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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대 이사장 내외분과 이영일 박사가족들)

이영일 명예법학박사학위 수락연설전문

 

이 연설문은 200811 6일 호남대학교 국제회의실에서 거행된 이영일총재 명예법학박사학위수여식에서 행한 이영일의 수락연설 전문임

수 락 연 설 문

존경하는 박기인, 이화성 설립자 내외분, 장병완 총장님, 백운선 대학원장님, 중국의 광주총영사관을 대표해서 참석하신 허잉 수석영사님, 교수님들과 내외귀빈 여러분!

오늘 저는 호남대학교가 저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기로 한 결정을 가장 기쁘고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제가 이 학위를 가장 영광스럽고 기쁘게 받아들이는 까닭은 이 학위가 제가 지금까지 살아 온 인생에 대한 평가를 토대로 저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간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형태의 크고 작은 훈장이나 상을 받은 바 있습니다.

1979
년에 정부에서 홍조근정훈장을 받았습니다. 이 훈장은 국토통일원에서 행한 제 직무에 대한 평가에서 저에게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훈장을 중앙청에서 최규하 국무총리에게서 받을 때 큰 감동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100여명의 중앙, 지방 공무원에 대한 상훈행정 차원에서 주는 훈장이기 때문에 이 훈장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서는 기쁠지 모르지만 개인차원에서는 별 감동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앞으로 홍조보다 한 급 더 높은 청조훈장을 받아야겠다는 목표를 갖게 되었을 뿐입니다.

다음으로 저는 1985년 벨기에 정부에서 대 십자수교훈장을 벨기에 왕궁에서 받은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훈장은 정상회담을 위한 국가원수의 친선 방문 시 공식 수행원들에게 벨기에 정부가 주는 외교 관례에 따른 훈장이기 때문에 특별한 느낌 없이 아! 이런 훈장정책으로도 친선외교활동이 가능하겠구나 하는 정도의 지식을 얻었을 뿐 내 자신의 노력과 관계없이 주는 훈장에서 감동을 가질 리 없었습니다.

2003년에는 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 외국어대학에서 명예정치학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이 학위는 우즈베키스탄처럼 경제적으로 낙후한 지역에서 한국의 유력한 NGO단체들이 한국어학과를 설치하고 있는 이 대학의 발전을 위해 많은 협찬을 기대하는 학교섭외활동의 일환으로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학위를 제가 받았다고 해서 어떠한 긍지나 감동을 느낄 수 없었고 어떤 면에서는 마음에 부담만 생겼습니다.

그러나 오늘 호남대학교가 저에게 주는 명예박사학위는 대한한국에 태어나서 한 60년이 훨씬 넘는 세월을 남달리 치열하게 살아온 제 인생을 그런대로 곱게 보아주고 좋게 평가해서 이 학위가 주어지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저는 정말 감개가 무량하고 자랑스러움을 느낍니다.


저도 이제는 나이가 좀 든 편에 속하지만 기분과 정열에서는 아직도 청년같이 살고 있습니다. 또 앞으로도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물론 제 삶은 앞서 경력보고에서 밝혀진 대로 항상
官界 政界 學界 활동무대로 삼아왔고 또 그 길을 가야하기 때문에 큰 돈벌이의 욕심은 아예 가져 본 일이 없습니다.

현시점에서 저에게 주어져 있는 한 가지 큰 과업이 있다면 조국의 평화통일에 사심 없이 올바로 기여코자 하는 것입니다.

그간 북한이 개발한 화생방 무기나 미사일이나 고성능 자주포나 심지어 핵무기 같은 폭력이 동족상잔의 수단으로 쓰이지 않도록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방도를 찾아내야 합니다. 이것은 저 같은 전문가들의 과제임과 동시에 우리 국민들에게 주어진 일인 줄 압니다.

동시에 북한을 개혁 개방하여 배고픔 없는 나라로 북한정권을 연착륙시키는 길을 찾아내야 합니다. 한반도 주변의 어떠한 강대국들도 찾지 못한 방도를 우리가 기필코 찾아내고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 역시 저에게 주어진 과업입니다만 동시에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과업일 것입니다.

저는 1961 4.19 혁명직후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했다가 5.16군사혁명재판에서 7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1년가량 옥살이를 한 후 4.19혁명유공자라고 하여 형 면제로 석방된 바 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제가 갖는 사회과학도로서의 문제의식의 맨 선두에 통일문제를 매달고 살아왔습니다.

공직생활의 시작도 국토통일원이었으며 세 차례에 걸쳐 국회의원을 하는 동안에도 항상 국회 상임위원회를 통일외교통상위원회로 선택하여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政界 떠난 후에도 韓民族福祉財團 공동대표를 맡아 평양을 네 차례 다녀오고 금강산과 개성을 시찰하는 등 여섯 차례 북한 땅을 밟았습니다.

북한 어린이들을 돕는 사업을 비롯해서 의료지원 사업, 식량증산사업 등을 펼쳤습니다. 항상 통일문제를 제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면서 평화통일을 위한 기반조성에 나름대로 심혈을 쏟았습니다.

