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증 목사의 시국에 대한 소견을 소개한다.

 박상증 목사 이력 : 1960∼80년대 국내 1세대 에큐메니컬 운동가이자 전 세계 에큐메니컬 진영에서 활동한 몇 안 되는 국내 인사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간사, 세계교회협의회(WCC) 간사,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총무,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기사연) 원장을 역임했다. 90년대 후반부터는 시민단체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참여연대 공동대표(10년 재직)를 거쳐 지금은 아름다운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Good Society Issue Letter 2010년 8월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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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대강 문제도 보면, 4대강 문제라기보다 대 정권 투쟁같이 보입니다. 4대강 이슈로서 토론했으면 좋겠는데 정권 심판 이렇게 나오니까 그것에 대한 종교계의 참여라는 것을 '좀 더 선별적으로 해야 될 것 같다'라고 생각합니다. 정권 타도가 목적이 아니잖습니까. 옛날 군사정권이고 유신체제라면 또 다른데 합법적으론 어느 정도 민주화되어가는 과정에서 큰 역사적인 흐름 속에서 봤을 때 프로세스입니다. 프로세스 속에서 야당도 있고 여당도 있고 하는 것인데 교회라고 하는 것이 정당정치에 휘말려 들어가지고 어느 한편에 선다 하는 그런 입장은 내가 봤을 때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제가 4대강 문제도 반대 발언은 많이 들었습니다. 찬성 발언은 한 번도 못 들었습니다. 주장하는 내용을 보면 4대강이라고 하는 것이 어느 만큼 우리나라 역사에서 국민들에게 해로운 것이냐 하는 것을 정말 정확하게 해주려는 노력은 없고, 내가 은평구에 사는데 이번에도 보니까 정권심판이더군요. 그런데 “정권심판은 좋은데 은평구에서는 무엇을 할 꺼냐?”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까? 그런 맥락에서 NCC가 그렇고, 가톨릭 신부가 그렇고, 불교가 특히 강하게 반대하는 것을 볼 때 내가 동참하기 어려운 운동같은 느낌을 가지게 합니다.

  사회자:

  그러나 정권타도를 액면에 내세우지는 않지요. 환경이나 생명문제를 중심 이슈로 삼아 논리를 전개합니다.

  박상증 목사:

  그런데 생명도 김지하는 다른 차원에서 하잖습니까?. 생명도 여러 가지로 사람들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을 이루려는 생동감과 시민을 감동시키는 비젼(Vision)은 아직 부족한 것 같습니다. 대정부 저항이라고 하는 것은 유신시대의 저항과 선별해서 우리가 식별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덮어놓고 정부 반대하는 것이 시민의 역할이다 하는 주장을 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 와서 그걸 느낍니다. 내가 예전에 몇 번 행사가 있어서 영산강에 갔습니다. 그런데 나는 영산강이라고 하는 강이 옛날에 큰 강인줄 몰랐습니다. 전남 나주에 있는 목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건 김대중 때부터 해야 하는데 못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근데 다리 건너가는 곳에 등대가 있더군요. 아주 흙에 파뭍혀 있는 등대가 뭔가 했더니 ‘옛날에 포구였다’는 겁니다.

  그러면 영산강을 살리는 것이 뭐가 그렇게 나쁘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지사도 좋다고 하고, 시장도 좋다고 하는데 왜 민주당은 반대합니까? 그러면 4대강 문제도 영산강을 빼고 해야지 않겠습니까?, 내가 볼 때 영산강을 2번 가보고나서 느낌이 있는데, 4대강 떠드는 사람을 동조 못하겠습니다. 그러면 나한테 영산강에 대해서 설명을 해줘야지요. 정권심판론은 내가 봤을 때 교회가 지양해야 될 성격이 좀 있습니다.

  천안함 사건도 오늘 중앙일보 보니까 김상근 등등이 미국 가서 역설을 하고 다니는 모양입니다. 미국에 그들이 가서 애기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들은 내가 미국에서 민주화운동 할 때 같이 이야기하기 어려웠던 사람입니다. 그건 분명합니다. 친북파이니까요. 교민들 돈 모아서 이북에 보내주고 왔다갔다 하는 역할은 그것까진 좋지만 그 사람들하고 같이 일을 하기 어려웠습니다. 그 사람들이 계속해서 김정일하고는 친한데 소위 보수정당 이명박 정권은 타도해야 할 정권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런 식인 시민운동은 과거 민주화 운동을 했던 사람으로서 동승하기 어려운 부분이 없잖아 있습니다. 교회의 사회참여라고 하는 것은 NCC가 반대하고, 가톨릭 신부들이 반대하고, 주교회의가 반대하고, 불교도 반대하는데 박상증 목사가 '니가 뭐가 잘났다고 혼자 떠드느냐?'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잘난 건 아니지만 그에 대해서 저는 비판적인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개신교에서 한기총과 함께 간 것도 아닙니다. 한기총은 나같이 에큐메니칼 운동을 하는 사람은 빨갱이로 봅니다. 그러면 에큐메니칼 운동을 하는 사람으로서 현재 한국의 NCC의 모든 주장을 그대로 다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비판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난 그런 입장입니다.

  박상증 목사:

 촛불시위를 주도했던 사람들은 그 운동을 어떻게 자체 평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만 나는 촛불이 반미 반정부행동의 상징이 되는 것에 어떤 모순을 봅니다. 말없이 자신의 몸을 녹이면서 빛을 비치는 희생의 상징인 촛불이 저항과 부정의 상징이 되는 것을 두 번 봤습니다.

  죽음을 가져온 사건 광우병 걸린 고기를 반성없이 국민에게 먹이는 정부라는 선동! 나는 일련의 사건을 통하여 내가 소년기에 겪었던 남한단독정부 부정을 앞세우며 북한정부수립을 위한 비밀선거에 동참을 강요하던 세력과 촛불시위에 비추어진 소위 선거부정의 정서에 어떤 역사적 연결고리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전쟁과 평화를 선거전에 이용하는 데마고그적인 전략도 Populist의 Propaganda로 보는 것은 단지 내가 나이 먹고 역사현실을 분명히 보지 못할 만큼 노쇠해졌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나는 역사는 큰 하나의 Process고 그 프로세스를 완벽하게 설명하려는 이념이나 사상에는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입장을 가지고 에큐메니컬 운동과 시민운동의 접점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아마 그래도 실패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회자:

 종교의 사회 참여에 대한 깊고 넓은 지식과 탁견을 나눠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시초에 로마의 정교일치에서 시작해서 정교분리로 사회와 종교의 역할관계가 정립된 과정,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교회가 해온 역할, 4대강 사업이나 촛불시위 등 현안과 관련된 종교의 사회참여 이슈에 대한 바람직한 시각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또 4대강, 광우병 촛불시위 등 최근의 이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주제를 핵심적으로 정리를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말씀하신 내용 중 종교의 사회참여는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선별적으로 해야 한다’ ‘균형감각이 있어야 한다’는 표현이 기억에 남습니다. 이런 것들이 결국 요즘에 종교의 사회참여가 지향해야 할 과제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중요한 사항을 짚어주시고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주신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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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이제 총대통일론을 들고 나왔다.

ⓒ열린북한방송(2010/07/28 현건) 2010년 4월 28일자 조선인민군보 기사

북한 인민무력부기관지 조선인민군(이하 군보) 분석 결과 천안함 격침이 있은 4월 이후부터 “총대로 조국을 통일하자”는 내용을 부쩍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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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간 북한은 통일 문제에 있어서는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부각하면서 《우리 민족끼리》정신의 자주적 통일을 강조해왔다. 이는 2010년 신년사에서도 다시 한번 강조되었다.

 

그러나 올해 군보 내용을 분석해 본 결과 6.15, 10.4 선언에 대한 강조는 4월 9일 김영춘 인민무력부장이 김정일 국방위원회 위원장 17 돐 기념 중앙보고대회의 보고에서 잠깐 등장할 뿐 그 이후에는 등장하지 않고 있다.

 

대신에 “총대로 조국을 통일”해야 한다는 무력통일정신을 부쩍 강조하고 있다.

 

가령 4월21일자 군보1면의 “총대로 결판낼 각오안고”라는 기사에서는 “수령님의 조국통일 유훈을 반드시 총대로 이룩할 각오”를 역설하고 있다.

 

아울러 4월 28일 군보4면의 “총대로 조국을 통일하자”는 기사에서는 포스터까지 게재하면서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원쑤들의 그 어떤 <<대화타령>>에도 끄떡없이 <<향기로운 바람>>에도 흔들림없이 오직 총대로 남녁땅을 해방하고 한나산마루에 승리의 깃발을 휘날릴 굳은 신념안고 백두산총대를 더 높이 추켜들자”

 

여기서 보듯이 북한은 통일을 위한 남북 대화는 의미없다는 식의 주장을 하고 있다.

 

그리고 군보 5월2일 2면 ‘인민군대의 총창우에 강성대국도 조국통일도 있다“는 기사에서는 “조국통일위업은 오직 총대로써만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은 력사에 의해 확증된 진리이다”고 말하고 있다. 평화적 통일은 애시당초 불가능하며 오직 무력적화통일 밖에 없음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북한이 올해 들어 “총대 통일” 사상을 유난히 강조하고 있는 것에 대해 한 북한 전문가는 “올 1월 5일 북한 중앙TV가 남한의 주요 도시를 공격 대상으로 상정해 사단급 탱크부대가 진군하는 장면을 공개하였는데 총대 통일 강조는 이 연장선상인 것 같다. 북한이 후계 세습을 위한 내적 단결을 위해 의도적으로 남북 대결을 고취하고 북한 내부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것 같다”고 분석 했다.

 

또 다른 전문가는 “북한이 김정은 시대의 국가 목표를 무력적화통일로 정하고 이를 선전하고 있는 것 같다. 즉 김일성은 조국 해방을, 김정일은 강성대국을 이루었다면 김정은 시대에는 통일조국을 달성하자는 목표를 정하고 이를 선전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분석했다.

 

지난 7월 20일 제임스 클래퍼 미국 국가정보국(DNI) 국장 지명자는 “북한이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남한에 직접적인 공격을 가하는 `위험한 시대'에 진입했을 수 있다”고 밝혔다. 즉 북한의 대남 무력 공격이 이번 천안함 공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또다시 재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북한의 “총대 통일” 사상 강조는 북한의 추가 대남도발 가능성과 관련하여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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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허문도 전 통일원 장관이 천안함 폭침 사고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6.25동란 60주년을 맞는 날에 정리해서 발표한 글이다 내용이 너무 교훈적이어서 함께 나누고자 한다. 이영일

북의 정치전쟁 공세와

역전의 전략

전 국토통일원 장관 허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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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에 달하는 대통령 지지율과, 정부의 천안함 사태 대응조처에 대한 국민다수와 주축언론의 압도적 공감은 연이어 졌던 지방선거의 여권 완패와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가. 의문이 남았을 것이다, 특히 여권 인사들에게. 견제민심이나 소통만으로는 풀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사진은 허문도 전 장관
천안함 사태로 접근해 본다. 사태는 아군의 함정이 적방으로부터 기습 당한 대적(對敵)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다.

 對敵상황의 문제에 의문이 있다면 우선적으로 전쟁의 논리로 풀어 보는 것이 순서다. 아무리 첨단 병기가 발달해도, 영원히 변치 않는 철리(哲理)가 있다. 전쟁은 정치의 도구라는 것이다. 원조 클라우제비츠의 표현을 새삼스럽게 옮기면, 전쟁이란, 다른 수단으로 행하는 정치의 연장일 뿐이다.

 달리 말하자면, 전쟁이란, 혹은 군사공격이라 해도 좋고, 정치와 따로 떨어져서 독립하여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천안함 사태를 치뤄내고 있는 우리 정치인, 지도자들이 제일 명념해야 할 얘기가 아닌가 한다.

 생사를 걸고 일 벌이려 드는 자들한테 전쟁 따로, 정치 따로는 없는 것이다. 전쟁을 지도하는 자의 염두에 정치가 있기 때문에, 군사공격의 궁극의 목적은 적의 섬멸이기 보다는 정치를 조종하는 적 수뇌부의 의지에 변화를 일으키고 의지를 제압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오늘의 전쟁론은 전쟁에 이기기 위한 방략인 전략의 노림수를, 적방의 의지를 흐트려 버리는 교란, 혹은 정신적 해체에다 두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 일어나 있는 현상, 두 눈 뜨고 과학의 결론을 아니라 하는 자가 무더기로 생겨나고, 국민이라면서 국가정체성의 울타리를 예사로 뛰쳐나가 버리는 현상 이는 우리사회의 정신적 해체라고 할 만하다. 북의 전략이 먹혀들고 있는 것이다. 정책상의 목적달성과 무관한 전략은 있을 수 없다. 전략이란 군사력을 정치목적에 연결지우는 가교라도고 한다. 그러므로 전략원칙에 투철한 자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군사공격은, 전투를 엮어 실행에 옮기는 활동과, 그 전투의 결과를 정치목적에 결부시키는 활동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 정도를 확인하고서, 서두의 천안함과 선거문제로 들어간다.

 먼저 지적해 둘 것은, 감사에서 드러났지만, 천안함 사태까지의 우리군대는 태평양 전쟁의 일본군대, 베트남전의 미국군대 급으로 전략부재의 군대였다는 것이다. 예상된 공격에 대비하지 않은 군대, 반잠수정이 새떼로 둔갑하는 거짓말보고가 복수의 상하 간에 용인된 분위기의 군대, 반격 결단의 기를 놓치게 하는 늑장 지연보고의 깨어 있지 않은 군대, 이런 군대는 국방비를 많이 쓴다 해도 전쟁할 수 없는 군대다. 그 정도의 희생으로, 이 같은 실상을 알게 된 것은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이 같은 군대의 책임의 귀속처는 대전략의 주재자인 최고사령관이라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녹림 군, 룸 펜 프롤레타리아, 빈농군상의 집합체인 중국 홍군을 강대한 장개석(蔣介石) 군대를 구축하는 강군으로 만든 것은 모택동 한 사람이었고, 프랑스 혁명정부의 오합지졸 같은 군대를 유럽을 제패하는 군대로 만든 것은 나폴레옹 한사람이었다.

정치공격의 시동

군사적 승부 없이 통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북의 선군주의다. 위에서 보았던 전쟁과 전략의 논리에 투철할 수 밖에 없는 북측은, 천안함 폭침만으로 상황 끝하지 않는 집단인 것을 태평성대 속의 남쪽 천지가, 알게 하는 지도자는 없어 보인다.

 

폭침에 이어 가해주체를 규명하는 작업이, 무슨 해난사고라도 만난 양 매스콤을 통해 국민시선을 모아놓고 진행되었다. 남측이 이공적(理工的), 자연과학적 진실추구를 위해 벌려 놓은 공간을 북측은 인문적, 정치선전의 마당으로 활용했다. 신문논조는 정부가 결론 낸 다음에도 의혹제기를 계속하는 정치선전을 두고 과학을 모른다, 괴담이다, 도덕성이 어떻다고 비아냥거렸다. 이들이 과학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남쪽의 조야가 전쟁이 뭔지를 모른다가 더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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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함폭침사고관련 국방장관 기자회견사건)

북측은 폭침이라는
전투의 결과정치목적에 결부시키는 활동을 한 것이다. 이때에 좌익정권 10년에 남쪽에 뿌리내린 북측의 콤만도나 에이젼트는 선전부대로 모자랄 것이 없었다. 국내건 국외건 출격을 가리지 않았다.

 

진상발표 후의 북측의 선전주제는 전쟁위기 강조였다. 지방선거 날을 일주일 남겨놓은 5월 26일에는 인터넷에 내일 아님 모레 전쟁이라고 올랐다. 이어서 군인과 예비군, 만 17세 이상 남자들은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대통령 때문에 모두 죽게 생겼다.가 떴다.

 

드디어 전쟁공포와 염전사상을 터뜨리고 나온 것이다. 전쟁이 났다면 먼저 전쟁터에 나가야 할 세대인 20 - 30대를 향해 정확하게 겨냥된 정치어뢰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중심에서 살고 있는 민, 정, 관, 군 모두의 감각이 천안함 기습에 이어지는, 북의 전략에 연동하는 정치공격을 상상이나 했을 것인가.

 

눈이 밝은 주축언론조차 북한제조의 정치어뢰를 과학적 몰상식, 도덕적 미숙성, 철부지들의 인터넷 심심풀이 괴담 이상으로 대접을 못했다.

선거 하루 이틀 남겨놓고 1번 찍으면 전쟁난다.는 삐라가 전국적으로 뿌려진 것 같다. 선거 전날 접적지역인 강원도 고성을 다녀온 사람이 전언했고, 서울지역의 보도도 있었다. 여권의 정치인들은 강원도의 정치전향의 이유로서, 아무라도 떠드는 견제민심이나 소통말고 아는 것이 있는가.

