해방 후 건국준비과정에서도 군정사령관 John R. Hodge 장군과도 많은 부문에서 의견대립을 보여 이승만의 제거를 미군정이 검토했었고 특히 한국 휴전협상 시기에는 이승만이 통일 없는 휴전반대라는 명분을 내걸고 단독북진을 주장하자 미국은 한국전쟁의 조기종결구상에 따르지 않는 이 대통령을 제거하기위해 맥스웰 테일러 대장이 Plan Everready라는 비상계획을 입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승만은 대미관계에서 기록상의 자료로는 공식적으로 대미종속이나 미국에 굴종하는 괴뢰 같은 처신을 한 사례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비록 국력은 약했고 원조를 받기위해 대미외교를 강화했지만 항상 당당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미국방문을 수행했던 김용식 전 국토일원 장관은 그가 통일원에 재임했던 1974년 당시 통일원 정치외교정책담당관이던 필자에게 다음과 같은 회고담을 들려주었다. “워싱턴 공항에 취재차 나온 기자들에게 한국은 워싱턴의 겁쟁이들 때문에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는 충격적인 도착성명을 발표, 그날 미국 주요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고 말하고 6.25동란에서 3만2000명의 미군이 희생됨으로 해서 한국이 국권을 지키게 되었다는 감사의 메시지보다는 제네바 정치협상이 실패로 끝난 상황에서 미국이 왜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와 경제 원조를 강화해야 하는가를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담판, 설득하기 위한 명분조성에 더 큰 비중을 두었던 외교의 귀재(鬼才)였다고 말했다. 결국 이승만 박사는 휴전반대 단독북진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벼랑 끝 외교를 통해 한미방위조약을 미국으로부터 얻어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승만을 친미사대주의자로 매도하기 보다는 지미(知美), 용미(用美)의 외교대통령으로 평가해주는 것이 옳을 것이다.
④ 정통정부와 위성정권 문제
남북한은 분단이후 서로에 대해 괴뢰정부로 비난하는 심리전을 계속했다. 이것은 한반도가 1945년 이후 동서냉전에 휩싸여 분단국가로 출발한데 그 원인이 있다. 당시 동서냉전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미군과 소련군 점령지역에서 남북한이 별개의 정치형태를 갖는 분단국가로 출범하는 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당시의 세계대세였다. 앞에서 본바와 같이 북한지역에서는 소련군점령 치하에서 형식은 대한민국보다 1개월 늦게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는 간판을 달았지만 실제로는 스탈린의 1945년 9월20일 지령에 의해 사실상 정부수립이 1946년과 1947년 사이에 완결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김일성 정권은 한마디로 동구라파에서와 같이 소련군 점령치하에서 소련의 제한주권론의 통제를 받는 위성국가로 그 출발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성립과정은 북한과는 달랐다. 우선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됨으로 해서 미국이 한국문제를 유엔이 해결할 과제로 정의하고 유엔으로 이관시켰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유영익(柳永益) 교수는 이승만이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서는 한국의 독립과 점령군철수문제를 결말지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한국문제를 유엔에 넘겨 해결하자는 유엔공식을 미국 측에 건의하고 이 건의를 미국 측이 받아들였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유엔활용의 아이디어를 꺼낸 사람이 이승만이라는 것이다.
이승만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산되고 미군정의 지원 하에 추진된 김규식⦁여운형 중심의 좌우합작운동이 소기의 성과를 거둘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1946년 12월 남조선 대한민국 대표 민주의원 의장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 1947년 4월까지 워싱턴에 머물면서 미국정부지도자들과 언론을 통하여 유엔을 통해 남한에 과도정부를 수립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는 당시 미국대통령, 국무장관, 유엔사무총장 등을 만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미 국무성의 점령지역 담당 차관보인 John R. Hilldring을 만나 자기의 과도정부 구상을 설명,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고 했다. 당시 상황은 미국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고 미소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기 때문에 모스크바 협정으로 발표된 한반도 신탁통치 안은 미국이 이를 포기하고 그 대신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 유엔감시하의 자유총선거로 한반도에 통일된 단일정부를 수립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대한민국은 이런 과정을 거쳐 유엔결의로 파견된 감시단이 참관하는 가운데 실시된 자유총선거로 정부를 수립했다. 이 과정은 공산세력들의 선거방해, 민족진영 일부와 진보성향 인사들의 선거거부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러나 이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유엔총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정통정부로 승인받았다. 그러나 이 과정과 절차가 갖는 중요성과 의의는 이승만의 단정론 비판에 휩싸여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분야에 대한 평가도 재고되어야 할 것 같다.
