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핵과 사드(THAAD)를 둘러싼 동북아시아 상황진단

(이글은 헌정지 20176월호에 게재되었다)

이 영 일

 

1. 들어가면서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후 펼친 인사를 포함한 몇 가지 개혁조치가 국민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주는 것 같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안보상황은 어느 순간에 전쟁의 불길이 솟을지도 모르는 매우 엄중한 상황이다. 지금 가장 긴급한 문제는 북핵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전쟁재발을 막는 일일 것이다.

그간 한반도의 핵문제는 탄핵정국이 벌어지면서부터 국내에서보다는 미국에서 심각한 논의가 진전되어왔다. 주요 논의는 미국의 외교협회(Council for Foreign Relations)가 발행하는 Foreign AffairsForeign policy, New York Times등에서 앞장서 다루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선거운동기간에도 북핵문제가 안보의 가장 절박한 과제였음에도 큰 쟁점으로 부상하지 못했다. 뚜렷한 대책을 내놓을 수도 없는 후보들이 핵문제를 선거의 쟁점으로 삼기에는 너무 버거웠을 것이다.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연초부터 북한의 핵문제를 미국이 당면한 가장 심각한 안보도전과제로 정의했다. 트럼프 이전의 미국 대통령들도 북한 핵문제를 안보의 도전과제로는 인식하면서도 해결의 우선순위에서는 항상 뒷전으로 미뤘다. 이 결과 북 핵과 미사일은 오늘날 미국의 우방이나 해외미군기지, 심지어는 미국본토까지도 핵탄두를 장착한 북한의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의 공격을 받을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퇴임직전 트럼프대통령에게 미국이 당면할 가장 큰 위협이 북 핵이라고 말한 것은 조금치도 과장이 아니었다. 최근 몇 개 월동안 미국 조야에서 북 핵 토론이 활성화된 이유다. 이하 북 핵 처리방법을 둘러싸고 전개된 국내외논의를 검토하면서 한국의 바람직한 선택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2. 북 핵문제의 쟁점사항

 

미국외교협회의 정책입안

미국의 안보외교관련 전문가들은 오바마 대통령이 퇴임할 시점에 즈음해서 미국의 북 핵정책의 경과를 총체적으로 평가, 반성하고 미국외교협회(CR)가 중심이 되어 오바마 이후에 들어설 정부에 건의할 정책보고서를 입안하였다. Mike Mullen(전 합참의장)Sam Nunn(전 상원의원)을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연구팀은 오바마 정권의 전략적 인내정책이 아무 성과를 얻지 못했다는 평가를 바탕으로 대북협상의 목표와 방향을 재구성할 것을 제안했다. 내용인즉 단계별 조치로서 현 단계 북 핵동결 비핵화조치의 이행 포괄적인 평화협정체결의 3단계를 제시하면서 중국과의 협력을 통해 북한이 이러한 방향에 응할 경우 합당한 보상을 제공하지만 거역할 경우에는 한층 강도 높은 유엔제재와 인권압박을 통해 김정은이 정권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들자는 것이다. 아울러 이들은 ··3국을 동맹으로 묶어 집단안보 공약을 발표하고 어느 일방에 대한 공격이 모두에 대한 공격임을 인지시키고 북한이 발사하는 미사일에 대해서는 예외 없이 격추하고 최종적으로는 선제공격도 준비하자는 대안을 내놓았다.

 

트럼프 정권의 북 핵 접근 방법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북한 핵문제에 관해 새로운 입장을 천명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오바마 대통령의 전략적 인내정책 실패확인 북 핵과 미사일문제를 미국의 우선적 해결과제로 설정 비핵화에 중국의 실질적 기여가 없었음을 확인 필요하다면 군사적 조치를 포함한 모든 방안을 활용하겠다고 결정했다.

이러한 정책방향을 제시한 후 47일 트럼프는 중국 시진핑 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북한 핵문제해결을 포함한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해소와 비핵화에 중국이 적극 협력하겠다는 다짐을 받고 그 대가로 중국을 환률 조작국으로 지정, 고율의 통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대선공약사항의 집행을 유보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중국이 한반도 비핵화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았음을 확인한 후 앞으로도 중국이 협력치 않는다면 미국은 북핵문제를 일방적 으로 해결하겠다고 밝힌 점이다. 일방적 조치가운데는 북한의 핵시설을 포함한 군사시설에 대한 폭격, 김정은에 대한 참수작전까지도 포함되는 것이었다.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은 미국의 목적은 비핵화를 위한 협상에 북한이 나오도록 하는데 있다고 밝혔지만 한국을 방문한 펜스부통령이나 매티스 국방장관 등의 언동에서는 선제공격도 불사한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트럼프 정책에 대한 찬반양론

트럼프의 새로운 대북접근 방식을 놓고 미국 내에서는 찬반논란이 일고 있다. 논란의 초점은 군사적 조치가 위험하다는 것이다. 미국의 38 North의 설립자인 Joel Wit는 군사적 위협과 새롭게 강화된 제재, 북한에 연결을 갖고 있는 중국기업에 대한 금융제재로 북한의 핵을 포기시키려는 것은 잘못된 방향이며 이럴수록 북한은 더 완강히 저항하면서 핵과 미사일 개발을 가속화함으로써 머지않아 미국이 통제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 봉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하버드 대학의 Roderick Mac Farguhar 교수는 미국이 중국의 협력 없이는 북한 핵시설에 대한 외과적 타격을 가하기는 어렵지만 미국과 중국은 현시점에서 협력이 가능하며 양국은 협력을 통해 김정은을 정권에서 몰아내고 한반도의 통일문제를 큰 차원에서 협의할 단계라고 강조한다. 그는 중국은 대미협력과정에서 사드 문제의 해결을 구할 수도 있고 통일 후 주한미군의 한반도 철수문제도 꺼낼 수 있기 때문에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미중협력은 양국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Nicholas Kristof는 선제공격이 북한에 근접해있는 인구밀집의 서울을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면서 함부로 처리할 문제는 아니라고 지적했다.

 

중국의 역할평가

트럼프의 북 핵 정책의 핵심은 중국이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적극 협력하기를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진핑은 아시아에서 미국을 밀어내고 중국이 지역의 패자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이런 중국이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 과연 얼마나 적극적인 역할을 할 것인가. 중국은 겉으로는 비핵화에 동조하지만 중국이 가진 모든 카드를 활용, 북한이 핵을 포기하도록 해줄 것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 47일 회담에서 양국정상들은 북 핵 해결에 협력하기로 했다지만 시진핑의 외교참모인 왕의(王毅) 외교부장과 푸잉(傅瑩)중국정협외사위원장은 한미양측과 북측의 자제와 대화요구라는 낡은 대본을 아직도 그대로 읊고 있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북한과 중국 간에는 제재정책상 넘어서는 안 될 레드 라인(Red Line)이 설정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조선중앙통신은 지난 53'김철'이라는 개인 명의로 낸 기고문에서 "조중관계에서는 넘어서는 안 될 레드라인이 있는데 중국이 이 선을 넘었다고 주장, 레드라인의 존재를 확인했다. 여기에 덧붙여 사드 요격 미사일을 주한미군사령관의 요청에 따라 한국에 배치토록 우리정부가 허가했다고 해서 6개월 이상 한국기업들에 대해 경제보복을 자행,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입히고 있다.

이런 행태로 미루어 중국이 원유공급 중단 같은 단호한 조치로 미국과의 협력을 통해 북한으로 하여금 핵무장을 단념시키고 한반도 비핵화 실현에 적극 협력할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오직 성과를 얻는 길은 중국을 상대로 미국이 트럼프 식 경제압박을 가하고 중국기업에 대한 Secondary 제재를 가하는 것이다.

 

북한핵무장의 의도평가

북한의 핵무장이 자기 체제보존이라는 목적에 국한된 것이냐 아니면 그 이상의 목적을 겨냥하는 것이냐를 놓고 전문가들 간에 논의가 엇갈린다. 북핵문제의 대화적 해결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북한은 독자적 생존이 가능한 여건만 마련된다면 핵을 포기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John Delury는 김정은이 정권승계 후 북한주민들이 더 이상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하고 경제개혁을 추진, 경제생활이 나날이 개선되고 있고 핵개발도 경제와 병진시키고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경제발전에 전심할 수 있도록 포용해주면 핵 포기가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Max Fisher는 미국이 북한을 상대로 협상을 개시할 때 내놓을 타결조건은 현재 보유한 핵의 묵인 북한을 한반도의 정통정부로 인정하고 전복기도를 포기할 것 일체의 제재해제 평화조약 체결과 주한미군의 철수를 주장하기 때문에 대화해결은 한마디로 어렵다고 본다. Joshua Pollack은 미국이 북한과 수교하려면 중국의 선례를 따라 한국과 단교할 것을 요구, 한미동맹관계의 해체가 궁극적 목표라고 말한다. 결국 미국의 어떤 정부도 수용할 수 없는 조건을 내놓고 핵전쟁이냐, 아니면 요구조건 수락이냐 중에서 택일하라고 압박하는 것이 대화와 협상에서 내놓을 북한의 본심이라고 말한다.

현재 북한은 이란과는 달리 오랜 세월동안 더 이상 낮아질 수 없는 지구최빈국이기 때문에 어떤 경제제재도 약효가 먹히지 않을 체제다. 5회에 걸친 강도 높은 유엔안보리 제재결의에 맞서 온 북한이 경제적 유인에 이끌려 핵을 포기할 것이라는 낙관론은 당초부터 어불성설이다. 북한정권은 정권유지자체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해지기 직전상황으로까지 몰리는 강도 높은 군사적, 경제적 압박 하에서만 비로소 비핵화를 위한 대화에 나올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3. THAAD배치문제

 

현재 나날이 발전하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의 제1차 타깃은 주한미군이다. 이 때문에 주한미군사령관이 북한미사일 공격으로부터 자국군대를 보호해야 할 필요에서 사드배치를 한미양국 정부에 건의한데서 사드 문제가 촉발되었다. 이 점에서 사드는 자체 폭발력이 없는 방어무기로서 전략무기가 아닌 전술무기이며 주한미군의 방호장비를 한층 더 보강하는 조치의 하나다. 그러나 중국은 사드에 달린 X밴드레이더가 인민해방군 미사일 부대를 추적하는데 이용될 수 있고 중국 핵탄두에 관한 중요정보를 수집, 중국의 핵 억지력을 약화시키는 장치라면서 배치를 강력히 반대한다. 동시에 한국에 대해 경제보복을 확대하는 한편 사드배치가 철회되지 않는다면 핵 선제불사용이라는 중국의 핵정책을 수정할 수 있다고 환구시보(環球時報)는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사드에 부착된 X 밴드레이더는 이미 카다르나 타이완에 배치, 활용되고 있으며 일본에서도 사드 급 레이더가 가동되고 있는 실정에 비추어 중국의 주장은 과장된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중국은 한국의 사드가 미국이 전개하는 미사일방어망(MD)의 일부로 편입되어 중국을 포위하는데 이용될 가능성을 우려한다. 한국의 사드가 당장은 아니라도 잎으로 위협이 될 수 있음에 유의, 야구경기에서 투수가 일루(一壘)주자에게 견제구를 날려 도루를 방지하는 작전처럼 한국에 경제보복을 해 보이고 있다.

그러나 중국내에서도 전략파와 전술파간에 사드처방이 다르다. 군부가 중심이 된 전략 파들은 사드배치의 철회를 강경하게 요구하는 반면 전술 파들은 사드부착레이더의 수준만 낮춰도 중국에 피해를 주지 않을 수 있다면서 기술적 수준의 협상 필요성을 말한다. 또 중국내의 한반도전문가들은 중국이 한국에 대해 사드로 경제보복을 하고 북한에 대해 유엔제재를 명분으로 경제제재를 한다면 결국 중국은 남북한 모두에 대해 영향력을 잃는 딜레마에 빠진다고 우려하면서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현 단계 한반도 정책을 우려한다.

이제 사드는 한미양국 간의 합의로 설치가 완료되었기 때문에 한국안보의 자산으로 관리하면서 북한의 도발에 대응해야 한다. 사드배치는 주한미군지위협정에 따라 양국정부간 합의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국회동의는 필요하지 않다. 중국에 대해서는 전술 파들의 견해를 수용, 기술적 협의의 길을 열면서 협력과 이해의 폭을 넓히는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중국은 아직도 문재인 정부가 중국의 요구를 수용할지 모른다는 기대를 갖기 때문에 대남심리전을 전개한다.

그러나 사드문제의 최종적인 해결은 한미중(韓美中 )3국 협의가 필요함을 역설하면서 서로에게 유리한 출구전략을 모색해야 한다. 중국이 북한핵문제의 해결에 보이는 성의의 수준이 사드해결의 관건임을 정부는 천명해야 할 것이다.

 

4. 나가면서

 

이제 북 핵과 미사일 문제는 북한정권의 존폐를 위협할만한 경제적, 군사적 압박 없이는 해결할 수 없는 단계에 왔다. 이 수단을 통해서도 해결의 길이 열리지 않는다면 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는 한국도 국제적 제재 없이 핵무장에 나서도록 길을 열어줘야 할 것이다.

앞으로 문재인 정부는 대화와 포용만을 내세우는 한국 좌파진영의 주장에만 귀 기울이기보다는 국민적 합의도모를 추구하면서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그리고 전 세계 속에 투영될 우리 좌표를 그리면서 필요한 안보정책들을 시의에 맞게 펼쳐 비핵화와 전쟁억제를 실현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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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개혁 2.0을 모색해야 할 때다(헌정지 2017년 5월호)

                          

이 영 일(11, 12, 15대 국회의원)

 

1. 들어가면서

 

우리는 201759일 탄핵으로 궐위된 대통령을 새로 선출한다. 우리는 그간 대통령이 탄핵되는 상황을 하나씩 지켜보면서 이런 불행한 일이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정치가 조속히 개혁되어야 할 필요성을 너나없이 절감했다.

대한민국은 건국 이래 70여년의 역사가 흘렀다. 이 기간 동안 우리 사회는 모든 분야에서 선진화를 향한 변화가 끝없이 이어졌다. 특히 경제 분야의 발전은 경이로웠다. 시쳇말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룬 유일한 나라로 지목될 만큼 우리나라의 발전은 놀라웠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러한 발전과는 거리가 먼 예외지대가 있다. 정치 분야다. 정치는 조금치도 개선되지 않았다. 그간 대한민국에서 시행된 대통령제는 그것이 단임제이건 중임제이건 간에 예외 없이 제왕적 대통령제로 변질되어 권력의 사유화 현상을 가져왔고 임기 말로 접어들면 레임덕과 비리, 부패에 휘말려 비극적으로 종말을 고했다. 1987년부터 실시된 여섯 번 선거에서 후세에 귀감이 될 대통령이 한 분도 나오지 않았다면 그것은 이 제도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번 대선은 현행 헌법에 따른 일곱 번째 선거인데 새 대통령도 현행 헌법에 그대로 따른다면 실패한 대통령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현재의 정국은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원내안정의석을 갖지 못한 4당체제하의 소수파정권이기 때문에 국정능률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약체 정권이 될 것이다. 국가상황도 험난하다. 안보위기가 심화되어 일촉즉발의 전쟁위기가 감돈다. 경제는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만들어 내지 못한 가운데 경기침체와 실업으로 한국경제의 장래를 너나없이 걱정하고 있다. 따라서 새 대통령은 앞선 대통령들의 실패한 전철을 밟지 않도록 정치개혁을 단행, 원내안정의석을 갖는 정당이 집권, 내외의 도전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즉 제7공화국을 만드는 길을 여는데 모든 노력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 그간 정치개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정치개혁은 있었으나 그 목표는 권력구조를 대통령중심으로 강화하거나 대통령임기를 연장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이같이 대통령의 권력 강화나 임기조정에 목표를 둔 개혁을 정치개혁 1.0’이라고 한다면 국정을 안정시키고 권력의 사유화를 방지, 정치행태를 민주적으로 바로 잡는 개혁을 정치개혁2.0”이라고 정의하면서 지금 당장 한국에서 필요한 정치개혁 2.0의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2.정치개혁 2.0의 세 가지 당면과제

 

필자는 현시점에서 한국정치가 당면한 정치개혁 2.0의 과제를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문제 상황에 조명하여 분석하고자 한다. 첫째로 패거리 정치의 적폐가 갈수록 심해져서 정당이 사당화(私黨化)하고 있다. 둘째 전무(全無) 아니면 전부(全部)를 요구하는 비타협의 정치가 한국의회의 정치기능을 마비시키고 있다. 셋째로는 5년 단임제 헌법이 이상 두 가지의 병폐와 결합되면서 국가발전의 걸림돌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 패거리정치의 적폐

패거리정치의 적폐가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다. 잘 알다시피 동교동계와 상도동계의 오랜 파쟁은 정권교체의 기회를 놓쳐 한국 민주화의 달성을 지연시키기도 했지만 더 심각한 부작용은 그것이 정당의 사당화현상을 초래한 것이다. 이들 양파의 갈등은 5년 단임제 헌법덕분에 양파의 보스가 각각 대통령에 당선되어 시들해졌지만 그들이 남긴 유산은 정당의 패거리 화, 사당화현상을 고착시킨 것이다. 예컨대 김대중은 민주당을 뛰쳐나와 평화민주당을 만들었고 이를 다시 새정치국민회의로, 또 이를 개편, 새천년 민주당으로 바꾸었는가하면 김영삼도 신민당에서 3당 합당으로 신한국당을, 다시 한나라당으로 당명을 바꾸었다. 당이라는 간판을 달았을 뿐 그것은 다름 아닌 패거리정치의 수식어였다. 민주당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노무현도 민주당을 열린우리당으로 바꾸었다. 열린우리당은 한마디로 말해서 노무현당이다. 이명박의 한나라당도 몰락직전에 박근혜가 당권을 장악,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꾼 후 공천갈등이 심화되면서 친 박 대 비박으로 갈등을 벌이다가 탄핵정국을 맞이해서 자유 한국당바른정당으로 갈라섰고 민주당도 국민의 당더불어 민주당으로 분열했다.