 

지방선거로 깨져 나간 것은 50%에 달했던 대통령 지지의 중도선호(中道選好)여론이 아닐 것인가. 대적(對敵) 상황에서 중도론(中道論)은 이념일 수 없다. 대결의 현실에서 이념적 긴장이 싫어서 피신한 공간이 중도 실용의 세계인 것이다. 리스크 부담 앞에 서기만 하면, 하루아침에 깨져나갈 숙명이 중도선호여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북의 전략은 남쪽 내부를 잘도 꿰뚫어보고, 군대 가기 싫은 풍요속의 인터넷 세대와 리스크라면 피하고 싶은 중도선호여론 앞에 정확하게 전쟁공포를 들이 댔던 것이다.

 

북의 전략에 공략당한 남쪽 수뇌부의 의지는 흔들려 보인다. 내용이 무엇이던 선거 전에 추진하던 정책을 선거 후에 포기하도록 방치한다면, 이는 북의 전략의도에 영합하는 행위일 수밖에 없다. 북의 기습이 만들어 낸 정치구도이다. 북의 전략의도에 영합한 지도자를 잠을 깬 국민은 쳐다보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평화통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다. 여권에 대국을 볼 줄 아는 눈은 없는가. 딴 곳 쳐다보는 사람들하고 초당체제(超黨體制)한다고 떠들지 말고, 거당체제라도 성사시킨다면 역전(逆轉)의 전략을 주도할 수 있을 것이다. 천하가 품을 벌릴 것이다.

 

북의 천안함 폭침 전략이 일으킨 남북상황의 질적 변화 두 가지를 지적해 두겠다. 통일당한 월남의 길을 가지 않겠다면 절대로 주목해야 할 사안이다.

 

첫째로는, 그동안 3차에 걸친 서해해전에서 드러났던, 물량적 열세를 극복할 비정규전의 전술을 북은 드디어 개발해 냈다는 사실이다. 비유하자면, 모택동이 물량적으로 우세했던 장개석의 포위토벌전을 극복하고자, 유격전술을 창안하여 反포위토벌전의 전략기초를 확립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둘째로는, 군사공격에서 시발한 전략이 추구하는 정치공세를 통해 북은 남의 정치판을 요리할 확실한 실적과 공산을 확보했다는 사실이다. 그 위에 좌익정권 10년이 남긴 남쪽 사회내(社會內) 진지(陣地)의 효능을 십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적의 전선(戰線)이 한국사회내부에 생겨나고 말았다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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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함 사건이후 불법으로 북한에 들어간 소위 한상렬목사의 작태

이는 월남전에서 공산측이 Tet공세(68년 구정, 전국적 동시 다발 도시 게릴라)를 통해 얻게 된 정치효과에 비견할만한 것이다. Tet공세를 통해 공산측은 군사적으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지만, 도시지역인데다 공산측이 선전공세를 곁들여서, 미국의 안방에 TV와 언론을 통해 과장된 미군의 희생과 전쟁의 참혹상을 집어넣었던 것이다. 반전(反戰)여론에 문이 열렸다. 월남전의 터닝 포인트였다.

 

여러 과정이 있었지만, 이 반전여론의 연장선상에서 전투에서는 패해 본 적이 없는 미군이 초기의 목적을 버린 채 철수하고, 패전하고 만 것이다.

천안함 사태가 가져온 위의 두 가지 실점(失點)은 대한민국이, 로마에 멸망당한 경제대국 카르타고나 통일당한 구 베트남의 길을 가지 않으려면 반드시 극복해야 할 사안이다. 알았다면 희망은 있다. 역전의 전략을 창안, 가동해야 할 것이다.(201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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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국제문제 8월호 이영일 칼럼에 기고한 글임)

지금은 정부가 남북대화를 서둘러 재개할 때가 아니다.

1. 북한의 적화통일역량은 끝났다.

오늘의 한반도 안보상황은 천안함 사태에도 불구하고 국제위기그룹(ICG)이 세계 각국에 그 위기수준을 알리는 분쟁위험지역리스트에 오르지 않은 상태다. 분쟁이 발생할 요인이 없어서가 아니라 한반도를 에워싼 세력균형이 북한 측에 불리하게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간 북한은 한반도는 휴전 중(休戰中)일뿐 통일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는 명제 하에 무력남침을 꾸준히 준비해왔다. 그러나 북한의 무력통일노선은 국제사회의 지지를 상실했다. 북한과 유일하게 쌍무적 안보동맹을 맺고 있는 중국도 북한의 전쟁노선을 확고히 반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북한의 두 차례에 걸친 핵실험을 규탄하는 유엔안보리의 결의에 중국은 찬성표를 던졌다. 북한과 러시아간의 우호조약은 문자 그대로 우호조약 일 뿐 안보지원의 성격을 탈각한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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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군사회담 광경)
또한 북한 자체의 적화통일추진역량도 만성적인 식량난, 에너지난, 원자재 난으로 전면적인 파국에 직면했다. 물론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개발이 국내외적으로 과시한 통일역량 같지만 이는 오히려 국제적 견제의 대상이 됨으로 해서 북한의 대외 고립과 경제난을 가중시켰다. 결국 북한의 핵개발시도는 한국 통일을 지지할 국제여론조성에 엄청난 난관을 조성했다. 우리 주변국들은 북이 핵을 포기하지 않는 한 한국 통일의 정당성에 대한 지지를 주저할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은 결국 침체와 추락으로 운명 지워진 낡은 사회주의계획경제의 틀을 중국처럼 과감히 내팽개치고 개혁, 개방으로 나서는 대신 ‘주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이를 유지하려고 버티다가 마침내는 주민들의 끼니조차 돌볼 수 없는 지구최빈국으로 전락하였다. 또 지난해에는 그간 배급제의 붕괴이후 주민생활의 근거가 되어온 초보적인 장마당 시장을 다시 정권의 계획경제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화폐개혁을 감행했다가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는 역풍을 만나 경제의 총체적 파탄을 가져왔다. 여기에서 비롯된 식량난과 인프레로 지난 5월 26일에는 북한주민각자가 자기 식량을 자기가 알아서 해결하라는 이른바 ‘5.26조치’를 내렸다고 한다. (좋은 벗들 2010년 6월14일자 북한소식 340호 참조 ) 이 조치가 사실이라면 김정일 정권은 더 이상 사회주의라는 말조차 꺼낼 자격을 상실한다.


2. 북한이 다시 꺼내든 서울 ‘불바다’ 론

북한은 자기들의 처지가 그 어느 때 보다 더욱 악화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즈음 1994년에 들고 나왔던 서울 “불바다” 론을 다시 꺼내들었다. 휴전선에 배치된 장사정포로 서울을 공격해서 불바다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심리전으로는 가능한 이야기이지만 북한정권이 자멸을 각오하지 않는 한 실제상황은 될 수 없다. 북한 군 지휘부도 남북한 간의 군사적 실력격차를 잘 알고 있다.

특히 북한이 한미연합방위체제를 선제공격했을 경우에는 6.25의 경우와는 달리 한미연합군이 행사하는 자위조치를 김정일이 혼자서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중국은 북한과 체결하고 있는 상호 원조조약에서 북한의 사전행동이 원인이 되어서 전쟁이 발생할 경우 어떠한 군사지원도 제공하지 않을 것임을 명백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안함 사건은 북한이 완전범죄를 목표로 감행한 도발이기 때문에 국제사회의 공동조사로 북한의 행위임이 밝혀졌는데도 철저히 이를 부인하는 자세로 일관 대처하고 있다. 유엔안보리가 북한책임을 지적할 경우 유엔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떼거지를 쓴다. “큰 거짓말은 진리로도 통용”될 수 있다는 스탈린의 선전전술을 그대로 활용하는 것 같다. 그러나 북한의 어떠한 군사도발도 그것의 필연적 결과는 북한정권의 괴멸이다.


3. 북한은 아직도 ‘남조선’ 해방에 미련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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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상황은 북한이 줄곧 추구해 온 한반도의 적화통일이 더 이상 실현불가능 함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아직도 남조선 혁명에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그것은 민주화이후의 한국사회의 분위기가 자신들의 적화통일에 유리한 여건을 조성하고 있다고 자평하기 때문이다. 민주화이후 1998년 정권장악에 성공한 김대중 정권과 그에 뒤이은 노무현 정권의 용공통일정책은 북한의 입장에서 볼 때 북한이 원하는 남한내부의 적화혁명동조역량이 크게 강화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우선 김대중 정권은 전교조(全敎組)와 민노총(民勞總)을 합법화 했고 북한군을 한국군의 주적(主敵)개념에서 배제했으며 햇볕정책의 이름으로 북한에 제공한 현찰외화를 포함한 거액의 경제지원이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에게 보다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돕는 선군정치(先軍政治)를 뒷받침했기 때문이다. 또 김⦁노 양 정권 하에서는 북한정권이 그들의 선전과 심리전의 주공목표로 삼아온 남한에서의 반미선전선동사업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훨씬 더 고조되었다. 예컨대 전교조와 민노총이 앞장서서 미군의 탱크운전사고로 두 명의 한국 여학생이 숨진 사건을 반미대중운동의 소재로 키워 전국적인 반미운동으로 확산시켰고 미군기지 평택이전 반대투쟁, 맥아더 동상 철거투쟁 등은 하나같이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이른바 남조선 혁명지원역량이 그 어느 때 보다 고양되었다고 판단할 요소가 된다.

여기에 곁들여 김대중, 노무현정권이 과거 정권에서 간첩죄나 이적활동으로 처벌받은 인사들을 과거사위원회를 통해 민주인사로 재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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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서 상당액을 보상해주는 조치를 취해줌으로써 국민들의 안보관, 특히 청소년들의 안보의식을 사실상 마비시키는데 성공했다고 볼 것이다.

이러한 투쟁을 주도한 진보좌파들은 정권이 바뀐 후에도 반미투쟁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이명박 정권의 미국산 쇠고기수입문제를 반정부 대중투쟁의 유발요인으로 활용, 촛불시위를 확산함으로써 이명박 정권의 존립을 위협했다. 여기에 북한이 "남조선 혁명"의 미련을 버릴 수 없는 까닭이 있다.

4. 한국사회의 다양성을 적화통일동조로 오인

북한이 시대착오적인 대남적화통일의 망상을 버리지 못하고 버티는 것은 남한 사회가 국론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북한 측의 대남공작이나 주장에 동조하는 세력이 아직도 한국 사회 내부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북한은 이미 망가진 경제 재건보다는 핵과 미사일 개발에 제한된 역량을 집중하면서 남한사회내부의 모순과 갈등개발에 전력을 투구하고 있다. 현재 천안함 폭침사건의 모순조작에서도 일정한 성과를 얻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남한의 이른바 진보세력들이 모두 적화통일동조세력은 아니다. 물론 이들 가운데는 진보는 곧 친북(親北)내지 대북동조라는 낡은 공식에 사고가 닫힌 사람들도 없지 않다. 이러한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진보진영 인사들 가운데도 오늘의 북한경제 사정이나 정치 상황을 자기들이 지향하는 목표나 비전으로 보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잘 살고 못사는 것을 떠나 먹을 것, 입을 것, 치료받을 의약품이 태무한 북한을 동경하는 진보세력은 없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에 걸친 정권세습을 정당하게 받아들일 진보세력도 없다. 북한의 핵개발이 반전평화운동에 역행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진보세력도 없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한국형 진보세력가운데는 이렇게 오도되고 있는 북한을 바로 잡기위해 희생을 각오하고 북한체제의 개혁을 위해 당당히 월북, 김정일을 상대로 개혁투쟁을 전개할 용기 있는 인사들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한국헌법이 민주주의의 다양성 존중이라는 원칙에 입각, 보호해 주는 권리를 등에 업고 진보적 가치 추구라는 명분하에 친북 내지 대북동조 활동을 벌이는 것이다. 이들의 활동은 마치 사발 안에서 낚시질하는 어부(漁夫)같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그러나 나는 역사의 편에 섰다"고 자위(自慰)할지 모른다.

1990년대 중엽부터 시작되어 최근 새롭게 고조되는 탈북현상은 북한주민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체제저항이다. 그러나 자신을 열렬히 진보라고 주장하는 사람일수록 배고파서 북한 땅을 등지고 뛰쳐나온 탈북자들에게 겨자씨만한 동정심도 베풀지 않는다. 탈북자 돕는 일을 반 진보(反進步) 진영에 가담하는 것으로 동일시하는 천박성 때문이다.

오늘의 한국은 민주화를 이제 막 시작하는 나라가 아니다. 이미 성취된 민주화선상에서 한 차원 더 높은 선진화를 향해 달리는 G20국가의 일원이다. 한국 사회에서 들리는 친북적 목소리나 주장을 적화통일에의 동조로 보아서는 안 된다. 한국이 민주화의 결과로 다양한 목소리를 받아들일 만큼 국가포용능력이 커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지금 전 세계는 ‘남조선 혁명’보다는 임박한 북한의 내부혁명을 기다리면서 지켜보고 있다.

5. 금강산 관광객 사살은 포용정책의 사살이다.

현시점에서 한국의 진보세력과 야당들은 6.2지방자치단체선거가 햇볕정책으로 표현된 대북포용정책의 정당성을 국민들이 수용한 결과라면서 포용정책 재개를 이명박 정권에 강력히 압박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햇볕정책의 파탄이 현 정권 아닌 북한 정권 자신의 소행에서 비롯된 것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2008년 7월 11일 금강산에서 발생한 관광객 피살사건은 북한이 마땅히 사과, 해명하고 재발방지의 성의를 보였어야 했다. 북한은 서해에서 발생한 연평해전 중에도 금강산으로 가는 관광선을 띄워 북한의 비위를 맞춰주었던 김대중 정권처럼 이명박 정권도 북한이 사과나 재발방지를 약속하지 않더라도 남북대화에 매달리면서 금강산 관광을 그대로 지속시킬 것으로 예상했던 것 같다. 그것은 북한의 오판이었다. 국민의 생명을 위험상황에 방치하면서 금강산 관광을 계속할 정권은 지구상에 없기 때문이다.

북한은 금강산 관광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개성공단의 통행로 차단과 체재인원 감축, 마침내는 공단 폐쇄까지 위협했다. 그러나 공단폐쇄는 북한에 치명적 손실을 입힐 것이다. 3만5천명을 넘는 북한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고 그들에 딸린 가족들을 합하면 10만 명이 넘는 북한주민들이 김정일 정권을 원망하면서 휴전선일대에 깔릴 것이다. 또 개성공단은 한국이 보내는 송전(送電)스위치를 끄는 순간 언제나 가동중단에 빠질 운명이다. 한국의 야당들이나 좌파들은 이러한 사정을 잘 알면서도 정부가 마치 포용정책을 버렸다고 비판하는 것은 전혀 사리에 맞지 않다.

6. 모든 사태에의 의연한 대처만이 평화의 보증이다.

남북한관계는 현시점에서 한국이 천안함 폭침사건을 그대로 덮어둔 채 당국 간이나 민간인들 간의 대화 재개나 교류협력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 북한의 대남심리전이 아무리 가열하더라도 심리전에는 심리전으로 응수하면서 북한의 변화를 기다려야 한다. 변하지 않고는 북한이 살아남을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북한이 변화를 계속 거부하는 한 그나마 북한을 국제사회에서 응원해 온 중국도, 천안함 폭침을 규탄하는 국회결의안 표결을 거부한 민주당도, 유엔안보리에 북한이 천안함 폭침의 주범이라는 정부발표에 반론을 제기한 참여연대 같은 소위 진보좌파단체들도 더 이상 북한의 변화를 기다리지 못하고 지쳐 넘어질 것이다.

우리 국민들은 어느 경우에나 제2의 동족상잔을 초래할 전쟁을 확고히 반대한다. 전쟁은 민족적 고통과 불행을 가중시키고 평화통일을 향한 역사의 전진을 가로 막기 때문이다. 또 우리 민족이 모처럼 세계사의 중심대열에 참여하는 발전의 기회를 빼앗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가 북한의 대남적대 심리전 공세가 가중되는 상황에서 국민들의 반전 심리를 6.2지방자치단체선거에 나타난 민의로 과잉 해석하여 무원칙한 대북지원을 재개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국가위기를 부를 것이다. 실패로 끝난 햇볕정책을 재개한다면 국론은 더욱 심각히 분열될 것이다. 북한의 도발은 더욱 악랄해지고 개혁개방은 더욱 요원해 질 것이다.

지난 역사에서 우리가 배운 확실한 교훈은 북한의 모든 형태의 도발에 단호하고 의연하게 대처할 안보 토대를 마련할 때 비로소 새로운 전쟁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남북한관계만큼 이 교훈이 진리로 통하는 곳은 없다. 지금은 남북대화보다는 안보토대강화에 주력할 때다.

이영일 한중문화협회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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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들에게 우롱당하는 '중도실용'정부를 개탄한다.

  이 영 일 (전 국회의원)

참여연대라는 단체가 정부와 국민에게 마음고생을 안겨주고 있다. 천안함 폭침의 원인을 북한의 어뢰공격으로 결론 내린 정부의 과학적 조사보고서에 의문을 제기하는 성명을 작성, 이메일로 유엔안보리에 보냈다. 그것도 유엔안보리가 천안함 문제를 토의하는 바로 그 때 말이다. 그리고 대단한 거사나한 양 기자회견까지 자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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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정치는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틀린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상대방의 태도를 존중하는 정치다. 그러나 국익에 반하는 주장을 과학적 조사나 탐구도 없이 세계여론에 쏘아 대는 태도는 다른 민주주의 나라들에서도 보기 드문 일이다. 물론 다른 민주주의 국가에도 엉뚱한 주장이나 생뚱맞은 구호를 외치는 NGO도 있고 특수한 신념으로 무장한 사회단체도 없지 않다. 시대착오적인 대중운동을 벌이는 단체도 있다.