금년에 제가 집필해서 출판한햇볕정책의 종언은 일부에서는 반론도 없지 않겠지만 저는 21세기의 상황에서 통일문제에 대한 제 나름의 정책구상을 밝히면서 국내에서 잘못 왜곡되어진 통일 장애요인을 극복하려는 제 의지를 문제로서 제기한 것입니다.

저는
政界 떠난 이후에는 저의 경력보고가 말해주는 것처럼 NGO운동가로 변신하였습니다. 목이나 어께에 힘을 주는 일이 아니라 남을 섬기고 돕는 일로 삶의 방식을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한민족 복지재단 공동대표로 있으면서 북한을 돕는 사업이외에도 23년간 계속된 전쟁으로 폐허가 된 아프가니스탄을 전쟁직후의 시기에 뛰어 들어가 고아들을 돕는 의료지원 사업을 2년간 계속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직후 아프가니스타에는 어린이 다섯 명 중 세 명이 고아였습니다. 또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시켄트에
列邦親善病院 세우는 일에도 힘을 보탰습니다. 이 때문에 지금도 저는 한국아프가니스탄 친선협회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10년 동안 한중문화협회를 맡아 운영해 오고 있습니다. 이 협회는 1942년 중국의
重慶에서 설립된 항일독립운동단체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독립의 과제는 없어졌지만 항일독립운동 시에 우리 독립운동지도자들이 중국 사람들에게 진 우정의 빚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중국인들은 35년간 계속된 독립운동기간 중에 우리 독립운동 지도자들에게 투쟁의 공간을 제공했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었으며 때로는 함께 피를 흘리면서 日本帝國主義者들과 싸웠습니다.

우리는 중국에 진 이 사랑의 빚, 우정의 빚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지금 이런 명분을 내세우고 중국에서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수술을 받지 못하고 있는 어린이 심장병환자를 중국 지방정부의 추천을 받아 매년 20명씩 무료수술을 3년째 해오고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어린이 병원 심장외과 전문의들의 자원봉사로 이 사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10 16일 수술 팀을 이끌고 중국산동성 천불산 병원을 방문했는데 그 병원 현관에는 작년도에 수술 받은 어린이 여섯 명과 학부모들이 모여 있다가 우리 일행을 현관에서 영접하면서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고마움을 표시했습니다.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오는 11 23일에는 신축된 하얼빈 아동병원에서 수술을 예정하고 있습니다. 저는 NGO 단체 대표생활을 하면서 모금활동에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정치자금 만들기보다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 어려움은 있지만 정치권에서 느낄 수 없는 감동과 보람이 있기에 이것이 항상 제 삶과 활동의 새로운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제게 주어지는 호남대학교의 이 학위가 저의 이러한 삶에 대한 평가에서 비롯되었다고 믿고 정말 고맙고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제 아내와 제 가족들이 와 있습니다. 친지들이
京鄕各地에서 축하해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모든 분들에게 감사들입니다.

저는 많은 분들이 다 아시겠지만 이곳 광주에서 국회의원선거에 나서서 633패의 기록을 가진 사람입니다. 승리의 기억보다는 낙선의 아픔이 오래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우리 가족들에게 제 삶에서 처음으로실패한 이영일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도시가 광주입니다. 때로는 태 자리를 원망하는 못난 소견에 사로잡혀 좌절의 시간을 갖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저이기 때문에 오늘 제가 이 대학에서 받는 학위는 정말 자랑스럽고 특히 제 아내와 가족들에게 광주에서 실패만 하지 않는 모습을 다시 보여주게 되어 너무 기쁘고 자랑스럽습니다.

제가 정계를 떠나있을 때 나에게 연구 활동을 계속하고 인생에서
再起 꿈꾸도록 기회를 마련해준 분들이 이 대학의 설립자 내외분입니다. 저는 10 년 가까이 이 대학에서 초빙교수로서 학생들에게 북한문제, 한국정치문제, 국제관계를 강의했습니다.

이제 호남대학교는 한국의 명문사학으로 발돋움했고 특히 호남지역에 최초로
孔子아카데미를 설립하여 한중간의 문화 교류와 협력의 큰 길을 열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큰 발전이 학교를 발전시키겠다는 설립자내외분의 강한 의지의 결과라고 믿습니다.

광주 서구 쌍촌 뜰에서 출발한 이 대학이 오늘 같이 큰 발전을 이루기까지는 설립자님들께서 많은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자기가 키워온 기업을 희생시키는 데는 살점을 떼어내는 아픔이 따릅니다. 그러나 기업보다는 학교를 지키고 발전시킨다는
哲學 있었기에 많은 어려움을 이기고 오늘 같은 큰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학교발전을 위해 헌신하신 설립자 내외분의 공헌을 우리 지역사회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앞으로 저는 호남대학교가 한중교류협력의 큰
架橋 되고 湖南人才 양성의 큰 基地로서 더욱 더 크게 발전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울러 설립자 내외분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또 이 대학에서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보내는 교수님들에게도 큰 복이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오늘 자리를 함께 해주신 친지들에게도 건강과 가정에 하나님의 가호가 있기를
祝願하면서 말씀을 맺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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