4.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 민주주의 문제
이승만 대통령은 해방 후 대한민국 통치의 기본 틀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로 만드는데 주도적으로 기여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은 이승만 박사의 선택임과 동시에 또 동서 냉전의 확산과정에서 한국에 주어진 운명적 상황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이러한 기여는 그가 4.19혁명으로 대통령직에서 하야한 후 하와이로 망명했고 그의 정치적 기반인 자유당은 해체되었으며 정치적 추종자들은 반민주행위자로, 그의 경제적 후원세력들은 부정축재자로 법의 심판을 받는 운명에 놓였기 때문에 누구도 제대로 평가해줄 수 없었고 한국 민주정치를 그와 관련시켜 왈가왈부하기도 힘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1960년 4.19로부터 약 30년간 지속되어왔고 아직도 저류가 남아있다. 그러나 4.19혁명이 50주년을 맞이하면서 이승만의 문제를 공과 과로 나누어 보다 객관적으로 새롭게 조명할 필요성 때문에 이승만과 한국의 민주정부 수립문제를 다시 살펴보게 된다.
가. 민주주의와의 만남
이승만의 생애를 보면 아이러니 같지만 한국에서 최초로 군주정치를 반대하고 공화정치를 부르짖다가 징역형을 선고받고 5년 옥살이를 한 한국최초의 민주화를 위한 운동권 형 인물로 보이는 측면이 있다. 그는 한말의 유생이었지만 일찍이 신학문을 받아들였다. 한말 독립협회운동에 참여했으며 배제학당에서 수학했고 여기서 그의 생애의 외교무기, 집권무기가 된 영어를 마스터했다. 그는 1898년 고종황제의 군주정치를 비판하고 공화정으로 정체를 바꾸려는 개혁에 앞장섰다가 국가반역죄로 투옥되었다. 한성감옥에서 5년간 복역하면서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선교사들이 보내준 책과 서재필 박사의 가르침을 익혀 미국식 민주주의에 심취했다. 1904년에 탈고한 그의 저서『독립정신』에서 그는 미국민주주의를 “제일 선미(善美)한 제도”라고 칭찬했다.
청년 이승만은 이때 알게 된 미국식 대통령제 민주주의가 지도자를 국민이 직접 선출하고 지도자와 백성이 함께 나라를 부강케 하는 제도로서 전 세계 정치제도가운데 가장 이상적인 것이며 공화정의 권력이양방식도 중국의 요순시대와 비슷한 것으로 인식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러한 사고는 그의 평생의 정치사상의 뿌리였으며 대한민국의 건국구상도 이러한 연구에서 싹튼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미소냉전의 와중에서 한국이 선택할 정치형태는 사실상 주어진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초대 대통령의 민주주의에 대한 정치교양이 부족했더라면 한국정치의 틀을 자유민주주의체제로 확립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 한국 민주화를 위한 노력-교육부분
그러나 해방된 한국은 자유민주주의가 제대로 꽃필 여건이 아니었다. 당시 민주주의라는 밀알은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 같았다. 공산세력의 폭력테러가 끊이지 않았고 한국의 문맹률은 인구의 78%로 집계되고 있었다. 또한 전문학교 이상 대학졸업의 학력소지자는 전체인구의 0.2% 미만이었다. 이러한 여건의 불비를 채우기 위해 이승만은 건국 후 초등교육 의무화를 서둘렀다. 이 결과 1959년까지는 전국학령아동의 95.3%가 취학하는 성과를 올렸고 성인을 대상으로 한 문맹퇴치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 1958년까지 5년간 지속적으로 실시함으로써 1959년에는 우리나라 문맹률은 22%(남자11%,여자 33%)로 떨어졌다. 아울러 학교도 대폭 증설하여 해방당시 초등학생수가 1960년에는 4600여교에 360만 명으로 배가 불었고 중학생의 경우도 5만에서 53만으로 10배 증가했다. 대학교는 해방당시 20교의 대학이 1960년에 이르러는 63개 이상으로 증가, 대학생 수도 10만 명에 달하여 인구 5천만이 넘는 영국의 대학생 수와 맞먹게 되었다.