그러나 정부의 지원과 한국 대기업들의 사회공헌자금을 얻어서 사무실 빌딩도 세우고 운영자금을 마련하는 단체가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참여연대는 그들 자신이 한국사회의 제반 약점-특히 기업체의 약점이나 반사회적 행위를 들추어내서 이를 폭로하고 광정(匡正)하는 활동을 통해 국민들의 신뢰를 얻었다. 또 항상 약점폭로를 두려워하는 기업들로부터 기부와 찬조를 받아내고 정부의 사회단체지원보조금도 많이 얻어내어 성장한 단체다.

 이러한 단체가 정부의 안보외교활동에 방해가 되는 행동을 한다는 것은 사회정의를 위한 것도, 국민을 위한 것도 아니다. 참여연대의 행동은 현시점에서 국민들에게 내놓고 공개할 수 없는 자기들만의 특수한 신념을 표현하는 투쟁업적 쌓는 것 같다.

그러나 문제는 이명박 정권이 이러한 행동을 마음대로 자행하고 심지어 월드컵에서 득점한양 당당히 기자회견까지 해도 좋을 환경을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현 정권은 집권 이래 합법투쟁과 반합법(半合法)투쟁을 변증법적으로 조합한 운동권세력들의 투쟁--촛불시위나 참여연대의 방약무인한 성명과 회견--앞에 참으로 무력했다. 인사 면에서도 좌파들의 친북적 투쟁전술을 잘 알고 막아낼 일꾼도 없는 것 같다.
 
이들의 동태를 조사하고 대처할 국정원도, 검찰도, 경찰도 용각산이 되었고 대통령의 통일안보노력에 조직적으로 힘을 실어줄 민주 평통도 용각산이 된지 오래다. 이명박 정권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참을 수 없는 좌절감과 비탄에 쌓였다. 허망한 기대를 안고 투표했기 때문이다.

 자기 지지 세력들의 이러한 불만과 비판을 모면하기 위해 대통령은 중도실용을 내세웠다 그러나 결과는 정부와 대통령을 형편없이 무시하고 얕보면서 국익을 무시하고 유엔안보리에 성명을 보낸 참여연대의 활동명분과 투쟁공간을 만들어 주었을 뿐이다. 결국  중도실용노선은 적대세력의 활동명분과 공간을 만들어 주었을 뿐 어느 편에서도 동지를 얻지못한다. 그래도 우파는 이명박이 싫더라도 참여연대같이 유엔안보리에 반정부 성명은 절대로 보내지않는다. 그걸 믿고 계속 중도만 강조하면 차기정권은 좌파에게 돌아갈 것은 자명하다.  

아 대한민국, 어떻게 해야 하나. 대통령이 중도실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장막에 둘러 쌓여있는 한 제2의 촛불시위, 제2의 참여연대가 줄을 이을 텐 데 아! 대한민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정치는 포기하고 세일즈만을 취미로 아는 대통령 밑에서 앞으로 무슨 희망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중도실용을 무슨 대단한 노선인양 말하면서도 광주, 전남출신 인사들을 청와대 참모진에서 완전 배제했다고 C일보가 보도하는 것을 보면 이것도 중도실용의 범주에 드는 것인지 묻고 싶다. 국민들은 지금부터라도 너나없이 나라 살릴 길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대통령만 믿고 앉아있기에는 너무 허무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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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암함 사태에 관한 감사원의 국방부 감사결과를 보면서

 

너무 어처구니가 없다. 천안함 폭침으로 초계함과 해군 병사 46명의 생명을 앗아간 3.26사건의 범죄자는 국내외전문가집단의 과학적 조사결과로 북한집단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국민들이 궁금히 여기던 문제점의 일부가 이번 감사원 감사결과로 밝혀졌다. 남북한의 분쟁수역을 왜 아무런 방비나 사전점검이나 대비 없이 통행했던가를 국민들이 궁금히 여겼다. 둘째로는 늑장대처였다. 사건발생시간이 발표시간과 발생시간 간에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심야에 새떼가 나타났다는 터무니없는 발표에 대한 의구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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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원은 사전대비의 부족을 지적했다. 안보의식이 마비된 늑장대처의 진면목을 밝혔다. 새떼의 출현이라는 허위조작보고가 밝혀졌다. 우리는 이러한 군을 믿고 그들을 유지하기 위해 비싼 세금을 납부했고 우리의 자식들을 그러한 지휘자 밑에 병역의무를 이행토록 보냈다. 3.26사건의 범죄자가 어뢰를 발사한 북한집단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국내범죄자는 바로 감사원이 발표한 합참의장을 비롯한 우리 군 장성들이다. 그 숫자가 25명이건 그 이상이건 간에 국가안보의식이 마비된 군 장성 모두가 3.26의 범죄자로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엄청난 배신이다.

 

3.26사건의 북측 범죄자들을 유엔안보리에 제소했다면 국내범죄자들은 마땅히 군법회의에 보내 중형으로 다스려야 한다. 그들이 미워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존속과 안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이러한 단안을 내릴 수 없다면 헌법이 그에게 부여한 의무인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능력이 없다고 보아 대통령직에 대한 탄핵을 단행해야 한다. 감사원의 보고가 6.2지방선거 전에 발표되었더라면 선거의 결과는 현재 나타난 것보다는 더욱 참혹했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10년 집권기간 동안 군의 안보기강이 해이해 질대로 해이해진 상태에서 집권했다.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군 장성들은 예외 없이 예편되거나 강등 당하거나 불이익을 받았다고 한다. 국방부장관이나 육군 참모총장은 작전 통보다는 기획통이 거의 기용되었다고 한다. 소위 김대중 식 햇볕정책에 역행하는 군지휘자가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를 우리 군 장성들이 살아왔던 것이다. 이러한 실정을 알고 집권했다면 마땅히 군의 기강확립을 집권 초부터 강구했어야 한다. 햇볕정책시대의 타성이 젖은 지휘관들은 마땅히 교체해야 했을 것이다. 이러한 노력보다는 남북정상회담의 유혹에 빠져 집권의 군사적 기초를 다지는데 소홀했다. 국가안보강화에 역점을 두는 팀워크도 구성하지 못한 것으로 C일보는 사설에서 국정원을 예로 들면서 평가했다.

 

천안함 사건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다. 이러한 전략적 판단의 결여, 문제의식의 부재, 준비와 대비능력의 부족이 몰고 온 사태이다. 천안함 사태에서 정부가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제2, 제3의 천안함 사건이 일어날 것은 명약관화 하다. 3.26의 국내범죄자들은 반드시 군재에 회부하여 엄중히 다스려야 한다.

 

여기에 곁들여 대북심리전에 한마디 고언하고 싶다. 심리전은 지금 상대방에게 하겠다고 선포하고 벌이는 전쟁이 아니다. 소리 소문 없이 진행하는 전쟁이 심리전이다. 언제 어디서 실시하고 언제 삐라를 살포한다고 발표하는 심리전은 지구상에 심리전이 생긴 이래 처음 있는 현상일 것이다. 이것도 한국형 심리전인가. 군 당국이 하고 싶지 않은 심리전을 피하기 위해 설치는 꼴이다. 여론이 북한의 반발이 우려되니 심리전을 중단하라는 내외여론을 유도하기 위해 나팔 부는 격이다. 이명박 정부의 안보방면에 이렇게 아이디어도, 인물도 없는지 정말 답답하다.

 

정부는 국민들의 안보정서에 영합하기 위한 포퓰리즘 보다는 보다 차원 높은 국가안보정책연구에 주력해야 한다. 천안함 사태는 너무 오래 끌면 끌수록 정부의 대안이 줄어든다. 조속히 천안함 사태를 국내외적으로 마무리하고 남북한 관계를 한반도 비핵화라는 국제정치의 큰 목표를 겨냥하면서 미국과 중국의 협력을 얻을 수 있는 출구전략을 서둘러 마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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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대화를 위해 김대중 노무현처럼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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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일당이 입만열면 ‘보수패당, 미제 식민지, 역도, 툭하면 불바다,“ 어쩌고 하며 행패를 부리는데..대화좋아하네.

주한 중국 대사라는 장 뭣인가 하는 친구와 이희호 씨가 비슷한 말을 했다. 남북이 대화로 풀라는 것이었다. 하하, 대화? 대화 좋지. 우리측이 언제 대화 안 하겠다고 했나? 이들의 성현 (聖賢) 같은 말을 듣자면 우리가 마치 대화를 거부한 것을 나무라는 투다. 그야 북한에 대해서도 대화를 촉구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대화가 왜 안 되고 있는지를 알아봐야 할 것 아닌가?

 천안함이 북한 소행이 아니라고 우기던 자들은 우리가 6.15 선언, 10.4 선언을 이행하지 않고 싸움질만 부추겼기 때문에 대화가 막혔다고 말한다. 돈 안 갖다 바쳐서 얻어맞았다는 이야기다. 아니, 우리가 언제 죄 졌나, 맨날 얻어터지면서 퍼주기만 해야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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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노무현이 망나니 깡패 버릇을 잘못 들여서 우리가 지난 10년 동안 호구 잡히고 봉 잡혔었다. 아무리 좀 주어야 할 줄은 알지만 그래도 그렇게 일방적인 관계로는 곤란하다고 해서 정권교체가 되었고 대북정책이 냉정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주기만 하고 양보는 하나도 받지 못하는 관계는 인간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김정일은 아주 조금만 더 가면 남한을 집어삼킬 수 있었는데 남쪽의 정권이 바뀌는 바람에 영 똥 밟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못 먹는 떡을 향해 어뢰를 발사했다. 화가 나서. 중국 대사라는 친구와 이희호 씨는 그간의 이런 자초지종을 알고서 그런 소리를 하는가, 모르고서 하는 소린가? 이희호 씨와 권양숙 씨는 천안함 용사들의 빈소에 가보기라도 했는가?

밤새도록이라도 따져보자.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 했는가? 우리는 실속없이 바보, 푼수처럼 헬렐레 하고 달라는대로 돈 퍼 준 것밖엔 없는데, 뭘 이 이상 더 어떻게 잘하지 못했다고 노상 “뭣 주고도 뺨이나 맞아야 하는 " 조공(租貢)국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

 대화? 이쪽이 아무리 대화를 하려 해도 저쪽이 ‘보수패당, 미제 식민지, 역도, 툭하면 불바다,“ 어쩌고 하며 행패를 부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노무현처럼 일방적으로 무조건 갖다 바치지 않는 한에는 대체 무슨 수로 대화가 가능한가? 그럼, 대화를 위해 김대중 노무현처럼 하라고? 그렇겐 못해! 죽어도! 목에 칼을 들이댄다 해도 그렇겐 두 번 다시 안 하고 못해!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

written by. 류근일

2010.05.20 09:05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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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핵안보정상회의 한국개최

이명박 대통령은 4월 12-13일 워싱턴 D.C.에서 개최된 '핵안보정상회의(Nuclear Security Summit)'에 참석하여, 2012년 핵안보정상회의 개최를 비롯하여 국제 핵안보 체제에 대한 우리의 기여와 역할 증대 계획을 발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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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안보정상회의(Nuclear Security Summit)는 국제안보에 대한 가장 심각한 위협중 하나로 평가되는 핵테러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개최된 회의로서, 47개국 정상(또는 정부대표) 및 유엔ㆍ국제원자력기구(IAEA)ㆍ유럽연합(EU) 등 대표적인 국제ㆍ지역기구 대표가 회합하여 핵물질 방호 강화 방안 및 핵안보 관련 국제협력 공고화 방안 등에 대해 논의한 최초의 회의로 그 의미가 큽니다.

우리나라는 금번 회의의 후속회의로 개최되는 2012년 제2차 핵안보정상회의를 개최할 예정인 바, 우리의 차기 회의 유치는 우리나라가 핵비확산조약(NPT) 등 비확산 규범을 성실히 준수하면서 민수용 원자력 이용을 활발히 추진해 온 모범국가라는 점과 한반도가 핵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 등이 고려된 것이라 평가됩니다. 또한 오바마 이니셔티브의 일환으로 시작된 동 회의를 우리나라에서 이어 개최하게 된 것은 한ㆍ미간 긴밀한 동맹관계 및 돈독한 신뢰ㆍ협력 관계를 반영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2012년 핵안보정상회의는 이번 워싱턴 정상회의를 통해 형성된 핵안보에 대한 국제적 관심과 의지를 구체적으로 점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로서는 북핵 문제 당사국으로서 핵안보정상회의를 한반도에서 개최함으로써 북핵문제 해결에 대한 국제사회의 의지를 결집하고 공고화시키는 효과도 거둘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 대통령은 차기 정상회의 개최 발표 외에도 제1세션 발언을 통해 ▲우리나라의 활발한 원자력 이용 현황(현재 원전 20기 운영중, 2030년까지 원전 19기 추가 건설 예정) 및 원자력 기술의 우수성을 소개하고 ▲우리나라의 핵안보 강화 노력(핵물질 방호를 총괄하는 전문 독립기관인 한국원자력통제기술원(KINAC) 설립, 방사성물질의 추적과 감시, 방재 대응을 위한 종합관리시스템 구축 등)을 소개하는 한편,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공조(6자회담, 안보리 제재 이행 등) 노력을 평가하고 ▲국제 핵안보 체제에 대한 우리의 기여 및 역할 증대 계획(2011년 세계핵테러방지구상(GICNT) 총회 서울 개최, 국제 핵안보 교육ㆍ훈련센터 설립) 등을 발표하였습니다.

금번 워싱턴 핵안보정상회의는 참석 정상들간 논의를 반영한 정상성명(communique)을 채택하는 등 핵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운 세상 건설을 향한 국제사회의 의지를 결집하고 구체적인 대응방안을 모색하는 자리였다고 평가됩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금번 회의 참석은 평화적 원자력 이용 모범국으로서 우리나라의 면모를 적극 홍보하고, 핵안보 강화를 향한 우리의 기여와 역할 증대 계획을 발표함으로써 글로벌 리더로서의 우리의 입지를 강화함과 동시에, 2012년 차기 핵안보정상회의 유치를 통해 대한민국의 달라진 국제적 위상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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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4.19혁명 50주년을 맞이하여 미래정책연구소가 2010년 4월 14일 14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한 “ 4월 혁명과 이승만 대통령”을 주제를 한 세미나를 위해 준비된 이영일의 기조논문이다.

이글의 주요내용은 2010년 4월 14일 조선일보 A25면에 상세히 보도되었으며 4월16일 조선일보 데스크 칼럼에서도 인용되었습니다

      4.19세대가 본 이승만 전 대통령의 공과 과

                                    차 례

1. 들어가면서

2. 재론의 필요성

3. 이승만 대통령을 둘러싼 그간의 공과논쟁 검토

4.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 민주주의 문제

5. 글을 마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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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우열4번)과 김구(좌열4번)가 보스턴 마라톤 대회 승리후 가진 기념사진
1. 들어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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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이영일(우로 부터 세번째)의 주제발표

우리는 금년으로 4.19혁명 50주년을 맞는다. 벌써 반세기가 흐른 것이다. 이제 우리의 민주정치는 국민의 자유로운 선거에 의한 지도자 선택, 정부 선택이 일상화될 수준에 도달했다. 앞으로 정당정치가 한 단계만 더 발전하여 대화와 타협을 통해 국사(國事)를 해결하는 관행이 확립된다면 이 나라는 당당히 민주 선진국의 반열에 오를 것이다.

이러한 정치발전은 4.19혁명의 큰 업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는 4.19혁명의 성공과 동시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4.19 혁명에 뒤이은 군사쿠데타와 개발독재정권의 출현, 군사권위주의 정부의 지배와 같은 엄청난 어려움이 있었으나 4.19에 흘린 젊은이들의 순수한 정의의 피가 국민적 지지를 비축하고 있음(Reserve of support)으로 해서 군사 권위주의를 반대하는 끈질긴 젊은이들의 투쟁이 이어져왔고 이 투쟁들을 통해 오늘의 민주화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러한 성공을 위하여 역사의 제단에 자기 피를 뿌리고 산화(散華)한 영령들의 명복을 빌고 지금도 병상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부상자들과 유족 및 가족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필자는 금년 초에 미래정책연구소의 박범진 이사장으로부터 4.19혁명 50주년을 맞으면서 4.19세대의 입장에서 4.19혁명으로 권좌(權座)에서 축출된 이승만(李承晩)전 대통령의 공(功)과 과(過)를 새롭게 조명해 보는 것도 의의 있는 일로 생각된다면서 1960년 당시 대학 3학년에 재학 중 서울대의 4.19혁명에 참여했던 나 같은 경력을 가진 사람이 오늘의 시점을 기준으로 이승만의 공과를 다루는 발제의 글을 세미나에서 발표해 달라고 제의했다. 필자역시 나 아닌 누구에 의해서라도 이 문제는 한번 재음미 해 보아야 할 문제라는 나름대로의 소신에서 이 제의를 수락했다.

