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혁명가들의 땅 흑룡강성을 찾아서
@ 얼마나 보고픈 하얼빈 이었던가
5월의 태양이 북만주 평원을 눈부시게 비추는 오후 늦게 우리 일행은 하얼빈의 타핑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의 착륙직전 창문을 통해서 우리 시야에는 멀리 넓은 평야를 가르면서 길게 뱀처럼 굽이굽이 흐르는 강이 보였다. 그 유명한 송화강이다. 공항문을 나서서 우리를 이곳으로 초청한 중국
흑룡강성 인민정부의 리무진을 타고 하얼빈 시의 한복판으로 들어설 때 나의 마음에는 잔잔한 설레임이 일었다. 어린
소년시절부터 한 번 오고 싶었던 하얼빈이 아닌가. 내 나이 7세
때 해방을 맞았고 8세 때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그 시절 어머니께서는 마치 현장을 지켜 본 사람처럼
실감나게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전에서 초대 조선총독 이또 히로부미를 육혈포로 쏘아죽이고 대한독립만세를 힘차게 부른 후 일경(日警)에
체포되었다가 여순(旅順)감옥에서
순국하셨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 때 어머니는 하얼빈을 하루삔 역전이라 표현한 것 같고 외할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전라북도 고부(古阜)에서 동학교도로 살다 가신 외할아버지의 막내딸로
1919년 생이기 때문에 안중근 선생의 의거가 있은 지 10년 뒤에 출생하셨다. 지금도 내 머릿속에는 외할머니가 어머니를 통해 전해준 항일역사에 관한 설화가 둘 남아 있는데 하나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요 다른 하나는 김일성 장군 이야기다. 김일성장군이 일경에게 체포되자 자기 손에 말
타고 달리는 사람의 그림을 그려서 일본 순경에게 보여 주는 순간 그는 말타고 홀연히 사라지는 도술(道術)을 부렸다는 것이다. 지금 북한의 김일성
주석은 이야기속의 김일성 장군과 나이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진짜가 아닐 것같다고 했다. 나는 이때부터
북만주의 대평원과 그곳에서 말달리는 선구자의 노래하며 꼭 한번 하얼빈을 가보고 싶은 소망을 품고 자랐다. 한중수교
후 하얼빈에로의 여행길은 열렸으나 나의 출장형식의 중국나들이는 공교롭게도 좀처럼 하얼빈 쪽의 길을 열지 않았다.
그 대신 백두산천지를 가는 길에 연변(延邊)은 두 차례나 방문했고 그 기간에 용정(龍井)에도 들려 윤동주 선생의 시비(詩碑)도 보고 용문중학교 출신의 잘나간 인사들 사진을 면면이 들여다보면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한 세기 전으로 돌아간 듯 그 당시의 현장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일행은 초청당국자로부터 여행일정을 설명듣다가 맥이 쭉 빠졌다. 일정표에는 안중근의
“안”자도 나오지 않았고 당초 생각지도 않았던 김좌진(金佐鎭) 장군의 기념사업과 장군이 흉탄에 맞아 최후를 마친 해림시(海林市) 산시진(山市鎭)에 있는 시골집의 복원사업에 관해 설명하면서 그곳을 시찰일정에 잡아놓았다는 것이다. 김좌진 장군의 업적과 생애를 흑룡강 성 인민정부가 평가하여 그의 삶과 죽음의 현장을 보존하고 그를 추모하는
기념공원까지를 허가해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번 여행이 그 나름의 의의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데 저으기 마음이 놓였다. 나는 관광국장에게 안중근 선생을 이곳에서는 어떻게 평가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은 너나없이 안 선생 이야기를 묻기 때문에 흑룡강 성 인민정부도 그 분을 중시한다고 말하고 그러나 아직 김좌진 장군만큼 기념할만한
