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北 양자협상의
함정 ...... 헨리 키신저 조선일보 3월 12일자에서 인용 (2003년 3월 16일)
이라크와의 전쟁 준비에 바쁜 미국은 지금 한반도에서 더 심각하고 점증하는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 요원들을 추방한 뒤 영변 핵시설을 재가동하면서 양자협상을 미국에 요구하고 있다.
북한이 핵활동 동결 대가로 요구하고 있는 불가침조약은 북한으로 하여금 한국과 일본 주둔 미군이 북한을 위협하고 있다는 구실로 다시
핵무기 개발 협박에 나서도록 만들 것이다. 그것은 속임수다.
미·북 협상은 두 가지 함정을 내포하고 있다. 남한
내부의 민족주의적 감정의 증대에 비춰 볼 때 양자협상의 교착은 곧 미국의 탓으로 치부될 것이고 한·미
관계는 더 악화될 것이다. 북한은 미국과의 양자회담을 통해 스스로 한민족 이익의 대변자로 나서면서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로 몰아갈 수 있다. 또 북한은 양자 회담을 미국에 촉구함으로써 핵 보유국의 지위를 정당화하려
할 것이다. 또 어떠한 (핵확산 금지) 합의의 이행에 대해서도 미국만 책임을 지는 상황이 올 것이다.
북한이 핵무기와 미사일 발사능력을 갖게 된다면 세계적으로 핵확산의 빗장이 풀리게 되며, 동북아시아에서도
세력 균형에 중대한 도전이 생길 것이다. 그러므로 정책의 목표는 한반도의 비핵화여야 한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한국과 함께 중국·일본·러시아까지 가담시키는 것이 지상명령이다. 중국과 일본은 북한의 핵
보유와 핵 공갈 능력에 의해 사활적인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일본은 인접 국가에 의해 핵무기가 생산되고
그것이 확산될 경우 스스로 핵보유에 나서거나 군비를 크게 확장하거나, 둘 다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영향을 받을 나라는 한국이다. 부시 미 행정부는 북한의 전략을 거칠게 표현함으로써
한국 정부와 틈새를 만들었다. 한국의 새 정부는 그 차이를 더욱 분명히 하면서 미국이 북한에 대해 군사적
압력을 시사하는 것조차 배격한다. 그러나 그 같은 위협 없이는 북한을 이성적으로 행동하게 만들기 어렵다. (양자든 다자든) 협상이 벌어지면 북한의 요구 목록을 의제로 삼게
돼 있고, 한국도 그 일부분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한국의 좌파 그룹은 미국을 긴장의 근원으로 보며, 평화주의자들은 북한의 핵 계획을 미국의
위협에 대한 대응이라고 정당화하고, 민족주의자들은 북한의 핵 계획을 민족 자존심의 재확인으로 여긴다. 한국의 새 정부는 스스로 미국과 북한의 중재자라고 생각하고 미국에 북핵문제를 풀기 위해 평화적으로 협상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북한에 대한 압력 배격과 어우러져 북한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
하지만 한국과 미국의 목표가 서로 조화될 수 없는 것이라면, 주한미군은 북한의 핵개발 계획과
한국의 국내 정치에 볼모가 되는 셈이며, 그런 상황은 한·미
간의 건실한 안보관계 및 장기적으로 미군의 한반도 주둔과 양립할 수 없게 된다. 북한은 남한에 엄청난
피해를 입힐 능력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자신의 멸망을 대가로 할 뿐이다. 한반도에서는 냉전적 대치 상황이 재현되고 있다. 양쪽 다 궁극적인
무력 사용을 주저할 것이다.
변화를 거부하면서 핵카드 장난을 하는 북한에 맞서기 위해서는 한반도 안보 상황을 전체적으로 다룰 수 있는 폭넓은 다자적 접근이 필요하다. 하나의 방도는 한반도의 안보에 관해 남·북한과 중국·러시아·일본·미국 등이
참여하는 회의체다. 중국과 일본은 북한의 붕괴를 바라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참여국들이 북한에 대한 무력 사용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북한이 추구하는 불가침 보장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회의는 북한이 세계 경제 속에 통합되는 틀을 마련해줄 수도 있다. 통일문제는 남·북한 협상에 맡길 수 있다. 하지만 결코 북한에 핵무기 보유를 승인해서는
안 된다.
시간이 핵심이다. 머지않아 북한의 플루토늄 생산량은 국제사회가 군사적 수단이 아니고서는
통제할 수 없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 삼국시대 역사의 중요부분인 고구려 문화유산을 중국이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시키면서 적극적으로 펼치고 있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무엇이며 중국이 이를 지금 추진하는 까닭은, 그 진의는 무엇일까. 국내
역사학자들은 우리의 역사주권에 대한 도전이라고 항의한다. 그러나 중국의 여러 지역을 여행하면서 만나본
중국인사들과의 대화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대부분이 고구려 사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고 관심조차 제대로 갖고 있지 않았다. 요녕성(遼寧省) 환인현(桓仁縣)에는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이 나라를 세운 도읍지 우뉘산성(五女山城)이 있어 지난 7월초 이곳을 다녀왔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도 이 지역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어 관광수입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고는 기뻐하면서도 고구려가
그들에게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필자는 여기서 중국정부가 동북공정을 일으킨 진의는 아무리
보아도 우리 국사학계가 말하는 역사문제를 놓고 학술적으로 다투자는데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인구 14억을 헤아리는 대국이 근대적인 의미의 국경개념도, 국가개념도 정착되지
않았던 1500년 전의 역사이야기를 오랜 준비와 공작 끝에 지금 들고 나올 때는 현실적으로 겨냥하는
분명한 목표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즈음 일각에서는 대한제국의 동의 없이 일본과 청나라가 체결한
간도협약(1909년)의 문제점을 앞으로 한국이 들고 나올
것을 우려해서 이를 사전에 봉쇄하자는데 동북공정의 진의가 있다고 한다. 이 주장에도 상당한 타당성은
있으나 문제제기의 시점과 상황으로 보아 그것이 동북공정을 추진하는 현실적 진의같지는 않다. 혹자는 한반도가
통일되거나 되려고 할 때 200만 조선족이 친한노선(親韓路線)으로 전향할 가능성을 막자는데 진의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정부의 소수민족을 다루는 세련된 정책에 비추어 큰 설득력이 없다. 현재 필자가 느끼는 바로는 중국의 동북공정문제에 팔을 걷어 부치고 애국적 목청을 올려야 할 사람들은 역사학자들이기보다는 정치학자, 그것도 동북아 안보정세와 외교사에 달통한 국제정치학자들이어야 할 것 같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미국은 북핵문제가 심각해지자 중국에 대만카드를 꺼내 보이면서 북한의 핵개발을 중국이
나서서 포기시키라고 압력을 가해 왔고 이 압력과 함께 중국 스스로도 한반도의 비핵화를 원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북핵문제를 풀기위한 베이징 6자회담을 개최하고 있다. 중국은 북한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조건에서의
한반도 비핵화를 주장하고 있지만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은 결코 용이하지 않다. 북한이 체제유지의
마지막 카드로 붙들고 있는 것이 핵개발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협상이 깨지고 북핵문제에 대한 미국의 군사적
해결이 시도될 수도 있고 천슈이벤의 대만 정권의 독립시도가 화근이 되어 미국과 중국간의 전략적 동반자관계가 와해되고 양자간에 군사충돌을 일으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 작금의 동북아 정세이다. 그간 중국은 오랫동안 북한을 지원해왔고 중국지도층은
한국에 대해서는 ‘바다를 사이에 둔 이웃’으로 표현하면서도
북한을 방문할 때는 언제나 양국관계를 순치관계(脣齒關係)로 설명하고 산수상련(山水相連)의 이웃으로 표현한다. 한편 북한은 역사적으로
고구려의 구지(舊址)를
영토로 하고 있으며 많은 돈을 들여 동명성왕 능을 건립하는 등 문화역사공작까지를 추진하면서 북한이 한반도에서 고구려를 승계한 정통정권임을 주장해
왔다. 때문에 중국은 차제에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라고 강변하면서 국제적 양해와 관심을 쌓아두면 유사시
중국이 북한지역에 개입할 명분을 만들 수 있다고 계산하는 것 같다. 북한이 돌연 붕괴하거나 안보위기에
처하여 와해의 위기에 직면하면 순치관계에 있는 중국에도 안보위기가 필지(必至)할 것이기 때문에 이런 사태에 대비해서 중국이 북한지역에 군사적으로 개입할 명분을
사전에 조성해 두자는 중국식 안보정책이 동북공정을 일으킨 진의로 보아야 할 것같다. 그런데 북한은 그간
고구려계승정권임을 크게 외쳐왔으면서도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서는 의외로 조용하고 담담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중국정부도
한국에 대해서는 우다웨이(武大偉)외교부 부부장, 자칭린(賈慶林)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을 파견, 한국
측 의견을 듣고 자국의 입장도 설명하는 외교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중국과 북한 간에는 동북공정문제에
대한 사전양해가 이루어졌는지 놀랍게도 이렇다할 외교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국내에서는 동북공정을 곧바로
고구려사 왜곡으로만 보는 경향이 있는데 동북공정의 중국어 표현은 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이다. 문맥대로라면 중국 동북 변강의 역사와 현 상황을 체계적으로 연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적 시각에서 보면 중국이 동북변경지방의 역사자료를 일방적으로 추출, 이용하여 안보위기시에 군사력을
발동할 대상과 명분을 만들어 놓기 위한 공작차원의 연구프로젝트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이 점에서 동북공정문제는
역사문제로 보다는 외교안보문제로 보아야 더 현실적일 것 같다.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노무현 대통령이 부르짖고 이를 여당이 수용함으로써 나라 안팎이 온통 이념적 내전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의 존폐문제는 이를 어떤 선입견이나 감정에서 다룰 문제가 결코 아니다. 냉철한 이성과 국가 공리적 관점에서 21세기 한국의 앞날을 투시하면서
다루어야 할 중요한 문제다.