다. 민주화의 경제적 기초정비
이 당시는 한국의 경제적 기초도 극도로 취약하였다. 이승만 정권시기에 한국경제는 해방 후의 극심한 혼란에다 6.25의 참화까지 겹쳐 일반서민들의 생활은 최저생계수준을 밑돌았다. 1인당 소득은 1953년의 67달러(1990년 불변가격으로는 757달러), 그리고 1961년에는 82달러 수준에 머물렀다. 이승만 정권은 건국과정과 6.25전란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휴전 후부터 전재복구를 중심개념으로 하여 경제 재건에 힘썼다. 우선 미국으로부터 22.8 억 달러의 거액의 경제 원조를 받아내 1955년까지 전화(戰禍)복구사업을 거의 완료하고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고 해방 후 지속된 악성 인플레이션을 1957년부터 수습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어려운 가운데서도 이승만은 원자력연구소를 만들고 소형원자로를 구입해주면서 원자력의 연구개발을 지원했다.
라. 농지개혁
이승만 정권은 이러한 전재복구(戰災復舊)에 선행하여 북한이 토지개혁을 끝낸 것에 자극받고 정부수립과 동시에 진보적 성향의 조봉암(曺奉岩)을 농림장관으로 임명하여 농지개혁을 실시하였다. 일제가 차지했던 식산은행 토지 등 귀속농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한편, 농지의 소유상한을 3정보 이하로 하여 농지의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단행함으로 해서 한국농촌의 소작농 체제를 자영농 체제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소작농 체제를 기반으로 한 한국 민주당의 반발을 잠재우면서 농지개혁을 단행, 자작농지의 비율이 전체농지의 92.4%에 달하게 한 것은 한국농업구조상의 획기적인 변화를 의미했다.
이승만은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자기의 청년시절의 이상에 좇아 한국정치의 틀로서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지향한 것은 올바른 선택이었다. 동시에 자유민주주의가 성장할 토대를 구축하기 위하여 국민교육을 강화, 문맹을 퇴치하고 미국원조를 끌어 들여 전재복구, 경제 재건을 이룩하고 농지개혁을 단행한 것도 잘한 일로 평가될 수 있다. 즉 한국 민주화를 촉진시키기 위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교육적, 기초를 확충, 강화한 것은 업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마. 민주화의 길에서 빗나간 집권연장책동
지금까지 이승만 연구가들이 집권연장 책동과 관련하여 지적하는 민주역행 사례의 대표적인 것은 ① 1952년의 부산정치파동을 통한 발췌개헌과 1954년의 사사오입(四捨五入)을 통한 초대 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 조항철폐 ②1957년의 진보당 탄압과 조봉암의 법살(法殺) ③ 1960년의 3.15 부정선거로 집약된다.
현재까지 자료에 나타난 바로는 이승만이 자기의 과오를 인정한 부분은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4.19 학생데모대에 대한 발포로 이 나라의 꽃다운 젊은 대학생들이 살상당한 사건뿐이다.(1960년 4.26 대통령 하야성명)
그 밖의 사건에 대해서는 본인 스스로 국민을 상대로 자기 과오를 인정한 사실이 없다. 이승만에게 있어서 부산정치파동이나 사사오입 개헌을 통한 초대대통령 중임제한 조항폐지는 민주헌정을 파괴, 유린한 행위라거나 정치적 과오로 인식된 것 같지 않았다.