 

특히 금년은 4.19혁명 50주년으로 혁명성공의 희년(禧年)을 맞는 해이다. Bible은 50년을 희년(禧年)이라 부르면서 빚진 자의 부채를 탕감해주고 노예를 해방시켜 주고 갇힌 자를 풀어준다고 한다. 그것이 우리 역사에서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이냐고 묻는 사람도 있겠지만 단일민족임을 자부하는 우리로서는 민족 내부에 쌓인 지나간 역사의 부채를 희년정신으로 처리해서 50년에 한번쯤은 민족의 화합과 단결을 도모하는 것이 보다 나은 미래를 열어가는 지혜가 될 수 있다는 견지에서 이승만의 문제를 새롭게 음미해야 할 것 같았다.

 

먼저 필자는 1960년 당시의 4.19세대가 오늘의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나름대로 회고해 보았다. 1960년 당시 20대였던 4.19세대들은 이제 인생 나이 70대에 이르렀거나 넘어섰다. 나이 20대의 4.19당시에 생각했던 이승만 대통령과 이제 고희를 바라본 시점에서 보는 이승만 대통령이 똑같을 수는 없다. 그간 사물을 관찰하고 평가하는 태도와 경륜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또 동서냉전으로 남북한의 사상전이 고도화 되던 시기에 평가되던 이승만과 공산권이 붕괴되고 한반도 분단국가 형성과정에 대한 공산권의 자료가 공개된 지금의 시점에서 보는 이승만 평가도 같을 수 없다.

4.19세대는 1인당 국민소득 60 여 달러시대에 인생의 청소년기를 살다가 이제는 20,000 달러시대를 맞고 있다. 자유당 정권에 맞서 4.19혁명에 앞장섰고 4.19혁명이 성공했다고 자부한지 2년 만에 발생한 군사쿠데타와 그로 인한 군사독재, 군사권위주의 정권하에서 25년을 살았다. 인생의 가장 활력이 넘치는 시대를 군사정권하에서 보냈다. 민주주의가 목적처럼 보이던 시대부터 국가발전의 수단으로 민주주의의 가치가 재 정의되던 시대를 살아왔다. 즉 1960년대 이후 신생국가에서 실험된 서구적 의미의 민주주의 정권들이 거의 예외 없이 붕괴되거나 변질되는 역사를 보면서 살아왔다.

또 군사권위주의 정권하에서 이루어지는 경제발전과 국력신장의 현장을 목격했고 이때의 국가발전에 동참하면서 살아왔다. 가장 가난했던 약소국가가 G20국가의 반열에 오른 역사과정을 지켜보았다. 다른 한편 소련과 동유럽 공산정권들의 몰락과 붕괴, 그리고 북한이 지구 최빈국으로 전락하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동서독이 통일되는 역사도 보았다.

이제 4.19세대는 시대의 변화와 진보의 증인임과 동시에 변화와 발전시대를 실존적으로 체험한 세대들이다. 4.19혁명 50주년은 바로 이렇게 살아온 세대들이 역사의 주역자리를 후대들에게 물려주는 시점이다. 이러한 때에 4.19혁명으로 퇴진했던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좀 더 성숙한 자세에서, 50년 전과 다른 시각과 관점에서 평가해보는 것도 의의 있는 일로 생각되었다. 정의감은 20대처럼 간직해야겠지만 사물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안목은 인생 70대 수준에 걸맞아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막상 자료를 검토하면서 글을 쓰려고 보니 4.19 당시 목숨을 잃은 친구들과 유족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李承晩의 문제, 부상당한 후 오늘날 까지 병상에서 목숨을 잇고 있는 분들이 보는 이승만의 문제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유족들과 부상자들은 독재 권력의 구체적 희생자들이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4.19혁명 50주년을 맞는 시점에서 실패한 독재자의 이야기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싫을 것이다. 필자도 이런 감정을 공유하지만 그러나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문제를 감정에만 묶여 그대로 지나칠 수는 없다.

4.19혁명 50주년을 맞는 이 시점은 이승만 대통령을 과오일변도에서만 보는 시각을 넘어서서 새롭게 조명해야할 상황을 맞고 있다. 현시점에서 이승만대통령의 치적을 공과 과로 나누어 공정하게 자리매김하는 일은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통성을 이어가고 확립하기 위해서도 또 우리가 앞으로 준비하고 대비해야할 통일을 위해서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이승만 대통령 평가문제를 부족한 사람이 감히 발제해보기로 한다.

2. 재론의 현실적 필요성

 

재론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은 우선 한국 갤럽과 한국논단이 실시한 바 있는 한국정치지도자에 관한 여론조사의 결과인데 내용인즉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친미사대주의자(53%), 반민주적 독재자(18%), 남북영구분단의 원흉(18%)이라는 등 부정적 평가가 주를 이루었으며 "독립투사이며 건국의 아버지"라는 평가는 1.3%불과하여 한국청년들의 다수가 북한의 김일성보다도 이승만을 더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4.19혁명이후 이승만 대통령을 보는 사회분위기가 이러한 결과를 초래했다면 이 문제는 한 정치인 이승만의 실패에 그치지 않고 자칫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통성에도 위기를 조성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한 인간의 생애는 누구나 장점과 단점, 과오와 업적의 결합체일진데 이승만의 생애도 공(功)과 과(過)의 양면에서 공정하게 다루어야 그의 진면목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생애의 특정시기와 몇 가지 사건만을 떼어내서 과오, 실책만을 들추고 이를 근거로 실패한 정치인의 대명사로 낙인찍어버리는 것이 과연 독립운동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냈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인물을 평가하는 정당하고 공정한 방법인가를 놓고 진지한 성찰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둘째로는 1990년 이후부터 국내외 학계에서 이승만의 공과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탈수정주의적(post-revisionism)관점에서 추진되었고 특히 냉전의 종식과 소련 및 동구 공산권의 붕괴에 따라 한반도문제에 관한 공산권 소장 자료들이 공개됨으로 해서 그간 베일에 가려졌던 한반도에서의 분단국가 성립과정과 한국전쟁발발원인의 진상이 밝혀졌다. 이런 연구와 자료가 공개됨으로 해서 이승만에 대한 평가기준이 바뀌게 된 점 즉 이른바 수정주의적 해석을 재고해야할 필요가 생겼다.

셋째로는 동서냉전으로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는 상황에서 이승만이 추구했던 유엔감시하의 총선거로 세워진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가 소련 군정이 세운 북한 공산정권에 비해 국가발전의 모든 부문에서 너무나 올바른 선택이었음이 현실 역사 속에서 입증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주역이 되어 그 기초를 세운 한국의 자유민주 체제는 오늘날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서고 있는데 반해 공산독재를 택한 북한은 지구최빈국의 하나로 전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넷째로는 민주당정부를 뒤엎고 집권한 군부쿠데타 정권들과 이승만 정권을 비교정치차원에서 따져 보아야 한다. 군사 권위주의 정권은 이승만 정권 12년보다 훨씬 더 긴 25년간 지속되었다. 이들 정권은 이승만의 가부장적, 내지 문민독재보다 한층 더 강도 높은 군사독재 정부였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독재 정권들의 출현은 한국에만 고유한 현상이 아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부분의 신생국들의 정치발전과정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또 한국의 경우 이들 권위주의 정권들이 경제발전에 치중하는 개발연대를 주도했고 이 단계를 거친 후에 비로소 현재 수준의 절차적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렸다. 동시에 민주주의 성장의 경제적 기초도 강화되었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에서 보면 이승만 정권에 대한 비판적 평가도 4.19혁명당시와는 달리 상대화(相對化)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필자는 이번의 발제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독립운동에 관한 분야는 중점을 두지 않았고 해방 후 한국 땅에서 행해진 그의 정치생활을 주 대상으로 삼으면서 과오는 그의 장기집권 욕과 관계된 부분을 중심으로 다루었고 동시에 새 자료가 나옴으로 말미암아 밝혀진 그에 대한 오해와 왜곡을 지적함과 동시에 그의 기여와 공헌을 나름대로 평가, 대한민국 역사의 정당성을 세우고 미래를 향한 발전의 지침을 마련하는데 목표를 두었다.

3. 이승만 대통령을 둘러싼 그간의 공과논쟁 검토

 

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비판과 옹호론 검토

 

한국 근현대사에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평가만큼 사실과 관계없이 호오(好惡), 긍부(肯否), 훼예포폄(毁譽褒貶)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지도자도 드물 것이다. 이승만은 생전부터 평가가 대립되었으며 사후에는 평가가 극단으로 양립되었다. 1950년대에 발표된 전기적(傳記的) 접근들에서는 이승만에 대한 예찬 등 홍보적 평가가 우세하였다. 반면 1960년대 이후 간행된 평전(評傳)들은 정반대로 비판적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다. 전기나 평전이외의 연구에서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시기별로 차이가 있다. 4.19혁명이후 이승만의 반민주 독재, 부정선거, 부정부패, 반공주의에 대해 국민들의 기억이 분명하던 1960년대〜80년대에는 이승만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분단과 독재의 책임자로 비판하는 평가가 주류였다. 특히 이 시기는 4.19혁명이념과 거리가 먼 군사정권시기임에도 불구하고 군사정권비판보다는 이승만 대통령을 마치 만 악(萬惡)의 근원인 것처럼 비판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4.19이념을 계승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논객들도 적잖았다. 그러나 이후 90년대에 들어오면서 비로소 일부 학계와 언론기관을 중심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재평가 논의가 등장하고 여기서는 이승만을 건국공로자로 긍정하는 평가도 있었다.

1960년대부터 80년대 기간에 등장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평가의 대표적인 예를 세 가지만을 예시하고자 한다. 먼저 이승만에게 포문을 연 학자는 한국인이 아닌 미국인 Richard C. Allen이었다. 그는 30세의 전기 작가이며 한국 전쟁 시 휴전반대를 부르짖는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할 계획을 입안했던 당시 주한유엔군사령관 Maxwell Taylor대장의 아들이었다. 그는 Korea‘s Syngman Rhee: An Unauthorized Portrait를 통해 이 대통령은 부산정치파동과 4사5입이라는 기상천외의 계산법으로 두 번이나 개헌을 감행하여 장기집권의 기반을 다진 후 진보당을 탄압하고 3.15부정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가 4.19로 권좌에서 물러난 경위를 설명하고 그의 대일 외교실패, 거창양민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사건 등을 조명함으로써 이승만을 “평생 자기 조국에 대한 봉사로 국민들에게 선물 받은 권력에 의해 타락한 애국자라고 낙인찍었다.

국내에서는 4.19이후의 시기에 대표적인 논객의 한 사람인 송건호 씨의 다음과 같은 논평도 주목할 만하다. "이승만은 ····그가 범한 많은 과오 중에서도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외세의 국가이익추구에 편승하여 이 나라를 분단하는데 앞장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제(日帝)시대 때 민족을 배반한 친일역적들을 싸고돌아 민족정기를 흐려놓은 점과 12년간의 통치기간에 이 나라를 자주 아닌 열강 예속으로 전락시켰다는 사실도 들어야 할 것이다. 전략(前略) ···· 오늘 한반도가 겪고 있는 민족의 수난은 다름 아닌 이승만의 지도노선에 일단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Allen 및 송건호의 이승만 비판론은 1980년대에 미국으로부터 유입된 수정주의 사관의 영향하에서 이승만에 대한 한층 더 강도 높은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 1965년에 이르러 김삼웅이 나열한바 다음과 같은 이승만의 12개 죄악상은 당시 중도, 진보진영에 속하는 학자나 언론인들의 입장을 총정리한 감이 있다. ①분단책임 ② 친일파 중용 ③한국전쟁유발 내지 예방실패 ④ 독립운동가 탄압 ⑤ 헌정유린 ⑥ 정치군인 육성 ⑦ 부정부패 ⑧ 매판경제 ⑨ 양민학살 ⑩ 극우반동 ⑪ 언론탄압 ⑫ 정치보복 등 12개 조목이다.

 

이상의 주장들과 각도를 달리해서 이승만의 사람됨과 업적에 대해 정반대의 평가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이승만을 가리켜 외교의 신(神)(조정환), 대한민국의 국부, 아시아의 지도자, 20세기의 영웅(허정), 조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 그리고 아브라함 링컨을 모두 합친 만큼의 위인(김활란), 자기 체중만큼의 다이아몬드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닌 인물(James A. Van Fleet)이라고 칭송했다.

이러한 단편적인 평가와는 달리 Robert T. Oliver(1909-2000)교수는 이승만의 1942년부터 59년까지의 자문역을 맡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에서 이승만의 애국심, 학문적 실력, 역사적 혜안, 정치적 투지, 종교적 초월성 등을 지적하면서 이승만을 한국역사상 누구보다도 국민들의 두터운 신망을 획득한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지도자”라고 평했다. 나아가 “그의 이름은 위인을 많이 배출한 한국역사에서 단연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이승만 대통령을 평가한 주된 내용을 요약하면 한국이 초창기에 직면했던 미증유의 혼란으로서의 여순(麗順)반란 사건, 4.3 제주도 사건과 6. 25동란을 거치는 등 극한의 위기상황들 속에서 국민을 단합시켜 국가적 재앙을 훌륭히 극복하고 대한민국의 국가건설(Nation Building)의 과업으로서 안보, 외교, 교육, 농지개혁을 통한 산업발전분야에서 혁혁한 업적을 세워 신생 대한민국을 굳건한 반석위에 올려놓았고 이것이 밑거름이 되어 1960년대 이후 한국에서의 눈부신 발전에 근원적으로 기여했다고 평하고 있다.

 

나. 이승만 평가기준의 변화요인 대두

 

①한반도 분단국가 형성과정에 대한 소련 측 자료의 발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이상에서 적시한 바와 같이 부정적 평가가 긍정정인 것보다 압도적으로 많았고 그 중에서도 국토영구분단과 6.25동란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평가(송건호, 김삼웅, 김도현, Bruce Cummings 등)는 이승만에게는 반민주독재자라는 평가보다 더 아픈 공격이었다. 그러나 동서냉전의 종결과 더불어 소련의 붕괴, 그에 수반한 한반도 분단국가 형성과정과 한국전쟁에 대한 소련 측 자료들이 발굴, 공개됨으로 해서 이승만의 책임으로 들씌워진 많은 사실 왜곡들이 밝혀졌다. 우선 소련군 점령지역에 부르주아 정권을 수립하라는 1945년 9월 20일의 스탈린 지령의 발견은 1946년 6월 3일의 이승만의 정읍(井邑)발언보다 앞선 것으로 소련군 총사령관 스탈린과 참모장 안토노브(Alexei E. Antonov)명의로 연해주 군관구 및 제25군 군사평의회(의장은 북한점령군 사령관 치스차코프)에 발송된 것인데 이 전보는 제2항에서 "소련군 점령지역에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조직의 광범한 연대(블럭)를 기초로 한 '부르주아적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할 것을 지시했다. 이 지령은 그대로 구체화되어 미소간의 합의 없이 북한지역에서 임시인민위원회라는 이름의 정부가 1946년에 세워지고 이 이 위원회를 통해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원칙으로 하는 토지개혁이 단행되고 인민군이 창설됨으로 해서 남한에서보다 먼저 소련점령군 주관 하에 분단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지령이 밝혀지기 전까지만 해도 국내좌파 및 중도 사학계, 특히 수정주의적 해석에 영향 받은 학자들은 이승만의 정읍(井邑)발언을 빌미삼아 국토영구분단의 모든 책임을 이승만에게 뒤집어 씌웠던 것이다.

지금까지 이승만 대통령을 소남한단정(小南韓單政)분자로 몰아 국토영구분단의 책임을 뒤집어씌운 것은 한반도 분단국가 형성과정에 대한 공산권의 자료가 나오기 전의 국내 언론을 기준으로 이승만을 평가한데 기인한 것 같다. 필자도 4.19직후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과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선전위원장 시절에 선배들의 이승만대통령에 대한 평가에 그대로 동조했음을 고백한다.

돌이켜보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정읍발언으로 공론화된 과도정부노선은 소련이 기도하는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예방하고 자율적으로 독립 국가를 세우려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분단의 원흉이라는 평가도 이제 재고되어야 할 것 같다.

 

② 소련의 6.25전쟁관련 자료

 

이승만 대통령은 6.25동란의 원인제공자라는 비판도 받았다 그러나 현재 밝혀지고 있는 6.25동란 관련 모든 자료는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스탈린이 승인, 지원하고 협력함으로써 일어난 민족최대의 비극으로 밝혀졌다. 1949년 3월 5일 소련의 초청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한 김일성은 공식회담을 마친 후 1949년 3월 7일 스탈린을 만난 자리에서 남한 공격을 스탈린이 허용해주고 지원할 것을 건의했다. 이때는 스탈린이 3.8선에 관한 미소합의는 유효하며 전쟁발발 시 미국개입가능성이 크고 북한군이 남한 군에 대한 절대 우위가 아니라는 이유에서 김일성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이 시기 스탈린은 북한의 군사력 증강노력을 지지하고 육해공군의 강화를 위한 원조를 제공했다.