국가보안법 폐지문제가 심각한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다음 두 가지 국면에서 우리 사회의 태도가 갈등을 빚기 때문이다. 우선 첫째 갈등은 북한정권의 지위를 어떻게 규정하는가의 문제에서 파생된다. 현행
국가보안법은 북한을 정부를 참칭하는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다.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를 영토로 한다는
헌법정신에 비추어 현 국가보안법은 합헌일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헌법규범과 헌법의 현실 간에는 현재
엄청난 괴리가 발생했다. 우선 북한이 주권국가에게만 가입자격을 부여하는 국제연합에 가입, 정식회원국의 지위를 얻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남북한간에는 그간
통치권이론에 의하건 정치현실의 필요성에 의하건 간에 7.4공동성명으로부터 시작하여 남북한 기본합의서, 남북정상회담과 6.15선언에 이르기 까지 대화와 협상의 파트너관계가
유지되고 있다. 정부를 참칭하는 반국가단체라는 법규를 현재대로 두고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새로운
현실이 출현한 것이다. 현행 국가보안법은 북한의 유엔가입이 이루어지기 전에, 남북관계가 극한적 대결구조에서 협력과 교류를 생산하는 대화관계로 전환되기 전에 성립했던 법이다. 북한을 괴뢰로 보고 우리의 통일을 “백두산영봉에 태극기 날리는 상태의
회복”으로 생각하던 시기에 오늘의 국가보안법이 제정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 국가보안법은 상황논리에서 보면 이미 그 시효가 다 지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만 단정할 수 없는 또 다른 현실이 있음에도 주목해야 한다. 한반도의 휴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전환되지 않고 있음으로 해서 남북한간에는 법률상 전쟁상태가 종결되지 않고 적대관계가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휴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전환되지 않는 한 남북한 간에는 정치적 수준에서 어떤 협력이 이루어지고 대화와 교섭이
전개된다고 하더라도 우리 헌법이 보는 북한의 지위는 적대국가(단체라고 표현하기가 어색하다면)이다. 특히 한반도의 휴전협정은 남북한 당사자간의 휴전협정이 아니고 1953년 성립된 이래 제네바 정치회담을 거쳐 국제화된 휴전협정이다. 정치적
수준의 새로운 협정중의 규정에 의하여 대체될 때까지(휴전협정 5조60항)는 계속 효력을 지니는 협정이다. 그리고 이 휴전체제는 한국이 미국과 체결한 한미상호방위조약과 북한이 중국, 러시아와
체결한 상호원조 및 우호협력조약체제에 의해서 지탱되어 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국가보안법은
아직도 그 명맥을 유지할 명분이 살아있다고 말 할 수 있다.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은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갈등의 한 국면이 있다.
다른 하나는 이른바 이적행위 또는 매스컴 적 표현에서의 친북행위를 어떻게 단속하고 규제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파생되는 갈등이다. 국가보안법이 하루아침에 폐지될 경우 우리 사회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친북이적활동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지구 최빈국(最貧國)으로
전락한 북한체제를 동경하거나 그 체제에 현혹될 국민들이 그리 많지는 않겠지만 도처에 김정일의 주의, 주장, 김일성의 소위 항일 유격대 활동을 지지 찬양하고 반미운동을 펼치는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 북한의 통일방안을 지지하는 활동이 가두화(街頭化), 구호화 하고 인터넷 게시판마다에 구호가 뜨고 주체사상 연구회의 간판이 이곳저곳에 학원처럼
난무하는 사태도 야기될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50년간
반공일변도의 정치사상교육을 받고 살아온 국민들은 일시에 시국불안에 휩싸이게 되고 한국의 장래에 대해 희망보다는 불안한 우려를 갖게 되기 십상이다.
이러한 활동은 북한의 집요한 대남공작의 결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또 이에 동조하는 세력들과
친북 인터넷사이트들이 활개를 펴고 분위기를 띄워 가면 한국은 졸지에 그 정체성의 위기에 함몰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정부가 이런 상황을 규제하거나 단속할 안전장치를 제도적으로 갖지 못하고 이런 분위기를 눈감아 주는 입장을 취한다면 국민들의 불안은
엄청나게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더욱이 집권층이 불안 해 하는 국민들의 입장보다는 친북지지활동을 남북긴장완화를
위한 바람직한 선택이며 6.15선언의 구현 내지 의미 있는 국민의식 개혁 작업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지지하고
나선다면 사태는 더욱 심각해 질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이민사태가 속출할 수 있고 체제에 대한 신념과
자신감이 와해될 수도 있다. 휴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전환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실상의 적국인 북한은 남한
내에 엄청난 동조세력을 얻게 되고 6.25전쟁당시 북한점령지역에서 북한 측에 섰던 이른바 부역자들과
그 가족, 그 후예들은 제 세상 만난 듯이 설쳐댈 수도 있고 조직화될 수도 있다. 자칫 대한민국의 망국 분위기가 조성될 수도 있다. 야당은 이런 사태를
예방할 안전장치를 만들지 않고 국가보안법만 폐지시키자고 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망국의 우를 범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물론 오늘의 북한은 남한 정세를 자기들 뜻대로 바꿀만한 힘이 없다. 북한이 한반도 적화를
위한 전략이론으로 오래 동안 말해온 이른바 3대혁명역량의 어느 것도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예컨대 북한의 남조선해방노선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원역량(북한식 표현으로는
국제혁명지원역량)도 북한이 지구 최빈국이 되어 유엔에 식량지원을 호소한 순간부터 이미 기대할 수 없는
역량이 되었다. 북한자체의 사회주의 혁명역량도 수많은 북한 사람들이 탈북하는 사태 속에서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된지 오래다. 북한이 주도하는 남조선 해방을 바라는 이른바 남조선혁명역량은 일부 친북 사이트나, 진보를 앞세운 정치인들의 통일 지향적 언동 속에 아직도 잔존하는 것같이 보이나 그러한 주장이 국민들의 호응을
받을 가능성은 결코 높지 않다. 북한체제가 남한사람들에게 더 이상 매력 있는 체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북한이 남한을 제압하거나 남한우위에 설 가능성은 없다. 북한이
핵개발에 체제생존을 의지하는 바로 그 이유가 이미 남조선해방이라는 그들의 정치목표가 허구임을 입증하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보안법 폐지문제는 폐지이후의 상황을 어느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큰 차이가 난다. 전자의
입장에서는 국가보안법을 온존시켜야 하고 후자의 입장에서는 국가보안법의 시효는 이미 지난 것이 된다. 이러한
상황설정도 갈등의 또 다른 국면이 된다.
이제 우리가 선택해야 할 대안은 국가보안법을 대체할 새로운 법을 제정하고 그 법의 부칙 규정에 의하여 국가보안법을 폐기하는 것이다. 우선 새로 제정될 법에서는 북한을 정부를 참칭하는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는 조항을 없애야 한다. 그러나 휴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바뀌지 않는 현재의 상황 하에서는 북한이 법률상 대한민국의 적국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반 국가단체 아닌 적성국가로 정의하자는 것이다.
동시에 적성 국가를 지지, 찬양, 고무, 동조하는 이적행위에 대해서는 그 목적과 취지를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한 후 구체적 예시를 통하여 단호히 단속하고
규제하는 입법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 법의 명칭은 대한민국안전보장법이나 민주질서수호법의 어느 것으로
해도 좋다. 다만 법의 시효를 명시하여야 한다. 즉 한반도에서
전쟁상태가 법적으로 종결될 때까지로 정하는 한시법(限時法)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이러한 조치를 통하여
국내의 이념적 내전상태에 하루빨리 종지부를 찍고 국가발전, 경제건설을 위한 국민통합과 국민의 일체감조성을
위해 총력을 경주해야 한다.
