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의 현실적 이해를 위하여

이 글은 2009년1월 30일 오전 7시 서울 프레스클럽에서 열린 4월회 정기총회에서 행한 연설내용임

 

연사 : 이영일(李榮一) 4월회 고문

(4.19당시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3년생으로 서울대 시위 주동자의 1인이며 3선 국회의원 을 역임했고 현재는 한중문화협회 총재 및 우석대학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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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1월 30일 4월회 정기총회에서 4월혁명의 현실적 이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는 이영일 총재)

1.들어가면서

 한국 민주주의의 새 시대를 연 4월 혁명이 내년이면 50주년을 맞게 된다. 4월 혁명은 그 당시의 상황이나 진행과정, 발생의 동기나 성립의 명분으로 보아 한마디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혁명이었다. 이때부터 민주주의는 한국 국민들의 가슴속에, 뇌리 속에 가장 바람직하고 가치 있는 정부의 이념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은 1948년 5월 10일 국민이 직접 선출한 국회의원들이 제정한 헌법에 의거, 민주공화국으로 성립되었지만 4월 혁명이 있기 전까지는 민주주의가 이 나라의 정치이념, 정부형태를 결정하는 값진 정치원리라는 것을 국민들이 제대로 알지도 못했고 제대로 교육을 받지도 못했다. 당시 한국은 솔직히 말해서 전체유권자의 3%만이 서구적 오리엔테이션을 가졌고 문맹률도 시급히 해결해야할 과제의 리스트에 높은 순위로 올라있었다. 경제수준도 오늘날 동부 아프리카 수준보다 결코 높지 않았다. 바꾸어 말하면 이 당시 한국은 서방적의미의 민주주의가 성장, 발전할 조건을 거의 갖지 않은 상태 하에서 민주주의 헌법을 만들고 민주주의 정부를 세웠던 것이다. 이 결과 민주정치는 이승만 박사의 가부장적(家父長的) 독재정치로 변질되었고 민주주의 이름하에 실시된 선거는 독재정권을 민주주의로 포장하기 위한 형식으로 치러졌을 뿐 관권에 의해 유권자의 의사가 왜곡되는 부정선거였다.

그러나 민주정치가 12년 동안 계속되면서 헌법이 선언한 민주주의 규범과 정치 실재로서의 반민주 행태가 충돌하는 상황이 조성되고 여기에 점차 지식인들 간에 비판의식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결국 국민들 가운데서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대학생들이 맨 먼저 현재의 정치가 민주정치 아닌 독재정치임을 각성하게 되었고 이 결과 한국 사회계층 구조상 대학생들이 이의 시정을 요구하는 운동의 선두에 설 수 밖에 없었다. 대학생들은 사회계급이 아니고 사회적 신분집단이기 때문에 계급적 이해관계를 반영하지 않고 전체국민의 의사를 대변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자기 조국이 일본의 식민지라는 사실을 먼저 각성한 학생 지식인들이 일제에 항거하는 3.1운동과 11.3 학생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사례와 궤를 같이하는 측면을 4.19혁명에서도 엿볼 수 있다. 3.15부정선거를 반대한 학생시위는 결국 독재정권을 타도한 학생혁명으로 발전하였다. 이 점에서 모든 혁명이 피지배계급이 지배 계급을 뒤엎는 사건으로 정의되는 혁명에 관한 보편적 개념과는 구별되는 측면이 있다. 즉 혁명의 주체가 계급적 이해(利害)를 혁명의 동력(動力)으로 한 특정계급이 아니고 전체국민의 의사를 대변하는 사회적 신분집단으로서의 대학생들이 혁명 활동의 주체였다는 점에서 지식인들에 의한 “측면에서의 혁명”이라는 평가도 주어졌다. (혁명을 위로부터의 혁명이냐 아래로 부터의 혁명이냐로 분류되는 것과 구별되는 의미에서의 혁명)