시설은 없지만 몇 년전 안중근 선생의 의거를 소재로 한 연극을 하얼빈 극장에서 공연한 바 있다고 말했다. 항일투사들을
보는 이들의 설명을 종합해 보면 흑룡강 성에서는 김좌진 장군을 안중근 의사보다 더 중시하는데 그 이유인즉 김좌진 장군은 1918년부터 흑룡강성에서 장기적으로 거주하면서 교육, 농사,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생을 마치신 분이라는 점이다. 특히 김좌진
장군의 손녀인 김을동(故 金斗漢의원의 딸이며 TV탈렌트 출신의 정치인)여사가 기념사업을 재정적으로 뒷받침하면서 유지복원사업에 적극 발벗고 나서자 이 지역의 촌로들도 각자가 보관하고
있던 김좌진 장군의 유품을 자진해서 내 놓았고 마침내는 해림시 당국도 시내 중심부의 좋은 부지를 기증하면서 기념공원조성을 허가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중근 선생의 경우 당국자들의 이야기를 촌탁(忖度)컨대 이또 하로부미를 저격살해한 사건은 그 자체로서는 전 세계를 놀라게 한 큰 사건이었고
동양평화를 지키려는 대의에서 나온 쾌거였지만 안 의사는 하얼빈에 삶의 뿌릴 내린 분이 아니고 타지역에서 들어와서 거사를 마친 후 이곳을 떠난 사람인
점에서 김 장군에 비해 친밀도가 다소 덜 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안중근 의사가 이또를 저격하기
위해 하얼빈에 와서 묵었던 호텔과 이또를 저격한 역전 귀빈실 앞 광장과 총성, 그리고 이또 히로부미라는
짝달막한 키의 일본인 노인의 죽음, 이 사건이 전세계에 던진 충격과 파장 등이 스토리가 되고 무대가
되지만 하얼빈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그들이 자진해서 기념사업을 일으킬만한 소재로는 다소 약한 것이 아니냐는 느낌을 깔고 있었다. 오히려 안중근 의사에게는 여순(旅順)감옥과 재판과정이 더 큰 화제와 관심을 유발하였고 이 때문에 여순에는 지금 안중근
의사의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흑룡강성 정부당국은 독립운동단체의 하나였던 한중문화협회 회장인 내가
안중근 선생을 사뭇 중시하자 지금 바로 안내해서 보여드릴만한 안중근의사 기념관은 준비되어 있지않지만 이곳에는 안중근 선생의 삶과 죽음을 평생을
두고 연구해 온 조선족출신의 흑룡강성 당 역사 연구소장 김우종(金宇鍾)선생이 계시다면서 이 분을 통해 안중근 선생의 역사적 사실과 그간 검토되어 온 기념사업의
개황을 듣게 해주기로 했다. 다소 아쉬움은 남지만 백야(白冶) 김좌진 장군의 유지(遺址)라도 보게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서구화(西歐化)를 경험한 하얼빈
북만주의 5월은 아직도 우리나라의 초봄날씨였다. 낮의
온도가 15도 안팍이어서 매우 선선한 편이나 반팔차림보다는 긴팔이 더 알맞았다. 북만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흑룡강성은 넓이 46만 평방킬로미터에
인구 3800만을 갖는 거대한 지역이며 이 성의 성도(省都) 하얼빈은 중국 동부3성의 도시 가운데서는
가장 크고 발달한 도시이다. 중국의 북극성과 같은 도시로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홍콩이 영국이 만든 도시라면 하얼빈은 제정 러시아시대에 러시아인들이 개발한 도시다. 이때문에 하얼빈 중심가에는 아직도 러시아 풍의 로마네스크식 건축양식으로 지은 건물들이 눈에 많이 띄었고 모슬렘의
사원을 연상시키는 러시아 동방정교의 교회건물들도 많지는 않지만 이곳 저곳에서 그 멋진 위용을 들어내고 있었다. 하얼빈은
이미 1930년대에 서구화를 체험한 도시였다.