중국은 아직도 한국투자가들에게 기회의 땅인가. 무역업계의 전망으로는 금년중에 한국제조업의 47%가 중국으로 공장이전을 추진한다고 한다. 노동력 조달이 용이하고
노임과 토지구입가격이 상대적으로 낮으며 생산성이 비교적 높다는 것이 중국을 선호하는 우리 기업들의 입장이다. 그러나
중국에 투자를 결심하려면 나날이 상황과 정책이 바뀌고 있는 중국실정을 보다 정확히 알아야 한다. 중국의
실정을 정확히 추적하고 있지않으면 자칫 투자목표를 달성치 못하고 해외투자의 시리(時利)를 놓칠 수도 있다. 필자는 최근 중국여행에서 중국정부의 외자유치환경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주목했다. 하나는
중국공장들이 개발붐 때문에 급속히 늘어난 에너지수요를 감당치 못하여 제한송전대상이 되고 여기에는 외자기업들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화력발전이 주종인 동부 연안지대의 공장들에서는 제한송전이 일상화되어 가고 있다. 다른 하나는 지방의 성(省)단위 인민정부나 시, 현, 진(鎭) 단위 인민정부의 외자유치사업을 중앙정부가 강력히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보기에
오늘의 중국을 경제급성장국으로 끌어올린 외자유치사업도 바야흐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것 같다. 개혁개방이후 중국정부의 외자유치정책은 대체로 세 단계의 변천을 보여왔는데 제1단계인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의 기간동안에는 외자유치를 비판하는 당내
보수파들의 견제를 받는 가운데 중국현대화의 목표달성에 필수적인 자본과 기술을 유치하는데 치중했다. 중국경제가
외국자본에 예속시킬 우려가 있는 분야의 합작보다는 중국경제의 현 수준을 한 차원 더 높일 수 있는 자본과 기술도입을 중시했다. 이 정책을 성공시킴으로써 중국경제는 이른바 원파오(溫飽)단계-최소한의 식생화문제해결단계-의 진입에 성공했다. 이 단계를 거치면서 중국지도부는 외국인들의 직접투자(Foreign Direct Investment)유치정책의 효용을 실감했다. 즉
외자를 유치하는 쪽에는 아무 리스크가 없고 투자하는 쪽에만 위험부담이 따르는 이 정책이야말로 중국현대화의 첩경임을 터득한 것이다. 제2단계는 장쩌민 국가주석이 재임하던 지난 90년대 기간인데 외국의 직접투자유치에 중앙은 말할 것도 없고 지방의 성단위 정부에서부터 시, 현, 진(鎭)정부에 이르기까지 외자유치에 총궐기 하였다. 국적불문, 업종불문, 액수불문의 외자유치운동이 활성화되었다. 서울의 주요호텔들에서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 두 차례 성(省) 시(市)단위의 중국 투자설명회가 열렸고 지금도 열리고 있다.
그러나 공산당 16차전당대회를 계기로 후진타오 총서기가 제4세대 지도부를 맡으면서부터 사정은 달라진다. 제3단계라고 할 수 있는 후진타오(胡錦燾)주석-원자바오(溫家宝) 총리시대의 시작과 더불어 후진타오 주석의 이른바 과학적 발전관을 앞세워 외자유치사업에 통제를 가하기 시작했다. 통제는 두 측면에서 가해지는데 하나는 과잉개발을 에서 오는 경기과열을 다스리는 금융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자유방임적
외자유치가 몰고오는 난개발(亂開發), 환경오염을 다스리는 개발측면이다. 중국의 국토자원부는
2003년 7월 이후부터의 모든 토지거래에 지방정부의 수의계약아닌 경쟁입찰실시를 요구하는가하면
각 지방 단위의 주요개발사업을 중앙정부의 관련부처로부터 사전에 승인 받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지금까지
지방정부는 자기들이 유치한 외자유치분에 대해서는 지역의 필요성을 앞세워 중앙의 명령이나 지시를 따르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지금은 중앙정부가 감사나 검열을 통하여 지방정부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있다. 따라서 지방의 성장(省長)이나 시장의 말만 믿고 토지를 매입했다가 입찰요건미비로 토지이전을 받지 못한 기업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 지방정부와 합작한 사업이라도 중앙의 사전 승인을 얻지 못하여 공사를 중단 당하는 경우들이 속출한다. 이 때문에 외자유치의 실적만 올려놓고 중앙의 지침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투자기업을을 외면하는 지방정부도 없지
않다. 중국의 현 지도부가 과학적 발전관을 내걸고 환경 친화적 개발, 난개발 억제, 민생에 도움을 주는 개발을 강조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중앙의
지침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지방정부의 권유를 믿고 투자한 외국기업인들에게 불리를 감수시키는 것은 결코 온당치 않다. 오늘의 중국은 미국처럼 민주적 자치정부연합체로 구성되는 중화합중국(中華合衆國)(United
States of China)이 아니고 지방정부의 당과 집행부의
간부를 중앙에서 직접 임명하는 중앙집권의 나라이기 때문에 중앙정부의 권한을 위임받은 지방정부의 권유를 따라 중국에 투자한 외국기업들의 권익은 존중되어야
한다. 지방정부가 중앙의 방침을 위반했다면 그 책임은 지방정부에 물어야지 어느 경우에도 투자자에게 불리를
감수시켜서는 안될 일이다. 동시에 한국의 투자가들도 지방정부가 권유하는 투자계획이 중앙정부의 지침과
일치하는지를 해당분야의 전문 변호인을 통해 상담, 확인한 후 계약을 체결하는 지혜와 노력이 필요하다. 이제 중국은 외자유치의 자유방임시대를 청산 극복하는 제 3단계에
와 있기 때문이다.
5월의 태양이 북만주 평원을 눈부시게 비추는 오후 늦게 우리 일행은 하얼빈의 타핑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의 착륙직전 창문을 통해서 우리 시야에는 멀리 넓은 평야를 가르면서 길게 뱀처럼 굽이굽이 흐르는 강이 보였다. 그 유명한 송화강이다. 공항문을 나서서 우리를 이곳으로 초청한 중국
흑룡강성 인민정부의 리무진을 타고 하얼빈 시의 한복판으로 들어설 때 나의 마음에는 잔잔한 설레임이 일었다. 어린
소년시절부터 한 번 오고 싶었던 하얼빈이 아닌가. 내 나이 7세
때 해방을 맞았고 8세 때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그 시절 어머니께서는 마치 현장을 지켜 본 사람처럼
실감나게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전에서 초대 조선총독 이또 히로부미를 육혈포로 쏘아죽이고 대한독립만세를 힘차게 부른 후 일경(日警)에
체포되었다가 여순(旅順)감옥에서
순국하셨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 때 어머니는 하얼빈을 하루삔 역전이라 표현한 것 같고 외할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전라북도 고부(古阜)에서 동학교도로 살다 가신 외할아버지의 막내딸로
1919년 생이기 때문에 안중근 선생의 의거가 있은 지 10년 뒤에 출생하셨다. 지금도 내 머릿속에는 외할머니가 어머니를 통해 전해준 항일역사에 관한 설화가 둘 남아 있는데 하나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요 다른 하나는 김일성 장군 이야기다. 김일성장군이 일경에게 체포되자 자기 손에 말
타고 달리는 사람의 그림을 그려서 일본 순경에게 보여 주는 순간 그는 말타고 홀연히 사라지는 도술(道術)을 부렸다는 것이다. 지금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이야기속의 김일성 장군과 나이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진짜가 아닐 것같다고 했다. 나는 이때부터
북만주의 대평원과 그곳에서 말달리는 선구자의 노래하며 꼭 한번 하얼빈을 가보고 싶은 소망을 품고 자랐다. 한중수교
후 하얼빈에로의 여행길은 열렸으나 나의 출장형식의 중국나들이는 공교롭게도 좀처럼 하얼빈 쪽의 길을 열지 않았다.