그러나 1949년 중엽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우선 남한 주둔 미군이 470여명의 미 군사고문단만을 남기고 전원 철수를 단행했고(1949.6.30)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함으로써 핵보유국가로 등장, 미국의 핵독점을 종식시키고(1949. 8) 중국의 공산군이 대륙장악에 성공하는 상황이 조성되었다.(1949.10.1) 이와 동시에 1950년 1월 12일 Dean Acheson 미 국무장관은 워싱턴 기자협회의 연설에서 미국의 극동방위선이 필리핀에서 유구열도, 일본을 지나 알류산 열도로 이어진다고 밝히고 이 방위선 밖의 지역에 대한 침공은 일차적으로 지역주민이 저지하고 유엔헌장에 의하여 모든 문명세계의 개입에 의존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은 김일성의 남침야욕에 다시 불을 붙였고 소련도 새로운 정세를 중국에 이어 한반도의 공산화라는 전략목표를 고려하게 되었다. 김일성은 1950년 3월 30일 재차 소련을 비공식 방문, 4월 25일까지 머물면서 세 차례에 걸쳐 스탈린과 남침계획을 검토한 후 스탈린으로부터 남침 허락과 군사원조, 필요한 전략지원을 확약 받고 여기에 유사시 중국군 지원계획까지를 합의한 후 귀국했음이 자료에 의해 밝혀졌다. 이런 관점은 Nikita Khrushchev 회고록에서도 같은 내용이 담겨있다.

이때 한국군은 북한에 맞설 군사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심리전차원에서 대북우세를 강조하고 군민(軍民)들의 사기앙양을 도모하는 조치를 취했는데 이 측면만을 부각시켜 그것이 남침유발이라고 평하는 것은 당시 국제정치상황이나 한반도 군사정세의 진상과는 전혀 맞지 않는 주장이다. 지금 살아있는 모든 자료들은 한국동란의 도발 책임이 김일성과 소련에 있었음을 명증하고 있다. 이 분야에서도 이승만에 대한 기왕의 평가는 시정되어야 할 것 같다.

③ 이승만은 친미사대주의자였던가.

 

우리 학계 일각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을 친미사대주의자로 매도했다. 필자는 최근 1993년 국내에서 출판된 이승만의 “독립정신”(1904년 한성가옥에서 탈고)이라는 저서를 읽었는데 이 책은 그가 한성감옥에서 5년간 수감되어 있는 동안 집필한 것으로 여기에 나타난 그의 대미관은 확실히 친미적이었다. 그의 이 책에는 그의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동경이 잘 그려져 있었다. 특히 그는 민주정치 제도에 관해서는 미국 민주주의를 관찰하고 이를 발표했던 A. de Tocqueville같은 느낌을 줄만큼 미국 민주주의에 심취하고 있었다. 이 결과 그는 미국유학의 길을 택했고 그가 마음속에 그린 해방조국의 정치형태를 미국화 하겠다는 건국의 이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미국에서 오래 살면서 조국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하는 동안 강대국들의 이중성(二重性)을 피부로 느꼈고 특히 미국의 20세기 초의 대한반도 정책의 진상을 파악한 후부터는 항상 미국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고 한다. 이승만 연구의 권위자의 한 사람인 미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이정식(李庭植) 교수는 이승만 박사의 미국관은 미국의 대한정책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면서부터 크게 달라졌다고 지적했다. 우선 이승만은 미국이 1882년 조미(朝美)수호조약에 명시된바 조선이 외국의 침략위협을 받을 때 거중조정(Good office)을 해주겠다는 약속을 위반했음을 알았고 특히 이승만은 미국이 1905년 미국의 육군 장관 William H. Taft와 일본의 카쓰라 타로(桂太郞)총리 간에 조선을 일본이 차지하도록 비밀협정을 맺었음이 1924년에 밝혀짐에 따라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승만은 1905년 당시 미국의 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을 찾아가 만나고 한국문제에 관한 청원서를 제출하려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승만은 미국의 이중적(二重的) 태도를 간취하고 분개했으며 그 후 미국은 일본에게 진주만을 침공 당한 후에도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요구를 거부한데 대해서도 불만이었다고 한다.

이런 체험 때문에 이승만은 자기 외교체험을 통해 강대국들 간의 흥정에 해방된 조국의 운명을 맡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하루라도 빨리 한국인들이 주도하는 정부를 서둘러 수립하고 외국의 군정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열망에 불탔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한미방위조약협상대표 Walter S. Robertson 국무차관보와의 담판에서 이런 사실(史實)을 상기시켰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승만은 해방 후 건국준비과정에서도 군정사령관 John R. Hodge 장군과도 많은 부문에서 의견대립을 보여 이승만의 제거를 미군정이 검토했었고 특히 한국 휴전협상 시기에는 이승만이 통일 없는 휴전반대라는 명분을 내걸고 단독북진을 주장하자 미국은 한국전쟁의 조기종결구상에 따르지 않는 이 대통령을 제거하기위해 맥스웰 테일러 대장이 Plan Everready라는 비상계획을 입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승만은 대미관계에서 기록상의 자료로는 공식적으로 대미종속이나 미국에 굴종하는 괴뢰 같은 처신을 한 사례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비록 국력은 약했고 원조를 받기위해 대미외교를 강화했지만 항상 당당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미국방문을 수행했던 김용식 전 국토일원 장관은 그가 통일원에 재임했던 1974년 당시 통일원 정치외교정책담당관이던 필자에게 다음과 같은 회고담을 들려주었다. “워싱턴 공항에 취재차 나온 기자들에게 한국은 워싱턴의 겁쟁이들 때문에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는 충격적인 도착성명을 발표, 그날 미국 주요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고 말하고 6.25동란에서 3만2000명의 미군이 희생됨으로 해서 한국이 국권을 지키게 되었다는 감사의 메시지보다는 제네바 정치협상이 실패로 끝난 상황에서 미국이 왜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와 경제 원조를 강화해야 하는가를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담판, 설득하기 위한 명분조성에 더 큰 비중을 두었던 외교의 귀재(鬼才)였다고 말했다. 결국 이승만 박사는 휴전반대 단독북진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벼랑 끝 외교를 통해 한미방위조약을 미국으로부터 얻어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승만을 친미사대주의자로 매도하기 보다는 지미(知美), 용미(用美)의 외교대통령으로 평가해주는 것이 옳을 것이다.

④ 정통정부와 위성정권 문제

 

남북한은 분단이후 서로에 대해 괴뢰정부로 비난하는 심리전을 계속했다. 이것은 한반도가 1945년 이후 동서냉전에 휩싸여 분단국가로 출발한데 그 원인이 있다. 당시 동서냉전이 심화되는 과정에서 미군과 소련군 점령지역에서 남북한이 별개의 정치형태를 갖는 분단국가로 출범하는 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당시의 세계대세였다. 앞에서 본바와 같이 북한지역에서는 소련군점령 치하에서 형식은 대한민국보다 1개월 늦게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는 간판을 달았지만 실제로는 스탈린의 1945년 9월20일 지령에 의해 사실상 정부수립이 1946년과 1947년 사이에 완결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북한의 김일성 정권은 한마디로 동구라파에서와 같이 소련군 점령치하에서 소련의 제한주권론의 통제를 받는 위성국가로 그 출발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성립과정은 북한과는 달랐다. 우선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됨으로 해서 미국이 한국문제를 유엔이 해결할 과제로 정의하고 유엔으로 이관시켰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유영익(柳永益) 교수는 이승만이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서는 한국의 독립과 점령군철수문제를 결말지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한국문제를 유엔에 넘겨 해결하자는 유엔공식을 미국 측에 건의하고 이 건의를 미국 측이 받아들였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유엔활용의 아이디어를 꺼낸 사람이 이승만이라는 것이다.

이승만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무산되고 미군정의 지원 하에 추진된 김규식⦁여운형 중심의 좌우합작운동이 소기의 성과를 거둘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1946년 12월 남조선 대한민국 대표 민주의원 의장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 1947년 4월까지 워싱턴에 머물면서 미국정부지도자들과 언론을 통하여 유엔을 통해 남한에 과도정부를 수립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는 당시 미국대통령, 국무장관, 유엔사무총장 등을 만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미 국무성의 점령지역 담당 차관보인 John R. Hilldring을 만나 자기의 과도정부 구상을 설명,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고 했다. 당시 상황은 미국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고 미소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었기 때문에 모스크바 협정으로 발표된 한반도 신탁통치 안은 미국이 이를 포기하고 그 대신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 유엔감시하의 자유총선거로 한반도에 통일된 단일정부를 수립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대한민국은 이런 과정을 거쳐 유엔결의로 파견된 감시단이 참관하는 가운데 실시된 자유총선거로 정부를 수립했다. 이 과정은 공산세력들의 선거방해, 민족진영 일부와 진보성향 인사들의 선거거부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러나 이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대한민국은 유엔총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정통정부로 승인받았다. 그러나 이 과정과 절차가 갖는 중요성과 의의는 이승만의 단정론 비판에 휩싸여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 분야에 대한 평가도 재고되어야 할 것 같다.

 

4.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 민주주의 문제

 

이승만 대통령은 해방 후 대한민국 통치의 기본 틀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로 만드는데 주도적으로 기여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은 이승만 박사의 선택임과 동시에 또 동서 냉전의 확산과정에서 한국에 주어진 운명적 상황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의 이러한 기여는 그가 4.19혁명으로 대통령직에서 하야한 후 하와이로 망명했고 그의 정치적 기반인 자유당은 해체되었으며 정치적 추종자들은 반민주행위자로, 그의 경제적 후원세력들은 부정축재자로 법의 심판을 받는 운명에 놓였기 때문에 누구도 제대로 평가해줄 수 없었고 한국 민주정치를 그와 관련시켜 왈가왈부하기도 힘들었다. 이러한 상황은 1960년 4.19로부터 약 30년간 지속되어왔고 아직도 저류가 남아있다. 그러나 4.19혁명이 50주년을 맞이하면서 이승만의 문제를 공과 과로 나누어 보다 객관적으로 새롭게 조명할 필요성 때문에 이승만과 한국의 민주정부 수립문제를 다시 살펴보게 된다.

가. 민주주의와의 만남

 

이승만의 생애를 보면 아이러니 같지만 한국에서 최초로 군주정치를 반대하고 공화정치를 부르짖다가 징역형을 선고받고 5년 옥살이를 한 한국최초의 민주화를 위한 운동권 형 인물로 보이는 측면이 있다. 그는 한말의 유생이었지만 일찍이 신학문을 받아들였다. 한말 독립협회운동에 참여했으며 배제학당에서 수학했고 여기서 그의 생애의 외교무기, 집권무기가 된 영어를 마스터했다. 그는 1898년 고종황제의 군주정치를 비판하고 공화정으로 정체를 바꾸려는 개혁에 앞장섰다가 국가반역죄로 투옥되었다. 한성감옥에서 5년간 복역하면서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선교사들이 보내준 책과 서재필 박사의 가르침을 익혀 미국식 민주주의에 심취했다. 1904년에 탈고한 그의 저서『독립정신』에서 그는 미국민주주의를 “제일 선미(善美)한 제도”라고 칭찬했다.

청년 이승만은 이때 알게 된 미국식 대통령제 민주주의가 지도자를 국민이 직접 선출하고 지도자와 백성이 함께 나라를 부강케 하는 제도로서 전 세계 정치제도가운데 가장 이상적인 것이며 공화정의 권력이양방식도 중국의 요순시대와 비슷한 것으로 인식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러한 사고는 그의 평생의 정치사상의 뿌리였으며 대한민국의 건국구상도 이러한 연구에서 싹튼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미소냉전의 와중에서 한국이 선택할 정치형태는 사실상 주어진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초대 대통령의 민주주의에 대한 정치교양이 부족했더라면 한국정치의 틀을 자유민주주의체제로 확립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 한국 민주화를 위한 노력-교육부분

 

그러나 해방된 한국은 자유민주주의가 제대로 꽃필 여건이 아니었다. 당시 민주주의라는 밀알은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 같았다. 공산세력의 폭력테러가 끊이지 않았고 한국의 문맹률은 인구의 78%로 집계되고 있었다. 또한 전문학교 이상 대학졸업의 학력소지자는 전체인구의 0.2% 미만이었다. 이러한 여건의 불비를 채우기 위해 이승만은 건국 후 초등교육 의무화를 서둘렀다. 이 결과 1959년까지는 전국학령아동의 95.3%가 취학하는 성과를 올렸고 성인을 대상으로 한 문맹퇴치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 1958년까지 5년간 지속적으로 실시함으로써 1959년에는 우리나라 문맹률은 22%(남자11%,여자 33%)로 떨어졌다. 아울러 학교도 대폭 증설하여 해방당시 초등학생수가 1960년에는 4600여교에 360만 명으로 배가 불었고 중학생의 경우도 5만에서 53만으로 10배 증가했다. 대학교는 해방당시 20교의 대학이 1960년에 이르러는 63개 이상으로 증가, 대학생 수도 10만 명에 달하여 인구 5천만이 넘는 영국의 대학생 수와 맞먹게 되었다.

다. 민주화의 경제적 기초정비

 

이 당시는 한국의 경제적 기초도 극도로 취약하였다. 이승만 정권시기에 한국경제는 해방 후의 극심한 혼란에다 6.25의 참화까지 겹쳐 일반서민들의 생활은 최저생계수준을 밑돌았다. 1인당 소득은 1953년의 67달러(1990년 불변가격으로는 757달러), 그리고 1961년에는 82달러 수준에 머물렀다. 이승만 정권은 건국과정과 6.25전란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휴전 후부터 전재복구를 중심개념으로 하여 경제 재건에 힘썼다. 우선 미국으로부터 22.8 억 달러의 거액의 경제 원조를 받아내 1955년까지 전화(戰禍)복구사업을 거의 완료하고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고 해방 후 지속된 악성 인플레이션을 1957년부터 수습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어려운 가운데서도 이승만은 원자력연구소를 만들고 소형원자로를 구입해주면서 원자력의 연구개발을 지원했다.

라. 농지개혁

 

이승만 정권은 이러한 전재복구(戰災復舊)에 선행하여 북한이 토지개혁을 끝낸 것에 자극받고 정부수립과 동시에 진보적 성향의 조봉암(曺奉岩)을 농림장관으로 임명하여 농지개혁을 실시하였다. 일제가 차지했던 식산은행 토지 등 귀속농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한편, 농지의 소유상한을 3정보 이하로 하여 농지의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단행함으로 해서 한국농촌의 소작농 체제를 자영농 체제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소작농 체제를 기반으로 한 한국 민주당의 반발을 잠재우면서 농지개혁을 단행, 자작농지의 비율이 전체농지의 92.4%에 달하게 한 것은 한국농업구조상의 획기적인 변화를 의미했다.

이승만은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자기의 청년시절의 이상에 좇아 한국정치의 틀로서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지향한 것은 올바른 선택이었다. 동시에 자유민주주의가 성장할 토대를 구축하기 위하여 국민교육을 강화, 문맹을 퇴치하고 미국원조를 끌어 들여 전재복구, 경제 재건을 이룩하고 농지개혁을 단행한 것도 잘한 일로 평가될 수 있다. 즉 한국 민주화를 촉진시키기 위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교육적, 기초를 확충, 강화한 것은 업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마. 민주화의 길에서 빗나간 집권연장책동

 

지금까지 이승만 연구가들이 집권연장 책동과 관련하여 지적하는 민주역행 사례의 대표적인 것은 ① 1952년의 부산정치파동을 통한 발췌개헌과 1954년의 사사오입(四捨五入)을 통한 초대 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 조항철폐 ②1957년의 진보당 탄압과 조봉암의 법살(法殺) ③ 1960년의 3.15 부정선거로 집약된다.

현재까지 자료에 나타난 바로는 이승만이 자기의 과오를 인정한 부분은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4.19 학생데모대에 대한 발포로 이 나라의 꽃다운 젊은 대학생들이 살상당한 사건뿐이다.(1960년 4.26 대통령 하야성명)

그 밖의 사건에 대해서는 본인 스스로 국민을 상대로 자기 과오를 인정한 사실이 없다. 이승만에게 있어서 부산정치파동이나 사사오입 개헌을 통한 초대대통령 중임제한 조항폐지는 민주헌정을 파괴, 유린한 행위라거나 정치적 과오로 인식된 것 같지 않았다.