① 부산정치파동을 통한 발췌개헌과 대통령 중임제한 철폐개헌
이승만 대통령은 재임 중 집권연장을 위해 두 차례의 개헌을 변칙적으로 단행했다. 하나는 부산정치파동을 통한 발췌개헌이고 둘째는 4사5입 개헌으로 알려진 대통령중임제한 철폐개헌이다. 우선 부산정치파동을 살펴보자. 이승만은 부산정치파동을 통한 개헌을 6.25동란이 진행 중인 국가위기상황에서 당시 의회 다수당인 야당이 미국의 대한정책과 대일정책에 편승, 헌법을 내각책임제로 바꾸어 이승만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미국이 선호하는 장면(張勉)을 선출하려는 기도로 부터 자기를 지키려는 정치행위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 당시 미국은 휴전협정을 반대하면서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한국전의 조기종결을 추진하려는 미국에 맞서고 동시에 미국이 원하는 한일수교에도 까다로운 조건을 달아 거부하는 이승만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할 계획을 추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부산정치파동은 국내정치차원에서는 내각제정부형태와 대통령제정부형태를 혼합한 제헌헌법에 내재했던 문제점이 이승만을 대통령직에서 밀어내려는 야당의 내각제 개헌기도로 말미암아 현실문제로 폭발한 사건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엄밀히 말해서 국회 내 여야 간의 정치문제였다. 그러나 내각제개헌안과 이승만의 직선제 개헌안이 정치과정을 통해 처리되지 않고 정권에서 동원한 군부대가 국회의원들을 협박하여 개헌안을 직선제로 처리한 것은 민주헌정사에 나쁜 선례를 남겼다. 물론 국회 내에서의 수적 우세를 믿고 전시(戰時) 중에 미국의 사주를 받아 개헌을 통해 현직 대통령을 밀어내려고 했던 당시 야당의 처사는 결코 옳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승만정권이 관제데모를 통해 민의를 조작하고 끝내는 군대를 동원, 의회를 무력화(無力化)시켜 개헌을 단행, 대통령직을 유지한 것도 잘못된 처사였다. 이러한 평가와 관련하여 헌법에 대한 태도 면에서는 국회를 불법 해산한 군사정권들 보다는 국회를 해산하지 않은 이승만이 좀 더 나은 편이었다는 소수 의견도 있다.
다음으로 초대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조항을 철폐한 사사오입(四捨五入)개헌에 대해서도 이승만은 과오를 인정한 일이 없다. 물론 이 사건이 한 국회의원의 착오투표로 빚어졌다고는 하지만 비록 1표라도 그것이 헌법규정을 위반했다면 개헌안은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는 국회를 통과한 개헌안을 그대로 받아들여 공포했다.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개헌은 국내외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고 또 이 시기를 전후해서 여당 후보를 돕는 관권의 공공연한 선거개입이 행해졌다. 헌법이 보장한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가 수시로 유린되는 사태가 계속되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신시내티 대학의 김한교 교수는 이승만이 1952년과 1956년에 두 차례에 걸쳐 은퇴의사를 거듭 표명했다가 민중대회나 진정서에 나타난 은퇴반대를 민의로 받아들여 재선, 3선의 길을 걸었는데 이는 당시 그가 고령(高齡)에 인(人)의 장막(帳幕)에 둘러싸여 일반사회와 격리된데 원인이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상 두 개헌안 처리문제는 집권연장을 위한 개헌이라는 점에서 도의적, 절차적으로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정치사적으로 보면 한국을 포함한 신생국의 민주정치발전과정에서 발생가능한 일종의 정치적 진통이었다. 4.19혁명이후 군사 정권들 하에서 강압적인 3선 개헌, 계엄령하의 유신, 그리고 두 차례의 국회해산이 있었고 이런 시련을 거쳐 오늘의 민주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③ 진보당 탄압과 조봉암의 법살(法殺)사건
조봉암 법살 사건에 대해서도 이승만은 한마디 언급이 없었다. 조봉암은 독립 운동기에는 모스크바 공산대학에 다닌 공산주의자로 알려졌고 해방 후에는 공산주의운동에서 손을 털고 상당수의 임시정부요인들과 진보진영 인사들이 불참했던 제헌선거에 참여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또 전술한 바 있거니와 초대 농림장관으로서 이승만을 도와 농지개혁을 단행한 사람이다. 그에게 잘못이 있다면 1956년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 진보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23.8%라는 높은 득표를 한 것이다. 조봉암은 1952년 제 2대 대통령에 출마했을 당시에는 11.4%를 얻었는데 이번에는 민주당 신익희 후보의 사망이라는 특별한 정세의 도움을 받고 아울러 6.25이후 이승만 정권이 집권유지수단으로 활용한 반공의 구호가 휴전의 성립과 전재복구의 진전에 따라 약효가 떨어지기 시작한데 큰 원인이 있었다. 특히 이 시점에 조봉암은 "피해대중 뭉쳐라", "평화적인 남북통일"론을 들고 나와 영호남 지역에서 높은 지지를 받았다. 당시 북진통일과 멸공통일을 집권의 주 무기로 삼던 자유당 등 보수 세력들은 평화통일론으로 젊은 유권자, 특히 영호남 유권자들에게 크게 아필하기 시작한 조봉암의 지지세력 신장을 심각히 우려했다.