이렇게 패거리정치는 공천 때마다 자기파 중심의 공천을 통해 권력 나눠먹기 경쟁을 하기 때문에 항상 이합집산을 거듭하기 때문에 흔히 정치학에서 말하는 당의 법통(Legitimacy)이나 정통성이라는 말은 아무 의미가 없어졌고 당 나름의 역사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념과 강령상의 큰 차이도 없었다. 정치인들은 패거리의 우두머리가 결정하는 정책과 강령에 맹종함으로써 정치생명을 이어가거나 존립했다. 이해관계가 달라지면 당을 떠나면 되었다. 이 때문에 탈당이나 당적 옮김이 변절(變節)이라거나 지조(志操)를 버렸다는 식의 도덕적 비난이 아예 성립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영미(英美)세계에서는 이념이나 정책선택의 흐름을 공유하면서 수백 년의 당사(黨史)를 이어오는 정당이 많다. 2차 대전이후 민주적 정당제도가 실현된 독일의 경우에도 기독교민주당이 70년의 당사(黨史)를 갖는 반면 사회민주당도 우파만을 기준으로 할 때도 10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의미의 역사가 있는 정당은 존재치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었다. 패거리 정치를 극복, 청산하기 위해서는 현존 정당을 본위로 개혁의 물꼬를 트기보다는 개혁의 목표를 공유하는 인물중심의 정계개편을 통해 패거리가 아닌 정책과 이념을 공유하는 진정한 정당의 출현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 전무(全無)냐 전부(全部)냐의 비타협정치의 지속

한국정치에서는 All or Nothing의 비타협의 정치가 의회정치의 전면을 규정하고 있다. 심지어 외교안보분야에서 까지 비타협의 정치가 계속되고 있다. 안보외교에 여야가 없다거나 한 때 프러시아 국회에서 이룩되었던 '성내(城內)평화'(Buerger Frieden)도 우리는 기대할 수 없다. 요즈음 THAAD배치 문제를 놓고 보이는 여야대립도 우리를 슬프게 한다. 지금 당장에라도 야당이 THAAD 배치를 찬성한다고 발표, 여야합의가 이루어진다면 중국의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빤히 결론이 보이는 상황 하에서도 타협이 못 이루어지는 것은 정치체질가운데 침윤된 비타협적 DNA탓도 있겠지만 북한의 대남작동에도 한 원인이 있을 것 같다.

한국은 조선시대 이래 사회윤리의 기조로 지조의 윤리(Gesinnungs-Ethik)가 지배적 추세였으며 책임의 윤리(Verantwortungs-Ethik)는 외면되었다. 책임의 윤리는 흥정의 윤리와도 맥을 같이 하는데 유럽에서는 한자 동맹이래 상응하는 대가를 주고받는 거래의 윤리가 흥정의 윤리로, 책임의 윤리로 발전해왔다. 흥정의 윤리가 없기 때문에 국내정치에서도 타협의 정치가 숨 쉴 여지가 없다. 타협의 여지를 만들어 낼 결선투표제도 없으며 제왕적 대통령제로 흐르는 대통령 단임제를 국정운영의 틀로 하기 때문에 내각책임제에서와 같은 정당연합을 통한 연립정부나 협치(協治)가 성립할 여지도 없다. 현행 헌법 하에서는 원내안정의석을 확보하지 못하는 한 누가 집권하더라도 정치 불안은 계속되고 국정능률은 하락할 수밖에 없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정에서 국론이 크게 양분되었다. 촛불시위와 태극기 시위가 그것이다. 그러나 촛불과 태극기 시위대의 등장은 국민의 통합이 아닌 분열을 의미하고 더욱이 정부와 국민이 아닌 국민 대 국민의 분열이기 때문에 이를 하나로 통합하기위해서는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연정(聯政)의 필요성을 절감케 한다. 비타협의 정치를 타협의 정치로 바꾸기 위해서는 각종선거에서 결선투표제를 광범위하게 채택 실시, 타협이 모든 정치에서 필수적 절차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유럽과 중남미에서도 결선투표는 일반적 관행이 되고 있다.

 

. 87년 체제의 청산극복

5년 단임제 헌법은 지난 30년 동안 한국정치의 오랜 병폐의 하나인 1인 장기집권을 막고 나아가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의 길을 터서 절차적 민주주의의 정착에 기여한 바 있다. 그러나 그 부작용이 기여를 넘어설 만큼 컸다. 이제 87년 체제도 박근혜 대통령 퇴진과 함께 역사 속에 파묻고 원내안정의석을 확보한 당이 권력을 장악 운영하는 내각제 내지 2원집정부제로 고쳐야 할 도전에 직면했다.

회고컨대 87년 체제는 1인장기집권의 폐해를 막는 데는 분명히 기여했다. 그러나 아직도 발전과 변화의 속도를 늦출 수 없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5년에 한번 씩 국민직선으로 대통령이 바뀜에 따라 국가발전의 견인에 꼭 필요한 장기적 국정과제 추진이 어렵게 되어왔다. 또 포퓰리즘이 선거의 주 무기가 되고 당선되는 대통령마다 전 정권이 추진한 정책의 승계발전보다는 이를 무시하거나 부인하고 새 정책을 추구하기 때문에 국가정책의 지속성, 일관성도 유지하기 어려웠다. 5년 단임제 대통령은 집권3년차부터 시작되는 대통령 리더십의 레임덕 화, 여기에서 비롯되는 공무원 집단의 복지부동, 대통령임기 후반에 예외 없이 나타나는 정치부패는 우리 모두가 경험했다. 이러한 국정상황 때문에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달러 선에 묶여 더 치솟지 못하고 있다. 침체와 답보상태의 지속은 국제 경제 환경의 탓도 있겠지만 대내적으로는 가장 중요한 원인의 하나 가운데 87년 체제에 포함된 비능률과 불안정, 비리와 부패에도 큰 원인이 있다.

이 시스템에 패거리정치와 비타협의 정치가 결합됨으로 말미암아 한국정치는 발전이 아닌 후퇴의 늪에 빠져 버렸다. 더 이상 국민들에게 희망과 꿈을 심어주지 못할 정도로 정치기능이 마비상태에 빠진 것이다.

 

3. 맺는 말

 

이러한 정치 병리를 극복하고 앞으로의 정치가 국가발전에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면 우선 국정의 틀을 개헌을 통해 대통령 단임제(87년 체제)에서 내각책임제나 2원집정부제로 바꾸어 원내안정의석을 확보한 정당이 국정을 주도케 해야 한다. 이러한 개헌은 제7공화국의 탄생을 의미할진데 새로운 내각제나 2원적 집정부제 정부형태 하에서는 패거리정치의 수단으로 전락한 정당을 정책과 이념중심의 정당으로 새롭게 탄생시키고 엄격한 당규 하에 당이 민주적으로 운영될 수 있게 해야 한다.

 

두 번째로는 원내안정의석을 획득한 정당이 없을 경우에는 연립정부를 모색하고 운영함으로써 정치에서의 타협이 정당존립과 정권유지의 필수조건이 되도록 정치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 앞서도 지적했듯이 한국은 현재 180석이상의 원내의석을 갖지 않으면 원만한 국정운영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협치(協治)를 위해서는 연립정부는 필연적 선택이 될 것이다.

 

이번에 당선된 대통령이 개헌을 추진, 제도적으로 제7공화국이 탄생할 여건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국민들이 주도한 박 대통령의 탄핵은 정치사적으로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더욱이 안정의석을 확보하지 못하고 출범한 약체정권이 대통령의 직권으로 임명 가능한 감투만 나눠 쓰는 정부가 된다면 필연적으로 새로운 시위의 물결이 일어날 것이다. 동시에 국가의 안보위기, 경제위기는 더 한층 심화되고 새 대통령도 정치실패의 늪에 빠지는 불행한 전철을 피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끝으로 한국은 금년으로 57주년을 맞는 4.19혁명이 성공한 나라다. 국민들의 주권의식도 팽배하다. 핵전쟁의 우려를 안고 있는 분단국가다. 이러한 나라에서 국정을 안정시키고 국민통합을 이루고 능률을 올릴 정치개혁은 촌분의 여유를 허용치 않을 만큼 시급한 과제다. 정치인들도 이 나라를 자기의 권력욕 충족대상으로만 보는 미망을 버리고 국민들도 이 나라의 내일을 걱정하면서 정치개혁 2.0의 성공을 위해 뜻과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정치개혁 2.0을 모색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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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심판 기각만이 헌법재판소가 사는 길이다>

 이영일의 밴드 칼럼(2017년 3월 8일)

 국회가 정치공세의 일환으로 결의한 탄핵심판의 판결을 앞두고 우리나라 헌법재판소는 존폐의 위기에 놓였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인용하건 기각하건 어떠한 결정을 내리더라도 국민들을 승복시키기 힘든 상황에 직면했다.

 

대통령의 헌법과 법률위반을 확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매스컴의 고발과 선동이 부추겨 일으킨 촛불시위에 겁먹고 국회가 황망 중에 탄핵을 결의하고 헌재의 판결을 구한데서 문제가 발생했다.

 

먼저 탄핵을 결의하고(先탄핵결의) 후 특검을 통한 입증이라는 해괴한 접근을 통해 국민 51.6%의 지지로 당선된 대통령을 몰아내려고 시도한 것이 이번의 탄핵정국의 배경인데 헌법재판소는 졸지에 이러한 여야 정치대결의 한가운데 서게 되었다.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법과 양심에 따라 심판을 맡아야 할 헌재가 여야갈등의 어느 일방을 편들어야 하는 곤궁에 몰린 것이다. 정치권이 국민적 공감을 살 수 없는 사건을 만들어 놓고 책임을 헌재에 떠맡기는 형국이다.

 

헌재가 탄핵을 기각하면 혁명을 일으키겠다는 협박이 공론화된 가운데 인용판결을 했을 때는 아스팔트위에 피 흘리는 사태가 초래될 것이라는 위협적 언동이 난무하고 있다. 당초 탄핵을 선동했던 신문과 방송들은 탄핵이 국민여론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다고 주장하지만 태극기시위가 촛불시위를 완전히 제압하는 지금 시점에서도 같은 여론조사가 나올 것으로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다.

촛불민심만이 민심이 아니고 태극기 민심이 더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면 헌재가 기댈 언덕은 어디인가. 특검의 조사결과인가 아니면 헌재재판관들의 양심인가.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문제는 이 시점에서 보면 더 이상 법률적 판단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상태다. 헌재가 판결로서 정국갈등을 해소하거나 국민적 컨센서스를 도출할 상황이 이미 아니다. 하루라도 빨리 정권을 잡겠다는 사람들은 헌재의 인용판결로 정권교체의 혁명을 이루겠다는 것이고 태극기 시위대들은 매스컴을 앞세운 선동으로 대통령을 억울하게 내쫒지 말라면서 기각을 주장한다.

 

이제 헌재는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지를 고민할 상황을 벗어났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의 본질이 정치공세의 하나이기 때문에 헌재는 법률이나 명령이 헌법에 위배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기관이상의 역할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다. 헌재는 여야 정치싸움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헌재는 더 늦기 전에 박근혜 대통령 탄핵사건을 심리해본 결과 헌재가 관할해서 결론을 도출할 사항이 아님을 확인했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심리대상에서 이번 대통령 탄핵사항을 배제하는 각하(却下)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헌법재판소장의 임기에 맞춰서 탄핵여부의 결론을 내려고 서두르는 우를 범해서도 안 될 것이다. 지체 없이 각하(却下)판결을 통해 탄핵안을 국회로 되돌려 보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헌재(憲裁)가 살고 법치가 살고 한국민주주의를 살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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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헌정지 2016년 12월호에 기고된 것임

헌법개정을 통해 국난을 극복하자

이 영 일(3선 국회의원)

 

한국정치에서 다시 개헌문제가 현안으로 등장하고 있다. 특히 최근 박근혜 대통령을 탄핵대상으로 몰고 가는 최순실 게이트는 단순한 비리로만 간주할 사건을 넘어서서 여섯 번째로 이어지고 있는 5년 단임제 헌법, 이른바 87년 체제가 그 수명이 다 했음을 단적으로 입증한 대표적인 사건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회고컨대 87년 체제는 1인장기집권의 폐해를 막는 데는 기여했지만 아직도 발전과 변화의 속도를 늦출 수 없는 우리나라에서 5년에 한번 씩 국민직선으로 대통령이 바뀜에 따라 국가발전의 견인에 꼭 필요한 장기적 국정과제 추진이 어렵게 되었다. 또 새로 당선되는 대통령마다 전 정권이 추진한 정책의 승계발전보다는 이를 무시하거나 부인하고 새 정책을 추구하기 때문에 국가정책의 지속성, 일관성도 유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예컨대 MB정권이 말하던 녹색성장론은 박근혜 정권의 창조경제론에 눌려 그 기치마저 희미해지고 있지 않은가.

 

또 모두가 경험해온 사실이지만 집권3년차부터 시작되는 대통령 리더십의 레임덕 현상과 여기에서 비롯되는 공무원 집단의 복지부동은 국력신장을 저해해 왔다. 여기에 대통령임기 후반에는 친인척 비리 아니면 측근 비리와 부정부패가 예외 없이 나타났다.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시작해서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비리, 김대중 대통령의 3형제 비리, 노무현 대통령의 형님비리, 아내, 자녀들의 비리, 이명박 대통령의 형님비리 등이 친인척 비리였다면 박근혜 대통령시대에는 친인척 비리가 없는 대신 측근비리로서 최순실 게이트가 나타났다.

 

이러한 국정상황 때문에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달러 선에 묶여서 3만 달러 선으로 치솟지 못하고 있다. 침체와 답보상태의 지속은 국제 경제 환경의 탓도 있겠지만 대내적으로는 가장 중요한 원인의 하나 가운데 87년 체제에 포함된 비능률과 불안정, 비리와 부패에도 큰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평가다.

 

지금 우리의 시대상황은 이러한 국내 상황의 어려움 극복 이외에도 현재 펼쳐지고 있는 제4차 산업혁명의 요구도 수용하고 또 북한의 핵무장으로 조성된 남북한관계의 변화에 까지도 적극 대처해야할 도전에 직면해 있다. 바로 여기에 국가운영의 큰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될 절실한 요구가 있으며 이 과제해결의 방편으로 개헌의 필요성이 등장한다.

이제 1인 장기집권의 우려는 없어졌다지만 우선은 내치외교에서 장기적인 국정과제를 추진하고 정책의 일관성, 지속성을 확보할 체제를 시급히 모색해야 한다. 아울러 대통령제의 또 다른 병폐로 지적되는 이른바 함량미달의 선동정치인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그 결과 열등한 정책이 나오지만 임기 중에 책임을 추궁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우리 국민 들은 너나없이 체험해왔다.

능력이 모자란 사람이 혼자서 중요한 국사를 마음대로 결정하는 폐단은 대통령제를 채택하는 모든 국가가 당면하는 고민거리이다. 플라토가 말하는 철인(哲人)이 대통령에 당선될 수만 있다면 그 나라는 축복받겠지만 우리나라는 불행히도 그렇게 인물 복이 많은 나라 같지는 않다.

 

요즘 국내에서 거론되는 차기 대선주자들의 면면을 보아도 국민들의 큰 지지를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는 상황을 본다면 87년 체제의 문제점이 해소될 전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점에서도 개헌은 필요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수석비서관들이나 내각의 각료들을 그대로 장식품처럼 세워놓고 자기의 카리스마를 지키기 위해 공식참모들과의 공식적인 국정논의나 개인독대를 피하면서 최순실과 문고리 3인방만 데리고 국가의 중요정책을 좌지우지하다가 터진 사건이 한국정치의 오늘의 위기라면 대통령이 혼자서 국가를 다스리는 시스템은 더 이상 이대로 두어서도 안 될 것이다.

 

다행히 박근혜 대통령은 금년 가을 국회연설에서 개헌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자기 임기 안에 개헌작업을 끝내고 싶다고 말했다. 정치권은 최순실 비리를 은패하려는 책동으로 간주하고 이를 무시, 외면했다. 물론 그러한 측면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개헌발언의 동기가운데 불순한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고 해서 87년 체제를 끝내고 새로운 형태의 국가체제를 갖자는 개헌의 필요성마저 부정하거나 외면해서는 안 된다.

 

앞으로 우리나라는 대통령 혼자서 독단적으로 다스리고 운영하는 나라에서 중지를 모아 함께 국정을 운영하는 협치의 중요성이 갈수록 필요해지고 있다.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적기만 하는 각료가 아니라 대통령에게 No!라고 말할 수 있고 민의를 반영하면서 국정을 토론하는 각료들이 중시되어야 한다. 즉 혼자 다스리는 나라를 함께 다스리는 나라로 바꾸어 보자는 것이다. 또 1인 장기집권은 안되지만 선거를 통해 능력과 실적을 인정받는 정당의 계속 집권, 장기집권은 허용되면서 장기적인 국정과제와 국가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해 나가야한다. 지금 우리는 바로 이러한 체제를 모색해야 할 때다. 바로 여기에 맞는 정답이 내가 보기에는 내각책임제 개헌이다.

 

일부논객들 가운데는 5년 단임제 헌법을 대통령 중임제 헌법으로 바꾸자는 주장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제가 유지되는 한 대통령제의 폐해는 결코 시정되지 않을 것이다. 5년 단임제보다는 장기적인 국정과제를 선정하고 레임덕의 출현 시기를 늦출지는 모르지만 대통령제의 폐단은 계속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의원내각제를 적극 모색할 필요성이 있다.

또 일부 논자들은 2원집정부제가 대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2원집정부제가 대권을 꿈꾸는 다수의 주자들을 타협시키고 협력을 통한 역할분담으로 국정을 안정시킬 수 있는 방도라고 주장한다. 어느 면에서 들으면 매력적인 제안이기도 하다. 그러나 2원집정부제는 대통령이 외교안보를 맡고 총리가 내정을 맡는다는 취지의 정부인데 우리나라는 내정과 외치를 구분하기 어려운 약소 분단국가이기 때문에 대통령과 수상간의 갈등만 유발할 뿐 프랑스에서와 같은 2원정부나 동거정부(Cohabitation)를 만들어내기가 정말로 힘든 나라다.

 

현시점에서 우리는 개헌을 통해 의원내각제를 실시, 정당을 통한 책임정치를 실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국민들은 우리나라 4.19혁명이후 성립했던 민주당 시대의 내각제를 연상하면서 잦은 불신임 때문에 초래될 정국의 불안정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독일식의 건설적 불신임 제를 채택하면 그런 우려는 해소될 수 있다.

독일은 건설적 불신임제를 채택, 야당이 연립이건 1당이건 간에 새로운 수상을 정해놓을 때만 불신임안을 제안할 수 있게 하는 건설적 불신임제도를 채택했던 결과 국회를 통과한 불신임안은 독일헌정사 70년 역사에서 단 1건뿐이었으며 장기간 정국안정이 유지되었다. 아데나워 수상시대에 기독교 민주당은 14년간 집권하면서 라인 강의 기적을 일궈냈던 것이다.

물론 역사적, 환경적 차이가 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18년간의 개발독재를 통해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것과는 아주 대조된다.

 

지금 우리는 정국의 혼미에서만 벗어나려고 하는 대신에 정국혼미의 원인이 된 국가운영의 틀을 혁명적으로 바꾸는 지혜를 발현해야 한다. 최순실 사건은 이를 적발하고 파헤침으로 해서 재벌들에게서 거두어들인 800여 억 원의 돈은 회수하면 그만이고 비리에 관련된 정범과 종범, 또 대통령 이름을 팔면서 호가호위(狐假虎威)한 부패집단들은 의법 처리하면 된다. 또 자기 카리스마유지를 위해 소수 인들의 인의장막에 갇혀 국정을 오도한 박대통령에 대해서도 중한 책임을 물어 국가가 더 이상의 혼란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된다. 동시에 적극적인 개헌추진으로 한국정치의 새장을 여는데 국민의 뜻을 모아야 한다.