그 대신 백두산천지를 가는 길에 연변(延邊)은 두 차례나 방문했고 그 기간에 용정(龍井)에도 들려 윤동주 선생의 시비(詩碑)도 보고 용문중학교 출신의 잘나간 인사들 사진을 면면이 들여다보면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한 세기 전으로 돌아간 듯 그 당시의 현장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일행은 초청당국자로부터 여행일정을 설명듣다가 맥이 쭉 빠졌다. 일정표에는 안중근의
“안”자도 나오지 않았고 당초 생각지도 않았던 김좌진(金佐鎭) 장군의 기념사업과 장군이 흉탄에 맞아 최후를 마친 해림시(海林市) 산시진(山市鎭)에 있는 시골집의 복원사업에 관해 설명하면서 그곳을 시찰일정에 잡아놓았다는 것이다. 김좌진 장군의 업적과 생애를 흑룡강 성 인민정부가 평가하여 그의 삶과 죽음의 현장을 보존하고 그를 추모하는
기념공원까지를 허가해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번 여행이 그 나름의 의의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데 저으기 마음이 놓였다. 나는 관광국장에게 안중근 선생을 이곳에서는 어떻게 평가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은 너나없이 안 선생 이야기를 묻기 때문에 흑룡강 성 인민정부도 그 분을 중시한다고 말하고 그러나 아직 김좌진 장군만큼 기념할만한
시설은 없지만 몇 년전 안중근 선생의 의거를 소재로 한 연극을 하얼빈 극장에서 공연한 바 있다고 말했다. 항일투사들을
보는 이들의 설명을 종합해 보면 흑룡강 성에서는 김좌진 장군을 안중근 의사보다 더 중시하는데 그 이유인즉 김좌진 장군은 1918년부터 흑룡강성에서 장기적으로 거주하면서 교육, 농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생을 마치신 분이라는 점이다. 특히 김좌진
장군의 손녀인 김을동(故金斗漢의원의 딸이며 TV탈렌트 출신의 정치인)여사가 기념사업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하면서 유지복원사업에 적극 발벗고 나서자 이 지역의 촌로들도 각자가 보관하고
있던 김좌진 장군의 유품을 자진해서 내 놓았고 마침내는 해림시 당국도 시내 중심부의 좋은 부지를 기증하면서 기념공원조성을 허가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중근 선생의 경우 당국자들의 이야기를 촌탁(忖度)컨대 이또 하로부미를 저격살해한 사건은 그 자체로서는 전 세계를 놀라게 한 큰 사건이었고
동양평화를 지키려는 대의에서 나온 쾌거였지만 안 의사는 하얼빈에 삶의 뿌릴 내린 분이 아니고 타지역에서 들어와서 거사를 마친 후 이곳을 떠난 사람인
점에서 김 장군에 비해 친밀도가 다소 덜 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안중근 의사가 이또를 저격하기
위해 하얼빈에 와서 묵었던 호텔과 이또를 저격한 역전 귀빈실 앞 광장과 총성, 그리고 이또 히로부미라는
짝달막한 키의 일본인 노인의 죽음, 이 사건이 전세계에 던진 충격과 파장 등이 스토리가 되고 무대가
되지만 하얼빈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자진해서 기념사업을 일으킬만한 소재로는 다소 약한 것이 아니냐는 느낌을 깔고 있었다. 오히려 안중근 의사에게는 여순(旅順)감옥과 재판과정이 더 큰 화제와 관심을 유발하였고 이 때문에 여순에는 지금 안중근
의사의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흑룡강성 정부당국은 독립운동단체의 하나였던 한중문화협회 회장인 내가
안중근 선생을 사뭇 중시하자 지금 바로 안내해서 보여드릴만한 안중근의사 기념관은 준비되어 있지않지만 이곳에는 안중근 선생의 삶과 죽음을 평생을
두고 연구해 온 조선족출신의 흑룡강성 당 역사 연구소장 김우종(金宇鍾)선생이 계시다면서 이 분을 통해 안중근 선생의 역사적 사실과 그간 검토되어 온 기념사업의
개황을 듣게 해주기로 했다. 다소 아쉬움은 남지만 백야(白冶) 김좌진 장군의 유지(遺址)라도 보게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서구화(西歐化)를 경험한 하얼빈
북만주의 5월은 아직도 우리나라의 초봄날씨였다. 낮의
온도가 15도 안팍이어서 매우 선선한 편이나 반팔차림보다는 긴팔이 더 알맞았다. 북만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흑룡강성은 넓이 46만 평방킬로미터에
인구 3800만을 갖는 거대한 지역이며 이 성의 성도(省都) 하얼빈은 중국 동부3성의 도시 가운데서는
가장 크고 발달한 도시이다. 중국의 북극성과 같은 도시로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홍콩이 영국이 만든 도시라면 하얼빈은 제정 러시아시대에 러시아인들이 개발한 도시다. 이때문에 하얼빈 중심가에는 아직도 러시아 풍의 로마네스크식 건축양식으로 지은 건물들이 눈에 많이 띄었고 모슬렘의
사원을 연상시키는 러시아 동방정교의 교회건물들도 많지는 않지만 이곳 저곳에서 그 멋진 위용을 들어내고 있었다. 하얼빈은
이미 1930년대에 서구화를 체험한 도시였다. 우리 일행은 흑룡강성 당국자들과의 의전적(儀典的) 대화모임을 마친 후 맨처음 안내된 곳이 소피아 교회였다. 이곳은 과거에는 러시아 정교회가 예배드리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예배가 아닌 하얼빈의 역사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홀안은 돔같이 높은 원형의 유리 천정밑으로 툭트인 넓은 공간이 있었다. 그안의
가장 깊숙한 쪽에는 ‘최후의 만찬’ 그림이 벽의 중심부에
걸려 있고 그 앞쪽으로 이어진 양옆 벽에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등 4복음서 저자들의 초상을 걸어놓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기독교적 상징물과 더불어 하얼빈시의 역사를 설명하는 사진들과 그림들이 시대순으로 진렬되어 한번 둘러보면
이 도시의 내력을 금방 알아볼 수 있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유니폼을 입은 북만주의 아리따운 처녀 안내원이
영어로 실내의 벽면 그림들을 하나씩 설명해 나갔다. 마치 설명문을 그저 달달달 암송하는 것 같아 이것
저것 캐묻지 않고 들어주는 편이 그 안내원을 도와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저만한 준비도
안된 곳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대견한 느낌이 들었다. 함께 동행한 흑룡강 성의 한 관리의 설명에 따르면
하얼빈은 1896년 러시아 니꼬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한
청나라 외무대신 이홍장(李鴻章)을 러시아인들이 구워삶아 시베리아 철도를 만주로 잇는 동청철도(수분하(綬分河)에서
만주리에 이르는)부설권을 얻어내고 1898년 동청철도(東淸鐵道-청나라가
망한 후에는 中東鐵道로 개칭하여 지금에 이름)철도부설공사를 시작하면서 철도공사 중심부에 있는 하얼빈 일대를
러시아의 관할하에 두도록 조약을 맺은 것이 러시아가 주도하는 하얼빈 도시건설의 시작이었다. 러시아인들의
당초목적은 만주를 관통하는 철도건설보다는 부동항(不凍港)인 여순과 대련(大連)을 잇는 철길을 트는 데 있었기 때문에 청일전쟁후 요동반도를 청나라에서 할양받으면서
하얼빈의 정남쪽에 위치한 여순으로 동청철도를 연결하는 조약을 청나라와 체결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로일전쟁에서
패함으로써 하얼빈에서 장춘(長春)을 잇는 권한만 획득하고 장춘에서 여순, 대련을 잇는 이른바 만주철도(약칭 滿鐵)부설권은
일본으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하얼빈지역은 1930년대에는 러시아인들이 17만
명까지 거주하였고 러시아인외에도 프랑스, 영국, 독일, 일본, 화란 인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 자유도시로
발전하였다. 이 때는 각국에서 온 거주민들이 인구수에 비례하여 대의원을 선출, 시정(市政)운영을 논의하였고 시장도 선출했는데 인구가 가장 많은 러시아인이 시장자리는 맡아놓고 했다고 한다.
소피아 교회벽면 그림을 보면 하얼빈은 그 당시 세계적인 성악가, 발레단의 초청 공연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국제문화도시였고 이때 세워진 하얼빈 공과대학은 전 중국에서 손꼽는 명문대학으로서 지금 중국의 정치국 상무위원인 리장춘(李長春),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의장인 왕조구어(王兆國)씨 등을 이 학교 출신이라고 강조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하얼빈은 야경이 아름다웠다. 중앙로(中央大街)와 고골리(果戈里) 고골리 거리는 러시아의 작가 고골리의 이름을 본딴 거리이름 거리는 거리 양옆으로 노오란 프랑스 색을 띄는 러시아 풍 건물들의 상점이 즐비하게 늘어섰고 요즈음 유행하는 피자 헛, 스타박스 커피숍, 맥도날드 햄버거 간판들이 은행들 사이에 끼여 휘황한
불빛을 발하고 있었다. 특히 가로등은 기둥전체를 형광등으로 옷 입힌 통기둥 모양으로 된 등인데 미국이나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리네 가로등과는 뭔가 다른 느낌을 주면서 유럽식의 멋을 느낄 수 있었다. 샹하이의
난징루(南京路)처럼
화려 현란하지는 못하지만 그런대로 선진국스러운 야경이었다. 그 밖의 하얼빈 외관은 다른 중국대도시가
다 그런 것처럼 도처에서 타워크레인이 군상(群像)을 이루는 개발의 붐에 쌓여 있었다. 포장공사로 길들은 파헤쳐져있고 한참 공사가 진행
중인 대형건물들의 공사현장이 인부들과 함께 어우러져 소연한 느낌을 주었다. 길거리는 모스크바 시내거리와
흡사했다. 즉 중앙분리대 안에 소규모의 공원을 꾸미고 그곳에 계절의 화초를 심어서 신록의 분위기를 살리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필자는 이 지역 당국자들이 뭔가 더 잘해보고 더 멋있게 해보려는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역시 한번 서구(西歐) 물을 먹은 도시여서인지 중국의 다른 도시들과 차별화되는 뭔가를 느낄 수 있었다. 이곳 관광국직원은 연간 흑룡강 성의 관광수입은 220억 위엔 인데
이는 흑룡강 성 총 수입의 5.4%를 점한다면서 연간 150만
명 이상의 외국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다고 하였다. 관광객중 러시아 인이