 

① 부산정치파동을 통한 발췌개헌과 대통령 중임제한 철폐개헌

 

이승만 대통령은 재임 중 집권연장을 위해 두 차례의 개헌을 변칙적으로 단행했다. 하나는 부산정치파동을 통한 발췌개헌이고 둘째는 4사5입 개헌으로 알려진 대통령중임제한 철폐개헌이다. 우선 부산정치파동을 살펴보자. 이승만은 부산정치파동을 통한 개헌을 6.25동란이 진행 중인 국가위기상황에서 당시 의회 다수당인 야당이 미국의 대한정책과 대일정책에 편승, 헌법을 내각책임제로 바꾸어 이승만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미국이 선호하는 장면(張勉)을 선출하려는 기도로 부터 자기를 지키려는 정치행위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 당시 미국은 휴전협정을 반대하면서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한국전의 조기종결을 추진하려는 미국에 맞서고 동시에 미국이 원하는 한일수교에도 까다로운 조건을 달아 거부하는 이승만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할 계획을 추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부산정치파동은 국내정치차원에서는 내각제정부형태와 대통령제정부형태를 혼합한 제헌헌법에 내재했던 문제점이 이승만을 대통령직에서 밀어내려는 야당의 내각제 개헌기도로 말미암아 현실문제로 폭발한 사건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엄밀히 말해서 국회 내 여야 간의 정치문제였다. 그러나 내각제개헌안과 이승만의 직선제 개헌안이 정치과정을 통해 처리되지 않고 정권에서 동원한 군부대가 국회의원들을 협박하여 개헌안을 직선제로 처리한 것은 민주헌정사에 나쁜 선례를 남겼다. 물론 국회 내에서의 수적 우세를 믿고 전시(戰時) 중에 미국의 사주를 받아 개헌을 통해 현직 대통령을 밀어내려고 했던 당시 야당의 처사는 결코 옳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승만정권이 관제데모를 통해 민의를 조작하고 끝내는 군대를 동원, 의회를 무력화(無力化)시켜 개헌을 단행, 대통령직을 유지한 것도 잘못된 처사였다. 이러한 평가와 관련하여 헌법에 대한 태도 면에서는 국회를 불법 해산한 군사정권들 보다는 국회를 해산하지 않은 이승만이 좀 더 나은 편이었다는 소수 의견도 있다.

다음으로 초대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조항을 철폐한 사사오입(四捨五入)개헌에 대해서도 이승만은 과오를 인정한 일이 없다. 물론 이 사건이 한 국회의원의 착오투표로 빚어졌다고는 하지만 비록 1표라도 그것이 헌법규정을 위반했다면 개헌안은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는 국회를 통과한 개헌안을 그대로 받아들여 공포했다. 발췌개헌과 사사오입개헌은 국내외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고 또 이 시기를 전후해서 여당 후보를 돕는 관권의 공공연한 선거개입이 행해졌다. 헌법이 보장한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가 수시로 유린되는 사태가 계속되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신시내티 대학의 김한교 교수는 이승만이 1952년과 1956년에 두 차례에 걸쳐 은퇴의사를 거듭 표명했다가 민중대회나 진정서에 나타난 은퇴반대를 민의로 받아들여 재선, 3선의 길을 걸었는데 이는 당시 그가 고령(高齡)에 인(人)의 장막(帳幕)에 둘러싸여 일반사회와 격리된데 원인이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상 두 개헌안 처리문제는 집권연장을 위한 개헌이라는 점에서 도의적, 절차적으로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정치사적으로 보면 한국을 포함한 신생국의 민주정치발전과정에서 발생가능한 일종의 정치적 진통이었다. 4.19혁명이후 군사 정권들 하에서 강압적인 3선 개헌, 계엄령하의 유신, 그리고 두 차례의 국회해산이 있었고 이런 시련을 거쳐 오늘의 민주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③ 진보당 탄압과 조봉암의 법살(法殺)사건

조봉암 법살 사건에 대해서도 이승만은 한마디 언급이 없었다. 조봉암은 독립 운동기에는 모스크바 공산대학에 다닌 공산주의자로 알려졌고 해방 후에는 공산주의운동에서 손을 털고 상당수의 임시정부요인들과 진보진영 인사들이 불참했던 제헌선거에 참여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또 전술한 바 있거니와 초대 농림장관으로서 이승만을 도와 농지개혁을 단행한 사람이다. 그에게 잘못이 있다면 1956년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 진보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23.8%라는 높은 득표를 한 것이다. 조봉암은 1952년 제 2대 대통령에 출마했을 당시에는 11.4%를 얻었는데 이번에는 민주당 신익희 후보의 사망이라는 특별한 정세의 도움을 받고 아울러 6.25이후 이승만 정권이 집권유지수단으로 활용한 반공의 구호가 휴전의 성립과 전재복구의 진전에 따라 약효가 떨어지기 시작한데 큰 원인이 있었다. 특히 이 시점에 조봉암은 "피해대중 뭉쳐라", "평화적인 남북통일"론을 들고 나와 영호남 지역에서 높은 지지를 받았다. 당시 북진통일과 멸공통일을 집권의 주 무기로 삼던 자유당 등 보수 세력들은 평화통일론으로 젊은 유권자, 특히 영호남 유권자들에게 크게 아필하기 시작한 조봉암의 지지세력 신장을 심각히 우려했다.

한편 당시 신익희 후보의 유세 중 사망으로 대통령 후보를 내놓지 못한 민주당은 신익희 후보에 대한 추모 표를 유도하면서 야당인 조봉암후보를 반대할 것을 분명히 했다. 이것은 민주당도 휴전반대라는 면에서는 이승만과 한 길을 걸었기 때문에 평화통일의 기치를 내건 조봉암을 반대했던 것이다.결국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에게 간첩혐의를 씌워 민주당의 암묵적인 양해아래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1957년 7월 30일 사형을 집행했다. 이승만이 집권기에 범한 과오 중에서 큰 과오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이승만은 조봉암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것을 사법부의 판결의 결과로 받아들이고 자기의 과오로 인정했다는 증거가 없다. 그러나 사법부의 독립적인 판단이라고 하더라도 사면권을 가진 대통령이 사형집행을 묵인한 것은 그의 과오로 지적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놀라운 것은 김대중·노무현의 집권기간 중 의문사 진상규명 등 여러 가지 과거사를 재검토 하는 위원회가 구성되어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고 심지어 보상까지 해주면서도 조봉암의 문제를 아직까지 거론하지 않는 소이를 필자는 알 수 없다.

 

③ 1960년의 3.15부정선거와 이승만의 퇴진

 

1960년 자유당은 이승만과 이기붕을 정·부통령 후보로 내세우고 정권재창출을 기도했다. 그러나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지만 이 시기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필요했던 것은 능력 있는 후계자를 물색하여 권력을 잇게 해주거나 아니면 국가유지의 방법을 변경하여 경제건설의 비전을 제시, 국민들로부터 갱신된 지지를 조달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시대의 요구에 즉응할 새로운 대안을 강구하기에는 이념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너무 노쇠했다. 상황이 어려울수록 기득권세력들은 권력유지를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여기서 3.15부정선거와 시위대에 대한 발포가 나왔다. 이것은 앞에서도 지적했거니와 이승만 대통령이 스스로 인정한 정치적 과오이기 때문에 재론의 여지가 없는 과오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이 당시 이승만의 정권유지노력이 실패한 것은 아이러니지만 이승만 정권이 적극적으로 문맹을 퇴치하고 학교교육을 초, 중, 고, 대학까지 전반적으로 확충하는 교육개혁을 단행하고 전재복구와 경제발전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국민들의 민주역량을 해방직후보다 훨씬 강화시킨 결과였다. 이승만 정권이 키워놓은 국민들의 민주역량이 독재정권을 타도할 동력으로 전환된 것이다. 이승만 정권의 무리한 정권연장기도는 국민적 저항을 유발했고 젊은 학생들이 국민들의 선두에 서서 피로써 항쟁하며 민주주의를 부르짖은 것이 4.19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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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4월19일 파고다공원에서 끌어내려지는 이승만 대통령 동상

이 혁명의 성공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권좌에서 물러나 하와이로 망명했다. 망명지에서 병고로 시달리던 이승만은 죽음만은 조국에서 맞겠다는 의사를 전했으나 당시 정권은 이를 거부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65년 7월 19일 서거(逝去)하고 시신(屍身)으로 귀국했다. 그의 시신이 돌아오는 날 서울 시내는 이승만의 서거를 애도하는 시민들의 인파로 가득 매워졌다. 그의 유족들은 국장(國葬) 아닌 가족장으로 영결식을 마치고 유해를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이때 서울은 물론이거니와 전국각지에서 수많은 추모인파가 몰려와 고인을 애도했다.

 

라. 6.25 당시의 한강 폭파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양민학살사건

상기 세 가지 사건들도 이승만 정권에게 책임이 돌아갈 과오의 리스트에 올라있다. 그러나 이 문제들 중 거창양민학살 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과 관련해서는 1951년 문책인사로 각료일부를 개편하면서 내무장관 조병옥을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임시켰다. 그러나 이 사건들은 그 본질이 전시에 발생한 군경의 작전에 관련되는 사항이었다. 또 양민 학살사건의 경우도 한국사회가 건국전야에 경험했던 여순반란 사건, 4.3 제주사건을 비롯해서 6.25당시 북쪽으로 철수 못한 공산군들이 민간을 볼모로 해서 지리산 일대에서 오랫동안 빨치산투쟁을 벌였다는 역사를 상기해 본다면 군이나 경찰의 작전수행과정에서 빚어진 사건들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사건들에 관해서는 국가 최고책임자나 군통수권자로서의 책임을 이승만에게 물을 수는 있겠지만 이는 대통령의 의지가 개입된 집권 욕에서 비롯된 과오로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피난민이 몰려오는 한강철교를 예고 없이 폭파한 사건, 수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된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등지에서 무차별로 양민들을 살상한 사건은 이승만 대통령의 집권 시에 발생했고 희생자가 너무 많았다는 점에서 이승만 정권이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이승만 정권은 국민에게 이 사건들의 전후관계를 밝히고 옥석을 가려 희생자들에 대한 사과와 응분의 배상을 했어야 옳다. 이승만 정권이 이 책임을 못했다면 뒤이은 정부들이라도 국가수준에서 진상을 구명, 사과와 배상을 강구해야 하는데도 이 문제를 이승만 정권의 책임으로만 떠밀고 어느 정권도 제대로 된 처리를 강구하지 못한 것은 역사의 유감으로 남는다.

마. 친일파 옹호문제

 

끝으로 대통령으로서 이승만이 범한 과오 중에서 친일파를 일소하지 않고 오히려 이들과 야합하고 그들을 정부수립과정에서 중용(重用)했다는 사실이 중점적으로 지적되고 있다. 한국도 해방 후 친일분자를 마땅히 단죄해야 했고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반민족행위자 처벌법도 제정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친일파숙정에 지나치게 소극적이었고 심지어 이들을 정권창출과 유지에 활용하는 한편 정부수립 후에도 이들을 요직에 기용함으로 해서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지 못했다. 심지어 친일파들이 이승만 정권의 주구가 되어 해방 후 임정요인들과 반이승만(反李承晩) 계열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탄압했다.

그로서는 물론 친일파 처리를 태만히 한 것과 관련하여 좌우대립이 극심했던 해방정국에서 자율정부수립운동을 반대하거나 용공적(容共的)입장을 갖는 정치세력과의 대결 속에서 대한민국을 건국해야 할 긴급한 필요성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또 정부수립과정에서 일제 때 학창에서 공부한 인재들을 폭넓게 활용할 필요성을 내세울 것이다.

특히 이승만은 조선 왕정이 일본과 혈전(血戰)한 번 치루지 않고 국권을 일본에게 내주어 자기 백성들이 친일하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만든 장본인인데 이러한 역사의 원천책임을 묻지 않고 일제 치하에서 고통당하면서 살아온 고국 동포들을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과 반일로 양분하는 것이 타당한 것이냐는 논리를 내세우면서 친일분자처단에 소극적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이런 주장은 한일합방직후 독립운동다운 독립운동이 활성화되지 못하고 일본에게 나라 뺏긴지 10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3.1운동을 전후해서 독립운동이 활력을 얻은 점, 그리고 국내 부르주아지들 가운데는 겉으로는 일제통치에 협력하면서도 이면으로는 독립운동을 후원하는 이중(二重)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적잖았다는 점들을 내세워 친일분자처벌을 적극화하지 않았다고 변명하는 입장도 보였다.

그러나 해방된 조국에서 민족정기확립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가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수립과 치안확보, 국방건설이라는 당면한 과제의 중요성, 효율성만을 내세워 친일분자처리문제를 소홀히 다루다가 6.25동란을 거치면서 유야무야 해버린 것은 마땅히 과오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그의 집권 욕과 깊이 관련된 처사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5. 글을 마치면서

 

이상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국내에서의 정치생활에서 들어난 공과 과를 대체로 검토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국내에서 거론된 평가논의의 핵심은 공(功)보다는 과(過)를 들추는데 치중했다. 과오를 지적함으로써 후세에 귀감을 삼자는 것은 옳지만 동시에 공헌도 평가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가진 지식과 정보의 양, 그리고 경험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을 정확히, 공정하게 평가하기 힘든 존재인 것 같다.

한 때 국내에서 저명한 논객으로 알려진 신상초(申相楚)씨는 이승만의 공과(功過)를 논하면서 공 3, 과 7(功三過七)로 채점하고 이러한 평가는 조금도 각박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가 집필한 시점이 1965년이기 때문에 이승만을 비판일변도로 보는 시류에 영합한 평가일 수 있다. 그러나 천관우(千寬宇)씨는 “우리나라처럼 인물이 많지 않은 형편에서 어떤 인물에 대한 극단적인 평가는 피했으면 좋겠어요. 한 인물에 대해서 조그마한 흠이라도 찾아서 부정적인 결론을 내리기로 말한다면, 성하게 남아날 사람이 우리 역사상에 몇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되도록 좋은 점을 발견하는 아량과 관용으로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총결산해서 플러스 편이 크면 우선 긍정적으로 평가해 놓고 그 테두리 안에서 흠을 말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고 말했다.

 

[중국의 모택동 평가가 주는 교훈]

 

지도자 평가문제는 중국공산당의 모택동 평가가 우리들의 관심을 끌어당긴다. 중국공산당은 1981년 6월 당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6중전회)에서 "당 역사에 관한 몇 가지 문제에 관한 결의"를 통해 모택동의 공과를 채점했다. 결의는 공이 70%이고 과는 30%였다. 공7, 과 3(功七過三)이었다.그러나 필자가 보기엔 이 평가는 모택동의 공을 지나치게 과대 포장한 것 같다. 모택동은 주지하는 바이지만 1957년의 대약진 운동으로 중국경제를 30년 이상 후퇴시켰고 1965년부터 벌인 이른바 문화대혁명을 통해 10년 동안 중국의 전토를 완전히 피폐의 극치에 이르게 했다. 문화대혁명과정에서 3600만 명이상의 중국인이 아사했거나 폭력에 희생되었다. 당시 국가주석이었던 류샤오치(劉少奇)는 1969년 홍위병들에게 구타당해 죽었고 등소평은 강남성 남창에서 트랙터 공장 직공으로 7년간 유배당했으며 그의 가족들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중국 변두리 지역의 인민공사로 배치되었다. 이러한 과오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은 모택동이 중국을 사회주의국가로 통일한 공로를 인정, 그의 공을 7, 과를 3으로 평가하여 중국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 모택동의 초상화를 항상 걸어놓게 하고 천안문 맞은편 광장에 모택동 기념관을 설치, 운영할 것을 결의했다.

중국공산당이 모택동에 대해 이처럼 관대히 평가한 것은 중국공산당의 일당 지배를 정당화하 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다. 만일 모택동을 과오일변도로 몰고 갈 경우 중화인민공화국을 이끄는 공산당의 역사는 정당성 위기에 직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결의를 채택하면서도 모택동의 과오가 워낙 심각했기 때문에 관련 자료를 검토해보면 논의과정에서 많은 고뇌가 있었던 것 같다. 예컨대 당시 정치국 상임위원이었던 천윈(陳雲)은 "모택동 주석이 1956년에 죽었다면 중국인민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언급했는가 하면 모택동과 모택동 사상을 구별, 과오를 줄이고 공을 부각시킬 논리를 개발하는 등 과오를 줄이고 공을 키우는데 어려움을 겪었음이 많은 자료에서 별견된다.만일 한국에서 이승만이 모택동만큼의 과오를 범했다면 그 시신은 한국 땅에 묻히지도 못했을 것이다.

가. 공헌부분

우리는 이 시점에서 이승만의 공과를 현재 밝혀진 자료와 대한민국의 정통성확립이라는 목적에 조명하여 공과를 재평가하고자 한다.