 

현시점에서 개헌을 반대하고 현행 헌법고수를 주장하는 인물들도 있다. 그들은 한시라도 빨리 대통령을 하야시켜 60일내에 대선을 치루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야당도 이제는 그 부작용 때문에 국기가 흔들리고 나라의 미래마저 암울하게 만들어 버리는 5년 단임 대통령제의 연장선에서 집권을 도모하려는 퇴영적 자세를 지양하고 국가의 틀을 바꾸는 개헌을 통해 한국정치의 새로운 비전정립에 나서야 할 때다.

더 이상 새로운 시위 없이도 이미 식물대통령으로 되어버린 박근혜 대통령의 존재를 크게 의식할 필요 없이 국가운영의 큰 틀을 바꾸는 개헌작업에 국민적 지혜를 모아야 한다. 개헌을 통해 87년 체제와 박근혜대통령을 함께 끝내는 것이야말로 100만 명의 시위가 얻는 커다란 보람이 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객(Politician)이 아니라 국정지도자(Statesmanship)이며 요즘 내 노라 하는 대권주자들이 정객적 자세를 넘어서서 국정지도자로 탈바꿈하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대통령을 하야시키는 압력으로서의 시위가 아니라 새로운 헌법을 탄생시키는 시위로 업그레이드될 때 한국민주주의는 더 한층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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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2016년 10월 20일 남북사회통합연구원이 주최한 통일공감포럼에서 발표된 주제논문이다. 통일부가 후원한 이 행사는 이날 하오 5시부터 7시까지 서울 낙원동 소재 IBIS앰배서더호텔에서 열렸다 

통일준비를 위한 민간외교추진방향 -특히 중국을 중심으로 

 이 영 일 (한중정치외교포럼회장, 3선 국회의원) 
 
1. 들어가면서 

 흔히 통일은 정부만의 일방적 과업처럼 인식된다. 이러한 관념은 우리 헌법이 대통령에게 평화통일 추진에 대한 책임을 명시한 데서 비롯되는 것 같다. 그러나 민주국가에서 통일의 주체는 어느 경우에나 국민이며 통일의 수익자도 국민이다. 아울러 정부와 함께 국민들도 통일을 위한 책임을 공유한다. 현실적으로 우리 정부는 국민이 선출했고 국민의 뜻에 따라 통일과업을 추진하게 된다. 우리가 추구하는 통일은 어떤 통일이냐--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전제로 추진되는 것이며 남한과 북한을 아무 조건 없이 무조건 하나로 묶자는 몰가치적(Value free)통일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주변 국가를 상대로 하는 통일외교는 어떠한가. 일반적으로 국가외교 그 중에서도 통일 외교는 전문외교관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의전이나 법규나 관행에 얽매이는 공식외교보다는 그러한 제약을 떠난 민간외교가 문제해결의 장을 넓히고 국민들 상호간의 이해를 심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민간인들이 정부와 협력해서 추진하는 공공외교를 중시한다.

최근 공공외교는 그 중요성이 날로 더해가는 추세다. 전문가들이 주도하는 공식외교는 문제의 해결단계에서는 그 비중이 크겠지만 문제해결을 향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난마(亂麻)같이 얽힌 매듭을 풀거나 꽉 막힌 상황의 돌파구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는 민간들이 앞장서서 만들어내는 다리역할(Bridge Building)이 더 생산적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러나 민간인들이 통일준비과정에서 제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통일 상황에 대한 논리적 인식이 필요하다. 한국의 경우 다음 세 가지 전제에 대한 인식이 매우 중요하다. 첫째 주변 국가들이나 주변국가의 국민들은 우리만큼 통일을 중요시하지도 않고 관심도 적으며 내심으로는 통일 보다는 분단의 현상유지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사실이다. 한반도 주변의 4대강국의 어느 나라도 다소 뉘앙스의 차이는 있지만 본질은 같다고 보아야 한다. 
둘째로는 남북한의 어느 쪽이라도 핵무기를 가질 경우 주변국들은 하나같이 한반도의 통일 상황의 도래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지금 한반도 주변의 강대국들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한반도의 비핵화를 한목소리로 요구하고 있다. 
셋째로는 통일이익이 분단이익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에 대한 국민 계몽의 필요성이다. 막대한 통일비용에 대한 우려를 내세워 통일을 먼 미래의 과제로 정의하고 분단된 채로 남북한이 공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타산적(打算的) 통일논의는 어느 경우에나 통일을 향한 역사진전에 역기능 할 것이다. 

이러한 논리적 인식의 바탕위에서 우리가 주변국가들 특히 중국인들을 상대로 펼쳐야 할 통일 논리는 무엇일까. 이하에서 통일외교의 과제를 점검하면서 우리가 활용해야 할 설득논리를 가다듬고자 한다. 

2. 상황의 과제들 

우선 맨 처음 다루어야 할 과제는 통일이익과 분단이익을 교량해서 통일이익이 한민족 도약의 토대이며 동북아시아 대륙에서 한국의 위상을 업그레이드 하는 것임을 국민들의 의식 속에 내면화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이 과제는 국내에서 항상 추진해야 할 통일교육의 과제이며 따라서 오늘의 논의에서 다룰 주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늘 중점적으로 다루어야 할 과제는 비핵화(Denuclearization)와 통일의 관련성이다. 현재 우리 입장에서 통일의 가장 큰 걸림돌은 북한의 핵무장 기도이며 비핵화 없이는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국내는 물론 대외적으로도 인식시키는 일이다. 
최근 우리사회에서 비핵화진행이 갈수록 어려워짐에 따라 독자적인 핵무장 내지 미국보유의 핵무기의 재반입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런 논의는 비현실적이다. 우선 한국 같은 개방경제체제를 갖는 국가가 핵개발을 시도할 경우 유엔의 경제제재를 피할 수 없다. 북한은 다섯 차례에 걸친 국제제재에도 굴하지 않고 버티고 있지만 정상적인 국가라면 이미 정권이나 국가가 해체되었을 것이다. 

둘째로 이미 철수시킨 미국의 전술핵무기의 재배치도 성사되기 어렵다. 미국이 앞으로 10년 동안 국방비를 대폭 감축키로 한 조치(Sequester)가 진행 중이고 핵무기의 감축을 추진하는 상황임을 감안할 때 핵무기의 한국에로의 재배치는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더욱이 한국과 같은 국제형의 분단국에서는 비핵화 없이는 통일에 대한 국제지지를 전혀 얻을 수 없다. 한반도를 에워싸고 있는 어떤 강대국도 통일한국이 강력한 핵무장 국가로 등장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와 유사하게 분단되었던 독일은 분단 45년 만에 통일을 성취했다. 독일인들의 통일 준비과정에서 우리가 배워야할 가장 큰 교훈은 통일을 주도한 서독이 ‘전체로서의 독일’(Germany as a Whole)을 하나로 지키겠다는 통일의 구심력(求心力)을 한시도 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동시에 독일을 에워싼 국가들이 독일의 분단을 고정화시키기 위해 부단히 펼치는 독일 통일의 원심(遠心)작용을 슬기롭게 제어(制御)하면서 ‘독일은 하나’라는 통일의 구심력을 유지해 온 것이다. 
아울러 양 독(兩獨)은 그들의 통일이 주변 국가들에게 결코 위협이 되지 않을 것임을 국제사회에 담보하기 위해 분단된 상태 하에서도 양독 공히 비핵화의 길을 걸었다. 양독 모두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하였으며 주변 국가들이 싫어하거나 경계하는 전략무기로서의 항공모함이나 핵잠수함, 탄도미사일을 제조하지 않았다.
서독은 핵무기나 탄도미사일을 제조할 기술과 자금이 풍부했지만 독일 통일을 방해할 주변국들의 견제나 반발을 피하기 위해 전략무기를 보유하는 대신에 안보문제를 나토나 유럽안보협력회의(Helsinki체제)의 테두리 안에서 풀어가는 지혜를 발휘했다. 독일이 주변국을 상대로 벌인 통일외교의 중점은 비핵화의 토대위에서 경제협력과 교류를 통해 독일 통일에 대한 긍정적 여론을 만드는 일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우리의 주변국 특히 중국을 상대로 하는 통일외교는 어떻게 펼쳐져야 할 것인가 

3. 한국통일과 중국문제 

 가. 중국의 입장 평가 

 일찍이 중국의 사마천은 분구필합(分久必合)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분열이 오래면 통일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한국도 타의로 분단된 지 75년을 경과했다. 이미 분열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룩할 시점의 축적은 넘친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산과 물로 이어져 있는(山水相連) 중국은 우리나라의 통일에 대해 항상 막연한 원칙론만 앞세워 왔다. 
1980년 등소평(鄧小平)이 “남북한의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을 지지한다”는 견해를 밝힌 이래 시진핑 대에 이르러서도 같은 소리를 계속 되풀이 하고 있다. 한때 통일원장관을 역임하시고 서울대학교에서 국제정치를 강의하신 동주(東州) 이용희(李用熙)선생은 대학 강단에서 “자주적”이란 표현은 통일에 관심 없다는 외교적 언사이며 “평화적”이라는 말은 한국 통일에 군사적으로 개입할 용의가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 않겠느냐고 지적한 바 있다. 

등소평 이후 장쩌민, 후진타오를 거치면서 중국은 ①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② 한반도의 비핵화 ③ 대화와 협상에 의한 문제의 해결 이라는 3원칙을 한반도 정책의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시진핑 시대에 들어와서 정책의 중점을 앞서의 ①과 ②의 순서를 바꾸고 한반도 비핵화에 더 큰 비중을 싣고 있다. 왜냐하면 북한의 핵무장 시도가 한반도정세를 안정시킬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시진핑은 아직 대외적으로 표시는 하지 않지만 내심으로는 ④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의 유지라는 새로운 원칙을 만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정부의 이러한 원칙론 이외에 중국학자들은 북한이 붕괴되어 한국주도로 통일이 된다고 가정한다면 세 가지 우려사항이 생긴다는 것이다. 첫째 북한난민들이 대거 한만(韓滿)국경을 넘어 들어와 중국을 어렵게 한다. 둘째 한국과 안보동맹을 맺은 미국의 군사력이 중국의 국경에 접하게 됨으로써 중국안보에 큰 부담이 생길 수 있다. 따라서 미국이 개입되는 통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셋째 낡은 이론이기는 하지만 북한이 지정학적으로 중국안보를 위해 완충역할을 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 예시(例示)된 사항들은 앞으로 한국인들이 중국인들과 만날 때 흔히 듣게 되거나 토론할 주제로 될 수 있다. 
이 글의 말미에서 한 대목씩 평가하겠지만 우선 중요한 것은 시진핑 정권하에서 당면 국제정치의 현안으로 부각되고 있는 비핵화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가장 중점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이다. 

나. 시진핑 시대의 상황평가 

 우리가 시진핑 시대를 주목해야 할 이유는 그가 주석에 취임하면서부터 중국의 대외노선이 ‘위대한 중국의 꿈’을 중국인민들이 달성할 목표로 제시하면서 중국이 국력의 크기에 상응하는 역할과 영향력을 세계정치에 투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시진핑의 입장은 한마디로 미국을 상대로 패권을 겨루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면해서는 전 세계보다는 우선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중국이 패자(覇者 Hegemon)가 되겠다는 것이다. 

시진핑은 이러한 포부에서 미국에 대해 중국을 미국과 대등한 능력과 영향력를 가진 국가로 인정, 세계문제를 함께 논의하고 중국의 핵심이익을 존중하라는 이른바 신형대국 관계론을 들고 나왔다. 동시에 중국은 일대일로(一帶一路)정책을 내세우면서 자국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남방실크로드와 북방실크로드의 개발을 주도적으로 선도, 세계경제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은 그간 중국이 급속히 성장, 발전한 것은 인정하지만 지금 미국과 맞상대하기에는 실력이 한참 못 미치고 다음 세기(世紀)나 되어야 가능할지 모르겠다면서 중국의 요구를 수용치 않고 현재 중국은 자기가 가진 역량만큼 국제사회에 책임 있는 역할을 맡으라고 강조한다. 동시에 미국은 자국의 군사역량을 아시아 쪽으로 집중하면서(Pivot to Asia) 중국의 패권추구를 견제하고 있다.

지금 미중관계는 냉전시의 미소관계와는 다르지만 갈등과 협력이 공존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남중국해, 동중국해 사태로 양국 간의 갈등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한반도 상황은 자칫 '미중관계의 하위체계'로 전위(轉位)되는 양상을 들어내고 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 가. 특히 현안으로서 비핵화를 달성하는 방도는 무엇일까.

 4. 국제사회의 비핵화 노력검토 

가. 중국의 유엔제재 찬성 
중국은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이지만 그간 5회에 걸친 대북제재에 찬성했다. 이러한 조치가 2021년까지 시효가 남아있는 북·중간의 상호원조 및 우호협력조약에 위배됨은 물론이다. 특히 유엔안보리의 결의 2270은 북한에 대한 강도 높은 제재안인데도 중국은 이 결의에 찬성했다. 정상적인 국가가 이러한 결의에 걸리면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안보리 결의 2270이 시행된 지 반년이 지나도 북한은 아직도 버티고 있다. 김정일 생존 시에는 핵실험 2회와 26회의 미사일 도발을 했는데 김정은 이 등장하면서부터 지난 5년 동안에 핵실험 3회, 탄도미사일 49회의 도발을 감행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 EU 등은 유엔제재에 병행해서 독자적인 제재를 추가하고 있으며 그 밖의 국가들도 대북제재를 강화하고 있다. 북한의 외교망은 하나씩 붕괴되고 있으며 고위급 탈북자의 숫자도 나날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김정은은 아직도 유엔에 맞서 핵과 탄도미사일의 성능개선에 모든 역량을 쏟아 붓고 있다.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북한에 가하는 제재의 목적은 북한정권의 전복이나 붕괴유도가 아니라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협상에 북한이 참여하라는 압박이다. 그러나 북한은 핵 보유를 헌법에 못 박고 핵·경제병진노선을 조선노동당 규약에 명시함으로써 대내외적으로 핵 포기를 협상할 수 없게 자박(自縛)하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의 소위 왕이(王毅)포뮬러로 알려진 평화협정과 비핵화를 병행해서 협상하자는 제안도 북한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북한은 오직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내용의 협상이외의 어떠한 협상에도 응하지 않겠으며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토대위에서 추진되는 핵군축협상에만 나서겠다는 것이다.

나. 중국의 이중적인 태도 

북한이 이처럼 버틸 수 있는 힘의 배경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중국과 러시아, 그중에서도 특히 중국이 인도주의를 내세우면서 막후로 북한정권 유지에 필요한 원조를 제공하고 있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중국은 석유공급중단을 통해 북한의 핵 포기를 강제할 카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행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홍상그룹 등 비정부 기업들을 통해 음성적으로 북한의 버티기를 지원해왔다.

겉으로는 제재조치를 이행한다고 하면서도 그것은 피상적이며 실질적인 조치는 이행하지 않고 있다. 중국의 이러한 이중적 태도를 제어하기 위해 미국과 한국은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미국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이 미국의 안보에 대한 직접적 위협이라는 입장을 천명했다. 북한의 5차 핵 실험이후 오바마 대통령, 케리 국무장관의 성명, 러셀(Russel)미 국무성 동아태차관보의 정책발언은 모두(冒頭)에서 하나같이 미국에 대한 직접적 위협(A Threat to the United States Homeland)임과 동시에 미국의 동맹국에 대한 위협임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은 자위조치로 대북 예방전쟁이나 선제공격 또는 북한 핵시설에 대한 정밀타격을 검토하기에 이르렀다. 경제제재이후의 제재로서 군사제재를 암시하면서 대북압박을 강화하고 아울러 북한지원과 연계된 중국기업들에 대해서도 Secondary Boycott조치를 취함으로써 미국인가의 금융기관을 통한 국제금융거래를 차단하기에 이르렀다. 

 한국도 개성공단 폐쇄이후 북한이 비핵화를 위한 대화에 나서지 않기 때문에 김정은 정권을 이대로 두고서는 비핵화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김정은의 공포정치 하에서 인권유린과 궁핍을 강요받는 북한 동포들과 북한정권을 분리해서 대처하는 대북압박정책을 펴나가고 있다. 외부세계에 대한 지식정보를 북한내부에 적극 유입시키도록 지원을 강화하는 한편 탈북민들을 ‘통일의 자산’으로 우대하는 정책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대화거부태도는 아직도 요지부동이다. 

다. 국제사회의 최종선택 

이제 비핵화를 위한 대화테이블로 북한을 끌어낼 수 있는 국제사회의 최종적 조치는 경제제재가 통하지 않을 경우 첫째 미국이 북한에 대해 예방전쟁(Preventive War)형태로 핵시설제거(Surgical Strike)같은 군사조치를 추진할 수 있다. 둘째로 유엔안전보장이사회가 유엔인권이사회의 결의를 근거로 김정은을 인권범죄자로 규정하고 국제형사재판에 피고로 회부하는 조치를 결의, 인권압박을 가할 수도 있다. 셋째로는 중국이 그간 행사를 유보했던 경제제재로서 석유공급의 중단 같은 급소를 누르는 조치를 취하도록 요구할 수도 있다. 

앞서 언급한 Mullen 전 미국합참의장과 Sam Nunn 전 상원의원은 중국의 협조를 전제한 셋째방식을 선호하고 있다. 한국으로서도 미국의 군사조치가 자칫 한반도를 미중갈등의 대리전쟁(Proxy War)터로 변질시킬 우려를 없애려면 중국의 경제제재로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는 것이 보다 바람직스럽다. 동시에 이 방식은 한중갈등의 하나인 THAAD문제를 해결하는 방도로도 된다. 

현재 가장 가능성이 있는 시나리오는 미국의 군사압박과 중국의 경제압박인데 여기서 중국은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미국의 방식으로 비핵화과정이 진행된다면 한미일의 안보협력은 고도화되면서 중국의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최근 중국도 5차 핵 실험이후에는 한국의 THAAD배치계획에는 반발하면서도 미국이 자위차원에서 강구할 군사적 제재 가능성을 주목하면서 중국 나름의 대안을 모색하는 조짐이 보인다. 최근 일부 중국학자들 가운데 <핵보유=정권 붕괴>냐 <핵 포기=경제발전>이냐는 북한의 선택지를 비교하면서 전자(前者)가 북한이나 중국을 위해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5. 앞으로의 전망 

중국인들은 앞에서도 말한바 북한정권 붕괴 시 대규모의 난민 발생과 중국유입을 우려하지만 그것은 기우(杞憂)에 불과하다. 한국은 노동력 부족국가로 200만 이상의 외국노동자를 수입하고 있다. 동서독 통일 후 동독에서 러시아나 기타 국가로 떠난 사람의 수는 극소했다. 특히 가족주의전통이 뿌리 깊은 한국사회에서 통일된 한반도에서 고향을 등지는 선택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또 중국은 항상 통일한국이 미국의 편에 서서 중국을 견제할 것이라는 우려를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주도로 통일이 이루어질 경우 현재 한중양국이 유지하는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와 대등한 수준으로 한미안보동맹이 한미 간의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로 진화할 것이다. 북한의 침략위협이 없어진 상황에서 한미안보동맹은 새롭게 정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북한이라는 지정학적 알박이가 없어짐으로 해서 유럽과 한국간의 철길이 열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 일본과 동남아시아 제국의 철길을 통한 유럽과의 교류협력의 장이 형성됨으로 해서 중국을 통하는TCR과 러시아를 통하는 TSR이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 운송수단이 될 것이다. 