우리 일행은 흑룡강성 당국자들과의 의전적(儀典的) 대화모임을 마친 후 맨처음 안내된 곳이 소피아 교회였다. 이곳은 과거에는 러시아 정교회가 예배드리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예배가 아닌 하얼빈의 역사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홀안은 돔같이 높은 원형의 유리 천정밑으로 툭트인 넓은 공간이 있었다. 그안의
가장 깊숙한 쪽에는 ‘최후의 만찬’ 그림이 벽의 중심부에
걸려 있고 그 앞쪽으로 이어진 양옆 벽에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등 4복음서 저자들의 초상을 걸어놓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런 기독교적 상징물과 더불어 하얼빈시의 역사를 설명하는 사진들과 그림들이 시대순으로 진렬되어 한번 둘러보면
이 도시의 내력을 금방 알아볼 수 있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유니폼을 입은 북만주의 아리따운 처녀 안내원이
영어로 실내의 벽면 그림들을 하나씩 설명해 나갔다. 마치 설명문을 그저 달달달 암송하는 것 같아 이것
저것 캐묻지 않고 들어주는 편이 그 안내원을 도와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저만한 준비도
안된 곳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대견한 느낌이 들었다. 함께 동행한 흑룡강 성의 한 관리의 설명에 따르면
하얼빈은 1896년 러시아 니꼬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한
청나라 외무대신 이홍장(李鴻章)을 러시아인들이 구워삶아 시베리아 철도를 만주로 잇는 동청철도(수분하(綬分河)에서
만주리에 이르는)부설권을 얻어내고 1898년 동청철도(東淸鐵道-청나라가
망한 후에는 中東鐵道로 개칭하여 지금에 이름)철도부설공사를 시작하면서 철도공사 중심부에 있는 하얼빈 일대를
러시아의 관할하에 두도록 조약을 맺은 것이 러시아가 주도하는 하얼빈 도시건설의 시작이었다. 러시아인들의
당초목적은 만주를 관통하는 철도건설보다는 부동항(不凍港)인 여순과 대련(大連)을 잇는 철길을 트는 데 있었기 때문에 청일전쟁후 요동반도를 청나라에서 할양받으면서
하얼빈의 정남쪽에 위치한 여순으로 동청철도를 연결하는 조약을 청나라와 체결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로일전쟁에서
패함으로써 하얼빈에서 장춘(長春)을 잇는 권한만 획득하고 장춘에서 여순, 대련을 잇는 이른바 만주철도(약칭 滿鐵)부설권은
일본으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하얼빈지역은 1930년대에는 러시아인들이 17만
명까지 거주하였고 러시아인외에도 프랑스, 영국, 독일, 일본, 화란 인등 여러 나라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는 자유도시로
발전하였다. 이 때는 각국에서 온 거주민들이 인구수에 비례하여 대의원을 선출, 시정(市政)운영을 논의하였고 시장도 선출했는데 인구가 가장 많은 러시아인이 시장자리는 맡아놓고 했다고 한다.
소피아 교회벽면 그림을 보면 하얼빈은 그 당시 세계적인 성악가, 발레단의 초청 공연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국제문화도시였고 이때 세워진 하얼빈 공과대학은 전 중국에서 손꼽는 명문대학으로서 지금 중국의 정치국 상무위원인 리장춘(李長春),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의장인 왕조구어(王兆國)씨 등을 이 학교 출신이라고 강조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하얼빈은 야경이 아름다웠다. 중앙로(中央大街)와 고골리(果戈里) 고골리 거리는 러시아의 작가 고골리의 이름을 본딴 거리이름
거리는 거리 양옆으로 노오란 프랑스 색을 띄는 러시아 풍 건물들의 상점이 즐비하게 늘어섰고 요즈음 유행하는 피자 헛, 스타박스 커피숍, 맥도날드 햄버거 간판들이 은행들 사이에 끼여 휘황한
불빛을 발하고 있었다. 특히 가로등은 기둥전체를 형광등으로 옷 입힌 통기둥 모양으로 된 등인데 미국이나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리네 가로등과는 뭔가 다른 느낌을 주면서 유럽식의 멋을 느낄 수 있었다. 샹하이의
난징루(南京路)처럼
화려 현란하지는 못하지만 그런대로 선진국스러운 야경이었다. 그 밖의 하얼빈 외관은 다른 중국대도시가
다 그런 것처럼 도처에서 타워크레인이 군상(群像)을 이루는 개발의 붐에 쌓여 있었다. 포장공사로 길들은 파헤쳐져있고 한참 공사가 진행
중인 대형건물들의 공사현장이 인부들과 함께 어우러져 소연한 느낌을 주었다. 길거리는 모스크바 시내거리와
흡사했다. 즉 중앙분리대 안에 소규모의 공원을 꾸미고 그곳에 계절의 화초를 심어서 신록의 분위기를 살리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필자는 이 지역 당국자들이 뭔가 더 잘해보고 더 멋있게 해보려는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역시 한번 서구(西歐) 물을 먹은 도시여서인지 중국의 다른 도시들과 차별화되는 뭔가를 느낄 수 있었다. 이곳 관광국직원은 연간 흑룡강 성의 관광수입은 220억 위엔 인데
이는 흑룡강 성 총 수입의 5.4%를 점한다면서 연간 150만
명 이상의 외국관광객이 이곳을 찾는다고 하였다. 관광객중 러시아 인이
50%이상인데 한국인도 많다는 것이다.