그러나 나는 4월 혁명을 한마디로 민주혁명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우리 역사를 통해 주권이 국민에게 있어본 일이 없었다. 항상 1인의 자유는 있지만 만인의 자유가 부정되는 동양적 전제주의 정치문화를 이어오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었던 적이 없었다. 일제로 부터의 해방과 건국은 이념상 국민에게 주권을 부여하고 있으나 정치현실에 있어서는 대통령이나 대통령의 권력을 집행하고 있던 관리나 공무원들이 주권을 행사했다. 주권재민(主權在民)아닌 주권재관(主權在官)이었다. 그러나 4.19혁명이 있음으로 해서 주권자가 대통령이나 공무원이 아닌 국민임을 확실히 각인시키는 역사적 전기가 마련되었다. 무주권(無主權)의 국민에게 주권을 부여하는 역사적 계기가 4월 혁명이었다면 혁명에 대한 이론적 정의가 무엇이고 관련된 학설들이 무엇이건 간에 한국역사에서 4.19는 민주혁명의 확실한 금자탑이 되는 것이다.

 

그동안 학계의 일각이나 정치권에서 혁명이냐 의거(義擧)냐의 논쟁이 있었고 완성된 혁명이냐 미완의 혁명이냐의 논쟁도 이어져왔다. 집권세력들은 학생들의 정치에 대한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4월 혁명을 종결된 것으로 보거나 의거로 간주하려 하였고 야당들은 4월 혁명은 미완성의 혁명이라면서 정권의 수평적 교체(여당에서 야당으로의 교체)가 이루어져야 진정한 민주혁명이 된다고 주장하였으며 좌익들은 4.19는 민주민족혁명으로서 냉전과 분단을 넘어서자는 약소민족의 반제민주민족해방혁명의 한 고리로서 4월 혁명을 이해해야한다는 주장을 내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4.19이후 한국 민주화의 전개과정을 주목하여 현실적인 결론을 도출한다면 4월 혁명은 한국의 역사를 민주주의를 향하도록 굳힌 거대한 역사의 거보였음이 입증되고 있다. 이하 한국 민주화 과정과 4.19혁명의 상관관계를 살피기로 한다.

 

2. 4월 혁명 이후의 한국의 민주화과정 회고

 

가 5.16, 5.18 군사정권 등장과 민주화의 반동

4월 혁명 이후 한국 사회는 여러 차례에 걸친 정치적 변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5.16군사쿠데타가 성공하면서 4.19를 통해서 국민이 쟁취한 주권은 다시 군부실력자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군부실력자의 수중으로 넘어간 주권을 되찾으려는 대학가의 투쟁은 부단히 계속되었다. 군부에서는 민주주의의 경제적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개발독재가 불가피하다고 국민들을 설득했고 근대화의 구호 하에 독재 권력이 행사되는 이 시기의 어느 국면에서는 국민들의 군부에 대한 일정한 지지도 뒤따랐다.

그러나 5.16이후의 개발독재 시기는 이승만 독재시기와는 국민들의 의식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주권은 반드시 국민들에게로 돌아와야 정당하다는 신념이 청년지식층은 물론 전체 국민들의 마음속에 광범하게 내면화되어 있었다. 이것은 4.19혁명이 다음 세 가지 요건을 충족시키면서 성공했기 때문이다.

 
첫째 참여의 전국성이다. 전국의 모든 지역에서 4.19혁명에 참여했다. 이점은 특정지역에 국한된 투쟁이었던 5.18과는 구별된다. 둘째 호응과 공감의 전국성이다. 국민의 일부가 아닌 전체국민이 4.19혁명에 대해 공감하고 지지했다는 사실이다. 이점에서 4.19혁명은 6.10항쟁이나 그 밖의 민주투쟁들과는 구별된다. 셋째는 전체국민의 대의(大義), 정당성(正當性)을 등에 업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수파들이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 궐기한 모든 투쟁들이 결실 없이 끝난 것은 결국 국민적 정당성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작년 5월의 촛불시위는 대중선동에는 성공했으나 그 본질이 위계와 허위사실유포로 조작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생명력을 상실했다.