50%이상인데 한국인도 많다는 것이다. 이 지역은 따칭(大慶)유전과 철광석, 석탄, 삼림 등 자원이 풍부한데다가
쌀, 콩, 옥수수의 생산량도 중국에서 상위권에 속하는 부성(富省)인데
여기에 곁들여 굴뚝 없는 관광사업수입까지도 적지 않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중국에 대해서는
영원히 관광 적자(赤字)를
면할 도리가 없을 것 같다고 함께 간 관광공사 P부장이 개탄했다. 마음
한 구석에 쓸쓸함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金佐鎭將軍의遺址를 찾아서
이튿날 우리 일행은 아침 일찍이 김좌진 장군의 묘소와 생전에 활동거점으로 삼았던 숙소가 있는 해림시(海林市)를 향해 떠났다. 억수로 오는 비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멎지도 않는 봄비를 맞으면서 우리 일행을 태운 중형버스는 백두산 자락으로 이어지는 연변 쪽을 향하여 달렸다. 하얼빈 시내를 빠져나가 시외로 접어들면 낮으막한 비산비야 지역의 들판이 끝없이 이어지는데 2차선 도로를 4차선으로 확창 하는 공사가 곳곳 마다 한창이었다. 비를 맞으면서도 모자를 쓰거나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맨 아낙들이 삽질을 하면서 돌들을 이고 지고 다니는 모습이
시야를 붙들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새마을 취로사업 같은데 중국에서는 무어라고 하는지 한번 안내원에게
묻고 싶었으나 참았다. 지방 도시로 들어갈수록 미 포장도로가 많아지고 중간 중간에 있는 화장실은 남자들은
견딜만하지만 함께 간 제 아내에게는 좀 참았다가 큰 식당에 가서 해결하라고 권해야 할 수준이었다. 정오에
가까워질 무렵 우리는 김좌진 장군의 무덤이 있는 해림시의 외곽에 도착했다. 사전에 연락받고 여러 사람들이
나와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오는 흙길을 30분가량 걸어가야
묘소 참배가 가능하다는 이 지역주민의 이야기를 들으니 일행들에게 묘지참배를 강행하자고 말하기가 쉽잖았다. 그
때 하얼빈에서부터 동행한 하얼빈시 관광국 안내원은 오늘은 일기관계로 묘소까지 안내하기가 부적절하니 묘소참배는 다음 기회로 미루자고 제안해 왔다. 우리 일행과 거의 동수인 중국안내원을 대표한 제안이었다. 여기까지
오전 내내 먼 길을 달려와서 묘소참배도 못하고 떠난다는 것은 지극히 유감스럽지만 질퍽대는 빗길을 걸을 수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우리는 권유를 받아들이고 곧장 차를 산시진(山市鎭)에 있는 김좌진 장군의 집터로 향했다. 김
장군께서 살던 집은 정말 북만주의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간 농촌 마을에 위치했다. 단독주택이지만 저택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옹기종기 붙어 있는 마을 집 중의 하나였다. 이곳을 맡아 관리하는 산시진의 여성 당서기가
우리를 반갑게 맞았다. 비가 줄곧 내리는 속에서 우리 일행은 김 장군의 흉상 앞에 나란이 서서 묵념을
올리고 제상이 놓인 방에 들어가서 분향재배했다. 권병현 중국주재 한국대사가 재임 중 이곳을 찾아와 제사를
지내고 갔다고 동네사람들이 전해 주었다. 주재국 대사가 항일운동 지도자의 유지를 찾아와 살피고 경의를
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같다. 그러나 누구나 그렇게 하지는 않는 일이기에 나는 권대사의 행동을
고맙게 느끼고 평가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대개 그러했지만 36년간만 고생하면 독립이 될 것이라는 시간적 전망을
가지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언제 독립이 될 것이라는 기약도 없이 오직 우리 민족은
일본에 종노릇 할 수없고 반드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바로 그 민족적 대의 하나를 위해 넓은 만주벌판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면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것이다. 오늘 우리 일행이 찾아온 김좌진 장군의 삶과 죽음이 어쩌면 우리 항일혁명가들의
생애의 전형일지도 모른다.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난 장군은 18세때
집안농노를 해방시켜 주고 북만주로 망명해 와서 농사를 짓고 방앗간을 세우고 만주에 50여개의 학교를
세워 동족교화에 힘썼다. 또 각지로 흩어진 한인을 결속시켜 독립역량을 기르고 연병장을 만들어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청산리에서 왜군 3,300명을
섬멸시킨 대첩을 이루었는데 불행히도 일본이 매수하여 침투시킨 박상실이라는 조선인 특무의 흉탄을 맞고 41세의
젊은 나이에 삶을 마치셨다. 김장군이 보여온 애국애족의 생애를 생각하면 저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없다. 더욱이 가슴 아픈 일은 일본 사람 아닌 동족의 손에 피살당했다는 사실이다. 동족의 손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 어찌 김 장군 한분뿐이랴. 백범
김구 선생이, 몽양 여운형 선생이 모두 동족의 손에 피살되지 않았던가.
되씹고 싶지 않은 우리 독립운동사의 가장 슬프고 아픈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다행스럽게도
김장군이 생전에 살던 집터의 현장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나는 중국정부의 배려에 감사를 표했는데 중국측은
개면쩍게 웃으면서 김장군의 손녀인 김을동 여사가 이 집터 복원과 해림시에 건립될 김좌진 장군 기념공원을 위해 거금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독립운동가의 후예들이 선대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거금을 희사(喜捨)하는 것은 미담이다. 그러나 우리가 반성해야할
것은 국민소득 10,000 달러를 넘어선 세계랭킹 11위의
국력을 가진 대한민국이 우리 나라의 오늘을 있게 하기 위하여 순국하신 독립혁명가들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고 그 애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사업을
위해서는 직계후손들이 아닌 정부가 스스로 예산을 편성하여 투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김을동여사가
김씨 가문의 딸이라는 이유하나로 자기 집을 팔아 김 장군의 유지(遺址)를 복원하고 기념공원 조성의 기금을 내놓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낯이 뜨거워 견딜 수
없었다. 하얼빈에 돌아와서 흑룡강성 정부가 소개한 김우종 선생을 만나 안중근 의사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었다. 작년에 황인성 전 국무총리가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 회장 자격으로 방문하여 기념사업추진문제를 흑룡강 성 정부와
협의를 가졌으며 금년 봄에도 보훈처에서 과장급 인사 두분이 다녀갔다고 한다. 그간 국회사정으로 예산처리가
늦어져 구체적 계획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나 한국측에서 적극적으로 나오면 흑룡강성 당국도 안중근 선생의 기념사업을 협조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우종 선생은 각종자료를 토대로 안중근 의사의 전기를 중국말과 한국어로 집필한 분인데 안중근선생은 요즈음 중동지역에서
보는 그러한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일본을 상대로 국권회복을 위해 궐기한 의병의 중정참모로서 하얼빈에 왔고 동양평화의 대의를 저버리면서 한반도를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국적 이또 히로부미를 응징사살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중국의 주은래 전 수상도 대학시절에
안중근 의사를 흠모하여 그의 아내인 등영초와 함께 ‘안중근’ 또는
망국한(亡國恨)이라는
이름으로 화극(畵劇)을
무대에 올려 아내가 남자역을 맡고 주은래 수상이 여자역을 맡아 연극을 한 바 있는데 후일 주은래 수상은 하얼빈 역두에서 이또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선생의 의거가 중조공동(中朝共同)의 항일투쟁의 시발로 된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장개석 총통도 여순감옥에서 안중근 의사가
사형집행을 당하자 장렬한 죽음 천추에 빛나리라는 휘호를 남기면서 애도하였다. 그후에도 1937년경 주은래, 곽말약 등이 조직한 항일 선전대에서는 무한(武漢), 장사(長沙) 등지에서 화극 ‘안중근’을 공연하면서 안중근
열사의 항일애국정신을 전 중국인에게 고취하였으며 이 결과 중화인민공화국 초기에는 중국의 초등학교 교과서에 까지 안중근 의사의 애국사적(愛國事蹟)이
올랐다는 것이다. 김우종, 이동원 편저 ‘안중근의사’(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1998년 11월 1판)참조 지금 중국에서는 외국인의 흉상 건립을 억제하고 있지만 한국정부가 적극적으로 기념사업을 추진하면 중국측의 양보를 얻어내는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고 김우종 선생은 토로했다. 나는 흑룡강 성 부성장과 관광국장에게 하얼빈은 서울에서 항공편으로
두시간이면 닿는 거리이기 때문에 안중근 선생과 김좌진 장군의 유지를 연결, 항일혁명유적지 탐방코스를
만들면 수많은 한국학생들이 수학여행코스로 이 지역을 택할 것이라면서 흑룡강 성 당국이 안중근 선생의 기념사업에 적극 힘써 줄 것을 당부했다. 하얼빈 시의 W 관광국장은 나의 제안에 큰 관심을 보이면서 현실적인
방도를 연구하겠다고 다짐했다. 항일혁명유적지를 체계적으로 조사하여 우리의 후대들에게 올바른 독립정신을
전수하는 사업을 이제는 정부가 나서서 전개해야 할 때다. 엄청나게 날려버린 거액의 공적자금을 생각하면
보훈사업예산을 대폭 증액하여 독립정신을 드높일 것을 요구할 큰 정치인은 없을까.