이제 중국은 결단해야할 시점에 당도했다. 중국은 아시아 대륙의 유일한 유엔 상임이사국으로서 합법적으로 핵을 보유한 국가다. 중국이 아시아에서 누리는 핵 독점지위가 북한으로 말미암아 깨짐으로서 일본이 자위차원에서 핵무장에 나설 명분을 제공하는 것은 북한이 지정학적으로 중국안보를 위한 완충작용으로 얻는 이익보다 훨씬 큰 부담을 중국에 안길 것이다. 

폴라리스 잠수함과 핵미사일이 발달한 21세기의 전략이론에서는 지정학적 완충개념은 더 이상 아무 의의도 가질 수 없다. 중국은 조선노동당 7차당대회의 결의에 묶여 비핵화협상에 나설 수 없는 김정은을 감싸기 보다는 비핵화와 개방으로 북한경제를 살릴 새로운 리더십이 북한에 세워지도록 상황을 이끌면서 중국의 제3위 무역파트너인 한국이 한반도의 관리책임을 맡도록 지원하는 결단을 내릴 때다. 

최근 중국정부가 미국과 더불어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치 않기로 결정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움직임이다. 북한은 핵보유국으로 공인받기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인권을 짓밟고 주민을 굶기는 나라를 핵보유국으로 인정할 국가는 지구상에 없다. 핵보유국으로 인정받는 다는 것은 국제사회의 제재를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어떤 침략위협도 받지 않는 침략면제권(Sphere of Immunity)의 지위를 갖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핵무장을 추구한 것은 외부로 부터의 침략위협 때문이 아니다. 현재 지구의 최빈국(最貧國)의 하나인 북한을 침략할 나라는 없다. 

대외적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75년 동안 이어진 3대 세습독재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핵무장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권에 보호막을 쳐주는 핵보유국인정은 있을 수 없다. 또 이러한 정권 주도로 한반도의 통일이 이루어져서도 안 된다. 이상 간추린 견해와 논리만으로 중국인들을 완전히 승복시킬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이러한 관점들이 국민들 의식 속에 내면화되고 우리의 주장으로 정착된다면 민간차원의 통일준비에 다소라도 보탬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소론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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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북아시아 국제정치에서 본 사드문제 

                                                           이 영 일 전 국회의원(11대, 12대, 15대의원)

 1. 들어가면서 

 오늘날 사드(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ce)는 한반도를 둘러싼 국내외 정치의 뜨거운 뇌관이 되었다. 정부의 사드배치허가는 한미방위동맹에 의거,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의 안전에 필요한 장비를 보강하겠다는 주한미군 사령관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것은 박근혜 정부가 아닌 다른 어떤 정부라도 한미방위동맹이 존속하는 한, 또 우리가 한미방위동맹을 필요로 하는 한 허가치 않을 수 없는 조치다. 여기에는 여야 간에 갈등이 일어날 원인도 이유도 없다. 더욱이 미국이 사드배치를 요청한 현실적 배경을 보면 바로 해답이 나온다. 우선 북한의 핵과 미사일 공세가 갈수록 공세화 하고 있는 점이다. 김정일 시기에는 핵 실험도발 2회, 미사일 발사 26회였지만 김정은 등장이후 3년 동안에 핵실험 도발 3회, 미사일 도발이 49회로 늘어났다. 김정은은 또 도발할 때마다 주한 미군이 제1차 타격목표이고 제2차 타격목표는 유사시 한국을 지원할 주일 미군 기지이며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괌 기지나 미국본토까지 타격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부의 사드배치 허가조치가 알려지면서 배치장소로 거론된 성주(星州)군민들의 반발은 물론이거니와 국민의 당, 더 민주당 소속의 일부의원들까지 반대에 가세했다. 여기에 중국이 러시아와 함께 사드배치를 강도 높게 반대를 천명하면서부터 사드는 동북아 국제정치의 새로운 긴장의 뇌관이 되었다. 그러나 이때 우리의 가슴을 가장 괴롭힌 것은 우리 내부에 사드배치에 반대하는 북한이나 외부세력의 주장에 맞장구칠 분열의 씨앗들이 잠재해있다는 사실이다. 적전분열(敵前分裂)이 망국의 길임은 누구나 잘 아는 역사의 교훈이다. 제1차 대전을 앞두고 여야 간에 성내(城內)평화(Burueger Frieden)를 부르짖으면서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했던 독일의 역사에서 우리는 많은 교훈을 얻어야 한다. 안보에 여야가 없다는 사실이 실천으로 입증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러나 북한의 5차 핵 실험을 계기로 안보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진 국민여론이 사드불가피론을 수용하면서 여야 간에 국론 통일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하 사드를 둘러싼 국제환경을 분석하고 우리의 대비책을 검토하고자 한다. 2. 한중간에 잠재된 모순의 폭발 중국은 사드배치결정에 강력히 반발하면서 거의 선전포고에 준할 수준의 공갈, 협박 위협을 가해왔다. 한국정부는 사드배치허용이 결코 중국을 겨냥한 것이 아님을 박근혜 대통령은 정상회담을 통해 시진핑 주석에게 직접 설명하고 북한의 도발이 사라지면 사드의 필요성도 없어진다는 조건부 사드배치 론을 제시했다. 특히 박대통령은 “북한의 위협에 대해 느끼는 불안감은 한국인과 중국인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다”며 사드 배치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푸틴 러시아대통령에게 “북한 위협은 생사의 문제”라고 했던 정도의 원색적 표현은 아니지만 강조하고자 한 의미는 같았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항조우(杭州)에서 열린 G20정상회담 중 시진핑 주석과 가진 정상회담에서 사드가 중국을 타격목표로 하지 않는 것임을 설명했지만 중국은 한미양국정부의 설명을 전혀 수용치 않고 사드배치는 동북아시아의 전략균형을 파괴함으로써 정세불안을 야기한다고 강력히 반발했다. 중국은 공식적으로는 사드가 왜 동북아시아의 정세균형을 파괴하고 안보정세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지에 대한 입장설명이 없다. 다만 시진핑 주석이 항조우 정상회담에 앞선 Summit 비즈니스 회담연설에서 한국정부를 겨냥, “각국의 안보는 긴밀히 맞물려 있고 어느 한 국가도 자기만 생각해서는 안 되며 또 홀로 해결할 수도 없다”고 말하고 박 대통령과 회담에서도 사드배체는 "지역의 전략적 안정에 도움이 되지 않고 관련 당사국 간 모순을 격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결국 사드문제는 박근혜 대통령이 설득외교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동북아시아 국제정치의 커다란 맥락에서 다루어져야 할 문제로 정의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 왜 중국은 이처럼 강경하게 사드배치에 반발할 까. <중국이 반발하는 논리> 중국의 사드반대론은 중국 메스컴을 통해 여러 가지로 제시되었지만 군사전략가들의 견해는 사드의 목표가 한국정부의 설명과는 달리 중국정부를 겨냥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우리 정부는 사드가 북한만을 겨냥하고 중국이나 제3국을 노리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전문가들은 사드 의 무기체계가 미국의 미사일방어(MD)체계의 핵심 요소로서 위성을 포함한 미국 MD망과 연계되지 않으면 아무리 종말단계라도 북한미사일을 요격하는 성능을 발휘할 수 없다고 지적하고 이것은 마치 아무리 최신형 스마트 폰을 갖고 있어도 통신망과 연결되지 않으면 쓰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면서 한국의 설명을 반박하고 있다. 특히 한국에 배치될 사드 포대는 미7공군 사령관이 관리하는데, 미7공군은 태평양 사령부에 직보를 하는 등 미국 MD체계와 직결돼 있기 때문에 중국은 사드를 미국 MD가 한반도로 확장된 것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또 전문가들은 “북한만 들여다보고, MD와 연결이 안 된다는 국방부의 주장이 맞는다면 성주에 배치될 사드는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 대상이 아니어야 한다. 그게 과연 가능할까? 또 사드의 한반도화란 결국 북한만 바라보고 중국은 엿보지 않는 레이더, 즉 옆으로 눈도 안 돌리고 업그레이드도 안 하는 레이더를 가진다는 것인데, 그건 바보 사드 아닌가. 1~2년 그럴 수는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종말단계라도 정확한 요격을 위해서는 업그레이드를 해야 한다”면서 중국이 아닌 북한만을 겨냥한다는 주장을 수용하지 않는다. 최근 미국은 루마니아와 폴란드에 아무 저항을 받지 않고 배치하는데 성공했다. 오히려 나토제국들은 미국은 퍼싱(Pershing)2 미사일보다 더 성능이 좋은 사드를 유럽보다는 아시아에 먼저 배치해야 하는가를 따졌다. 그러나 정작 사드를 문제 삼을 러시아는 그것이 방어무기이고 러시아가 미국과 유럽대륙에서 패권다툼을 벌일 형편이 아니기 때문에 초기의 한 두 차례에 걸친 항의성명이후에는 동유럽지역에 대한 사드배치를 묵인했다. 여기에는 나토에 편입된 동유럽 국가들은 이들 지역이 피침 시 나토에 군사적 대응의무가 배제된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중국이 반대하는 진의> 이상의 주장은 기술적(技術的) 관점이지만 사드를 중국이 반대하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시진핑이 구상하는 중국의 꿈 실현에 역행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번 사드에 대한 정부의 허가를 계기로 우리가 확실히 파악한 것은 미중 간에 잠재된 패권경쟁이라는 모순이 양성화되었다는 사실이다. 미국과 중국 간의 모순은 무엇인가. 간단히 요약하면 시진핑이 말하는 중국의 꿈은 아시아에서 미국을 밀어내고 중국이 지역의 패자가 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은 중국이 동북아지역의 패자가 되는 것을 막으면서 아시아 태평양세력으로 계속 남겠다는 것이다. 사드배치허가는 한국이 미중패권투쟁에 끼이게 됨으로써 한국이 소화해야할 국제정치의 상황이 한층 더 어렵게 되었다. 중국도 대외적으로 밝힐 수는 없겠지만 북한과 마찬가지로 주한미군이나 주일미군 기지를 겨냥할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배치해 놓았는데 한국의 사드는 미국본토를 공격할 중국의 ICBM은 요격할 수 없지만 이 지역에 배치된 중국의 미사일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중국을 자극한다. 그간 중국은 한미동맹을 비판적이면서도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였지만 이제는 중국이 미국 MD체제의 일환으로 보는 사드가 들어옴으로 해서 한미동맹이 반중군사동맹으로 달리 해석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궁극적인 선택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3. 한국이 보는 중국과 중국이 보는 한국 한국은 1992년 수교 이래 양국관계발전을 가장 중요한 대외관계의 하나로 규정하였다. 중국도 이에 호응하고 초기의 단순수교관계가 협력적 동반자관계, 전면적 협력동반자관계,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로 발전해 왔다고 중국 관리들은 평가한다. 그러나 한국의 어느 누구도 중국이 양국관계의 단계적 발전에 붙이는 수식어가 무엇을 뜻하는가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혹자는 전략적 동반자관계란 동맹조약만은 못하더라도 양국협력의 긴밀도가 동맹수준에 오를 만큼 높아졌을 때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 중국은 47개국과 전략적 동반자관계를 맺고 있지만 협력수준은 그렇게 높지 않다. 중국이 다만 북한과 동맹조약을 맺고 있고 유효기간은 2021년까지다. <한국이 보는 중국> 한국에 있어서 중국은 휴전협정의 서명자인데다가 북핵문제의 비군사적 해결이나 한반도 통일에서 기대하는 역할의 중요성 때문에 동맹국가인 미국에 못지않은 중요한 국가로, 최근 여론조사로는 미국보다 더 중요하게 간주되었다.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를 동맹관계보다 더 중시한 것이다. 그러나 2010년의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사태를 거치면서 중국은 중요하지만 안보 면에서 신뢰할 수 있는 국가인지에 대해 짙은 회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국이 자기 동맹국인 북한을 감싸면서 북한에 대한 국제제재를 거부권으로 막았기 때문이다. 중국은 그러나 제4차 북한의 핵실험 후에는 북한에 대한 유엔의 강도 높은 제재에 동참하고 북한에 대한 국제제재를 다짐했다. 그러나 중국의 대북제재는 핵을 포기시킬 만큼 강도 높은 제재가 아니었다. 중국은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핵 비확산 지지라는 명분 때문에 대북제재에 동참은 하면서도 미국을 핵으로 괴롭히면서 중국안보의 일각을 맡아주는 북한의 존재를 중국은 줄곧 활용하겠다는 속셈을 버리지 않았다. 북한문제와 북핵문제를 분리대처 한다거나 북한의 도발이 일어날 때마다 관련당사자들이 서로 냉정하고 자제하라는 양비론적 논평만을 되풀이 하는 중국에 우리는 실망을 거듭해왔다. 북한은 중국의 이러한 속셈을 읽고 국제사회와 맞서 핵 도발을 하면서 버티고 있는 것이다. <중국이 보는 한국> 중국은 한중수교이후 한국의 발전경험을 활용, 경제발전을 추진하면서 한중간의 교역량을 증진시켜왔다. 지난 수년 동안 한중교역량은 미국, 일본과의 교역량을 능가하면서 양국협력은 FTA를 체결할 만큼 고도화되었다. 그러나 한중수교를 가능케 했던 등소평(鄧小平)의 도광양회(韜光養晦)외교노선이 폐기되면서부터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등소평은 도광양회전략을 통해 사회주의 초기단계를 약 100년간 계속해야 할 것을 당부했지만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가 도래하자 중국은 도광양회노선을 끝맺고 국제사회에서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노리는 대국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한국을 보는 중국의 시각은 달라졌다. 중국은 한미동맹을 냉전의 유물이라고 비판, 한미안보협력을 약화시키려 하는 한편 한국국민들의 역사적인 반일감정을 활용, 한국이 미국, 일본과 긴밀히 협력하는 관계발전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중국의 대한정책의 중점이 중국의 동아시아 패권 장악에 한국이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는 쪽으로 옮겨진 것이다. 시진핑이 북한의 핵무장 포기를 요구하면서 김정은과의 면담을 거부한 것이나 항일투쟁시의 중국 측 파트너로서 임시정부의 법통을 승계한 한국을 인정하고 기념물을 설치해주는 조치 등은 모두 중국의 이러한 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중국이 패권추구의 명분으로 내세우는 세력전이(勢力轉移)론이나 신형대국관계 론을 앞세운 중국의 꿈은 시진핑 주석이 추구하는 목표는 될 수 있지만 당장 실현되기는 힘들 ㄱ서이다. 학자들은 모든 지표로 보아 금세기는 어렵고 22세기에나 가능할지 모른다고 한다. 우리 입장에서 볼 때 중국의 꿈은 자칫 한국의 핀랜드화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경계해야할 요소이기도 하다. 더욱이 당면한 한국안보위기해소와는 무관하다. 현시점의 한국은 중국과의 전략적 동반자관계 아닌 한미동맹을 통해 도전 상황을 극복해야 한다. 여기서 내야할 우리의 목소리는 중국에 대하여는 ‘북한의 도발이 있는 한 한미동맹은 결코 흔들릴 수 없음’을 강조하고 미국에 대해서는 ‘한미동맹이 북한의 도발억제와 비핵화 이외의 목적에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이러한 뜻을 담은 박근혜 대통령의 외교독트린이 필요한 때이다. 4. 맺으면서 현시점에서 우리가 국익이라고 정의해야할 과제는 북한의 핵과 미사일도발을 효과적으로 저지하는 것이며 이 과제를 해결하는 데는 한국 안보에 대한 확실한 공약이 있고 유사시 함께 목숨 걸고 싸워 나갈 동맹인 한미동맹을 굳건히 강화하는 것이다. 또 상황이 어려울 때 일수록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국론통일이다. 외부세력들에게 얕보이거나 이용당할 적전분열을 철저히 방지하고 국가의 결정된 목표를 향해 온 국민이 하나로 뭉치는 것이다. 민주정치를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다당제나 다양성, 언론자유가 국가위기 시에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하지 못하고 적전 분열을 일으켜 위기대응 능력을 약화시킨다면 그러한 민주주의는 수호할 가치가 없다. 지금이야말로 국론분열의 도구로서의 민주주의가 아니고 국론을 하나로 통일, 위기대응능력을 키우는 민주주의로 한국정치를 발전시킬 방도를 적극 모색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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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해외개입축소균형전략의 의미를 살핀다.
                                      
                                                                                      이 영 일 전 국회의원 

미국 시카고 대학의 존 미어세이머(John Mearsheimer)교수는 미국의 외교평론지인 Foreign Affairs지에 Harvard Kennedy School의 스테펀 월터(Stephen M. Walter)교수와 공동으로 집필한 논문(The Case for Offshore Balancing(July/Aug2016, Foreign Affairs))에서 미국의 새로운 대전략(Superior U.S. Grand Strategy)으로서 ‘해외개입축소균형전략(Offshore Balancing Strategy)을 제안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국제정치학에서 현실주의학파(Realist School)에 속하는 석학들인데 그간 미국의 대외정책입안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학자들인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특히 이번 미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의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후보와 공화당의 도날드 트럼프(Donald Trump)후보가 미국 대외정책을 해외관여보다는 국내문제에 중점을 두자고 주장하고 있고 2016년에 4월에 실시한 미국 내 여론조사(Pew Poll)에서도 응답자의 57%가 다른 나라들의 문제보다는 미국의 국내문제해결에 치중해야 한다고 응답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 비추어 미국의 대외정책이 차기행정부에서 크게 바뀔 조짐을 보이기 때문에 영향력 있는 학자들의 대외정책변경에 관한 견해에 관심을 갖지않을 수 없다. 필자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미어세이머 교수와 월터 교수의 정책제안을 총체적으로 검토하고 제안된 정책관점 중 우리 한국이 유의해야 할 대목을 간추려 소개하면서 필자의 소견을 말하고자 한다.

                                          1.

 지난 25년 동안 미국의 대외전략은 흔히 자유주의 패권(Liberal Hegemony)추구로 불리는 전략(Grand Strategy)에 입각, 전개되어왔다. 물론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강조하는 구호나 슬로간, 정책의 중점이 바뀌었지만 그 기저는 자유주의 패권이론에 입각, 미국이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서 유일 최고의 패권(Hegemony)을 누리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최근에 들어와서 자유주의 패권전략을 싫어하게 된 것은 지난 25년간 되풀이 된 정책실패 때문이다. 