한편 당시 신익희 후보의 유세 중 사망으로 대통령 후보를 내놓지 못한 민주당은 신익희 후보에 대한 추모 표를 유도하면서 야당인 조봉암후보를 반대할 것을 분명히 했다. 이것은 민주당도 휴전반대라는 면에서는 이승만과 한 길을 걸었기 때문에 평화통일의 기치를 내건 조봉암을 반대했던 것이다.결국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에게 간첩혐의를 씌워 민주당의 암묵적인 양해아래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1957년 7월 30일 사형을 집행했다. 이승만이 집권기에 범한 과오 중에서 큰 과오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이승만은 조봉암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것을 사법부의 판결의 결과로 받아들이고 자기의 과오로 인정했다는 증거가 없다. 그러나 사법부의 독립적인 판단이라고 하더라도 사면권을 가진 대통령이 사형집행을 묵인한 것은 그의 과오로 지적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놀라운 것은 김대중·노무현의 집권기간 중 의문사 진상규명 등 여러 가지 과거사를 재검토 하는 위원회가 구성되어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고 심지어 보상까지 해주면서도 조봉암의 문제를 아직까지 거론하지 않는 소이를 필자는 알 수 없다.
③ 1960년의 3.15부정선거와 이승만의 퇴진
1960년 자유당은 이승만과 이기붕을 정·부통령 후보로 내세우고 정권재창출을 기도했다. 그러나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지만 이 시기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필요했던 것은 능력 있는 후계자를 물색하여 권력을 잇게 해주거나 아니면 국가유지의 방법을 변경하여 경제건설의 비전을 제시, 국민들로부터 갱신된 지지를 조달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시대의 요구에 즉응할 새로운 대안을 강구하기에는 이념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너무 노쇠했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기득권세력들은 권력유지를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여기서 3.15부정선거와 시위대에 대한 발포가 나왔다. 이것은 앞에서도 지적했거니와 이승만 대통령이 스스로 인정한 정치적 과오이기 때문에 재론의 여지가 없는 과오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이 당시 이승만의 정권유지노력이 실패한 것은 아이러니지만 이승만 정권이 적극적으로 문맹을 퇴치하고 학교교육을 초, 중, 고, 대학까지 전반적으로 확충하는 교육개혁을 단행하고 전재복구와 경제발전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국민들의 민주역량을 해방직후보다 훨씬 강화시킨 결과였다. 이승만 정권이 키워놓은 국민들의 민주역량이 독재정권을 타도할 동력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승만 정권의 무리한 정권연장기도는 국민적 저항을 유발했고 젊은 학생들이 국민들의 선두에 서서 피로써 항쟁하며 민주주의를 부르짖은 것이 4.19혁명이었다.
1960년 4월19일 파고다공원에서 끌어내려지는 이승만 대통령 동상
이 혁명의 성공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권좌에서 물러나 하와이로 망명했다. 망명지에서 병고로 시달리던 이승만은 죽음만은 조국에서 맞겠다는 의사를 전했으나 당시 정권은 이를 거부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65년 7월 19일 서거(逝去)하고 시신(屍身)으로 귀국했다. 그의 시신이 돌아오는 날 서울 시내는 이승만의 서거를 애도하는 시민들의 인파로 가득 매워졌다. 그의 유족들은 국장(國葬) 아닌 가족장으로 영결식을 마치고 유해를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이때 서울은 물론이거니와 전국각지에서 수많은 추모인파가 몰려와 고인을 애도했다.
라. 6.25 당시의 한강 폭파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양민학살사건
상기 세 가지 사건들도 이승만 정권에게 책임이 돌아갈 과오의 리스트에 올라있다. 그러나 이 문제들 중 거창양민학살 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과 관련해서는 1951년 문책인사로 각료일부를 개편하면서 내무장관 조병옥을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임시켰다. 그러나 이 사건들은 그 본질이 전시에 발생한 군경의 작전에 관련되는 사항이었다. 또 양민 학살사건의 경우도 한국사회가 건국전야에 경험했던 여순반란 사건, 4.3 제주사건을 비롯해서 6.25당시 북쪽으로 철수 못한 공산군들이 민간을 볼모로 해서 지리산 일대에서 오랫동안 빨치산투쟁을 벌였다는 역사를 상기해 본다면 군이나 경찰의 작전수행과정에서 빚어진 사건들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사건들에 관해서는 국가 최고책임자나 군통수권자로서의 책임을 이승만에게 물을 수는 있겠지만 이는 대통령의 의지가 개입된 집권 욕에서 비롯된 과오로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피난민이 몰려오는 한강철교를 예고 없이 폭파한 사건, 수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된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등지에서 무차별로 양민들을 살상한 사건은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 시에 발생했고 희생자가 너무 많았다는 점에서 이승만 정권이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이승만 정권은 국민에게 이 사건들의 전후관계를 밝히고 옥석을 가려 희생자들에 대한 사과와 응분의 배상을 했어야 옳다. 이승만 정권이 이 책임을 못했다면 뒤이은 정부들이라도 국가수준에서 진상을 구명, 사과와 배상을 강구해야 하는데도 이 문제를 이승만 정권의 책임으로만 떠밀고 어느 정권도 제대로 된 처리를 강구하지 못한 것은 역사의 유감으로 남는다.