4.19혁명 이후 끊임없이 학생들이 주도한 주권재민(主權在民)을 향한 투쟁은 지속되었다. 6.10시위나 5.18광주항쟁 등이 그래도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4.19혁명이 그 성공을 통해 국민들의 의식 속에 비축해 놓은 지지(Reserve of Supports)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4.19가 성공한 나라에서 5.16이나 5.18같은 반동정권이 등장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 같지만 한국 민주화 성립의 기초여건 불비가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4.19혁명으로 집권한 민주당 정부는 민주주의 원칙구현에만 지나치게 매달렸기 때문에 4.19이후의 혁명 상황을 제대로 주도하지 못하다가 5.`16군사쿠데타의 객체가 되었다. 국민들은 민주주의와 함께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절실한 욕구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욕구를 효과적으로 처리할 능력이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 사거 후 민주화의 새봄은 왔지만 자유에 수반한 책임이라는 윤리의식이 마비된 정치상황은 결국 5.18의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반동정권이 들어섰다고 해서 4.19이념이나 혁명의 유산이 부정된 일은 없었다. 혁명이 아닌 의거라거나 완결된 혁명이라거나 하는 등 정치적 말장난은 있었지만 혁명의 본질적 가치는 한 번도 부정되거나 훼손되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주권재민의 정치이념으로서의 민주주의는 우리 역사 속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무릇 역사에서 보면 모든 혁명에는 항상 반동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프랑스혁명도 독재자와 전제군주의 등장을 영원히 분쇄한다면서 바스티유 형무소를 깨트린 벽돌들을 바닥에 깔아 콩코드광장을 만들었지만 민주정치를 부정하는 왕정은 부활했고 이러한 반동기를 거치고 거치면서 자유 평등 박애의 프랑스 혁명이념이 꽃피었던 것이다. (프랑스 혁명은 1789년 7월 14일부터 1794년 7월 28일까지 계속되었으나 1799년 11월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에 의하여 공화정이 무너지고 나폴레옹의 집정정부(執政政府)가 수립됨으로써 공식으로 "혁명 종결"이 선언되었다. 그러나 "1789년 혁명" 이라고도 불리는 프랑스 혁명의 자유, 평등, 박애의 이념이 어느 정도라도 정착된 것은 "혁명이 종결"된 후 20세기 초의 제3공화국에 이르러서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3. 앞으로의 과제

 

한국의 정치사는 4.19혁명의 성공이라는 역사의 금자탑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으로 해서 앞으로 민주화의 후퇴는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양대 지주로 삼고 국가발전을 추진해 온 한국은 현재 세계랭킹 13위의 경제대국을 이룩하였다. 돌이켜 보건데 우리민족이 서구(西歐)가 주도하는 근대화의 물결에 편승, 발전하지 못하다가 일본에게 식민지가 되었고 중국역시 반식민지가 되는 국가적, 민족적 수치를 당했다. 세계사 진운의 중심대열에 끼지 못한 민족이나 국가의 운명이 어떠했는지는 우리의 현대사가 잘 가르치고 있다.

이제 한국은 세계사의 중심대열에 끼여 있지만 조선인민공화국으로 대표되는 한반도의 다른 부분은 지구최빈국으로 전락, 세계사의 중심대열에서 완전히 이탈한 상태에 놓여있다. 아직도 1인의 자유는 있으나 만인의 자유가 없는 국가로 남아있다. 북한 주민은 국가가 보호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수령의 안위를 위해 소모되어야 할 대상으로 정의되고 있다. 남북한 간에 인민개념이 공유되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민족끼리라는 말은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다. 아직도 한반도에는 무주권(無主權)의 국민들이 2000만 명 넘게 살고 있다. 4.19민주혁명의 진의가 인민에게 주권을 부여, 인민을 국가의 주인으로 만드는 것이라면 아직도 주권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북한 동포들에게 주권을 찾게 하여 북한 땅의 실질적인 주인으로 만들어 주는 일이야말로 지금 우리 앞에 나서는 4.19혁명의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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