이 전략은 아시아에서 인도와 파키스탄, 그리고 북한의 핵무장을 막지 못했고 중국이 인접해역에서 현상유지(Status Quo)에 도전하게 했다. 유럽에서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크리미아를 합병하면서 미국과 러시아 관계가 악화되었다. 중동을 보면 미국은 지금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싸우고 있지만 승리의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미국은 이라크와 리비아에서 정권교체(Regime Change)를 끝내고 시리아에서도 정권교체를 추진했지만 내전이 국제적으로 확산되면서 혼란이 가중되고 이런 와중에서 이슬람주의운동은 대부분의 지도자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아랍세계로 파급(Metastasis)되면서 이슬람국가(ISIS)를 출현시켰다. 
미국이 주선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협상은 실패, 두개 국가방식으로의 해결이 어렵게 되었다. 민주주의는 세계적으로 약화되고 있으며 미국이 자행한 고문이나 기획 살인 등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행위로 말미암아 인권과 국제법의 옹호자로서의 미국의 이미지는 심각히 퇴색되었다. 미국이 이러한 실패를 거듭하게 된 것은 자유주의 패권추구라는 오도된 전략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이 전략의 핵심은 미국이 주요지역(Key Area)에서의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요구에 부응하는 대신에 세계 도처에서 민주주의를 촉진하고 인권이 위협받는 곳이면 어디에서라도 미국의 힘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미국이 세계경찰로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국제법(International Institutions), 대의정부, 시장개방, 인권에 기초한 세계질서를 수호하는데 미국의 힘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미국은 세계에서 지정학적으로 가장 축복받은 나라였다. 한때 주미프랑스대사였던 장질 쥐세랑(Jean-Jules Jusseand)은 “미국은 북으로는 약한 이웃, 남으로는 더 약한 이웃, 동서양쪽으로는 물고기만 있는 대양을 끼고 있는”국가로서 자원은 풍족하고 역동적인 인구를 배경으로 세계최대의 경제대국, 수천 개의 핵탄두를 가진 대국이기 때문에 미국본토가 외부로부터 위협받을 가능성이 없는 국가라고 말했다. 이런 천혜(天惠)의 환경 때문에 미국인들은 세계를 자기들의 이미지에 맞게 재형성시키려는 저돌성을 벌였다. 
미국은 이러한 돌출적 충동에 기초한 군사개입확대정책을 구사하지 않고도 미국의 힘과 안정을 유지하고 지구 최강자로 남을 전략을 만들 수 있다. 지금 양 교수가 제안하고 있는 해외개입축소균형전략(Offshore Balancing Strategy)이 바로 그 대안이다. 

                                         2. 

 해외개입축소균형전략(이하에서 균형전략으로 약칭함)은 미국이 다른 사회를 미국의 가치에 맞게 재구성하려거나 세계경찰이 되겠다는 야심적인 생각을 접고 우선 서반구(Western hemisphere)에서 미국의 지배적인 지위(Dominance)를 유지하면서 유럽과 동북아시아, 페르샤 만(灣)에서 잠재적인 패자(Potential Hegemon)가 등장하는 것을 막는데 힘을 집중하자는 것이다. 

미국은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직접 해외로 군사 개입하는 것을 자제하고 새롭게 부상하는 세력에 대한 견제는 가능한 한 현지에서 도전받는 세력이 감당토록 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세계국가로서의 미국의 지위를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고 미국본토만을 지키자는 것도 아니다. 이 전략은 미국을 가능한 한 힘 있는 국가, 이상적으로 말하면 서반구뿐만 아니라 지구상에서 지배력을 갖는 국가로 유지시키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전략이 고립주의(Isolationism)와 다른 점은 서반구이외에도 미국인의 피와 물자를 제공해야 할 지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바로 유럽, 동북아시아, 페르샤 만 지역이 여기에 해당한다. 유럽과 동북아시아지역에서는 미국이 서반구에서 누리는 것 과같이 이 지역을 지배할 지역패권국가가 출현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은 경제적인 영향력도 충분하고 정교한 무기를 개발할 능력, 자기 힘을 지구상에 투사할 잠재력도 갖추면서 미국과의 무기경쟁에 더 많은 자산을 투자할 능력을 가질 국가의 출현에 관심을 갖는다. 
지금 러시아와 중국이 미국의 표적인데 러시아는 이제 유럽에서 패자가 될 가능성은 줄어들었다. 독일을 중심으로 한 나토세력이 러시아를 견제할 만큼 힘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페르샤 만에서도 이란이나 이라크가 지역패권을 장악할 가능성은 줄어들었다. 이라크의 정권교체와 이란 핵협상 타결은 미국에 도전할 지역패권국가의 출현가능성을 줄였다. 따라서 미국은 이러한 지역에서 군사개입을 줄여 나가고 지역 국가 상호간에 균형을 유지하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맡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북아시아의 상황은 다르다. 미국은 중국의 인상적인 성장과 굴기가 미국의 지도력에 도전할 잠재적 패권추구의 환경을 조성하였으며 특히 이 지역에는 중국을 견제할 다른 강자가 없다. 물론 미국의 동맹국들이 있지만 서로 떨어져 있어 유효한 중국견제가 어렵다. 이러한 지역에는 미국이 직접 군사적으로 개입하고 미국의 힘을 유지함으로써 중국의 패권추구를 막는 것이 균형전략이다. 

지난 30년 동안 중국은 미국이 지난날 해외군사개입에 끼어들지 않고 경제건설에 매진, 강대국 반열에 오른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경제발전에 주력하여 강대국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미국은 중국이 이 지역에서 패자(覇者)로 등장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이 점은 미어세이머 교수의 평소의 지론과 일치한다) 

                                             3.

 균형전략은 미국의 해외군사개입을 줄임으로써 현지국가들이 자국의 안전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하게 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냉전 이후 미국의 보호에 무임승차만 하는 동맹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게 된다. NATO의 경우 군사비용의 76%를 미국이 부담해 왔는데 이는 배리 포슨(Barry Posen)교수가 “부자를 위한 복지지출”과 같다고 비꼴만했다. 

또 균형전략은 테러위험을 줄이기도 한다. 자유주의 패권정책은 토양이 맞지 않는 곳에 민주주의를 심는다면서 군사적으로 점령하거나 현지 정치상황에 개입하였는데 이러한 행동은 민족적 분노를 유발한다. 저항세력들은 미국과 직접대결하기에는 너무 힘이 약하기 때문에 테러에 호소한다. 특히 미국은 정권교체를 통해 미국의 가치 확산을 추구함으로 해서 기존통치제도의 역할은 약화되고 폭력적인 극단주의자들이 판칠 통치부재 공간 을 만들어 주었다. 

앞으로 미국은 중요한 이해가 걸린 지역이 잠재적인 패권국가에 위협받는 경우에 한하여 해외에 미군을 주둔시켜야 한다. 이러한 경우에는 반미가 일어나지 않고 미군을 구세주로 여긴다. 그러나 위기가 해소되면 미군은 곧장 철수하고 현지정치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 
끝으로 자유주의 패권논자들은 미국이 핵 비확산을 보장하기 위해서도 해외개입을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국의 역할이 줄어들거나 주요지역에서 철수한다면 미국보호에 익숙한 국가들은 스스로 핵을 개발하여 자신을 보호할 길을 택할 도리밖에 없을 것이다. 이점에서 아직까지 핵무기의 확산을 완전하게 막을 수 있는 전략은 없는 셈이다. 모든 국가들은 공격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핵을 가지려고 하는데 미국이 정권교체(Regime Change)를 추구하면 할수록 이러한 두려움은 더 커진다. 

그러나 해외개입축소균형전략에 입각하여 미국이 군사개입을 줄이고 정권교체를 추진하지 않는다면 핵 확산논자들의 명분도 약화될 것이다. 그러나 핵무기를 꼭 갖겠다고 결의한 국가들의 핵무장을 막아내기 힘들 것이다. 최근 이란 핵협상의 성공은 예방전쟁이나 정권교체보다는 잘 조절된 다자압력과 엄격한 경제제재가 더 좋은 방도임을 알게 해주었다. 만일 미국이 안보 공약을 축소한다면 취약한 국가들 가운데는 핵 억지력을 추구할지 모른다. 이것은 결코 바람직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핵을 완전히 막는다는 것은 비용도 많이 들고 성공하지도 못할 것이다. 

1945년 이래 10개국이 핵 문턱을 넘었지만 그렇다고 지구질서가 와해되지도 않았고 핵을 가졌다고 해서 약소국가가 강대국으로 변형된 일도 없으며 경쟁 국가를 공갈로 굴복시키지도 못했다. 핵 확산문제는 아직도 미국이 우려해야할 사항이지만 이 문제의 해법도 해외개입축소균형전략으로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4.

 중국은 미국의 아시아재균형전략에 따라 중국견제를 강화하는 미국을 상대로 평화적인 세력전이(勢力轉移)론을 내세우면서 우선 미국이 중국을 미국과 대등한 강국으로 대우하는데 합의, 양국관계를 신형대국관계로 발전시키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국은 중국을 미국과 동일한 대국반열에 올리자는 주장에 난색을 표시하고 앞으로 세월이 흘러 결과적으로 대등해질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 당장 대등하다는 모자를 씌울 수는 없다고 말하고 상호간의 협력을 통하여 양자관계를 능력에 상응하게 전개시키자고 대응한다. 중국은 미국과 역량이 대등해지는 것이 목표일수는 있어도 21세기 안에 그렇게 되기는 힘들다고 미국 전문가(Joseph Nye 등)들은 말한다. 미국의 아시아 전략은 미국의 새 행정부를 누가 맡게 되더라도 해외개입축소전략을 추구하겠지만 중국이 동북아시아 지역의 패자로 부상하는 것을 막겠다는 미국의 목표는 변할 것 같지 않다. 이점에서 한미동맹을 안보의 기본 축으로 삼으면서 중국과의 협력동반자관계를 유지하는 한국정부의 방침은 타당하다. 그러나 북한의 비핵화를 협상의 전제조건으로서가 아니라 해결해야할 협상의 과제로 정의하면서 남북관계를 풀어나가는 지혜도 우리에게는 필요한 방향이 아닐까. 함께 모색해야 할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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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동북아시아공동체연구재단이 2016년 6월 16일 서울프레스센터에서 “남북대화 어디로”라는 제목으로 개최한 세미나에서 발표한 이영일의 기조연설전문이다 

이제 자주 외교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한중정치외교포럼 회장 이 영 일 

 1. 들어가면서 

 2016년 1월 6일 북한의 제4차 핵 실험과 뒤이은 탄도미사일 발사가 있은 직후 미국과 중국은 북·핵 처리를 논의했다. 2월 24일 미국의 존 케리 국무장관과 중국의 왕이(王毅)외교부장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결의 내용을 협의한 후 양국은 북한에 대해 강도 높은 제재를 결의하되 제재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수단인 만큼 한반도의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는 협상도 병행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미국은 비핵화가 전제되지 않는 평화협정은 있을 수 없지만 제재에 병행하는 비핵화협상의 필요성을 인정, 제재와 협상의 병행이라는 접근방식에 합의했다. 앞으로 어떤 형태의 대북 협상이 열릴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북한의 김정은은 7차당대회에서 당 규약을 일부러 개정, 핵·경제병진노선을 명문으로 규정해 놓았기 때문에 이를 폐기, 변경시킬 협상에는 쉽사리 응하지 않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중국이 북한을 협상으로 끌어낼 미끼는 북한이 오래 동안 주장해온 휴전협정의 평화협정에로의 전환일 것이다. 북한은 미국과 북한만이 휴전협정(Cease-fire)의 서명주체로서 양자 간의 평화협정을 통해서 한국전쟁을 법적으로 종결하고 주한미군이 철수해야하다고 주장해왔기 때문에 이 문제를 주제로 열리는 미·북양자회담이라면 북한도 응할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해서 검토해야할 또 다른 과제는 한반도에서 전쟁상태를 법률적으로 종결시키려면 현재의 휴전협정이 “정치적 수준의 새로운 협정에 의해 대체될 때까지 계속 유효하다”고 규정한 휴전협정 5조 61항의 처리문제다. 

종전에 관한 국제법의 최근 흐름은 한반도의 경우 비핵화실현을 바탕으로 남북한 간에 전쟁상태가 종결되었음을 확인하는 유엔안보리의 결의로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이하 한반도 평화문제에 임하는 미중양국의 태도를 차례로 살펴보자. 

 2. 강대국들의 평화에 대한 태도검토 

 한반도가 포함된 동북아시아지역에는 1975년에 유럽에서 성립한 헬싱키 체제-구주안보협력회의(CSCE)와 같은 역내평화를 담보할 국제기구가 없다. 최근 카자크스탄 대통령이 제안하고 중국이 중심이 된 아시아교류 및 신뢰구축회의(CICA)는 아시아 집단안보를 표방하고 있다. 또 중국의 시진핑(習近平)주석은 지난 5월 21일 상해의 CICA총회에서 아시아의 안보는 아시아 국가들이 해결해야 한다는 아시아 집단안보론도 제기했다.
그러나 이 기구에는 한국은 가입했지만 북한은 회원이 아니고 동아시아 평화와 안보에 절대적 영향력을 갖는 미국이 참여하지 않고 있어 아시아 집단안보기구로 볼 수 없다. 현재 동북아시아는 국제정치 환경이 집단안보기구를 형성하기에는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고 특히 미국과 중국의 이해충돌이 심각하기 때문에 집단안보기구논의는 현시점에서는 수사(修辭)적 수준을 넘어서기 힘든 실정이다. 그런데도 한반도의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자거나 평화체제를 안출해야 한다는 주장이 미국과 중국 간에 북·핵 처리의 한 방법으로 거론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하 미중양국의 입장을 검토하기로 한다. 

가. 그간의 평화협정논의 회고 

1970년대부터 북한은 현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꿀 것을 미국에 요구해왔다. 북한은 휴전협정의 서명당사자가 미국과 북한이기 때문에 한국을 배제하고 미국과 북한이 평화협정을 체결, 이 협정으로 휴전협정을 대체해야 하고 한반도에서의 전쟁상태를 법률적으로 종결시키면서 주한미군도 철수시켜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한국을 배제한 평화협정주장은 다분히 선전적 주장이기 때문에 미국이 북측 제안을 수용할리 없었다. 
그러나 한국도 휴전체제문제를 이대로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1996년 한미양국은 남북한과 미·중이 참가하는 4자회담을 제안했다. 이 제안은 서명국인 중국을 회담 당사자로 포함시킨 점에서 진일보했다. 중국과 북한이 이를 수용, 1997년 12월 제네바에서 제1차 회담이 개최되었다. 이 회담에서 한국은 한반도의 비핵화나 양국 간의 신뢰관계 조성을 위한 조치 등 지금까지의 합의사항에 대한 이행을 요구한데 반해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우선으로 내세웠다. 1999년 6차까지 진행된 4자회담에서 북한은 미군철수, 한·미 대규모 전쟁연습 중지, 한반도로의 전쟁장비 반입 금지를 주장했다. 중국은 자국의 입장을 '조선반도 평화협정 초안'을 만들어왔는데 내용인즉 전쟁상태의 종식 선언, 불가침·내정불간섭, 군사적 신뢰구축 및 군축조치 등 일반적인 평화협정에 포함되는 사항들을 담았다. 
한국은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남북한이 주당사자가 되고 미·중은 증인 자격으로 서명하는 '남북평화합의서'와 미·중이 합의서의 효력을 보장하는 내용의 '추가의정서'를 채택할 것을 주장했다.

 나. 중국이 말하는 표본겸치(表本兼治)와 평화체제 

중국은 시진핑 정부의 등장과 더불어 2013년 1월 외교담당 국무위원인 양제츠를 내세워 한반도문제의 표본겸치론을 들고 나왔다. 북핵문제를 처리함에 있어 증상치료뿐만 아니라 원인까지를 함께 다스리자는 것이다. 북한이 안심하고 핵을 포기할 환경을 만들어주는 방식을 한반도 비핵화과정에서 함께 다루자는 것이다. 지금 중단된 6자회담의 9.19합의는 이러한 요구를 십분 반영했지만 북한이 핵 포기를 거부함으로써 수포로 돌아갔다. 현시점에서 중국은 한반도가 포함된 동북아시아 평화체제의 일환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모색하자고 말하지만 중국의 내심이 담긴 평화체제개념은 나오지 않았다.

또 중국은 북한의 핵 포기라는 표현대신에 한반도 비핵화를 주장한다. 중국이 의미하는 한반도비핵화는 북한의 핵 포기뿐만 아니라 필요시 핵사용 능력을 가진 주한미군의 철수까지를 포함한 개념임을 암시한다. 그간 중국은 소련과의 갈등이나 일본의 재무장 가능성 차단이라는 중국안보목적에 필요할 경우에는 미군의 한국주둔을 역사적 사실로 긍정해왔지만 미중갈등의 최근 양상에서 보면 내심으로는 주한미군철수까지를 협상대상에 포함시킬 것을 상정한다.

최근 THAAD배치에 대한 중국의 태도에서 이러한 의도를 규지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이 구상하는 평화체제는 주한미군의 철수를 암묵적 조건으로 하면서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남북한이 통일수단으로서 무력불사용을 문서로서 합의하고 미국과 중국이 이 합의의 효력을 보증하는 형식의 한반도 평화체제이다. 결국 중국의 목표는 자국과의 관계에서 한반도 전체의 완충지대화(Buffer Zone)일 가능성이 크다. 시진핑이 주변 국가들을 상대로 친성혜용(親誠惠容)의 외교원칙을 내세우면서 펼치는 담론인 운명공동체론도 바로 이러한 의도를 담고 있는 것 같다. 

 다. 아시아 재 균형론과 미국의 평화체제구상 

미국도 한반도의 휴전협정이 국제법이 생긴 이래 가장 오래된 휴전협정이란 점에서 변화된 환경에 맞게 새롭게 정의될 필요성에는 공감하고 있다. 미국은 2003년부터 시작되었던 6자회담의 실패 이래 북한의 비핵화 의지가 전제되지 않는 한 어떠한 협상도 무익하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유엔의 안보리제재나 미국의 독자제재도 그것이 비핵화를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점에서 북핵문제의 비군사적, 외교적 해결을 위해 중국의 주선으로 북한이 협상에 응해온다면 미국도 북한과의 대화에 응할 뜻을 밝히고 있다. 현재 북한은 비핵화를 전제한 어떠한 회담에도 응할 수 없다고 하지만 국제제재를 돌파하고 경제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모든 협상을 거부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미국이 유엔제재를 통한 한반도의 비핵화유도상황의 진전과는 관계없이 자신이 추구하는 아시아재균형전략의 일환으로 중국견제로 보이는 외교활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남중국해에서 중국이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인공섬에 대한 영토권을 인정하지 않고 오바마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 베트남에 대한 무기 수출을 허용했으며 일본의 히로시마를 방문, 미일동맹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한반도에 THAAD미사일 배치도 추진하고 있다. 