이 지역은 따칭(大慶)유전과 철광석, 석탄, 삼림 등 자원이 풍부한데다가
쌀, 콩, 옥수수의 생산량도 중국에서 상위권에 속하는 부성(富省)인데
여기에 곁들여 굴뚝 없는 관광사업수입까지도 적지 않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중국에 대해서는
영원히 관광 적자(赤字)를
면할 도리가 없을 것 같다고 함께 간 관광공사 P부장이 개탄했다. 마음
한 구석에 쓸쓸함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金佐鎭將軍의 遺址를 찾아서
이튿날 우리 일행은 아침 일찍이 김좌진 장군의 묘소와 생전에 활동거점으로 삼았던 숙소가 있는 해림시(海林市)를 향해 떠났다. 억수로 오는 비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멎지도 않는 봄비를 맞으면서 우리 일행을 태운 중형버스는 백두산 자락으로 이어지는 연변 쪽을 향하여 달렸다. 하얼빈 시내를 빠져나가 시외로 접어들면 낮으막한 비산비야 지역의 들판이 끝없이 이어지는데 2차선 도로를 4차선으로 확창 하는 공사가 곳곳 마다 한창이었다. 비를 맞으면서도 모자를 쓰거나 수건으로 머리를 동여맨 아낙들이 삽질을 하면서 돌들을 이고 지고 다니는 모습이
시야를 붙들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새마을 취로사업 같은데 중국에서는 무어라고 하는지 한번 안내원에게
묻고 싶었으나 참았다. 지방 도시로 들어갈수록 미 포장도로가 많아지고 중간 중간에 있는 화장실은 남자들은
견딜만하지만 함께 간 제 아내에게는 좀 참았다가 큰 식당에 가서 해결하라고 권해야 할 수준이었다. 정오에
가까워질 무렵 우리는 김좌진 장군의 무덤이 있는 해림시의 외곽에 도착했다. 사전에 연락받고 여러 사람들이
나와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오는 흙길을 30분가량 걸어가야
묘소 참배가 가능하다는 이 지역주민의 이야기를 들으니 일행들에게 묘지참배를 강행하자고 말하기가 쉽잖았다. 그
때 하얼빈에서부터 동행한 하얼빈시 관광국 안내원은 오늘은 일기관계로 묘소까지 안내하기가 부적절하니 묘소참배는 다음 기회로 미루자고 제안해 왔다. 우리 일행과 거의 동수인 중국안내원을 대표한 제안이었다. 여기까지
오전 내내 먼 길을 달려와서 묘소참배도 못하고 떠난다는 것은 지극히 유감스럽지만 질퍽대는 빗길을 걸을 수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우리는 권유를 받아들이고 곧장 차를 산시진(山市鎭)에 있는 김좌진 장군의 집터로 향했다. 김
장군께서 살던 집은 정말 북만주의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간 농촌 마을에 위치했다. 단독주택이지만 저택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옹기종기 붙어 있는 마을 집 중의 하나였다. 이곳을 맡아 관리하는 산시진의 여성 당서기가
우리를 반갑게 맞았다. 비가 줄곧 내리는 속에서 우리 일행은 김 장군의 흉상 앞에 나란이 서서 묵념을
올리고 제상이 놓인 방에 들어가서 분향재배했다. 권병현 중국주재 한국대사가 재임 중 이곳을 찾아와 제사를
지내고 갔다고 동네사람들이 전해 주었다. 주재국 대사가 항일운동 지도자의 유지를 찾아와 살피고 경의를
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같다. 그러나 누구나 그렇게 하지는 않는 일이기에 나는 권대사의 행동을
고맙게 느끼고 평가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대개 그러했지만 36년간만 고생하면 독립이 될 것이라는 시간적 전망을
가지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언제 독립이 될 것이라는 기약도 없이 오직 우리 민족은
일본에 종노릇 할 수없고 반드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바로 그 민족적 대의 하나를 위해 넓은 만주벌판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면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것이다. 오늘 우리 일행이 찾아온 김좌진 장군의 삶과 죽음이 어쩌면 우리 항일혁명가들의