마. 친일파 옹호문제
끝으로 대통령으로서 이승만이 범한 과오 중에서 친일파를 일소하지 않고 오히려 이들과 야합하고 그들을 정부수립과정에서 중용(重用)했다는 사실이 중점적으로 지적되고 있다. 한국도 해방 후 친일분자를 마땅히 단죄해야 했고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반민족행위자 처벌법도 제정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친일파숙정에 지나치게 소극적이었고 심지어 이들을 정권창출과 유지에 활용하는 한편 정부수립 후에도 이들을 요직에 기용함으로 해서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지 못했다. 심지어 친일파들이 이승만 정권의 주구가 되어 해방 후 임정요인들과 반이승만(反李承晩) 계열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탄압했다.
그로서는 물론 친일파 처리를 태만히 한 것과 관련하여 좌우대립이 극심했던 해방정국에서 자율정부수립운동을 반대하거나 용공적(容共的)입장을 갖는 정치세력과의 대결 속에서 대한민국을 건국해야 할 긴급한 필요성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또 정부수립과정에서 일제 때 학창에서 공부한 인재들을 폭넓게 활용할 필요성을 내세울 것이다.
특히 이승만은 조선 왕정이 일본과 혈전(血戰)한 번 치루지 않고 국권을 일본에게 내주어 자기 백성들이 친일하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만든 장본인인데 이러한 역사의 원천책임을 묻지 않고 일제 치하에서 고통당하면서 살아온 고국 동포들을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과 반일로 양분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냐는 논리를 내세우면서 친일분자처단에 소극적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이런 주장은 한일합방직후 독립운동다운 독립운동이 활성화되지 못하고 일본에게 나라 뺏긴지 10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3.1운동을 전후해서 독립운동이 활력을 얻은 점, 그리고 국내 부르주아지들 가운데는 겉으로는 일제통치에 협력하면서도 이면으로는 독립운동을 후원하는 이중(二重)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적잖았다는 점들을 내세워 친일분자처벌을 적극화하지 않았다고 변명하는 입장도 보였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에서 민족정기확립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가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수립과 치안확보, 국방건설이라는 당면한 과제의 중요성, 효율성만을 내세워 친일분자처리문제를 소홀히 다루다가 6.25동란을 거치면서 유야무야 해버린 것은 마땅히 과오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그의 집권 욕과 깊이 관련된 처사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5. 글을 마치면서
이상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국내에서의 정치생활에서 들어난 공과 과를 대체로 검토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국내에서 거론된 평가논의의 핵심은 공(功)보다는 과(過)를 들추는데 치중했다. 과오를 지적함으로써 후세에 귀감을 삼자는 것은 옳지만 동시에 공헌도 평가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가진 지식과 정보의 양, 그리고 경험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을 정확히, 공정하게 평가하기 힘든 존재인 것 같다.
한 때 국내에서 저명한 논객으로 알려진 신상초(申相楚)씨는 이승만의 공과(功過)를 논하면서 공 3, 과 7(功三過七)로 채점하고 이러한 평가는 조금도 각박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가 집필한 시점이 1965년이기 때문에 이승만을 비판일변도로 보는 시류에 영합한 평가일 수 있다. 그러나 천관우(千寬宇)씨는 “우리나라처럼 인물이 많지 않은 형편에서 어떤 인물에 대한 극단적인 평가는 피했으면 좋겠어요. 한 인물에 대해서 조그마한 흠이라도 찾아서 부정적인 결론을 내리기로 말한다면, 성하게 남아날 사람이 우리 역사상에 몇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되도록 좋은 점을 발견하는 아량과 관용으로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총결산해서 플러스 편이 크면 우선 긍정적으로 평가해 놓고 그 테두리 안에서 흠을 말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고 말했다.