@ 흑룡강 요리와 경박호(鏡泊湖)의 민물고기
중국에는 각 지역 마다 요리에 특색이 있다. 광동요리와 베이징 요리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고 상해 부근의 양수 요리, 한국인들의 미각에 잘 맞는다는 사천요리, 산동요리는 나름대로 우리에게 이름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흑룡강
성 요리(菜)는
아직 이름난 중국요리의 반열이 오르지 않았다. 흑룡강 성의 N 관광국장은
앞으로 흑룡강 성은 바다가 없는 내륙이지만 민물고기를 소재로 한 용강요리(龍江菜)를 개발 중이라면서 성 정부가 지원하고 있는 ‘바이진롱
음식공작실(白金龍飮食工作室)’로 우리 일행을 초청, 만찬을 베풀었다. 바이진롱
이라는 요리사 내외가 민물고기와 감자요리를 시범하면서 흑룡강성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새로 개발된 요리를 우리에게 시식(試食)해보라고
권했다. 필자는 중국의 여러 지역뿐만 아니라 한중정상회담의 공식수행원으로도 활동한 바 있어 중국 영빈관인
디아오위타이(釣魚臺)에서도
식사를 해보고 또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국빈만찬에도 참석하여 여러 종류의 중국요리를 접했다. 그러나 바이진롱
내외가 만들어준 새로운 용강 요리는 처음 먹는 음식일 뿐만 아니라 맛도 담백하고 훌륭했다. 특히 태양어(太陽魚)라는
민물고기로 만든 생선회는 5〜6월 한국 남해안에서 갓잡은 농어회 맛을 연상시켰다. 또 감자를 바늘귀에 들어갈 만큼 엷게
썰고 그것을 덩어리로 모아 튀겨 놓았는데 이 요리의 맛 또한 진미가 아닐 수 없었다. 우리 일행의 품평이
좋을수록 맛있는 요리가 이어지는데 닝(寧)국장은 앞으로 전 중국을 석권할 용강요리가 조만간 탄생하도록 성 정부가 열심히 독려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김좌진 장군의 기념공원이 세워질 해림시에서 늦은 오찬을 마친 우리 일행은 장마비처럼 지루하게 내리는 빗속을 뚫고 저녁해질 무렵에야
경박호(鏡泊湖)라는
천혜의 절경 유원지에 도착했다. 유니폼을 잘 차려 입은 처녀들이 줄을 서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합창으로
환영인사를 하는데 비를 맞으면서 인사하는 것이 뭔가 좀 눈에 거슬렸으나 그냥 지나쳤다. 입구에 들어서저
마자 등소평의 휘호가 눈에 들어왔다. ‘중국의 승치 경박호(勝致鏡泊湖)’라는 휘호였다 당시 이곳을 찾은 등소평은 중국제일의
‘승치’라고 썼다가 다른 더 좋은 곳이 나올수도 있다는 참모들의 건의를 받고 제일이라는
표현을 삼갔다고 관장이라는 사람이 자랑스럽게 회고했다. 이곳은 베이다이허(北戴河)와
함께 중국의 지도층이 이용하는 양대 휴양처로서 매년 여름이면 중국지도부의 상당수 인사들이 휴가를 여기서 보낸다고 한다. 99평방미터의 호수속에는 70여종의 담수어가 서식하고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이 호수에서 나는 물고기요리를 즐겨먹는다고 한다. 석양의 호반에는 러시아 사람들이 설계했거나
지어 놓은 별장들이 아름다게 늘어서 있고 최근에 채색한 것 같은 사찰도 눈에 띄었다. 이 호수휴양지에도
러시아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서 성수기에는 방 잡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관리인이 내준 배를 타고 약40분 가량 호반을 돌면서 경관을 감상했는데 요트가 없는 것을 제외한다면 스위스의 레만 호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호수였다. 동편 육모정 같은 언덕에는 한때 류샤오치(劉小奇)국가주석이 낙시질을 했다고 한다. 또 호텔
앞쪽으로 멀리 낮으막한 산과 산을 잇는 구름다리가 보이는데 이 다리의 남단과 북단의 모양이 마치 모택동 기념관에 안치된 모택동의 상반신과 하반신을
연결해 놓은 것 같다고 안내원이 설명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중국산 포도주에 곁들여 민물
고기 생선회를 먹는 것이었다. 빙어튀김 비슷한 튀김요리로부터 어른 긴팔뚝만한 대어를 낚아 여러 시간
끌여서 내놓은 생선요리도 일품이었다. 평생 이렇게 많은 민물고기를 다채롭게 맛있게 먹어보기는 처음이었다. 바다가 없는 곳에서는 담수어가 바다생선의 대역을 하는 셈인데 요리기술이 발달해서인지 비린내도, 역겨운 맛도 없이 담백하고 싱싱한 물고기 요리를 생선요리로 즐길 수 있다는게 경박호를 찾는 또다른 즐거움인
것 같다. 만찬 후 경박호를 떠나 목단강(牧丹江)시로 향했다. 조선족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으로도 유명한 목단강시에는 상지(尙志)를
비롯하여 세 군데에 조선족 집성지가 있다고 한다. 밤늦게 북산빈관(北山賓館)에 여장을 풀고 지친 몸으로 숙면했다. 비가
갠 아침에는 조찬을 서둘러 마치고 하얼빈을 향해 차를 급히 몰았다. 우리 일행을 태운 중형버스는 2차선을 급히 달리면서 앞에 가는 차를 추월하려다가 두 차례나 대형충돌사고를 낼 뻔 했다. 전신을 긴장시키는 버스 드라이브가 4시간 계속된 끝에 우리들은 하얼빈
농업과학기술원에 도착했다. 일요일인데도 흑룡강성 관광국장 이하 직원들이 나와서 우리 일행을 영접했다. 이곳에서는 온실을 개조한 식당에서 유기농으로 된 식단으로 오찬을 준비했다. 오는
사람들에게는 빨리 못가게 붙들려고 칭칭 감는 국수를 대접하나 떠나는 이들에게는 많은 추억을 쌓아가라는 뜻에서 만두요리를 대접한다면서 선인장으로
빚은 만두요리를 내놓았다. 매우 맛좋은 만두였다. 3박4일의 짧은 일정이지만 흑룡강 성 직원들의 정성스러운 안내와 보살핌이 줄곧 마음에 부담으로 남는다. 우리도 한때는 그랬는데 이제 살만하나까 다시 교태(驕態)가 나오는 현실을 통렬히 반성했다. 지금
날개단듯 발전의 고지를 향하여 돌진하는 오늘의 중국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야 할 것인가, 또 우리의
오늘은 무엇인가를 곰곰이 반추하면서 내심에 쌓이는 걱정과 불안을 무게로 느끼면서 귀국길에 올랐다.
(필자 사단법인 한중문화협회 회장 이영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가 헌법재판소의 기각판결로 일단락이 되었다. 기각판결
내용도 탄핵에 대한 찬반양론의 국민 여론을 충분히 반영한 점은 평가할만하다. 헌재는 결론적으로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결의가 매우 중대한 결정이었지만 대통령 직을 파면할 만큼 심각한 위법해위를 대통령이 범했다고 볼 수는 없다는 논거에서 탄핵을 기각시켰다. 마치 집행유예의 판결 같은 결정을 내렸다. 정치적 시각으로 볼 때 이 판결은 시의 적절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의 이번 판결에서 우리는
몇 가지 문제점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 대통령을 포함한 주요 고위 공직자에 대한 탄핵제도를 헌법에
정하고 있는 세계 각국은 예외 없이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의 결정을 최종적으로 보고 헌법재판소는 다만 국회의 소추결의의 절차나 과정에 하자(瑕疵)나
흠결(欠缺)이
있는가를 조사하고 그러한 하자나 흠결이 없을 경우 국회의 결의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인용(認容)판결을 하는 것이 관례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헌법재판소는 국회의 의결절차는 논외로 하고 탄핵사유의 정당성 여부를 심리하는데 집중하였다. 과연 우리
헌법이 헌법재판소에 탄핵사유의 실질심사권을 부여하기 위하여 헌법재판소를 설치했던 가의 문제는 우리 헌법학계가 두고두고 논쟁해야 할 쟁점으로 부각될
것이다. 둘째는 헌법재판소의 판결내용 중 대통령의 언동이 헌법과 법률에 위배되었는가 여부는 심리 판단하면서도
경제정책 실패와 같은 정책실패의 문제는 사법적 심리판단의 대상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헌재의 이러한
태도와 결정이 옳다면 앞으로 국회의 대통령 탄핵은 헌법과 법률에 위반한 경우에 한정해야 하며 경제파탄으로 국가위기가 조성되어도 그러한 경우의 탄핵결정은
그것이 헌법과 법률위반이 아니기 때문에 헌재에서 기각될 것으로 예상되는 판례를 남기는 셈이 된다. 대통령의
행위는 헌법과 법률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통치권자로서의 행위로서 내우외환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에 헌법재판소가 탄핵사유의 실질심사권을 행사하려면
심사대상을 헌법과 법률위반에 한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탄핵사유의 실질을 심사할 능력이 없다면 국회결정의
절차나 과정상의 하자나 흠결을 조사하는 것으로 기능을 소극적으로 정의해야 할 것이다. 헌법재판관들은
지금까지 법에 정해진 사건을 심리하고 법전에 따라 사건의 내용을 판단해 온 분들이기 때문에 탄핵사유의 실질심사를 제대로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점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탄핵을 발의한 주체나 심판을 맡은 헌법재판소도 헌정사상 처음 있는
일을 슬기롭게 처리해야할 도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한 결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수반되는 문제점들은 탄핵심판의 전후맥락을 살피면서 제도적 미비나 판단 범위 등에 관해서 보다 심도 있는 재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다. .