미국의 이러한 조치가 유엔의 대북제재조치에 참여하고 있는 중국을 자극함으로써 대북제재에 대한 미중양국의 제재전선의 균열을 가져올 우려를 낳고 있다. 북한 핵문제를 미중관계의 맥락에서 활용하는 중국은 현시점에서 북한을 약화시킬 제재이익(制裁利益)과 자국의 국익을 면밀히 검토한다. 결론은 중국이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제재방식만을 따라간다면 북한에 대한 자국의 영향력만 줄어들고 미국의 대중국견제망만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우려다. 이러한 우려는 지난 6월 1일 시진핑 주석과 김정은의 친서를 휴대한 이수용 북한외상의 면담성사로 외교현실이 되었다. 미국으로서는 북한의 핵 포기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국익으로 추진되는 아시아 재 균형전략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미국과 중국이 현시점에서 논의하는 한반도 평화체제는 엄격히 말해서 미중 양자관계에서 필요한 수준의 한반도 평화논의이다. 군사충돌이나 소요나 갈등이 줄어드는 현상유지(Status Quo),즉 미중양국의 안보정책에 종속시키는 평화다. 따라서 미중양국이 말하는 평화협정이나 평화체제는 그것이 북한으로 하여금 핵을 포기시킴과 동시에 한국이 주도하는 통일도 포기케 하는 타협안으로서의 평화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나마 북한의 핵 포기라도 가시적 성과를 낸다면 다행일 것이다. 우리가 강대국들이 말하는 평화에 대해 경계심을 늦출 수 없는 이유다. 

 3. 한국의 선택 

 가. 우리가 맞을 어려운 상황 

 한국은 현재로서는 한미동맹을 근간으로 하여 대북제재를 통한 북한의 핵 포기유도를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도리밖에 없다. 그러나 유엔안보리의 강도 높은 제재에도 불구하고 국제적인 대북제재전선에 균열이 생기고 또 강대국들이 주도하는 협상이 북한의 비핵화가 아닌 핵의 현상동결이나 비확산으로 미중 간에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한국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들은 하나같이 한국의 입장을 어렵게 한다. 정답은 한국이 주도하는 자주적 해결이지만 그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우리가 지나치게 자주를 내세우면 미국과의 협력이 어려워질 수 있고 미국에만 일방적으로 끌려가면 한중관계를 어렵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강대국들과의 협력은 긴밀히 추구하면서도 모든 것을 강대국에만 맡기거나 의지할 것이 아니라 자주적으로 대비해야 할 전략을 미리 준비해두어야 한다. 출구전략과 Plan B를 준비하는 지혜다. 
현시점에서 우리가 검토할 수 있는 출구전략은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문제다. 인도적 지원의 중단은 북한의 지배층보다는 북한에서 변화를 주도할 장마당 세력과 주민들을 더 곤궁하게 만들고 이산가족들의 재회의 꿈을 차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도적 지원문제를 깊이 고려해야 한다. 핵개발에 필요한 물자나 자금이 북으로 들어가는 것은 철저히 차단해야겠지만 북한주민을 위한 식량이나 의료지원, 이산가족 상봉추진 같은 인도적 차원의 문제는 민간기구나 단체를 활용, 지원에 나서도록 해야 한다. 

 나. 자주적 결단과 준비의 필요성 

다음으로 Plan B를 준비해야 한다. 첫째 북한의 비핵화가 외교적 방법으로 해결불가능한 상황에 대비해서 한국이 독자적인 핵무장의 길을 강구하자는 것이다. 직접적인 핵무장이라기보다는 핵물질과 기술의 확보라는 핵무장 준비태세(Nuclear Hedge)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시화될 때 비로소 중국은 북한의 핵 포기를 강하게 밀어붙일 것이다. 한국의 핵무장이 일본의 핵무장으로 이어져서 동북아시아가 중일(中日)양국 간의 핵 대결체제로 바뀌는 것을 중국이 가장 꺼리기 때문이다. 요즈음 중국학자들 가운데는 한국은 미국의 압력 때문에 핵무장을 엄두도 못 낼 것이라고 단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둘째로 한반도 평화체제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남북한과 미중양국이 참가하는 ‘신 4자회담’을 준비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이 북한의 핵 보유를 공동으로 반대하고 있는 현실에 주목, 한국이 ‘신 4자회담’을 제의함으로써 국제사회의 대화수요도 수렴하는 한편 대화주도권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회담이 한국의 이니셔티브로 열려야 한국의 발언권이 계속 유지될 수 있다. 중국학자들 가운데는 일본과 러시아를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협상에 꼭 참여시킬 필요가 있는가에 회의를 표시한다. 남북한과 미·중만이 당사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남북한 관계의 전개형태로서의 대화, 교류, 협력, 제재 중 “제재”가 진행 중 임을 감안, 제재의 실효성 확보에 비중을 실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 Plan B는 당분간 공개적으로는 아니더라도 필수적으로 준비하고 구체화시켜야 한다. 현재 어떤 주변강대국도 우리의 분단을 아파하고 통일을 지원하지 않을 것이다. 북한의 붕괴를 기다리는 자세로도 통일의 길은 열리지 않는다. 이제 우리의 통일은 기다리는 통일이나 주어지는 통일이 아니라 쟁취하는 통일이어야 한다. Plan B의 집중적 개발과 준비가 절실히 요망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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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박사와 4.19와 나

 

이글은 2016년 4월 19일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서울 정동제일교회 아펜셀러 관에서 열린 이승만 포럼에서 행한 이영일의 강연 전문이다

 

                                             이 영 일 (4.19당시 서울대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3년생)

 

1. 들어가면서

 

이승만 포럼 측에서 저에게 준 논제가 “이승만 박사, 4.19와 나”라는 매우 특이한 제목이다. 4.19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이승만 박사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를 묻는 제목으로 이해한다. 오늘은 4.19혁명 56주년 기념일이다. 419혁명에 앞장섰던 한 사람으로서 이승만 박사에 대한 제 소견을 말씀 드리기 전에 지금부터 56년 전 불의와 부정에 항의하기위해 궐기했다가 목숨을 바친 183위의 영령들을 추모하는 묵념을 잠시 올릴 것을 제안한다. --(잠시 묵념)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평가하려고 하면 평가자가 가지거나 축적하고 있는 당해 사건이나 인물에 관한 지식이나 정보, 평가자가 지향하는 이념, 평가하는 시기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서면서 떠오르는 성경말씀 한 구절이 생각난다. 신약성경 고린도 전서 13장 11절로 기억하는데 “내가 어릴 때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다”는 바울 사도의 이야기다. 제가 지금부터 56년 전 20대 때인 4.19혁명당시에 생각했던 이승만 박사와 80대를 바라보는 지금의 시점에서 제가 생각하는 이승만 박사는 결코 같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우선 말씀 드리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승만 박사는 그의 90년의 생애가 한국 현대사와 궤를 같이하기 때문에 그분의 영향력 범위 안에 있던 사람들의 여러 가지 이해관계(정치적, 이념적, 사회경제적)에 따라 호오포폄(好惡褒貶)이 극에서 극으로 갈린다.

 

 그간 이승만 박사에 관해서는 최근 이승만 대통령 재평가라는 우리 사회의 새로운 분위기가 조성되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분을 부정하거나 매도하는 이른바 ‘이승만 죽이기’가 우리 사회의 일반적 흐름이었다. 이러한 흐름에 연(沿)하여 가능한 한 이승만 박사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지 않는, 시쳇말로 “말을 아끼는 추세”가 이승만 박사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였던 것 같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는 대한민국의 국가로서의 위상이 제고되고 남북한 발전경쟁에서 한국의 우위가 실증되는 것과 때를 같이해서 초대대통령으로서 ‘이승만 대통령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 조명하려는 분위기가 싹텄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승만 죽이기‘의 목소리보다는 ’이승만 살리기‘의 목소리가 점차 들려오고 학자들 간에 이승만을 다시 보는 연구업적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제가 과문(寡聞)하거나 불민(不敏)한 탓도 있었지만 오늘 같은 포럼이 거의 매월 한 차례씩 지닌 6년간 지속되어왔다는 사실을 저는 오늘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다른 나라에서 같으면 이승만 박사가 서거했던 60년대 후반부터 등장했어야 할 이승만 연구나 포럼이 80년대에 겨우 싹트고 이승만 포럼도 21세기에 들어와서 겨우 월례행사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오늘 우리 사회의 현주소인 것 같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 작업은 역사학자들이 중심이 되는 것만으로는 공정성과 객관성을 기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한국 역사학자들의 역사연구범위는 가능한 한 조선사 연구로 시종되었으면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독립운동사까지 연장할 수는 있겠지만 해방 전후사나 대한민국의 수립과 발전과정의 연구, 분석, 평가는 정치학이나 국제정치학, 비교정치학자들에게 우선적으로 맡겨야할 과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역사학자들은 대개 일국사(一國史)적 안목이나 도덕적 기준에서 사물을 관찰하기 쉽고 법통이나 치적평가를 선악을 중심으로 보는 경향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학이나 국제정치학(외교사 포함), 비교정치학은 한국과 같은 신생국이 나라세우는 Nation Building 과정에서 직면하는 여러 가지 복잡다단한 내외의 도전을 비교, 분석하면서 상황의 의미를 객관화하는 방법론에 의지하기 때문에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 평가에서 현실성과 객관성을 가질 수 있다. 이점에서 작금에 거론되는 한국현대사 교과서의 집필 주체도 한국사 전문가들에게만 맡기는 것으로는 부적절하고 오히려 정치학과 비교정치학자들이 더 큰 역할을 맡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이와 관련해서 유념해야 할 것은 이승만 살리기가 이승만 죽이기의 재판(再版)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승만을 긍정하고 추앙하고 숭배할 자료만을 수집하고 이러한 평가를 토대로 한국의 현대사를 재단(裁斷)하려고 한다면 상당한 반론에 직면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승만 죽이기가 이승만의 철저한 부정에만 치중했기 때문에 이승만 살리기의 필요성을 자극한 것처럼 이승만 살리기도 지나친 과찬이나 추앙(推仰)으로 흘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정치지도자는 누구나 공(功)과 과(過)가 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지적하여 후세에 귀감을 삼도록 해야 할 것이다. 특히 21세기 한국의 오늘을 사는 우리 국민들은 대한민국의 탄생과 존속과 발전의 기초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역사 속에서 되돌아본다면 이승만 대통령의 지도력과 예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 사회는 이승만 박사의 90평생의 어느 한 시기(이승만 생애의 20분의 1정도)만을 떼어내어 그분의 과오를 들추면서 욕하거나 부정해왔지만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항상 편치 못했던 것은 그 분이 우리나라 초대대통령이었고 우리 Nation Building에 끼친 기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지금 국민들 가운데는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을 이렇게 홀대, 폄하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태도인가를 놓고 반성하는 사람들도 점차 늘고 있다.

영국의 정치학자 Bernard Click은 정치를 멋있게 정의했다. 즉, 정치란 한 나라의 정치공동체의 존속과 발전에 기여한 정도에 비례해서 거기에 상응한 몫을 나누는 과정이라고. 이승만 박사가 대한민국의 존속과 발전에 기여한 몫을 공헌으로서 제값대로 평가해주고 동시에 과오를 지적하는 것이 지금 우리 후대들에게 주어진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러한 맥락과 문제의식에서 “이승만 박사와 4.19와 나와의 관계”를 살피기로 한다.

 

2. 나의 청소년 시절과 이승만

 

저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추억을 감히 인문학적 표현을 빌려 “나와 이승만 박사와의 만남”이라고 한다면 건방진 태도 아닐까. 이승만 대통령은 해방 다음해인 1946년 9월 필자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부모님들에게서 훌륭한 독립 운동가, 나라의 큰 지도자라고 들었다. 초등 3학년 때인 1948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고 그 때부터 대학교 3학년 되던 1960년까지 대통령은 오로지 이승만 한 분뿐이었다. 그 시절 이승만 박사는 국민 모두에게 대통령의 동의어로 받아들여졌다.

 

제 삶속에서 이승만대통령과 맨 처음 연관된 일은 광주서중 2학년 때인 1954년 6월에 일어났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 제막식에 이승만 대통령이 제 모교인 광주서중을 방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관행으로는 대통령의 방문 시 학생들이 시민들과 함께 출영하는데 이때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다는 광주서중과 전남여중생들이 출영을 맡았다. 제 어머니는 “나라님” 출영을 나간다고 하여 잘 다려놓은 교복을 내줘서 입었던 기억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다. 광주에서 14Km 가량 떨어진 송정리비행장까지 부슬비를 맞으면서 도보로 행진, 출영을 나갔지만 기상사정으로 대통령의 광주방문은 취소되었다.

이날 학생들은 먼 길을 비 맞으면서 되돌아왔지만 누구하나 불평불만을 내뱉지 않았다. 먼발치로라도 말로만 듣던 이승만 박사를 한번 못 본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을 뿐이다. 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카리스마의 극치였다. 학생 탑 건립위원회는 이승만대통령에게 ‘학생운동기념탑’이라는 휘호 써주기를 청했는데 대통령은 원안(原案)에 ‘독립’이라는 두 글자를 첨가 “光州學生獨立運動紀念塔”이라는 휘호를 써주었다. 이 대통령은 휘호를 주는 자리에서 "1919년 3.1운동으로 점화된 독립운동의 열기가 10년을 지나면서 자칫 시들해지는 바로 그 때인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외치고 나옴으로써 독립운동의 열기가 다시 타올랐다“ 회고하고 해외에서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큰 용기와 희망을 준 사건이었다고 술회했다는 것이다.

 

1955년 광주일고에 진학하면서부터는 중학교 다닐 때 영문도 모르고 선배들과 함께 휴전을 반대하는 관제시위에 동원되어 참가했던 시절과는 달리 내 또래 친구들 간에도 정치의식이 조금씩 싹트면서 시국이야기를 곧잘 나누었다. 특히 동아일보의 사설을 매일 읽고나오는 친구 한 사람이 화제를 독점하면서 국내정치를 소재로 매일 쉬는 시간마다 토론했다. 저도 이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신문사설을 열심히 읽었다. 이승만 박사이야기보다는 민주당의 신익희 씨나 조병옥 박사 이야기에 관심이 쏠렸으며 특히 4사5입 개헌 이야기는 우리 학생들에게도 큰 흥밋거리였다.

 

136표면 가결될 자유당의 개헌안이 자유당의 이용범의원이 잘못투표함으로써 135표로 1표 부족사태가 발생, 개헌안이 부결되었는데 이를 4사5입으로 처리, 개헌안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용범의원은 저와 같은 함평이씨(咸平李氏)였는데 그는 입구(口)자가 있는 투표지에 O표를 하라는 원내총무의 지시를 받고 투표용지를 받아 보니 옳을 가(可)자에도 口자가 있고 아니 부(否)자에도 口자가 있어 두 쪽 모두에게 O표를 한 것이 투표를 무효로 만든 원인이었다. 그 정도로 무식한 수준의 의원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자유당에 대한 국민적 혐오를 유발하는 것이었다. 자유당을 싫어하고 반대하는 심리가 내심에 쌓이기 시작했다.

 

3. 저의 대학시절

 

1958년 일고를 졸업하고 저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에 진학했다. 이 때는 6.25의 전재복구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는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이 흑 수저로서 가정교사로 입주하여 공부하였다. 저도 얼마 있다가 친척집 아들을 가르치기로 하여 숙식문제는 해결되었고 성적이 오를 경우 등록금 보조도 약속받았다. 입학식이 끝난 후 광주에서 다니던 교회목사의 권고로 장충단에 있는 서울 경동교회에 대학생으로 등록을 하고 동대문 시장의 헌 책 방을 뒤지면서 대학 내에서 진보적인 채 할 수 있는 책 몇 권을 헐값에 샀다.

유물사관으로 역사를 보는 세계사 교정 5권, 전석담의 조선경제사, 백남훈의 조선 봉건사회경제사, 반 듀링 론 등 학내에서 진보를 앞세우면서 좀 유식한 채 하는 친구들과 입씨름할 책을 구입하여 탐독했다. 내 인생이 요즈음 말로 표현하면 ‘운동권’으로 변하는 과정이었다.

이런 책의 내용을 놓고 날 새가면서 토론했고 책에 담긴 내용을 한국현실에 대입하면서 한국사의 현 단계를 ‘반봉건 민주주의 혁명단계’로 규정하고 경제적으로는 미 제국주의에 예속된 매판자본에 의해 한국경제가 수탈되고 있다고 분개했다. 특히 집권당인 자유당은 이승만이 친일파숙정을 외면하고 그들과 제휴했기 때문에 친일 관료배들이 국권을 농단한다고 진단했다.

 

이런 지적 분위기속에서 나는 학내 정치학과생들이 중심이 된 사회민주주의 연구 서클인 신진회에 가입하여 선배들과의 토론에 참여하였다. 신진회는 류근일 사건 등으로 유명했고 정치학과 선후배들의 주류서클이어서 참여한 것 자체가 매우 자랑스러웠다. 그 당시는 활동보다는 연구와 토론이 주제였기 때문에 Lenin의 Imperialism이나 Rudolf Hilferding의 Financial Capitalism을 원서로 구입, 영어공부 겸 지식습득의 수단으로 연구하고 연구결과를 발표하면서 사회과학의 비판적 측면을 학습하였다.

 

이런 와중에 사회민주주의자로 알려진 조봉암(曺奉岩) 선생이 공산간첩으로 몰려 사형당하고 경향신문이 폐간되고 국가보안법이 개악되어 인심혹란죄(人心惑亂罪) 같은 항목이 설치되는 등 적어도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민주역행현상이 줄이어 일어났다. 우리 학생들은 이 모든 것이 이승만이 조종한다고 생각했다. 민주공화국을 만들어놓고 정부 스스로가 헌법을 유린하고 갈수록 강권독재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고 단정했다. 이승만이 말하는 민주주의와 한국의 현실은 너무 유리되었다. 학교에서 배운 민주주의와 우리가 현실에서 목도하는 민주주의는 너무나 달랐다.

 

자유당 정권에 대한 미움에서 민주당에 대한 선호가 지식인 사회는 물론이거니와 시골이 아닌 도시에서는 갈수록 팽배했다. 여촌야도(與村野都)는 당시 선거의 일반적 흐름이었다. 이에 당황한 자유당은 지방자치법을 개정하여 6.25전쟁 기간 중에도 실시해왔던 지방자치단체장의 선거를 없애고 시장 군수 임명제를 실시하면서 1960년에 실시될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대비했다.