[중국의 모택동 평가가 주는 교훈]
지도자 평가문제는 중국공산당의 모택동 평가가 우리들의 관심을 끌어당긴다. 중국공산당은 1981년 6월 당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6중전회)에서 "당 역사에 관한 몇 가지 문제에 관한 결의"를 통해 모택동의 공과를 채점했다. 결의는 공이 70%이고 과는 30%였다. 공7, 과 3(功七過三)이었다.그러나 필자가 보기엔 이 평가는 모택동의 공을 지나치게 과대 포장한 것 같다. 모택동은 주지하는 바이지만 1957년의 대약진 운동으로 중국경제를 30년 이상 후퇴시켰고 1965년부터 벌인 이른바 문화대혁명을 통해 10년 동안 중국의 전토를 완전히 피폐의 극치에 이르게 했다. 문화대혁명과정에서 3600만 명이상의 중국인이 아사했거나 폭력에 희생되었다. 당시 국가주석이었던 류샤오치(劉少奇)는 1969년 홍위병들에게 구타당해 죽었고 등소평은 강남성 남창에서 트랙터 공장 직공으로 7년간 유배당했으며 그의 가족들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중국 변두리 지역의 인민공사로 배치되었다. 이러한 과오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은 모택동이 중국을 사회주의국가로 통일한 공로를 인정, 그의 공을 7, 과를 3으로 평가하여 중국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 모택동의 초상화를 항상 걸어놓게 하고 천안문 맞은편 광장에 모택동 기념관을 설치, 운영할 것을 결의했다.
중국공산당이 모택동에 대해 이처럼 관대히 평가한 것은 중국공산당의 일당 지배를 정당화하 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다. 만일 모택동을 과오일변도로 몰고 갈 경우 중화인민공화국을 이끄는 공산당의 역사는 정당성 위기에 직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결의를 채택하면서도 모택동의 과오가 워낙 심각했기 때문에 관련 자료를 검토해보면 논의과정에서 많은 고뇌가 있었던 것 같다. 예컨대 당시 정치국 상임위원이었던 천윈(陳雲)은 "모택동 주석이 1956년에 죽었다면 중국인민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언급했는가 하면 모택동과 모택동 사상을 구별, 과오를 줄이고 공을 부각시킬 논리를 개발하는 등 과오를 줄이고 공을 키우는데 어려움을 겪었음이 많은 자료에서 별견된다.만일 한국에서 이승만이 모택동만큼의 과오를 범했다면 그 시신은 한국 땅에 묻히지도 못했을 것이다.
가. 공헌부분
우리는 이 시점에서 이승만의 공과를 현재 밝혀진 자료와 대한민국의 정통성확립이라는 목적에 조명하여 공과를 재평가하고자 한다.
우선 이승만 대통령은 동서냉전으로 한반도가 남북한으로 분단될 수밖에 없던 역사적 상황 속에서 내외정세에 대한 예리한 통찰과 자율정부수립이라는 신념을 바탕으로 대미외교를 통해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그는 유엔감시하의 자유총선거를 통해 대한민국을 수립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유엔이 결의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의 지위를 얻게 한 점도 크게 평가되어야 한다. 이 점은 소련의 위성정권으로 출발한 북한과 너무나 대조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건국의 기틀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헌법을 갖는 국가로 세움으로써 공산독재를 추구한 북한과는 달리 오늘날 세계사의 중심대열에 올라서서 국가의 수준을 G20반열에 끌어올린 기초를 다진 것이다. 이점에서 우리는 초대 대통령으로서의 이승만 박사의 공헌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
둘째로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6.25동란에서 공산침략군 몰아내고 대한민국을 지킨 지도력과 전시외교능력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의 공로를 각별히 인정해야 한다. 특히 미국과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6.25동란 후 60년 동안 한반도에서의 전쟁재발을 방지, 한국이 오늘과 같은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안보환경을 조성한 점도 중요 공헌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건국의 기초를 마련하는 내정개혁에서 보인 성과도 그의 주요 치적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공헌의 내용은 앞에서 검토한 '4의 나, 다, 라'항으로 대체한다. 이 자료를 보면 한국에서 60년대부터 시작된 개발연대가 이승만 대통령 집권기에 그 기초가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 과오부분
첫째 고령의 비극과 장기집권의 획책을 지적한다. 그는 인생 70세에 귀국하여 73세에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75세부터 3년간 6.25동란을 겪었다. 3.15 부정선거로 그가 하야할 때의 나이는 85세의 극 노인이었다. 그가 재선임기가 끝나는 1956년에 정치인생을 마감했더라면 그는 훌륭한 지도자의 한 분으로 역사에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1960년 3.15 정부통령 선거에서 불법, 부정선거로 정권을 연장하려다가 이에 항의하는 학생 시위대들에게 발포, 수많은 사상자를 낸 것은 치유할 수 없는 과오가 아닐 수 없다. 자기가 집필한 『독립정신』속의 민주주의 정신을 스스로 망각한 것이다.