탄핵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각은 분명히 둘로 갈리고 있다. 탄핵소추는 논리적으로나 법률적으로, 절차․방법 면에서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틀리지 않다고 해서 다 옳은 것도 아니고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다. 국민들은 국회의 탄핵결정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국민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국민들은 제 16대 국회는 임기가 다 끝나가고 있는데다가 도덕성에서 국민들의 지지를 상실한
국회라고 단정한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한나라 당이 정경유착을 통해 저지른 정치부패는 그 도가 국민의 인내심의 한계를 훨씬 넘어섰고 국회의원의 대다수가
직접이던 간접이던 부패자금의 분배 분식의 당사자들이라는 허물을 벗을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이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탄핵할만한 자격이 없다고 본다. 더욱이 부패정치인으로 구속된 정치인을 석방토록 결의한 것은 이번 국회를 보는 국민의 시각을 완전히 뒤엎어 놓았다. 정치부패 문제와 관련해서 노무현 대통령이 한편으로는 자기의 살점을 과감히 떼어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차떼기 부패세력의 뼈를 도려내는
과정에서 민주당의 발의로 탄핵안이 통과시킨 것을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결코 그대로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민주당의 결정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국민들의 기대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민주당이 자기 당의 추천으로 당선된 노무현 대통령이 당내의 개혁부진을 내세워 민주당을 탈당한 사실은 그 자체로서 정당정치를 부정하는
짓이기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을 보는 국민적 시각은 결코 곱지 않았다. 또 노무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을 만들어 민주당을 분열시키고 선거에서 “민주당을 찍는 것은
한나라 당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할 때 노무현 대통령을 배신자라고 통렬히 비판하는 민주당의 호소에
전 호남유권자들은 뜨거운 공감을 보내면서 차기 총선에서 배신자를 응징하자는 여론이 거세게 일어났다. 하지만 탄핵안 통과 후 호남유권자들의 분위기는 배신자 응징론 보다는 부패정치세력인 한나라당과 제휴하여 탄핵안을 통과시킨 민주당에 대한
불만과 불신감이 고조되고 있다. 민주당이 취한 조치가 논리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정서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도가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국민여론 가운데는 탄핵안의 통과는 불안통치, 열등통치를 종식시킬 좋은 기회라고 받아들이면서
만일 헌법재판소가 일부 국민들의 탄핵반대여론을 오판하여 탄핵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말도 함부로 하고, 외교도
잘 모르고,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국민에게 신뢰감도 주지
않고, 능히 피할 수 있는 국회탄핵까지 자업자득하는 대통령 밑에서 앞으로 4년간을 어떻게 더 살아야 할 것인가를 심각히 우려하는 목소리도 강하게 번지고 있다.
KBS보도를 환영하는 청중이 있는가 하면 저런 불공평한 탄핵 반대 보도야말로 공영방송이 본연의 자세를 잃은 태도라고 비판하면서 시청료
납부를 거부하자는 움직임도 일어나고 있다. 길거리에서 누군가 나누어 주는 촛불을 받아들고 탄핵반대 시위에
참가하는 국민들 보다 훨씬 더 많은, 그러면서도 반 탄핵 데모에 휩싸이지 않고 정국의 추이를 말없이
지켜보는국민들도 적잖다. 또 탄핵안이 통과되기 전날 기자회견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한때는 성공도 했고 학벌도 좋은
회사 사장이 자신의 임기연장을 위해 별 볼일 없는 자기 형님에게 돈을 싸들고 찾아오는 일은 앞으로 없어 졌으면 좋겠다”고 자기 이름을 거명하면서 비판하는 소리를 듣고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은 수치심을 감추지 못하여 한강에 투신자살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수많은 한국의 아버지들은 남상국 사장의 일을 처자를 먹여 살리기 위해 별별 짓을 다하면서 살아온 자기 자신들의
일로 받아들이면서 자기의 발언이 남에게 어떤 상처를 줄지를 예상도 못하고 함부로 입을 놀린 노무현 대통령의 교양 없는 언동을 통탄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을 살인자라고 극언을 퍼붓는 사람들도 있다. 또 국민들 가운데는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 이헌재 경제부총리,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 등이 이끄는 대행 정국이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지도하는 정부보다 훨씬 더 안정적이고
국민적 신뢰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면서 헌재를 통하여 노무현 정부가 조속히 종결되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지금 국론은 심각히 분열되고 있다. 광화문 촛불시위에서 한 노사모 회원은 혁명을 완수하자고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무슨 혁명인지는
모르나 섬뜩한 표현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의 분열상황을 감정에서가 아니라 냉철한 이성에서 평가하고 대처해야 한다. 국회의원들이
도덕성에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대통령탄핵소추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성이 아닌 감정이다. 도덕성에 문제가 있고 임기도 다 끝나가는 국회의원들이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의 탄핵 같은 중대한 결정을 국민과의 충분한 공감대 없이
단행한 것도 이성적이라기보다는 감정적이었다. 이제 우리는 감정을 죽이고 이성을 되찾자. 그리고 헌법재판소가 감정이 아닌 이성의 명을 따라 국회의 탄핵소추를 신중히 심리하여 한국 민주주의와 국익의 최대화를 기할 수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가야 한다. 여야 각 당과 정파들이 탄핵사태를 자당 자파의 총선이익을 위하여 이용하려고 기도한다면 헌법재판소는 자칫 중립적 이성적 기능을 마비
당하고 그 판단에서 여론추수주의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조용한 가운데 헌법재판소로 하여금 법과 이성에 따라 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정치에서는 ‘틀린 것은 아니나 다르다’는 여론에 귀를 기울여야하지만 헌법재판소는 틀린 것은 틀린 것으로, 다른
것은 다른 것으로 판단하는 결단과 선택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국민들의 바램이 아닐까.
요즈음 정가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공천방식으로 당내경선 또는 국민참여경선을 통한 상향식 공천을 당헌 당규에 반영하고 있다. 소수의 공천심사위원들이 밀실공천의 형식을 취하면서 실제로는 당보스의 지시대로 공천하던 시대의 반동으로 상향식
경선 공천론이 등장하는 것은 시의에 적합하다. 유권자의 뜻보다는 당보스의 뜻대로 공천을 얻던 시대가
오래 지속되었던 나라에서 하향식 아닌 경선방식에 의한 상향식 공천만큼 획기적 정치개혁안은 없을 것이다. 당보스에게
돈보따리를 바치고 공천을 받는 헌금공천이나 가신적(家臣的) 충성을 바쳐 공천을 따는 맹종형 공천의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경선을 통한 상향식
공천은 분명 커다란 개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경선제도가 만능일가.
결코 그렇지 않다. 고대 아테네 민주정의 호민관선거에서도 유권자의 매수는 비일비재했다. 경선은 자칫 금권선거의 가능성이 가장 높은 선거제도이다. 불특정
다수인도 아닌 소수의 대의원을 상대로 하는 선거에는 금권은 상당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동시에 정치적
경선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야 한다는 경쟁심리 때문에 갖가지 모략전, 흑색전 등 권모술수가
총동원된다. 이 때문에 선거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이에 불복하는 쟁송이 끊이지 않는다. 당내 경선의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 국민참여경선이다. 그러나
국민참여경선을 최초로 도입한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 경선과정을 지켜본 사람은 과연 저런 제도가 민주의 이념을 가장 잘 구현하는 제도인가를 의심케
했다. 나는 공직후보 선출방식은 여론조사를 통해 결정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면서 이 제도의 채택을 각당에 건의하고자 한다. 여론조사는 한 마디로 부작용없는 국민참여경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론조사방식을
채택할 경우 유권자는 주권자로서 자기가 좋아하는 후보를 선택할 권리를 갖게되며 당보스아닌 유권자에게 잘 알려지고 유권자에게 충성하는 인물이 많은
지지를 받게 된다. 이 방식을 채택할 경우 적어도 함량미달의 인사나 지역사회에서 도덕성에 흠결이 있는
사람이 후보로 선출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 제도는 후보자의 전과(前科)사실유무를
판별할 수 없는 약점이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여론조사에서 1위와 2위를 한 사람을 중앙당이 1차로 선발하고 심사하여 흠결없는 후보를
당공천자로 최종 확정하는 절차가 필요할 수 있다. 한 가지 더 보완해야 할 것은 각당은 자기 당에 공천을
신청한 후보자들을 유권자에게 널리 알려 국민들의 관심과 기대를 불러 일으켜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후보자 공개토론이나 매스컴을 이용한 홍보를 기획해야
할 것이다. 여론조사와 홍보기획에 적잖은 비용이 들겠지만 그 비용은 후보자들과 중앙당에 대한 국고보조를
통해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제도가 정치신인에게 불리하다는 견해가 있지만 신인이 후보가
되려면 기성정치인을 압도할만한 각고의 노력의 축적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 유의한다면 크게 우려할 문제는 아니다. 여론조사의 가장 큰 장점은 조사결과에 승복하는 효과가 가장 크다는 것이다. 노무현후보와
정몽준후보간의 후보단일화는 여론조사의 효과를 웅변한다. 또 2002년 8월의 光州北甲에서 행해진 보궐선거나 1997년 光州東區에서
실시된 보궐선거는 여론조사가 갖는 결과승복효과를 가장 잘 입증하고 있다. 또 이 방식에서는 탈락한 후보자도
덜 불명예스럽게 결과를 받아들인다. 공천때마다 잘못된 공천을 규탄하는 데모대가 중앙당사를 에워싸는 소동은
여론조사공천에서는 야기될 여지가 가장 적다. 왜냐하면 여론조사는 그것이 민의의 과학이기 때문이다. 객관성있고 책임있는 조사기관을 선정하여 여론조사로서 공직후보를 엄선하는 결단이야말로 한국에서 정치개혁을 앞당기는
첩경일 것이다.