그러나 정부통령 선거가 공고된 기간 중에 야당 대통령후보였던 조병옥 박사가 암으로 서거하는 바람에 이승만 대통령은 사실상 무투표당선이 확정되었고 다만 미국과 달리 정부통령 런닝 메이트 제가 아닌 한국에서는 부통령을 국민직선으로 선출해야했다. 1956년에 실시된 제3대정부통령 선거 때는 대통령과 부통령의 당적이 달랐다. 야당의 장면(張勉)씨가 부통령에 당선되고 여당의 이기붕 씨가 낙선했는데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이러한 실패가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자유당의 목표였고 미국식 민주주의를 선호했던 이승만 대통령도 정부통령이 동일정당에서 나오는 것이 순리라는 입장을 누차 표명한 바 있었다.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지만 만일 정부통령이 같은 당에서 뽑히는 미국식 선거제도였더라면 3.15부정선거는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4. 4월 혁명의 전개

 

1960년 3월 15일에 실시된 제4대 정부통령 선거는 사실상 부통령선거였지만 관권선거의 극치였다. 유권자의 정치적 의사표시를 철저히 왜곡하는 부정선거였다. 전 국민이 피부로 실감할 정도의 부정선거였다. 부정선거규탄의 함성이 전국각지에서 터져 나왔다. 이 과정에서 1960년 4월 11일 부정선거 규탄 데모를 하다가 사망한 김주열 군의 시신이 마산앞바다에서 물위로 떠오르면서 국민적 분노는 불길처럼 솟았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국민들의 구호는 ‘이승만 정권타도라기보다는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것이었다. 조봉암 선생은 사형 당했고 조병옥 박사도 병사하여 마땅한 야당의 대통령 후보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승만 퇴진을 요구하기보다는 우선 부정선거 규탄으로 국민들의 주장은 모아졌다.

 

그러나 데모가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경찰들의 데모진압이 강경해지면서 반정부시위는 변증법적 진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양(量)이 축적되면 질(質)적 변화를 가져온다는 질변율(質變律)이 적용되기 시작했다.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구호가 ‘독재정권 물러나라’로 바뀌기 시작했고 1960년 4월 18일 고려대학생들의 시위에 대한 자유당 깡패들의 테러가 알려지면서부터 드디어 전국 각 대학들은 4월 19일을 기하여 총궐기하게 되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새벽에 닭이 울듯이 전국 대학생들은 너나없이 반정부 시위에 떨쳐나선 것이다.

자유당 정권은 무력으로 시위진압을 시도, 183명의 시위대들의 목숨을 앗아갔고 수 천 명의 학생들에게 부상을 입혔다. 국민들의 분노는 치솟았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계엄군은 데모진압에 나서지 않았고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가진 미군사령관과 당시 주한 미국대사 Walter p. McConaughy는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권고했다. 계엄군은 중립을 표방함으로써 자유당 정권에 대한 충성을 포기했고 이승만 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지철회라는 압력 앞에서 대통령은 하야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이승만 정권을 옹호하다가 자칫 한국 국민들이 반미(反美)로 태도를 바꿀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승만 박사의 하야를 촉구하고 하와이 망명길까지 신속히 마련해주었다.

 

당시 서울대학교는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3년생들이 주동이 되어 데모에 필요한 준비를 서둘렀다. 선언문은 몇몇 친구가 초안을 마련했지만 최종적으로 채택된 것은 정치학과 3학년 이수정(지금은 고인, 문화공보부장관 역임)이 작성한 선언문이었다. 선언문의 요지는 “한국 학생운동이 적색독재를 반대했던 것과 똑같은 논리의 연역에서 백색독재에 항거함을 자부 한다”면서 “부정과 불의에 항거하기 위해 진리의 상아탑을 박차고 거리로 뛰쳐나왔다”고 시위입장을 밝혔다. 4월 25일 “학생의 피에 보답하자”는 피켓을 든 교수단 데모에 이어 이승만의 하야성명이 발표되었다.

 

대통령 하야와 때를 같이하여 서울 시가지는 무규제의 혼란에 휩싸였다. 파출소는 불타고 경찰들은 근무지를 이탈, 모두 도망쳤기 때문에 경찰서들은 텅 빈 공간으로 방기되었다. 이때 학생운동은 두 패로 갈렸다. 학생들이 질서유지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파가 있었는가 하면 혁명의 가장 정상적 질서는 ‘파괴와 혼란과 무질서’이기 때문에 혁명화를 촉진하기 위해서는 제4계급으로서의 건달들이나 좌판상인들이나 껌팔이, 구두닦이들이 앞장서는 파괴활동이 더 지속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필자는 두 주장이 모두 일리는 있지만 당시의 상황에서는 질서유지의 주체가 학생이 되어 파괴를 막아야한다는 견해를 지지했다.

결국 4.19 직후 사태는 질서유지 파들이 장악했고 계엄군도 여기에 협조하였다. 다행이도 북한공산당이 배후에서 주도했다고 인정할만한 공작이나 준비는 전무했던 것 같았다. 이 당시 혁명적 질서를 강조하던 친구들 가운데는 그 후 여러 형태의 친북좌경사건에 휘말리거나 사회활동에서 낙오되어 지금은 생사조차 알 길이 없다.

 

5. 4.19이후의 학생운동의 흐름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면서 우리 사회는 국가의 진로를 놓고 심각한 토론이 사회 각 분야에서 일어났다. 서울대학교의 경우 세 가지의 큰 흐름이 등장했다. 하나는 학생회가 중심이 되어 펼친 새 생활운동이었다. 관용차량의 사용(私用)반대나 양담배 안 피우기 운동, 질서 지키기 운동, 공명선거추진운동 등 우리 사회의 일반적 비리를 척결하자는 것이다. 두 번째로 관심을 끈 움직임은 민족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우면서와 후진성극복을 통한 국가근대화연구 활동이었다. 문리대 사회학과나 서울상대 경제학과 등에서 주도하는 운동이었다.

 

셋째로는 7.29선거이후로 등장한 민족통일 운동이었다. 한국이 겪는 모든 어려움의 근원은 외세가 물고 온 분단이기 때문에 독재정권을 타파한 열정으로 민족의 발전을 저해하는 3.8선을 타파하는 통일운동이 이 시대를 바로 사는 청년운동의 길이라는 주장이 대학운동의 새롭고도 강렬한 흐름으로 등장했다.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운동의 결성이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이 시기에 학생들에게 가장 자극적이었던 뉴스는 우주과학 분야에서 소련이 미국을 앞질러 Sputnik 발사에 성공했고 후르시초프가 유엔에서 미국을 상대로 평화공존을 제의하면서 전쟁하지 않고도 발전경쟁에서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이긴다고 큰 소리를 친 것이다. 여기에 주일본 미국대사인 마이크 맨스필드가 한국통일 모델로 오스트리아 식 중립화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발언한 것도 큰 자극제였다.

 

 4.19 이후 정권을 잡은 민주당은 혁명의 주체세력들인 대학생들이 갈망하는 이상과 꿈에 걸 맞는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던 학생들의 대다수는 자유당 정권이 정권연장에만 급급했을 뿐 국민들에게 필요한 국가발전의 꿈과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이 컸는데 이 점은 민주당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3선 개헌으로 장기집권의 길만 열었을 뿐 장기집권의 대가로서 국민들에게 꿈과 비전을 주지 못했다. 부흥부장관(復興部長官) 송인상(宋仁相)씨 등이 중심이 되어 경제개발계획을 세웠다고는 하지만 이 계획이 정권의 중심 어젠다가 되지 못했고 국민들이 원하는 근대화의 비전으로 발전시키지도 못했다. 인사정책도 집권연장을 위한 친일관료정상배들을 선발, 권력의 주변에 포진시키고 정권안보를 위해 경찰들의 권력만 강화시켰다.

 

제가 볼 때 이승만 대통령은 개헌으로 3선의 길을 열고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당시 81세의 노인 대통령으로서는 경륜 있는 새 정치를 펼치기에는 육체적인 한계가 찾아왔던 것이다. Vilfred pareto는 그의 유명한 ‘권력순환이론’에서 노쇠라는 육체적 몰락은 이념의 고갈을 수반하면서 필연적으로 엘리트 순환을 가져온다고 설파한 바 있다. Pareto의 권력순환이론이 이승만 박사에게 적중한 것이다. 이승만 박사는 집권기간이 늘어난 만큼 거기에 상응하는 대국민 서비스로서 근대화나 경제개발 같은 공공재나 꿈을 제공하지 못했다. 북진통일이나 안보위기강조만으로는 더 이상 국민들의 지지를 창조해 낼 수 없었다. 결국 무상독재(無償獨裁)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맞게 된 것이다. 이승만 정권 붕괴 후 아무런 준비 없이 정권을 장악한 민주당 역시 비록 단명으로 끝났지만 시대정신에 맞는 국민통합의 길을 제시하지 못했다. 4.19의 혁명에 국민들이 걸었던 기대는 그 후 모두 군사정권의 과제로 옮아갔다.

 

대한민국 체제는 북한의 수령정치처럼 우상화를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은 재임 중 자신의 생애나 업적을 정리하여 국민들에게 알리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북한처럼 독립운동의 역사나 건국과정의 어려움을 자료로 편찬하여 알리지도 않았다. 때문에 이승만 박사의 정체(正體)는 젊은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일반국민들에게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알 수도 없었다.

또 하와이로 망명한 후에는 ‘이승만 죽이기’라고 명명할만한 엄청난 모략과 비방이 쏟아짐으로 해서 이승만 박사가 81세 이전(1956년 이전)에 쌓은 기여나 공로는 모두 묻히고 과오만 나열되는 사태가 빚어졌다. 4.19당시 젊은 학생들은 대통령으로서의 이승만 박사는 알지만 그분이 독립운동과 건국을 위해, 한국전쟁과 휴전과 한미방위 동맹을 위해 어떻게 기여했는가를 바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바로 이 무지의 공간을 파고든 것이 친북좌파들이었다. 이승만 박사 때문에 적화통일이 안된 것을 몹시 애통해했던 친북공산주의자들이 나서서 4.19이후의 혼란을 틈타 반 이승만 모략책동을 치밀하게 펼쳤다.

 

6. 이승만 박사에 대한 모략책동

 

가. 소남한단정(小南韓 單政)론 비판

 

4.19직후 서울대민족통일연맹이 결성된 후 필자는 전국민족통일연맹 선전위원장으로서 활약했는데 이 때 한국의 각지에 잠재되어있던 공산 분자들은 제철을 만난 듯 민족통일연맹운동에 날 파리 떼처럼 몰려들었다. 이들 중에는 민청학련사건에 관련되어 사형당한 사람도 끼여 있다. 이들이 맨 먼저 들고 나와 나를 설득한 주제는 이승만의 건국노선을 소남한 단정노선(小南韓單政)이라고 공격한 것이다. 당시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김구(金九) 선생 중심으로 통일되었어야 할 나라가 이승만이 미국과 짜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했기 때문에 통일이 안 되고 한반도에 두 개의 분단국가가 세워졌다는 것이다. 매우 그럴듯하게 들렸다.

 

이 주장이 허구였음을 제가 깨닫는데 반세기가 흘렀다. 4.19혁명 50주년 기념으로 기획된 미래정책연구소의 학술세미나에서 “4.19세대가 본 이승만 박사의 공과 과”를 주제로 발표논문을 준비하면서 몇 가지 놀랄만한 사실을 발견하였다.

첫째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이 북한 땅에 그들이 오래 동안 염원했던 부동항(不凍港)을 마련할 목적으로 미소공동위원회의 결과와 관계없이 그들 점령지인 북한에 위성정권을 세우도록 1945년 9월 20일 북한군 점령사령관 치스차코프에게 스탈린이 지령했다는 사실이었다.

둘째로 우리나라 해방정국에서 민족지도자가운데 미국인 비서와 러시아인 비서를 기용, 정보를 수집 분석한 사람은 이승만 박사뿐이었다는 사실이다. 미국과 소련의 움직임을 전혀 모르면서 한반도에 독립국가 건설을 모색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인데 이승만 대통령만 이 유일하게 미국인으로서는 로버트 올리버(R. Oliver)를, 러시아인으로서는 에밀 구베로(Emile Gouvereau)를 두고 정보를 획득했다는 사실이다. 이 당시 북한에서 단독정부가 세워지고 인민군이 창설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군정당국은 아무 대책 없이 세월을 허송하면서 일제에서 해방된 한국 국민들의 주권회복을 기약 없이 천연시키고 있었다. 이 답답한 현실을 타개하기위해 이승만은 미국으로 건너가 유엔감시하의 자유총선거로 한국민의 주권회복과 적법한 독립정부를 수립할 방도를 마련, 미 국무성에 제시함으로써 유엔방식에 의한 정부수립의 길을 열었다.

 

소련군 점령사령관의 지시로 만들어진 북한 정권은 한마디로 소련의 괴뢰정부, 위성정부였으나 한국은 유엔감시 자유총선거로 국회를 구성하고 정부를 수립한 후 유엔총회로부터 한반도에 유일한 적법정부로 승인받았기 때문에 국가수립의 정통성에 아무런 흠결이 없는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적법 정부의 출현을 소남한 단정으로 비방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 곁들여 특히 놀라운 세 번째 발견은 이승만 박사가 1923년에 벌써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이란 논문을 써서 공산주의를 비판하고 자기가 꿈꾸는 정부는 그가 1904년에 발표한 “독립정신”에서 주장한대로 자유민주주의 정부였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민족지도자가운데 여운형(呂運亨)은 중국대륙에서 공산주의 ABC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번역하는 등 공산주의에 심취한 반면 그 밖의 인사들은 아나키즘에 흐르기도 했고 아니면 이념문제에 대해 문외한이기 일쑤였다.

김구(金九) 선생이 추구한 이념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바 없지만 그분이 이승만 박사보다는 나이가 한 살 아래지만 학문적 배경이 과거(科擧)를 준비하던 유생이었던 점으로 보나 외교투쟁보다는 의혈투쟁(윤봉길 의사나 이봉창 열사가 추구했던 노선)을 주도한 점 등으로 미루어 공산당이나 공산주의에 대해 명확한 개념을 가졌는지는 의문이다. 특히 1948년의 김일성이 주도한 이른바 4김 회담이나 남북협상에서 들어난 김구 선생의 태도는 그분의 대공관이 매우 불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민족이익을 사상이익의 우위에 두고 분단 없는 통일을 추구하기위해 이승만의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반대할 수 있다는 주장도 성립될 수 있지만 당시 북한이 남한의 치안능력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한 인민군이 창설된 것을 보고도 통일만을 추구했다면 공산화통일도 통일로 받아들이겠다는 태도를 가졌다는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나. 부산정치파동과 양민학살문제

 

소남한 단정비판 이외에 이승만이 받는 다른 비판은 부산정치파동과 한강 폭파사건, 양민학살 사건 등이 있다. 그러나 부산정치파동은 6.25전쟁 중에 미국이 자기들 목적에 맞도록 한국전쟁을 끝맺기 위해 미국의 한국전 종전방침에 사사건건 맞서자 임기가 종료되기 직전에 있는 이승만을 대통령 직에서 끌어내기 위해 국회가 대통령을 선출하는 당시 헌법에 착안, 원내다수의석을 가진 한국 민주당을 꼬드기는 공작을 이승만이 미리 알아채고 군대를 동원, 국회를 겁박함으로써 미국의 책동을 저지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킨 사건이다. 이 사건은 어느 면에서 이승만을 비판할 대목이라기보다는 어느 면에서는 평가해야 할 대목이다. 한국통일을 바라는 한국민의 여망에 따라 전쟁정책이 수행되어야한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주장이 옳았기 때문이다.

미국에 놀아난 당시의 한민당(韓民黨)의 열등성, 한국내정에 마구 개입한 미국의 태도는 이승만의 반민주적 행태에 못지않게 비난받아야할 것이다. 결국 이승만의 이러한 대미외교자세가 반공포로석방, 한미방위조약체결로 이어졌던 것이다. 제가 과거 통일원 재임 중 모셨던 고(故)김용식 장관에게 이승만 대통령에 관하여 들은 이야기 한 토막을 여기에 옮기겠다. 이승만 박사는 6.25 동란에 참전,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한국을 지켜 준 미국에 사의를 표하기 위해 휴전 직후 1953년 10월 미국을 방문했다고 한다. 이때 이승만은 도착성명에서 한국에서 목숨을 잃은 미군병사 3만2000명의 희생에 감사한다는 이야기는 한마디 하지 않고 “우리 한국 국민들은 워싱턴의 겁쟁이들 때문에 통일을 상실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 정도로 대미외교에서 국익을 강력히 앞세우는 외교를 펼쳤다는 것이다.

 

이밖에 양민학살 문제나 한강 철도 폭파문제도 비난받아야 할 이유가 되지만 그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결심사항이라기보다는 군사작전상의 필요가 더 컸고 또 개인으로서 자기 이익을 위해 취한 행동이 아님에 비추어 큰 과오로 보지 않겠다.

 

. 친일파 숙정문제

 

끝으로 친일파 청산문제 역시 이승만 박사가 책임져야 할 과오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친일파문제에 대해서는 이승만 박사의 입장이 일반인들의 생각과는 다른 측면이 있었다. 그는 194510월 임시정부요인환국기념만찬 석상에서 해외파와 국내파간에 친일문제를 놓고 열띤 토론이 벌어지자 이승만은 자리에서 일어나 조선국왕이 총 한방 쏘지 않고 나라를 일본에 합병시킴으로써 2천만 조선민중이 친일하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만들었는데 조선국왕에게 물어야할 책임을 그간 국내외에서 일제 때문에 고생하면서 살아온 사람들 끼리 친일이냐 반일이냐를 따지는 것은 옳지 않다면서 지금은 합심하여 나라를 세우는 일에 힘을 모아야 한다고 호소했다는 것이다.(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논리적으로는 옳은 말이지만 국회가 의결한 반민족행위처벌에 관한 법에 따라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는 차원에서 시범적으로라도 악랄한 행동을 한자들에 대한 처벌을 단행해야 했는데 그것을 차일피일 하다가 6.25동란을 당하여 친일파응징은 손도 못 댔고 휴전 후에는 오히려 친일 했던 사람들을 대공기술자들이라고 하여 정부요직에 기용하고 오히려 독립운동가탄압에 앞장섰던 자들이 득세하는 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라. 토지개혁문제

 

남한의 좌익들은 해방 후 북한에서는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토지개혁을 실시했지만 이승만은 지주계급의 이익만을 옹호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1947년 북한에서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을 내세우면서 토지제도를 개혁한다는 정보를 얻은 후 즉시 한국형 농지개혁안을 만들어 토지개혁을 단행, 6.25 전시 하에서도 이를 적극 추진하였다. 북한에서는 잘 알려진대로 토지국유화는 있었어도 농민에게 토지가 분배되는 토지개혁은 없었다. 토지의 소유를 협동적 소유, 전 인민적 소유로 명칭을 바꾸면서 국유화를 했을 뿐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한 일은 없었다.

 

이승만 정부는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원칙으로 하여 소작농체제를 폐지하고 자작농체제를 확립했다. 조선조 500년 이래 양반계급만 재산을 소유하고 학문을 배울 수 있었던 나라를 누구나 공부하고 재산을 소유할 민주주의 시대로 바꾼 것은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가 아닐까.