생애의 전형일지도 모른다.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난 장군은 18세때
집안농노를 해방시켜 주고 북만주로 망명해 와서 농사를 짓고 방앗간을 세우고 만주에 50여개의 학교를
세워 동족교화에 힘썼다. 또 각지로 흩어진 한인을 결속시켜 독립역량을 기르고 연병장을 만들어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청산리에서 왜군 3,300명을
섬멸시킨 대첩을 이루었는데 불행히도 일본이 매수하여 침투시킨 박상실이라는 조선인 특무의 흉탄을 맞고 41세의
젊은 나이에 삶을 마치셨다. 김장군이 보여온 애국애족의 생애를 생각하면 저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없다. 더욱이 가슴 아픈 일은 일본 사람 아닌 동족의 손에 피살당했다는 사실이다. 동족의 손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 어찌 김 장군 한분뿐이랴. 백범
김구 선생이, 몽양 여운형 선생이 모두 동족의 손에 피살되지 않았던가.
되씹고 싶지 않은 우리 독립운동사의 가장 슬프고 아픈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다행스럽게도
김장군이 생전에 살던 집터의 현장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나는 중국정부의 배려에 감사를 표했는데 중국측은
개면쩍게 웃으면서 김장군의 손녀인 김을동 여사가 이 집터 복원과 해림시에 건립될 김좌진 장군 기념공원을 위해 거금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독립운동가의 후예들이 선대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거금을 희사(喜捨)하는 것은 미담이다. 그러나 우리가 반성해야할
것은 국민소득 10,000 달러를 넘어선 세계랭킹 11위의
국력을 가진 대한민국이 우리 나라의 오늘을 있게 하기 위하여 순국하신 독립혁명가들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고 그 애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사업을
위해서는 직계후손들이 아닌 정부가 스스로 예산을 편성하여 투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김을동여사가
김씨 가문의 딸이라는 이유하나로 자기 집을 팔아 김 장군의 유지(遺址)를 복원하고 기념공원 조성의 기금을 내놓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낯이 뜨거워 견딜 수
없었다.
하얼빈에 돌아와서 흑룡강성 정부가 소개한 김우종 선생을 만나 안중근 의사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었다. 작년에 황인성 전 국무총리가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 회장 자격으로 방문하여 기념사업추진문제를 흑룡강 성 정부와
협의를 가졌으며 금년 봄에도 보훈처에서 과장급 인사 두분이 다녀갔다고 한다. 그간 국회사정으로 예산처리가
늦어져 구체적 계획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나 한국측에서 적극적으로 나오면 흑룡강성 당국도 안중근 선생의 기념사업을 협조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우종 선생은 각종자료를 토대로 안중근 의사의 전기를 중국말과 한국어로 집필한 분인데 안중근선생은 요즈음 중동지역에서
보는 그러한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일본을 상대로 국권회복을 위해 궐기한 의병의 중정참모로서 하얼빈에 왔고 동양평화의 대의를 저버리면서 한반도를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국적 이또 히로부미를 응징사살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중국의 주은래 전 수상도 대학시절에