한국정치는 이른바 3김 정치의 퇴진과 더불어 지역감정이 유권자의 선택상황을 결정적으로 규정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적어도 상황논리에서 보면 지역감정이 작동할 정치명분은 크게 약화되었다. 그러나 지역정서는 아직도 강하게 남아있다. 이 때문에 정치분석가들의
상당수는 다음 총선에서도 지역감정이 유권자의 선택심리에 적잖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13대
국회의원선거에서부터 양 김씨(兩金氏)의 선동으로 표출되기 시작하여 한국정치를 철저히 후퇴시킨 지역감정의 정치가 17대 총선에서까지
사그라지지 않고 기승을 부린다면 한국정치에서의 지역감정의 부작용은 마침내 망국병으로 고착될 것 같다. 노태우(盧泰愚)정권이
집권세력 속에 자파세력을 많이 심는 수단으로 소선거구제를 채택한 것이 결과적으로는 여소야대의 정국을 초래했고 양김역시 자신의 존립과 집권의 꿈을
키우는 수단으로 이를 이용함으로 해서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선동정치의 문이 열렸던 것이다. 지역감정은 그것이 유권자의 선거심리에 접목되는 순간 인간의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키는 묘약으로 표변한다. 지역감정은 지난 13대부터 16대까지의
총선거의 투표성향을 보면 유권자의 교육수준, 성별, 종교
연령의 차이를 초월하였다. 지역감정의 배터리인 지역보스가 공천하는 인물은 그 인물의 정치인으로서의 함량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은 채 지역주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지역감정의 투표는 거의 맹목적인 준봉투표였다. 결국 지역감정의 정치는 한국정치의 퇴행화를 초래했고 오늘날 한국의 정치인과 정치가 전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거나
혐오당하는 주원인으로, 함량미달의 정치인을 양산하는 정치로 전락하게 되는 주 원인으로 되고 있다. 현행 소선거구제는 오늘날 한국의 망국병이 된 지역감정의 정치를 성립시키는 온상이다. 우선 현 소선거구제는 도농간의 인구격차가 나날이 커지는 현실을 생각할 때 지역대표성과 인구대표성을 억지로 꿰맞추고
있음으로 해서 항상 위헌사태를 야기 시키고 있다. 또 우리나라의 인구가 영남 쪽에 유리하게 분포되어
있는 관계로 이 지역은 지역감정으로 뭉치기만 하면 언제나 원내 제 1당이 될 수 있다. 여기에 지역감정의 정치가 장기화할 여지가 있다. 뿐만 아니라 소선거구제하에서는
후보자들 간의 경쟁상황이 제로섬게임이기 때문에 극단적 갈등과 후유증을 유발한다. 이론상 소선거구제가 반드시 지역감정의 정치를 유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역갈등이 점화되기만
하면 곧바로 지역감정의 정치로 비화될 소지가 있는 국가에서는 소선거구제는 필연적으로 지역감정의 정치를 낳는다. 일본역시
지역감정의 정치가 성립할 내재적 요인이 많았다. 그러나 상당히 장기간 동안 내각제와 중・대선거구제를 실시, 지역감정이 정치적으로 표출될 여지를 축소시켜 옴으로 해서 지금은 소선거구제를
채택해도 그 병폐가 별로 크지 않다. 이런 견지에서 우리나라에서도 지역감정의 정치가 몰고 온 지역 구도를
타파하려면 소선거구제를 중・대선거구제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 흔히 중대선거구제는 신인들에게 불리하고 돈이 많이 든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문제는 지역구도의 정치를 이대로 방치할 경우 아무리 신인들의 정치참여가 많이 이루어져도 그 신인들 역시
지역감정에 안주하거나 편승하여 정치적 생존을 유지하려 할 것이다. 또 중・대선거구는
정치비용도 소선거구제만큼 결사항전을 유발하지 않음으로 해서 소선거구제보다 더 많이 소요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지역별 비례대표제를 지역구도 타파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주장이 있지만 이 주장은 지역구도의 온존을 전제로 하는 편법이기 때문에 올바른
지역구도 타파 책이라고 말 할 수 없다. 이 점에서 필자는 지역구도 타파를 위한 중대선거구제의 적극적
모색을 제안한다.
이글은 내일신문 2003년 11월 4일
신문로칼럼에 게재된 이영일 한중문화협회 총재의 기고문임
한국기업, 중국으로 옮겨가는 까닭은
요즈음 서울의 주요 호텔에서는 중국 각성, 시 단위에서 실시하는 투자설명회가 눈길을 끈다. 평균 한주일에 5건 정도의 투자유치단이 방한, 투자설명회를 열고 투자의사나 기업의 중국진출을 검토하는 기업들을 방문, 유리한
투자조건을 설명하는 데 열을 올린다. 사스 파동 이후 중국에서 한국을 찾는 투자유치단 대열은 매일 같이
이어진다. 한중문화협회에도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2001년 이후 1500여개의 한국기업들이 중국의 각성이나 시로 공장을 옮기고 있다. 무역연구소에 의하면 현재 국내 제조업 26.1%가 생산거점을 중국, 동남아 등 해외로 이전했으며 47.7%는 이전을 계획 중이라고 한다. 나머지 47.7%마저 이전을 완료하면 국내제조업의 절반 이상이 우리나라를
떠나게 될 것이다. 국내에는 제조업의 심각한 공동화가 초래될 것이다.
한국기업들이 그간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하던 제조업을 해외로 옮기는 주요원인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비용절감(28.6%)으로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둘째는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를 위해서(20.9%). 셋째는 해외시장확대(17.9%), 넷째는 현지기업과의 전략적 제휴(6.6%), 다섯째는
통상압력 회피(6.6%), 여섯째는 신사업촉진(4.6%)등으로
나타난다. 기업의 해외이전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현지기업과의 전략적 제휴를 위한
것일 경우는 오히려 적극 권장되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중국의 경우 한국제조업이 현재 누리고 있는 중국에
대한 기술, 경영, 시장면에서의 우위는 결코 오래 유지될
수 없다. 특히 일본의 장기불황으로 인하여 수많은 일본기술자들이 중국으로 대거 이동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비용절감, 노동력 확보로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
따라서 중국을 공산품 수출기지로만 간주하다가는 결국 중국기업들에게 추월당하면서 시장마저 상실할 수 있다. 이러한 기업들은 중국의 동종 유사업체와 합작하여 공생하면서 공동으로 시장을 확보해 나가는 편이 장기적으로 보아
더 유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통상압력을 회피하고 신사업을 열기 위해 해외로 나가는 경우도 권장할만하다. 그러나 노조와의 갈등, 임금인상요구로 제조업의 경쟁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공장을
해외, 특히 중국으로 옮기는 경우나 노동력 부족 때문에 한국을 떠나는 기업들이 계속 늘어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제조업이 줄어들면 국내 산업구조에서 제조업의 공동화현상이 생기고 그 결과는
고용감소, 이공계 기피, 새로운 산업을 위한 기술창출 미흡으로
이어지면서 성장잠재력 약화라는 악순환을 몰고 올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을 제약하는 가장 큰 문제는 노사관계의 부조화라는 데 크게 이론이 없는 것 같다. 손익의 균분을 전제로 하지 않은 노조의 경영참여요구, 소위 3 D기피증이나 기업의 경쟁력을 감소시켜 기업의 존립위기를 가져올 만큼 심각한 임금투쟁과 파업에 시달린 기업들은
이런 부담과 고통이 적은 나라를 찾아 공장을 옮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중국에도 노조는 있다. 그러나 중국경제의 현 단계는 기업의 존립을 해칠 수준의 임금투쟁이나
파업은 상상할 수 없다. 생산성 향상을 위한 단합과 협조를 강조하는 노조가 존재하는 단계다. 공장에서 일자리를 얻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중국 각 지역에서 도시로 몰려든 노동자들은 감격한다. 이러한 나라에서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전투적 노조나 조합원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선동하는 정치노조가 존재할 리
없다.그러나 작금 우리나라에서는 공장의 해외이전으로 심각한 문제가 부작용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선 청년실업문제가 심각하다. 한국기업들이 공장을 중국으로 옮겨
중국인 20만 명에게 직장을 마련해 주는 대신 한국에서는 10만
명이 취업기회를 상실한다.
제2의 아르헨티나 되기 전에 대책 서둘러야
우리나라에서 새로 태어난 제조업은 2002년 1월 1084개를 기록한 후 2003년 현재 555개에 그치고 있다고 한다. 2003년 6월 현재 제조업의 신설법인 수는 전년 동월대비 19.7%가 감소했으나
건설 및 서비스업은 14.2%, 3.5% 증가했다. 외국인들의
한국에 대한 투자도 급감하고 있다. 1999년 71억 달러를
상회하던 외국인투자가 2002년에는 24억 달러로 급감했다. 이제 우리 경제의 앞날을 걱정하는 소리가 여러 곳에서 들린다. 1인당 GNP 1만 달러 수준에서 묶여 제자리걸음을 계속하다가 다시 아르헨티나처럼 낙하할지도 모른다는 비관론도 나오고
있다. 한국의 브라질화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자칫하다가는
일터를 찾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중국대사관 앞에서 입국비자를 얻기 위해 줄을 서는 사태가 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는 것이다. 기업들의 해외 이전을 보면서 이 현상에 수반하는 긍정적 요소는 계속 발전시켜 나가야겠지만 부정적 요소는 정부와
기업과 노조의 공동노력을 통해 극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