 

마. 조봉암 선생에 대한 사법살인

 

죽산 조봉암 선생에 대한 사법살인은 이승만 대통령의 과오의 하나로 지적되어야 한다. 죽산 조봉암 선생은 자기 스스로 독립운동기에 택했던 공산혁명노선을 청산하고 대한민국의 정부수립을 위한 제헌국회의원선거에 참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김구, 김규식 선생 등 한국독립당이 참여를 거부한 제헌의회선거에도 참여하고 농지개혁을 추진하는 이승만 정부의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입각하여 농지개혁을 시행하는데도 기여하였다.

그러나 당시 국내정계는 이승만 대통령이후 가장 유망한 대통령 후보로 여론의 지지가 있는 그를 제거해야 한국보수 세력으로서의 자유당과 민주당이 계속 집권할 수 있다는 계산 하에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사형을 선고했다. 설사 사법당국이 그런 결정을 내렸더라도 형의 집행을 면제할 권한을 가진 대통령이 형의 집행만은 허가해서는 안 될 터인데 사형집행을 허가했던 것이다.

 

7. 끝마치면서

 

이승만 박사는 그의 생애를 조국의 독립과 발전에 헌신한 위대한 선각자요 민족의 큰 지도자였다. 한국처럼 좋은 지도자 복이 없는 나라에서 하늘이 준 큰 인물이었다. 그분으로 인하여 오늘의 대한민국이 탄생했고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해방당시 우리나라는 민주정치가 뿌리내릴 여건이 거의 갖춰지지 않은 나라였다. 전체인구의 80%가 문맹이었다. GDP의 통계가 잡히지 않을 만큼 빈곤한 나라로서 민주주의가 발전할 경제적 기초가 원천적으로 결여된 나라였다. 여기에 분단국가로서 건국초기부터 남북한 간에는 심각한 사상전이 이어졌고 급기야는 동족상잔의 비극마저 겪어야 했다.

 

그러나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황 하에서도 이승만은 문맹퇴치에 박차를 가했고 열악한 재정형편 속에서도 배워야 산다는 일념 하에 국민의무교육제를 밀어붙였고 지방자치를 실시함으로 해서 대한민국국민들을 국민으로서 정체성(正體性)을 갖도록 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미군이 주둔하는 밀착방어체제를 갖춤으로써 국가의 안보기반도 공고히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인생 70세에 귀국, 나라를 세우고 전쟁에서 국가를 방위하고 대한민국을 국가다운 국가로 기틀을 세우는데 12년의 세월을 바쳤다. 그는 3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던 1956년에 이미 81세의 고령이었다. 육체적으로 더 이상 정상적인 정무와 국사를 감당할 수 없는 시점에 왔던 것이다. 그는 마땅한 후계자를 찾지 못한 가운데 장기집권을 꾀하다가 수많은 젊은 학생들이 목숨을 잃는 비극을 보면서 혁명의 객체가 되는 큰 과오를 범했다.

 

 중국의 모택동은 이승만 대통령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난 과오를 범했다. 그는 이른바 문화대혁명이라는 10년 대란을 일으켜 전 중국을 폐허로 만들고 수천만의 동포가 굶어죽거나 테러로 죽음을 당하게 하는 엄청난 과오를 범했다. 양과 질적으로는 이승만과 비교도 안될 만큼 크고 무서운 과오를 범했다. 그러나 오늘날 모택동은 중국베이징의 천안문위에 그의 초상이 항상 걸려있고 중국공산당 만세와 함께 모택동 만세가 대형 현수막으로 걸려있다.

 

중국공산당은 1981년 6월 역사에 관한 중요결의를 통해 모택동의 공(功)은 7이요 과(過)는 3으로 결정했다. 중국 현대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모택동은 과오가 7, 공을 3정도로 봐주어도 너무 후한 평가일 것이다. 그러나 등소평(鄧小平)은 중국공산당이 일당으로서 계속 정권을 장악할 명분을 쌓기 위해 모택동의 공과 과를 7대 3으로 결정하였다.

문화대혁명의 책임을 물어 공산당이 모택동을 단죄한다면 중국공산당은 스스로 더 이상 집권할 명분을 가질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모택동을 의도적으로 살려야 중국공산당이 존속할 수 있다는 것을 등소평은 잘 알았기 때문이다. 이승만 박사도 그 분의 삶을 총체적으로 평가한다면 공을 7로, 과를 3으로 점수를 매겨도 결코 과장된 평가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 박사에게는 그를 죽이기에 나설 사람들은 많았어도 살리기에 나설 사람은 정치세력가운데 없었다. 이승만을 지지했던 자유당은 해체되었고 부정선거 원흉으로 처벌받거나 부정축재자로 몰려 단죄되었기 때문이다. 안창호 선생이나 김구 선생은 해방이후 냉전의 와중에서 건국이라는 어렵고 힘들고 중차대한 과업에 맞닥뜨려 투쟁한 일이 없기 때문에 찬사만 있고 욕이나 비난은 적다. 좋고 나쁨이나 공과 과의 평가는 일한 사람에게만 귀속되는 것 같다.

 

하와이에서 병들어 최후를 기다리면서 이승만은 모국에서 삶을 마치기 위해 귀국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청했지만 국민여론이 두려워 귀국허가가 거절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승만 박사의 귀국을 주선하고 필요한 경비도 지원했다는 글이 최근 김종필 회고록에 나와 있지만 그때는 이미 환국이 의미가 없을 만큼 건강이 악화된 시점이었다.

그러나 그분은 아직도 국민들의 마음속에 존경받는 존재로 남아있었다. 필자의 체험담 하나를 이 기회에 소개한다. 1965년 7월 21일경 이승만 박사의 시신이 서울로 돌아와 국립묘지에 가족장으로 묻힐 때 전국각지에서 그분 시신의 환국을 지켜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상경했고 도로연변에는 시민들이 도열, 애도하고 있었다. 이때 4.19에 앞장섰던 저와 더불어 제 친구들이 모여 하와이로 망명한 이승만 유해의 귀국을 반대한다는 시위를 벌였지만 이때 저희들에게 동조하거나 호응하는 시민들은 거의 없었고 오히려 우리들에게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결국 이곳, 저곳을 뛰어다니다가 도로교통법위반으로 걸려 남대문 경찰서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훈방당한 일이 있었다.

 

일반시민들은 이승만 대통령은 훌륭한데 그분이 인의 장막에 싸여 민심을 몰랐다거나 자유당 강경파 관료세력들 때문에 말년이 잘못되었다고 평가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다행히 1980년대의 시작과 더불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작업이 학계와 언론계에서 시도되고 그분의 건국과 관련된 업적이 제대로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많은 모략이 허위임이 밝혀지고 있고 특히 한미방위조약체결로 휴전 60년 동안 부분적인 남북충돌은 있었지만 동족상잔의 큰 전쟁 없이 경제발전을 이룩할 여건을 만든 이승만 박사의 기여가 새롭게 조명된 것도 잘 된 일이다. 현재까지 나타난 업적평가의 실적은 미약하다. 그러나 초대대통령으로서 이승만 박사의 공로를 그 적정형태에서 평가하고 국민들이 기억하도록 해주는 일은 민족의 긴 미래를 내다볼 때 서둘러야 할 일이다. 우리 후대들이 자랑스럽게 기억하고 회고할 민족의 큰 지도자의 반열에 이승만 대통령을 올리는 작업이 오늘 이 포럼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강사 : 이영일(李榮一)

 

주요학력 및 경력 학 력

 

*광주·서중·일고(1955-58) 및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정치학과 졸업(1958-64)

*동국대학교행정대학원 수료(1968)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발전정책연구과정 1기 수료(1972)

*日本 츠쿠바(筑波)대학 외국인연구원(1988-90)

*중국 베이징 대학 국제관계학원 동북아전략연구중심 특약연구원(2009-2011)

*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드 외국어 대학 명예정치학박사(2003)

*광주 호남대학교 명예법학박사(2009)

 

경 력

 

1.정치경력

 

*제11,12,15대국회의원(통일 외교 통상위원)

*제12대 국회 국회문교공보위원장(1987-89)

 

2. 頂上外交참여

*한미정상회담(전두환 대통령-레이건대통령)공식수행(1985)

*유럽4개국(영국, 프랑스, 독일 벨기에)정상회담공식수행(1986)

*한중정상회담(金大中대통령-장쩌민주석) 공식수행(1998)

*한중정상회담(박근혜대통령-시진핑 주석)비공식수행(2013)

 

3.국토통일원 근무(1970-1980)

*통일연수원장(1급)

*교육홍보실장(1급)

*정치외교정책담당관(2급)

 

4. 사회활동경력

 

*한민족복지재단 공동대표로 6회 북한방문 (2001-2006)

*한중문화협회 총재(1998-2014 )

*한중정치외교포럼회장(2014~ )

 

5. 상훈 및 주요저서

*홍조근정훈장 수상(1979)

*벨기에정부 대십자수교훈장(1986)

*분단시대의 통일문제(전예원 1981)

*햇볕정책의 종언( 전예원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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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의 해산은 통일준비의 거보를 내딛은 것이다.

 

이 영 일 한중정치외교포럼 회장

 

1. 헌법재판소가 통일진보당에 대한 정부의 해산청구를 헌법재판관중 9인중 8인의 찬성으로 받아들였다. 1인의 반대가 있었으나 그것도 통진당의 존속에 대한 지지라기보다는 정당의 해산방법으로 법원의 판결보다는 유권자의 투표에 의한 청산이 더 바람직하다는 의사표현이었기 때문에 통진당 해산은 헌법재판관들의 일치된 판단으로 보아도 틀림없다.

 

이번 헌재(憲裁)의 통진당 해산판결은 헌재가 그간 다루어온 수많은 헌법불합치판단이나 법률의 위헌판결과는 그 의의가 사뭇 다르다. 대한민국헌법질서-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를 부정하고 파괴하려는 정치세력의 존재를 거부함으로써 한국 통일을 위한 국론통일의 확실한 기준을 마련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들은 그간 4.19혁명 이래 줄기차게 진행되어온 민주화의 발전과정을 거치면서 민주화의 정치공간을 뚫고 들어오는 친북 적색분자들의 거점 확보 공작을 좌시하거나 덜 주목했다. 때로는 친북세력들의 공작활동에 대한 규제를 용공조작에 의한 민주화의 억압으로 간주하는 정치선동에 동조하기도 했다.

특히 좌익세력들의 준동을 민주화의 일환으로 눈감아주는 김대중, 노무현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사회에는 친북좌익세력들이 부지불식간에 존립거점을 확대해 나가면서 지방자치단체 선거를 통해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생긴 정치적 영향력을 무기로 급기야는 야권통합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반보수(反保守)통일전선의 고리에 전통야당을 끌어넣고 이를 기반으로 통일진보당은 국회에 의석까지 확보, 원내교두보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통일진보당의 원내의석확보는 북한 노동당이 1948년 국회프락치 사건 실패 후 반세기를 넘는 오랜 노력 끝에 혁명투입공작을 통해 얻은 나름대로의 값진 성과였을 것이다.

 

 

2. 우리는 1970년 조선노동당 제5차당대회가 대내적으로는 4대군사노선(전인민의 무장화(武裝化), 전 군의 간부화, 진 지역의 요새화, 군장비의 현대화)의 완성을 호언하면서 한국에 대해서는 인민민주의 혁명을 통한 남조선 해방을 공약했던 역사를 어느 순간 망각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나 북한은 그들 주도의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남한에서의 인민민주의 혁명을 성취하기 위한 혁명투입공작을 꾸준히 추진해왔다. 김대중 정권 성립과 동시에 대한민국 교육계에 조직거점을 마련, 이를 합법화하는데 성공했고 노동계 내부에 투입된 혁명역량의 조직공작에도 성공, 합법적 고지를 점령했다. 이어 노무현정부의 등장과 때를 같이하여 문화, 종교계에 까지 인민민주주의 혁명에 동조할 세력을 침투, 확보하였다.

 

그러나 교육계, 문화계, 종교계, 노동계에 투입된 조직역량은 반정부 통일전선의 우군(友軍)이나 동맹군은 될 수 있어도 한국사회전체를 인민민주의 혁명으로 몰아갈 통일전선의 정치적 지도부는 될 수 없었다. 통일진보당의 출현과 원내의석확보는 바로 이러한 정치투쟁의 일선지도부의 확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시 야당인 민주당과의 통합정치협상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통진당의 원내교두보 확보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민주당(당시 당대표 한명숙)내에 존재하는 동조세력 내지 연대세력의 후원으로 야권통합에 성공, 통진당은 원내진출의 길을 뚫었다. 이들은 나름대로 혁명정세의 성숙을 기다리면서 내외정세변동기를 틈타 혁명투쟁의 봉화를 들어 올리려다가 이석기 일당의 일망타진으로 퇴조기를 맞았고 이번 헌재의 해산판결로 인민민주주의혁명을 위한 정치투쟁의 남한 내 정치거점은 일단 붕괴되었다.

 

 

3. 박근혜 대통령은 작금의 정세를 통일의 준비기로 보고 통일이야말로 민족웅비의 대박이 트일 것이라고 말하면서 통일 준비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통일준비의 대전제는 ‘어떤 통일인가’에 대한 국민적 합의, 즉 통일에 대한 국론의 통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통진당처럼 친북통일을 내밀히 추진하는 혁명정당이 민주헌법이라는 보호막을 쓰고 원내정당이라는 특권을 누리면서 대한민국의 강점을 약화시키고 약점을 극대화하는 선전 선동을 펼쳐나간다면 조국통일을 위한 국론의 통일은 기할 수 없다.

또 통진당 의원들의 비호 하에 그들의 동맹세력인 교육계, 종교계, 문화계, 언론계가 국론분열의 추동체가 된다면 그 속에서도 국론통일을 기하기 힘들어진다. 특히 통합진보당은 현 정부를 독재정권이라고 격렬히 비난하면서도 유엔총회를 비롯하여 전 세계가 규탄하는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또 북한이 공화(共和)정체가 아닌 3대에 걸친 세습정권으로 변해도 여기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비판도 없었다.

또 전 세계 진보운동의 핵심가치인 반전반핵평화(反戰反核平和)를 외면하고 핵과 미사일 전력을 강화, 무력통일을 획책하는 북한에 대한 비판은커녕 오히려 북 핵과 미사일개발의 타당성을 내심으로 옹호했다. 여기에 곁들여 대한민국을 태어나서는 안 될 나라라거나 기회주의가 득세한 나라라고 폄하해왔다.

 

어찌 이뿐인가. 유엔감시 하에 실시된 자유총선거를 통해 탄생한 정부의 정통성은 부정하고 스탈린의 지령에 의하여 소련 군정사령관이 수립한 정권과 그가 지명한 사람이 정권을 잡은 북한을 마치 합법정부인양 왜곡하는 사람들이 누구였던가. 이러한 세력 들을 방치해두고서는 통일을 위한 국론통일을 기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통진당의 영향권 하에서 국공립학교 교사들이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그릇된 역사관을 주입하는 행위를 방치해도 통일을 위한 국론통일은 어려워진다. 특히 문화, 예술, 언론분야에서도 북한이 투입시킨 혁명가들이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라는 가면을 쓰고 국론분열활동을 계속하는 한 국론통일을 기할 수 없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번에 사법기관으로서의 헌재가 내린 통진당 해산결정이 정치차원에서의 국론통일 저해요인을 삼제(芟除)하는 것이라면 문화, 종교, 언론, 교육, 노동계에 뿌리내린 친북동조세력을 거세하는 일은 앞으로 정부와 국민들에게 맡겨진 몫이다.

 

헌재의 이번 판결은 정부와 국민들이 친북세력거세를 위한 투쟁의 훌륭한 지침이 될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는 국민의 자유를 최대로 보장하지만 자유민주주의를 이용해서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세력에게는 결코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 독일은 나치나 공산전체주의를 조금치라도 찬양, 고무, 동조하는 행위가 발생하면 이를 즉시 가장 단호하게 처벌했다. 이른바 방어적(防禦的) 민주주의를 철저히 실천한 것이다. 이로써 오늘날 독일은 통일을 달성했다.

 

 

4. 우리는 앞으로 통진당 해산을 계기로 세 가지 과업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 하나는 통일준비에 박차를 가하는 것이다. 통일준비에는 민간과 정부의 공동노력이 필요하다. 정부만의 통일준비가 아니라 민간자율의 통일준비운동도 추진되어야 한다. 우리 앞에 나서는 가장 긴급한 통일준비의 과제는 통일에 대한 국론의 통일이다. 주변정세변화에 대한 국민적 합의형성, 통일역량에 대한 점검과 조정, 통일전망에 대한 가치관의 공유가 필요하다. 정부의 통일준비 위원회에서는 통일 미래상을 준비한다고 한다. 국론통일의 준거를 마련하겠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기대해볼만하다. 그러나 사회 각 분야에 투입된 북한의 공작거점을 색출하고 제압하는 데는 국민적 참여가 필수적이다. 이를 고무하는 노력도 아울러 강화되어야 한다.

 

둘째로는 탈북민들에 대한 우리의 관심도 제고되어야 한다. 목숨을 걸고 북한을 뛰쳐나온 탈북동포들이 너나없이 한국사회에 정착, 성공하도록 지원하여 탈북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음을 실감토록 해야 한다. 이 일은 정부와 국민이 합심하여 감당해야 할 일이다. 국론통일과 탈북민의 정착지원활동은 정부만의 과업이 아니다. 민간이 정부와 협력하여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이것이 민간통일준비위원회의 자율적 구성이 필요한 이유다. 통일의 주체는 엄격히 말하면 분단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국민이다. 국민들이 배제된 정부만이 주체인 통일은 없다. 국내외에 거주하는 우리 민족 모두가 주체가 되고 부모 형제와의 재결합의 날을 학수고대하는 탈북민들이야말로 통일달성의 실존적(實存的) 주체들이다.

 

셋째로는 국민 속에 잠재되어 있는 진보가치에 대한 희구가 건전한 진보세력의 대두를 통해 실현되어야 한다. 세습이 아닌 공화정체를 지지하고 반전반핵평화의 기치를 분명히 하면서 경제민주화를 통해 빈부의 격차를 줄이고 정의와 평등의 가치를 실현할 합리적 진보세력이 출현해야 한다. 독일과 영국 등지에서 성공한 사회민주주의나 민주사회주의 세력의 등장은 어느 면에서는 오늘의 한국사회가 당면한 시대적 요청 같기도 하다. 이번 헌법재판소의 통진당 해산결정은 분명코 통일을 향한 우리의 국론통일과정에서 거보(巨步)를 내딛은 결단이며 동시에 반종북(反從北)건전 진보세력이 등장할 새로운 정치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이제 우리 국민 모두는 뜻과 지혜를 모아 통일을 위한 국민적 합의기반을 넓히는 한편 한국정치도 개혁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세력간의 건전한 경쟁구도로 발전, 재편할 전기를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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