안중근 의사를 흠모하여 그의 아내인 등영초와 함께 ‘안중근’ 또는
망국한(亡國恨)이라는
이름으로 화극(畵劇)을
무대에 올려 아내가 남자역을 맡고 주은래 수상이 여자역을 맡아 연극을 한 바 있는데 후일 주은래 수상은 하얼빈 역두에서 이또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선생의 의거가 중조공동(中朝共同)의 항일투쟁의 시발로 된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장개석 총통도 여순감옥에서 안중근 의사가
사형집행을 당하자 장렬한 죽음 천추에 빛나리라는 휘호를 남기면서 애도하였다. 그후에도 1937년경 주은래, 곽말약 등이 조직한 항일 선전대에서는 무한(武漢), 장사(長沙) 등지에서 화극 ‘안중근’을 공연하면서 안중근
열사의 항일애국정신을 전 중국인에게 고취하였으며 이 결과 중화인민공화국 초기에는 중국의 초등학교 교과서에 까지 안중근 의사의 애국사적(愛國事蹟)이
올랐다는 것이다. 김우종, 이동원 편저 ‘안중근의사’(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1998년 11월 1판)참조
지금 중국에서는 외국인의 흉상 건립을 억제하고 있지만 한국정부가 적극적으로 기념사업을 추진하면 중국측의 양보를 얻어내는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고 김우종 선생은 토로했다. 나는 흑룡강 성 부성장과 관광국장에게 하얼빈은 서울에서 항공편으로
두시간이면 닿는 거리이기 때문에 안중근 선생과 김좌진 장군의 유지를 연결, 항일혁명유적지 탐방코스를
만들면 수많은 한국학생들이 수학여행코스로 이 지역을 택할 것이라면서 흑룡강 성 당국이 안중근 선생의 기념사업에 적극 힘써 줄 것을 당부했다. 하얼빈 시의 W 관광국장은 나의 제안에 큰 관심을 보이면서 현실적인
방도를 연구하겠다고 다짐했다. 항일혁명유적지를 체계적으로 조사하여 우리의 후대들에게 올바른 독립정신을
전수하는 사업을 이제는 정부가 나서서 전개해야 할 때다. 엄청나게 날려버린 거액의 공적자금을 생각하면
보훈사업예산을 대폭 증액하여 독립정신을 드높일 것을 요구할 큰 정치인은 없을까.
@ 흑룡강 요리와 경박호(鏡泊湖)의 민물고기
중국에는 각 지역 마다 요리에 특색이 있다. 광동요리와 베이징 요리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고 상해 부근의 양수 요리, 한국인들의 미각에 잘 맞는다는 사천요리, 산동요리는 나름대로 우리에게 이름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흑룡강
성 요리(菜)는
아직 이름난 중국요리의 반열이 오르지 않았다. 흑룡강 성의 N 관광국장은
앞으로 흑룡강 성은 바다가 없는 내륙이지만 민물고기를 소재로 한 용강요리(龍江菜)를 개발 중이라면서 성 정부가 지원하고 있는 ‘바이진롱
음식공작실(白金龍飮食工作室)’로 우리 일행을 초청, 만찬을 베풀었다. 바이진롱
이라는 요리사 내외가 민물고기와 감자요리를 시범하면서 흑룡강성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새로 개발된 요리를 우리에게 시식(試食)해보라고
권했다. 필자는 중국의 여러 지역뿐만 아니라 한중정상회담의 공식수행원으로도 활동한 바 있어 중국 영빈관인
디아오위타이(釣魚臺)에서도
식사를 해보고 또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국빈만찬에도 참석하여 여러 종류의 중국요리를 접했다. 그러나 바이진롱
내외가 만들어준 새로운 용강 요리는 처음 먹는 음식일 뿐만 아니라 맛도 담백하고 훌륭했다. 특히 태양어(太陽魚)라는
민물고기로 만든 생선회는 5〜6월 한국 남해안에서 갓잡은 농어회 맛을 연상시켰다. 또 감자를 바늘귀에 들어갈 만큼 엷게
썰고 그것을 덩어리로 모아 튀겨 놓았는데 이 요리의 맛 또한 진미가 아닐 수 없었다. 우리 일행의 품평이
좋을수록 맛있는 요리가 이어지는데 닝(寧)국장은 앞으로 전 중국을 석권할 용강요리가 조만간 탄생하도록 성 정부가 열심히 독려하고 있다고 자랑했다.