 

우선 이승만 대통령은 동서냉전으로 한반도가 남북한으로 분단될 수밖에 없던 역사적 상황 속에서 내외정세에 대한 예리한 통찰과 자율정부수립이라는 신념을 바탕으로 대미외교를 통해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그는 유엔감시하의 자유총선거를 통해 대한민국을 수립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유엔이 결의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의 지위를 얻게 한 점도 크게 평가되어야 한다. 이 점은 소련의 위성정권으로 출발한 북한과 너무나 대조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건국의 기틀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헌법을 갖는 국가로 세움으로써 공산독재를 추구한 북한과는 달리 오늘날 세계사의 중심대열에 올라서서 국가의 수준을 G20반열에 끌어올린 기초를 다진 것이다. 이점에서 우리는 초대 대통령으로서의 이승만 박사의 공헌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

둘째로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6.25동란에서 공산침략군 몰아내고 대한민국을 지킨 지도력과 전시외교능력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의 공로를 각별히 인정해야 한다. 특히 미국과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6.25동란 후 60년 동안 한반도에서의 전쟁재발을 방지, 한국이 오늘과 같은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안보환경을 조성한 점도 중요 공헌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건국의 기초를 마련하는 내정개혁에서 보인 성과도 그의 주요 치적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공헌의 내용은 앞에서 검토한 '4의 나, 다, 라'항으로 대체한다. 이 자료를 보면 한국에서 60년대부터 시작된 개발연대가 이승만 대통령 집권기에 그 기초가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 과오부분

첫째 고령의 비극과 장기집권의 획책을 지적한다. 그는 인생 70세에 귀국하여 73세에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75세부터 3년간 6.25동란을 겪었다. 3.15 부정선거로 그가 하야할 때의 나이는 85세의 극 노인이었다. 그가 재선임기가 끝나는 1956년에 정치인생을 마감했더라면 그는 훌륭한 지도자의 한 분으로 역사에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1960년 3.15 정부통령 선거에서 불법, 부정선거로 정권을 연장하려다가 이에 항의하는 학생 시위대들에게 발포, 수많은 사상자를 낸 것은 치유할 수 없는 과오가 아닐 수 없다. 자기가 집필한 『독립정신』속의 민주주의 정신을 스스로 망각한 것이다.

둘째로 앞으로 정권을 노릴 유력한 정적(政敵)이 될 것이라는 우려에서 진보당을 탄압하고 독립운동가인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것은 중대한 과오가 아닐 수 없다.

셋째로 친일파 처리를 유야무야하고 심지어는 친일파들이 국정의 요직을 장악, 독립지사들을 감시, 심문하는 위치까지 오르게 한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과오였다.

 

다. 총평

현시점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공과를 세계 속의 한국이라는 큰 안목에서 교량(較量)하면 대한민국의 국가로서의 초석을 올바로 세우고 한반도의 공산화책동을 막아낸 공로에는 큰 방점을 찍을 수 있다. 그러나 고령에도 불구하고 장기집권 욕에 사로잡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과오를 법한 것은 그의 업적의 액면 가치를 크게 감살 시켰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현시점의 이승만 평가를 중국공산당의 모택동 평가처럼 공7과3식으로나 신상초 씨처럼 과7 공3식으로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1990년대와 더불어 공산주의의 길을 택한 소련을 비롯한 동구제국이 몰락하고 오늘날의 참담한 북한실정을 보게 되면 이승만 대통령이 저초(底礎)한 건국노선이 너무 정당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점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구상과 추진이 갖는 의의를 새삼 재평가 하게 된다.

또 3.15부정선거와 학생데모대에 발포한 이승만의 큰 과오를 제외한 여타의 반민주행위는 1960년대에 걸쳐 신생국들에서 발생한 민주주의의 변질, 왜곡, 헌법외적 정부의 출현 등의 현상과 민주당 정부를 무너뜨린 5.16군사혁명 후 25년간 지속된 군사권위주의 정권의 역사를 되돌아 볼 때 결코 절대악(絶對惡)인 것처럼 단죄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서구식 민주주의가 한국에 정착되는 과정의 진통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현재 밝혀진 사료에서 보면 이승만 대통령을 한반도의 영구분단의 원흉이라거나 6.25동란을 초래했다는 평가는 공산권 자료들이 공개되기 이전의 자료부족에 기인하거나 아니면 냉전사에 뿌리를 둔 잘못된 평가였다. 남북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이 김일성과 스탈린의 한반도 공산화전략의 산물로 밝혀진 이상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잘못된 평가는 응당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주 독재자뿐만 아니라 국토영구분단의 원흉, 6.25동란의 유발자라는 덤터기까지 한데 뒤집어씀으로써 그의 공헌은 부정되고 과오만 부각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의 공헌도 바로 지적되고 올바른 역사의 내용으로 채워져야 할 것이다.

4.19 혁명은 이승만 대통령을 권자(權座)에서 몰아냈지만 그렇다고 그의 과오만을 들추어내서 그를 역사 속에 매장하자는데 목적이 있다고 말 할 수는 없다. 이승만 대통령 시대로부터 이 땅에 뿌려진 민주정치의 씨앗을 잘 북돋고 바로 키워 국가의 더 큰 발전을 이룩하자는 데 참뜻이 있었을 것이다. 4.19혁명 50주년이 이 나라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박사의 위치를 재조명해주는 희년(禧年)정신실천의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필자: 이영일(李榮一)

①4.19혁명당시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정치학과 3년생으로 문리과 대학 학생 데모의 준비, 조직,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

② 국토통일원 정치외교정책담당관 및 교육홍보실장, 통일연수원장 역임

③ 11대, 12대, 15대국회의원 및 국회문교공보위원장 역임

④ 일본츠쿠바(筑波)대학 국제정치 객원연구원 역임

⑤ 호남대학교 및 우석대학교 초빙교수 역임

⑥ 한중문화협회 총재 및 중국베이징대학 동북아 전략연구 중심 초빙연구원

⑦ 호남대학교 명예 법학박사취득

⑧ 정부의 홍조근정훈장, 벨기에 정부의대십자수교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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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L과 PD를 매장하라"

[사민주의연대 토론회 발표문] "한국판 바트 고데스베르크 선언이 시급하다"
 필자 주섭일 박사

* 아래의 글은 25일 열리는 사회민주주의연대 주최의 토론회 <제3의 길인가, 사회민주주의인가?>에서 발표될 제2주제 부분의 발표문 「'제3의 길'의 종언과 사회민주주의의 새출발- 한국판 바트 고데스베르크 선언이 시급하다 -」의 요약문입니다.

한국 진보가 나아갈 길, 제3의 길인가, 사회민주주의인가?

■일시: 2010년 2월 25일(목요일) 오후 3시-5시
■장소: 프레스센터 19층 매화홀

■개회 인사: 이부영 (화해상생마당 운영위원)
■격려사: 박영호 (한신대 명예교수, 사회민주주의연대 고문)

■사회: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

제1주제 : '제3의 길' 정치의 평가와 새로운 정치전략
발표: 김윤태 (고려대 교수)
토론: 고세훈 (고려대 교수)
토론: 윤도현 (현도사회복지대 교수)

제2주제 : '제3의 길'의 종언과 사회민주주의의 새 출발
발표: 주섭일 (언론인, <사회와 연대> 회장)
토론: 김석연 (변호사, 진보신당 정책위부의장)
토론: 노항래 (국민참여당 정책위의장)


 

1) 주섭일 박사의 주제글
프랑스 석학의 경고: 사회민주주의는 소멸할 것이다.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BHL)는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프랑스 사회당은 죽었다, 사회당은 사라져야 한다”고 선언해 유럽정가를 진동시켰다. 그는 유럽의 중도좌파가 과거의 서구 공산당처럼 소멸할 것을 경고한 것이다.

유럽의회선거에서 프랑스사회당은 사르코지 대통령의 대중운동연합(UMP)에 대패했고 녹색당과 같은 13%대의 득표로 사르코지의 대체세력에서 제거될 위기에 처했다. 영국 브라운총리의 노동당은 카메론의 보수당보다 8%나 적은 15%로, 파시스트 극우정당인 영국국민당에도 뒤진 3등으로 전락했다.

유럽사회민주주의는 과연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붕괴 후 소련제국을 포함한 현존사회주의가 멸망한 것처럼 소멸하고 있는 것일까? 영국노동당이 극우정당에 이은 3등으로 전락하고, 스페인 중도좌파 자파테로 총리가 우파 인민당에, 독일사민당이 메르켈의 기민-기사연에, 프랑스 사회당과 이탈리아 민주당이 각각 중도우파에 대패한 것은 한마디로 총체적 패배를 의미한다.

서민-노동자-농민-중산층의 대변 정당들이 ‘삶의 정치’를 수행하지 않고 신자유주의정책을 답습하거나(영국노동당, 독일사민당, 스페인 사회당 등), 아니면 중도우파의 실용주의정책으로 좌파정책을 선점했기(메르켈 독일 총리,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 스웨덴 럼스펠트 보수당 총리등) 때문이다.

2) 영국노동당 총리, ‘제3의 길’ 장례를 치르다.

영국노동당은 월스트리트와 부시 전대통령과 같은 신자유주의정책으로 세계경제를 위기에 처한 책임자로 지목된 좌파정당으로 선거승리는 애당초 포기한 상태였다. 영국노동당의 블레어와 브라운총리는 12년 집권하면서 이른바 “제3의 길” 구호로 신자유주의를 추종해 사회민주주의를 ‘사회자유주의’로 변형시킨 장본인들이다.

그러나 브라운은 노동당 정권의 경제정책이 잘못이었다고 공개적인 사과를 했다. 블레어 전총리의 ‘제3의 길’ 계승자인 브라운은 신자유주의적 시장만능주의를 원인으로 진단하고 사회민주주의정책으로 신속히 대응함으로써 위기국면을 극복하려고 한 것이다. 이는 영국경제의 파산을 막는데 큰 효과를 냈으며, 영국의 신노동당이 창안한 ‘제3의 길’에 종지부를 찍은 셈이다.

브라운 총리의 대국민 사과는 노동당 당수로써, 금융위기의 원인이 ‘제3의 길’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노동당 총리의 손으로 장례식을 치른 것이다. 이로써 ‘제3의 길’은 서구대륙에 확산되다가 경제위기 한복판에서 신자유주의와 함께 침몰했다.

3) ‘제3의 길’ 전염된 사민당, 메르켈 승리보증하다

금융위기를 맞으면서 메르켈은 처음에는 파산은행의 국유화를 주저하다가 브라운과 사르코지의 권고를 수용해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의 방어에 앞장섰다. 우파총리가 사민당정책으로 위기탈출의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여기서 메르켈은 국민의 신뢰를 확보했다.

그러나 명분을 챙기지 못한 연정 파트너 사민당은 ‘제3의 길’이 만든 슈뢰더의 2010 개혁정책이 위기를 불렀다는 책임을 혼자 떠맡게 됨으로써 공은 메르켈과 우파에게, 과는 스타인마이어의 사민당이 덮어 쓰는 이상한 국면이 나타났다. 사실 유럽의회선거 대승에 이어 2009년9월 총선에서 메르켈의 승리는 예정된 것이었다.

슈뢰더가 ‘제3의 길’ 전염병에 걸려 사회민주주의의 정체성인 시장의 관리와 사회정의마저 포기한 2010 개혁을 수립할 때부터 최대의 사회민주주의 대중정당 독일사민당은 사실상 기민-기사연과 차별이 없는 중도우파정당의 모습으로 투영되었다. 기민-사민 연정에서 보듯, 독일 유권자들은 좌우 색깔이 비슷한 혼란한 정치정항에서 경제위기를 잘 극복하고 있는 메르켈총리에게 결정적 손을 들어주었다.

총선결과 사민당은 역사상 최저 득표율 22.9%로 참패했다. 2005년보다 무려 11%나 감소한 군소정당 득표라는 최대의 수모를 당했다. 메르켈의 기민-기사연은 35%의 득표율로 승리하면서 3위 득표를 한 우파 자유당과 연정파트너를 교체했다. 사민당은 1998년 이래 12년만에 야당으로 전락했다. 스타인마이어는 “참으로 참담한 날이다. 득표결과를 긍정적으로 제시할 방법이 없다”고 역사적 패배를 자인했다.

‘제3의 길’ 수용에 반대해 11년 전 사민당과 결별한 라퐁텐의 좌파당은 12%의 득표율로 5년 전보다 4%나 약진했다. “우리는 역사적인 최고의 득표를 했으며, 앞으로 사회민주주의 국가복원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독일사민당은 선거전에서 2010플랜을 접고 2020플랜을 공약으로 제시해 슈뢰더와 차별화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4) ‘제3의 길’ 거부, 조스팽 총리의 21세기 프랑스사민주의

프랑스 중도좌파 사회당은 ‘제3의 길’을 거부하고 ‘21세기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독자 노선을 걸었다. 프랑스는 신자유주의의 세계화가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의 바람을 타고 몰아치고 있을 때인 1997년, 사회당-공산당-급진좌파 좌파3당 연합정부를 수립했다. 미테랑대통령의 집권은 2차 우파동거정부를 경험했지만, 사회민주주의정책을 원만히 집행했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아버지 부시, 그리고 영국의 대처총리가 미테랑의 좌파노선을 견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프랑스의 경제성장이 느리고, 노조의 잦은 파업, 복지로 과도한 재정부담, 큰 정부는 나라를 망치는 길이라고 주장하며 미테랑은 설득했다. 미테랑은 ‘우리는 사회보장, 대학까지 무료교육, 헌법상 노사공동 경영원칙 등을 위해 큰 정부가 필요하며, 우리 길에 간섭 말라’고 응수했다.

미테랑은 철강, 전자, 조선, 항공분야 대기업의 국유화를 단행했고, 민영은행을 전면적으로 공영화했다. 그리고 노인연금과 퇴직연금을 획기적으로 인상하는가 하면, 최저임금도 올렸다. 그리고 ‘사회연대세’라는 이름으로 고소득자와 부자들에게 부유세를 부과함으로써 좌파정부의 정체성을 강화했다. 특히 일부 부유층 자녀들이 다니는 사립학교에 대한 규제를 취하면서 공립학교에 대한 정부지원을 확대해 공교육을 강화했다.

특히 외국인의 프랑스 거주조건을 크게 완화하는 획기적 이민정책을 집행했다. 많은 해외이민자들이 미테랑정부의 개방정책에 환호를 보냈으며, 사회적 약자들이 살만한 사회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5년 보수 드골파 시라크 대통령시대를 열었으나, 혼합사회라는 프랑스모델을 바꾸지 않았다. 기간산업 국유화, 노사공동경영, 사회보장제도, 무상의료-무상교육 등 복지국가체제를 구축한 것은 2차대전후 드골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1997년 총선거에서 리요넬 조스팽 사회당수의 사회-공산-녹색당 연합정부를 구성해 보다 더 사회화-평등화했다. 특히 조스팽은 “경제는 시장경제, 사회는 국가의 규제관리”라는 현대적 사회민주주의정책을 수립해 경제성장과 공정분배의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결과적으로 조스팽의 정통사회민주주의는 오늘 “가장 견고하게 경제위기에 잘 저항하는 프랑스 모델”이라는 영미언론의 호평을 받는 자유와 평등의 조화로운 균형사회를 만드는데 큰 기여를 한 것이다.

5) 중도실용 신보수 3총사, 사르코지, 메르켈, 라인펠트
(생략)

6) 독일사민당 새출발, 전당대회 슈뢰더 2010 끝장내다

사회민주주의는 과연 멸망할 것인가? ‘최대의 위기인 것은 확실하나, 다시 살아 날 것이다. 베를린장벽 붕괴 후, 멸망한 구소련중심의 공산주의와는 달리 사민주의는 자본주의체제 멸망과 이를 대체하려는 이념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관리해 인간을 위한 쇄신을 도모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 서구정치학계의 일치된 해석한다.

르몽드지는 정치학자들과 사회민주주의의 위기에 관한 토론을 최근 주최했는데, 로랑 부베교수(니스대학교 정치학교수)는 3중 위기증상을 지적하고 해법을 제시했다.

“먼저 사회민주주의는 역사적 사명을 완수했기 때문에 위기이다. 다시 말하면, 사회(민주)당이 집권한 모든 나라들에서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양식의 사회복지국가가 정착했다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 역사적 플랜은 지금 완전히 실현된 것이다. 사회민주주의는 사회주의실현의 또 하나 거대한 다른 길인 공산주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살아남는데 성공했다.

그래서 사회민주주의 또는 민주적 사회주의는 1917년 러시아혁명 이래 사회주의혁명 전략의 반대에 참여한 역사적 투쟁에서 승리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또한 공산주의라는 내부의 적을 상실한 것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에 혼자 직면해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회민주주의의 제3의 위기는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것을 잘 알지 못했거나, 자발적으로 합류했기 때문에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와의 대결에 실패했다. 사람들은 이를 ‘사회적 자유주의’라고 부르는 ‘제3의 길’이다. 그래서 위기는 심각한 것이며, 반드시 경제상황에만 기인된 것은 아니다”

‘제3의 길’이 신자유주의를 답습해 위기를 만든 후, 글로벌 금융위기의 해법을 잘 찾을 수 있는 사회민주주의는 이 때문에 시장규제와 관리를 경고했음에도 유권자의 불신으로 패배했다는 얘기다. 반면 재빨리 사회민주주의의 문제의식을 갖고 모방한 신우파에게 도리어 권력을 인도한 꼴이 됐다는 말이다. 그러니 사회민주주의의 사망과 폐허에서 새출발을 권고하는 석학 BHL의 경고가 공감을 얻는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낡은 복지지향적 정통사회민주주의를 그대로 품고 계속 나갈 수 없다. 그러면 사회민주주의는 어떻게 새출발하는가?