둘째로 앞으로 정권을 노릴 유력한 정적(政敵)이 될 것이라는 우려에서 진보당을 탄압하고 독립운동가인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것은 중대한 과오가 아닐 수 없다.
셋째로 친일파 처리를 유야무야하고 심지어는 친일파들이 국정의 요직을 장악, 독립지사들을 감시, 심문하는 위치까지 오르게 한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과오였다.
다. 총평
현시점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공과를 세계 속의 한국이라는 큰 안목에서 교량(較量)하면 대한민국의 국가로서의 초석을 올바로 세우고 한반도의 공산화책동을 막아낸 공로에는 큰 방점을 찍을 수 있다. 그러나 고령에도 불구하고 장기집권 욕에 사로잡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과오를 법한 것은 그의 업적의 액면 가치를 크게 감살 시켰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현시점의 이승만 평가를 중국공산당의 모택동 평가처럼 공7과3식으로나 신상초 씨처럼 과7 공3식으로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1990년대와 더불어 공산주의의 길을 택한 소련을 비롯한 동구제국이 몰락하고 오늘날의 참담한 북한실정을 보게 되면 이승만 대통령이 저초(底礎)한 건국노선이 너무 정당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점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구상과 추진이 갖는 의의를 새삼 재평가 하게 된다.
또 3.15부정선거와 학생데모대에 발포한 이승만의 큰 과오를 제외한 여타의 반민주행위는 1960년대에 걸쳐 신생국들에서 발생한 민주주의의 변질, 왜곡, 헌법외적 정부의 출현 등의 현상과 민주당 정부를 무너뜨린 5.16군사혁명 후 25년간 지속된 군사권위주의 정권의 역사를 되돌아 볼 때 결코 절대악(絶對惡)인 것처럼 단죄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서구식 민주주의가 한국에 정착되는 과정의 진통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현재 밝혀진 사료에서 보면 이승만 대통령을 한반도의 영구분단의 원흉이라거나 6.25동란을 초래했다는 평가는 공산권 자료들이 공개되기 이전의 자료부족에 기인하거나 아니면 냉전사에 뿌리를 둔 잘못된 평가였다. 남북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이 김일성과 스탈린의 한반도 공산화전략의 산물로 밝혀진 이상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잘못된 평가는 응당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주 독재자뿐만 아니라 국토영구분단의 원흉, 6.25동란의 유발자라는 덤터기까지 한데 뒤집어씀으로써 그의 공헌은 부정되고 과오만 부각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의 공헌도 바로 지적되고 올바른 역사의 내용으로 채워져야 할 것이다.
4.19 혁명은 이승만 대통령을 권자(權座)에서 몰아냈지만 그렇다고 그의 과오만을 들추어내서 그를 역사 속에 매장하자는데 목적이 있다고 말 할 수는 없다. 이승만 대통령 시대로부터 이 땅에 뿌려진 민주정치의 씨앗을 잘 북돋고 바로 키워 국가의 더 큰 발전을 이룩하자는 데 참뜻이 있었을 것이다. 4.19혁명 50주년이 이 나라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박사의 위치를 재조명해주는 희년(禧年)정신실천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필자: 이영일(李榮一)
①4.19혁명당시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정치학과 3년생으로 문리과 대학 학생 데모의 준비, 조직,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
② 국토통일원 정치외교정책담당관 및 교육홍보실장, 통일연수원장 역임
③ 11대, 12대, 15대국회의원 및 국회문교공보위원장 역임
④ 일본츠쿠바(筑波)대학 국제정치 객원연구원 역임
⑤ 호남대학교 및 우석대학교 초빙교수 역임
⑥ 한중문화협회 총재 및 중국베이징대학 동북아 전략연구 중심 초빙연구원
⑦ 호남대학교 명예 법학박사취득
⑧ 정부의 홍조근정훈장, 벨기에 정부의대십자수교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