김좌진 장군의 기념공원이 세워질 해림시에서 늦은 오찬을 마친 우리 일행은 장마비처럼 지루하게 내리는 빗속을 뚫고 저녁해질 무렵에야
경박호(鏡泊湖)라는
천혜의 절경 유원지에 도착했다. 유니폼을 잘 차려 입은 처녀들이 줄을 서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합창으로
환영인사를 하는데 비를 맞으면서 인사하는 것이 뭔가 좀 눈에 거슬렸으나 그냥 지나쳤다. 입구에 들어서저
마자 등소평의 휘호가 눈에 들어왔다. ‘중국의 승치 경박호(勝致 鏡泊湖)’라는 휘호였다 당시 이곳을 찾은 등소평은 중국제일의
‘승치’라고 썼다가 다른 더 좋은 곳이 나올수도 있다는 참모들의 건의를 받고 제일이라는
표현을 삼갔다고 관장이라는 사람이 자랑스럽게 회고했다. 이곳은 베이다이허(北戴河)와
함께 중국의 지도층이 이용하는 양대 휴양처로서 매년 여름이면 중국지도부의 상당수 인사들이 휴가를 여기서 보낸다고 한다. 99평방미터의 호수속에는 70여종의 담수어가 서식하고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이 호수에서 나는 물고기요리를 즐겨먹는다고 한다. 석양의 호반에는 러시아 사람들이 설계했거나
지어 놓은 별장들이 아름다게 늘어서 있고 최근에 채색한 것 같은 사찰도 눈에 띄었다. 이 호수휴양지에도
러시아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서 성수기에는 방 잡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관리인이 내준 배를 타고 약40분 가량 호반을 돌면서 경관을 감상했는데 요트가 없는 것을 제외한다면 스위스의 레만 호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호수였다. 동편 육모정 같은 언덕에는 한때 류샤오치(劉小奇)국가주석이 낙시질을 했다고 한다. 또 호텔
앞쪽으로 멀리 낮으막한 산과 산을 잇는 구름다리가 보이는데 이 다리의 남단과 북단의 모양이 마치 모택동 기념관에 안치된 모택동의 상반신과 하반신을
연결해 놓은 것 같다고 안내원이 설명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중국산 포도주에 곁들여 민물
고기 생선회를 먹는 것이었다. 빙어튀김 비슷한 튀김요리로부터 어른 긴팔뚝만한 대어를 낚아 여러 시간
끌여서 내놓은 생선요리도 일품이었다. 평생 이렇게 많은 민물고기를 다채롭게 맛있게 먹어보기는 처음이었다. 바다가 없는 곳에서는 담수어가 바다생선의 대역을 하는 셈인데 요리기술이 발달해서인지 비린내도, 역겨운 맛도 없이 담백하고 싱싱한 물고기 요리를 생선요리로 즐길 수 있다는게 경박호를 찾는 또다른 즐거움인
것 같다.
만찬 후 경박호를 떠나 목단강(牧丹江)시로 향했다. 조선족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으로도 유명한 목단강시에는 상지(尙志)를
비롯하여 세 군데에 조선족 집성지가 있다고 한다. 밤늦게 북산빈관(北山賓館)에 여장을 풀고 지친 몸으로 숙면했다. 비가
갠 아침에는 조찬을 서둘러 마치고 하얼빈을 향해 차를 급히 몰았다. 우리 일행을 태운 중형버스는 2차선을 급히 달리면서 앞에 가는 차를 추월하려다가 두 차례나 대형충돌사고를 낼 뻔 했다. 전신을 긴장시키는 버스 드라이브가 4시간 계속된 끝에 우리들은 하얼빈
농업과학기술원에 도착했다. 일요일인데도 흑룡강성 관광국장 이하 직원들이 나와서 우리 일행을 영접했다. 이곳에서는 온실을 개조한 식당에서 유기농으로 된 식단으로 오찬을 준비했다. 오는
사람들에게는 빨리 못가게 붙들려고 칭칭 감는 국수를 대접하나 떠나는 이들에게는 많은 추억을 쌓아가라는 뜻에서 만두요리를 대접한다면서 선인장으로
빚은 만두요리를 내놓았다. 매우 맛좋은 만두였다. 3박4일의 짧은 일정이지만 흑룡강 성 직원들의 정성스러운 안내와 보살핌이 줄곧 마음에 부담으로 남는다. 우리도 한때는 그랬는데 이제 살만하나까 다시 교태(驕態)가 나오는 현실을 통렬히 반성했다. 지금
날개단듯 발전의 고지를 향하여 돌진하는 오늘의 중국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야 할 것인가, 또 우리의
오늘은 무엇인가를 곰곰이 반추하면서 내심에 쌓이는 걱정과 불안을 무게로 느끼면서 귀국길에 올랐다.
(필자 사단법인 한중문화협회 회장 이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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