먼저 독일사민당은 2009년11월13일 드레스덴 전당대회에서 시그마르 가브리엘 전 환경장관을 새 당수로 뽑았다. 사민당 다수당원들은 슈뢰더의 ‘제3의 길’이 분당을 초래해 패배한 반면, 오스카 라퐁텐의 좌파당을 출현시켜 이번 총선에서 약진한 만큼 합당을 기대했다.

전당대회는 슈뢰더의 2010개혁 프로그램, ‘제3의 길’을 사실상 매장시켰다. 보흐닝 대변인은 전당대회 후 회견에서 “과거를 대체하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작업이 시급하다. 사민당에게 너무나 비싼 대가를 치르게 한 기민-기사연 정책과 타협한 과거를 청산하고 슈뢰더시대의 2010유산을 확실히 끝장내게 되었다”고 전당대회 결과를 요약했다.

7) 유럽사민당대회, ‘제3의 길’ 매장 사회생태주의 깃발 들다

3월 지방선거를 앞둔 프랑스 사회당은 환경문제를 사회문제와 접목함으로써 위기의 돌파구마련을 분명히 했다. 오브리당수는 “새로운 발전 모델을 창안하기 위한 성찰과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하고, “사회주의자들이 환경문제의 해결을 위한 대책을 본격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모든 환경정책은 사회문제로 수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우리는 <사회적 생태주의> 또는 <에코-발전주의>를 위해 3월 지방선거부터 드림팀을 구성해 활동할 것이다. 특히 환경문제해결을 위해 그린세금, 기후에너지세금, 탄소세 등을 기업의 에너지 소모량에 따라 사전 공제하도록 하겠다”고 설명했다.

유럽연합 27개국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2009년12월7-8일 양일간 체코의 프라하에서 전체의원대회를 열어 사회민주당-사회당의 새 출발을 다짐했다. 전당대회는 “독일총선 패배의 잿더미에서 특히 2010년 예상되는 영국노동당 패배가능성을 앞두고 새로운 결의를 다지며 위기탈출에 총력을 기울인다”고 선언했다.

대회는 위기의 진단을 5가지로 요약했다. 1) 세련되고 상당한 호소력을 가진 중도실용주의로 무장한 우파가 유권자를 압도해 승리를 견인함. 2) 사회민주주의의 장점을 잠식한 우파의 득세와 정책적 혼란으로 사회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함. 3) 녹색당의 선전과 부상으로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정치의 리더십을 상실함. 4) 독일사민당의 2009년 패배와 영국노동당의 2010 총선 패배전망으로 좌파에게 전반적으로 패배감이 증폭됨. 5) 그러면서 유럽사회민주주의자들은 2009년 유럽의회선거의 집단적 패배와 독일사민당 패배는 ‘이제 바닥을 쳤다’는 사실에 동의했으며, 앞으로는 패배가 오히려 중도좌파의 기회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리고 유럽사회민주주의 전당대회는 다음과 같이 결의함으로써 제로에서 출발하기 위한 방향과 지향, 이정표를 세웠다. 1) 사회민주주의의 적은 내부의 적뿐만 아니라 극좌파로 규정한다. 2)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사회의 변화에 선행대처하고 환경주의와 조화를 이루며 연결함으로써 ‘녹색-케인스주의’를 실현한다. 3) 시장경제를 수용하고 세계화는 사회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 4) 재정과 사회부문에 약간의 이견이 표출되었으나, 앞으로 대화를 통해 극복한다.

5) 유럽의 진보세력을 위한 공동의 아젠다 창출을 위한 작업팀을 구성해 앞으로 2년간 연구해 최종 마스터플랜 결정한다. 6) 앞으로는 국가단위의 해석, 정의, 규정, 결정 등을 탈피해 유럽대륙차원의 공동정책을 수립하고 가치관을 재정립한다. 7) 2014년 사회민주주의 유럽대통령 단일후보를 낸다. 그리고 대회는 유럽사회민주주의당의 총재로 덴마크의 풀 라스무쎈 전총리를 추대했다.

그리고 유럽사회민주주의당의 향후 구호를 이렇게 정했다. “사회자유주의는 죽었다! 사회-생태주의 만세!”

8) 엥겔스, 공산주의 혁명론 등이 오류임을 밝히다

그러면 세계차원의 사회민주주의의 위기탈출과 발전은 한국정치에, 특히 진보세력에게 어떤 교훈과 시사점을 보이는 것일까. 한국에서 사회민주주의, 또는 중도좌파는 진보주의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다. 진보세력으로부터는 개량주의, 또는 기회주의나 희색분자로, 보수세력은 공산주의자와 같은 적색분자로 상대하지도 않는 현실이다.

과연 그런가? 앞에서 분석한 바 같이 현대정치의 양대 주류의 하나를 이루며 중도우파와 교대로 정권교체를 해 자본주의체제를 사회화-인간화함으로써 사회양극화를 치료하는 의사의 역할을 사회민주주의는 담당해왔다.

특히 사회민주주의는 정치부패를 청소한 도덕성으로 정치사회를 쇄신하고 정화하는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국에서는 정치무대에 한 정당으로 데뷔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진보는 이른바 NL과 PD라는 양대세력이 분점해 끝없는 이론-분파-파당 싸움을 하고, 삶의 정치를 주장하는 사회민주주의를 권력의 하수인으로 매도함으로써 현대적 진정한 진보세력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한국진보세력의 경직성과 완고성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자본주의 멸망설에 근거한 공산주의의 대체론, 소수정예 엘리트를 전위로하는 프롤레타리아 폭력혁명론의 도그마의 족쇄를 풀지 못하고 있다.

이는 1848년2월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선언에 근거하는 전략이며 이념이다. 특히 이는 이른바 ‘사회주의혁명’을 부르짖는 북한 김정일의 존재와 무관하지 않다. 이른바 한국진보는 북한의 덫에서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모습이다. 진보는 여기서 탈출하지 않으면 소멸할 운명에 직면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민주주의의 뿌리와 진전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

사회민주주의는 1895년3월 마르크스의 『프랑스의 계급투쟁』 재판의 엥겔스의 서문에서 출발했다. 프랑스의 1848년 2월 혁명을 분석한 마르크스의 이 저술은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의 연합봉기가 왕정을 타도하고 세계최초의 좌우공동정부를 수립한 역사적 혁명을 다루었다.

엥겔스의 서문은 그의 유서로 평가되며, 특히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저인 공산당선언의 오류를 솔직히 시인한 문서로 더욱 유명하다. 그러나 레닌의 러시아혁명 후 엥겔스의 유언은 날조된 것으로 왜곡되어 잊혀진 문서가 되었으나, 소련멸망 후 다시 빛을 보고 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엥겔스의 유서에서 공산당선언의 오류를 근거로 공산주의 도그마에서 탈출했다.

엥겔스는 여기서 공산당선언에서 1848년 경제상항을 사회주의혁명의 성숙기로 보았던 것이 오류였다고 고백한 것이다. 엥겔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역사는 우리와 우리처럼 생각했던 사람들 모두가 틀렸음을 입증했다. 역사는 유럽대륙의 경제발전이 아직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제거할 만큼 성숙되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역사는 1848년 혁명이래 전역을 휩쓴 혁명에 의해 이를 입증해 주었다”

1789년7월 프랑스의 부르주아혁명이 봉건제의 성숙기에서 부르주아의 봉기로 자본주의로 대체했고, 1848년 자본주의 성숙기에 프롤레타리아의 봉기로 공산주의로 이행한다는 혁명론이 마르크스와 엥겔스 자신의 오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공산당선언의 공산주의유토피아는 엥겔스가 부정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다음에는 폭력혁명시대는 갔고 선거의 시대가 왔다는 엥겔스의 선언이 담겨 있다. 공산당선언은 국가란 부르주아계급의 프롤레타리아 착취도구로 타도대상으로 보았으나, 그렇지 않다고 엥겔스는 말했다. “선거야말로 프롤레타리아의 제일 효과적인 해방의 수단”이며 권력에 (프롤레타리아세력의) 다수가 진입함으로써 국가를 부르주아로부터 독립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부르주아는 프롤레타리아의 비합법적 활동보다는 합법적 활동을, 반란의 결과보다 선거의 결과를 더 두려워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엥겔스는 “체제전복을 위한 혁명가이며 음모가였던 우리는 합법적 방법으로 훨씬 더 성장하고 있다. 프랑스 부르주아 질서당은 그들이 창조한 법적 조건에서 소멸하고 있다. 그들은 합법성은 우리의 죽음이라고 울부짖고 있다!”라고 썼다. 여기서 마르크스의 폭력혁명론에 종언을 고한 셈이다.

그런데 엥겔스의 유언집행자의 한 사람인 베른슈타인이 유언발표 이듬해인 1896년 “자본주의의 제문제”에서 “자본주의 멸망은 없다”고 선언해 공산당선언의 유토피아를 매장했다. 그는 “엥겔스가 지적한 오류는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것은 자본주의 붕괴론,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자본주의체제의 필연적 붕괴를 항상적으로 기대하는 오류이다. ‘혁명’에 의해 권력을 장악하고 국가를 전복한다는 1848년(공산당선언)의 잘못된 사고는 마르크스의 지나친 연역에 의한 편향적 논리에 의해 기인하는 것이다” 그는 또 “자본주의는 점차 자기통제력을 갖게 되었다. ....노동계급의 생활조건이 향상됨으로써 계급투쟁은 오히려 약화되었다. 사회내 제관계는 공산당선언이 말한 것처럼 악화되지 않았다”고 자본주의 붕괴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했다.

실로 사회민주주의는 여기서 출발했으며, 이것이 세계최초의 사회민주당정부를 독일에서 출범시킨 이유다. 자본주의 멸망테제가 붕괴되면 공산당선언은 단순한 유토피아로 끝난다. 마르크스가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을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로 매도한 것은 이제 역사적 오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20세기 말 공산주의 멸망은 이를 확실히 증언하고 있다.

9) 한국진보, 한국판 바트 고데스베르크 선언을 하라.

1959년11월13일 독일사민당은 바트 고데스베르크에서 임시전당대회를 열어 역사적 사적소유, 시장경제, 반공산주의 규탄선언을 채택함으로써 현대적 사회민주주의의 새로운 깃발을 들었다.

   
  ▲ 1959년 독일사민당의 바트 고데스베르크 당대회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주의의 뿌리를 주장할 권리가 없다. 그들은 사회주의이념을 왜곡시켰다. 사회주의자들은 자유와 정의의 실현을 위해 투쟁하고 있으나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의 갈등을 이용해 자기 당의 독재를 확립하려한다”

독일사민당은 이렇게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규탄하고 공산주의와 결별했다. 그리고 자유정신과 개혁, 휴머니즘과 인권을 기초로 하는 ‘사회민주주의’ 강령을 구축했다. 강령의 핵심은 생산수단의 공유화라는 마르크스주의 원칙을 포기하고 사적소유권, 소비의 자유, 노동의 자유, 자유경쟁의 원리, 개인의 이니시어티브와 연대의 가치에 기초를 두는 새로운 사회경제질서의 구축을 천명했다. 이렇게 해서 “자본주의체제의 옹호”와 “사적 소유를 권장”했다.

“사회정의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면”이라는 조건을 달았지만, 자본주의의 멸망과 공산주의이행을 근간으로하는 공산주의도그마의 안전무결한 폐기요, 규탄이다. 독일사민당은 자본주의체제의 영속을 공식화하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회보장제 등 사회주의적 정책을 집행함으로써 자본주의체제를 인간화하기 위해 총력을 기우린다는 것이다. 강령은 정치부문에서 혁명을 부정하고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를 주장해 의회민주주의원칙을 천명했다.

특히 강령은 서독의 국토방위를 위한 외교-국방정책을 수립했다. 이는 좌파정당이 서독의 헌법을 존중하고 국토를 지키는 것을 원칙으로 천명한 중요한 문서다. 강령은 “우리의 길”이라는 결론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자유의 극단적 억압자, 인간권리의 파괴자, 개인과 국민의 자치를 거부하는 자들이다. 이제 공산주의국가 안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지적하고 “사회민주주의의 기본가치를 기초로 하는 사회만이 미래에 새로운 희망을 줄 수 있다”고 천명했다.

이 강령은 엥겔스가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의 오류를 마르크스의 “프랑스의 계급투쟁”서문에서 밝힌 후, 60여 년 만에 사회민주주의가 공산주의와 대체하는 이념으로 규정한 역사적 문서이다.

사회민주주의는 바트 고데스베르크 선언을 계기로 프랑스와 독일 북유럽에서 큰 발전을 이루었으며, 1989년11월 베를린장벽 붕괴로 구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진영이 멸망함으로써 유일한 좌파이념을 대변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한국의 이른바 진보세력 또는 정당들은 이미 소멸한 현존사회주의 즉 구소련공산권이라는 과거의 이념의 틀에 얽매어 있음이 확실하다.

민주노동당은 NL이 주류라고 하며, 종북주의로 비판하면서 탈당해 창당한 진보신당도 PD가 주류라는 사실은 모두가 다 알고 있다. 10년 전 우리 유권자가 10% 이상 표를 던져 국회의석 10석을 주었으나, 민주노동당은 오늘 유일좌파인 사회민주주의정책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공산주의 이념의 이론투쟁에 매달림으로써 오늘 국민적 불신의 늪에 빠저 정치무대에서 소멸한 운명에 처해 있다.

10년 동안 한국진보세력은 사회민주주의를 개량주의와 기회주의로 매도하면서 종북주의와 민족해방(NL)이라는 통일지상주의노선을 고수했고, 일부는 마르크스-레닌주의적 민중해방(PD)노선을 걸어왔다.

그들의 길은 이미 1989년11월 베를린장벽 붕괴로 사망한 공산주의와 이의 변종인 이른바 “주체사상”의 길이었다. 그들은 공공연히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세계”의 존재를 이상화하고 있으나, 이는 1895년 엥겔스가 고백했고, 60년전 바트 고데스버그 선언이 천명했으며, 20년전 베를린장벽 붕괴로 사망한 공산주의의 시체를 이념으로 삼은 그들만의 싸움일 뿐이다.

그러니 오늘 한국유권자들이 이른바 진보세력에 장송곡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프랑스의 좌파 철학자 BHL의 “프랑스 사회당은 사라져야 한다”는 외침은 서구 중도좌파가 아니라 바로 한국의 진보세력에게 주는 준엄한 경고라 하겠다.

그러면 한국의 진보가 살길은 있는가? 나는 분명히 있다고 말한다. 진보대연합을 부르짖고 있으나 쓸데없는 공허한 게임이다. 먼저 왜 20년 전 공산주의 멸망 시기에 이탈리아와 스페인, 포르투갈 공산당이 적색에 낫과 해머를 그린 깃발을 내리고 사회민주주의로 전향했는지, 특히 동독노동당을 비롯한 폴란드, 체코,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공산당이 임시전당대회를 열어 붉은 모자를 벗고 서구사회민주당의 모자를 바꾸어 썼는지를 한국의 진보는 깊이 성찰해야 한다.

그들은 모두 그래서 공산주의 멸망 후 전환 사회민주주의는 살아남았고, 민주주의 질서에 순응함으로써 보수당을 누르고 집권하기도 한 것이다. 한국진보가 NL이다, PD다 하는 공산주의시체를 껴안고 대연합이다 공동전선이다 하며 낡은 얼굴화장의 분을 바른다고 해서 회생할 수 없다. 서민, 노동자, 중산층, 지식인의 삶의 정치를, 구체적 집행정책을 강령에 담아 사회민주주의 가치관, 이념, 행동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2012년 총선에는 완전 소멸할 것이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NL과 PD라는 시체를 스스로 매장하고 사회민주주의 옷을 갈아입어라. 그리고 한국사회를 자유와 평등이 조화롭게 균형을 잡는 사회로 쇄신하는 강령을 채택해야 한다. 서구선진 사회민주주의 정치양식을 벤치마킹해서 진보의 면모를 완전히 쇄신해 우리 유권자에게 새롭게 접근하면 우리정치에 새 희망을 줄 수 있다.

독일사민당의 바트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읽어보고 한국판 강령을 만들어 대전환을 선언하라. 그리고 외교안보정책과 교육정책을 강령에 분명히 담으라. 그러면 우리 유권자는 돌아 올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정치는 영호남, 충청의 지역구도가 영원히 고착되는 보수만의 천지가 지속될 것이다. 이것은 한국을 제2의 아르헨티나로 전락시키는 최악의 시나리오이며, 그 책임은 무능하고 오만방자하고 비도덕적이며 경직된 도그마의 족쇄에 얽어 매인 이른바 한국의 가짜진보세력이 져야 할 것이다.

여기서 나는 한국선진화, 국민통합, 사회갈등해소의 길은 시장경제, 의회민주주의, 사회정의, 인권, 평화, 복지국가의 확고한 가치관으로 무장한 사회민주주의세력이 정치구도에서 보수와 대등한 규모의 주류세력을 형성하는데 있다고 굳게 믿는다. 또 이것은 대한민국을 지키는 일이며 동시에 통일을 앞당기는 길이 될 것이다. 오늘 우리가 서구 사회민주주의를 공부하는 까닭은 실로 여기에 있다.

2010년 02월 24일 (수)

주섭일 / 언론인, '사회와 연대' 회장 redian@redia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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