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3김 정치는 끝났다.

                               이영일  우석대학교 초빙교수

그간 한국정치의 상징적 표현의 하나처럼 들리던 "3김정치"라는 말이 사라지고 있다. 용어의 뜻이 정확히 정의된 것도 아니지만 누구라도 3김식 정치라고 하면 그 의미가 대충 짐작 이 갈 만큼 우리 국민들에게는 매우 익숙해진 표현이다.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가 끝나면서부터 3김식 정치는 이제 끝났다는 인식이 널리 확산되고 있다. 소위 3김정치의 진원(震源)이 사라진데서 오는 상황평가인 것 같다.

 

한국정치에서 3김식 정치는 두 가지 명분에서 성립된 듯하다. 하나는 권위주의 독재정권하에서 국민 대중을 대신해서 독재 권력으로부터 가해지는 온갖 탄압과 고통, 심지어는 목숨까지를 내걸고 민주화를 위해 헌신한 지도자가 곧 자기 자신이라는 명분이다. 다른 하나는 권위주의 독재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권위주의적 대응능력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는 명분이다. 특히 이 두 번째 명분 때문에 한국정치는 극복해야 할 두 가지 고질병을 얻었다. 첫째는 망국적 지역감정의 정치무기화였다. 한국정치에서 지역감정을 정치에 응용한 것은 그 역사적 뿌리가 오래지만 지역감정을 정치무기화 하여 국내정치권을 지역감정으로 쪼갠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현상이었다. 이 문제는 지역감정을 정치무기화 하지 않고는 정치생명을 지켜낼 다른 방도(학력, 경력, 재력, 도덕적 고매성 등)를 갖지 못했던 DJ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지만 그렇다고 YS나 JP도 이 책임에서 면제될 처지는 아니다. 둘째로 당권의 사유화 현상이다. 당 보스가 공직선거 출마자의 공천권을 완전히 장악한 가운데 1인 독재의 극치라고 말 할 정도의 가장 반민주적인 방식으로 정당을 운영, 관리하고 당원들을 극한적인 정치투쟁으로 내몰았다. 당 보스에 대한 정치헌금과 맹종을 공직후보추천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삼았다는 점에서는 3김식 정치는 그 속성과 양상이 대동소이했다.

3김정치는 바로 이런 명분에서 성립되기 때문에 한국정치에서 권위주의 통치가 갖는 긍정적 의의, 예컨대 한국 사회발전의 어느 단계에서 불가피하게 요청되었던 권위주의적 통치는 전혀 인정될 여지가 없는 악(惡)이었다. 악과의 투쟁에는 타협이란 있을 수 없고 오직 전무(全無) 아니면 전부(全部)의 투쟁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 부분에서 JP는 억울하다고 할 것이지만 한국정치의 가장 중요한 변화의 고비마다에 양 김 씨들과의 정치적 동거를 서슴지 않았기 때문에 같은 카테고리로 분류했다고 해서 크게 억울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간 한국정치에서 3김식 정치가 이렇게 맹위를 떨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의 정치 문화적 뿌리와 무관치 않다. 우선 한국 사회는 중세봉건사회가 상업의 발전으로 해체되면서 "주고받는"(Give and Take) 타협의 윤리가 발전했던 유럽과는 달리 충효사관에 입각한 지조(志操)의 윤리가 정치문화의 속성이었다. 둘째로는 식민지민족주의운동기의 정치투쟁방식이 독립이라는 정치적 대의 때문에 모든 투쟁이 전무냐 전부냐(All or Nothing)로 시종되는 전통을 학습시켰다. 식민지를 체험한 국가들에서 민주화가 더디게 된 중요한 이유의 하나가 비타협적 투쟁노선의 득세 때문이었음을 비교정치학이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3김식 정치는 그 공과를 평가받을 시점에 도달했다. 3김식 정치는 흔히 민주화를 위한 정치였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이들의 정치활동은 목적이 민주화가 아니라 입신양명이었기 때문에 이들 때문에 한국 민주화가 이룩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한국의 민주화는 정확히 말해서 주권이 대통령이나 관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자신이 주권자임을 학생들의 피로 각성시킨 4월 혁명의 공로다. DJ나 YS가 민주발전에 다소 공헌한 점은 인정되나 민주화를 마치 이들이 이룬 것처럼 말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덕담이거나 장례식상의 수사일 수는 있어도 사실은 아니다. 한국의 민주화가 촉진된 것은 196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사회의 발전 즉 근대화의 산물이고 한국 근대화를 위해 몸 바쳐 일한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오늘의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또한 3김식 정치는 국가발전을 위한 이념적 지향과는 관련성이 적다. 3김정치는 한마디로 4월 혁명의 성공으로 비축된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여망을 등에 업고 자기 개인의 입신양명을 위해 추구된 일종의 선동정치(Demagogy)였다. 본질이 이러하기 때문에 이들이 야당일 때에는 국익보다는 비타협적인 극한투쟁을 통해 자신들의 선명성 제고에 주력했고 또 여당이 되어서는 치국의 경륜부족을 은폐하기 위해 정치적 포퓰리즘을 통치의 전면에 내세웠다. 과거사문제나 통일문제까지도 대중선동의 수단으로 이용했기 때문에 국론분열과 대북 퍼주기 논란을 일으켰다. 한국의 1인당 GNP가 2만 달러 언저리에서 약진을 멈춘 것은 3김식 정치가 득세하면서부터이다.

이제 한국정치는 전무냐 전부냐를 다투는 3김식의 극한투쟁보다는 정치학자 버나드 클맄(Bernard Click)이 말한 대로 한국이라는 "정치공동체의 존속과 발전에 공헌하는 정도에 비례해서 자기 몫을 배분받는 정치"로 바뀌어야 할 상황이다. 국민들은 이제 3김식의 낡은 정치를 연장하는 극한투쟁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정치인으로서 자기의 개성을 버리고 당명에만 굴종하는 정치인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바야흐로 정치인의 모든 언동이 매일 같이 분석 평가되고 정치인으로서의 용도를 항상 증명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멀티미디어의 시대를 맞고 있다. 여기에서 정치인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하나, 3김정치의 유산을 하루속히 자기 몸과 사고에서 털어내고 진실의 정치, 능력의 정치를 수범하는 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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